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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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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택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
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북아메리카에 진출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인디언들과의 관계에 대
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
겠습니다.

영국의 북미 초기 역사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세번째로 탐험에 참여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존 캐벗(John Cabot,

351

1449-1498)은 영국 왕의 후원에 힘
입어 1497년 5월에 선원 18명을 실
은 매튜호라는 작은 배로 브리스톨항
을 출발하여 약 1개월 후인 6월에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와 미국의 메인
(Maine, 오늘날의 메인주 지역)에 도
착하였는데, 영국은 이 해를 북아메
리카를 탐험한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
다.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
도에 당도한 1492년으로부터 5년 후
입니다. 영국이 북아메리카의 영유권
을 주장했던 근거는 바로 이 캐벗의
탐험에 있습니다.
캐벗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데

352

자신의 탐험 계획에 스페인과 포르투
갈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영국으로
이주해서 영국 왕 헨리 7세의 지원을
받고 탐험에 나섭니다. 헨리 7세는
캐벗에게 특허장을 발부해 미지의 땅
을 탐색하도록 항해를 인허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지원 아래 미지
의 나라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자극받
아 영국도 탐험 사업에 박차를 가하
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캐벗은
1498년 2월에 선원 200명을 데리고
5척의 함선으로 2차 탐험을 떠나지
만 행방불명되어 버립니다. 당시의
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배는 조난당

353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500년대 들어오면서 대서양에서의
영국의 활약은 영국 출신의 해적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닙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 때의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대표적인
해적입니다. 이 해적들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획득하여 본국으로
가져가는 금과 은 등을 해상에서 약
탈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약탈에 불
만을 품은 스페인은 1588년에 무적
함대를 이끌고 영국에 쳐들어갔지만
예상과 달리 완전히 패배를 당하고

354

맙니다. 이 일로 인해 스페인의 대서
양에서의 해상권은 막을 내리게 됩니
다. 이 일이 있기까지 영국은 북아메
리카 대륙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이곳에서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고 있
었던 스페인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
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1584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원 하
에 월터 롤리(Sir Walter Raleigh)의
탐정대가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해
안의 로어노크 섬(Roanoke Island)
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시도
했으나 실패에 그칩니다. 3년 후인

355

1587년에 존 화이트(John White)에
의해서 다시 한번 식민지 건설이 시
도되었지만 이 역시 실패하고 맙니
다.
이로부터 약 20년 후인 1607년 5
월에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특허장을
하사받은 런던 회사(이 회사는 나중
에 버지니아 회사라고 개명됩니다)는
144명을 배에 태우고 출발하여 그
가운데 104명이 북아메리카의 버지
니아에 상륙하여 드디어 정착촌을 세
우는데 성공합니다. 그들은 이 정착
촌 이름을 당시 영국 왕 제임스 1세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영국 왕위

356

에 오른 인물)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
타운(Jamestown)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제임스타운은 영국이 북아메리카
에서 세워서 성공한 첫 번째 식민지
정착촌입니다. 앞서 실패했던 식민지
계획은 영국 정부 주도로 한 것이지
만, 제임스타운은 정부가 주도한 것
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런던 회
사가 주도하여 세운 것입니다.
제임스타운 초기에 정착민들의 삶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해충이 많았고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심한 굶주림을 겪
어야 했습니다. 처음 104명이던 제임

357

스타운 주민은 그해 9월에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1년 만에 30명 정도
생존했습니다. 제임스타운은 약 20년
전에 실패했던 로어노크처럼 되는 듯
했습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사
람들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파 먹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영국은 이주민들을 계
속 보내기도 했지만 상황은 크게 달
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존 스미스
(John Smith)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주변의 인
디언들과 좋은 유대를 가지며 그들로
부터 먹을 것을 얻어오기도 했습니

358

다. 그리고 이주자 전원에게 신분고
하를 막론하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
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리는 등 그들
을 지도해 나가면서 정착촌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중에 1615년이 되면서 그들은
인디언들에게서 배운 담배 재배가 성
공하면서 영국으로 수출하여 큰 소득
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초기
정착과 관련하여 담배 재배 성공은
그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몫을 차지했
습니다. 만일 담배 재배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제임스타운은 결국 몰락하
고 말았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합

359

니다. 제임스타운이 담배 재배로 성
공하자 많은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를 새로운 경제적 기회의 땅으로 여
기고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게 되었습
니다.

이 당시 제임스타운과 관련하여 등
장하는 인물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디언 포카혼타스(Pocahontas)입니
다. 어느 날 스미스 선장은 정찰대를
구성해 돌아다니다가 주위의 인디언
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됩니다. 인디
언들이 그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몽
둥이로 내려쳐 죽이려는 순간 11세

360

된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가
스미스 선장의 몸을 덮으며 살려달라
고 아버지 포와탄(Powhatan) 추장에
게 호소합니다. 이에 추장은 스미스
를 살려주고 제임스타운으로 돌려보
냅니다. 이후 포카혼타스는 세례를
받고 크리스찬이 되어 레베카(리브
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착실
한 기독교도인 존 롤프(John Rolfe)
라는 백인 청년을 만나 결혼하여 아
들을 낳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국에까지 가서 크게 환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폐렴에 걸려 22세
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그 후손

361

들이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지위 높은 사람들도 있습니
다. 버지니아주 곳곳에 그녀의 동상
이 세워져 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도시, 도로, 학교 등이 많이 있습니
다.)

그리고 1620년에 신앙의 자유를 찾
아 유럽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102명의 사람들이 매사추세
츠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
리는 흔히 이 1620년 이들의 도착부
터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역사에서

362

는 이들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로 부르면서 미국의 건국 시
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로는 이들의 도착이 미국 역사의
시작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건
설한 사람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필그림 파더스 보다도 13년이나
앞서 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이들보다는 필그림
파더스를 미국 역사의 시조로 내세우
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는 미국 역사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
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남북 전쟁을

363

통해 국가 주도권을 장악한 북부인들
이 남군의 본거지였던 버지니아를 미
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인정하기 싫었
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한 사람들
은 처음부터 이익 추구를 위한 경제
적 이유로 북아메리카를 찾은 데 비
해서 필그림 파더스는 신앙의 자유를
따라 대서양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그리고 필그림 파더스는 최
초로 메이플라워호 서약이라는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성문법을 만들었
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
니다.

364

프랑스와 네덜란드 북미 역사

북아메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탐험은
카르티에(Jacques Cartier)로부터 시
작되었습니다. 1534년 그는 중국으
로 향하는 북서 항로를 찾고 있었던
중에 북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하여 뉴
펀드랜드 등 동북부 연안을 탐험하였
으며(이곳은 1497년 영국의 존 캐벗
이 이미 최초로 탐험했던 지역입니
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하여 그

365

강을 따라 지금의 퀘벡(Québec)과
몬트리올 등의 내륙 지방으로 탐험을
계속해 들어갔습니다. 카르티에가 두
인디언 젊은이에게 퀘벡으로 찾아가
는 길을 물었을 때 그들은 ‘카나
타’(kanata)라고 말했는데, 그 이후
그는 퀘벡 지역 일대를 카나타(캐나
다)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말은 인디
언어로 단지 ‘마을’이라는 뜻이었는
데, 그는 지명으로 오해했던 것입니
다. (이는 현재 국가 이름으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퀘벡이라는 말 또한
알곤킨 인디언어로 ‘강이 좁아지는
곳’을 뜻하는데, 퀘벡은 실제로 세인

366

트로렌스 하구에 강폭이 갑자기 좁아
지는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후인 프
랑스인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북아메리카를 탐험하
는데, 이때 그는 앞서 카르티에가 탐
험했던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습니
다. 그는 1608년에 이곳에 정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퀘벡을 그 수도로
삼았습니다. (영국은 1607년에 버지
니아에 최초의 식민지 도시 제임스타
운을 세웠는데, 이보다도 퀘벡은 1년
먼저 세워진 셈입니다.) 그리고 카르
티에는 인근에 살고 있던 알곤킨족과

367

휴런족 인디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면서 그들과 모피 교역을 했습니
다. 그는 그들에게 카톨릭을 전하기
도 했습니다.
그 이후 라샬(Sieur de La Salle)은
1682년에 3개월에 걸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하구까지 내려가면서 그
주변 일대를 탐험했습니다. 이는 프
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이룬 탐험 역
사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일이었습
니다. 그는 자신이 탐험한 미시시피
강 주변의 모든 땅을 당시 프랑스의
왕인 루이 14세의 영토라고 선포하
면서 그 이름을 ‘루이지애나’라고 명

368

명했습니다. 당시의 루이지애나 지역
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와는 다른,
미시시피강을 주변을 포함하여 동쪽
으로 애팔래치아 산맥부터 서쪽으로
는 록키 산맥까지 이르는 광대한 땅
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나중에 이와같은 탐사를
근거로 하여 캐나다의 퀘벡 지역과
미국의 루이지애나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1755-
1763년 동안 프랑스는 인디언과 연
합군을 이루어 영국과 전쟁을 했는데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그 결과 이
모든 땅들을 포기하고 북아메리카에

369

서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이에 대
한 상세한 내용은 바로 뒤에서 다루
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이
처럼 북아메리카에서 물러나긴 했지
만 지금도 퀘벡 지역과 미시시피강
하구에 위치한 뉴올리언스에는 여전
히 프랑스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
습니다. 특히 퀘벡은 지금도 ‘캐나다
속의 작은 프랑스’라고 일컬어질 정
도로 주민의 95%가 프랑스어를 사용
하고 있으며 고풍스런 프랑스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
인트 루이스 역시 거리 이름에 프랑
스어가 남아 있는 등 프랑스 문화의

370

흔적이 있습니다.)

이제 네덜란드와 관련된 역사를 살
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보았듯
이 1600년대는 네덜란드의 전성기였
습니다. 1609년에 네덜란드의 지원
을 받은 허드슨(Henry Hudson)이
뉴욕주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탐험을
했습니다. (이 강은 그의 이름을 따
서 ‘허드슨 강’이라고 명명되었습니
다.) 현재의 허드슨 강 근방의 코네
티컷,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주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네덜란드는 이곳
을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라

371

고 명명하며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그
들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1621년
에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이 지역에
서인도회사를 만들어 진출해 들어왔
는데, 이들도 프랑스 사람들처럼 인
디언들과 모피를 거래하는 등 그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중 1626년에 맨해튼 섬의
이주민 총독으로 부임한 페터 미노이
트(Peter Minuit)는 레나페(Lenape)
인디언 추장을 만나 그 섬을 금속 냄
비류, 투명 구슬 등이 들어있는 60길
더 가치의 물품 2상자를 주면서 구입
합니다. 60길더는 당시 영국 화폐로

372

는 24달러, 현재 미국 화폐로는
100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는 금액
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레나페 인디
언 부족이 옥수수를 재배하고 칠면조
를 기르면서 살고 있었는데, 네덜란
드는 그들로부터 이 땅을 거저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곳은
지금도 레나페 인디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예컨대 북부뉴저지에 위치한
‘파라무스’ 타운은 레나페 인디언 말
로 ‘풍족한 땅’이란 뜻입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렇게 해서 구입한
맨해튼 섬을 그들의 모국 네덜란드의

373

수도인 암스테르담 이름을 따서 뉴암
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들
은 주위 인디언들과 갈등을 많이 겪
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공격으로부
터 보호하기 위해 뉴암스테르담 북쪽
에 벽(wall)을 쌓았는데 그 중 하나
가 오늘날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이
되어 있는 월 스트리트(wall street)
입니다.
하지만 1664년에 영국이 이곳을 공
격하기 위해 군함 1척을 보내자 네덜
란드는 힘이 약하여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쉽게 항

374

복해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네덜란
드 식민 지역은 모두 영국에 넘어가
게 되고 뉴암스테르담도 영국에 인수
되어 당시 영국의 요크(York) 경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이 됩
니다.
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애초부터 청교도적인 뉴잉글랜드 사
람들과는 달리 세속적이고 다양한 종
교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네
덜란드는 자국 소속의 서인도회사의
임금이 낮아 자국민들이 쉽게 이주하
려고 하지 않자 국적과 관계없이 어
떤 사람이든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

375

과 1640년 뉴욕에서는 약 20개의 언
어가 통용되었습니다.

영국 대 프랑스-인디언 연합군
전쟁

영국은 1607년에 대서양 연안에 제
임스타운을 건설하여 자국민들을 이
주케 하여 정착시킨 이래로 1700년
이 되어서는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서
쪽으로 애팔래치아 산맥까지 이르는
13개주로 식민지 지역을 확대해 나

376

갔습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진출에
있어서 런던 회사와 같은 이윤을 추
구하는 민간 회사가 앞장섰으며 이주
자들도 개인 소유가 없는 농노와 같
은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땅을 개인적
으로 가질 수 있는 소유주가 될 수
있었으며 종교 활동 또한 자유로웠으
므로 북아메리카를 식민지로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자 했습니다. (이처
럼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은,
영국만 민간 주도로 했으며 다른 나
라들은 국가 주도로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 당시
에는 프랑스 또한 북아메리카에 진출

377

하여 현재의 캐나다 지역과 애팔래치
아 산맥부터 록키 산맥까지 이르는
대부분 지역을 포괄하는 반달 모양의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땅 크기만 본다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영국보다 훨씬 더 넓
은 땅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스페인도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
까지의 땅과 플로리다를 모두 자신들
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스페인이 넓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어도 이
땅은 영국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땅과
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

378

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어 서로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달랐습니
다. 영국계 사람들은 주로 대서양 연
안에서 정착을 하며 그 인구가 자연
발생적으로도 많이 증가했을 뿐만 아
니라 이주민들이 계속 밀려 들어 왔
기 때문에 자연히 서쪽 경계선이었던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서까지 서쪽
으로 계속 밀고 나아가는 상황이 되
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그곳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프랑스계와 충돌이 필연적으로 일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379

그러던 중 1756년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으며 이
전쟁은 1763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전쟁을 역사가들은 ‘프랑스-인디
언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으
로 인해, 마치 프랑스와 인디언이 서
로 다툰 전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
니라 프랑스-인디언 연합 세력과 영
국계가 싸운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
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도 북아메리카에서 보다 1년 늦게 시
작하여 7년 동안 대규모로 전쟁을 치
렀습니다. (1756-1763, 이를 흔히

380

‘7년 전쟁’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영
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전쟁
을 벌인 것도 단순히 지엽적인 영토
싸움이 아니라 누가 북아메리카 전체
를 식민지로 장악하느냐 하는 패권
싸움이었는데, 그들은 동양의 인도
식민지를 누가 차지하느냐의 패권을
두고도 싸웠던 것입니다.
이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훗날 미
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
이 약관 22세의 나이로 영국측 민병
대 소령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습
니다. 그런데 그는 첫 전투에서 프랑
스에게 항복을 하는 등 패배를 당했

381

습니다. 하지만 그는 26세가 될 때까
지 현역으로 근무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영국 식민지 거주민들에게는 영
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나중
에 미국 독립 전쟁 때 그가 미국 대
륙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이
유들 중에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됩
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초기 3-4년 동안
에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며 영국은 계
속 패배를 면치 못했습니다. 아메리
카 대륙의 프랑스군은 숫자적으로는
많이 열세였지만 조직과 전력에 있어
서는 영국군보다 월등히 나았으며 또

382

한 인디언 부족들도 대부분 프랑스군
과 연합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은 이 전쟁을 그동안 자신들
을 괴롭혀 온 영국에 복수할 좋은 기
회로 여겨 프랑스 편이 되었던 것입
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프랑스-인
디언 전쟁’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이 더
많은 원정대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
견하면서 전쟁 상황이 달라집니다.
영국은 1758년에서 1760년 사이에
연전 연승하였으며, 1760년에는 몬
트리얼까지 함락시켜 캐나다 전역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영국과

383

프랑스는 1763년 종전을 위한 파리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로써 영국은 명
실상부한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캐나다와
플로리다를 포함하여 대서양에서 미
시시피강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 전체
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캐
나다 지역과 루이지애나 땅 가운데
미시시피 동편으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의 지역 전체를 영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서쪽 지역은 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도왔던 스페인에게 양도합니다. 그리

384

하여 프랑스는 북아메리카로부터 완
전히 철수하고 그곳에서의 식민지 역
사를 종식하게 됩니다. (이뿐 아니라,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실패로
영국과 식민지 패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던 인도 식민지에서도 손
을 뗍니다.) 이때 스페인은 자신들의
땅이었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넘겨
주고, 대신 루이지애나 지역 가운데
미시시피강부터 록키 산맥에 이르는
서쪽 땅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
국은 더 이상 프랑스라는 경쟁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북아메리카 지역에
서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식민지

385

패권을 더욱 확고히 밀고 나가게 됩
니다.

그런데 영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북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들과
관련하여 특이한 일이 하나 발생합니
다. 즉 영국이 그곳 식민지인들에게
어떠한 경우든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
어서 서부로 진출해서는 안된다는 포
고령(Proclamation)을 내린 것입니
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
기자마자 동부 13개주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백인들은 애팔래치아 산맥
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했습니다. 애

386

팔래치아 서부에서 영유권을 주장하
고 있던 프랑스 세력이 이제 다 물러
갔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늘 그곳
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그들에게는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로 인해 애팔
래치아 서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과의 다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여 1763년에 정식으로 백인들
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서 서진하
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공표했던
것입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인디언 부족들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일로 인해 적지 않은 골머

387

리를 앓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인디언과의 다툼을 원치 않았던 것입
니다. 그리고 영국 정부로서는 미국
식민지 주민들이 계속해서 서부로 진
출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
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
나 이 포고령이 처음에는 효력이 있
는 듯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 효력
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고, 식민지 백
인들은 무리를 지어 애팔래치아 산맥
을 넘어서 서쪽으로 이주해 갔습니
다. (바로 뒤에서 보겠지만, 이 영국
의 포고령이 미국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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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로 작용합니다.)

미국 독립전쟁

앞에서 보았듯이, 영국은 프랑스-인
디언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
로써 북아메리카에서 캐나다 땅 전
부, 그리고 애팔래치아 산맥부터 미
시시피강의 동쪽에 이르는 전체와 플
로리다까지 획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은 이 전쟁에서 비록 승리하긴

389

했지만, 이로 인해 많은 예산과 국력
을 소모하였으며 채무까지 지게 됩니
다. 그 채무액이 무려 1억 3천만 파
운더인데,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
한다면 수백억 파운드 이상에 이른다
고 합니다. 그 이자만도 당시에 한해
450만 파운드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를 메우기 위한 방
법으로 13개주의 식민지인들에게 온
갖 종류의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러
자 식민지인들은 이러한 영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식민지인들은 그
전쟁에 들어간 재정의 일부를 감당해

390

야 하는 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그들
은 영국의 덕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재정의 일
부도 부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
다.)

그러던 중에 영국은 인도 식민지에
있었던 동인도회사에만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인기리에 팔리던 차(Tea)
의 사업 독점권을 주자, 이에 식민지
인들은 불만이 더욱 고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인들은 차
에 대해서 불매 운동을 벌이면서 차
를 싣고 식민지 지역으로 들어오는
영국의 배가 차를 하역하지 못하도록

391

했습니다.
하지만 1773년에 영국 정부가 보스
턴 항에서 하역을 강행하려 하였고,
이때 약 150명의 식민지인들이 인디
언 복장으로 변장하고 정박 중인 배
에 올라서는 선적되어 있던 차 상자
를 모두 바닷물에 집어 넣어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보스턴 티
사건’(Boston Tea Party)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이 인디언으로 가장
했던 것은 이 일을 마치 인디언들이
일으킨 것인양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는

392

식민지에 대해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했고 식민지인들 또한 더욱 강한
반발을 하면서 양측은 결국 1775년
무력 충돌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
여 시작된 미국 독립 전쟁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승리가 확정될
때 까지 8년 동안 진행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
게 된 이유는, 영국이 이처럼 많은
세금을 식민지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등 강경책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
만,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들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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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금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포고령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13개주 식민지인들이 계속 서
쪽으로 진출하면 그곳의 인디언들과
충돌이 일어날 게 뻔하고, 더욱이 식
민지 세력이 멀리 떨어진 영국 본국
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성장
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
자 영국 정부는 1763년 아예 포고령
(Proclamation)을 내려 애팔래치아
산맥부터 미시시피강변까지 이르는
서쪽 지역을 ‘인디언 보호지
역’(Indian Reserve)으로 설정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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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인들이 그곳으로 넘어 가지 못
하도록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이 법령에 따르면 식민지 주민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곳
의 인디언들과 무역을 하거나 땅을
거래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하지
만 당시 식민지인들은 애팔래치아 산
맥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프랑스 세
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넓은 땅으로
이주해 개발하여 재산을 더욱 늘리고
자 하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이 프랑스-인디언 연합군
과 전쟁을 치르는데 영국군에 동참했

395

던 것도 내심으로 이러한 속셈이 있
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마음껏 서부로 진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런데 전쟁이 끝나자 뜻밖에도 영국
정부가 포고령으로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디언 보호지역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계속 서부 지
역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했으며 이 과
정에서 식민지인들과 그곳의 인디언
들 사이에 분쟁이 자주 발생했습니
다. 그러자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
다는 명분으로 군대까지 파견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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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재정적 비용에 부담을 느
껴 ‘병영법’을 제정합니다. 이 병영법
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식민지
인들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이 또
한 그들로 하여금 큰 반발이 일어나
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이 영국 본국
과 식민지는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
전쟁을 치를 때는 일치 단결하여 승
리를 거두었지만 막상 그 이후에는
관계가 서로 소원해지고 다투는 양상
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식민지인들은
1775년 영국에 대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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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War of Independence)
을 일으켰으며 1783년에 마침내 독
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사실 이 전쟁
에서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미국
의 식민지 민병대는 당시 세계 최강
대국이었던 영국 군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데도 식민지 민병대가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가들은 대략 3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국은 영국에 비해 전력에
서는 약할지라도 지형에 강했습니다.
영국은 비록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지
라도 엄청난 손실을 감내하며 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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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 떨어진 곳으로부터 병력을 재충
원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 식민지군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일단 게릴라전에 능할 수 있었습니
다.
둘째는, 미국 식민지군 총사령관이
었던 워싱턴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입
니다. 그는 이미 약 10여년 전에 있
었던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 영국
군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서 민병대
지휘관으로 참가하여 많은 전투 경험
을 축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영국
을 위해 싸우면서 쌓았던 이러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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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 이제는 역설적으로 영국에 대항
해서 전쟁을 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워싱턴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
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엇보다 미국 식민지
군은 당시 영국과 대립 관계에 있었
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특히
프랑스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해군과
육군 등 군사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
입니다. 특히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은
미국이 승리를 굳히는데 결정적 역할
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에
수송선과 전투선 등 316척의 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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