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3월8일~3월15일 묵상과 해설
3월8일: 가식의 탈을 벗으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
혔나니(갈 2:20).
굳은 죄를 시인하고 예수님과 연합
죄를 끊을 마음과 각오뿐 아니라
사물을 전혀 새롭게 보려는 자세가 있
기 전까지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
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
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움켜잡
기 전에, 가진 것을 먼저 내놓고 일체
의 허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은 선도 정직도 혹은 열심도 아니
고, 우리의 굳은 죄입니다. 주님이 우
리에게서 가져가고 싶으신 것은 죄밖
에 없습니다. 그럼 죄를 가져가고 대
신 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반석 같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된 듯한 가식의 탈
을 모두 벗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의 인정이나 고려를 받을 만하다는 자
부심을 말끔히 던져 버리십시오. 그러
면 성령님이 우리가 다음 단계에서 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자기 권익을 파기하고 예수님과 연합
나 자신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주장을 어떤 분야에서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소유와 애착물에 대
한 권익을 파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동화시킬 용의가 있습
니까?
권익 파기를 하려면 뼈아픈 고통의
환멸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보시
듯 우리가 자신들을 보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육신의 더러운 죄들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려
는 무서운 자만심의 본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주님께 비추어 보면, 수치와
두려움과 죄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우
리의 심장 속을 파고들 것입니다. 권
익 파기에 대해 아직 미흡한 점이 있
다면, 지금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들
여다보고 모든 세상 욕심의 집착을 던
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그 분이 요구하시는 일에 합당한 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묵상해설: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했
다”라는 의미와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연합하는 출발 = “굳은 죄”
를 발견하고 시인
챔버스는 “주님이 성도에게 원하시
는 것은 선한 행실, 정직함,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도 굳은 죄를 예수님 앞
에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신
의 ‘굳은 죄’를 밝히 드러낼 때, 예수
님은 우리의 죄( 우리의 불의)를 하나
님의 의와 교환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 앞에 서서 모든 가식,
허식의 탈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self-
righteousness)를 말끔히 벗어 던지
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나 자신이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있으면 예수님
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
니다.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는 양
립 불가능합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십자가 앞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굳은 죄’를 드러내지는 않고, 자신의
선한 행실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
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인정을 부른
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
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율법
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실 분
이신데, 왜 율법을 완성하신다고 하시
는 걸까요? 예수님은 십계명을 온전히
재해석해 주셨는데, 바로 미워하면 살
인하는 것이요, 음욕을 품으면 간음하
는 것이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
랑하면 우상숭배 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율법의 참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을 외적
행위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의 마음에 적용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
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이 사람의 마음에 적용될 때,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온전히 발
견하고 자기 안에 있는 굳은 ‘자기
의’를 벗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
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율법을 마
음에 적용하면 ‘자기 의’는 완전히 무
가치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이신 십자
가와 예수님의 보혈만 바라보게 됩니
다.
예수님과 연합하는 증거 = 자기중심
성의 처리
챔버스는 우리들이 주님이 보시듯이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면 우리에게 충
격을 주는 것은 육신의 더러운 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려는
무서운 자만심의 본성임을 깨닫게 된
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
하려는 무서운 자만심은 바로 자아 때
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두 나무는 하나
님 안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생명나
무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바로 예수님
을 상징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
이 바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은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연합
하여 사는 삶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
는 나무는 바로 ‘율법’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
져 처음으로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들이 벗었다
는 것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
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그들이 자기
중심적 삶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 눈이 이제는 자기 자신들
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된 ‘우
리’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라는 독립된 개념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과
악’의 잣대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삶
속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
람의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도덕
적인 행위를 갈구하는 마음이 생겨났
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과 악을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행동,
행위를 향상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문
제는 자기 행위(자기 삶)의 행동수준
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큰 율법의 속박이 작용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선택하여 하나
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고자 할 때에
만 사람은 온전해지는 성화의 길을 걸
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하고 악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
가 아니라 ‘예수 안에(In Christ)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 밖에 있는
자아의 행위’인가? 입니다. 예수 밖에
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외적으로는
선하고 의롭게 보일지라도 자기중심적
삶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의 내용은 아
무리 겉으로 선하고 의롭게 보일지라
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의롭다고 계수
(count)하실 수 없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성도의 가치는 예수 그리
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3월9일: 퇴보의 시간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퇴보 가운데 있는 사역
우리의 폐부를 꿰뚫는 질문입니다.
실은 주님이 극히 간단하게 하시는 말
씀이 우리의 가슴속을 파고듭니다. 우
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압
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너희도 가려
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해 결연한 자세를 항
상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6).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
들은 죄 가운데 빠진 것이 아니라, 주
님을 떠나 퇴보하는 길에 선 것입니
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
도를 위해 일을 하고 있거나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자가 허다합니다.
동행 가운데 있는 사역
주님의 제자가 된 후에 우리가 겪
는 영적 연단은 주님과 동행하는 문제
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
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
시거든 자연스러운 삶을 살도록 하십
시오. 하나님의 길만 따라 걷고 주님
께 온전히 헌신하며 살아가십시오. 당
신은 주를 따라가는 길이 확실하지 않
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따라가는
그 길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로지 자신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알
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함께 멍에를
멜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우리
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따
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라는 말씀
을 보면 타인에 대한 베드로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타인의 영적 상태
에 대해 주님께 대꾸할 처지가 아닙니
다.
묵상해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
도를 위해 일하고 쓰임 받고 있지만,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이 많
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구원 없는 상태 = 영생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마음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
시라”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주
님을 떠나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
머지 열두 제자들에게도 물어보신 것
입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
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말합니
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
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
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
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중
에서 ‘우리’라는 것에 대한 문제를 말
씀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 열둘
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
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라고 말씀하
십니다(요 6:70). 예수님이 가룟 유다
는 예수님 곁에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마귀에게 속한 불신영혼이었다고 말씀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외적으로 상당
히 선행과 구제를 잘하는 사람처럼 말
했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
수님의 발 앞에 향유가 든 옥합을 깨
뜨려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가룟 유다가 말하기를 “이 향
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
비하는가”(요 12:5)라고 합니다. 그러
나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돈을 훔
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가룟 유다
처럼 예수님에 대한 성도들의 순전한
사랑의 고백을 율법주의적인 틀에 가
두어 왜곡하려고 합니다. 구제와 선교
를 통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
고 하면서 실상은 돈 사랑이 있고, 자
기 사랑, 자기 의가 사실상 동기인 경
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자기 보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합
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위
해 일하지만 주님과 함께 다니지는 않
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방법으로 예수
님을 증거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 곁에는 있지만 주님과
같이 다니지는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
지 못한 불신영혼입니다.
구원을 모르는 상태 =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이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
각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외적인 선한 행위를 근거로 삼아 말하
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방식
대로 예수님을 증거 하려다가 영적 생
명도 얻지 못하고, 생명의 근원인 예
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한 번도 생명의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분명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으
신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
고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
룟 유다는 말하기를 “내가 죄 없는 피
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라고 말
하며 자신이 한 짓을 돌이키려고 하지
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방법대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
다. 예수님이 당연히 유죄 판결을 받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가룟 유다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님이 전혀 죄 없으신 능력의 왕으로
증거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유대인들은 표
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한
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표적을 구했
습니다. 마치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에
내렸던 재앙과 같은 하나님의 표적을
구했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이스라
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준
과 관점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
아)되심을 증거해 주시기를 바랬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였
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동행하
는 것보다, 예수님을 자신의 방법대로
증거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
고 유대인들처럼 표적(기적)을 보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달라
고 요청하는 마음이 있는 기독교인들
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사업 성공, 높
은 위치, 출세 등, 여러 가지 자기 성
공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시
도하는 사람은 가룟 유다 또는 유대인
들처럼 자신의 기준과 관점대로 예수
님을 ‘능력의 왕’으로 입증하려는 불
신앙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 순간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은혜를 부음
받고 매일 매 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3월10일: 설교는 간증이다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성령 세례받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신 되는 길
우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만 구속 받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
나님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서도 구
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은 영적 매개체가 아니라 영적 사신
(使臣)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메시지는 우리의 일부분이어야
합니다.
인자는 곧 자신에 대한 메시지였습
니다. 그래서 인자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같이
우리의 생활도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
의 실체로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인간
은 어떤 봉사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죄에 대한 깨달음
으로 깨어지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하
나님의 목적 앞에 쏟아지기 전에는,
우리의 삶이 메시지의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
가 되는 길
간증과 설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하나
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기울이기로 작정한 자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적인 열정과
아이디어로 꾸려 나가는 삶에서 끄집
어내시려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도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처럼 깨어지
고 으스러지며 쓰임 받을 수 있는 그
릇들로 만들어져 갑니다.
오순절이 제자들에게 새로이 가르쳐
준 것들은 없습니다. 오순절의 목적은
제자들에게 어떤 새로운 가르침을 주
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설교한
말씀이 ‘성육신’ 되게 하려는 것이었
습니다. 즉 말 그대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게 하려는 것이
었습니다.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당신은 입을 열어 주님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유롭게 역사하
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
의 메시지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해방
시킬 수 있기 이전에, 그 해방의 체험
이 당신 속에서 먼저 성령님을 통해
전인격에 내면화되어 살아 있어야 합
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당신이 입을
열 때 실체화된 복음이 힘 있게 타오
르게 하여 적용하십시오. 당신에게 적
용된 메시지를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
에게 적용하십시오.
묵상해설: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적인
열정과 아이디어로 꾸려 나가는 삶에
서 끄집어내시려 하십니다.”라는 의미
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삶 = 인격체이신 주님을 실제
로 경험하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도의 온 삶
자체가 성령님을 통해서 진리인 말씀
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시기 위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예수님의 메시지
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 보듯이 성령을 받고 나서 제
자들은 예수님이 설교하신 말씀이 그
들의 삶 가운데 실재적인 실체가 되었
습니다. 인간적인 아이디어와 포부로
하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온전히 삶
으로 증거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
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아이디어
와 포부로 예수님을 증거하려는 시도
와 자세는 부서지고 깨어져야만 합니
다. 그래야만 성도는 성령님이 자유롭
게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도 성도들은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아이디어와 포부로 예수님을
증거 하려던 모습 가운데 숨어 있던
‘죄’(‘자기 의’)가 깨어지고 성령으로
채워져야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의 목적도 조정될 수 있습니다. 하
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가득 채워진
‘삶’이 되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실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하는 부풀려진 간증도
우리는 자제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인
간적인 간증은 성령의 인도를 강조하
기보다는 인간의 아이디어와 용기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한 강조는 사람
들의 ‘자기 의’를 자극하는 잘못된 것
입니다. 여러분은 부흥회나 간증집회
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만약에 1000
명을 교회로 인도(인도와 전도는 다
름)한 전도왕, 가망없다고 선고 받은
질병을 치유받은 사람의 간증, 믿음으
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의 간증을 들었
을 때, 무엇을 느끼십니까?
(1) “전도를 많이 해야 하는데 난 너
무 열정이 없다.”
(2) “주님과 더 깊은 교제와 성령의
인도가 필수적이다.”
(3) “전도 은사가 없는 나에게는 동떨
어진 이야기이다.”
무엇이 정답이어야 할까요? 정답은
(2)번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간증을
하는 사람도 (2)번 중심의 간증이어야
만 합니다. 전도를 할 때, 부흥을 경
험할 때,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았
는지를 간증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테크닉이나 열심을 강조하는
간증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적인 성공기준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것입니다.
영적인 삶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삶
야곱은 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
대로 모든 것을 추진해 가는 치밀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아이디어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형
에게서 장자권도 취하고, 아버지의 축
복도 받고, 삼촌에게서 양 떼들도 많
이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형 에
서의 칼날 앞에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
니다. 때론 우리도 칼날 앞에 선 것
같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
다. 그 위험 앞에서는 어떤 아이디어
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원대한 포
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위기
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
님을 만나야만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위기의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영적인 삶이 시
작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아이디어와 포부를 가지고 덤빌
지라도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나
서야 그 인생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온
전히 받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자기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십
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아이디어를
구해야만 말씀이 역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실패하는 이유는 자기 아이디어를
먼저 따르려는 마음으로 인해, 말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하나
님의 말씀으로 해방시키는 사역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그 해방의 체험이
우리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챔버
스는 충고합니다. 그 해방의 체험을
간증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입니다. 야
곱이 환도뼈를 다치고 평생 절뚝거리
며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
님을 만난 간증이었습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아이디어가 야곱의
환도뼈처럼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인간적인 아이디어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
습니까?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
람만이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
엘’로 바뀐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는 온갖 인간적
인 아이디어로 살던 ‘야곱’에서 하나
님의 아이디어로 새롭게 살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야곱이십니까? 아니면 이스라
엘이십니까?
3월11일: 비전의 영감 속에서 살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비전을 잃는 영적 누수
우리에게 비전이 없다면 책임은 자
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비전을 잃는
이유는 영적 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실생활의 당면
문제들에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비전에 순종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나의 최고봉, 나의
최종선으로 삼는 길뿐입니다. 이 일은
마음을 굳게 잡고 계속적으로 비전을
되새겨 볼 때만 가능합니다. 이 일에
관한 테스트는 기도회나 헌신예배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1시간이 60
분, 1분이 60초라는 시각이 빠짐없이
다 포함되는 테스트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 비전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달성할
때까지 우리는 비전의 영감 속에서 살
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일만 너무
따지다가 비전을 잊거나 잃어버립니
다. 처음에는 비전을 보지만, 더 기다
리지 못하고 곧장 실무 사역으로 돌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비전이
달성되었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더디
이루어지는 비전을 기다리는 일은 하
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가늠하는
테스트입니다. 비전의 성취는 보지 못
하면서 사역에 전념하는 것은 영혼의
위기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처사입니
다.
비전을 성취할 영적 충만
하나님의 회오리바람을 조심하십시
오. 하나님은 돌풍으로 성도들을 기르
십니다. 당신이 본 비전의 빛에 따라
실제로 살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억센 바람이 불어 닥칠 때 열매 없이
꺾이고 맙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일터
로 던지시게 하십시오. 그때까지 나서
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당신이 스스로
일자리를 선정한다면 싹이 마른 꼬투
리에 불과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심으셔야만 당신이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비전의 빛에 따라 서둘
지 않고 걷는 보행 연습은 비전의 성
취를 볼 수 있는 필수 요건입니다.
묵상해설: “비전의 성취는 보지 못하
면서 사역에 전념하는 것은 영혼의 위
기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적누수의 원인=봉사에 매몰된 사역
영적 성장의 길을 가지도 않으면서
영적 성장을 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비전이 주는
영감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챔버스
는 성도가 비전을 잃는 이유는 바로
영적 누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
다. 어디에서 영적 누수가 발생할까
요? 성도의 영적 성장은 십자가의 길,
곧 하나님의 뜻(will = way)을 좇아가
고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최고봉인 하나님의 뜻이 나
의 최종선이 될 때 하나님의 비전도
지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부어집니다.
하늘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비전(하
나님의 뜻과 목적)을 매 순간 일분일
초 온전히 따라가고 있어야만 영적 성
장도 가능하고, 영적인 지속적인 비전
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많
은 봉사에 매몰되면 초점이 흐려지고
비전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챔버스는 하나님의 비전(하나님의 뜻)
없이 바로 실무 사역으로 뛰어드는 것
도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
인의 초점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나의
봉사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비전이 성취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
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비전이 더
디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더디 이루어지는 비전을 대기하는 일
을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충성을 가
름하는 테스트이다”라고 말합니다. 비
전의 영감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비
전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답답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런 답답한 마음 때문에 무엇이라도 해
야겠다는 마음으로 봉사에 뛰어들고
실무 사역으로 돌진하게 됩니다.
성도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아닌
육적인 자녀로서의 이스마엘과 같은
봉사나 사역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봉사와 사
역이 나중에 약속의 자녀에게 가시 역
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서 영적 누수가 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누수의 원인=성취에 매몰된 사역
성도가 자기 성취적인 봉사에 관심
을 쏟는 것은 영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심각한 일입니다. 챔버스는 성도의 봉
사가 하나님의 뜻에 뿌리박은 것이 아
니면 하나님이 회오리 바람과 돌풍을
일으키실 때, 억센 바람 때문에 열매
없이 꺾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허리케인이 오면 강풍으로 인하여 수
많은 나무들이 뿌리째 넘어지고 맙니
다. 나무가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쓰
러져 버리는 나무들은 대부분 땅속 깊
이 뿌리를 내리지 않은 나무들입니다.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비전)에 뿌리
내려진 사역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말할지라도, 자기 스스
로 자기 비전으로 인하여 하는 사역이
라면 언젠가는 뿌리째 뽑힌 나무와 같
이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운 사
역과 비전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에 서 있는 사역만을 위해서 성도들
과 같이 일하시고 성취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심으시고(plant), 성취해 나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
으신 사역이 아니면 온전한 열매를 맺
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
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심으시
도록 기다리면서 매 순간 하나님의 뜻
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갈
때 나무가 자라고, 결국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인내하며 묵
묵히 미미한 일상 속에서 따라가고 있
는 당신을 가장 적합한 장소에 심으실
것입니다. 열매 맺을 수 있는 자리에
심으실 것입니다. 비전의 성취에 매몰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최적의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 심으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빛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 있
는 성도로 쓰임 받을 수 있는 방법입
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이 당신을 일터로
던지시게 하십시오. 그때까지 나서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당신이 스스로 일
자리를 선정한다면 싹이 마른 꼬투리
에 불과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터로 던지셔야만 뿌리 뽑히지 않는
나무가 됩니다. 또 하나님이 심으시면
반드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열매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들이 뿌리 깊이 터를 잡고 성장해
서 열매 맺도록 회오리와 돌풍과 억센
바람을 통해서 성도들을 기르십니다.
3월12일: 당신의 자기 포기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
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막 10:28).
상업적 동기의 자기 포기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요약
하면, 자기 포기란 주님 자신을 위해
서 하는 것이지,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유익과
이익을 위한 동기를 가진 자기 포기를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나
거룩하게 되고 싶어 하나님께 헌신하
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
나님과 바른 관계 후에 오는 결과입니
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이 되는 자
기 포기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상업적인 사고에 젖
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꼭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려
고 할 뿐 주님 자신을 구하지 않습니
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
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원
치 않습니다. 원하는 것은 저 자신입
니다. 저 자신이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진열실에 놓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주님이 내게 하신 일이라고 말하
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더 얻고 싶어
서 하나님께 자기를 방치한다면, 그
같은 자기 포기에는 성령님이 존재하
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이윤만
차리는 저급한 상업주의입니다.
영적 동기의 자기 포기
참된 자기 포기에는 천국에 가고
싶다거나 죄로부터 풀림을 받거나 하
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 받고자 하는
따위의 동기는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자아를 던
지는 것이 진정한 자기 포기입니다.
우리가 막상 신앙생활의 장벽에 부딪
힐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디에
계십니까? 대부분 주님을 버리지 않습
니까?
자기 포기의 테스트는 언제나 일상
의 헌신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의 헌
신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이 하신 자
기 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삶의 끈을 얼마나 내려놓았습니까? 그
러면 당신이 자신을 내려놓고 던질 때
당하게 되는 모든 상처가 낫게 될 것
입니다.
묵상해설: “상업적인 동기를 가진 자
기 포기를 조심하라”고 한 의미는 무
엇입니까?
상업적 동기의 자기 포기 = 자기 성
취적 성화를 위한 노력
자기 성취적인 시도와 노력은 어떤
성화와 거룩을 불러오는 자원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 포기(내려놓음)를 통해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포
기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받고 싶습니
까? 자기 포기를 통해서 ‘성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챔버스는 만약 ‘예’라고
대답하신다면, 그것은 자기 포기에 대
한 잘못된 이해와 동기를 가지고 있다
고 말합니다. 어떠한 일체의 개인적인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하는 ‘자기 포
기’는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
다. 구원받기 위해서, 거룩해지기 위
해서, 성화되기 위해서, 위대한 종으
로 쓰임 받기 위해서 자기 포기를 하
려고 한다면 상업적 동기의 자기 포기
입니다.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자기
포기는 진정한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챔버스는 그런 상업적인 동기의 자
기 포기는 성령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적 성장이 전혀 없는 자기 포기입니
다. 진실로, 진정한 자기 포기는 오로
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아를 내던지는 신부의 마음에서 나
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든, 육적으로
든, 일체의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하는
자기 포기는 그 자체가 잘못된 목적입
니다. 챔버스는 진정한 자기 포기의
테스트는 일상의 헌신에 관한 것으로
온다고 말합니다. 일상의 헌신에서 어
떠한 자기 포기가 나타나는지를 보면
주님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자기 포기
인지, 무언가를 주님께로부터 얻어내
려는 자기 포기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포기는 신랑
되신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
던질 때 겪게 되는 어떤 상처도 낫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상업적 동기의 자기 포기 = 율법주의
적인 자기 속죄
많은 사람이 자기 포기에 대하여
율법주의적인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보상
하려는 마음으로 어떤 자기포기를 해
야 한다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자기 속
죄의 정신입니다. 나의 행위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자기 포기를 마치 자기 속죄처럼
이해하는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적인 자기 포기는 헛
된 경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후회나 희생을 짊어지
게 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을 만한 사
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자기
포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인하여 나의 죄가 완전히 소멸
되었다는 믿음이 없을 때, 율법주의적
인 자기 속죄로서의 자기 포기를 하려
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벌
을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몸
을 괴롭게 하는 금욕적인 경건훈련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권면합니다(골
2:18-23).
자기를 괴롭게 해야지 왠지 하나님
께 용서받을 자격이 될 것 같은 생각
을 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기뻐하면서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는
것은 왠지 배은망덕한 것같이 생각하
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얻는 은혜를 얻
기 위하여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히 4:16).
하나님의 은혜가 곧 하나님의 선물입
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값없이 받은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한 마음 때문
에 눈물을 흘리십니까? “내 너를 위하
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예수님께 엄청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무의식적으로 우
리 안에 자기 속죄적인 율법주의 의식
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
에 봉사, 헌신, 기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
예배, 헌신, 봉사를 올려드리는 사람
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마음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
집니다. 자기 속죄적인 마음과 행동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
하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으로 오르락내리
락하십니까? 자기 속죄적인 율법주의
적 마인드가 주된 원인이 아닐까요?
율법주의적 자기 속죄의 마인드와 행
위에서 자유함을 입으십시요! 그러기
위해서 예수 보혈과 예수 이름을 통한
십자가의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더 깊
이 매일 묵상하십시오!
3월13일:하나님의 자기 포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의 자기 포기의 열매
구속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고 개인의 거룩한 체험도 아닙니
다. 하나님의 구속은 자아로부터 풀려
나서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는 것입
니다. 환언하면, 구속은 하나님의 성
령이 나를 하나님의 인격체에 연합시
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
신보다 무한히 위대하신 자와 연합된
사실에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즉 나
는 하나님의 자기 포기에 휩쓸려 들어
간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과 성화에 관한 말씀을
전파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말하는 것
은 핵심을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고 성결하게 해 주신다는 사
실은 하나님의 위대한 자기 포기의 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기 포기의 열매
자기 포기는 스스로의 노력을 의식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생
애가 자기 포기의 대상인 주님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기
포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헌신이니
포기니 하는 말들을 해서는 안 됩니
다. 당신은 요한복음 3:16이 하나님이
자신을 남김없이 주셨다는 뜻의 말씀
임을 인식할 때까지는 자기 포기가 무
엇인지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던질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
처럼 추호의 계산도 없이 던져야 합니
다. 우리가 이러한 자기 포기를 할 때
는 그 결과에 대한 이해타산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연
합되어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해설: “당신은 요한복음 3:16이
하나님이 자신을 남김없이 주셨다는
뜻임을 인식할 때까지 자기 포기가 무
엇인지 알지 못한다”라는 의미는 무엇
입니까?
구속받은 자의 정체성 = 하나님의
자기 포기에 휩쓸린 자
‘구속’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
님 되시기를 포기한 완전한 자기 포기
의 결과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
로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완전
히 포기하심으로 자신의 생명을 남김
없이 주시고 구속의 사랑을 확증하셨
습니다. 챔버스는 성도의 자기 포기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포기에 완
전히 휩쓸려 하나님과 하나의 인격체
가 합치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주
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
17)라고 말합니다. 챔버스는 성도가
자신보다 무한히 위대하신 자와 합쳐
진 사실에 스릴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
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포기에 휩쓸
려 들어간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위대
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기 포기에 휩쓸린
사도 요한은 성령님에게 사로잡혀 하
늘보좌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보좌에
계신 예수님의 광채를 보게 됩니다(계
4장).
하나님의 인격체에 합치된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압도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체에 합치되면 합치될수록 하늘의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땅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하늘의 영광
에 대한 소망을 두지 못합니다. 하늘
의 것에 소망 두는 인생이 되려면 인
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합치되는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한 자기 포기를 통하
여 구속을 이루셨습니다(요 3:16). 하
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 자신과
합치시키시기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다 비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
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속받은 자의 자기 포기 = 계산없이
하나님께 휩쓸린 자
성도들 역시 하나님 사랑이 목적이
기에 자기 포기를 하게 되는 것이 참
된 동기입니다. 성도의 자기 포기의
목적은 거룩과 성화를 얻겠다는 계산
에서 나온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래서 예수님이 성도의 자기 포기를 이
렇게 요구하십니다. “매일 자기를 부
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
라” 이렇게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곧 제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요, 군사는
예수님 사랑만으로 자기 포기된 사람
입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주님을 따
라가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잠깐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예수
님을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지
내게 하라”(마 8:22)라고 말씀하십니
다. 주님을 따르는 데 어떠한 자기 계
산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 (자기 명예, 지식, 돈, 권
력 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
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기 포기’를 하려는 이유가 ‘자기 목
숨’을 더 얻기 위한 동기, 곧 경건한
자아의 성취를 목적으로 출발했다면
그것은 아무리 외형적으로 겸손하고,
경건해 보여도 성도의 ‘자기 포기’의
참된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도의 자기 포기는 예수님 사랑
이외의 어떠한 것도 목적으로 삼지 않
습니다. 성도는 자기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요, 자기가 포기된, 자기가 부인
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
기에 위대한 ‘희생’을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존경의 눈으로 보
아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포기
를 위장한 헛된 희생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자기 포기는 예수님
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드러나시
게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된 자기 부인(자기 포기)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
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
으셨을까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
는 사람만이 자기 부인(참된 자기 포
기)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곧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이 진정한 자기 포기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누릴 자
격이 되신 예수 하나님이 자기를 포기
하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피 흘리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자기 포
기를 깨닫는 심령이 진정한 자기 포기
를 하는 성도가 됩니다.
3월14일:미워도 버릴 수 없는 것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
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 6:16).
고질적인 나쁜 습관에 묶인 원인
나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힘은 그렇
게 되도록 나 자신을 굴복시켰기 때문
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노예가 되었
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마
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이기심이 문제입니다. 어릴 때 이기
심에 자신을 굴복시킨 자는 커서도 이
기심의 쇠사슬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을 일단 굴복시킨 후에
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 인
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초라도 탐욕의 본성에 관여된 것에
자신을 굴종시켜 보십시오(탐욕이란
육적이든 영적이든 내가 ‘당장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자신을 굴복시켜버리고 나면
설혹 그 사실에 대해 자신을 증오할지
라도 별 수 없이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여기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속을 받
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자신을 압도하
고 있는 이 막강한 세력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
신을 철저히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됩
니다.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
내사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눅
4:18).
고질적인 나쁜 습관에서 해방되는 길
습관이 문제입니다. 당신은 간단하
고 대수롭지 않게 “아, 그 습관은 내
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
니다”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습관은 당신이 말한 대로 원하면 언제
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그 문제의
습관이 당신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