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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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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13억 리브르(5600만 파운드)를 지원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너
무 많은 돈을 써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프랑스는 10
여년 전에 북아메리카에서 인디언과
연합군을 형성하면서까지 영국과 전
쟁을 치렀지만 패배를 당해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미
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에 와
서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열등감을
자극하면서 지원을 요청하자 당시 프

401

랑스 왕 루이 16세는 즉시로 지원을
확답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도 루
이 14세 이후부터 재정이 말라가고
있었는데 이 전쟁 지원으로 재정은
거의 파탄 지경에까지 몰리게 됩니
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시민들은
미국 식민지인들의 영국에 대한 독립
전쟁을 지켜보면서 자신들도 정부에
대해 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
감을 얻게 됩니다. 더구나 미국 독립
전쟁에 원정을 갔던 프랑스의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와서 이에 가세를 했습니다. 이러한

402

것들이 영향을 주어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이처럼 불과
10여년 후에 그의 백성이 미국 혁명
(미국 독립전쟁)에 크게 고무될 것이
라는 사실을 내다보는 안목만 지녔더
라도 그의 판단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그는 이제 막 왕위에 오른 22세
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지만 정부 관료들 역
시 미국 식민지를 도움으로써 영국을
응징해야 한다고 하나같이 주장했습
니다. 어쨌든 프랑스는 이 지원으로

403

인해 엄청난 재정 파탄을 가져오긴
했지만 과거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
배했던 일에 대해 벼르고 있던 설욕
을 간접적으로 풀었던 것은 사실입니
다. 프랑스가 이 일에 대해 얼마나
두고 두고 통쾌해 했던지 훗날 미국
의 독립 100주년 기념 때에 선물로
거금 40만불을 모금하여 자유의 여신
상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국은 프랑스-인
디언 연합군에게 이기고 어마어마한
전비를 사용했고 이로 인해 결국 미
국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됨으로써 실

404

속 없는 일만 하게 된 셈입니다. 프
랑스 역시 그때의 분풀이로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여 영국에 대해서 간접
적인 복수를 하긴 했지만 이 때문에
안게 된 엄청난 재정 부담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을 허용하고 1793년 1월
루이 16세 자신이 처형을 당하는 일
까지 발생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참
으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미국의 독립을 확정한 파리 조
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강
동쪽까지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
다.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의 전쟁

405

에서 영국이 승리했을 때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강 동쪽에까지 이
르는 지역을 확보했지만 현실적으로
는 인디언 보호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유보시켜 두었는
데, 이제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
함으로써 이 지역을 확고하게 차지하
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국이 이 지역
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
미국 독립 운동의 한 원인이 되었는
데, 미국으로서는 이제 영국이라는
방해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 지역에
노골적으로 진출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06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13개주 지역에 비하면 소수의 개척
자들만이 진출해 있는 한산한 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주거지 형
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407

루이지애나 구입

미국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을 쟁취하면서 국경이 이전의 애팔래
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강까지 확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보
았습니다. 그런데 1803년 미국의 3
대 대통령인 제퍼슨이 루이지애나 지
역을 구매함으로써 미국 땅은 이제
미시시피강을 넘어서 록키 산맥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루이지애나 구입
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부동산 거래’
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땅 가격

408

은 에이커당 3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1,500만 달러였던 것입니다.
(미국은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
스카를 720만 달러에 구입하는데, 이
는 에이커당 약 2센터로 알려져 있습
니다.)

당시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구입한
이 루이지애나 지역은, 지금의 루이
지애나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포함하여 몬태나,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타, 네브라스카, 캔사스,
아이오와, 미주리, 알칸사스, 오클라
호마, 콜로라도, 와이오밍, 미네소타
주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땅입니다.

409

이는 미국이 당시 보유하고 있던 영
토 만큼이나 되며 현재 미국 전체 땅
의 약 1/4이 되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규모입니다.
루이지애나 구입은 제퍼슨이 처음부
터 의도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미
시시피강에 위치한 뉴올리언스 항만
을 프랑스에 구입하고자 요청하는 과
정에서 거의 굴러들어오다 시피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많은 통상
물량이 미시시피강의 하구에 위치한
뉴올리언스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를 위해서는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고
그래서 미국인들은 불만이 많았습니

410

다. 그리고 미국은 뉴올리언스를 장
차 수로 건설에 있어 매우 유용한 항
구가 될 터전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연유로 제퍼슨은 사절단을 나폴레옹
에게 보내어 뉴올리언스 구매 협상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영국과 전쟁을 벌
일 생각을 하면서 고심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자신을 찾아 온 미
국 협상단의 이러한 제안은 그의 귀
를 번쩍 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래서 많은 전쟁 자금을 필요로 했던
나폴레옹은 조그만 뉴올리언스 항만
보다는 루이지애나 지역 전체를 매각

411

하고자 하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서로 입맛이 당기는 일이라 거래는
쉽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뉴올리언스 항구 매입마저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던 제퍼슨으로서는 상
상치도 못했던 결과를 얻게 된 것입
니다.
이와 같이 해서 우연찮게 거대한 땅
을 획득하게 된 제퍼슨은 이 땅이 실
제로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여 이제
그곳에 탐사대를 보내고 싶어 했습니
다. 또한 그렇게 해 두어야만 나중에
영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들의 땅임
을 주장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남

412

길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미국이 오리건의 영유
권을 주장할 때 이곳의 탐험을 근거
로 삼습니다.) 더구나 제퍼슨은 루이
지애나를 넘어 태평양까지 어떻게 도
달할 수 있는지 그 경로도 알고 싶었
습니다. 당시에 전설처럼 들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미
주리강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물길인 북서 통
로(Northwest Passage)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퍼슨은 루
이스(Meriwether Lewis)를 대장, 클
라크(William Clark)를 부대장으로

413

하여 탐사대를 발족하도록 지시했습
니다.
루이스는 제퍼슨 대통령의 비서이자
인디언과의 전쟁에 여러 번 참가했던
군인이었습니다. 클라크 역시 서부의
변경 생활 경험을 갖고 있어 인디언
들을 잘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
고 이 둘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루이
스의 탐사대가 출발하기 전에 제퍼슨
대통령은 그에게 이러한 지침을 내립
니다. 즉 “네 임무는 미주리강과 주
요 하천의 경로, 그리고 그 경로가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사하
는 데 그 목적이 있다.”

414

30세 전후의 강한 체격과 책임감을
갖춘 군인 29명으로 구성된 탐사대
는 1804년 5월 14일 미주리강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은 미주리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1805년 8월에 당시
미국이 프랑스로 구입했던 루이지애
나 땅의 경계선이었던 록키 산맥 분
수령(Continental Divide)에 도달했
습니다. 그리고 1805년 11월에는 드
디어 태평양에 도착했으며, 그곳 주
위의 적당한 장소에 캠프를 치고 추
운 겨울을 난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1806년 9월에 세인트 루이스에 되돌
아 왔습니다. 그 어떠한 지도도 없이

415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왕복
8,000마일, 2년 4개월 기간의 대장
정 탐험이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돌아오
자 사람들은 흥분 속에 그들을 대대
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 이후 루이
스와 클라크는 제퍼슨 대통령의 지시
에 따라 탐사 기간 동안 많은 정보가
담긴 엄청난 분량의 일지를 작성했습
니다. 그들의 탐사는 이 지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탐사에
의해서, 대륙을 쉽게 횡단할 수 있는
북서 항로가 있다는 신화는 허구임이

416

밝혀졌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은 그들이 미주리강
상류를 시작으로 콜럼비아강을 경유
해 태평양까지 연결된 이 탐사 루트
를 결정한 것은 약 100년 전에 동일
한 루트를 택했던 인디언 탐험가 아
페(Moncacht Apé)의 대륙 횡단 탐
험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탐사와 관련하여 인디언
여인 사카가위아(Sacagawea)를 특별
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이스
와 클라크는 탐사를 시작한지 얼마되
지 않아 프랑스 모피상 출신의 사르

417

보노와 인디언 사카가위아 부부를 만
나 고용하였는데, 길 안내와 통역을
담당했던 사카가위아는 그들의 탐험
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녀는 갓 낳은 아들을 늘 등에 업고
다녔는데 이는 탐사대가 여행하는 동
안 조우했던 여러 인디언 부족민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갖도록 해 주었습니
다. 인디언 문화에서 전투부대는 여
성, 특히 아이가 딸린 여성과 함께
동행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런 그
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탐사대가 결
코 전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었던 것입니다. (아기

418

를 업고 다니는 것은 우리나라와 몽
골 사람 등 몽골리안족에게만 발견되
는 모습입니다. 인디언들도 아기를
업고 다니는 풍습이 있는데, 그래서
이 또한 인디언들이 몽골리안 계통의
인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형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탐사대원들에게 위기
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도움을 주었
습니다. 그녀는 인디언들이 탐사대원
들과의 관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나
오면 통역으로 평화롭게 해결했으며,
탐사대원들의 식량이 떨어지면 씨앗
이나 식물을 들이나 산에서 찾아 제

419

공해 주었고, 그들이 아프게 되면 야
생 양파와 식물 뿌리 등을 활용한 민
간요법으로 치료도 해주었고, 길이
막혔을 때 직감적으로 길을 알아냈으
며, 탐사대장 루이스가 인디언 들에
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생명을
구해주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기념하여, 탐사대가
걸었던 여정을 따라 아이다호주, 몬
타나주, 와이오밍주, 워싱턴주 등 몇
몇 지역에는 사카가위아라고 이름지
은 지명이 있으며, 또한 아이를 업고
있는 사카가위아의 모습이 2000년에
1달러 황동색 동전으로 출시되기도

420

했습니다. (이 동전은 2009년에 단종
되었습니다. 인디언과 관련하여 포카
혼타스와 사카가위아, 이 두 여인은
유명합니다.)

개척 정신의 오해

세인트 루이스 시에 가면 멀리서도
하나의 높은 아치가 시야에 들어옵니
다. 그 이름은 게이트웨이 아치
(Gateway Arch)인데, 루이스와 클라
크가 제퍼슨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421

미주리 강을 통해 서부 탐사에 나서
성공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5
년에 완공한 것입니다. 이 아치는 그
앞을 흐르는 미시시피강의 넓이와 동
일하게 630피트(192m) 높이로 제작
된 것입니다. 게이트웨이(Gateway),
즉 관문은 서부로 나가는 관문
(Gateway to the West)이란 뜻입니
다.
프랑스 루이 왕에서 유래한 세인트
루이스(St. Louis)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인트 루이스는 프랑
스 개척자들에 의해 시작된 도시로
서, 그들이 인디언들과 교류하면서

422

이루어졌던 모피 무역 지역으로 유명
합니다. 이곳은 지금도 세계적인 모
피 무역 중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이트웨이 아치는 모피 무역이 처음
시작된 바로 그 장소에 세워져 있습
니다. 이곳을 통해 루이스와 클라크
가 서부 지역을 탐사한 이후에 이곳
은 미국 서부 개척의 전초 기지 역할
을 담당했습니다. 유럽에서 북아메리
카로 건너온 수많은 백인들은 부를
얻기 위해서 세인트 루이스라는 서부
개척의 관문을 통해서 서쪽으로, 서
쪽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인들에게는 이처럼 개척이

423

고 확장이지만, 본래 그 땅을 갖고
있던 인디언들에게 이는 침탈이고 재
앙이었습니다. 백인들이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서부로 밀려올수록 인디언
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서부’라는 말 자체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영
국 식민지가 맨 처음 동부 연안에서
출발할 때부터 미국 독립 전쟁이 발
생할 때까지만 해도 서부는 애팔래치
아 산맥 너머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
이었습니다. 당시 백인들은 애팔래치
아 산맥 너머로 서부의 끝이 어디까

424

지인지 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
고 1783년 미국이 독립하면서 국경
이 미시시피강까지 미치게 되자 이제
는 미시시피강 너머서 부터 록키 산
맥까지 이르는 루이지애나 땅을 서부
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806년 제
퍼슨 대통령 때 서부의 오리건 탐사
가 이루어지고 나중에 1848년 캘리
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그곳으로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록키 산맥부터
태평양 연안까지가 서부로 지칭되었
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중서
부’(Midwest)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

425

니다. 이는 미시시피강부터 록키 산
맥까지 이르는 땅에 해당하는 루이지
애나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과거
에는 이곳이 서부에 해당했지만 현재
의 지리로는 중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서부라 불리는 것입니다. 좀 더 구
체적으로는 이 지역 가운데 남부 지
역은 빠지고 중북부 지역에 있는, 일
리노이, 인디아나, 캔사스, 미네소타,
아이오와, 미시건, 노스 다코타, 사우
스 다코타, 네브라스카, 미주리, 오하
이오, 그리고 위스콘신 등 12개 주가
미국 인구통계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중서부(Midwest)라고 정의된 지역입

426

니다. 그래서 미국에 처음 온 분들은
이 지역에 대해 중서부라고 들을 때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이 지리
적으로는 분명 중부인데, 왜 중서부
라고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 역사로 인해 이렇게 된 사
실을 알 때 비로소 그 오해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최서부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와 오리건주를 포함하여 현재와 같
은 영토를 갖춘 나라가 되기 전에는
미국인들에게 국경은 늘 ‘움직이는
국경’이었습니다. 국경 너머의 땅을
그들은 ‘미개척지’라고 불렀습니다.

427

하지만 이 말도 어폐가 있는 것으로,
백인들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일 뿐입
니다. 왜냐하면 백인들이 미개척지라
고 했던 그 땅은 실제로는 미개척지
가 아니라 이미 인디언들이 살고 있
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이미 그 땅에 살고 있음
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미개척
지라고 한 것입니다.

‘프런티어 정신’(The Frontier)은
미국인들이 가장 애용되는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프런티어는 사람이 살고

428

있는 거주지와 사람이 살지 않는 미
개척지 사이의 경계선을 가리키는 말
입니다. 프런티어 정신은 이처럼 미
개척지의 경계선을 자꾸 뒤로 밀려나
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미개척지
를 계속하여 새롭게 개척해나가는 불
굴의 개척 정신이 곧 프런티어 정신
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백인들이 역사적으로
이 말을 북아메리카의 땅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그들에게
있어 개척은 곧 정복이며, 개척 정신
혹은 프런티어 정신은 곧 정복 정신

429

이었던 것입니다. 백인들은 처음 콜
럼버스가 북아메리카에 당도하고는
그 이후에 이곳을 ‘신대륙’이니 ‘발견’
이니 하는 잘못을 범했듯이, 마찬가
지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가리켜
서 미개척지니, 프런티어니 하는 잘
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인들이 이런 말들을 사용
한다 할지라도, 우리나라 사람들 조
차 이 말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도리어 요즈음에는 백인들 중에
는 이런 말들의 사용에 대해 극히 조
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430

미국사를 공부했다는 한국인 학자들
마저 이런 말들을 쉽게 사용하며 심
지어 ‘우리도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
을 본받아서...’라고 하는 경우가 있
는데, 이러한 일들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개척이 미지
가 아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일
때는 개척이 아닌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기는 ‘풋
볼’(미식 축구)입니다. 그 풋볼은 개
척 정신, 즉 프런티어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땅따먹기 경기인 것입니
다. 백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에 있었

431

던, 밀고 밀리는, 아니 항상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밀어내고 땅을 빼앗는,
그것을 경기로 만든 것이 풋볼인 것
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인
디언들 가운데도 이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들은 이 풋볼 경기의 기원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할 것입니다.

미국 역사의 미화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432

많은 사람들까지 미국의 개척 정신을
드높이는 것은 미국의 자국 역사에
대한 미화 작업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많은 책들과
언론들, 특히 영화가 그 한 몫을 담
당했습니다. 개척이 정복, 즉 땅뺏기
가 분명했는데도 미국인들은 이를 잘
포장하여서 정당한 것처럼, 나아가
아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까지 보이
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나
이든 사람들 대부분이 기억하듯이,
미국의 서부 개척 영화를 보면 착한
백인들이 처음에는 악한 인디언들에
게 수난을 당하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433

정의의 용사인 보안관이나 카우보이
에 의해 결국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기게 되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면서
통쾌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치 착
한 한국군이 나쁜 북한군을 때려잡는
것만큼이나 좋아했던 것입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인디언들을 최대한
악한 사람, 미개한 사람, 사람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야 상대적으로 자신
들은 착한 사람, 문명적인 사람, 사람
다운 사람으로 부각됩니다. 또한 그
렇게 해야만 정복이 ‘개척’이라는 이
름으로 잘 미화되고, 살육이 그들의
잔인한 공격에 대한 ‘정당 방어 행위’

434

로 잘 합리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내용을 담은 서부 개
척 영화는 너무도 정의롭고 재미도
있고 하여 사람들이 자꾸만 찾게 되
었고, 그래서 흥행 몰이를 하면서 계
속 출시되곤 했던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있는 지역에 LA에서
한 그룹이 방문차 왔는데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이 지역이 인
디언들이 사는 곳과 가까운 것을 알
고는 “인디언들은 머리도 벗기고 사
람도 잡아먹는다고 하던데...” 하면서
정색을 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인디언들

435

에 대한 이런 잘못된 정보가 과거에
만 있었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므로
요즈음은 많이 바뀐 줄 알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사
람에게 한번 오해된 선입관이 형성되
면 그것은 거의 평생 동안 그 사람을
지배하는 듯합니다. 아무리 나중에
인디언들이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고 하는 말을 들어도 어릴 때부터 영
화 등을 통해 얻어진 인디언들에 대
한 오해된 선입관은 그의 머리 속에
서 계속 작용하는 것입니다.

436

서부 개척 시대는 크게 보면 1600
년대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07년 한 무리의 영국인
들이 버지니아에 찾아와 제임스타운
을 세웁니다. 이어서 1620년 또 다
른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도착합니다. 이 두 곳 모두에서 영국
인들은 처음에는 인디언들의 환호를
받았고 그들 덕분으로 생존이 가능했
습니다. 하지만 그 두 곳 모두에서
또한 그들은 영국인들에 의해 거의
모두 살육을 당하거나 쫓겨나게 됩니
다. 이것이 개척 역사의 시작인 것입

437

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연안
에서 13개주로 서서히 발전되었으며
(1733년에 13개주가 됩니다), 영국
으로부터 미국이 독립한 이후 서부
개척은 가속화됩니다. 미국이 독립한
해인 1783년 이전에는 애팔래치아
산맥이 서부의 경계선이었지만 독립
후에는 미시시피강이 경계선이 되고,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이 있은 다
음에는 록키 산맥이 경계선이 되고,
1846년에는 오리건 지역을 차지하고
1848년이 되면 캘리포니아도 합병하
게 되어 현재 미국의 태평양 연안까

438

지가 서부 개척의 경계선이 됩니다.
그리고 1890년대가 되면 인디언들과
의 모든 전쟁이 종결되고 미국은 모
든 인디언들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
래서 당시 미국의 인구통계국은 “개
척 시대와 정착지가 완전히 사라졌
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세인트 루이스의
서부관문 아치(Gateway Arch)는 ‘제
퍼슨 국립 영토확장 기념
관’(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 공원 내에 위치해 있습니
다. 그리고 이 서부관문 아치 아래에

439

는 ‘서부 영토확장 박물관’(Museum
of Westward Expansion)이 있습니
다. 이처럼 제퍼슨 대통령이 루이지
애나를 구입한 것을 미국인들이 ‘영
토확장’(Expansion)이란 용어를 사용
하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들이 영토확장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
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부
영토확장 박물관에 가보면 한편으로
는 미국이 자신들의 영토확장을 한껏
드높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러한 영토확장으로 인해 인디언들이
입어야 했던 피해에 대해서는 사과하
는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느낄

440

수 있습니다. 그곳 입구에 윌리엄 클
라크의 마네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
니다. “우리는 인디언과의 관계를 위
해서 기념 은메달을 선물했고 이 은
메달은 인디언과 미국인 사이의 평화
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클라크의 마네킹 맞은편
에는 유명한 인디언 추장 붉은 구름
(Red Cloud)의 마네킹은 미국인을
비판하듯 강한 어조로 이처럼 말합니
다. “백인들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약속들을 우리에게
했지만 그들은 단 하나도 지키지 않
았다. 그들은 우리의 땅을 취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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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켰다.”
(They made us many promises,
more than I can remember, but
they never kept but one; they
promised to take our land, and
they took it.)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탐사대원들이 은메달을 나눠준 것은
인디언과의 평화를 위해서 라기 보다
는 그 이면에 나중에 인디언들에 대
해서 미국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주장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박물관의 한 벽면에는 당
시 유명한 언론가였던 워싱턴 어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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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상업적 이
득을 위한 두가지 주요 물품, 즉 남
부의 값비싼 금과 북부의 고가(高價)
의 모피는 미국 초기 역사에 있어서
사업이 광범위하고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 주었다. 즉 이 두
가지에 대한 열망이 문명의 개척자요
선구자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 워
싱턴 어빙” (Two leading objects
of commercial gain have given
birth to wide and daring
enterprise in the early history of
the Americas: the precious metals
of the South, and the rich peltries

443

of the North. These two pursuits
have thus in a manner been the
pioneers and precursors of
civilization. - Washington Irving)

이와 같이 서부 영토확장 박물관은
미국인들의 영토확장에 대한 열망과
인디언들에 대한 사과라는 양면을 동
시에 보여주고 있지만, 영토확장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
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영토확장으
로 인해 인디언들이 입었던 피해에
대해 언급하며 사과하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그들은 양심적이고 용기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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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일
본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래는 체로키족 인디언 출신으로
인디애나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에
드먼즈(David Edmunds)의 글 ‘인디
언의 눈으로 본 미국 국가의 팽창’에
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미국사에
던지는 질문>(영림카디날, 유시주 번
역, 215-217 쪽에서 인용된 것으로,
일부는 변형되어 인용되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의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출판된 백인
중심주의적인 교과서들은 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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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개조되어야 하고 뿌리째 근
절되어야 하며, 또는 서쪽으로
더 멀리 축출되어야 하는 야생
서식지의 일부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 이전에
간행된 출판물 가운데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대학 교재들은 인
디언과 백인들의 관계를 ‘인디언
장벽’(Indian Barrier)이라는 표
제 하에 다루었다. 인디언은 백
인들에게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
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나 텔레비전은 그들
의 서부를 향한 ‘진보’의 행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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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은 쓸데없이 저항하는
불필요한 존재로만 묘사되었던
것이다.
프런티어들, 즉 개척자들은 대부
분 경제적 기회주의자로서 자신
들의 야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이익을 취하려고 했
고, 이런 일에 아무런 양심의 가
책도 갖지 않았다. 설령 그러한
이익이 인디언들의 희생을 대가
로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개척
자들은 부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면 어떤 집단일지라
도 서슴없이 제거해 버렸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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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 개척자들에게 인디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자원은
‘먹기 좋게 익은 열매’로만 보였
다. 그런 그들에게 인디언들은
성가신 존재요 없어져야 할 존재
였던 것이다.
1795년에서 1800년 사이에 연
방 정부 관리들은 오하이오, 인
디애나, 일리노이, 미시건주의 인
디언 부족들과 17개의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이 조약은 충실히
이행하는 것보다는 위반하는 것
이 더 영예로운 것으로 간주되었
다. 미국의 개척민들은 조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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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인
디언 영토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
고 덫을 놓고 농장을 세웠다. 오
하이오와 인디애나의 연방 관리
들이 인디언들의 이익을 보호하
기 위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시행
했지만, 공격적인 팽창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인디
애나 주지사 해리슨(William
Harrison)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
다. “너무도 많은 개척민들이 인
디언들을 죽이는 일을 대단히 영
예로운 일로 여기고 있다.”
당시 연방 정부 관리들이 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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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영토와 백인 영토를 구분
지어려 했다고 하더라도, 개척민
들에게 서부 지역은 무한하게 착
취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
고, 따라서 그곳의 영토와 자원
에 대한 인디언들의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개척민들의 이
러한 침탈은 오하이오와 인디애
나, 일리노이 지역의 인디언들에
게 엄청난 고통을 야기시켰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거주 지역을
유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냥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인디언들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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