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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3월7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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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idge Fellowship International, 2021-02-28 19:02:23

3월1일~3월7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

3월1일~3월7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3월1일~3월7일 묵상과 해설

3월1일: 고통은 계시의 시작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

영적 감각을 둔화시키는 ‘죄’
마음을 찌르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

한 베드로의 반응은 용감하게 선언했
던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즉 베드로는 며칠 전에 “나는 주님과
같이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님을 부인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한 단언적인
선언을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마 26:33-35 비교).

육적인 인간은 자기 의지에 대해
단언하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참된 사
랑은 예수님의 질문에 찔림을 받을 때
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예
수님을 사랑했지만, 육적인 인간이 다
른 한 선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다
름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사
랑은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변덕스러
운 사랑일 뿐입니다. 즉 인간의 감정
적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

랑도 상당히 깊을 수 있지만 인간 심
층의 중심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합니
다.

참된 사랑은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
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
에서 나를 시인하면”(마 10: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인(confession)이
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언행으로 고백
하는 것입니다. 죄는 감각을 둔화시킵
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모든 눈가
림에 대해 찔림 받지 않는다면, 하나
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죄와 달라서 우리를 아프게 합니
다. 죄는 우리의 감각을 둔화시킬 뿐
입니다.

영적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하나님
말씀’

주님의 질문은 우리가 극도의 고통
을 받을 때까지 우리 마음을 예민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을 아프게 하지만, 그 고통은 오묘하

면서도 개인적인 방법으로 감지됩니
다. 주님의 말씀은 영과 혼을 쪼개기
까지 하여 어떠한 왜곡과 속임도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님의 질문을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 질문하실 때 그저 좋은 말로 대
꾸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심적 고통은 오히려 일체의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
다.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들에
게 올 때는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
다. 그렇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심오
한 계시의 시작입니다.

묵상해설: “우리들이 자신의 모든 눈
가림에 대해 찔림을 받지 않는다면 하
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미치고 있
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마귀의 정죄와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찔리게 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방해받는 증거 = 마음
을 억누르는 죄책감과 열등감

마귀가 성도를 정죄할 때, 마귀는
죄책감, 열등감, 두려움, 그리고 의무
감 등을 불러일으키려고 합니다. 자녀
가 책망 받는 것과 종이 책망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령님의 책망은 자녀
가 받는 책망입니다. 자녀는 책망을
받지만, 자기 잘못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
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마치 ‘앵벌이’
를 시키는 가짜 부모처럼, 죄책감과
의무감으로 성도들을 영적 절망과 어
둠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영적으로는 둔감하게, 무디게 만
들려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그런
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마음의 찔림
은 우리를 ‘죄’에 대해 더 민감하게
하여서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은 찔림을 얻었지만, 예수님
께 사랑의 회복으로 치유받았습니다.
챔버스는 “베드로는 이제 선언을 하지
않는다…참 사랑은 예수님의 질문에
찔림을 받을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라
고 말합니다.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마음의 찔림이 선행되어야 합
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
나기 위해서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
을 상하게 하시는 찔림(conviction)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찔림을 경험했던 사도 베드
로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세
례를 받고는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을 일으키는
성령님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도행
전 2:37-38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십시
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
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
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
늘”이라고 반응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복음증거를 듣고, 그들은 마음에 찔

려,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음으로 성
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참된 ‘죄인 의
식’은 생명을 주는 성령님의 역사입니
다.

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증거 = 마음에
찔림으로 거룩한 슬픔

우리가 “은혜받았다!”라는 것의 참
의미는 “마음에 찔림을 얻었다”라는
것입니다. 내 귀에 듣기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받고 위안을 얻은 것이 것이
은혜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마음
에 찔림을 주시므로 더 많은 회개를
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슬픔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찔림은 구원받기 전
에 한 번으로 충분하다구요? 더 이상
정죄 받는 느낌을 갖고 싶지 않다구
요?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7:10에서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
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

회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영어로 “godly
sorrow”(거룩한 슬픔)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찔림(conviction)과 마귀의 정죄를 영
적으로 잘 구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
다. 그래서 마귀의 정죄와는 다른 것
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마음에 찔림
이 있으면 그것도 마귀가 정죄하는 것
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외침을 율법주의적이요,
정죄적인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을 주는 존
재는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귀는 문제를 회피하게 합니다. 죄를
회피하게 합니다. 회개를 회피하게 합
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문제를 직면
(confrontation)하게 하시고 사람의
근본 문제인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영적 지성소인 십자가 앞에 담대히 나
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

게 하십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성도는 당연히 마음에 찔
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더
깊이 참예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
게 “거룩한 슬픔”(godly sorrow)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이 거룩한
슬픔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 앞에 서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서게 하
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참 자유를 얻
게 하려 하십니다.

3월2일: 생살을 찌르시는 주님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요 21:17).

주님의 질문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나를 사랑하느냐.” 당신은 주님이

생명의 속살이 차 있는 가장 예민한
생살을 찌르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
습니까? 사탄도 죄도 인간의 애정도
당신의 자아가 깊이 담겨 있는 생명의
심층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
님의 말씀만이 당신의 생명이 잠겨 있
는 속살을 찔러 상처를 입힐 수 있습
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
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
로되.”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께 헌
신한 자아의 중심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끈질긴 질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습니
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자신을 드러내준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이제 눈가림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는 자신
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열정적인 확
신도, 환희나 흥분에 들뜬 단언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드러내 주는 계시였습니다. “주여, 모
든 것을 아시오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과연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저것을 보시고 확인하십시오!”라
고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극진히 사
랑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했습니
다. 그래서 천지간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더 사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 사실을 주님이 오셔서 질
문으로 자기를 찌르기 전에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
님의 질문은 언제나 나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주님은 얼마나 오래 참으면서 베드
로를 신묘하게 다루셨습니까! 우리 주
님은 적기(適期)가 올 때까지 질문을
보류하십니다. 극히 드물게 일생에 거
의 한 번쯤 주님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우리
를 아프게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어떤 고백보다도 더 깊
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됩니다.

묵상해설: “주님이 생명의 속살이 차
있는 가장 예민한 생살을 찌르신다”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성도를
상하게 하는 것과 예수님이 성도를 상
하게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성도를 상하게 하시는 이유
= 치유와 회복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했
던 베드로에게 세 번째 물어보고 계십
니다. 챔버스는 “마치 생명의 속살이

가득 차 있는 가장 예민한 생살을 찌
르시듯 베드로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왜 주님은 베드로를
이렇게 상하게 하시는 질문을 하셨을
까요? 주님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입
니다. 회복하려면 자신의 상한 부분을
인식해야 하고, 상한 부분을 치유할
자원을 발견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
에 대한 사랑이 베드로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자원이었습니다.

사탄은 성도를 상하게 하는 목적이
‘회복’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을 만드
는 것입니다. 사탄은 상처를 치유하려
는 목적이 전혀 없고, 상처난 부분에
대해 ‘회칠한 무덤’을 만들려고 합니
다. 즉 회칠한 무덤 상태는 궁극적인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과 육체의
선한 행위를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속
이 썩어서 상처가 난 상태임에도 외적
인 의로운 행위로 ‘회’를 칠하게 함으
로써 성도를 더 상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자기 행

위에 의지하여 ‘의로움’을 얻고자 하
며, “더 많은 열심, 더 많은 헌금, 더
많은 봉사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거짓 신념의 가
라지를 뿌려서 성도를 속이려고 합니
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
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원을 가지고 하
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
으시는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
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
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십니다. 마치 조개에 조그마한 상처
자국에서 ‘진주’가 생기는 것처럼, 우
리의 상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
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믿음의 결정체가 생
기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도를 상하게 하는 이유 =
치유와 회복을 회피

마귀와 세상은 성도에 대하여 ‘행
위’를 바꾸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
가 바뀌지 않습니다. 간혹 행위가 바
뀐 것 같지만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옵
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런 성도를 정
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마
음’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있는 마음이 상처 날 때,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영적인 진주를 맺히게
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
니다.

내 힘으로 하는 예배, 기도, 성경공
부와 교회봉사는 근본적으로 치유와
회복을 부르는 능력도 없고, 치유와
회복의 자원도 되지 못합니다. 마귀에
게 속아 회칠한 무덤을 만들 뿐입니
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서 예배와
기도, 성경공부, 교회봉사를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은

접어둔 채, 용서할 마음을 접어둔 채,
여전히 교회생활 하는 것을 통해서 은
혜생활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위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인
정을 얻으라”는 마귀의 속임수에 놀아
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삭개오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
나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은 행위
만을 바꾸려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회칠한 무덤으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경건한 행위를 하
려는 사람은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이
요, 하나님의 영적 생명이 없거나, 소
멸되어 가는 길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영적 생명이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
들을 구석으로 몰아 놓고 피할 수 없
는 질문으로 우리들을 상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
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
럼,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회복

시키시려고 끈질기게 우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상하게 하시
는 과정에서 때론 ‘징계’가 있습니다.
삶 가운데 주님의 징계가 없는 사람은
친자녀가 아니라 ‘사생아’입니다(히
12:7-8).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주님은 그 사람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
십니다. 주님이 성도를 상하게 하시는
징계는 성도에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
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라고 말
합니다. 징계로 말미암아 연단 받아서
열매를 맺을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상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진주 같은 치유와 회복을
주시려는 생명의 역사를 목적 삼으시
기 때문입니다.

3월3일: 피할 수 없는 사명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인간의 시한부 사랑과는 다른 하나님
사랑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사랑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한 번 반짝하고 꺼지는 시한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연합되면 주님의 사랑
이 우리 속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
재하시는 성령에 의해 내 영혼이 하나
님과 연합된다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의 끝은 우리가 예수님처
럼 아버지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어떤 연합을 가
지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을 땅으로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뜻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는 사명
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선입견을 개의치 않는 하나님
사랑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이제
주님의 찌르시는 질문을 받고 자신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계
시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계시는 거기
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고 고
백하고 놀라운 계시에 대해 간증하는
것으로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
다.

예수님의 양들은 변변치 못합니다.
지저분한 양, 우둔한 양, 들이받는 양,
길 잃은 양, 그저 밉살스럽고 못난 양
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
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내 속
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끝없는 하나님
의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의 사랑은 인간 본성이 만든 선입견들
을 개의치 않습니다. 내가 나의 주님
을 사랑한다면 나의 기분이나 성격에
따라 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

는 오직 주님의 양을 먹일 것입니다.
이 사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대체
시키는 일을 경계하십시오. 그런 사역
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대체
시키는 일을 경계하라. 그런 사역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명 완수의 길 = 하나님 사랑의
온전한 이해에 기반

챔버스는 이 구절 “내 양을 먹이
라”(요 21:17)를 “예수님이 이제 베드
로에게 부어 주신 ‘사랑’을 이루라”고
말씀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연합한 사람은 하나님 아버
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

럼, 예수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 ‘사명’입니다. 그 사명의
핵심내용은 “예수님의 양 떼를 먹이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 떼는 나 자신
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순종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예수님의
양들은 처음에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었다고 말합니다. 지저분한 양, 어색
한 양, 들이받는 양, 길 잃은 양, 초
라하고 모자라 보이는 양들이 얼마든
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나서 예
수님의 양 떼를 먹일 때, 그 사랑은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
랑이 예수님의 양 떼를 먹이는 자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동정
심이나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대체시키
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
일까요? 우리의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연민으로 하는 사역들은 하나님의 무
조건적인 사랑과 피 흘리신 사랑을 가
볍게 여기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도 흉
내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사건입니
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죄 없
이 피를 흘려 모든 사람의 죄를 씻으
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또 사람의 어떠한 숭고한 희생도
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선행을 숭고한 희생
으로 여기게 해서 십자가에서의 피 흘
리신 사랑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
다. 사람의 선한 행위를 본받자고 하
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헛되
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명완수 마인드 =’선행’도 ‘죄’일 수
있다!

잔느 귀용은 어느 날, 주님과의 친
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갔을 때, 자기

자신의 선행과 구제가 하나님 앞에서
‘죄’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했다고
간증했습니다. 자기의 보람과 자기 기
쁨을 위해서 선행을 할 때, 결국 사람
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
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
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선행이 ‘죄악’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은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
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
이 하나님께 돌려지지 않고 나에게 돌
아왔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
는 장소에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홈리스를 도와주고자 1불을
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왜 저렇게 어
리석게 살까’라며 그 사람을 마음으로
멸시하고 무시하고 있다면, 겉으로는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행을
은근히 자랑하며 사람의 영광을 취하
는 것이 바로 악한 마음입니다. 선함
을 가장한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성도는 선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할
때에만 선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
으로 보기에 선한 것이 하나님 입장에
서도 다 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람이나 회사나 얼마
나 많이 자기 목적을 실현하려고 눈에
보이는 ‘선’을 행하는지 모릅니다. 그
러나 주님 보시기에도 그런 행위가 선
할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더 이
상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이유
를 말씀하셨는데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이다”라
고 말씀하십니다(창 8:21). 마음은 악
할지라도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해질까
요? 선한 행위가 악한 마음을 덮어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선’만이 중요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나님의 의)은
그리스도의 보혈뿐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선행을 어떻게 평가합
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 64:6)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많은 선행을 할지라
도 자신이 마음과 행위로 지은 죄를
덮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이름
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만 모든 것을 행해야 합니다!

3월4일: 나는 이런 자가 아닌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
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
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갈등 없는 사역의 문제
사명이나 소명 없이 하나님을 섬기

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요
구하시는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당신의 안내자로
삼고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한다는 감
상에 따라 일을 하면 됩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더욱 번창하고 성공할 것입
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도 많아질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면 그런 식으로 평탄한 길
을 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
로부터 사명을 받으면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것이 늘 채찍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상식만으로는 도
저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됩니
다.

하나님께 유용한 사역자
내가 진정 귀히 여기는 것은 무엇

일까?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
해 잡힌 자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 시간, 내 생명이 모두 내게 귀
한 것들이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
명이 부름 받은 사역을 성취하는 데
쓰일 때만 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일을 위해서도 자신의 정력
을 사용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사도행전 20:24에서 바울은 자신을
좀 돌보라는 권유에 거의 짜증을 내듯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
기지 아니하노라”고 답변하고 있습니
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역의 성취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
혀 없었습니다. 실용적인 일은 하나님
께 몰입되는 일을 막는 장애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용적인 일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 기초하기 때문입
니다. 즉 “당신이 이 방면에 얼마나
소질이 있소”, 혹은 “이 일에 당신이
봉사한다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 것이
오” 등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를 안내자로 삼고 우리의 행방(行方)
을 정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가장 유용한지를 자신
의 판단에 따라 정하는 태도입니다.
당신이 유용성을 생각지 마십시오. 당
신이 소유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묵상해설: 왜 비전이나 소명 없이 하
나님을 섬기는 일은 오히려 쉽습니까?

갈등 없는 사역=상식으로 하는 사역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을 섬기는 일은 쉽다”고 말합니다. 왜
냐하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일에 신경
을 쓸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상

식(common sense)을 사역의 안내자
로 삼고,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한다는
감상에 젖어서 일을 해 나가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챔버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부르심의 소명이
없으면 사역에 있어서 오히려 더 여유
롭고 성장하며 번창할 수 있는 탄탄대
로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건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의 부르심과는
다릅니다. 건전한 종교적 신앙생활에
는 주님께 순종할 때 종종 경험하는
내적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일에 대하여 ‘순종’해야 할지
아니면 내 상식대로 사역을 해 나가는
불순종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
므로 내적 갈등이 더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는
즉시 그 사람은 더 이상 상식으로는
사역을 할 수 없는 성령의 사역자가
됩니다. 성령의 사역자는 성령의 능력
을 나타내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성령의 인도대로 하나님의 생
각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
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늘 채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정확한 사역의 지침
입니다. 즉 자기의 생명이 부름 받은
사역의 성취에 쓰여질 때에만 귀하다
는 것입니다(행 20:24). 아무리 실용
적이고, 성공적이고, 거창하다고 할지
라도,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역이 아
니라면 사람에게는 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행해야할
때, 주님께 우리는 생명을 걸어야 합
니다. 그리고 상식을 초월한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
다. 그래서 건전한 종교생활보다 예수
님이 주신 소명을 붙잡고 살아가는 참
된 신앙생활은 더 어려우면서도 값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만이 목적된 삶
인 것을 증거합니다.

갈등하는 사역 =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역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눅14:26). 자기 목숨은 무
엇을 말합니까? 육적인 생명을 말하기
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것들, 즉 돈, 지식, 명예, 인정,
자녀, 목회 성공 같은 것들을 말합니
다. 그러한 자기 목숨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음
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를 치유하고 회
복하시려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
고 물어보실 때, 사도 베드로는 부활
하신 예수님 앞에서 갈등하며 “사랑합
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나의 목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나의
목숨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숨 된
사람은 주님께 “너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

을 따르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 보
라고 말씀하십니다. 망대를 지을 때도
비용을 계산해 보는데, 영생을 얻으려
고 주님을 따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계
산해 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
입니다. 물론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
은 싸구려 공짜 선물이 아닙니다. 그
냥 너무 흔하게 남아돌아서 누구한테
나 막 가져가라고 하는 그런 싸구려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비
용을 계산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
님의 값진 선물인 구원을 보잘것없이
취급하게 되어, 데마처럼 세상으로 나
가는 사람이 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됩니다. 망대를 짓는
공사가 중간에 중단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믿음의 망대를 짓기를 중단하
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망대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역에는 갈등

이 존재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제
어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려고 할
때, 육신을 거스르는 영적 갈등이 있
게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현재 영적인 갈등이 있습니까? 만약
영적 갈등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
까요? 챔버스는 “당신은 이 방면에 대
단한 소질이 있소”, 혹은 “이 일에 당
신이 봉사한다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
것이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잘못된
안내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
니다. 나의 탁월한 재능과 대단한 소
질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당
연히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산제사로서의 순종입니다.

3월5일: 소명의 참뜻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
명을 (기쁨으로)…마치려 함에는(행
20:24).

주님이 정해주신 적소(適所)를 찾으라
기쁨은 내가 완전히 지음을 받고

중생이 완벽하게 성취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내가 선택한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했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경험하신
기쁨도 아버지께서 위임하신 일을 행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받았습
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부름 받은 사
역에 충성하기 위해 우리 생명까지도
그 사역의 성취에 사용할 때만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하라
고 보내신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잘했

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라는 칭찬을 듣게 될 때의 만족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처한 적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적소는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우리의 사역을 받았을 때 가장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
면 우리는 예수님과 반드시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개인적인 구세
주라는 사실 이상으로 깊이 알아야 합
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

주님이 정해 주신 사명에만 충성하라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

을 먹이라”(요 21:17). 여기에는 봉사
의 선택이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충성은 당신이 하나님과 가장 밀착되
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당신이 주 예
수님에게서 사역을 받았다면, 일에 대
한 어떤 필요 때문에 소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
다. 필요는 기회일 뿐입니다.

소명은 당신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명에
대한 충성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위
해 어떤 봉사의 영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지 않는 다른 일에 대해서
는 봉사의 요구를 무시해 버려야 한다
는 뜻입니다.

묵상해설: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
면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여기
에는 봉사의 선택이 없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
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주인 되신 사역 = 나의 일이
없는 사역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이 하라고 하
신 일만을 하면 됩니다. 주님은 자신

의 자녀들이 종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
으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명령만 합니
다. 주인은 종을 돕지도 않고, 같이
일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
셔서, 같이 일하시고, 같이 동행하십
니다.

그런데 왜 기쁨이 고갈되고, 지쳐버
리는 것일까요? 내가 만든 사역을 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만 잘 감당한다면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
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
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
다”(마 25:21). 주님이 명령하신 작은
일이라도 온전히 감당할 때 성도는 주
님의 즐거움, 기쁨에 참예할 수 있습
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적도 없는 일
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주님의 즐
거움에 참예할 자격을 주지 못합니다.
챔버스는 “소명의 참된 뜻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셔서, 주님과 친밀하게
밀착되었을 때 받는 사명에 대한 충성
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지
정해 주시지 않은 일에는 충성스러운
봉사의 의무가 없지만, 주님이 지정해
주신 일에는 어떠한 작은 일이라도 충
성할 때, 주님의 기쁨에 참예하는 특
권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에게 주님의 기쁨을 부어 주십니다.

봉사할수록 마음이 힘들고 몸이 지
치는 이유가 사실은 내가 만든 사역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만든 사역은
점점 내 안에 있는 주님의 기쁨을 빼
앗아 갑니다. 자기만족은 하나님의 기
쁨을 소멸시킵니다. 자기 보람은 하나
님의 평강을 소멸시킵니다. 주님이 주
인 되신 사역의 현장에서 주님의 기쁨
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의 기쁨에 참예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영광뿐만 아니
라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 소명
받은 자의 길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신 사역 = 주님이 보
여 주시는 일을 하는 사역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그(사울)에게
보여 주리라”(행 9:16)라고 말씀했습
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 주님은 바울
이 할 일을 직접 보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
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 주
시는 일들만을 실행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
에 가서 복음전도 사역을 했습니다.
아시아로 가고 싶었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막으시는 것을 이해하고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만 나갔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일과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장소로 나가는 것이 주
님이 주인 되신 사역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신 일만을 행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일만을 하
는 것이 소명받은 자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자꾸 큰일, 위대한
일을 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
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131:1b)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내가
만든 사역으로 달려 가다가 문제가 생
깁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고요하
고 평온하게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바랄 것이라고 고백
했습니다(시 131:2-3). 큰일, 위대한
일, 효과적인 일을 하다가 도리어 하
나님과는 멀어지고, 예수님과는 관계
가 상실된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경
각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
과 환경 속에서도 다윗처럼 우리의 영
혼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잃어버리
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의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큰일, 위대한 일, 놀라운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 다는 다윗의 고백을 묵상
합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
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
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
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131:
1-3).

3월6일: 미미한 일 속에서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
과(고후 6:4).

미미한 일 속에서 예수님 따르기
비전도 없고 봐주는 이도 없을 때

나에게 맡겨진 다음 단계의 일들을 계
속 해나가려면 전능하신 분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일들은 헌신, 공부,
독서, 부엌일 등 여러 가지일 수 있습
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비전도 없고,
삶 가운데서 열정도 사라지고, 봐주거
나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을 때, 당신
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이 일들을 감당해 내려면 하나님의
심대한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적인 노력
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의
일들이 복음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누가 크냐 하는 다툼에서 벗어나 예수
님 따르기

그리스도인은 성육신의 진수가 무엇
인지를 실생활에서 몸소 깨우쳐야 합
니다. 피와 살이 되도록 일을 형상화
시키십시오. 우리는 비전이나 동기부
여가 없으면 맥이 빠져서 다람쥐 쳇바
퀴 돌듯 답보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
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끈기 있게 행하는
사역입니다. 이런 미미한 듯한 일을
하면서 눌리거나 실망하지 않는 비결
은 하나님을 앙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눈이 열려서 부활
하신 주를 항상 바라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
이 당신의 기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하잘것없는 일에서가 아니라 소심
하고 째째한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부
단히 벗어나십시오. 누가 크냐 하는
다툼에서 벗어나십시오. 요한복음 13
장을 숙고해 보십시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
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
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묵상해설: 미미한 일 속에서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기쁨과 평강의 근원 = 미미한 일 속
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

우리는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전도 없고, 자기 열심을 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남들의 관심과 후원도
없을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압니
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챔
버스는 말하기를, 모든 일(성경공부,
가정생활, 하나님의 사역 등)에서 하
나님 자신에게 우리는 의지적으로 더
집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도 복음의 근원이시고, 목적 되

신 하나님 자신에게 우리는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
지적으로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가장 미
천한 일, 가장 미미한 일을 행하신 예
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종’
(slave)의 위치까지 낮아지셔서 제자
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살아계신 하
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종의 신분
으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나
님의 뜻인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씻기셨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면 아무리 미미하고 비천한 일이라도
우리 주님께는 너무나 가치 있는 일입
니다.

작고 미천한 일 속에서 주님을 따
르고 있습니까? 다윗처럼 위대한 일을
하려고 일부러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닙
니까? 당신은 미천하고, 작은 일을 하
고 있기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적
은 없습니까? 챔버스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일은 보이지 않
는 곳에서 조금씩 끈기 있게 행하는
사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
는 곳에서 끈기 있게 주님만을 바라보
며 사역할 때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미미한 일 속에서 주
님을 따르는 단계를 넘어가면 다음 단
계가 나올 것입니다!

기쁨과 평강의 근원 =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

성도가 예수님 자신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챔버스는 “모
든 그리스도인은 성육신을 경험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처
럼, 우리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몸
소 ‘삶’으로 경험하고 증거 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
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
니…”(행 3:6)라고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성
육신 하신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 때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였던 병자가 베드로가 예수
이름으로 명할 때 일어나서 걷게 되었
습니다. 베드로 안에 성육신 하신 예
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형상화되는 것은 미미한 일 속에서 주
님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는 ‘큰일’ 또는
‘작은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
르는 일’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아무
리 큰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일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하나님
의 관점에서 가장 큰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미천
해 보여도, 미미해 보일지라도, 하나
님의 뜻을 따르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입니
다.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기준을 명
확히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미미한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라면 위대한 일입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만 충만하면 우월감
도 사라지고, 열등감도 사라지고, 하
나님의 은혜로만 충만하게 됩니다. 주
님은 미미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순종
하는 성도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런데 충성된
것의 반대는 불충성 또는 불순종일까
요?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
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하십니다.

충성된 것의 반대는 ‘불의’한 것입
니다.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

을 맡겨주어도 불의합니다. 그래서 주
님은 먼저 미미하고, 비천하고, 작은
일을 시켜보십니다. 그리고나서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큰일을 하고 있다면 불의한 상태에 있
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주
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
예할지어다”(마 25:21, 23)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인의 즐거움은 바로 주인
되시고 기쁨과 평강의 근원 되시는 예
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3월7일: 환난은 기쁨을 낳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
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하나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는 위협들
바울은 언뜻 보면 성도와 하나님의

사랑이 따로 구별되어 갈라져 있는 것
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
사이를 단절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동떨어진 삶과 우리 영
혼의 헌신생활 사이에는 수많은 일들
이 일어납니다. 어떤 것들은 한 개인
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기도 합니
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
랑과 성도를 완전히 갈라놓지는 못합
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바탕은 갈
보리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
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로는 죽어도 얻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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