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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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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ctchomelee, 2021-04-13 21:52:58

나의 친구 인디언

final-나의친구 인디언-아래한글 원본입니다2

만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과 글로 된 협정
문서를 작성하고 그것도 모자라 서명
을 하고도(인디언들은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서명을 할 때는 X 표시만 했
습니다) 이를 어기기 일쑤였습니다.
아래는 수우족 인디언 추장 붉은 구
름(Red Cloud)이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오. 여러분은
우리를 도와주시겠소? 1868년에
백인들은 우리에게 서류를 가지
고 왔습니다. 우리는 그 서류에
적힌 것을 읽을 수 없었고 또 그

151

들은 그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
는지 사실대로 얘기해 주지도 않
았어요. 우리는 그 조약이 요새를
철거하고 우리가 싸움을 끝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지
요. 그러나 백인들은 우리를 미주
리로 보내려 했소. 우리는 미주리
로 가고 싶지 않았고 우리가 있
는 곳에서 살며 교역을 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워싱턴에 갔을 때
큰아버지(미국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는 조약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통역이 나를 속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소. 내가 원하는 것은 옳고

152

바른 것이오. 나는 큰아버지에게
그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전적으
로 내 뜻을 이룬 것 같지는 않
소... 문명인은 뭐든지 글로 기록
하려들고, 그래서 항상 종이를 가
지고 다니오. 그들이 오래 기억하
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오.
우리는 종이가 필요 없소. 진실이
담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스
며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
된다오. 인디언은 결코 그것을 잊
어버리는 일이 없다오. 그러나 문
명인은 기록해놓은 종이를 잃어
버리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153

오.”

위 내용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1868년에 수우족 땅을 침범하려는
미국 백인들과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
는 수우족 인디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인디언들이 승리하면서 라
라미 조약(Treaty of Fort Laramie)
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인디
언들이 미국 군대에 대항하여 거둔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데, 이 전투
를 지휘한 사람이 붉은 구름 추장이
었습니다. 그 조약의 내용은, 인디언

154

들은 서부로 가는 백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 대신 백인들은 수우족이
성지(聖地)처럼 여기는 블랙 힐스
(Black Hills) 만큼은 인디언 지역으
로 지정하고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는
상호 약속이었습니다. 이 조약에는
“백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역의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으며 어느
부분도 점유할 수 없다. 또한 인디언
의 동의 없이는 이 지역을 통행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블랙 힐스 지역에서 1874년에 금
이 발견되면서 미국 정부는 그 금을
차지하기 위해 조약을 파기하고 결국

155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굴
복시키고는 미주리강 유역으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미국인들 교육과 인디언들 교육

나바호의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있
는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백인 선생님이 칠판에 한 문제를 적
어 두고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불러
내어 그것을 풀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칠판 앞에 아무 말 없이 선

156

채로 전혀 문제를 풀지 않는 것이었
습니다. 문제를 몰라서도 아닌 듯해
보였고, 선생님에 대해 반항하는 태
도로 그렇게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
니다. 선생님은 궁금하여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지 않는 이유를 물어 보았
다가 그들의 대답에 크게 놀랐습니다.
인디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상대방
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왔
는데 자신이 문제를 풀었을 때 혹시
라도 풀지 못하는 아이가 있어 망신
을 당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
문에 그렇게 그냥 서 있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157

나바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
피 인디언 보호구역 내의 초등학교에
서 있었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
이들에게 근대 교육을 시키던 백인
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아이들
모두에게 문제지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르르 함께 모여들더
니 토의를 하면서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야단
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절대로 옆
사람 것을 보아서는 안되고, 보여주
어서도 안된다. 더구나 서로 의논해
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건 잘못

158

된 것이고 점수

를 받을 수 없

다.”

그러자 호피

킴스 캐년(Keams Canyon)에 아이들은 말했
위치한 호피족 마을에 한 한

인 선교팀원들이 찾아가 전 습니다. “우리

도를 하고 있다. 아이, 나이

드신 분들이 그들의 전도 내 조상들은 어려

용을 귀담아 듣고 있다. 예수 운 문제나 중요
님에게만 구원과 소망이 있

다. 한 문제가 있으

면 늘 함께 모

여서 상의해서 최선의 해답을 찾으라

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서

로 상의하며 문제를 푸는 것이 옳다

고 생각해요.”

159

수우족 인디언 보호구역 내의 초등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숫자를 배우는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에게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고깔
모자를 쓰게 하고서는 교실 구석에
앉아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
님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사
과를 4개 갖고 있는데, 네게 1개를
주면 내겐 몇 개의 사과가 남지?” 이
때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부끄러운 줄 아세요. 사과는 2개 주
어야만 해요. 우리는 친구와 무언가

160

를 나눌 때는 항상 똑같이 나줘 주어
야 한다고 우리 조상님들에게서 배웠
어요.”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는 과
거에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다녔던 인디언들이 아직도 많이 생존
해 있습니다. 다른 인디언 부족의 보
호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870
년대에 시작하여 1970년대에 이르기
까지 거의 100년 기간 동안 수많은
인디언 아이들이 기숙학교에서 보내
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숙학교 생활을
했던 이들 인디언들 가운데 여기서

161

받았던 큰 정신적 상처(트라우마)를
지금까지도 계속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인디언 부모와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후에 기숙학교
에 강제로 합숙시켜서 교육을 통해
백인과 같이 만들고자 했습니다. 백
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아이들을 강제
로 데려간다고 하지 않았지만, 실제
로는 강제로 빼앗아 가기도 했으며
부모들이 아이들을 내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각종 압박을 가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미국은 인디언에 대하

162

여 크게 두가지 종류의 말살 정책을
시행합니다. 하나는 1890년까지는
인디언들을 살육하거나 살던 곳에서
추방함으로써 인종적으로 말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살아
있는 인디언들을 문화적, 정신적으로
말살시키는 일을 행했습니다. 흔히
이것을 ‘동화(assimilation)’ 정책이라
고 합니다. 즉 그들에게서 인디언의
문화와 정체성을 제거하고 그들로 하
여금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 미국인처
럼 살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를 위한 최상의 프로그램이 인디언
아이들을 기숙학교에 집어넣어 교육

163

을 통해 이렇게 만드는 것이었습니
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발생
한 인디언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습니다. 부모로부터 한창 사
랑을 받으며 키워져야 할 어린 나이
의 아이들이 부모와 집으로부터 강제
로 격리당해 거의 군대나 감옥과 다
름없는 기숙학교에 갇히게 됨으로써
그들은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
니다. 자기 아이를 빼앗긴 부모들이
당했을 정신적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기숙학교에 들어가

164

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
는 일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어떤 아이가 자신의 부족 언어를 사
용하면 교사는 그의 입에 비누를 물
리는 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아이
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길게 땋
고 있었던 머리가 짧게 삭발되었으며
모든 옷과 신발은 미국식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마저도
자신들의 것은 못 쓰고 미국식으로
바꾸어 써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미
국 정부는 아이들이 가족과 고향에
대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의도적으
로 그들을 가급적 먼 곳에 위치한 기

165

숙학교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기숙학교에서 어쩌다가 탈
출을 해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
고 그들은 기숙학교 생활을 하는 중
에 교사들로부터 많은 종류의 학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펜실바니아주의 칼라일(Carlisle)에
있었던 칼라일 기술학교는 가장 대표
적인 인디언 기숙학교였습니다. 이
학교는 140개의 인디언 부족들로부
터 데리고 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칼라일 기술학교는 1879년에 개교하
여 1918년에 폐교할 때까지 1만명

166

이상의 인디언 아이들을 데려와 교육
시켰습니다. 칼라일 기술학교의 표어
는 “그 안에 있는 인디언을 죽이고
사람을 구하라”(to kill the indian in
him to save the man)였는데, 이는
당시의 모든 기숙학교가 시행하고자
했던 교육 내용을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학교장 프래트
(Henry Pratt)는 남북 전쟁 때에 장
교로 복무했던 사람으로서, 기숙학교
를 군대식으로 운영했습니다.

트로이어(David Treuer)는 그의 책
<인디언 보호구역에서의 삶>(Rez

167

Life)에서 한 기숙학교의 실상에 대
해서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1887년 호피족이 살고 있는 킴
스 캐년(Keams Canyon)에도 기
숙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부모들
은 그곳에 아이들을 보내기 싫어
했습니다. 하지만 기숙학교 담당
자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기
숙학교로 데려 오고자 했습니다.
호피 부모들은 그들에게 약속만
할 뿐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숙학

168

교 담당 책임자는 그들의 연금을
몰수하고 그들의 집 건축 계획을
보류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그는 그들이 우물
을 파서 지하수를 퍼 올리려고
시공 중이던 일까지 중도에 그만
두게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잔
인한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매우
추웠던 겨울로서 그들에게 물이
꼭 필요하던 때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피인들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들의 아이들
을 기숙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
다. 기숙학교 담당 책임자가 행

169

할 수 있는 더 이상의 일이 없
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호피족
마을에 진주해 들어와서는 한 마
을에서 104명의 아이들을 붙잡
아 킴스 캐년 기숙학교에 보냈습
니다. 그리고는 호피인들이 이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마을 지도자들을 붙잡아 샌프
란시스코에 있는 알카트라즈
(Alcatraz) 감옥에 보내어 1년
동안 수용했다가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apology)

170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2010년에 미
국 내 인디언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일이 있습니다. 공화당 소
속의 상원의원인 샘 브라운백(Sam
Brownback)은 이날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묘지에서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행
위 등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미국 원주민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낭독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은
2004년부터 인디언들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줄기차게 추진했던 인물입

171

니다. 그의 노력으로 2009년 12월에
연방 상, 하원이 이 결의안을 통과시
켰으며, 곧이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이 서명했는데, 마침내 2010년 5월
20일에 그 결의안이 공식적으로 낭
독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결의안은 크게 세가지 내용을 담
고 있습니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과
거 인디언 부족들에 대해 잘못된 정
책과 폭력 행위들을 시행했던 사실
등을 인정하면서 사과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디언들에 대한 정책의 잘못
으로 인해 지금도 인디언들이 보호구
역 내에서 빈곤과 폭력 사태에 직면

172

해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

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앞

으로 인디언 부족들의 권익 향상과

복지 증진을 위한 미국 정부의 약속

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가

열린 의회묘지

는 과거 미국

육군에 대항해

2009년 12월 오바마 대통령 서 싸우다가 죽

이 인디언에 대한 사과문에 었던 인디언 부
서명했으며, 이 사과문은

2010년 5월에 낭독되었다. 족 지도자 36명

하지만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할 정도 도 묻혀있습니

로 사과문 발표가 미약한 것

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 다. 이 행사에는
도 오바마는 역대 대통령 가

운데 인디언을 위한 정책에 173
대한 가장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체로키, 촉토, 무스코지, 포니, 오야
테족 등 5개 부족의 인디언 대표들이
참석했습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1월에 미국 인디언 부족
장 회의에 참석하는 등 인디언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시해 왔습니
다. 오바마는 당시 564개 부족대표들
이 참석한 가운데 행한 연설을 통해
“과거 미국의 역사가 인디언을 수탈
한 폭력의 역사란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원주민의 역사는 폭력과
질병, 빈곤으로 점철돼 있다. 미국 정
부와의 협정은 무시됐고, 약속은 지

174

켜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이 부족장 회의에
참석하는 등 원주민들에 대한 성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바마가 과거에
인디언 부족의 아들로 입양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2008년 대선
때 오바마는 몬태나주의 크로우족 인
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
데, 이때 크로우족 한 가족과 양부모
와 양아들의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
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인디언들에
대해 이같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

175

도 불구하고, 정작 대다수 인디언들
은 이 사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사과 결의안
을 발표했는지 조차 아는 인디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바마 행정부
의 사과 결의안에 대해서 한 인디언
언론에서는 ‘한 나무가 숲에서 쓰러
졌다, 즉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소리
를 듣지 못했다’(A Tree Fell in the
Forest: The U.S. Apologized to
Native Americans and No One
Heard a Sound) 라는 제목으로 부
정적으로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즉

176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사과를 한
다고 했지만, 그것은 정작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한 인디언 목사에게 오
바마 대통령이 인디언들에게 사과했
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
은 적이 있는데, 그는 이를 잘 모르
고 있었으며, 설사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국 오바마가 유권자
들의 ‘vote’(투표)를 의식해서가 아니
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만큼 인디언
들은 미국에 대한 불신이 높은 것입
니다.
몇몇 진보적인 인디언들은 오바마

177

행정부가 사과문을 의회묘지 앞에서
형식적으로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과거 원주
민들에 대해 똑같이 큰 잘못을 행했
던 호주와 캐나다는 전 국민 앞에 공
개적으로 사과를 했으며, 그 나라 원
주민들은 그 진정성을 받아들였습니
다.
2008년 2월 13일 호주의 케빈 러
드(Kevin Rudd) 총리의 노동당 정부
는 호주 의회에서 과거에 유럽인들이
호주를 침략하기 시작한 이래 호주

178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

Australian Origin의 줄임말)들이 겪

은 피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천3백만 명의

호주 인구 가운데 원주민은 약 2%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1967년까지만

해도 인구조사에 포함되지도 않았습

니다. 원주민들은 호주 내의 거의 모

든 영역에서 불이익을 당했으며, 원

주민들의 실업률과 감옥에 들어가는

비율은 매우 높은 편입니다.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가 연설한 사

과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내용은

원주민 아이들이 동화 정책으로 인해

179

당한 피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는 “애버리진 원주민의 자녀를 부모
에게서 떼내어 백인 가정에서 기르도
록 한 동화 정책이 국가의 정신을 더
렵혔다... 동일한 호주 국민인 애버리
진에 대해 깊은 슬픔과 고통, 손실을
안겨준 역대 의회 및 정부의 법률과
정책에 사죄한다.”고 했습니다.
호주 정부는 1916-1969년에 ‘동화
정책’이란 이름 아래 원주민 어린이
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분리하여 백
인 가정에 입양시키거나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호주에서는 당시 이와같
은 피해를 당하면서 어린이 시절을

180

보냈던 원주민들을 일컬어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 혹은 ‘잃어
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고 합
니다. 러드 총리는 특히 이들에 대해
사과를 했던 것입니다.

이 호주의 공식 사과가 있은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캐나다 역시 공개
적으로 자국의 원주민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2008년 6월 11일에 캐나
다의 하퍼(Stephen Harper) 총리는
의회 의사당에 원주민 대표들을 비롯
하여 수백명의 원주민들을 초대하여
그들 앞에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181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현재 캐나다에는
전체 인구 약 3천5백만명 가운데 1
백3십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
습니다. 이들 역시 과거에 백인 이민
자들로부터 당했던 불이익과 학대,
살육 등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현재도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생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캐나다 하퍼 총리의 사과 내용 가운
데 가장 대표적인 것도 호주와 마찬
가지로 인디언 아이들이 동화 정책을
통해 당한 폐해에 관한 것이었습니

182

다. 캐나다에서도 미국과 거의 비슷
한 시기에 기숙학교 제도를 통하여
수많은 아이들을 자신이 인디언임을
포기하고 백인들에게 동화되어 백인
처럼 살도록 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
던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기숙학교
를 보딩 스쿨(boarding school)이라
고 했으며 캐나다에서는 레지덴셜 스
쿨(residential school)이라고 호칭했
습니다.)
하퍼 총리는 “이 동화 정책들은 원
주민 어린이를 전통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주류(백인)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왔다... 원

183

주민의 고유 문화와 정신적 신념이
열등하다는 전제를 바탕에 둔 이 정
책들은 인디언 말살을 위한 것이었
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슬픈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라
고 하면서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원주민들에 대한 동화 정
책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백인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시행된 것이었습니
다. 이들의 동화 정책은 원주민과 관
계되는 모든 것, 즉 그들의 문화와
정신 모두를 이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리는, 원주민 문화 말

184

살 정책이요 정신 말살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호주나 캐나다에 비해서 원
주민들에 대한 사과가 약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동화 정책에 대한
사과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이 행했던 동화 정책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한 인디언은 오
바마의 사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과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돈 문제가 따
르기 때문이다.”

185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식민
지 통치를 시행하던 중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식 이름을 갖게 하는 소
위 ‘창씨 개명’, 그리고 학교에서와
관공서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하고 일
본어를 국어라고 칭하도록 했던 일,
교복을 입게 하고 머리를 깎게 한
일, 그리고 내선일체 - 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것으로 겉으
로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조선은 일본
아래로 들어가 모든 전통적인 것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 - 등의 동화 정
책 및 문화 말살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것들을 백인들의 원주민들에

186

대한 동화 정책 및 문화 말살 정책에
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00-1800년대에 유럽의 백인들은
아메리카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을 하는 과정
에서 대부분 원주민들과의 융화 보다
는 무력을 통한 정복과 착취, 살육,
혹은 동화 정책을 행함으로써 그들에
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것이 사
실입니다.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캐나
다와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의
해 짐승처럼 살육을 당했고, 백인들

187

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인해서도 많이
죽었으며, 그들의 땅들은 결국 백인
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는 남아
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한 원주민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강탈
당해 기숙학교나 백인들의 가정, 혹
은 고아원에 보내어졌으며, 이로 인
해 원주민들은 부모, 아이 할 것 없
이 이산의 큰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
다. 특히 아이들은 나중에 사춘기를
지나면서 원주민도 아니고 백인도 아
닌 자신을 발견하고는 정체성
(identification)의 혼란을 겪었습니
다.

188

이러한 정체성 혼란과 자기 나라가
없다는 좌절감 등의 복합적 요인들로
인해 미국, 캐나다, 호주의 원주민들
은 공통적으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에 빠져 있으며, 자살율과 감옥에 들
어가는 비율이 높으며, 모든 면에서
사회의 최하층민을 형성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평균 연령이 일반 사람들
보다 20살 정도가 낮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
디언들은 백인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
밀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189

아닐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그렇
게 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 가운데 하
나님의 자녀들만은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행위
인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도 그
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화평은 계속 화평을 낳지만
불화는 계속 불화를 낳습니다. “화평
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
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이요.”(마 5:9)

190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분
노, 투쟁, 다툼 등에 관한 것이 아니
라, 그 반대로 화해, 사랑, 용서 등에
관한 것입니다. 백인들의 과거 행위
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서 지적하거
나 분노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
지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용서를 못
하고 사랑하지 못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따
를 필요가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191

믿음으로써 모든 분노와 증오, 좌절
에서 벗어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 외
에는 아무런 답이나 희망이 없습니
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답과 희망이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

앞에서 캐나다의 하퍼 총리도 인정
했듯이,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동화
정책을 시행했던 것은 인디언들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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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보다 열등하며, 자신들은 인디언
들보다 우월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
입니다. 미국 역사를 보면, 미국인들
은 인디언들을 단지 열등한 사람 정
도가 아니라 하나의 동물처럼 취급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이 있도록 한 몇 가지
정신적 요소들이 있는데, 청교도 정
신(puritanism), 발견의 원리
(doctrine of discovery), 개척 정신
(the frontier), 동화(assimilation) 정
책, 그리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입니다. 이 가운데, 발견의
원리, 개척 정신, 동화 정책, 명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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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개념들은 모두 백인우월주의
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찾아온 것을

그들은 ‘신대륙 발견’이라고 표현합니

다. 아메리카

대륙은 결코

‘신대륙’이 아니

라, 이미 인디

한 한인 선교팀이 나바호 보 언들이 수천년

호구역 내의 한 집을 다른 동안 살고 있었

집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전

도하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 던 ‘구대륙’입니

이곳은 해발 7600피트(2300

미터)에 해당하는 고지대다. 다. 따라서 ‘발

이런 지역에도 수천년 전부 견’이 아니라

터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194

그냥 도착하고 당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 간에도,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땅과 집을 찾아가서는 ‘이
것은 내가 발견한 새 땅이다’라고 한
다면 이는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백
인들이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를 고
집하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적 시각 때
문입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인디언들
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다고 여
겼기 때문에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
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개척 정신도 동일합니다. 백인들의
관점으로, 그들은 아메리카라는 신대
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하며, 그

195

다음에 이 땅을 차지해 나가는 과정
을 ‘개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곳에 들어가
는 것이 말 그대로 개척인데, 이미
수많은 인디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인데도 그 땅에 대해 자신들은 개
척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개척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복’이며,
이 정복을 개척이라는 말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정복이
라고 하면 듣기 거북하지만 개척이라
고 하면 도리어 듣기에 좋아 보입니
다.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과 마찬가
지로 개척이라는 말 역시 인디언들을

196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용어입니다.

동화 정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동
화(assimilation)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처럼 되
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는 자체가 이미
우월주의이며, 상대방을 열등 취급하
는 것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융화(harmony)는 서로 상대방
을 존중하며 상대방의 고유성과 독자
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화가 용광로(melting pot)라면,

197

융화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에
해당합니다. 용광로는 모든 고유한
특성들을 녹여 버려 하나로 만들지
만, 샐러드 그릇은 각각 고유한 특성
들을 유지한 채로 하나가 되도록 하
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이 인디언들
과의 관계에서 동화 정책보다는 융화
정책을 취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역
시 그러합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합니다. 즉 1845년에 미
국이 텍사스를 합병했을 때 미국인들
은 더 많은 영토 확장에 대해 열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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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다시피 합니다. 이때 영토 확장론
을 옹호하였던 잡지 <United States
Magazine and Democratic
Review>의 편집장 오설리반(John L.
O’Sullivan)이 “해마다 증가하는 우
리 수백만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할당해주
신 대륙을 온통 뒤덮기 위한 명백한
운명을 이행하자”는 내용의 기사를
쓰면서부터 이 문구는 미국인들에게
삽시간에 전파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태평양 끝이 얼마 남지 않았
으므로 그들은 그곳까지 곧바로 나아
가 전 대륙을 차지해야 하며,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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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부여해주신 명
백한 그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운명’ 역시 인디
언들 땅의 정복에 대해 백인들이 자
신들의 영토 확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의 뜻’까지 끌어와서 만든 자기 암
시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슬픈 열대, 슬픈 인디언

유명한 프랑스 사회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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