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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vol.11
03-2020
Brunch Kid Model Story Sports Story Fashion Story Interior Story Fun Illust Story
Alice in Wonderland 2020 NBA All-Star Gabrielle Chanel Livestyle by IKEA 기코작가의
컨셉 화보 숨은 그림찾기
www.en.airfish.co
BM Entertainment 소속 아티스트 박소율 Stella Park
2019년 Best Mom, Best Managament의 약자 BM.
BM Entertainment는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는 엄마의 마음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저희 BM Entertainment는 따뜻하고 온화하게 험하고 거친 이 세상에서 내편이 되어
줄, 나를 지켜 줄 단 한 사람 ‘엄마’의 존재처럼 아티스트들이 믿고 기댈 수 있도록 하고자하는
다짐으로 세워졌습니다. 처음 그 다짐대로 좋은 엄마, 든든한 버팀목,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믿
음직한 파트너로서 아티스트들이 몸과 마음이 아프거나 외롭지 않고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
도록 한국과 미국 콘텐츠 부흥에 노력할 것입니다.
BM Entertainment LLC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플랫폼 역할로 문화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기업입니다.
p.07 p.18 p.38
Contents
Cover P.07 - Brunch Kid Model Story P.54 - Yoga Story
Alice in Wonderland 컨셉 촬영 Mukti 선생님과 배우는 쉬운 요가
Illustration by P.18 - Fashion Story P.56 - Kitchen Story
Ji Young Chang Gabrielle Chanel 정희정의 Easy Kitchen
Instagram @calicallillust P.25 - New York Story P.57 - Kids Story
Henry Bendel 아이들의 해맑은 그림세계
P.26 - Interior Story P.60 - Fun Illust Story
Lifestyle by IKEA 기코작가의 숨은 그림찾기
P.34 - Sports Story P.62 - Fun Recipe Story
2020 NBA All-Star Luca Mom’s 재미있는 레시피
P.38 - Travel Story P.64 - English Story
Getaway House 감성영어-Something Stronger than Death
P.42 - Artist Story P.65 - Brunch Story
Andy Warhol 2월 브런치 클래스 이야기
P.48 - Cafe Story P.75 - Music Story
레이지 데이지의 뉴욕 카페 탐방 가호의 시작 (이태원 클라쓰 OST)
P.52 - Ballet Story
심지영 선생님의 발레이야기
BRUNCH KID MODEL STORY
Brunch Kid Model
Lookbook
브런치매거진과 Best Mom Entertainment가 함께하는
브런치 키즈 모델 컨셉 화보
Alice in Wonderland
STELLA & DAWON
Photographer l Sage (Jihye) Baek born in Seoul, South Korea. Mother of two boys.
Graduated Pratt Institute majored Masters Fine Art Photography in New York.
Model Agency l Best Mom Entertainment
Models l Stella Park & Dawon Seo
Stylist l OOAHOOAH
Hair & Make-up Artist l Jane Everwell
Sponsoring Brands l Airfish & Tiny Apple
Special Thanks To
Flowers l Darlingmoon Flower
Macarons & Cake l Thursday Baking Kitchen
Airfish Floral Corduroy #DressCoat
Flower Design by Darlingmoon Flower
소품: Preserved Flower by Flower by Niel
Airfish Bubbletop / Louise Misha Dress Oxaca, Cloud
Airfish Bubbletop & #MouseJeans / Macarons & Cake Design by Thursday Baking Kitchen
소품: Yrtti Herb-Garden Candle Holder
Airfish Bubbletop / Louise Misha Dress Oxaca, Cloud Macarons & Cake Design by Thursday Baking Kitchen
Airfish Floral Corduroy #DressCoat
Airfish #XOXOHeart
Flower Design by Darlingmoon Flower
Macarons & Cake Design by Thursday Baking Kitchen
Stella: Airfish #XOXOHeart
Dawon: Beauloves Ruffle Collar Top, Light Blue / Picnik Skirt Salome, Blue
FASHION STORY
Gabrielle Chan`el
여성이 어떻게 자신을 조금도 꾸미지 않고 집을 나설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그날이 운명의 상대와 데이트를 하게 될 날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1883 ~ 1971
고급 브랜드의 상징. < 샤넬과 카펠 >
여성들의 로망. 부러질 듯 가냘픈 몸매에 고집 센 검은 눈동자, 하얀 피부에
매혹적인 짙은 머리의 그녀는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묘한 매력을
샤넬. 풍겼기에 카바레를 찾는 부유층 남성들은 곧잘 샤넬에게 반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을 가져다준 남자가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 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패션 나타나죠. 바로 에티엔 발장. 그녀는 당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었고, 샤넬은 발장의 끈질긴 구애를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패션의 역사는 샤넬을 전후로 나뉜다는 말이 받아들여 25세의 나이에 그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발장의
있을 만큼 패션사와 현대 여성사에서 그녀가 이루어낸 업적과 목장에서는 돈 많고 할 일 없는 부유층 자제들과 그들의 정부들, 또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영원한 스테디셀러 트위드 슈트에서부터 고급 창녀들이 모여 종종 사교 파티를 했고, 샤넬은 처음으로
퀼팅백, 샤넬 넘버 5 향수까지 그녀가 창조한 수많은 아이콘은 귀족들의 파티에 발을 들여놓으며 상류 사회로 가는 첫 문을
샤넬이 탄생한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치 않는 세기의 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는 드레스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샤넬은 옷이 필요할 때마다 발장의 승마복을 꺼내 여성복으로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가난하고 어려운 개량해 입곤 했습니다. 당시 패션은 상류층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역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샤넬이 열두 살 때 어머니는 이었거든요. 상류층 부인들이 입는 스타일이 곧 패션 트렌드였고,
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혼자 자식들을 키울 수 없었던 아버지는 많은 창부와 정부들은 귀족들의 스타일을 따라 입으며 그들처럼
샤넬과 어린 여동생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 버렸죠. 보이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샤넬은 수녀들의 교육 아래
자랐고 바느질도 그곳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샤넬의 여동생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샤넬의
어린시절은 지독히도 외롭고 불우했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때로는 거짓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18세가 되던 해 생마리라는 의상실에서 보조 재봉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했기에 밤에는
비쉬와 물랭에 있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샤넬이 즐겨 부른 <코코리코> 라는 노래 때문에 손님들은
그녀를 “코코”라고 불렀는데 우리에겐 코코샤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 이름을 싫어했습니다. 샤넬은 자신이
뚜렷한 삶의 목적이 없는 여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성공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상류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샤넬은 발장과 사교 파티에
참석하여 귀족들과 어울렸고, 승마와 놀이를 배우며 점점 그들의
문화를 습득해 갔습니다. 샤넬의 패션 감각이 처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샤넬이 자신이 쓸 모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많은
부인들의 부러움을 샀고 이렇게 하나둘씩 얻어 간 샤넬의 모자는
어느새 귀부인들 사이에서 대인기가 되었죠. 무언가를 깨달은
샤넬은 1908년 발장의 아파트 1층에서 모자를 팔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자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느 날, 샤넬은
인생에 두 번째 전환점이 되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발장에게
소개받은 카펠. 카펠은 영국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부모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한 인물이기도 했죠. 카펠은 샤넬의
소망을 무시하던 발장과 다르게 그녀의 열정을 이해하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샤넬은 발장의 친구 카펠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카펠 역시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샤넬은 자신의 첫 번째 남자 발장을 떠나버립니다. 달랑 편지 한 통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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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장을 떠난 샤넬은 1910년 카펠의 후원으로 파리의 캉봉 거리 < Dress, 1924 from THE MET >
21번지에 “샤넬모드”를 오픈하면서 처음으로 파리에 디자이너로
서게 되었습니다. 모자 디자이너로 인기를 얻었던 샤넬이었기에 특히 1920년대 들어서 저지 드레스는 가르손느 룩으로 발전합니다.
샤넬 모드도 처음에는 모자를 파는 부티크였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어로 작은 소년을 뜻하는 가르손느 룩은 마른 몸의 소년처럼 납작한
모자는 꽃과 레이스, 진주 등의 장식이 많은 대단히 화려한 허리라인을 가진 원피스로 짧은 헤어스타일과 어울려 당대의모든 여성들이
것들이었죠. 하지만 샤넬은 최소한의 장식만 달린 매우 심플한 이 유행을 따랐다고 합니다. 샤넬이 만들어 낸 이 입기 편한 원피스는
디자인의 모자를 팔았고 이 색다른 모자는 빠른 속도로 여성들에게 여성들에게 있어 그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관습을 벗어던지는 것을
인기를 얻었습니다 얻었습니다. 특히 당시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뜻했습니다. 이는 당시 떠오르던 여권 신장 운동과 맞아떨어지면서
가브리엘 오르지아가 샤넬 모자의 열성팬이 되면서 샤넬의 이름은 여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아 1910년대와 1920년대의 트렌드를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장악했습니다.
샤넬 모드의 성공으로 1913년에는 비아리츠에 연달아 샵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당시 파리 패션의 선두주자는 폴 푸아레였는데
20세기 초 폴 푸아레는 상류층 여성들을 위한 이국적이고 화려한
의상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죠. 그의 디자인을 선두로 한데
프랑스의 유행은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며 화려한 장식에
사치스러운 드레스였습니다. 허리를 꽉 조여주는 코르셋까지
착용해야 했기에 활동하기 굉장히 불편한 옷이었지만 그 화려함과
고급스러움 때문에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었습니다. 특히 그는
값비싼 최고급 원단을 이용해 드레스를 만들었는데, 풍성하고 긴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원단을 필요로 했기에 당연히
드레스의 가격 또한 초 고가였던거죠. 그러한 그의 스타일을
증오한 인물이 바로 샤넬이었습니다. 그녀는 폴 푸아레의 옷을
부자들의 허세라고 여겼고, 특히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것이 럭셔리라는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결심합니다. 중산층을 위한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드레스를
만들기로…
그 당시 그녀가 사용한 원단은 당시 남성들의 운동복이나
속옷으로만 활용되던 값싼 저지 소재였는데 스커트의 길이도 폴
푸아레와는 반대로 대폭 줄여버리고, 여성의 몸을 억압하던 코르셋
역시 과감히 없애 버렸던 거죠.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저지 원피스는
사람들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 단순한 원피스가 당시에는 왜 혁명이었던 것이었을까요?
첫째, 여성복에는 전혀 쓰이지 않던 값싼 저지 소재
둘째, 여성들의 활동을 자유롭게 무릎 길이로 올라간 스커트
셋째, 코르셋에서 벗어나 몸을 조이지 않는 넉넉한 라인의 드레스
이 모든 것이 샤넬이 최초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스타일이 당시로서는 오트 쿠튀르계
의 일대 혁신이었던 거죠.
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
유럽에서 시작된 고급 맞춤복 라인을 말한다. 고급 소재를
이용해서 개개인을 위해 수작업으로 만드는 옷으로 그 가격이
엄청나다. 옛날 프랑스에서는 이 오트 쿠튀르 라인이 패션계의
주를 이뤘다.
프레타 포르테 Pret-a-Porter
영어로는 레디 투 웨어 (Ready to Wear)라 불리는 기성복 라인을
일컫는 용어이다. 처음에는 품질 좋은 옷을 원하지만 비싼 오트
쿠튀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맞춤복이
아닌 만큼 가격이 오트 쿠튀르에 비해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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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펠을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채울 길 없는 공허만 남기고 나의 카펠은 떠나버렸다.’
-가브리엘 샤넬-
31, RUE CAMBON 한편 미국에서는 검은색 포드 자동차가 나타나면서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이 세계적인 이슈는 샤넬에게 또 다른 영감을
그녀의 러브 스토리 두 번째 남자 카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주었습니다. 당시 검정이라는 색상은 죽음을 애도하는 용도의
일어나면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정계에 색상으로, 장례식을 갈 때 외에는 입지 않았는데 샤넬은 오로지
진출하기 위해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을 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들은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드레스를 최초로 세상에 내놓았던 거죠.
카펠의 결혼 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해 나갔고 결국 카펠은 이혼을
한 후 다시 샤넬에게 돌아왔고 이 둘의 사랑은 영원할 듯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1926년 탄생한 샤넬의 ‘Little Black Dress -LBD ‘ 리틀
1919년 그만 교통사고로 카펠이 죽고 말았습니다. 샤넬은 카펠을 블랙 드레스입니다. 검은색을 일상복으로 입지 않았던 프랑스
잊으려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 사람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들은 곧 세련되면서도
쿠튀리에( 오트 쿠튀르를 만드는 부티크 혹은 디자이너)로 공식적인 고상한 느낌을 주는 이 검정 드레스에 매혹되었고 파리의 유니폼으로
인정을 받으며 샤넬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뤼 캉봉 31번지에 불리면서 큰 사랑을 받았던 거죠. 이렇게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폴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샤넬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뤼 푸아레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향수와 의류에서 연달아
캉봉 31번지는 그 주소만으로도 멋진 디자인이 될 정도입니다. 대박을 터트리고 샤넬은 곧 전설적인 아이템을 세상에 선보입니다.
바로 샤넬 스타일의 정점을 찍는 샤넬의 슈트가 탄생하였는데, 이
그 후 샤넬은 향수 제조가 에르네스트 보를 만나 그의 향수 회사 “랄렛 슈트는 깃이 없는 재킷에 무릎 길이의 스커트를 매치한 것으로
No.1 “이라는 향수 시리즈 중에 열 가지 샘플을 샤넬에게 보여주고 심플함과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남성복 재킷의
맘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게 했습니다. 그녀는 No.5를 선택했고 라인에서 따온 일자로 떨어지는 넉넉한 실루엣은 활동성이 좋아 매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샤넬 No.5는 크리스마스에 샤넬의 VIP 고객들 실용적 이였죠. 여기에 샤넬 특유의 인조 진주 목걸이와 작은 모자가
에게만 비공식적으로 증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향수를 원하는 코디되면서 완벽한 샤넬룩이 완성되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
고객들이 점점 많아지자 샤넬은 마침내 1921년 공식적으로 No.5를 프랑스 거리는 이 심플하고 우아한 샤넬룩의 물결로 넘실거렸다고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합니다.
< 31, RUE CAMBON STORE >
‘ 신은 내가 사랑을 원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순간 난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
나의 의상들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난 드레스를 택했다. 일은 내게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이다. 가끔씩 내
인생에서 남자들이 없었다면 샤넬이 무엇이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브리엘 샤넬-
샤넬은 일생동안 많은 남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하나하나 영감을 얻었고, 그녀에게 그런 샤넬은 체포되었지만 운 좋게도 무죄로 석방되고
계기가 없었다면 과연 샤넬이라는 브랜드는 탄생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연인들이 있었던 거죠. 항간에 소문으로는 윈스턴 처칠이 그녀를 도왔다는
1930년대가 되면서 샤넬은 전 세계에 샵을 오픈했고, 직원을 4천 명이나 둘만큼 성장했습니다. 소문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죄로 판명되었어도 진실을
그리고 모든 브랜드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 바로 2차 세계대전이 찾아오고 세계 경제는 알고 있는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고
악화되었고, 이는 샤넬의 사업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샤넬은 1939년 사업을 접고 패션계를 잠시 그동안 그녀가 쌓았던 명성과 인기는 전쟁 후
은퇴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었고 독일은 프랑스의 적국이 된 악명으로 바뀌며 비난의 눈초리를 피해 스위스로
상황에서 샤넬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남자들 보다도 무섭고 잘못된 선택으로 독일군 나치 장교인 탈출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스위스 호텔을 전전하며
한스 퀸터 폰 딩크라게와 연인이 됩니다. 당시 샤넬은 57세, 장교는 그녀보다 열 살 아래. 전쟁 중 지냈고 일중독이었던 샤넬은 그런 무료한 생활을 견딜
독일에 있었어도 프랑스인인 샤넬은 한스 퀸터 폰 딩크라게와 함께 리츠 호텔에 머물면서 아무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샤넬이 자리를 비운 프랑스는
불편과 위험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전쟁이 종결되고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죽지 않았습니다. 금세 발렌시아가와 크리스챤 디올
프랑스는 독일에 협력한 매국노를 잡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등 신진 디자이너가 등장하여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샤넬도 예외는 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유행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샤넬은 15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지만 프랑스에서는 곱게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겁내지 않고
차근차근 컴백 컬렉션을 준비한 샤넬은 당시 나이 71
세로 1954년 2월 5일 컴백 패션쇼를 뤼 캉봉 31
번지에서 열었고 샤넬은 그대로의 패션을 선보였는데,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은퇴하기 전에 유행시켜 놓은 굴곡을 강조하지 않는
직선의 넉넉한 실루엣은 여성의 몸매를 아름답게
강조하는 디올의 뉴룩 실루엣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후였던 것입니다. 샤넬은 자신감을 잃고 흔들렸고
컬렉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컴백을
냉대했던 프랑스와 달리 영국과 미국 패션계는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뉴룩은
시들고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커리어 우먼들이 다시
실용적인 옷을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반세기 전에 태어난 샤넬 슈트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 8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1971년 어느
그대로 변함없이 사랑을 받으며 샤넬을 가장 잘 나타 날 산책을 마치고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한마디를
내는 시그니처 룩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고급스러운 남긴 채... “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트위드 소재의 재킷과 스커트는 여전히 우아한 안타깝게도 그녀는 프랑스를 배신하고 독일에 협력했던일로 인해 프랑스에 묻힐 수
아이템의 대표로서 명품 슈트의 전설이 되었고 지금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의그녀의 시신은 그녀가 망명 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수많은 브랜드에서 샤넬룩을 표방하여 디자인을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피에르 발망, 발렌시아가, 이브 생 로랑 등
내놓게 된 것입니다. 샤넬 슈트와 어울리는 구두도 당대 최고의 패션계 거장들이 참석했습니다.
이슈가 되었고 당시 페라가모가 발명한 높은 굽인
스틸레토 힐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샤넬은 두 가지 샤넬의 옷은 유행이 지나면 촌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도 모든
색으로 배합된 편안하게 신을 수 있는 낮은 굽의 ‘ 이들에게 트렌드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스타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슬링백 펌프스’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바로 샤넬 스타일
유명한 샤넬 백 2.55백을 창조합니다. 당시 여성들의
가방 대부분은 짧은 손잡이만 달리고 어깨 끈이 www.hellobrunchmag.com 23
없었는데 항상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백에 너무나
불편함을 느낀 샤넬은 퀼팅 처리한 가방에 체인을 달아
샤넬의 첫 번째 백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 체인은 그녀가 고아원에서 지내던 시절
감독관이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닌 열쇠 체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샤넬은 1955년 2월에 이 실용적인 백을 론칭했고,
이것 또한 그대로 가방 이름이 되었습니다.
FEBRUARY,1955 = 2.55
그녀는 저지 드레스에서 샤넬 슈트를 거쳐 2.55 백까지
샤넬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세기의 아이콘들로 여성들을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편안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90여 년간에 걸쳐 그녀가 여성 복식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죠. 이러한 공로로 미국에서는
“과거 50여 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로 뽑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샤넬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샤넬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다.
패션은 철 지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일은 결코 그렇지 않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가브리엘 샤넬 -
다음 호에는 어떤 명품 브랜드 이야기를 만나보게 될까요? 기대해 주세요.
글 브런치매거진 편집부
<사진출처 google, 소셜네트워크>
NEW YORK STORY
Henri Bendel
헨리 벤델 백화점
미드타운 FIFTH AVE 712번지 였던...
업타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줄무늬의 헨리 벤델
쇼핑백은 화려한 쇼핑계의 주류 중 하나였죠.
백화점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랄리크(Lalique :
프랑스의 유리공예 명가) 창은 이곳을 5번가의 대표적인
건물로 만들었었습니다. 1850년 그리니치 빌리지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1931년에 업타운으로 옮긴 벤델은
미국에 “코코 샤넬”을 처음 들여온 선구자이기도 했죠.
패션계뿐만 아니라 업계 유명인사들이 새로운
액세서리를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고, 뉴욕의
화려하면서 시크한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상징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해서 관광객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던 헨리 벤델 백화점은 안타깝게도 2
년 전 불황기로 문을 닫고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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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 STORY
Lifestyle
한번도 구입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
IKEA 이야기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1926-2018) 는 2018년 1월 29일부로 별세하였습니다.
2019년까지도 비상장기업이며, 앞으로 상장 계획은 없다고 밝혔었죠. 창업자이자 고문인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이 아이케아가 금융 기관
에 의존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018년 1월 29일 잉바르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상장할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1943년 초기에는 그냥저냥 한 잡화점에 가까웠으나 1950년대 스웨덴의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사업과 맞물려 크게 사세를 확장했습니
다. 대량 구입을 통한 효과적인 원가절감으로 경쟁업체보다 20%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조립식 가구를 내놓으면서 호응을 얻었고, 대형
매장도 세우기 시작하며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해외로 사업을 확장하며 1980년대에는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
겨서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색채를 갖추게 되었죠.
아이케아? 이케아?
KEA라는 이름은 Ingvar Kamprad, Elmtaryd, Agunnaryd의 약자입니다. Ingyar Kamprad는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의 이름, Elmtaryd
는 그가 자란 농장의 명칭, Agunnaryd는 그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입니다.
보통 발음으로 한국에서 오신 분들하고 뉴욕 뉴저지 현지인들하고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옥신각신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한국에서
는 보통 이케아로 읽습니다. 다만 영어권에서는 아이케아라고 읽습니다. 하지만 영어권이라도 영국 같은 경우 매장에서 꾸준히 이케아로
방송하는 등 본래 발음으로 유도하는 모습이 보이죠.
다른 예시로, IDEA의 발음도 IKEA처럼 이데아와 아이디어로 나눕니다. 비슷한 경우로 니콘을 미국에서 나이컨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쨌
거나 스웨덴 발음은 이께아에 가까우며(외래어 표기법은 원칙적으로 된소리 표기를 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이케아라고 표기하는 것일
뿐), 영어권을 제외한다면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식 발음으로도 대게 이케아라고 합니다. 일본도 이케아라고 발음하고, (이케
야)라고 말장난하기도 합니다. 중국 역시 宜家로 '아이' 보다는 '이'에 가깝게 읽습니다.케야)라고 말장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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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EA 는 스웨덴 색이 짙은 브랜드입니다.
스웨덴 국기와 깔맞춤한 색깔을 기업 로고부터 스토어 외관까지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스웨덴의 국가정체성이 가장 확실
히 드러나는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창업주가 세금 덜 내겠다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고, 법인세를 덜 내겠다고 본사를 덴마
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옮긴 덕택에 스웨덴 내에서는 복지국가 스웨덴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기업임에도 세금은 안 낸다고 이래저래 말이
많습니다. 한창 사업을 국외로 확장했을 때 납품단가를 떨어트리겠다고 동독 정부와 협력하여 정치범들을 착취했다는 폭로도 나왔고, 사
실 창업주 자신이 젊었을 적에 네오 나치에 가담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기도 한데다가 이후로도 세금 탈루 혐의를 받는지라 사실 스웨덴 내
에서는 도덕적인 경영과는 거리가 먼 기업으로 손꼽히기는 한답니다. 같은 스웨덴 출신 발렌베리 가문(이 거느린 기업들)이 거의 절대적일
정도의 양심 경영으로 모범적인 기업에 손꼽히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인 거죠. 규모가 큰 만큼 목재 소비량도 엄청납니다. 매년 세계
에서 생산되는 목재 중 1%가 아이케아 가구에만 쓰입니다. 적어 보이지만 한 기업이 세계의 1%라는 엄청난 물량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케아가 세계인들 삶 속에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인 듯 합니다.
IKEA 는 어떻게 가격이 기성 가구브랜드와 다르게 저렴 할 수 있는가?
아이케아는 완제품이 아니라 DIY로 공급하죠. 공장에서 조립 공정을 생략할 수 있고, 플랫 패킹이라는 납작한 형태로 포장하기 때문에 물
류비를 절감하여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 가능하고, 제품 태그와 설명서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써둠으로써 안내를 위해 상주하
는 직원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MDF 자재나 베니어판을 덧댄 골판지를 많이 사용합니다. 골판지의 경우 책상다리나 탁자 침대
에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책장 뒷판 같은 것은 두꺼운 종이를 쓰기도 하는데 물론 원목을 사용한 제품도 있지만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기도 합니다. 조립 설명서는 글자 없이 그림으로만 되어있어 알기 쉽습니다. 여기서 또 인쇄비와 번역료를 절감할 수 있겠죠.
아이케아는 국가별 프리미엄이 거의 없다시피한 드문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북미에 비해 뭐든 기본적으로 1.5~2배 가격표를 붙이는 영
국, 호주,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이케아만큼은 환율 기준 거의 동일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이케아 상품의 특징은 한 가지 제품에
대해 동일 디자인으로 전세계에 판매하기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생산이 가능하여 제품 생산 단가가 낮고, 제품의 용도에 따라 내구성을
달리하기 때문에 동일 제품군이라고 하더라도 가격대가 다양하며, PB, MDF 뿐만 아니라 무늬목, 원목 등도 적절히 사용하면서 전체적으
로 값이 합리적이고 내구성 또한 기존 가구 전문 브랜드에 비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매년 카탈로그를 통해 새로운 제품을 소개하고 주기적
으로 제품은 교체되고 있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가능한한 불필요한 요소로 보이는 것들을 지양하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
습니다. 요즘시대 가구계의 패스트 패션이라 보면 될 듯 하네요.
재미있는? 살짝 요상한 아이케아만의 가구 이름
매장이 어디에 있든 파는 물건에 무조건 스웨덴어 이름을 붙입니다. 이는 창립자인 잉바르 캄프라드 회장이 알파벳과 숫자로만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델명을 외우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대요, 그러다 보니 가끔씩 외국인이 볼 때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작명도 종종 보이
는데, 한국을 예로 들면 몰라 색연필, 삼라 옷상자, 김세 수납함, 쉬 실, 말린다 방석, 송에 거울, 말름 침대, 외스타니 조명, 만달 서랍장, 바르
되 수납용기, 볼멘 변기솔, 뷰르스타 식탁, 반달 주방용 받침대, 잉오 테이블, 군데 의자, 콜론(KOLON) 바닥재, 펠라 화분, 발제 책꽂이, 빌리
탁자, 브랄리스 옷걸이 등등 독특한 제품명이 끝이 없습니다. 식품도 예외는 아닌데, 아이케아에서 파는 마시멜로 이름이 Godis sk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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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
IKEA Fail이라고 하여 조립에 익숙지 못한 일반인들이 멋모르고 아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다 완성 후에 보니 잘못되어도 다시 뜯어고칠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엄청 후회하는 경우 한 번쯤은 다들 경험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렇지만 인터넷에
서 짤이나 밈으로 퍼지기도 하는 걸 보면 대부분 한 번쯤은 ㅎㅎ 그래서인지 IKEA Fail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의 이불킥과 유사한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입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아이케아 의자를 조립하던 아가씨가 다리와 등받이 위치를 혼동하여 결국 좌절하는 모습이
찍혀 있기도 합니다.
사실 제대로 조립해도 부러질 수 있습니다.
아이케아 가구는 대부분 합판이고, 그나마도 일부 제품의 내구도는 가격에 비례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100짜리 테이블 세트를
샀는데 의자에 앉아 기지개 한번 폈다가 등받이가 부러졌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조립이 필요 없는 파트인데도 말이죠. 책장 뒷
판이나 서랍 바닥판 같은 경우는 퍽 치면 빡 하고 동강 날 것 같이 얇고... 그러니까 가격을 보고 싼 가구인 경우에는 조립할 때 그냥 끼우기
만 하기보다 강력본드나 목재용 풀로 덧대어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조립이 되어 있는 부분이라도 부러지면 아이케아에서 교환해주
는데 이것에 못을 박아 보강하는 편이 오래가긴 합니다.
당연히 풀칠한 대가로 해체는 안되는데 가구 해체는 굳이…. 다시 할….
동해 표기 논란도 있었죠.
한국에서 이케아 코리아는 광명점 개장 전 공식 홈페이지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 세계지도 제품 이미지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케아 광명점이 열린다는 소식에 큰 관심을 가진 소비자들에게 SNS를 통해 알려지자, 한국 소비자들은 이케아 코리아 측에 해명
을 요청했으며 이에 이케아 코리아 측은 한국에서는 팔지 않겠다고 공표하여 한국 소비자들의 비난을 샀더랬죠. 그 이후 이케아 코리아 측
은 자사 공식 SNS에 사과문을 게시하였으며, 해당 상품을 전세계 제품군에서 제외하긴 하였습니다.
아이케아의 조세 회피 문제
복잡한 기업 구조를 갖고 있는 아이케아는 여러 국가에 매장을 갖고 있지만 내야 할 세금을 회피하거나 아주 적게 내오고 있습니다. 구글,
스타벅스 같은 다국적 기업이 주로 쓰는 조세 회피 방법으로, 유럽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등에 지사를 설립해두고 세금 우대
및 면제 혜택을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분명 스웨덴 전통, 스웨덴 감성 등등 스웨덴 팔이를 하고 있지만 정작 본사는 네덜란드에
있는 웃픈일이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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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케아는 Soooo Whatttt?
이라고 말하듯 영화에서도 여기저기 등장합니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 등장하며 "자동차 회사의 리콜 심사관으로 일하는 잭은 스웨덴산 고급 가구로 집안을 치장하고 유명 메이커의 옷만
을 고집하지만 일상의 무료함과 공허함 속에서 늘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무비스트에 기재된 영화 소개) 여기서 말하는 스웨덴산 고급 가
구가 아이케아로 온 집안이 아이케아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자막으로 가격이 표시되는 등 마치 아이케아 카탈로그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편집이 일품입니다.
“히트맨”의 에피소드 3 모로코 미션에서 스웨덴 영사관 직원이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 아이케아 의자를 조립하다가 실패해서 전화
를 거는 이스터 에그를 목격할 수 있고,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에서는 IKA BOHAG라는 이름의 회사로 패러디되어 나옵니다. 반대로
ProMods나 실존 회사 모드 등을 설치하면 IKEA 회사 이름 그대로 나옵니다.
“심즈 2”에서는 아이템 팩으로 등장하는데 2008년 IKEA와 컬래버레이션으로 IKEA 홈 데코라는 확장팩을 발매하여 IKEA의 가구나 인테
리어 소품 등을 그대로 게임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가구의 재현 정도가 뛰어난 편이라 인테리어 할 때 좋은 팩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스웨덴 영화 “경계선”에서 주인공 티나가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다가 '아이케아 가구를 가진 중산층 가족'식으로 언급을 합니다.
스웨덴 현지에서 아이케아가 중산층의 상징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SCP 재단에서는 SCP-3008 (완벽하게 평범하고 일반적인 낡은 아이케아)이 존재하는데,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아이케아 매장으로 보이
지만 매장 내부로 들어가서 출입구가 안 보일 정도로 깊게 들어가다 보면 내부가 무한히 이어진 아이케아 매장 형태의 미궁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내부에는 '대략 키 210cm가량에 이목구비가 없고 아이케아 직원복을 입은 형태의 괴물'들이 존재해서 낮에는 별로 위협
이 되지 않지만 오후 10시 이후만 되면 적대적으로 돌변하기까지 합니다. 이 미궁에서 벗어난 한 민간인의 기록이 존재하는 거죠.
아이케아가 등장하면서 아이케아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아이케아 세대는 교육 수준이 높고 스펙이 뛰어나지만, 불안정한 고용으로 미래를 계획하기 힘든 78년생 전후의 세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가격 대비 좋은 품질의 상표인 아이케아에 빗대어 이르는 말이죠.
아이케아는 왜 불편한 가구를 만드는가?
아이케아는 불편함으로 전 세계를 장악한 글로벌 가구 공룡이라는 타이틀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다름 아
닌 ‘고객과 함께 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창업자는 이야기합니다. 3시간 동안 매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고른 가구를 직접 카트로 끌고 와서
조립까지 하게 만들지만, 북유럽의 세련된 디자인 제품을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기회이기 때문에 고객들은 기꺼이 번거로움마저 달콤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나 아이케아 가구를 사서 조립하는 과정이야말로 고객들에게 흥미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죠. 아이케아 가구를 일컬어 ‘성인용 레고’라
고 하거나, 아이케아 매장을 ‘스웨덴식 디즈니랜드’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싸고 디자인 좋고 품질 좋으면서도 재미까지 있는 아이케아는
아날로그입니다. 그래서 디지털 가구보다 불편하지만 재미를 주기에 승승장구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은 불편을 제거함으로써 생존본능을 높이려는 의도임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불편함은 인간의 생존본능을 일
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거죠. 불편함을 배척하고 편안하고 편리함만을 고집할 경우, 디지털 치매증후군처럼 생존을 위협하는 현상으
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현대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힐링 캠프, 올레길, 걷기 여행이 인기인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인 듯합니다. 얼마든지 가이드와 자
동차를 이용해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음에도 굳이 ‘걷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수행에 가까운 힘
든 걷기 여행을 즐기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아날로그의 표본이니까요.
글 브런치매거진 편집부
<사진출처 google, 소셜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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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STORY
2020 NBA ALL-STAR
The Black Mamba, Kobe Bryant
농구 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
NBA(미국 프로농구) 정규 시즌 경기, NBA 최고의
선수들만 참가하는 올스타 경기 2019-2020 시즌
미국 프로농구 올스타전은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
치열한 명승부로 펼쳐졌습니다.
최초의 NBA 올스타전(NBA All-Star Game)은 1951년 3월 2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있는 보스턴 가든에서 개최되었었죠. 이번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열린 2019-2020
NBA 올스타전은 '8초간의 침묵'으로 시작해 '팀 르브론'의 157대
155 승리로 끝났습니다.
지난달 말 헬리콥터 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NBA의
전설' 코비 브라이언트를 추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밖에도 브라이언트와 그의 딸 지아나를 기리기 위해 '팀 르브론'과
'팀 야니스' 선수들이 브라이언트 부녀의 생전 등 번호 2번과 24번을
달고 출전했습니다.
41대 41로 승부를 내지 못한 3 쿼터에서는 양 팀 선수들이 쿼터
점수에서 이기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쿼터 막판에
양 팀 벤치가 차례로 타임아웃을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또 전반 종료 직전에는 애틀랜타 호크스의 트레이 영이 하프라인
버저비터를 성공하는 장면이 나와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는데,
공교롭게도 영은 브라이언트의 딸 지아나가 살아 있을 때 가장
좋아한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은 브라이언트 사고 당일 열린
워싱턴 위저즈와 정규리그 경기에서도 2 쿼터 종료와 함께 장거리
버저비터를 넣고는 하늘을 가리 키며 브라이언트를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133대 124로 3 쿼터까지 '팀 야니스'가 앞선 가운데 시작된 4
쿼터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앞서 있는 '팀 야니스'가
4 쿼터에 브라이언트의 등 번호와 같은 24점을 넣으면 경기가
끝나는 방식이었습니다. 뒤진 '팀 르브론' 역시 '팀 야니스'의 '목표
점수'인 157점을 채워야 합니다.
4 쿼터에는 거의 정규리그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접전이 <초대 코비 브라이언트 어워드 수상 : 커와이 레너드>
펼쳐졌습니다. 3 쿼터까지 9점을 끌려간 ‘팀 르브론’이 맹추격에
나선 끝에 제임스 하든의 3점포로 146대 146,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어진 '11점 먼저 넣기'의 승자는 결국 ‘팀
르브론’이었습니다. 르브론 제임스의 덩크슛으로 ‘팀 르브론’이 156
대 153을 만들었고, ‘팀 야니스’는 조엘 엠비드의 자유투 2개로 156
대 155로 추격했습니다. 양 팀 모두 한 번의 공격만 성공하면 이기는
상황에서 '팀 르브론'의 앤서니 데이비스가 자유투 2개 중 2구째를
넣어 치열했던 승부를 마무리했습니다.
올해부터 올스타전 최우수선수 트로피의 명칭이 '코비 브라이언트
어워드'로 제정된 가운데 '초대 코비 브라이언트 어워드' 수상의
영예는 이날 30점, 7 리바운드를 기록한 커와이 레너드에게
돌아갔습니다.
내로라하는 NBA 슈퍼 스타들이 다 모이는 올스타전.
늘 현역 최고 스타들이 벌이는 현란한 묘기는 전세계 농구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다시 한번 코비 브라이언트 선수와
그의 딸 지아나를 추모하며...
<코비 브라이언트 & 딸 지아나>
글 브런치매거진 편집부
<사진출처 google, 소셜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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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STORY
Getaway House
자연속에서 심호흡. 잠시 쉬어가기.
New York Catskill에 위치한 Getaway House를 소개할까 합니다.
캠핑을 그리 즐기지 않는 일인으로서, 아주 작은 설렘을 안고 아주 착한
가격에 1박을 booking 하게 되었어요.
미리 예약을 해 놓으니 여행 날짜 일주일 전에 리마인드 이메일이 오
고, 예약 당일 문자로 주소와 cabin pass code를 보내주더라구요. 연락
온 문자로 여행하는 동안 뭐든 물어보고 24시간 연락이 가능하다고 합
니다!
아이들은 캠핑을 좋아해서 아빠랑 셋이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저는 이
번 여행이 처음 캠핑이었죠. 우선 포트리에서 출발하니 2시간 정도 운전
하고 갔어요. 그 전날 너무 피곤했는지 신랑이 운전하는 동안 딥 슬립을
하는 바람에 오는 길 구경을 못한 게 아쉽네요…(호호호)
꿀잠을 자고 도착한 Catskill의 Getaway House는 숲 가운데로 길을 내
어 길 옆으로 띄엄띄엄 cabin들이 자리를 잡고 있더라구요. 저희는 4인
가족이라 4인이 잘 수 있는 cabin을 예약했어요. 둘러보니 더 큰 cabin
도 보였고, 더 작은 cabin도 보였어요.
Catskill Getaway House는 East와 West, 두 군데로 나뉘어 있더라고
요. East는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구요, 저희는 West로 예약을 했
어요.
도착해서 차를 저희 cabin옆에 주차하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cabin
키패드에 코드를 넣었습니다. Tadah~~~ 사진에서 많이 보던 통창 옆
에 침대와 미니 키친, 그리고 화장실 공간으로 최소한의 공간을 최대화
시켜 레이아웃을 잡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광고에 많이 나오던 숲을 향한 큰 통창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는데 저희
cabin 침대는 이층 침대여서 통창이 뻥 뚫리게 다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아쉬웠어요…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테이블 위에 놓인 웰컴 패키
지예요. 폴더에 손글씨로 쓰인 제 이름과 짧은 메세지가 personal 하고
특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안에 내용은 cabin을 사용하는 방법과 유료
아이템 가격 등등 스테이에 필요한 설명들이었어요.
미니 주방에는 대우 냉장고가 눈에 띄었고, 사용 가능한 식기들과 전기
stove,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 그리고 유료로 먹을 수 있는 스낵들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정말 들고 오지 않았어도 될 것 들이 많더라구요. 다
갖추어져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와 식탁이
있었고, 키친 옆으로는 화장실이 있었어요-변기와 샤워부스. 변기는 물
로 내리는 시스템이 아닌 점 알아두세요 ㅎ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네요. 약간 불편하기도 했구요..)
Cabin 구경을 마치고, 문자로 받았던 지도를 보니 산책로가 있더라구요. 어두워지기 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아이들과 산책로로 향했
습니다~ 한 5분 정도 되는 산책로라 아이들과 걷기 무리 없이 좋았어요. 아이들이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좀 짧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날이 아직 추웠던
관계로 저에겐 적당하다고 느껴졌어요. 나무들 사이로, 낙엽을 밟으며, 나뭇가지 지팡이 한 개씩 찾아들고 아빠 따라 조잘조잘 떠들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
기해하는 아이들. 정말 뭐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 짧은 산책로를 탐험하는 수준으로 재밌게 다녀왔답니다!
돌아와서 몸을 좀 녹이고, 신랑은 밖에서 불 피울 수 있는 fire pit에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밖에 Campfire Kit이라는 상자를 열어보면 태
울 수 있는 나무와 fire starter가 들어있어요. 유료이지만 가격은 $10 안쪽으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답니다. 불이 붙기 시작하고, 불이 좀 안정적으로 잡
혔을 때 준비해온 스테이크와 야채를 올려 너무 맛있는 저녁을 차렸답니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 집에서 다 준비해 왔는데 cabin에 있던 걸로 사용했어요. 저는 설거지가 싫어서 종이 접시를 준비해 갔는데 딱 좋았어요! 스테이크
와 컵라면으로 거하게 저녁을 먹고, 드디어 아이들이 기다리던 S’more 타임이 온 거죠. Getaway House에서 웰컴 패키지처럼 선물로 S’more package를 준비
해 주었어요. 안에 나무 꼬챙이, 마시멜로, 초콜릿, 그라함 크래커까지 준비되어 있어 아이들이 마시멜로를 구우며 엄청 행복해했답니다. 저희는 따로 마시멜
로 한 봉지를 사 갔어요. 그날 먹은 마시멜로… 엄청난 칼로리를 흡수하였답니다. 아이들만 행복하다면야 ^^;;
좋아하는 옛날 음악을 틀어 놓고 불 옆에 앉아 있으니 추운 날씨였지만 마음은 행복하고 따뜻했네요.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숲과 달리 반짝반짝 별들이 청명한 공기와 어우러져 빛이 나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았어요.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아이폰
으론 무리가 있더라구요... 아쉽게 제 눈에만 담아왔답니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고, 밖에 피워둔 불이 꺼질 때까지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Getaway House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녁이 되니 cabin 안에 통창
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밖이 하나도 안 보여서 좀 아쉽더라구요. 저 창문은 낮에만 즐길 수 있다는 점... 그래도 낮엔 예쁘니 용서가 되네요^^
체크인은 오후 3시, 체크아웃은 오전 11시. 다른 호텔이랑 비슷한 시간이죠~ 다시 또 오겠냐구요? 음… 로맨틱한 겟어웨이를 꿈꾸며 아이들 없이 다시 한번
은 가고 싶네요. 아이들 데리고는 그냥 워터파크 있는 리조트를 가겠어요 ㅎㅎㅎ 조용히 사색을 즐기기엔 한 번쯤 다녀올 만큼 괜찮은 곳인 거 같아요! (아름
다운 마무리 :D)
Website: www.getaway.house
글/사진 온유, 시온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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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ORY
Andy Warhol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팝의 교황', ‘팝의 디바'로 불린다.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였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
었으며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의 이름은 앤디 워홀
출생-사망 1928.8.6 ~ 1987.2.22
국적 미국
출생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주요저서 《1970년대의 조망》, 《앤디 워홀의 철학》, 잡지《인터뷰》 창간
주요작품 《캠벨 수프 Campbell's soup》(1962), 《두 개의 마릴린 The two Marilyns》(1962), 《재키 Jackie》(1964),
《마오 Mao》(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앤디 워홀은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1949년)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죠. 1960년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배트맨, 딕 트레이
시, 슈퍼맨 등 연재만화의 인물시리즈를 그렸으나 고상한 예술만을 중시하던 당시 뉴욕의 화상들로부터 외면당하
고 말았죠.
Popeye, 1961 superman,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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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bell's soup, 1962
1962년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 New Realists' 전시에 참여해 주목을 받으며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
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워홀은 그것을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조수들과 함
께 대량 으로 생산하게 됩니다.
The two Marilyns, 1962
워홀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 하였습니다.
1963년 첫 영화 《잠 Sleep》을 촬영했고,
1965년에는 영화 만드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회화와의 작별을 선언하기도 했었죠.
그는 총 280여 편의 영화를 찍었고, 1968
년 팩토리의 일원이자 그의 실험영화에 등
장하기도 했던 발레리 솔라나스에 의해 저
격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극적으로 살아
나기도 했습니다. 솔라나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
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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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edes-Benz Formel Racing Car W125, 1987
워홀은 1970년대부터 사교계나 정치계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72년 《마오 Mao》시리즈로 다시 회화 제작에 전념했습니다.
1983년 장 미셸 바스키아와 친분을 맺고 함께 작업을 했고 1987년 2월 22일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
고,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
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현재 그의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주요 작품은 《캠벨 수프 Campbell's soup》
(1962), 《두 개의 마릴린 The two Marilyns》
(1962),《재키 Jackie》(1964), 《마오 Mao》
(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등의 실크스
크린과 영화 《잠 Sleep》(1963), 《엠파이어
Empire》(1964),《첼시의 소녀들 The Chelsea
Girls》(1966) 등이 있습니다.
Jackie, 1964 Liz Taylor, 1964
글 브런치매거진 편집부
<사진출처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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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 STORY
Getting Work Done in NYC
한국에서는 카페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을 “카공족” 이라고 하죠.
뉴욕에도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랩탑을 들고 나와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어요.
가끔 필요한 혼자만의 여유, 오래 앉아 있기 좋은 카페에서 마음껏 누려보세요.
< CAFE JAX >
CAFE JAX
어퍼 이스트에 위치한 이 카페는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workspace 로
꾸며진 지하의 넓은 공간이 무척 인기있어요. 오래 앉아 있기 좋은 편한
테이블과 무료 와이파이, 아늑한 공간으로 언제나 사람들이 꽉 차있어요.
햇살이 잘 드는 1층의 자리들은 좀 좁은 편이지만 역시 편히 앉아 이야기
나누기 좋았어요.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며 자리를 찾기도 하고 테이크 아웃 해가기도 하는 바쁜 곳이었는데,
일하는 스태프들이 무척 친절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여기는 뉴저지, 뉴욕
기반의 역사가 깊은 커피 컴퍼니인 Lacas coffee 의 원두를 사용하고 있고,
Kings Street과 Amy’s bread의 빵을 판매해요. 공부하거나 일하기엔
최적의 장소인 Cafe Jax에서 미뤄뒀던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는건
어떨까요?
위치 318 E. 84th St. New York
시간 Mon - Fri 7am - 8pm , Sat & Sun 8am - 8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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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LOW COFFEE SUPPLY
들어서자마자 편안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던
카페. 한적하면서도 구석구석 재미있는 로어이스트에 딱
어울리는 장소였어요. 카페 안쪽으로 들어가면 빈티지하면서도
편해보이는 라운지 체어와 낮은 테이블들이 있고 각각 다른
모양의 의자에 앉아 랩탑을 켜고 일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아늑하고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라 그런지 늘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너무 시끄럽거나
복잡하진 않아요. 브루클린에서 로스팅 하는 원두를 쓰고 있고,
드립커피나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 모두 진하고 향이 좋아서
오래 두고 마시기에도 괜찮았어요. 특히 버번 바닐라 라테나
메이플 라테 등 여기에만 있는 시그니처 음료 메뉴들을
추천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만 해도 시간이 훌쩍 갈 것
같은 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들고 편한 의자에 앉아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어요.
위치 176 Ludlow St. New York
시간 Mon - Sun 7am - 9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