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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treentea, 2017-01-19 21:36:44

문화분권

미를 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은 대구시내에서만 타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서

의 성서공단역 앞, 칠곡 3지구의 롯데리아 네거리, 달성의 화원삼
거리, 홈플러스 상인점 앞, 서구청 앞 등 생활공간에서 작게는
200여명에서 1,000여명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이 참여하는 촛불이

타올랐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이에서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 이른바 비선실세 의혹으로
불리는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했고 이를 방조를 넘어 공동으로 실

행한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유린에 대해 분개했던 것이다.


2. 지도부 없는 스마트 시민이 주체가 된 유례없는 시민혁명



나는 내가 대표한다.

이번 촛불항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있고 대
구에는 ‘박근혜 퇴진 대구시민행동’이 있지 않냐고. 물론 시국대회

를 준비하는 조직은 있었다. 집회신고를 하고 행사순서를 정하고
촛불과 깔개 등 집회물품을 나누어주고 행진 코스를 기획하고 집
회가 끝나면 행사장 정리를 하였다. 물론 집회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참가단체들을 통해 모금도 하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도 모금을 하는 역할을 하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투쟁의 방향과
노선, 집회참여자의 동원 등은 집회 주최 측의 몫이 아니었다. 집

회 참여자의 수는 매번 주최 측의 예측을 벗어났고 참여자의 주요
구성원은 소위 운동권(?) 또는 소속단체 회원들이 아니었다. 그리

고 2달여 이어져 온 촛불항쟁의 과정에서 소위 뜨는 리더도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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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다.
광장의 주인은 온전히 시민들 자신이었다. 광장에 나온 촛불시

민은 어떤 대표자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을 대신할 어떤 대리인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나’로 대표될 뿐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집회 참여자가 아니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앞을 바라보고 앉아서

준비한 순서대로 집회를 관람하고 정해진 구호를 따라 외치는 수
동적인 참여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스스로 구호를 정하고 행진과

정에서 선창했으면 피켓도 스스로 준비해 오기도 하였다. 집회 현
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집회 현장을 실시간 중계했고 친구 가족들이
모인 ‘단톡방’에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적극적인 참여자는 발언을 신청해 무대에 올라 자기의 입으

로 이 사태를 분석하고 의미를 이야기 하였다. 집회의 발언은 소
위 자발적인 시민들의 자유발언으로 채워졌다. 간간히 이른바 선

수(?)라고 이야기되는 단체 소속 대표나 활동가들의 발언이 있었
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의 자발적 신청에 의해 발언은 채워졌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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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의 발언은 소위 무대에 많이 올라 본 사람들의 발언보다 훨씬
논리적이었고 이번 사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위 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라 불리는 ‘넥타이부대’도
아니고 지난 시절 변혁운동의 주력군이라고 불리던 노동자, 농민
으로 대표되는 ‘민중’도 아니다. 어떤 단일한 획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아마 네그리가 말한 ‘다중’이 이번
촛불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표현할 수 있는 개념에 가장 적합하
지 않을까? 다중은 단순히 많은 수의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대중

(大衆)’과 다르며, 동일한 목적의식의 상대인 ‘민중(民衆)’과도 구
분된다. 다중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특
정한 사안을 동의할 때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번 촛불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의 특성과 가장 유사하다.
어떠한 깃발과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박근혜의 헌정유린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이게, 나라냐?’라고 분노하며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의 모습은 사실 지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에서 시작
되어 2004년 탄핵반대, 2008년 광우병 시위에 이르면서 점점 더

진화되어 갔다 특히 2016년, 광장의 시민들은 스스로 정보를 습득
하고, 공유하고, 분노한 뒤 행동에 나섰다. 그들의 무기는 스마트
폰이었다는 점에서 ‘스마트 시민’이로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대의민주주의 아래 유보됐던 주인의식을 마음껏 표출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고자 했다. 누구도 자신을 대리할
수 없고 대표할 수 없다는 이들의 주인의식은 최근 정치스타트업

‘와글’이 시민대표를 추천받아 ‘온라인 시민의회’를 만들려고 했다
가, 거센 반발에 부딪힌 사건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은 결국 ‘당신이 왜 함부로 나를 대표하려는가’라는 질문으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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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회’를 주저앉혔다. 시민의 대표를 자임했던 시민단체, 스스로
민중의 대표라고 생각했던 민중단체가 깊이 성찰해 볼 대목이다.

자임과 대리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3. 광장의 활성화와 광장의 제도화의 동시 진행



이 촛불은 과연 언제까지 꺼지지 않을 것인가? 물론 즉자적인
분노가 사라지면 촛불의 규모는 줄어들 것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

규모가 줄어든 지난 12월 10일의 집회가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난 2달간의 촛불이 단순히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은 분명하다. 이는 국회의 탄핵 이후 박근혜 정권의 각종 적폐 청

산과 우리사회 개혁과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에
서 확인할 수 있다. 시민들은 이번 촛불항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인

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소위 특정한 패거리 집
단 안에 소속된 이들이 규범과 법, 상식을 무시하고 서로 끌어주
고 봐주며 온갖 특권과 특혜를 누려왔던 것에 대해 분노했다. 시

민은 최소한의 공적 질서와 공공성이 지켜지고 반칙과 특혜가 없
는 공동체를 회복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리고 사적이익보다 공적
이익이 지켜지는 사회,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가 회복되는 사회를

요구하였다. 또한 정경유착에 따른 재벌특혜가 사라지고 모든 사
람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고 있
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준수되기를 갈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촛불 광장은 거대한 민주주의 교육의 장
이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이러한 우리

의 요구는 누가 대신 실현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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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민주주의로
는 국민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기
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광장의 정치가 활
성화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
민이 생업을 접고 개인의 일정을 회생하며 매주 주말 광장에서 촛
불을 드는 것도 꼭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광

장의 제도화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민(民의) 의사가 온전히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다. 직접 민주주의가 보다 활성활 될 수 있는 공간은 아무래도 생
활공간이 자기가 사는 곳일 것이다. 주민자치를 강화하는 지방자
치의 재구성이 필요한 이유이다. 또한 중앙정치에도 직접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여러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 그 방안에 이번 촛
불항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듯 ‘스마트 민주주의’가 반영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와 새로운 체제의 형성에 대한 집단지성이 필요함은 물론이
다. 인간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소위 ‘궁정동 안가’에서 사

망하였지만 체제로서의 박정희는 2016년 11월 광장에서 ‘사망선
고’를 받았다. 우리는 이제 박정희 이후로 가는 첫발을 내딛고 있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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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함께 세우는 대구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이정찬(대구평화의소녀상 건립 범시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대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 범시민추진위원회 결성과 활동



지난 2016년 6월 15일 대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 범시민추진위
원회(상임대표 서일웅 목사, 이하 범추위)가 결성식을 갖고 본격적

인 모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범추위는 결성식에 즈음한 對시민
호소문에서 대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로 밝혔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

을 건립하려는 것은 일본
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
어 성노예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고, 일본의 진정어
린 사과와 올바른 피해 배

상을 촉구하기 위함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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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려는 것은 식민지 어린 소녀와
여성에게 가해진 잔혹한 성폭력 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반

인권적·반인륜적·반역사적 만행을 알림으로써, 다시는 이러한 범행
이 우리 미래세대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려는 것은 식민지 여성에게 자행

된 인권유린과 전쟁범죄의 진실을 밝히고,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
부’ 피해자를 추모하며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역사교육의 장을 만
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것은 굴욕적인 한일 당국자 간
‘위안부’ 합의의 백지화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로써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대구시민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범추위는 또 건립 장소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대구 도심에

세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시민들이 가장 쉽게 다
가가서 볼 수 있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대구에서 가장 번다하고도 시민이 많이 오가는 도심에 세우려 하

고 있습니다. 한편, 몇몇의 독지가가 아닌 다수 시민의 뜻과 실천
으로 세운다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현재 ‘위안부’(위안부의 작
은따옴표는 그 업에 종사하거나 여타 종군 위안부 여성과 구분하

기 위한 사회학적 정의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미 합의된 사항
입니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정의를 실천하는데 있어 올바
른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취지에 누가 크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리
하여 굳이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또 이성적으

로도 이미 충분히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대구시민들이 많이 호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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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셨고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범추위에서는 온·오프
라인을 통한 홍보와 선전, 정기 캠페인, 시민약정운동과 기금마련

을 위한 콘서트, LED 조명을 통한 집집마다 세우는 소녀상, 대학
교수들의 전문가 릴레이 기고 등 각종 모금활동 및 선전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리하여

2016년 12월 15일 현재 약 1,500여 명의 시민들이 적게는 천 원
에서부터 많게는 2백만 원이 넘는 돈을 의연해주셨고 연 내에 건
립비용 모금이 완료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참여하신 분

들은 동판에 하나하나 이름을 새겨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세우고
기록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추위 활동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

히려 힘겨운 시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건립 시기의 변동을 보더
라도 알 수 있는데, 현재 범추위에서는 내년 3월 1일을 건립일로

확정했습니다. 이는 최초 밝힌 건립 목표일인 10월 3일을 훌쩍 넘
긴 것이며, 또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한일당국자 간 합의 1년이 되
는 12월 28일에 건립한다는 소박한 소망도 지나치고 말았죠. 당연

히 이는 모금상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활동 초·중기 기금 조성에
상당히 애로를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약정 금액과 직결됩니
다. 앞서 지적했듯이 애초 건립 취지가 다수 시민의 참여가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범추위는 약정 모금액을 청소년 1000원 이상,
성인은 5000원 이상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몇 십만
원에서부터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내고 있습니다만 몇 만원의 돈이

주를 이루고 있죠. 따라서 타 지역에 비해 참여 인원은 적지 않으
나 전체 모금액수는 적은 상황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또한 순수

민간차원에서 진행되다보니 홍보에서도 적잖은 한계를 노정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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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다음으로 범추위 구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현재 범추
위는 27명의 공동대표와 1명의 감사, 7명의 고문단, 9명의 집행위

원, 그리고 31개의 단체(개인 추진위원 제외)가 참여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31개의 단체는 타 지역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숫자죠.
평화의 소녀상이 이미 세워진 포항과 상주만을 보더라도 80여 개

에 이르는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대구가 대도시라는 것을
감안할 때 턱없이 부족한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간의 내막
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수 시민을 향한 활동

범위에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정황에 비춰볼 때
건립일이 확정되고 모금 목표도 거의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
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참여 시민들의 헌신

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대구 평화의 소녀상 형태와 소녀상에 관한 진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범추위가 세우려는 평화의 소녀
상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서 있는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초기 범추위를 결성할 당시 일부에서 기존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제기가 있었
어요.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판에 박은 것 아니
냐?” “소녀 혹은 여성의 순결성을 강조한다” “민족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한데, 문제 해결에 있어 국제연대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겠다” “보편적 여성 인권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등등

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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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타당하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견도 반영하여
처음에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창작한다는 구상이 있었습니다. ‘입상

(立像)으로 한다’ ‘변발(辮髮)이냐 단발(短髮)이냐’ ‘소녀의 모습 혹
은 할머니의 모습’ 등등...... 그래서 예산에도 반영시켜 목표액을
크게 설정하기도 했고요. 이에 범추위에서는 시민들의 의견과 함

께 지금까지 세워졌거나 계획에 있는 타 지역의 의견도 중시하여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로서 위와 같은 결론을 내게
된 것입니다. 현재까지 기존의 것에서 변형된 소녀상이 세워진 곳

이 있습니다. 거제와 남해, 광주의 경우가 그러하고 가까이는
2015년에 세워진 대구여상과 군위의 것도 입상입니다. 특히 대구
여상에 세워진 것은 입상에다 이용수 할머니를 염두에 두고 조상

(造像)된 것이죠.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처럼 변형된
것도 모두 원작가의 작품을 모델로 한, 그야말로 변형된 것이란

지적입니다. 즉 최초 김서경 · 김운성 작가의 창작세계를 초월하지
는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명칭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의 원래 이름은 “평화비”입니다. 소녀상은 그 평화비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한데, 다만 그 구성 가운데서 크기도 크고 또 그
이미지가 너무 강열한 나머지 “평화의 소녀상”으로 별칭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 다음은 원작가의 창작정신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혀진 내용
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만든 조각

상이다. 2011년 12월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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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때 세워졌다. 전쟁의 아픔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
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이다. 1920~1940년대 조선 소녀들의 일반적인 외모를 가진
단발머리 소녀로 의자 위에 손을 꼭 쥔 채 맨발로 앉아 있다. 단

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새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소녀상
이 있는 바닥에는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를 별도로 새겼다. 소녀상
옆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

피해자를 위한 자리다. 빈 의자에는 관람객이 앉을 수도 있다.”



이 해설은 검색 포털사이트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죠. 범추위
는 건립형태를 논의하면서 다시 여기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지금까지 평화비가 건립되었거나 추진 중에 있는 지역의 일

꾼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힌트도 좀 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처
음에는 몇몇의 지적이 있어 다른 형태를 고민하고 세우기도 했는
데, 오히려 원래의 작가정신과 상징이 훼손되지 않았나 하는 반성

이 된다. 기존의 것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의외의 반
응이 있었죠. 또 중국, 대만, 호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유럽 등
등 역시 건립되었거나 추진 중에 있는 외국에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정대협의 의견도 충분히 고려되었습니다. 다만 미국의 글
렌데일시에서는 “만약 한복을 입고 있는 소녀상이 상징하는 것이

한국인만의 특별한 기억이었다면 미국 땅에 세워질 이유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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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일본군(종군) ‘위안부’가 인류 공통의 인권 범죄이기에 보편성
을 획득하여 글렌데일시에 세울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

죠. 만약 외국에서 그러한 제의가 들어오면 그에 맞게 세우면 되
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모든 걸 양보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우
리가 세우는 데는 크게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일 것입니다. 오히려

호주의 경우, 일본의 종교단체가 현지에서 호주 정치인에 대해 로
비를 진행하며 일부 소요를 일으켰을 뿐 호주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국제연대에 지장을 초래하

다는 지적은 듣지 못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리고 보편
적 여성인권문제는 이미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한편, 작가 김서경과 김운성은 이른바 순결이데올로기에 대해

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소녀상의 외형이 ‘순결이데올로
기’라고 지적하는데 그건 넌센스다. 그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간 이들이 불결해야 하나? 왜 그런 단어를 써서 공격하는지 모르
겠다. ……처음에는 평화비를 만들려고 디자인했다. 그런데 평화비
건립을 일본 정부가 집요하게 반대했다. 우리 땅에 세우는 것조차

반대하다니 화가 났다. 그래서 정대협에 조형물로 가자고 제안했
다.”며 평화의 소녀상 탄생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검토를 거쳐 범추위는 일본대사관 앞의 것

과 같은 형태로 대구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려고 합니다.





대구 평화의 소녀상은 역사 정의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로 가는 길



작년 12월 28일 있었던 ‘위안부’관련 한일 당국자 간 합의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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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우리는 또다시 모욕과 굴욕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피해 할머니
들의 심정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돈 백억에 20만 명

이 넘는 우리 여성들의 인생과 인권을 바꾸려는 그 의도는 파렴치
와 굴욕의 극치에 다름이 아닙니다.
작년 12·28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내용의 졸속성도 문제지만 그

추진배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끌었죠. 국가 간의 중대한 외교적 행
위가, 그것도 피해 당사자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도 어떻게 이토
록 비밀리에 추진될 수 있었던가! 하지만 이 의구심은 미 정부 고

위 관리의 발언과 바로 다음날 있었던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반응
을 통해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작년 2월 27일 미국무부 셔먼 차관
은 한 토론회에서 한일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언급, 실망

스럽다는 말을 한 뒤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는 시건방진 발언을 했죠. 또 합의 바로 다음날
오바마는 박근혜 대통령을 극찬하기도 했고요. 이로써 한일 간의
합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합리적 결론이 성립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합의를 배후조종한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국의 전략, 즉 ‘아시아로 회귀(Pivot to Asia)’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위기와 끝나지 않는 중

동의 전쟁은 미국에게 존망이 걸린 부담이었습니다. 한편 현 세계
의 또 다른 패자 중국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견제의 대상이
되었죠. 따라서 미국은 모든 역량을 쏟음으로써 정치·군사·경제적

인 이익을 동북아에서 극대화시킨다는 전략으로 수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시아로 회귀’ 정책입니다. 당연히 실현방도는 군사

적 압박이며 전략의 핵심은 ‘사드’체계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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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한 부담이 뒤따르게 되는데 바로 재정의 문제입니다. 미국은
‘아시아로 회귀’를 천명했으면서도 동시에 군비를 대폭 감축해야

하는(향후 10년간 안보 예산 1조 달러(약 1천70조 원) 삭감) 처지
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재정문제 해결과 동북아 패권 구축! 이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모두 잡을 것인가?

의외로 답은 간단했는데요, 바로 미일동맹에 기초한 한·미·일 군
사동맹을 강화하면 끝이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작년 4월 27일 뉴
욕에서 미-일 안보협의위원회 (SCC)를 열어 18년 만에 새로운 미

일방위협력지침을 내놓았죠. 핵심은 일본이 미군과 연합작전을 펼
칠 수 있는 지역을 일본 주변에서 세계적 범주로 넓힌다는 것인데
요, 이는 미국의 신전략과 군국주의화를 실현하려는 일본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정치군사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 한일관계가 변수가 되었으며 돌아보면 그 중심에 일본군 ‘위안

부’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한일 양국을 압박하여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한미일 동맹
을 완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일군사협정 체결만 남았는

데, 이미 지난달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에 서명했죠? 결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만 고스란히 희생자로 남게 된 것입니다.
현재 동북아는 한반도의 ‘사드’, 조어도(센카쿠열도),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인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국
언론(CCTV國際)에서는 연일 일본 관련 뉴스를 집중 보도하고 있
으며, 일본에 대해 비난과 함께 각성을 촉구하고 있지요. 양국은

전투기를 서로 띄우면서 긴장은 극도로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 근
저에는 미국의 전략과 시대 역행의 한미일 군사동맹이 자리하고

있어요. 정상적인 한미일 관계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동북아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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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요원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일 합의 백지화와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것과 동시

에 정상적 한일관계에 이은 동북아 평화의 주춧돌이 되는 셈입니
다. 소녀상은 단순한 기림비가 아닌 것이지요. 그야말로 평화와 인
권의 상징이며, 이는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 피해 할머니들의

원한을 푸는 것과 함께 보다 구체적인 정치적 함의가 있습니다.





이용수 선생님의 외침을 기억해주십시오


지난 8월 15일이었습니다. 지역 방송인 TBC에서는 8·15특집으

로 메인 시간대에 이용수 선생님(피해 할머니인 이용수 여사는 구
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의 활

동은 ‘위안부’문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여성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운동가로서 선생
님이라 칭합니다)과의 대담을 내보냈습니다. 현재 대구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앵커의 질문에 이용수 선생님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
습니다.



“원래 이 소녀상은 동경 한복판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사람들
이 매일 보고 반성해야 하는데...... 저는 평화의 소녀상이 우리 대

구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골골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위안부’ 문제)은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

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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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에는 이용수 선생님을 비롯하여 아직 네 분의 피해 여
성이 생존해 계십니다. 전국적으로는 얼마 전 남해의 박숙이 할머

니께서 돌아가셔서 39명이 남은 상황입니다. 대부분이 90 전후의
고령으로 건강이 심각하게 우려됩니다. 특히 아직도 왕성하게 활
동 중인 이용수 선생님의 경우 ‘저러시다 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하고 있지요. 물론 이용수
선생님 본인은 정작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나
는 백 살을 넘어 이백 살까지 살겠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에 일본놈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먼저 가신 할머니들 몫까지 살
겠다.”라며 낙천적이시지요.
아마도 우리가 세우려는 대구 평화의 소녀상은 아무것도 아닐지

도 모릅니다. 그래도 대구 도심에 세워서 선생님과 할머니들께 자
그마한 위안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

해 대구의 사정을 알게 된 타 지역의 사람이 그러더군요.


“우리(인구 50만 정도의 도시)는 하나 세웠는데 인구로 보면 대

구는 최소 다섯 개는 세워야 안될까요? 하하하”


더 이상 늦기 전에 우리가 피해 할머니들의 손을 잡아드리길 간

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구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그날!
우리 모두 평화와 인권, 그리고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 만세삼창이
대구에 울려 퍼지길 학수고대합니다. 부디 이용수 선생님의 부탁

을 잊지 말아 주세요.








66

세계의 변화는 이미 중동에서 시작됐다










하영식(국제분쟁지역 전문기자)



















8월 4일, 모두가 잠든 한 밤중인 자정인 다 된 시각에 필자가
머물고 있는 이스탄불의 한 지역의 주택가 골목, 네 명의 청년들
이 대형 터키 국기를 받쳐 들고 행진하고 그 뒤를 수백 명의 청년
들과 스카프를 쓴 여인들이 소형 터키 국기를 흔들면서 지나가고

있다. 이들의 시끄러운 구호소리에 잠이 달아나 불 꺼진 유리창
뒤에서 이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방안의 불을 켜면 거리

에서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불을 켤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있다. 지나가고 있는 이들은 터키대통령인 에르도안이 소속
된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당원들이다. 이들이 지나가면서 외치는

구호는 터키에 대한 애국과 7월 15일에 일어난 실패한 쿠데타에
대한 성토가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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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터키에서도 아주 드문 현상이다.
7월 15일에 불발로 끝난 군부의 쿠데타 이후 매일 밤마다 이스

탄불 시내 중심가인 ‘탁심광장’에서는 붉은 터키국기를 든 여당인
‘정의개발당’ 당원들이 집회와 시위를 벌여왔다. 쿠데타 이후에 약
1억 개의 터키국기가 제작돼 각 지역에 배분됐다고 터키의 한 변

호사 말하기도 했다. 매일 밤마다 계속되는 집회는 조금씩 지역단
위로 번져왔고 지금은 구 단위로 집회가 벌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일요일인 8월 7일에는 이스탄불의 예니카피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

인 대대적인 집회가 벌어졌다. 집회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비롯
해 정부와 군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해 발언했다. 붉은 색의 터
키국기로 뒤덮인 광장에서 벌어진 집회에서 터키의 지도자들은 쿠

데타를 성토하는 발언을 했고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한 ‘귤렌’과
미국을 비판하는 발언도 했다.

이들이 계속적으로 집회를 벌이고 있는 이유는 먼저 군부의 쿠
데타를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제압했다는 자축의
의미가 있다. 7월 15일 벌어진 군부쿠데타로 인해 270명 이상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군인들의 전진을 막아내면서 에르도안
정권을 지켜냈다. 1960년부터 거의 10년마다 터키의 군부는 쿠데
타를 통해 터키정부를 뒤흔들어왔다. 민간정권을 앞세우고 실세인

군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후정치를 실행해왔다. 하지만 지금까
지 수많은 군사쿠데타가 벌어진 터키에서 민간인들이 나서서 군인
들을 제압한 사례는 처음이다. 휴대전화기가 탱크를 제압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친위시위가 이어지는 다른 이유는 앞으로 더 있을 지도 모를 또

다른 군부쿠데타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다. 공포를 느낀 에르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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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군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계속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지금 밤마다 벌이는 시위는 이것과 매우 유사하다
는 점이다. 이전부터 터키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군부였고 사
실상 군부가 배후에서 정치를 주도해왔다.

세 번째 이유를 든다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정의개발
당’ 당원들의 힘을 최대한 규합해 민간독재의 길을 열겠다는 시도

로도 해석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터키의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
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에르도안의 정
의개발당이 다수인 의회에서 에르도안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 되

는 정국이 탄생한 것이다.
현재 터키 내부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다. 미국과 유럽과의
관계악화까지 감수하면서 터키정부는 초법적인 숙정작업을 실행하

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가 쿠데타의 주역으로 지목하는 인물은 미
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페툴라 귤렌’이다. 귤렌은 1999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래로 그곳에서 거주해왔지만 터키정부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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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관찰대상이 돼왔다. 귤렌은 한 때 에르도안의 정치적 동반자
로서, ‘귤렌의 사람’들이 에르도안 정부에 입각해 권력을 공유한

적도 있었다. 귤렌은 “이타주의와 교육, 부지런한 노동”이라는 구
호를 내걸고 이슬람의 사회참여와 현대화를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개혁적인 이슬람노선은 서방세계의 지지를 받으면서 귤렌은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꼽혀왔다. 귤렌의 이
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교들과 방송과 신문 등 언론기관
들도 세워졌다. 그의 노선에 동조해온 언론들은 에르도안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를 보여 왔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확대되자 불안
해진 에르도안 정부는 2013년부터 귤란의 세력을 권력에서 쳐내
기 시작했다. 터키정부는 7월 15일에 일어난 군부쿠데타의 배후로

귤렌을 지목했고 미국정부에 귤렌의 인도를 요청해왔다. 미국정부
는 증거불충분을 들어 터키정부의 귤렌에 대한 인도요청을 거부하

면서 양 정부 간의 관계는 계속적으로 악화돼왔다.
현재 터키정부는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된 페툴라 귤란과 조금이
라도 관련 있다는 의심만 들면 모두 체포하고 구금하고 해임했다.

6만 명 이상의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 군부 인사들이 해임됐고 1
만5천 명이 체포돼 수감됐다. 귤란과 관련됐다고 의심되는 수많은
학교와 100개 이상의 방송신문사들이 폐쇄됐다. 현재 수감된 3분

의 2이상이 군인들이다.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군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군장성급의 40%에 해당하는 1700명의 장군들이나
제독들이 쿠데타와 관련돼 해임됐다. 또한 360명의 장군들은 구속

된 상태로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7월 20일 터키의회는 에르도간 대통령의 3개월간의 비상사태선

포를 승인했고 터키국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률도 통과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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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유럽연합과 논란이 되고 있는 사형제부활을 추진하는 중
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시행되는 비상사태법의 핵심내용은

30일간 법원의 영장 없이 의심될만한 사람들은 경찰이 구금할 수
있다는 법조항이다. 터키의 법률가들이나 정치인들은 반인권적인
법조항이 정치적 반대파나 야당들, 시민활동가들을 압박하는 수단

으로 사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면서 비상사태법을 비판하고 있다.
이미 에르도안 정부는 실패한 쿠데타를 빌미로 해서 필요 이상
으로 많은 사람들을 솎아내 왔고 공포정치의 기미까지 보이고 있

다. 이 때문에 “쿠데타가 에르도안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적인
시각도 터키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터키정부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굴렌은 매체들과의 인터뷰

에서 “검사들과 판사들이 체포되고 해임되고 있는데 이들이 나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해왔

다.
터키정부는 지금 쿠데타의 배후로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귤렌을
꼽지만 실질적으로 터키의 군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미국

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귤렌이라는 인물
을 터키로 인도하느냐 마느냐로 미국정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
만 실상은 이참에 미국정부의 쿠데타에 대한 반대의지를 확고히

받아내겠다는 의도도 내포돼있다.
터키가 실패한 쿠데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
전히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소문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떠돌았다. 에르도안
정부가 지금까지 실행해온 탈세속화정책과 IS에 대한 의심스런 우

호적인 정책은 쿠데타의 소문을 계속 증폭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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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군부는 지금까지 터키의 건국이념인 ‘케말주의’의 핵심인
세속정권을 지원한다는 빌미로 수차례 쿠데타를 일으켜온 전력이

있다. 반면에 에르도안 정부는 케말의 건국이념에 반하는 세속주
의에 반하는 이슬람주의로 경도된 정책을 펴왔다.
또한 미국과의 갈등은 2003년 이라크전쟁 때부터 보이지 않게

계속 확대돼왔다. 터키는 종교적 극단주의단체인 IS의 격퇴에는
소극적이면서도 IS와 전투를 벌이는 쿠르드무장단체에 대한 공격
에 더 초점을 둬왔다. 이 때문에 터키가 IS를 지원하고 있다는 의

혹이 무성했다. 반면에 미국정부는 IS격퇴를 위해 터키정부가 테
러리스트단체로 낙인찍은 쿠르드민병대를 지원해왔다. 터키는 계
속 미국에 쿠르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IS와의 전투에서 쿠르드민족을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계속 미국과 터키는 표면적으로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틀 안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지만
물밑으로는 계속 충돌해왔고 이번의 쿠데타를 계기로 갈등이 폭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

터키에서 실패한 쿠데타의 후유증은 터키 국내뿐만 아니라 중동
일대,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터키가
서구에 등을 지면서 러시아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점이다. 8월 9

일의 에르도안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전격적인 만남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해 말 러시아 공군기가 터키에 의해 격추
되면서 두 나라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갈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그

리고 중동정책에서도 지금까지 터키는 시리아의 아사드정권의 제
거를 요구해왔고 실제로 아사드에 대항하는 반군들을 조직해 사우

디와 함께 물질적으로 지원해왔다. 반면에 러시아는 시리아반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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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아사드정권을 보호해왔다. IS에 대한 전
쟁에서도 러시아는 적극적인 공격을 해온 반면, 터키는 소극적이

었고 한편에서는 터키가 IS를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
내왔다. 터키의 러시아로의 밀착은 사실상 중동 전체의 정세가 변
화할만한 중대한 이슈이다. 물론 한 번의 방문으로 지금까지 사실

상 적국이었던 러시아와의 관계가 갑자기 우호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침공 이후 계속 갈등을 겪어온 미국과 터

키의 동상이몽의 관계도 이제는 재정립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도
달했다. 미국과 터키관계에서 가장 크게 걸리는 문제가 바로 쿠르
드의 국가수립문제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쿠르드민족을 지원해온

반면 터키는 사력을 다해 쿠르드민족의 세력 확대를 억눌러왔다.
쿠르드민족과 IS의 싸움에서 IS를 응원하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

던 터키는 사실상 쿠르드민족을 적으로 대해왔고 미국에는 계속적
으로 쿠르드민족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미국은 IS에 대한 전투에서 쿠르드민병대를 계속 지원해왔고 앞으

로도 그럴 전망이다.
그럼에도 미국도 중동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터키
라는 대국가를 버릴 수는 없다. 터키도 미국이 없는 앞날을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러시아에만 의존해서는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냉각기를 거치면서 조금 시일이 지나면 미국
과 터키도 다른 차원에서 다시 관계가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터키의 러시아로 향한 변화는 중동일대의 정치지향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터키는 시리아의 아사드정권의

제거를 강력하게 요구해왔지만 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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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의 보호를 받아온 시
리아의 아사드정권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길 것이
다. 아사드정권의 제거보다
는 아사드정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시리아전쟁의 종전
회담이 힘을 받을 것이다.
또한 IS제거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 온 터키가 러
시아로 선회하면서 IS제거
가 보다 신속해질 전망도

보인다. 지금까지 터키가
보여 온 IS에 대한 태도로

인해 터키가 IS를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의 시선을 받아왔다. 터키
가 IS를 지원할 충분한 이유는 바로 쿠르드문제 때문이다. 터키의
사활이 달려있는 쿠르드민족의 국가건설문제가 쿠르드와 싸우고

있는 IS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져왔다는 의혹이다. 터키를 방문한
에르도안이 푸틴에 주문한 가장 큰 이슈가 쿠르드족의 민족국가수
립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동에서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장 중요
한 위치에 있는 터키를 놓칠 수는 없다. 사실상 터키를 통하지 않
고서는 중동에서 헤게모니를 잡기 어려운 실정이기에 미국도 터키

정부와 적당히 타협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터키와 미국의 갈등으로 인해 미국은 현재 터키 내에 건설돼있

는 ‘인쥐릭’ 미공군기지의 이전까지도 검토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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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IS에 대한 폭격을 발진하는 공군기지의 이전문제까지 거론된
다는 건 IS와의 전쟁에서 중대한 전략적 차질이 발생했다는 의미

로 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터키정부가 아사드정권의 제거를 목표로 하면서 시
리아반군들을 지원해왔지만 터키내의 쿠데타를 계기로 지원이 중

단되거나 약화될 수도 있다. 즉 시리아의 아사드정권의 입지가 강
해진다는 의미이며 시리아반군이나 IS의 입지가 축소된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비록 실패한 쿠데타이지만 터키의 쿠데타로 인한 후

유증은 중동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또한 유럽의 처한 난민문제는 터키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여
서 터키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유럽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해 유럽에서 벌어진 난민사태는 유럽연합을 거의 붕괴
상태로 몰고 갔으며 여전히 제대로 된 해결책이 없는 상태로 시간

만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리아인구의 절반이 난민으로 전
락해 주변 국가들인 터키나 요르단, 레바논으로 피난해있고 수백
만 명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유럽을 향해 나서고 있다. 시리아난민

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 하는 통로가 터키인 까닭
에 해법은 더 복잡해진다.
난민들의 유럽 유입을 막기 위해 터키와의 공조정책을 수립해온

유럽연합은 지난 7월 15일에 발생한 에르도안정권의 전복을 노린
군사쿠데타의 실패로 공조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에 있다. 쿠데타
뿐만 아니라 터키가 난민유입을 막는 대가로 제공한 유럽연합의

비자면제도 대부분 유럽국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될 가능성이
없는 실정이다. 사실상 터키의 협력이 없이는 유럽으로의 난민유

입을 막을 길이 없는 유럽으로서는 별 다른 묘안이 없는 실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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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난민유입의 정도에 따라 유럽연합의 기본적인 정책 자
체가 변화될 수밖에 없다. 국경 통제가 전면적으로 재개될 가능성

과 함께 “브렉시트”로 금이 간 유럽연합이 동유럽국가들과의 난민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서서히 붕괴될 조짐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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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학문의 이상을 피교육자의 현실과 결합해야 | 김사열
헌신과 순결,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 배창환
최초의 희곡집 소암 전집 펴낸 국어학자 김동소 | 김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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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이상을 피교육자의 현실과 결합해야

-김사열 경북대 총장 당선자 대담



























김용락 -마침 비가 많이 옵니다. 이 우중에서도 대학생인지, 대학

원생인지 연구자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이 인
상적인데요, 총장 당선자님 근황은 어떠신지요?



김사열 -이번 가뭄이 아주 길어서 농사짓는 이들이 무척 힘들었지
요. 가뭄은 결국 장마의 시작으로 끝이 나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번 주 초반에 비가 조금 내렸지요.
대학은 학기말이라서 강의가 종료되었지만, 성적 처리와 학술대
회 참석, 다음 학기 강의 준비 등으로 조금 다르게 바쁜 시기입니

다. 원래 교수에게 학기당 9학점 시수인데 이번 학기엔 11학점을
강의하였고, 다음 2015년 후학기에는 16학점을 강의할 예정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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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준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별도로, 경북대학교 총장임용과 관련되어 재판이나 언론 인터뷰

등으로도 시간을 씁니다.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서 나름대로 헤쳐가고 있지요.



김용락 -지방 국립 거점 대학이자 명문대인 경북대 총장에 당선되
셨는데 교육부 인준을 못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요? 경
북대 학생이나 동문뿐 아니라 많은 지역민들이 걱정하고 있습니

다. 그 과정, 부당한 측면에 대해 답해주십시오.


김사열 -작년 2014년 10월 중순에 총장선거가 있었고, 그때 7명

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제가 1순위 후보자로 선출되었습니다. 교내
에서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 대학본부로부터 교육

부에 상위 2인에 대한 후보 추천이 이루어졌지만, 12월 16일 교육
부로부터 거부 통보가 공문의 형태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아무런 이유 제시 없이, ‘귀 대학에서 추천한 총장 임용후보자를
임명제청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라는 통보를 전해 들었어요. 이
어서 대학본부와 교수회에서 이유를 제시하기를 요구하였는데, 비

공개 대상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지요.
2014년 12월 30일에 저도 당사자로서 정보공개요청을 하였는
데, 2015년 1월 9일에 ‘현재 총장임용제청 거부 사유 미고지와 관

련한 절차에 대하여 다투고 있는 행정소송이 진행 중으로, 귀하가
요청하신 임용제청 거부 사유는 당해 쟁송결과와 연계하여 통보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




80

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적절한 이유 제시 없이 임용제청을 하지 않은 것은 부당

하죠. 헌법을 포함한 법을 지키지 않아서 불법이기도 합니다. 국립
대총장 선거에서 투표 결과가 중요하고 임명과정은 오히려 부차적
일 수 있는데, 교육부가 지나치게 여기에 개입하여 대학 자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김용락 -인준을 안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사열 -글쎄요. 모른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맞겠지요. 실제로 교
육부에서 보내 온 공문 상에 임용제청 거부에 대한 합당한 이유는

없었죠. 옛 속담에 ‘벙어리가 서방질을 해도 제 속이 있다’고 했는
데, 밝히지 못한 이유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개해도 타당하지

못하다면 결국 이유는 없는 셈이죠.


김용락 -교육부의 답변 태도나 내용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군요.

벌써 오래 전부터 항간에서는 교육부가 없어져야 한국 교육이 바
로 선다는 말이 많이 떠돌고 있는데, 이건 대학 교육뿐 아니라 중
등교육에서도 교육부의 정책이나 태도 등에 문제가 많다는 의미로

통용되었거든요.
이번 답변 행태를 보면 교육부의 태도가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지난번 치열했던 총장 선거과정, 두 번이나 하게 된 과정을 조금

소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김사열 -2014년 6월 26일에 8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1차 선거가




81

있었고, 10월 17일에 그 중 1명을 뺀 7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2차
선거가 있었습니다. 원래 선거는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1차

선거과정에 학내 총장후보추천위원회 위원 배정에 공대측 교수를
1명 더 넣은 것이 빌미가 되어, 재선거에 대하여 논란을 거듭하다
가 10월에 두 번째 선거를 하게 되었지요.

재선거가 부당하다고 여겨 2번째 선거에서 저는 마지막까지 불
출마를 고려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해당 선거
자체가 불법이 되어 문제가 된다고 하여 결국 출마했습니다. 1차

선거에 이어서 다행스럽게도 2차 선거에서도 제가 더 큰 표 차이
로 1순위 후보자로 선출되었습니다.



김용락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그러면 김 총장 당선자께서는 총
장이 되고자 한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그리고 총장 선거 때

지역사회와 협력을 주장하셨는데 그 점도 좀 말씀해주십시오.


김사열: 굳이 이유라면, 경북대학교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라

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수월성 있는 연구자를 포함한 사유하
는 지성인의 양성을 통하여, ‘지역과 상생하는 대학(Community
University)’, ‘내실있는 국제화 대학(Global University)’, ‘경계를 넘는

대학(Nomad University)’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선거 기간 동안, 경북대학교가 “지역성장동력이 되겠습니다!”라
는 제 나름의 주장을 폈지요. 경북대학교가 예전보다 못해진 것은

지역경제가 쇠락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역경제의 낙후는 좋은 일자리가 적어지고 청년에게 제공하는 일

자리가 충분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우수학생이 지역대학을 기피하




82

게 된 것과 큰 연관이 있죠. 경북대 내부의 효율적 과정만으론 부
족한 것이죠.

그래서 경북대학교는 ‘지역공동체를 위한 대학(Community+Univer
sity=Communiversity)’이 되어야 큰 흐름의 대학 발전도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 동안 경북대학교의 지역발전에 대한 책임의식이

미비했던 것을 반성하고, 지역 지자체와 시민사회와 상생하는 교
육, 연구, 봉사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지역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으
고 실천에 돌입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대구캠퍼스 주변의 <5대문 테마 프로젝트> 같은 것
이나, 다른 캠퍼스나 관련 시설이 있는 현풍을 포함한 대구 여러
곳, 상주, 군위, 청송, 구룡포 등지에 대한 단계적인 발전 방안을

연관 지자체들과 함께 마련하여 추진하려고 합니다. 지자체와 대
학 간 <상생 메커니즘> 가동, 바로 대구, 경북은 경북대학교와 함

께 성장하여야 할 협력파트너이며, 가족으로 보는 셈이죠. 경북대
학교에는 우수한 인력이 많아서 힘을 모아 집중하면 많은 성과가
이어지리라 봅니다.



김용락 -재선거를 종용하는 교육부의 요구에 대한 대학의 대처는
어떠한지요? 총장 인준을 위한 지역시민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말

씀해주십시오.


김사열 -대학본부와 교수회에서도 임용제청을 거부한 사유를 제시

해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지만 이유 없이 재선거를 하라고 압박
했죠. 초기부터 2014년 총학생회(회장 김민지)는 적극적으로 대응

하여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허필윤)를 꾸려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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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동문, 학부모 등과 함께 <1인 시위>를 전개해 왔습니다. 3월에
2015년 총학생회(회장 지홍구)가 결성되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

해 오고 있습니다(비상대책위원장 박진원).
2015년 4월 27일에는 '대학 자율성 수호를 위한 경북대 교수모
임(이형철 교수 포함 9인 공동대표)'과 ‘경북대 비정규교수노조(위

원장 정보선 박사)’, ‘경북대 총장사태 해결을 위한 학생공동대책
위원회(위원장 박진원)’, ‘경북대 총장임명을 촉구하는 동문모임(대
표 함종호)’, 지역 시민단체 등은 경북대 총장 공백 사태 해결을

위한 연석회의를 열어서, 급기야 「경북대학교 총장임용을 촉구하
는 범비상대책위원회(이하 범비대위)」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습니
다. 5월 6일에는 범비대위(공동대표: 윤재석, 함종호, 지홍구)에서

<경북대학교 총장임용을 촉구하는 1만인 서명운동 선언문> 발표
및 선포식이 있었죠.

개교기념일인 5월 28일에는 범비대위 주관으로 <경북대 총장임
용을 촉구하는 교육부, 국회 나들이> 행사를 실시하였습니다(4대
의 ‘경GO버스’에 160여명 분승하여 참가). 오전에는 세종시의 교

육부를 방문하여 교육부장관 면담 시도와 「경북대총장 임용을 촉
구합니다!」 서명 용지(13,166명)를 전달하였습니다. 교육부 앞에서
총학생회 박진원 부학생회장의 사회로 가두집회가 있었는데, 경북

대 학생 대표자들(정지용, 박상연, 권도훈) 발언 후 타대 총학생회
장(부산대, 전남대, 공주대, 방송대 등)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고 언
론을 통해 들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 연 후, 오후 4시부터
경북대학교 범비대위 주최로「경북대학교 총장부재사태 해결을 위

한 토론회」를 열었지요(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제3간담회실). 토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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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지홍구, 김규종, 윤재석, 김서중, 임재홍 등, 발언 국회의원으
로는 신성범, 유은혜, 강은희, 류성걸 등이 나섰지요. 이어서 교육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설훈 위원장에게 13,166명의 서명지 전달식이
있었습니다.



김용락 -나름 대책위 활동이 활발히 진행됐군요. 혹시 전국적 연
대활동이 있는지요?



김사열 -조직적인 연대 활동으로는, 2015년 2월 27일에는 공주대,
방통대, 경북대 총장임용문제 해결을 위한 「국립대총장임용정상화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공대위가 중

심이 되어 2차례의 뉴스레터를 출간하고 여러 차례 여야 정치인을
만나는 공개적 연대활동이 전개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와는 별도

로 각 대학 1순위자가 교육부장관을 상대로 하는 행정재판을 진행
중에 있기도 합니다.
최근 6월 20일에는 서울대에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이 모여 <벼랑 끝의 대학: 대학 자율성을 위한 싸움>
을 주제로 긴급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용락 -김 당선자의 교육관(교육철학)은 무엇입니까?


김사열 -글쎄요, 교육철학이라 다소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평

소에 당면한 문제들에 대하여 현실적 요인들을 고려하여 이상적
목표와 연결시켜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전자는 생

명과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로서, 후자는 생활문화 속에서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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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천으로서 결합되는 셈이지요. 제가 쓴 에세이 책제목이 공존과
대안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피교육자와 교육자가 함께 생명
을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 및 공존함으로써 평화로
운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대학과정을 거

치면서 먼저 피교육자 개인에게는 민주시민으로서 세상을 살아가
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수월성을 제고하고 상식과 기본을 제공하
는 것입니다. 나아가, 피교육자가 당대의 사회적 리더로서 선택한

분야의 전문지식을 쌓아 그 전문성으로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 목표라 할 수 있겠지요.



김용락 -제가 듣기로는 자연과학자이신데도 인문학적 소양이 굉장
하고, 또 저서도 많이 내고 논문도 많이 발표하신 것으로 알고 있

는데요?


김사열 -무슨 말씀을, 그것은 너무 과장된 소문이네요. 솔직히 말

씀드리자면, 교수로서 평균치에도 미달할 정도라고 봅니다.
책 쓰기를 좋아하여 22권을 냈습니다. 이공계 교수로서는 조금
많은 편이지요. 그렇지만 대부분 공저이고, 제대로 된 단독저서는

몇 권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30권까지 출간할 꿈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구체적으로 시사생명과학에 대한 토픽을 두루 다루고 싶
습니다.

논문은 82편을 썼는데, 글쎄요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지요.
2000년 경북대학교로 와서 60여 편을 썼으니 한 해 평균 4편 정

도 쓴 셈이네요. 굳이 탁월한 논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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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Nature) 잡지에 실린 고초균(Bacillus subtilis 168)의 유전체에
관한 국제공동연구 결과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학에 와서는‘미생물과 타 생물 간 상호작용’ 중에서도 「미생물
과 식물 간 상호작용」에 집중하였고, 식물면역에 대한 기본 연구
에 조금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까, 글쎄요 제가 저를 평가하기는

곤란하네요. 어쨌든 최근 그 분야에서 저희 연구실팀이 낸 논문들
이 조회수나 인용지수가 국제적으로 조금 높은 정도입니다. 그 분
야에 대하여 독일의‘스프링게르(Springer)’라는 출판사에서 요청을

받아 북 쳅터 리뷰를 한 편 쓰기도 했습니다.
융합적 연구로는, 탄산칼슘으로 된 돌을 생성하는 세균을 찾아
건축공학적 기본과 응용을 다뤄본 것입니다. 미생물이 만드는 돌

로 건축공학적 적용을 하는 것은 아직은 초보 수준이지만, 아주
흥미로운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김용락 -저는 문외한입니다만, 역시 공부도 많이 하셨네요. ‘네이
처’ 같은 잡지는 세계적인 잡지인데 거기에 논문도 발표하시고, 논

문 편수도 어마어마하네요. 보기 좋습니다.
현재 그 논란의 와중에 있는 셈인데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사열 -우와, 제가 대답하기에 너무 큰 문제로 보입니다. 글쎄
요,‘한국 대학교육의 문제점’이라, 물론 대학 내에도 있고 외부에

도 문제점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대학 내 문제점은, 대학이 ‘학문의 전당’에서 ‘취업준비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점 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학문의 이상을 피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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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현실과 결합하는 교육과정의 현실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새로
운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지요.

대학 외 문제점으로는, 교육부의 대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
는 지적에 저도 동의합니다. 예산을 공급하는 주무부서로서 교육
부는 대학에 대한 견제와 간섭이 어느 정도는 용인되어야 하겠지

요. 그렇지만 최근 대학 총장임용문제와 관련하여 대학의 자율성
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대학 거버
넌스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간섭은 대학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지적 공동체임을 잊은 처사로 봅니다.
입학 학생 수 감소에 따른 대학구조조정 문제의 경우도 그렇습
니다. 가만히 두면 자연스레 정리될 것인데, 너무 무리하게 대학

측을 압박하고 있어요. 20여 년 전 교육부에서 전문대를 대학으로
인가하고, 학과와 학부를 증설할 때에 대학 측에서는 머지않아 인

구감소가 있을 것인데 어쩌려고 저러나 했지요. 현재 상황을 만든
책임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학이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으로 밀
어붙이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겠지요.

대학은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각도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
고, 자치적인 예산 확보 노력도 필요할 것입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일 수 있지요. 한 예를 들자면, 대학생 숫자의 감소를 오히려

대학교육의 질적 도약의 계기로 삼으면 될 것으로 저는 봅니다.


김용락 -지역에서 대구민예총 대표, 시민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등 사회활동을 열심히 해오셨는데요, 말하자면 실천하는 지성이신
데요, 대구지역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대구지역의 비

전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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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열 –글쎄요, ‘대구지역사회의 문제점’이라, 참 어려운 질문입
니다. 대구는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고, 그래서 지역단위에서도 민

주주의 체제의 정치가 이뤄지고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가 꾸려지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구체적으로 대의민주주의가 효율적으로 이
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세력의 다원화가 기본입니다. 많은 전문가

들이 지적하듯이, 그런 점이 취약하다고 할 수 있지요.
정치세력이 한쪽으로만 몰리니, 중도에 서서 비판적 역할을 감
당해야 할 시민사회의 영역이 버틸 수가 없을 정도여서 시민운동

세력 자체가 무척 빈한한 것이 현실이지요. 너무 약하여 힘내기가
힘들어서 문제점 지적 수준에 머물고 있지요. 대안의 제시와 시대
에 맞는 대책 마련에 나서기에는 한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어려운 환경에도 꿋꿋이 활동하는 분들이 있어서 시민들은 감화를
받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대구에도 동구에 혁신도시가 구축되고 있고, 첨단의료복합단지
나 경북도청 후적지 벤처타운, 달성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등에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가 속속 마련될 예정이어서 도시 인구 고령

화에 따른 문제점들을 차츰 극복해 갈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대학
을 졸업한 청년들이 갈 일자리가 지역에 많아지면 앞서 지적한 대
구지역사회의 문제점도 덩달아 해결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긴 어

둠은 결국 제대로 된 빛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김용락 -고향이 경북 의성 안계라고 알고 있는데 유년시절 성장과

정이나 가족관계 등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특별히 초중등학교
때 천재였는지? 뭐에 두각을 드러냈는지? 등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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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열 –예, 고향은 ‘의성군 안계면 토매동’이라는 곳입니다. 거기
서 안계초등학교를 졸업했지요. 중학 시절부터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과거를 소상히 기억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특
별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어쩌지요. 가끔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제가 다

니던 안계초교가 한 학년이 400여명쯤 되었는데, 졸업식 때 학업
1등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5학년 때 선거로 전교 부회장에 당선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는 체구가 작았는데, 공부를 좀 하는 평

범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대구로 와서 대구중학교와 계성고등학교를 거쳤는데, 굳이 찾으
라면 그림을 잘 그리고 글짓기를 잘 하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미

술대회나 글짓기대회에 나가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
다. 부모님 반대로 미술반 활동은 접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학에

심취하여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하이 와이(Hi-Y)’ 활동을 하기
도 했어요.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김용락 -경북대 재학시절에 탈춤반을 하시고, 80년대 초에는 탈춤
관련 책도 펴냈지요. 그리고 탈춤 등 연희에 관한 이론작업도 한
걸로 기억하는데 다 까닭이 있었군요. 시골 수재에서 국립대 총장

이 되셨는데, 제 때 인준이 돼서 학교를 잘 이끌어가고 발전시켰
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쉽고, 교육부의 비민주적인 처사가 새
삼 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경북대학교가 총장 부재 사태를 맞아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것으로 예측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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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열 -그렇지요. 총장부재라는 초유의 사태가 이 대학이 위기에
처한 것을 말해 줍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위기는 기회일 수 있습

니다.‘대학의 자율성’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대학에서 사회 정의적
이론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을 통하여 직접 확보하는
경험은 경북대학교 학생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고 저

는 봅니다.
사태가 일어난 초기에 교수나 교직원들이 멈칫거리고 있을 때,
학생들은 이미 비상대책위를 꾸려 활동했고, 범비대위의 일원으로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제 가슴이 뿌듯합니다. 청
년이 살아있는 대학과 지역, 나라는 미래가 밝다고 저는 보기 때
문입니다. 이미 경북대학교는 대학 자율성 수호 분야에서 특별히

긍정적 역할을 하는 대학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학구성원들이 진짜 주인이 되는 대학, 특별히 학생이

제대로 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도 큰 꿈을 꾸고 그것을
현실화해 나가도록 애쓸 것입니다.



김용락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예정인지요? 적게는 총장 선임문
제, 크게는 개인의 실존적 미래에 대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김사열 -경북대학교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 역
할을 감당하면서, 총장임용 제청이 되어 총장 임명이 되도록 하는
데 큰 힘을 쏟을 것입니다. 틈이 나면, 총장 임명이 된 후 대학을

어떻게 구성원들과 힘을 합하여 꾸려나갈 것인가 고민하려고 합니
다. 대학 내외 사람들과 만나 지역 발전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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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총장 임기를 마치면 평교수로 돌아 와 자리를 지키면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교육과 연구, 봉사가 저의 본령

이지요. 대학의 청년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면, 제 마음도 푸르
게 쑥쑥 자라는 듯합니다.



김용락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총장 임용사태가 잘 마무리 되어
훌륭한 총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길 빌겠습니다.
(때 : 2015. 6. 30. 오후 4시, 장소 : 경북대 김사열 교수 연구실)





∎2015년 6월 이후의 상황(2016. 2. 26 전화와 전자메일 인터뷰 내용)
▶[2015년 8월 17일] 직선제 포함 대학자치 요구하는 유서 남긴 채 부산대
고현철 교수 투신.
▶[2015년 8월 20일] 경북대 김사열 교수의 행정소송 1심 최종선고가 서울
행정법원(재판장: 박연욱, 판사: 민병국, 박혜영)에서 승소로 판결함(변호사:
장윤기, 이담, 장미영).
▶[2015년 9월 8일] 교육부장관이 경북대 김사열 교수의 경북대총장임용제청
관련 <2015구합51712> 사건에 대하여 서울행정법원에서 2015년 8월 20일
선고한 판결정본을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함.
▶[2015년 6월 20일]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서울대
SPC동 201호에 모여 <벼랑 끝의 대학: 대학 자율성을 위한 싸움>을 주제로
긴급 토론회 개최.
▶[2015년 8월 20일] 오후 5:30 경북대범비대위 주관으로 동대구역에서 기자
회견.
▶[2015년 8월 16일] 오후 2~5시,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위기의
대학자치, 문제와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의 긴급토론회 열렸음(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실, 국립대학총장임용정상화공동대책
위원회, 부산대학교 교수회 공동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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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 <전국교수대회> 개최.
▶[2015년 11월 5일] 경북대 교수회 주최로 10월 29일 임시평의회 결의 사
항에 대한 교수들의 의견을 묻는 부재자투표 개시. 본 투표는 11월 10일.
▶[2015년 11월 11일] 11월 4일 경북대 임종진 교수 외 19명(채권자)이 경북
대학교 교수회(채무자)를 대상으로 대구지법에 낸 <교수 총투표 실시금지 가
처분>에 대하여 채권자의 주요 주문 내용이 수용되어 가처분 처리됨 → 11월
10일의 투표함의 봉인되어 대구북구선거관리위원회에 보관되고, 개표나 관련
결과 공표 행위가 금지됨.
▶[2015년 12월 10일] 경북대학교 교수회 제21대 의장 선거에 4명이 후보자
로 출마하여 투표를 통하여 「자율성교수모임」 대표로 활동해 온 윤재석 후보
자가 차기 의장으로 당선됨.
▶「국립대 직간선제 갈등, 4곳 중 1곳 총장 공백」(천인성 기자, 중앙일보
2016년 1월 28일); 정부 임명거부로 소송 진행(경북대, 공주대, 방송대), 대학
후보추천 후 정부 임명 보류(강릉원주대, 부산대, 전주교대, 진주교대), 총장
선출방식 갈등(강원대, 경상대, 충남대, 해양대).
▶[2016년 2월 4일] 경북대 김사열 교수의 <임용제청거부처분취소>에 대한
선고심이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릴 예정(오후 14:00)이었으나 법원 정기인
사조처로 연기 됨.






“정권은 짧고 정의의 역사는 길다”

-대학 자율의 침해과정


한국에는 2016년 현재 210개 정도의 4년제 대학이 있습니다.
그 중 국립대는 42개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적은 비율의 국립대에
대한 자율성 훼손의 수준이 최근에는 한계점을 넘어섰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에는 대학을 줄세우기 하려는 교육부의 일
관된 흐름이 작동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



93

국의 국립대는
자율성 확보라

는 관점에서
큰 위기에 봉
착한 셈입니

다. 대학의 지
배구조 체제와
연봉제 변경

등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국립대의 가버넌스 체제

먼저 대학의 가버넌스 문제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교육부
는 대학 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총장이나 학장에 대하여 가능

하다면 쉽게 간섭하고 길들이기 함으로써, 자신 부서의 일방적인
정책과 이해관계를 일관되게 관철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육부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가버넌스 체제 선택을

대학에게 강요해 왔는데, 근년에는 그것에 재정지원사업까지 연계
시켜 대학 측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해방 이후 대체로 설립되기 시작한 국립대는 총장

선출이나 임명 과정이 1989년까지 무려 40년 동안 관선임명제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소위 ‘관선임명제’는 대통령이 마음대로 대학
총장을 임명하는 방식입니다. 정치권력에 줄 댄 인사들이 오랫동

안 대학의 운영을 맡아 온 것입니다. 그들은 대학구성원들과 의견
을 소통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보다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정

부의 정책을 수용하기에 급급했습니다.




94

그러한 관선임명제의 부정적 측면을 오랫동안 경험한 대학에서
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총장과 학장 직선제 선출 방식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직선제’는 1990년부터 2012년까지
20년 이상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과다한 사전선거운동이나 외부인
사 개방 문제, 구성원들의 투표참여 비율 부적정성 등에 대하여

적지 않은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선제’는 꾸준한 개혁을 통하여 스스로 진화·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부정적 여론에 떠밀려 ‘간선제’라는 투표 방식에 자

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교육부가 비민주주의적 성
향을 가진 박근혜 정권의 특성을 활용하여 유도한 결과이기도 했
습니다. 직선제이든 간선제이든 투표가 매개되어 최종 후보자가

결정되는 민주주의적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정치
권력의 입맛대로 임명권이 행사됨으로써 ‘간선제’는 거의 ‘관선임

명제’ 수준으로 전락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2013년에 간선제를 적용하기 시작한 이래 불과 3년 만에 정부
와 정권은 2가지 방식으로 그런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는, 이유 제시 없이 교육부장관이 총장임명제청을 하지 않았
습니다. 그것은 한국체육대, 공주대, 경북대, 방송대, 전주교대, 광
주교대 등 6개 대학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불법이어서 관련

소송에서 교육부 측은 대부분 패소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분
명한 이유 제시 없이 대통령이 2순위자를 총장으로 임명한 것입니
다. 그것은 순천대, 경상대, 충남대, 한국해양대, 경북대 등 5개

대학에서 일어났습니다. 비정상적 처리는 무려 11개 대학에서 일
어났고, 경북대의 경우는 2가지 방식이 모두 적용된 최악의 상황

이 연출되었습니다.




95

최근 20년간의 국립대 현실
직선제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하게 되면서 대학에 큰 변화가 일

어났습니다. 정부나 정권이 특정한 정책을 강요해도 만약 대학구
성원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 따르지 않는 자율적 분위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대학은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를 반기고 넓혀가려 했지

만, 관료나 정치인들은 권력에 대한 도전의 분위기로 읽고서 대책
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시도 중에는 극단적인 신자유
1)
주의 정책 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하 1987년, 교육개혁심의회에서는 국립대학의 특수
법인화(일종의 국립대 민영화)를 권장했습니다. 문민정부(1995)에
서는 대학설립자유화정책을 펴서, 국립대를 법인화하고 사립대를

상업화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특히 국립대에게는 선택적 특수법인
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참여정부(2005)에서는 운영체계를 변경

하는 법인화 정책을 다시 꺼내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7년에 국
립대법인화법 입법을 예고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인천대와 울산과
기대가 국립대 법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2)
이명박 정부에서는 2단계의 「국립대선진화 방안」 을 법제화를
통하여 강제하여 대학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1단계(2010)에서는
국립대 법인화, 성과급적 연봉제 도입 예고, 학장 직선제 폐지, 국

립대 통폐합 등의 정책을 강요했습니다. 실제로, 2010년 12월 8일
에는 「국립서울대 법인화법」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기도 했
습니다. 2단계(2012)에서는 총장직선제를 강제로 폐지하도록, 소위

‘임의추출 총장추천위원회 선출 방식’(간선제)을 예산 지원 정책과


1) 「국립대학법」 제정의 필요성과 주요 내용(임재홍, 국교련 정책위원장, 2016.7.).
2) 국립대법인화에 대한 대학 측 전면적 반대에 부딪쳐 내게 된 교육부의 일종의 편법
적 우회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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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시켜 강요했습니다. 거기에다 교원업적 평가체제 선진화와 기
성회회계 제도 개선, 구조개혁 등이 함께 다루어졌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2단계 「국립대선진화 방안」을 도입하여
3)
법제화를 포함한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한다면 , 박근혜 정부는 그
정책을 실제로 적용하여 대학을 공포 분위기로 몰고 왔습니다. 구

체적으로 2013년에 총장 간선제 선출방식이 최초로 대학에 도입
되었고, 2016년에는 성과급적 연봉제 시행이 이루어졌습니다. 더
구나, 대학구조개혁법 제정이 예정되어 있고, 국립대의 자발적 법

인화 지원 정책의 강행이 예고되어 있어서 대학 측의 염려가 이만
저만이 아닌 셈입니다.
이렇듯, 정권의 성격이 어떠하든 교육부의 대학에 대한 정책은

큰 틀에서 변함이 없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인들
의 고등교육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교육 관

료들의 집요함과 대학구성원들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
니다.



대학에 어떤 폐해가?
제법 긴 세월 동안 교육부가 집요하게 추구하여 그러한 정책을
대학에 강요함으로써 어떤 폐해가 발생하였을까요? 실제적 적용

은 최근인 박근혜 정부 기간에 집중되어 시작되었으나, 그 피해는
장기적으로 이어질 전망입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
도이나, 우선 2가지 폐해가 크게 눈에 띕니다.

하나는, 대학의 지배구조 체제가 흔들려서 대학자율성의 심각한


3) 「국립대학 회계 및 재정운영에 관한 법」은 공론화 되어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다른 가버넌스 관련 규정이나 성과급적 연봉제는 국회를 거치지 않고 단순히 국무
회의를 거쳐 「대통령 시행령」이라는 형식의 법제화를 통하여 대학을 유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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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이 일어난 것입니다. 총장 간선제 선출 방식이 적용되면서 대
학 외부인 정부나 정권 측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져서 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육부장관에 의한 총장임용제청 거부
사태와 대통령에 의한 이유 제시 없는 2순위자 임명이라는 불합리
한 임명권 행사 사태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불과 3년여 기간

동안 무려 11개 대학에서 그러한 사태가 실제로 발생했습니다.
해당 대학들은 대학구성원들이 의기소침하게 되어서 활동이 위
축되었습니다. 장기적인 대학 정책을 세워 열정을 쏟아 일하기가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졸업장에 ‘총장직무대리’
의 직인이 찍히게 되었다고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수와 직원에 대하여 성과급적 연봉제가 시작되

어 비교육적이고 비인간적인 대학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
다. 이른바 ‘상호약탈적 경쟁’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

한 문화가 파생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에 대한 평가가 공
정성 때문에 과다하게 연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봉사나
강의와 같은 교육 분야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

로 우려스러운 것은, 동료교수를 경쟁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신임
교수 임용 시에 부적절한 결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대학의 교육이 조화를 잃어버려서 미래 세대

인재 양성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문제 해결 가능할까?

대학에 발생한 문제들은 선진화 정책이라는 이름을 업고 이미
적용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아서 풀기가 쉽질 않습니다. 큰 틀

중 하나로는, 서구의 선진국처럼 <국가교육위원회제도>를 도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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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써 교육부를 해체하자는 방안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정부의
주무기관이 과다한 역할을 하여 교육 현장에 오히려 혼란을 가중

하고 있으므로 교육의 큰 흐름은 <국가교육위원회>가 맡고 나머지
역할은 교육지자체에 분산하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육 현장
에 자율성을 크게 부여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큰 틀 하나는, 1953년 제정하여 그간 운용되어 온 「국립학
교 설치령」이 교육 현장에서 한계에 달하였으므로 폐기하고, 고등
교육을 위해서는 소위 「국립대학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시대에 맞

게 하자는 방안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동시대와 국제적 수준
에 부합하는 법안을 합의하여 만들고 국회에서 법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발전된 상위 법안을

통하여 현재 기존의 법안과 충돌하는 소위 ‘무순위 추천’과 같은
4)
위헌적 시행령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대학의 가버넌스 문제에 대한 해결에는 2가지 접근이 동시에 필
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는, 총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여러 가지 방식
으로 분산하거나 혹은 견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총장의 권한이

과다한 현실 때문에 대학 내 간섭을 하려는 측은 총장을 정점으로
한 가버넌스 체계에 손을 대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권한을 나누어야 합니다. 관선임명제 시대에 구축된 총장의 막강

한 권한 행사가 민주화된 대학 문화나 자율적인 환경에 들어맞기
가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실제로, 교수회나 대학평의회
에 상당한 권한을 분산하고, 학과나 학부, 단과대학 수준에서 교수


4) 교육부는 2015년 11월에 「교육공무원임용령」을 변경하여 ‘무순위 추천’이라는 방침
을 대학에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와 대학 자율
성(31조 4항)의 정신을 훼손하고, 기존 적용해 온 1순위자 후보 추천 방식(「교육공
무원법」)이나 ‘행정처분을 할 때엔 당사자에게 근거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행정절차법」(제23조)과 모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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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의 중요 결정 체제에 학생의 참여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을 것
입니다.

다른 하나는, 투표 참여자를 확대하기 위하여 직선제로 돌아가
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민주주의
가 더욱 강화되고 한층 진화된 형태의 직선제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제시하자면, 후보자를 초청하거나 압축하는 단계에서
대학평의회나 학내외 총추위원들이 관여하더라도, 최종 투표 단계
에는 교수, 직원, 학생 등을 포함한 대학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1

인 1표씩 행사하는 것입니다. 경북대의 경우, 최종 투표에 4만여
명이 참가하게 되니, 이 결과를 정치권에서 임명권한을 내세워 함
부로 손댈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성과급적 연봉제와 관련해서는 현재의 상호약탈적 성과급 연봉
제는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약 경쟁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공론화 될 경우에도 과다하지 않도록 부분적으
로 결합해야 합니다. 연구와 같은 특정 분야에 평가 점수가 치우
치지 않도록 연구, 강의, 봉사의 요소들이 공평하게 다뤄지도록 세

심하게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과의 평가를 정할 때, 현재
의 개인 평가 위주에서 개인 평가 요소와 전국 단위 소속 집단 평
가 요소를 결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 자율성 훼손과 회복
지난 20년 간 정부와 정권에 의하여 꾸준하게 자율성이 훼손되

어 온 대학은 그것을 외부의 환경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스
스로에게도 어느 정도 문제점이 있음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결과를 토대로 스스로 자정하고 혁신하여 바람직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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