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월21일~2월29일 묵상과 해설
요한복음 6장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2월21일: 사랑은 몰입하는 것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느니라.
(막 14:6)
하나님께만 몰입하라
만일 사랑이 스스로를 몰입하게 만
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
다. 사랑이 항상 신중하고 현명하며
사리를 따져 나를 몰입하게 하지 않는
다면, 아마 연민이나 따스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그 속에 사랑의 참된 속성
이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에 몰입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의무감이나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주님을 사랑
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자신이 완전히
휩쓸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고 받으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골몰하며 집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저앉아서 원
대하신 하나님의 구속에 대해 부질없
는 꿈만 꾸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골몰해 있다
는 증거는 신령하고 거룩한 일들을 통
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고 여기지 말아
야겠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상적
인 날마다의 사건 속에서 내가 하나님
께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가치 있게 되라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주 예수님의
가슴속에 감동을 일으켜 드린 적이 있
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의 사랑을 달아 보시기 위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몰입된다는
것은 개인의 성결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개인의 성결은 우리
자신의 정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
니다. 그래서 언행과 외모에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을 거슬리지 않게 하려
고 애씁니다.
완전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께 몰입되게 하고 자기 중심적인 관
심사들을 앗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내가 무슨 소용이 될까” 하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용이 없다고
아예 결론 내리는 편이 더 진리에 가
깝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가 소용이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
에게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으면, 하나님
은 우리 속에서 언제나 가치 있는 일
을 하십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이 우리들의 사랑을
달아보시기 위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라고 한 말처럼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
게 여기시는 우리의 마음은 무엇일까
요?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는 증거 =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삶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40년 동안 내어 보내신 목적이 무엇
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알려고 내어 보내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4:21
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
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
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
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 사랑’을 이스
라엘 백성에게서 확인하고자 하신 것
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광야의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달아보시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
애굽할 때 금과 은과 보석을 가지고
나옵니다. 기적적으로 노예생활을 청
산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
다. 홍해를 건너오면서 찬양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어떻
습니까? 광야에서 진실로 하나님을 사
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축복받았을
때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해 드릴
것 같은데 광야의 시간이 되면 본심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예수님께 몰입되어 있었던
한 여인이 자기 전 재산인 향유 옥합
을 깨뜨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향유 옥
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시
각과 사람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달랐
습니다. 사람들은 생산성에 근거한 효
과성, 효율성을 중심으로 그 여인의
행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
인의 사랑의 마음을 중심으로 바라보
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신랑 되신 주님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사랑을 보십니다. 의무감이나 재주를
통해서 사랑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을 향하는 것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일
입니다.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는 증거 = 오직
주님께 가치 있는 삶
성도가 책상머리 앞에 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겠다고 헛된 공상에 빠져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께 가치 있는 자
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몰입되
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받고 싶어 하시는가에
대해서 골몰합니다. 챔버스는 하나님
께 완전히 골몰해 있는 증거는 신령하
고 거룩한 일들을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오
히려 단순하고 평상적인 일상의 사건
속에서 내가 하나님께 몰입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그런 사건이 바로 베다니의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드린 일입니다.
그녀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어떤 계산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베다
니의 마리아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기
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진실
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
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
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
라 하시니라”(막 14:9)라고 그녀의 가
치 있는 행위를 평가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챔버스가 “내가 소용이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가
치 있게 되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소
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몰
입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언제
나 가치 있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나’
자체가 가치 있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어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자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가치 있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는 성도는
예전에 내가 육신적으로 관심 가졌던
것들이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느낍니다. 주님께 몰입하면 몰입할수
록 주님이 가치 있어 하시는 것에 나
자신이 완전히 휩쓸려가는 것을 느끼
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에 더 빠져가기 때문입니다.
2월22일: 영적 끈기의 훈련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
다(시 46:10).
영적 끈기의 정신
영적 끈기는 인내 이상의 것입니
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실현될 것
이라는 절대적인 확신과 인내가 합해
진 것이 끈기입니다. 끈기는 밑으로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그냥 매달려 있
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차원에서는
자기 하나님이 패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꿋꿋하게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최악의 공포
는 자신이 정죄 받을 것이라는 것보다
예수님이 패배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입
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세웠던 사
랑, 정의, 용서, 자비가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
에 덮이게 됩니다. 영적 끈기를 촉구
하는 부르심은 전전긍긍하며 매달려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라
고 하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이 패
배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
을 하고 의식적으로 굳혀 가라는 것입
니다.
영적 소망의 정화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소
망이 지금 좌절되었다면, 그 이유는
소망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실
현되지 않을 희망과 꿈을 꾸는 것처럼
헛된 일은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끈질긴 끈기 있는 인내를 요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
입니다. 영적 불굴의 자세가 흩어 지
지 않게 하십시오. 어두운 밤이 깊으
면 깊을수록 새벽이 옵니다. 새벽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계 3:10).
묵상해설: “우리의 소망이 지금 좌절
되었다면 그것은 소망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망의 정화 과정 = 하나님의 비전만
소망하게 하는 역사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이 많이 듣는
말은 “비전을 가지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비전
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는
가가 아닙니다. 누구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하나님의 음
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
진 것이기 때문에 기필코 성취될 주님
의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주님이 소망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
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
요, 그 자손이 별같이 모래같이 많아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소망은 200만의 자손들
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됨으로 인해
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러한 엄청난
소망을 가질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태
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아들 하
나도 얻지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실수를 범합니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신의 자녀
인 이스마엘을 하갈을 통해서 얻었습
니다. 그것은 아내인 사라의 집요한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한 사라는 육신의 자녀
를 낳은 여종 하갈에게 무시를 당합니
다. 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주신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괴롭힘을 당합니
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속히 이루
겠다는 사람의 소망은 먼 훗날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
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우리 개인의 소망은 좌절되도록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의 소망(약속)을
듣고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챔버스는
“우리들의 소망이 지금 좌절되었다면
그것은 소망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
다. 실현되지 않을 희망과 꿈을 꾸는
것처럼 헛된 일이 없다”라고 말합니
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
질 소망과 꿈만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소망의 성취 과정 =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는 역사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비하신 후에 약속을 성취하실까요?
바로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
는 일이다”라는 고백을 들음으로 영광
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이르러서 약속의 자
녀를 받았습니다. 자녀를 주신다는 하
나님의 음성을 듣긴 했지만 점점 하나
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에는 불가능한
상태 가운데 놓여져 갔습니다. 왜냐하
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자녀를
낳기 힘든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가능한 상
태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놓였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렇게
하실수 있다”라는 영광의 고백을 온전
히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 놓으라”라는 것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도
아닙니다. “내려놓으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약속을 이루려는 하
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으려는 시
도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라”는 것은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는 인간적 욕구를 비
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있
는 단계에까지 나의 신앙이 자랐는가
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으로 인해
서 생긴 일에 대해서 간증할 때, “새
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어
요”, “정기적으로 금식기도를 했어요”,
“열정적으로 전도에 힘썼어요”와 같은
간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듣기 원하시는 간증은 “하나님의 약속
하신 것을 내가 성취할 수 없는 상황
에서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성취하셨습니다!”라고 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 확실하
다면 성도는 불굴의 인내를 가지고 그
날을 고대하며 믿음으로 더욱더 확신
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의 불굴의 인
내는 단지 정신작용으로 된 것이 아니
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생긴 실제적
인 영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은 정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의 계획과 나의 열심이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라
고 고백하는 단계입니까?
2월23일: 바울의 봉사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 20:28).
복음 사역자의 역할
바울의 봉사관은 주님과 동일합니
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를 위
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고후
4:5).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왠지 일반 사람들과는 다
른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소
명’은 남의 신발을 털어주고 닦아주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들
은 영적 지도자이긴 하지만 남보다 높
은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빌
4:12)고 했습니다. 그의 봉사관은 이
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힘이 소진될 때까지 당
신들을 위해 몸을 움직일 것이다. 당
신들은 나를 칭찬도 하고 원망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신을 내어준다
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
시 말하면 바울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
도를 모르는 자가 단 한 명이 있더라
도, 그가 주님을 알 때까지 빚진 자로
서 종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사역 동기
바울의 복음 사역의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인류애(휴머니즘) 때문이라면, 우리는
곧 환멸감에 싸여 마음의 큰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은망덕하
게 나오는 수많은 사람을 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
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면, 감사
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계속 봉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다
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내가 전에
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
나”(딤전 1:13). 바울은 사람이 아무
리 고약하게 자기를 취급하더라도, 자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여 학대
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열
성, 이기심, 기타 온갖 죄들을 보시고
도 어떻게 우리를 섬겨주셨는지를 깨
닫는다면 주를 위해 남을 섬기는 마음
과 자세를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
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묵상해설: “바울의 복음 사역의 동기
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라고 말했는데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
반한 것과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복음 사역의 잘못된 동기 = 휴머니즘
에 입각한 사역
사람의 행위 자체가 옳은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사람은 선악의 원리로 모든 것
을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철학
과 사상도 무엇이 선하냐 무엇이 악하
냐에 대한 판단기준을 가지고 논쟁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 자체
로 선한 것이 없습니다.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역도 그 자체
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거리를 지나
가다 보면 구걸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돈이나마 도움
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온 몸이 멀쩡한 사람 같은데 일은 안
하고 구걸을 하지”라고 멸시하는 마음
이 은근슬쩍 올라옵니다. 행위로는 사
람을 구제하는 휴머니즘적인 선행이지
만 마음으로는 사람을 경멸하는 비휴
머니즘적인 선행입니다.
챔버스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역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의 헌신이 인류
애(휴머니즘) 때문이라면, 우리는 곧
환멸감에 싸여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은망덕하게 나
오는 수많은 사람을 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휴머
니즘이 마치 선 자체가 된 사회분위기
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수
많은 악한 것들이 선한 것을 위장하여
사람에게 접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
니다. 독일의 크리스천들도 히틀러가
그들의 구세주인 것처럼 착각하며 히
틀러를 열광적으로 칭송했습니다. 마
귀는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다
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썩어질 것이요, 새 것이 없
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은 절대적인 진
리를 담지 못하는 그릇들뿐입니다. 오
직 진리 자체이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한 것, 의로운
것 자체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난 것들(하나님의 창조목
적과 구속 목적을 벗어난 것들)을 성
경은 ‘악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대로 한 것으
로 ‘선하다’, ‘의롭다’라고 말합니다.
복음 사역의 온전한 동기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선하게 대했는데도 배은망덕하게 되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
는 사람들입니다.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역을 하면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계속
봉사하면서 섬길 마음이 사라질 것입
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감사를 모르는 사람
들을 위해 계속 봉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섬김은 사람의
반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만
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백 데
나리온 빚진 자가 아니라 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에는 훼방자
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합니
다(딤전 1:13).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섬
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사람들이 아무리 고약하게 자기를 취
급하더라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여 학대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깨달음이 있으십니까? 잘난 사람이 못
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구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
까? 그렇다면 겉으로 아무리 숭고해
보이고, 헌신적으로 보여도 거기에는
하나님께만 돌리는 영광이 없고, 사람
에게 쏟아지는 영광만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봉사할 때만 변함없
이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줌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
시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하
나님의 관심도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떠한 인간
적인 선한 행위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무가치합니다.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
게 할 만큼 아름다운 찬양이라도 인간
적인 감동은 주님의 관점에서는 무가
치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와 주님
관점에서의 참된 봉사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희생이 섬김이 아
닙니다. 어떤 사람보다 나를 우월하게
생각하면서 “저 사람은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니까 참아주겠다”라고
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
를 가장한 마귀가 주는 희생을 가장한
영적 교만이요, 거짓된 섬김입니다.
참 섬김은 긍휼함입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용서의
마음입니다.
2월24일: 희생의 기쁨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재물을 허
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고후 12:15).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한 섬김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에 뿌려 주면, 예수 그리스
도께서 사람들에게 갖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우리는 갖게 됩니다. 예수 그
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
해관계나 기호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
여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테스트입니다.
희생의 기쁨은 내가 자원하여 내
친구(주님)를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
놓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이 다른 사
람들에게 갖는 관심에 자신을 일치시
켰으므로 주님을 위해 남을 섬기는 것
이지,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위해 자
신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사
람들을 섬긴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신
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항상 주님의
영광을 찾았습니다(고전 9:22).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하는 섬김
바울은 남의 발수건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홀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고 동떨어져서 남을 섬
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용한 인간
입니다. 바울은 늘 자신을 부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
습니다.
반면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해 헌신합니다. 따라
서 주님이 우리의 삶을 주님의 뜻대로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몰입되어 있다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구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아무 거
리낌 없이 남의 ‘발수건’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주요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었기 때
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는 우리를 영적으
로 해방시켜 주는 사물들에 헌신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헌신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원하는 바로
라”(롬 9:3). 이는 너무 과장된 표현일
까요? 사랑에 빠진 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의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묵상해설: “우리들은 자신의 이해관계
나 기호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여 섬겨
서는 안 된다.이것은 우리들이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테스트이다”라고 말한 테스트
는 왜 중요합니까?
영적 분별력이 쇠퇴했다는 증거 =
사람을 외모로 판단
주님을 사랑함으로 드리는 봉사와
섬김은 사람의 외모를 중심으로 해서
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해관
계, 나의 기호에 따라서 사람을 섬기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람을 섬
기는 지를 주님은 테스트하십니다. 자
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섬김이 아니
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섬김
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
지 않고, 능력의 예수님의 모습만을
따르려고 할 때, 거기에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점점 사
라져 갑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성
령의 은사를 가지게 된 능력의 공동체
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기 사랑
이 충만해지면서, 참된 섬김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외모
로 판단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증거로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사람을 외모
(교육 정도, 재력, 실력, 명예, 권력
등의 세상적 성취)로 보기 시작한 것
이었습니다. 영적 분별력도 어두워져
서 교회 안에 심각한 죄(아버지의 아
내를 자기 아내로 삼은 일)마저도 온
전히 판단하여 처리하지 못합니다. 사
람을 외모로 보고, 외모로 평가하고,
외모로 대접한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
나도 예수님의 참된 섬김을 따라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인도
를 따르지 않고 자기 유익을 따라갈
때, 거기에는 영적 분별력이 점점 사
라지고 영적 어둠 가운데 처하게 됩니
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 대
해서 더 좋은 관계들을 맺고, 또 자신
에게 유익을 줄 만한 사람도 더 가깝
게 지내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
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사람
중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사람에 대해
서 같이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
다. 많은 경우에, 내 성향이나 생각과
는 맞지 않는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
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런 사
람들이 나에게 주님이 허락하신 사람
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를 물으며 섬김을 행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온전하다는 증거 =
섬김의 복을 아는 성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의 영적 삶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허락
한 축복의 통로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형제자매들
에게 기쁜 마음으로 비용을 쓰고 자신
의 몸까지도 희생하였다고 말합니다.
바로 기꺼이 영적 섬김을 하였다는 것
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섬긴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섬겼다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
도 바울의 섬김은 기쁨을 주는 희생입
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왜 섭섭한 마
음이 들까요? 섬김을 행한다고 하면서
실제 마음으로는 어떤 대가(예: 인정
과 칭찬)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영적 섬김인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흘리신 일이 우리에게 어떤 대
가를 바란 것이었나요? 그렇다면 예수
님 앞에 은혜로 설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섬김으로 인해서 하
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배우게 되며,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사랑을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오로지 형제자매를 섬기는 동기와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
문이어야 합니다. 그 외에 어떤 다른
동기와 목적은 무익합니다. 예를 들어
서 이웃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의 사역
을 해서 경건해지고 거룩한 사람이 되
고 싶다는 것이 동기요 목적이라면 거
기에는 경건과 거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사랑에만 성령의 열매로
경건과 거룩이 열매 맺습니다. 스스로
경건해지고자 하는 희생적인 노력에는
영적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
는 영적 섬김에만 영적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허락하신 사람들은 내가
섬김을 통하여 복을 받는 통로로 주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
은 나를 도우라고 붙여주신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영적 섬김을 행하라고
주신 섬김의 대상이요, 내 인생을 주
님께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축복의 통
로입니다.
2월25일
떡은 떼어지고 포도주는 부어져야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
을 받겠느냐(고후 12:15).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꾼
인간적인 사랑은 대가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
하든 미워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을 완
전히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막연히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 그
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
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고후
8:9).
바울의 봉사관은 자신이 아무리 소
진되더라도 기쁘게 봉사하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예배나 의식적인 면에서만
교회를 돌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
시는 봉사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종
이 됨으로써 주님 자신을 섬기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사회주의자가 가지는 일반 개념을 더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섬김에 조건이 없는 참된 일꾼
주님은 자기 왕국에서 가장 큰 자
는 모든 사람을 다 섬기는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진가는 복음
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보통 인물을 평가할 때 고려
하지 않는 부분들이 하나님의 평가 기
준에서는 가장 중요한 점이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고 계신 지대한 관심에 호응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기꺼이 맡아 행
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의 결과나 대
가를 고려에 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경제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고 하나
님의 일을 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월급과 생활 조건과 기후를 항상 따집
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조건부
로 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데 조
건을 붙인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자기 생활에 그대로 옮긴 자입니다.
즉 단순히 복음만 전하는 목회자나 전
도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서 떡이
떼어지고 포도주가 부어지듯이, 자신
을 헌납한 일꾼이었습니다.
묵상해설: 섬김이 결핍되고 빈곤하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육신적 섬김 = 인간적 사랑에 기초
첫 번째는 인간적인 사랑 때문입니
다. 인간적인 사랑은 대가를 바랍니
다. 최소한 고마움의 표시라도 받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몰래 교회에 들어온 거짓 형
제인 유대주의자들-율법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간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 의
하여 배척받는 상황을 경험합니다(빌
1장). 바울을 시기하여 열심히 전도하
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바울은 복음이
더 증거 된다면 잘된 일이라고 말합니
다. 즉 사도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
히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
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관심은 하
나님의 관심과 동일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다면 자신이 미움을 받든 사랑을 받
든 개의치 않고 자신을 소진하면서 내
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때로
는 사람들이 인물을 보통 평가할 때에
고려에 넣지 않는 부분들이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서는 가장 중요한 점이 된
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적 분별력이 무뎌져 있을
때 사람을 외모로 보게 됩니다. 그렇
게 되면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도 무
뎌져 가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예배
나 의식적인 면에서 교회를 돌보는 것
은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관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봉사관은 우리들
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됨으로써 주님
자신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
합니다. 즉 영혼에 관계된 섬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예수 그
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
의 종이 되는 것이 참된 봉사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배 가운데 예물
을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
이 있으면 그와 먼저 화해하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
나 예물을 드리는 의식적인 면(예식적
인 면)을 돌보는 것보다 한 영혼을 살
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게 하시려고 안식
일에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치
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고 비난을 받
기까지 하셨습니다(요 9장).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영혼을 살리시는 것이었
습니다.
육신적 섬김 = 조건적인 사랑에 기초
두 번째는 하나님을 조건부로 섬
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경
제적인 측면 - 월급, 생활조건, 기후
등을 따지기 때문에 섬김의 제약을 우
리 스스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군사
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
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을 먼저 생기고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챙기려 하는 습
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그 나라
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을 얼마나 어려
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좁은 길
이요, 순교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
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챔
버스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복음만
전하는 목회자나 전도사가 아니라 다
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
도의 품 안에서 떡이 떼어지고 포도주
가 부어지듯이 자신을 내어주는 자”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조건적인 사랑
(Give & Take)에 익숙해져 있습니
다. 한 가지를 받으면 꼭 한 가지를
주어야 하고, 또 한 가지를 주면 한
가지를 받으려 합니다. 조건적인 사랑
의 섬김은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늘 대가
를 요구하는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입
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도 조건부를 달지
않는 사람입니다. 경제적인 것이 준비
되면 주님의 일을 해야지! 선교하러
나가야지! 등등의 조건부를 다는 섬김
은 성도의 섬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주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챔버스
는 “성도의 진가는 복음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데 조
건부를 붙인 적이 없이 떡이 떼어지고
포도주가 부어지듯이 자기 자신을 헌
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
신 대로 자신을 헌납한 바울 같은 성
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
대한 관심에 호응하여 자신을 내어주
는 일을 기꺼이 맡아 행하는 사람입니
다. 즉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됨으
로써 주님 자신을 섬기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와 달리 인간적 사랑에 기초한
섬김과 조건적인 사랑에 기초한 섬김
은 육신적 섬김입니다. 육신적 섬김은
영적 결핍과 빈곤을 가져옵니다. 예수
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는 섬김이
영적 섬김입니다. 이 영적 섬김에 하
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능력이 역사합
니다.
2월26일: 저급한 의구심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요 4:11)
능력의 예수님을 불신하는 어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
좋은 말씀인데 실생활에서 어떻게 그
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이상은 높아서 우리에
게 감명을 주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
어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자기 실력으
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경우 별 수 없
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건한 우월감마
저 갖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 같은 의
구심 어린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당신이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이요? 당신이
어떻게 나를 돌보아 줄 수 있단 말이
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혹
은 자신의 경우는 주님께 너무 힘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의 예수님을 의심하는 어둠
그래서 주님을 의뢰하라(잠 3:5)고
말하는 것은 매우 좋게 들리긴 하지
만, 인간은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도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어서 주실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며 이 권면을 시
시하게 여깁니다. 당신 속에 있는 거
짓된 경건을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말
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이 없고,
다만 자신에 대해서만 믿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
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심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
니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시는 것
을 보면 기분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의심하는 것은 어떻게 예
수님이 그런 일을 해내실 수 있을 것
인가를 따져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결
국 의심은 나 자신의 깊은 열등의식
속에서 솟아납니다. 내가 이런 잘못을
발견하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 대해 의구심이 있
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능력을 나 자
신의 이론과 이해의 범위에서 판단하
여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묵상해설: “우리들은 예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시는 것을 보
면 기분이 상하기까지 한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급한 의구심의 어둠 = 능력의 예수
님을 불신
우리는 보통, 사도 바울, 사도 베드
로, 아브라함, 다윗과 같은 믿음의 선
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 사람
들은 우리와는 다른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사람이다. 우리가 그렇게 특별
히 세운 사람이 되지 않은 이상, 우리
가 그런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다”라
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다 믿음의 사역자요, 성령의 사
역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수많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선배들이 특별히
따로 세움 받지 않았어도 예수님을 따
라가기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던졌
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좋
긴 다 좋지만 실생활에서 어찌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향이 있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은 높아
서 우리에게 감명은 주지만 실제 생활
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
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 하려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의 마음이 ‘선생님은 물을
기를 두레박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과 같습니
다. 실상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심은 자
기 자신에 대한 깊은 열등의식에서 솟
아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연민이
지나쳐서 예수님조차도 자신 같은 케
이스는 치유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자기를 불신하는 사람같지만
실제는 예수님을 더 불신하는 사람입
니다.
거짓된 경건은 예수님을 위하는 것
처럼 말을 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
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영에 눌
려서 간질병 증세를 보이던 이를 데려
왔는데 주님의 제자들은 고치질 못합
니다. 아이의 아빠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
옵소서!”(막 9:22)라고 주님께 요청합
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하십니다. 그
러니까 아이의 아빠가 소리를 지르면
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
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반응합
니다. 우리도 주님에 대한 불신을 멈
추고 솔직하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
백해야 합니다.
저급한 의구심의 어둠 = 부활의 예수
님을 불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
한다며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려고 합
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에 대한
불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을 발견할 때
가 많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님을 보고도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며 주님을 의심하였습니
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후
에는 비로소 고백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만나셨습
니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십니
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은 예
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을 영접한 사람 = 예수님을 인격적으
로 만난 사람 = 살아계신 말씀 하나
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
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서 역
사하시는 창조주이시요, 온 우주만물
을 보존하시는 창조의 근원 되시는 말
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생명’
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과 장소에는 ‘생명’이 생기지 않
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
씀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이 자신의 생명인 그리스도의 보혈을
흘려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신이 존재한다”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을 유신론자라고 부릅니다. 그렇
다면 유신론자가 그리스도인일까요?
모든 종교는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을 이 땅에 자기를 드러내셔서 성도에
게 보이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
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
상이요, 본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빌 2:6).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하나님
을 만난 사람입니다.
2월27일: 누가 주님의 손발을 묶는가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1)
주님이 길어 내시는 생수
우물은 깊었습니다. 과연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
은 우물이었습니다! 인간 본성과 당신
속에 있는 우물의 심연을 생각해 보십
시오. 당신은 예수님을 막아 사역을
못 하시도록 한 적이 없습니까? 당신
마음속에 고통의 심연을 가진 우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예수
님이 오셔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고 말씀하신다고 해 봅
시다.
당신은 “주여, 우물이 깊나이다. 주
님은 이 고통의 우물에서 마음의 안식
을 길어 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로부터
생수를 길어 내십니다. 주님은 인간
본성의 우물 속에서는 아무것도 길어
내시지 않습니다.
주님께 몰입하는 사역자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과
거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고 제한합
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이 일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지 못하겠다!”
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예
수님이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만 합니
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사실
을 잊는 순간 주님의 사역을 능력 있
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약함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몰입하십시오. 우리 가
운데 연약한 교인이 많은 것은 전능하
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나 경험들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몰입되어 있지는 않습니
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리는 예수
님의 손발을 묶고 “주님도 당연히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실거야!”라는 태도
를 취합니다. 그리고는 곤경을 벗어나
려고 몸부림치지만 점점 더 깊은 수렁
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수렁으로
함몰되면서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할 수 없지”라고 말하며 뒤로 한발 물
러서 버리면 안 됩니다.
안 될 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
까? 당신의 무능의 샘이 깊을지라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묵상해설: 주님 사역에 손과 발을 묶
음으로 생기를 떨어뜨리는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손발을 묶는 것 = 자기의
과거 경험을 신뢰하는 것
챔버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과
거의 신앙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이라
고 말합니다. 과거의 신앙경험에 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