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6월8일~6월15 묵상과 해설
6월8일: 성도의 실천생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
리라(요 13:17).
영적 지각이 둔화되고 분별력이 죽은
이유
마음을 작정하고 본문에서 지적하는
성도의 실천의 뜻을 알기를 힘쓰십시
오. 당신은 지금 안일한 항구에 머물
러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밧줄을 끊
지 않으면, 하나님이 폭풍으로 끊으시
고 당신을 밖으로 내몰아 버리실 것입
니다. 당신 삶을 하나님 안에서 배처
럼 떠다니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목
적이라는 큰 바다 위에서 항해를 시작
하십시오. 당신의 눈이 뜨일 것입니
다.
당신은 안일한 항구에서 나와 하나
님의 대해(大海) 속으로 들어가야 합
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넓고 깊은
세계를 알게 되고, 영적 분별력도 얻
게 됩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해야 된
다고 느끼면, 즉시 실천에 옮기십시
오. 실천을 통해 당신은 곧 더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어디에 걸려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이 해
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받은
소명이 없는 것같이 실천하지 않은 일
들에서 당신이 걸려 있음을 발견할 것
입니다. 그 결과 당신은 현재 영적 지
각이 둔화되고 분별력이 죽어 버렸습
니다. 그 까닭은 당신이 위기를 만났
을 때, 영적인 자기 절제 없이 영적
혼돈 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영적 사역의 모조품인 자기희생 사역
성도의 실천을 경시하는 일은 이렇
게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실천
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자기희생
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려고 힘쓰는 마음의 상태는
순종의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열심을
영적 분별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로마
서 12:1-2에 언급된 당신의 영적 사
역을 성취시키는 것보다, 당신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
보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
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명심
하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
하나님이 당신에게 예전에는 한 번도
해 보지도 못했고, 되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으로 인도하실 때, 당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을 조심하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요 7:17).
묵상해설: 성도의 ‘실천’과 ‘자기희생’
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실천 = 자기희생이 아닌 실천
적 순종
챔버스는 안일한 항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대해 속으로 들어가라고 조
언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넓은 세계를
알게 되고 영적 분별력도 얻을 것이라
고 조언합니다.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
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좁은 길을
적극적으로 감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 있는 믿음을 이
야기한 것처럼 성도의 영적 성장은 행
함 있는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자라납니
다. 많이 듣고, 많이 깨닫지만, 아무런
믿음의 순종이 없다면 영적 성장을 기
대할 수 없습니다.
영적 지각 능력과 통찰력이 점점
무뎌지는 이유는 바로 성령의 감동으
로 주신 일을 믿음으로 실천에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나는 어느 부
분에서 여전히 실행하지 않고 있는지
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적 지각과 통찰력
이 무뎌질 뿐만 아니라 죽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성도의 실천은 자기희생
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희생은
순종의 모조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하리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희생
으로 착각합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지
면 겉 껍데기가 벗겨지고 알맹이는 땅
에 심기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
게 여전히 존재하는 껍데기인 겉사람
은 벗겨지고 알맹이인 속사람이 하나
님의 씨앗을 심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
다.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의 흐
름을 따르고, 사람의 욕망을 따르고,
사람의 상식을 따르는 겉사람이 깨어
지고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실천하
는 속사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
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한 알의 밀알
이 되는 것을 자기희생적의미로 받아
들여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시는 성령의 감동은 무시하고 외면
한 채,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는지 모
릅니다. 안일한 항구에 있으면서도
“한 알의 밀알”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담긴 엄청난 파도
속을 통과하고자 하지 않으면서 하나
님을 위한다고 하는 열심은 자기희생
입니다. 그래서 자기희생은 순종의 모
조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가 자기 겉사람을 깨뜨
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폭풍우에 내던지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실천 = 하나님의 생명 얻는
자기 목숨을 버림
성도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 이 영적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하
나님의 깊으신 뜻도 분별하게 됩니다
(롬 12:2). 산제사로 주님께 드리는
영적 사역보다 ‘자기희생적 사역이 더
쉽다’라고 챔버스는 말합니다. 누가복
음 14:28에서 예수님은 건축물(망대)
을 세우려면 준공하기까지의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무엇을 계산해 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제시하신 계산 내용은 바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만 제자가 될
수 있다”(눅 14:26)라는 ‘자아 부
인’(self-denial)에 관련한 부분입니
다. 자아(self)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영적인 일이
아닌 육적인 일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하다못
해 하나님의 일조차도 산제사가 아닌
‘자기희생’이라는 자기중심적 틀 안에
가둬버립니다.
자기 목숨 비용을 계산하지 않은
사역자는 나중에 “내가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마 7:23)라는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님이 왜 그들
을 모른다고 외면하시나요?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
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름으로 놀라운 일을 많이 했지만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행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대로 행할 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됩니다. 성
도가 자기희생적으로 행하려고 하면
영적 분별력이 쇠퇴합니다. 그러나 성
도가 하나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영적
분별력이 충만해집니다. 내 앞에 있는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
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요 7:17
).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영
적 사역이 아닌 반복적인 자기희생적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적
사역은 자기중심적인 육적 사고방식을
강화시키고 하나님 중심적인 영적 사
고방식을 쇠퇴시킵니다. 예수님이 하
나님으로부터 온 가르침과 능력을 행
하는 것임을 바리새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은 계속적으로 자기
희생적인 금식, 구제, 기도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
와 영광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
씀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않는다”(요
5:3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월9일: 차선책Ⅰ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눅 11:10)
성령을 구하는 이유
당신이 받지 못했거든 구하십시오.
구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
다. 우리는 마음을 태우며 소원하지
만, 뭔가 일이 급해져야 비로소 구합
니다. 당신은 도덕적 빈곤의 심연에서
하나님께 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
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하나님께
구하라”(약 1:5). 다만 당신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
다.
믿음의 실체는 당신이 마음 내킬
때마다 아무렇게나 의식할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믿음의
실체(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를 의식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을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는 것입니다(눅
11:13 참조). 성령님은 예수님이 당신
에게 해 주신 모든 것을 실제적인 것
으로 느끼게 해 주는 분이십니다.
영적 극빈자가 복 있는 이유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이것
은 당신이 청하지 않으면 못 받을 것
이라는 뜻이 아닙니다(마 7:8). 그러나
청하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로부터 왔다는 것을 지적, 도덕적, 영
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당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깨
닫게 된 이유는 당신이 영적 실체이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고 싶
어 합니다. “우리에게 간단히 복음만
가르치시오. 우리가 거룩해져야 한다
고 말하지는 마시오. 그렇게 되면 우
리가 가난한 자같이 느껴지지 않소.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느낌은
좋지가 않소!”
‘구하라’는 말은 애걸하라는 뜻입니
다. 어떤 이들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
에 자신들의 빈곤을 솔직히 인정합니
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인데, 영적으
로 그렇게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습니
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목적을 염두
에 두고 구하면 결코 받지 못합니다.
즉 우리의 가난함 때문이 아니라 욕심
을 채우기 위해 구하면 받지 못합니
다. 그래서 오히려 영적 극빈자는 복
이 있는 사람입니다.
묵상해설: “당신은 도덕적 빈곤의 심
연에서 하나님께 구해 본 적이 있습니
까?”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은혜받은 증거 = 나의 ‘무익함’ 자체
를 인식한 마음
성도는 자기 자신이 처한 영적 현
실을 직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도 제일 먼저 우리들이 처한 어
둡고 빈곤한 영적 현실을 드러내십니
다. 그래서 나에게 지혜가 없고, 사랑
이 없고, 믿음이 없고, 너무나도 부족
함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
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됩
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거
나, 성도들의 놀라운 간증을 듣고 “은
혜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그 마음 가운데 영
적 빈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한 심
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
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위로를
받아서 영적 만족을 느낀 것이 은혜받
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영적
만족을 느낀 것을 은혜받았다고 착각
합니다.
챔버스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우
리에게 간단히 복음만을 가르치시오.
우리가 거룩해져야 한다고 말하지 마
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적빈자(가
난한 사람) 같이 느껴지지않소. 우리
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느낌은 좋지
가 않소”라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인 빈곤을
경험한 사람만이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눅 11:10)라는 말씀처럼 “영
적 충만”을 간절히 구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구할 때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
고 챔버스는 말합니다. 모든 것을 예
수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
하고 행동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지적, 도덕적, 영적인
모든 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
님의 은혜를 이해하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받는 길 = 영적 가난함을 인식한
마음
영적 만족감을 가지려고 하면 할수
록 영적 충만을 구하는 것은 어렵게
됩니다. 마치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
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 안의 선함
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다는 증거입니
다. 영적 만족은 하나님의 은혜와 반
비례합니다.
예수님께 찾아 와서 영생 얻는 법
을 물어봤던 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부자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
러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부자청년에
게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
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습니
다. 바로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있어
서의 ‘돈 사랑’을 드러내셨고, ‘하나님
사랑의 빈곤과 결핍’을 드러내셨습니
다. 수면 아래에 둔 풍선이 결국은 수
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부자청년의
‘돈 사랑’에 대하여 진리의 공기를 불
어넣으실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빈곤과 결핍’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
다.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주심으로 풍선에 공기를 불어넣듯이
진리의 영을 불어넣으실 때, 우리 안
에 있는 헛된 만족과 헛된 풍요로움을
드러내시고, 성도의 마음 가운데 영적
빈곤감과 갈증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추구’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참으
로 은혜받은 사람은 ‘영적 만족’이 아
니라 ‘영적 충만’을 위해 더 간절하게
애걸하며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심령 가운데 은혜
를 부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
가운데 성령 충만, 영적 충만을 기름
부으십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을 잘
믿는 증거로 십계명의 ‘부모 공경’을
든다면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기반을 둔 영적 만족을 얻으려는 것입
니다. 양심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불신
자도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
다”는 마음으로 섬깁니다. 그런데 만
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부모님
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한 것을 회개하
고,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행위로까
지 온전히 공경해야만 합니다.”라는
설교를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
니까? “그런 식으로 내가 부모님을 온
전히 공경하지 않는 사람인 것을 드러
내지 마십시오! 나로 하여금 부모 공
경에 있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마십
시오!”라는 생각이 있으시다면 지금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영적 갈증과 갈
급함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도의 영적 빈
곤을 드러내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
하게 만드십니다!
6월10일: 차선책Ⅱ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눅 11:9)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구하지 말라
찾지 못했으면 찾으십시오. “구하여
도 받지 못함은…잘못 구하기 때문이
라”(약 4:3). 당신이 하나님 대신 물질
을 구하면 잘못 구하고 있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실현의 욕망
에서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이 자신에게 더 집중해서 자신을 인식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그만큼 덜 찾게
됩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이
한 가지 일에 당신의 온 관심을 집중
하십시오. 당신은 전념하여 하나님을
찾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
의 신경통에 걸려 하나님께 칭얼대기
만 하고 있습니까? 찾으라, 몰두하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당신은 목이 마릅니까 아니면
당신의 경험에 만족하여 점잖은 체하
며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원치 않
는 영적 무관심의 상태에 있습니까?
신앙체험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출입
구일 뿐입니다.
당신의 믿음을 체험 위에 세우지
마십시오. 체험위에 자기 믿음을 세우
면, 그 체험으로 남을 비판만 하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체험
위에 믿음을 세우려고 하면, 다른 사
람들에게 당신이 경험한 신앙체험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당신이 발견한 보
배로운 것은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겸손으로 문을 두드리라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
릴 것이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 4:8). 문을 두드려 보십시오. 문은
잠겨 있습니다. 당신은 두드릴 때 가
슴이 두근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손을 깨끗이 하라”(약 4:8). 좀 더 크
게 두드려 보십시오. 당신은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당신
은 이제 절실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울지어다”(약 4:9).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내적 삶의 상태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참된 애통에
는 자기 연민의 흔적은 없어야 합니
다. 다만 자기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
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주 앞에서 괴
로워할 뿐입니다.
“낮추라”(약 4:10).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일입니
다. 당신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함
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10).
묵상해설: “당신이 자신에게 더 집중
해서 자신을 인식하면 할수록 하나님
을 그만큼 덜 찾게 됩니다.”라는 의미
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가난한 심령
자아실현(자기 성취)과 하나님을 추
구하는 것은 완전히 반비례하는 관계
입니다. 즉 자아실현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또는 자기를 성취하고자 하면
할수록 성도는 하나님을 그만큼 덜 추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3
의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잘
못 구함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자아
실현과 자기성취를 위하여 구하는 것
은 아무리 열심히 구하여도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아실현을 위한 간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도입
니다. 자아실현을 위한 기도는 자기
삶에서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
을 더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정욕적인 기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나오는 소망이 아닙니다. 즉
천국을 소망하는 가난한 심령이 아닌
이 땅의 복을 추구하는 자기만족의 심
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자아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
님은 기다리셔야만 합니다. 자기를 실
현하고, 성취하려는 노력이 완전히 바
닥을 칠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즉 탕자를 기다린 아버지처럼 기다리
십니다. 탕자가 돈을 짊어지고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를 성취하기 위하여 세
상으로 나갔을 때, 돼지의 쥐엄 열매
를 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돼지의 쥐엄 열매조차도 먹으
라고 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을 발견합
니다. 탕자는 지극히 가난한 상태를
인식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의
풍요함을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자아실현과 자기 성취는 ‘사망선고’
가 이루어져야 하는 성도의 원수입니
다. 성도의 원수는 자기를 더 의식하
고 자아실현으로 나아가려는 자기 자
신(self)입니다. 많은 성도가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기가 성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다는 이
야기보다는, 정말 어렵고 어두운 상황
가운데 놓였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깊
이 경험했다는 간증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내 삶 가운데 나
의 삶을 주장하던 자아실현과 자기 성
취가 사망 선고를 당해서, 나 자신에
대하여 ‘무능’을 철저하게 경험한 가
난한 심령 상태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예배, 봉
사의 출발은 가난한 심령에서부터입니
다.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하는 첫 단
추를 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추구
하는 가난한 심령 상태가 모든 영적
생활의 첫 단추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 = 애통하는
심령
챔버스는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
신의 내적 상태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자기 죄책감이나 자기 연민에 대한 질
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영
적으로 형편없는 나의 내면의 상태를
보고 애통해 본 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성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이
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서 괴로워하는
심령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
에게 어느 한구석이라도 만족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발견한 사
람의 심령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
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전혀 애통할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심령은 예수님 옆
에 달린 한 강도처럼 주님의 선처만을
바라는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
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
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눅 11:9)라
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게 되
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
사하게 됩니다(롬 7:25). 이렇게 하나
님의 은혜를 찾는 애통하는 심령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마 5:4). 성
령 충만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
로’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눅 2:25
). 바로 하나님의 위로이신 예수 그리
스도를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기 전에
만납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
원을 보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일입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함께 문을 두드
려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은 겸손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
혜를 두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두드리는 이
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10)라는
말씀이 실제로 역사합니다. 애통하는
심령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
습니다(마 5:4). 내 힘으로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어두운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극복하고 이
길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집니다. 포기
하지 마십시오. 애통하십시오. 극복할
길은 애통하는 자에게 열립니다.
6월11일: 저기 그곳에Ⅰ
내게로 오라(마 11:28).
“내게로 오라”는 말씀의 의미
죄와 슬픔이 멈춘 곳에 찬송과 성
도의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그곳에
이르고 싶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곳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는 실
상 몇 개 되지 않습니다. 모두 “내게
로 오라”는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님께 나아가면 나의 삶은 나의 참된
소망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실제로 죄를 멈추게 되고 주
님의 노래가 내게서 흘러나올 것입니
다. 당신은 예수님께 나아간 일이 있
습니까? 당신의 고집을 경계하십시오.
당신은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그대
로 따르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일 이외
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죄에서 실제로 끊어지는 경험을 원
한다면, 당신은 예수님께 반드시 나가
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자신을 우리의 순전함을 결정짓는 잣
대로 삼으셨습니다. “오라”는 말씀을
주님이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유의하십
시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주님이 “내
게로 오라”고 속삭이십니다. 당신이
즉시 주님께로 이끌려 가 주님과 개인
적으로 만나면 만사가 뒤바뀝니다.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말
씀에 당신 자신을 내던질 만큼 어리석
은 자가 되십시오. 주님께 가는 자세
는 굳은 의지로 만사를 제쳐놓고 의식
적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
니다.
“쉬게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즉 내
가 너를 지탱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를 자리에 눕히고 손을
잡고 자장가를 불러 잠재워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자리에서 나
오게 하고, 살아 있으면서도 반은 죽
은 것 같은 권태와 무기력함에서 나오
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
면, 주님이 내게 생명의 영을 충만하
게 불어넣어 주심으로 인해서, 충만한
생동력으로 지탱될 것이라는 의미입니
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뜻을 위해 고
난을 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넘치는 생동력과 하나님
의 아들의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
다.
묵상해설: “삶의 문제는 실상 몇 개
되지 않는다. 모두 내게로 오라는 말
씀에 해답이 주어져 있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예수님을 위하는 것과
예수님을 누리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
습니까?
‘내게로 오라’는 의미 = 주님을 누리
는 인생
예수님은 성도에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
닙니다. 예수님은 그저 “내게로 오라”
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로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
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사람은 왜 자꾸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합니까? 바로 성공적인
자아를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께 성공적인 성도, 성공적인 제자로
인정받고 싶어서 성도들이 이것도 하
고 저것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내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쉼’을 얻는 사
람이 주님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합니
까? 주님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
이 성공적인 자아를 세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처
럼 온유하고, 선하고, 거룩하고자 하
는 시도를 내려놓고 그저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와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은 스스
로 깨끗해지려는, 경건해지려는 노력
과 추구가 이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 받았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편
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소 한 마리가 혼자
메고 가는 멍에가 아니라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중간에 두고 같이 메고
일하는 멍에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짊어지는 멍에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모든 일
을 사실상 다 해놓으시고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해놓으신, 하고 계시는 일에
동참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도가 지는 멍에는 가볍다는 것입니
다.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려고 하
면 그 멍에는 나 혼자서 짊어지고 가
기 때문에 편하지 않고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짐(일)은 가볍지
않고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 멍
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기 때문에 ‘마
음에 쉼’도 충만하게 얻을 수 있습니
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의미 =
주님이 지탱해 주시는 인생
예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엄마가 아
가를 위해서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이
세상에 억눌리고 헛된 것에 휩싸여 있
는 상태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쉼’
입니다. 즉 주말에 푹 쉬고 나서 느끼
는 월요일의 피로함도 없습니다. 오히
려 주님이 주시는 ‘쉼’은 온전한 생동
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직후, 제자들
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는
데 바람과 물결이 요동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침 기도하러 가셔서 거기
에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다 위
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제
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가 생각하여 놀라서 소리
를 지릅니다. 놀랍니다. 베드로는 놀
란 채로 예수님께 “주여 만일 주님이
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
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라”
고 응답하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마 14:28-29).
베드로가 바람이 치는 것을 보고 두려
워하기 전까지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
님께 갔습니다. 베드로가 능력이 있어
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 위
를 걷도록 지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렇게 성도의 인생을 지
탱해 주십니다.
주님께 걸어갈 때, 물결치고 바람치
는 것을 바라보면 의심이 생겨서 믿음
이 온전히 작용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로지 물 위에서 나에게 “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고정되어 있
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갈 수 있을 것입
니다. 이런 인생이 바로 주님이 ‘쉼’을
불어넣어 주셔서 온전히 생동력있게
사는 성도의 인생입니다.
챔버스는 “주님의 뜻을 위해서 고난
을 받는 것이라면 주님에 대한 넘치는
생동력과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있
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예
수님을 만났을 때의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물을 던져서 수많은 고기를 낚았습니
다. 사도 요한이 부활의 예수님이신
것을 먼저 알아보고 “저분은 주님이시
다!”라고 외칩니다. 베드로는 그 즉시
겉옷을 몸에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립
니다(요 21:7). 예수님의 ‘쉼’은 이렇
게 성도를 생동력과 능력으로 충만하
게 하시는 ‘쉼’입니다.
6월12일: 저기 그곳에Ⅱ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와서 보라
(요 1:38-39).
‘새 이름’을 가진 자들
랍비가 계신 곳은 사리사욕이 잠들
고 참 유익이 일깨워지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우리는 랍비와 살
지 못합니다. “저희가 가서…그날 함
께 거하니.” 고작 랍비와 하룻밤 자는
것이 대부분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현실의 아침에 깨어나면 우리에게는
사리사욕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랍비
와 더 이상 거할 수 없게 됩니다. “네
가…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42
절).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자만,
자족, 사리사욕이 지워진 곳에만 새
이름을 적어 주십니다.
우리 중에는 마치 영적 홍역처럼
몇몇 군데만 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분만 보면 우리는 아
무 문제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
다. 더욱이 영적 분위기가 잘 잡혀 가
는 때는 당신은 마치 훌륭한 성자요,
신령한 성인이 된 것처럼 느끼기 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위기가 가라앉
으면 이런 것은 하나도 남는 것이 없
습니다. 제자란 자기의 삶 전체에 새
이름이 적혀 있는 자입니다. 사욕과
자긍과 자만이 완전히 지워진 상태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받은 자들
교만은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는 죄
입니다. 우리 중에는 바리새인들의 짓
이나 세리들의 실상과 다를 바 없는
자긍 속에서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 나는 성도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못돼!”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한 인간
의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여질 만한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성도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너무 약
하고 희망이 없다. 나는 구속의 테두
리 밖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
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인간 앞에서
겸손해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실상은 무시하는 무의식적인
불경이 될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성도라고 불릴 만한 사
람이 못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그
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신이 성도가
되고 싶지 않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성도로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불신하
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
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조건을 붙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하루뿐 아니라 영원
히 고향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묵상해설: “제자란 자기의 삶 전체에
새 이름이 적혀 있는 자이다”라는 의
미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새 인생 = ‘자아’가 지워진 십
자가의 삶
성경은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야곱
은 이스라엘로, 사울은 바울로, 시몬
은 베드로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언제’, ‘왜’ 이름을 바꿔주실까요? 챔
버스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자만, 자족, 사리사욕이 지워진 곳에
만 새 이름을 적어 주신다.”라고 말합
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선진들에게 새
이름을 주신 시점은 그들의 인생이 하
나님의 목적과 뜻에 맞추어져서 새롭
게 시작될 때였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을 살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을 산다는
의미는 나의 삶이 ‘육신의 정욕’, ‘안
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근거하여
자기 성취와 자아실현을 위해서 살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사
랑과 자기 자랑이 지워지지 않으면 하
나님의 뜻을 담는 새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고, 새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
다. 문제는 나의 인생이 육체를 위하
여 심으면 심을수록 내 안에는 염려,
근심, 육적 쾌락이 더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배설물을 껴안
고 살아가기 때문에 향기가 아니라 썩
은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배설물은 ‘육체를
신뢰하는 모든 것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많았
습니다. 할례받은 것, 베냐민 지파의
혈통, 바리새인의 지위, 열심 있는 신
앙, 율법의 준수 등이었습니다. 그런
데 이러한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배
설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
울이 배설물과 같다고 하는 것들을 현
대 신앙인들은 오히려 ‘너무 귀중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나요? 삼대 째 내
려오는 신앙의 가문, 모태신앙, 정통
교단에서의 신앙생활, 신학박사 학위,
수많은 금식기도, 사회적 지위 등을
너무나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육체를
신뢰할 만한, 육신의 것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을, 실로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을 방해하는 배설물로 여
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
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
럼 여긴다고 한 것들을 너무나도 소중
히 여기며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
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아무리 고
상해 보여도 영적 배설물 덩어리라고
말한 것을 성도들은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배설물을 자꾸 더 소유하
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영적 지식에서는 멀어진다는 사
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뜻에 맞추
어져 새롭게 시작한 인생이 아니기 때
문에 영적인 새 이름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의 새 인생 = 하나님의 목적을
짊어진 십자가의 삶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
님은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을 이스
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출발로 삼으셨
습니다. 예수님도 시몬에게‘베드로’(게
바)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새로운 성
도의 삶의 형태인 ‘교회’를 세우시겠
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버
린 배설물과 같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
는 마음 가운데는 새 이름도, 새 역사
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를 신뢰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는 배설물
의 냄새와도 같은 것입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이요,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썩어질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썩어
질 것은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하
나님 앞에서 고약한 냄새를 피우면서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자아를 성취하려는 모든 시
도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고 내세울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바
라는 것이 바로 육신이 신뢰하고자 하
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신뢰
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
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는 자아를 높이
고, 자기 의로움을 은근히 자랑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
합니다. ‘육신’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배
설물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높이 평가해 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짊어진 십자가의 삶
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새 인생
은 육신을 거스르는 십자가의 길에서
세워지고 성장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자
(saint)입니다. 스스로는 성자가 아니
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자’입
니다. 나의 경건함과 거룩함 때문에
성자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 때
문에 성자가 된 것입니다. 육신의 자
랑거리를 다 포기해야 하는 동시에,
헛된 겸손(나 자신을 성자로 보지 않
는 사고)도 같이 포기해야 합니다. 주
님은 나를 성자로 만드시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6월13일: 저기 그곳에Ⅲ
나를 따라오라(막 1:17).
‘자기 권리’를 주님께 헌납하라
까다로운 기질이 없어질 때, 성화의
자기 포기가 솟아납니다. 예수님께 나
아가는 데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하나
는 기질에 대해 핑계를 대는 것입니
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기질이나 취
향을 내세워 예수님께 나아가는 장벽
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갈 때 맨 처음 알게 되는 것은, 예
수님은 우리의 천성적 기호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은사를 봉
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것이 아닌 것을 절대로 봉
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권리 포기뿐입니다(롬 12:1).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하나
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신령한
실험대 위에 올려놓을 것입니다. 하나
님의 실험은 언제나 성공적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께 헌납하라
성도의 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를 던짐으로써 솟아나는 도덕적
창의력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생활에
는 창의적인 생활의 샘물이 흘러넘칩
니다. 하나님의 샘은 언제나 신선하게
솟아오릅니다. 이를 통해서 성도는 자
기 환경을 이끌어 가는 분이 하나님이
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평하
지 않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의 경험에서 삶의 원리를 창출
해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삶의 원리가 되셨다면, 남들에게
도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원리가 되도
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자기를 맡
기고 “오라”는 말씀을 따라가십시오.
당신이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당
신을 통해 계속해서 “오라”고 말씀하
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영위하
는 삶은 그리스도의 ‘오라’는 말씀의
메아리가 됩니다. 그런 삶은 예수님께
자기를 투신하고 나아간 모든 영혼들
의 필연적인 생활입니다. 당신은 예수
님께 나아갔습니까? 지금 나아갈 마음
이 있습니까?
묵상해설: “까다로운 기질이 사장될
때 성화의 자기 포기가 솟아난다.”라
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질(성격)과
성도의 삶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람의 자연적 기질 = 하나님이 무너
뜨리실 대상
챔버스는 “많은 사람이 개인의 기
질이나 취향을 내세워 예수님께 나아
가는 일을 방해하는 장벽으로 삼아버
린다.”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이 원래
타고난 기질과 성격 때문에, 자신은
예수님의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
르심을 따르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
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혀
가 둔한 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
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 기질과
기호를 바라봄으로 인해 하나님의 부
르심앞에서 주저합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 어느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에 당당히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기를 내
던지고 나아갈 때, 성도들이 맨 처음
알게 되는 진리는, 예수님은 성도들의
천성적인 기질과 기호에는 아무런 관
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
터 온유하게 보이는 것은 기질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불같고 다
혈질이었던 모세에 대하여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
다 승하더라”(민 12:3)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타고난 기질이 아
니었습니다. 모세의 타고난 기질은 불
같은 다혈질이었습니다. ‘온유함’은 모
세의 기질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기
질은 온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가, 온유함이 어떤
다른 사람보다 충만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모세의 속사람
가운데 역사하셔서 새 성품을 창조하
신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챔버스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를 던지면 도덕적 창의력이 솟아
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집니
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지칭
합니다.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모
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 모
세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려
고 합니다(신 9:14). 그때 모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그에게 도덕적 창의력이 솟아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애원하며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
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신 마음이 누그러지면
서 죄를 사함 받을 길을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열어주십니다. 모세의 온유
함은 사람의 기질에서 나온 온유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
온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사람의 자연적 기질 = 하나님의 은혜
를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는 종종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그분은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너
무나 착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바
로 이런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
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비춰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
음에 비춰지면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바로 마음으로 미워한 자가 살인자요,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가 간음한 자
요, 마음으로 남의 것을 탐한 자가 도
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
서 타고난 성품이 하나님의 법 앞에서
는 무용지물임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품 곧 성령으로 말미
암은 새 성품으로 살 거룩한 마음을
가지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부
모를 한 번이라도 미워했다면 그는 부
모를 살인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까? 자녀를 잠깐이라도
미워했어도 그는 자녀를 살인한 사람
입니다. 그런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
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
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
에서 선한 사람이라고, 착한 사람이라
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기호는 십자
가에 못 박고, 새로운 성품, 성령으로
열매 맺는 새 성품을 소유하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서서 늘 은혜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좋아 보이는 타고난 자연적 기질을 의
지하거나 자랑거리로 삼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투신하는 삶
이 되게 하시려고, 성령님은 외적으로
좋아보이는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심
판하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의 법을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가 제자로 부름 받을 때,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눅 5:8)
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시려고 성령님
을 통해서 주님이 일하셨습니다.
6월14일: 고요한 삶
내 안에 거하라(요 15:4).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환경’에서
할일
예수그리스도의 ‘영’은 주님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내 속에 들어와 계십니
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사고방식을 주
님의 것에 일치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도록 조작하거나 조종하시지 않
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묶어 그리스도
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
라.” 여기에는 지적 문제 및 금전 문
제를 비롯하여 인간 만사가 다 포함됩
니다.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려서 말쑥
하게 사는 외형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한다는 핑계로 하나님이 당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