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6월1일~6월7일 묵상과 해설
6월1일: 엄청난 질문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
냐(겔 37:3).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저런 죄인이 성도가 될 수 있을까
요? 저렇게 비뚤어진 인생도 바로잡힐
수 있을까요?” 대답은 오직 하나뿐입
니다. “오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저는 모릅니다.” 종교적인 상식으로
적당히 다음과 같이 “아, 예, 성경도
조금 더 읽고 헌신과 기도 시간도 좀
더 가지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
지 알게 되겠지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무엇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우리
는 혼란 가운데 당황스러워 해낸 일을
영감으로 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
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은 적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
람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훨
씬 좋아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정말 믿고 있
습니까? 내가 사람에 대해서 갖는 실
망의 강도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하
셨는가를 깨달은 자각의 크기에 비례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알아서, 누구에게서
도 실망하지 않는 그런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속에서 조금이
라도 영적 사역을 이뤄본 적이 있습니
까? 당황의 정도는 각자의 영적 체험
의 결핍 정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 본성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12절). 하
나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
본성이 어떤지를 보여 주시려면, 먼저
당신 속에 그 사실을 밝혀 주셔야 합
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을 때 당
신의 형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성령
님이 보여 주시면, 당신은 세상에서
당신보다 더 악한 자가 없음을 깨닫고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무덤’은 하나님이 여셨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
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를 떠났을 때 어떤 성품을 갖게 되는
지를 늘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
나님의 영을 만나야 합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이 메마른 뼈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과정은 어떻습니
까?
성령님이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첫 시도 = 나의 무덤을 발견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
다. 챔버스는 “성경을 많이 읽고, 기
도와 헌신을 많이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종교적인 상식으로 한 영혼
의 구원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
합니다. 에스겔 37장은 메마른 뼈들을
살리시어 큰 군대를 만드시는 하나님
의 구원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성령님을 통하여, 한 영혼에게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것처럼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메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렇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님이 먼
저 사람에게 행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요? 바로 사람 자체는 메마른 뼈와 같
다는 것을 인식시키시기 위하여 ‘나의
무덤’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내
가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
시기 위해 나의 무덤을 보게 하십니
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사람
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철저하게
드러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은 아버
지의 은혜와 사랑을 떠나 자기가 생각
하기에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습
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물(돈)을 짊어지고 ‘자
기중심적 삶’을 선택하여 아버지를 떠
나갑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생의 비참함이었습니다. 돼지가 먹
는 쥐엄열매라도 먹고 싶었으나 그것
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는 비참한 환경
에 처하게 됩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돼지만도 못한 궁핍 가운데 죽은 자처
럼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하
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음을 고백
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집의 종
(노예)이라도 돼야겠다고 생각하며 아
버지께로 돌아갑니다. 탕자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던 아버지를 만
나,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죄를 고백한 아들에게 모든 것을 회복
시켜 주십니다. 아버지는 죄를 추궁하
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복시켜 주었습
니다.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님은 하나님 없는
삶이 ‘무덤’과 같음을 제일 먼저 깨닫
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을 성장시키시는
길 =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혹시 성경의 여인, 한나처럼 하나님
께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아들 또는
딸이 당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녀에게 모든
사랑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까? 하나
님을 떠난 육신적, 인간적 사랑은 영
적 무덤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응답으
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자유롭
고 행복하게 해 주는 대상으로 삼게
되면 영적 결핍과 궁핍에 빠져드는 출
발점이 됩니다.
성도는 모든 관계(부모자녀관계, 교
회에서의 성도 간의 관계,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등)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놓
여있지 않으면 영적 풍요가 아닌 영적
결핍과 궁핍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
다. 그래서 열심히 가족, 이웃, 성도들
을 사랑했는데도 자신은 사랑받지 못
하는 것도 예수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나’를 위하여, ‘나’의
뜻대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사랑과 육신적 열심의 결과는 영적 결
핍과 궁핍을 담고 있는 영적 무덤임을
성령님은 드러내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경우, ‘나의 인간적,
육적 사랑’을 드러내시는 성령님의 음
성을 외면하고 상대방(남편, 아내, 자
녀, 교인들, 이웃 등)을 탓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은혜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들이라고 나 이외
의 사람들을 비난,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두세 사람이 나의 이름으
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중심
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워지는
관계만이 온전한 관계로 자라갈 수 있
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거하시는 관계
가 아니면 아무리 많은 정성과 헌신을
다해 상대방을 섬겨도 감사와 은혜 갚
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배은망덕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메마른 뼈와 같은 자신의
심령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한 후에,
무덤에서 몸이 썩어가는 나사로를 부
르셨듯이 우리의 메마른 마음에 생기
를 부으셔서 새롭게 살리시고 성장시
키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십니
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 자녀, 내 배
우자, 내 부모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
까? 이세벨처럼 사람들을 조종하는 자
리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임재가 없으면 모든 것이 메마른 뼈와
같습니다. 주님의 임재로 가족과 이웃
을 사랑해야만 변화와 성장이 따라옵
니다. 메마른 뼈와 같은 인생을 변화
시킬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6월2일: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시 25:12)
하나님 의식에 사로잡힌 순전한 마음
당신은 무엇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
습니까? 아마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모두
가 주로 자신들로 인해 무엇인가에 마
음이 쏠려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대개 자신의
경험에 신경을 씁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신경 써야 한
다고 말합니다.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의식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
람은 하나님의 임재로 온통 정신이 쓰
여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의식 속에는
늘 엄마가 따라다닙니다. 아이가 엄마
를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어려움이 닥치면 속에 있
는 엄마에 대한 의식 때문에 금방 엄
마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
나님 속에 우리를 담고 살아야 합니
다. 만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
안에 형성된 하나님 의식을 늘 앞장세
우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뢰에 사로잡힌 순전한 마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정신이 사로
잡혀 있다면 다른 것이 우리 마음속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염려, 고
난이나 근심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왜 세상 염려의 ‘죄’를
강조하셨는지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면, 어찌 마음을
겹겹이 잠그고 불신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쏠린 마음은 원수의 팔방
공격을 막는 효과적인 바리케이드입니
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시
25:13). 고난, 오해, 중상, 이 모든 것
에서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
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피
난처를 침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묵상해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
이와 같은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순전한 마음 = 주님께로만 향한 마음
마태복음 19장에서 사람들이 주님
께 어린아이들을 데려와서 안수받기를
바랄 때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을 꾸짖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를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
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18장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말씀하신 것은 어
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린아이들이
순결하기 때문일까요? 어린아이처럼
죄가 적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
일까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죄가 조금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
린아이들도 죄가 있는 존재입니다. 예
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말씀
하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기
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는 늘 어린아이들이 따라왔습니다. 챔
버스는 “어린아이가 늘 엄마를 찾듯
이, 성도들도 항상 의식적으로든 무의
식적으로든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넘
어져도 엄마를 찾고, 나쁜 꿈을 꾸어
도 엄마를 찾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
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도, 의식적으
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 신앙을 말씀하신 것입니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는 주님께로만
향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의식으로 충만한 사람
이 됩니다. 하나님 의식으로 충만하면
모든 사물과 환경과 나 자신까지 하나
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팔
복의 내용을 나에게 적용할 때도, 나
스스로는 팔복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팔
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심령
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가난
하고 주님에 대해서만 어린아이처럼
부요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놓고 볼 때에
비로소 애통할 수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도 내가 예수님께 용서받
은 은혜 때문에 남을 긍휼이 여길 마
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팔복의 사람이 될 수 있
습니다.
순전한 마음=주님만을 신뢰하는 마음
어린아이들은 세상을 사는 염려와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빠와 엄
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
나님을 아버지로 온전히 인식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은 ‘염려와 근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가
정의 어린아이라도 염려와 걱정 없이
천진난만하게 아빠와 엄마를 찾습니
다. 왜냐하면 엄마와 아빠를 믿기 때
문입니다. 우리 신앙도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하면 염려와 걱정이 우
리 마음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
님을 온전히 의식하면 염려와 걱정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게 됩니다.
성경은 염려와 근심은 성도의 마음
가운데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고 마
음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씀합
니다. 또 더 근본적으로는 ‘돈 사랑’,
‘자기 사랑’으로 살아갈 때, 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온통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지금 무엇에 쏠
리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쏠리는 것이 내 마음에 심겨지
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곳
이 내 마음이 자라는 곳입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영적
원리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돈 사
랑을 심으면 나이가 먹을수록 돈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
면 나이가 먹을수록 더 이기적인 사람
이 됩니다. 또한 그와 비례해서 염려
와 근심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주님
을 신뢰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열매로 거둘 것입니다. 여호
와 이레의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
는 나의 주님 되심을 경험하기 때문에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원수 마귀는 성도를 어떻게 공격합
니까?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가
라지처럼 성도의 심령 가운데 퍼뜨립
니다. 세상적 염려와 근심이 충만하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열매는 맺지 못
합니다. 염려와 근심의 가라지가 알곡
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마 13장).
염려와 걱정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습니까? 챔버스는 “하나님께 쏠
린 마음은 원수의 팔방공격을 막는 효
과적인 바리케이드다”라고 말했습니
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서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평안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시 25:13
). 평안한 심령에 알곡 같은 주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것이 자라서 열매
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이
신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환경을 묵
상하면 염려와 걱정이 밀려들어옵니
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상황을 묵상하면 염
려와 근심이 밀려옵니다. 원수 마귀에
게 가라지를 뿌릴 기회를 허락하지 말
아야 합니다!
6월3일: 하나님의 인도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시 25:14).
하나님의 숨은 기쁨
우정의 표시는 무엇일까요? 숨겨진
슬픔을 당신에게 말해 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신에게 숨은 기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숨은 슬픔을
털어놓을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
러나 각별한 우정의 최종적 표시는 숨
은 기쁨을 당신에게 털어놓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의 기쁨을
이야기해 주시도록 마음을 열어드린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당신
의 비밀들만 계속 이야기함으로 주님
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여지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 생활의 초기에는 하나님께 요
청만 합니다. 그러나 좀 지나면, 하나
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
도인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소원이 하나님의 영적 비밀임을 알고,
이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하
나님의 크신 축복보다는, 작은 일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인도법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
다.”(12절). 처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의식하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
좀 더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을 너
무 가까이 의식하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게 됩니
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택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별되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택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제동을
거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멈추
어야 합니다. 의심이 있어도 당장 정
지하십시오. 따지면서 “왜 하면 안 되
는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택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즉
올바른 선택을 위해 우리의 상식을 인
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가
르침과 인도에 복종하면, 더 이상 우
리는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
까?”라고 애걸복걸하면서 성령님을 거
스르던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의
기쁨을 이야기해 주시도록 마음을 열
어드린 적이 있습니까?”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숨은 기쁨 = 하나님의 비밀
에 관심을 두는 마음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
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
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다
고 말씀하십니다(눅 8:10).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만 하나님의 비밀을 이
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기
쁨은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알려고 하
는 마음에 부어집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제자들이 예
수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면서 하나님
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전
도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권능 때
문에 악한 영들조차 항복합니다. 예수
님은 제자들의 전도 보고를 받고 성령
으로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천
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
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
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
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나오는 사람입니다. 스스
로 지혜롭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숨기셨
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
로 행하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
라에 관한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
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바로 하
나님이시라는 놀라운 비밀이 제자들에
게 증거 됩니다. 하나님의 숨은 기쁨
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운 비밀
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대 가운데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숨은 기
쁨과 비밀을 알려주시기를 소망하십니
다. 하나님의 기쁨과 비밀을 아는 성
도는 ‘오직 예수’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숨은 기쁨 = 하나님의 인도
에 대한 철저한 순종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하고자 하
는 일을 막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
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우리 지
혜로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
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 성
숙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선교하려고 나아가고자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이를 막으
므로 마케도니아로 발걸음을 옮겼습니
다. 아시아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땅
입니다. 인도가 있고, 인도를 넘으면
중국이라는 땅이 있습니다. 즉 수많은
영혼에게 빨리,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
거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 길을 막으셨습니
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며 기도하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게 하셔
서 사도 바울을 마케도니아로 인도하
십니다. 그 성령의 인도는 결국 ‘유럽
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당시 미개한 민족들
이 많았던 유럽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은 유럽의 전체적인 환경을 바
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
게 영적 비밀이 담겨있는 놀라운 역사
의 자원입니다.
요즘은 많은 교회가 ‘선교’에 총력
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 활동과 선교 헌금을 합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뜻을 떠나 하나님을 위
하여 하는 선교 활동과 선교 헌금은
무가치합니다. 중국은 현재 1억이 넘
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중국이 공
산화되고 나서 수십 년 동안 기독교인
들이 씨가 마른 줄로 생각했지만 중국
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서구의 교회들이 공산
화된 중국에 대하여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성령님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선교
는 절대로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
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100만
불을 줄테니 예수 믿으라고 해도 성령
님이 아니고서는 그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선교지에
교회, 학교, 병원을 많이 세우기만 하
면 많은 영혼을 손쉽게 구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비밀은 하나
님의 뜻에 담겨 있고,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의 믿음과 결합되어 실행될 때
에만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챔
버스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
는 것을 택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제
동을 거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의심이 있어도 당장
정지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성령님
의 제동을 받고도 정지하지 않는 사람
은 “왜 하면 안 됩니까?”라고 하나님
께 따집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성령님
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에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시간
대를 조정하는 사람이 착하고 충성된
성도입니다.
6월4일: 범사에 계신 하나님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범사에 하나님 말씀 듣기
우리는 어느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쪽입니
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쪽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의 말씀을 들은 후에 말하기를 익히고
있습니까?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
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
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 13:5-7).
범사에 하나님 찬양하기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
고.” 가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것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과의 단조
로운 생활의 반복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죄와 이기심, 고집, 탈선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
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기회
를 드렸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
었다면 다시 들어야겠습니다. 힘써 올
라갈 산등성이도 없고, 비전도 받은
것이 없고, 별나게 신통한 것도, 아름
다운 것도 없이 평범한 하루가 오고
가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
나님이 무엇인가 예외적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지금 현재
이 곳에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
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
나님의 약속, 즉 나를 버리시지 않는
다는 말씀으로 부축을 받고 있다면,
가장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평범한 날들과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
님을 찬양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묵상해설: 성도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
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에 대하여
실망합니까?
범사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의 장
애물 = 드라마틱한 변화에 대한 기대
예수님은 성도들을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늘 성도들과 함께하시
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 13:5-7).
그런데 언제 성도들이 실망할까요? 우
리의 삶 가운데 환난과 고통이 있을
때는 오히려 주님을 더 의지하기 때문
에 실망이나 회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일상의 단조로운 생활이 반
복될 때 오히려 실망과 회의가 듭니
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
라는 식의 회의를 품게 됩니다. 예수
님이 늘 같이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단지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을 때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
도가 죄와 이기심, 고통, 영적 탈선에
빠졌을 때만 적극적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
아니고, 늘 성도들과 함께하시는 분이
십니다. 일상의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예수님은 늘 동행하여 주신다는 것입
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단조로운 삶
가운데서 항상 주님과 같이 살기를 바
라지 않고, 어떤 드라마틱한 변화와
변동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상상 속의
그때와 그날’을 기다립니다. 즉 현재
는 단조롭고, 특별한 비전도 없이 지
내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나를 ‘큰일’
에 쓰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상상
속의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서 예수님을 만나고 획기적으로 변화
받은 것처럼, 나의 삶 가운데에도 그
러한 획기적인 변화를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이미 만난 사람은 다메섹에
서의 ‘그날과 그때’를 여전히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날은 절
대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삶 가운데 이미 와 계시기 때문
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과 동행하지 않
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선교사로, 목사로, 전도자로
능력 받아서 나설 날을 기다리는 것은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큰일을 하
려는 욕심을 버리십시오. 내 삶에 임
재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오셨다는 것보다 더 큰 드라마틱
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범사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 =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감동을 따르는
성도
영적 성장과 변화는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먹고
마시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생명
을 먹고 마시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
은 성도에게 이웃과, 가정과, 직장 가
운데서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에 대하
여 생명이신 예수님을 나누어 주도록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꺼이 돈을 사용하게도 하시고, 시간
을 투자하게도 하시고, 중보기도를 하
게도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주시
는 감동을 따라서 일상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행할
때, 평범한 날들 속에서 하나님을 찬
양하게 됩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하
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게 더 큰일도
맡겨집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
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말
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작은 일, 미천한 일,
보잘것없는 일에 충성할 때, 예수님께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
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
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
다.”(마 25:21)라고 인정받을 것입니
다.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만나주시려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일
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처럼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한 그날과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깊은 손길을 전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여
기 계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 삶 가
운데 계십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에
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이 세
상으로부터 감추어 놓은 사람들입니
다. 엘리야가 이세벨과 이세벨의 거짓
선지자들과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7천 명의 순결
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하
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7천 명의
숨겨진 성도들도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이
세벨의 가르침을 허용하고 그 가르침
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고 책망하셨
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가르침을 수
용하지 않은, 즉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
떤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계 2:24). 주변의 수많은 사
람이 범사에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성공을 우상으로 숭배할 때 주님은 범
사에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
는 사람들을 꼭 기억하시고 보물처럼
숨겨두십니다. 범사에 성령의 감동에
따라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사는 성도를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
다.
6월5일: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그러므로 우
리가 담대히 말하되(히 13:5-6).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나의 확신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
신 것 위에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5
절)고 하시니까, 우리는 담대하게 “주
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
니하겠노라”(6절)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염려로 마음이 눌릴 필요가 없습
니다. 그렇다고 내가 두려움의 유혹을
아예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
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
씀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
는 마치 아빠가 원하는 높이에 닿으려
고 힘을 모아 발돋움하는 어린아이처
럼 용기에 차 있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
까?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지 않습니
까! 그럼에도 어떤 일을 놓고 대응치
못한 채 무서운 생각에 말려들고 있습
니다.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다. 나의 현재 상황을 아시고 도
우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
저 듣고 당신의 말을 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먼저 말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 상황에 끼워 맞추려 합니
까?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붙잡으라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붙잡으
십시오. 그 다음 용기를 갖고 “내가
무서워 아니하리라”고 말하십시오. 도
중에 어떤 재난이 일어나거나 일이 잘
못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내
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나
님이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과 우리
사이에는 연약함이 종종 끼어듭니다.
우리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얼마나
약한지를 깨달으면, 난관은 거인같이
확대되고 우리는 메뚜기같이 작게 보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혀 계시지
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으뜸음을 먼저 듣고
찬양하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까? 당신
은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라고 언제
든지 말할 용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기가 꺾여 위축되고 있습니까?
묵상해설: 주님이 성도에게 제시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
까?
두려움에 억눌려 있는 상태 = ‘나’를
‘메뚜기’로 보는 마인드
사람은 난관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난관이 거
인처럼 크게 보이고 난관 앞에 서 있
는 우리는 메뚜기같이 작아 보입니다.
성경에는 자기 정체성을 ‘메뚜기’에
비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열두 정탐꾼들
이 돌아왔는데 소동이 일어납니다. 여
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정탐
꾼들은 가나안 땅에 대하여 악평을 합
니다. 가나안 땅은 거주민을 집어삼킬
땅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 악평합니다. 자기 정
체성에 대하여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
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
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
라”(민 13:33)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가나안 족속에 비하여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고 자기 자신들을 악평합니
다. ‘메뚜기’ 마인드가 온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퍼져가면서 그들은 더욱 두
려움에 억눌립니다. 두려움에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소리를 지르
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려움이
떠나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세와 아
론에 대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모세
와 아론을 원망한 후에는 이집트로 다
시 돌아가자고 소동을 일으킵니다(미
14:1-4). 두려움에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적인
일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사람들
은 난관을 만날 때마다 난관은 거인처
럼 여기고 자기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이들은 두려움에 억
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원망과 후회를 낳게 됩니다.
원망과 후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까지 시작하게 합니다.
성도 자체는 능력 없는 연약한 존
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이 성도를 ‘메뚜기’처럼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작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거인 골리앗을 때
려눕히게 만드십니다. 성도의 위대성
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
신 하나님의 위대성을 보여 주시기 위
해서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리를 치며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할 때 여호수와
갈렙은 똑같은 난관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대
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
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해 보니 정말로 아름다운 땅
이었다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주장합니
다.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합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의 먹이라”(민 14:9)고 말합니다. 가
나안 족속에 대하여 ‘우리의 밥(먹이)’
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
게는 어떤 두려움도 역사하지 못했습
니다.
하나님은 광야 1세대 중에서는 여
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
고 갈렙이 85세가 되었을 때 가나안
에 들어 가게 됩니다. 갈렙은 “이 산
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
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을 기억해내며 말하기를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
)라고 말하며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
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
다. 갈렙이 85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
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
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수 14:11)라
고 자기를 평가합니다. 육신의 힘이
여전히 강건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 말씀 때문에 충분히 난관과 싸워
서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십시오. 그 말씀에 근거하여
당신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메뚜기 마
인드가 당신을 사로잡지 못하게 하십
시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하며 전진하십시
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수많
은 믿음의 선진들도 수많은 실패를 경
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성공과
실패가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
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하
신다는 진리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어떤 경우에든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
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모신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6월6일: 의지와 고집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과의 화합을 가로막는 의지
당신의 의지는 하나님과 일치해 있
을지라도 그러나 당신의 육신 속에 당
신이 마땅히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전
혀 하지 못 하게 만드는 어떤 성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님이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시면, 첫
번째 우리의 양심이 해야 할 일은 의
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지
는 항상 하나님과 일치합니다. 당신은
“내 의지가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는지
나는 모르오.”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당
신의 의지와 양심이 주님과 항상 일치
되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나는 하지
않겠다!’고 당신 속에서 말하는 것은
사실 당신의 의지보다는 오히려 덜 심
각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바로 고집과
완고함인데, 이런 것들은 결코 하나님
과 화합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인간에
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의지
이지 죄가 아닙니다. 의지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에서 제외될 수 없는 필요불
가결의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죄는 올
바른 정도를 벗어나 인간에게 들어온
하나의 기질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부르는 의지
중생한 인간에게 의지의 가능성은
무한정합니다(빌 2:13). 당신은 하나
님이 일으키신 일을 전념하여 조심성
있게 이루어 나가야만 합니다. 당신
자신의 구원을 일으켜 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완성된 구속 위에
불굴의 믿음을 바탕으로 두고 당신의
구원을 살려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
게 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
는 뜻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뜻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연스런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들어맞고, 삶은 호흡처럼 자연스
럽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의지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
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고
집은 밝은 빛 가운데 나오는 것을 거
부하는 아둔한 덮개와 같습니다. 이
덮개를 제거하는 방법은 성령님께 복
종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
나님이 당신 의지의 근원임을 믿습니
까?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대하실 뿐 아니라, 그 뜻
을 행하도록 하시기 위해 당신 속에
거하십니다.
묵상해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의지’이지 ‘죄’가 아
닙니다.”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다움의 증거 = 자유의지로 사랑
의 대상을 선택
챔버스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들어온 하나의 기질입니다. 원래 인간
의 본성이 아닌 기질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 즉 ‘자유의지’는 하나
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완
전하게 부여된 요소입니다. “인간이
실로 인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바
로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인간이 완벽하게 창조되었
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선택권인 자유
의지가 없다면 완벽한 인격체로 창조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의지로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만 부여된
고유한 속성인 ‘의지’입니다. 사람은
이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이 자유의지입니다.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하거
나, 세상을 사랑하기로 선택하게 됩니
다.
주님은 인격적이셔서 억지로 사랑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자유의지
로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
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유의지로 누
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느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반면에 죄 문제
를 자기 스스로, 또는 예수 이외의 다
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의지
가 발동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하
나님처럼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와 같이 성도는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이기에 성도 안에서 하나
님이 활동하십니다(빌 2:13). 그래서
중생한 성도의 의지의 가능성은 무한
하다고 챔버스는 말합니다. 그래서 사
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토픽은 ‘의지’
에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됨의 참된 표현 = 하나님과 일치
된 의지
인간의 불순종의 근본적인 출발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근본적인 이유
는 바로 ‘자기중심적 삶’을 선택한 의
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
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이유는
바로 자기중심적 삶(Self-Centered
Life)을 선택한 의지로 인한 것이었습
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
다”는 의지를 발휘했을 때, 오히려 사
람은 하나님처럼 될 가능성을 잃어버
리게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살려는 의지는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근본원
인이 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신앙생
활을 해 보겠다고 작정하면 그런 신앙
생활의 결론은 ‘바리새인적인 종교생
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가정을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애를 쓰
면 쓸수록, 그 가정은 점점 변화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점점 자
기중심적 삶을 선택하여 떠나갑니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삶은 전염병과 같아서 사
람들에게 ‘자기’만을 주목하게 만들고,
자기만을 가장 소중하게 만드는 영적
바이러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강화시키는 의지인
‘고집’ 즉 ‘강퍅함’이 무너져야 합니
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이 고집과
강퍅함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님의 능력에
복종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
고 광야에 계속 머무는 이유 중의 하
나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완고한
마음으로 인한 고집과 같은 것들입니
다. 챔버스는 “고집은 밝은 빛 가운데
나오는 것을 거부하는 아둔한 덮개이
다. 이 덮개를 제거하는 방법은 성령
님께 복종하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고집과 같은 사람의 의지가 가나안으
로 들어가는 길을 막는 요인입니다.
성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수
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히 3:
15).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고집과
아집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인도가 없는 것이 문
제가 아니라 완고한 마음으로 역사하
는 고집과 같은 사람의 의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6월7일: 삶의 구심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 14:13).
내 삶의 ‘구심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속죄를 위
한 내적 사역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중보에는 함정도, 극단도, 교만의 위
험도 없습니다. 중보하는 일은 숨겨진
사역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는 영적 삶
을 낭비하는지, 아니면 주님의 속죄에
내 삶을 몰두시키고 있는지 자문해 보
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구석구
석까지 밀려와서 나를 더욱더 지배하
고 계시는가?’ 내 삶의 축이 되는 구
심점이 주님의 속죄라면, 내 삶의 각
부분에는 주를 위한 열매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구심력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합
니다. 단 1분이라도 이 구심점에 몰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