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냥 당당한 문학인으로 서는 것이고, 거기에 발맞추어 문학단
체나 문예지가 지역의 좋은 문학인들을 발굴하여 시집을 내거나
작품을 발표하게 하고 평가를 통해 전국 무대에 소개하는 일을 게
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작가회의나 유수한 문예지들
은 그 일에 큰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해요. 그게 곧 존재이유이니
까요.
지역 문학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발표의 ‘기회’도 문제지만, ‘긴
장’문제도 큰 문제에요. 아무래도 지역은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 둔
감하기 쉽고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긴장’과 ‘채찍’을 받을 ‘기회’
역시 적기 때문에 여차하면 낙후되기 십상이지요. 그 점이 사실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애쓰고, 공부하고, 많이 움직여서 자신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어
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그렇지 못하면 소박한 온정주의에
머물고 자기를 높여가는 일보다는 작가 시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
으로 만족하고 안주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동인 활동 같은 작은 동아리 단위로 서로 배우고
채찍을 가하고 손 이끌어 함께 가려는 노력이 절실하지요. 그리고
작가회의 같은 조직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배우고... 특히 지
역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선배들의 치열한 자세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지역에도 이하석, 정지창 선배 같
은 분들이 있고, 후배들 가운데도 늘 자기 갱신을 통해 작품이 거
듭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따라가고 함께 가며 배우고 있잖
아요? 결국은 자기 세계를 세우고 ‘좋은 작품’을 쓰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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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참 공감이 가는 좋은 말씀입니다. 지역/중앙 이 이분법이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아니
문화적으로 차이가 없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
은 우선 자신의 문학활동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자신의 문학적 역
량을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요. 실력을 키워야 되는 것이
죠. 자신은 태만하여 제대로 실력을 갖추지 않고서 지방차별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제도적으로 상존하는 지역차
별문제는 그 나름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작가회의 40주년 기념시집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회원들의 비판
여론이 있었지요. 편집자 개인의 시집이라면 선택에 대해 별 이론
이 없어요. 제 돈으로 자기 취향의 시집을 만드는 일이니... 그리
고 문학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건 한 조직의
40주년 기념시집인데... 심하게 말하자면 미친 짓이지요.
말머리를 돌려 올 해가 회갑입니다. 회갑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지난 청춘시절은 역사, 사회에 대한 고투와 헌신의 시절이었습니
다. 명문 국립사대 출신으로 평탄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비유하자
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습니다. 편안하게 살았다면 인품이나 우수
한 지적 능력으로 봐서 교장이나 장학사 등 관리자도 되고, 이런
게 반드시 잘 살았다는 징표나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니고 평교사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민족문학 진영에 참여, 전교
조활동, 대구시내 학교가 아닌 지방으로 자진 전출 등등 후회는
없는지요?
배창환 -회갑이라니... 남의 일 같습니다. 요새야 뭐 청춘이긴 하
지만, 그래도 나도 제법 많이 살았구나 싶어요. 아이 곧 결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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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곧 할배 될 거니까요. 요즘은 역사 속에서 어떤 크고 작은
일을 의미 있게 이루어낸 사람들이 좀 달리 보이고, 또 한편으론
운도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이 어찌나 짧은
지, 이 번쩍 하는 순간에 작은 일이라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
든가를 생각해요. 큰일을 한 사람들도 잠시 동안에 그 일을 하고
금방 무대에서 퇴장하거든요.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역사는 사람을
오래도록 무대에 세워두지 않거든요. 그리고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도 알 수 있고요. 사람이 아무리 노력
해도 하늘의 뜻이나 시운이 맞지 않으면 작은 일이라도 뜻대로 되
기란 쉽지 않잖아요.
그러고 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있고, 좋은 예술
이 생명이 그만큼 길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그가 요절하지만
않으면 자기 의지와 노력에 따라 자신의 삶과 예술을 갱신할 기회
가 여러 차례 주어져요. 왜냐하면 살아 있는 예술가는 언제나 자
신을 들여다보고 검증하면서 길을 가느라 그냥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게으르지만 않다면 자신의 예술세계가 변모를
거듭할 수 있는 거고요.
짧은 시간을 긴 여정으로 바꾸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요. 나는
내 시를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몇 편을 기억해 줄지는 모
르지만, 그래도 여러 편 썼고, 교육운동에 뛰어들어 내가 필요한
곳에,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잔을 받은 적도 있고,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그게 결국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지만,
능력 없는 자신을 부지런히 채찍질하고 땀을 흘린 적도 있어서 큰
후회나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참 좋은 사람들을 가졌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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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동지 같은 좋은 제자들이 있고, 마음으로 공경하는 고귀한 선
생님들을 곁에서 뵐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 그것으로 충분하
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되고 말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내 마음에 큰 후회가 없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요.
김용락 -앞으로 계획은 어떤지요?
배창환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못 읽은
책을 마음껏 읽고, 나를 다시 일으키고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시
를 많이 쓰고 싶다는 것, 시간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작물들을 땀
흘려 길러서 먹고, 남으면 벗들과 아이들에게 좀 나눠주고,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이라도 받을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만큼 나눠주
면서 소박하게 사는 것, 돈을 아껴서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좋은
사람들과 가끔씩 여행을 해 보고 싶은 것... 등이에요.
그러고 보니 욕심이 크네요. 다 될지 모르지만, 하나둘이 아니
고...
김용락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배창환 -고맙습니다.
(때 : 2015. 8. 8, 장소 : 한국문화분권연구소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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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시인 자선 연보
⋅1955년 경북 가야산 북사면(北斜面) 그늘에 있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
동에서 빈농인 아버지(배상락)와 어머니(이필봉)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
어났으며, 여섯 살 때 가야산 동북쪽 자락 수륜면 수성동 갈암마을로
이사 나가다. 확 트인 하늘 아래 넓은 들판 가운데로 그림 같은 대가천
이 흐르고, 시내 건너엔 한강 정구 선생의 생가와 집성촌이 있는 그곳
에서, 대자연과 사람의 마을, 산과 흙과 초목과 거기 숨 얻어 사는 것들
과, 시내와 하늘의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다.
⋅1966년 수륜초등학교 5학년 초에 대구로 이사 나오다. 중학교 때까지
동시를 몇 편 긁적거리다.
⋅1971년 대구고등학교에 입학.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나, 학비
를 벌기 위해 근로 장학생을 하면서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할 기회를 갖
지 못하고, 틈 내어 혼자 책 읽는 것으로 대신하다.
⋅1974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하여 시골 교사의 꿈을
그리는 한편, 학내 유일한 문학 동아리였던 복현문우회에 가입하여 시
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다. 교양과정부와 2학년 전공 과정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 수업을 듣다. 염세주의의 문을 들락거리며 세례를 받고 헤매
기도 하고, 유신독재의 공포 정치에 염증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시는 놓
치지 않고 꼭 붙잡다.
⋅1977년 4학년 1학기에 휴학하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울산 동해안
에 초병으로 배치되다.
⋅1979년 제대 2학기 복학. 아버지 돌아가시고 피지배 하층민의 삶과
죽음을 역사 속에서 다시 발견하면서 시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
다. 대학 마지막 두 학기 동안 10.26, 12.12, 80년 민주화의 봄과 5.18을
겪으면서 리얼리즘을 시의 중심에 놓다.
⋅1980년 10월 말에 졸업하고 경북 영천 영동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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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첫 교단생활 시작하다.
⋅1981년 계간 「세계의 문학]」겨울호에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우리는」
등 4편의 시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 시작하다.
⋅1982년 대구 경화여고로 학교를 옮기다.
⋅1984년 첫 시집 『잠든 그대』(민음사)를 냄. 충북의 도종환, 김창규, 김
희식, 대구의 김종인, 김윤현, 김용락, 정대호 등과 함께 [분단시대] 동인
결성. 재창립 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적극 활동하다.
⋅1985년 [분단시대] 제1집 「이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 에 작품 발표.
[대구우리문화연구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창립 후에는 문학분
과장을 맡다. [대구YMCA중등교직자협의회]에 참여하면서 교육민주화와
참교육 운동에 뛰어들다. 첫 시집 잠든 그대가 한길사에서 주관한 ‘오
늘의 책’에 선정되어 상패를 받다.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 실천대회 참여, 교육시와 문인시국선언,
YMCA중등교직자협의회 전국연수(총회)에 참여한 ‘죄목’ 등으로 경화여
중으로 쫓겨 가다. 이듬해 10월, 대구 경북지역에서 처음으로 대구 경화
여자중학교 평교사협의회를 창립하여, 이후 들불처럼 일어난 평교사회
창립 운동에 불을 댕기다.
⋅1987년 [대구YMCA중등교직자협의회] 마지막 회장을 맡아 교사 대중
조직인 대구교사협의회 준비에 힘 쏟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 대구
경북교사토론회(대명성당)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대구경북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어서 다시 원천봉쇄를 뚫고 [대구경북교사협
의회](회장 이재원, 부회장 이도걸, 이병희)를 창립(10월 31일, 대구 봉덕
성당) 초대 사무국장을 맡다. [대구경북 민족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3학년 김복순, 박소윤 두 학생 글집 우리 얼른 자라서(물레)를 엮어내
다.
⋅1988년 둘째 시집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실천문학사)를 내다.
⋅1989년 전교조 결성 때 대구경화여중 분회장을 맡아 7월에 해직되다.
도종환, 이광웅, 김종인, 조재도, 안도현, 정영상, 김시천, 전인순,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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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과 함께 해직교사 신작 공동시집 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을
냈고, 진보적 교사 문인들의 모임인 [교육문예창작회]의 창립 멤버로 활
동하기 시작하다. 1993년까지 대구 서·달서구지회장, 지부 홍보, 편집,
교과위원장, 참교육실천위원장, 부지부장 등을 두루 맡다.
⋅1994년 셋째 시집 백두산 놀러가자(사람출판사)를 내다. 3월에 해직
교사가 대부분 복직되고 혼자 상근자로 남아 1997년 2월까지 6,7대 전
교조대구지부장을 맡다.
⋅1995년 귀향, 성주에서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까지 100리 길을 오가
다.
⋅1998년 전교조 합법화를 앞두고 이해 9월 1일에 10년 만에 복직, 교
단으로 돌아와 대구 성당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기 시작하다.
⋅1999년 전교조 마침내 합법화 되고 2월에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
회](대구작가회의) 결성에 참여. 초대 지회장에 선출되다.
⋅2000년 넷째 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창작과비평사)과 국어
시간에 시 읽기1(나라말)을 냈고, 4월에 [성주문학회]를 창립하여 고문
을 맡기 시작하다.(현재까지)
⋅2001년 성주 벽진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며, 첫해부터 학교 종합 축
제인 ‘별뫼축제’를 기획 추진하여(2004년까지) 소규모 농촌 학교 학생
주도의 종합축제(연극, 시, 전시, 공연, 마당극, 마당놀이, 천연염색...)의
모범적인 모형을 만들려고 애쓰다. 「성주문학」을 창간하여 편집을 맡기
시작하다(10년 동안, 10호까지). 이 해부터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위촉되다.
⋅2002년 [성주학생문학회]를 창립하여 지도자문 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간 대구와 성주 지역 학생들, 국어교사들과 더불어 청소년문학
캠프를 열다. 성주문학회 주관으로 대구경북 청소년 문예지 「푸른 나무
들」을 3호까지 발행, 국어교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편집위원의 일원으
로 활동하다. 시 교육 방법과 실천사례집 이 좋은 시 공부(나라말)를
출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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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학교를 김천여자고등학교로 옮기다. 학생들과 문예 동아리와
수업을 통해 글쓰기, 문집 만들기 등에 노력한 결과 좋은 글을 많이 얻
어, 학생작품을 자료집으로 만들어 읽고 토의하고 글쓰기로 이어가는
교육을 실천하다. 이즈음부터 전국국어교사모임과 각 지역 국어교사모
임 시 교육 연수, 대구, 경북, 강원, 경기, 울산, 서울교육연수원 등에서
주관하는 1급 정교사 자격연수에 시 교육을 주제로 출강하다.
남북작가회담에 남한 측 문인 대표 100인 중 한 사람의 자격으로 참가
하여, 남북 통일문학의 새벽을 여는 문학 행사에 참석, 신새벽에 백두산
에 오르는 감격을 맛보다.
⋅2006년 생애 첫 해외 나들이로 몽골에 가서 스텝과 사막 지역의 대
평원과 대평원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거기서 광야를 보고 몸으로
겪다.
⋅2007년 시집 겨울 가야산으로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김천여고 학생
들의 창작 시집 뜻밖의 선물(나라말)을 펴내다. 김천여고 아이들 학교
문집이 전국 품평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경북교육청에서 시행하는 교사
유럽 교육 연수단에 뽑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다녀오다. 유럽의
교육과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 교육과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더
분명해지고 깊어지다.
⋅2009년 김천여고 학생들의 창작 수필집 어느 아마추어 천문가처럼
(나라말)을 펴내다. 3학년 이다은 학생의 시집 생각하면 눈시울이(강물
처럼)를 펴내다.
⋅2010년 학교를 경주여자고등학교로 옮기다. 경북대학교 정우락 교수
와 함께,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성주의 대표 시인들의 대표시를 망라
하여 별고을 성주의 시와 시인들(1)(강물처럼)로 펴내다.
⋅2011년 8월에 경북국어교사모임에서 기획한 ‘윤동주 문학기행’을 다
녀오다. 연길 조선족학 교의 국어교육 실태를 살펴보고 합동 연수 모
임에서 우리 측 대표 발제로 시 교육의 방법에 관해 발표하여 관심을
끌었으며, 그곳 명동촌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 시인의 묘소 등을 참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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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고, 두 차례나 백두산을 오르다. ‘가야산과 대가천, 성주의 사람과 자
연’ 이라는 제재로 쓴 성주시인 대표시집 별고을 성주의 시와 시인들
(2)(강물처럼)을 정우락 교수와 다시 펴내다.
⋅2012년 학생 시 선집 36.4℃(작은숲)를 조재도 시인과 함께 펴내다.
⋅2013년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에 선출되다.(이시영 이사장, 공광규 사
무총장 체제, 부이사장 김용택, 이은봉, 공지영과 함께) 시선집 서문시
장 돼지고기 선술집(작은숲)과 육필시선 소례리 길(지식을만드는지식)
을 출간하다.
⋅2014년 학교를 포항장성고등학교로 옮기다.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답사2(공저, 창비), 국어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창비) 등 저
술에 참가하다.
⋅2015년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통합 대구경북작가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다. 경주여고 학생 창작 시집 지금은 0교시(한티재)와, 학생 창
작 수필집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작은숲)를 출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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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희곡집 문소암 전집분을 펴낸 국어학자 김동소
-김동소 교수 대담
지난 3월31일(2016년) 연합뉴스 보도를 시작으로 대구경북지역
의 몇몇 일간신문에서 눈에 띄는 문화기사 한 꼭지를 싣기 시작했
다. 대부분 보도내용의 초점은 한국 최초의 희곡집『황야에서』
(1922)를 출간한 희곡작가 소암 김영보의 전집(문소암 김영보 전집분
김동소 엮음. 소명출판사, 2016)이 출간됐다는 것인데, 그 소암 김
영보가 대구 영남일보를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까지 지냈다는 내용
이었다.
아니 한국문학사 최초의 희곡집을 낸 주인공이 우리지역 사람이
었단 말이지... 하는 감탄과 아울러 그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탐색
을 하기 시작했다. 곧 정체가 밝혀졌다. 현재 우리 국어학계의 대
가이자 원로 학자인 김동소 교수(국어학, 전 대구가톨릭대 인문대
160
학장)의 선친이 바로 소암 선생이었다.
김동소 교수는 나도 일찍부터 알고 있는 분으로 인품과 학식이
빼어난 국어학자이다. 대학을 정년퇴임한 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개인연구실에 나가 만주어, 여진어들을 연구하고 책을 번역하고
있는 분이다. 이 분이 서울의 유명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거나 서울
에 거주한 학자였더라면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지금보다는 훨씬 중
요한 학자로 알려졌을텐데... 하는 생각을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그런 분이었다.
외람된 말인지 모르겠지만, 소암 김영보 선생의 문학적 업적도
대단하지만 김동소 교수의 학문적 성취나 업적도 결코 그에 떨어
지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렵게 시간을 얻어 김 교수를
만나봤다.
김용락 -중요한 책을 내셨습니다. 효도하셨는데요. 언제부터 선친
의 전집을 내려고 생각하셨습니까?
김동소 -자료를 모으는 등 준비는 오래 전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내려하니까 아버지의 친일문제가 걸리는 거에요. 숙부님도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말씀하시기도하고...
김용락 -아버지의 친일문제요?
김동소 -아버지께서 매일신보 경북지사장을 지냈어요. 그 덕에 내
가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매일신보 통신부장,
문예부장, 지방부장의 직전, 직후 인사들이 등재 돼 있습니다. 그
161
런데 아버지께서는 등재돼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
다. 이 분야의 전공자인 이윤갑 계명대 사학과 교수에게 물었습니
다. 그랬더니 이 교수의 대답이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면 괜찮다.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어요. 그게 2015년 1월쯤이
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32년 조선총독을 수행해서 지방을 시찰했습니
다. 그리고 총독수행기를 썼어요. 그런데 총독에 대한 아첨이나 일
본에 대해 미화하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매우 객관적으로 글을
썼어요. 이것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근무하고 있지만, 필
요 이상으로 일본에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특별히 일본에 잘 보
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용락 -그렇군요. 당시 그런 위치에서 조금만 아부하면 쉽게 출
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정도를 걸으신 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길을 면하셨군요. 당
사자로서도 다행한 일이지만, 후손에게도 다행한 일인 것 같습니
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말씀해주시지요.
김동소 -제가 중3 때 4막짜리 연극 김진수 작, <별을 따는 소년
들>이라는 연극에 주연을 했습니다. 당시 사대부중 사친회장이셨
던 아버지께서 와서 그 연극을 끝까지 보셨지요. 그리고 귀가 후
집에서 제 연극에 대해 코멘트를 하셨지요. 그렇게 자상한 면이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코멘트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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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희곡작가이시면서 내가 국문과에 진학했
을 때도 한 마디 안 하셨어요. 무슨 까닭이 있겠다 생각하고 1976
년부터 아버지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지요.
희곡을 전공한 김원중 교수가 처음 아버지의 문학에 대해 말씀
하셨어요. 춘원이나 동인보다도 훨씬 더 진보적이라고 말씀하셨는
데 요즘말로하자면 ‘심쿵’했어요. 이후에는 공주사대 하동호 교수
가, 이분은 장서가인데 아버지의 작품집『황야에서』가 있다고 알려
주셨지요. 그게 1978년이었어요. 그 책을 서울 종로의 헌책방에서
구입했는데 표지가 없었어요. 그 후 표지가 있는 것을 구입했는데
책의 표지 디자인을 소암 본인이 직접 했더라고요. 아마 국내에서
장정가가 알려진 최초의 책일거에요.
김용락 -아들인 선생님께서 국문과에 진학을 했는데 왜 선친께서
는 자신이 희곡작가였다는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궁금한
데요.
김동소 -아버지께서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전문부에 다니던 시
절 학생 기숙사에 있던 여학생 두 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요. 아마 아버지를 사랑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추측하는
데... 누님은 2명이 죽었다고 증언했는데 당시 신문에는 3명이 죽
었다고 났어요. 또 당시 김우진이 윤심덕과 자살하는 사건이 일
어나기도 했어요. 아마 아버지와 김우진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
던 거 같은데, 이런 일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문학과 연극에 상처
를 받아서 완전히 자신의 기억에서 없앤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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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가 희곡작가라는 사실을
몰라서 대학에서 언어학을 했어요. 알
았더라면 문학이나 연극을 했을 거에요.
김용락 -아버지와 함께 오래 사셨어요?
성품은 어떠셨는지요?
김동소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
셨어요. 자상하신 분이셨어요. 퇴근해
집에 오시면 물걸레질도 하고, 화초도 가꾸시고 했지요. 사색가,
철학자, 종교인 같은 풍모를 풍기셨지요. 찦차를 타고 영남일보 출
근하시던 게 생각나요. 그러나 저와 나이차가 많이 나서 어려웠지
요.
김용락 -가정 형편은 어땠습니까?
김동소 -아버지는 <자유부인>을 쓴 정비석과 친한 친구사이였습니
다. 아버지 자신도 <금강산 순례기> <촉석루 순례기>를 쓰셨지요.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을 해서 그 당시 집에 전화도 있고, 찦차를
타고 다니고... 제가 어릴 때는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장조림을 싸가지고 갔더니 친구들이 제 이름에
빗대어 소가 소를 먹는다고 놀리는 거에요. 그때부터 고기를 안
먹는 채식주의자가 됐지요.
아버지께서 신문사 사장 10년하고 퇴임한 후 집에 돈이 없어요.
노후 준비를 안 한 거에요. 큰아들 친구는 그런 아버지를 가리켜
164
소암은 낭만주의자여서 그렇다... 고 말하기도 했어요. 문방구를
했는데 대신동에 문방구 도매로 사러 갈 때 제가 따라갔어요. 아
버지가 문방구를 꼼꼼하게 수를 헤아린다고 도매직원이 항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현재 어린이 대공원 앞인 황천동에서 양계장을
하기도 했어요. 당시 버스가 수성교까지 다녔어요. 거기서 범어동
으로 이사한 후 얼마 뒤 5.16이 일어나고 1962년 9월에 아버지께
서 돌아가셨지요.
김용락 -선생님께서는 왜 국문과에 진학하셨는지요?
김동소 -취향이지요. 중학교 때 좋은 국어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런데 최현배 선생의 문법에 반해서 국어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
다. 경북대 입학 할 때 제가 전체수석을 했습니다. 의과대를 제치
고요. 그게 1961년인데 공교롭게도 당시 제 수험번호가 1961번이
었습니다. 그때는 가장 형편이 매우 어려워 대학 갈 형편도 안 됐
는데, 제가 전체 수석을 하니까 아버지가 매우 기뻐했습니다. 제가
경북대 사대부고를 나왔는데 부고 다닐 때 문예반장을 했습니다.
그때 지도교사가 이재철 선생님인데 후에 아동문학가가 되셨고 대
구교대와 단국대 교수를 하셨지요.
김용락 -정년을 하신 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경북대 도서관에 나
와 말 그대로 열공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 숙연해지고 대가
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요?
165
김동소 -만주어 성경을 역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주어와 여진어
를 할 줄 알아요. 사도행전 18장 가운데 현재 16장을 하고 있습니
다. 돈도 안 되는 데 왜 하느냐 하면은 종교적 소명의식 때문이
아니에요. 일본에 동양문고가 있는데 동양에 있는 인문학 책을 다
모우고 있어요. 18세기 청나라 때 프랑스 신부 루이드 푸와로가
만주어로 성경을 번역한 원고가 동양문고에 있는 거에요. 이런 사
실을 아무도 모르는 걸 내가 찾아냈습니다. 당분간 이 작업을 할
거에요.
김용락 -학문에 대한 선생님의 정년이 없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그리고 언어학자로서 매우 희귀하게 만주어, 여진어 등을 능숙하
게 구사할 줄 아는 능력 등 부러운 게 한 둘이 아닙니다.
늘 건강하시고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동소- 오늘 김 선생이 수고 하셨어요.
(때: 2016. 5. 31. 오후 2시, 장소: 경북대 중앙도서관 5층)
166
시
문병란 도광의
이하석 이태수
박노정 도종환
이은봉 김창규
오승건 김사람
이필호 박은주
허태연 정은희
박언휘 송정화
정연홍 신동호
윤덕점 정훈교
박승민 남효선
표성배 장진명
박영미 김성숙
이해리 박경조
박선주 박일아
구옥남 김경희
최월강 권화빈
김봉석 권진희
황정혜(신인)
167
원고모집
문화민주주의와 열린지역주의를 지향하는 「문화분권」이
원고를 모집합니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문화분권, 지역분권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하는
원고를 구합니다.
신인과 기성 구별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부 문 : 사회정치평론, 문화담론, 시, 소설, 비평 등 제한 없음.
보낼곳 :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94번지 한국문화분권연구소
「문화분권」 편집팀
이메일 : [email protected]
전 화 : (053)426-7829
팩 스 : (053)425~7829
휴대폰 : 010-2526-5693 (발행인)
기 타 :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채택된 원고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168
눈을 비비고 본다 외 1편
문병란
시력이 감퇴하는 80세 가을
의심증이 많은 회의주의자
나는 자꾸만 눈을 비비고 본다
-의사는 확대경을 놓으며
눈동자에 백내장이 끼었다 진단했다
죄는 사람 탓이 아니다
그 알량한 모국어 때문이다
그 세종어제 훈민정음 탓이다
-의사는 처방전을 내밀며
실명예방을 위해 수술을 권장했다
한글로 써진 특호활자 커다란 죄목
국가 전복 반란 음모에 대하여
종북이 그 혓바닥 잘못된 발음
짝사랑 조국에 대하여
사실일까 아닐까
169
씀벅씀덕 자꾸만 눈을 비비며
우리는 만나야 한다
종북이 종남이 두 형제
「직녀에게」 그리운 안부를 위하여
도수 높은 안경 너머에서
자꾸만 아른거리는 이적죄 위에서
휴전선이 있는 한반도
100년간 이 땅은 아직도 전쟁 중
이완용은 지금도 보국안민 외치고 있고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거꾸로 가는 한반도 25시
그날의 백골들이 참회록을 쓰고 있다
-의사는 마침내 메스를 들고
시력에 치명적 백내장은 깨끗하게
발본색원해야 한다 경고 했다
거짓말과 참말 사이에서
종북이와 종남이 긴 이별 사이에서
나는 자구만 두 눈을 비비고 있다
씀벅씀벅 아파오는 두 눈을 깜박이고 있다...
-2015. 6. 광복 70주년에
문병란
전남 화순 출생. 조선대 인문대 국문과 졸업. 1959~63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 추
천으로 등단. 요산문학상, 광주문학예술상 등 수상
170
우리들의 봄은
청마가 온다기에
잔뜩 부풀은 기대 속에
온갖 재앙만 저질러 놓고
묵은 달력 밑에서 아사한
우리들의 봄은...
지금도 남양군도 밀림 속에서
징용강 그 세월 골병든 채
고향길 찾지 못하고
오사까 하늘 밑에 길 잃고 헤매이나
우리들의 봄은...
아무르강 시베리아 철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 님은
지금도 두만강 푸른 물 그려
북간도 어느 산막에서
마적단 두목 되어 그 머리
효수형 당하고 있나
우리들의 봄은...
171
양마, 2015년 첫날 아침부터
너의 애잔한 울음
몇 번을 더 죽어야
묘향산맥 넘어 우리들의 봄은
남쪽에서 오려나...
북쪽에서 오려나...
하늬바람 매서운
차현 고개 넘어 공주강 가에서
‘껍데기는 가라’
‘우리는 만나야 한다’
끊어진 다리 건너지 못한 채
골병든 사랑 절뚝이고 있구나
우리들의 봄은...
172
다시 무학산을 보며 외 1편
도광의
서설이 내리면 봄이 길다
친정 다닐 적엔 아득한 산등성이다
분이 시집 가던 날
톨스토이 소설 루진이 벌판처럼 눈이 왔다
첫날밤 울고 떠난 분이는
친정엔 한번도 오지 않았고
무학산엔 서설이 내리지 않았다
능선이 닿는 산동리에 길이 나고는
대처 사람들로 붐비었고
네온사인 휘황한 달이 떠올라
종달이 영태를 떠나게 했다
청람 풀꽃 억새 하늘대는
읍내 오르내리던 토농土農이들 안 보인다
벌레처럼 모래처럼 반짝이던 강물이
미이라처럼 누워있다
도광의
경북 경산 출생.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4~78년 「현대문학」에 「갑
골甲骨길」 외 6편으로 추천완료. 시집 『갑골길』, 『그리운 남풍』, 『하양의 강물』. 제1회
대구문학상, 제9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73
대목장大木匠
마른 벽에 목 힘껏 친다고 못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안다
퍼석한 벽에 수액 바르고 못 박으면 잘 들어간다는 것 안다
장마 끝나고 벼락치던 마당에 말목末木 밀어 넣으면 쑥 쑥 잘 들
어간다는 것 안다
나무 밑둥 횡단면에 생기는 나이테 보지 않고도 깎고 다듬는 끝
촉감으로 나무 나이와 고향을 안다
여자들이 헐거워진 복부 죄는 레깅스 입고부터는
여자들이 몸에 꽉 끼는 스키니진 입고부터는
남자들이 여자 밑에 슬슬 기는 요즘 세상은
찐득한 검은 오일 발라야 야문 콘크리트 벽에 못이 잘 들어간다
는 것 안다
174
그래, 난 죽었으니 외 1편
이하석
총알 받은 몸이사
콩알처럼 나뒹굴었지.
그렇게 죽었으니
마침내 비가 올게야.
그 젖은 땅에서
콩이 싹트듯
내가, 우리가
날거야.
죽기 전 저항의 노랠 불렀으니
모두 영원이 되고
불멸이 될 거야.
그래, 그래,
새벽의 어둠이 우릴 피워 올리기 위해
마구 수런거리겠지.
마침내 너끈히 세계의 상공에
175
꽃들 뽑아올려질거야.
이하석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지 추천으로 등단. 시집 『투명한 속』, 『김씨의 옆
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것
들』, 『상응』 등.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176
시를 쓰려하니
시를 쓰려하니
기억마다 말끝마다
죽음의 뼈들이 부스럭거린다.
냉수처럼 수런대며
죽음의 뒷모습들이
바닥의 面目을 드러낸다.
177
그 사람의 말 외 1편
이태수
그 사람의 말에는 늘 여지가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깊숙이 끌어안는 여유와
부드럽고 넉넉한 여백,
어떤 대상이든 결코 혼자 차지하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어법으로 자기화하면서도
언제나 그 누구와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자리,
더 나은 말로 채워지기를 기다려준다
어느 순간이든 어디서나 한결같이
다른 사람 몫으로 빛날 수 있는
빈 데를 넉넉하게 남겨둔다
178
하지만 오래 삭인 것 같은 그 사람의 말은
-
그 누구의 말보다도 웅숭깊다
날개를 달고 눈부시게 날아오르기도 한다
대상을 결코 사로잡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높고 그윽하게 사로잡는다
이태수
경북 의성 출생.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문그림자의 그늘분, 문우울한 비상의
꿈분등 다수.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 수상. 「매일신문」 논설주간 지냄
179
나쁜 꿈
무표정한 얼굴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 가까이 슬며시 다가간다
일진광풍… 허물어져버린 집들과
넋 나간 사람들이 주저앉아
하늘을 멍하니 쳐다본다
먹구름 뒤의 해도 서산을 넘어가고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바삐 나는 새들,
마을은 봉두난발, 어둠에 잠긴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은 뒤돌아볼 리 없다
돌처럼 굳어진 사람들,
그 옆에 웅크린 나도 처참하다
나쁜 꿈을 헤쳐 나오자 창이 덜커덩거린다
새벽 쓰레기차 방울소리, 바람소리,
눈을 떠도 꿈속 장면들이 안 지워진다
180
시 한 편 외 1편
박노정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손끝,
발끝까지 내려와
땀냄새로 버무린 딱깔발이
시 한 편 보쌈하고 싶다
박노정
경남 진주 출생. 「호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공양』, 『운주사』 외 다수. 진주민족
문학예술인상, 개척언론인상, 경남문학상, 호사문학상, 토지문학상 등 수상.
181
甲
반드시 質이 따르지
악질 · 저질…
떠세 *
그래도 이만큼 세상이
숨쉬는 까닭은
종요로운 극순질이 어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선생 권정생과 장일순이
그리운 까닭이지
* 재산과 세력, 지위 등을 믿고 젠 체하며 억지를 쓰는 것
182
사이오아 아란도 외 1편
도종환
그녀는 출근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이 셋의 어머니이며 대학교수인 사이오아 아란도
그녀는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다 말고
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
코를 팽 하고 소리 나게 풀고는
코 푼 종이를 다른 쪽 주머니에 넣고
이론을 현실로 가져오는 수업에 대해 설명했다
학생들에게 시장의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그 좌절이 해를 거듭하며 정교해지는 걸
지켜보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했다
그때마다 짧은 상고머리 밑으로 귀고리가 찰랑거리고
자신감 넘치는 입술로 쫄깃쫄깃한 목소리를 쏟아냈다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그녀의 대학은
다른 사립대보다 보수가 많지 않고
수업은 두 배나 많다고 했다 협동조합들과
동일한 노동시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나 그녀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자기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해고 없는 직장에 다니는 것 때문에 얼굴이 밝았다
협동조합도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애쓰지만
183
그 이윤이 공동체를 위한 이익이 되게 한다고 했다
그녀의 뒤에는 몬드라곤의 심벌 이니셜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플러스 기호가 하나 반짝이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의 인생에 점수를 줄 수 있다면
그 플러스 하나를 얹어 주고 싶었다
뒷산 산마루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고
초록의 산비탈에서 풀을 뜯던 양떼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산 아래로 몰려 내려오는데
그녀는 휴지에 다시 코를 힘주어 풀고는
이번에는 그 종이를 윗옷 주머니에 넣는다
다양하게 오르내리는 오른손을 통해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이 남았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여자
쉼 없이 움직이는 입술에 한참씩
몰입하게 하는 바스크 여자
도종환
충북 청주 출생. 시집 문고두미 마을에서분, 문접시꽃 당신분외 다수. 산문집 문사람은 누
구나 꽃이다분, 문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분외 다수. 신동엽 창작상, 정지용문학
상,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아름다운 작가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
184
낯익은 냄새
아주 낯익은 냄새였다
부연 열기와 함께
콧잔등과 이마를 덮던 냄새
숟가락에 얹혀 입안을 적시고 나온 뒤
단음절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소리를 내게 하던 냄새
도시락은 하고 묻는 소리 옆에
밥통에서 방금 옮겨진 까만 콩과 콩물 든 밥알이
뜨거운 몸을 식식거리던 냄새
국물이 메주콩빛으로 우러난 배추국 냄새
동동거리며 책상과 식탁 사이를 옮겨 다니던 소리
화장실 문 두드리던 소리와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 냄새
뜨거운 김과 함께 왁자하던
아침의 냄새였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살며시 빠져나와
복도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며
몽글몽글 옮겨 다니는 냄새를 보았다
조용히 출근하면서 저 냄새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잊고 지냈던 익숙한 냄새에
185
잠시 걸음 멈칫거리는
공복의 출근길
186
심장들 외 1편
이은봉
늦가을 오후, 영동 거리를 자동차로 달린다 차창 밖 감나무들,
붉은 주먹들 치켜들고 달려온다
문득 어지러워 자동차를 세운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주먹들
이 아니라 심장들이다
심장들, 벌렁벌렁 뛰고 있다
그 모습, 너무 무섭다
다리가 후둘후둘 떨린다
사람들의 노한 마음, 부르르 여기 있다 하늘 저쪽의 둥근 낮달,
한숨 푹 쉰다 저도 견디기 힘든가 보다
심장들 곁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자꾸 겁난다 바람이 분다 불
길한 소식 전해질 것만 같다
도망치듯 서둘러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저 마음들 어쩌나 저 한
들, 저 원들.
이은봉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
름』 등이 있음.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87
별
밤이 되어도 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밝기 때문이다 도시의 밤, 불
을 끄고 찬찬히 보아야 겨우 보이는 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사방 더욱 캄캄해질 때까지.
188
살구쟁이 학살 외 1편
김창규
찬바람 부는 골에
하얀 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금소리와 가야지 라는 민요
애끓는 노랫소리가 총소리와
비명소리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죽고 오빠도 끌려와
총살당하는 살구나무가 있는 언덕에
꽃은 피고 새는 날아와 울건만
집단학살 매장지에 봄은
슬픔을 참지 못 한다
내 큰 아들이 국군이고
작은 아들은 경찰이고 그랬는데
보도연맹으로 끌려와 죽을 수 있단 말이냐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했는데
어찌 끌려와 죽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189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착하게 살았는데
서북청년단 저것들이 난데없이 내려와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지
남편 잡혀가는 트럭을 붙들고 끌려가다
아주머니 논두렁 밑으로 떨어져 죽고
또 다른 어머니
울면서 떠나는 남편과 아들을
끝내 살리지 못한 죄를 한탄하다
곰나루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여기가 바로 동학농민군들이 떼죽음
일본군에 의해 죽은 곳이라
더욱 슬프다
살구꽃이 떨어져 금강에 흘러간다
노을 지는 강 살아오는 푸른 하늘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오고
할아버지가 살아온다
살구꽃 달이 환하게 떠오른다
김창규
충북 보은 출생. 한신대학교 졸업, 1984년 <분단시대> 동인. 시집 문푸른벌판분 외
190
골령골 대학살
제주도에서
서울과 여수 순천에서
대전교도소에 수감 되었다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그 발굴자리 내가 서 있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는
칠순의 소복한 여인의 울음소리
골짜기를 맴돌아 구름 위를 날아 흩어진다
마른 뼈들이 얼키설키 일어나 소리 지른다
이제야 하늘에 오르게 되었다
저 망할 놈의 십자가
이념의 앞잡이 민주주의가 어떻고
공산주의가 어떻고 설교하더니
수천 명 매장 터에 교회를 세워
마른 뼈들이 하늘에 호소한다
191
내 살아 하나님을 믿었건만
여기 죽어 이렇게 뼈로 남아 증언하니
어디 정의가 살아있고 천당이 있나
거짓말 하지마라 예수도 없고
당신은 더군다나 없다
저 운동권이라 핍박당하던 사람들
우리 죽음 세상에 알려주니
광주학살 영웅 군인들이 대접받고
친일파가 득세하여 정권 잡은 나라의 국민들
경찰을 믿지 말고 군인도 믿지 말고
믿을 건 하나여 나 자신이여
양심이여 내 죄를 물어 봐
조국을 사랑한 죄 뿐이여
골령골 산내 골짜기도 봄이다
봄날 내가 웃으며 죽을 수 없었고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없었고
가족을 잊을 수 없어 뼈로 남아
여기 대전교도소 수감 된 독립군이
뼈로 살아나 증언 한다
잊지 않아 이승만 학살자
거기 동조한 박정희를 잊지 못해
제주와 서울 마산에서 끌려와 죽은
192
우리들은 조국을 사랑했다
193
대변항 멸치 외 1편
오승건
내 고향은 산벚꽃 얼비치는
대변 앞바다
대한해협 거센 파도 간질이며 논다
연한 은빛 어깨 겯고
물살 거스르며 유영(遊泳)하다
산벚꽃 속울음 터트리는 사월이면
뭍사람 그리워
그물코에 머리 박아 마을로 간다
세월이 멎은 칠흑의 어둠 속
왕소금과 어깨동무하여
욕망도 삭이고 사랑도 내리고
마침내 몸은 허물어져
빛바랜 슬레이트 지붕
온기 빠진 남향 일자 가옥
노부부의 저녁 밥상에 오른다
남루한 근육의 가장이 꿈꾸는
뼈대 있는 가문의 살신성인
대변항 멸치
194
*대변항 :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항구. 멸치로 유명하다.
오승건
대구 출생. 1983년 <예각> 동인. 시집 문다시금 그리움 하나로 선다면분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문나보다 더 힘겨워하는 한 사람을 위해분
195
일용 잡부
칠흑의 잠바다에
게릴라성 소나기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알람시계 묵음 단추 누른다
눈 비비고 이불 개키며
허우적허우적
가까스로 반쯤 뜬 눈으로
시계 한 번 보고
뭉그적뭉그적
환청으로 들리는
인력시장 호루라기 소리에
용수철 되어
문지방을 나선다.
196
*
성천 막국수Ⅱ 외 1편
신동호
아우님, 건너편 약산에는 절벽이 있다고 했죠. 여즉 양념에 길들여
지지 못해 메밀내 푹푹, 어머니 자궁 속에서나 맡았을 동치미 냄새
가 좋은 모양입니다. 절벽에도 꽃이 핀다고 했죠. 물론 저는 그래
서 답십리, 무릎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국수집에 드나드는 게지요.
“형수님 살까는데 좋다”는 뽕잎차 떨어진지 오래입니다. 막국수
두 그릇을 시켜놓았는데 李箱 형님은 '흰나비 봉선화'처럼 생긴
애인의 귀에 취해 뒷전입니다. 아우님, 제가 평양식 직설화법에 당
황하자 가정법과 편견이 난무하는 서울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
죠. 우린 도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몰라, 야생이 그리울 때 여
기 서울에서 갈 곳은 답십리 사거리밖에 없답니다.
조그만 점방에서 라이터를 사다말고 느린 걸음이 떠올랐습니다.
급한 게 뭐 있겠습니까만 여름밤 반딧불이 사라진 까닭입니다, 진
짭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안전은 개인의 문제이지 공적인 문
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긴 그렇습니다. 근자에 건강이 부쩍 나빠진
李箱 형님은 성천에 가고 싶어 안달하십니다. 또 '죽어버릴까 그
런 생각을' 하십니다. 매일 '벽 못에 걸린 다 해진 내 저고리를 쳐
다봅니다.'
197
아우님, 에둘러 다니다보니 자주 길을 잃습니다. 여기 꽃은 화원에
피고 껍질 채 가루 낸 메밀이 들어가야만 겨우 순종할 생각을 잊
는답니다. 답십리는 걸어야 제 맛입니다. 긴긴밤 십년이면 그리움
도 깊어간답니까. 그저 막국수 한 젓가락에 아우님만 붙들고 신세
한탄입니다.
* 이상이 요양 차 한 달가량 머문 평안남도 성천
신동호
강원도 화천 출생.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문겨울 경춘선분, 문저물
무렵분, 문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분, 산문집 문유쾌한 교양읽기분, 문꽃분이의 손
에서 온기를 느끼다분, 문분단아, 고맙다분, 문세월의 쓸모분등
198
대동식당
저무는 보통강변엔 서도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었고, 유난히 나무는 부드러웠고,
감홍로甘紅露의 도수는 높았다
이슬이 맺힌 눈으로 보면
고압적이었던 소비에트 양식의 건물들도 취해 흥청거렸다
뒤늦은 변명이지만 그 탓에 치맛자락을 쫓아갔다
버드나무를 잘못본 건지 모를 일이다
뒤에 곰곰이 되새겨보니 긴 머리를 흩날렸던 듯
아스라한 얼굴은 사상교육을 자주 빼먹었을 법했다
평양냉면을 주문하고 선주先酒를 위해 조찰떡을 부탁했다
만경대쪽으로 지는 노을은 이상하게도 지루했는데,
얼굴까지 붉어지는 까닭이었다
권번은 간판을 내리고 침방기생은 인민복을 지었다
걸음걸이와 손끝 매무새만은 무엇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들의 삶에도 초록으로 물든 풀비린내가 남아있다
모두 버드나무 탓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편지를 쓰면 도착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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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길이만큼만 쓰면, 손바닥만큼이라도 넉넉하겠다
행간은 많이 비워놓고
보통강을 걷다가 문득 불러내고픈 골목 끝에 살고싶다
치맛자락처럼 체제도 편견도 한들한들해진 저녁이다
북서풍을 따라 답장을 기다려보는
그저 소문이라도 들려오길 기다려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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