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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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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에 호소하기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디언들은 백인
들을 자신들에 대한 범죄 사실로
법에 기소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설령 기소를 했다고
하더라도 백인 배심원들이 기소
된 백인들을 교묘하게 석방해 버
렸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1700년대만 있
었던 일이 아니라 1800년대에도 캘
리포니아 등 미국 내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이었
습니다. 특히 백인 개척민들은 중부

451

평원의 버팔로를 몰살시키다시피 했
습니다. 그들이 버팔로를 얼마나 많
이 죽였던지 1800년대 초기에 7천만
마리로 추산되던 버팔로가 1880년이
되어서는 200마리 정도로 줄어들었
습니다. 버팔로는 중부 평원의 인디
언들의 의식주를 위해서 어느 부위
하나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주 요긴
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버팔로를 재미삼아 죽이기도 했지만
인디언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
으로 대량으로 죽였습니다. 이러한
버팔로의 대량 살육은 실제로 중부
평원 인디언들의 인구를 감소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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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제2 독립전쟁

미국은 1775-1783년 영국에 대항
하여 벌인 독립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써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1803년 제퍼슨 대통령 재임 시에 루
이지애나 땅을 프랑스로부터 아주 헐
값에 구매함으로 영토가 거의 2배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와 같이 해서
영토 확장의 재미를 보게 되자 영토
에 대한 욕심을 더욱 키워 나갑니다.
내친 김에 북쪽에 위치한, 영국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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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고 있는 캐나다 지역까지 모두
점령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에 미국은 독립 국가가 되었고
또한 루이지애나 구매를 통해 상당히
넓은 땅까지 확보하여 성장의 발판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신생
국가로서 유럽의 강대국과 같은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
국은 1783년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
하여 동부 연안의 13개주를 포함하
여 미시시시피 강까지의 땅을 모두
미국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과거
1763년에 프랑스로부터 빼앗았던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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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지역은 계속 차지하고 이곳에서
세력을 형성한 채 미국을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1783년 파리조약에서,
영국은 미시시피강 유역 땅은 미국에
게 내어주고. 캐나다는 계속 차지하
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입니다.) 그
래서 미국은 북아메리카에서 이러한
영국 세력을 모두 몰아냄으로써 실제
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강대국
으로 발돋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미국인들 중에는 캐나다 지역
을 쳐들어가서 그곳까지 모두 미국
땅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지역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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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주전파(主戰派, War Hawk, 전
쟁 매) 의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
었으며 대다수 미국인이 이들을 지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
사에도 보면, 고려 말기에 명나라가
우리나라와 자꾸 영토 분쟁을 일으키
자 주전파 최영은 아예 명나라로 쳐
들어가 만주(요동)를 정벌해 버리자
고 생각했고 결국 이 일을 이성계에
게 맡깁니다. 하지만 결코 명나라를
쳐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까지 올라가
다가 거기서 회군하여 결국 최영 세
력을 진압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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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나라에 만주 정벌론이 있었
듯이, 당시 미국인들에게도 캐나다
정벌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에 프랑스의 나폴레
옹은 유럽 제패를 이루고자 영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었으며 제퍼
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미
국은 이 전쟁에 관련해서는 중립을
표방한 채 어느 편에도 기울여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당시에 프랑스는
유럽의 모든 항구에 영국 수출품에
대해 봉쇄령을 내리고 영국 물품을
수송하는 중립국 선박을 나포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대항해서 영국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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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 같은 중립국이 프랑스나 그 동
맹국과 거래를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영국 측의 해상 통제는 프랑스
측의 조치보다 훨씬 심각했으며, 이
로 인해 미국은 교역 금지와 화물 압
수의 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영국 해군을 탈영해 미국 상
선에서 일하는 선원들이 많았는데 영
국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미국
상선을 수색하고 결국에는 무려 1만
명에 이르는 미국 선원을 불법적으로
차출해 영국 해군에 복무토록 한 것
입니다. 이런 일들은 영국이 미국으
로 하여금 여전히 과거 그들의 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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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처럼 취급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
여 미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습니
다.
1809년 매디슨(James Madison)이
제퍼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
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
시민을 강제로 모병해간 수천 건에
달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상세한 보고
서를 의회에 제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
륙에서 영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
고자 했는데 영국이 이같은 행위를
계속하자 드디어 1812년에 영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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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이를
‘1812년 전쟁’이라고 하는데, 미국의
‘제2 독립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미국과 영국 사이에 전
쟁이 발발하자 이때 인디언들은 영국
편에 가세하여 전쟁은 미국 대 영국-
인디언 연합군 양상을 띠게 됩니다.
과거 1755-1763년에 영국이 프랑스
와 전쟁을 할 때 인디언들은 프랑스
편이 되었었는데(이때는 영국이 승리
합니다) 이제 인디언들은 영국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당시에는 영국이 인디언들을 괴
롭히고 프랑스는 인디언과 우호적인

460

관계였지만, 이제 미국과 영국 사이
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는 미국이 인
디언들을 괴롭히고 영국이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영국은 애팔래치아 산맥부터 미시시
피강까지의 유역에서 인디언 세력이
자리잡아 완충 지대로서의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영국은 이 인디
언 세력이 미국의 영토 확장을 막아
주길 바랐으며 또 인디언들과 모피
거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과
는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이에 반
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461

에 계속 서부 개척을 통해서 영역을
확장해 갔으며 이 과정에서 인디언들
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전쟁
이 일어나기 약 4년 전인 1808년북
서부(northwest)의 오하이오 지역에
테쿰세(Tekoomsē)라고 하는 걸출한
인디언 지도자가 나타나 인디언들 부
족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힘쓰고 있었
습니다. 그 즈음 재임에 성공한 제퍼
슨 대통령은 이 북서부 지역을 차지
하고 싶은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462

고 인디언들에게 압박과 회유를 계속
했는데, 인디애나 준주(準州, 주로 승
격되기 이전 상태)의 주지사 해리슨
(William Harrison)이 그 실제적인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테쿰세는 북서부의 인디언 부
족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들
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가오는 미
국의 세력에 대항하여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모든 부족들이 단합
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으며, 이것이
어느 정도의 결실을 거두어 마침내
연합체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처
음에는 부족들은 대부분 테쿰세의 말

463

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미국의 압박
이나 회유에 넘어갔지만 나중에는 자
신들이 백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테쿰세 편에 섰던 것입니다. (테쿰세
는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구한말에 일
제에 항거했던 ‘이강년’과 같은, 인디
인식 의병대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전
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11년 테쿰
세는 이 인디언 연맹체를 이끌고 미
국 군대와 ‘티피카누 전투’를 벌입니
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이 연맹체는
해리슨이 지휘하는 미국 군대에게 패
하고 맙니다. 그러나 테쿰세는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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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하지 않고 더 북쪽의 캐나다 지역
에 위치한 영국군과 동맹을 맺습니
다. 그리고는 1812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미국군이 캐
나다에 있는 영국군을 향해 진격해
올 때 이를 저지하는데 큰 전공을 세
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1813년 결국
그는 템즈강 유역에서 해리슨과의 결
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패
배를 당했으며 이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북부 지역에서 이처럼 미국군이 영
국-인디언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남부 지역에서는 앤드류 잭슨

465

(Andrew Jackson)이 크리크족 등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잭슨이 지휘한 미
국군 역시 전쟁에서 승리하여 남부
지역의 인디언들을 모두 진압합니다.
북부에서는 해리슨이, 남부에서는 잭
슨이 전쟁에서 각각 인디언들에 대한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잭
슨은 당시 인디언 부녀자들과 어린아
이까지 참혹하게 살해함으로써 인디
언들에게는 ‘인디언 킬러’(Indian
killer) 혹은 ‘날카로운 칼’(sharp
knife)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칩니다. (어쨌든 잭슨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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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에 힘입어 미국 제7대 대통령
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는 중에 미국과 영국 둘 다 전
쟁에 지치게 되었고 이윽고 1814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겐트 조약
(Treaty Ghent)을 통해 전쟁을 종결
합니다. 겐트 조약의 핵심 내용은 미
국과 영국 모두 전쟁 이전 상태로 돌
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
로는 이 조약에 따라 양측 모두 얻은
것이 없이 전쟁 이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간 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얻
은 것이 많았습니다. 미국은 비록 영

467

국에 승리를 거두지 못해 캐나다 지
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데는 실
패했지만 자력으로 막강한 영국에 대
항하여 전쟁을 무승부로 이끌 정도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인디언들은 서로를 믿
고 연합하여 미국을 견제하곤 했는데
이제는 영국 세력이 물러갔고 인디언
들의 힘도 약화되어 미국은 서부를
향해 더욱 거침없이 진행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 제2 독립전쟁 시에 미국은 백악
관 건물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등
피해를 입습니다. 이때 불에 탄 자국

468

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건물이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이후에 ‘백악
관’(White House)라는 이름으로 지
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 인디언들이
나라를 잃었고 자신들의 역사나 전통
마저도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
신들의 역사 가운데 테쿰세와 같은
리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해리슨이 테쿰세를
비록 적장이었지만 매우 선견지명이
있고 사람들을 잘 통솔하는 천재적인
리더로 보았을 정도로 테쿰세는 손꼽
히는 인디언 리더들 중의 한 명이었

469

습니다.
* 제3대 대통령으로 연임한 제퍼슨,
그리고 제7대 대통령으로 연임한 잭
슨은 둘다 영토 확장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로서 이들은 모두 당시 사람들
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당시 미
국인들이 영토 확장에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특히 잭슨은
처음 대통령이 된 것은 남부 지역의
인디언들을 진멸한 공로(?) 때문이었
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에 인디언 강제이주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고 당시 미국인들로부터 그 치적

470

(?)을 인정받아 연임에 성공했던 것
입니다.
제9대 해리슨 대통령 역시 마찬가
지입니다. 그 역시 인디언과의 전쟁
에서 승리를 이끈 것을 이유로 대통
령에 당선된 인물입니다. 그는 인디
언과의 ‘티피카누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늘 ‘티피카누’라는 별명으로 불
리었으며,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늙은
티피카누’라는 로고송으로 인기를 얻
어 당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는
취임식에서 자신이 아직 기운이 넘친
다는 점을 과시하고 싶어 추운 날씨
에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외투를 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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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나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몸입니다. 이런 비 따
위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고 하면
서 취임 연설을 1시간 동안 진행하다
가 급성폐렴에 걸려 한달 만에 사망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대통
령 중에서 가장 짧은 한달 간의 재임
기간을 가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1841년 3월 4일-4월 4일). 그렇지
않았으면 그 역시 전쟁 영웅으로 연
임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는 전
쟁 영웅 출신들이 많습니다. 미국 독
립 전쟁의 영웅으로 초대 대통령이

472

된 워싱턴, 남북전쟁 시에 총사령관
으로 북군을 승리로 이끈 후에 18대
대통령이 된 율리시즈 그랜트, 그리
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
역으로 34대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
워 등입니다.
* 준주準州)는 주로 승격되기 이전
의 상태를 말합니다. 인디언들의 땅
이었던, 인디애나 준주는 1816년에
주로서 미합중국에 편입되었고 곧이
어 많은 백인정착민들이 몰려왔습니
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473

미국은 1814년 영국과의 전쟁을 끝
낸 이후에 얼마 있지 않아 플로리다
에 눈독을 들입니다. 플로리다는
1513년에 스페인 출신의 탐험가 레
온(Juan Ponce de Leon)이 유럽인
으로는 최초로 발을 디뎌 알려진 곳
입니다. 그 이후 이곳은 스페인이 점
유지로 가지고 있다가 1763년 영국
과 프랑스-인디언 연합군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프랑스로부터 루이
지애나 동쪽 지역을 양도받을 때에
플로리다까지 함께 가져갑니다. 그러
다가 1783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474

독립했는데 이를 협의한 파리 조약에
서 미국의 땅을 ‘캐나다와 플로리다
를 제외한 미시시피강의 동쪽 전부’
라고 규정하면서 플로리다는 다시 스
페인에게 귀속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미국은 이곳에 관심
을 갖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에 스페
인은 위협감을 느끼고는 1819년 플
로리다를 미국에 양도해 버립니다.
(이처럼 플로리다는 그 영유권이 여
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을 겪은
후에 최종적으로 미국의 소유가 되어
미국 속령으로 있다가 1845년 미국
27번째 주가 됩니다.) 이때 스페인과

475

미국은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소유하
고 있는 텍사스만큼은 미국이 건드리
지 않는다는 협약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 가운데는 과거 제퍼슨이 루
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구입
할 때 플로리다와 텍사스 역시 루이
지애나 지역에 포함된다고 하면서 그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으
므로 스페인으로서는 플로리다를 미
국에 넘겨주는 대신에 텍사스만큼은
확고히 소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텍사스를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
던 중에 멕시코가 1824년 스페인으

476

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스페인이 소
유를 주장했던 북아메리카의 모든 땅
이 멕시코에 귀속됩니다. 이때 많은
미국인들이 텍사스에 와서 정착을 하
고자 했으며, 멕시코 정부는 지역 개
발 및 세금 수입을 위해서 이들을 모
두 받아주었습니다. 스페인 통치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 멕시코로서는
북아메리카의 방대한 영토의 개발과
수익을 위해서는 많은 정착민들을 필
요로 했기 때문에 이들의 유입을 도
리어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멕시코에게는 이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1830년에 이르자 미국 이

477

주민들이 텍사스에 사는 멕시코인들
보다 거의 3배가 더 많아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멕시코 정부는
뒤늦게 두려움을 느끼고는 부랴부랴
미국인의 이주를 금지시키고 미국 상
품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 정부는 혹시나 미국이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을 감행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갖고 있었
습니다. 미국이 멕시코 정부에 두 번
에 걸쳐서 텍사스를 팔 의향이 없는
지 의사 타진을 해 온 적이 있어 텍
사스에 대한 미국의 욕심을 알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멕시코 정부

478

는 보다 많은 군인을 텍사스에 주둔
시켜 미국 이주민들의 행동을 통제했
습니다.
그런 중에 멕시코인과 미국 이주민
들 사이에 충돌이 심해지자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가 미국 이주민들을 추
방하고자 시도했는데, 그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1836년에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텍사스 공화국을 공
표합니다. 그러자 산타 안나는 6천명
의 병력을 이끌고 텍사스로 진격하고
는 알라모(Alamo) 요새에 집결하여
항거하던 미국 이주민 의용군 187명

479

을 전멸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미국
의용군 부대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알라모를 기억하라’(Remember the
Alamo) 구호를 외치며 멕시코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으며 마침내 산 하신
토(San Jacinto) 전투에서 대승을 거
두고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까지
포로로 사로잡습니다. 이에 산타 안
나는 하는 수 없이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그 이후 텍사스는 미국에 편입되기
를 강력하게 원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대로 공화국 상태를 거의 10년간
유지하다가 결국 1845년에 플로리다

480

에 이어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되
어 미국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
때까지만 해도 텍사스 공화국에 계속
미련을 가지면서 스스로 그 종주국이
라고 여기고 있던 멕시코 정부는 분
노하면서 미국과 국교 단절 조치를
취합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조치로
군대를 멕시코 국경으로 파견하여 멕
시코를 자극했습니다. 멕시코 군대는
발끈하면서 미국 군대를 기습 공격을
시도하여 16명의 미국 군인이 살해되
는 일이 발생합니다. 미국은 이를 빌
미삼아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하고는
곧바로 멕시코 군사의 4배나 되는 대

481

군으로 뉴멕시코의 수도 산타페로 진
격하여 점령하였고, 이어서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들어가 함락시
켜 버립니다.
그후 1848년 2월에 미국과 멕시코
는 멕시코의 과달루페 이달고에서 과
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로써 미국은 현재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의 전역과 텍사스주,
콜로라도주, 아리조나주, 뉴멕시코주,
와이오밍주의 일부 지역을 영토로 획
득하였으며(이 땅은 한반도의 15배나
되는 큰 규모입니다) 멕시코와의 국
경선은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하였

482

습니다. 이때 미국은 그 댓가로 멕시
코에 1,500만불을 지불합니다. 이 일
로 멕시코는 자신들의 영토 거의 절
반을 날려 버린 셈이 됩니다.

이 즈음에 미국은 오리건 지역
(Oregon Country, 오리건 컨트리)
역시 자국 영토로 병합시키는 일을
단행합니다. 당시 오리건 지역은 현
재의 오리건주, 워싱턴주, 아이다호주
전체와 몬태나주, 와이오밍주의 일부
를 포함하는 넓은 땅을 가리키는 말
이었습니다. 이곳은 영국과 미국이
서로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여

483

1818년부터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
습니다. 땅 문제로 인해 한때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지만 서로 전
쟁만은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46년 북위 49도 선을 기준으로 하
여 오리건 지역도 미국 영토로 확정
이 됩니다. 미국은 본래 54도 선을
계속 주장하였다가 이처럼 49도 선
으로 물러났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는 남부 지역에서 멕시코와 영토 분
쟁이 발생하고 있어서 오리건 영토
문제를 서둘러 결정해 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484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합니
다. 이로써 그해에 본토 48개주와 알
래스카를 포함하는 지역이 미국 영토
로 확정됩니다. (하와이는 1959년 8
월 21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
며, 이로써 현재 미국의 50개주 형성
이 완료되었습니다.)

목화와 인디언

목화(cotton)는 인간의 의복에 있어
서 거의 필수적인 식물입니다. 목화

485

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위로 인해 고통을 당했을까 생각해
보면 목화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목화가 의복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을 넘어, 인간
역사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는 사실
을 아십니까? ‘목화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700년대 중엽부터 영국에서 일어나
기 시작한 산업 혁명은 인류 문명의
큰 전환점이 되는데, 이 산업 혁명이
가능하도록 한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목화였던 것입니다. 목화로 만든 면

486

직물이 인기를 끌게 되자 이 면직물
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한 기술들이 개
발되고 그 기술로 인해 기계가 제작
되고 공장이 세워지고 하면서 결국
이것이 산업 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입
니다. (우리나라에는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 말기
인 1364년에 귀국하면서 목화씨를
붓대에 몰래 숨겨와서는 목화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 의류와 사회
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화는 인디언과도 매우 관
련이 있습니다. 영국은 면직물을 만
들기 위해 목화를 처음에는 주로 인

487

도에서 가져오다가 1800년대 이후에
는 전량을 미국 남부 지역에서 가져
오게 됩니다. 본래 미국 남부 지역은
모두 인디언들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7대 대통령이었던 잭슨은 이
남부 지역에서 인디언들을 강제로 쫓
아내고 백인들이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해주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바로 그
들의 목화 재배에 대한 욕심 때문이
었습니다. 당시 목화는 산업 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 수출하면 엄청난 돈
벌이가 되었으므로 미국인들은 결국
인디언들을 다른 곳으로 추방시키고
이들의 땅을 목화 농장지로 전환시켰

488

던 것입니다.

잘 알 듯이, 이 목화는 흑인들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흑인들은 맨 처음
에는 백인들의 담배 재배를 위해서
미국으로 끌려 왔습니다. 미국은 영
국에 담배를 수출하면 수지가 맞았기
때문에 상인들을 통해서 흑인들을 사
와서 담배 재배를 위해 부려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영국에 대
해 독립 전쟁을 치른 이후에 담배 재
배가 사양 산업이 되자 흑인들을 많
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러다가 영국에서 목화가 인기를 끌게

489

되면서 미국 남부 농장주들은 목화
재배에 손을 대 봅니다. 하지만 담배
와는 달리 목화를 재배하고 솜을 추
출해 내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
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마저
도 시원찮았습니다. 그래서 농장주들
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흑인
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했습니다. 사
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노예라기
보다는 소위 ‘계약하인’(indentured
servants) 이었습니다. 계약하인은
일정 기간(대개 4-7년) 동안 노동을
해주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될 수 있
는 신분이었습니다.

490

그런데 1793년에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가 ‘조면기’(繰
綿機)를 발명하고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조면기는 목화에서 씨
를 빼고 솜을 타는 기계였는데, 이것
은 몇십명이 달라붙어 해야 하는 작
업을 일시에 해결해 주었던 획기적인
제품이었습니다. 그러자 실의에 빠져
있던 농장주들은 일시에 화색이 돌면
서 너나 할 것 없이 다시 면화 재배
에 달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에게는 아주 반
가운 소식이었는지 모르지만, 흑인들
과 인디언들에게는 큰 비극을 안겨다

491

주게 됩니다.
백인 농장주들은 이제 많은 흑인들
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노
예로 삼아 면화를 재배함으로 많은
돈을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습니
다. 이 과정에서 흑인들은 때론 짐승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면화 재배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흑인들은
면화 농장에서 사슬에 묶인 채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일하곤 했습니다. 백인 농장주들은
도망치는 흑인은 사냥개를 풀어서 물
어 죽도록 하거나 총으로 쏘아 죽였
으며 붙잡힌 노예는 채찍질을 당하거

492

나 본보기로 공개처형을 하거나 도망
을 가지 못하도록 발을 자르기도 했
습니다. 그 외에도 흑인들은 글로써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과 형
벌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백인 농장주들은 더욱
많은 면화 재배를 하고픈 욕심으로
인디언들의 땅에 눈독을 들이게 됩니
다. 그래서 그들은 연방 정부를 향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자신들
이 갖도록 해주지 않으면 연방을 탈
퇴하겠다는 등의 협박도 서슴지 않았
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잭슨 대통령
은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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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추방하고 그들이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잭슨은
미국 정착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재선에 성공하여 연임을 하게 됐는
데, 이 사실은 당시에 그들이 면화와
땅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를 잘 보여줍니다.

인디언들의 강제 추방이 있은지 약
20년 후인 1861년에 발생한 미국의
남북 전쟁(Civil War) 역시 결국 목
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
다. 그래서 남북 전쟁을 목화 전쟁이
라고도 합니다. 남부인들에게 목화는

494

거의 생명줄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
들은 결코 이 목화를 포기할 수 없었
으며 이 목화 사업을 위해 흑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
에서 보았듯이, 목화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흑인들을 이미 자발적으로 해
방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
업 중심의 북부인들은 굳이 흑인들을
노예로 활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이 해방되면 공장에서
흑인들을 저임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잇점도 작용했기 때문에 흑인 해방을
찬성했던 것입니다.

495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그 이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
고 영영 어디 갔느냐”로 시작되던 클
레멘타인(Clementine)이라는 제목의
동요를 우리는 어릴 때 즐겨 불렀습
니다. 그런데 이 한글로 된 동요 가
사는 미국 본래의 노래 가사와는 상
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3절까지의 영

496

어의 원 가사를 번역해 보면 대강 이
러합니다.

In a cavern, in a canyon
어느 계곡의 동굴 속에,
Excavating for a mine
금을 찾으려고 땅을 파던
Dwelt a miner, forty-niner
‘포티 나이너’인 어느 광부와
And his daughter Clementine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고 있었죠

Oh my darling, oh my darling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Oh my darling Clementine

497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네가 영원히 내 곁에서 사라져
Dreadful sorry, Clementine
내 마음이 너무도 아프구나

Drove the ducklings to the water
매일 아침 9시만 되면 그 아이는
Every morning just at nine
오리떼를 몰고 물가로 갔지요
Hit her foot against a splinter
어느 날 그만 나무조각에 발이 걸려
Fell into the foaming brine
거센 물결 속으로 빠져버렸답니다

498

위에서 보다시피, 이 노래의 본래
가사는 바다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두막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글
가사는 일본 압제를 당하던 시절의
우리나라 상황과 정서에 맞추어서 번
역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사에서
특별히 한 영어 단어가 눈에 띄는데,
‘포티 나이너’(forty-niner, 49년도
사람)입니다. 이 말은,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새크라멘토에서 금이
발견된 이후 1849년부터 미국 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사
람들이 소위 ‘골드 러시’(gold rush)
를 이루면서 캘리포니아로 모여들게

499

된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이 원 가사는, 금을 찾으러
먼 곳에서 가족이 함께 캘리포니아로
왔는데 아버지가 채굴을 하러 간 사
이에 딸 아이가 그만 물에 빠져 죽게
된 슬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골드 러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캘
리포니아로 향해 갔지만 그 도중에
모하비 사막 등에서 죽은 사람들 등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고 하
더라도 금 채굴 과정에서 사고나 다
른 광부들과의 채굴 다툼으로 인해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한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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