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 이
유는 당신이 의식적으로 계속적으로
그 습관에 자신을 넘겨주었기 때문입
니다.
“사슬이 풀렸네!”라고 찬송을 부르
면서도 당신 자신에게 노예가 된 상태
로 계속 묶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
다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전
영역에 걸쳐 우리를 속박하고 억누르
는 일체의 종노릇에서 우리가 해방되
는 길은 주 예수님께 굴복하는 일뿐입
니다.
묵상해설: ““아, 그 습관은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습관은 당
신이 말한 대로 원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고질병 같은 나쁜
습관은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왜 없어
지지 않나요?
고질병 같은 나쁜 습관의 처리법 =
구속의 능력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챔버스는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누르도록 허락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나 자
신이 그러한 힘, 일, 사물 등에 대해
서 지속적으로 굴복했을 때, 오랫동안
‘종노릇’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
루아침에 고질병 같은 나쁜 습관이 생
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의
식적, 무의식적으로 영적 고질병의 막
강한 세력 앞에 굴복해 왔다는 것입니
다.
한국이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되고
나서도 20-30년 이상을 생활 곳곳에
서 ‘쓰레빠’, ‘빠게스’, ‘밴또’ 등의 일
본어가 통용되었었습니다. 일본에 종
노릇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습관이 몸
에 베였던 것입니다. 일본을 욕하고
미워하면서도 일본 말로 된 용어가 입
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습니다. 오
랫동안 종노릇하다 보니 미워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된 습관, 나쁜 습관에서 헤어 나
오지 못할 때,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
습니다. 예수님의 통치에 완전히 지배
당하기 위해서 ‘자기 포기’ 곧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
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으면 갑자기 신분은 하나님의 자
녀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마치 육과 혼도 동시에 거룩해졌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아서 홍해를
건너갔지만 여전히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이집트의 우상숭배 하는
문화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범
죄했습니다. 옛사람의 습관과 습성은
남아서 성도의 육과 혼은 계속 구원받
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혼과 육은 아직도 구원의 과정 가
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구속의 능력을 매일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목적은 포
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
다(눅 4:18). 주 예수님께 굴복하는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고질적인
나쁜 습관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그것
이 바로 구속의 능력입니다.
고질병 같은 나쁜 습관의 처리법 =
매일 십자가를 통과하는 성도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이요,
또 매일 십자가를 통과하러 십자가 앞
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
울 사도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갈
5:24)이기를 원하십니다.
의지적으로 열심히 자신 안에 있는
지속적인 죄 된 습관, 나쁜 습관에서
자유함을 얻으려고 힘써 보아도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고 힘쓰면 힘쓸수록 자신의 마음은 더
죄를 짓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죄를 내 힘으로 외면할 수 없습니다.
죄를 외면할수록 죄의 세력이 더 강력
하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사
람들이 ‘사슬이 풀렸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노예가 된
상태로 계속 묶여 살아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유와
해방의 찬양을 목청껏 부르면서도 여
전히 알콜중독, 도박중독, 포르노중독,
돈중독과 같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
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죄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
니다. 십자가 앞에 나의 고질병 같은
나쁜 습관에 대하여 애통하며 부르짖
으면 구속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도박
중독에 빠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박중
독에서 자유를 얻는 길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
에서 애통하며 도박을 사랑하는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구속
의 능력이 실제 내 삶에서 역사해 주
시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
면 온갖 종류의 죄의 노예 된 행위가
그치기 이전에 도박에 대한 사랑, 술
에 대한 사랑, 성적인 탐욕, 돈에 대
한 탐심이 끊어질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의 죄와 허물
을 모두 못 박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신 예
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
음에서 부활 하셔서 거룩한 몸을 입으
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
가를 통과해서 새 인격을 옷 입어야
합니다. 그러한 새 인격은 예수 그리
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롬 13:14
갈 3:27). 우리가 모든 속박과 억압에
서 해방되는 길은 오로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3월15일: 당황을 통제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막 10:32)
나를 당황하게 하는 예수님의 기준
우리는 처음에는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 아는 것처럼 확
신해 버립니다. 그래서 만사를 다 던
지고 사랑의 기운에 넘쳐 신나게 주님
을 따르려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
나다 보면 옛날처럼 그렇게 확신이 가
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서 계시
지만 왠지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처럼
보이기만 합니다(32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심중 깊은 곳까
지 차디찬 오한을 느끼게 만드시며 영
적 생활에 숨을 막히게 하는 일면이
있으십니다. 이상하게 굳은 얼굴을 하
고 강직한 결단으로 걸어가시는 이분
은 내게 공포를 안겨 주시는 듯합니
다. 이분은 더 이상 보혜사도 아니고
동역자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런 모습은 내가 예전에 전혀 몰랐던
일면입니다.
주님의 이상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나는 주님을 안
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
신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
스도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사실
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주님과 이
제 익숙한 사이가 아닙니다. 주님은
내 앞에 계시며, 뒤를 돌아보지 않으
십니다. 나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목표는 이
상스러우리만큼 저멀리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나의 당황을 통제하는 제자 훈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죄와 슬픔의 깊이를 다
재어 보셔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이
주님을 타인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우
리가 이런 관점에서 주님을 보면 전혀
모르는 분 같습니다. 우리는 사실 주
님의 생애의 일국면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선,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앞서가십니
다. 실로 이상스러운 인도자이십니다.
우리는 이분과 동지가 아닙니다. 우리
는 이 때 ‘당황’해 버립니다.
당황을 통제하는 것은 제자 생활에
필수 요건입니다. 놀라서 우리 자신의
작은 불꽃에 의지하여 열을 내려고 하
면 위험하게 됩니다(사 1:10-11 비
교). 당황의 어둠이 드리우면 끝날 때
까지 견디십시오. 어둠이 지나면 예수
님을 따르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묵상해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심중
깊은 곳까지 차디찬 오한을 느끼게 만
드시며 영적 생활에 숨을 막히게 하는
일면이 있으십니다.”라는 의미는 무엇
입니까? 왜 예수님은 우릴 당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당황의 단련 내용 = 예수님의 기준이
우릴 당황하게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
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막 10:28)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위하여 모
든 것을 버려라, 부모, 형제, 안락함을
다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수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늘 인자
하고 사랑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예수님이 치루실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도 감수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영생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이 시대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요구하신
다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취급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로마서 10:10을
근거로 해서 영접기도를 하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단지 입으로 “예수님! 내가 예수
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
마 시대에는 황제들이 자신을 하나님
처럼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제
들에게 로마 시민들이 인사할 때조차
도 “나의 주님은 00 황제이십니다!”라
는 식으로 고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
백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
습니다. 그저 입으로 영접기도를 하는
수준의 말씀이 아니었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수준의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수준의 결단을 요구하
신다면 수많은 사람이 얼마나 당황할
까요? 우리 자신도 심각하게 당황하지
않을까요?
당황의 단련 내용 = 제자 삼는 것이
전도이다!
주님은 많은 사람을 모으려 하지
않으셨고 참 제자 한명을 만들려고 하
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을 얻
는 믿음의 수준을 하향 조정하지 않으
셨습니다.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하나
님의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부자청년
에게 ‘돈’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정말 착
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도 “저 사람은 구원받
기 충분한 사람이야”라고 느낄 정도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던 사
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구원
받기가 정말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예
수님께 제자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응합
니다.
주님은 교회로 사람을 인도하려 하
지 않으시고 영혼을 구하는 전도를 하
셨습니다. 제자를 삼는 전도를 하셨습
니다. 제자를 삼는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많은 불신영혼들이 교회에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한 영혼이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영접할
수 있는 제자 삼는 일이 정말로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부자청년도 영생을 얻고
싶어 한 구도자(seekers)였습니다. 영
원한 생명을 간절히 추구하던 사람이
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의 하나님
이었던 ‘돈’을 처리하지 않고는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
님은 왜 부자청년이 시간을 두고 돈을
정리하도록 지도해 주지 않으셨을까
요? 하나님을 ‘생명’처럼 영접하지 않
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
다. 돈, 명예, 권력, 자녀, 성공이 나
의 하나님인데 거기에 또 다른 하나님
(생명 되신 진짜 하나님)을 더 추가할
수 없습니다. 모두 헛된 신들을 정리
하고 나서야 생명 되신 주님이 나의
하나님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멀게 느껴질 때가
있으십니까? 도저히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느껴질 때
가 있으십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
르침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만이 당황의 단
련을 받습니다.
챔버스는 “당황을 통제하는 것은 제
자 생활에 필수 요건입니다…당황의
어둠이 드리우면 끝날 때까지 견디십
시오. 어둠이 지나면 예수님을 따르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
다”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때론 예수님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당황의 시간
이 지나면 놀라운 기쁨이 찾아 올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