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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unch Magazine LLC, 2020-10-21 21:33:45

Brunch Magazine Vol.15 2020

vol.15 - 2020
Hello Fall

B RU NC H

magazine

vol.15
2020

Brunch Kid Model Special Interview Brunch Meets Cooking Story Baking Story

제2회, 제3회 디자이너 ‘이상봉’ 한국의 심은섭 Cecilia’s Kitchen 생과일 쿠키 만들기
브런치 키즈 모델 발표 우주 박사님



www.en.airfish.co

Stella Park Seungho Yang Gahyeong Kim I An Kim

www.bmentertainment.group

뉴욕 새로운 개념의 엔터테이너 양성 교육기관

비르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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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ksainfed in style
Aerosilver Face Masks for kids & adults
Stylish and functional face mask necklaces



p.20 p.36 p.94

Contents

P.9 - Brunch Kid Model Contest P.69 - Kids Story P.86 - 미담 Story
Congratulations COVID-19 Art Contest 꿈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P.12 - Fashion Story P.72 - Fun Recipe Story P.88 - Fun Illust Story
Mary Quant Luca Mom’s 재미있는 Recipe 기코작가의 숨은그림 찾기

P.20 - Special Interview P.74 - Wellness Story P.90 - Cafe Story
디자이너 ‘이상봉’ 간헐적 단식 레이지데이지의 카페 탐방

P.30 - Special Proejct P.79 - 고사성어 P.94 - Cooking Story
한국의 심은섭 우주 박사님 長短相較 장단삼교 Cecilia’s Kitchen

P.36 - Brunch Kids Lookbook P.80 - Yoga Story P.96 - Baking Story
인생 吉 이야기 Mukti’s Yoga Story 생과일 쿠키 만들기

P.56 - Art Story P.82 - Ballet Story P.99 - Brunch Market
Edward Hopper 발레로 만나는 Cinderella 이야기 가을 마켓

P.62 - Interior Story P.84 - English Story
Louis Poulsen 손은 왜 두개 인가?
Luca Mom’s 재미있는 레시피

BRUNCH KID MODEL CONTEST

CONGRATULATIONS

제2기, 3기 합격자를 소개합니다.

INTRODU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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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ohne g2nrdaBrtuunlchaKtidioMnodsels

BRUNCH KID

CTohne g2nrdaBrtuunlchaKtidioMnodsels

MODELS

FASHION STORY

MARY QUANT

1934~PRESENT
패션은 집밖에서 경쟁하기 위한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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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디자이너 ‘이상봉’

Designer, Sang Bong Lie

Brunch/ 이상봉 선생님께서 런칭한 LIE SANGBONG은 본인의 성함을 B/ 우리 것을 디자인적으로 잘 녹여낸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따신 것 같은데 영문이 좀 독특합니다. 성(last name)이 Lee가 아니고 관심 있어 하잖아요? 단청, 기와, 한복의 곡선 등 소재는 무한하지만
Lie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영문으로 라이, 거짓말이라는 뜻도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요. 쉽지도 않고요. 그 중 한글을
연상되는데요. 디자인과 접목시킨 작품이 새로워 보였습니다. 아니 너무너무 멋지십니다.
이상봉선생님께서 한글 텍스트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던
Sang Bong Lie/ 세상에서 나만의 성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제가 첫 단추는 무엇이었을까요?
브랜드를 런칭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제 이름의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누구도 쓰지 않았던 L/ 제가 한국에서 컬렉션을 계속해서 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파리에
이름을 가지고 싶었고 어떤 외국인 분도 성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진출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접목해 패션쇼를 시도한 게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한국분들만 질문하시곤 합니다. 샤머니즘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불수교 120주년을 앞두고 2005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각 장르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과정에
B/ 선생님 학력에서 흥미로운 점을 봤습니다. 서울예술대학 이왕이면 우리나라 한글을 모티브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방송연예과에서 공부하셨더라고요. 혹시 어떤 사연이 있으실까요? 대한민국 디자이너의 의무감으로 시작한 게 폭발적인 외국인 바이어와
프레스의 반응을 보며 용기를 얻고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L/ 저는 고등학교 때 꿈이 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저희 직원들조차 반대하였습니다.
작가 교수님들이 계시는 서울 예술대학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해서 친구가 없던 저는, 연극이라는 새로운 예술에 접하면서 꿈이 B/ 선생님 80-90년대에 한국 패션디자인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기
연극지망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잖아요. 해외로 나간다는 것 조차 상상하기 쉽지 않은
때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파리에 진출하셨는데 디자이너 시기
B/ 통상적인 질문이지만 이상봉님은 언제부터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초반 해외 무대는 이상봉님께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결심하셨는지요?
L/ 첫 파리 진출은 영국 패션쇼에 진출하려던 꿈이 IMF로 좌절되면서
L/ 대학시절 연극인의 꿈을 꾸었지만 공연 일주일을 남기고 외아들로서 파리에 옷을 판매하는 전시에 참가하였던 것이고, 이 때 외국
집안에 대한 책임감으로 도피하다가 우연히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이어들에게 첫 전시부터 1,000pc 이상의 오더를 받으면서 용기를
수선집을 하면서도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국제 패션디자인 얻었습니다. 그리고 5년 정도 1년에 두 번씩 파리 전시회에 참가하고
연구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디자이너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2002년에 꿈에 그리던 파리 패션쇼를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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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2011년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프리 프로그램 때 B/ 홍익대학교 대학원 원장에 재직 중이시잖아요. 학교라는 틀은
입었던 의상이 당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한국 수묵화를 토대로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만들어졌잖아요. 그야말로 엄청난 감동이었습니다. 어떻게 착안된
아이디어이며 이를 의상에 구현해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요, 선생님. L/ 예전에는 은퇴하면 내가 배우고 느꼈던 일들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좀 더 일찍 학교를 선택했던 건 일할
L/ 제가 파리 패션쇼를 할 때 출국 이틀 전에 저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 수 있는 능력과 영향력이 있을 때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치매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은퇴하고 학교로 가는 건 비겁하고 학생들에게도
요양원에 계시고 여동생의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나서 제가 장례를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돌봐야 하는데 파리 스케줄에 맞추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울면서
비행기에 올랐지요. 귀국하고 조카와 함께 동생이 안장된 강릉에 가게 B/ 그렇다면 이상봉선생님께서 꿈꾸시는 후진양성은 어떤 모습을 띄고
되었고 오랜만에 설악산에 올랐다가 아름다운 산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있을까요.
파리 진출 후에 설악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는데 동생으로 인하여
다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수에 빠지게 되었고 김연아 선수를 위해 L/ 진정한 제자를 키워내는 건 지식전달이나 이론적인 학문 전달이 아닌
우리나라의 수묵화 의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같이 작업하고 함께 하는 것이며, 필요한 건 보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B/ 디자인의 다음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여쭤볼게요. 시간의 흐름과
함께 패션 뿐만 아니라 디자인 시장 전체가 커졌지만 경쟁 또한 치열한 B/ 디자인과 색은 동전의 앞뒤 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까요?
분야라고 보입니다. 열정만으로 뛰어들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오감 중 특히 시각은 디자인과 밀접하고 그 시각은 색에 의해 많은 부분
센스와 감각 이외에 디자이너로서 갖춰야 할 인문학적 요소와 가치관이 결정되고요. 디자인에서 색채의 중요성을 볼 때 색채에 대한 감성적
있는지 인문분야 에디터가 궁금해하네요. 접근을 넘어서 과학적 연구 또한 중요하다고 보여서요. 색에 대한
이상봉선생님의 철학이 있으실까요?
L/ 디자인이란 그 시대와 소통하고 그 시대를 위한 디자인이 사랑
받고 인정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파인 아트는 시대를 초월할 수 있지만 L/ 색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장소와 시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
디자인은 시대와 공존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습니다. 디자이너는 그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패션 신인 디자이너일 때 집이 불이 나서 타는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적인 코드를 이해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자긍심과 시대를 앞서가는 예지력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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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바라보면서 빨간색만으로 패션쇼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L/ 그 시대의 영화, 스포츠, 세계적인 사건 등 아니면 문학이나 미술까지도
집이 타는 것을 보고 통곡하시는데 저는 집이 붉은 화마에 쌓여있는 참 많은 영감을 받아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1%의 가능성만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색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색은 있어도 도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저의 회사 입구에 30년 전부터 이
감정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디자이너는 시간과 촉각만이 아닌 청각이나 문구를 붙여놓고 있습니다.
후각까지 오감을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B/ 이상봉님이 패션에서 추구하는 기본 컨셉과 그 컨셉을 채워나가는
B/ 고 앙드레김 선생님의 경우 흰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계셨잖아요. 일련의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아마도 이 질문은 패션의 메카 뉴욕에서
혹시 이상봉선생님께서도 특별한 의미를 두는 색이 있으신가요?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L/ 저는 검정과 빨강입니다. 젊은 디자이너 시절에는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L/ 저는 패션을 물과 구름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물은 흘러가거나 담겨
계절과 상관없이 입고 다녀서 검은 망토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있을 때에도 사물에 맞게 형태가 변하게 되지요. 구름은 어디든 머무를 수
있고 한 곳에 정착하지 않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시대와
B/ 선생님께서는 멋지게 해외시장개척을 하셨고 이제 여러 해가 함께 하는 것이 살아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났습니다. 해외시장에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와 정착한 이후 어떻게
달라지셨다고 생각하시나요? B/ 의는 인간 생활의 최소요건인 의식주 중 하나로서,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기본적인 요소로 교과서에서도 배워왔잖아요. 과거 대다수가
L/ 제가 처음에 진출한 1997년도에는 대한민국을 모르는 사람이 어려웠던 시절 통용된 관념인지라 근대 문물의 도입과 함께 지금 시대에
많았습니다. 실제로 MBC 방송국에서 저의 파리 패션쇼 다큐를 의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의에 대한 대중의 시각도
찍으러 모델에게 인터뷰를 하는데 먼저 한글을 묻기 전에 대한민국을 달라졌고요. 어쩌면 실용과 심미라는 경계에서 의와 패션이 정의될 것
아느냐고 물었는데 모델이 Korea가 뭐냐고 되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데요. 이상봉님은 의와 패션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지요.
한글을 물을 수도 없었지요. 그 뒤로 한국(영화, K-Pop, 드라마 등)이
조금씩 해외 진출을 하면서 우리나라가 알려지기 시작했죠. 저의 옷을
수입하려던 바이어가 제조국을 일본으로 할 수 있느냐고 제의했는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해서 거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B/ 패션이라 함은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또 변화를
주도하는 분야잖아요? 특별히 변치 않는 선생님의 가치관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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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옷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까요? 한국 디자인의 전문가가 읽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도 궁금합니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노동이나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인 조건에
해당하고, 선진국에서 패션은 자신의 개성과 치장을 위해서 자신을 꾸미고 L/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4차 산업화가 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가꾸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옷은 때와 장소, 목적에 맞추어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패션은 세계의
입는 형태의 의상을 옷으로 표기할 수 있겠지요. 선진국에서 패션은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옛날처럼 스타일이 존재하기는
다양한 소재와 환경이라는 사이클에 맞추어 발전되고 사랑 받아 우리 힘듭니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서 4차 산업보다 더 큰 변화가 디자인과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유통에서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온라인 마켓을 통하여 세상은 소통되고
발전될 거라 생각합니다.
B/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한글과 수묵화 등 한국 전통 문화에 깊은
애국심이 느껴지고 애착이 보여집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실까요? B/ 대중이 이상봉님을 기억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 보시나요.

L/ 해외 진출을 하기 전 한국에서의 활동은 몇 년에 한번씩 우리 문화적인 L/ 아무래도 한국에서 처음에 알려진 계기는 MBC <무한도전> 출연
요소를 발표하던 것이었습니다. 파리에서 한글을 발표하면서 같은 소재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한글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제게 용기를 준 건 한글 이외에 하나씩
우리의 문화적인 요소를 패션에도 도입하여 과거에 머물던 문화를 현재와 B/ 특별히 기억에 남는 패션쇼, 전시, 공연이 있으신가요?
미래로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화로 표현된 디자인들이 별로
없어서 차라리 독창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L/ 기억에 남는 패션쇼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패션쇼를 했을 것입니다. 200번은 넘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B/ 선생님은 지금도 최고의 자리에 계시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꿈을 서울, 파리, 뉴욕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꾸고 계실 것 같습니다. 혹시 선생님 꿈이 있으신가요? 살짝 귀띔을... ^^ 수교행사나 기업브랜드, 해외 초청 패션쇼 등 너무 많습니다. 매 순간
패션 뿐 아니라 디자인의 영역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계신데 지속적으로 모든 패션쇼는 긴장감과 생각지 못한 돌발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지향하는 바는요? 라이브로 한 번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패션쇼에는 퍼포먼스와
다른 예술과의 콜라보가 많아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홍신자 무용단과
L/ 저는 세가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봉이 추구하는 우리문화를 94년도 안성 숲 속에서 밤 9시에 무용과 패션이 자연과 어우러졌던
패션을 통해 세계에 알리는 것. 두 번째는 홍익패션대학원의 원장으로서 패션쇼는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모스크바 패션쇼와
후배 양성과 교육으로 한국 패션의 세계화 진출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했던 패션쇼는 장소의 특별함 때문에 지금도 기억에
싶은 것. 마지막으로 고교패션테스트와 고교모델콘테스트를 만들어 남고 2012년도 런던 올림픽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빅토리아 앤 알버트
운영하면서 어린 꿈나무들의 패션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게 저의 마지막 뮤지엄에서 했던 패션쇼는 나에겐
도전입니다.

B/ 세계 디자인의 흐름 속에 한국 디자인의 흐름과 변화는 어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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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영광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기증했던 의상들이 돌아가서 뮤지엄에 B/ 디자이너 외길 인생 30년을 넘게 걸어오셨잖아요. 멋지십니다. 행여
전시되고 있습니다. 후회는 없으신가요?

B/ 그냥 스스로 나를 한번 돌아본다면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 사업가, L/ 저는 후회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많은 것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교육가로서 여러 역할 속에 이상봉 선생님이 말하는 이상봉은 어떤 사람도 일도 부정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사람일까요? 보려고 노력합니다.

L/ 저는 사업가로서는 망하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교육자로서는 아직도 B/ 이상봉선생님께 인생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부족한 게 많아 아쉬움이 많습니다. 디자이너로서는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나의 능력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운도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L/ 지금 이순간. 사랑과 일 그리고 인연
태어나도 디자이너가 될 것입니다.
B/ 뉴욕, 뉴저지에 거주하고 타지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브런치 매거진
B/ 디자이너로 살아온 길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 후배나 동료나 스텝이나 독자분들과 만나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희한테는 뉴욕에서도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활동하시는 자랑스러운 선생님같은 분을 만나뵌 것이 너무나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뉴욕에서 다시 뵐 날이 있겠지요? 꼭 다시
L/ 정말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함께 꿈을 키웠고 좋은 아티스트들과 뵙고 싶습니다. 혹시 이곳에 거주하는 독자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
작업도 많이 하였습니다. 정말 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몇 사람이 상처로 있으실까요?
남아있지만 그 또한 저의 부족함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저의 지금의
모습은 노력과 운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과의 열정과 행운이 모여 L/ 예전에는 누가 묻기 전에는 대한민국을 숨기시는 분들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조국을 이야기합니다. 전에 뉴욕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 강연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우리의
B/ 이상봉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요즘은 아이들 육아에 조국과 자신을 이야기하라고 말합니다. 선진국의 문화와 그들의 경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아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들 뵈면 어린 시절이 너무 위축되지 마십시오. 세계 문화에도 한국의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궁금합니다.
B/ 그리고 현재 Covid-19때문에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혹시 뉴욕에서
L/ 저는 철저하게 외아들로서 친구도 거의 없이 오로지 저의 꿈 속에서 패션쇼나 어떤 이벤트 계획이 있으신가요? 간절히 기다려집니다.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공부보다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고 중3부터는
나의 미래와 진로를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L/ 지금 세계의 패션은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온라인 수업, 온라인
문제아였습니다. 고교시절 가출과 방황이 많았었지만 제가 선택한 패션쇼, 온라인 쇼핑 등.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서로의 눈빛과 미소와
만큼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어렸을 적 꿈은 계속 바뀌고 성장합니다. 정신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교민들과 함께 우리 문화를 통한 패션쇼와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자신을 전시 등을 하고 싶습니다.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을 다 만나 뵙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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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Sang Bong Lie)

1984 - 현재 ㈜ 이상봉 설립, 대표
2012 – 2015 CFDK대표 (Council of Fashion Designers in Korea)

2018 – 현재 홍익대학교 패션대학원장

1994-현재 | 서울 컬렉션(SFW - SEOUL FASHION WEEK / SFAA - Seoul 2011 | 인천 공항 개항 10주년 기념 갈라 디너 패션 쇼
Fashion Artist Association) 2011 | VOGUE KOREA 창간 15주년 기념 Fashion into Arts 전시 참가
2011 | 국립 중앙 박물관 특별전<바로크ㆍ로코코 시대의 궁전
2014 - 현재 | New York Fashion Week 컬렉션, 뉴욕, 미국 문화>의상전시
2011 | 페르노리카 코리아, More Than Whisky Chivas Regal 작품 공동
2017 | 남양주 국제대회 ‘SLOW LIFE’ 초청 패션쇼 제작 및 런칭
대한민국 아름다운 선거 초청패션쇼 2010 | 행남 자기 이상봉 에디션 런칭 [영국 런던 V&A 박물관에 영구 전시]
2010 | ‘FESTA ON ICE’ 김연아 및 출전 선수 의상 디자인
2017 | International Fashion Week 휘날래 초청쇼, 광저우, 중국 2010 | ALL THAT SKATE L.A. 김연아 및 출전 선수 의상 디자인
2010 | 대통령배 E-스포츠 아마추어 대회
2017 | 서울 아트페어 전시, 서울, 한국 2010 | 선수/자원봉사자/심사위원 의상 디자인
2010 | 월스트리트저널(WSJ) 유럽판 한글광고 디자인
2017 | 광명동굴 ‘바비인형전’ 바비인형 의상 전시 2010 | 한국 러시아 수교 20주년 기념 모스크바 패션 쇼, 모스크바, 러시아
2010 | 이상봉 브랜드 설립 25주년 기념 청주 전시
2016 | 한국 프랑스 수교 130주년 라스코 광명동굴전시 오프닝 패션쇼 2010 | 청와대 초정 한글 작품 전시 (564회 한글날 어린이 기자단 청와대
하얼빈 인터네셔널 패션위크 오프닝 초청쇼, 하얼빈, 중국 초청 행사)
2014-2015 | FW New York Fashion Week 컬렉션 2009 | Blank Space Gallery ‘패션 아키텍트 뜨레드 컨스트럭션’ 전시, 뉴욕,
미국
2015 | 자카르타 Fashion Week,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2009 | 주영한국문화원 1주년 개관 기념 ‘한글=마음’ 전시, 런던, 영국
2009 | ‘ROSES’ 자선 전시, 도쿄, 일본
2015 |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루브르박물관 전시, 파리, 프랑스 2008 | 미키마우스 탄생 80주년 기념 전시, 파리, 프랑스
2008 | A1GP 한국 팀 유니폼 및 자동차 디자인
2015 | FIT 박물관 ‘Global Fashion Capital’ 전시 서울 대표, 뉴욕, 미국 2008 | 금호건설 리첸시아 아파트 인테리어 디자인
2007 | KT&G 에쎄 골든 리프 이상봉 에디션 런칭
2015 | 레스 아트 ‘Korea Now’, 파리 공예 박물관, 파리, 프랑스 2007 | 스와로브스키 코리아 ‘Crystallized’ 전시
2007 | 삼성생명 여성농구단/레슬링/탁구팀 유니폼 디자인
2015 | 대한민국 경찰 창설 70주년 기념 경찰복 디자인 자문 2007 | 삼성전자 인텔코리아 주최 이상봉 디자이너 PC 런칭
2007 | KT&G 이상봉 에디션 론칭 기념 패션쇼, 모스크바, 러시아
2014 | 한국 이탈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초청패션쇼, 밀라노 2007 | 프랭클린 플래너 이상봉 에디션 런칭
2007 | 스위스 메이드 유라 이상봉 에디션 커피 잔 런칭
2014 | ‘패션과 드라마틱 공간의 만남’ 가구 디자인, 체리쉬 2007 | 중국 상하이 ‘Preview in Shanghai’ 오프닝 패션 쇼
2006 | 프랑스 파리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 갈라 전시 기획 및 참가
2014 | 샘소나이트 아트 콜라보레이션 캐리어 디자인 2006 | ‘Who`s Next’ 한글 패션 전시, 파리, 프랑스
2006 | LG 전자 샤인 폰 이상봉 에디션 런칭
2014 | 광복 70주년 기념 리미티드에디션 핸드폰 케이스 디자인 2003 | 한국 인도 수교 30주년 패션쇼, 뉴델리, 인도
2002 | ‘한일 월드컵 기념’ 초청 패션 쇼, 도쿄, 일본
2014 | 체리쉬 ‘패션과 드라마틱 공간의 만남’ 소파 디자인 1997 | 예술의 전당 10주년 초대 패션 퍼포먼스
1996 | 죽산 국제 예술제 패션 퍼포먼스
2002-2013 | 프랑스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 1996 | 광주 비엔날레 국제 미술 의상전 패션 쇼 및 참가
2013 | 한국 스위스 수교 50주년 기념 K Style In The World 패션 쇼 1995 | 세계 월드 패션 쇼, 오사카, 일본
(취리히, 스위스) 1985-1993 | 중앙 디자인 컬렉션
2013 | 한국 스위스 수교 50주년 기념 K Style In The World 패션 쇼 WELT
Museum (비엔나, 오스트리아)
2013 |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특별전 <한류, 예술로 물결치다>
2013 | 인천국제공항 전통공예전시관 한글전시
2013 |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 특별리미티드에디션 여행용
캐리어디자인
2012 | 런던 올림픽 한국 국가대표 탁구 유니폼 제작
2012 | 2012 런던 올림픽 기념 ‘Korea Shining Bright’ 패션 쇼, Victoria &
Albert Museum (런던, 영국)
2012 | 초청 Opening Fashion Show, Asian Couture Fashion Week
(방콕, 태국)
2012 | MBC JAPAN “Korean International Style Show” 패션 쇼, 도쿄
요요기 국제 경기장 (도쿄, 일본)
2012 | 한글 Trans-‘한글:영감과 소통의 예술’, 서울시립미술관
2011 | ISU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김연아선수 프리의상 디자인
2011 | ‘Premium Korea’ Harrods 백화점 전시, 런던, 영국

BRUNCH MEETS

대한민국 우주 개발의 선구자!
우리 어리이들의 꿈과 희망,

한국의 심은섭 우주 박사님

Special Interview

Brunch/ 박사님, 안녕하세요. 항공우주과학은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우주에 대한 1995년 3월까지 참여하였습니다. 귀국한 후 1995년부터 아리랑 1호
과학적 연구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좀 더 자세하게 항공우주과학이란 개발사업에, 대한민국의 실용위성을 개발하는 주역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아리랑
어떤 학문인지요. 1호는 1999년 12월 21일 발사되었습니다. 주요임무는 6m 해상도를 갖는
광학카메라를 탑재하여 전세계 지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과 해양 관측과 우주
Dr. Sim/ 항공우주 과학기술은 21세기를 주도할 과학기술 중 하나입니다. 플라즈마를 관측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위성의 컴퓨터, 통신시스템, 전력 생성,
일반적인 과학탐구보다는 인류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우주개발이 지상국 자료 수신시설 등 전기전자 분야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지상국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주선을 개발하여 달과 화성에 우주인을 보내는 것입니다. 책임자로서 미국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위성을 발사한 후 지상국에서 교신을
공기가 있는 곳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체를 개발하는 것이 항공기술이고, 수행하였습니다. 지금도 첫 교신을 성공한 후, 많은 동료 연구원들과 기뻐하며
공기가 없는 지표면에서 100km 위인 우주를 나는 비행체를 개발하는 것이 환호했던 순간들이 엊그제 일처럼 생각납니다.
우주과학기술입니다. 별을 연구하는 천문우주과학도 넓은 의미에서
우주과학에 포함됩니다. B/ 대한민국 우주개발에서 아리랑 1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B/ 심은섭 박사님께서 항공 우주 과학 분야를 평생 연구하시며 몸 담게 되신 S/ 아리랑 1호는 대한민국 위성 기술 자립화의 초석을 마련한 국내 최초의 실용급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위성입니다. 해외 위성개발 산업체로부터 주요 부품에 대한 핵심 기술을 공동
개발 형태로 전수 받았습니다. 이는 향후 아리랑 2호 위성 본체를 독자 개발할 수
S/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9년에 미국의 닐 암스트롱 우주인이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업비는 위성 2대와 시험시설, 지상국 구축에 2,240
달착륙선을 타고 달에 내리는 역사적인 장면을 읍내 가게에서 흑백 TV로 억원이 소요되었습니다. 무게가 470kg으로 중형위성급인 아리랑 1호가 획득한
보았습니다. 한밤 하늘에 떠 있는 달에 인류가 발을 내 딛는 장면은 지금도 영상은 국토관리 및 지형조사, 지도제작, 지역감시 등의 분야에서 활용됐으며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학을 좋아했습니다. 각인된 임무 기간 동안 고도 685km 궤도에서 지구를 4만 3,000여회 선회하며 약 47만
한 장면은 꿈을 쫓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 장의 위성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아리랑 1호는 당초 설계 수명이었던 3년보다 2배
전기공학과에서 제어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항공우주공학과에서 이상인 8년 동안 임무를 수행한 뒤 2008년 1월에 임무를 종료했습니다.
포스트탁터를 마친 후, 한국에서 신설된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 들어와
우주과학기술 분야에 계속 몸 담고 한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B/ 우주 연구에 있어 기초 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겨지는데요. 대한민국의 경우 항공우주분야 발전을 위한 기초과학의 토대는
B/ 뉴스 보도만로 들을 수 있었던 과학기술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디까지 왔을까요?
할 수 있다니 꿈만 같은데요. 사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외세에 억압받고 한국
전쟁의 발발로 20C중반까지도 과학의 토대가 미흡했습니다. 이후 국난을 S/ 비록 한국이 과학분야에서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극복하고 경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처음 국내에서 만든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 1 교육열은 세계에서 선두 그룹에 속하고 있고, 국력은 톱 10위권에 듭니다.
호가 발사되었습니다. 아리랑 1호 개발자로서 그 때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기초과학의 토대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든다고 생각되지만, 수백 년의 대학 역사를
가진 유럽과 미국의 선진국에 따라 가려면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S/ 1991년 항우연에 입소한 후, 1992년 9월에 한국통신(Korea Telecomm)
에서 미국에 발주한 무궁화위성의 기술전수요원으로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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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고 항공우주과학 분야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위해 우주주파수조정그룹(SFCG)이라는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
주셨던 그 분이 그 당시 그 그룹의 의장님이셨습니다. 큰 사업이어서 기술적인
S/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정밀한 지구 관측이 가능한 아리랑위성 3호, 3A호, 문제들이 매우 많았지만, 노력하고 힘을 합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
전천후 지구 관측이 가능한 레이더 위성인 아리랑위성 5호, 정지궤도위성으로 1호가 1999년 12월 21일 오후 4시13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기상 관측, 해양관측이 가능한 천리안위성 1호, 천리안 1호의 후속 위성인 발사장에서 성공리에 발사되었습니다. 하지먀 그날 밤 10시 32분에 항우연의
기상관측위성 천리안 2A호와 2B를 개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상국과 교신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제가 임무운영책임자
선진국보다 늦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국가 주도로 위성 개발을 시작했으나 (MOM)여서 모두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날
우수한 연구개발 노력으로 오늘날 세계 6~7위권의 인공위성 개발 기술력을 밤을 지상국 연구원들과 꼬박 새우면서 노력하여 9시간 만에 위성과 교신을
확보했습니다. 항우연은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고 있으며 2018년 11월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시험발사체 성공으로 세계에서 75톤급 중형 액체로켓엔진 기술을 보유한 7번째 또, 과학기술위성 1호는 2003년 9월 27일 오후 3시 11분(한국시각) 플레세츠크
국가가 되었습니다. (Plesetsk) 우주센터에서 러시아의 COSMOS 3M 로켓에 의해 발사되었고,
발사는 성공하였습니다. 다음날 발사장에서 발사 성공을 보고 귀국 중 모스코바
B/ 어린시절 영화나 책에서 보아온 우주 탐사는 말 그대로 신비롭게만 호텔에서 한국의 KAIST 지상국에서 위성과 통신을 이루지 못한 상황을
보였습니다. 박사님은 어린 시절 특별히 과학에 흥미를 가진 모습이었는지 들었습니다. 29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내려, 곧바로 대전의 지상국에 가보니
궁금합니다. 많은 기자들이 총괄사업책임자인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책반원들과
회의하고 위성이 우주궤도상에 있으니 대안을 세워 위성을 찾겠다고 기자들에게
S/ 저의 어린시절,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집에 라디오는 말했습니다. 그날 밤 11시 19분에, 발사 후 56시간 만에 교신에 성공시킨
있었지만, 오늘날 흔히 갖고 있는 전화, 냉장고나 TV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음에야, 귀가하여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노력으로 끼니를 건너 뛰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화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 했습니다. 그 중 로봇 B/ 우주에 관심있는 어린이에게 추천할만한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마치스테 만화와 깡통 로봇 만화를 좋아 했습니다. 그때는 공부를 잘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S/ “Explore NASA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웹사이트를 방문하여 자기
레벨에 맞는 여러 자료를 살펴보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미국 NASA는 우주를
B/ 박사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아무래도 자녀를 둔 독자분들이 연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관입니다. 그리고,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우주공학박사를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가정교육을 국립항공우주박물관 방문 또는 Virtual Tour을 추천합니다. 천문대를 방문해서
해야 박사님처럼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 별들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드론이나 모형 비행기를 날려 볼 수도 있습니다.
우주개발은 모든 과학분야가 포함되는 종합 과학분야이므로 과학과 수학에
S/ 저희 부모님은 공부를 많이는 못 하셨지만, 7명의 자녀를 잘 양육시켜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주셨습니다.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자녀의 장래는 부모님의 사랑에 의해 B/ 항공우주는 앞으로 무궁무진한 분야라 미래산업으로 각광받는 분야이지만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획일화된 교육이나 강요에 의한 교육이 절대 쉬운 분야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분야를 평생 연구하고픈 학생들에게
아닌, 소리 없이 뒤에서 믿어주고 받혀주신 사랑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차로 통학했던 중학교 시절, 어머니는 매일 새벽 기도에 다녀오신 후 불을 떼서
새벽밥을 지어 주셨습니다. 매일 뜨거운 밥을 해 주시면 저는 기차 시간에 늦지 S/ 미래 블루오션인 항공우주 과학기술은 21세기를 주도할 과학기술의
않기 위해 찬물에 말아서 후루룩 마시고 첫차를 타고 학교에 일찍 가서, 예습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공지능이나 IT 분야는 소수의 연구자에 의해 개발
복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애쓰신 어머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될 수도 있으나, 항공우주는 거대과학기술 분야로 많은 연구자들이 모여 연구하는
분야로서 자기가 맡은 영역을 잘 해야하고 또한 팀워크가 매우 중요함을 인식해야
B/ 과학기술위성과 무궁화, 아리랑 인공위성까지 여러 연구개발 중에 어려움에 합니다. 자기 인생을 바쳐 어느 한 분야를 연구하려면 그 분야를 좋아하고, 끊임
봉착한 경험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없이 노력하며,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S/ 무궁화위성 1호를 발사한 델타2 발사체에는 9개의 부스터가 부착되어
이것들이 다 타고난 후 바로 떨어져야 위성을 계획한 고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데, B/ 얼마 전 미국에서 민간 유인우주선 스페이스 X사의 드래곤 2호가
6개는 정상적으로 분리되고 나머지 3개가 늦게 분리되는 바람에 원래 예정된 발사되었습니다. 민간 우주 탐사로서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끈 장면이었습니다.
고도보다 6,350km 낮은 고도에서 위성이 분리되어 위성의 운영 중 사용할 박사님은 어떠세요?
연료를 먼저 사용하여 정지천이 궤도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10년
위성 수명이 5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프린스턴에 있는 GE지상국에서 이런 S/ 2011년 NASA의 스페이스 셔틀이 은퇴한 뒤 미국 유인우주선이 400km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60세 넘은 미국인 엔지니어가 침착하게 그 일을 상공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에 2명의 미국 우주인을 태우고 2020년 5월 31일
처리하는 것을 보고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도킹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젠 민간회사가 유인우주선의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아리랑 1호는 항우연에서 개발한 실용위성으로 1994년에 착수되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기존 로켓의 아나로그 버튼 방식에서 현대적인 터치 스크린으로
항우연의 첫 번째 위성이어서 해야할 일들이 매우 많았는데, 처음 해보는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 우주복과 매우 다른 새 우주복이었습니다.
것이었고 참여 연구원 대부분이 위성개발 경험 없었습니다. 저는 무궁화위성 스페이스 X의 우주복은 3D 프린터로 제작된 헬멧과 일체형의 날렵한 디자인이
개발 참여로 위성에 대해 조금 아는 정도였습니다. 나이도 40세이었구요. 제가 특징입니다. 우주인의 체형에 따라 맞춤 제작됐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전기전자 분야의 제일 시니어여서 관련분야를 모두 담당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성공이었습니다. 스페이스 X를 창립한 남아프리카 태생의 일론 머스크는 대단한
위성과 지상국 간에 통신을 하기위해서 사용하는 고유주파수를 정해 국제등록을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엄청난 애독가였답니다. 책을 통해 스스로 배우는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의 위성들의 주파수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것에 익숙했다고 합니다. 그는 항공우주와 전기차로 인류를 구하겠다고 합니다.
상태에서 한 주파수를 정해 국제통신연합에 신청을 했는데, 이 주파수가 그는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Ad Astra라는 학교도 만들었습니다. 테슬라
프랑스에서 개발하고 있었던 위성 주파수와 겹쳤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로부터 모터스사를 이끌어 자율주행 전기차도 개발하였습니다. 솔라시티, 인공지능 연구
이의 신청 레터를 받았습니다. 그분께 같이 사용하자는 양해 편지를 보내 의사를 기업인 오픈 AI, 뇌와 컴퓨터의 연결을 연구하는 뉴럴링크사를 설립했습니다.
타진한 결과, 양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들을 사전에 협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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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요즘 미국은 펜데믹 아니 전세계가 그러하지만 특히나 미국이 코로나로 S/ 항우연에서는 2022년 8월 발사 목표로 2016년부터 달 궤도선을 개발하고
제일 심각한 상황인지라 이런 상상을 한번 해 봅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이렇게 있습니다. 6개의 탑재체인 달 표면 관측용 고해상도 카메라와 편광 카메라, 달
어려움에 처하면 우리가 과연 언젠가는 우주 어느 별에 가서 산다는 것이 가능한 자기장 측정기, 감마선 분광기, 우주 인터넷 시험장비, 물 성분을 찾는 섀도우캠이
시대가 올 것인가… 가능할까요? 실리게 됩니다. 2차로 2030년에 한국형 발사체로 달 착륙선을 보낼 계획입니다.

S/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 40만km 떨어져 있어, 현재 기술로도 5일이면 도달할 수 B/ 얼마 전 공상과학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달의 자원(예를 들면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비록 공기는 없지만 달에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문 빌리지 헬륨-3)을 지구에 가져오려는 계획이었는데요. 사실 로켓을 발사할 때 비용이
(Moon Village) 같은 달 기지를 건설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화성에 어마어마하고 과연 실현가능하냐를 생각하게 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인류가 거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년 마다 화성이 지구에 가까이 오는데 편도 생각하면 항공우주 분야는 항상 실현불가능을 가능으로 보여주었습니다.
8개월 정도 걸립니다. 스페이스 X의 일론 머스크는 2024년에 화성에 우주인을 박사님은 이러한 달 자원 활용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태양을 제외하고 가까운 별은
센터우루스자리 프록시마인테 4.244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인류가 가기에는 S/ 달 표면 암석에는 태양풍으로 생성된 헬륨-3가 존재하고 있다고 알려져
너무 멀다고 생각됩니다. 있습니다. 지구로 가져올 수 있는 헬륨-3의 양은 25%라고 할 때, 이는 200~500
년간 지구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20~30년 후에는
B/ 이렇게 나라마다 우주개발에 힘쓰고 우주에 가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달의 헬륨-3를 채굴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탐사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B/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항공우주과학기술의 미래는 어떨까요.
S/ 항공우주기술은 냉전시대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발전했으나, 궁극적으로
인류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고 각 분야의 첨단산업을 주도하며 인류의 생활방식을 S/ 2019년이 비행기 엔진을 만들고 있는 GE항공 창립 100주년이 되는
근본적으로 바꿔왔습니다. 우주탐사의 목적은 지구와 인류와 생명체의 기원을 해였습니다. 미래에는 시속 3,500마일이 넘는 극초음속 항공여행이 가능하게
찾고, 인류의 지속적 생존 추구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머지않아 달이나 되어, 한 시간 이내에 지구 어느 곳에나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소행성에서 우주의 생성 기원을 연구하고, 우주광물을 채취해서 지구로 가져와 개인용 항공기가 등장하여 현재의 자동차처럼 개인들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주비행기를 타고 우주호텔로 여행을 갈 수 있고, 달과 화성에 식민지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항공우주과학기술은 미래를 주도할 분야 중 하나임이
B/ 민간인? 일반인들의 우주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분명합니다.

S/ 민간인들의 우주여행은 머지 않아 실현된다고 봅니다. 현재 우주여행을 B/ 참으로 오랜 기간 연구하고 결과물을 보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분야가
준비하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아마존의 창업주 제프 베조스가 설립한 민간 항공우주과학이라 생각됩니다. 박사님, 한평생을 무한한 우주공간 연구에
우주기업 블루오리진에서 뉴셰퍼드 로켓과 블루오리진 우주캡슐세트를 이용해 매진하시다가 많은 업적을 이루시고 이번 해는 은퇴를 앞두신 정말 뜻깊은 해라고
고도 100km에서 무중력 체험을 하는 준궤도 우주여행 프로그램을 시험 중이며, 들었습니다. 가족분들이나 매거진 독자분들께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나, 박사님
고전적 로켓의 형식이지만 캡슐은 재활용이 되고, 로켓은 스페이스 X 처럼 착륙 자신에게 회고 하시는 글도 좋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들려 주실 수 있을까요?
후 재사용하여 실질적으로 폐기되는 부분 없이 모든 우주선의 부품들이 알뜰하게
사용됩니다. 가격은 1억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궤도 우주관광 패키지를 판매 S/ 시골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희생으로 개발 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서울대,
중인 회사는 스페이스 X 크루드래곤 우주선을 사용할 비글로 에어로스페이스가 한국과학원에 수학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고, 30년간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있습니다. 4인승 우주선을 총 4회 발사하여 16명의 민간인에게 우주관광을 한국의 인공위성 프로그램이었던 무궁화위성, 아리랑위성, 과학기술위성 등을
제공할 예정이며, 1인당 비용은 약 5,200만 달러라고 합니다. 지구 저궤도에 연구개발 할 수 있어서 매우 보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우주호텔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미래에 일반인들이 달이나 화성까지 여행할 수 감사하고, 고락을 같이 했던 장경희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있을 것이고, 이는 상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B/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해져요. 박사님의 앞으로는 어떤 꿈을 꾸시나요? 왠지 또
B/ 실례가 안된다면 박사님 개인의 일상을 여쭙고 싶은데요, 개인적인 취미나 다른 꿈을 생각하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혹은 박사님의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은 무엇인지 여쭤봅니다.
S/ 3개월 후면 29년동안 몸 담았던 항우연을 은퇴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쌓은
S/ 코로나19사태 전에는 주말이면 오전에 병원에 가서 환우들 머리 감기기와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고 싶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체력이 받쳐주는
목욕 봉사를 했고, 주일에는 병원 예배가 2회 있어서 예배 준비와 환우 침대 기간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모셔오기 등을 거의 20여년간 했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환갑까지는 연구소에
있는 코트에서 테니스를 즐기곤 했습니다. 지금은 산속 전원마을에서 13년된 B/ 기회가 된다면 미국에 있는 어린이들과 박사님의 만남도 기약하고 싶구요 더
비즐라와 2년된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기르고 있습니다. 목공 기구를 가지고 있고, 많은 이야기가 계속 해서 듣고 싶습니다. 박사님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다면
데크를 직접 만들어 놓았으며, 목조주택과 목조 울타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해 주세요 ^^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10살 된 멋진 손자와 8살된 예쁜 손녀와 동영상 통화를
하는 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S/ 어린이들은 미래 사회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꿈을 가지고 노력하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B/ 인류가 최초로 달에 첫 발을 내딛은 지 5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달은
아직도 인간의 발이 닫기 어려운 곳이지요. 미국과 중국 외에 다른 나라들도 “If you want to change the world, start off by making your bed.”
여전히 달 탐사 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박사님께서 달 탐사
연구를 하고 계시는데 한국은 어떤 목적으로 달 탐사 연구를 진행하고, 언제쯤 -William McRaven-
도달하는 계획인지 조심스레 여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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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SPECIAL PROJECT

吉 이야기

Photography:
Jinhwan Choi (MOiM Studio)

Photo Editing:
Han Kwon (HJ Design Studio)

Brunch Editors:
Ja young Kim, Jieun Youn

Hanbok : @thehanbok
Hair/ Makeup : @jane_everwell
Flowers: @darlingmoon.flower

Model : Myungsoon Kim / Stella Park
Agency : BM Entertainment

Special thanks to Lisa Kim and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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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吉 (길) 이야기

 
(김명순 할머니 막내따님 인터뷰)
 
B/ 안녕하세요,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좀 알고 싶습니다.
S/ 1972년도에 미국에 오셨구요, 아버지하고 딸 하나, 아들 셋과 같이 오셔서
엄마는 직장일 안 하시고 집에서 가정주부로 일하시고, 여태까지 거의 50년을
저희 뒷바라지 하며 사셨어요.
 
B/ 뉴저지에 가족분들이 처음 오게 되신 건가요?
S/ 네, 뉴저지 쪽으로 처음 와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10살 때 이곳에
왔으니 48년 정도 되었네요. 저는 여기서 쭉 자랐죠. ^^
 
B/ 미국에 오게 되신 계기는 아버님 관련해서 오게 되셨나요?
S/ 네, 처음에는 아버지 일 관련으로 왔고, 지금까지 오빠들과 사업도 하며
지내왔습니다.
 
B/ 그러면 처음에 뉴저지에 정착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겠네요.
S/ 진짜 어려웠죠. 설움도 많이 받고, 특히 학교 같은 거, 동양인들이 많지
않다 보니까 놀림도 좀 받구요. ‘한국으로 다시 가고 싶다.’ 그런 마음도 있었고
힘들었죠. 그 땐 다 힘들었던 거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B/ 한국인이 많이 없었나요?
S/ 그렇죠, 학교에 가면 동양인이 많지 않으니까 놀림도 많이 받고, 말이 안
통하니까 그게 제일 힘들었죠.
 
B/ 그러면 부모님도 처음에 오실 때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셨나요?
S/ 그렇죠. 큰오빠가 그 때 고등학교 졸업해서 집안 관련된 영어를 다 도와서 해야
했으니까 힘들었겠죠... 어머니는 지금도 영어가 익숙하시지는 않으니까요.
 
B/ 어떤 어머니이셨어요?
S/ 엄마는 항상 집에 계신 어머니였어요. 살림하시면서 자식들 보살펴
주시고, 학교 다녀오면 항상 집에 계시는... 학교 갔다 왔는데 엄마가 집에 안
계시면 너무 서운했어요. 항상 나에게 Big support인 존재. 어딜 다녀와도 항상
계셔주시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그때는 학교 다녔어도 점심시간에 집에 올 수
있었거든요~ 그러면 오빠랑 같이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다시 학교 가고, 항상
그렇게 엄마는 집에 우리가 돌아오면 항상 계셔주시는 존재. 없으면 화가 나고
쓸쓸하고 그런 존재셨어요.
 
B/ 요리도 계속 집에서 해주시고요.
S/ 네, 요리도 계속 해주셨죠. 집에서 먹는 게 used가 돼서요. 그걸 또 좋아해요.
 
B/ 주로 어떤 음식 해주셨나요?
S/ 한국 음식 같은 거, 항상 한국 음식 하셨는데 아버지나 저희들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해주셨어요. 엄마의 취향보다는 항상 저희 가족들을 위한 음식들로
챙기셨어요.





 

(큰며느님 인터뷰)
 
B/ 어떤 어머님이셨는지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S/ 우리 어머님은 집에서 주로 살림하시고, 우리 일할 때 손주들 다
키워주시고, 아이들 먹는 거를 참 열심히 챙겨주셨어요. 먹는 것 다
챙겨주시고, 우리 다 직장 다니고 할 때 다 키워주시고 그러셨어요.
 
B/ 미국에 오신지 오래 되셨다고 들었어요.
S/ 네, 한 40년 넘었죠? 계속 챙겨주시고 맛있는 것 많이 해주시고요. ^^
 
B/ 그러면 같이 살고 계신 거에요?
S/ 네, 다 같이 살고 있어요. 저희 가족과 어머님 같이 살고 있습니다.
 
B/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는 어떤 어머니셨어요?
S/ 제가 처음 시집와서는 따로 살다가, 출산 후에는 애기 봐줄 분이 필요하다 보니
같이 살면서 키워주시고 그랬죠. 애들에게 너무 잘 해주셨어요. 손주들도 할머니를
다 좋아하구요. ^^

 
B/ 실례지만, 어머님의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정정하신 거 같아요^^
S/ 지금 84세 되십니다. 36년생이세요. 정말 정정하세요. ^^ 집 앞에 호수가
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호수를 돌면서 운동하세요. 저보다 더 건강하신 거
같아요^^ 소식도 하시구요.
 
B/ 가족분들이 너무 보기 좋은 것 같아요. ^^
S/ 네 감사합니다. ^^
 
 
사진 촬영하는 동안 브런치 매거진은 할머니 가족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씀은 다 안 하셨어도 낯선 이국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으실까요. 하지만 우리 할머니, 온
가족이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 좋게 지낸 덕분에 얼굴에 근심 걱정
없이 고우십니다.
일부러 김명순 할머니 인터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진으로 느끼고 싶었고 눈으로 하시는 말씀을 읽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 소녀에서 숙녀로 그리고 여자로, 
그리고 주부로, 그리고 엄마… 할머니가 됩니다. 긴 여행이지요.
수없이 많은 타이틀로 바꿔 달아가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여행하듯이
삶을 살게 되지만 늘 마음속에 소녀가 살고 있는 것이 또 여자이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삶.
한번 밖에 없는 단 하나뿐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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