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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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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험대의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북아
메리카에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등장하
게 된 이 말은 북아메리카 대평원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의 삶을 바꿔놓았
으며, 그들의 활동 범위를 크게 넓혀
주었습니다. 이곳에 말이 전래되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인디언들은 신
기에 가까울 정도로 말을 잘 몰았습
니다. (인디언들이 몽골리안계 사람
이라서 그런지 모릅니다.)
그러는 중 스페인은 1565년 플로리
다에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e)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이

301

요새는 스페인이 북아메리카에 세운
최초의 정착지로서, 영국이 1607년
에 대서양 연안에 세운 영국 최초의
정착지였던 제임스타운보다도 약 40
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말하자면 북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인 식
민정착지는 이 세인트 오거스틴이었
습니다. 이 사실은 영국보다도 스페
인이 먼저 북아메리카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
다.)

이후 1598년에 오냐테(Juan de
Oñate)가 약 500명의 정착민을 이끌
고 지금의 뉴멕시코의 리오그란데강

302

상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 푸에블로 인디언들에
대해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시작합니
다. 그런데 스페인 정착민들로 하여
금 그곳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하도록 하는 등 오냐테의 식민
지배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스페인
의 왕은 이 사실을 알고는 오냐테를
소환하고 대신 1609년에 페랄타
(Pedro de Peralta)를 뉴멕시코 총
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1610년에 페랄타는 산
타페를 수도로 정하고는 뉴멕시코 지
역을 통치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처

303

음 한동안에는 스페인 사람들은 푸에
블로 인디언들과 서로 좋은 관계를
갖고 평화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
러다가 1675년 그들은 카톨릭 종교
만을 강요하면서 푸에블로 인디언들
이 자신들 고유의 종교 의식을 행하
지 못하도록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
니다. 이로 인해 푸에블로 인디언들
은 지도자 포페이(Popay)를 중심으
로 1680년 8월 10일에 스페인에 대
항하여 푸에블로 반란(Pueblo
Revolt)을 일으켰는데, 11일 동안 격
전을 벌인 끝에 그들이 승리합니다.
이때 산타페에 있던 약 3,0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은 뉴멕시코 남쪽으로

304

피신했으며, 이로써 스페인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원래
각 마을마다 자치를 하는 독립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 공통의 적인
스페인 사람들을 몰아낸 후에는 분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푸에블
로 반란 후 12년이 지난 1692년 바
르가스(Diego de Vargas)의 지휘 아
래 스페인 사람들이 다시 진입해 들
어와 전투 하나 없이 무혈로 뉴멕시
코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런 다음 바르가스는 간간이 저항

305

을 계속하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혹
독한 진압으로 대처하여 1600년대
말경에 재정복을 완료합니다. 이때
푸에블로족 가운데 일부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피해서 아파치족 혹은
나바호족과 합류하거나 대평원 지역
으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푸에
블로 반란과 재정복 사건 이후로 스
페인 사람들은 인디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의 전통
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주는 등 유
화 정책을 펼쳐 나갔습니다.
이로써 스페인의 뉴멕시코 식민지는
안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은 스

306

페인 이주자들의 정착지라기 보다는
스페인의 고립된 전초기지로서의 역
할을 담당할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뉴멕시코는 스페인의 카
톨릭 문화와 인디언들의 전통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이루게 되었으
며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
니다.

(참고적으로 뉴멕시코 역사를 더 살
펴보면, 1821년에, 스페인의 식민지
였던 이 지역은 스페인에서 신생 독
립 국가인 멕시코에 속하게 되었습니
다. 하지만 불과 25년 후인 1846년
멕시코와 미국 간에 영토 분쟁으로

307

인해 전쟁이 일어났으며 2년 후인
1848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에 의해 이곳 뉴멕시코는 미
국의 영토가 됩니다. 그리고 뉴멕시
코는 1912년 1월 미합중국의 47번
째 주로 편입되었고 산타페는 뉴멕시
코주의 주도가 됩니다. 뉴멕시코주에
는 현재 나바호족을 비롯하여 아파치
족, 주니족 등 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와 인디언

308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본래 인디언들의 땅이었
습니다. 이 캘리포니아 땅에 1542년
에 스페인 함대 지휘관인 카브리요
(Juan Rodríguez Cabrillo)가 서양인
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발을 디뎠
습니다. 그 이후에 1700년대 후반이
되면서 스페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스페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
곳에 찾아와 지배해 나갔습니다. 그
즈음 1776년 미국은 독립선언을 하
였는데, 이와같이 당시에 미국의 세
력은 대륙의 동부에만 영향을 미치고

309

있었을 뿐이며 서부에 위치했던 캘리
포니아 연안은 전적으로 스페인의 독
무대로 점령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
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스
페인의 ‘캘리포니아 미션 시
대’(California Mission Era)라고 칭
하기도 합니다.
스페인은 카톨릭의 프란시스코 수도
회를 중심으로 하여 1769년 샌디에
고에 미션(Mission, 카톨릭 포교센
터) 건물을 세우는 것을 필두로
1823년까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올
라가면서 21개의 미션 건물을 건립
합니다. 예를 들어, 미션 샌프란시스

310

코(Mission San Francisco)는 미션
건물들 가운데 6번째로 1776년에 건
립했으며, 미션 산호세(Mission San
Jose)는 1797년에 14번째 건물로 건
립했습니다. (산호세-San Jose-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가리
키는 스페인 말입니다.) 이 건물들을
연결시키는 길이 이른바 ‘왕의 길’을
의미하는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인데 현재 101번 하이
웨이가 이 엘 카미노 레알을 따라 만
들어져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연안의 주요 도시들은
거의 모두 이 21개의 미션 건물과

311

관련하여 세워졌다고 할 만큼 미션
건물은 캘리포니아 역사에서는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
고 이 미션 건물은 카톨릭에서는 성
지로 기념되고 있으며 미국의 초등학
교 교과서에도 중요한 사료로 나오기
도 합니다.
우리가 이 미션 건물들을 방문하노
라면 주목할만한 공통점을 하나 발견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디언들의 모
습이 담긴 그림이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인디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든지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자상(母子

312

像)이 인디언 풍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캘리
포니아에 와서 미션 건물들을 건립한
것은 인디언들에 대한 카톨릭의 포교
와 자국의 식민지 확장을 하는데 목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션 건물과 인
디언들 사이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당시 수도회 사제들은 인디언들에게
유리구슬, 음식 등의 선물을 제공하
여 환심을 산 다음에 그들을 미션 건
물로 끌어들이거나, 스페인 군인들이
인디언들을 사로잡아오기도 했습니
다. 스페인 사람들은 일단 미션으로

313

들어오게 된 인디언들이 절대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금하여 강제로 개
종시키고 노예처럼 혹은 노예보다 더
심하게 다루면서 온갖 노역을 시켰습
니다. 더구나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스페인식 교육을 강요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 예식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인디언들의 언어나 전통을 일체 금지
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디언들은
스페인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전
염병에 걸려서 상당수가 죽기도 했습
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늘 자연과
더불어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던 인디
언들에게는 미션 건물 속에 갇혀 지

314

내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821년에 멕시코가 스페
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땅이 됩니다. 멕시코 정부는
1833년부터 이 미션 건물들을 그대
로 두지 않고 경마장이나 도박 장소,
술집 등의 세상적 용도로 쓰도록 해
버립니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미션
건물의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가 미국이 1846-1848년에 멕시코와
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캘리포니아
는 이제 미국의 소유로 양도됩니다.
양도일은 1848년 2월 2일이었는데,

315

불과 8일 전인 1월 24일에 캘리포니
아의 새크라멘토 지역에서는 금이 발
견되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캘리포
니아 땅을 얻게 된 것만도 대단한데
그곳에 금까지 매장되어 있었으니 일
거양득(?)을 한 셈입니다.

금 발견의 소식이 전해지자 동부에
있던 수많은 미국 백인들이 캘리포니
아로 물밀 듯이 몰려갔습니다. 그런
데 이 때부터 인디언들은 미국 백인
들로부터 큰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미국 백인들은 이미 그곳에서 오랫동
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많은 인디언

316

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이때 캘리포니아 인디언들 뿐만 아
니라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멕시코
인들도 미국 백인들로부터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멕시코인들
은 인디언들처럼 무작정 살해를 당한
다든지 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던 재산들을 미국 백인들에게 강탈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멕시코인들을 가리켜
당시에는 스페인어로 ‘깔리포르니
오’(Californio)라고 불렀습니다. 이
깔리포르니오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317

되찾기 위해 법정에도 호소해 보았지
만 법정은 늘 미국 백인들 편이었고
결국 깔리포르니오들은 재산을 잃어
야 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사회 실상을 적나라
하게 고발한 미국의 여성 작가가 있
었는데, 이름은 헬렌 잭슨(Helen
Hunt Jackson)입니다. 그녀는 1881
년에 ‘불명예의 시대’(A Century of
Dishonor)라는 책을 발간하여 미국
백인들이 캘리포니아를 비롯하여 다
른 여러 지역의 인디언들에게 행한
추악한 행위들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

318

을 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미국 백
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불명예스럽고
부끄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양심을 일깨우면
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인디언 정책에 대해 재고해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3년 후
인 1884년에 라모나(Ramona)라는
소설을 발간하여 미국 백인들을 향해
인디언 문제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그녀
가 사실에 기반하여 쓴 것으로, 인디

319

언 혼혈족인 주인공 라모나와 멕시코
계의 깔리포르니오가 결혼하여 이룬
가정이 미국 백인들로부터 재산을 모
두 강탈당해 빼앗기는 등의 처절한
시련을 겪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 소설을 쓴 목적은 깔리포
르니오와 인디언 혼혈족인 라모나도
이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일반 인디
언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녀의 이런 의도와
는 달리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방향
으로 읽혀졌습니다. 즉 이 책에는 당
시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320

를 차지하기 전에 그곳에 거주하던
멕시코계의 깔리포르니오들의 풍족하
고 화려한 삶이 그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영토
가 된 후에 동부로부터 이주해온 미
국 백인들은 이 책을 읽고서는 그들
역시 깔리포르니오의 그러한 삶을 동
경했던 것입니다. 이들 깔리포르니오
들은 유럽의 영주 수준 못지않게 스
페인 풍의 큰 저택을 갖고 수많은 하
인들을 두고 살았었는데, 미국 백인
들 역시 이같은 삶을 갖고 싶은 열망
에 빠져 이 소설책을 너도 나도 구입
했던 것입니다.

321

그녀는 이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전
혀 다르게 책이 읽혀지는 사실에 대
해 크게 한탄하면서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중
라모나를 출간한지 1년 후인 1885년
에 그녀는 임종을 하게 되는데, 그녀
는 죽는 그날까지 인디언들이 겪는
참상을 알리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습
니다. 그녀는 마치 인디언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다가 죽었던 것입
니다. 흑인들을 위해서는 엉클 톰스
캐빈(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여성
작가 해리엇 스토우(Harriet

322

Beecher Stowe)가 있다면, 인디언들
을 위해서는 여성 작가 헬렌 잭슨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친구 사이기도
했습니다.

신대륙 발견?

우리는 학교에 다닐 때 역사 과목
시간에 아메리카 대륙과 관련하여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늘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시험을 볼 때도 그
렇게 해야만 정답으로 인정받았습니

323

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서양인들이 당도
하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원주민
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는데도, 그
곳을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라고
말하는 것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던
원주민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
는 일입니다. 그곳은 신대륙도 아니
고, 그리고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책에서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이것은
잘못된 표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서양 사람들
의 관점에서 잘못 사용되는 것일 뿐

324

입니다.)

그런데 백인들은 아메리카를 차지한
것을 단지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을
넘어서 ‘발견의 원칙’(Doctrine of
Discovery)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근
거까지 만들어서 이를 합법적으로 정
당화해 왔습니다. 콜럼버스가 1492
년에 바하마 제도에 도착하자 그 이
듬해인 1493년 5월 4일에 당시의 교
황인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인테르 체테라’(Inter Caetera)라는
교서를 통해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나 포르투갈이 이교도 국가들에서 발

325

견하는 땅에서는 독점적 소유권과 통

치권을 갖는다고 반포합니다.

이 ‘인테르 체테라’는 그로부터 약

40년 전인 1452년에 교황 니콜라스

5세(Nicholas V)가 포르투갈 왕인

알폰소 5세(Alfonso V)에게 하달한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교서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이 교서에서 교황 니콜라스는 카톨릭

국가가 세계 전역에서 모든 비카톨릭

국가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때 그러

한 국가의 땅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

톨릭의 적인 이슬람교인들과 이방인

326

들을 사로잡아 복속시키며 그들의 재
산과 소유물들을 취하라고 지시했습
니다. 그의 교서에 따르면 비카톨릭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들로 간주되
었습니다. 그러자 포르투갈 왕 알폰
소 5세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땅을 ‘발견’함으로써 자신들의 땅을
넓혀 갔으며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로
잡기 위해 힘썼습니다.
콜럼버스는 1492년에 바하마 제도
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아직 카톨릭
을 믿지 않는 지역의 땅을 ‘발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땅을 ‘소유’할 권리
가 있는 것으로 알고 항해를 한 것이

327

었습니다. 콜럼버스와 당시 스페인의
통치자였던 페르디난드(Ferdinand)와
이사벨라(Isabella) 부부왕은 이 ‘발
견’의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라곤의 왕이 될 페르디난도와 카
스티야의 여왕이 될 이사벨라가 결혼
함으로써 두 왕국이 합병하여 스페인
을 통일한 뒤 공동 국왕이 되었습니
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항해를 마치
고 유럽으로 되돌아 오자, 1493년 5
월 3일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페르
디난드와 이사벨라 부부왕의 요청에
따라 콜럼버스가 이미 발견했던 땅뿐
만 아니라 장차 ‘발견’할 땅에 대해

328

정복할 수 있는 권리를 스페인에게
하사(grant)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스페인의 경쟁국이었던 또
다른 카톨릭 국가 포르투갈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하였고,
이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그 다음날
인 1493년 5월 4일에 또 하나의 연
속적인 칙서를 내리면서 사과를 반으
로 쪼개듯이 지구를 반으로 나누어
서경 38도를 기준선으로 서쪽의 땅
은 스페인이, 동쪽의 땅은 포르투갈
이 각각 정복하여 차지할 수 있는 권
리를 수여함으로써 양쪽을 화해시키
려 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브라

329

질을 이미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 교황의 칙서는 포르투갈에게 브라
질에서 철수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
지였기 때문에 포르투갈로서는 또 다
시 항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서 1년 후인 1494년 6월 6일에 알
렉산더 6세가 다시 중재에 나서 두
국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
여 그 기준선을 서경 38도선에서 서
경 43도선으로 재조정합니다.
이렇게 하여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만큼은 결국 포르투갈 소유로 남게
되고 나머지 모든 땅은 스페인이 차
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330

조약이 체결된 1494년 시점에는 유
럽은 아직 중세 시대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
리고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 만이 대서양을 통해서 해외
진출을 하여 식민지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500년대에 들어오면서 상
황이 달라집니다. 종교개혁이 발생하
는 등의 이유로 교황의 영향력이 급
격히 쇠퇴하게 되었으며 또한 스페인
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약화되고 대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세력이
증대하면서 ‘발견의 원칙’과 관련된

331

교황의 칙서나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효력은 사라지다시피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동안 실종된 것과 같았
던 이 ‘발견의 원칙’이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내미는 때가 생깁니다. 1800
년대 미국의 대법원장 마샬(John
Marshall)에 의해서였습니다. 마샬은
미국 역사상 가장 존중받는 법관 중
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1823년과 1830년에 토지 분쟁과 관
련한 두 소송에 대해서 교황 칙서였
던 ‘발견의 원칙’을 배경으로 하여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

332

견은 그 대륙을 매입하든 정복하든,
인디언의 소유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립니다. 즉 그는 인디언도 분명히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음을 인
정하면서도 그 인디언의 소유권은 미
합중국의 발견의 권리에 의존적, 종
속적인 관계에 있다고 판결한 것입니
다. 쉽게 말하자면, 인디언의 소유의
권리 보다 백인의 발견의 권리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인디언은 소유권을
갖고 있기는 하되, 이 발견의 권리에
의해 규제되는 불완전한 소유권이라
는 것입니다. (이 마샬의 판결 이후,

333

미국의 인디언 부족들은 모두
‘domestic dependent nation’-(미국)
국내의 종속적 국가-로 지칭됩니다.
즉 독립 국가가 아닌 연방 정부에 종
속된 혹은 의존적 국가인 것입니다.)
이 발견의 원칙을 개신교 국가인 영
국은 그대로 계승하여 북아메리카 땅
을 차지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으
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 또한
이를 계승하였고 그 기본 골격은 지
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발견의 원칙의 요지는, 어떠한 땅
이든 카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기독교
인이 살지 않는 땅이라면, 그 땅은

334

‘발견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발견의 권리는 이미 그 땅을 소유하
고 있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불신자
인 인디언의 소유권을 능가하는 것입
니다.
또한 발견의 원칙을 주장하는 백인
들은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아메리카
땅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
들은 일시적으로 그것을 점유한 권리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발견
이 그들의 소유권을 능가한다고 말합
니다. 즉 인디언들은 땅을 경작하면
서 지속적으로 살았던 정주민이 아니
라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335

그 땅의 영구적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이 이동하
게 되면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은 자동
적으로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인디언
들이 그들의 이동으로 자신들의 소유
권을 포기하면 그 땅을 발견한 ‘문명
화’된 국가가 그곳을 개척하여 적절
하게 이용하고 합법적인 소유권을 확
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
디언들의 소유권은 일시적이고, 유럽
인들의 소유권은 항구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백인들의
관점에서 나온 억지 주장일 뿐입니

336

다. 인디언 부족민들은 대부분 떠돌
아 다닌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한 곳
에 정착해 있었던 정주민들이었기 때
문입니다. 중부의 나바호족, 호피족,
아파치족 등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체
로키족 등 동남부의 농경지에 터를
잡고 있었던 인디언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브링클리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에도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동남부 인디언들은 유럽의 백인
들이 그들을 묘사할 때 흔히 그
러했듯이 유랑성 수렵민이 아니

337

었고 정주 촌락에서 살아가던 농
경민이었다. 그리고 설령 남자들
이 수렵을 하러 갔을 때에라도
여성들은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
다. 동남부의 인디언들은 유럽인
들과 접촉하기 수세기 전부터 농
경 생활에 의존했다. 원주민들은
호박과 조롱박을 재배했고, 옥수
수와 콩도 경작했다. 농작물의
긴 성장 기간, 그리고 넉넉한 연
간 강우량 덕분에 동남부 지역은
농업 경제에 더 없이 적당한 지
역이었다. 이러한 농경으로 인해
사람들은 정주 가옥과 촌락을 건

338

설하면서 정주 생활을 하고 있었
던 것이다.”

북미 초기의 역사 개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의 북
아메리카 역사는 미국 동부 연안에
있었던 영국의 13개주 식민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
만 앞에서 보았듯이, 영국인들이 그
곳에서 식민지 정착을 시도하기 100
여년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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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습
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영국에 이
어서 곧바로 프랑스와 네덜란드 역시
북아메리카에 욕심을 갖고 탐사를 하
거나 정착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은 스페인, 프랑
스, 그리고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과
각축전을 벌이면서 결국 최종 승자가
되며, 이어서 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한 미국이 결국 현재의 땅 전체를 차
지하게 됩니다.
북아메리카의 초기 역사를 좀 더 알
기 위해서는 당시 이 네 나라를 중심
으로 이루어졌던 서구의 역사를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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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디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아
메리카 역사 및 나아가 세계 역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콜럼버스 이후
에, 인디언의 역사는 그 자체로 분리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당시의 아메리카 역사 및 세계 역
사와 연관하여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시대를 크게 보면, 1500년
대는 스페인, 1600년대는 네덜란드,
1700년대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1800년대는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00년대
초반에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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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금과 은을 가져와서 엄청난 부
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
로부터 들어오는 이러한 금과 은의
재화에만 국가 재정이 지나치게 의존
되어 국내 산업을 돌보지 않다가 금
과 은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서서히
침체하게 됩니다. 생산은 없고 소비
만 있었으며, 물가가 치솟았던 것입
니다. (그래서 스페인에게 신대륙 진
출은 축복이자 저주였다는 말이 있습
니다.)

더구나 당시 영국의 드레이크
(Francis Drake)라는 해적이 나타나
남아메리카로부터 금과 은을 약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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싣고 가는 스페인의 배들을 재약탈함
으로써 스페인에게 큰 타격을 가했습
니다. 그러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강하
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의 엘리자베스는 겉으로만 사과를 표
할뿐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
여해 버립니다. 이에 크게 진노한 펠
리페 2세는 1588년 무적함대를 이끌
고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진군합니
다. 하지만 무적함대는 도리어 드레
이크의 노련한 해상 전술과 때마침
불어온 폭풍 때문에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이 패배로 인해 스페인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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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은 재기불능일 정도가 됩니다.

이때 네덜란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무적함대 격파에 편승해서 직접 동양
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나섬으로써 스
페인에 이어서 1600년대에는 세계
제일의 상업 국가로 부상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2만 여척의 세계 전체의
무역선 가운데 3/4에 해당하는 1만5
천척 정도가 네덜란드 소유였을 만큼
네덜란드는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
고 북아메리카에도 뉴 암스테르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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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1700년대에 들어오면서 영
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의 기세를 꺾
고 세계 최강의 국가로 부상합니다,
영국은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여
러 번의 전쟁을 일으켰는데, 마지막
제4차 전쟁을 통해 1784년 5월에 결
국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세계 강대국 지
위를 상실했으며, 대신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세계 상권을 차
지합니다. 1795년 프랑스가 이미 쇠
퇴기에 접어든 네덜란드를 공격해 들
어감으로써 네덜란드는 사실상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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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의 위성국가로 전락했으며, 1810
년에는 프랑스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그 영토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각지에
식민지 영역을 넓혀 나가는 등 둘다
막강한 세력을 갖추면서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15
년 영국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에
게 승리하였고 그 이후 전 세계를 주
름잡는 국가로 자리매김합니다. 작은
섬나라가 전 세계의 땅 1/4을 차지하
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야기
까지 듣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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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들 말
합니다. 북아메리카만 두고 볼 때, 영
국이 승자가 되지 않고 네덜란드 혹
은 프랑스가 승자가 되었다면 미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랬을
경우, 인디언들의 상황은 훨씬 나아
졌을지 모릅니다.
북아메리카에 들어온 프랑스 탐험가
들은 모피 교역에 가장 관심을 두었
으며, 네덜란드 역시 북아메리카에
진출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만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된
목적은 단지 모피 교역을 통해서 이
익을 얻는데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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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개발을 하면서 영구적인 정착을
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에 찾아왔던 영
국 이주민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서 큰 영향
을 발휘하지 않은 상태에서 곧장 영
국에 의해 퇴출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달랐습니
다. 프랑스는 당시 북아메리카에서
규모로 볼 때는 영국 보다 훨씬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국
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은 북아메리카
진출 방식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프
랑스인들은 이주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단지 모피 사업을 통한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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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인디언들과 친화적이었고 결혼까지도
하곤 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 지
역에 일련의 요새들을 설치하고는 이
를 거점으로 하여 주로 동물 모피 수
집과 교역을 하면서 내륙 지방에서
인디언들과 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프랑스는 인디언들과의 불화 관계 보
다는 가급적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
하는 공존의 삶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를 찾
아온 주 목적은 정착이었습니다. 따
라서 그들은 대규모로 몰려와서는 인
디언들을 쫓아내면서까지 땅을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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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열중하였으며 이로 인해 인디
언들과 충돌이 불가피했습니다. 이러
했던 영국은 어쨌든 프랑스-인디언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승리함
으로써 프랑스 역시 완전히 북아메리
카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독주해 나갔
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계가 인디언들을
배척하지 않고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 봅니다. 프랑스인들의 경우에는
인디언들과 친화적이었고 결혼까지
했던 사실을 보면 영국계도 인디언들
에게 보다 우호적이고 포용적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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