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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yesupraise, 2017-08-25 21:28:38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1. Prime number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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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Reaching God through Jesus’ Mathematics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David Kim, Ph.D. (Permanent head Damaged) at Almaty, Kazakhstan
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2. 삼각형
3. 1/0 = infinity, 0/1,000,000 = 0
4. 1000, 100, 10 ?
5. 능력있는 사람 100을 가진 사람. 능력없는 나 50을 가진 나. 하나님은 누구를 쓰실까?
6. Impact varies directly as the velocity and square root of height. (i  kv 7. 무게를 지탱하는 줄의 강도를 신뢰하는가?
8. Prime number, composite number, Neither?
9. + 의 의미는?
h )
10. 3 + X = 4 given, find X.
11.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이 저리로 옮겨질까?
12. 1 = 1 + 1 = 1 + 1 + 1 = 1 + 1 + 1 + 1 = ...?
13. 오병이어의 공식: 5 +2 - 5000 = 12(5 + 2)
14. 삼위일체의 하나님?
15. R____ + A____ = ______y ?
16.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두고 하나님과 협상을 할 때 왜 10인 보다 적은 수는 말하 지 않았을까?
17. 하나님의 연산 법, 우리의 연산 법, 사탄의 연산 법
18. Conversation between i and 
19. 153 = 1 + 2 + 3 +...+ 17
20. 8은 예수님의 숫자
21. 17은 삼위일체의 숫자?
22. 직선이 원을 만든다.(공동체의 원리)
23. 3 이라는 숫자?
24. Polynomial 은 우리의 삶이다.
25. 성실성(integrity)는 무슨 뜻일까?
26. Triple Cube Number
27. 우리의 upper bound 와 lower bound 는?
60 mph ?
28.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의 말을 증명해보자.
29.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30. Chain rule 을 통해 내 마음을 쏟아놓자.
31. 나의 real solution 은 몇 개인가?
32.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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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33. 340200 의 positive factors 는 몇 개인가?
34.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35. Long Division 에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자. 36. All Students Take Calculus?
37.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자
38. 10계명의 1, 2, 3, 4, 5, 6, 7, 8, 9, 10
39. 일대일 이란?
40. 다니엘서 9장 24-27에 나오는 ‘Seventy Sevens’ 의 해석 41. 요한계시록4장4절에 나오는 24는 어떤 수인가?
42. 직선이란 ?
43. 1i의의미?
44. ei 는 무엇일까?
45. 11 은 왜 아름다운 수일까?
46. 666 의 의미는 무엇일까?
47. 144000 은 무엇일까?
49. 48. 에스겔4:4-6 에 나오는 390 과 40 의 의미는 무엇일까? 50. 기드온의 300 용사의 의미는?
51. 가나안 정탐은 무리수?
52. 답안에 가장 좋은 답을 써 넣는 방법은?
53. 정지도 운동이다?
54. 뉴톤의 법칙 안에 내가 있는가? 밖에 내가 있는가?
55. 전기는 (+) 에서 (-)로 흐르는가? (- ) 에서 (+)로 흐르는가? 56. 십일조란?
57. ‘신678’의 삶이란?
58. 10 : 2 의 Ratio
59. tithe 공식: f(x) = 9/10 + x
60. Rome 8:28... summation of vectors
61. 관성의 법칙
62. black hole
63. Refraction 과 Reflection
64. 판별식(Discriminant) 와 근의 공식(Quadratic formula) 65. 7X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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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1. Prime number
Prime number is the number that has factors of 1 and itself.
2, 3, 5, 7, 11, 13, 17, 19, 23, 29,...
2=1X2
3=1X3
5=1X5
7=1X7
11=1X11
...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다. 마치 2, 3, 5, 7, 11,... 과 같이...
그리고 우리 모두를 보배로운 존재라고, prime 이라고 칭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보배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1"이 있어야 한다. "하나"...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우리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2. 삼각형
삼각형에는 항상 Base가 있고 두 개의 Sides가 있다. Base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이고, 두 Sides 가 만나는 Vertex 는 우리가 향해 가는 산의 정상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 쪽 Side 에서 산의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 가고 있었다. 얼마나 생각들과 번민이 많았을까?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아들 이삭을 이제는 바치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죽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아비 아브라함의 심정. 어쩌면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을 때 만나는 여러 가지 고난과 광야보다도 더욱 힘든 길을 아브라함은 걷고 있다.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산 정상을 향해서...
그리고는 산의 정상에 가서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보게 되고, 죽여야만 했던 이삭을 털 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다시 얻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우리들에게 고난과 광야의 길을 걷게 하고 팔장끼고 가만히 계셨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삼각형의, 우리가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의 다른 편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여호와 이레"를 예비하시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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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만나는 순간은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광야를 통과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있어야 할 그 곳, 산의 정상에 가서야 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삼각형의 다른 Side 에서 우리를 위해 신실하게 예비하시고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바라보자. 신뢰하자.
3. 1/0 = infinity, 0/1,000,000 = 0 분수... 수학에서도 분수가 있는데...
그 분수를 잘 알면 하나님 안에서 자랑이 뭔지를 알게 된다.
수학에서 분수는 위를 Numerator 라고 하고 아래를 Denominator 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위로 올려놓고 나를 내리는 것은 기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리 Numerator 는 모두를 서로 다르게 다양하게 그리고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인 Prime number 를 만드신, 각각의 수를 창조하신... Number Creator 인 Numerator 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나' 를 지명하여(Denomination) 부르신 Denominator 가 나의 자리이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Denominator 인 내가 0 이 된다는 것은...
1/0 = 무한대(infinity)
하나님이 나의 삶의 우선 순위에... Numerator 에 있고, 나를 비우고 내려 놓으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한대의 축복이 된다는 말이 바로 분수를 아는 것이 아닐까...
근데 내가 하나님보다 크고, 하나님이 내 안에 없으면...
0/1,000 = 0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축복... 복음의 축복... 영생의 축복은 0 이다.
4. 1000, 100, 10 ?
하나님은 왜 성경에서 축복을 1000 배, 100 배, 10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실까? 10 배, 100 배, 1000 배가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무조건 10 배보다는 1000 배의 축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5. 능력있는 사람 100을 가진 사람. 능력없는 나 50을 가진 나. 하나님은 누구를 쓰실까? 능력있는 사람이 100 중 자신을 위해 90을 쓰고 나머지 10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나는 내가 가진 50 을 전부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자.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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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6. Impact varies directly as the velocity and square root of height. (i  kv h ) 높이가 높을 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은 크고 더 아프다. 근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높아지려고만 하는 것일까? 높은 데서 떨어지면 더 아픈데...
7.무게를 지탱하는 줄의 강도를 신뢰하는가?
멋지게 차려 놓고 가려 놓은 엘리베이터의 줄을 본 적이 있는가? 번지점프 하는 줄은 멋지지는 않고 보이게 해 놓았어도 차라리 번지점프 줄을 믿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근데 왜 우리는 엘리베이터는 신뢰를 하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타고, 보다 안전한 번지점프 줄은 두려움에 부딪히는 걸까? 차라리 짜릿함으로 말하자면 번지점프가 재미있지 않을까?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우리를 잡고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번지점프 타듯 짜릿함을 즐기는 것이 어떠한가? "고난은 번지점프 이다."
8. Prime number, composite number, Neither? 하나님의 백성: prime number
항상 하나(1) 와 자기 자신(3)이다.
세상 사람들: composite number
하나님(1)도 있고 자신도 있고(12) 다른 것들도 있다(2,3,4,6).
Neither?
0.
무엇일까?
가운데 이것이 무엇이죠? 하며 묻는데, 하나님께서는 줄을 그어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theo, 하나님이시다.
9. + 의 의미는?
부족한 내 삶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더하는 것. 부족한 나는 -1
하나님은 1(하나)
하나님과 함께(-1+1) 할지라도 내가 주인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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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0 1
하나님이 주인 되면
1 1무한대가된다.
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11 0
또한 더하기(+,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만남이다. One-to-one function 이 되려면
vertical line test 와 horizontal line test 를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는 이런 시험과 고난을 통과하게 해주어 하나님과 나를 일대일로 만나게 하는 도구이고, 더하기이고, 툴이다.
10. 3 + X = 4 given, find X.
3 Nails + Jesus Christ = 4 Given
3 개의 못과 십자가(예수 그리스도)를 더하면 용서(Forgiven)가 된다. X = 1 (하나님)
11.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이 저리로 옮겨질까?
E  mC 2
Energy = mass * Speed of the light squared
내가 아무리 겨자씨 같더라도 그리스도만 있으면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자. m: 겨자씨 무게 0.00155 kg
C: 300 million meter per second
E  mC 2
E  0.00155300,000,0002
= 139,500,000,000,000 Joules = 139,500 billion Joules (1 Joule = textbook 을 바닥에 떨어뜨릴 때의 에너지)
1 Gallon of Gasoline = 1 billion Joules
⇒ 139,500 Gallons of Gasol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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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E= Eternity, Enthusiasm, 영성
m= me
C= Christ
내가 아무리 겨자씨라도 그리스도만 있으면 된다.
12. 1 = 1 + 1 = 1 + 1 + 1 = 1 + 1 + 1 + 1 = ...?
성경 전체의 핵심: 수 개념으로 아담, 사람의 정체성을 규명할 수 없다.
사람의 존재 양태는 하나님이 커뮤니티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도 커뮤니티로 존재함 -) 존재론 신약에 예수님이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원리가 창조원리이다. 왜? 아담 안에서 하와를 꺼냈기에. 사람하나와 사람하나. 인과 인 사이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의 ‘간’자가 ‘사이 간’이다.
창세기 2 장 18-24 절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18절에서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셨으면 21절 앞으로 와야 하는데 19-20절이 왔다. 이름을 지어주는 중이며, 아담의 문화사역이다.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2 절: 이끌어 오시니
아까는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기에 이름 짓는 일을 기억하고 23 절에서 마저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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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지어준다. 이름을 지어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권위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대상을 정복했다는 것(본질을 규명)이고, 뭔지 안다는 것이다. 바로, 아담은 여자에 대해 다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이다.
하나님은 왜 여자를 남자에게 복종하게 만드셨을까?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굉장히 위대한 아담의 인간론이다.
"당신은 나 입니다"
아담에게서 아담과 하와가 생겨났다는 것은,
1 = 1 + 1 = 1 + 1 + 1 (애기)
1 = 2 = 3 = ... = 인류공동체
아담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이 보시는 창조의 완성은 인류공동체이다. 이 인류 공동체의 성경적 용어는 ‘하나님의 나라’ 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여럿인 하나, 공동체이다. 인간이 세포의 유기적 공동체 이듯이, 교회 공동체에서는 머리는 예수님, 몸은 그의 교회이다.
딱 보면 꽃 한 송이 이지만 여러 유기체가 합해졌다. 때로는 차별이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은 멋지게 연주하는데 심벌즈는 가끔 치기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받는 수익금을 생각하면, 바이올린은 일원이원삼원사원... 이렇게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서 수고비를 받는 반면, 심벌즈는 가끔 치면서 한번에 십만 원 하며 받는 것이다.
하나이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인류공동체를 보고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다.
13. 오병이어의 공식: 5 +2 - 5000 = 12(5 + 2)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은 기적이다.
이것을 계산해 보면,
5 +2 - 5000 = 12(5 + 2)
그러나 열 두 광주리의 남은 오병이어는 또 다른 기적을 낳는다. 그것이 계속 되면,
5 + 2 = 5000 + 12(5 + 2) = 5000 + 12[5000 + 12(5 + 2)]
= 예루살렘 = 온 유대 = 사마리아 = 땅 끝
날마다 일용할 양식은 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 홀로 먹는 세끼 양식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를, 주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모든 필요한 양식이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다. 세상의 법칙대로 주면 없어지는 그러한 세상의 계산법이 아니라 5 + 2 - 5000 = - 4993 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산법인 5 +2 - 5000 = 12(5 + 2) + X 인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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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시는 계산법이고, 심을 것을 더욱 풍성하게 주시고 나의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계산법이다.
그리고 각자에게 임한 오병이어는 다시 새로운 오병이어를 낳으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선교이다.
14. 삼위일체의 하나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예를 들어, 짝수 뿐이거나 홀수 뿐인 주사위는 주사위가 아니다. 1 부터 6 이 함께하여 하나의 주사위를 이루고 상황에 따라 1 부터 6 중 하나가 나타나게 된다.
이해가 좀 되면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3개의 Segment이 있다. 이 Segment들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서로 다른 Segment 들을 떼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어 하나로 된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된다. 때론 하나님이라는 Segment 이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예수님의 Segment 가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와 동행하며 도우시는 성령의 Segment 를 체험하게 된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본래부터 다른 세 하나님인데 그 하시는 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하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이다. 단일복수의 공동체 모습이다. 완벽한 연합과 화합이다.
15. R____ + A____ = ______y ?
밖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면, 마음쿠션의 비밀을 풀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비좁은 내면을 더욱 확장시키는 도구로 쿠션을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은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마음쿠션에 대한 비밀은 반응을 선택하는 능력에 있다. 즉, Response + Ability = Responsibility 이다.
곧 마음쿠션의 비밀은 인간이 절망을 선택하느냐, 희망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고, 그 자유의지가 마음의 쿠션을 만든다는 말이다.
인생의 성공은 물질의 부나 명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말해준다. 보이는 가치 곧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쿠션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음의 쿠션이 어떤 상태인지를 어떻게 점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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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우물의 깊이를 돌멩이 하나로 알 수 있듯이,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비난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면 마음의 쿠션을 키울 필요가 있다.
마음의 쿠션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
마음의 쿠션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반응을 선택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반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선택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선택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고, 긍정적인 생각을 선택하면 평안과 감사가 피어 오른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불순물 제거이다. 설거지를 할 때 손에 아무런 상처가 없으면 설거지 하는 일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손에 조그만 상처만 있어도 설거지 할 때 약간의 고춧가루 같은 불순물은 상처를 자극해 고통으로 다가온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 남아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하면 쿠션은 더욱 탄력 있게 된다.
자신만의 특별한 의식을 개발해 내면을 고양하는 것도 쿠션을 키우기 위한 결심 중의 하나이다. 경건의 시간 곧 'QT'가 그것이고, 풍부한 독서와 묵상으로 영혼을 살찌우기, 날마다 겸손의 우물을 깊게 파기, 호흡을 느낄 때마다 마음의 쿠션을 생각하기, 부정적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다.
온유한 사람이 되라. 온유한 사람은 자신보다 크고 위대한 존재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그 분의 뜻을 잠잠히 따르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땅으로 비유하실 때 비옥한 땅을 가진 사람이 온유한 자이다. 말씀이 씨앗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받아들여 열매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 맺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 안에 조각배 한 척을 띄우라. 강에 돌을 던지면 돌은 강바닥에 가라 앉아 상처로 남고 쓴 뿌리가 된다. 어떤 돌도 물 위에 뜰 수 없다. 하지만 배는 수십 킬로그램의 돌을 싣고도 물 위에 뜬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조각배 한 척을 띄우면 어느 정도는 고통의 무게에 흔들리지 않고 상처나 쓴 뿌리로 남지 않고 기쁨으로 강이나 호수를 가로지를 수 있다. 누군가가 마음에 돌을 던지는가? 항상 조각배를 마음에 띄워두고 날라오는 돌에 대해 즉각 반응하지 말고 일단 그 돌을 조각배 위에 놓으라. 그리고는 배를 조용한 곳에 닿게 하여 돌을 내어 던지라. 그러면 그 배는 이웃을 감싸 안고, 실어 나르며 심지어 자신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마음의 쿠션을 키우면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마음의 쿠션을 키워 나가자. 반응을 선택하는 능력을 키워나가 우리가 속해있는 가족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일터 안에서, 학교 안에서 횃불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여 훗날 우리도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자. 즉시 달라지기가 어렵겠지만, 변한 만큼 사람들은 우리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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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16.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두고 하나님과 협상을 할 때 왜 10 인 보다 적은 수는 말하지 않았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협상을 하면서 계속 숫자를 50인부터 출발하여 계속 45 40 30 20 10 으로 줄여나간다. 왜 더 적은 숫자를 요구하지는 않았을까?
아브라함은 Sequence 에 해박한 사람이다. 처음에 50 인부터 시작해서 다섯 씩 줄이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알고 용기를 얻어 40 인부터는 10 씩 줄여 나간다. 그래서 도달한 숫자가 10 인 이다. 그런데 Sequence 에 해박한 아브라함은 거기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10 인에서 다시 10 인을 줄이면 Zero 가 되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계속 5인 씩 줄여나갔으면 의인 5인까지 허락을 받았을 텐데... 50, 45, 40, 35, 30, 25, 20, 15, 10, 5 !!!
여기서 중요한 수학은,
평균(average)은...
지금 더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자.
평균(average)은 50527.5 이다. 2
Median 은...
지금 가운데 숫자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자. Median 은 이 경우 평균값과 같다. 즉, Median = 27.5 이다. Evenly spaced numbers 다시 말하면 Arithmetic sequence 인 경우에만 이것이 성립함을 기억하길...
17. 하나님의 연산 법, 우리의 연산 법, 사탄의 연산 법 하나님의 연산 법: Multiply, exponent, Log
우리의 연산 법: Add, Plus
사탄의 연산 법: Minus, Divide
잠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18. Conversation between i and  i: imaginary number
 : irrational number
Page 12
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i: Hey, be rational!  : Hey, be real!
Do we always blame others without looking our flaws?
19. 153 = 1 + 2 + 3 +...+ 17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끌어올리는 고기가 153 마리이다. 모나미 153 볼펜에서 모나미(MonAmi)는 불어로 Mon(몽 : 나의) + Ami(아미 : 친구) = 나의 친구라는 뜻이며 153 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서 베드로가 물고기 153 마리를 잡았다는 데서 유래하기도 한다. 왜 153 마리일까를 묵상하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깨닫게 하신다.
153 은 어쩌면 베드로가 그 밤에 밤새도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그물던진 숫자 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153 을 통해 나에게 주시는 마음은
153 은 1 + 2 + 3 +...+ 17 이다.
나 하나(1)에 계속 1 을(하나님을) 더해 나가면서 17 을 이루어가는 것임을 보게 하신다. 그럼 17 은 무엇일까?
17 = 10 + 7 이다.
10 은 하나님이 주신 10 계명이고,
7 은 성령의 7가지 은사이다. (로마서12장8절: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153 = 1 + 2 + 3 +...+ 17
그리고 +(더함)은 십자가이고 예수 그리스도이다.
153 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삶에 지키며 성령의 은사를 삶에 풍성하게 더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날마다의 삶임을 깨닫게 하신다. 결국 153 마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 153 의 풍성한 삶,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1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하나)는 하나님이기도 하며, 밤이 새도록 세상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한번 그물을 던지는 것이고, 나 자신을 한번에 던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한번의 그물 던짐을 원하시고 기다리고 계심을 알게 하신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멧돌같이 내가 늘 가지고 있는 그물을 말씀에 의지해 한번 던짐을 기다리신다. 그 다음부터는 도미노이다.
내가 1 로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10), 성령님이(7) 일하심을 깨닫게 하신다.
"한번 던져보자. 내 삶을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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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8 은 예수님의 숫자
유진 피터슨이 쓴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부활의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과 숫자 8 을 연관시킨다. 주님께서 사역하신 것을 주 중의 6일과 비교하면 무덤에 갇혀 계신 것은 안식일인 7일째이고, 그러므로 부활은
8 일째 일어날 창조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수비학으로 풀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수비학(Numerology)이란 히브리나 헬라어 문자들을 숫자들로 대응시켰을 때 얻게 되는 수에서 성경메시지의 의미를 찾아 보자는 것이다. 수비학에서 문자와 숫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시킨다.
첫 번째 헬라문자인 알파(혹은 첫 번째 히브리어 문자인 알렙)는 숫자 1 에 대응시키고,
두 번째 헬라문자인 베타(혹은 두 번째 히브리어 문자인 베트)는 숫자 2 에 대응시키고,
세 번째 헬라문자인 감마(혹은 세 번째 히브리어 문자인 김멜)는 숫자 3 에 대응시키고, 이하 등등...
이렇게 해보면 주님과 관계되는 단어에는 항상 숫자 8이 인수로 나온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 '예수'를 헬라어로 읽으면 '예수스'인데, 이것에 해당하는 숫자는 위와 같이 하면 888 이 된다. 즉, 예수(아이오타 에타 시그마오미클론 업실론 시그마) = 10 + 8 + 200 + 70 + 400 + 200 = 888. 이런 방법으로 하여 주님과 관계되는 여러 단어들의 해당 숫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 8 X 185
구세주 = 8 X 256
메시아 = 8 X 82
아들 = 8 X 85
주 = 8 X 100
특히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 21 장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153 마리를 잡았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물고기들'이란 단어를 수비학으로 분석하면 8 X 153 이 되어서 주님의 숫자 8 과 물고기의 숫자 153 이 나온다!
그리고 물론 물고기는 그리스도의 상징인데,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에 "나의 구세주"라는 고백의 첫 글자들을 모으면 헬라어로 '익쒸스', 즉, '물고기'란 단어가 되기 때문이다.(익쒸스: I 예수 X 그리스도 theta 하나님 V 아들 sigma 구세주)
그러므로 제자들이 153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들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요한복음에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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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53 마리의 물고기 사건 이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당부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수비학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주님의 사역에서 부활은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부활을 나타내는 숫자 8 이 주님을 나타내는 단어들에 공히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21. 17 은 삼위일체의 숫자?
17 은 무엇일까?
17 = 10 + 7 이다.
10 은 하나님이 주신 10 계명이고,
7 은 성령의 7가지 은사이다. (로마서12장8절: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그리고 +(더함)은 십자가이고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17 = 10(하나님) +(예수님) 7(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17 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삶에 지키며 성령의 은사를 삶에 풍성하게 더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날마다의 삶임을 깨닫게 하신다
22. 직선이 원을 만든다.(공동체의 원리)
이는 축구공의 원리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원리이기도 하다.
축구공은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만들진 것인데 20 개의 육각형과 12 개의 오각형들이 서로 만나 부드러운 곡면을 형성한다.
이는 미국의 건축학자 리차드 벅미니스터 풀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실은 수 천년 전의 지혜에서 착안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이 좋다고 말하지만 면 하나로 유연하면서 완벽한 구는 형성되기 힘들다.
그러나 모가 난 정다면체, 오각형이나 육각형이 서로 어울리면 비로소 모가 나지 않고 균형 잡힌 구가 완성되는 것이다.
위의 논리에 비추어 공동체라는 구의 한 면을 형성하는 한 사람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아 상식에서 벗어나는 듯한 모가 난 생각이나 행동들도 각도를 달리해 바라보는 열린 시각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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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공동체나 이웃이나 교회나 사회, 나아가 국가적 균형에서도 물론이지만 한 개인의 삶을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모난 생각들이 점차 다듬어져 균형 잡힌 정다면체를 유지하게 된다면 때를 만나 또 다른 균형들과 어울리게 될 것이다.
오로지 둥근 것만을 강요하는 것은 가축의 염통 같은 속되고 통속적인 사회의 잣대를 겨냥하는 것임을...
푸른 잔디를 누비는 축구공이 되어 스트라이커의 멋진 플레이로 골 문을 향해 슛~ 골인~ 할 때까지.....!
23. 3 이라는 숫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다.
이 3 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한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전면적인 부인이라는 마음이 든다. 어둠이고 밤이다.
그래서 닭 울기 전이다. 닭이 울고 나면 어둠이 걷히듯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닭 울기 전"에서 느끼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성령님을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긍정을 원하시는 질문이시다. 예수님은 육지에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을 구우시고 베드로에게 "조반을 먹으라" 하신다. 예수님을 닭 울기 전 불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해야 했던 베드로에게 남아 있을 죄와 상처를 똑같은 셋팅으로 숯불을 피워놓고 세 번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마지못해 부인해야 했던 내면의 죄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신다. 그리고 사명을 "내 양을 치라"며 다시 주시는 신실한 예수님이시다.
24. Polynomial 은 우리의 삶이다.
Polynomial 에서 Poly 는 '많은' 이라는 뜻이고 nomial 은 'term' 이라는 뜻이다.
삶에서의 많은 우여곡절은 바로 Polynomial 의 꼭대기와 골짜기와 같다. 내가 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데 금방 교만으로 인해 내리막길로 가기도 하고, 희망이 없는 좌절과 실패의 골짜기 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은혜를 먹으며 순종으로 가다 보면 어느덧 오르막에 와 있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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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치 Polynomial 의 그래프에 rule 이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rule 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Polynomial 의 룰은 'End Behavior' 라는 rule 으로, leading coefficient(맨 처음 나타나는 숫자) 가 (+) 이면 오른쪽 상단에서 그래프는 시작되고, leading coefficient 가 (-) 이면 오른쪽 하단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rule 도 그러함을 발견한다.
leading coefficient 는 맨 처음 나타나는 숫자이고, 우리의 우선순위이고, 그 우선 순위가 (+) 이면, 즉 우선 순위가 십자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면 그래프의 중간이 어떻든지 마지막인 오른 쪽 끝은 꼭대기 이다. 아니 꼭대기보다 더 올라감이다. 그저 꼭대기는 다른 숫자들이 아니라, 나의 노력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 leading coefficient 의 (+) 에 의해 결정된다. leading coefficient 가 (-) 라는 의미는 (+)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 순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의 것이, 즉 사단이 나의 우선순위가 되어 버린 삶을 의미한다. 그 경우 중간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든 삶의 마지막은, 그래프의 오른 쪽 끝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끝은 골짜기보다 더 내려감이다. 아무리 다른 숫자들이 좋아도, 우선 순위가 (-) 라면,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삶의 끝은 골짜기보다 더 내려가는 산의 뿌리와도 같은 삶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은 다 각각 다른 coefficients 를 가지고 있는 Polynomial 이다.
"당신의 삶은 어떤 Polynomial 입니까?"
25. 성실성(integrity)는 무슨 뜻일까?
사전에는 "integrity [intéɡrəti] 고결, 완전" 이렇게 나온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 말은 integrate, integration 에서 온 말이다.
수학에서는 derivative 와 integration 은 항상 함께 나오는 개념이다. 그래서 integration 을 anti-derivative 라고도 한다.
그럼 우선 'derivative'란 말을 살펴보면, "derive [diráiv] 1 끌어내다, 비롯되다 2 유래하다" 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 각자를 다 다른 다양한 Polynomial 로 만들었는데,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고 창조되었는데 그만 우리의 죄로 인해 다른 모양의 삶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의 삶은
8x7 2x6 4x5 7x4 x3 3x2 4x11 이었는데, 그래서 이 창조된 Polynomial 대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만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derivative 의 삶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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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그런 derivative 의 삶은 바로 56x6 12x5 20x4 28x3 3x2 6x4 이다.
죄로 인해 derivative 된 삶은 그 삶의 모양을 나타내는 숫자들, 즉 coefficients 가 복잡하고 야곱의 죽기 전 고백처럼 고달프고 험난한 삶의 여정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다르게 창조하셨듯이, 그 다른 Polynomial 의 derivative 또한 다 다르다. 물론 때로는 우리의 삶의 Polynomial 이 다른 사람과 끝 숫자만 다르다면, 그의 derivative 삶은 같은 모양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다 교도소에 모여 있고, 마약에 젖어있고, 죄악과 향락에 빠져 있음을, 그들의 공통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integration'에 있다. 왜냐하면 integration 은 anti-derivative 로 하나님과 멀어져 derivative 된 삶을 다시 되돌려 가는 것이고, 돌이킴이고, 회개이고 구원이다. 우리의 derivative 된 삶은 56x6 12x5  20x4  28x3  3x2  6x  4 인데, 이것을 integration 하면
(56x6 12x5 20x4 28x3 3x2 6x4)dx8x7 2x6 4x5 7x4 x3 2x2 4xC
이다.
'dx'는 우리의 죄로 인해 derivative 된 우리의 삶을 X(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 길을 통해 되돌릴 가능성을 말하고 예수님은 어쩌면 이 'dx'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derivative 된 삶을 integration 할 때마다 붙는 Constant of integration 이 있다. 이것이 꼭 붙어야 하며, 붙지 않으면 옳바른 integration 이 아니다.
이 C 가 바로 Christ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는다.
우리의 derivative 된 삶, 죄된 삶을 되돌려서 회개의 integration 을 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대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얻게 되는 회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너스로 항상 붙어있는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구원임을 깨닫는다.
"integrity 는 회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다"
26. Triple Cube Number
Triple Cube Number 는 각 자릿수를 Cube 해서 더한 것이 자신이 되는 숫자이다.( all integers between 100 and 1000 such that each digit is a different odd number and the sum of the cubes of the digits is the original three-digit number)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나타내고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숫자인 153 이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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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1의3승은1,5의3승은125, 3의3승은27이므로3승한3개의수를더하면
1 + 125 + 27 = 153 이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숫자가 네 개 밖에 없는 Triple Cube Number 중의 하나이다. Bible 에서 Cube, 즉 정육면체가 의미하는 것은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모세가 말씀을 듣고 만든 지성소가 정육면체다. 지성소는 거룩한 곳. 그것도 지극히 거룩한 곳. 즉, 정육면체는 “거룩”을 나타낸다. Triple Cube Number 는 특별히 거룩을 의미하는 숫자인 것이고, 베드로가 잡은 153 마리의 물고기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 임을 알 수 있다.
27. 우리의 upper bound 와 lower bound 는?
오래 전부터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며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나'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성경은 그 '나를 찾는 것'의 길을 가르쳐준다. '나'를 알려면 우선 나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 대략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 수학에서는 upper bound 와 lower bound 로 정의한다. 즉,
Lower bound < 나 < Upper bound
라는 뜻이 된다.
정확히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upper bound 는 무엇이고 lower bound 를 알면 더 가깝게 나를 찾는 일에 갈 수 있게 된다.
그럼 우선 lower bound 를 어떻게 찾는가 하면, 나를 어떤 것으로 나눠봐야 한다. 나를 쪼개고 부수고 내려놓는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면 그 때는 나를 발견하기가 쉽다. 이 나를 나누는 것을 수학에서는 Synthetic Division 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함은 (-)의 숫자로 나눔이다. 그렇게 했을 때 Synthetic Division 의 세 번째 줄에 나타난 숫자들을 보면 그것으로부터 나의 lower bound 를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줄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드러난 나의 속 모습이다. 그 속 모습을 나타내는 숫자가 alternating sign 을 반복한다면, 즉
+3 -2 +5 -1 +4 -7...
이렇게 된다면 그 나눈 숫자가 바로 lower bound 이고 (-) 의 숫자이다.
이 의미는 나의 삶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을 때마다 그 무엇이 나의 삶을 예수님과 사단 사이에서 왔다 갔다 방황하게 만들었다면 그 무엇인가는 나의 lower bound 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럼 upper bound 는 어떻게 찾는가?
Synthetic Division 으로 나누는 숫자는 (+)의 숫자이다. 이 숫자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얻게 되는 성품이다. 이것으로 내 삶을 Synthetic Division 하였을 때 세 번째 줄에 나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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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숫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드러난 삶의 모습들이 모두 (+) sign 을 가질 때 그 나눈 숫자는 나의 upper bound 가 된다.
우리의 삶이 모두 (+)의 sign 을 갖는다는 말은, 우리의 삶을 통해 (+) sign 이,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고 닮아가는 삶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lower bound 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lower bound 가 돈 때문일 수도 있고, 사업 문제일수도 있고, 자녀 문제 일수도 있고, 자신의 성공일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일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upper bound 는 그리스도의 성품들이고, 성령의 열매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나의 lower bound 를 upper bound 로 옮기는 나의 노력과 결단이 믿음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다.
28. 60 mph ?
아침에 freeway 를 가는데 '60 mph' 라는 사인이 특히 눈에 띤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데 '잠잠' 과 '성령의 감동'을 묵상하고 있어서인지 이내 mph 는 'mile per hour' 가 아니라 'me per holy spirit' 이라는 마음이 든다. 내가 얼마나 '성령의 감동' 보다 빨리 달리고 있느냐가 mph 라는 것이다. 내가 달리는 60 mph 는 '성령의 감동'과 비교해서 60배나 빠른 속도로 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사야와 같이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속도는,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깨달음의 속도는 1 mph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속도는 '성령의 감동'의 속도와 나(me)의 속도가 같을 때이다. 그래서 그저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듣고 보고 할 수 있는 속도임을 묵상한다.
1 mph 는 시편 62 편 1 절의 속도이고,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출애굽기 14 장 13 절의 속도임을 깨닫게 하신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기서 가만히 서서는 cease 이다. 그저 stop 이 아니라 하던 것들을 멈추고,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내 방법으로 하던 것을 멈추고 기다리는 상태이다. '기다림'의 상태이다.
어려운 문제나 고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은 때론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 듯 하다. 나는 잠잠히 그리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는 1 mph 의 속도로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마치 정지해 계신 것 같다. 정지는 0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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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그러나 10 mph 는 무한대의 속도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 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지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무한대의 속도를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만히 계심은 정지의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시며 가만히 계시는 동사라고 한다. 이사야53장7-12절 말씀에도 도무지 내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10 절)" 우리 모두를, 나를 존귀한 자로 강한 자로 삼고 하나님의 몫을 나누고 탈취한 것(구원과 영생)을 나누게 하시는 하나님의 속도임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속도는 세상의 분주함이라는 성공이라는 부유라는 100 mph 의 속도가 아니라 '기다림'의 속도 임을 깨닫는다.
기다림은 정지가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활발한 움직임이고,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본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차가 오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마련인 것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다린다면 그 쪽을 바라보고 주님을 찾으며 그 분을 소망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기다리는 이들을 통해 성취됨을 말씀하신다.
29.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의 말을 증명해보자.
빌립보서 3 장 8 절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세상의 좋은 것들도 배설물로 여긴 바울 사도의 마음을 닮고 싶다. 그래서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예를 들어, 아무리 100만 불을 번다고 해도 그것이 2000년 동안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만 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10 년 동안 이라면 과연 그 액수에 만족할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사랑도 그렇다. 그 사랑이 가치가 있냐 없냐는 시간이라는
것으로 재봐야 한다. 사랑이 그저 10 년만 유효기간이라면 그 사랑이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모든 가치는 시간으로 견주어 결정되는 것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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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보고 있는 시간은 그저 몇 십 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이고 영원이다. 영원의 시간으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견주어 본다면 과연 가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40 조원 이라고 하지만 영원에 비교하면 과연 남아 있을까? 언젠가 먼지와 같이 변할 40조원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혹시 가지고 있는 부나 명예, 혹은 자녀나 건강,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영원이라는 무한대로 나누면 뭐든지 0(zero)가 됨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그저 모든 가치를 이렇게 영원의 시간에 비교했다는 마음이 든다. 그렇기에 세상의 어느 것도 영원의 시간에 비추면 배설물과 같다고 단정한 사도 바울의 말이 세상 어떤 훌륭한 철학자보다도 더 확실하고 옳은 말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추어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찾은 것처럼, 영생의 시간 속으로 가는데 가지고 갈 수 있는 복음이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소속이고, 하나님께 드려온 나의 시간들이고, 하나님을 향해 걸어왔던 마음의 제사들이고, 내가 보아 온 성경책이고, 날마다 하나님과 만난 기록인 QT 책 임을 확신하게 하신다.
30.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요한복음19장23-24절에서는 군병들이 예수님이 입었던 옷 네 벌을 각각 한 벌씩 가지고 속옷은 나눌 수가 없어서 제비를 뽑는다. 23 절에서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얻고"라고 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님이 주신 것처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얻을 것으로 치면 그보다 더 한 것도 주실 수 있는데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서 그저 뺏다시피 얻는 옷에 만족하면서 나름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네 깃'은 바로 십자가의 네 끝임을 깨닫게 하신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체 그저 십자가의 네 깃만 있으면 십자가를 만들 수 있는 양 여긴 세상의 사람들과 나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 임을 발견하게 하신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저 네 깃만 취하면 될 줄 아는 나에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있는 이 위를 보라"고 하신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다 벗으셨다"라고 "I am naked. I am naked." 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셔야 했던 치욕, 자존심, 창피함은 바로 나 대신에 감수하셨음을 깨닫게 하신다. "세상은 치욕과 자존심과 창피함 속에 있을 너를 놓고 제비 뽑고 즐길지라도 나는 너 대신에 너를 사랑하여 이렇게 발개 벗고라도 너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단다"라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 위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하신다.
"I am naked. I am na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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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절과 25 절 사이에서 말씀하시려 했던 것은 바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한단다"라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십자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달려 계신다. 이 순간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두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여시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드디어 이어지고 회복되는 순간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시는 순간이다. 바로 십자가의 위 아래를 온전히 이으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와 어머니를 보며
"Here is your son"(26 절)
"Here is your mother"(27 절)
이라고 하시면서 이제는 사람들간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음을, 그래서 십자가의 수평관계가 이 세상에서 회복되기를 원하셨기에 혈연관계가 아닐지라도 회복된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원하셨다는 마음을 주신다. 믿는 나와 다른 믿는 나와 믿지 않는 다른 나 사이에 예수님이 이어주시는 섬김과 사랑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완전한 회복임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13장34절과 15장12절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아가페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시며 우리도 같은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십자가의 진정한 수직관계의 완성이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면, 십자가의 진정한 수평관계의 완성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온전히 이루어짐을, 이것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임을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신다. "It is finished."
이것은 창세기 2 장 1-3 절의 하나님이 하신 것과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It is finished" 하신 다음에 안식하시듯 예수님도 "It is finished" 하시고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다,
이 "It is finished"는 바로 예수님에 의한 영적인 천지창조임을 깨닫게 하신다.
바로 이 예수님에 의한 영적인 천지창조의 현장이, 방법이, 길이 바로 사명에 의한 수직관계와 사랑에 의한 수평관계로 이루어진 '십자가 위'에서였음을 말씀해 주신다. 그래서 영적인 천지장조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십자가)는 더함이다.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함이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죄로 멀어졌던 하나님의 관계를 이어주는 새로운 천지창조가 내 삶에 더해지는 것이고, 온전한 사명이 더해지는 것이고, 온전한 사랑이 더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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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과 사명 중 하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수평관계만 있는 (-) 이고 그의 삶에는 하나님이 마이너스(-)된 상태이고 구원과 영생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수직관계만 있는 |(conditional symbol)이고 그의 삶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구원의 상태이지만 여전히 조건부 상태(conditional)인 "새로 태어났지만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 아이의 상태이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두 발을 바라보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발길이 멈춘 곳이고 우리의 영생이 시작되는 곳이다."
더하자.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하고 온전한 사명을 더하고 온전한 사랑을 더하자.
31. Chain rule 을 통해 내 마음을 쏟아놓자.
Calculus 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Chain rule 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Calculus 의 근간을 이루는 Derivative 와 Integration 의 Key 를 Chain rule 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Chain rule 이 뭔가 하면, 만약에 Function 이 복잡할 겅우에는 그것의 Derivative 는 계속 안으로 들어가면서 derivative 를 한다는 것이다. 즉,
d f (g(h(x)))  f '(g(h(x))) g'(h(x)) h(x) 이다. dx
제일 밖을 derivative 하고, 그 다음 안의 것을 derivative 하고 제일 안의 것을 derivative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주 복잡한 sin3[(2x4  4x2  2)2 ] 를 derivative 한다고 하면, 제일 밖의 function 은 (something)3 이므로 그것의 derivative 는 3(something)2 가 된다. 여기의 something 은
sin[(2x4 4x2 2)2] 이다.
그 다음 안의 것은 sin[something] 이다. 그것의 derivative 는 cos[something] 이 된다. 여기의 something 은 (2x4  4x2  2)2 이다.
그 다음 안의 것은 (something)2 이다. 그것의 derivative 는 2(something)이다. 여기의 something 은 2x4  4x2  2 이다.
그 다음 제일 안의 것은 2x4 4x2 2 이므로 그것의 derivative 는 8x3 8x 이다. 이 것들을 다 써주면,
3sin2[(2x4 4x2 2)2 ]cos[(2x4 4x2 2)2 ]2(2x4 4x2 2)(8x3 8x) 가 derivative 한 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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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우리의 삶은 복잡해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더 엉켜버리는 실타래와도 같은 상태로 변하게 된다. 바로 아주 복잡한 sin3[(2x4  4x2  2)2 ] 를 derivative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복잡한 문제와 상처와 상황들을 놓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저 인사치레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가 벗겨지고, 우리의 생각이 벗겨지고, 우리의 내면이 하나하나 벗겨지며 완전히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 기도를 통해 토로되기를 원하신다. 이 복잡한 문제를 하나 하나 안으로 들어가며 풀게 되는 것이 Chain rule 이고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이고 토로하는 기도이다.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하다 보면 어느덧 내면에 있던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의 마음 가장 깊숙이 있던 것들이 나오게 된다. 바로 위의 문제에서 8x3 8x 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도를 통해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회복시킨 예수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에 예수님의 숫자인 8 이 드러날 때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기 시작하신다.
이 Chain Rule 은 마치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문제와 죄를 들고 회막문을 거쳐 성소를 거쳐 휘장을 거쳐 지성소로 들어가는 순서와 같다. 문제가 복잡한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순서대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Chain rule 을 derivative 에서는 써 먹는데 그것의 반대방향인 Anti-derivative 즉 Integration 에서는 거의 쓰지 못한다. 이 말은, 지성소까지 와서 회복을 얻고 이제 그의 역순으로 휘장을 거쳐 성소로 그리고 회막문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르는 것과 같다.
Derivative 에 Chain rule 을 써서 지성소까지 들어갔다면 그 다음 나올 때는 Chain rule 을 거꾸로 쓰면서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치를 모르는 것 같다.
나오는 길, Integration 은 이렇다.
f'(g(h(x)))[g'(h(x))h'(x)dx] f(g(h(x)))C 가 된다.
결국은 [g'(h(x))h'(x)dx] 부분은 지성소에서 휘장을 거쳐 성소까지 나온 상태이다. 이젠 그냥 회막문만 나서면 된다.
즉,
f'(something)[Chain rule part] f(something)C
이므로 회막문 나오는 것이나 잘 신경쓰면 된다. 왜냐하면 지성소부터 휘장을 거쳐 성소까지 나오는 Chain rule part 인 g'(h(x))h'(x)dx 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dx = due to Christ)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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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기억하자. Integration 에서 C 가 없으면 틀린 답임을. Christ 가 없으면 틀린 답이다. 예를 들어,
3sin2[(2x4 4x2 2)2 ]cos[(2x4 4x2 2)2 ]2(2x4 4x2 2)8x3 8xdx
 3sin2[(2x4 4x2 2)2 ]{cos[(2x4 4x2 2)2 ]2(2x4 4x2 2)8x3 8xdx}
 3(something)2 [chain rule part]
 sin3 (something)  C sin3[(2x4 4x2 2)2]C
가 된다.
이렇게 Chain rule 을 통해 Derivative 로 지성소에 들어가고, Integration 으로 세상에 정답을 가지고 승리자로 사명자로 돌아오는 삶이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32. 나의 real solution 은 몇 개인가?
우리의 삶은 Polynomial 에 비유된다. 그 각각의 굴곡을 나타내는 것은 Quadratic func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각각의 굴곡 Quadratic function 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 Polynomial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Quadratic function 은 y  ax 2  bx  c 이고, 이것의 그래프는 leading coefficient 인 a 의 부호에 의해 결정된다. a 가 (+) 이면 Open upward 이며, a 가 (-) 이면 Open downward 를 향하게 된다. 우리의 우선 순위가 십자가(+) 이고 그리스도이면 그의 삶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지만, 우선순위가 십자가와 정 반대인 (-) 이면 그의 삶은 땅을 향해 열려 있음을 보게 된다.
이 Quadratic function 이 갖는 solution 은 바로 Quadratic formula 를 Quadratic equation 에 적용하면 알 수 있다.
Quadratic equation 은 y 를 0(zero)로 놓으면 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you(y)를 비우고 내려 놓아라." 그러면 Quadratic function 은 Quadratic equation 으로 바뀐다. 이 Quadratic equation ax2  bx  c  0 는 바로 real solution 이 몇 개 인지를 찾을 수 있는 시작이 된다.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들이 생겨나고 이것을 우리 인생에 있어서 real solu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Quadratic equation ax 2  bx  c  0 에 solution 을 찾기 위해 적용하는 Quadratic formula 는
xb b24ac 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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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저 a, b, c 를 집어 넣기만 하면 solution 을 구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나면 그 다음은 심플하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말씀대로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의 real solution 은 몇 개 인가?
real solution 은 x-axis 와의 만남이고(x-intercept), 삶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x-axis 와의 만남(x-intercept)이 몇 번인지를, 삶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몇 번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 Discriminant 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Discrimination 과 같이 인종차별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 Discriminant 를 통해서 x-axis 와의 만남(x-intercept)이 몇 번인지를, 삶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몇 번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Discriminant 는 Quadratic formula 의 square root 안에 있던 것으로, D  b2  4ac 이다.
이 Discriminant 의 값에 따라, 삶에서의 모양에 따라 몇 번의 만남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즉,
D > 0 (+) 는 두 번의 만남이다.
D = 0 는 한 번의 만남이다.
D < 0 (-) 는 0 번의 만남이다.
D > 0 인 경우는 D 의 값이 (+) 인 경우이고, 삶 가운데서 십자가(+)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x- axis 와의 만남(x-intercept)이 두 번이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가난(vertex)으로 갈 때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올라갈 때에도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다.
D = 0 인 경우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최악의 상황(vertex)에서야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비록 자신의 삶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곳은 그의 vertex 이고 자신의 삶이 x-axis 와
touch 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D<0 인 경우는 D 값이 (-) 인 경우이고, 삶 가운데서 십자가(+)와는 정 반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x-axis 와의 만남(x-intercept)이 전혀 없다. 자신의 삶에서 최악의 상황(vertex)을 경험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solution 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그들의 solution 은 real solution 이 아니라 Complex solution 이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점점 더 Complex 로 치 닿는다. "당신의 real solution 은 몇 개 입니까?"
33.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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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다. "Mystery of God must be left mystery."
그러나 중요한 3 가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첫째,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둘째, 한분 한분 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셋째, 한 하나님 밖에 안 계시다.
그래서 한 분을 보면 다른 분이 보이고 얘기해 주시는 게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세 개의 다른 변을 가진 하나의 삼각형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물론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세 개의 변 중 하나로 찾아오신다. 그래서 때론 성부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하고, 성자 예수님을 만나기도 하며, 성령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게 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삼각형의 서로 다른 변들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Concurrence 라는 것이 있다.
Concurrence 는 Circumcenter, Incenter, Orthocenter 를 말하는 것이다. 각각을 살펴보면, Circumcenter 는 각 vertex 에서 opposite side 의 midpoint 로 이어 segment 를 만들면 이것을 median 이라고 하는데, 각 vertex 에서 만든 세 개의 median 은 한 점에서 만난다. 이것을 Circumcenter 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삼각형의 꼭지점들은 원 위에 놓이게 되고 원은 그 삼각형을 Circumscribe 하기 때문이다.
Vertex 는 나의 어려움이고 고난이고 힘든 환경이다. 그곳에서 그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삼위일체로 드러내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내 마음의 중심을 내리면 그곳이 미디안(median)이고, 모세가 애굽왕 바로를 피해 머물렀던 땅 미디안 이다(출 2:16-22)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세 분의 하나님은 내가 그린 원 위에 접하시며 나의 삶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Circumscribed 된 삶을 경험하게 된다.
Incenter 는 각 vertex 에서 각을 둘로 나누는 angle bisector(angle bisector 는 ray 이다)를 그리면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Incenter 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점을 중심으로 삼각형의 안에 원을 그리면 삼각형의 변들은 원을 접하면서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원은 삼각형 안에 있게 되기에 그 원의 중심을 Incenter 라고 부른다.
나의 어려움이고 고난이고 힘든 환경에서 angle bisector 와 같은 ray 를, angry 의 화살을 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 안에는 자아의 원이 있는데, 그 자아 밖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원에 접해서 기다리신다. 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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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Orthocenter 는 각 vertex 에서 opposite side 에 수직선을 그리면 그것을 altitude 라고 하는데, 이 세 개의 altitude 가 만나는 점을 orthocenter 라고 부른다. 'Ortho" 라는 말에서 'Orthodentist' 의 '이를 교정해서 수직으로 만드는' 의사가 나왔듯이 'Ortho' 라는 뜻은 직각이라는 뜻이다.
고난의 vertex 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orthodentist' 가 되신다. 그래서 어그러졌던 우리의 삶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아름다운 모습의 삶으로 변해가신다.
여러분들은 어떤 Center 이신가요?
34. 340200 의 positive factors 는 몇 개인가?
12 는 1x12, 2x6, 3x4 이므로 12 의 positive factor 는 1, 2, 3, 4, 6, 12 가 된다.
그러면 340200 의 positive factor 는 몇 개일까?
이것을 구하려면 우선 factor tree 를 이용해서 prime factorization 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340200 23 35 52 7
이 된다.
Prime factorization 은 나의 삶이라는 숫자를 prime factor 들로만 표시하는 것이다. 그 prime number 란 바로 1 과 자기 자신 밖에 factor 가 없는 수이므로, prime factor 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의 만남들로 표현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Prime factorization 이 아닐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exponent 들만 바라보면서 하나님(1)만 찾으면 된다. 즉,
340200 의 positive factor 의 수는
(3+하나님)*(5+하나님)*(2+하나님)*(1+하나님) =
(3+1)*(5+1)*(2+1)*(1+1) = 144
이다.
하나님만 찾자!
35.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수학에서 주어진 data 에 대해 그것들의 statistics 를 표시하는 용어 중 mean, median, mode, range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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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Mean 은 Average 로 주어진 data 를 다 더해서 data 의 갯수로 나누면 얻는다.
Median 은 data 를 작은 수부터 큰 수까지 순서대로 나열한 다음 가장 가운데 오는 숫자이다. 만일 가운데 숫자가 두 개이면 average 하면 된다.
Mode 는 가장 자주 나오는 숫자이다. 물론 여러 개의 mode 가 나올 수도 있다.
Range 는 가장 큰 숫자에서 가장 작은 숫자를 빼서 얻는다.
그렇다면
1, 2, 2, 5, 6, 10, 11, 11, 13, 15, 17, 17, 18, 18, 18, 20 의 mean 과 median 은 어떻게 될까? 머리로만 계산한다면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왜 복잡할까? 아무런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아무런 규칙도 없이 마음 내킬 때에 말씀보고, 마음 내킬 때에 기도하고, 생각 날 때만 QT 한다면 이렇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런 규칙도 없고, 그렇기에 우리의 중심(median)을 쉽게 찾아서 하나님께로 가기가 여간 쉽지가 않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늘 찾고 기도하고 물씀을 보고 QT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숫자들은 어떻게 될까?
이 숫자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숫자로, 이것을 수학에서는 evenly spaced numbers 혹은 arithmetic sequence 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evenly spaced numbers 는
3, 6, 9, 12, ... , 423
이다.(3 의 배수들)
이때 average 와 mean 을 찾는 데는 1 초도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evenly spaced numbers 에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Mean = Average = (처음 숫자 + 나중 숫자) / 2
그러므로 위와 같은 evenly spaced numbers 숫자들의 mean 과 median 은 항상 같으며 그
값은
3  423  213 2
이 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늘 찾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QT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의 중심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는 단 일초도 걸리지 않는다.
36. Long Division 에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자.
우리가 11/2 를 할 때 몫으로 5를 찾고 11에서 10을 subtract 해서 나머지 1을 찾듯이, Long Division 은 polynomial 을 binomial 이상으로 나눌 때 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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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예를 들어보자.
(2x4 5x3 4x3) 를 (x2) 로 나눌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first term 들을 비교하는
것과 대부분의 실수는 subtract 할 때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하나는예와같이 x2 term이없을때 0x2 라고넣어주는것이다.
Subtract 할 때 자꾸 실수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Subtract 는 삶에서 자꾸 빼가는 것이고 삶 가운데서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생길 때마다 그와 관련된 마음을 제거해버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Subtract 할 때 자주 생기는 실수를 피하는 방법은 더하는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다. 즉, 각 항들의 부호를 바꿔 더하는 것이다.
삶 가운데서 생겨난 증오와 분노의 부호를 반대로 바꾸는 것이다.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말씀으로 바꾸는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저 더하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만 있으면 해결된다.
그럼 한번 해보자.
Dividend의첫항 2x4 와Divisor의첫항x를비교하면quotient에 2x3 가필요함을알수 있다.
2x3 (x2) 는 2x44x3 가된다.
그 다음 Subtract 하는 대신 사인을 바꾸고 더하자.
그러면 dividend 에는 x3 0x2 가 된다.
또첫항들을비교하면Quotient에x2 가필요하게되고,x2(x2)x32x2 이므로, 사인을 바꿔서 더하면 dividend 에는 2x2 4x 가 된다.
같은 방법으로, 또 첫 항들을 비교하면 Quotient 에 2x 가 필요하게 되고,
2x(x2)2x2 4x 이므로, 사인을 바꿔서 더하면 dividend 에는 8x3 가 된다.
같은 방법으로, 또 첫 항들을 비교하면 Quotient 에 +8 이 필요하게 되고, 8(x2)8x16 이므로, 사인을 바꿔서 더하면 dividend 에는 13 이 된다.
그러므로 Quotient 는
2x3 x2 2x8
이고, Remainder 는 13이 된다.
답은,
2x3 x2 2x8 13 이다.
x2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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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Subtract 하며 증오와 분노로 점철된 마음들을 도러내지말고 각 항들의 부호를 바꿔 더하자. 삶 가운데서 생겨난 증오와 분노의 부호를 반대로 바꾸는 것이다.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말씀으로 바꾸는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저 더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점점 더 풍성해진다. 십자가(+)만 있으면 해결된다.
이 방법이 바로 오바댜 1장12절에 나온다
옵(오바댜)1:12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오바댜는 구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그러나 이 간략한 기록 속에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숨어있다. 원수가 불행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바댜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을 동안 예루살렘 시는 바벨론 군사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적군들이 파괴하고 죽일 때 이웃 에돔인들은 실로 기뻐 환호했다(시 137:7-9).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처를 주는 조롱을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혈족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야곱의 후손들이었고 에돔인들은 에서의 후손들이었다.
오바댜는 에돔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비난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옵 1:12).
만일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불행을 당할 때 복수심으로 인해 쉽게 고소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라고 권고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계속 지니며 하나님이 그분의 시간에 공의를 행하심을 믿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사람들과의 문제를 다루는 법(로마서 12 장):
인내하기(12 절),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기(14 절), 겸손하기(16 절), 원수 갚지 말기(19 절),
선으로 악을 이기기(21 절).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우리가 최악의 원수에게 보이는 사랑으로 가늠할 수 있다.
37. All Students Take Calc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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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수학의 Trigonometry 에서 4 개의 Quadrant 에 Angle 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sin, cos, tan, csc, sec, cot 의 값이 + 혹은 - 가 되는데, 이를 빨리 체크하기 위해 "All Students Take Calculus."를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즉, Quadrant 1 에서는 All 이 + 이고, Quadrant 2 에서는 sin (혹은 csc) 이 + 이고, Quadrant 3 에서는 tan (혹은 cot) 이 + 이고, Quadrant 2 에서는 cos (혹은 sec) 이 + 가 된다.
예를 들어 sin(X) 는 Quadrant 1 과 Quadrant 2 에서 + 가 되고, Quadrant 3 와 Quadrant 4 에서 - 가 된다.
sin(X) 는 바로 우리의 original sin 은 X(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결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Quadrant 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찾아주시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9-1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위의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 사람의 신앙의 현 위치를 말해준다.
십자가를 x 와 y axis 로 나타내면 수직방향의 y-axis 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수평방향의 x-axis 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즉, x-axis 의 - 방향은 나 중심이고, + 방향은 이웃 중심을 나타내고, y-axis 의 - 방향은 나 중심이고, + 방향은 하나님 중심을 나타낸다.
위의 두 질문에서 아담을 찾는 하나님의 질문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고, 아벨을 찾으시는 질문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나의 신앙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좌표이다.
Quadrant 1: 내 신앙의 좌표가 Quadrant 1 에 있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모두 + 면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Quadrant 2: 내 신앙의 좌표가 Quadrant 2 에 있으면 하나님 사랑은 + 면, 이웃 사랑은 - 면에 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신비주의적 신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Quadrant 3: 내 신앙의 좌표가 Quadrant 3 에 있으면 하나님 사랑은 - 면, 이웃 사랑은 + 면에 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 종교의 신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Quadrant 4: 내 신앙의 좌표가 Quadrant 4 에 있으면 하나님 사랑은 - 면, 이웃 사랑은 - 면에 있기 때문에 이 경우는 거의 사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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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자
예레미야 7 장 3 절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Reform your ways and your actions" 말씀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신앙과 삶이 일치됨은 Congruent 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도 신앙과 삶을 비스므레 같게 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Similar 이다. Congruent 는 정확하게 같은 것이고 일치하는 것이며 Similar 는 모양만 비슷하지 같은 것이 아니다.
Congruent 하다는 것은 같은 크기의 같은 모양임을 말하고, Similar 하다는 것은 모양만 같고 크기는 다른 것을 말한다. Similar 한다고 항상 Congruent 한 것은 아니지만 Congruent 하면 항상 Similar 하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며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예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님의 성전인 것을 말하더라도 "그런 거짓말을 믿지 말라"(4 절)고 하시는 말씀에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긁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그러면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바로 10 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신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이
도둑이면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이고 성도가 있으면 성전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도둑은 바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그저 비슷하게 흉내만 내는 사람들임을 말씀하신다.
Congruent 가 아니라 Similar 인 삶이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면서도 6 절과 9 절의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이다.
성도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들이고, Congruent 이며 Similar 인 삶이다. 신앙과 삶은 Congruent 하며 예수님의 삶을 닮기 위해 Similar 하기 위해 날마다 하루씩 빚어가는 사람들임을, QT 하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11 절: "I have been watching!"
39. 10 계명의 1, 2, 3, 4, 5, 6, 7, 8, 9, 10
1 부터 10 까지의 숫자 중 십자가가 있는 숫자는 4 와 10(한자로 +)이다. 십계명의 4 계명과 10 계명은 바로 예수님이 요약한 새 계명이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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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십계명의 4 계명은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계명의 요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라는 계명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십계명의 10 계명은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계명의 요약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탐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탐심을 버리면 저절로 사람간의 관계가 좋아지고 사랑할 수 있으며 새 계명에 있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저절로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늠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기는 가치의 재발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최고의 가치를 두는 우상을 섬기게 되며 그 우상숭배는 마음 안에 탐심을 생겨나게 하고 결국은 온갖 죄 가운데 처함을 에스겔서 22 장 3-7 절에서 말씀하신다.
에스겔서 22 장 3-7 절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5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6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7 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에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에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9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10 네 가운데에 자기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과 관계하는 자도 있었으며
11어떤 사람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의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하였으며 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그 자매 곧 아버지의 딸과 관계하였으며
12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돈과 이자를 받았으며 이익을 탐하여 이웃을 속여 빼앗았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 일대일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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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 제자 양육이란 양육자의 삶과 동반자의 삶이 일대일로 맞부딪쳐 나눔으로,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도록 집중양육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남녀가 16 주를 매주 한번씩 만나면 어떻게 될까?
점점 더 좋아지고 사랑에 빠지며 역사가 일어난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그보다 더 강력한 변화가 성령님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놀라운 변화는 주위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변화시키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대일 만남의 현장에서 가능하다.
수학에서도 일대일이란 말이 있다. 즉, One-to-one function 이 그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relation 을 알 필요가 있다. relation 은 set of ordered pairs (x, y) 로 간단히 set of points 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function 은 이 relation 중에서 모든 x 값이 다른 경우이다. 다시말하면, 주어진 x 에 따라 어떤 규칙을 가지고 y 값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이 function 인지 아닌지를 체크하는 방법은 3 가지 정도가 있다.
우선 points 이 주어진 경우에는 그저 모든 x 값들만을 보면 된다. 모든 x 값이 다를 경우 그것을 function 이라고 한다.
또한 Graph 가 주어진 경우에는 그저 Vertical line 을 그려서 한 점만 만나게 되면 function 이고 아니면 function 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Vertical line test" 라고 한다.
떄로는 주어진 식에 y^even 인 경우에는 function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function 의 composite function 이 x 인 경우에, 즉 f(g(x))=g(f(x))=x 이면 g(x) 를 f(x) 의 inverse 라고 한다. 그런데 이 inverse of f(x) 가 function 인지 아닌지를 빨리 확인하는 길은 'Horizontal line test'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설명했던 'Vertical line test' 와 'Horizontal line test' 를 모두 통과하면 그것을 One-to-one function 이라고 한다. 이것은 수직선과 수평선을 모두 그어도 오직 하나의 관계라는 것이다.
일대일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니 일대일은 바로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십자가였다. 십자가의 수직에 해당하는 하나님과 내가 매일마다 삶 속에서 겪고 나누는 것이고, 십자가의 수평에 해당하는 나와 또 ‘다른 믿는 나’를 연결하는 교제이다.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어떻게 교제하는 것을 안 다음에 세상의 믿지 않는 ‘다른 나’들을 찾아 가는 것이 전도이다. 전도는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을 통해 그저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며 바로 십자가를 통한 일대일 양육임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분들 모두 과연 내가 훌륭한 일대일 양육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지금도 하시는 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말씀하건대 베드로에게 3 번 던지셨던 질문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라는 음성에 그저 순종함으로 나아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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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알아서 하신다. 내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다음은 제자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성령님이 다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일대일하면서 동반자와 양육자 둘 중 하나만 은혜받는 일대영이나 영대일이 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나눔과 간증도 은혜도 모두 일대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과를 마치고나서 그 평가를 적어 보는 것도 좋다. 이번 과는 일대일. 지난과는 일대영. 이렇게...
동반자와 함께 삶과 갈등을 나눌 때 다이나믹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현장이 바로 여러분이 하게 될 일대일 제자양육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더욱 은혜의 지경을 넗히는 축복의 관계들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기에 축하드리고 싶다.
41. 다니엘서 9 장 24-27 에 나오는 ‘Seventy Sevens’ 의 해석
(주)이 해석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고, 하나 하나 성령님께 물으며 얻은 것이기에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장래와 인류 역사의 종말에 관한 ‘70 이레’(The Seventy “Sevens”)의 계시를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게 된다. 이 계시는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Darius, son of Xerxes= Ahasuerus, a Mede by descent)가 갈대아 왕으로 세움 받던 통치 원년(423BC)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아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 년 만에 그치리라는 것을 깨달은 직후(단 9:1) 금식하고 기도하며 간구할 때 받은 것이다. 그리고 받은 것이 바로 Seventy ‘Sevens’ 이다.
70 은 10×7 으로 10 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십계명을 뜻하고 하나님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이고, 7 은 완전, 충만, 거룩을 나타내는 수이며 성령을 나타내는 수이다(계 1:4, 롬 12:6-8). 또한 X 는 그이스도를 나타내므로 70 은 거룩을 계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이레’(7) 역시 거룩한 수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상징하고 있다. 70 이레는 바로 70×7=490 년을 의미하고,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70 년과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은 성령의 역사
7 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70 년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 7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며, 그것이 바로 다니엘9장24절에 나오고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허물이 그치고 돌아오기 까지 걸리는 기간이 70 년이고, 죄가 끝나고 죄악이 용서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사야의 모든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오시고 기름부음 받음을 뜻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숫자 7이다.
그러면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seven ‘sevens,’ and sixty-two ‘sevens’)는 무슨 뜻일까? 우선 7+62=69 이다. 바로 70–1 이고 1(하나님)이 없는 기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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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는 모두 69 이레이고 69×7=483 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1 년을 354일로 계산했기에 태양력 연수로 계산하면 473년이 된다. 그럼 다니엘서9장2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는 바로 느헤미야를 뜻하며,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기 위해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하여 유다총독이 되는 해가 444BC 이다. 이 때부터 성벽이 중건되고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 살며 광장과 거리가 세워지게 되며,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나게 되면 바로 483–444=30AD 가 된다. 이 때가 바로 기름부음 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때이고, 비로소 이 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이 된다. 즉,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인 69 이레는 70–1 이고 1(하나님)이 없는 기간이었다. 이 이유가 다니엘서9장26절에 잘 설명되고 있다.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이 30AD 이고, 그 이후 세상에서 왕노릇하는 사탄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서 바로 30AD 는 중요한 시간의 시작이다. 그 후로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더해주신 역사이다. 바로 69 + 1 이며, +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더하는 역사이며 1(성령 하나님)을 더하는 역사이다. 그 역사가 바로 남아있는 ‘1 의 이레’ 동안에 펼쳐지게 된다. 그 남아있는 ‘1의 이레’의 역사가 바로 다니엘서 9장27절에 나오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남아있는 ‘1의 이레’ 즉 7년이 뜻하는 것은 완전하고 충만하고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펼쳐질 7년이고 이 땅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역사인 완전한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 ‘이레의 절반’은 좁게 보면 스테반의 순교(32AD)를 의미하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서듯이 온갖 박해가 복음 전파하는데 있게 되지만 그 복음의 문이 열어지며 열방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시초가 바로 그 남아있는 ‘1의 이레’의 마지막인 37AD로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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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쩌면 이 남아있는 ‘1 의 이레’는 아직도 여전히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일어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로 막아내고 이겨내며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복음을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질 것을 믿고 살아가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행전의 기간이 아닐까...
42. 요한계시록4장4절에 나오는 24는 어떤 수인가?
24 = 1x2x3x4 = 4!
이다.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 하나에 하나님을 더하고(2), 또 예수님을 더하고(3), 또 성령님을 더하고(4), 이 모두를 그리스도(X)로 더불어 하나가 된 상태이다.
바로 고결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24는 고결한 숫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에서도 24 를 고결한 수로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4장4절에 나오는 24장로는 바로 고결함을 얻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43. 직선이란 ?
직선의 정의는 임의의 두 점을 잇는 최 단거리의 선으로, 그 선은 무한으로 뻣어 있는 것을 말한다. 만일 그런 선을 그리려면 종이에 그려봤자 유한한 유한직선이 되고, 무한 직선을 그릴 수 있는 종이를 얻었다 하더라도 체력의 한계 때문에 그릴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직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 물질에도 자연현상에도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영원한 세계가 바로 마음 속에 있는 직선이다. 바로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수학세계를 과학세계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직선의 정의는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가 간직하기를 원하는 마음 속의 믿음과도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물질에도 자연현상에도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하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봐야 한다.
44. 1i의의미?
square root 안에는 본래 negative number 는 올 수가 없다. 그래서 square root 의 Domain 을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그 안에 있는 것이 0 보다 크거나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안의 숫자가 negative number 이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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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우, 즉, 1을 i 라고 쓰고 imaginary number 라고 부른다.
이 숫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수학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셀룰라폰이 개발되고,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i 를 잘 보면 알 수 있다.
필기체 i 를 보면 두 손으로 받치는 모습이다. 무엇인가를 받치고 있고, 그 무엇인가는 이 세상이 될 수도 있고, 문명일 수도 있다.
그럼 이 i 는 무엇일까?
가장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르는 i 는 바로 " i love you" 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세상을 받치고 있는 '사랑'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랑하라' 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닐까...
45. ei 는 무엇일까?
e 는  와 같이 irrational number 로 integer number 의 ratio 로 나타낼 수 없는 수이다. 즉, 영원히 멈추지 않고 끝이 나지 않는 숫자들이다.
e 는 2.7182818284... 이고  는 3.1415926535... 이다. 그리고 imaginary number i 는 마음 속에나 있는 수이다.
이렇게 끝이 나지 않는 숫자들과 마음속에 있는 숫자 i 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ei 은어쩌면마음속에서끝도없이솟아나는욕심과자기생각들로가득찬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이 ei에1을더하면갖가지모순되는것들이통일이되어무를끌어안게된다.즉,
ei 10
이다. 무 관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수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연결성을 발견하는 이 식은 마치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의 빛과 같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의 아름다움과 같고, 들에 핀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과 같다.
이 아름다움은 바로 마음 속에서 끝도 없이 솟아나는 욕심과 자기 생각들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온전한 내려놓음 zero 가 되는 아름다움이다. 이런 것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오일러가 느꼈듯이..
이 공식을 오일러 공식 이라고 하는데, 그는 크리스천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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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1 은 왜 아름다운 수일까?
11 은 prime number 중에서도 아름다운 prime number 이다.
왜냐하면 1 과 1 의 만남이고 1 + 10 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아름다운 존재가 된 것이고, 나 하나(1)에 하나님(1 혹은 10)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47. 666 의 의미는 무엇일까?
666 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로 로마 황제 네로라고 여기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악한 짐승의 숫자이고 요한이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국가)에 의한 기독교 대 박해라는 당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666 의 기본 의미를 추출해 낸 다음, 그것을 장차 도래할 종말의 세속적이고 사단적인 인물(적 그리스도 혹은 그의 세력)에 결부시킨 듯하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문자들은 각각 숫자상의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다.
로마는 헬라어로 "라테이노스"(λατεινος)인데, 헬라어는 각 글자마다 수치가 있으므로 라테이노스의 수치를 합산하면 666 이 된다.
- (람다 λ)=30
- (알파 α)=1
- (타우 τ)=300
- (엡실론 ε)=5
- (이오타 ι)=10
- (뉘 ν)=50
- (오미크론 ο)=70
- (시그마 σ)=200
30+1+300+5+10+50+70+200=666 이 된다. 당시 기독교 핍박의 최대 세력이 로마제국이기에 바로 짐승의 수 666 은 로마 황제와 로마제국을 가리킨다.
6의수는 요한 당시로서 로마이다. 666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에 굴복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 6 의 숫자를 나열한 것은 6 의 인물의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세 인물을 의미한다. 그 세 인물을 나타내는 각각의 6 은 용과 짐승과 새끼 양으로 이 세 인물이 666 을 나타낸다. 이들 세 인물을 인정하는 자들은 살아 남을 수 있으나 그 밖의 사람들은 환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환난을 이기는 자들은 계시록 12장에 의하면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된다. 그리고
11 장에 의하면 두 선지자의 교회에 속한 자들이 되고 13 장에서는 성도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다니엘서 11 장에 의하면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에 해당한다. 이들 외에는 모두가 그들에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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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네로 황제"를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네론 카사르'(NRON KSR) 이다. 이 것을 당시 유행하던 게마트리아 해석법(히브리어의 문자를 알파벳의 수치로 환산하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법)을 따라 풀이하면(여기에 들어갈 문자는 히브리어로 표기하지 못했음) 네론 카사르 = 50 + 200 + 6 + 50 + 100 + 60 + 200 = 666 이 된다. 이 견해는 로마 황제 네로(Nero, 54-
68 년)에 의한 기독교인 대 핍박의 잔흔이 남아있던 그 시대적 상황이 참작되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666 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777(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비교하여 항상 하나님과 비슷하려고 하는 사탄을 나타낸다.
777 심판은 이 666 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과 닮으려고 속이는 사탄의 모습마다 하나님이 나타나 심판하시는 (6+1)(6+1)(6+1) 의 상징이 아닐까?
7 이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라면 이와 비슷하게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숫자가 있는데 그 수가 바로 6 이다.
왜냐하면 6 이 가지고 있는 factor 들을 더하면
6 = 1+2+3 이기 때문에 완전 수라고 한다.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처럼 완전하다고 6 을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세 번 강조하는 666 은 사탄이 하나님과 같다고 속이려는 교만의 극치를 나타낸다. 어쩌면 666 은 오늘날 우리를 구원에서 넘어뜨리는 '교만'일 수 있다.
그리고 666 은 (7-1)(7-1)(7-1) 이다.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없는 상태이고, 악의 상태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이면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전도서 3:18) 바로 짐승의 표 666 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교만을 가질 때 생기는 하나님만이 보시는 표가 666 일지도 모른다.
이 말씀이 에스겔 22:25-29 에 잘 나타나 있다.
25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7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28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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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지자, 제사장, 고관(왕)으로 삼으셨는데 25 절의 선지자에게서는 하나님이 없다. 바로 7-1 = 6 의 상태이다. 26절의 제사장에게서도 하나님이 없다. 바로 7-1 = 6 의 상태이다. 그리고 27 절의 고관(왕)에게서도 하나님이 없다. 바로 7-1 = 6 의 상태이다. 이렇게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부르신 우리 속에 하나님이 없는 상태가 바로 666 의 상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666 의 상태는 29절에서 이 땅 백성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짐승의 표 666 의 숫자임을 드러낸다.
창세 때에 하나님은 만물을 6 일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쉬셨다. 7 은 하나님의 수이고 6 은 세상의 수이다. 지상의 것이 발전하면 7 이 되는 것이 아니라 6 이 하나 더 붙어 66 이 된다. 그것이 더욱 발전하면 6 이 또 하나 붙어서 666 이 된다. 세상의 수는 발전하면 할수록 6 만
자꾸 늘어날 뿐이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수인 7 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이를 분별할 수 있다. (이병규, 요한계시록)
48. 144000 은 무엇일까?
계시록 7:4 에 나오는 인침을 받은 자들 144000 은 무엇을 나타내는 수일까?
12 는 이스라엘의 열 두지파를, 또 예수님의 12 제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1000 은 그 시대에 아주 큰 수를 나타낼 때 쓰인다. 144 는 12X12 로 이스라엘 12 지파와 예수님의 12 제자로 이루어지는 Area 를 의미하고, 그 정사각형의 Area 는 바로 하나님의 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44000 은 그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낸다.
49. 에스겔 4:4-6 에 나오는 390 과 40 의 의미는 무엇일까?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390 일은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나타내는 말로 390 년 동안 그들이 죄악을 행하였다고 하신 것이고, 40 일은 유다 족속의 죄악을 나타내는 말로 40년 동안 그들이 죄악을 행하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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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90 과 40 에 대한 많은 해석이 분분하다. 몇 개를 소개하면,
여로보암부터 예루살렘 함락까지 이스라엘이 범죄한 390 년을 상징한다
이 두 기간을 합하면 430일인데 이는 430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30년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지낸 기간을 생각나게 하는 기간이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 년 동안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의 땅에서 포로로 살면서 영적인 훈련을 받으며 살다가 때가 되면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390 일: 이스라엘의 죄(여로보암-바벨론으로부터 귀환까지 약 390 년)
40 일: 유다의 죄(바벨론 포로부터 귀환까지 약 40 년
390 년은 대략 솔로몬 때 성전이 헌당된 시점에서부터 파괴 시점까지이다.
다른 하나는 390년과 40년을 합해 일수로 나타내고 모세가 기록한 칠배의 벌을 곱하고 여러 복잡한 계산을 하며 맞추는 해석이다.
이렇게 분분하지만 하나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거나 명쾌한 것은 없다.
이 390 과 40 을 해석하는 데는 수학보다는 특히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390 과 40 의 해석은 결코 정확할 수 없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이 둘의 숫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하나님을 향한 죄악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것과 같이 어떻게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인들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죄악의 해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라보시고 감찰하시는 분이 한 분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가 혹은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가 모르는 자신들의 죄악도 보아오신 분이기에 정확하시다. 그분이 보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악의 기간들이 각각 390 년이고
40 년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전혀 알 수도 없고 계산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하나 하나 다 보시고 알고 계시는 전지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라는 마음을 주신다.
50. 기드온의 300 용사의 의미는?
32,000 → 10,000 → 300.
만약 이 숫자가 돈이라면... 백만원 단위라면 실감이 난다.
320 억원이 줄어 100 억원으로, 그리고 결국은 300 만원으로...
지금 눈 앞에는 320억원보다 훨씬 더 많은 1,250억원을 가진 자가 기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근데 내가 가진 돈이 이렇게 32,000 → 10,000 → 300 만원으로 줄어든다면 어떤 마음일까... 벌써 기는 죽고, 싸우는 것도 포기하고 싶고, 내가 가진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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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숫자는 돈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두고 싸우는 전쟁에서의 숫자이다.
처음 32,000 명에서 줄고 줄어 300 명이 된다면 그 싸움은 하나 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 숫자를 전혀 다르게 보고 계시는 다른 한 분이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숫자 개념과 나의 숫자 개념이 다름을 보며... '하나님의 숫자 개념'을 이해하려 해본다.
전투 전에 기드온이 받은 하나님의 명령은 병력을 소수로 줄이라는 것...
의외이다...
기드온이 모은 군사의 숫자는 32,000 명이었다.
그들은 기드온의 고향 사람들인 아비에셀 주민들과 기드온의 소속 지파인 므낫세 사람들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북부 지파인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삿 6:34-35). 하지만 이 인원은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군사들의 수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였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삿 7:1)
하나님은 기드온이 '여룹바알'에서 머물지 않고 이제 '여룹미디안'이 되기를 원하신다. 삶에서 끊임없이 고개드는 두더지들인 미디안을 망치로 내리치는 여룹미디안이 되기를...
근데 하나님은 숫자를 줄여야 미디안을 넘겨주겠다 하신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미디안과 싸우기도 불리한 상태인 기드온의 군대...
숫자로도 이스라엘 32,000 명과 미디안 약 125,000 명.
그런데 하나님은 이 32,000 의 이스라엘 군사를 줄이고 줄여 300 명으로 고르신다.
이 300 이라는 숫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어하신 것은 무엇일까...
왜 하나님이 그러실까...
하고 묵상하는데 요한복음 11 장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 남매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신다. 예수님과 이들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 같다(요 11:5). 그런데도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어도 즉시 오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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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라며 쓴소리를 한다.
그 말에 대해 예수님은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믿느냐...라고 어쩌면 염장지르는 소리를 하신다. 그러나 마르다의 믿음이 대단하다. 요 11:27 에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며 베드로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한다.
그리고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돌을 옮겨놓으라(요 11:39)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른 신앙고백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작동되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가신 그분이 "돌은 너희가 옮기라"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이 돌이 무거워서 "너희가 옮기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고백대로 아주 조그마한 일이라도 감당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신앙고백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무덤가에서, 직장에서 믿음이 작동되도록 하라는 말씀이시다.
나는 죽은 나사로는 살릴 수는 없지만 성의껏 돌은 옮겨놓을 수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별짓 다하면서 순종은... 사랑은... 돌은... 옮기려하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기드온의 줄이고 줄인 300 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하나님은 잘 준비된 300 명과 일하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32,000 명을 300 명으로 줄이신다.
무덤에 있는 돌을 옮기는 것만큼 별 일도 아닌데 하나님은 뭐하러 물 마시는 자세를 보고 엄선하실까...
아무리 별 일 아니라도 하나님은 준비안된 사람과 일하고 싶어하시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에, 돌 옮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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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통일, 민족 해방의 구호를 외치다가 골리앗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양치는 일에 그저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은 좌절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쓰신다. 32,000 에서 300 명으로 선발하는 기준은 현실 앞에서 떨지 않는 자이다(삿 7:3). 그랬더니 2/3 가 탈락됐다.
현실이 어렵고, 사업이 망하고, 병에 걸렸는데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니 나는 망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하나님은 알라딘 마술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바꾸신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그들은 우리 밥이다" 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고백한 그 답안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은 겸손의 능력을 아는 사람을 쓰신다. 왜 줄였다고 말씀하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 한 목적은 단지 이방의 압제를 그치게 하려는데만 있는 게 아니라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성시켜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으셨다.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다.
그것은 숫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싸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효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의지하라고 요구하신다.
사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은 300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삿 7:5)...
당시에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은무릎을 꿇고 우상에게 경배를 드리곤 했다.
그렇기에 300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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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님이 수학도 가르치시네?
하나님은 몇 명이든 우상을 섬기지 않는...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이면 뭐든 할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삿 7:7) 선발된 300 명...
최정예 용사들이었을까...
32,000 명에서 22,000 명은 두려워하는 자들이었고(삿 7:3), 9,700 명은 부주의한 자들었다(삿 7:5-6).
하나님은 힘에 의해 선발한 것이 아니라 신중함을 기준으로 선발하셨다.
물 마시는 방법에 의해 실시된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한 300 명의 용사들은 하나님께서 펼칠 작전, 곧 야간 기습 공격에 적합한 자들이었다. 밤중에 몰래 펼쳐질 그 기습작전에는 세심한 주의와 신속한 행동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기드온의 300 용사는 전투에서 하나님만 있으면 32,000 이 아니라 300 으로도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전쟁에 임해서 결국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용사였다.
이제 하나님의 숫자 개념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왜 32,000 보다 300 이 훨씬 더 낫다고 하시는지...
3,2000 이란 숫자와 300 이란 숫자를 묵상해보면... 32,000 은 불리하지만 애쓰면 이길 수 있는 숫자이지만... 300 이란 숫자는 절대로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숫자이다.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은 내 힘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두손 두발 다 들으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한다. 교만하면 죽는 것이고, 겸손은 그런 면에서 능력이다.
삶에서 어려운 상황과 문제 가운데 있을 지라도...
나를 믿고 열심히 하고자 했던 32000 에서 이제 300 까지 내 것을 다 내려놔야 한다. 조금만 참으면...
이제 300 으로 납짝 엎드리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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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가나안 정탐은 무리수?
하나님이 주신 땅 앞에서 눈 앞의 상황들은 보면서도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은 가나안 정탐을 통해 원망하며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맞는다. (민수기 13-14 장) 원망은 믿음의 반대말이고, 원망은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정탐'하자고 무리수를 둔다.
하나님이 맛있게 밥상 차려놨더니 '이건 무슨 맛이고 저건 무슨 맛이죠? 맛보고 먹을래요.' 하는 것과 같다.
'무리수'는 끝이 없이 가는 decimal number 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나 약속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상상으로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두려움이고, 그것은 끝이 없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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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목사 이야기를 기억한다.
상황은 자꾸 그를 절벽으로 몰아가고, 결국은 절벽에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는데도 하나님은 그의 등을 밀으셨다. 그리곤 그가 발견한 것은 그에게 절벽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날개가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300 은 바로 이런 날개를 찾는 고난의 여정이다. 그러나 300 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숫자 개념'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보시는 숫자의 unit 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32,000 의 unit 은 '믿음이 없음'이고...
300 의 unit 은 '믿음의 정예' 이다.
두 숫자의 unit 이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다.
마치 하나님의 숫자 개념은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과 같다. "32,000 과 300 중 어떤 것을 선택할래?
근데... 두 숫자가 unit 이 틀리거든.
32,000 의 unit 은 '원' 이고, 300 의 unit 은 '억원' 이거든... 32000 원과 300 억원...
어떤 것을 선택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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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52. 답안에 가장 좋은 답을 써 넣는 방법은?
시험에서 Multiple Choice 인 경우에는 A) 부터 E) 까지 차례로 답을 체크해야 할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럴 때는 A) 부터 E)까지 순서대로 체크하는 것 보다는 먼저 C) 를 체크하고, A) E) B) D) 로 하는 것이 좀 더 낫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때론 인생에서의 삶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한 답안은 어떻게 적성할까?
역대하 20 장 13-30 절에서 야하시엘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신다. 여호사밧은 전쟁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만을 신뢰한다. 싸워야 할 전쟁에서 사복입고 찬양을 한다. 하지만 적들은 전멸한다. 누가 싸웠을까?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내가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한다. 만약 홍해가 앞을 가리고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온다면 하나님이 일하시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돕는 길은 가만히 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이다.
내 눈 앞에 실제처럼 일어나는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지로 받아 들고 그곳에 내가 적는 답안대로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답안에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
1. 두렵다 (1 번 답을 쓰면 두려운 상황이 되도록 하나님은 팔짱끼고 기다리신다)
2. 죽고 싶다 (2 번 답을 쓰면 죽고 싶은 상황이 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3. 하나님이 일하신다 (3 번 답을 쓰면 하나님이 즉시로 개입하신다)
4. 내가 열심히 풀어보자 (4번 답을 쓰면 내가 엉켜버린 실타래를 하나님께 내밀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실제로 내게 일어나는 어려움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문제지로 여기고 내가 답안지에 써 넣는 답안대로 실제 문제들을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네가 써 넣은 답안대로 내가 일할꺼다"
라는 신실함에서 경험된다.
53. 정지도 운동이다?
뉴톤의 법칙은 세 가지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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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도 배우고, 은혜도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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