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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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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로 금을 채취하여 부자가 된 사람은
많지 않았고 도리어 이 금광부들을
상대로 돈을 벌던 사람들이 꽤 있었
습니다. 그들에게 비싸게 물건을 팔
아 돈을 챙기던 장사들, 고리대금을
하던 사람들과 은행들, 그리고 청바
지 제조업자 등입니다. 어쨌든 이 골
드 러시로 인해 200명도 채 되지 않
던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1848-1853
년 사이의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약
3만6천명으로 폭증하고, 캘리포니아
전체 인구는 약 1만4천명에서 거의
30배가 되는 약 40만 명으로 늘어납
니다.

501

그런데 1853년이 되면서 금이 거의
고갈되자 많은 금광부들은 동부의 집
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캘리포니아에
거주할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채굴을 하는 동안에 보았던
풍요로운 캘리포니아 땅에 욕심을 가
진 나머지 전갈을 보내어 자신의 가
족들이 오도록 해서 정착을 합니다.
금을 얻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찾아
왔던 그들이 이제는 농경민으로 정착
하며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골드 러시로 인해 백
인들이 캘리포니아로 유입해 들어오
고 또한 정착하는 것은 그곳에 살고

502

있던 인디언들에게는 거대한 재앙이
되었습니다. 즉 백인들은 캘리포니아
에 찾아와 금을 찾는 동안에, 그리고
금이 고갈되자 그곳에 눌러 앉아 정
착하는 과정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수많
이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캘리포
니아 인디언들은 그 숫자가 급격히
줄었으며, 한명도 남지 않고 전멸되
어 사라져 버린 인디언 부족들도 있
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인디언들의 수
난은 특히 금의 발견과 관련이 깊습

503

니다. 미국에서는 크게 세 번의 금
발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이 발
견되는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은 하나
같이 섬멸되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습
니다. 1828년 미국에서는 맨 처음으
로 체로키족 인디언들 거주지에서 금
이 발견됩니다. 그러자 백인들이 그
곳에 거주하던 체로키인들을 쫓아내
고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후 20년이
지난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다시 발견되자 동부의 백인들이 그곳
으로 몰려들어 많은 인디언들을 제거
하고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1874년 수우족이 성지(聖地)로 여기

504

던 블랙 힐스(Black Hills) 지역에서
금이 또 발견되자 백인들은 그들을
미주리강 유역으로 추방하고 그 땅을
차지합니다.
이들 중 최대의 사건은 역시 캘리포
니아에서의 금 발견입니다. 이것은
동부에 살던 수많은 백인들로 하여금
서부 캘리포니아를 향해 몰려가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인디언 땅 점령은 동부, 그리고 서부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중부는 통과
만 한 것입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서
부의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얻는 것이

505

워낙 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서부로 곧장 찾아 갔던 것입니다.
금 발견으로 인해 1850년대에 결과
적으로 서부 지역에 있는 캘리포니아
의 인디언 정복이 이루어지자 1860
년대 부터는 동부와 서부의 중간에
위치한 중부의 대평원에 살고 있던
인디언에 대한 정복을 시도했습니다.
이때 이곳의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디언 부족들은 나바호족,
수우족, 아파치족입니다. 이들은 미국
에 가장 저항적이었고 미국이 굴복시
키기 가장 어려웠던 세 부족이기도

506

했습니다.
중부 지역에서 맨 처음 타겟은 당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나바호
족이었습니다. 1863년 가을에 미국
군대는 나바호족에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때 나바호인들
은 천혜의 요새인 캐년 드 세이
(Canyon de Chelly)에 집결하여 최
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굶주림과 추위
에 지쳐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1864년 봄이 되자 미국 군대는 이들
을 약 350마일(580km) 떨어진 뉴멕
시코주의 포트 섬너(Fort Sumner)에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 수난의 길을

507

나바호인들은 ‘먼 길’(Long Walk)이
라고 부릅니다. 그곳에서 4년 동안의
고된 포로 생활을 마친 후 1868년에
그들은 지금의 나바호 보호구역 지역
으로 돌아옵니다. (나바호인들은 지
금도 이 일을 잊지 않고 자녀들에게
기억시키고 가끔 포트 섬너에 다녀오
기도 합니다.)

미국은 다음으로 아파치족에 대한
정복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아파치
족의 지도자 제로니모는 수년간 탁월
한 게릴라 작전으로 미국 군대를 괴
롭히며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1886년 8월에 체포됨으로써

508

아파치족의 저항도 완전히 막을 내리
고 맙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
미국 군대는 1890년에 운디드니
(wounded knee)에서 저항의 기미가
보인다는 이유로 200 여명의 수우인
들을 죽입니다. 이 운디드니 사건은
미군과 인디언 사이에 있었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1890년에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의 모든 정복 역사는 종결되고
그들의 모든 땅은 미국의 지배 속으
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의 인디언
숫자는 미국 인구통계국에 의하면 불

509

과 25만 명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던 1492년 당
시에 북아메리카에는 대개 약 1-2천
만 명 정도의 인디언들이 살았던 것
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약
400년 후에 인디언들은 백인들에 의
해 거의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그
러다가 현재 인구는 약 300만명이
되어 있습니다.)

510

제3장
인디언 선교 단상

[ 선교 이전에 복음이다 ]

요즈음, 교회는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많이 이야기되고 있
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선
교는 모든 교회,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넓은 의미로 신자들 모두
가 다 선교사이며 또한 먼 타지만이
선교지가 아니라 우리 주위 전체가
선교지다. 물론 아직 복음을 전해 듣
지 못한 먼 타지에 찾아가 복음을 전
하는 전문적인 선교사도 필요하지만,
타지에 나가있는 이러한 선교사만 선

512

교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
자는 예외 없이 선교사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선교적 삶’(Missional
Life)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적
삶이란, 말로 전도하는 것을 포함하
여 삶 전체가 곧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선교도 중요하지만
선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것은 복음이다. 우리는 선교를 열심
으로 해야 하지만, 이에 앞서 과연
선교가 무엇이며, 자신이 하는 선교
가 복음적인가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7가지 내용으로

513

‘복음적 선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분이다. 하나
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우리 인간의 구원
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선교하신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렇게 하셨고 지
금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사는 인간 구원에 있으며 이를
위해 항상 선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선

514

교, 곧 ‘하나님의 선교’인 것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래처럼 4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선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선교하고 계신다고 하든 말든 이러한
사실에 관심도 없고 선교 자체에 관
심이 없다. 늘 자신의 일에만 매달려
있고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하다.
둘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선교를 하신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채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노력으로 선교를 하려는 사

515

람.
셋째, 하나님이 선교를 하신다는 사
실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
만, 실제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생각
과 노력으로 선교를 하려는 사람.
넷째, 하나님이 선교를 하신다는 사
실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선교
의 주체가 되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
의 도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번째 사람에 해당한다
고 생각됩니까?) 위에서, 첫째 보다
는 둘째, 둘째 보다는 셋째, 셋째 보
다는 넷째가 더 향상되어 있는 사람
이다. 하나님은 선교의 대장되시며,

516

우리는 그의 도구요 종일뿐이다. 하
나님은 선교를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결과까지도 모두 주관하신
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를 하려 할
때는 선교의 대장으로서 이미 선교를
하고 계시며 선교의 모든 것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
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리고 이를 위해 얼마나 열
정적으로 선교하고 계신가를 먼저 알
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교의 주
체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선교를
할 때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517

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
어서는 안된다.

2. 선교는 하나님을 앞세워야 한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가 되시도록
한다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항상 하
나님을 앞세우고 우리는 뒤에 위치하
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앞서 가시도록만 하면, 하
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행
해 주신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은 시시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
은 전능하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

518

을 하실 수 있고, 무에서 유를 창조
하시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분은 능력이 한이 없으시며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위대하시며,
만유를 다스리고 주관해 나가신다.
온 우주도 그분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앞세우고 나가는 하나
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티끌같은
우리가 이런 분을 우리 앞에 세우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은 전능
하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믿고 있다.
하지만 지식적으로 혹은 입술의 신앙
고백으로만 그러할 뿐, 실제의 삶에

519

서는 이 사실을 믿지 않을 때가 많
다. 즉 우리는 현실에서 조그마한 어
려운 일만 닥쳐도 하나님의 전능하심
을 믿지 못하고 쉽게 염려하고 좌절
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
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단지 머리로
알고 믿는 것 혹은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믿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의 일상적
삶 가운데 실제적으로 역사하도록 해
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전능
하심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하나
주장하시도록 하며 그래서 그 하나님
의 전능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현실적

520

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이 몸에 배여 무의
식 중에도 나올 수 있을 정도까지 되
어 하는데, 그러려면 오랜 시간의 영
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하루
아침에 되어지지 않는다. 오랫 동안
자신만을 앞세우며 자기 생각과 뜻대
로만 살아오는 습관이 굳어있는 사람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앞세우며 사는
삶으로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
다. 오랜 인내와 자기 부정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통
해 자신의 습관과 체질이 완전히 뒤
바뀌어져야 한다. 장기간의 훈련은

521

하려 하지 않고, 건성으로 하나님을
앞세우려고 시도해 보는 사람은 결국
이 일에 실패하고 다시 옛날의 습성
과 체질로 살아가게 된다.
어쨌든 이런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
는 사람은, 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일하려고만 하며 그래서 그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그 결과로 인해
쉽게 좌절하고 절망해 버린다. 우리
는 얼마나 결과주의, 실적주의에 미
혹되어 넘어지고 마는가.
하나님이 앞서시도록 하는 것과 관
련하여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은, 하
나님은 결과보다는 동기와 과정을 더

522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얼마나 일을 잘 했느냐 보다
는 우리가 하나님이 앞서시도록 했느
냐를, 하나님은 더 살피시는 것이다.
우리는 늘 결과를 중시하지만 하나님
은 동기와 과정을 더 중시하신다. 따
라서 우리는 동기와 과정에서 늘 하
나님을 앞세워 나가는 일에만 충실하
면 되며, 결과가 어떻게 주어지든 그
것마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
리는 결과가 잘 되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결과가 좋아 보인
다고 해서 우쭐할 것도 못된다. 환경
바라보지 않고 그저 납작 엎드려 하

523

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앞세우는
일만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앞세우며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유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전적으로 무
능하다는, 처절한 자기 절망을 전제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여전히 자
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자신이 전적
으로 무능한 자임을 인정하면 전능하
신 하나님만 앞세우며 살 수 밖에 없
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늘 ‘나는 아
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고 해야 하며, 이것

524

은 단 한번으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순간 순간 그렇게 살
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낮에
는 구름기둥,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
으로 인도해 주셨다.(출 13:31-32,
민 9:15-23) 그래서 구름기둥과 불
기둥이 진행하면 그들 역시 진행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멈추면 그들도
멈추었다. 광야는 낮에는 덥고 밤에
는 추웠는데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으
로 시원하게 해주시고, 밤에는 불로
춥지 않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이렇

525

게 그들을 철저히 보호하시면서 인도
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행해
나아갈 때도, 하나님은 언약궤가 맨
선봉에 진행하고 이스라엘 12지파
백성 모두가 그 뒤를 따르게 하셨다.
(민 10:33)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은 그의 백성들이 얼마나 철저히 하
나님을 앞세우고 그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훗날 다윗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앞서
진행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능력을 베

526

풀어 주신 사실을 회상하였다.(시
68:7-8)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요
단강을 건너려 할 때도 언약궤가 앞
서 진행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기
적이 임하여 당시 물로 넘치던 요단
강이 마른 땅같이 되어 그들은 이 강
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 3:1-17) 이때 그들이 했던 일은
너무도 단순했다. 언약궤를 앞세우기
만 하는 것, 그뿐이었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 사실에 놀라운 진리가 들

527

어 있다. 이는 일상적 삶이나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함을
잘 가르쳐준다. 우리는 늘 분주하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지만,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앞세
우는 일이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일은 운전대를
잡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의
삶과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운전대를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잡으시도록 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
다. 그래야 그분께서 자신의 뜻대로
목적지로 올바로 가실 수 있다. 우리
가 운전대를 잡을 때 목적지로 올바

528

로 갈 수 없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목적지도 없
이 무작정 앞만 가시는 분이 아니다.
구약 광야 시대에 목적지는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었다.
하나님은 이 목적지를 향해 그의 백
성들을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
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한 목적지
를 향해 전능하신 능력으로 인도하신
다. 그 목적지는 하나님의 귀한 것이
다. 하나님만이 이것을 이루어주실
수 있다. 우리는 목적지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우리가 그를 앞세우며 살
때 하나님은 목적지를 향해 우리를

529

인도하시고 마침내 그곳에 다다르게
하신다. 우리는 죄성(罪性)으로 인해
스스로 세상의 허탄한 것을 목적지로
삼아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확고한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것은 크고도 놀라운 것이다.

3. 선교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야
한다

늘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열정이 스스로에게서 나오
는 것인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인
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530

사람도 문제지만, 늘 자기 스스로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문제다.
대개 타고난 성격이나 체질에 있어서
다혈질적인 사람이 열정적인데, 이런
사람은 열심을 내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단점과 동시에 장점이 있다.
단점은 자신의 성격적 열심이 너무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며, 장점
은 이런 사람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
나님의 열심을 갖게 되면 진짜 열심
있는 대단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점
이다.

531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
혈질적이고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이
었다. 그런 그가 오순절날 성령을 받
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의 열정으로 일하는 놀라운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역사하도록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늘 타고난 열
정적 성격으로 살아가고 선교를 하려
하는 사람은 베드로처럼 그 열정이
새롭게 순화되고 변화될 필요가 있
다. 그러면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
이다’는 말이 있다. 자기 스스로의 성

532

격적 열정마저도 끝나는 지점에서 하
나님의 열정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
다.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성격적 혹은
율법적 열정은 때론 하나님의 뜻을
크게 그르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심지어 그 열정은 하
나님의 교회와 선교를 망치게 할 수
도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열심
이 있었지만 그 열심은 자기들 스스
로에게서 나온 열심이었고,(롬 10:3)
그래서 그 열심으로 신자들을 핍박하
였고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려고 했
다.

533

열심을 내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의 열심이나 적극적
힘 따위가 아닌, 하나님의 열심과 능
력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올바
르게 더욱 열심있는 사람이 될 것이
다. “...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를 이루시리라”(사 9:7, 37:32) “일
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
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
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렘 33:2)

4. 선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
도록 해야 한다

534

존 스타트(John Stott)는, 선교의 지
상 명령(마 28:18-20)에 대한 순종
이나 버림받고 멸망당할 죄인들에 대
한 사랑도 선교의 동기가 되지만 최
상의 선교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
다. 그리고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
심>(God's passion for God's glory)
이라는 책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그분 스스
로 열심을 다하신다고 했다. 그러므
로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535

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앞서 가시도록 하
고 뒤따라 가면서 오직 그분의 영광
만을 바라보면서 그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즉 뒤따라 가는 나의
영광은 조금이라도 생각하거나 드러
나서는 안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
광만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왜 이토록 중
요할까?
하나님의 영광은 조금이라도 침해되
거나 손상되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
이다. 집에 아주 값비싼 보물이 있다
면, 그 주인은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536

의식하고 잘 보관되어 있도록 할 것
이다.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고, 먼지
하나도 내려앉지 않게 하려 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세상의 보
물과도 비교가 되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참 보물이며, 값어치를
논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다.
구약 시대에 성막과 성전 안은 하나
님의 영광으로 충만하였는데, 감히
인간이 들여다 보기조차 힘들 정도였
다.(출 40:35, 왕상 8:11) 하나님은
항상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시며, 임
재하실 때도 항상 충만한 영광으로
임재하신다.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

537

리 원어 ‘카보드’는 본래 ‘무거움’이
란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
은 우리가 무겁게, 중하게 다루어져
야 한다. 결코 가볍게 다룰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자라고 하
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볍게 다루
고 경시하거나 아예 무시할 때가 많
다. 집안의 허드레 물건 보다 더 천
하게 다룰 때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소중하게, 가치있
게 다룰수록 좋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고 ‘영광’이라는 인간의 단어조차로
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또한 우
리는 참으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538

을 안다면 입술로 쉽게 ‘하나님’이라
고 말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인간은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보
게 되면 그 앞에 고꾸라지고 죄인임
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이사야가
그랬다.(사 6:1-5) 우리는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죄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것
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된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인간의 모든 것
이 달렸고, 인간의 모든 해답이 이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님의 영광에서 떠나면 모든 것을 잃

539

게 된다.(롬 3:23) 하지만 우리는 하
나님의 영광을 찾을 때 모든 것을 얻
게 된다. 이 때 우리에게 생명, 선,
희락, 치유, 회복 등 모든 것이 주어
진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
르침을 보면서 이런 오해를 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
님의 영광만을 위해 태어나 살아가는
기계나 도구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가?”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
님은 자신만 영광을 독점하시려는 것
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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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그의 영광을 나누어주고 그들도
공유하게 하신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구할
때 그 역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는 것이다.(시 8:4-5) 이것이 하나
님이 인간을 만드신, 창조 목적이자
창조 질서다.
태초에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인
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자가 되기를 바라셨
다. 물론 이 영광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
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짓고 죄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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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
은 이런 죄인을 구원시켜 그의 영광
으로 충만한 자로 다시 만들어주신
다. 하나님의 영광으로만 충만한 인
간, 이보다 더 존귀하고 영예로운 자
가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공
유할 수도 없고 또한 공유하려고 해
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위
의 영광을 부인(否認)하고 오직 하나
님의 영광만을 구하면 하나님은 당신
의 영광을 나누어주고 공유하게 하신
다. 죄로 가득 찬 우리가 하늘에 속
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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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니! 티끌보다 못한 우리 인간
이 그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의
끝자락이라도 누릴 수 있다니! 참으
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인된 우리는 본래 도무지 하나님
의 영광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
니다. 공유는 커녕, 그 수천억 미터
가까이도 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도 하나님은 오직 그의 은혜로 말미
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스런
세계에 끌어들이시고, 그 영광을 맛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하시고, 그래
서 그 영광을 먼저 맛본 우리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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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의 영광을 모르는 타락한 죄인
들에게 찾아가 그의 영광을 증거하고
나타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선
교다.
또한 성경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살
아있는 성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과 영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
계다. 앞에서 보았듯, 구약 시대에 성
전에는 늘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재하였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우
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늘 충만히
임재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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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그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살
면 선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선교
이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
냐 ...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
는 것은, 우리 자신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신다. 하나님은 죄많은 이 세
상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거
하는 성전이 되어서 그 영광을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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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다. 우
리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
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
한 성전이 되면 죄는 저절로 멀리 떠
나지게 되는 것이다.

5. 선교는 차고넘침으로 하는 것이


인간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
면서 죄를 짓는 것은 하늘에 속한 참
된 영광과 기쁨을 보지 못하고 경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
다.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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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누리지 못하므로 세상의 추한
영광과 죄악을 탐닉하는 것이다, 하
지만 만일 그가 천상의 영광과 기쁨
을 맛보게 되면 그러한 것에서 떠나
려 할 것이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
해 산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 뿐만 아니라 참된 기쁨
또한 충만하게 주신다. 이 기쁨은 하
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
이요 하늘에 속한 영원한 기쁨이다.
이 기쁨은 단순히 감정적 기쁨을 넘
어 우리 존재 전체의 기쁨이요 본질
적인 기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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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사람에게 자신의 영광과 기쁨은
물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귀한 것을
차고넘치도록 공급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이 차고넘
침이 다른 사람에게로 자연스럽게 흘
러가게 하신다. 이와 같이 차고넘침
이 계속 흘러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 방식이며, 이 모든 진
행을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신다.
따라서 선교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기쁨 등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
래야 나의 충만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차고
넘치지 않으면 내게서 흘러나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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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선교를 하려면 하나님의 차고
넘침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은 그에게 새롭게 더욱 차고넘치도록
공급해 주신다.

선교는 하늘에 속한 영원한 일로
서, 비천한 우리가 이런 일에 참여되
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영광스
럽고 기쁜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를
통해 그의 원대한 구원의 역사를 펼
쳐나가시는데, 우리가 이 땅에 한번
태어나,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일에
한 자그마한 귀퉁이라도 동참하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고 감격할 것뿐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고생이 아니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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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며, 억지
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
듯 감격으로, 아니 감격의 눈물의 넘
침으로 하는 것이며, 선교사 리빙스
턴이 말했듯이 희생이 아니라 특권인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일을 위해서
라면 기꺼이 고난당하고 희생도 감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 선교는 주님의 승리를 전하는 것
이다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로 승리를
이루셨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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