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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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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다. 혹은 그들은 저를 영어로 부라더
(brothe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그
마한 아이들이 ‘부라더 리’라고 부르
며 쫓아오기도 합니다.
인디언들은 단기선교를 온 우리 한
인들에게 쉽게 부라더라고 부릅니다.
나바호 보호구역에서 20년 이상을
사역을 하시는 한 백인 선교사는 이
런 모습을 보고는 우리 한인들을 부
러워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는 거의 단 한번도 부라더
라고 부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백인 선교사는 자신들이 과거에
인디언들에게 결코 치유되기 힘들 정

251

도로 저지른 악행이 너무도 크기 때
문에 자신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것
이라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인디언
들과 우리 한인들은 같은 몽골리안으
로서 신발의 각각 한쪽들과 같은 관
계이기 때문에 만나자 마자 곧바로
서로 형제처럼 느끼는 듯합니다.

나바호 암호통신병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국 군대는
나바호어를 암호로 사용하여 큰 효과

252

를 보았습니다. 나바호어 암호가 없
었더라면 미군이 전쟁에서 결코 이기
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당시 미군은 암호를 아무
리 교묘하게 만들어 작전 명령을 하
달해도 적군인 일본이 모두 해독해
버리는 바람에 전쟁 수행에 큰 어려
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암호가 해독
되어 미군기는 공습을 위해 출격하자
마자 곧바로 일본군에 의해 격추되곤
했습니다.
이때 존스톤(Philip Johnston)이 미
국 군대에 나바호어를 암호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나바호 인디언

253

보호구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목사
의 아들이었던 그는 나바호 부족민들
과 함께 생활하면서 성장하여서 나바
호 언어에 익숙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바호어는 나바호 부족
민이 아닌 사람에게는 알아듣기가 불
가능한 언어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
다. 나바호어는 억양과 음조에 따라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사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이기 때문에 다른 언
어들에서는 흔히 명사와 형용사에 해
당하는 단어들이 나바호어에서는 동
사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이들의 언

254

어는 단순히 학습을 한다고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살
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않으면 전
혀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미 해병대는 존스톤의 제안을 받아
들여 1942년 나바호 암호통신 지원
병을 모집하였고 1차로 29명의 지원
병을 선발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해
병대의 강한 훈련을 무사히 극복해
내면서 나바호 암호통신 교육까지 잘
마쳤습니다. 이것이 성공하자 미 해
병대는 2차로 200명의 지원병을 더
모집하여 교육시켰습니다. 나바호 암
호통신병들은 암호 기록 문서를 따로

255

마련해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암호 체계가 전부 그들의 머
리 속에 암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
다. 일본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은 이
나바호 암호문을 풀기 위해 가능한
기술을 모두 동원했지만 일본이 전쟁
에 패할 때까지도 끝내 풀어내지 못
했습니다. 일본군에 대해 미군 승리
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나바호 암
호통신병들은 그후에 한국전과 베트
남전에도 투입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
습니다.
하지만 나바호 암호통신병들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6

그들이 적에게 잡힐 위기 국면에 처
할 경우에 그 즉시로 그들을 보호하
던 동료 해병대원이 그들을 죽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바호어 암
호가 누설되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
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종 차별로 인해 합당한 대
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외면했으며, 나바호어 암호통
신의 사실조차 1968년까지 철저히
기밀에 부쳤습니다. 그러던 중 2001
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최초의 암호
통신병 29명 중 생존자 5명과 나머지
유족들을 백악관에 초대하여 최고명

257

예훈장과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나

바호 인디언 부족의 수도인 윈도락

(Windowrock)에는 그들을 위해 기념

비와 기념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뉴

멕시코주에는 주내 고속도로 구간 가

운데 16마일이

‘나바호 암호통

신병’ 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습니

2010년 6월 10일자 나바호 다.
-호피 신문은 최초의 29명

나바호 암호통신병가운데

마지막 생존 병사 네즈 6월

(Nez)의 죽음에 대해 전하 2014년

고 있다. 10일자 나바호-

호피 신문

258

(Navajo-Hopi Observer) 은 최초
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에 입대했
던 나바호 암호통신병 29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 네즈(Cherster Nez)
의 죽음과 이에 대한 나바호 사람들
의 애도를 전했습니다. 그는 한국전
에도 참전했던 인물입니다. (나바호
사람들은 나바호 암호통신병들이 자
신들의 위상을 크게 선양한 것으로
여겨 이들이 운명할 때는 조기를 달
정도로 이들을 아주 존중합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에 암호통신
병으로 참전했던 인디언들은 나바호
부족 인디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

259

다. 체로키족 등 다른 부족 인디언들
도 있었는데, 나바호 부족 인디언들
이 가장 숫자도 많았고 유명했습니
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
로 참전한 인디언들은 암호통신병들
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들을 포함
하여 인디언들은 약 2만 5천명이 미
군으로 참전했으며 한국전에도 수천
명이 참전했습니다. 그 후 베트남전
에도 4만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가
미군으로 참가했고 이라크 전쟁에도
약 3천명의 인디언들이 참전했습니
다. (지금도 많은 인디언들이 미군에
입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260

나바호 신학생 부부의 딸도 미군으로
복무 중입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주한 미군의 핵
심부대인 미2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한
기지 이름은 ‘캠프 붉은 구름’(Camp
Red Cloud) 입니다. 이는 한국전에
참전하여 살신성인으로 전투를 하다
가 전사한 인디언 출신 육군 상병 레
드 클라우드 주니어(Mitchell Red
Cloud, Jr.)를 추념하고자 붙여진 것
입니다. 그는 청천강 유역의 123고지
에서 미군 주력부대의 최전방에 매복
하고 있던 중 야간기습공격을 하고자
다가오는 중공군들을 발견하고서는

261

그들이 30미터 앞까지 접근했을 때
자동소총을 발포했습니다.
본래 그의 임무는 적군의 접근을 인
지했을 시에 이를 보고하고 얼른 본
대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그
는 상황이 너무도 위급하다고 판단하
고는 적군의 접근을 최대한 지연시키
고자 사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결국
중공군은 철수했고, 다음 날 아침 미
군은 나무에 묶인 상태로 8발의 총상
을 입은 채 죽어 있는 그를 발견했습
니다. 그는 적군의 총상을 입어 서
있기조차 힘들게 되자 스스로를 나무
에 묶고서는 전투를 계속했던 것입니

262

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
명예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17년
에 창설된 미2사단은 인디언 헤드
-Indian Head, 인디언 추장- 사단으
로도 불리며 부대 마크도 별 모양 안
에 인디언 추장 모습이 그려져 있습
니다.)

인디언이 보는 아름다움

나바호 인디언은 체로키 인디언과
더불어 미국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263

인구가 가장 많은 부족입니다. 그리
고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나바호 인
디언 보호구역의 땅은 아리조나, 뉴
멕시코, 콜로라도, 유타 등 4개 주에
걸쳐 있으며, 대한민국의 약 2/3에
해당할 만큼 넓습니다. 하지만 이 땅
은 100% 모든 땅이 황무지로서 사
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땅도 많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에서도 ‘미스
나바호’를 뽑는 경선대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경선대회에서는
출전자들이 일반적인 미스 경선대회

264

처럼 얼굴이나 몸의 아름다움을 겨루
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 음식인
프라이-브레드 만들기(fry-bread
making), 양탄자 짜기(rug weaving),
양 도살하기(sheep butchering) 등
을 겨룬다는 점입니다. 이 가운데서
도 점수가 가장 높게 매겨지는 부분
은 양 도살하기입니다. 일반인들은
20세 전후의 아가씨들이 양을 도살
한다는 사실이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곳 문화를 알게 되
면 수긍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양의
목축이 주요 생계 수단인 이 나바호
보호구역 내에서는 양을 잘 잡는 것

265

은 아주 중요한 일에 속합니다. (프
라이-브레드는 우리 한국인이 늘 밥
을 먹듯이 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입니다. 단순히 밀가루를 물에
반죽해서 식용기름에 튀겨서 먹는데
처음에는 맛이 밋밋하지만 이 맛에
익숙해지면 고소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아름다
움을 추구합니다. 나바호 인디언들
역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다만
그 아름다움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좀 다릅니다.

266

나바호 인디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는 ‘호조’(hozho)
입니다. 이 호조는 아름다움, 조화,
균형, 질서, 관계 등 다양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아름
다움은 곧 조화요 균형이요 질서요
관계입니다. 즉 조화롭고 균형을 이
루며 질서와 관계를 잘 이루는 것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미(美)에 대한 이러한 인디언의 기
준은 서양인의 기준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서양의 미가 대부분
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바
호 인디언들의 미는 보다 수준이 높

267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전통적
인 나바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
들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
듯이, ‘호조, 호조, 호조’ 하면서 노래
를 즐겨합니다.
물론 나바호 인디언들이 말하는 ‘호
조’의 아름다움이나 서양식 아름다움
이나 둘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아름다
움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
움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조화롭
고 질서 있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말하지만, 다만 그것은 하나님에 의
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268

인디언은 한국인과 동족일까?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은 어떠할까
요? 그들이 땅에서 솟은 것도, 하늘
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라면 분명 그
이주해 온 경로가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 경로에 대해서 북대서양
이주설, 남대서양 이주설, 태평양 이
주설, 베링 해협 이주설 등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당시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큰 지원을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대서양을 통

269

과하여 아메리카에 도착할 수 있었는
데, 태고 적에 거의 아무 것도 갖추
지 않은 사람들이 그 넓은 대서양을
건너왔다고 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
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이주설에 따
르면, 호주 오른쪽에 위치한 태평양
의 섬들에 거주했던 폴리네시아인들
이 아메리카로 이주해 왔다고 하는
데, 그들이 고대에 그 망망대해의 태
평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왔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빈약합니다.
이제 유일한 하나의 가설만 남는데,
베링 해협 이주설입니다. 이 가설에
의하면, 현재 베링 해협은 아시아와

270

북아메리카가 매우 가깝게 맞닿아 있
는 곳으로 아주 오랜 과거에는 이 두
대륙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로 쉽
게 건너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
체적으로 학자들은 네 번째의 베링
해협 이주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특
히 고고학계에서는 이 가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유래와 관련하여
최근에 언어인류학자인 그린버그
(Greenberg, 스탠포드 대학 교수),
인종학자인 제구라(Zegura, 아리조나

271

대학 교수), 그리고 인류학자인 터너
(Turner, 아리조나 주립대학 교수)는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놓고 종합적으로 토론을 한 적이 있
습니다. 그 결과, 이 세 학자들은 인
디언들이 한 번에 곧바로 온 것이 아
니라 세 번에 걸쳐 대규모로 왔었는
데 이들이 동북아시아에서 베링해협
을 통해 이주해 온 것만은 틀림없다
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린버그 교수는 인디언을 크게 세
부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으며,
제구라 교수는 인디언의 혈액형을 A,
O, B, Rh형으로 나누면서 그린버그

272

교수가 구분한 세 인디언 부족에 이
혈액형을 맞추어 배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어의 분포
에 있어서도 위의 세 지역과 일치한
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터너 교수는 인디언들의 치아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인디언의 기원
을 추적하였는데 먼저 그들의 어금니
수를 조사하였습니다. 일례로, 유럽인
들은 어금니의 뿌리가 두 개인데 비
해 어금니의 뿌리가 세 개이면 아시
아인이거나 인디언의 치아라는 것입
니다. 이처럼 치아의 형태는 인종의
유래를 찾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273

역할을 하는데, 이 조사를 위해 터너
교수는 직접 시베리아와 중국에 다녀
오기까지 했습니다. 터너 교수가 조
사한 치아 형태에 의한 분류는 제구
라 교수가 행한 혈액형에 의한 분류
와 일치하였으며, 또한 그린버그 교
수가 연구한 언어에 따른 분류와도
일치하였습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와 알래스카를
통과해서 북아메리카로, 이어서 남아
메리카까지 이동해 간 사람들은 인디
언들로서 우리 한국인과 동일하게 북
방계 몽골리안 사람들입니다. 인디언

274

들이 몽골리안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
한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엉덩이에 푸른 점이
나타나 보이는 ‘몽골리안 반점’입니
다. 실지로 이 몽골리안 반점은 북방
계 몽골리안 계통의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현지 선교사들에
의하면 북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인디
언 아이들과 남아메리카의 인디오(인
디언을 남아메리카에서는 ‘인디오’라
고 합니다) 아이들에게서도 이 몽골
리안 반점을 볼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바호 인디언 아
이들에게서도 이 몽골리안 반점이 발

275

견됩니다.

그리고 인디언들과 한국인들의 유사
점에 대한 또 하나의 실질적인 증거
가 있습니다. ‘미션 산타 바바
라’(Mission Santa Barbara) 건물에
가면 그 지역의 츄마시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도토리 절구가 보관되어 있
는데, 이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던
도토리 절구와 모양새가 거의 완벽하
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절구의 넓은
돌은 도토리 갈판이고 그 위에 작은
돌은 갈돌이입니다. 사람들은 도토리

276

들을 갈판 위에 두고 갈돌로 갈았던
것입니다. 이 갈판과 갈돌은 스페인
어로 ‘메타테 마노’(Metate Mano)라
고 하는데 메타테가 갈판, 마노가 갈
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메타테 마
노는 학자들에 의하면 북미와 남미에
서만 발견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한
국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의 미션(Mission, 카톨릭
포교센터) 건물들에 보관되어 있는
당시 인디언들의 작업장 모습 또한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틀을 짜던
방의 모습과 거의 판박이입니다. 그

277

리고 인디언들의 윷놀이, 지게, 절구
찧기, 마을 장승도 그 모습에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것들과 거의 완벽
하게 일치합니다. 북아메리카에서 발
견되는 인디언들의 토기나 바구니에
새겨진 문양들도 과거 우리나라 사람
들의 것들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또한 인디언들도 실뜨기 놀이를 하
는데 그 모습은 한국인들이 실뜨기
놀이를 하는 모습과 똑같아 보입니
다. 그들은 실뜨기 놀이를 손은 물론
이고 이빨이나 입술 등을 이용하여
혼자서 하기도 하는데 한국인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78

그 외에도 인디

언들과 우리 한국

인들은 얼굴 모양,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나바호 어린이들의 모습을 풍습, 언어 등에

사진에 담은 것이다. 어릴 있어서 너무도 유
때 우리 한국 어린이들의

실뜨기 놀이와 똑같고, 외 사합니다.

모도 한국 어린이와 차이

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파치=

아버지, 호간=헛

간, 보시오=여보시오, 그네=그네(그

들), 데네=저네들, 덮이=덮개, 코신=

꽃신, 낫=낫 등의 낱말들이 거의 일

치합니다. 어순에 있어서도 영어는

주어+동사+목적어로 되어 있지만,

279

인디언 언어들은 주어+목적어+동사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 인디언은, 아파치가 아버지란 뜻
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즉 아파치족
은 전투를 할 때 부족들을 대표해서
가장 선두에 서서 아버지 역할을 했
기 때문에 아파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피 인
디언 보호구역에 들어서는 입구에
‘투바’(Tuba) 마을이 있는데, 이 이름
은 그곳에서 뜨거운 물이 나와서 ‘앗
뜨거’(앗 뜨버)했다고 하는 데서 유래

280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말과 너
무도 일치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뜨거운 물에 접촉하면, ‘앗 뜨거’ 하
는 것입니다.

281

제2장
인디언과 미국의 역사

콜럼버스 데이와 인디언

2014년 10월 어느 날, 저는 나바호
보호구역 지역 근방에서 우편물을 부
치기 위해 우체국을 들렀던 적이 있
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문이 잠겨 있
어 왜 그런가 했더니 그 날이 ‘콜럼
버스 데이’였기 때문에 공휴일이었던
것입니다. 저처럼 그날이 콜럼버스
데이인 줄 모르고 우체국을 찾아왔다
가 허탕을 치는 사람들도 몇몇 보였
습니다.
콜럼버스 데이는 미국에서는 10월
둘째 주 월요일에 지켜지는 연방 공

283

휴일입니다. 콜럼버스 데이는 미국
외에도 스페인,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등의 국가들에서도 국경일로 지켜지
고 있습니다. 그리고 콜럼버스
(Columbus) 혹은 그 여성형인 콜럼
비아(Columbia)는 국가, 여러 지역
이름, 학교 이름, 우주왕복선의 이름
등, 미국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름입니다. 미국 수도인 워싱
턴 D.C에서 C또한 콜럼버스의 약칭
입니다.

그런데 콜럼버스라는 사람만큼 진실
과는 달리 영웅 대우를 받는 사람이

284

역사상 또 있을까요? 그는 아메리카
를 차지한 서양인들 관점으로는 위대
한 탐험가요 개척자로 칭송받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잔학한 살
육자요 약탈자였습니다.
콜럼버스 친구의 아들로 그의 탐험
에 동행했던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
에 대해 자행했던 잔학 행위에 회의
를 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나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된 인
물입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인디언 파
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라는 글을 남

285

겼는데, 그 글은 일반인들이 읽기에
는 거북스런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
니다. 그가 콜럼버스 곁에 있으면서
실제로 겪었던 경험을 적었던 것이기
에 그의 진술 내용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글만 소개합
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 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
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
먹이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
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
댕이쳤다... 그들은 아기와 어머

286

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
럼 꿰기도 했다.”

“어떤 스페인 사람이... 갑자기
칼을 뽑았다. 그러자 100명 전체
가 일제히 칼을 뽑아, 겁에 질려
앉아 있던 일단의 타이노족 남녀
노소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잘라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큰 집에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소가 도
살당한 것처럼 피가 냇물처럼 흘

287

러나왔다.”

“이번에 최대의 포악행위와 학살
극이 자행되어 마을 전체가 도륙
을 당했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
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
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
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 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
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

288

서 굶어죽었다.”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기념 행사
로 떠들썩했던 1992년에 미네소타대
학 인권센터에서는 콜럼버스를 ‘사상
최악의 인물’로 모의 재판에 기소한
적이 있습니다. 배심원들은 12시간에
걸쳐서 심리를 한 끝에 콜럼버스를
노예범죄, 살인, 강제노동, 유괴, 폭
행, 고문, 절도의 7개 죄목에 대해서
유죄라고 평결하였고, 재판장은 죄목
하나하나마다 50년씩, 통합 350년의
사회봉사활동을 콜럼버스에게 명했습
니다.

289

그리고 2000년이 시작되는 새로운
밀레니움을 눈앞에 둔 1999년도에,
뉴욕타임즈는 움베르토 에코 등 당대
의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지나온 1천
년 동안 최고의 아이디어나 발명품,
혹은 발견 등을 선택해달라고 의뢰했
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 석학들
은 반대로 최악의 사고로 1492년 콜
럼버스 항해를 꼽았습니다. 많은 사
람들이 콜럼버스 항해를 지난 1천년
동안의 최고의 사건으로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이를 최악의 사고라
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290

인디언들 가운데 콜럼버스 데이를
폐지하고 이 날을 ‘원주민의 날’
(Indigenous People's Day)로 삼자
는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
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실제로 사
우스 다코다주에서는 1989년에, 캘
리포니아주의 버클리 시는 1992년에,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 시는
2014년 4월에, 그리고 워싱턴주의
시애틀 시도 2014년 9월에 각각 콜
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개칭하
여 지키는 것으로 의결했습니다.
미니애폴리스 시의회에서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개칭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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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장일치로 의결할 때, 베스티
(Besty) 시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조례는 이 땅에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원주민들을 인정하고, 축하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본인은 오늘 아
침에 이 결의안에 서명하는 것을 영
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본인은
‘원주민의 날’을 공표하며 이 나라에
원래 거주하고 있었던 원주민들의 역
사, 문화, 활력 등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는 매년 6월 21일
을 ‘원주민의 날(Aboriginal Day)로
정하여 법정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
다. 캐나다는 원주민들에 대한 정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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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콜럼버
스의 인기는 거의 변함없이 여전합니
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3년 콜
럼버스 데이를 맞아 행한 연설에서
“제노바를 출발한 탐험가(콜럼버스)
의 항해는 대담한 용기와 발견의 위
대한 역사 속의 한 장이었다... 미국
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공헌과 희생
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12년 뉴욕시는 맨해튼의 ‘콜럼버
스 서클(원형 광장)’에 세워져 있는
콜럼버스의 동상 주위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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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기’(Discovering Columbus)라
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그곳에 찾아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치 그들이 맨
해튼의 고급 집에 들어온 것처럼 느
낄 수 있도록 꾸몄던 것입니다.

스페인과 인디언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1492년에 바하마 제도에 발을 디딘
이후에, 스페인은 이를 기반으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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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카에 대한 정복을 진행해 나갑니
다. 1519-1521년에 코르테스
(Hernando Cortes)는 남아메리카의
멕시코에 많은 황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가서 막강한 아즈텍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나
서 1531-1533년에 피사로
(Francisco Pizarro)는 그 역시 황금
을 찾아 페루로 내려가 그곳의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은 1500년대 전
반기에 브라질을 제외하고 남아메리
카의 거의 모든 땅을 차지합니다.
당시에 스페인과 함께 쌍벽을 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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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강대국이었던 포르투갈은 남아메
리카 대륙에서 브라질을 차지했습니
다.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 대륙 보
다는 아프리카 대륙에 집중적으로 노
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1580년
에 스페인은 포르투갈 왕정까지 병합
시켜 브라질 역시 자신들의 통치하에
들어오도록 하는 등 엄청난 땅을 보
유한 제국이 됩니다. 스페인은 이렇
게 하여 남아메리카 거의 전체를 식
민지화하여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부
려먹었으며 금과 은의 많은 재화를
약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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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침탈로 큰 재미를 보면서 북아
메리카 땅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
니다. 스페인인 레온(Juan Ponce de
Leon)은 1513년 4월에 북아메리카
대륙의 한 곳에 도착하여 이곳을 플
로리다로 명명합니다. (당시 그는 이
곳이 북아레리카 본토에 있는 줄 모
르고 섬인줄 알았다. 플로라다는 ‘꽃
들이 많다’-full of flowers-는 뜻입
니다.) 이후 그는 1521년 2월에 식
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찾아갔지만 7월에 그곳 원주민인 세
미놀 인디언의 공격을 받고서 사망하
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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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북아메리카에 당도한 탐험
가는 소토(Hernando De Soto)입니
다. 1539년 그는 탐험대를 이끌고
쿠바를 떠나 플로리다 서쪽 연안에
상륙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금을 찾
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남부를 탐험하
면서 마침내 미시시피강에 도착합니
다. 하지만 그는 끝내 금을 찾지 못
한채 인디언들과 수많은 전투만을 계
속하다가 열병에 걸려 미시시피강 유
역에서 사망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스페인 탐험가 코로나
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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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540년에 금이 많이 있다는
‘엘도라도 시볼라의 일곱 개의 황금
도시’(El Dorado de Siete Cíbola)를
찾아 멕시코를 떠나 북아메리카로 향
했습니다. 그 황금 도시는 오늘날 뉴
멕시코주의 주니족 인디언들이 거주
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누런
흙벽돌 집들로 형성된 마을로, 낮에
태양에 반사되면 마치 황금으로 지은
것 같아 보여 황금 도시로 소문이 났
던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도 탐험
대가 이곳에 당도하여 금을 찾아보았
지만 발견한 것이라곤 흙덩어리 뿐이
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도 탐험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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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황금 발견에는 실패했지만 스페
인 식민 지역이 이곳을 중심으로 하
여 뉴멕시코주 주변을 확장해 나가도
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도 탐험대가 자신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북아메리카 지역 인디언들에게 놀라
운 선물을 남겨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도 탐험대에서 달아난
말들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북아
메리카에 본래부터 말이 있었고 그래
서 인디언들이 오래 전부터 말을 잘
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
지가 않습니다. 말은 이 코로나도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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