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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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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1908- 1991)는 브라질의 상 파울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브라질 내
륙 지방을 여행하며 원주민들을 관찰
하였는데, 그는 이에 근거해서 1955
년에 <슬픈 열대>를 저술합니다. 그
가 이 원주민 관찰을 통해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31년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최
연소 합격하기도 했던 그는 원주민
관찰을 통해 사회인류학에 눈을 뜨게
되고 그 이후는 사회인류학자로 자신
을 자리매김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201

철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류학에
접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
학계에도 구조주의 철학의 한 사람으
로 이름을 남깁니다.
그는 야만과 대립시켜 문명의 우월
성을 강요하는 것은 백인들의 오만하
고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라고 단언합니다. 꼭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면, 문명국이라고 그토록 자
부하던 유럽의 백인 국가들이 그 엄
청난 야만적인 제1차, 2차 세계대전
을 일으킨 경우에서 보듯이 진짜 야
만은 도리어 백인 국가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202

그는 이전의 많은 백인 문화인류학
자들이 문화 비교 연구라는 이름으로
서양 백인들은 우월하며 원주민들은
열등하다는 등식을 더욱 공고히 만든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도리어 문명의 오염물들
이 전혀 없는 울창한 밀림 속에서 소
위 문명인이 소유하지 못한, 자연과
일치되어 순수한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원주민들은
서양인 자신들보다 더 공평하고도 타
당하게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긴 브라질 원주민 여행을 마치
고 돌아오면서 큰 비애감을 느낍니

203

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으로
서구 문명인들이 역사상 저질러온 오
류가 너무나 크다고 여겼기 때문입니
다. 어쨌든 그가 이 책을 펴내기 전
까지만 해도 서양 백인들의 눈에 비
친 브라질 원주민은 인격도, 생각도
없는 거의 짐승 수준의 존재로 여겨
졌지만 이 책의 발간 이후에 그들도
인격과 생각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인과 영
국인 등 많은 유럽계 백인들이 과거
에는 야만인 취급을 받았던 역사가

204

있습니다. 유럽의 민족은 크게 남부
유럽의 라틴족(이탈리아, 그리스 등),
중부와 북부 유럽의 게르만족(프랑스,
독일, 영국 등), 동부 유럽의 슬라브
족(러시아, 폴란드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인은 앵글로
색슨족 후손인데, 이 앵글로 색슨족
은 게르만족 일파입니다. 그래서 프
랑스인, 독일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
인 등 유럽계 백인들은 모두 게르만
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조상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봤을 때 야만인(barbarian)
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게르

205

만족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개가 짖는
듯이 ‘바르 바르...’로 들린다고 하여
게르만족 사람들을 ‘바르바리언’
(barbarian)이라고 하였는데, 그후에
이 바르바리언은 야만인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게르
만족 사람들이 언어도 세련되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얼기설기 엮은
텐트같은 데서 자며 날 음식을 먹고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보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
이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
(barbarian)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

206

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
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
노라.”(롬 1:14-15) 그리스인(헬라
인)과 그들의 문화를 계승한 로마인
들은 자신들을 문명인으로 여기면서
자신들 외의 이방인들은 모두 야만인
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적 관점에서는 문명인과 야만인
이 나뉘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
나님 앞에서는 이들 모두가 똑같이
죄인이며 따라서 누구든지 복음을 받
아들여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
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07

‘야만은 문명의 또 다른 얼굴’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문명은 결코 문명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종이의 양
면처럼 문명 뒷면에는 야만이라는 것
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문명이라
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 과정에
서 수많은 야만적인 일들이 저질러졌
다는 사실을 인류의 역사, 특히 백인
들의 인디언들에 대한 역사가 잘 보
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명은 야
만적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
닙니다. 오늘날에도 문명이 발달할수
록 이를 이용한 야만적 행위 또한 얼

208

마나 발달하고 있습니까? 문명 자체
를 반대하고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문명은 항상 야만성을 내포하고 있음
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1954년에 출판한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으로 노벨문학상을 받
았는데,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도 인간 사회에는 문명과 야
만의 양면성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사
실을 보여주면서 문명의 야만성을 고
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
서 인간 마음 속에 조차 문명 보다는

209

야만이 항상 내재해 있으며 문명이라
는 것이 얼마나 쉽게 야만성에 의해
패배하고 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인디언 사냥꾼

미국의 서부 영화는 늘 백인들은 멋
있고 정의로운데 비해 인디언들은 약
탈하고 비겁하며 잔인한 존재로 그렸
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인디언’ 하
면 정말로 그러한 사람들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서부 영화는 특히 인디

210

언들을 죄없는 백인들을 죽여 머리가
죽을 벗기는 사람으로 왜곡시켜 왔습
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서부 영화
에서 보아 온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는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야만
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대표적인 장
면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백
인들로 구성된 ‘인디언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
십니까?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 머리
가죽을 벗겨 포상금을 받는 것을 직
업으로 삼았던 백인들을 가리킵니다.
머리가죽 벗기기는 인디언들이 아니

211

라 인디언 사냥꾼들로부터 시작된 것
입니다. 그리고 머리가죽 벗기기를
처음 창안한 것도 인디언들이 아니라
백인들입니다. 1703년 식민지 입법
회의는 인디언 머리가죽 하나에 12
파운드의 포상금을 주기로 결의했으
며, 1720년에는 100파운드로 인상되
었습니다. 식민지 가운데 가장 관용
적이었던 펜실베니아에서까지 인디언
머리가죽은 상당한 가격으로 팔렸습
니다.

2014년 8월에, 한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이 자신들 조상의 머리가죽을 되

212

찾기 위해 독일의 한 박물관과 반환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뉴스가 전해졌
던 적이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의 머리가죽이 왜 독일에 있는 걸까
요? 독일의 칼 마이(Karl May,
1842-1912)라는 유명한 소설가는
미국의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소설을 썼는데 이것이 엄청나게 인기
를 끌면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
고 사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미국 서
부 시대의 유물들로 전시된 박물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술집에서 경매를 통해 인디언들의 머
리가죽을 팔곤 했는데, 이때 박물관

213

직원들이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미국
다코타에서 100달러와 술 3병을 주
고 인디언의 머리가죽들을 구입했고
그래서 이것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었
던 것입니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인디언 후
손들은 그 머리가죽의 반환을 요구했
습니다. 하지만 칼 마이 박물관측은
이를 거절하며 “박물관 종사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유물을 보존하고 보호
할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 머리가죽을 통해 당시 백인 개척
자들이 얼마나 야만적이었고 반인권
적이었는지 알리기 위해서라도 보존

214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관장
은 “문화적으로 모독을 주는 행위까
지 정당화할 만큼 유물을 보존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면서 인디언들
에게 머리가죽을 돌려줄 것을 촉구했
습니다. 과거 인디언의 머리가죽 모
으기에 혈안이었던 미국인들이 이러
한 촉구를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유럽인들이 인디언들을 사냥하는 방
법에는 머리가죽 벗기기만 있었던 것

215

이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사냥개를
풀어 인디언들을 사냥하여 죽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맨 처음 정착촌 건
설을 주도했던 버지니아 회사의 한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무력을 사용하거나, 사냥개로 쫓아
그들의 벌거벗은 검게 탄 몸뚱이를
물어뜯어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인디언들이 전염병에 약한 사실을 알
고 천연두 등의 전염균이 묻은 담요
를 선물인양 건네 그들을 몰살시키기
도 했습니다.

216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인
디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면서 이
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
람이 록키 산맥에서 동쪽으로 여행을
한다면 그는 맨 먼저 자연의 법을 제
외하고는 어떤 법도 가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야만인들을 보게 될 걸세.”
제퍼슨은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 가
운데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합중국의 초기 국가 조직의 형태를
만드는데 있어 그가 야만인으로 여겼
던 바로 그 인디언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

217

다. 이때 그가 관심있게 보았던 것은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 부족 연
맹체였습니다. 미합중국이라는 이름
이 보여주듯이 미국은 각각 주권을
갖는 주(state)들이 연합하여 형성된
연방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각 주
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모
여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는 독특한
모양의 미국의 연방 정부 형태는 각
부족들이 독립적이면서도 또한 연합
적이었던 이로쿼이 부족 연맹체를 참
조한 것입니다.

미국 상원은 1988년, 미국 헌법 발

218

효 200주년(미국 헌법은 1788년에
발효되었습니다)을 맞아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즉 “미국
의회는, 미국 헌법이 발효된 200주년
을 맞이하여 미합중국은 이로쿼이 연
맹체 및 다른 인디언 부족들에게 대
해 역사적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한
다. 그들은 개화되고 민주주의적인
정부 원리들을 보여주었으며, 각각
독립적인 인디언 부족들이 하나의 자
유롭게 결합된 형태를 모범적으로 이
루고 있었다.”(Congress, on the
occasion of the 200th anniversary
of the signing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acknowledged

219

the historical debt which this
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owes to the Iroquois
Confederacy and other Indian
Nations for their demonstration of
enlightened, democratic principles
of government and their example
of a free association of
independent Indian Nations.) 미국
의회가 이로쿼이가 미국 헌법을 만드
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결의안을 통
해 정식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하겠습니다.

220

이와 같이 이로쿼이 연맹체는 미국
의 정부 조직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
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성립하는 데에
도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의 뉴욕 북
쪽에 위치한 5부족들(나중엔 6부족
들)이 연합해서 동맹을 구성하고 있
었던 이로쿼이는 내부적으로는 역사
상 가장 대표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적들에 대해
강력하게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하
지만 그리스마저도 노예나 여성은 참
정권이 없었습니다. (미국도 1920년

221

이 되어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
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인
구 가운데 2/5가 노예였으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 당시
의 유명한 철학자들도 모두 이러한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체
제에서 살면서 철학을 논할 수 있었
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선
천적 노예 제도까지 인정했을 정도였
습니다. (그래서 이들 철학자들도 모
순입니다.)
하지만 이로쿼이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아예 노예

222

자체도 없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발언하고 부족회의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로쿼이 인
디언들은 장로회의의 장로들을 지명
하고 추장을 퇴위시키는 권한을 나이
든 여성들에게 줄 정도였습니다. 그
들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와도 비교가
안되는, 가장 탁월한 민주주의를 이
미 실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가 지나고 근대에 이르러 민주
주의는 영국 명예 혁명(1688년), 미
국 혁명(1775-1783년, 미국 독립전
쟁), 프랑스 혁명(1789-1799년)을
거치면서 이루어져 왔다고 역사가들

223

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로쿼이는 이
러한 혁명들의 진통을 겪으면서 이루
어진 서양의 민주주의보다도 훨씬 나
은 민주주의를 이미 1400년대부터
구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
면, 이로쿼이 민주주의는 고대의 그
리스 민주주의나 서양의 근대 민주주
의보다도 진보된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또한 인디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독립선언서 서두
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
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

224

고, 신은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
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
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처럼 독립선언서의 근간이 되는 자
유와 평등 정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의 자연법 내용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회계약론의 자연
법은 인디언 사회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스티브 테일러
(Steve Taylor)는 <자아폭발>이라는
책에서 루소가 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의 원주민들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사회계약론을 저술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서에서

225

말하는 자유와 평등 정신은 결국 인
디언들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독
립선언서에 보면 인디언은 야만인으
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독립선
언서는 명시하고 있지만, 이 독립선
언서에서 말하는 자유와 평등 속에는
인디언들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서 얻었던 것
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인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과 관
련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있는 그

226

대로의 미국사>의 저자인 역사가 브
링클리(Alan Brinkley)는 이렇게 진
술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의 인디언은 안정된 농
부들로서 그들이 사는 마을 주변
은 다양한 농작물, 콩, 호박, 여러
가지 채소 그리고 옥수수를 재배
하는 잘 정돈된 밭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영국 이주민들은 신세계
에서 어떻게 식량을 재배하는지에
관해서는 인디언에게서 상당히 많
은 것을 배웠다. 특히 옥수수 재
배가 그러했다. 영국인들은 옥수

227

수 옆에 콩을 심으면 토양이 비옥
해지는 이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초기 뉴잉글랜드 식민지
의 한 정착민은 인디언들이 ‘최고
의 씨앗을 고르고, 최적기를 기다
리고, 심는 구멍의 간격을 맞추고,
흙을 얼마만큼 돋울 것인지를 정
하고,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고, 필요하면 때때로 다
듬는 일’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
했다.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이 하
는 대로 식량재배와 사냥 및 고기
잡이를 겸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
다. 특히 카누는 매우 중요했는데

228

영국 배보다 뉴잉글랜드의 강과
샛강을 다니는데 유용했다. 원주
민의 원시적 문명이 초기 영국 정
착민들에게 사실상 가장 중요한
농사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 주었
던 것이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서 도움을 받
은 것은 또 있습니다. 미국 독립 전
쟁 당시 워싱턴의 독립군 군대는
1777-1778년 사이의 겨울에 펜실베
니아의 밸리 포지(Valley Forge)에
서 식량, 의복, 기타 보급물자들을 충
분히 공급받지 못해 심한 굶주림과

229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 가운데서 꼼
짝달싹하지 못하는 큰 곤경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변의 오나이다(Oneida, 이로
쿼이 연맹체 부족들 가운데 하나) 부
족 인디언 남자들은 600부셀(bushel,
약 2톤)의 옥수수를 그들의 등에 지
고 운반하여 그 병사들이 기근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쿠퍼(Polly Cooper)라는 오나이다
인디언 여인은 남자들을 데리고 가서
독립군 병사들에게 어떻게 그 옥수수
를 가성소다물(잿물) 속에 푹 담궈
먹기에 좋게 말아서 만드는지를 가르

230

쳐주었습니다. 워싱턴과 그의 병사들
은 이 사실에 감사를 표했으며, 특히
워싱턴의 부인 마르타(Martha
Washington)는 개인적으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보니트(bonnet) 모자
와 숄(shawl)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
기도 했습니다. 만일 당시 워싱턴의
부대가 이 밸리 포지에서의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미국을 생
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서 여
러 가지로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한
인디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이

231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다는 한
마디만 말해주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232

인디언의 추수감사절

인디언 출신 작가 셔먼 알렉시
(Sherman Alexie)가 지은 <캔터기
후라이드 껍데기>라는 책에는 아래
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인디언들이 추수감사절을 기념하
는 건 웃기는 짬뽕이다. 그러니
까, 내 말은, 인디언들과 순례자
(필그림)들은 첫 추수감사절 때
분명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하
지만 몇 년 후 순례자들은 인디

233

언에게 총을 쏘아댔다.
난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칠면조를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요, 아빠, 인디언들은 뭘 감
사해야 하는 거예요?”
난 아빠에게 물었다.
“우리 인디언 모두를 죽이지 않
은 걸 감사해야지.”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11월 마지
막 주간의 목요일에 지켜집니다. 추
수감사절은 잘 알 듯이 1620년에 백
인 필그림들이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

234

고 지금의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하여
모진 고난 끝에 그 이듬해 1621년에
마침내 추수를 한 다음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
리게 된 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필그림들이 그곳에서 추수를
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주
변의 왐파노아그(Wampanoag) 부족
인디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그들
에게 옥수수 등의 농사를 짓는 법,
야생 동물을 잡는 법, 물고기를 잡는
법, 심지어 집을 짓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

235

는 영국식 집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
면 그들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고,
그렇다면 오늘날 그들의 후손 격인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존립도 과연
가능했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고기를
먹는 것은 미국인의 전통으로 자리잡
혀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이
칠면조를 필그림들이 잡아서 준비했
다는 설과 인디언들이 잡아서 그들에
게 선물로 가져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령 필그림들이 칠면조를 직

236

접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잡는 법은
인디언에게 배운 것이므로 그것은 인
디언 덕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위 알렉시의 책에서는 주인공이 왜
칠면조를 먹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
하고 있는데, 미국 서부 끝에 위치한
워싱턴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살고
있던 주인공은 먼 과거에 필그림들이
미국 동부 끝의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
본다면, 미국인들은 특히 추수감사절
에는 물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237

인디언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
다.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들 역시
추수감사절에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지만 인디언들에 대해서도 감사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존립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한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 수 있었던 근본이 인디언들 덕분
이기 때문입니다.

1970년에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
서는 ‘뉴잉글랜드 인디언 연합 단
체’(United America Indians of
New England)가 결성되어 추수감사
절 날 정오에 메사추세츠 주 플리머

238

스에서 추수감사절 대신 ‘국가 통곡
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
을 정하였으며 지금까지 해마다 지키
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이날 전국
각지로부터 플리머스에 모여 과거부
터 있어왔던 인디언들에 대한 역사
왜곡과 차별에 대해 항의의 표시를
합니다.
이 날에 그들은 특별히 ‘필립왕 전
쟁’이라는 사건을 떠올립니다. 1675년
부터 약 1년 동안 영국 이주민과 인
디언들 사이에 벌어졌던 이 전쟁은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이주민들과 인
디언들 사이에 있었던 최초의 대규모

239

전쟁이었습니다. 필립왕은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아사 직전에 처해 있던 필
그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왐파노아
그족 추장의 막내 아들 메타코밋의

별칭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영국인

2011년 5월 11일, 보스톤 글 이주민의 숫자

로브는 왐파노아그 부족 출

신의 하버드대 졸업생이 346 가 계속 많아지

년 만에 배출된다고 전했다.

이름은 티파니 샘리(Tiffany 면서 토지에 대

Smalley). 1665년 왐파노아그 한 그들의 탐욕

부족의 추장 아들이었던 갈

렙(Caleb 이 더욱 늘어갔

Cheeshahteaumuck)이 하버

드대를 졸업한 이후 처음이 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240

영국인들이 계속하여 자신들 부족의
영토에 침입해 들어오고 이 과정에서
기만과 살육이 이어지자 메타코밋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전쟁을 일
으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
서 왐파노아그족은 패하여 몰살되거
나 노예로 팔려갔으며 일부는 캐나다
등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때 메타코밋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
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은 영국으로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왐파노아그 부
족의 후손들은 지금도 살아있는데,
그들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인디언
부족민들은 이 사건을 잊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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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날을 통곡의 날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242

야아떼, 하고네, 시끼스

‘야아떼’. 이는 나바호 인디언 사람
들끼리 만날 때 하는 인사말입니다.
‘하고네’는 헤어질 때의 인사말입니
다. 그런데 이 ‘야아떼’와 ‘하고네’ 두
인사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
다. ‘야아떼’의 본래 뜻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좋다’ 혹은 ‘저 위가
참 좋다’ 입니다. 나바호어에서 ‘야’
는 ‘위’(the above)를 뜻합니다. 즉
위(the above)가 좋으니, 이 우주에
있는 전체가 좋고, 너와 나 사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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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모든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나바호 사람들은 한편에서 ‘야아떼’
하고 인사하면, 상대방은 ‘오’라고 인
사합니다. ‘오’는 ‘예, 그렇습니다’, 영
어의 ‘예스’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좋구
나’하고 인사를 하면 상대방은 ‘그래,
정말로 좋아’하고 맞장구 쳐 주는 것
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나바호 인디
언들이 동양의 철학자들 못지않은 우
주관과 철학관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
다. 물론 그들이 ‘저 위’(the above)
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의미하는

244

지는 모르고 야아떼 하고 인사하겠지
만, 어쨌든 그들은 ‘저 위가 참 좋아
야 모든 것이 다 좋다’는 사고를 갖
고 있었으며 또 이것을 일상의 인사
말에까지 적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나바호의 인사말은 단순히 ‘안녕,
잘 지내니?’를 뜻하는 ‘하이, 하우 아
유’(hi, how are you?) 등의 영어 인
사말 보다는 무게와 의미가 있어 보
입니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야아떼’
하고 인사를 할 때 손가락을 모두 폅
니다. 이는 ‘나는 네게 개방적이다,
우호적이다’란 뜻입니다.)

245

그리고 나바호 인디언들이 헤어질
때 사용하는 ‘하고네’는 하고(오다)와
고네(가다)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
‘잠시 가지만 다시 온다’, 즉 ‘다시
보자’ 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
들은 헤어질 때 흔히 ‘good bye’라
고 하는데,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good bye’라는 것이 없습니다. 헤어
짐, 이별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네는
친한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영어의
‘so long’(다시 보자) 뜻에 가깝습니
다. 즉 그들은 헤어지면서도 항상 곧
다시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
다.

246

나바호 인디언들은 죽은 자들도 혼
령이 되어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다
시 찾아와 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들에게는 죽음도 일종의 하고네인 것
입니다. 내세는 현세에서 잠시 떠나
있는 상태로 여길 정도로 그들은 현
세와 내세의 구분을 크게 느끼지 않
습니다. 물론 이들의 현세관과 내세
관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나바호 인디언들
도 내세에 대해서 이렇게 가깝게만
여기는데, 이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
서도 내세에 대해서 먼 곳으로만 느
끼며 살아가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247

죽음과 내세에 대해서 무언가를 생각
하게 해 준다 하겠습니다.
저는 이 ‘하고네’에 근거해서 나바
호 인디언들에게 이런 내용의 메시지
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즉 “여러분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하고네’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잠시 후에 다시
보자’라는 뜻이 아니냐? 영원한 굿
바이, 이별이 아니라 다시 보자는 뜻
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
런 말이 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
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248

사실 이 세상은 잠시 동안 거처하는
곳에 지나지 않고 내세가 우리의 영
원한 본향이다. 그런데 잠시 이 세상
에 살다가 내세의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나려면, 죽고 나서도 진짜 ‘하
고네’ 하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해 주실 수 있
다.”

수우족 인디언들에게 친구는 ‘나의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지고 가는 사
람’(a person who carries my
sadness upon his back)이라는 뜻입
니다. 그리고 나바호족 인디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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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시끼스’라고 하는데, 이는
‘나의 반쪽’이라는 뜻입니다. 신발 두
쪽이 있으면 그 한쪽이 친구라는 것
입니다. 영어의 ‘friend’(친구)의 의미
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혹은 또
는 ‘도와주는 사람’, 혹은 ‘적대적이
아니고 좋은 관계의 사람’ 등입니다.
영어에는 이외에도 친구에 대한 정의
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에 대
한 영어의 그 어떠한 정의보다도 인
디언들의 정의가 더 운치 있고 의미
가 있어 보입니다.
나바호 보호구역에서 저를 시끼스라
고 부르는 인디언들이 몇몇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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