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ds you are searching are inside this book. To get more targeted content, please make full-text search by clicking here.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Discover the best professional documents and content resources in AnyFlip Document Base.
Search
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는 삶의 자세와 교훈은 내가 알고 있
는 어떤 윤리적 가르침보다도 오늘
우리 세계에 더 필요한 것이라는 생
각을 한다. 백인들의 문화와 문명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이다. 그들은 ‘얼마
나 많이 부를 가지고 있는가?’를 성
공의 척도로 삼는다. 인디언의 문화
는 정신적인 것이다. 그들은 ‘동족에
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를
성공의 기준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성공의 기준
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

101

질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모아 큰
부자가 되어 이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인디언처럼 주
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
인들의 경우에는 좀더 나아가 하나님
께 많은 영광을 돌리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은 어떤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어쨌든 시튼의 책에 따르면, 이웃과

102

더불어 사는 것이 인디언들의 일상적
삶이었습니다. 제가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그들을 실제적으로 대
해 보면서, 그들에게 이런 면이 지금
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물론 요즈음은 그들에게도 서양의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문화가 많이 침
투하여 그들 역시 많이 변해 있긴 합
니다만 그들은 외부인들에게 대체적
으로 친절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
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면 마치
옛날의 우리 시골 사람들을 대하는
것같은 푸근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103

나바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인디언
인구를 가진 부족 중 하나로서 자신
들을 ‘나바호 국가’(Navajo Nation)
라고 칭하면서 대통령(President)도
있는데, 누구든지 그 대통령 집무실
을 방문하면 직원들이 얼마나 친절하
게 대해주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한 선교팀과 함께 인디언 가정
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겨울 방한
용 새 자켓을 나누어 주며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 나이드신 분
이 자신은 옷이 충분하니 다른 사람
에게 전해주라고 하면서 한사코 양보
하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104

그분은 얼마든지 그것을 가질 수 있
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
다.

시튼은 책 <인디언 영혼의 노래>를
통해서 자신들을 우월한 문명인이라
고 자부하는 백인들보다도 인디언들
이야말로 더 우월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
다. 그러면서 그는 물질 문명에 함몰
된 백인들의 정신 세계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 말미에서
‘백인의 문명은 실패작’이라고 단언하
기까지 했습니다.

105

그리고 시튼은 이 책에서 인디언들
의 종교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디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들의 모든 행동과 관습에
스며들어 있는 실제적인 삶이었으며,
그들의 일상적인 사고와 생활의 전부
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
게는 모든 날, 모든 시간이 다 종교
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
의 언어에는 종교라는 말 자체가 없
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곧
종교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시튼이 그의
책에서 언급한 인디언의 종교에 대한

106

내용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참고할만
한 점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라는 참된 종교가 단지 우리 삶의 일
부가 아니라 전부가 될 수 있다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인디언 출신 작가인 포리스트 카터
(Forrest Carter)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디언 주인공 ‘작은 나무’
를 내세워 쓴 자전적 소설 <내 영혼
이 따뜻했던 날들>이 있습니다. 이

107

책의 영어 원제는 ‘작은 나무의 교훈’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인
데, 한국에서는 처음에 이 책을 <작
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라는 제목으
로 번역, 출간했습니다. 이 번역서는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
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
는 제목으로 재발행되면서 많은 사람
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원서는 미국에서 1991년에 무려
4개월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을 장식하였고 ‘미국 서점의
올해의 책’(ABBY, American
Booksellers Book of the Year) 상

108

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도서관에
서는 이 책이 서가에 꽂혀 있을 새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
은 이 책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
자>에 비견할만한 작품이라고도 했
는데, 실제로 내용을 읽어보면 훈훈
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실입
니다. 특히 후반부에는 신앙과 교회
에 대한 익살맞은 내용이 나오므로
신자들이 한번 읽어볼만 합니다. 중
간 중간에 미국 역사에 대해서도 사
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등 여러
모로 유익한 양서로 기꺼이 추천할
만 합니다. 이 책은 번역 또한 칭찬

109

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주 깔끔하고
유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주인공 작은 나무가
다섯 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체로키
혼혈인 할아버지, 그리고 체로키 순
수 혈통인 할머니와 산속에서 함께
살면서 겪었던 1930년대 이야기입니
다. 이 책에서 발견되는 몇몇 인상적
인 내용들을 아래에서 소개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110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
를 먹을 수 있는 거야.”

“인디언은 절대 취미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동물을 잡는
다. 즐기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보
다 세상에 더 어리석은 것은 없
다고 할아버지는 분개하곤 하셨
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이
정치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분
명하다. 전쟁이 끝나면 사람을 죽
이러 갈 수 없으니까 그동안 살

111

인하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동
물을 상대로 그 짓을 하는 것이
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
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때는
물고기를 손으로 잡기에 가장 좋
은 시간인 한낮이었다. 해가 시냇
물 바로 위에서 내리쬐고 있어서
물고기들은 시냇가 둑 밑으로 숨
어들어가 시원한 그늘 속에서 낮
잠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이럴 때
는 시냇가 둑에 배를 대고 엎드
려 물속에 조심조심 손을 집어넣

112

고 물고기 구멍을 찾아야 한다.
구멍을 찾으면 물고기가 만져질
때까지 가만가만히 손을 구멍 속
으로 밀어넣는다. 끈기를 가지고
구멍 속을 더듬다보면 물고기 옆
구리를 쓰다듬게 되는데, 그래도
물고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곤 했다. 그러면 한 손으
로는 물고기 머리 뒤를 잡고 다
른 한 손으로는 꼬리를 잡아 밖
으로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배우려면 좀 시간이 걸린
다.”

113

이런 내용을 읽노라면, 우리는 인디
언들이 결코 미개하거나 야만적이지
않고, 도리어 고매한 정신을 가진 수
준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
은 실제로 야생 동물들을 잡을 때 먼
저 경건한 마음을 갖고 고개를 숙여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는 죽이곤 했습
니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도 나옵
니다.

“그 정치가는 차에서 내리자 사
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내 손만은 잡

114

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인디언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하
셨다. 인디언은 아예 투표를 하
지 않으니 그 정치가한테는 우리
가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겠
느냐고 하면서... 그럴듯한 설명
이었다.”

위 내용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역사
적 상황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24년에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이 제정됨으로써 인
디언들은 비로소 시민권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지만 많은 주에서는 여전

115

히 투표권이 그들에게 부여되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투표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인디언들이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
전에 많은 젊은 인디언들이 미국을
위해 싸워주었던 댓가였던 것입니다.
주인공 작은 나무가 사는 숲은 노스
캐롤라이나주에서 테네시주로 이어지
는 곳에 위치한 스모키 마운틴
(Smoky Mountain) 부근입니다. 애
팔래치아 산맥의 남쪽 끝자락이기도
한 이 산은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
는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한국인들
에게는 그랜드 캐년이 미국 최고의

116

관광지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
인들은 스모키 마운틴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 수려한 천혜의 경관에
이끌려 한 해에 1천만 명 이상의 관
광객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 이
면에는 백인들의 탐욕적 행위로 인
한, 체로키족에게는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슬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스모키 마운틴 한 구석에는
‘체로키 인디언 보호구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체로키족은 본래 그곳을
포함하여 주변 일대의 넓은 땅에서

117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백인들

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먼

오클라호마 지

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버립

니다. 당시 체로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을 키족 인디언들

떠나는 체로키 부족민들의

모습. 실제는 이 그림보다 훨 이 강제 이주를

씬 참혹했다. 한 겨울인데도 당하면서 걸었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

고 떠난 사람들도 많았던 것 던 ‘눈물의

으로 알려져 있다.

길’(Trail of

Tears)은 미국

역사책에 항상

소개되어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습

118

니다. 당시 그들이 당했던 강제 이주
는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누군가가
그 길을 ‘눈물의 길’이라고 표현했지
만, 실제로 이 길은 눈물을 넘어 비
통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스모키
마운틴 지역에서 출발하여 테네시주
와 캔터키주를 지나 오하이오강과 미
시시피강을 건너서 또 미주리주를 통
과하고 오클라호마 지역까지 이르는
약 1,600 마일(2,400km)의 행렬 과
정에서 추위와 식량 부족, 질병 등으
로 인해 체로키인들은 1만5천명 가운
데 4천명이 죽었습니다. (4명중 1명
에 해당합니다)

119

이 길을 걸으면서 체로키인들은 ‘어
메리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를 체로키어로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
를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했던 존
뉴턴(John Newton)이 작사한 찬송이
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런데 이 곡은 원래 미국 원주민(인디
언)들의 전통곡이었습니다. 이 곡의
맨 오른쪽 위에 보면 ‘미국 전통
곡’(Traditional American Melody)
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곧 이
곡이 인디언들이 불렀던 것에서 전래

120

된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노래를 당
시 백인 선교사 워시스터(Samuel
Worcester, 1798- 1859)가 체로키
어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는 체로
키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강제 이주에
끝까지 반대해 법정 투쟁까지 하며
이들을 도와주었던 인물입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체로키인들은 이
노래를 애국가처럼 부르고 있으며,
다른 인디언 부족들민 역시 가장 애
송하고 있습니다.
당시 1,000명 정도의 체로키인들은
강제 이주를 피해 스모키 마운틴 속
깊숙이 도망하여 들어갔습니다. <내

121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주
인공 작은 나무와 그 할아버지와 할
머니는 바로 이들의 후손인 것입니
다. 약 1만명의 후손들은 현재 애팔
래치아 남쪽에 위치한 스모키 마운틴
의 자락에 있는 ‘체로키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체로키인들은 현재 동쪽의
원래 땅인 스모키 마운틴 지역과 서
쪽의 오클라호마 지역에 나뉘어져 살
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곳의 체로키
인들은 모두 합치면 2010년 인구통
계국에 의하면 31만4천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미국 인디언 부족들 가

122

운데 최대 인구 숫자에 해당합니다.
(나바호족 인디언들은 이와 비슷한
약 30만명입니다.)

눈물의 길, 죽음의 길

우리는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던 체
로키족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00년 이
후 체로키족은 소위 ‘문명화된 다섯
부족’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부
족이었습니다.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

123

란, 미국의 문명을 거부하지 않고 잘
받아들여서 자신들도 문명화되고자
노력했던, 미국 동남부에 거주했던
인디언 다섯 부족을 가리킵니다. 그
들은 곧 치카소족, 체로키족, 촉토족,
크릭족, 그리고 세미놀족입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체로키족은 미국 정부를
모방하여 체로키라는 독립된 국가를
세워 공화국 형태의 정부 조직을 갖
추고 체로키 국가 헌법까지 제정했으
며 학교도 세웠습니다. 백인들로부터
집 짓는 법을 배워 그들처럼 집도 지
어 살았습니다. 세쿼이아(Sequoyah)
가 체로키어를 개발함으로써 많은 체

124

로키인들이 이 문자를 사용했으며,
체로키어와 영어를 혼용하여 만든
‘체로키 피닉스’(Cherokee Phoenix)
신문도 발간했습니다. 또한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당도 세웠으며 체로키
어로 번역한 성경과 찬송가도 사용했
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이곳의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문명을 따랐다고 해서 백인
들은 그들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형제
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백인들은 그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강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인
디언 이주법’을 만들어 그곳에서 그

125

들을 추방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대
법원장 마샬이 이 인디언 이주법이
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잭슨 대
통령은 “그것은 마샬의 결정일 뿐이
다, 법 집행을 하려면 해 봐라”며 이
를 무시해 버리고 인디언들에 대해
강제 이주를 강행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체로키인들은 잭슨을 싫어하
며,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미국
20달러 지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837년 잭슨의 대통령 재임 임기가
종료되고 밴 뷰랜(Martin Van
Buren)이 대통령이 되어도 강제 이

126

주 정책은 변함 없이 진행되었습니
다. 1838년 5월 스캇(Winfield
Scott) 장군이 이끄는 7천명의 군인
들에 의해 1만 6천여명의 체로키인
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과 정
든 집, 그리고 그들이 지었던 학교와
교회당 등을 그대로 둔 채로 하루 아
침에 끌려 나와서 들판에 설치된 임
시 수용소에 가두어 졌습니다. 그들
이 이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많은 백인
주민들은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불태
웠습니다. 그리고 미국 군인들은 그
들을 1838년 10월부터 이듬 해 3월
까지 5개월여의 기간 동안 강제로 오

127

클라호마 지역으로 이송해 갔습니다.

이처럼 백인들이 체로키족을 비롯하
여 미국 동남부 땅에 살고 있던 인디
언들을 모두 추방시켰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목화에 대한 탐욕 때문이
었습니다. 백인 농장주들은 그 땅에
목화를 재배함으로써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으므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을 강제로 쫓아내었던 것입
니다. 면화는 백색금이라고 불릴 만
큼 그곳의 백인 정착민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는 본서의 뒷 부분, ‘목화와 인디언’

128

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 이주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마침 체로키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
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농장주들은
체로키족 등 동남부에 거주하던 인디
언들을 쫓아냄으로써 한시바삐 그곳
에 목화를 심어서 더 많은 이익을 남
기고 싶어 하고 있었는데, 그 땅에
황금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들은
조급증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체로키족의 거주지에서 금이 발견된
것은 1828년 말경입니다. 이것은

129

1848년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
서 있었던 금 발견보다 약 20년 앞
선, 미국 역사상 최초의 금 발견입니
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많은 금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캘리포
니아 금 발견 만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보다 앞서 1500-1600년대에 몇
몇 스페인 탐험가들이 북아메리카를
남쪽으로부터 위로 북상하면서 탐험
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금을 찾
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혹시나
남아메리카에서처럼 대량의 금을 찾
을 수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탐험을

130

했으며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비록 소량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토록 찾던 금이
이제 미국에서도 드디어 발견된 것입
니다.
이 금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체로
키족 아이였는데, 그가 발견한 작은
금이 자신의 조국에 큰 비극을 안겨
줄 것이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을 것
입니다. 금 발견 소식을 듣게 된 백
인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선 인디언들이 그 금을 캐
어갈 수 없고 자신들만 독점할 수 있
도록 법을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인

131

디언 이주법’으로 결국 인디언들을
추방시키고 그 땅마저 자신들의 것으
로 차지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체로키인들의 역사를 보
노라면 우리나라 고려인의 역사를 연
상하게 됩니다. 1937년 10월, 구소련
의 극동 지방에 살던 거의 모든 한인
약 17만명이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지
역으로 강제로 이주된 적이 있습니다.
이 한인 동포들을 가리켜 고려인이라
고 하는데,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
주 정책에 따라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에 내팽개쳐지고 도중에 수많은

132

사람들이 열차 안에서 숨졌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땅에 움막을 파서 사는
등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카레이스키’(고려인)이라고 불리는
그들 후손들은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
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 한인들과
인디언들의 역사는 유사점이 많다 하
겠습니다.)

아래에는 책 <내 영혼의 따뜻한
날>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체로키
족이 추방당할 때의 일을 있는 그대
로 전하고 내용입니다. 이는 당시 그

133

들이 당했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를 잘 알게 해줍니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들이 찾아
와 종잇 조각 하나를 내 보이며
서명하라고 했다. 새로운 백인
개척민들에게 체로키족의 토지가
아닌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
을 알려주는 서류라고 하면서,
체로키들이 거기에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정부군 병사들
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찾아왔다. 병사들 말로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이 바뀌었다

134

는 것이다. 이제 그 종이에는 체
로키들이 자기들의 골짜기와 집
과 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 적
혀 있었다. 체로키들은 저 멀리
해지는 곳으로 가야했다. 그곳에
가면 체로키들이 살도록 정부에
서 선처해 준 땅, 하지만 백인들
은 눈꼽만큼도 관심을 보이지 않
는 황량한 땅이 있었다. 병사들
은 체로키들을 그 원 속으로 밀
어넣었다. 다른 산과 골짜기에
살고 있던 체로키들까지 끌고와
우리 속에 소, 돼지처럼 계속 그
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135

이런 상태로 꽤 많은 시간이 흘
렀다. 이제 체로키들을 거의 다
잡아들였다고 생각한 그들은 마
차와 노새를 가져와 체로키들에
게 해가 지는 그곳까지 타고 가
도 좋다고 했다. 체로키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덕분에 체로키들은 무언
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서 그들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
어갔다.

136

정부군 병사들은 체로키들의 앞
과 뒤, 양옆에서 말을 타고 갔다.
체로키 남자들은 똑바로 앞만 쳐
다보고 걸었다. 땅을 내려다 보
지도 않았고 병사들을 쳐다보지
도 않았다. 남자들 뒤를 따라 걷
던 여자들과 아이들도 병사들 쪽
을 쳐다보지 않았다.
기나긴 행렬의 맨 뒤쪽에는 아무
쓸모없는 텅 빈 마차가 덜그덕거
리며 따라왔다. 체로키는 자신들
의 영혼을 마차에 팔지 않았다.
땅도 집도 모두 빼앗겼지만, 체
로키들은 마차가 자신들의 영혼

137

을 빼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
았다.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갈 때
면 백인들은 양옆으로 늘어서서
체로키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
켜보곤 했다. 처음에 백인들은
덜그덕거리는 빈 마차들을 뒤에
달고가는 체로키들을 보고 멍청
하다고 비웃었다. 체로키들은 웃
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백인들
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웃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가자 사람들

138

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
지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와 노
인들과 병사들이 그 까마득한 여
행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
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
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
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
에 몇백, 몇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체로키
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3일에 한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139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
키들에게서 손을 떼고 싶은 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
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
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
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
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

140

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
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
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
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
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행렬을 ‘눈물의 길’이라
고 불렀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울지 않

141

았다. 사람들은 그 말이 낭만적
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
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동
정심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렇
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
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
이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
가는 동안 감기지 않은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
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밤 내
내 그 옆에 누워 있다가 아침이

142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쳐다보지도....
말하지도.... 울지도.... 고향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은 그 행렬을 ‘눈물의 길’이라고
불렀다. 체로키 모두가 그 행렬
에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산길
에 익숙한 일부 체로키들은 깊숙
한 계곡이나 먼 산등성이 쪽으로

143

달아났다....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도 모두 산에서 자란 사람
들이었다. 그들은 토지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나는 체로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이 원했던
것도 오로지 산속에서의 자유로
운 생활 뿐이었다.”

인디언들의 진실

스페인 사람들이 북아메리카에 처음
당도했을 당시에 인디언들은 옷을 거
의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사

144

람들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그들을 야만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데 인디언들로서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옷감이 부족해서 그렇기도 했지
만 그처럼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럽고
청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디언들에게는 더럽고 냄새나
는 몸을 긴 옷으로 칭칭 감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이 도리어 이상
하고 불결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스페인
사제들은 북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에
와서 여러 미션(Mission, 카톨릭 포

145

교센터) 건물들을 지었는데, 이때 그
주위의 많은 인디언들을 잡아와 노예
처럼 부렸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 매일 하나 둘씩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
은 인디언들을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가져간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했기에 그러느냐는 듯이 말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인디언들
에게 그런 행위는 남의 물건을 훔치
는 도둑질이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고 훈육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자신들
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여

146

사제들은 몇 번을 반복하여 도둑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러
나 인디언들은 여전히 사제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
인 소유가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한
개인만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들은 내 것, 남의 것을 구분하지 않
았으며 그래서 도둑질이라는 단어 자
체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
던 것입니다.

147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한 사제는 스페인 본국에 이런
편지를 적어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인디언들은 이미 산상수
훈의 내용을 다 지키고 있는 듯하여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선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너무도 착
하고 순진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서
로 나누어 주는 등 천국 시민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무엇
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
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48

한 스페인 사제의 무리가 캘리포니
아에 처음 왔을 때 있었던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연안에 찾아와 인디언들을 발
견했습니다. 이때 인디언들은 그들에
게 다가와 “당신들은 오랫 동안 우리
가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
하면서 그들을 크게 환대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자초지종
을 알아보니, 그들이 오기 100여년
전에 먼저 그곳에 왔던 스페인 탐험
가들이 그곳을 떠나면서 언젠가 자신
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인
디언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있었던

149

것입니다. 그 탐험가들은 결국 돌아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
은 그들의 후손에게 얼굴이 흰 사람
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던 사실
을 계속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
디언 후손들은 그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처럼 반겨 주었던 것입
니다.

인디언에게는 글이 없었고 말로써
만 의사를 소통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서로 무엇을 약속할 때도 말로써 충
분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

150


Click to View FlipBook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