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해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율성의 회복을 위하여, 대학구성원들은 함께 소통하며
지혜를 짜고 그 결과를 쟁취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실천해야 할 것
입니다.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보면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대학 자율성(autonomy)에 대해서도 대학 내외 집
단적 지성에 의한 끊임없는 지혜 모으기가 선행되고 그 실행이 뒤
따라야 할 것입니다.
경북대학교의 경우, 지난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총장선출문제와
1)
관련하여 자율성이 심대하게 훼손되어 오는 상태에서 , 대학구성
원들이 대학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짜고 실천
적 활동을 해 왔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일관되
게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왔고, 대학 자율성 문제를 단순히 지식
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의 대상으로 넓혀서 여러 가지 활동
을 체계적으로 해 왔습니다.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그러한 활동은 다른 대학구성원들에게
도 점차 영향을 미쳐서 대학 자율성 회복에 함께 하도록 유도해가
2)
고 있어서 더욱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 그러한 활동을 근거로
하여 이제 경북대학교의 부정적 이미지는 날로 개선되어 가고 있
습니다. 지금의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될 때 그들이 경험한 대학
자율성이라는 가치 실현과 긍정적 주도성은 보다 큰 힘을 발휘하
게 될 것입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대학 자율성이 훼손된 현실을 잘 극복하고 회
복하게 되면 오히려 대학 사회는 커다란 질적 비약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제대로 된 대학정상화는 겪었던 고통의 슬픔 보다 오히
려 더 크게 회복의 기쁨을 안겨 줄 것입니다. 정권은 짧고 정의의
101
역사는 길듯이, 대학 자율성이라는 정의의 흐름도 구성원들이 회
복을 위하여 애쓴 만큼 오래도록 지속될 것입니다.
-2016. 11. 10. 김사열 <빼앗긴 대학 자율에 대한 토론회> 자료
◼참고자료
1) 경북대 현장 훼손 기록
-[2014년 6월 26일] 8명 후보가 출마한 간선제(대학 내부위원 36명, 대학 외부위원 12
명으로 총 48명 구성) 총장선거(1차)에서 김사열 후보가 1순위, 김동현 후보가 2순위로
각각 선출되었음(외부총추위원 1명 불참으로 25:22).
-[2014년 10월 17일] 선관위 관리 미숙으로 공대 총추위원 1명 더 배정한 일로 일부
후보들이 재선거 주장 → 7명 후보들(후보 1명 불출마)이 재출마한 간선제 총장선거(2
차)에서 김사열 후보가 1순위, 김상동 후보가 2순위로 각각 선출되었음 (29:19).
-[2014년 12월 16일] 교육부에서 경북대 대학본부로 공문을 보내어 10월 17일 선거
결과에 의한 두 후보에 대하여 ‘귀 대학에서 추천한 총장 임용후보자를 임명 제청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라는 통보 보내 옴.
-[2014년 12월 26일] 교육부에서 교수회로 「공공기관의 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 제9
조 제 1항 제5호에 의거 비공개 대상이라고 알려옴.
-[2016년 8월 8일] 오후 4시 총추위 재소집하여 2014년 10월 17일 선거 결과를 존중
하여 두 후보(1순위자 김사열 교수, 2순위자 김상동 교수) 재추천에 대한 추인성 찬반
투표 실시: 총추위원 48명 중 44명 참가, 찬성 36표, 반대 8표로 의결함. [2016년 8
월 17일] 두 후보자 재추천 서류 발송.
-[2016년 9월 21일]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주재의 인사위원회가 열려서 우병우 민정수
석의 강력한 주장으로 경북대 총장으로 2순위자 김상동 교수를 임용하기로 결론 내렸
다고 전언됨.
-[2016년 10월 21일] 전날 오후 7시 전자문서 공문 통해 2순위자 김상동 교수를 총장
으로 10월 21일부터 임명하였음.
2) 현장 회복 기록
-[2015년 8월 20일] 오후 2시, 경북대 김사열 교수의 행정소송 1심 최종선고가 서울
행정법원(재판장: 박연욱, 판사: 민병국, 박혜영)에서 승소로 판결함(변호사: 장윤기, 이
담, 장미영).
-[2015년 5월 28일] 개교기념일 맞이하여 범비대위 주관으로 <경북대 총장임용을 촉구
하는 교육부, 국회 나들이> 행사 실시(4대의 ‘경GO버스’에 160여명 분승하여
참가). 세종시의 교육부를 방문하여 교육부장관 면담 시도와 「경북대총장 임용을 촉구
합니다!」 서명 용지(13,166명) 전달 →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 연 후, 오후 4시부터
102
경북대학교 범비대위 주최로 「경북대학교 총장부재사태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음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제3간담회실),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설훈 위원장에게 13,166
명의 서명지 전달.
-[2016년 7월 12일] 경북대 학생 3,011명이 “총장공석사태 국가가 배상하라”고 대구
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음. 참가자 1인당 1천 원씩 소송비용을 마련하고, 동문출신 대구
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법률 지원을 맡음. 1인당 10만원씩 손해배상금 청구.
-[2016년 10월 25일~] 대학본부 건물에서 2순위자 총장임용 반대 포함 시국문제 해결
을 촉구하는 교수(손광락, 임승택, 엄창옥 등) 단식농성 돌입.
-[2016년 10월 28일~] 대학본부 건물 앞에서 박상연 총학생회장 단식 농성 시작.
-[2016년 11월 2일~] 북문에서 학생 중심 파란장갑1인 시위 시작.
-시국대회: [10.31] 1차-대학본관 앞, 400여명 참가 / [11.8] 2차-북문, 학외 가두시
위, 450여명 참가.
103
헌신과 순결,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배창환 시인 대담
배창환 시인이 올해 집안 나이로 환갑을 맞이했다. 요즘은 워
낙 장수시대라서 시중 풍속이 환갑 정도에서는 별 다른 잔치도 없
이 그냥 지나간다. 적어도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문학을 비롯한 문
화예술, 교육 분야에서 선구적인 탐구와 자발적인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중요한 업적을 남긴 그의 환갑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서운하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큰 잔치를 벌이기도 쑥스러운
일이고보면 그 동안의 문학적 삶을 한번 글로써 라도 정리할 필요
는 있겠다 싶었다.
십 수 년 전 나는 그의 시집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해설에
서 배창환 시인이 대구경북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시단에
서 훨씬 주목받는 시인이 됐을 텐데, 하면서 고립무원 수구보수
104
변방에서 홀로 싸우는 그를 지원해줄 매체나 인력이 없음을 안타
까워 한 적이 있다. 혹자는 나의 이런 생각을 비문학적 세속주의
쯤으로 비난할지 모르겠으나, 당대의 문학은 기왕에 끼리끼리 하
는 것이고 보면 평가나 가치설정의 중요성이 대두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의 문제이다.
전교조운동으로 10년 넘게 학교 밖에 쫓겨난 그의 교육운동의
이력도 들여다보면 형극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문화분권」3
집에서는 배창환 시인을 모시고 그의 문학예술과 교육에 대한 이
야기를 들어 봤다.
김용락 -더운데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방학 중이지요? 근황에
대해 밝혀 주십시오.
배창환 -예, 방학입니다. 방학은 방학인데 방학이 아니군요. 학교
에 수업하러 가고 또 지금은 교사들 상대로 하는 목공 연수 다니
고 있습니다. 손에 대패를 쥐어보고 끌로 파내고 망치로 못을 두
들기면서 나무와 친해지는 작업이지요.
그냥 나무를 만지고 싶어서, 내 손으로 작은 의자라도 뚝딱 만
들어내는 힘을 갖고 싶어서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원래
도목수였는데, 나는 그 피를 전혀 받지 못했는지, 모든 게 서툴고
힘써야 하는 일은 힘에 부치기만 하데요. 요즘은 주로 전동기기를
써서 일 하는데, 전동기기도 다루는 일이 쉽지 않더군요. 한 마디
로 나무도, 기계도 모두 내 삶에서 멀어져 온 느낌입니다. 내 손으
로 아무것도 만들 필요가 없이 필요하면 돈 주고 구입하는 데 익
숙해져 왔고, 아버지 따라 일하러 가 본 일도 없으니 일머리가 제
105
대로 트일 리가 없지요.
나중에 자연 속에 들어가면 내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
어서 시작한 일인데, 일을 조금씩 하면서 눈여겨보니 나무가 만나
서 이루어지는 간단한 구조물은 뼈대가 조금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직은 까마득해요. 나 같은 사람이 열흘 만에 다 체득하면 나무
만지는 목수 일꾼들 다 굶어 죽게요.... 어쨌든 나무의 속살이라
할 나이테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어요.
김용락 -아, 목공 배우러 다니시는군요. 부지런하신데요... 선친께
서 도목수였다는 사실은 들은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대구로 이주
해 비산동 어딘가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기억나고. 나무의 속살이
아름다운가보지요? 특히 고생을 많이 한 나무가 속살이 더 아름답
습니까? 어떻습니까?
형이 고향의 주산인 가야산을 시집 제목으로 쓴 겨울 가야산
이라는 시집을 낸 바도 있고, 여러 시편에서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데, 출생지, 어릴 때 성장과정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배창환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성주 가천 가야산 자락이었고, 지
금의 성주댐 바로 아랫마을 강정이에요. 우리가 마을을 떠나고 한
참 뒤에 댐을 만들면서 마을 일부가 뜯겨나갔고, 논밭은 산자락에
붙은 것 말고는 북쪽 봉두들판 쪽은 거의 다 잠겼지요. 집들만 살
아남아 옛 모습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데, 그나마 고향이 몽땅
잠기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지요. 김태수 시인이 다니던 봉두초등
학교는 그 이웃 마을 들판 가운데 있었고 모두 댐에 잠겨버렸지
106
요. 실향민의 상실감을 나는 그 댐에 잠긴 마을을 바라볼 때마다
아프게 실감해요.
거기서 다섯 살까지 살다가 남쪽 들판으로 내려와 수성동 갈암
이라는 마을에 살게 됐어요. 대가족에서 살림이 난 것이지요. 참
신기한 것은 강정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마을은 골목이나
길, 뒷산 등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함께 놀던 동무들의 얼굴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이
갈암마을에서 오고 있고, 내 시에서 자연 생태의 생생한 그림과
이미지는 모두 여기서 생겨나고 있어요.
이 마을은 자라면서 몰랐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을 따라
대구로 나오고 대학 다니면서 친구들의 고향마을이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내가 얼마나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자랐는가를 알게 됐
지요. 나는 원래 모든 마을은 배산임수 그대로 뒷산이 있고, 눈앞
에 가슴을 확 틔게 해 주는 너른 들판 그 한가운데로 적당한 크기
의 시내가 흘러서, 냇가에서 목욕도 하고 고기도 잡고, 들로 산으
로 마음껏 거침없이 놀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갈암마을은 그런
걸 모두 갖춘 곳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자라게 해 주신 하나만으
로도 부모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참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자
연을 누리고 즐기면서 자랐지요.
김용락 -그런 좋은 곳에서 태어나서 좋은 시인이 된가 봅니다. 사
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공간적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잖아
요. 물론 시간도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성장했는가
하는 문제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게 사실이지요. 저도 촌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우리 고향에
107
는 가야산 같은 그런 위용을 자랑하는 큰 산은 없었지요.
배창환 -자라면서 동무들과 소 먹이러 가거나(당시 우리 집엔 소
가 없어서 사실 나는 그냥 동무들 따라 놀러가곤 했지만) 나무 하
러 마을 뒷산을 올라가 보면 가야산 해인사 뒷쪽 북사면의 위용이
장엄하게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지요. 그리고 수륜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가야산 동쪽 끝자락 들판 가운데 있어서 등하교길에
늘 가야산의 사계절을 다 보며 다녔지요. 위압적인 듯하면서도 포
근하게 안아주는 대자연의 모습이 그때 이미 내게 전면적으로 들
어온 것이고, 어딜 가나 내가 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산이 되
고 들판이 되었어요. 나를 도시인으로 귀화할 수 없는 사람으로,
‘천생 촌놈’으로 만들어 준 것도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덕분이지
요.
우리 세대가 운이 좋았던 점은 전후에 태어난 세대여서 그 고통
을 직접 겪지 않아도 됐다는 점과, 농경시대의 끝자락을 경험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는 점을 꼽을 수 있어요. 물론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
는 독재 정권의 공포정치 속에서 보내며 살아야 했다는 점은 좋았
다 할 수 없지만, 그 시절 또한 민주화운동의 긴 여정이었다는 점
에서 보면 예외가 아니지요. 이를테면 내가 극악한 유신 독재시대
에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제대하고 다시 복학했을 때가
79년 2학기니까, 10.26이 터져 유신이 종말을 맞고 곧이어 12.12
전두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 발 앞을 알 수 없는 초긴장
속에서 해를 넘겼는데, 이듬해 봄에 민주화의 염원과 에너지가 캠
퍼스를 가득 채우던 이듬해 5월 광주항쟁, 그리고 무자비한 진압,
108
5공의 등장으로 다시 억압체계가 이어지던 중요한 시기를 대학 생
활의 마지막 1년 동안 다 겪을 수 있었다는 점이, 내 시와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거든요. 그런 점으로 보면, 그 또한 운이 좋았다
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농경시대의 마지막을 농촌에서 겪을 수 있었다는 점은
내가 흙을 떠나 살 수 없게 하는 정체성을 갖게 되고, 나를 자연
의 일부로 이해하게 된 것, 아버지 세대뿐 아니라, 몇 천 년을 이
어 온 농경인들의 삶의 모습이나 이미지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왜
곡된 근대화와 자본의 쓰나미가 농촌사회를 조각내어 해체하는 현
실을 겪고 그에 대한 체질적인 반감이나 저항을 내면화하게 된 점
등은 내 시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지요.
김용락 -성주라는 곳은 가야산이 있어서 경치도 절경이지만 문화
적인 전통도 있는 곳이잖아요. 그런 문화적이고, 학문적인 전통이
시인의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배창환 -성주가 정우락 교수의 표현을 빌면 전통적으로 ‘퇴계와
남명의 학문적 회통로(回通路)’가 되는 지역이어서 많은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사람과 문학(학문)을 실감으로 생생하게 이해
하는 데 큰 힘이 됐지요. 김용락 시인과 함께 전에 둘러본 적 있
는 성주 수륜면 회연서원도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의 학통을 모두
이어받은 한강(寒岡) 정구 선생이 회연서당을 일으킨 자리인데, 제
자들이 그의 사후에 그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그 서원이
기대고 있는 작은 뒷산이 대가천의 물결을 받아내면서 절경을 이
루는데 그곳이 한강대(寒岡臺)이고, 거기서 북쪽으로 물 따라 1킬로
109
미터 정도 올라가면, 가야산이 훤히 보이는 우리 외갓집으로 건너
가는 보(洑)가 있는데, 그 주위 절경이 봉비암(鳳飛巖)이거든요.
이곳이 한강 선생이 노래한 ‘무흘구곡’ 중 제1,2곡(曲)에 해당하
는데, 가야산 동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수륜, 대가, 가천, 금수, 증
산 계곡 명승지 아홉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읊은 것이지요. 그
를 통해 우리는 옛 선비 문인들이 자연과 학문을 한몸으로 받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 집은 일곱 식구에 논 한 마지기와
초가삼간 한 채가 전부였는데, 우리 외갓집 갈 때 봉비암 보(洑) 건
너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는 ‘갓말(갓마을)’이라는 동네는 한강 선
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고, 대궐 같이 즐비하게 늘어선
집들 사이에 한강 선생의 생가가 있는 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우
리는 주눅이 들어서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지나갔지요. 그때
뒤에서 누가 “야, 이놈!” 부를까 싶어서, 마치 밤중에 마당 끝 깜
깜한 화장실을 가서 볼일 보고 나올 때, 귀신이 잡아당기는 듯한,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긴장감으로 바짝 쫄아서 다니곤 했어요...(웃
음)
그런데 그 갓말에 한강 선생의 후손 중에 내가 수륜초등학교 2
학년 때 담임 맡으신 정채호 선생님이 계셨고, 그 은사님의 딸이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제가 대구 경화여고에서 담임 하면서
국어 가르쳤어요.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대구에서 한문 교사가
되었고, 그때 은사님 댁에 가정방문 가서 만났던 대학생 오빠가
지금 경북대학교 국문과 정우락 교수인데, 이미 저명한 중견 학자
가 되어 한강과 남명의 학통을 크게 잇고 있으니, 참 인연이 이렇
게 이어지는 것이구나 싶어요. 정우락 교수와는 몇 년 전에 성주
110
의 대표 시인들의 대표시를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망라하여별고
을 성주의 시와 시인들(1,2)이란 이름으로 펴내는 작업을 함께 한
일이 있어요. 참 소중하고 진귀한 인연이고 경험이었지요.
한 사람의 시인이나 학자가 만들어지는 일도 그냥 되는 것이 아
니라, 흙 한 줌, 햇빛 한 올, 시공을 뛰어넘는 많은 사람들의 숨
결, 역사와 문화가 모두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비로소 되는 것임
을, 이론이 아니라 실감으로 느끼게 해 준 데 감사하고 있지요.
김용락 -재미있는데요. 제가 태어난 의성군 단촌이라는 데도 소위
안동지역의 유가들로 싸여 있는 곳이에요. 북쪽에는 퇴계의 구 고
제 중의 한 분으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 선생의 종택과, 제 외가인
달성 서 씨 문중의 약봉 서성 부자를 기리는 소호정이 있고, 동쪽
에는 서애 유성룡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안동 김 씨 집성촌인
사촌마을이 있어요. 가까운 곳에 또 하회마을이 있고 해서 어릴 때
부터 양반, 예의범절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지요. 기억나는
것 하나가 제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 이웃 어른을 방금 만나고 곧
또 만나도 인사를 깍듯이 하라고 시켰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가
지금도 어른들에게 인사 하나는 잘하지요(웃음)
달(큰 아들)이가 결혼한다고요? 감회가 있겠는데요?
배창환 -우리 집은 5남매인데, 내가 둘째(차남)입니다. 아버지는
형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6.25가 나서 입대하셨고, 다행히 살
아오셔서 형은 유복자를 면했고, 나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요.
며칠 후면 제 큰아이가 장가가는데, 세월은 정말 광속(光速)으로 흐
른다는 걸 실감합니다. 내가 1980년대에 문학운동과 교육운동에
111
정신이 없을 때 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마치고 데리고
성주 들어갔는데, 어느 새 커서 대학 나오고 군대 제대하고 결혼
이라니... 뒷강물에 밀려서 앞강물이 흐르듯이, 여기 머물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도 합니다. 결혼식은 요새 아이
들 저들이 준비 다 하니까 나는 그냥 달력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김용락 -형 말마따나 참 세월이 빠르네요. 형이 결혼할 때 연세대
성낙운 교수가 주례사로 시를 낭송하던 게 어제 같은데 그 아들이
벌써 결혼을 하다니... 달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서 결혼을 한다니
축하드리고, 사실 저는 형이 전교조로 해직돼 10년간을 학교 밖에
서 고생하다가 대구시내 학교에 복직돼서 곧 아이들 데리고 고향
인 성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남들은 시
골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다 대구로 나오는데 형은 그 반대
길을 갔으니... 제가 형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지는 모
르지만,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아이들 대도시에서 교육시켜 명문대
보내고 소위 사회적 출세를 시키는 걸 보람으로 알고 있는데, 형
은 그 길을 가지 않았으니.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
럽게 만들어요.
김용락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배창환 -문학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는 뚜렷하지 않아요.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마칠 때부턴지 중학교 입학하고부턴
지 종이를 끈으로 묶어서 표지에 그림을 오려 붙이고는 문집 비슷
한 걸 만들었던 기억은 있어요. 거기 담긴 글이래야 교과서에 나
112
오는 동시나 동요 가사를 모방해서 쓴 것들인데, 주제는 주로 ‘고
향 그리워’ 같은 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걸 보면 내 시의 고향
은 역시 ‘고향’이었고, 흙이었지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만난 한 여학생이 나의 감성을 온전히 일깨
워주었지요. 그 아이도 우리 고향 수륜 아이였고, 내가 일찍이 5
학년 때 가족을 따라 정든 모교를 떠났을 때 그 아이는 거기 남아
졸업했다가 뒤에 대구에서 여고를 다니고 있었고, 모교 동기회 모
임에서 만났지요. 이후 그 아이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나를 한 인
간으로 성숙시키고 문학을 더욱 가깝고 절실한 것으로 만들어 가
는 데 큰 계기가 됐지요. 특히 그때 주고받은 편지는 점 하나, 획
하나에도 온 정신과 혼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최고의 집중력으로 다듬은 문장이고 시 그 자체였다고 생각해요.
그때 언어가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훌륭하면서도 부
족한 도구인가를 깨달은 것인데 그게 시(詩)의 시작이잖아요.
김용락 -대학 가서는 어땠어요? 김춘수 선생한테 배우셨지요?
배창환 -대학에 가서는 스스로 ‘복현문우회’를 찾았는데, 그때 경
북대학교의 유일한 문학 동아리가 복현문우회(복문)였거든요. 거기
서는 시 공부를 미친 듯이 했지요. 마른 논이 물을 확확 빨아들이
듯이... 고등학교 때는 학비를 면제받으려고 학교 협동조합에서 근
로 장학생으로 일하느라 동아리 활동을 전혀 못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심리랄까, 동아리 모임에는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을 만큼 말이지요.
동아리 선후배들과도 물론 그랬지만, 국어과 동기들과도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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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는(실제로는 막걸리를 마셨는데) 문학 그룹을 형성하여 오직
시 공부에만 매달려서, 술집이나 풀밭이나 아무데서나 모이면 술
마시고 토의하고 달달 외우고 쓰고 했지요. 그때 난생 처음 시인
이란 분을 만났어요. 참여 순수 논쟁의 한쪽 중심축이었던 김춘수
시인이었는데, 복문 동아리 지도 교수이기도 했던 그분에게서 교
양과정부 때는 <교양국어>를, 2학년 때는 전공 필수 과목으로 <시
론(詩論)>도 듣게 됐지요. 그 수업에 나름대로는 심취해 있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것은 받아 옮겨 적었고, 수업 중에 언급된 릴케의
저작물을 이것저것 찾아 읽기도 하고, 당시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
인 총서’ 2권으로 나온 시집 처용의 많은 시는 달달 외우고 있
었고, 술집에서도 토론의 주요 제재로 삼았지요. 하지만 교수연구
실에 찾아가거나 따로 작품을 보여드린 적이 없었어요. 그땐 동아
리 선배들에게 시평 시간마다 형편없이 깨지는 게 복문의 전통이
어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터였고, 당시 제자들 시평에 깐깐하
기로 소문난 분이어서 시를 보여드릴 용기도 없었던 거지요.
김용락 -대학생 때 당시 문단의 중심에 있던 시인인 김춘수를 만
난 건 나름 행운이었겠어요.
배창환 -김춘수 시인의 초기 시에는 강한 리듬과 회화성이 넘쳐서
매력이 있었고 중독성이 커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지요. 경북대
뿐 아니라 이 지역의 문학판은 김춘수 시인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고, 거기서 헤어나 홀로서기를 한 시인이 많지 않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에요. 나 역시 79년 2학기에 제대 복학하고 유신
이 종말을 향해 가던 때 복문에 복귀하여 진보적인 학생운동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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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임광호, 정대호 같은 후배들과 만나고, 10.26이 일어나 유신이
막을 내리고 변혁의 소용돌이에 캠퍼스가 온통 휩싸이던 때, 시와
역사 공부를 다시 하면서, 일단 벗어날 수 있었지요. 이후 그분이
당시 군부 독재정권의 국회의원으로 들어가는 정치 행보를 보면
서, 이른바 순수시의 맨얼굴을 보게 된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70
년대 순수시와 참여시 논쟁을 내적으로 정리하고, 문학과 현실 그
리고 시인과 삶의 문제 쪽으로 생각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데는 도
움이 됐지요.
김용락 -형의 시에는 유독 아버지가 많이 등장하지요?
배창환 -암흑기 유신시대 압제 아래 대학을 염세주의자로 헐렁하
게 다니며 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 학점 왕창
날리고 휴학계 내곤 입대 했는데, 79년 제대하고 8월에 복학할 무
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내 시에 꾸준하게 등장하는 ‘아버지’는 해방 이후에 볼 수 있었
던 전형적인 빈농의 아들이었어요. 6.25 전에 어머니와 결혼하여
형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나 입대하고 전쟁 끝나고
제대하여 논 한 마지기 받고 살림났는데, 온갖 발버둥 다 치며 살
다가 60년대 말에 이농하는 행렬을 따라 대구로 나와 평생을 돈
걱정하며 일하시다 좀 일어설 만할 때 돌아가셨거든요. 그 아버지
가 내가 제대 복학하여 후배들과 역사 공부와 시 공부를 새로 시
작할 때 내 시의 주요 모티프로 떠오른 것은 내가 현실을 구체적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나는 그 아버
지의 삶과 유산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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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이 이농하여 도시 변두리 빈민으로 일당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당시의 전형적인 민중의 삶의 경로였으니까요. 그
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이 땅의 민중을 만난 것이에요. 진짜
찌들어가는 삶 속에서 발버둥 치며 끝까지 일어서고 싶어 한, 그
러면서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한 세상
을 고통 속에서 살다 간 민중의 모습을... 하지만 그때는 나는 민
중을 바로 보기에는 아직은 어설픈 ‘먹물’이었지요. 나중에 내가
해직되어 우유 배달을 하고 신문 배달을 하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이
해하는 통로였던 것만은 사실이고, 내 시가 끈질기게 아버지의 삶
의 역사성을 추적하고 따라온 것도 사실이에요.
김용락 -저도 시골에서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시단에서 아버지가 등장한 대부분의
시가 울림이 있고 감동적인 특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등단 무렵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배창환 -1980년 5월 이후에는 광주항쟁을 거친 뒤라 주변 상황이
어수선했고, 복문 임광호 후배는 몸을 숨기느라 고향 원주로 돌아
갔는데, 그는 헤어지면서 김민기의 ‘작별’이란 노래를 불렀지요.
그런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당시엔 짐작하지 못했어요.
전두환 정권이 시작된 뒤 추가졸업을 10월 말에야 할 수 있었고,
친구가 근무하다가 떠나면서 소개해준 영천의 영동고등학교에서
교단생활을 시작했어요.
이래저래 우울한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학교 부근 하숙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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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지요. 주말엔 대구로 나오고 주중엔 그 하숙집 창가에 앉아서
책 읽고 시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전두환 등 신군부
가 「창비」, 「문지」 같은 계간지를 폐간했고, 김우창, 유종호 교수
가 편집하는 계간 「세계의 문학」이 필자들에게 주요 발표 공간으
로 남아 있던 때였지요. 그래서 그때까지 쓴 시들을 정리해서 이
듬해 가을쯤 「세계의 문학」에 투고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떨어졌구나, 생각하니 더 우울해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 아마
크리스마스 직전인가 해서 대구로 가서 중앙통 한일극장 부근의
어느 서점을 지나가게 됐는데, 혹시나 싶어서 유리문 너머로 「세
계의 문학」겨울호 신간 표지를 보는데, 거기 내 이름이 시인들의
끄트머리에 있지 않겠어요? 신인이란 타이틀도 없고, 그냥 기성
시인들의 말석(末席)에요. 정말 내 이름이 맞나 싶어 다시 보았는데,
한자로 내 이름 석 자가 분명히 박혀 있는 거에요. 내 이름은 동
명이인이 잘 없으니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의 기쁨
은 정말 형언하기 어려웠지요. 추천사나 소감 같은 것, 이런 것 일
체 생략하고 바로 작품을 추천해 주는 일은 그 자체가 당시로서는
충격이었지요. 곧 이어지는 80년대에 동인지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동인지에 작품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등단이 되곤 했지만, 아직 그
때는 아니었거든요. 나처럼 낯가리고 수줍음이 많아서 누굴 찾아
가는 일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깔끔하게 시
를 수록해 주신 편집인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스물다섯 편인가 보냈는데, 하나같
이 원고 뒤쪽에 숨기듯이 해서 묶어 둔 것들이 수록되었고, 앞에
실었던 것들은 거의 빠져 있었어요. 그때 느낀 것이, 아, 내가 좋
아하는 시와 다른 사람이 보는 시는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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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시집을 낼 때 믿을 만한 벗들에게 먼저 보이는 내 습성은
아마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어쨌든 일단 시인으로 등단은 됐고 추천해 주신 김우창 선생님
께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이나 망설이다
가 겨우 전화를 드렸는데, 그분은 일단 등단 축하 말씀과 함께, 지
금은 학기 중이라 서로 바쁠 테니 여름방학 때 만나자고 하시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여름방학 때가 되어서야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연구실을 찾아갔지요. 그렇게 하여 당대의 뛰어난 평
론가 중 한 분으로 후학들에게 문학의 길을 제시해 온 김우창 선
생을 만나게 됐는데, 그분은 내가 태어나 두 번째 만난 문인이었
지요. 방학 중인데도 계절제 수업 때문인지 캠퍼스가 교직원과 학
생들로 북적거렸고, 연구실에서 선생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지요.
촌에서 올라온 초년생 신인을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고, 나는 감사
하다는 말과 열심히 해 보겠다는 말밖에는 별로 하지 못하고, 아
무래도 식사를 내가 대접해 드려야 할 텐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서 망설이는데, 갑자기 교수식당으로 나를 데려가시는 거예요. 교
내에 식당 있는데 뭐 하러 밖엘 나가느냐 하시면서...
결국은 내가 식사 한 번 대접해 드릴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말
았어요. 그리고 나오는 길에는 교문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 배웅해 주시고는 악수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날 기분이 참
뭐랄까,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오히려 선물 받고 돌아온, 잔잔
한 감동 같은 것이 전해져서 오래도록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날이
었지요.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 후배들에게 가져야 할 겸손함과
배려... 이런 걸 몸으로 배운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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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누구에게나 문단 등단의 순간은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텐데, 형의 이야기를 듣고 봐도 역시 재미가 있네요. 김우창
선생 같은 당대의 최고 지성을 만났으니 그 감격이 더했을 거 같
습니다.
소위 ‘심미적 이성’이라는 브랜드로 많은 문학인뿐 아니라 철학
적 사유를 지향하는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우리시대의 스승
인데 저는 한 번도 가까이서 뵌 적이 없어요. 김우창 전집을 통독
하고, 그 분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과 같은 좋은 평문을 감동 있
게 읽었는데... 사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핵심은 한국시가 깊
이나 철학성이 너무 없다는 지적이잖아요. 저는 백 번 공감하는
글이에요. 지금이라도 그 분의 좋은 강의를 한 번 듣고 싶네요.
등단 직전 <분단시대> 결성 전후의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죠.
배창환 -<분단시대> 동인 30주년 기념호가 지난해에 나왔고, 거기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만, 우리 <분단시대>는 그야말로 ‘분
단’이라는 시대가 가져온 총체적인 억압에 대응하는 문학을 지향
했어요. 당시 5공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6,70년대에 주도적으로 활
동해 온 「창비」와 「문지」가 폐간되자 문학의 활로를 찾기 위한 무
크지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고, 각 지역별로 태동한 진보
적인 동인지 운동이 80년대 문학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요.
가장 먼저 광주를 중심으로 <오월시>가 일어나 횃불 역할을 했
고, 충남 대전 지역의 <삶의 문학>이, 서울을 중심으로 <시와 경
제>가 횃불을 올렸지요. 경남에서도 <마산문화>가 지역문화 운동
으로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충북과 대구 경북 지역에는
비어 있었지요. 그만큼 이곳은 진보 운동이 70년대 소위 인혁당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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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이후에는 크게 위축되었던 곳이었고, 문학판은 더욱 심각했었
지요. 그러던 차에 시대의 부름에 부응하고자 모색해 온 청주의
도종환, 김창규, 김희식 등이 대학 때부터 독서 창작 모임을 꾸준
히 해 오다가 백두대간 추풍령을 넘어왔고, 대구지역에서는 계명
대학교 노천문학회의 중심이었던 김용락, 유신 말기에서 80년대
광주항쟁 시기에 걸쳐서 환골탈태한 경북대학교의 복현문우회 출
신의 정대호와 저, 그리고 사범대학 국어과 74학번 동기 문청(文靑)
인 김종인, 김윤현,.. 등이 대구 운동의 메카로 불리던 곡주사 할
매집 골방에서 전격 회동하여 그날로 바로 동인을 결성하기로 합
의해 버렸지요. 이런 걸 의기투합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 산파역은
당시 상주여고에 근무하던 국어과 동기 김재환 시인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요.
하여튼 그때 동인의 대부분이 20대 중반에서 막 서른 살 문턱을
넘을락 말락 하는 문학청년들이었는데, 나와 김종인이 「세계의 문
학」으로, 김용락이 「창비 신작시집」을 통해, 모두 등단한 지 1년
에서 3년 정도 된 신인들이었고, 도종환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
은 아직 문단에 이름을 올려놓지 못한 상태였지요. 그러니까 세 사
람 말고는 모두 <분단시대> 동인지를 통해 ‘자력(自力)으로’ 등단한
셈이지요.
생각해 보면 참 놀랍잖아요? 추천 절차에 구애됨 없이 동인지에
작품 발표하는 것만으로 등단 절차를 마무리하고 세상으로 나서는
모습은 아마도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2,30년대 일제강점기 동인지
시대 외에 언제 있었습니까? 하지만 도종환 시인은 「분단시대」 1
집이 나오고 곧바로 창비에서 고두미 마을에서란 걸출한 첫 시
집을 냈고, 김용락 시인도 창비에서 푸른 별이란 아름다운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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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냈지요.
어쨌든 우리는 동인 이름을 <분단시대>로 하기로 하고, 거의 매
달 한 차례씩 청주와 대구에서 만나 동인지를 준비했는데, 그 무
렵 청주에서는 주로 청주 영운동 도종환 시인의 집에서 만나 밤늦
게까지 술 마시며 원고도 검토하고 시대 현실을 토론하곤 했는데,
그때 도종환 시인의 부인이 술안주를 끓여주고 데워도 주면서 잠
을 설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단재 선생의 고두미 마을 사
당을 참배하고, 상당산성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억압된 시대에 대
응하는 진정성과 열정으로 <분단시대> 활동을 이어가던 동인들의
진지한 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대단하게 여겨지곤 해요.
김용락 -그랬지요. <분단시대>가 결성될 때의 기억이 생생하네요.
지난해 <분단시대> 30주년 기념시집 광화문 광장에서 해설에서
도 쓴 바가 있지만, 형의 노고가 컸지요. 대구 쪽에서 중심이 되었
지요. 저는 뭐 제대로 모르면서 형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지요.
배창환 -그건 겸손의 말씀이고 모두가 주역이지요. 특히 청주에서
온 도종환, 김창규 시인의 역할도 컸지요. 우리 <분단시대>가 등
장하자 진보적인 문학운동 진영에서는 반가움과 기대를 감추지 않
았지요. 일단 호남선과 경부선을 잇는 리얼리즘 민족문학 운동의
전국 문학지도가 갖추어지게 되었고, 특히 불모지로 분류되던 이
곳에도 그때까지와 다른, 과거 이육사, 이상화 시인을 비롯한 해방
전후의 진보적인 문학운동을 계승하는 문학이 태동하게 되었으니
까요.
그때 우리가 추구한 ‘분단극복의 민족문학운동’ 이외에 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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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치는 ‘지역문학운동’이었지요. 그것은 「분단시대」 1집에서부
터 판화시집과 4집에까지 줄곧 나타난 일관된 정신이고 흐름이었
는데, 지역의 삶이 중앙 독점적인 거대 자본에 의해 희생되는 ‘내
국 식민지’라 일컬어졌듯이, 문학 역시 중앙 문단의 독점적인 지배
유통 구조 속에 놓여 있던 현실에 대해, ‘내가 선 곳이 곧 삶의
중심이고 중앙’이라는 인식이었지요. 말하자면 ‘중앙’과 ‘지방’이라
는 이분법적인 대립구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방’
대신에 ‘지역’이란 개념을 가져온 것이지요. 이는 마치 ‘세계 문학’
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 실체가 구체적인 각 민족의 참된 문학
이고, 그래서 “민족문학이 곧 세계문학”이라는 명제가 성립하듯이,
‘한국문학의 실체는 곧 지역 문학일 수밖에 없고 개개인의 참된
문학이 곧 한국문학이고 민족문학이다.’ 이런 생각이지요. 그러면
서울도 하나의 지역이 되는 것이잖아요.
당시에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창작하는 문학이 곧 이 시대의
구체적인 삶의 문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고, 시대에 ‘복무
하는’ 문학이란 의식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지요. 그것이 나중에는
우리 스스로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분단시대> 동인의 문학 활동이 그런 시대정신의 표현이기를 바랐
고, 당연히 1집 이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부터 분단시대 판화
시집 등이 5공 당국으로부터 판매금지를 당했지요.
<분단시대> 동인들은 그 뒤로 정원도, 김시천, 김성장 외 여러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활력을 보강해 갔고, 대구 경북과 충북
청주 지역에서 작가회의나 민예총, 또는 계간지 「사람의 문학」등
을 통해 젊은 문학인들의 중심에서 일정하게 역할을 해 가면서 진
보적 리얼리즘 문학의 터를 착실히 넓혀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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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오늘의 시> 동인인데요, 당시 대구지역 젊은 시인들 중 김재진,
류후기, 문형렬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출발한 동인이지요. 이들
을 한 동아리로 묶어 세워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데는 이하석 선
배 시인의 역할이 컸지요. 당시 대구지역에는 70년대 중반부터
<자유시> 동인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반시>와 더불
어 동인지 운동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지요. 대학에서 써클과 학
과에서 문학 공부할 때 이미 두 동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구하
거나 사서 읽어보고 시적인 경향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고
토의하기도 했었지요. 당시 <자유시>의 중심 멤버였던 이하석 시
인은 내가 등단한 이후에 곧바로 연락을 해 주셔서 만난 분이고,
이미 그 명성을 들어온 터였지요. 대학 선배라는 사실도 이미 대
학 시절에 알았구요. 이 선배님은 나중에 6월 항쟁 이후 <대구경
북민족문학회>를 창립할 때 영남대학교 정지창 교수님과 함께 공
동대표를 맡기도 했는데, 당시 5공 때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그런
중책을 맡는다는 건 우리 판단으로는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할 각
오까지 해야만 가능했지요. 이후 대구작가회의 회장, 민예총 대구
지부장, 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대구경북작가회
의> 고문으로 젊은 시인들보다 앞장서서 활동하시는, 한마디로 이
지역 진보문학운동의 원로이며 기둥인 분인데, 당시에도 이미 이
지역의 보수적인 문단과는 다소 이질적인 젊은 친구들을 묶어주어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때 이미 느끼고
있었지요.
<오늘의 시>는 이 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를
안고 출발해서 84년에 1집을 냈고 그 사이에 막 등단한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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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등 젊고 진보적인 시인들을 새로 받아들여서 2집을 내려고
준비하던 중에 <분단시대>가 결성되면서, 위의 두 시인과 저까지
3명이 모두 빠지게 되어 일정하게 혼선이 있었겠지만, 곧 새로운
동인들을 받아들여서 2집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지요. 이 일로
인해 한참동안 내 마음에는 <오늘의 시> 동인들과 이하석 선배님
께 마음으로 무거운 부채가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구요.
김용락 -말씀하시니 저도 생각나는데 당시 저와 김종인 형이 <오
늘의 시> 동인으로 가입해서 시내 하이마트라는 음악감상실에서
시낭송회 한 것까지 생각이 나네요. 당시 저는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이었는데 선배들이 끼워주어서 함께 했지요. 선배들의 넓은 아
량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꽤 오래 전인데 「문예중
앙」인가 하는 잡지에서 <오늘의 시> 특집을 했는데 그 과정 이야
기가 써져 있더라고요. 저도 속으로 조금 웃었습니다. 주범(?)은
형이지만 저도 미안하기도 하고...
첫시집 잠든 그대(민음사)를 낼 당시 이야기도 해주시죠.
배창환 -첫 시집은 등단하고 난 뒤 3년 뒤에 냈는데, 처음 「세계
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당시 문학 환경으로 볼 때 어쩌면 민음사
에서 시집을 내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시집
을 언제 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요. 등단 이후 여
기저기 청탁이 오고해서 발표한 것과 미 발표작을 모아서 김우창
교수님께 보내드렸는데, 시집을 내기로 결정했다는 통보가 왔어요.
막상 시집을 내게 되니까 들뜨기보다 좀 가라앉으면서 겁이 나는
겁니다. 시집은 곧 시인의 세계인데, 내게도 시 세계가 있는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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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내 시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줄기는 무엇일까, 내 시에도 신인
다운 새로운 무엇이 과연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채광석 선배님이 내려왔는데, 그분의 호
방한 기질과 의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반독재 민족 민중
문학 운동의 선봉에서 날카로운 필력을 휘두르는 평론가이고 시인
이었지요. 당시 대구와 인근지역 각 대학에서 주로 활동하는 중견
문인들과 문화 연극계 활동가들을 만나러 내려오는 채광석 평론가
를 여럿이서 모여 환영하는 술자리였는데, 그때 염무웅 선생님이
저를 불러주셔서 덕분에 그 자리에 끼이게 된 거지요.
염 선생님과의 만남은 십여 년 전 「대구작가」2호인가에서 자세
히 쓴 적이 있는데, 아마 김용락 시인이 창비 신작시집으로 등단
하고 안동공고에서 교편 잡고 있을 때였고, 나는 대구시내 사립학
교에서 한창 교육문제와 문학활동의 활로를 찾아 고민하고 있던
때인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총각 교사였고 시인 초년생일 때
였지요, 두 분이 아마 오랜만에 대구시내에서 한 잔 하는 자리였
던 것 같은데 그 자리에 불러주셔서 끼이게 된 것이지요. 아직 내
첫시집이 나오기 전이고 김 시인이 막 등단하고 나서이니까, 1984
년 봄쯤으로 기억해요. 봄밤에 찻집에서 만나, 1차 맥주집, 2차 또
맥주집, 이렇게 두 분이 한 잔씩 차례로 사시고, 나도 한 잔 사고
싶은데 이미 술은 좀 취했고 해서 고민이던 차에, 마침 2차 맥주
집 문 앞에 잔소주 파는 포장마차 리어카가 있어서, 선 채로 멍게
해삼과 소주잔을 마시게 됐는데,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
아 있는 것은, 단순히 첫 만남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김용락 시인
과는 이미 대구 대명동 계명대학교 이성복 시인의 연구실에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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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정문 앞 막걸리 집에 가서 바로 십년지기가 된 상태였지요.
아마 그날 그 만남도 김용락 시인이 나를 염 선생님께 소개해 드
리기로 말씀드려서, 선생님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이런 표현이 대단히 무례한지 모르겠지만 염 선생님과 그
자리에서 바로 통해버렸다고나 할까요... 김 시인과 그랬고, 우리
분단시대 동인들과 처음 보고 바로 그랬듯이.
염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도 두 분이 주로 말씀하시고 나는 그
냥 귀동냥만 하고 속으로 감탄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지요. 십 수
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분의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고, 문단의
스승과 제자 격이 아니라 어찌 보면 친구 같고, 동지 같고, 형제
같아서,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오고 감에 걸림이 없는 것을 보고,
존경하는 대선배님 앞에서 바짝 ‘쫄아 있던’ 나는, 세상에 이런 만
남도 있구나, 하는 부러움 같은 것을 느꼈지요. 그리고 염 선생님
의 말씀에 고인이 된 분들에 대한 호칭이, 신동엽 선생, 김수영 선
생...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자신의 말과 추구하는 가치가
일치해야 한다는 진지함을 배웠어요. 그 당시 우리는 대학생 때부
터 토론할 때, 김수영 씨, 신동엽... 이렇게 말했지, 신동엽 선생이
라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 때 속으로 많이 놀랐어요.
그리고 나도 그 자리에서 바로 ‘선생’, ‘선생님’으로 호칭을 바꿨지
요. 어쨌든 두 분의 소탈함이, 촌놈이면서 도시인이 될 수 없었던
나와도 같은 체질이란 것을 느끼고 마음으로 ‘통해 버린’ 거지요.
그 압권은 촌에서 농사짓다가 방금 나온 듯한 포장마차 주인과 염
선생님이 곧바로 친해져서 잔술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
면이었어요. 그때 문학과 삶이 다른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당시 우리가 지향한 문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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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문학이고 민족 민중 문학이니 더욱 그러하지요.
김용락 -저도 생각이 납니다. 형을 처음 만난 게 82년 봄인데 형
이 재직하던 여고에서 그날 체력장인가 뭔가 한다고 가벼운 옷차
림에 모자까지 들고 온 게 기억납니다. 곧바로 계명대 앞 막걸리
집에 가서 문학이야기를 나눴지요. 저는 등단 전이었고 형은 등단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지요. 미등단 문청에 불과한 저를
격의 없이 대해주었던 형의 인품에 저도 바로 빠졌지요.
염 선생님과 함께 만나던 때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제가 염
선생님께 훌륭한 선배가 있다고 하니 염 선생님도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해서 자리가 만들어졌지요. 그날 만남을 위해 안동에서 일
부러 올라온 게 기억납니다. 몇 년 전에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이란 책에서 염 선생님을 비롯한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글을 쓰기
도 했지만 염 선생님이나 형과 같은 분들을 만난 건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에요. 두 분에게 큰 가르침을 받은 거지요.
배창환 -1980년대 초반에 문단 초년생인 내가 만난 분들이 김우
창, 이하석, 염무웅 선생... 이런 분들인데, 이 선배 문인들이 내게
문학의 길을 찾는 진지함, 겸허함, 소탈함과 헌신성... 이런 자세를
가르쳐 주었지요. 또 김용락 시인이나 정대호 시인 같은 듬직하고
겸허한 후배 시인들, 그리고 곧 맺어진 분단시대의 도종환 시인을
비롯한 많은 동기, 후배 시인들에게서도 지금까지 줄곧 배우면서
함께 가는 중이구요. 참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이야기가 좀 멀리 나왔는데, 그때 만난 채광석 선배는 참 대단
했어요. 모인 사람들이 대략 그분의 선배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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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그 언행은 바위를 들이치는 거센 파도 같이 거침이 없었
고, 막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선배들에 대한 따끔
한 질타도 빼놓지 않았지요. 내가 보기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그치기도 했지만, 거기 모인 분들은 다들 웃어넘기면서 대인의
풍모를 보여주어 또 한 번 놀랐어요. 또 즉석에서 창작 편곡한 노
래 한 곡을 보통 30분 이상을 쉬지 않고 열창을 하는 그 모습이
아주 신들린 듯했지요. 강인하면서 넘치는 기백에서 참 강렬한 인
상을 받았어요.
다음 날이 아마 일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술이 좀 덜 깬 상태에
서 시내에서 어제 모인 분들 가운데 몇몇 분들이 다시 만나 아침
을 먹고 이별 의식을 하게 됐는데, 그때 내 시집 발문을 좀 써달
라고 부탁드렸고, 그 자리에서 선뜻 승락을 받고 써줄 테니 작품
을 보내라 해서 발문을 받게 된 거지요.
내 시에 대한 채광석 선배의 발문이 어떻게 전개될까, 이게 사
실 당시 내게는 큰 관심사였어요. 왜냐하면 나도 내 시에 대해 어
떤 개성이나 특징이 있는지, 하나하나 따로인 시들을 꿰는 공통점
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내 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요. 그런데 교정지를 통해 발문을 보고나서 깜짝 놀랐어요. 내 지
나온 날과 당시의 나의 내면세계를 훤히 뚫어보는 듯이 서술해 놓
았는데, 그 내용은 ‘민중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현실을 인식하는 눈은 길러왔으되, 아직 관념적이고 실
천이 부족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서...’ 대략 이런 것이었지요.
한편으로 격려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비판의 채찍을 가하는 글이었
는데... 말하자면 삶과 시에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처음
으로, ‘야, 1급 평론가들은 무섭구나!’ 이런 생각을 했지요. 물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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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 선배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고수들의 눈은 피해갈 수
가 없다는 생각, 그래서 피하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나의 세계를 세워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도 그때 얻은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리얼리즘의 길을 더욱 굳힌 것이지요.
첫 시집 『잠든 그대』 이후에 곧 <분단시대>가 나왔고, 1985년
부터는 교육운동에 뛰어들면서 문학과 교육, 이렇게 양다리를 걸
치게 되었지요. 그건 우리 동인들 중 교편 잡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지요. 민족 민중운동의 큰 틀 속에서 교육노동운동과 민족문
학운동의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진 80년대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서울에서 열리는 구속 문인 석방을 위한 문학의 밤
에는 꼭 참석했고, 각종 성명서에는 우리 분단시대 동인들은 자동
으로 들어갔지요. 「분단시대」가 나올 때마다 대략 판매금지 되거
나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고, 대구에서 <우리문화연구회> 창립에도
발기인으로, 창립 뒤에는 문학분과장을 맡아 쫓아다녔고, 그리고
교육운동에도 적극 뛰어들어서 요주의인물로 분류되어 행사 있을
때마다 형사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못 가게 막고... 그러다 1986년
3월에는 결국 중학교로 강제로 전보되어 쫓겨 내려가고, 정든 아
이들과는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됐지요. 그 이후에는 교육운동에 에
너지를 집중하게 되어 이듬해 87년 6월민주항쟁 있던 해 10월에
학교평교사회를 대구 경북에서 최초로 만들어 학교 당국과 교육청
의 집중 탄압을 받게 되었지요.
김용락 -저도 채광석 선생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앞서 형이 말한
그때 곡주사 2층에서 술을 많이 마셨잖아요. 채광석 선생이 엉망
으로 취해서 ‘전태일이 대구 출신인데 자기와 같은 1948년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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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울음 반 노래 반으로 태일아, 태일아,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다락같은 2층에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지요. 많이 다치지는 않았
구요. 그러면서 형은 교육운동과 문학운동을 함께하는 말하자면,
고난의 길로 접어들게 된 거지요.
배창환 -그러던 중에 제2시집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가 실천문
학사에서 1988년에 나왔지요. 그러다보니 이 시집은 자연 교육시
집이 되었고, 교육운동 속에서 얻은 체험들이나 현실 인식이 주가
되었지요. 아마도 채광석 선배가 지적한 실천의 부족에서 오는 현
실과의 괴리감이나 관념성은 많이 사라지고 대신 운동적인 실천성
은 보강이 되어 대중들에게 접근하고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 때문
에 시적인 에너지는 넘쳐나는데, 구조의 다양성이나 언어의 밀도
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요.
또 제재가 교육현실이고 학교 안팎의 아이들과 교사의 삶과 미
래에 대한 희망 등이 중심이다 보니 주요 독자가 교사들이 되고
여기서 다소 교육현실에 인식상의 거리를 갖고 있는 일반 독자대
중들이 접근하고 충분히 공감을 하기엔 힘들다는 난점을 안고 있
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이 시기에는 농민시, 노동시 등과 더불어
‘교육시’라는 특수한 영역이 생겨났는데, 이는 많은 진보적인 시인
교사들이 참교육 운동과 교육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교육현
실을 적극 노래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교육문예창작회가 생겨났고요. 김진경, 도종환, 윤재철, 조재도, 안
도현, 정영상, 이광웅, 전인순, 김종인, 김시천, 김영춘... 그리고 저
를 포함해서, 교육시 1세대들이 이 무렵에 좋은 교육시들을 우리
시문학사에 남긴 시기이기도 해요. 우리 김용락 시인도 안동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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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근무하던 때 쓴 초기시에는 좋은 교육시들이 있잖아요?
김용락 -그렇죠. 교육시라는 특수 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의 대
표시인이 바로 배창환 시인이라 할 수 있지요. 저도 공고 교사로
생활하면서 아이들에게 느꼈던 안타까움과 현장의 어려움에 대해
몇 편 썼지요.
배창환 –셋째 시집 백두산 놀러 가자는 1994년에 대구 사람출
판사에서 나왔는데요. 1989년 무렵에서부터, 대다수의 해직교사들
이 복직되고 도종환 시인이나 저 같이 각 시도지부에서 한 사람씩
지부장을 맡은 사람들이 남아서 조직을 지키고 있던 1994년 무렵
까지 쓴 것입니다. 이미 시대는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거리에 남아서 전교조 합법화와 교육개혁의 꿈을 놓지 않고 있던
때였지요.
그러니까, 해직 전에 나온 제2시집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보
다 더 절박하고 투박한, 어찌 보면 외침에 가까운 언어들이 자리
를 찾으려고 소용돌이치는 시들이랄까요, 시의 메시지도 표현도 더
단순해지고 투박하면서도 단단해져서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는 부
담스러운 시였을 거란 것을, 시집이 나온 뒤에 깨닫게 되었지요.
밖으로 내보내야 할 메시지에 내가 너무 집착하고 매달려 있다는
것을, 당시 『백두산 놀러 가자』에 발문을 썼던 김진경 시인도 지
적했지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정신이 보다 자유로워지지 않으
면 안 된다고...
2000년이 되어 창비에서 제4시집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을
냈어요. 1995년 무렵부터 복직이 되고 학교를 고향의 작은 벽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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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옮긴 직후인 2000년 초까지 쓴 시들을 모은 것이지요.
1995년은 내 인생 길에 새로운 모색을 실천한 해였어요.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니까요. 어찌 보면 귀향이고 또 달리 보
면 낙향이라 할, 귀향이지요. 이때부터는 흙을 만지고 흙의 품을
느끼면서 굳어 있던 내 육신과 시어의 어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
한 때지요. 아이들도 마을의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 마음껏 뛰놀
수 있었고, 나는 주말에는 집에 딸린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평일
에는 대구 전교조 사무실로 출퇴근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복직이 늦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몸무게가 빠지고 병이
나기 시작했어요. 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요구하는 촌놈인
나의 몸의 요구를, 투쟁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내 생활이 너무 오래도록 무시하며 사느라 생긴 것이지요. 사회주
의가 퇴조하면서 이미 초국적 거대 자본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사
람들의 삶을 지배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 규모로 쓸어가던
때, 거리에 남아 동분서주하고 조직을 합법화해서 교단으로 돌아
가는 날을 기다리는 그때의 내 모습은, 어찌 보면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의 시 「호랑이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사방이 포위되어
오는데 ‘퇴각 명령을 받지 못한 초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때는 외롭다거나 초조하지는 않았지요. 해야 할 일이 있
고, 우리 뒤에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 대중들이 있다고 믿었
으니까요.
어쨌든 이 시기의 시는 내 시가 다시 억압 속에서 살아나기 시
작한 때라고 볼 수 있어요. 그동안 내게 가해진 삶의 억압이 내
시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해직의 고통과 복직의 순간이 이
시집 속에 공존하고 있지만 내 시는 마침내 내 호흡으로 숨을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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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고, 흙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새로 발견해내고 부드러움
의 아름다움을 내 시에서 찾기 시작한 때니까요.
김용락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1차로 복직하고 난 후 각 지회 지
회장들은 복직하지 않고 5년간을 더 학교 밖에서 일했지요. 형이
나 도종환 형 같은 분들이 10년을 밖에서 고생한 것으로, 말하지
만 희생인데 그 희생을 묵묵히 감내하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존경의 마음이 들기도 했지요.
그런 풍찬노숙의 고행이 시에도 그대로 배어나온 게 아닌가 생
각해요. 때론 격렬하고 거칠게...
배창환 -실천문학사에서 2006년에 낸 다섯째 시집 겨울 가야산
은 내 시에서 고통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던
시기의 시집이에요. 주로 벽진중학교에서 아이들과 그동안 못했던
교육 활동을 마음껏 펼쳐내던 시기와, 김천여고에서 많은 제자들
과 문학교육 글쓰기 교육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검증할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교사 시절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
었지요.
고향 성주에서는 문학 강좌를 열고 그 회원들을 중심으로 문학
회를 결성하여, 해마다 종합문예지 성주문학을 내고 학생문학상
을 제정하고, 학생 문학캠프를 10여 년 간 빠짐없이 열었고, 벽진
중학교에서는 30-50명 아이들과 함께 학교 <별뫼축제>를, 200여
명이 참여하는 면민축제로 열어서 문학운동과 학생문학교육을 열
심히 펼치기도 했었지요. 곳곳에 감동이 있었고 기쁨이 있어서 알
게 모르게 내 속에 무성하게 자라왔던 상처가 문학활동과 교육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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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통해 많이 치유되었던 시기지요. 2013년에 두 권의 시선집을
냈는데, 그때 내가 낸 다섯 권의 시집을 펼쳐놓고 뽑다보니 주로
2000년과 2006년에 나온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과 겨울 가
야산에 수록된 시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때 내 시가 조금씩 진화
해 왔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하지만 1,2,3시집은 그 주춧돌이지요.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직 여섯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겨울 가야
산 이후 쓴 시들이 마음에 차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만, 지
금부터는 언제나 마지막 시집이라 생각하고 좋은 시집을 내야겠다
는 욕구가 있고, 생활 속에서 만나는 시대와의 긴장이나 변화를
시 속에 받아들여서 담아내고 형상화하는 일에 치열함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하고 있어요. 자본이 뼛속까지 속
속들이 지배하고 있고 다들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시가 어
떤 길을 가야하며, 어떤 소용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
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난해하고 알맹이 없는 언어유희만으
로 머리를 어지럽혀 놓는 시나, 자본의 폭력에 저항하는 듯하면서
한편으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어 속절없이 끌려가는 시들이 우리
시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시가 독자들과 멀어져 가
고 있는 데는 시대의 변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시인들
의 자폐적인 시 쓰기도 분명 한몫하고 있거든요. 이런 때에 나아
가고 서 있는 자리를 찾는 일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좋은 시를
쓰는 것은 더욱 힘이 들어야 하는 작업이지요. 이번 시집은 좀 시
간을 갖고 생각을 더 해서 좋은 시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모색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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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확실히 형은 부지런해요. 저도 대구작가회의 회원들과 성
주군 금수에서 열린 학생문학캠프에 수차례 참석하기도 했고, 별
뫼축제에 가보기도 했지요. 그리고 「성주문학」에 글을 쓰기도 했
는데 이런 활동, 그러니까 학생들과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문학행
사는 웬만한 열정으로는 어렵지요. 이게 다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
에서 가능한 것인데...
솔직히 저 같으면 그 시간에 내 공부나 했으면 하는 생각도 없
지 않아요. 이것도 개인에게는 희생일 수도 있어요. 자기 개인의 능
력을 향상하기보다 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 진력했으니까요.
사실 이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안
서지만, 문인들 가운데 혼자 골방에서 자신의 문학적 기량 연마에
만 몰두해서 이름을 내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형의 노력은 자기희생의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밑거름이 돼서 그런지 형은 제자들에게 존경의 대
상이 되고 또 옛 제자들과도 지금도 잦은 교류를 하고 있지요? 우
리가 보면 부러운 부분이기도 한데...
배창환 -지나고 보면 정말 세상에는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도 맞
고, 거저 오는 것은 없다는 말도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마음
으로 정성을 쏟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인연이 서로 통하
는 경우에만 오래도록 서로에게 남게 되고, 그 남음을 바탕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제지간이 되는 거지요.
내 경우에는 아이들과 교감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보따리가 있
으니까 퍽 다행한 일이었지요. 아이들과 문학 공부를 함께 하면서
한 세월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아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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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릴 수 없는 일이지요. 문학이 나를 세상에 세우는 도구이며 힘
이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아이들과 나의 특별한 만남도 문학을
통해서 가능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대학에서 국어교사를 꿈꾸는 사
람들은 시든 소설이든 수필, 희곡, 시나리오 할 것 없이 하나는 꼭
쓸 수 있어야 하고 비평적인 안목을 갖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리고 나와 아이들의 관계는 시대가 만들어 준 측면이 커요.
독재 정권과 독점 재벌의 야합으로 아이들을 질곡 속에 빠뜨리고
교육을 숨 못 쉬게 만들고,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체제 순응적인
노동력을 생산하려는 불순한 의도에 반기를 드는 진보적인 교사들
을 폭압으로 교단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교사들이 많은
상처를 입었지요. 하지만 수난 속에서 상처가 자라지만 그 상처를
나누면서 믿음도 커지는 것 아니겠어요?
전에는 경화여중고 제자들과 김천여고 제자들을 따로 만났었는
데, 근래에는 연말에 함께 만나거든요. 나를 인연으로 만남이 서로
이어지게 된 것인데, 해직 기간이 중간에 놓이고 복직해서 한참
뒤에 만난 아이들이 김천여고 아이들이니까, 많게는 20년의 차이
가 나는데도 자매처럼 다정하게 모여서 함께 밥을 먹고 술도 먹는
모습이 참 눈물겹기도 해서 시를 하나 썼어요. 거기서 우리 아이
들을 ‘별’과 ‘꽃’으로 표현했어요. 경화여중고 제자 아이들은 고통
을 함께 겪은 소중한 동지이니까 내 생애의 ‘별’이라면, 벽진중,
김천여고, 경주여고 아이들은 복직해서 내가 성심으로 아껴준 귀
여운 아들 딸내미들이니까 아름답고 귀한 ‘꽃’이지요. 그래서 나의
‘별’들에게는 늘 미안해요. 사랑과 열정을 쏟아주기보다 오래도록
커다란 고통만 안겨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모두 내 삶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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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일부이고 내 인생의 소중한 인연이고 자산이에요.
김용락 -그렇군요. 아이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그 말
씀에는 저도 가슴이 찡해지는군요. 그러나 고통 없이 자라는 나무
는 없다는 말처럼, 그 아이들에게도 그런 고통이 있었다면 자신을
키우고 보다 넓게 인생을 이해하는 좋은 거름이 됐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경화여중고 제자들은 저도 몇 몇 얼굴은 아는데 다 지역
에서 당차게 자신의 일을 잘하고 좋은 일꾼으로 자랐더군요. 그런
게 자신에게뿐 아니라 사회에도 보람이 되지 않겠어요?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 진학 전후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배창환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이유라면, 다른 이유보다 우
선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당시 국립 사대는 수업료가
면제되어 공납금이 아주 쌌어요. 또 하나는 학교 안에서 선생님들
이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서로가 말을 높였기 때문에 평등한사회
인 줄 알았지요. 국어과를 진학한 이유는 국어 과목과 문학에 흥
미가 있었고, 영어 과목이 별로 재미가 없어서였지요. 원래는 역사
과도 가고 싶었는데, 고구려 패망 이후의 역사에 대해선 공부할 자
신이 없었어요. 속이 말라 터질 것 같았으니까요. 당시엔 선생님들
이 모두 사범대 가는 걸 말리는 분위기여서 원서 쓰러 가서도 죄송
하다고 머리 벅벅 긁으면서 교무실에 들어갔지요.
대학생활은 일단 사범대학 나오면 발령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학
점 따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앞날의 취업에 대해서는 걱정 없이
살았지요. 그런 게 오히려 교단에 섰을 때 큰 도움이 됐어요. 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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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로 넘어가고부터는 학교가 결국 학원화되고, 대학생이 취업
준비생으로 되어 진짜 교사로서의 자질이나 가치관,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 셈이지요. 입시 지도교사가 아니라
아이들과 인생을 말하고 문학을 이야기할 때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능력은 임용고시라는 또 다른 입시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
라, 그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을 보는 눈을 갖출
때 나오는 것이잖아요?
첫 교단은 영천 영동고등학교에서 시작했어요. 친구가 근무하다
다른 데로 가면서 소개한 사립학교인데 장학제도가 잘 돼 있어서
가정 형편은 어려워도 근실하고 학업열이 크게 높은 아이들을 거
기서 만날 수 있었지요. 내 생애 첫 제자들이지요. 하지만 일제강
점기부터 누적되어 온 비민주적인 교육구조에다 당시 전두환 독재
가 눈을 더 시퍼렇게 뜨고 교사들을 옥죄고 감시할 때니까 교직생
활에 대한 회의가 곧 밀려왔지요. 하지만 이때는 신출내기 교사였
고, 혼자였고,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내가 생각해 온 교육과 많이 다른 비민주적인 교육구조와 현실에
대한 막연한 반감일 뿐, 어떤 교육철학적인 줄기가 서 있었던 건
아니었지요.
81년 겨울에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고 1982년 3월에 대구
경화여고로 학교를 옮겼어요. 이곳에서 교육 현실의 문제를 심도 깊
게 느끼고 또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지요. 당연
히 해직은 각오한 것이었고, 구속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
지요. 1985년 민중교육 사건 때 우리와 동인지 문학운동을 함께
했던 다른 지역 문인들, 이를테면 <5월시>의 김진경, 윤재철 시인
이나 <삶의 문학> 조재도, 전인순, 정영상... 많은 교사 시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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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거나 파면, 해임의 길을 걸었는데, 그때 「민중교육」2집을 만
들고 있을 즈음이었고, 김진경 형과 몇 사람이 서울에서 만나 내
시도 싣기로 돼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민중교육」1집 사건이 터
져서 약간의 시차로 나는 빠지게 됐고 해직은 면했지만, 그때는
최소한 해직을 각오하지 않은 활동가는 없었다고 봐요.
그 무렵에 당시 YMCA중등교직자협의회 지도자이고 대구 회장
이셨던 이재원 선생님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불려나가게 됐는
데, 바로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을 시작했지요. 당시 대구경북 활
동가들 다 합쳐도 20여 명이 채 안 됐어요. 이 분들 가운데 상당
수가 많은 수난을 겪다가 전교조 때 해직되었지요. 당시 대구는
사립학교가 많았고 독재정권의 교육 장악 정책이 빚어온 무수한
문제점 위에, 영세 사학이 갖는 온갖 비리들이 더욱 중첩되어 특
히 사립학교 활동가들이 많았지요.
82년 3월부터 86년 2월까지 4년 동안 경화여고에서 활동하다가
정권의 방침으로 많은 이른바 ‘문제 교사’들(교육운동가)이 중학교
로 쫓겨 가게 되는데, 그때 저도 경화여중으로 쫓겨 갔고, 이를 계
기로 개인적으로는 문학운동과 교육운동의 균형추가 교육운동으로
옮겨가게 됐고, 독재정권 하에서 해직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지
요.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요. 이 당시 우리 제자들
은 민주교육을 향한 우리의 뜻을 믿고 적극 지지해 주었어요. 그
때문에 더 많은 탄압을 받고 고통을 받았지요. 우리는 교사들뿐
아니라, 아이들과도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동지적인 믿음으로 인
연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지요. 우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많은
제자들은 그런 아픈 과정을 통해 각자가 거듭나면서 서로의 삶을
자랑스럽고 풍족하게 만들어 온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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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89년 8, 9월에 우리 재단에서만 10명이 해직되고 대구
시 전체에서 60명이 넘는 해직교사가 나왔지요. 나도 그때 경화여
중 분회장으로 해직되었지요. 민주교육을 외치던 교사들이 거리의
교사가 되어, 해직 이후에는 전교조의 합법화와 해직교사의 복직
을 위해 쫓아다녀야 했고요. 저 역시 그 속에 있으면서 ‘복무’한다
는 자세로 쫓아다녔고, 마지막까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
다’는 생각을 견지하려 애썼지요. 지부에서 지회장, 홍보부장, 교
과위원장, 참교육실천위원장 등 많은 직책을 두루 맡았고, 93년도
에 부지부장을 지내면서, 94년 봄, 해직 5년 만에 모두 그리운 학
교로 돌아갈 때, 잔이 내게로 돌아오자 이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
요. 처음 이 길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규합하여 운동을 일으킨 사
람들이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도 하고요. 나는 그때
혼자 남아 지부 사무실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도 3년쯤으로 생각했
는데, 그것이 다시 5년이 되어 10년이 된 것이지요. 서른다섯에서
마흔다섯까지의 10년... 이 시기에 나의 시와 아이들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시가 힘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해직교사들은 94년 김영삼 정부에서 복직이 됐고, 전교조가 합
법화된 것은 99년 김대중 정부에 와서지요. 그 6개월 전인 98년
9월에 복직할 수 있었는데, 공립학교인 대구 성당중학교로 발령이
났고, 성주에서 대구로 출퇴근을 하다가 2000년 3월에 고향으로
학교를 옮겨서 성주 벽진중학교에서 4년, 김천여고에서 5년, 그리
고 경주여고 4년을 근무했지요. 이 시기가 내가 하고 싶었던 교
육을 제대로 그리고 마음껏 해 볼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교사시
절이었어요. 89년에 내가 해직될 때 제일 억울했던 건, 이제야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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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교육을 알만할 때 해직된다는 것이었어요. 그 억울함을 보상받
듯이, 아이들과 정말 열정으로, 원 없이 쫓아다녔어요. 그래선지
벽진중학교에서 김천여고로 옮길 때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들이
제게 감사패를 주셨지요. 그것이 내게 주어진 어떤 것보다 큰 상
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감사하지요. 나와 함께 한 우리 아이들도,
학부모님도... 이제 그런 날은 내게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이와 함께 내 시도 부드러워졌고, 성장했고, 진보했다고 믿어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흙과
더불어 살면서 시가 나와 더 가까워졌어요. 복직하고부터 시 교육
의 재미를 알았는데, 학생 시 교육용으로 만든 국어시간에 시 읽
기1은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고, 아이들과 시 교육 체험 사례
와 방법을 담은 이 좋은 시 공부도 내고, 벽진, 김천, 경주에서
해마다 학교문집, 학급문집, 동아리 문집, 신문 등을 이어가고 김
천여고와 경주여고 아이들과는 시집 2권, 수필집 2권을 출판사에
서 출판하여 시판하고 있어요. 김천여고 아이들 교지 덕분에는 9
박 10일 유럽 교육시찰기행도 다녀올 수 있었구요. 전국 교지 콘
테스트에서 우수상(2위)을 탔거든요. 아이들과 교사가 믿음과 애정
으로 맺어진 다음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 시기이기
도 해요.
김용락 -듣고 보니 참 어려운 길을 잘 뚫고 나오셨군요. 지금은
담담히 회고하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갑자기 러
시아 작가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제목의 소설이 생
각납니다.
전교조 시절 이야기 좀 해주시죠. 해직되고 10년, 지부장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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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겪은 어려움, 또 경제적 어려움 등과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도
겸양으로 사양마시고 밝혀주십시오. 역사적 자료로 남겨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배창환 -해직되면서 곧 생계 문제에 봉착했지요. 지부에서 후원금
으로 받은 돈은 초기에는 15만 원 정도... 그것도 모두 현장 선생
님들의 후원금에서 나왔어요. 물론 나중에 상근 활동가가 줄어들
면서 점차로 인상 되었고요. 기초 생계가 어려운 실정이라 친구의
한겨레신문 수성지국에서 1년여 신문 배달 일을 돕다가, 나중에는
수성구에 가서 우유배달 구역을 인수해서 딱 석 달 열흘을 했는
데, 이것이 해직기간 동안 내가 한 유일한 생계 활동이었지요. 그
때 느낀 것도 많았는데, 이 사회가 곧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전
쟁터나 다름없는, 극한적인 경쟁에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치
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이라는 것이었지요. 무거운 우유통을 들고
새벽 3시부터 낮 11시까지 배달하는 8시간 노동이 당시 나의 신
체에 맞지 않아서 무릎이 아파왔고, 낮에는 비몽사몽으로 잠만 자
고 저녁에도 일찍 자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중노동이라 그만
두었지요. 전교조 사무실에도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거든
요.
그래서 다시 사무실 상근 일만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
지면서 몸에 탈이 나기 시작해서, 단식도 하고 ‘민족건강회’에도
들어가서 건강강좌도 들어가면서 어쨌든 ‘견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견딘 것이지요. 아마도 마음의 병도 함께였을 겁니다. 원래 평화주
의자였던 내게 거대한 벽과의 ‘싸움’이 내 체질에 맞지 않았나 봐
요. 그러니 병이 날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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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4.19혁명 속에 태동한 한국교원노조를 잇는 교육운동
과 노동운동의 양면적인 성격을 갖는 조직인데, YMCA초중등교직
자협의회가 대중조직으로 성장한 것이 전국교사협의회였고, 그것
이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노동조합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지요. 임의조직인 교사협의회에서, 교섭
을 할 수 있는 기구인 교직원노동조합으로의 변신인데, 물론 당시
에는 교사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모두 금지되고 있
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결성 그 자체가 불법이라며 노태우 정권은
국가기구의 모든 권력을 총동원하여 초법적이고 탈법적인 탄압을
가했고, 그 결과 전국의 1500여 교사들이 가입 자체만으로 해직당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조직 결성 후 합법
화를 이루려는 전교조 추진 주체들의 전략은 일단 탄압과 원천봉
쇄를 뚫고 조직을 결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절반은 성공한 셈
이고, 남은 것은 법 개정을 통한 교원노조의 합법화였고, 많은 해
직 조합원이 학교로 돌아가서, 교육 주체들의 지지 속에서 비민주
적인 교육구조를 개혁하고 열악한 교육여건을 개선하면서 참교육
을 실천하는 일이었지요.
전교조 초창기에는 조합원들의 단결과 후원회원들의 연대, 그리
고 교사들의 참교육 의지와, 그 동안 쌓아온 학생들과의 신뢰, 학
부모들의 참교육 지지를 바탕으로 해직교사의 복직 여론은 언제나
67%의 지지를 웃돌았고, 그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기에 정권의
부담이 되었고, 결국 5년 만에 교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하
지만 교원노조의 합법화 문제는 국민 53%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반대는 언제나 그 절반인 25% 전후였고요.) 독재 재벌 정권이 그
들의 장기집권 구도에 언론과 교육 장악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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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탄생과 함께 국회 과반수 의석을
가진 다음에야 가능했던 거지요.
전교조는 분명히 교육운동 조직이며, 초기의 지도자들은 절대 다
수가 전국교사협의회에서 교육운동으로 잔뼈가 굵어온 분들이에요.
교육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꾸려는 민족민주교육의 실천가들이
었지요. 이 점은 전교조의 투쟁가에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
세-’라는 구절에서도 확인되지요. 그러다 법적인 필요에 의해 노
동조합으로의 변신을 꾀하면서, 다른 부문의 노동운동과 연대를 통
해서 노동운동의 성격이 강화되어, 교육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확
립하면서 교육노동운동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지요. 이 교육운동
과 노동운동의 지향이 충분히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결합하고 자
리 잡기 전에, 비합법 상황에서 탄압국면을 오래 맞아 합법화 투
쟁이 중심이 되면서, 교육운동가들이 조직 안에서 실천의 영역을
충분히 확보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차츰 전교조에서 원심력을 형
성하면서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갔지요.
초기의 국어, 역사교과모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교과모임과 상
담, 학생생활 등 비교과모임이 전교조 산하의 조직인 교과위원회
로, 나중에 참교육실천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어 가다가 자생력을
얻으면서 떨어져 나간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내가 해직교사 복직
전인 1992,3년 무렵에 대구지부에서 맡았던 교과위원장, 참교육실
천위원장이 모두 그런 참교육 실천의 방안과 사례를 연구 실천하
기 위한 기구의 책임자 자리였고, 각 교과모임 창립대회에 지부장
을 대신하여 축하하러 쫓아다녔으니까 잘 알지요. 이 점이 참 안
타까운 부분이지요.
결국 전교조에 대한 기대와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거기에 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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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게 부응하면서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온
셈이랄까요? 교육운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노동운동과 연대
하면서 정체성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교육운동 단체로서의 힘을
갖는 것인데, 무게추가 노동운동 편향으로 기울어지면서 근무여건
과 환경 개선에 치중하게 되어, 국민들에게는 집단이기주의로 비
치면서 국민 지지도의 하락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이와 맞물려
서 교사 대중들의 교육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요구에 대응하는 데
한계를 노정하면서. 교사대중들로부터도 상당 부분 지지가 떨어지
게 된 거라 생각해요. 물론 정권의 집요한 공격도 크게 한몫했지
만...
오늘날 전교조가 맞고 있는 위기의 상당 부분이 그 뿌리가 여기
에 있다고 봐요. 교육은 교육하는 ‘사람’의 의지가 첫째이고 여건
은 다음인데, 오늘날 교육 여건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부족하고 조직이 노후 되어 가는 것을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탓만
할 수는 없어요. 더 근본적으로는 내적인 원인에서 분명히 찾아
짚어야 할 거에요.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인데, 사람의 따스
함과 진정성과 의지 없이 누구 한 사람인들 변화시킬 수 있겠어
요? 전교조가 그 혹독한 탄압에서 이겨낸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잊고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지난날의 우리에게는 분명히 있었거
든요.
김용락 -전교조 초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형의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교육운동 주체들이 경청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요
즘 전교조에 대한 지지가 예전만 못한 부분이 있지요. 이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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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보수언론 등의 집요한 공격과 왜곡된 여론전의 결과이지만,
전교조 내부적으로도 개혁해야할 부분, 혹은 전술, 전략적으로 참
고해야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다시 문학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문학적으로 영향 받은
선배작가, 혹은 사숙한 작가나 스승에 대해 밝혀주십시오. 결혼식
때 성래운 선생이 주례하시면서 시낭송을 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영향은 없는지 밝혀주십시오.
배창환 -제가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어
서요... 대학 다닐 때 처음엔 김춘수 시인에게서 배우면서 민음사
시집 처용을 외우고 다녔으니까 그 영향 아래 있었고, 무엇보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이전에 내려오던 보수 문단의 관념적인 시들과는 전혀 달라서, 이
것도 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리둥절했던 것도 사실이구요. 농촌
현실을 잘 드러내면서 이해가 크게 어렵지 않고 리듬도 강렬한 리
얼리즘 민중시로 읽혔지요.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에서 김수영, 고은, 박재삼, 황동규,
이성부, 강은교... 같은 시인들의 시집도 늘 들고 다니며 외웠지요.
그런데 그보다 가장 먼저 읽은 시집은 민음사에서 나온 서정주 시
집 자화상인데요. 아마 대학 가서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시집
으로 기억해요. 그 중에도 「자화상」이란 시는 역시 놀라웠어요.“애
비는 종이었다”,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이런 구절을 보면서 아, 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어요. 서정주의 시는 나중에 그의 친일 행적과 해방 이
후에 보인 역겨운 행보를 보며 멀어졌지만, ‘시적인 것’이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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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를 보여 준 것만은 틀림없지요. 청마의 시집도 참 강렬한 목
소리로 사랑과 죽음을 담아낸 명시들이 많아서 좋아했지요. 덩달
아 이영도 시조시인의 「진달래」도 좋아했구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현실의식에 눈을 뜨게 되고 제대 복학한
뒤에 복문 후배들과 시 공부를 다시 하면서, 판금되었던 신동엽
시인의 금강을 구해 읽고,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복사본으로
읽고, 정희성, 조태일, 양성우, 김준태... 시인 외에도 저항적인 현
실의식을 표출한 창비 시선들은 나올 때마다 사서 읽었지요. 문지
시선 가운데는 김명인 시인의 동두천을 감명 깊게 읽었어요. 80
년대에는 김용택, 황지우, 이성복, 김진경, 박노해, 백무산 시인...
등의 시집을 즐겨 읽었구요. 이후 우리와 함께 활동한 여러 동인
지의 시와 선후배 시인들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고, 지금도 배우는
중이에요. 백석이나 이용악 시인들을 접한 것은 그들이 해금되고
난 뒤의 일이니까 오래 되진 않았지만 우리시의 획을 그은 시인으
로 당대의 다른 시들과 견줄 때 수준 높은 시여서 좋아했어요. 한
마디로 내 속에는 많은 시인들이 모여서 살고 있어요.
김용락 -(웃음)들어보니 제가 읽은 것과 거의 같네요. 아마 우리 세
대의 시 공부 텍스트가 대충 이런 분들의 시집이 아니었나 싶어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대구지회장을 비롯 본회 부이사장을 역
임하기도 하고 했는데, 지역에서 문학활동 하면서 느끼는 소외감,
굳이 나누자면 중앙/지방의 차이나 문제점 등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배창환 -우리 세대는 문학활동 시기만 보면 시운이 좋았던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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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요. 우리가 80년대에 민족문학운동을 하면서 지역과 중앙의 차
이 또는 차별 같은 것을 느끼지 않으면서 활동할 수 있었으니까
요. 「창비」와 「문지」 같은 주요 계간지들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문학 게릴라 활동이라 할 만한 무크지들이 문학판
을 이끌어가던 때라, 지역에 있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거나
갈등을 안고 출발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광주항쟁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로부터 진
‘빚’을 정신적으로 받아 안고 시작한 문학운동 역시 광주에서 나온
동인지 <5월시>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지요. ‘빛’이 서울(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터져 나
오고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 결과에 얹혀서 문학활동을 한 것
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활동했으니까요.
그 당시 대전 충남에서 활동한 <삶의 문학>이나, 마산의 <마산
문화>, 대구 청주의 <분단시대>는 물론이고, 서울 중심으로 나온
<시와 경제>조차도 중앙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서울 지역’에서
나온 문학이라고 인식했을 정도니까요. 지역의 삶을 노래한 지역
문학이 곧 한국문학이고, 그것이 우리의 민족문학이고, 그것이 곧
세계 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는 생각이지요. 이런
인식이야말로 문학이 사람살이의 터전 위에서, 삶을 위한 문학으
로 설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중앙집권이 아닌 지역분권, 지금
김 시인이 하고 있는 <문화분권>도 이미 80년대의 그런 실천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해요.
이런 역사성 위에서 보면 영호남문인들이 뒤에 <영호남문학인대
회>를 10여 차례나 치룰 때,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국 행사나 다
름없을 정도로 성대하고 수준 높은 문학 축제이자 행사가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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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도 이런 역량과 대중적인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거지요.
동인지 시대는 문학이 억압을 견뎌내는 자생적인 소집단 운동으
로 지역에서 문학 주체가 되어 활로를 개척해 가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중대형 출판 자본을 중심으로 거대한 출판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문학 활동을 하는 각자가 개인별로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요. 상업
화 된 문학공간에 각개 약진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작가회의 같은 문학 단체가 있어서 하부의 의중이 전달되
기도 하고 논의구조 속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서울이 중앙’이라
는 인식, 곧 ‘그 밖의 지역이 지방’이라는 인식이 현실로 굳어가고
있지요. 이러다 보니 출판사도 지역 출판사는 살아남기 힘들고 결
국 위(서울)만 쳐다보고 경쟁하듯 쫒아가는 형국인데, 지역의 자주
성이나 자립이 어려운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문예지들이 무수
히 생겨나서, 문예지들이 ‘자기 사람’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나서서
아직 문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나 능력을 갖기도 전에 너무 많은
신인들을 양산해서, 자기 주변에 포진시키고 관리하고 있는 모습
이 가히 눈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러니 ‘개나 소나 시
쓴다’며 문학판에 대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돌 정도지요. 참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진정한 문
학운동을 꿈꾸며 지역에서 악전고투하며 좋은 시집을 내주고 문예
지를 내는 몇몇 출판사의 땀과 헌신성은 높이 평가하고 기억해 주
어야 할 거에요.
문학의 서울(중앙) 집중화 현상과 여러 가지 부작용이 부의 집
중, 문화의 집중이 자본의 운동 방향에 편승하는 것이라 막기 어
려운 부분이 있지만, 글을 곧 자신이라 생각하고, 글을 통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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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세워나간다는 문학인으로서의 기본자세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세상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문제지요. 시류에 편승하여 쉽
게 장식품을 사듯 사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문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실한 문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에요. 그래서 작가회의에서도 크고 작은 회의에서 언제나 올
라오는 문제가 지역 문인에 대한 발표 기회(지면) 배려가 부족하다
는 점이에요.
지역의 작가 시인들이나 회원들의 창작 의욕을 돋우는 일에 배려
를 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예로, 지난해 작가회의의 40주년 기념
시집에 작가회의 회원이 아닌 시인이나 거의 활동하지 않았던 시인
의 시가 버젓이 올라와 있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회원들이 많았
는데, 편집 담당자야 할 말이 있겠지만, 바로 이런 점이 작가회의
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원심력을 만드는 원인이라 할 수 있
어요. 작가회의가 운동 단체라는 걸 망각한 것이지요.
이런 현상이 여기저기 자주 나타나면 문제가 심각해지지요. 지도
부와 집행 단위에서 늘 배려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배려’를 막상 한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일정하게 한
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에요. 작가회의 기관지에 지역 회원
들을 돌아가며 싣는다 한들 회원이 천 수백 명이고 지회 지부가
스무 개가 넘는데, 한번 싣는데 20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그렇더
라도 그나마 지역회원 모두를 다 실을 수는 없지요. 그러니 ‘배려’
는 하더라도, 문제는 지역 문학인들이 자생력을 길러야 하는 것입
니다. 80년대 무크지나 동인지 문학운동이 그러했듯이. 가장 이상
적인 것은 지역에서 자생력을 기르고, 지역끼리 연대하여 활동하
면서 스스로가 수준 높은 작품을 생산하여 누구의 눈치 볼 것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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