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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6일~3월22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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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idge Fellowship International, 2021-02-28 19:08:08

3월16일~3월22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3월16일~3월22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3월16일~3월22일 묵상과 해설

3월16일: 죄 많은 종교생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고후 5:10).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굳은 죄를
인정하라

바울은 설교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한
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의 밝은 빛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면 심판의 말씀은 당신에게 오히려 복
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
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당신 속에
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항상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거룩한 빛 속에서 행하십시오.
아무리 당신이 성자 같더라도 거룩한
빛에 비추어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두 가지의 그릇된 걸
음이 당신을 실족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 그릇
된 마음씨를 지니고 있으면 끝내 마귀
의 ‘영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순간의 육적인 판단은 당신에게 지
옥을 안겨 줄 것입니다. 즉시 그릇된
것들을 빛 앞으로 끌고 가서 “나의 하
나님, 나는 이 점에 있어 죄가 있습니
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곧 마음이 굳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바리새주의를
세우라

죄의 삯은 죄의 완고성입니다. 하나
님이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실 뿐 아니
라, 죄 자체도 죄인을 잔뜩 움켜쥐고
완고히 마음을 굳게 합니다. 그런 상
태에 이르면 설혹 몸부림을 치며 기도
를 해도 당신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
다. 죄의 삯은 당신으로 하여금 조금
씩 죄를 예사로 여기게 하며, 마침내
그것이 죄라는 것도 모르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의 필
연적인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성

령님의 도래밖에 없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요일 1:7). 빛 가운데 행한다
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세운
나의 수준에 따라서 사는 것으로 생각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최악의
바리새주의는 위선이 아니라 의식도
못 하고 있는, 실체 없는 비현실주의
입니다.

묵상해설: “‘나의 하나님 나는 이 점
에 있어 죄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하
라, 그렇지 않으면 곧 마음이 굳어져
버릴 것이다. 죄의 삯은 죄의 완고성
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죄의 완고성의 출발=종교생활의 열매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뿐만이 아니라
현재적 시점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죄
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없으면 죄는
더욱더 그 사람 안에서 견고해집니다.
그것을 죄의 완고성이라고 말합니다.

챔버스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
도 있지만 죄 자체도 죄인을 움켜쥐고
완고히 마음을 굳히게 한다고 설명합
니다. 결국 나중에는 죄에 대하여 무
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심령들에게 예수님은 그래
서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자이다”
라고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
다.

종교생활은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죄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종교생활만을
반복하고 있다면 완고하고 굳어진
‘죄’ 가운데 여전히 살 수밖에 없습니
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요
일 1:7). 성도가 종교생활에 빠지면
빠질수록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승
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마음이 무뎌지고, ‘죄’에 대해
서 마음이 굳어져 ‘죄’라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 시대에 존재하는 죄악

은 바리새인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태
도의 외식과 위선보다도 ‘죄’가 무엇
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종교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인식되지 못한 거
짓된 삶’이 가장 큰 문제다”라고 말합
니다. 종교생활은 우리 안의 죄를 깨
닫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안의
‘죄’를 무마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
다. 수십 년 교회생활을 했는데도 영
적 성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
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해 왔기 때
문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생활이 아니며, 기독
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종교예식, 종교의식보다 신
앙의 핵심과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
한 관계 가운데 자신의 전 삶을 드리
는 것”입니다.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의
차이를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죄의 완고성의 열매 = 바리새주의

왜 바리새주의라는 어둠에 처하면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어둠을 보지도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책망하
시면서 까지 마음을 돌이키도록 수없
이 권면하셨습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영생의 근원 되
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
자들의 마음에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
님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
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
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합당한 일을 한다고 믿었습니
다. 왜 이렇게 자신들 안에 있는 죄와
어둠을 보지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했
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의 사
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
람들에게 미혹의 힘, 미혹의 역사, 미
혹의 영을 보내서 거짓을 믿게 하신다
고 성경은 말합니다(살후 2:10-12).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 심판이 어디 있
겠습니까?

챔버스는 “죄의 필연적인 결과를 바
꿀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도래밖에 없
다”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와
어둠을 발견하도록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하나님,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분
명히 죄가 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보시면서 자
기 의로움을 위해서 기도, 구제, 금식
하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돈을 사랑
하는 마음 때문에 부모공경도 하지 않
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열심히 전도
를 해서 개종하는 사람은 얻지만 자기
들보다 더 지옥 자식을 만드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습니다. 나는 이

점에 죄가 있습니다.”라고 인정도 고
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
가에서 죽이는 것을 진리라고 믿는 미
혹하는 역사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습
니다.

죄의 완고성은 사람의 마음을 굳어
지게 만듭니다.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자기 스스
로를 속이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그
결정판이 바로 바리새주의입니다. 그
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설교하는
말씀대로는 살아야 하지만, 바리새인
의 누룩은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
입니다. 이 바리새주의는 현재도 존재
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도 여전히 존
재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셨
습니까? 한 번쯤은 반드시 ‘나의 바리
새인 됨을 자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
입니다.

3월17일: 청중보다 스승의 인정을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
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 5:9).

주인의 포부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행해야 하는 사역이
있는데 그것은 주인의 포부를 선두에
놓고 최우선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
니다. 즉 자기 자신을 해마다 높은 이
상에 달아매 놓고, 영혼을 얻거나 교
회를 짓거나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가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서 대망을 품고 사는 일입니다.

실패는 영적 체험의 결핍에서 찾아
오기보다는, 올바른 목적을 향한 우리
의 초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핍
때문에 찾아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훑어
보며 당신의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수
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점검

하십시오. 바울은 마치 훌륭한 음악가
처럼 청중의 박수소리를 경청하기보다
는 자기 스승에게 인정을 받고자 했습
니다.

주인의 인정
어떤 포부이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딤후 2:15)을 받을 수 있는
궤도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난 것은 실
상 버림받을 위험에 놓여 있는 것입니
다. 당신의 포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지를 분별하는 일을 훈련하여 익
히십시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얼굴을 향하고 사는 일이 왜 꼭 필요
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
게”(고전 9:27)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의 포부에 만사를 연결 짓고
끊임없이 그 포부를 지닌 채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나의 공
적 가치는 나의 사적 가치와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대망의
포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이

기꺼이 받으실 만한 것입니까? 아니면
뜻은 한없이 고상하지만 주님이 받으
시기에 부족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주인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묵상해설: “당신의 포부가 어디를 지
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하는 일을 익히
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이 작업이 중요합니까?

청중의 인정을 추구하는 사역 = 사람
의 영광을 구하는 사역

우리는 아주 쉽게 사람의 인정을
받는 방향으로 포부를 가질 수 있습니
다. 왜냐하면 거기에 청중의 박수소리
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광과
증거는 예수님이 그렇게도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마
태복음 6:1 말씀처럼 사람에게 보이려
고, 사람들로부터 ‘의롭다’라는 증거를
받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의
로운 행실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은 아무런 상급이
없습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생각으로부
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
받는 교회, 사람에게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선한 행위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외식’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 모든 절기, 구제, 헌금, 기도, 집회
에 열심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의 본질 곧 하
나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떠난 채, 행하는 수많은 외적
선행들에 대하여 ‘가증스럽다’라고 말
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거짓 선
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외쳤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거짓 선
지자들의 포부는 사람의 영광과 증거
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
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문제가 있고 신앙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처럼 회개하

라고 말하지 않고, 열심히,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 봉사, 헌신, 헌금, 구
제하면 모든 것이 늘 평강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으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도 평강한 사람이 아닙
니다. 황폐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영
광과 증거를 구하는 사역은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좋은 달콤한 메
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를 병들게 합니다.

스승의 인정을 추구하는 사역 = 하나
님의 증거만 구하는 사역

사람들의 증거를 얻기 위하여 “평강
하다 평강하다!”라고 외치면서 ‘죄’에
대하여는 영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거
룩함을 회복하도록 요청하지 않는 설
교와 전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구원받을 자를 온전히 예
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증거만을 구하는 사역은
어리석게 보이거나 꺼려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나아갔습니다. 광
야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서 이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서 이사
야서를 읽고 있던 그에게 이사야서에
서 말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을 증거하고 세례를 줍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
을 전하고 싶어서 아시아로 나아가고
싶었으나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지금의 터어키 지역 쪽으로 복음을 증
거하러 갑니다. 아시아에는 세계 최대
의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와 중국이 있
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
으셔서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만을 늘 구하는 사람
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의 증거를
구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지 못합니다. 비상식적인 사역을 해서
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믿음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

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전적인
인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
으면 사람의 증거와 영광을 따라서 일
하게 됩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람들은
슈바이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슈바이
처의 희생을 칭찬하고 위대하게 높입
니다. 아무리 위대한 희생이라도 주님
보다 더 높임을 받는다면 주님의 영광
을 가리는 일입니다. 모세가 그런 이
유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성
경은 말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높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
역이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영광과 증
거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
니다. 성도의 삶의 최우선 순위는 “그
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임을 늘
깨닫고, 주님만 온전히 영광 돌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나의
공적 가치는 나의 사적 가치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만큼만 우리는 가치가 있
습니다. 챔버스는 한없이 고상한 뜻을
가진 사역이라고 해도 주님이 받으시
기에 부족한 것일 수 있다고 충고합니
다. 그래서 성도는 제일 먼저 내가 행
하는 사역이 오로지 주인 되신 하나님
께 인정받기에 합당한 지를 온전히 알
아야 합니다.

3월18일: 하나님께 우선권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
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내 삶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런즉 이 약속을 가진 우리

가”(7:1 상반절). 내가 하나님의 약속
이 성취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입장에
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
에서 바라보면, 약속을 통해서 “네 삶
에 대한 소유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
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 몸이 성령의 전
이라는 사실을 내가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빛을 담지 않으려는
습관을 지닌 몸을 내가 가지고 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형성되는 것은 거룩에 의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 순종함
으로써 육적인 삶을 영적인 생활로 전

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의 성취를 위해 우리

를 철저하게 훈육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속 모습을 점검하실 때는 혈이
나 육과 의논하지 말고 즉시 자신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날마다 항상 깨끗
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내 삶을 예수님의 삶과 일치시키려는
하나님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될 때까지 육
과 영의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나 자신
을 씻어가야 합니다. 우리 영은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애와 완
전히 일치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지적
으로 반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가고 있습
니까?

주님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한 권리
를 내세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내부를 늘 감찰하면서
자기 마음을 아버지께 맡기며 살았습
니다. 내 영을 주님의 영과 항상 일치

시키는 일은 나의 책임입니다. 주님은
점진적으로 나를 들어 올려 주님이 사
셨던 곳, 즉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합
치되어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
는 경지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이런 수준의
거룩함을 이루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셔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생애에서 더욱더 드러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진지한 교제를 가지십시오.
다른 일은 이차적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우선권을 드리십시오.

묵상해설: “내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형성되는 것은 거룩에 의해서이다”라
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거룩의 목적 =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
순위

하나님은 거룩의 성취를 위해서 우
리를 철저하게 훈련시키십니다. 하나

님은 거룩의 성취를 통해서 성도가 성
령의 전(Temple of God)으로서, 교
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온전히 주인
으로서 형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의
성품이 일치되고, 영과 혼과 육이 예
수님과 궁극적으로 연합함으로써 “하
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최우선권을 드
리는 것이 ‘거룩함’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권리’를 주
장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거룩함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람의 증거가 아
닌 ‘하나님의 증거’만을 구하는 것입
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 사
람들의 증거를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
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라고 예수님께 간곡히 충고합
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가지 않

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
을 둘러엎으면서 그들을 내쫓으셨습니
다. 인간적으로는 몰인정한 모습일 것
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입은 모습은
바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
나님의 증거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이 거룩한 분
으로, 사랑의 주님으로, 온유한 사람
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
수님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종교지
도자들, 약 50세를 넘긴 바리새인들에
게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들, 마귀
의 자식들이라며 심하게 책망하셨습니
다. 그래야만 그들 중에서도 회개하는
자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
데모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돌 같
은 마음을 주님은 망치를 들어 부숴버
리신 것입니다. 그들도 죄인으로 회개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
문입니다. 나이 많은 바리새인들을 책

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들은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과 온유
는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 되는 것입니
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말씀 = 죄를 직면하게 하는
십자가 복음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람들에게 “평강
하다! 평강하다!”라고 외치신 적이 없
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
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얻을 수 있도
록, 사람들이 ‘죄’를 직면하고, 직시하
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
함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만을 최우선으
로 삼고, 사람의 증거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
을 최우선으로 삼게 하지 않기 때문입
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칭찬,

명예, 도덕적 추앙 등)은 하나님의 영
광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직면하게 하
는 십자가 복음의 사역은 사람들로부
터 강력한 저항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셨습
니다. 십자가 복음은 일체의 사람으로
부터 오는 영광(인정과 칭찬)을 용납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죄를 직면하여
십자가 앞에 나오도록 촉구합니다.

죄를 직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
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리,
간음한 여인,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철저하게 직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기도할 때는 하늘을 우
러러보지도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
은 이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
나 죄를 직면하지 않은 바리새인은
“나는 세리와 같지 않은 사람입니

다…!”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
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
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평가하십니
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사
람에게도 인정받겠다고 한다면, 마치
천국과 지옥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
우, 눈에 보이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
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광을 취
할수록 하나님의 인정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어둠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챔버스가 말한 “내 영을 주님의 영과
항상 일치시키는 일”이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내 영을 주님의
영과 일치시키는 자리인 ‘십자가’로
초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유일한 곳, 곧 골고다의
십자가로 나아가면 성도들 역시 거룩
하신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
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3월19일: 시험을 거친 믿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이탈된 성품
구약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

분을 갖는 것이 세상과의 구별됨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는
이 점이 오히려 아브라함에겐 자신의
나라와 친족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
의 구별됨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지
못한 가족들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
는 사람들의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
의 정신적 도덕적 이탈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눅 14:26).

믿음은 어디로 인도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도하는 분
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지적으로 이성적

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
이게’ 하는 분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뿌리는 인격체
를 아는 지식입니다. 여기에 도사린
한 가지 큰 함정은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
라는 신념입니다.

믿음의 테스트를 거친 성품
믿음의 생활에서 오는 마지막 단계

는 성품의 완성입니다. 성품은 각양각
색으로 변합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의 축복이 우리를 둘러싸는 듯하기 때
문에 잠시 동안 변화된 듯하지만, 곧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구태의연한 생활
패턴 속에서 은혜는 꼬리를 감추고 맙
니다. 믿음의 생활은 날개를 달고 솟
아오르는 비약이 아니라, 기진하지 않
고 걸어가는 보행의 생애입니다.

믿음의 삶은 성화에 관한 것이 아
닙니다. 성화보다 무한히 더 깊고 넓
은 폭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생
애는 시험 받고 인정을 받아 굳건히

서 있는 삶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성화의 표본이 아니라 참 하나님 위에
세워진, 시험을 거친 믿음의 생애를
역설하는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롬 4:3).

묵상해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구
별됨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지 못한
가족들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사
람들의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정신
적 도덕적 이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테스트 = 사랑의 확인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에서 “무
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
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적으로는 몰인정한 것일지 모릅니다.
챔버스는 예수님의 이 명령은 주님을
모르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세상 가
치관과 관점에서 정신적으로 이탈하라
는 명령이라고 해석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
은 무엇입니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
의 가문이 이름을 날리고, 나의 민족
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뚝 서는 것입니
다. 이러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도덕적 목표에서 성도
는 이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
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 사랑
으로만 살려는 영적 목표를 새롭게 세
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번
째 명령도 나라, 친척, 아버지의 집에
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어디로 인도되
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분을 알고 사랑함으로 순종하

여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
다. 믿음은 사랑에 대한 테스트입니
다. 사랑은 배타적인 관계입니다.

사랑하면 어디라도 따라 갑니다. 결
혼하는 신랑과 신부는 자신의 배우자
와 더불어 다른 이성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4: 26에서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의 고백을 성도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고백은
믿음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챔
버스는 “믿음의 삶은 테스트를 받고
인정을 받아 굳건히 서 있는 삶이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테스트 = 십자가의 길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성전을 회
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서의 이방인과의 결혼관계를 완전히
정리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도대체 사
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아내와 자식들

을 버리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이방인
의 아내와 자녀는 바벨론이나 자기 민
족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치 시어
머니 나오미를 잘 섬긴 오르바가 자기
민족에게로 돌아가면 새로운 결혼과
삶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
입니다.

바벨론은 모든 경제적, 사회적 기반
이 다 형성된 풍요의 땅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들이 이방사람과의 결혼 생
활을 정리한다는 것은 홀로 ‘광야’에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같이 홀로 광야의
삶으로 나아간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는 버림받는 환경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얻는 십자
가의 길을 걷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모세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
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
로 왕궁의 영광과 쾌락을 버리고 그리
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다고 히브리서
11장은 말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모세
가 왕궁을 버린 것 같지만 실상은 사

람으로부터 버림받기를 선택한 것입니
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습
니다. 그러나 모세는 왕이 될 수 있는
왕궁의 삶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고
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광야에 나갔습
니다. 그는 성격도 어떤 면에서 공격
적이어서 이집트 관리를 살인했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훈
련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요 구
원자로 세워졌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말년에 그를 평가하시기를 “모세로 말
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
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온유한 사람)
이다”(민 12:3)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
다. 왜냐하면 믿음은 “오로지 나의 하
나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합니다.”라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
의 약속만을 신뢰하고 묵묵히 하나님
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을 때에만

성령의 열매도 있고, 영적 성장도 있
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으면서
믿음이 자라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월20일: 하나님과의 교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
겠느냐(창 18:17).

하나님과의 우정의 기쁨
창세기 18:17말씀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끔 느끼는 경우와
비교해서, 하나님과 갖는 진정한 교제
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고 넘쳐서 주님
의 뜻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게 된
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연단의 마지
막 단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면
당신은 자유와 기쁨의 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또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
님의 뜻이 되어, 상식적으로 하는 모
든 결정이 주님의 제재가 없는 한 당
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의 완전하고 즐거운 교제 속에서 자연
스럽게 일들을 결정하면 됩니다. 동시

에 당신이 그릇된 결정을 할 때는 하
나님이 언제나 브레이크를 거시리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의 어려움
아브라함은 왜 기도를 멈추었을까

요? 그는 하나님이 자기 소원을 들어
주실 때까지 담대하게 나아갈 만큼 하
나님과 가깝지 못했습니다. 즉 아브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무엇인
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멈추고 “아이고 모르겠다. 아
마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봐”라고 말할
때마다 아직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밀착되
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
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
서”(요 17:1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최근에 한 기도를 생각해 보십
시오. 당신의 소망과 하나님 중 어디
에 마음을 쏟았습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으려고 기를 썼습니까? 아니면 하나

님께 닿으려고 굳게 결심했습니까?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
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
라”(마 6:8). 그럼에도 청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입
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
해서 계속 기도하십시오.

묵상해설: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
님의 뜻이 되어 상식적으로 하는 모든
결정이 주님의 제재가 없는 한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될 수 있
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교제의 절정 =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만 품는 단계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알
려주신 것을 행하고 말씀하신다고 하
셨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아버
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신다고 하셨습

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
님은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
게 하옵소서”(요 17:11)라고 기도하셨
습니다. 주님과의 교제의 절정은 바로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나
는 하나님의 뜻만 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
다. 십자가로 기꺼이 나아가게 됩니
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기
뻐집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
성령 충만을 받고 나아가서 말씀을 전
하며 병자를 고치고 악한 영을 몰아냅
니다. 이를 보고 시기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붙잡아 옵니다.
매를 때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도록 경
고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너무나 기뻐
합니다. 풀려난 것을 기뻐한 것이 아
니라 비로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할 자격’을 얻게 된 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행 5:41).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의 존재

자체가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
박을 받는 것을 기뻐하라”(마 5:10
-12)고 하신 주님의 뜻을 품게 되었
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며 모욕
당하고 비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여 주님과 연합된 단
계의 사람들이 얻는 기쁨은 환난과 핍
박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
라 환난과 핍박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
입니다. 이런 단계의 성도는 하나님과
의 완전하고 즐거운 교분 속에서 자연
스럽게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일들을
결정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인으로 이방인과
상종할 의지가 없는 사도였지만 고넬
료에게 가기를 순종합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의 방법 = 성령님을 구
하는 기도

예수님은 강청하는 기도(눅 11:1-
13)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기도가 부족해서 응답을 못 받
는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
든 기도에는 늘 응답하신다고 하셨습
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
다. “응답되지 않는 것도 응답이다”라
는 것은 말장난이요, 비성경적인 말입
니다. 물론 하나님은 응답의 때를 하
나님의 뜻 가운데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예 실제로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기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이름으로 기도한
기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숨기지 않고 알려 주신다고 하셨

습니다(창 18:17). 아모스서에서도 하
나님의 종에게 미리 알리지 않으시고
는 일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 3:7).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데도
전혀 응답이 없다면 나의 욕심과 탐욕
으로 한 기도는 아니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으면 우
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뜻에 주파수
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
제하는 기도를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
의 뜻을 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챔
버스는 그의 책 『간구』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어떠한 ‘종교적인 간청’에 전
혀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1:1- 13에서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은 무엇
인가요? 강청하는 기도의 목적은 자기
필요와 비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예수
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충
만히 받기 위하여 강청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을 선물로 주시
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응답이 목적이 아니
라, 하나님의 뜻으로 나의 전 존재를
채우는 것입니다. 온전히 기도할수록
나의 생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각
이 충만하게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
다. 그리고 하나님 생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임하신 증거
입니다. 오늘도 더욱 하나님을 구합시
다. 챔버스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
하기 위해서 계속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처럼 더욱 하나님을 알아갑시
다!

3월21일: 주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
혔나니(갈 2:20).

주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 각

자에게 피할 수 없는 영적 지상과제는
우리 ‘죄의 본성’에 대한 사망증서에
서명을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일체의 감정적 견해와 지적인 신
념을 동원하여 죄의 성벽, 즉 자신이
자기 것이라는 권리 주장에 대하여 기
꺼이 도덕적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
가에 못 박혔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로
결심했다”거나 “내가 주를 따르기로
노력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라고 함으
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과
동일시했습니다.

내가 이 같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

고 그에 따라 행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들
이 내 ‘속에서’ 실현됩니다. 자신을 하
나님께 자유로이 맡기면, 성령님이 내
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이제 내가…사는 것은.” ‘나’라는

한 개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나’라
는 성향을 다스리는 주체는 근본적으
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몸이
남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권리
주장을 하던 사탄의 옛 권리는 파기되
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
는 것은,” 이는 내가 살기를 희구하며
살기 위해 기도하던 삶이 아닙니다.
이 삶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
는, 즉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새 삶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
스도에 대한 바울 자신의 믿음이 아닙
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수여한

믿음,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
음은 더 이상 믿음 자체를 믿는 믿음
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모든 영역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고 있
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묵상해설: 십자가에서 “죄성에 사망
진단을 내리는 것”과 “자기 자신이 나
의 것이라는 권리 주장에 도덕적인 심
판을 내리는 것”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습니까?

새 생명의 시작 = 내 삶의 소유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

‘죄’의 근원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하는 권
리 주장”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더 이
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겠
다!”라고 선포하는 불순종을 했을 때
‘죄성’에 지배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래서 죄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
주장은 동일한 것이고, 죄의 근원적인
내용입니다.

다른 일반적인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십자가에서 나
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라는
것이 마음으로 고백되지 않은 상태라
면, 여전히 자기 삶에 대한 권리 주장
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길 능력
이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이전까지는 내가
내 삶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
니다. 챔버스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
었다라고 함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과 동일시했습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즉 자기 권리 주장에 대
한 도덕적 심판을 내린 사람의 고백이
라는 것입니다. 자기 권리 주장에 도
덕적 심판을 내리고 주님을 따라 행하
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

이 실제 삶에서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알콜 중독에 빠져 ‘술’을 사랑하는 자
기 권리 주장에 대한 도덕적 심판이
내 심령 안에서 이루어지면 술에서 해
방되게 됩니다. 십자가가 실제 삶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삶의
권리 주장을 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
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의지적인 열심
입니다. 베드로도 자기 의지적인 열심
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
지만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베드
로는 자기 삶에 대한 권리 주장이 부
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전히 포
기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님도 젊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
만 늙어서는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대
로 다니게 될 것이라고 베드로의 삶에
대해서 예언해 주셨습니다. 내 인생의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완전히 넘어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 삶의 충만 = 하나님의 아들의 믿
음으로 사는 것

바울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
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
고 고백합니다. 챔버스는 여기서 말하
는 ‘믿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하
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수여한 믿음,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최초 제공자도 예수님이시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시는 분도 예수님
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2:2). 믿음은 내 안에서 생겨나거나
솟구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로지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께
로부터 나와서 성도에게 부어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

지 않는 의지적인 열심과 결단은 안개
와 같이 없어질 것들입니다. 믿음 충
만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믿음의 근원입니
다. 그래서 성도는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의인입니다. 그런데 믿
음을 공급받는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입니다. 성도는 최초 구원
(중생)에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이
라 칭함을 얻는 믿음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이루어 가는 구원(성화)에서도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한 백성이라 인정
을 받는 믿음을 공급받습니다. 예수님
을 떠나서는 믿음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어리석게 보여도, 바보 같아 보
여도 예수님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기에만 생명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생

명입니다. 성경은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얻어집니
다. 예수의 보혈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길임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
습니다. 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까요? 구원받는 믿음은 ‘믿음의 창조
자’이신 예수님이 당신 자신 안에서
생성하신 믿음을 부어 주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
들입니다. 챔버스는 우리가 가질 믿음
은 믿음 자체를 믿는 믿음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마음 안에 창조해 주신 믿음입니다.
노아의 믿음도 노아의 마음 안에 창조
해 주신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소
유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3월22일: 타오르는 마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
냐(눅 24:32).

주님이 일으킨 뜨거운 마음을 지키는
비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비결을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갑자기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불길이
일어나고 놀라운 비전을 소유하게 됩
니다. 그 다음 우리는 모든 것을 통과
하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을 익혀야 합니다. 타오르는 마음
도 지지부진하고 단조로운 일상생활
속에 빠지면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하는 비결을
배운 자만이 이 비전의 불길을 계속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가
꺾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죄 때문이 아니라, 자
아 본성의 원리와 속성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로서 우리가 이성,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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