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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idge Fellowship International, 2021-03-30 18:23:44

4월1일~4월8일 최고봉 묵상해설-Bridge Fellowship

4월1일~4월8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4월1일~4월8일 묵상과 해설

4월1일: 무심한 교인들

그리스도 예수시니 …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성령이 …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34, 26-27)

일손을 멈추고 중보하라
본문의 말씀을 읽고도 간구하는 일

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라는 것은 성령님의 가
르침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님의 가
르침대로 그렇게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처한 환경, 즉
가정, 직장, 국가, 기타 당면한 위기를
위해 간구의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환경이 너무
각박해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지
도 못하고 경배의 시간적 여유도 못
갖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는 의연히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로 진입하는 중보기도를
올려 보십시오. 우리 형제들을 위한

중보를 통해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
십니다.

경배의 자세로 중보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오히려 하나님을 앞질러가게
할 수도 있음에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열심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주님을 앞
서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과
어려운 일들에 매여 하나님을 경배하
지도 않고 중보기도도 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무거운 짐에 눌리면 우리의
마음가짐은 경배의 자세에서 떠나, 하
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굳어지고 자신
의 영혼에 대해 실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늘 소개해 주시는데, 우리가
경배의 자세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
을 무심하게 대하고 맙니다. 기껏해야
한두 마디 꼬집는 성경구절을 인용하
거나 틀에 박힌 상담을 하고는 하나님
께 맡겨 버립니다. 무심한 그리스도인

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
겨 줍니다. 우리는 주님과 성령님의
중보를 온전히 본받고 있습니까?

묵상해설: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상
관이 없는 사람들을 늘 소개해 주신
다. 우리들이 경배의 자세를 갖고 있
지 않으면 이들을 무심하게 대하고 만
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중보
가 중요합니까?

남을 위한 중보기도 = 하나님의 뜻과
때를 먼저 찾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
하는 사람은 남을 향한 ‘중보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성도를 위
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롬 8:
34). 성령님도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
시는 분입니다(롬 8:27). 우리는 “왜
중보기도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보다 앞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열심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하나
님을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God’s Time)를 분별하지 않고, 자
기 열심을 가지고 나아갈 때, 결국 성
도는 마음이 굳어지고 실망감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게 됩니
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원망의 마음
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
해서 일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탓합니
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알
기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가 없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소
멸해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
성에게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에 올라
가 싸워서 약속의 땅을 취하라고 하시
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을 믿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
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을 듣고는 가나안에 올라가서 싸우려
고 하지만, 그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
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어코 올라
갑니다. ‘약속의 땅이니까, 언제든지
올라가면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냐’라
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 하나님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40년
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무심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에는
빠르지만 하나님의 관심에는 무심한
것처럼 큰 영적 무지는 없을 것입니
다.

남을 위한 중보기도 = 하나님의 관심
사에 동참하는 길

하나님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늘 소개해 주시는 것을 통해
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

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가 드러납니
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를 어
떻게 알았습니까? 몇 명의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할 때, 예수님은 십
자가를 지실 때가 왔음을 아셨습니다
(요 12장).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실 하나
님의 때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마음으로 늘 중
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서가도
안 되고, 그렇다고 뒤쳐져서도 안 됩
니다. 모든 초점이 하나님의 뜻과 하
나님의 마음에 맞춰져서 하나님의 때
를 분별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중
보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
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
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부어집니
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 온전히 중보
기도를 할수록 성령의 새로운 기름 부
으심이 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남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심

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하
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
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무
관심한 사람일 것입니다. 챔버스가 말
한 대로, 우리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
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에
게 ‘나그네’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
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
을 대접하였다’라고 말합니다(히 13:
2).

성경에 이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
시려고 가는 나그네 모습을 한 하나님
의 사자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소
돔과 고모라에서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의인이 단 10명도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

함의 중보 때문에 하나님은 롯의 생명
을 건져주셨습니다(창 19:29).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롯의 생명을
구하는 놀라운 통로였습니다. 참으로
한 영혼을 위한 중보기도는 한 영혼의
생명을 구하는 축복된 일입니다. 하나
님의 관심사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
입니다.

4월2일: 주만 보이네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행 9:17).

영적인 신자
바울이 시력을 회복했을 때 본 것

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인격체를 볼
수 있는 영적 감각도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영적 시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의 생애와 설교는 예수 그
리스도께 집중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음이라”(고전 2:2).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이외에는 바
울의 심령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
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
전속에서 계시된 것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간직하고 지키는 일을 익혀야 합
니다.

영적인 신자의 특징은 주 예수 그
리스도를 자신에게 먼저 해석, 적용

하고 나서 남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풀
이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
기를 불태울 수 있는 정열로 예수 그
리스도를 섬깁니다. 이런 자를 만나면
당신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
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비 영적인 신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게 하

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무리 작은 것이
라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것은 당신이 영적인지 아닌지를 판가
름하는 테스트가 됩니다. 비 영적인
상태란 다른 사물들이 당신의 마음을
점점 휘감아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이후부터는 옆에 있
는 모든 것에 내 눈 멀게 되었네.
내 영혼의 비전에 이끌려 가서 십자가
에 달린 주만 보게 되었네.

묵상해설: ‘영적 신자의 특징’은 무엇
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의 얼굴을 보는 것의 관계는 무엇입니
까?

영적 신자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만 구하기

사울(사도 바울)은 살아계신 인격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
서 만났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보았을 때, 사울은 눈이 멀
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나니아
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
사울에게 찾아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고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
에 사도 바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의 인격체를 영적으로 보기 시작합니
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을 자랑하겠다고 늘 선언합니다. 예수
님을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긴다고 말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

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임재를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이 폭
포수처럼 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의 얼굴을 추구하는 것이 영적 신자의
특징입니다. 내가 현재 처해 있는 맹
인 된 상황(사울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진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
하신 상황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성도는 계속 맹인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며 잠잠
히 기다리면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보
내주십니다. 내 스스로 맹인 상태를
벗어나려고 예수님의 ‘아나니아’를 찾
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만을 구하고
기다리면 나를 맹인 된 상태에서 자유
하게 해 줄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많
은 사람이 맹인 상태를 벗어나려고 온
갖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맹인 상태에
있는 것은 주님의 임재 없이 어려운
상황을 자기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
속에서 계시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
이 간수하고 지키는 일을 익혀야 합니
다. 맹인 상태를 벗어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대로 나아
가야 합니다.

영적 신자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기

영적 신자는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말씀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리고
나서 남에게 해석 적용하게 하는 사
람”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예수 그리
스도의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
니다. 영적 설교자는 사람들을 설득하
기 위하여 잡다한 예화를 즐겨 사용하
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
씀하시고,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세
상원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과 피 흘리신 구속의 은혜를 통한 영
적 원리가 자신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
였는지를 증거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
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어떤
위대한 위인(록펠러, 알렉산더 대왕
등)이 더 높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위
대한 위인들의 업적이 예수님을 더 증
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의 얼굴(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장
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어떤 위대한 신앙
인이 성도의 삶의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믿음의 선조들의 ‘믿
음’을 본받아야지 ‘믿음의 행위’를 본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위를 본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
다. 만약 어떤 성도가 노아의 믿음의
행위를 본받으려고 ‘방주’를 짓는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믿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자기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
지 믿음으로 붙잡고 나아간 것을 본받
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와 성장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
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따
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
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음이
라”(고전 2:2)라는 바울의 고백을 자
세히 보십시요. 특별히 “알지 아니하
기로 작정했음이라”라는 구절을 보십
시오. 어떤 면에서는 일부러 인간적으
로는 무식한 상태에 있기로 작정했다
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랬을
까요? 챔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
굴을 가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
무리 작은 것이라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영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테스트가 된다.”
고 말합니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 그
리스도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을 추

호라도 허용하지 않기로 작정한 마음
상태입니다.

비 영적인 상태는 다른 어떤 것 때
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
무식해 보이던, 유식해 보이던, 신령
하게 보이던, 그렇지 않던 간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4월3일: 너도 알았더면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2)

영적 맹인이 되어 가는 길
예수님은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

성하셨습니다. 성은 온통 흥분에 휩싸
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바리새주
의의 이상한 ‘신’도 있었습니다. ‘자
만’이라는 이 신은 종교적이었고 청백
했지만, 실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
다.

오늘 우리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무
엇입니까? 우리도 이상한 ‘신’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괴물 같은 우상 신은
아니겠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나
쁜 성향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 번 내게 이 이상한 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이 괴이한 ‘신’을 버
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
했습니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기기는 했으나, 아직도 이 이상한
신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평
안에 속하는 일들에는 눈멀어 있습니
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무시로 드나
들 수 있는 입장에 자신들을 놓고 살
면서도, 하나님의 눈에 우리 자신이
계속 정죄 받게 한다는 것 은 딱한
일입니다.

영적 맹인에서 벗어나는 길
“너도 알았더면.” 하나님은 예수님

의 눈물로 우리의 심장을 파고드십니
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과실이 있음
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
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악한 성향이 아직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알았더라면
좋을 뻔했다”라는 말씀은 심연의 슬픔
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님은 닫힌 문을 여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다른 문을 열어 주

십니다. 그렇지만 닫힐 필요가 없는
문들인데 우리가 스스로 닫은 문이 있
고, 좋은 생각들을 밀쳐 버린 경우가
있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과거를 회상시킬
때, 두려워 말고 기억의 역할을 인정
하십시오. 과거는 견책과 비애를 사용
하여 하나님의 수종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을 뻔했다”라는 말씀을
미래를 위한 유익한 훈련으로 경이롭
게 전환시키십니다.

묵상해설: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
는 것을 방해하는 ‘바리새주의’라는
이상한 ‘신’은 무엇입니까?

영적 맹인이 되어 가는 영적 원인 =
바리새주의

챔버스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
하고 눈이 멀게 하는 것은 ‘바리새주
의’라는 우상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는 영광을 받으십
니다. 그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예수
님께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과 제자들
을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
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눅 19:42)
하시며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영적 맹
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 안
에 있는 ‘교만’과 ‘자만’이 하나님의
얼굴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저주의 근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서 바리새주의는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우상으로서의 ‘신’(god)인 것
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역사입니다(엡
2:2). 공중 권세잡은 세상 임금이 하
는 주된 역사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
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해서 그리스
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
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고후 4: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마음에 임
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고후 4:6).
따라서 바리새주의는 어둠의 영의 역
사입니다. 어떠한 미신을 섬기는 것만
이 ‘우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
보는 것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과 성향
이 모두 우상인 것입니다.

바리새주의에 대한 주님의 해결법 =
징계(심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징계’입니다. 예
수님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를 찾
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
다”(눅 19:44).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에는 영적, 육적으로 징계가 임합니
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때, 사울
왕은 영적, 육적으로 고통 가운데 처

했지만 ‘왕’의 자리 때문에 회개의 자
리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성도개인
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고갈되면
영적 기쁨과 평강이 사라집니다. 로마
서 8:6은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주의에 휩싸이면 종교적으로
탁월하여 교회 사역을 잘한다고 하여
도 거기에는 생명과 평안이 고갈되어
가게 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고갈되기 때문에 육신의 즐거
움으로 그것을 대신하게 되고, 결국은
이중인격자 또는 위선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인이
라고 생각하며 성령이 고갈된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면 불행하게도 사울 왕
의 뒤를 따라가게 됩니다.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면 구원과
성화의 역사가 교회 가운데서도 사라
집니다. 역사적으로도 유럽의 기독교
가 인간적인 지식으로 교만함에 빠질
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고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쇠퇴했습니다. 종교적
인 예식은 더 거룩하게 보이는 예식으
로 바뀌어가지만 생명력은 소멸해 갑
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자신들의 종
교적 예식을 더 의지하고 즐거워하는
교회와 성도에게 이것이 징계가 아니
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러한 바
리새주의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지속적
으로 문제제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챔
버스는 “‘너도 알았더면’(눅 19:42) 하
나님은 예수님의 눈물로 우리들의 심
장을 파고드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과실이 있음을 물으신다.”라고 말합니
다. 우리 심령 안에서 바리새주의가
심판받아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영적 맹인 상태를 벗어나는 지름길
은 바로 나 자신의 바리새인적인 상태
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
새인들에게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
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

나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요 9:41)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에 자신들의 벌
거벗은 상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바
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구
제, 금식, 기도와 같은 것을 잘한다는
‘자기 의’가 눈을 가려서 ‘벌거벗은 상
태’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벌
거벗은 상태를 깨닫게 하시려고 “미워
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사람이다”, “음
욕을 품는 사람마다 간음하는 사람이
다”라고 십계명을 재해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까지 적용하면
모든 사람이 다 벌거벗은 상태일 수밖
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본다’(‘안다’)라고 하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으로 지은 ‘죄’들은 그대
로 남아있게 됩니다. 차라리 세리와
창녀처럼 ‘못 본다고 하는 자’는 하나
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
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
나고, 영접하게 됩니다.

4월4일: 어둠의 섭리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요 16:32).

황폐한 내적 체험을 통과한 믿음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을 책망하시

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진짜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질서가 없고, 초점도 없는 혼란스러운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의 믿음은 삶 가운데 정말 중요한 상
황에서는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습니
다. 따라서 제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
에 따라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 그
리스도의 관심사가 아닌 일에 제자들
은 마음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연결된 후에는 실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 황폐함
을 통해서 산산히 부서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

하던 욕구의 ‘내적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같
은 황무지의 경험을 해 볼 각오가 되
어 있습니까?

물론 당신이 선택한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환경을 사
용하여 내적 황폐함에 이르게 하십니
다. 이 같은 경험이 있기 전까지는 우
리의 믿음은 감정이나 축복에 의해 지
탱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황폐한 내적 체험을 통과한 후에는
비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놓으
시든, 어떤 심적 고난을 주시든 하나
님을 끝까지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황폐한 환경을 통과한 영적 담력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실상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흩어 버림으
로써 예수님을 혼자 둔 적이 있지 않
습니까? 이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
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둠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옵니

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허락해야 합니다.

예컨대 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는
축복에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일이 있
더라도 그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주가
되실 때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목적
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자
신보다 하나님의 축복에만 관심을 두
었다는 점을 지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담력입니
다(요 16:33).

묵상해설: “하나님이 당신의 환경을
사용하여 내적 피폐의 지경에 이르게
하신다. 이 같은 경험을 치를 때까지
는 우리의 믿음이 감정이나 축복에 의
해 지탱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황폐한 내적 체험의 목적 = 자기 목
적이 처리되는 길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열정적
으로 따라다녔지만 여전히 ‘자기 목
적’을 위해서 살고 있었던 모습을 발
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를,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요 16:32)라고 하십
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적인 현
장에서 ‘믿음’을 점검받게 된 것입니
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잡혀
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둠에
빠집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어버렸습
니다. 앞길이 막막해진 제자들은 각기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가버립니다.

환경적으로 어둠에 처하는 것도 하
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다고 챔버스
는 말합니다. 암흑 같은 어려움 가운
데서 ‘자기 목적’이 없어지고 ‘하나님
의 목적’을 붙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황폐한 내적 체험을 치르도록 잠

시 동안의 어둠을 허락하신다고 챔버
스는 말합니다. 왜 그러한 시간을 허
락하시나요?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누
구보다도 목숨 바쳐 예수님을 따를 것
이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은 여전히 자기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
르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
에 앉는 영광과 권력을 누리고 싶었습
니다. 그런데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
님이 잡혀가셔서 심문을 받는 현장에
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
니다.

베드로는 황폐한 내적 체험을 치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라는 것을 절감하
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회
복시켜 주시고 나서 ‘하나님의 목적’
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런 베드로에 대해서 “젊어서는 자기
원하는 데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들

이 원하는 데로 다니게 될 것이다”라
고 예언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
가 여전히 ‘자기 목적’으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게 하신 것처럼 황폐한 어둠의 시간을
허락 하십니다.

황폐한 내적 체험의 결과물 = 자기
자원을 의지하지 않음

하나님은 성도가 여전히 옛날 자신
이 쌓아온 자기 경험, 자기 지식, 자
기 지혜, 자기 판단으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날 수 없
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는 통
로로서 살 수 있도록, 자기 목적을 내
려놓는 황폐한 내적 체험을 하게 하시
는 분이십니다. 마귀가 주는 어둠은
죄를 통해서 고통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잠시 동안의
어둠은 자기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취하게 하는 십자가의

길을 훈련하는 영적 훈련 과정입니다.
성도가 광야의 시기에 겪는 필수 코스
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는 자원
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 능력, 행복이
었던 단계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자
신을 추구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
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황폐한 내적
체험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보
다는 하나님의 축복에만 관심이 있어
왔다는 점을 지적해 주실 것이라고 챔
버스는 말합니다.

주님이 나의 자원 되시고 생명 되
시는 단계로 성도들을 이끄시기 위하
여 황폐한 내적 체험 과정을 거치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하나님
의 축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 하루는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
머니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마 20:21)라
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의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세배대의 아들인 2명의 제
자에게 분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과 제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임할 육적인 축복에 의해서 믿
음을 지탱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런데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
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
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라
고 말씀하십니다(마 20:22).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믿음을 지탱하려고 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
고 구하는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복은 눈에 보이
지 않는 세계에 성도의 기업과 상급을
쌓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일을 성취하시려고 황폐한 내적
체험의 환경으로 우리를 몰고 가십니
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환경, 상황, 조건, 인간관계를
통해서 황폐한 내적 체험을 하게 이끄
십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
화 받는 필수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4월5일: 겟세마네의 고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
되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6, 38).

인자의 겟세마네 고뇌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님의 극심한

고뇌를 우린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참뜻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겟세마네
의 고뇌는 죄를 목전에 놓고 씨름하는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분의 고뇌입니
다. 우리는 겟세마네의 체험을 개인적
으로 치른 적이 없습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전례가 없는 특이한 사건입
니다. 그곳은 우리가 생명으로 이르는
문턱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두려워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목적으로 세상
에 왔다는 것을 알고 이를 분명히 밝

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
가의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아
셨습니다. 한편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
에게는 감히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이 인류와 상관
없이, 즉 하나님의 아들이기만 한 채
로 십자가를 지나치게 하려고 겟세마
네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했습니다. 사
탄의 공격 포인트가 성공하기만하면
예수님은 결코 구세주가 될 수 없었습
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자의 십자가 승리
광야에서 유혹하던 사탄이(눅 4:

13) 겟세마네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탄은 인자로서의 주님을 상대로 겟
세마네에서 최후의 공격을 퍼부었지
만, 역시나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겟
세마네의 고민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
상의 구주로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
키려는 진통이었습니다. 겟세마네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얼마나 큰 주님
의 희생이 있어야 했는가를 드러내 줍
니다.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단번에 이루게 한 기초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자에 대한
승리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존전
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지금 열려
있는 것은 인자가 거쳐간 겟세마네의
고통과 십자가의 승리 때문입니다.

묵상해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고통
스럽게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자의 승리= 성도들의 승리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이 두려워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
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
을 것’을 아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
다. 육체적 고통을 이미 예상하셨습니
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피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을까요?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겟세마네의 고민
은 죄를 목전에 놓고 씨름하는 하나님
이시자 사람이신 분의 고뇌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시
고 죄인 취급을 당하셔야 하는 것에
대해 심한 고통을 느끼실 수밖에 없었
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께 모든 사람의 죄
를 전가시키시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것입니다(롬 8:3). 아버지
께서 예수님을 죄인 취급당하게 십자
가로 내모신 것입니다.

사탄은 마치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
여 실패하게 만든 것처럼 광야에서 예
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
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
고, 높은 성전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천
사들이 와서 받쳐줌으로 섬김을 받을
자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
들로 대접받을 권리를 누리라고 유혹

한 것입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로서는
전혀 시험할 수가 없었는데, 사람의
아들 곧 인자(Son of man)로서 단독
으로 행동하도록 지속적으로 시험했다
“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로서의 예수님은 이미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마귀는 하나
님의 아들인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식
으로든 시험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아담되신 ‘인자’(Son of man)로서의
예수님을 마귀는 지속적으로 시험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이신 예수님
의 승리는 인류 모든 성도의 승리였습
니다.

인자의 승리 = 십자가로 승리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방법으로
성도들도 시험합니다. 어떻게 마귀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소리와 십자가상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거의 흡사합니다. 즉 마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무기력하게 죄
인들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
취급당하지 말고 하나님으로서의 능력
을 발휘해서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
라”라는 식으로 계속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달리 독자적으
로 하나님의 아들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취하고, 영광을 받으라고
시험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
를 부여받은 아담은 이 마귀의 시험에
실패해서 세상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자’로서의 예수
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
를 다 부여받은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셨기에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을 위해 복
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요

13:31)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방법

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방법과 동
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귀는 성도에게도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너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정도는 누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니”라
고 말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승리하
신 것처럼 십자가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만큼 하나
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게 됩
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며 육신의 유익을 도모
하라고 부추깁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
는 육신의 본성을 더 강화하여 발람과
같은 사람을 만듭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거룩을 가장한 외식과 위선을
강화합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가인
과 같은 사람을 만듭니다. 십자가 없
는 성경공부는 지적 만족만을 줄 뿐입
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모든 것

들은 성도를 영적 패배로 이끄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역설을 말
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
라”(마 16:25)라는 것은 십자가를 통
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나
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상에
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한 성도의 삶 역시
사망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4월6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
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순교’차원의 사건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지옥의
기초가 흔들린 대승리였습니다. 시공
간을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 죽음보다 더 확실한 사건은 없습니
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하나님과의 올
바른 관계 속으로 다시 이끌어 들이셨
습니다. 예수님은 구속을 인간생명의
기본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연히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
다.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창세 이후

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13:8)이
십니다.

성육신의 총체적 의미는 곧 십자가
입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죄인이 되신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동일한 하
나님이십니다. 성육신은 구속의 목적
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를 해결하려고 성육신 하신 것이지,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의
몸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의 중심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의 중심이자

그 신비의 해답입니다. 십자가는 인간
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체험 속에
서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
나님의 본성을 들추어 줍니다. 이 십
자가의 문을 통해서만 인류가 하나님
과 연합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십자가는 우
리가 겪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

님을 알게 됩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
의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이, 주님이
치르신 십자가의 공로와 유익을 받기
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문
턱에 닿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가 주는
생명 속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구속
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묵상해설: “예수님의 십자가를 순교로
보는 생각을 묵인하지 말라”라는 의미
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생명의 통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은 ‘순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갔
을 때, 하나님이 이삭 대신 준비해 놓
으신 어린 양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해
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

건은 하나님의 정의(Justice)와 사랑
(Love)을 동시에 실현하심으로, 지옥
의 기틀이 흔들린 대승리(Great
Victory)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 + 사랑 = 승리”를 이루시기 위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
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이제는
승리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하시려고
했던 인간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si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인류 박애 정신’을 통해서 이 땅
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다
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반체제 인사로
몰려 그저 순교 당하신 인도주의자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사회
운동가였다면 세례 요한이 헤롯 왕의
부정함을 지적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
세례 요한을 석방하는 운동을 했을 것

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을 주장하다가 포악한

자들에게 죽임 당하신 순교자로 취급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예수님을 패배자로 취
급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을 순교자처럼 취급하려고 드는 이유
는 자신들의 희생을 높이 평가하려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숨어
있는 죄된 의식 때문입니다. 사람의
어떠한 숭고한 희생이 그리스도의 십
자가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숭고한 희생이 온 인류를 죄와 사탄에
게서 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
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자녀를 위한 부모의 고귀한 죽음조차
도 자녀를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피가 뿌려진 십자가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유일한 생명의 통로입니
다.

예수님의 십자가 = 세상을 이기는 능
력의 통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승리하시고,
부활을 통해 그 승리를 확증하신 구원
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
여 사람들에게 임하는 죄의 저주를 정
복하셨고, 세상을 정복하셨고, 사망권
세를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십
자가를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
럼 성도들도 역시 십자가에서 죽고 부
활하는 존재로 선택받은 것에 대한 의
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불쌍해서 대신
죽으려고 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은 사람들의 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
시려고 의도적으로 작정하고 죽으시려
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
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
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을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 피조물, 새
인류,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서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을 존재로 만드시기 위
하여 작정하시고 계획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막혀있던 ‘길’을 열어 놓으
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도들을
위해서 오셨고,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예
수님은 우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말미
암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들어갈 소망을 확증하여 주셨던 것입
니다(히 2:10).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진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
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
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존재가 성도라
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라는 것
을 확인하고 세상을 이기는 자의 자리
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
력입니다! 성도가 항상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 십자가의 문
을 통해 인류가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십자가
는 우리가 겪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
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문을 통해서만 인류가 하
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
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십자가 앞에
늘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
가면 우리는 십자가는 우리가 겪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열
렸다는 관점이 흔들리면 세상을 이길
능력도 흔들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월7일: 왜 말씀이 어려운가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
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말씀이 계시되는 영적 상태
인자가 당신 속에서 부활하실 때까

지는 아무 말도 마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을 온통 사로
잡아 예수님이 지상에서 가르치신 것
이 이해될 때까지는 입을 열지 마십시
오.

당신의 내적 자아가 바른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분명
한데도, 왜 전에는 깨닫지 못했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과거에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은 주님의 말씀
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가르침을 숨기
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생활 상태가 양호할 때만 주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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