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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treentea, 2017-01-19 21:36:44

문화분권

싸락눈 내리는 아침
그 어머니 뜬 눈으로 하늘을 날으셨고

누나는 지루박과 차차차를 외로이 돌았고

우리 교회엔 태식 씨가 있다













































김성숙
대구 출생. 경북대대학원 문학치료과 수료. 2015년 「문화분권」 2집에 동시 발표로 등단


251

콩 타작하는 날









팔십 넘은 권사님은 남편이 없으신데
그 남편 가신지 십 수 년이 지났는데
소곤소곤 두런두런 은밀하신데


아들손자며느리 노래를 하여
줄줄이 불러 아뢰는 날에

온 나라와 전 세계도 간절히 하고

가끔은 서러운 통곡을 뱉다 삼키다

모두들 돌아간 듯 조용해지면
깜박 졸던 보따리를 다시 풀어


주거니 받거니 회계도 하시고 회개도 하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늴리리 가락으로
구성진 자작곡의 새 찬송을 뽑으시고


세월은 잘도 가고,

그날도 사실*이 길어지더니
날이 밝았다 기운이 다 빠졌는데





252

주님요, 콩 타작을 해야 되니더
우예노, 늦었니더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니더


산비탈에 일궈놓은 것들이 자꾸 없어진다고
산짐승들이 물어 가나보다고 한 며칠 애를 태우시더니




*사실-경상도 일부지역에선 수다, 사연 등을 사실이라고 한다.













































253

부시罘罳* 외 1편




이해리





궁궐이란 어떤 의미에서 흉가다 겨울 비원이 보고 싶어 찾아간
그 해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처마는 둘러가며 시퍼런 그물을 탱탱 감

고 있었다 새 깃들지 못하게 하는 방책이라 했다 새가 날아들면
어쩌다 죽을 수도 있으니 미물이라 해도 죽어나가는 것은 불길해
아예 깃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원천 봉쇄하기에 삶이

추방되는 냉혹한 법도에 추운 새 한 마리 부딪쳐 쨍그렁 깨진 하
늘로 튕겨 나가는 그 날, 단청 없는 낙선재 흐미한 대청엔 주검
이 돼서야 돌아 올 수 있었던 마지막 왕손이 오래된 빈소 흰 커

튼이 되어 바람에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호
곡하지 않는 숲길이 살얼음을 운구하다 덩그렁 멈춰서는 고궁, 지

붕은 높다랗고 기둥은 우람하나 살아서는 추방되고 죽어서야 입
궁되는 왕자가 있어 낙엽들만 스스스 스란치마 끄는 소리로 몰려
다니고 있었다





*부시(罘罳):궁궐 처마에 조류 방지를 위해 치는 그물





이해리
대구 출생. 2003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시집 문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분, 문
감잎에 쓰다분, 문미니멀 라이프분



254

잠자리











잠자리는 앉는다
앉으면 다리마저 손이 되는 잠자리
바지랑대 끝이나 한들거리는 꽃이파리
막막한 말뚝이라도 꼬옥 붙잡고 앉는다

붙잡지 않은 세상은 헛것일 것 같아
턱밑까지 그러모아 꼭 붙잡은 모습이

참 간절하다 참 공손하다
그러다가 진정 이것이
내가 잡고 싶은 것인가 회의懷疑라도 하는 듯

또록또록 겹눈을 굴린다 그리고는
금방 놓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참 간절히도 잡았던 걸 참 간단히도 놓아서

하늘과 땅 사이가 아득하다




















255

청춘 외 1편



박경조






청춘만큼 봄은 짧아
멀리 산벚나무가 쳐놓은 분홍차양도
금세 걷어낸 깊고 붉은 팔공산
켜켜이 차오른 한 때의 초록으로

제 속에 갇힌 천둥소리 있었을까
저토록 타 오르는 거 보면,

계절이 몰고 가는 세월의 조수석에 앉아보니
신뢰했던 청춘도 금세 사라진다는 것
변하지 않을 뒷모습 또한 없다는것

뭣도 몰랐지만 애면글면 살아왔다고
눈자위 붉히면서 북북 우겨 보는데
조락의 단풍 길이

백미러 속, 한 점으로 사라지고 마는
그런 나의 뒷모습 빤히 보는 것만 같은데
그래 우길 일도 아니었는데

우겨서 되는 일 하나 없는데
오늘처럼 청춘에게 욕심 부린 적 처음이네

철나지 않은 채 살아 온 길,

박경조
경북 군위 출생.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 등단.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 시집 문밥
한 봉지분, 문별자리분


256

미안하다











어쩌나
처음에는 숲에 들어온 것처럼 반가웠다
양지꽃 구슬붕이 현호색 노루귀
철없이 따라 나온 풋 망개까지

문예회관 3층 통유리 속에 붙박여두고
이쁘다 이쁘다며 호들갑 떠는 도시 구경꾼들

삐에로 같지?


봐라

들꽃사랑 전시회장 밖 햇살 너른 잔디밭에는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키 낮은 풀꽃들
그래도 생긋 웃으며 숨은 그림으로 생생하다

그래
창틀 하나 사이에서 너와 나
외눈박이 사랑, 하고 있었구나
















257

봄 외 1편



박선주






돌풍을 동반한 봄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세찬 소낙비가 내린다
시를 쓰려니

그 많던 뒤엉킨 생각의 잔해들
우선 멈춤이다

황폐한 내출혈이다
컴퓨터 자판기에서
뼈가 녹는 듯 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울려퍼진다


나의 실존의 풍경은 고독하다

















박선주
서울 출생. 2005년 「사람의 문학」 봄호로 등단.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258

염화미소











충북 음성 가섭사 간다
대구현대불교문인협회에서
봉고에,
각자의 알 수 없는

마음을 싣고 간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 수제자인

가섭 존자의 이름을 빌려서
가섭사라 한다는 것만 나는 알고 있다
가는 길 중부고속 오월의 산,

그 신록이
너무 심오해
깊은 우물 속에서 솟구치듯 눈물이 핑.

山門에 다다르니
500년 된 느티나무와
부처님의 미소가

와락 안아준다 이 중생을



그냥 머언 하늘만 보았다








259

봄비 외 1편



박일아






앞산에 봄비가 오고
나무들은 새순이 돋아나
둥글둥글해져 연두색 뭉게구름이다



바람이 불어와 비가 옆으로
백로의 날갯짓을 하면서

출렁거리며 곡선으로 난다


수직으로 내릴 때보다

빗금으로 올 때보다
파르르한 연두색위에 곡선으로 흐르는 비



영혼을 흔들어
자연으로 동화 되네












박일아
2009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문하루치의 무게분.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260

맨발











문경세제 꼬부랑길
조선시대 선비들이 짚신신고
장원급제의 꿈을 바랑에 매고
과거장 가는 험하던 오솔길

옛날을 더듬으며 걷는데



곱게 만든 황톳길
운동화를 신고 걸어도
발에 물집이 생겨 신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걸으니
모래알갱이가 발바닥을 간질이고



전족을 했다는 중국의 여인들을 생각하고
족쇄에서 풀려난 자유를 즐기며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기분도 상쾌하고 마음도 여유롭다

불어오는 솔바람을 향해
심호흡을 해 본다
연분홍 꽃비가 날아다니고




261

맨발, 맨손의 여유가 참 좋다



























































262

향기의 毒 외 1편



구옥남






몇 날을 새침하더니 열닷새 보름달빛 앞에
핑크빛 제 가슴 열어젖히는 천리향
도시의 이방인들은 월세 집에서 전세 집으로
한 계단씩 힘들게 오를 때

사시사철 푸르게 수문장처럼
집을 지키던 밴 자민

발코니 창문 반쯤 열어 놓기로 하자
천리 멀리서도 그 향기 맡을 수 있게
달빛마저 움츠려 어둠속으로 자맥질 하는데

어쩌자고 꽃을 피우는 건지


애절하다가 간드러지는 뽕짝을 깔았다

야릇한 조명도 흔들렸다
핑크색 레이스치마를 팔랑이며 나비처럼 춤을 추어라
별들은 빛으로 부서져 수 백 마리 나비 떼를

향기에 취해 널브러지게 하였다







구옥남
대구 출생. 2003년 「불교문예」 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263

삼십년 나의 작은 터를 지키던 수문장

잎 하나 떨어뜨리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서
한 생을 똑 똑 부러뜨리고 떠났다






















































264

수성못











청춘, 전설 되어 수장되어있다
열망과 절망들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우리
어둠 속에서 오색 알전등이 새파랗게 뿜어내던 열기
낮에는 두더지가 되어 숨어야했던 그대

마음 한 조각 나누지 않던 그를
내가 먼저 떠났다

신문 기자였던 그대 아버지는 실직을 해야 했고
그대 소식은 풍문으로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저 물속으로 그대를 던졌다

푸른 심장에 가시를 스스로 박으며


디지털 시대에 맞추어 잘 다듬어진 산책길

음악 소리에 색색이 뿜어대는 분수
물오리들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아이들 던져주는 먹이를 먹는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그대

없어도 세월은 흘러갔다
또 다른 모습으로 흘러갈 것이다
다만 내 푸른 청춘만 고여 있을 뿐




265

빵과 시 외 1편



김경희





모르는 사람은

내게 밝은 시를 쓰라 하네
가만히 웃네
생각해 보니 그래야 될 것도 같네

어두운 글자를 지우고
고물 티브이도 끄고
일찍 잠이 드네

밤새 세상아,
국회의사당아
시야, 너도,

상쾌한 아침이군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머릿속은

정말이지 신선해
갓 구운 공갈빵 같아
왠지 고도*도 곧 올 것 같지 않아

마음이 텅 비니까
저것 봐,
국회의사당 돔 지붕도

무덤으로 안 보여
심드렁해




266

텅 빈 건 좋은 거야
텅, 텅 빈 내 시도 보이잖아

어라, 갑자기 혼란스럽네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 자고 했는데
왜 이러지
다시 시작하자

티브이도 일찍 끄고 글자도 지우고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김경희
2010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 한국작가회의회원



267

각시붕어










각시붕어

혼자 밥 먹으러 나왔네
식초병처럼 밥집 의자에 담겨 있네
말 수 적은 햇빛과 마주 앉아

손톱 끝의 식욕을 달래고 있네
한 무리의 햇빛이 왁자지껄 하게
밥집을 채우고

라디오에선 살아갈 시간도 얼마 없으니
사랑을 많이 나누라는데
겨자 때문도 아닌데

코끝이 괜히 찡하네
슬그머니 냉면 그릇에 당겨 앉네

냉면 국물이 환하네
안드레아스*에 들킬까
각시붕어

허둥지둥 냉면 속으로 몸 숨기네





*안드레아스 바르텔스(런던대학교): 체내 방사능 분포사진인 MRI를 이용하여 뇌의 영
상을 포착, 사랑에 빠지면 뇌에서도 빛이 난다는 논문을 신경학회에 발표.




268

개망초꽃 외 1편



최월강






개망초꽃 아래 붙어있는
무당벌레의 번데기 한 마리
있는 듯 없는 듯 꼼짝 않고
제 몸 크기 만한 꽃 그림자가

종일 숨기고 또 숨기네

































최월강
경북 경주 출생. 2015년 「시에」 등단.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269

통장정리











현금지급기 앞에 서면
목이 뻣뻣해지고 두 눈이 침침하다
번번이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생활의 누수를 털어놓고

차가운 카메라 속으로 들어간다
구원의 성사표를 제출하듯

낡은 통장을 밀어 넣으면
비릿한 삶의 거품이 떠오르고
현재의 잔액상태에 따라 대죄와

소죄를 구분 짓고
찌르륵 찌르륵
독감 걸린 목소리로 보속을 내린다

워리강, 신용등급을 낮춥니다
잠들지 못할 때 욥을 만나보고
세상의 욕망과 몸섞지 마세요

길다란 어항 속의 쬐그만 금붕어들
입금될 수 없는 동전처럼 소복하다











270

똥과 詩


권화빈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어제 저녁
안동 예술의 전당 북콘서트에서 받은

안상학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배는 살살 자꾸만 꼬이는데

밑구멍 그것 소식은 아직도 캄캄하다
정녕, 詩도 그렇다
이마를 부여잡고

밤온 내내 끙끙대도
그게 시원스레 잘 나오질 않는다
무한 허공 아래로

그것을 떨어뜨리는 일이나
무한 허공 입술 밖으로
그것을 뱉어 내놓는 일이

문득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권화빈
경북 영주 출생. 「작가정신」으로 등단.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표



271

깨어진 화장실 문틈사이로

살살 늦가을 햇살이 번지는 아침
























































272

비 내리는 풍경 외 1편



김봉석






삶이 그쳐서 비가 온다
흰벽에는
삼베같은 질긴 울음 스며
울먹인다



비 갠 하늘 달은 창백하다

노을에 두고 온 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희디흰 발뒤꿈치는
차마 떠날 수 없는 발걸음 때문이다



그래도 떠나는 사람은
몇 잎 비늘 두어 방울 떨굴 뿐이지만

떠나는 것들을
태우고 묻어서 잊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남은 우리들의 몫인 것을



창밖에는 다시

그친 삶의 모습으로 비가 오고
유리창너머로
남은 온기 태우며




273

하늘을 오르는 산안개 몇 조각























































김봉석
1967년 대구 출생. 2015년 「사람의 문학」 여름호 등단.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274

봄비











봄 비 사이로 꽃잎 몇


푸른 신 벗어 놓고



툭툭 뛰어 내리자



나직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선염법으로 번지는 빗물



당신 가슴에 고여 풀리는



분홍 주검


그제야 세상으로 놓여나는 봄,



봄.











275

꽃그늘 외 1편



권진희






오래도록 피어있지 못한다는 걸
저도 알길래
이리 환하게 피어나는 거라



꽃에게
꽃의 기다림에게 미안해서

나무는 오래도록 열매를 키워내는 거라


오래도록 피어있지 못한다는 걸

저도 알아서
그리 환했던 거라 사랑은



사랑에게
맺지 못한 사랑에게 미안해서
사람들은 오래도록 꽃을 보는 거라








권진희
1967년 대구 출생. 1992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 시집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276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드는

꽃그늘 아래
둥근 슬픔 하나 뚝뚝 묻어주는 거라






















































277

권 씨 표류기











가다 문득
잃어버리는 것
길을 잃을 때는 늘 그랬다 영화 속 김 씨가 그랬던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개 그렇다 길이 끝난 자리에서 생이 시작되었거나

길 끊어내는 뙈약볕 아래 여태도 裸身으로 서있는


보이지 않을 때가 왜 없겠는가

굽어서 보이지 않든
가팔라 보이지 않든
잘못 접어들어 보지 못하든



길을 놓아버린 사람은 저문 者
이번 생의 긴 하루를 노을빛으로 검붉게 칠해

서녘에 매달아버린 자



먹빛 닫힌 바닷가에서
먼 바다로 생의 마지막을 던져 넣는 별을 보며
소주를 마신다




278

언제 저에게로 몸 누일까



몸 떠는 저 마른 별빛 지켜보느라
돌아눕지도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

채석강 층층 벼랑으로 쌓여버린 시간

















































279

◼신인

또는 목련이나 붉은 동백처럼 외 4편


황정혜





미군 부대 옆

평화라는 이름으로 벽화가 그려진 담장에는
한 번도 철조망이 걷혀진 적 없네



녹이 쓸거나 반짝이거나


벽화 속 꽃들은 피었으나

져 본적이 없고
그네는 허공에 멈춘 지 오래라네



철조망 너머 흐드러진 벚꽃이나
또는 목련이나 붉은 동백처럼

흐득 흐득 떨어져 나리고 싶어


따뜻한 봄 햇살이 온종일

담장을 데워도
흰 비둘기의 심장은 뛰지 않네
-난 언제 나는 거야?

지날 때마다 나를 노려 보네






280

으스름 내린 마을엔
그 흔한 광장 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네





















































황정혜
1970년 울산 출생. 영남대학교 미대 졸업. 화가



281

마디










내 눈은

아버지의 굽은 새끼손가락을
버릇처럼 만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까시 꽃대를 양손에 흔들며
우정동 어진 골목을 함께 걸어 집으로 향하던

얼큰한 운동화의 콧노래 속에도
늦가을 바삭거리는 낙엽의 뿌리
서른의 그 무게 속에도

아버지의 펴지지 않는 마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의 그림자가
부드럽게 봉분들을 어루만지던 뉘엿한 오후
손자들의 말랑한 손을 잡고 오르던

망개나무 엉겨 곱던 백양사 산등성이에서


화해하는 법을 모르던 나는

굽은 그 손가락 위에
슬그머니 내 손을 걸쳐 놓았다




282

유월







지난겨울

가지들이 말끔히 잘려나간 은행나무들이
뭉숭뭉숭 줄지어선 군청 앞 도로가에서
여름이란 이름으로 제 잎들을 일제히 피워 올렸다


힘껏 밀어 올린 그대의 청춘은
아무리 용을 써도 무성하지가 않아
갓 병원을 나선 그녀의 머리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야생으로 돌아가고픈 그녀


미군부대 저 긴 담장 숨이 막혀
도로건너 환호하는 부산행 기차 칸으로
힘껏 뛰어 오를 수만 있다면


햇살 한줌 가릴 수 없는
정오의 그림자


뜨거운 유월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고 섰다



283

그녀의 마당









그녀의 집은 담장이 없었다

장마가 긴 여름날이면 할매 집 슬레이트 지붕에서 쭈르륵 떨어
지는 빗물을 받아내던 양동이며 분유 깡통이며 오지그릇들이 처마
밑 일렬횡대로 늘어진, 지금 생각하면 어느 설치미술가의 그것처

럼 극적이고 아름다운 하모니가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있
기 싫어 아무 때곤 할매 집 안방 문을 벌컥 열어젖히곤 했는데,
할매랑 물외를 따러 가거나 분갈이를 하거나 꽃대를 세우거나 아

니면 할매와 할배 사이에 끼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담장대신 심어놓은 천리향이며 수국이, 오종종 이끼 낀 계단가

로 파등파등 흔들린다 어느 날 복숭아 묘목도 그 옆에 심겨지고
해가 거듭하면서 내 키를 훌쩍 넘어 버린 참나리 꽃대. 할매의 손

길에만 닿으면 비실대던 묘목도 그리도 튼실하게 자라던 우정동
427번지. 코스모스길이 끝나면서 한그루 아까시나무와 마주한 그
녀의 집. 꽃들이 사시사철 피고 지는 울타리를 지나 육남매가 늘

북적대던 우리 집엔 변변한 화초하나 자랄 새가 없었지만 할매의
화단에는 벌이며 나비며 새들이 찾아들었다 해마다 처마 밑엔 제
비들이 그 노란 주둥이로 어미를 불러대고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새

끼를 낳아 어디론가 내보내던 고양이 살찐이는 내가 쥐방울 마냥
들락거리던 마루에 길게 누워 꼬리만 흔들어 댔다




284

내가 걸음마를 할 때도 꽃집 할매였고, 대학생이 되어 대구로

유학을 할 때도 꽃집 할매, 내가 첫 아이를 낳아 갔을 때도 꽃집
할매, 꽃집 할매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내가 너으 아배
보다 더 오래 살줄은 몰랐데이......”하시던 머리가 옥수수 흰 수염

마냥 고운 할매. 그녀는 당신 속으로 무엇 하나 품어내지 못하였
으나 맨드라미, 수국, 나리꽃과 살찐이, 그리고 나마저도 그녀의
마당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오늘도 빗소리에 밤새 뒤척인다 꿈결

처럼 만난다 할매 집 처마 끝 미끄럼 타고 양동이에 떨어지던 낙
숫물 소리, 그 마루에 턱을 괴고 엎드렸던 유년을.








































285

아큐정전* 2015










어느 날 간(肝)이

벼룩의 간처럼 쪼그라들어
기침 한 번 하니 툭 하고 튀어나왔다
말랑한 그것이 벼룩처럼 톡톡 튀더니 사라져 버렸다

간이 부을 일도 없고 졸아들 일도 없어
마음은 절로 평화로워 졌다



벼룩의 간도 간이라는 데
오장 육부 다 갖고 사는 일은 얼마나 고단했던지
눈치 보며 아부하며 내 속을 다 내보일 듯 했지만



-난 보여줄 게 없어요. 다 뱉어 버렸거든요



간도 쓸개도 없는 그가 큰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바람도 솔개도 슬쩍 눈치를 보다가

그가 옆으로 뒤척이자 깜짝 놀라며
회색 숲 사이로 달아나 버렸다





*노신의 ‘阿Q正傳’에서 따옴




286

산문











































영남 유림의 보수성과 진보성|정지창
‘대구발 정치혁명’과 대한민국의 장래|김형기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은 존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김태용
유아동화- 햇님과 짜장면 외 1편|최영자
불교적 문학관의 가능성|장영우
해방공간 대구지역 신문에 난 연극비평ㆍ영화비평 사례|박창원
아우라지와 몰운대에서 만난 문학의 흔적|강기희
경주, 천년의 시간이 내어준 길에서 천년의 삶을 산다|박수희




287

288

영남 유림의 보수성과 진보성










정지창





왜 왔나 왜 왔나. 이하백이 왜 왔나.
영락없이 죽어 갈 길 이하백이 왜 왔나.
왜 죽였나 왜 죽였나 이하백이 왜 죽였나.
조동아 홍조동아 이하백이 왜 죽였나.



이 노래는 팔공산 너머 경북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신원) 마을에
서 마을 꼬마들이 부르던 민요이다. 이곳에 사는 신현목(1925〜) 전

면장은 어린 시절 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니며 이 노래를 불렀다
고 한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40년 이상 마을 사람들의 입
으로 이런 민요가 불리어졌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이하백(李夏伯)은

동학농민군 지도자요, 홍조동은 인근 아래 한밤 마을(군위군 부계면 춘
산리)에 살던 홍규흠(洪奎欽 1846〜1903, 호는 조동)을 가리킨다. 그는 민
보군으로 활동하면서 이하백 부자를 비롯한 동학농민군을 죽이거

나 경상감영에 잡아 바치는 데 앞장섰으며 그러는 동안 방화로 집
이 불탔다고 한다.
부림 홍씨는 이씨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

키기 위해 이곳 산골로 은둔한 홍로 선생의 후손들로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289

당시에는 신분제 타파를 내세운 동학군을 적으로 보고 민보군을
조직하여 토벌하였다. 유림 사대부에게는 반상의 구별이 하늘이 정

한 법도, 즉 강상(綱常)이었기에 동학의 만인평등사상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포덕에 나서자 가장 먼저

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관에 고발한 것은 서원을 중심으
로 한 영남 유림이었다. 심지어는 수운의 친족인 경주 최씨 문중
에서도 그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니, 당시 영남 유

림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동학군 토벌 과정에서 예천의 양반들은 농민군 11명을 한내 모
래밭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안동의 유림 김석중은

갑오년에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하다가 충청도 보은까
지 넘어가 일본군과 협력하여 북실에서 동학군 2천 6백명을 학살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안동관찰사가 되었으
나 다음 해 1월 문경 출신의 의병장 이강년에게 붙잡혀 공개 처형
되었다.

유림의 이러한 보수성은 영남 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항일의병 활동 과정에서도 팔도의병장 유인석
(柳麟錫)은 상놈 출신의 의병장 김백선(金百先)을 양반인 중군 안승우

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항일투사 최익현이 동학군을
도적의 무리로 보아 동비(東匪)라고 지칭한 것도 양반 계층의 뿌리
깊은 계급의식을 반영한다.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부르짖은 수

구파 유림은 종래의 봉건왕조 체제와 신분제에 대한 집착,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했고 유인석의 경우처럼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벌일 때도 복벽(復辟), 즉 봉건왕조인 대한제국의 부활을 목




290

표로 삼았다. 이같은 봉건적 반외세운동은 이후 공화주의 독립운
동에게 대세를 내주고 스스로 소멸하고 말았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결합한 이른바 혁신
유림도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동산 류인식(柳寅植), 석주 이
상룡(李相龍), 백하 김대락(金大洛) 등이다. 동산 선생은 신학문이 인

륜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
동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
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와 신간회 안동지회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계속했다. 석주 선생은 의병투쟁이 실패한 다음 “50년 세월 동안
공자·맹자를 읽고 공부한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으니 생각할수록
부끄럽다”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간사한 오랑캐

무리라고 낙인찍어 배척하는 것은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통절한 자
아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

회를 설립하였고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
고 서로군정서 최고책임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백하 선생은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정하

고 협동학교의 운영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합방 후에는 만주로 망
명하여 유교적 이상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같은 안동지방의 혁신 유림에 못지않게 진보적 독립운동에 투

신한 대쪽 같은 선비로는 성주의 심산 김창숙 선생(金昌淑 1879〜1962)
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의 부친은 동학혁명 당시부터 신분의 차이
를 넘어서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하도록 시켰으며, 늙은 종과 일꾼

부터 먼저 식사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심산 선생은 파리 장서 사
건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다음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에 반대했다. 일제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었




291

으나 해방 후에는 성균관대학을 세우고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웠
다. 5ㆍ16 쿠데타 후에는 병상으로 찾아온 박정희를 거들떠보지

않고 외면하는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이밖에도 김재봉, 권오설, 나준태, 김남수, 안상길 같은 사회주
의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과 김지섭, 김시현, 김정섭 등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도 영남 유림의 후손들이었다. 역시
의열단원인 시인 이육사 선생은 유림 명문가인 진성 이씨 출신으
로 「광야」, 「절정」, 「청포도」 같은 그의 시가 유가적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에서 영남 유림의 진보적 전통
은 빛났으나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 진보의 맥은 단

절되고 희석되고 변질되었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
지는 군사독재시대에 영남은 호남에 대한 배타적 지역감정과 집권

세력과의 동일시가 결합한 이른바 티케이(TK)정서에 오염되어 수구
보수의 철옹성으로 굳어졌다.
이제 영남의 유교문화 속에서 진보의 맥을 찾아내기란 낙동강

모래밭에서 금을 골라내는 것만큼이나 힘들게 되었다. 오히려 영
남의 진보적 전통은 민족자주와 생명평화의 문화의식을 탐색하고
실천한 이른바 분단시대의 영남 3현에게 전승된 것처럼 보인다.

영남 3현은 이오덕(1925〜2003), 전우익(1925〜2004), 권정생(1937〜2007)
세 분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사상은 유교적 전통과는 거리가 멀지
만 분단체제에 기생한 독재 권력과 자본주의적 물신주의를 추상같

이 비판하고 꼿꼿한 자세로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
품성과 기개는 영남 유림의 선비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받은 것

처럼 보인다.




292

언젠가 국정 교과서나 검인정 교과서 시대가 지나고 지역별 자
유 교과서 시대가 온다면,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그날이 오면, 무엇보다도 최치원의 풍류사
상을 원류로 하여 원효의 민중불교 사상, 일연의 민중적 불국정토
사상을 거쳐 정도전의 민본 유가정치 사상, 김시습의 기철학, 최제

우와 최시형의 동학사상, 혁신 유림의 애국계몽주의, 김범부의 동
방사상, 일제시대의 영남 아나키즘, 해방 이후 영남 3현의 민족자
주 생명평화 사상, 10월항쟁과 2•28항쟁, 전태일과 조영래의 노동

인권사상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진보적 사상의 흐름이 중요한 자산
으로 평가되고 수용된, 지금보다는 훨씬 풍성하고 균형 잡힌 한국
사 교과서로 학생들은 공부하게 될 것이다.






























정지창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독어과 졸업. 영남대 교수, 부총장 역임. 저서 문오늘도 걷는다
마는분외 다수



293

‘대구발 정치혁명’과 대한민국의 장래










김형기





4.13 총선의 최대 관심지역은 단연 대구였다. 한 세대 이상 오

랜기간 새누리당의 철옹성이었던 대구에서 과연 야당 국회의원이
나오느냐, 새누리당 공천에서 터무니없이 배제되어 무소속으로 나
온 현역 국회의원들이 생환하느냐에 전국이 주목했다.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대구의 정치 1번지 수성갑에서 31년만
에 야당 김부겸 후보가 62% 대 38%의 압도적 표차로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 출신 무

소속의 유승민, 주호영 후보가 생환했다. 더불어민주당 공천에서
부당하게 컷 오프되어 무소속으로 나온 홍의락 의원도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이번 총선 결과는 가히 ‘대구발 정치혁명’이라 할만하다. 왜 ‘대
구발 정치혁명’인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한세대 이

상 유지되어온 대구의 일당 독점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새누
리당 일색의 정치판이 새누리당(빨강), 더불어민주당(파랑), 무소속
(흰색)이 공존하는 3색의 정치판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다양성이

실현되어 대구에서도 이제 여야간 의미있는 정치적 경쟁이 가능하
게 된 것이다. 대구시가 내건 ‘컬러풀 대구’란 구호의 목표가 정치




294

영역에서 달성된 것이다.
일당 독점체제에서 여야 경쟁체제로, 정치적 획일성에서 정치적

다양성으로 전환했기에 정치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대
구에서 양당체제가 성립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이제 그것을 향한
대전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동안 대구의 일

당 독점체제를 고정불변의 상수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이
런 시각에서 지식인 사회와 야권과 진보진영에서는 좌절감과 무기
력과 냉소주의가 팽배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 땅밑에서 마

그마처럼 끓어오르던 민심이 폭발하여 뿌리 깊은 일당 독점체제를
일거에 뒤엎어버렸다.
총선 전 3월 30일에 대구에서 지역의 밝은 미래를 위해 각계

인사 1,033명이 “이제 대구를 바꿉시다”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학계, 종교계, 의료계, 법조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경제

계 등 각계 인사들은 호소문에서 4.13 총선을 계기로 대구의 일당
독점체제를 여야경쟁체제로 전환시킬 것을 시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정치적 경쟁이 없는 일당독점이 지역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주된

요인중의 하나라고 인식한 호소문은 더 이상 특정 정당에 표를 몰
아주는 ‘묻지마 투표’를 하지 말고 능력이 있는 야당후보에게도 투
표하여 여야 국회의원이 지역발전을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총선을 앞두고 발표된 이 호소문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규모의 각계 인사 호소문 발표 자

체가 지역에서 초유의 일이다. 4년 전에도 총선을 앞두고 지식인
선언이 있었다. 이번과 동일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때

는 교수중심의 500명 규모의 선언이었다. 이번에는 각계의 다양한




295

인사들이 1,000명 이상 참여한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이제 대구도 변
해야한다는 것이 지식인 사회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4.13 총선에서 대구시민의 투표행위에 큰 변화가 나타났음이 주
목된다. 대구시민은 더 이상 특정 정당을 위해 ‘묻지마 투표’를 하

지 않았다. 경쟁력이 있고 진정성이 있는 인물이면 야당 후보도
당선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남이가’하는 배타적 지역
주의가 무너졌다. 대구시민을 무시한 하향식 공천학살을 자행한

오만한 여당에 대해서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대구시민이 건전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지혜롭게 투표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정치문
화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배타적 지역주의는 광주전남에서 먼저 무너졌다. 광주전남
에서의 더불어민주당 독점체제는 2년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이

정현 후보의 당선으로 깨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총선에서 순천에
서 이정현 의원이 재선되고 광주전남과 전북에서 국민의당이 석권
하여 이제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호남당이 아니게 되었다. 호남

에서 일당 독점체제가 결정적으로 붕괴된 것이다. 득표율 기준으
로 보면 호남은 양당 경쟁체제가 성립하였다 할 수 있다.
부산에서의 더불어민주당의 대약진으로 부산에서도 지역주의가

크게 무너졌다. 경북이 여전히 새누리당 독무대이긴 하지만 대구
에서는 야당 김부겸 후보 당선과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의 선전으로
새누리당 철옹성이 무너졌다. 그래서 이제 ‘새누리당=영남당’, ‘더

불어민주당=호남당’이란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
는 실로 큰 변화다. 한국 정치 발전의 발목을 잡아온 배타적 지역

주의가 사라지는 일대 정치혁명이 아닐 수 없다. 대구에서의 야당




296

국회의원 당선은 이 정치혁명의 결정판이다. 이제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이 민심의 심판을 통해 전국정당화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

어진 것이다.
‘대구발 정치혁명’은 광주발・부산발 정치혁명과 어우러져 대한민
국의 장래에 밝은 전망을 던져준다. 광주와 부산과 대구에서 실현

된 정치적 다양성은 이들 도시 발전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에서 제도와 문화의 역할을 중시하는
이론에 의하면, 정치적 다양성이 있는 지역은 정치적으로 획일적

인 지역보다 경제가 더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대전, 인천, 부산 등 정치적 다양성이 비교적 큰
지역이 정치적으로 획일적인 대구와 광주보다 훨씬 더 경제발전이

잘 되고 있다.
특히 지역에서 창조경제가 실현되려면 정치적 다양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필수적이다. 서로 다른 강령과 정책을 제시하는 유력한
정당들이 공존하는 정치적 다양성이 실현되면 문화적 다양성도 촉
진될 것이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가진 이질적인 사

람들이 섞여 살면서 서로 경쟁하며 협력할 때 지역주민의 창의성
이 고양되어 지역경제의 역동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번 총
선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한 박근혜 정부가 내걸고 있는 창조경제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역설적이다.
대구의 김부겸 야당 당선자가 지역발전을 위해 여당과 협력하는
정치를 펴겠다고 한 약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다. 그의 약

속이 지켜지면 ‘대구발 정치혁명’은 여야가 서로 발목을 잡는 공멸
의 정치가 사라지고 서로 손목을 잡는 상생의 정치가 열리는 계기

가 될 것이다. 정치적 다양성이 실현된 상태에서 여야 국회의원이




297

지역발전을 위한 좋은 비전과 정책을 다투어 제시하며 서로 경쟁
하면서도 협력하는 상생의 정치를 펼 때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따

라서 대한민국이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나라 전체에서도 새롭게
형성된 3당체제에서 국회에서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정치가
이루어지면 국회가 나라발전을 촉진하는 민의의 전당이 될 것이

다.
4.13 ‘대구발 정치혁명’은 ‘대구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말이 참임을 보여줄 것이다. 3만불 소득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일

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엄중한 상
황에서 ‘대구발 정치혁명’은 지역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대한민국을 4만불, 5만불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역사적 계

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은 영남일보 4월 18일자 기고 내용을 보완했습니다.




















김형기
경북 경주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현재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저서 문새정치
경제학분, 문한국 노사관계의 정치경제학분외 다수



298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은 존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










김태용





수백만 명의 촛불이 서울 도심 한 복판에 모여 장관을 이루는

광경은 차라리 하나의 예술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준 비폭력 평
화주의, 집회가 끝난 후 자발적 청소로 이어지는 시민의식은 감탄
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지난 주말 집회로 제8차 촛불집회가 끝

났다.
나는 누구처럼 KTX 타고 서울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는 열의는
보이지 못 했다. 그것은 하루하루가 빠듯하고 송곳 꽂을 틈도 없

이 바쁜 생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 중앙통인 한일로에서
열린 집회에는 꾸준히 참석해 왔다. 때론 지인들과, 때론 지역 당

원들과 함께 참석해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지지난 주 달서구 지역집회 때는 수능시험을 막 끝낸 막내아들
을 데리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촛불을 들기도 했다. 아

이에게 이런 역사의 큰 물결을 보여주고 싶고, 사회적 이슈에 직
접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나는 지난 4월에 있었던 20대 총선에 예기치 않게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라는




299

표현은 총선을 위해 미리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대구시 달서구(을) 지역구에는 현역인 여당

의원만 출마하고 타 후보자가 없어 여차하면 무투표 당선이 생길
판이었다. 대구지역은 워낙 새누리당 강세지역이자 보수의 본거지
라서 웬만한 용기를 가지지 않고는 선출직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

기가 쉽지 않다. 여차하면 선거비 보전도 못 받고 말 그대로 경제
적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인 것이다. 오죽하면 덕담성이긴 하지
만, 대구에서 야당으로 출마하면 독립운동 한다고 하겠는가.

나는 무투표 당선은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 당원들과 상의한 후에 출마를 결심했다. 그때까지 나
는 민주당의 당원이었다.

출마한 후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당원과 주변 지인들의 헌신
적인 도움이 컸다. 한 가지 기억할 일은 당시 나의 선거 캐치프레

이즈가 “지역 야당의 싹을 키워 달라” “대구를 민주주의의 꽃밭으
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처럼 지난 총선에서 대구에서는
30여년 만에 김부겸 민주당 후보가 야당으로 당선됐다. 김 후보의

당선은 개인에게도 물론 큰 영예이지만, 지역 정치판에 변화의 바
람을 불러일으키는 한 마리 봄 제비였다. 얼음짱 같이 꽝꽝 얼어
붙은 수구보수라는 동토의 땅에 해빙의 봄바람이 불고 곧 완연한

봄이 올 거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선거운동 내내 “달서(을)에
는 김태용, 대구에는 김부겸”을 외쳤다. 대구에도 야당 의원을 당
선시켜 대구를 폐쇄적 도시, 고담도시에서 탈출시키자고 외쳤다.

사실 나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김부겸 후보는 당선 가능
성이 높았기 때문에 내 선거보다는 김부겸 선거에 더 주력한 그런

한판이었다. 그만큼 김부겸 후보의 당선은 대구정치권에 큰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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