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 5 · 6월 (권 287) 숭 조 돈 종 사진설명 : 종묘 대청 앞에 있는 오얏나무 (사진 : 박연) 2. 본원 소식 3. 재단법인 이장 소식 6. 영광의 얼굴 8. 肇慶壇 大祭 봉 9. 건원릉, 억새 자르는 청완예초의 거 10. 사직단 전사청 권역 복원 상량식 거 11. 건국 대령 우남 이승만 박사 신 146주년 기념식 열려 12. 기부를 진정 아름다움을 전는 이준용 DL명예장 15. 제사는 무엇인가(7) ………………………………………………………… 본원 문이사/문박사 이범직(李範稷) 19. 역사왜곡과 의 자유 ………………………………………………………… 본원 문이사/문박사 이범직(李範稷) 21. 조선왕릉실록(3) / 신의고 제릉 ……………………………………………………………… 李花보 주 · 시인 이규원(李揆元) 27. 대동기문(大東奇聞) …………………………………………………………………… 본원 부이사장 이승창(李承昌) 31. 만로 보는 역사이야기 101 ………………………………………………………………………………………… 이전경(李田景) 33. 어머니 봉양일기(4) ………………………………………………………………… 본원 문부 차장 이병준(李炳俊) 39. 117자의 긴 시를 가진 조선의 임금은 누구일까 ………………………………………………… 본원 문위원/ 왕실문 작가 이상주(李相周) 43. ‘매국노 고종’은 일제의 역사 왜곡이다 ……………………………………………………………………………… 서울대 명예교수 이진 45. 선릉 정자각 중건상량문 ………………………………………………………………… 본원 전례부 차장 이상(李商訓) 48.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 ………………………………………………………………… 본원 문부 위원 이문섭(李文燮) 52. 숨가 되고, 쉼가 되는 조선왕릉 ………………………………………………………………… 본원 전례위원 이재(李在鎬) 55. 부산 동래사직단(社稷壇)을 복원다 ………………………………………………… 부산광역시 부지원장/명예기자 이상용(李尙龍) 57. 어짐에 관 짧은 이야기 …………………………………………………………………………………………… 白思 이진우 59. 실록 령대군 일대기 …………………………………………………………………………… 양대 명예교수 이완재 60. 별원원 가입을 영니다 61. 사직대제보존 가입을 영니다 62. 승경원 건립기금 모금 성자 명단 발인/이귀남 집인/이범직 주/이규원 발처/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소/서울 종로구 돈문로 89 우번/03131 전/(02)765-2124 스/(02)742-1676 인쇄인/이재복 인쇄처/(주)경인인쇄 전/(02)2272-8063 발/2021년 5월 1일 등록/1973년 12월 31일 이지(http://rfo.co.kr) 이메일([email protected]) 값 2,000원 (1년 6, 정기구독 10,000원)
2 李花 287 제697 상임이사(2021. 3. 24.) ◎ 참석 : 상임이사 14명중 13명 참석 ◎ 의안 심의 결과 ․ 2021년도 조경단대제 봉의 건 - 코로나19 방역수칙을 감안여 참석인원은 제관, 준비위원, 상임이사 ‧ 감사 등으로 고, 소요예산 380만원 원안대로 승인. ◎ 보고 사 ․ 제212 이사, 제60 정기총 의안 서면 심의 결과 - 의별 찬 · 반 동의서 제출 및 의안별 원안대로 가결, 정관과 조직운영규정의 개정된 주요내용, 차기 이사 선출을 위 각 위원 구성 일정안을 보고 . ◎ 기사 ․ 숭인원 봉, 소경원 · 영원 봉 인준의 건은 조선왕릉 제 국고보조금 대상 결정시까지 인준을 보류기로 . ․ 승경원 건립 관련여 오전에 귀남 이사장님과 경 총무이사가 DL(옛 대림산업) 이준용 명예장(본원 목릉봉장, 이장 이사) 사무실 방문여 기금 모금에 5억원 납부 동참기로 답 받은 사 보고와 종친 중 건설업 시는 분 발굴여 추천는 방안 등 의견개진 . ․ 상임이사의 CMS(자동출금) 가입을 당부 . 본원 소식
李花 287 3 장금 기 종친 (2021.3.3~4.5) 기일자 기자 금액 비고 3.25 진(和鎭, 령군 16대) 70,000 본원, 문재청장과 간담 실시 본원 귀남 이사장은 4월 2일(금) 본원 이사장실에서 문재청장과 간담를 실시다. 이날 간담에는 변지 무문재 과장이 참석으며, 본원은 승창 부이사장, 경 총무이사, 은 전례이사가 참석다. 간담에서 귀남 이사장은 조선왕릉 제의 국가무문재 종목 지정 조, 종묘대제 · 종묘추대제 제비 예산 증액, 인원 묘역 조성 지원, 조경단 ‧ 조경묘의 국가지정 문재 신청, 조선왕릉 제 국고보조금 지급 범위 대 및 예산 증액에 대 내용을 건의다. 재단법인 이장 소식
4 李花 287 서울 강북구분원, 순금 이뱃지 모범원원에게 전달 지원․ 분원명 (지원․ 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진 경기 성시(鎬洛) 2021 21.3.31(수) 11:00 농 의실 30 △예산 결산 승인 ① 강원 삼척시(應周) 46 21.3.15(월) 서면결의 202 △예산 결산 승인 사단법인 청권사, 정기총에서 제19대 이사장 廷日 종친 선출 지원 ‧ 분원 ‧ 종 ‧ 봉 소식 서울 강북구분원(분원장 光宰)은 최근 코로나19로 인 원원들의 불 안 마음을 위안는 뜻으로 모범 원원들에게 순금으로 제작된 이뱃 지를 전달다. 또 종약원 발전기 금으로 1백만원을 기부(본보 286 11면 참조)기도 였다. <서울 강북구분원> 사단법인 청권사(령대군종) 제134 정기총(21. 3. 29)에 서 제19대 이사장으로 정일(廷日) 종친을 선출다. 이날 선거에서 청권사 재적 대의원 70명 중 49를 득 정일 당선인은 당선 소감 에서 “우리의 시조이신 령대군 아버님의 철과 사상을 드높이 고 숭조돈종(崇朝惇宗)의 문가치를 최우선으로 실천며 청권사가 더층 발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겠다.”고 말다. 임기는 2021년 6월 1일부 2024년 5월 31일까지 3년이다. 정일 종친은 청권사 문 위원, 대의원을 역임으며 재 도서출 일진사 대, 국검인정교과서 이사, 이 강년선생기념사업 이사, 령대군 천전공종장을 맡고 있다. <사단법인 청권사> 정기총 결과보고 ■ 지원·분원
李花 287 5 단체명 전임 신임 비고 경기 여주시분원 용재 병(秉爀, 덕양군 14대) 2.24 제1차 정기이사, 寧陵봉장 겸임 충남 청양군분원 응선 시우(時雨, 무산군 16대) 3.17 장단 의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在位者 主 管 祭 官 名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溫陵 端敬王后 慎氏 (中宗大王妃) 2.4 14:30 경기도 양주시 국로 무 관 중 온릉봉 (장 有燮) 有燮 錫泳 慎一晟 宗林 平海 浚圭 庚鎬 鎬奭 漢奎 光圭 元圭 康根 東燮 在鎬 睿陵 哲宗章皇帝 哲仁章皇后 金氏 3.26 14:30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길 9 예릉봉 (장 平揆) 平揆 亨宰 金建漢 範春 達浩 鍾城 浩永 元善 鍾培 揆鎬 突康 浚圭 道宰 泰善 ①경기 성시분원 ②강원 강릉시분원 지원․ 분원명 (지원․ 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진 강원 강릉시(康石) 44 21.3.22(월) 11:00 분원 사무실 30 △예산 결산 승인 ② 충북 음성군(健瑢) 52 21.3.8(월) 서면결의 48 △예산 결산 승인 종명 (종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완원군(周珩) 36 21.2.25(목) 11:00 종 사무실 26 △예산 결산 승인 △임원계선 : 成起 신임장 ■ 대자 변경 ■ 종 ■ 제봉
6 李花 287 徽慶園 顯穆綏妃 潘南朴氏 (純祖肅皇帝 私親) 3.27 10:30 경기도 남양주시 부리 30 수경원봉 (장 淳浩) 淳浩 大中 朴勝世 道宰 達浩 峻夏 振勳 朴勝珏 紀定 長吉 明承 泰喜 愚珍 在鎬 穆陵 宣祖大王 懿仁王后 朴氏 仁穆王后 金氏 3.31 11:30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30 목릉봉 (장 埈鎔) 載萬 起鎔 金一泳 載興 朴春緖 成柱 海周 愚榮 載信 權柱 承鎔 燦柱 武鎔 在鎬 惠陵 端懿王后 沈氏 (景宗大王妃) 3.31 15:00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37 의릉봉 (장 政秀) 珍洙 殷雨 沈東燮 光敎 達浩 奎大 錫雨 根浩 鐘祐 鍾文 鍾培 載喆 琯雨 在鎬 洪陵 高宗太皇帝 4.13 경기도 남양주시 유릉로 28 릉봉 (장 東宰) 皇嗣孫 信宰 輔兢 南政 鍾培 鎔太 洪宰 國宰 載永 正九 範玟 起秀 南政 承允 濬慶墓 陽茂將軍公 4.20 11:00 강원도 삼척시 기리 무 관 중 준경묘영경묘봉 (장 鎔瑄) 연수 용 직 주 윤 윤 귀영 충일 영 경재 남정 범민 永慶墓 陽茂將軍公妣 李氏 4.20 11:00 강원도 삼척시 사전리 무 관 중 준경묘영경묘봉 (장 鎔瑄) 용기 용순 명승 도연 운찬 운찬 원일 철 은일 건삼 도재 릉 집례 俊在, 찬례 天宰, 좌장례 揆敦, 우장례 建宰 준경묘 수복 승, 가자군 운재‧광노 영경묘 수복 영, 가자군 용‧종진 ● 영광의 얼굴 ● 德珩 종친, GKL 사공재단 이사장 취임 덕(德珩, 성종/전성군 17대) 종친은 공익법인 GKL 사공재단(문 체육관광부 산비영리재단법인)의 이사장에 취임, 취임사를 국가 적 가치와 공공이익에 부는 사 공동에 쓰겠다고 였다. 덕 종친은 국예총 대외력위원장과 코레일유 비상임이사, GKL 사 공재단 이사를 역임였다. <전성군 의산군종> 방주(芳周, 정종/덕천군 18대) 종친은 2021년 2월 27일 제26 신곡문 상 대상을 수상다. 종묘제례 인간문재 故 은(殷杓) 종친의 4남 인 방주 종친은 1998년 수가, 2014년에 문론가로 등단여 수 집 《들꽃 들에 길을 묻다》외 7권을 상재 중견 수가이다. 방주 종친은 덕천군 오원군종 선무랑문중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재 서 원대교 생교육원 수창작 지도교수로 진 양성에도 쓰고 있다. 芳周 종친, 신곡문상 대상 수상
李花 287 7 ◇ 별원원 가입 안내 ◇ - 가입자격 : 종친 개인이나 종 단체 - 가 입 비 : 200,000원 이상 - 연 비 : 연 30,000원 이상 (종 단체:100,000 이상 / 가입 당 연도는 연비 면제) ● 영광의 얼굴 ● 炟周 종친, 작가 등단 기념문집 내 달주(炟周, 정종/덕천군 18대) 종친은 최근 작가 등단 기념문집을 냈 다. 당신은 산에 미친 사람, 아버지의 손자 교육, 내가 갈 곳은 요양원 등 등 일상을 담담 체로 써 내려갔다. 달주 종친은 1936년 경기도 에서 어나 서울시 수도사업소장, 용산구 건설국장, 강남구 시민국 장, 은구 재무국장 등을 역임다. 『국제문예』 수부문 등단, (사)국 제문인 원이다. 明 종친과 백수경 宗婦 부부 동시 승진 명(明, 세종/수춘군 19대) 종친이 2020년 4월 9일 자로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승진여 방위사업 청에 임용되었으며, 또 명 종친의 부인인 백수경 宗婦도 2021년 2월 19일 정사무관에서 서기관 으로 승진여 국민권익위원사무처에 임용되었다. 부친 성주(成柱) 종친은 수춘군종 대의원과 광주광역시 관동종친 고문을 30여년 역임고 있으며, 종묘 세종대왕 3실과 여주 세종대왕 영릉 제에 관으로 봉무는 등 열성적으로 종사동을 고 있다. <수춘군종> 광(光杓, 세종/광대군 20대) 전 문공보부 장관이 지난 2월 25일 별세다. 년 91세. 광 종친은 1955년 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와 집국장 대리 등을 거쳐 1980년 문공보 부 장관을 역임다. 이 연신( 연뉴스)과 서울신문 사장을 지 냈다. 光杓, 전 문공부장관 별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8 李花 287 肇慶壇 大祭 봉 시조 제인 조경단(肇慶壇) 대제가 4월 10일 요일 정오,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 동 조경단(肇慶壇, 전라북도기념물 제3)에서 봉됐다. 조경단은 519년간 조선왕조를 이룬 조선왕실 시조의 묘역으로, 1899년 고종제께서 전주 건지산에 조경단을 쌓고 비를 세워 은덕을 기려오는 곳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시조묘이다. 금년 조경단 대제는 코로나19의 영으로 본원 귀남 이사장을 비롯 임원진 일부와 제관 및 준비위원 등 최소 인원만 참석여 봉다. 제 관 성 명 소 속 / 직 위 初 獻 官 皇嗣孫 李 源 亞 獻 官 李 勳(덕17) 終 獻 官 李 相 宰(령19) 전라북도지원 執 禮 李 商 訓(선성18) 본원 전례부 차장 贊 禮 李 道 宰(근녕18) 본원 전례부 전례위원 監 察 李 泫 境(성녕19) 전라북도지원 大 祝 李 範 春(광17) 본원 전례부 전례위원 典 祀 官 李 羲 澤(안19) 전라북도지원 祝 史 李 承 亨(담양19) 전라북도지원 전례이사 執 尊者 李 廷 逵(령21) 전라북도지원 壇 司 李 振 昱(경녕21) 전라북도지원 齋 郞 李 準(장21) 전라북도지원 執 事 者 李 哲 守(담양19) 전라북도지원 近侍 (左) 左掌禮 겸 李 元 敎(안16) 전라북도지원 近侍 (右) 右掌禮 겸 李 甫 珩(안양17) 전라북도지원 謁者 贊引 겸 贊者 李 南 政(선성18) 본원 전례부 전례위원 解 說 李 炳 學(성녕19) 본원 전례부 전례위원 준비위원 皇 嗣 孫 : 李 源 理 事 長 : 李貴男 副 理事 長 : 李承昌 李柱英 李錫雨 常任理事· 理事 : 李慶薰 李範稷 李愚德 李致中 李在福 李燕浩 李泰雨 李富鎔 李在煥 監 事 : 李昌宰 李康伍 1. 財政部 部長 : 李錫務 委員 : 李基浩 李采垠 李鍾培 2. 典禮部 部長 : 李殷弘 委員(典禮) : 李商訓 李道宰 李範春 李南政 李在鎬 委員(祭務) : 李康元 李奎大 李光敎 委員(祭服) : 李性大 李永九 3. 事務處 李範成 李賢友 朴凞縯 李準爀 李效貞 李鍾允
李花 287 9 건원릉, 억새 자르는 청완예초의 거 문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나명)는 4월 5일 식(寒食)을 맞아, 경기도 구리 시 동구릉 내 건원릉(健元陵)에서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靑薍,청완)를 자르는 청완예 초의(靑薍刈草儀)를 거다. 금년 청완예초의는 지난에 이어 코로나19 산 방지를 위 관람객 없이 진된 가운데 사 장을 영상으로 제작여 문재청 유브로 공개다.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게 봉분이 억새로 덮여있는데, 조의 유언에 따라 고 인 의 억새를 옮겨와 봉분을 조성다고 전진다. 예로부 건원릉 억새는 1년에 번 식날 예초를 였는데, 문재청은 이러 전을 계승기 위 조선왕릉이 세 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듬인 2010년부 매년 식날에 청완예초의를 거고 있다. 청완예초의는 봉분의 억새를 베는 예초의, 1년간 자란 억새를 제거음을 알리는 고 유제, 제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례 순으로 진는데 올는 코로나19 예방을 위 음복례는 생략였다. , 청완예초의 제관으로는 본원 전례이사 및 전례위원과 동구릉관리소 관계자가 봉무 가운데 초관 은 전례이사, 아관 명승 위원, 종관 용 위원, 감찰 구순 , 찬자 범춘 위원, 대축 도재 위원, 축사 재 위원, 재랑 박상, 집준 철수, 집사 성병 위원, 전사 강대성, 능사 최동준, 알자 건재 위원, 설 병 위원이 참여다.
10 李花 287 사직단 전사청 권역 복원 상량식 거 사직단 전사청 권역 복원정비 상량식 및 안전기원제가 지난 3월 23일 요일 오전 10시, 사직단 전사청권역 복원정비 장에서 진됐다. 이날 사에는 문재청 궁능유 적본부, 종묘관리소, 사직단 관리소, 국가무문재 제111 사직대제보존, 시공관계 자 등이 참여다. 사직단 전사청 상량식은 조선시대 국가의 대역사나 건물 신축시 였던 상량봉문안 의를 국조오례의 등을 참조여 진다. 복용 사직대제 이수자 및 본원 전례위원이 참여여 상량문 봉안제의를 올렸다. 사직단은 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조선왕조 최고의 제례시설이었 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공식적으로 사직제가 지되고 1920년부 공원으로 조성되 면서 사직단 대부분의 옛 건물과 담장 등이 철되었다. 재는 광복 들어선 원래의 용도와 다른 건물들과 1987년부 추진 사직단 복원정비사업의 결과로 복원된 국사 단, 국직단과 동 ‧ 서 ‧ 남 ‧ 북문 등만이 남아 있다. 문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전사청 권역 뿐 아니라 주변 시설물을 철거 ‧ 이전고 발굴 ‧ 복원 설계를 거쳐 2027년까지 원을 복원 계이다. 이날 참여 제관은 종묘관리소장, 사직대제 이수자, 본원 전례부 위원 등이 참 여 가운데 관 정명 종묘관리소장, 집례 복용 사직대제 이수자, 대축 상 전례차 장, 단사 직 위원, 축사 규돈 위원, 재랑 건재 위원, 알자 도재 위원이 봉무다. 전 체적인 의례 자문은 은 전례이사, 제수는 재승 제무차장과 재춘 위원이 진설다.
李花 287 11 건국 대령 우남 이승만 박사 신 146주년 기념식 열려 건국 대령 우남 이승만 박사 신 146주년 기념식이 3월 23일 오 2시 이승만건국 대령기념사업(이사장 신철식) 주최, 국가보처 원으로 이장에서 거됐다. 송기성 목사의 사로 진된 기념식에는 인수(仁秀) 본원 고문을 비롯여 종로구분원 임원과 나경원 기념사업 부장, 교안 전 총리,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이 참석다. <자료제공 손귀옥 종로분원>
12 李花 287 “ 승경원 건립기금으로 5억 1천만 원 성 ” 기부를 진정 아름다움을 전는 이준용 DL명예장 <집자 주 : 목릉봉 장 겸 재단법인 이장 이사를 맡고 있는 이준용(李埈鎔) DL (옛 대림산업) 명예장이 지난 3월 30일 승경원 건립기금으로 5억 원을 종약원에 기부다. 준용 명예장은 대림그룹 창업주 故 수암(修巖) 이재준(李載濬) 장의 장남으로 40년 간 대림그룹을 이끌다가 2001년 일선에서 은다. 종약원은 준용 명예장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인뷰를 요청으나, 꾸밈없는 겸손으로 정중 사양는 뜻을 보내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준용』, 일간지와 주간지, 인넷 검색 등의 자료를 참고여 이준용 명예장의 생애를 조망 보고자 다.> “우리의 시조묘가 있는 전주에 지어 질 승경원 건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승경원 건립기금으로 5억 원을 기 부 이준용 DL명예장의 짧은 소감 이다. 준용 명예장은 이에 앞서 초 창기에 이미 1천만 원을 성 상 였는데, 승경원 건립이 지체되고 있다 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 두 번째로 기 부를 준 것이다. 종약원이 승경원 건립기금을 모금기 시작 2013년 11월부 2020년 말 재 16억 여 원 모금 것에 비면 준용 명예장이 성 금액은 액수이다. 승경원의 건립 추진은 그동안 부지 마련과 건축 자금 등 관계로 지체되고 있었으나 이번 준용 명예장의 금 으로 건립에 속도를 내게 되었다.
李花 287 13 DL그룹의 성장과 께 40년 올 84세인 준용 명예장은 대림의 창업주인 故 재준 장과 더불어 DL그룹 의 산 역사이자 대민국의 경제성장을 껏 상시 주인공이다. 준용 명예장은 1938년 선조 왕자 인 성군 11대(시조 42세)로 출생, 경기고교 ‧ 서울대 상대를 졸업고 미국 덴버대에서 계 전공,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강의 를 던 엘리 자였다. 그러나 1966년 에 대림이 외 건설시장을 개척 당시 외감각과 국제 업무에 정 사람이 요고, 이 때 대림에 입사다. 엘리 사원인 준용 명예장의 유창 영어 실 력은 외 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결에 도움이 되었다. 준용 명예장은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 , 1978년 부사장 재임 시 건 설업계 최초로 업무전산 작업을 추진 는 등 경영정보시스 구축에 앞장섰 다. 이듬 사장에 오르면서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부문의 도 마련여 건설과 석유의 양대 사업을 구축 안정과 성장을 이루는 기업의 새 가치관 을 마련다. 이것은 부친이 대림의 동이 됐던 목 재상(부림상)을 건설업으로 운 것에 대 또 다른 경영 보의 대이고 이것 은 곧 대림의 성장 기제가 되었다. 준용 명예장은 부친의 뒤를 이어 대 림산업을 경영 오다가 1993년부 2001 년까지 대림그룹과 대림산업 장을 역임 고 2001년 경영 일선에서 은다. 숭조돈종은 조부의 가르침에서 시작 젊은 세대에게 ‘대림’면 떠오르는 것 이 무엇이냐 물으면 아 브랜드 ‘e 세상’을 말다. 국내 최초 브랜드 아 였고 려보다는 주거공간 본연의 가치 인 안에 초점을 맞춰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베남 진출로 국내 최초 외건설시장을 개척 며 중동건설 붐의 주도적 역을 기업 으로 각인돼있다. 국내 최초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 착공과 경부고속도로, 서울 역 고가 도로 준공 등 대민국의 산업 발전에 공을 세운 대적 건축기업이 기도 다. 잠실종운동장, 세종문 관, 역사박물관, 국의사당, 독립기념관, 제철 공사 준공을 기업으로도 기 억다. 1939년 창업 이래 8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DL의 기업정신은 인간존중 을 기본으로 고 있다. 100년 기업의 중 심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DL은 창업 주부 근검, 절약, 정직, 신용을 모로 기업을 이끌어간다. 이것은 준용 명예 장 집안의 가(家統)이다. 독 경영수업을 받으며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룬 준용 명예장은 이렇게 고 다. “선친으로부 근면과 절약, 정직을 배웠고 그것은 제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검소을 몸소 실천게 되었습니다. 조 부(이 규자 응자)께서는 선친에게 ‘사람을 널리 사귀되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손 를 보더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멀
14 李花 287 리 내다보고 일을 도모라, 순리를 져버 리지 말아라, 정직고 솔직야 다’는 등 사업가가 갖추어야 자질을 익도 록 독려다고 니다.” , 준용 명예장의 아버지는 1977년부 1992년까지 종약원의 이사장 을 역임 故 운경(雲耕) 이재(李載灐) 전 국의장이다. 운경 이사장은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 10,11,12,13대에 걸 쳐 15년간 봉직면서 종약원 숙원사업이 었던 이관을 종친들이 참여는 뜻으 로 전 종친들의 성금으로 신축였다. 재단법인 이장를 마련여 들 에게 면의 길을 넓 주었고, 본원이 국가 중요무문재 보유단체로 지정받 을 수 있도록 앞장서는 등 종약원의 기반 을 다진 분이다. 그리고 준용 명예장의 부친 재준 장은 1974년부 목릉봉 장을 맡아 선조대왕과 왕비 의인왕의 제 을 봉는데, 준용 명예장은 1995 년부 목릉봉 장을 맡고 있다. 이러 준용 명예장가(家)의 깊은 숭 조돈종 의식은 조부의 가르침에서 늘 강 조던 절약과 성실, 봉사정신의 결실에 서 나온 것이다. 대중문의식 고취와 이웃을 위 기부의 앞장 서울 서대문역 사거리에 자리 잡은 DL 건물은 이제 대림의 상징이 되었다. 수십 년 간 건설 외길 인생을 살아온 준용 명 예장의 적은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광문 D워에는 대중이 쉽 게 접근 수 있는 전시문공간인 ‘구슬 모아당구장’에서 소과 창작의 기를 제공고 있다. 그동안 사진전문 미술관 인 대림미술관을 대사진과 창의적 인 디자인을 지닌 감각적 전시는 물론문 로그램을 진여 대중이 쉽게 접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더니 이번에 는 세종로 복에 문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몇 년 전 준용 명예장은 딸과 께 영 ‘국제시장’을 보며 깊은 울림을 받았 다고 다. 국전쟁부 1980년대의 대사에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영에서 주인공의 대사가 가슴 에 박다. “아버지,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면 잘 살았지예?” 대민국의 경제성장과 께 치열지 만 아름답게 살아온 준용 명예장은 은 와 께 대민국에 ‘기부’라는 문를 치며 또 번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열심 살아온 본인에 대 보상 이 아닐까…. 준용 명예장의 사적 기부는 그동안 여러 로 이루어졌다. 대구 지철공 사 장 발사고, 지진, 강원도 산불 등 재난 시에도 앞장섰다. 일을 위 설립된 공익재단, 고 김수 추기경의 나눔 실천을 이어가는 단체, 사공동모금 등에도 선뜻 나서서 기부에 동참다. 사적 지위에 상응는 도덕적 의무를 다는, 대민국의 진정 노블리스 오 블리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준용 명예장 은 ‘노익장의 아름다운 여유’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정리 : 문부 차장 우 · 조 / 안 19대 · 始42세>
李花 287 15 제사는 무엇인가?(7) 이범직(李範稷) 본원 문이사 · 문박사 제사의식은 신과 인간의 공존을 상징 을 중심으로 이고자 다. 앞서 우리는 국가 제사 그리고 사대부 제사, 서민 제사가 갖는 위상과 의미를 개관 였다. 군주가 국가치를 위 천명과 연계 천신과 지신, 군주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 묘제이 갖는 제사와, 귀족 사대부들은 공자와 제자 문묘와 교 지역신 사직신과 조 상신을 모신 사당 제사와, 서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신과 생신 그리고 부모신을 모 시는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의식으로 신과 살아있는 인간과 소을 고 있다. 시공에서 전개되는 의식을 주목고자 다. 먼저 공간 중에서 제단(장소)을 천 ‧ 지 ‧ 인 신의 제의를 는 제단을 본다면 천신에 천단은 처음은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오 악에서 준비된 것으로 기록이 전다. 궁궐에서 근접 장소에서 천단이 원단으로 세워 지고 제천의가 매년 정기적으로 지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중국사에서와 같이 삼국 시대 이어 고려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남쪽 원구단이 세워지고 제천의가 왕실의 왕권이 천명으로 부여는 의식이 되고 있었다. 왕실은 또 지신을 궁궐의 우측인 서에 사직단을 세워 지신과 곡신을 께 매년 제 사고 좌측인 동에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사당으로 종묘를 세우고 대사 격으로 제을 고 있다. 최고층 신분인 왕실은 천단 즉 원구단과 지신과 곡식신을 모신 사 직단 그리고 조상신을 모신 종묘에서 천신 ‧ 지신 ‧ 인신에 제의식으로 신과 교고 있었다. 다음 신분층인 귀족 사대부들은 지역 지신과 자의 최고위 공자와 제자 신을 모 신 석전의로 성균관 문묘와 지방 교 문묘에서 고 자신들의 조상신은 각자의 사
16 李花 287 당을 세우고 제을 다. 다음 서민들 은 자신들의 전을 감당는 신과 자신 들의 부모신들을 사당이나 대청마루에서 제을 모시고 있다. 제사의식은 일정 제단에서 다. 우 리는 모든 제단에 생(犧牲)인 제물과 예 물을 서 신과의 교에 지켜지는 의식 의 요체를 보도록 다. 생은 소 ‧ 양 ‧ 돼 지 등 우리가 생존에 수적 가축이 있고 예물로는 최고의 진귀 옥 ‧ 비단이 등장 다. 제사의식은 생과 예물로 신과 연계 소을 가능게 을 상징다. 유교에서 제 사는 대사 ‧ 중사 ‧ 소사로 분류고 신위를 천신 지기 인귀로 그 대상을 보면 다음과 같 다. 대사로 분류되는 원구 ‧ 사직 ‧ 종묘 제사는 천명의 최고 신위로 왕실의 국가 치권을 보는 신격으로 사료되고, 이어 중사 ‧ 소사로 분류되는 신위도 국가 치에 보좌는 기능을 상징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사에는 천사(天祠)로 ‧ 운 ‧ 뢰 ‧ 우 ‧ 우사(風 ‧ 雲 ‧ 雷 ‧ 雨 ‧ 雩祀)를, 지기(地祇)로는 악 ‧ ‧ 독(嶽 ‧ 海 ‧ 瀆)을, 인귀(人鬼)로는 선농 ‧ 선잠 ‧ 문선왕 ‧ 역대 시조(先農 ‧ 先蠶 ‧ 文宣 王 ‧ 歷代 始祖)를 신격으로 정고 있다. 다음 소사로 분류되는 천신(天神)으로 영성 ‧ 노인성 ‧ 마조 ‧ 사 ‧ 마사 ‧ 마보(靈星 ‧ 老 人星 ‧ 馬祖 ‧ 司寒 ‧ 馬社 ‧ 馬步)이고, 지기(地祇)로는 명산대천 ‧ 영제 ‧ 칠사(名山大川 ‧ 禜 祭 ‧ 七祀)가 있고, 인귀(人鬼)로는 선목 ‧ 마제 ‧ 제 ‧ 독제 ‧ 여제(先牧 ‧ 禡祭 ‧ 酺祭 ‧ 纛祭 ‧ 厲祭)로 신격을 정고 있다. 이를 돕기 위 신격의 명사를 설명면 우사는 기우제. 영성은 곡식 농사를 주제는 별. 마조는 말의 수 신인 이십수의 네 번째 방성. 사은 겨울을 주관는 신, 얼음신. 마사는 승마의 창시자의 공적을 기념는 제 사. 마보는 말에 재를 끼친다는 귀신. 영제는 비를 그치게 는 제. 칠사는 봄에는 사명, . 여름에는 조. 가을 에는 문,여. 겨울에는 , 중류. 선목은 최초로 말을 길렀던 신. 마제는 군대가 머무는 곳에서 군신에게 지내는 제 사. 제는 메뚜기 나방 등 충의 가 심 때 지내는 제사. 독제는 대장기에 지내는 군기제. 여제는 여귀(유 병에 죽은 자, 제사 받지 못는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위에서 설명 신명과 신격에서 우리는 차별되는 각종 신들은 우리의 생 속 곳곳 에서 주신을 도와 우리 인간의 삶을 영위록 는 기능의 신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주 신과 배신으로 신의 역을 담당는 것으로 유교제사의 구조를 만들고 있음을 그 구조 와 분류는 가리고 있는 것이다. 주신과 배위신이 께 살아있는 손들의 삶을 돕고 있다는 인식을 유교의례에서 읽을 수 있다. 국가 치로부 귀족 관료의 군주 보좌명분 양민들의 의무에 대 역 분담으로 신위 세계에서도 역 분담에서 요구되는 천지인에서 신기귀(神祇鬼)의 음덕 ▲ 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李花 287 17 에 대 감사와 소을 위 의식이 제사라고 이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 제사의식에서 주목되는 위 중에서 생의 위체계를 이욱 교수의 설명을 인용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신과의 만남인 제사는 인간이 수 있는 일중 가장 일이라 여 삶을 축복으로 인도는 길례(吉禮)로 보았다는 것이다. 제사의례 속에서 시대와 장소에 따 라 다른 모습으로 역사는 보였으나 모든 의식에는 생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였다. 생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모든 대상물을 가리다. 제사는 신의 성격에 따라 제물을 달리였다. 천신에게는 제물을 워 늘에 연기를 보내고, 지신에 경우 땅에 묻었으며, 천의 수신에게는 제물을 물에 빠뜨렸다. 이러 방식들은 신께서 제물을 수 있도록 변용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다. 제물의 규정은 예기에서 읽을 수 있다. 교생에서는 지극 공경스러운 제물은 맛을 조리여 올리지 않으니 기운과 기를 귀게 여기기 때문이다. 인정과 지극 공경이 란 말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을 숙지 요가 있다. 인정이란 살아있 는 사람의 일상의 법식을 말고 있는 것으로 음식의 경우 맛을 내어 입맛에 맞게 만 드는 조리법이다. 그런데 귀신을 섬기는 공경 도리는 이러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것 에 있음을 경전은 말는 것이다. 제물의 경우 인간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인 는 것이다. 지고의 늘만이 아니라 일상생 곳곳에서 신을 찾았던 유교문에서 제사는 단일 나의 방식이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 신격에 따라 다양 모습으로 전개되었다고 말기도 다. 제례에 사용되는 생은 일반적으로 소 ‧ 양 ‧ 돼지로 이중 소가 가장 귀게 여겨졌다. 종묘 제에 사용 생은 붉은 소이다. 생이 될 가축은 목인(牧人)이 우리에서 3개 월 동안 정성스럽게 기른다. 제사 당일이 되면 신좌와 제기, 제관의 자리를 준비고 절차에 따라 관례-신을 부르는 의식으로 울창주를 땅에 부어-를 고 생을 맞이다. 다음 뜰에서 신에게 고고 생을 잡는다. 유교에서 신과 인간의 만남은 신분에 따른 제사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천자는 천 지(天地)에 제사고 사방(四方)에 제사고 산천(山川)에 제사고 오사(五祀)에 제사 고 매년 두루 제사를 지낸다. 제(諸侯)는 자기 방에 당는 곳에 제사고 산천에 제사고 오사에 제사고 매년 두루 제사 다. 대부(大夫)는 오사에 제사고 두루 제사며, 사(士)는 자신의 조상을 제사다는 예기 곡례의 내용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천지에 대 제사는 천자만이 드릴 수 있 고 일정 지역 범위 내에서 공유되는 산천은 제만의 신이다.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의 위상이 되는 조건은 예기 제법(祭法)에서 보면 성왕(聖王)
18 李花 287 이 제사를 제정 때에는 백성에게 법을 베 자를 제사고, 죽기까지 임무를 근실 자를 제사고, 국가를 써 안정시 자를 제사며, 재난을 막은 자를 제사며, 난을 막은 자를 제사다. 이들 신은 모두 백성에게 공렬(功烈)이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산림 ‧ 천곡 ‧ 구릉(山林 ‧ 川 谷 ‧ 丘陵)은 백성이 재용(財用)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면 신의 대상으로 사전(祀典)에 두지 아니다고 였다. 즉 처음으로 농사법을 가르친 신농씨(神農氏), 처음 길쌈일을 가르친 서릉씨(西陵氏)와 같이 인간의 문물발전에 기여 인신 등이 그 러다는 것이다. 또 유에 공이 있어 문묘에 모셔진 문선왕 공자와 이 성들은 삶 의 모범으로 제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상제사는 위에서 제시 조건과는 무관 자신들의 조상신에 대 다른 차 원의 의례로 접근야 다는 것을 말고 있다. 조상에 대 제사는 삶의 성장과정에 서 치러지는 의례로 출생 ‧ 성년 ‧ 결 ‧ 사망 등 일상생과는 다른 별 의식을 수반 는 살아가는 과정 전 시간 속에서 단절과 고난, 새로운 삶의 기준 분기점에서 가문 의 중심에서 는 죽음으로 일어나는 조상과의 만남을 의식으로 구는 것이다. 제 사를 만나는 조상은 사적 지위가 초월성을 담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 로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인연으로 연적 조건으로 생 의례적 성격으로 제사의식을 는 것이다. 제사는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서 손과 관계를 지속고 있 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조상이 신주의 상징으로 제사의 시간을 만물 을 생장시는 자연과 일체를 이루고 나아가 영원의 세계 속에 유의미 존재로 의례 에서 손과 만나 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겠다. 유교 제사는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손과의 관계를 유의 시간을 만들어 의례의 의미를 무겁게 고 있었다. 친진이라는 규제를 설정여 무 사자와 생자의 관계를 의례로 실천도록 였다. 왕실에서도 대부 ‧ 사 ‧ 서인에 이르는 조상과의 제사의식에서 친진을 지도록 였다. 불천위는 대부 ‧ 사 ‧ 서인들의 조상들 가운데 나라에 공렬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친진이 된 신위라 여 체천지 않고 영원 사당에 모셔두고 있다. 일정 시기가 되 면 제사를 모시지 아니고 신주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는다. 친진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대수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말다. 임금은 4대, 6 이상은 3대, 7 이는 2 대, 서인은 부모만을 가문에서 제사를 받드는 인신을 말다. 왕은 종묘에서는 묘를 갖고 정전에서 신주가 친진이 되면 영녕전으로 신주가 모셔 지고 조묘와 세실묘 위상으로 나라차원의 제을 받도록 고 있었다. 천자국은 7대, 제국은 5대가 지나면 종묘에 제을 받지 못는 신이 되는 것이다. 종묘에 부묘되지 못면 제을 받지 못는 인신이 되는 것이다. <세종/광대군 17대 ‧ 始42세>
李花 287 19 역사왜곡과 의 자유 이범직(李範稷) 본원 문이사 · 문박사 이곳에서 인용는 자유는 역사적 개념이다. 역사는 인류의 자취를 기록으로 남긴 문 상 인류의 문자기록으로부 각종 의 적 모두를 다. 유물 유적을 인류의 역사와 문자로 명료 적을 구 역사기록에서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을 배우고 그 위에서 역사의 발전을 추구고 역사의 변를 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변에서 우리는 자유의 덕목을 주목고 있다. 고대 중세 대라는 시대구분 의 기준을 자유라는 것으로 정고 있다. 고대는 사람의 군주만이 자유를 유고 중세는 소수의 귀족 관료만이 자유를 갖고 정치를 였다. 대는 모든 인민이 정치에 참여는 자유를 갖고 있는 시대로 명명는 역사로 발전 것이다. 참정권이라는 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는 각자 자유의지로 자신의 사유 동으 로 복추구를 수 있다. 적극적인 동의 영역으로 장려는 것이 인류의 자유에 대 염원이었다. 자유에 대 인류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다. 의 자유, 결 사의 자유, 이주의 자유, 여의 자유 등은 부문적으로 용되고 있을 뿐 아직 자유가 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그리고 역사의 주인 개개 인간들이 서로 충돌는 상을 만나 이를 역사상의 경으로 기록고 있다. 역사상 경을 사실 그대로 거짓 없는 진 실에 공유면서 역사의 경을 교으로 수용 때 인류가 이성으로 감성을 유는 지로 얻은 방법이 개개인의 갈등을 조정고 걸음 나아간 발전된 역사상을 만들 고 있었다. 즉 개인의 자유로운 문적 의 자유 영역에서 노출될 수 있는 션의 세계와 역 사의 진실과 충돌될 접점에서 생되는 문적 거짓이라는 상은 단순 상이라는
20 李花 287 국면에서 그치는 것 만이 아니라, 세인들에게 치명적인 오도된 역사관을 심게 되어 오려 보되는 역사로 진입게 는 것이다. (스=SBS '조선구마사') ‘조선구마사’ 역사극에 대 비을 우리의 시각은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 를 가다듬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조선의 역사에 대 기억은 그야말로 기억의 영상으 로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엄정 조선왕조실록 이라는 기록에 의존 조선의 역사라 는 사실을 주목야 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에서 사료비의 과정을 거친 1등급 사료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왕조의 역사, 조선시대상을 영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 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사실만을 대로 조선의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거짓이 아닌 참된 사실의 전개를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근거 조선의 역사는 손인 우리들에게 교을 전달고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도록 였다. 교의 역사가 되기위서는 거짓이 아닌 참된 기록, 진실의 기록이어야 다. 사실의 역사에서 벗어난 션의 역사로 작가의 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역사의 교이 기능을 감당 수는 없는 것이다. 다스럽게도 우리 국민 다수가 드라마가 전 개 상의 왜곡을 지적여 역사의 교이 지켜지게 되었다. 사실의 역사상과 션의 역사를 별 능력을 우리들은 우리의 역사교육으로부 수여 받았다. 우리는 상고시대 고조선의 역사로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이웃 중국 역사와 교류는 가운데 고유 문명문를 창조 발전는 역사 를 만들면서, 21세기 세계사와 류 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세계사는 동서 양문명의 충돌이라는 격변으로 커다란 소용돌이가 치는 가운데 국은 역사의 변을 당다. 그리고 국난을 이기고 대 국을 세웠다. 세계사의 중심에 서서 문 문명을 창조는 선진국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세종/광대군 17대 ‧ 始42세>
李花 287 21 신의고 제릉 여인의 손으로 5백 년 왕업을 잇다. 이 세상에 여인의 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시대를 아우르며 치열게 살다 간 왕장상이나 영웅걸도 결국은 여인의 아들 딸이었다. 그들도 어릴 적엔 따뜻 어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극진 정성과 보살으로 성장 나라를 위 일 고 청사에 족적을 남겼다. 예부 세상은 남자가 지배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지배 는 것이라고 일러왔다. 나의 왕조가 발여 쇠망는 역사적 섭리는 늘의 뜻에 따른 것이지 결코 인 력으로는 불가 일이라 다. 단군조선 ‧ 고구려 ‧ 신라 ‧ 백제의 고대 국가가 그러고, 궁예와 견을 멸고 고려를 개창 조 왕건 역시 다를 바 없다. 이들 왕조의 지속 과정에는 신가 임금을 시고 국왕을 교체는 등 수없는 국가적 변란이 난무지 만 용상은 부로 범접지 못다. 제왕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조 이성계(1335~1408 ‧ 이 조)가 창업 조선왕조는 27대 왕 519년을 존속 다. 단일 성씨(전주이씨)의 이 절대 왕권을 유지며 5백 년이 넘도록 왕업을 유지 것은 세계 왕조 역사상 조선왕조가 유일다. 재 전주이씨는 5백만 명을 아린 다. 왕조 개국 이 모든 왕손들은 조와 그의 원비 신의고(神懿高皇后) 안변 씨의 손들이다. 여인에게서 비롯된 창생(蒼生)의 위업이다. 신의고(1337~1391 ‧ 이 씨)는 안천부원군(증 영문부사) 경(韓卿 ‧ ?~?)과 삼국대부인 신(申)씨의 딸이다. 고려 27대 충숙왕 복위 5년(1337 ‧ 정축) 9월 고려 동 북지방인 경도 안변에서 어났다. 예로부 안변은 산천이 영고 상서로운 명산 대천으로 유명 곳이다. 씨 생가 인근 류산 명당에 씨 삼조(三祖)의 묘를 용사 조선왕릉실록(3) 이규원(李揆元) 李花보 주 · 시인
22 李花 287 조고제와 신의고 신주가 봉안된 종묘 정전. 국보 제227로 좌측 끝이 제1실이다. (用事) 이 경사가 줄을 이었고 가문이 번창기 시작다. 씨가 어날 때 아름 다운 류지음(風流之音)이 3년간이나 끊이지 않아 본래의 청산을 류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증조부는 유(증 문시랑찬성사)였고 조부 규인(증 문좌정승)은 당시 고려 동북지역의 오래된 문벌로 대를 잇는 명문거족이었다. 씨는 15세 되던 당시 동북면의 최고 실권자 중 나였던 이자춘 (1315~1360 ‧ 추존 조대왕)의 아들 조와 례를 올렸다. 조는 일찍이 씨를 맞 이여 운전리에서 세거다. 동서고금을 막론고 전쟁에 임는 장수의 몸은 국 가를 위 존재였다. 조는 북방 여진족을 무찌르고 남방에서는 왜구를 벌야 는 고려의 걸출 무장이었다. 곳에 정착는 문신처럼 가정을 보살며 소생을 육시 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 일이었다. 씨의 질곡 같은 삶은 그로부 비롯되었다. 오늘은 북간도를 젓고 내일은 몽골 초원을 질주는 남이었다. 동가식서가숙으로 전쟁를 전전는 조가 어느 때는 몇 달 만에 집을 찾았고, 어느 는 1년이 넘어서 야 나나기도 다. 유일 위안은 조가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다는 승전 소식이었 다. 조보다 두 살 아래였던 씨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감수다. 고난 자식 복으로 어느 덧 6남 2녀를 출 먹이고 입는 양육 건사 모두가 씨의 몫이 었다. 조의 무공으로 부인에게 내려지는 (宅號 ‧ 주인의 벼슬에 따라 나라에서 내리 는 가 명칭)도 받았다. 고려 31대 공민왕 13년(1365) 조가 동북면 병마사로 삼선· 삼개의 난을 다. 그 공으로 조가 봉익대부밀직부사 직에 오르고 단성양절익대 공신 칭를 받을 때 씨는 원신주(元信宅主)로 봉졌다. 32대 우왕 재위 시에는 조 군막이 있는 경기도 천 재벽동의 전장(田莊)에서 우거다. 위도 군 당시는 다시 동북면으로 신 초막에서도 은신다. 아녀자로선 감당기 든 극의 간고 (艱苦)였다.
李花 287 23 여종부(女必從夫) 덕목으로 일생을 신 온 씨에게도 수 없는 여인의 이 응어리져 있었다. 조가 도에서 곡산 부의 딸 신천강씨(1356~1396 ‧ 조 계비 신덕고)를 측실로 맞이 것이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이 아니던가. 뒷날에 는 강씨가 두 아들 방번(1381~1398) ‧ 방석(1382~1398 ‧ 초봉 세자)과 딸 경순(?~1407) 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 들었다. 씨는 숙명으로 알고 일체의 내색 없이 자기 소생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신명을 바쳤다. 고려 왕실과 장상(將相)의 처첩제도는 조선시대와 달랐다. 지방 관료나 변방 출신 장 수가 개경에 봉직며 고의 조강지처를 동 수 없을 때는 지처를 취는 것이 관례였다. 이 때 고의 첫 부인은 처라 고 서울 부인은 경처로 불렀다. 처는 리에서 시부모 봉양고 자식 우느라 삭신이 무너졌고 경처는 부임지마다 남과 께며 의관을 보살고 복록을 누렸다. 씨의 유일 낙은 조의 여섯 아들과 두 딸을 올곧게 양육는 것이었다. 이마저 도 소생들이 성장면서는 씨 곁을 떠났다. 조를 닮은 무골 기상의 아들들이 모두 고려 조정에 출사 벼슬길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조가 생 것처럼 빼 닮은 다섯째 이방원(이 종)은 조와 께 도 전쟁를 누비고 다녔다. 첫째 방우(芳雨 ‧ 1354~1393 ‧ 진안대군)는 찬성사 지윤의 딸과, 둘째 방과(芳果 ‧ 1357~1419 ‧ 영안대군 ‧ 2대 정종대왕)는 좌시중 김천서의 딸과, 셋째 방의(芳毅 ‧ ?~1404 ‧ 익안대군)는 찬성사 최인규의 딸과, 넷째 방간(芳幹 ‧ 1364~1421 ‧ 안대군)은 찬성사 민선의 딸과, 다섯째 방원(芳遠 ‧ 1367~1422 ‧ 정안대군 ‧ 3대 종대왕)은 여부 원군 민제의 딸과 각각 인다. 여섯째 방연(芳衍 ‧ ?~? ‧ 덕안대군) 만이 일찍 세상을 떠나 씨의 가슴에 못이 박다. 딸 경신(慶愼 ‧ ?~1426) 공주는 상당부원군 이저(1363~1414)에게 가고, 막내딸 경선(慶善 ‧ ?~?) 공주는 청원군 심종(?~?)에게 출가다. 씨는 시집가는 두 딸에게 “오직 지아비의 뜻만을 따를 것이며 남을 위서라면 목숨을 두려워서도 아니된 다.”고 계다. 그리고는 “심산유곡을 주름잡는 젊은 수범도 세월이 르면 굴 속 의 암범을 찾게 되는 법이다.”며 인종(忍從)의 부덕을 가르쳤다. 34대 공양왕(재위 ‧ 1389~1392) 말년 고려 내정은 누구도 장담 못 란의 와중이었 다. 원나라(몽골족)에 충성는 친원와 신대국 명나라를 따르는 친명의 극 대 결로 국정이 위로웠다. 조와 께 친명였던 은 정몽주(1337~1392)가 변심 조 살를 음모다. 종은 미래를 예단고 이들과 맞서 개 세력을 이끌었다. 천 성이 어질고 유순던 씨는 정국이 요동치는 급보가 날아들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 려앉고 억장이 무너졌다.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기에 저록 무고 생명들이 되이 스 러지고 를 보아야만 는가. 고려 내정의 동요로 노심초사던 씨가 중병에 들었다. 백약이 무였다. 진중(陣
24 李花 287 中)에서 보고를 접 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강지처 씨에 대 온갖 연민과 이 뇌리를 스쳤다. 조를 수 전 중인 아들 종에게 명다. “방원아, 네가 가서 어미를 시봉록 라.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보가 될 듯싶 다. 쯧쯧, 가엾은 지고….” 종이 집에 당도을 때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선왕조 개국을 불 과 열 달 앞둔 공양왕 3년(1391) 9월 23일(양력 10월 29일). 씨의 나이 55세였다. 종은 땅을 치며 앙천곡다. 씨가 누워 있는 시상(屍床板) 갈대를 쥐어뜯으며 적란운이 뭉쳐 다니는 서녘 늘을 응시다. “늘도 무심구나. 먹지도 입지도 못고 남과 자식만을 위 살다간 여인의 일생이 어찌 이리도 망 수 있단 말인가. 이 내 몸이 자식 된 도리로 장차 무슨 일 을 야 것인가.” 씨는 북도 개군 대련리 율촌(栗村) 부소산 남쪽 기슭에 안장됐다. 성이 극 진던 종이 묘지 아래 초막을 짓고 3년의 시묘(侍墓)에 들어갔다. 지만 마지막 도조차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었다. 종은 왕명을 받고 서장관(書狀官) 신분으로 목은 이색(1328~1396)과 께 명나라로 떠났다. 보다 충이 당시 사의 우선 본분이었던 까닭이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다. 씨가 세상을 떠난 이듬 (1392) 7월 17일,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개국고 조로 등극다. 다음 날 씨는 절비(節妃)로 추존되고 씨 묘는 제릉(齊陵)으로 능를 지어 올렸다. 능의 동쪽 마을에 제궁(齊宮)을 창건고 초경사 (肖慶寺)라 명명다. 조정에서는 초경사를 불교 교종과 선종 중 교종(敎宗)에 소속시 뒤 전(田) 200결을 배속시켰다. 당시의 1결(結)은 가로 세로 각각 100척(尺) 씩 이 었다. 조 등극 이 모든 부귀영는 경처였던 계비 강씨의 차지였다. 처였던 절비 씨는 백골로 진되어 가고 그 소생들마저 엄동설의 찬밥 신세로 전락다. 잠시 뒤 의 죽음조차 예측 수 없는 게 인간사이다. 개국 초 일련의 정국 소용돌이가 살상을 부르고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을 줄은 아무도 예견지 못다. 생 동지가 적이 되어 등 뒤에서 비수를 꽂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천군만마로 대사를 도모는 격동기가 지속 됐다. 조는 신의왕 상을 인소전에 봉안고 친 거둥 치제(致祭)다. 조가 상 왕이 되고 영안대군이 2대 정종으로 등극 1398년 11월. 정종은 신의왕 기신재를 장의사(藏義寺)에서 봉고 절비 씨를 신의왕로 추존다. 정안대군이 3대 종 으로 왕위에 오르면서는 동궁(세자전)을 인소전(仁昭殿)으로 삼아 신의왕 새 상을 봉안(1405)다. 종 8년(1408) 승인순성신의왕(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시를 격상시켜 다시 추봉다. 2년 (1410) 부제(祔祭 ‧ 조상의 신주 곁에 모실 때 지내는
李花 287 25 종묘 대청 앞의 오얏나무. 전주이씨의 상징목으로 개량 자두나무와는 종이 다르다. 제사)를 올리고 종묘 정전 제1실 조의 신주 옆에 신의왕 신주를 배다. 종은 세자(4대 세종대왕)로 여금 덕사에 가 신의왕 영전에 소록 다. 숙종 9년(1683) 조정에서 내명부 제(諸)왕 시책 중 신의왕와 원경왕(종 원비 여민씨) 만의 (太)자가 미(未便)다고 논의다. 왕의 太자를 제고 개책(改冊)였지만 두 왕에 대 왕실의 숭모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23대 순조 24년 (1824)에는 첨지 철제(1757~?)의 주청으로 신의왕 출생지 안변 익위사(翊衛社)에 강구기(舊基) 비각이 세워졌다. 광무 3년(1899) 고종(재위 1863~1907) 제가 칭제 건원(稱帝建元)며 조고제와 께 신의왕를 신의고로 추봉 올렸다. 어느 날 용상에 앉은 종(재위 1401~1418) 대왕이 시립 대신들 중 양촌 권근 (1352~1409)을 문다. “경은 짐의 어미 되는 신의왕를 어찌 여기고 있는가?” 노(老)대신 권근은 부들부들 떨었다. 일찍부 종대왕의 성정을 잘 아는지라 자칫 잘못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날 이다. 권근이 얼른 부복다. “신(臣) 권근 엎드려 돈수백배옵고 용안을 우러러 감 아뢰옵니다. 신의왕 마마 께옵서는 천자(天資)가 숙고 아름다우시며 곤덕(坤德)이 유순고 발(正)라 일찍이 용연(龍淵)에 빈(嬪)이 되어 왕업을 도와 이루게 셨사옵니다. 성철(聖哲)을 강케 사 대을 끝없이 전니 신이(神異) 공과 아름다운 의범(儀範) 또 옛 사람과 비교 여 추의 부끄러움이 없사옵니다. 일찍이 왕업의 기초를 닦아 마련 자취는 조종 (祖宗)에서 비롯되었사오나 자손을 잘 낳은 경사는 실로 신의왕마마께 유래옵니다. 전, 부디 굽어 살 주시옵소서.” 종 5년(1405) 제릉비에 음각된 비문의 내용이다. 비록 생전에는 영를 누리지 못지만 조고제 이 조선의 모든 왕들은 신의고의 자손이다. 제릉은 릉(厚 陵, 2대 정종대왕 ‧ 정안왕)과 께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에 있다.
26 李花 287 기록에 의면 제릉(북 보존급문재 제556)은 고려 공민왕릉(공민왕 릉과 노 국공주 정릉, 북 국보급문재 제123) 묘제를 도입 조선 초기의 왕비릉이다. 종 7년(1407) 공조서 박자청(1357~1423)의 감독 에 씨 묘소를 대 사초(莎草) 고 묘역을 3단으로 조영 왕비릉 규모로 갖추었다. △제릉의 맨 상단에는 12지신 상을 새긴 병석을 둘렀고 그 주위에 난간석을 설치 다. 난간석 밖 3면에 낮은 높이의 곡장을 두른 뒤 곡장 안에는 여러 개의 석양과 석 를 배치다. △중간 단 가운데 6각 장명등을 세우고 좌우에 문인석과 석마 쌍씩 을 세웠다. △왕권을 상징는 무인석은 단에 있으며 능역 앞쪽에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신의고의 적과 추증 시를 밝 제릉비(북 보존급문재 제1624)가 있다. 사계에서는 제릉의 상설물(象設物)을 북 소재 왕릉 중에서도 조미가 뛰어난 석 조 예술으로 가고 있다. <세종/광대군 19대 ‧ 始44세> ☞ 다음에 계속
李花 287 27 대동기문(大東奇聞) 이승창(李承昌) 본원 부이사장 [집자 주 : 우리나라에는 선유(先儒)들의 사상이 담긴 문사철(文思哲)의 책이 무수 많다. 그 중 에 조선왕조 및 대제국을 519년 간, 각 대(代) 왕조 요소요소에서 남다른 역로 이름을 남 긴 인물들이 많다. 이분들의 기(奇行)을 색고 수문(搜聞)여 찬집(纂輯) 『대동기문(大東奇 聞)』이라는 책이 있다. 찬집인(纂輯人)은 금천(衿川) 강석(姜斅錫), 교정인(校正人)은 징(波澄) 윤 영구(尹甯求), 동교인(同校人)은 성주(星州) 이종일(李鍾一)이다. 다음은 1926년에 간된 『대동기문』 에 실린 소재에 고사성어 및 사자성어를 곁들여 쓴 글이다. 배극렴의 봉국새(奉國璽)와 조의 등극 배극렴(裵克廉 : 1325 ~ 1392)은 성주인 (星州人)으로 자(字)는 양가(量可)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문좌시중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청렴 고 근신 인물로 일컬어진다. 공양왕 4 년(1392) 임신 7월 16일에 배극렴이 조 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대소신료, 량(閑良) 기구(耆舊)들과 국새보(國璽 寶)를 받들고, 감록국사(監錄國事) 이성 계(李成桂 : 이 조)의 저에 찾아가 왕위에 오르기를 권자 조가 마침내 보위에 등극였다. 고려 우왕 14년(1388) 무진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당시는 대국이었던 원 나라는 망고 주원장(朱元璋)의 명나라 가 신는 세대교체가 되고 있었다. 고 려조정은 친명(親明派)와 친원(親元 派)로 갈려 있었다. 최영(崔瑩 : 1316 ~ 1388)과 우왕은 멸망 원(元)을 지 고, 조를 위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은 명(明)을 고 있었다. 때마침 명 나라가 철령 이북 이동이서(迆東迆西)는 원의 개원로(開元路)에 속 것이라면서, 그 군민인 인(漢人), 여진(女眞), 달달 (達達), 여인(麗人)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 시고 있었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요동정벌의 일에 대 논의니 다들 ‘안 된다’고 다. 그 러자 우왕이 단독으로 최영과 남모르게 요동공벌의 계을 세웠다. 그 계을 안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 :
28 李花 287 ? ~ 1388)이 최영의 집에 찾아가 그것이 불가을 역설자 최영은 이자송은 임견 미( ? ~ 1388)의 소속이라면서 장(杖)을 쳐 전라도내상(全羅道內相)으로 유배 다가 곧 뒤따라 죽였다. 우왕은 명나라의 요동병(遼東兵)이 강 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웠다는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의 보고 를 듣고는 “군신들이 요동공벌 계을 듣 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눈물 렸다. 이 3월에 우왕이 최영과 요동 공벌을 결정였으나 오려 감 선언을 못고 있던 였다. 사냥을 다는 계 로 주에 거둥여 4월에 봉주에 머물렀 다. 우왕이 조에게 말기를, “과인이 요양(遼陽)을 공벌려고 니 을 다 야 것이요.” 였다. 그 말을 들은 조는 우왕에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불가을 들어 말였다. “소국으로 대국을 거슬리는 것이 불가 의 나요, 여름에 군사를 일으는 것이 불가의 둘이요, 왜적에게 빈을 보여 침범 기를 줄 수 있는 것이 불가의 셋이요, 무더위는 비 오는 시기인데 과 쇠뇌의 아교가 리고 대군들의 이 빠 지는 것이 불가의 넷입니다.”였다. 그 말을 들은 우왕은 자못 그렇게 여겼다. 조가 이미 물러 나와서 최영에게 일러 말 기를, “명일에 이 말을 다시 아뢰는 게 마땅니다.”니, 최영이 그렇게 겠다고 말고는 밤에 최영이 궁에 들어가 우왕에 게 ‘남의 말을 듣지 말라’고 아뢰었다. 명일에 왕이 조에게,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 수 없소.”자, 조 가 “전께서 반드시 대계를 이루려십 니까? 그러시다면 서경(西京)에 머물렀다 가 가을에 출사(出師)소서. 가을은 벼 곡식이 들에 가득니 군사의 식량이 넉넉여 북을 울리며 공격 수가 있습 니다. 지금은 출사의 시기가 아닙니다. 요 동의 성(城) 나를 빼앗는다고 도 군 사가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어 군사
李花 287 29 는 노쇠고 양식은 떨어질 것이니 만 부를 뿐입니다.” 자, 왕이, “경은 이자 송을 보지 못소?”였다. 조가 “이자송은 죽었어도 아름다운 이름이 세에 전 것입니다만 신은 살 아있어도 이미 계책을 잃었으니 어디에 쓰겠습니까?”였다. 조가 물러나와 눈 물을 리니 군사가, “공께서는 어찌 여 그리 슬십니까?”자, “생민(生 民)의 (禍)가 이일로부 시작될 것이 기 때문이다.”였다. 드시어 요동공벌을 결고 우왕은 양에 머물면서 도의 군사를 독책 징발 여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고 승도 (僧徒)를 발(發)여 군사를 만들었다. 이 어 최영을 도도사로, 창녕부원군 조 민수를 좌군도사로, 조를 우군도사 로 삼아 출정을 였다. 고려의 세와 중국 명나라의 세로 볼 때 중과부적이 요 당낭거철(螳螂拒轍)이라고나 까. 상 대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우왕과 최영의 계은 되돌릴 수 없는 책이었다. 중도 에 도망병이 뒤를 이었다. 5월에 압록강 중간에 있는 위도에 머 물러 있으며 앞으로의 일정이 악여 전진기 곤란고 군사는 병들고 비는 억수로 쏟다져 도저 더 이상 진격 수 없는 실정을 여러 차례 보고였다. 그러 나 우왕과 최영은 무가내(無可奈)였다. 조가 장졸들을 이로 설득여 결국 군을 결정다. 장졸들은 사지에서 벗 어나게 된 것을 즐거워며 만세를 불렀 다. 조는 대군이 도강는 동안 강 언 덕에 서서 독려여 모든 장병들이 사 람도 낙오 없이 도강에 성공였다. 대군 이 모두 도강을 마치자 갑자기 물이 닥 쳐 위도를 쓸고 갔다. 모두가 천우신 조요 인력불급(人力不及)의 상상도 못 불가사의 일이었다. 이 어려운 군 결은 종묘사직과 억 조창생을 위 것으로써 자신의 영욕은 말(毫髮)도 끼어들 이 없는 견의위 (見義必爲)의 용기에 실천이었다. 이는 조의 남정북벌에 백전백승의 개선으로 쌓은 인덕지용(仁德智勇)이 바로 위도 군의 대 결단을 결여 사직과 생령 (生靈)을 위망(危亡)에서 구제 수 있었 던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우왕과 최영은 막급으로 자기의 실책을 자기 몸으로 당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영은 복죄되고, 우왕은 출되었다. 그 아들 창(昌)을 세웠지만 명나라 제 가 “왕씨가 아닌 이성이 왕이 될 수 없으 며 앞으로는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불 다”는 보였다. 이에 조정백관들이 “창왕을 출고 신왕(神宗)의 7대손인 정창군(定昌君) 왕 요(王瑤)가 왕씨의 친족 중에 가장 가까 우니 이를 왕으로 세워야 다”고, 공민 왕의 정비 궁(恭愍王正妃宮)에 가서 정비 (正妃)의 교서를 받아 우(禑)를 강릉에, 창 (昌)을 여 강로 추방여 서인(庶人) 으로 만들고, 왕요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가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이색과 정 몽주 등의 조의 충정을 의심고 배격 는 무(誣陷)에 뇌동(雷同)였다. 조의 일단심은 고려의 중에 있었 으나 반당들의 도모와 책은 끊임없이
30 李花 287 2021년 종묘대제 정전제 유브로 관람가능 온라인 생중계 사이 : https://youtu.be/HN-w3D_qqLA 이어지고 있었다. 조는 위도 군 4년 동안을 은인자중며 절절사(折節 下士)로 일관이었다. 그러나 조의 생 쌓은 숭덕광업(崇德廣業)은 고금천(古 今天下)를 기울여도 비 데 없는 무쌍 (無雙) 공덕으로 명동천(名動天下)였 다. 천무이일(天無二日)이요 지무이왕(地 無二王)이라 까 아무리 충심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의 의심을 수 없는 늘을 떠받치는 위세였다. 마침내 왕을 는 무리들이 조의 좌우길사(左右吉士)들을 제거고 조를 려는 책을 기에 이르렀고, 조의 제5남 방원(芳遠 : 종)의 천(通天) 지모(智謀)에 걸려 그들 마수는 멸망되고, 위에 빠졌던 좌우길사는 보되었다. 이에 시중(侍中)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 게, “왕이 왕도를 상실였고 인심이 떠났 으니 사직과 생령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 다”고, 출을 청여 대비의 교서를 받 아 공양왕을 기로 결정되었다. 남은(南 誾)이 문리(門下評理) 정계(鄭熙啓) 와 교서를 받들어 공양왕의 시좌궁(時座 宮)에 가서 선교(宣敎)를 니, 공양왕이 손위(遜位)고 국새를 내놓았다. 백관(百 官)이 그 전국새(傳國璽)을 받들고 왕대비 궁에 가서 왕대비전에 맡겨두고 서무(庶 務)를 아뢰어 왕대비에게 결재를 받았다. 임신년(1392) 7월 13일 임진에 대비(大 妃)가 교서를 선언여 조를 감록국사 (監錄國事)로 삼았다. 7월 16일 을미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 김사(金士衡), 이제(李濟), 이(李和), 정계(鄭熙啓), 이지란(李之蘭), 대소신 료 및 량(閑良) 기구(耆舊) 등이 국새 를 받들고 조의 집에 나아가니 구경꾼 들이 저자거리를 꽉 메웠다. 조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날은 저 물어갔다. 배극렴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국새를 대청위에 놓으니, 조가 놀랍고 갑작스러워 어찌 야 바를 몰라 였 다. 간신 이천우(李天祐)를 붙들고 겨 우 침문(寢門)을 나오자 백관들이 나열 여 서서 배례를 올리고 북을 치며 장안이 떠나도록 만세를 불렀다. 배극렴 등이 사(合辭)로 아뢰기를 “나라에 임금을 두는 것은 위로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 생민을 안게 려는 것일 뿐입니다. 고려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 왕씨의 제사는 이미 없어진 것 입니다”였다. 마침내 임신년(1392) 7월 17일 병신(丙申)일에 조가 부득이 수창 궁(壽昌宮)에 나아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궁전에 들어가 왕위에 즉위고 어좌를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조(朝賀)를 받았다. 이렇게 조선왕조 천년 왕업의 기 초가 산보다 무겁고 단단게 놓여 졌던 것이다. <종/양녕대군 16대 · 始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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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花 287 33 어머니 봉양일기(4) 이병준(李炳俊) 본원 문부 차장 2020.12.24. 고마운 요양보사님 오전 10시 20분, 일주일에 5일 간은 가 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오전시간 요양 보사가 집에 도착는 시간이다. 약 3 개월 지켜보니 도착시간이 얼마나 정 지 20분을 전‧서 5분을 초과서 도 착 적이 번도 없다. 자기 직무에 대 철저 도덕성과 봉사정신으로 임는 그 마음의 성심(誠心)을 읽을 수가 있다. 집에 와서 주로 는 봉사의 내용은 보 보조기구로 걷기운동, 종이컵으로 쌓기, 소 목으로 쌓고 다시 개 씩 빼어내기, 즐 맞추기 등은 정신 집 중으로 인지기능을 유지 또는 복시는 반복 운동으로 치매자에겐 매우 적 반복 련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 가 나나는 상은 엄마가 재미있게 집 중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작년 초에 지어준 치매(인지 기능 상실증) 약을 지어드렸는데 나중에 보니 개도 안 잡수시고 지에 몽땅 버린 걸 인다고 내게 귓속말로 주 었다. 치매 5급 정을 받은 날 처음으로 수령 알약 30알을 가지고 집에 와서 저녁 식사 따슨 물 컵과 알약 개를 드리며 “어머니, 이 약은 기억력이 자꾸 더 나빠지는 걸 막아주는 예방약이 니 잡수셔야 요, 달 잡셔 보시고 과 없으면 제가 이 약은 안 지어 올게요. 저가 먹는 압약도 3년 전부 복용으 로 압을 거뜬 정상으로 아직까지 유 지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 이 약은 어 디까지나 예방약이지 중병자가 먹는 약 이 아니니 맘으로 드셔야 요” 다 내 설득이 먹들어 아무 말 없이 잘 잡수시고 계시고 과도 상당 보고 있다. 치매가 아직은 더 심지지 않음을 실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머니 건강 유지의 비결은
34 李花 287 꾸준 독서열이고 삼시 세끼 식사를 더 도 말고 정량으로 거뜬 비워낸다는 사 실이다. 적당게 커도 드시고 따뜻 날씨에는 지이를 짚고도 베기, 뽑 기, 밭매기 등 움직임을 쉬지 않는 그 정 신력이다. 몫 더는 건 이젠 마음에 대소사 집안일로 게 근심 걱정거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자식이 와 있으니 불시에 어찌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치매 상의 실 증상은 자기의 오래전의 과거사 일은 다 기억면서도 금방 얘기 것을 기억지 못고 잘 잡수시던 반찬 조리도 어떻게 야 지 그 방법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모시면서 짜증스럴 때도 있고 괜 스 스로 성질이 날 때도 있다. 지를 땅에 묻는 위, 종이 우려는 위 등은 쓰레기 봉를 사용 니 지 말라고 말씀을 수차 드렸는데도 막무가내다. 내 개인의 자유스런 시간은 거의 기야 는 일상으로 변 버린 게 계점이다. 어쩔 수 없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삭 내야는 조바심에 안간을 쏟아야 는 게 실이요 계점이다. 2020.12.31. 세모에 느끼는 단상 또 가 의미없이 마지막 달력 장과 께 무게 넘어간다. 별게 의미를 부여 계기를 마련지도 못 채 시간에 떠밀려 엉뚱 장소에 불시착 느낌이다. 부모를 모시는 건 자식으로 서 당연 천륜의 도리이나 삼시 세끼 밥 지어 챙겨드리고 봉양는 일이 너무 단 조롭고 루루 자신과 버내기를 는 듯 무료 루살이 삶이 돼버린 느낌에 의미를 찾는데 가끔 의감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내 개인적 시간 용이 전 수월게 용 되지 않는다. 밥상에다 책 놓고 책상다리고 쪼그리고 계속 책만 보다보 니 이 또 계 상이 오는 것 같다. 무릎에 이상이 오는 것 같다. 저리기도 고 짧은 코스의 길 걷기에도 오른쪽 무 릎이 저리고 땡기는 느낌이다. 전적으로 운동부족이다. 나이 도 다소는 있겠지 만 못 내려놓는 긴장감이 스레스로 축 적되는 느낌이다. 내년부는 루 일과 생 을 어 떻게 바꿔서라도 내 건강 유지를 위 단의 대책, 라이스일을 강구야겠는 데 뾰족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매 주말 이은 집을 좀 벗어나서 순수 내 개인의 자유시간을 갖도록 시도 봐야 것 같다. 시간에 억눌려 끌려다니는 느낌이 참 감내기가 갈수록 들 것 같 은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다. 독서도 집 중이 잘 되지 않고 삼겹살에 술 잔도 게 마주 나눌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 천애의 고독, 그 쓰라린 맛에 동반되는 서글 감상(感傷)들을 어머니는 예순다
李花 287 35 섯 를 청상으로 어찌 견뎌내며 감내 내셨을까 감이 잡지 않는다. 어버릴 수 없는 긴장감, 주무시는 모 습 망연 지켜보며 불을 켜지 않은 상 에서 좌변기에 소변보는 소리에도 귀 기 울이며 시나 넘어지지나 않으실까, 주 무시다가 격게 몰아쉬는 숨소리에도, 전 숨소리가 안 들려도 귀 기울여서 신 경을 써야는 이 긴장감을 감각 적으로 늦출 수 없다. 지로운 생쥐 보살님에게 조언을 구 려 도 뾰족 수가 나오지 않을 듯 니 내가 고뇌며 스스로 체득며 열어 가야 일인데 도무지 단의 묘책이 서 지 않는다. 짧게 남겨진 내 몫의 인생을 냉철게 인식고 바르고 참된 삶을 모 색가야 일이다. 아직은 좀 더 남은 시간 어머니를 봉양야 각오로 가장 율적이고 독자적인 시간 관리를 구상 봐야 시기이다. 그리고 내 삶에 의 미를 부여고 내 존재의 가치도 스스로 업그레이드 누려가야 일이다. 우선은 내일 국문인 봉군지부 원 작집 <奉化文學 25집>책 수령부 야겠다. 이번에 신입원이라서 내 수 3이 책 제일 앞면에 실리게 되어 기쁘다. 직장생 임 에 귀 고 문(文協)에 입서 원으로서 첫 작 이 게재가 되니 기쁘다. 그리고 5월 초 순경에 발간 우리 <善思人문동인> 창간 발간 원고 및 집 전반에 대 준비를 야 고 내 창작 문 작 제2 집(가제: 어머니 봉양일기) 발간 준비도 착실 점검야겠다. 결코 신이 나를 지 켜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지며 난관을 지롭게 이겨내고 짧게 남은 나 의 날들을 석양에 곱게 물들여 가야리 라 다짐본다. 2021.1.1. 신축년 새 첫날에 시골집, 소에 집을 찾는 이는 우체부 아저씨, 아주 가끔 배 기사님, 달에 번 전기 검침원외 찾는 분이 거의 없 는 곳이다. 지금 시골이란 게 자녀들은 모두 외지로 출 나가고 로 아니면 두 분이 사는 집이 거의 대부분이다. 균 연령도 60세 이상 80고령이 대부분이 다. 재가요양보사의 방문 봉사를 받는 가정도 있고 요양시설에 부모를 의 놓은 가정도 다다. 땅 위이니 육지라는 이유 외 사 바다 에 갇 섬 같은 느낌이다. 이 느낌은 내 가 와서 로 약 10개월 어머니를 봉양 며 실감 뼈아 실이다. 부모님의 심경을 어찌 설, 추석 때 겨우 잠간 다녀 가면서 그 외로움과 적적의 깊이를 이 수 있겠는가. 도저 가늠조차 순 없는 것이 절박 농촌의 실이다. 마을관 노인정 나들 이도 대부분 유모차에 의지는 실이다. 느님! 2021년 신축년에는 코로나 절명케 시어 오고 싶은 사람 올 수 있게 시고 가고 싶은 사람 갈 수 있게 소서. 소 에 서로 지장 없게 시어 얼굴 바라보 며 다시 정 나누는 세상 되게 소서. 코 로나로 거세된 일상의 소중을 새삼 깨 닫게 시어 불실 미래에 대처는
36 李花 287 지의 안을 열어 주소서. 자에겐 조 속 쾌유를 락시고 절망에 빠진 이 에겐 소망을 실어주시고 치매 노인 봉사 는 요양보사님 자를 위 사는 의사, 간사님 봉사와 신의 고운 손길 위에 별신 은총으로 머물러 주소서. 느님! 근심 걱정 번민 슬은 거둬 가시고 당신의 의지대로 창조신 인류 소과 구원의 손길 쳐 주시옵소서. 부처님! 대승보살의 대자대비심으로 중 생들의 고(苦)를 멸 거두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줄 어떤 신(神)도 이 지상에 는 존재지 않음을 인식게 시어 자 기의 주인은 오로지 자기뿐이며 자신의 노력만이 자신의 가치를 창출을 깨달아 느끼게 소서. 참되게 살 가치 있는 빛나는 지구별 동 방에 빛나는 아름다운 내 조국 금수강산, 남과 북이 나 되는 의 길 열어 주소서. 지긋지긋 코로나 거둬 가시고 긴장된 얼굴에 웃음을 되찾게 소서. 온 인류가 복된 일상 속에서 과 목 속에 복을 느끼며 사랑을 누리는 일상 이 되게 소서. 2020.1.13. 새를 맞아 아들 제에게 너 제는 내가 살아가야는 이유이 다. 다소간은 너들의 목가 달성된 듯 서 기쁘고 복구나. 건강게 잘 성 장서 자기 본분 지는 나의 두 아들, 고맙고 자랑스럽구나. 너 제도 불 의 나이를 지났으니 이제는 집안 대소사 는 제간에 서로 의고 의논가며 제간 정의(情誼)를 돈독게 지도록 거라. 가정목을 최고 우선의 복 목로 삼고 내가 선 반려자, 생사고락도 께야 는 운명 같은 인연의 소중 아 내와 두 영의 작인 천륜의 육인 선 우, 승연, 도연, 채연은 ‘된사람 든사람 난사람’ 참사람으로 영육간에 륭 ‘된 사람’으로 육가길 바란다. 이젠 너들도 나이가 반생을 넘어서는 위치이니 가까운 장래 직 는 물론 좀 더 먼 그 일 자신의 자상을 미리 새 겨보며 알뜰 게 사전에 준비는 마음 자세로 미래를 대비 가길 바란다. 범사에 감사는 마음, 겸손의 자세로 삶을 겸게 사유는 삶을 지가길 바란다. 건강이 최고임을 인식되 무리 지는 말길 바란다. 과유불급이라는 옛 말씀을 잘 새겨 소에 스스로 진단고 체여 체력을 단련고 유지 무병장 수 누리도록 마음을 다스려가길 바란다. 나는 우선 머니를 요양시설에 안 보 내게 봉양에 최선을 다야는 것이 급 목로서 의무가 부여되어 있기에 다른 어떤 내 개인적인 소망조차도 잠시 접어두어야 절제절명의 시기이다. 이 점을 너들이 넓게 새겨 이주길 바 란다. 조모 봉양엔 내 체력이 우선인데 10여 개월간 귀서 그동안 어머니를 봉양 모셔본 경에 바서 건강 유지를 위 자력의 대비책을 곰곰이 생각고 강 구 중이나 가끔 내 스스로 계를 느끼곤 나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길니 너 무 심려말길 바란다. 늦출 수 없는 일상
李花 287 37 의 긴장감과 로감, 스레스 등 은 갈 수가 없는 실이다. 너 제에게 별 당부 것은 재의 집 상 엄마의 심경을 잘 아려 배려 주길 바란다. 나는 고에 와서 머니 봉양에 당분간은 집에도 자주 들 르지 못 임을 너들이 눈으로 봐 서 짐작리라 생각다. 도라는 무거 운 단어보다는 상시에 기본적 도리를 아려 다길 바란다. 어차 나는 짧게 는 몇 날이 될지, 몇 가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고에 머물면서 조모님을 봉양 야니 애비가 빈 공간에 엄마의 처지를 별 배려야 는 너 제의 역 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 시기 임을 명심길 바란다. 더군다나 내가 금년 3월 정년임으로 인 우리 가정의 상의 경제동의 리 듬이 깨져버린 느낌에 누구보다도 엄마가 제일 당스럽고 심려가 것이다. 이 점을 자식 된 입장에서 깊이 새겨 세심 게 배려고 보살주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 자주 내왕며 상면지 못는 어려운 경에 처 있으나 대 메시지나 로 안부라도 자주 물어 소며 가족으로서 외롭다는 느낌만은 안 느끼게 소가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시골이란 곳은 우 배달부, 배기사, 전기검침원, 마을 이장 등 외에는 집을 방문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사람이 거주는 가옥도 띄엄띄엄 있으니 마치 절 집 같은 분위기다. 겨울 추위가 극성 을 부리니 바깥 걷기 운동마저도 머뭇거 리게 는 실정이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삭막과 요즘은 새소리조차도 들리지 않 는 적적이 전부인 이 곳 고집의 경 도 좀 아려 머니와 애비에 대 관심 도 생각에서 너무 잊지 말고 다소 기억 주면 고맙겠다. 새엔 우리 가족들 서로 간에 배려 며 너 제도 인생의 절반 고개를 넘어 섰으니 차원 업그레이드된 시각으로 당면 실의 세상과 미래의 세계를 관 조며 대비는 지로운 삶을 모색가 길 간절 빈다. 소는 가정으로 목 생을 영위 가도록 쓰는 가 되길 소망 본다. 별 건강에 유의서 극성스런 코로나는 원수처럼 대접 병원신세는 지 는 일 절대로 없는 가 되길 간절 마음으로 빈다. 2021.1.14. 채취 냉이를 얻은 날 오늘은 봉 읍내 시장보러 가야다. 갈방 버스정류소까지 20분 걸어가서 버스 를 면 되나 걷기 운동도 겸 다덕약 수까지 4km이니 40분이면 더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걷기로 작정고 집에 서 출발 약수에 도착니 오 3시였 다. 법전역에서 3시 20분 버스가 과 니 5분 정도 늦춰 25분 정도에 약수 정류장에 나가면 될 것을 예상고 날씨 가 추워 예천가든 슈마켓에 가서 잠시 몸을 녹기로 작정다. 젊은 사장과는 구면이라 상당 오랜만 에 왔다면서 반가이 인사를 다. 상점 안에는 장작 난롯불을 우고 있어
38 李花 287 다. 우곡 성지를 갔다가 돌아올 적에 들렀으니 약 3개월은 된 듯다. 오가며 자주 들러 식사도 고 물건도 사고니 친분이 두워 감을 느낀다. 께 있는 분께 사장의 인사소개로 성명을 보니 그분은 동양초등교를 졸업으며 우리 마을 고(故) 이이원과 친구라면서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배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버스 도착 시간 이 다되어 3시 25분에 정류소에 가서 무 릎 꺾기 운동을 며 버스를 기다리다 사 전 구매 놓은 승권을 주고 버스를 고 봉읍에 내려서 봉 식자재마에 들러 대에 메모 오늘의 장보기 콩 나물 2봉지, 두부 3모, 무 2개, 대 1단, 두 1봉지, 땅콩 너, 율무차 등을 구 입다. 일부는 배낭에 넣고 나머지는 작 은 박스에 넣어 들고 가기 게 끈으로 묶어서 대고 봉발 서벽 4시 40 분발 버스를 고 갈방역에 5시에 내렸 다. 걸어서 귀가를 시작 금완섭 배 집앞 노(路)상에서 맞은에서 자전거를 몰고 귀가는 여인을 만났다. 서로 수인 사로 어느 동네 사는 누구댁이냐고 묻다 보니 그분은 불미골에 살다가 사으로 이사 신덕의 따님으로 자기는 어머니 가 금년 81세로 치매 초기상이 와서 봉양러 와 있으며, 춘양재가센 소속 으로 요양봉사동도 겸고 있다고 다. 나는 명창골 송월재(松月齋 ‧ 자의 10대조) 정자 바로 뒷집에 살며 97세 어 머니 봉양러 귀 있음을 간략게 말다. 오늘은 봉읍에 가서 시장보고 오는 길이라고 설명다. 그 분은 바구니 안에서 채취 냉이를 움 쥐어서 어 머니 국 끓여 드리라고 준다. 나는 갑자 기 줄 것이 없어 <奉化文學 / 국문 봉지부 원 작집> 책을 권 드리 고 제 글 수이 세 실려 있으니 심심 적에 번 읽어보시라고 당부고 건 네주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이 추운 겨울 날 몇 시간을 이 밭 저 밭을 매 다니며 채취 귀 냉이를 서슴없이 움 집 어주는 그 마음이 동병상련의 정리(情理) 인가 싶어 고마운 맘에 코끝이 시며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집에 도착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엄마 는 냉이를 다듬으며 “누가 채취는지 모 르지만 채취 경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다. 왜냐면 깔끔게 채취면 다듬 을 게 별로 없는데 반 정도의 분량은 못 쓰는 잡이라는 설명이다. “엄마, 그 분은 서울서 친정어머니 봉양러 귀 분으로 냉이 채취 경이 없어서 그래요” 고 그분을 위 변명을 주었다. 다 듬어 국 끓여서 잘 먹으면 될 것을 엄마 는 세 번이나 말씀신다. 나는 고사람의 인심과 인연을 생각 며 고마운 마음만 새길 뿐이다. 이 역시 어머니의 초기 치매증상에서 나나는 상임을 내가 인지게 되니 안까운 실을 또 번 실감는 날이다. 받아온 냉이에서 참사람의 기가 이는 듯다. 언제 다시 만나질 인연이 되면 깍듯이 감 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다짐며 오늘 루도 신에게 감사 기도드리며 잠자리에 든다. <종/온녕군 17대 ‧ 始41세>
李花 287 39 117자의 긴 시를 가진 조선의 임금은 누구일까 이상주(李相周) 왕실문 작가 본원 문위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다.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는 이다. 사람은 이름을 부 르며 소다.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는 빛깔과 기가 담겨 있고, 상대를 바라보는 눈 빛에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그렇기에 불리지 않는 이름, 눈빛 교 없는 상대는 존재 의미가 덜게 느껴진다. 지만 부를 수 없고, 불릴 수 없고, 눈빛을 마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늘의 뜻 인 천명(天命)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다. 물론 군주에게도 이름이 있다. 세종은 이도(李祹)이고, 정조는 이산(李祘)이고, 순종은 이척(李坧)이다. 그러나 전시대에는 임금의 이름을 부르거나 쓸 수 없었다. 극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고는 눈 맞춤도 수도 없었다. 사 기록 등에서도 왕의 얼굴을 그리지 못 다. 공은 옥좌 뒤에 쳐진 병인 일월오봉병을 배경으로 의자를 그려 임금을 상 징적으로 다. 절대 권력자인 임금은 신성불가침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금의 이름은 ‘숨기다’는 뜻의 (諱)로 다. 이름 부름을 는 게 (避 諱)다. 과거시을 준비는 유생은 역대 임금의 이름을 줄줄 외워야 다. 과거 답안 지에 역대 임금의 이름자를 쓰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관리도 공문서에 임금의 이름 을 쓰면 처벌되었다. 신들은 임금의 이름과 의미나 발음이 같으면 개명을 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최석만이다. 그는 종의 어릴 때 이름인 소(小諱)를 여 석만(錫萬)을 석정(錫鼎)으로 바꾸었다. 세 살 때 왕세자에
40 李花 287 문조 축문. 문조의 제 축문에는 117 자의 긴 이름이 나온다. 책봉된 문조의 이름은 영(旲)이다. 이 글자는 주로 ‘대’로 발음되지만 당시 왕실에서는 ‘영’으로 읽었다. 이 때 경도 관찰사가 김이영이었다. 그의 이름 끝 자 발음이 세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는 곧바로 상소를 올린 이영(履永)을 이양(履陽)으로 고쳤다. 이처럼 임금의 이름으로 인 많은 불이 따랐다. 이에 나라에서는 임금이 될 가능성 있는 왕자의 이름 을 가급적 글자로 다. 또 실생에서는 쓰이지 않는 귀 글자를 다. 때로는 기존 자의 음과 다르게 읽게 다. 백성의 불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종묘의 정전 15실에 모셔진 문조(1809~1830년)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다.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긴 시를 가졌다. 무려 117자다. 또 임금을 지 못지 만 날 왕으로, 다시 제로 추존되었다. 이런 이 이력은 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 다. 117자의 시와 보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왕과 제로 추존된 것은 도와 관계있다. 조선은 기로 갈 수록 좋은 의미의 이름인 시를 계속 더다. 사 왕으로 올리는 추존 역시 마찬가지다. 군주가 된 손이 선조에게 예를 다고, 나라의 권위를 세우기 위 왕과 제로 추존 것이다. 문조는 명세자 시절인 22세 청춘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아들 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고종이 대 제국을 선면서 제로 재 추존 된다. 임금을 지 못지만 역사의 변천에 따라 사 왕으로, 다시 제로 거듭 신분이 상승된 것이다. 문조는 종 때부 고종 때까 지 16차례나 시가 올려진다. 시는 왕실이나 나라의 경사와 정치적 목적이 겹쳐서 가상 되었다. 문조의 시 가 상은 문조의 대리청정 60주년, 문조의 인 60돌, 신정왕 국모 동 50년, 신정왕 일, 신정왕 칠순, 고종 즉위 30년, 대제국 선 등 때 이뤄졌다. 문조의 자(字)는 덕인(德寅), (諱)는 영(旲)이다. 임금의 이름은 시, 묘, 시, 존로 구성된다. 시는 명나라에서 전온 것과 조선에서 정 것이 있다. 묘와 존 는 신들이 올린 것을 국왕이 낙점다. 그러나 문조는 중국에서 전온 시는 쓰 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강목왕(康穆王)이라는 시를 전왔었다. 조선의 군주는 인조 때부 중국에서 보내온 시를 사용지 않았다. 문조는 강목을 쓰지 않았음에도 묘(문조)와 시, 존로 117자의 긴 시를 갖게 되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종이 즉위 1863년, 임금의 아버지인 명세자를 군주로
李花 287 41 망료. 왕릉이나 종묘에서 제을 모신 뒤 축문을 불사르는 의식이다. 추존 것을 건의다. 또 다음 에 운성렬선광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의 존를 올 렸다. 1869년에는 요순공우근정(堯欽舜恭禹勤湯正)이, 1875년에는 계천건신숙모 (啓天建統神勳肅謨)가, 1876년에는 건대곤광업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의 존가 각 각 더졌다. 그 에도 세 차례에 걸쳐 장의창륜건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 기수 유범창(基泰垂裕熙 範昌禧), 입경도성 소장(立經亨道成獻昭 章)의 시가 올려졌다. 이로써 완전 이름 은 문조체원찬석극정 명성영철예성연경융 덕순공독경운성 렬선광준상요순공우 근정계천건신숙 모건대곤광업영조장 의창륜건배녕기수 유범창입경도성 소장치중달계력 기강수경목준연지굉 유신수서우복돈문 무인의명익제(文祖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 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 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 帝)로 되었다. 117자의 시 중 종묘의 신주에는 요순공우근정계천건신숙모(堯欽舜恭禹勤 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의 16자가 빠진 채 101자만 새겨져 있다. 고종 6년(1869)과 고 종 12년(1875)에 올려진 존다. 1869년은 문조 신 갑(回甲) 기념 존 상이다. 그 1월 3일 고종은 종묘 춘대제를 친면서 요순공우근정(堯欽舜恭禹勤湯 正)을 기록 책보를 올렸다. 고종은 12년에 문조의 세실(世室) 기념으로 시를 마련다. 신주는 4대가 지나면 인연이 끝난 것으로 보고 땅에 묻는다. 조선 왕실에서는 정전의 신주를 4대가 지나면
42 李花 287 영녕전으로 이안다. 세실은 불천위로 영원 정전에서 제사를 받는 왕이다. 문조의 추상존책보례는 그 12월 20일 종묘에서 졌다. 종묘의 신주에 16자가 빠진 이유는 알 수 없다. 조선말의 란기 으로 이되지만 그 에 올린 존가 새겨진 것을 보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실적으로 101자의 글자 도 새기기는 녹록치 않다. 세로로 두 줄로 새겨진 글자 당 기는 2mm에 불과다. 아주 작고 세밀게 새긴 글자는 육안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다. 미경으로 독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긴 시에 따른 에소드도 있다. 종묘대제와 왕릉제 때 문조에게 제사 드리는 축 문을 읽는 대축관은 무척 이 든다. 10여 분 동안 문조의 긴 이름을 독축면서 무척 긴장게 된다. 자라도 리게 읽어서도, 운율을 잃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스물 두 살의 짧은 생을 산 문조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문조는 스물 살 때 궁중무용의 으뜸으로 꼽는 춘앵전을 창제다. 어머니인 순조 숙의 보령 40세를 맞아 장수기를 기원는 춤이었다. 봄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독무로 연는 정재(呈才)다. 대궐의 잔치 때 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가 정재다. 문조가 창제 이 춤은 꾀꼬리를 상징는 노란색의 앵삼을 입고 관을 쓰고 춘다. 또 오색삼을 양 손에 끼고 육자길이의 문석위에서 없이 느리고 우아 춤사위 동작을 보인다. 문조는 아버지인 정조의 문예성을 빼어 닮았다는 을 들었지만 요절로 인 재능 을 꽃 우지 못다. 어려서부 문적 재능을 보인 문조는 외삼촌인 김유근에게 많 은 지를 보냈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우리나라 부채, 중국 부채, 좋은 등과 께 담뱃대 등을 보내줄 것을 청다. 여섯 살 때 쓴 지에는 사을 달라는 아이의 순진 이 묻어나고 있다. 內舅承旨開坼(내구승지개) 卽承審夜間氣候萬重 不勝喜幸 二封唐果 食之甚美 後日又爲覓送 望望不 備(즉승심야간기만중 불승 이봉당과 식지심미 일우위멱송 망망불비) 지를 받고 밤에 안 보내심을 아니 기쁨과 다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과(糖果) 두 봉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문조는 117자의 긴 시만이나 조선 부을 위 꿈을 꾸었다. 그러나 웅지를 치지 못다. 그가 만약 수명이 길었다면 조선 기는 색다른 빛이 보였을 수도 있 다. 안까움에 불러 보는 길고 긴 이름의 명세자, 문조익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추억이런가. 부국강병, 국민안을 염원으나 심중의 말을 끝내 지 못고 승 문조의 뜻은 117자의 긴 시에 깃들어 있다. <세종/밀성군 19대 ‧ 始44세>
李花 287 43 ‘매국노 고종’은 일제의 역사 왜곡이다 이진 서울대 명예교수 3월 26일은 영웅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다. 1910년 2월 14일 그는 뤼순 법정에서 사 을 선고받고 사 뒤 법원장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목숨 구기 위 상고지 않겠 다고 선언다. 그렇게 면 일본의 치를 인정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그 는 이 로부미가 내세운 동양 론의 거짓을 낱낱이 지적면서 이가 우리 제의 ‘총명’을 이기지 못 강제로 위시켰다고 였다. (「청취서」) 안중근 의사가 고종제를 가 귀중 사료이다. 최근에 고종제를 매국노라고 지칭는 책이 나왔다. 책 이름이 매우 선동적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문에 “누가 고종을 변는가?” “고종은 악의 근원”이라고 였다. 무슨 억심정으로 이런 언을 일삼는가? 안중근이 바로 고종 변 1라면 어떻게 답 것인가? 이 책은 고종이 뇌물을 받고 신들에게 ‘보조약’을 체결라고 지시다고 였다. 2005년 일본 역사자가 고종제 상지시설을 내놓았다. 국 측에서, 이가 제의 저 사실을 인멸기 위 사에 『실록』 기록을 조작 것임을 낱낱이 밝 다. 지금까지 일본 측에서 반론은 없다. 고종이 뇌물을 받았다면 어찌 이그 의 사견이며, 강제위의 역사가 있었겠는가? 이 책은 『주 일본공사관기록』 1905년 12월 11일 자 야시 공사가 가쓰라 총리 에게 보낸 보고서에 근거여 고종이 뇌물 받고 나라 아먹었다고 주장다. 11월 17 일 ‘보조약’ 강제 20여 일 지난 뒤에 올린 사 보고서다. 기밀비 10만 원 중 2만 원을 제 쪽에 보냈다고 지만, 제가 직접 받았다는 말은 없다. 청일전쟁 때 이와
44 李花 287 비슷 일이 있었다. 일본 군부는 러시아가 주동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내놓게 되자 뒷날을 도모여 반도의 전신시설 관리를 위 일본군 1개 대대의 반도 잔류 를 망다. 조선 정부가 시설 것인데 저들이 제 것처럼 계속 쓰겠다는 것이다. 이 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성사를 위 조선 왕실에 300만 엔을 내놓았다. 고종은 게 노 여 물리치고 일본군의 즉각 철수를 두 번, 세 번 명령였다. 수모를 당 일본 군부 는 이듬 왕비 살 만을 저질렀다. 책의 저자는 고종을 비난 서양인 기록도 용다. 서양인들 것이라고 다 옳은 것 은 아니다. 나는 서양인의 가라면 『코리안 레지리』(1896.11.)에 실린 인뷰 기사를 추천다. 국 체류 10년 된 머 버와 리 아젤러가 취재 기사다. 감리교 닌드 주교가 서울에 와서 알 때, 왕은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신문명을 가르 쳐 주는 선생님들이므로 더 많이 보내달라고 말 것을 소개였다. 이는 우리 서양인 들이 잊지 말아야 ,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라는 도 붙였다. 군주는 이 나라 최 고 지식인으로 ‘개적’이라고도 다. 고종제 무능 설은 일제가 1905년 ‘보조약’ 강제 , 저들의 침략을 정당기 위 만들어 낸 것이다. 국은 군주가 무능여 일본의 보를 받게 되었다고 선전 기 위서였다. 이때 죽은 지 오래인 대원군을 생시켰다. 대원군은 서원 철를 단 정도로 개적이었는데, 왕과 왕비가 그를 실각시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왕비살 만에 대 국제적 비난을 모면 보려는 음 수작도 붙였다. 일 본인들이 왕비를 죽인 것이 아니라 대원군이 왕비를 없애려는 것을 보고 조선의 장래 를 위 도왔을 뿐이라고 였다. ‘고종실록’은 조선총독부가 찬 것으로 1904년 러일전쟁 이 기록은 저들에게 유 리 것들로 채웠다. 이를 용는 데는 전문적 찰력이 요 데 이 책은 전 그 렇지 못다. 고종 죽이기에 급급선지 사료를 잘못 읽은 곳이 둘이 아니다. 미숙 책의 언을 취여 시국을 비는 논설도 몇이나 나왔다. 어리석은 역사 남용이 다. 광복 70여 년에 아직도 일제 역사 왜곡의 덫이 작동다니 어이가 없다. 고종 죽이기 는 미청산 상인 일 간 ‘과거사’ 문제 결에 나쁜 영을 끼칠 수 있다. 고종은 강 제로 위당 때 연주 최재 등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그 돈으로 ‘대의군’이 창설 되었고 안중근은 이 부대의 우 장군이었다. 안중근은 이 처단 신문 초기에 「이 로부미 죄악 15가지」를 서면으로 내놓았다. 세 역사가라도 빼고 보 것이 없을 정도로 당 것들을 열거였다. 안중근은 대 설립을 위 랑스어를 공부 정도 로 수준 높은 지식인이었다. 그의 ‘고종 제 변’를 누가 왈가왈부 것인가. <‘서울신문’ 2021년 3월 9일 자 시론 전재>
李花 287 45 선릉 정자각 중건상량문 (宣陵丁字閣重建上樑文)1) 이상(李商訓) 본원 전례부 차장 伏以。崇岡有截。幸仙寢之孔安。舊閣重新。欣寶座之罙固。禮則然矣。時有 待焉。恭惟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運撫盈成。業承艱大。專心典學。敎 已闡於文明。礪精圖治。志靡懈於宵旰。洋洋二紀之政化。廩廩三代之規模。睠 玆月出之遊衣。托在漢南之近服。龍蟠葱欝。拱蒼翠於先陵。象設閟嚴。煥丹靑 於神閣。霜露起感。瞻拜之誠愈勤。烝嘗以時。洒掃之禮罔缺。第緣風雨之攸 萃。不免棟宇之將頹。神道靡寧。正急慰安之擧。國儲雖詘。詎緩修葺之方。仍 舊貫而經營。基不加拓。命有司而監蕫。役無重煩。豐約之節得中。盖體恭儉之 德。陟降之靈如在。 怳聞謦欬之音。猗歟嬀幄之並尊。赫然明宮之改覩。山川 暎發。覺體勢之彌高。甍桷翬飛。儼氣像之增麗。陳筵几之整密。可備四時之祼 將。仰廉陛之崇深。應煩百靈之呵護。肆揚善頌。贊擧脩樑。 삼가 생각건대, 높은 언덕 가지런니 선침(仙寢)이 매우 아늑 다스럽고, 오래된 정자각을 다시 새롭게 니 보좌(寶座)가 매우 견고져 기쁘도다. 예에 있어서는 당연 일이지만 때로서 말면 기다림이 있었다. 공손 생각건대 성종강정인문무성공대왕(成宗康靖仁文獻武欽聖恭孝大王)께서 는 천운(天運)으로 영성(盈成)을 어루만져 왕업을 이어받으셨다. 전심으로 문에 1) 석문은 최석(崔錫恒, 1654~1724)의 「선릉정자각중건상량문」 원본을 저본으로 였고, 박락된 글자 는 『손와유고損窩遺稿』 권12에 실린 「선릉정자각중건상량문」을 참고였음.
46 李花 287 전념여 교가 이미 문명(文明)을 밝 셨고, 정신을 가다듬고 치세를 도모여 마음은 밤낮으로 이 적이 없으셨다. 양양게 이기(二紀)의 정(政化)를 이 루었고, 늠름게 삼대(三代)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제 달마다 꺼내는 유의(遊衣)를 돌아 보니, 수 남쪽의 근복(近服)에 있도다. 용이 서린듯 울창니 선릉(先陵)에 른 빛이 감돌고, 상설(象設)이 삼엄니 신각(神閣)에는 단청이 빛나도다. 상로(霜露)가 감 를 일으니 첨배(瞻拜)는 정성이 더욱 정성스럽고, 증상(烝嘗)을 때에 알맞게 지 내니 쇄소(洒掃)의 예에 이 없도다. 다만 우가 몰려들면 동우(棟宇)가 장차 무너짐 을 면치 못 것이다. 신도(神道)가 치 않으면 바로 위안(慰安)의 거조를 시급 야 니, 국가의 재정이 궁색더라도 어찌 수즙(修葺)의 방도를 늦추겠는가. 옛 관례대로 짓되 는 더 넓지 않고, 유사에게 감독게 니 일은 번거로움이 없 다. 약(豐約)의 절도가 중도에 맞으니 공검(恭儉)의 덕을 본받은 것이요, 늘에 계신 영령께서 앞에 계신 듯니 게 기침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륭라, 규악(嬀幄) 이 께 높여지며 게 명궁(明宮)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산천이 광채를 발니 불 듯 체세(體勢)가 더욱 높아졌고, 용마루와 서까래가 높이 치솟으니 엄연 기상(氣像) 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연궤(筵几)를 정밀게 진설니 사시(四時)의 관장(祼將)을 갖 추게 되었고, 모서리와 섬돌이 높고 깊게 올려지니 응당 백령(百靈)의 가가 있을 것 이다. 이에 아름다운 축문을 올려 긴 들보를 드는 일을 돕는다. 兒郞偉抛樑東。隱暎簾櫳瑞日紅。地接獻陵先寢近。望中佳氣欝葱葱。 兒郞偉抛樑西。靈珠秀色與天齊。回看順寢無多遠。松栢蒼蒼路不迷。 兒郞偉抛樑南。向晩簷端滴翠嵐。桑麻蔽野人安堵。像想仁風遠邇覃。 兒郞偉抛樑北。咫尺終南雲外碧。千古尊名簡冊垂。永隨江漢流無極。 兒郞偉抛樑上。星斗昭回天晃朗。悵望眞遊杳莫攀。玉欄花發應同賞。 兒郞偉抛樑下。依俙仙馭臨神座。恭惟聖孝永無違。長遣祠官勤掃洒。 어영차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니 상서로운 가 주렴 창에 은은 비쳐 붉도다 땅은 릉에 접있어 선침이 가까우니 선릉 정자각
李花 287 47 눈앞에 쳐진 아름다운 기운이 사방에 서려있도다 어영차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니 신령 구슬 빼어난 빛이 늘 높이 빛나네 돌아보니 순침이 그리 멀지 않고 송백이 울창여 길이 미지 않네 어영차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니 저물녘 처마 끝에 른 이내 감도네 뽕과 삼대 들을 덮어 사람들 안니 어진 습이 멀리까지 두루 지겠네 어영차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니 지척의 종남산이 구름 너머 르다 천고의 존귀 이름이 간책에 드리웠으니 길이 강을 따라 끝없이 르리라 어영차 들보 위로 떡을 던지니 뭇별들 돌며 늘에 찬란네 서글라 신선 놀이 붙잡을 길 없음이 백옥루 난간에 꽃을 께 감상시겠지 어영차 들보 아래로 떡을 던지니 어렴이 신선의 수레가 신좌에 임네 공손 생각건대 우리 임금의 성은 영원 거스름이 없으시니 길이 사관을 보내 쓸고 닦게 리라 伏願上樑之後。金粟成堆。珠丘不陊。基扃固護。屋宇與山岳長存。曆祚綿延。 宗祀並日月齊久。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로 금속(金粟)이 언덕을 이루고 주구(珠丘)가 무너지지 않아서, 기경(基扃)이 견고게 보되고 옥우(屋宇)가 산악과 께 오래 보존되어, 역 조(曆祚)가 면면 이어져 종사(宗祀)가 일월과 께 영구게 소서. <정종/선성군 18대 ‧ 始42세>
48 李花 287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 - 우기에 안거듯 비 오는 날은 마음 공부는 날이어야지 - 이문섭(李文燮) 본원 문부 위원 빗소리 좋게 들리는 곳 띠집(茅屋)에서 낮잠에 드니 구(浦口)에 비는 뿌리며 비스듬 부는 실바람을 따르니 버들은 늘어져 르디 르고 꽃은 촉촉 붉음을 머금으니 농부는 웃음으로 대며 집집마다 년들기를 기대누나. -정도전(鄭道傳)-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은 어린아이나 강 아지뿐 아니라 윤기 있는 가슴을 가진 이 들은 모두 좋아다. 물론 눈을 치워야 는 사람이나 교사고를 걱정는 분이 나 전방의 병사들은 싫어 수 있다. 여 름에 비가 오는 것은 어떤가. 작물에 요 비를 기다리는 농부는 반가울 것이 요. 이야기에 나오는 짚신 장수 어머니는 미울 것이다. 이렇게 내리는 비나 눈을 보고도 각자 의 처지나 마음가짐에 따라 보는 눈이 달 라지게 마련이다. 정도전의 시에서처럼 로운 기분으로 낮잠 자듯 마음 공부 를 고 년을 꿈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사람들에게 비 오는 날 생각나는 것을 물으면 라이에 부침개 부쳐 먹 기, 막걸리 마시기, 친구들과 고스 치 기, 래식 음악 듣기,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 마시기… 등등의 이야기 를 다. 그런데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의 뜻을 물으면 대개 그 의미를 안다는 눈치다. ‘손 보는 날’, ‘ 치는 날’, ‘돈을 벌 수 없는 날’ 등으로 이 고 있다. 그런데 그 이는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