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M Y CM MY CY CMY K
C M Y CM MY CY CMY K
宗 訓 崇 祖 惇 宗 차 례 2. 권두언 4. 본원 소식 8. 지원· 분원· 종· 봉 소식 11. 제사는 무엇인가(2) …………………………………… 본원 문이사/문박사 이범직(李範稷) 14. 준원전 조어진으로 보는 국초상의 정의 …………………………………………………… 미술부 조용진(趙鏞珍) 18. 세상은 수시변역 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 본원 부이사장 이승창(李承昌) 21. 자교실 22. 종묘대제 복원과 이재범 선생 …………………………………………… 본원 제무부위원 이재춘(李在春) 26. 故 봉 이명준(鶴峯 李明埈) 종친, 소장자료 규장각에 기다 28. 겨울바다 ………………………………………… 본원 제2문위원 이병(李丙赫) 29. 게 될 나무 …………………………………………………………… 시인/ 소설가 이규 32. 서오릉(西五陵)에서 ……………………………………… 월산대군종 부장 이재기(李在璣) 33. 만로 보는 역사이야기 96 …………………………………………………………………… 이전경(李田景) 35. 전주 이씨 종묘배 공신(4) …… 본원 문부 위원/이박사/고려대 경생연구소 이정(李政昊) 40. 귀, 어머니 봉양 일기 …………………………………………… 본원 문부 차장 이병준(李炳俊) 43. 당신을 사랑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 길병원 원무과 이진우 44. 운봉의 산대첩(荒山大捷)과 지명 유래 ………………………………………………………………… 이남일(李南一) 49. 세계 유일의 성소(聖所)인 유엔기념공원 …………………………… 부산광역시 부지원장/명예기자 이상용(李尙龍) 53. 愚夫愚婦 ………………………………………………………………… 이자(李賢子) 54. 세종 영릉의 천장과 세 왕족의 비밀 대 ……………………………… 왕실문 작가/본원 문위원 이상주(李相周) 57. 선조대왕 손자 원군 묘갈명 ……………………………………… 영성군종 명예장 이창용(李昌鎔) 61. 21세기에서 바라본 종대왕 ………………………………………………… 본원 자문위원 이춘근(李春根) 66. 일상의 의미 …………………………………………………………………… 이중(李重杓) 67. 승경원 건립기금 모금 성자 명단 69. 별원원 가입을 영니다 70. 사직대제보존 가입을 영니다 ▲ 지리산(이배 作) 2020 / 7 · 8월 격월간 李花 (권 282) 발인/이귀남 집인/이범직 발처/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소/서울 종로구 돈문로 89 우번/03131 전/(02)765-2124 스/(02)742-1676 인쇄인/이재복 인쇄처/(주)경인인쇄 전/(02)2272-8063 발/2020년 7월 1일 등록/1973년 12월 31일 이지(http://rfo.co.kr) 이메일([email protected]) 값 2,000원(1년 6, 정기구독 10,000원)
2 李花 282 존경는 종친 여러분, 안녕셨습니까? 먼저 종친 여러분의 안전과 건강을 간절 마음으로 기원는 바입니다. 연초 발생 코로나19는 경자년 새에 대 망과 기대에 부었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과 고 속에 몰아넣었으며 사 경제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금년 상반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코로나19는 아직도 그 위세를 꺾지 않고 있습니다. 권두언 이사장 이귀남(李貴男)
李花 282 3 이러 상에서도 종친 여러분들께서 종사 운영을 위 별성금을 내 주심에 감사드리고, 격려의 말씀도 아끼지 않으셔서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니다. 재 종약원 원무는 다소 지연되거나 실되고 있지 못는 것들이 있지만, 빠른 시일 내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원 종사 동을 수 있기를 기대니다. 존경는 종친 여러분! 숭조와 돈종을 며 문를 지고 역사를 발전시는 종사의 일들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반기에 실시지 못 일련의 사는 차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것 이라는 믿음으로 망찬 8월을 맞이고자 니다. 유시유종(有始有終).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코로나19가 루속 진정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기대며 종친 여러분 가정의 건강과 목을 기원니다. <성종/산군 17대 ‧ 始45세>
4 李花 282 본원 소식 ◎ 의 안 ․ 예산 ‧ 결산 심의의 건 ․ 보존 가입 원 승인의 건 ․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 임시총 개최의 건 ◎ 의 안 ․ 예산 ‧ 결산 심의의 건 ․ 보존 가입 원 승인의 건 ․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 임시총 개최의 건 재단법인 이장 소식 문재청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소장 김명준)는 지난 5월 15일 오전 11시 여 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 세종대왕 신 623돌을 기념는 숭모제전을 봉다. 금년 은 코로나19 산 방지를 위 제 수요원 등 최소 인원만 참석 가운데 치러졌다. 2020년 종묘제례보존 이사(2020. 6. 17) 2020년 사직대제보존 이사(2020. 6. 17) 기일자 기자 금액 비고 5.25-6.25 진(和鎭, 령군 16대) 60,000 5.25, 6.25(2) 장금 기 종친(2020. 5. 16 ~ 6. 30) 세종대왕 신 623돌 숭모제전 봉
李花 282 5 이날 숭모제 제관으로는 관 김명준 세종대왕유적관리소장, 집례 상, 찬례 규돈, 감 찰 명수, 대축 수, 좌장례 찬, 우장례 부열, 근시 범춘‧재, 집준 찬, 축사 명승, 재랑 도재, 전사 기종, 능사 범민, 찬자 원, 알자 성규, 설 병 전례부 위원이 봉 무다. 본원은 2020년도 국가무문재 제111 사 직대제 기사의 일으로 지난 6월 13일 요일 오전 11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소재 단성 사직단에서 주제 사직의를 봉다. 금년 주사직제는 코로나19 영으로 최소 인원이 참석 가운데 관으로는 초관 이만 규 산청군의 의장, 아관 이근 산청문원 장, 종관 권동 농중앙 산청군지부장이 봉무으며, 찬자 복용(福用) 사직대제 이수자, 대축 부용(富鎔) 사직대제 전수자, 장찬 직(鎬稙) 사직대제 이수자, 집사 규 대(奎大) 사직대제 이수자, 집준 진구(秦九) 사직대제 전수자, 알자 경용(景用) 사직대 제 이수자, 설 상(商訓) 전례부 차장이 참여다. 본원은 7월 2일 오전 11시, 종묘 정전에서 종묘 정전 보수공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착공 고유제를 봉다. 이번 고유제는 문재청 궁 능유적본부가 정전 보수공사의 의미를 제고 고 공사 중 안전을 기원고자 본원에 의뢰 여 진된 것으로 코로나19 산 방지를 위 최소 인원만 참석 가운데 봉됐다. 고유제 봉 제관은 초관 이성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장, 아관 김정수 시공 업체 대, 종관 김길 감리단장, 집례 우 종묘위원, 묘사 범춘 전례위원, 대축 준재 전례위원, 내봉 달 종묘위원, 축사 광섭 종묘위원, 재랑 재 종묘위원, 알자 도재 전례위원이 봉무다. 본원, 단성사직제 봉 종묘 정전 보수공사 착공 고유제 봉
6 李花 282 안대군 의령군종(장 羲成)는 지난 5월 26일 경북 의성군 봉양면 사부리 사당 영 모재(永慕齋)에서 숙원사업이었던 안대군 영 정 봉안 고유제를 올렸다. 이날 고유제에는 안대군종 구(恒求) 장과 대구시지원 성구(成求) 지원장이 참석여 종관으로 봉 무다. <대구시지원> 영광의 얼굴 순동(淳東, 종/령군 17대) 종친은 6월 2일 교법인 서 원 제8대 이사장에 취임다. 순동 종친은 연세대 정치외교과를 졸업, 연세대 정대원 석사, 양대 언론 박사 위를 취득 다. 중앙일보 기자, 삼성그룹 전략기실 사장, 국가브랜드위원 기업IT분과위원장을 역임으며 령군 수원종중 장으로 종사 에 참여고 있다. <령군종> 안대군 의령군종, 안대군 영정 봉안 고유제 淳東 종친, 서원 이사장 취임 본원 방문 이보 정기구독 기간이 금번 (권 제282)로 만료되는 종친에게는, 별도로 지로용지를 첨부여 보내드립니다. 지로 용지에 정 주소와 성을 기재시 고, 1년 청독료 1만원을 가까운 은이나 우체국으로 납부여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부 (02)765-2124 6.15 승경원 성금(이준구) ◇ 장기금 모금 계좌 안내 ◇ 국민은 817-01-0254-362 (예금주 : 재단법인 이장)
李花 282 7 병윤(炳允, 종/온녕군 17대) 종친은 최근 수집 『삶의 조각 과 그림자』를 냈다. 병윤 종친은 경북 봉 출생으로 동국대 교 사과를 졸업고 1966년부 1993년까지 교직에 근무다. 국사찬위원 사료조사위원, 대구시지원 종묘 ‧ 사직제례교육 강사 역임으며 본원 종교육 3기 ‧ 전예절교육 1기 수료를 다. 재 대구시 남구분원장으로 봉사에 참여고 있다. 자(賢子, 종/온녕군 18대) 종친은 최근 시집 『왕소금』을 냈다. 자 종친은 경북 봉 출생으로 중앙대교 문예창작과 를 졸업고 『문세계』 시 부문으로 등단, 『예술세계』 시 부 문 신인상을 받았다. 국문인, 국문인 은지부, 예술세 계 문부, 나라사랑 문인 원으로 동고 있다. 재(在珩, 성종/완원군 17대) 종친은 최근 자전적 에세이 『밑 도 끝도 없는 생각』을 냈다. 재 종친은 경남 천 출생으로 진주교대를 졸업고 교사로 동, 국정교과서 임직원을 역임다. 어린이문집, 사, 자서전, 수집, 논문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 며 천군분원 총무로 다년간 종사에 참여다. 종민(宗旻, 종/양녕대군 19대) 종친은 지난 4월 21일 ‘제53 과의 날’을 맞이여 과의 구심과 창의성이 뛰어나고 교내외 과관련 동에 우수 성적을 발여 과기술정보신부 장관 상을 받았다. 종민 종친은 동안초등교 6년에 재중이며, 전 강원도지원 총무이사 근수(槿秀) 종친의 손자이다. 炳允 종친, 수집 내 賢子 종친, 시집 내 재 종친, 에세이집 내 宗旻 종친, 과기부 장관상 수상
8 李花 282 지원 ·분 원 소 식 지원․ 분원명 (지원․ 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진 서울별시(泰鎬) 63 20.6.12(금) 11:00 본원 강당 91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① 금천구(在福) 25 20.5.11(월) 18:00 명가중식당 3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② 관악구(仁中) 46 20.5.20(수) 17:00 관악중앙새마을금 고 의실 23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 淳浩 신임 분원장 ③ 은구(盛柱) 40 20.5.21(목) 18:00 유러스 7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 忠根 신임 분원장 ④ 강북구(光宰) 23 20.6.11(목) 18:00 와룡갈비 3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⑤ 성북구(世雨) 46 20.6.19(금) 18:00 고산천 58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⑥ 부산 부산진구(尙龍) 46 20.5.16() 17:00 아이온 25 △코로나19로 인 이사로 대신 동래연제구(永植) 44 20.5.22(금) - - △코로나19로 인 서면 결의 강원 삼척시(應周) 45 20.3.31() - - △코로나19로 인 서면 결의 원주시(鎬晩) 69 20.6.1(월) 11:00 분원 사무실 26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⑦ 충남 서산시(明求) 64 20.5.31(일) 11:00 아르델웨딩컨벤션 90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⑧ 전남 군(錫鉉) 61 20.4.3(금) 11:00 분원 사무실 96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⑨ 종 ‧봉 소 식 종․봉명 (종․봉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진 진안대군(弘培) 2020 20.5.30() 13:00 청덕기념관 111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⑩ 익녕군(完浩) 63 20.5.8(금) 11:00 종 사무실 249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 英浩 신임 장 대 자 변 경 단체명 전임 신임 비고 서울 구로구분원 德瑝 東宰(령대군 20대) 상임이사(2-2.5, 5.26) 의결 정기총 개최 및 결과보고에 대 안내 정기총 개최보고는 총개최 7일전, 정기총결과보고는 총개최 15일 이내 에 의록, 의서류, 임원명단, 총사진을 첨부여 본원 조직부에 제출 주시기 바랍니다.
李花 282 9 ①서울별시지원 ②서울 금천구분원 ③서울 관악구분원 ④서울 은구분원 ⑤서울 강북구분원 ⑥서울 성북구분원 ⑦강원 원주시분원 ⑧충남 서산시분원
10 李花 282 ⑨전남 군분원 ⑩진안대군종 제 봉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在位者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明陵 肅宗大王 仁顯王后 閔氏 仁元王后 金氏 5.13 11:30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로 51 명릉봉 (장 玄昌) 峻基 愚珍 閔庚奭 在秀 項秀 炳學 成炳 建宰 範春 明承 長吉 泰喜 亨洙 在鎬 ① 思陵 定順王后 宋氏 (端宗大王妃) 5.20 11:30 경기도 남양주시 사릉로 70 장사릉봉 (장 載天) 起鎔 承鎔 鄭鍾燮 厚源 宋洙能 範春 浩燦 愚珍 道宰 鍾培 成炳 建宰 揆敦 在鎬 ② 睿陵 哲宗章皇帝 哲仁章皇后 金氏 5.23 11:30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길 69 예릉봉 (장 平揆) 平揆 亨宰 金建漢 鎔太 達浩 範春 洪宰 浚圭 鍾培 鍾雪 鍾城 揆鎬 道宰 在鎬 ③ 徽慶園 顯穆綏妃 潘南朴氏 (純祖肅皇帝 私親) 5.24 11:30 경기도 남양주시 부리 80 경원봉 (장 淳浩) 仁中 信在 朴永緖 根洙 大中 峻夏 鵔雨 朴德雨 紀定 泰喜 成炳 建宰 南政 ④ ①명릉제(5. 13) ②사릉제(5. 20) ③예릉제(5. 23) ④경원제(5. 24)
李花 282 11 제사는 살아있는 인간이 천 ‧ 지 ‧ 인 신에 게 소는 길을 의식으로 만든 것이다. 유교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삶을 예법이라 는 로 인간의 소원는 바를 성취고 자 였다. 상고시대부 우리 인간은 생 존을 영생으로 것을 염원고 각종 문 으로 그 소원 바를 남기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실의 역사가 아닌 이상의 세계 와 소는 의식을 는 것으로 대치 였다. 중국역사는 ‧ 은 ‧ 주 상고시대를 대 역사자들은 이상적 사가 예치로 운영되었다고 역사의 적을 찾았다. 소위 제자백가의 들은 상고시대의 사상을 복원려는 문적 노력과 일정 성과를 얻었다. 그 가운데 공자는 유으로 여 육경을 정리고 있었다. 시경, 서경, 역 경, 춘추, 예기, 악경이다. 공자의 유는 살아 있는 인간의 돈 의 세계를 성찰고 안의 세계 저승까 지 연결는 소의 수단으로 제사의식을 정립였다 겠다. 역사자 사마천은 이와 같은 사실을 사 기에서 정리였다. 우리는 앞서 사기 봉 선서를 인용 천신 지신과 소는 왕권 이 재 인간의 삶을 치 수 있는 권 력을 천명으로 기술고 있음을 보았다. 사마천은 예서(禮書 : 문구조를 기술 는 주제중 나로 예를 중심으로 기술 부문)에서 [제왕은 늘에 제사 지낼 때 조를 께 배는 배천을 니, 제는 감 이를 어그러 뜨릴 수 없다. (중략) 동짓날 남쪽 교외로 나가 늘 에 제사를 올리는 교제(郊祭)는 천자(天子)만 다. 종묘제사는 제 이상이 다. 아래로 사대부(士大 제사는 무엇인가(2) 이범직(李範稷) 본원 문이사 / 문박사
12 李花 282 夫)에 이르기까지 각기 정진 제도가 있다. 존귀 자는 존귀 것을 섬기고 낮은 자는 낮은 것을 섬기 고 예를 게 는 것은 게 고 작게 것은 작 게 도록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를 보유 자 는 7세, 나라를 보유 자는 5세, 5승의 땅을 가진 자는 3세, 3승의 땅을 가진 자는 2세의 조상을 섬긴 다. 생 마리로 제사를 지내는 민은 종묘를 세 울 수가 없다. (략)] 라는 사마천 사기의 기 술은 (漢) 나라가 진왕조가 무너진 천를 일 왕실이 천 질서의 중심에 서서 제천 제지와 왕실의 조상 신에 대 제사 절차와 내용에 주목고 예의 분별과 차별의 내용을 기술고 있 었다. 이어서 사마천은 [천지(天地)가 예에 의 나로 치고 날과 달이 예에 의 빛나고, 사계절이 예에 의 순고, 별들이 예에 의 운고, 강 물이 예에 의 르고, 만물이 예에 의 창성고, 오(好惡)가 예에 의 절도에 맞고, 로(喜怒)가 예에 의 당을 얻는다. 아래 사람이 유순 지 고, 윗사람이 명 지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라 는 예 주제의 이념을 강조고 사람의 도 리(人道)의 궁극으로 주장고 있었다. 비교적 왕조가 유가 의 이념으로 경도되는 름을 이어 갔으나, 춘추전국시 대에 추구 인간의 꿈은 영생과 삶의 다 양 가치가 있음을 주장 제자백가의 사상은 ‧ 은 ‧ 주, 상고시대의 이상사상 을 다양 시각으로 조명고 있었다. 즉 예컨대 노장가 그러다. 대 제사라 는 의식으로 이승과 저승의 세계 즉 생과 사망 의 세계 신의 세계를 상정고 실과 소 수 있는 제사의식으로 진전 시는 유가의 방법만이 아님을 유의야 였다. 여기서 우리는 유가 육경의 성립과 경 의 발전과정을 성찰면서 제사 또 중 국사와 국사 전개 과정에서 살아 있는 우리들의 문로 정착되고 있음을 이 도록 는 것이다. 서두에서 우리는 재 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역사의 앞서 살고 간 시대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동시 대 천지신과 조상신과의 관계, 나아가서 대의 손과의 소을 염려는 문 구조로 제사의식을 배려고 있음을 역사 서를 인용여 설명려는 것이다. 사마천 사기에 이어 반고의 서 등 역 대 중국사서는 기전체라는 역사서의 체제 를 고집고 다시 서지라는 사문경제 구조를 주제로 는 사서 내용으로 전문 를 계승려는 역사의식에 주목고 있 다. 예지 또는 예악 예의 지에서 길례 목 으로 제사의례를 정리고 있다. 이와 같은 지 가운데 길례가 제사를 중시는 것은 유교경전에서 모두 주대의 이상정치의 중 심에 예와 의례를 강조기 때문이었다.
李花 282 13 선대 왕조의 정치력으로 문과 의례를 종려는 중국고대사의 선례는 전 에 이은 경연구의 심경은 역대 사서에서 예지 예의 예악지로 분고 제사는 왕조에는 예악지와 교사지로 나누어지고 실의 질서는 예악지로 사 질서의 근거는 예악지로 고 제사의 사 실은 교사지에서 반고는 제사 사실을 기 록고 있었다. 즉 제사 중시의 사실이 前 漢 역사가 말고 있는 것이다. 전 교사지는 [천자가 말다. ‘최근에 가 넘치고 년이 여러 계속 되어 그 때문에 순 면서 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이 곡식을 잘 기를 수 있게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올의 작 여부에 대 아직 신으로부 응보를 받지 못는데 쇠솥은 어찌여 나온 것인가?’ 유사가 모두 말다. “듣건대 옛날에 제(인 복씨)가 신정(神鼎) 나를 만 들었는데 나란 일(一統)이니 천지 만물이 그것에 의 나로 연결되는 것이라 습니다. 제(黃帝)는 보정(寶鼎) 셋을 만들어 늘‧땅‧사람을 상징고 우왕 은 9목(9주의 牧)의 금속을 모아 구정(九鼎)을 주조 였는데 모두 생을 삶아 상제와 귀신에게 제사 지 내는데 썼습니다. 솥의 가운데를 뜨게 만드는 다리를 격(鬲) 이라고 는데 세 가지 덕을 상징고 있다. 나라의 덕이 쇠자 쇠솥은 은나라로 옮겨 갔고 은나라의 덕이 쇠자 쇠솥은 주나라로 옮겨 갔으며 주나라 덕이 쇠자 쇠솥은 진나라로 옮겨 갔고 진 나라 덕이 쇠고(주나라 제사를 이었던) 송나라의 사직이 망자 쇠솥은 마침내 어딘가로 숨어버려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 쇠솥이 감천궁에 이르렀는데 빛이 나고 윤기가 러 용이 변 듯니 아름다운 복을 이어 받음이 끝이 없을 것입 니다. (중략) 이 쇠솥은 마땅 종묘와 아버지 사당에 바쳐 제정(감천궁에 있는 천신의 뜰)에 소중 감추어 신명의 상서로움에 부야 것입니다.] 라는 역 사 사실을 인용 수 있다. 제사의식이 갖는 역사 사실에 주목고 국가 정치력이 의식에 영는 구이라 는 인식을 구였다. 반고는 교사지 찬에서 [나라가 일어난 초기에는 거의 모든 일들이 처음 시작 던 때라 오직 사람 숙손(叔孫通)만이 조정의 의례를 개략적으로마나 정을 뿐 이다. 이에 정삭(正朔)과 복색과 교제사와 망제사의 일도 여러 대에 걸쳐 아직 제대 로 쳐지지 못다. 문(孝文)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여름에 교제사를 지내기는 지만 (중략) 무(孝武) 시대에 예악과 법도가 성대 지면서 초(太初) 연간 (B.C.104~101)에 제도를 개정고]. 라는 사신의 기록은 왕조차원의 제사의례가 천 명과 치세의 실이 직접 연계되었음과 이어지는 새로운 문의 영입과 융는 역사는 제사의례를 정립 정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세종/광대군 17대 ‧ 始42세>
14 李花 282 삼재문 어진(三才紋 御眞) -조선시대 500년 간 준수된 어진도상 원방각 도에 맞추어 (익선관)+(곤룡)+ (둥근)+(사각무 용)+(용상)+(정좌)+(정 시) 임금초상 식인, 조어진으로부 이어져 온 ‘삼재문어진(三才紋御眞)’ 식 이 300년이나 지나서 숙종 39년(1713년) 5월에 이르러 비로소, 이제까지 지칭되던 진(眞), 진용(眞容), 진영(眞影), 수용(睟 容), 성용(聖容), 어용(御容), 어영(御影), 영자(影子), 영정(影幀), 왕상(王像) 등 여 러 명칭을 제쳐 놓고, ‘어진(御眞)’으로 공 식 사실은 이 ‘삼재문(三才紋)’의 개 념을 자각고 서로 공감 때문이다. 조어진에 이미 국초상(韓國肖像畵)가 제시되어 있다 사람의 모든 동은 결과적으로 양식을 만든다. 국 사람은 국인의 체격과 정 신동에 의여 연적으로 국스런 생 양식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이를 문 라고 부른다. 모든 동물은 4km 이내의 이 성과 결기 때문에 지역유전자이 생 기기 마련이고, 반도라는 지역유전자 에서 수 천 년 사는 동안, 근거리 결의 누적으로 인여 연적으로 질적 의미 의 민족이 생기고, 여기서 우리끼리 사 는 동안 연적으로 국문가 생성된다. 이것이 주변의 다른 민족과 다른 개성을 갖게 되면 민족문로서 인류문사에서 새로운 가치를 갖는다. 이 문적 가치는 조상으로부 이어져 내려오는 전이 된 다. 국국민은 이 문를 계승고 발전 시 의무가 있다. 이런 까닭에, 초상라고 여, ‘닮으면 그만’이 아니다. 초상도 국적 초상라 준원전 조어진으로 보는 국초상의 정의 - 준원전 조어진은 국초상의 시작이자 기준이자 완성 - 조용진(趙鏞珍) 미술부 박사
李花 282 15 야 가치를 갖는다. 국에서 그린 초상이 국스러워야지, 미국스럽거나, 일본스럽 거나, 중국스러우면, 아무리 닮았고 멋있 고, 고, 보기 좋아도, 그것은 ‘국초상 ’가 아니고 따라서 최고로 칠 수 없다. 오늘도 국의 모든 예술가들은 ‘국성 문’의 구을 목지여 정진고 있다. 단, 국제문나 외국문에 배적이면 안 된다. 그것을 수용여 우리문의 을 넓 미래의 발전가능성을 열어 두는 이 우리를 위 방법이기 때문이다. ‘초상’란 아주 좁은 개념의 별 그림양식 국의 초상가들의 목는 국적 초 상(양식)를 만드는 것이다. 국적이란 말은 ‘국식’, 즉 국적 양식이라는 말이 다. 그림 점을 지칭 때는 ‘이조 초 상’이다. 그러나 여러 임금의 초상들 사이 에 일관되어 공존는 요소가 있어야 비 로소 미술양식의 이름인 ‘국어진’이 될 수 있다. 아래 그림을 살보면, 왼쪽의 선으로 그린 모나리자 그림은 분명 모나리자를 닮게 그리려고 목적여 그렸고, 누가 보 아도 모나리자이지만 이런 그림은 ‘초상 ’가 아니다. ‘일러스’라고 는 별개의 그림양식이다. 이를 치가 드러나게 그리 면 ‘캐리커처’라고 부르는 또 다른 양식이 다. 이를 연로 그리면 ‘데생’이다. 초상 란 오른쪽처럼 완벽게 정밀고 세밀 게 구석구석 완성는 그림양식이 ‘초상 ’이다. 이를 글자 이여 ‘肖像-얼굴 을 닮게 그린 그림’으로 석면 일러스 , 캐리커처, 데생과 구별 수 없어 초 상이란 말의 본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초 상’은 그림 장을 나내지만, 초상란, 얼굴을 꼼꼼 치밀게 섬세게 실물이상 으로 실물답게 ‘그리는’- 그린이 아님- 스 일의 그림양식이다. 일러스식 1단계부-초상식 20단계까지의 단계 중, 일러스 양식과 초상 양식의 경계점은 어디일까? 유럽초상란 단지 5% 이내의 주관성을 인정는 그림양식임을 알 수 있다. 낱개의 ‘초상’들이 여럿이 모여서 이들 사이에 어떤 양식적 공점이 성되었을 때, 그 양식이름이 ‘초상’이다. 조선이란 나라에 ‘초상’은 많은데 이들 사이에 공 성이 없다면, 아직 미술사적 의미의 ‘조선 초상’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서 로 재료와 도구가 같은데도 조선의 초상 은 이들 사이에서 조선초상끼리의 공점 을 성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상’를 이룬 사실은 국문사의 륭 업적이다. 당연 이를 잘 계승‧발전시 켜 창달이 우리의 본분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초상들은 조선시대 중 기초상라는 양식을 만들었고, 조선 기 의 초상들이 조선기 초상라는 양식을 성다. 그럼에도 양식적으로 다른 이것
16 李花 282 들을 모두 여도 ‘조선초상’라는 양 식을 성으므로, 지극 국적으로 자 연스럽게 된 일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시작 점이 준원전 조어진이란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고 있었다. 국식 초상의 시작은 준원전 조어진 조선개국 7년 만에 처음 그린 어진인 ‘조어진’에서 단번에 조선스러운 초상 양식을 만든 것이다. 그것도 단 번의 실도 거치지 않고 아주 완벽 모범으 로 제시 것이다. 이 점 또 빼놓을 수 없는 준원전 조어진의 미술사적 가치이 다. 여기에 근대국미술사의 모든 문제를 결 마스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고려시대는 시각적 사실성을 중시는 이었다. 고려의 염제신(廉悌臣) 초상 은 사진처럼 그려졌다. 원근법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그렇게 그렸다면 미술사가는 조선의 초상는 고려의 양식을 답습다 고 기록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신여 개국 6년 만에 이런 ①성리적 관념성과 ②삼재사상의 전신성과 ③창업군주의 사조 성을 갖추어, ①단번에 ②단 나의 초상 작에 압축여 ③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④국적으로 완성된 양식으 로 만든 일은, 이런 능력이 우리의 생물 적 유전인자에 존재을 신 수 있는 증거로서, ‘5천년 국미술사의 쾌거’라고 말 수 있다. 인간 사고의 산물인 모든 그림에는 사조 성과 전신성이 모두 들어있다. 언어뇌인 좌뇌(左腦)는 의미를 추구는 본성이 있 어, 의미가 없이 모양만 똑같이 그려진 그 림에는 만족지 못다. 사조성(寫照性) 은 그림(작)을 구성는 우뇌의 시각적 정보의 양이고, 전신성(傳神性)은 좌뇌에 서 일어나는 개념의 양이다. 사람의 모든 동은 생각의 반영이므로 있는 대로 찍 는 사진에도 앵글을 잡는 의도가 있으면 이미 전신성이 들어 있다. 사조와 전신의 총량이 작성이므로, 사조(寫照‧形似)와 전신(傳神‧神似‧得意)은 대립(對立) 개념이 기도 고 상보(相補) 요소이기도 다. 준원전 조어진-우리에게 준엄 꾸짖음과 망과 교을 전신다 이런 대립과 상보관계의 완벽 의미구 성의 어진은 조선초상 500년을 여 이 준원전 조어진에서만 볼 수 있다. 천 지인 삼재문의 의미가 군왕을 상징는데 아주 적에도 불구고, 중국 제들 초상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아 마도 중국의 제는 대개 북방 이민족으 로서 원주 이민족에 대 군사적 정복자 이기 때문에, 늘[天]이 내린 자[天子]라 는 권위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쇼군(將軍)들 초상에도 없었던 이 유도 역시 농지와 농민에 대 지배권을 놓고 이를 차지기 위여 내는 자들 끼리 싸워 이긴 승자로서, 언제고 이 없으 면 빼앗길 처지에서 사치스럽게 ‘천지인의
李花 282 17 조’ 따위를 생각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비여 조선의 경우는, 이미 조 상으로부 이어져 존재고 있는 강산(江 山)이 있고, 때가 되어 이의 관리자를 늘이 바꾸는 일로 리될 수 있었다. 마 침 맹자의 천명론(天命論)이 받쳐주고 있 어 늘의 명을 받아 새로 임무를 받은 사람으로서, ‘늘의 명을 받은 자’라는 다 분 명분론(名分論)적 제왕관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삼재사상이 구 되고, 기법마저 국스러운 임금초상 이 나의 식과 양식으로서 완성된 초 상은 세계 초상미술사에서 오직 준원전 조어진이 유일다. 더욱이 천보구여(天 保九如), 강산만대(江山萬代)를 뜻는 일 월오봉도(日月五峰圖)와 세를 이루 면 그야말로 완벽 도상이 된다. 인구 200만 정도의 작은 나라 조선 개 국 7년 만에, 최초의 임금초상에서, 일체 의 중간과정을 뛰어넘어, 단번에 고려 과 다른 조선초상 양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임금초상이 갖추어야 모든 요소 를 완벽게 갖추고, 거기에 가장 국적 인 양식의 미술작으로 완성시 일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제작에도 결코 많은 사람이 참여지 않 았을 것이다. 몇 사람이 숙의여, 인류의 미술사 전체를 여 가장 국적인 식으로 임금의 초상을 완벽게 제시고 이를 ‘御眞’이란 이름으로 개념 선례 가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국가 무 삼재문 양식의 조어진은 강산만대도(江山萬代圖-일월오봉도)와 께 어우러져 완벽 조선식 임금초상이 되었다. 이는 국초상미술 사의 쾌거로서 준원전 조어진은 아직도 국 수립의 길을 찾지 못고 맴도는 국단에 준엄 꾸짖음과 망과 교을 전신(傳 神)다. 엇인지, 동양와 어떻게 다른지, ‘어진’과 ‘임 금의 초상’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조차 미치지 못는 실을 보면서 조의 사나운 용안에서 준엄 꾸짖음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이만 초상가 다시 나오기는 이 350년이나 지난 영 ‧ 정조시대에 가서이다. 같은 조선사람임에도 조 때 수 있는 일을 어째 300년이나 지나서야 는지, 거꾸로 정조 때 수 있는 일을 어떻게 300년이나 앞당겨 수 있었는지, 이렇 게 준원전 조어진이라는 부동의 선례가 있는 만, 이에 대 비밀을 어 내어 우리 주변의 모든 부진 일에 발전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망을 붙들게 된다. 국(韓國畵) 성공의 선례 를 보여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을 비롯 준원전 조어진의 제작진에게 존경과 감사를 금 수 없다. <연재 끝>
18 李花 282 사람의 일은 세상의 변에 따라 변고 세상은 사람의 일에 따라 변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일동일정에 따라 세상의 일 이 변다고 겠다. 세상은 사람이 만 들어가며 사람이 그 주인이 된다. 세상의 주인인 인간이 어찌여 자기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을 는가? 이는 인간들의 자 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자기가 어떤 일을 시작고는 만일에 시착오로 잘못되었을 때는 자기 의 동을 기 전에 으레 주변을 고 세상을 나무란다. 이 때문에 우리가 께 만들어가는 세상이 불신의 세상으로 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망을 갖고 산다. 망이 없으면 삶이란 무의미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만 망도 갖가지일 것이다. 그 망이 무엇이든 자기 나름대로 어떤 망 을 갖고 그를 가고 있다. 그 망의 결실을 빨리 보고자 는 사람도 있을 것 이고 느긋이 망는 바를 기다리면서 자기의 일을 차근차근는 사람도 있 을 것이다. 급 망는 바의 성공을 이 루려 는 자는 조급에 망던 것을 아마도 중도에 기는 낭를 보는 일 이 많을 것이겠지만, 느긋게 망의 결 과를 기다리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망 의 과실을 수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대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 가에서부 사 전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은 거의가 선거를 여 그 단체의 대자를 선발고 있다. 게는 나라의 대령을 뽑는 대령선거가 있고 국의 원을 뽑는 국의원선거가 있다. 선거에는 당연 상대가 있어 선거운동을 서 세상은 수시변역 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남리 이승창(李承昌) 본원 부이사장
李花 282 19 로의 승부를 대결다. 결국은 유권자의 선거권사에 의 승가 결정된다. 승자 는 쾌재를 부르면서 승리의 기쁨을 즐기 겠지만 자는 세상을 며 세상을 부 정는 것이 대부분이다. 세상이란 단어는 사람을 대칭는 단어 이기도 다. 사람이 없으면 세상이 존재 수 없다. 내가 실수를 지 않으면 세 상은 아름답다. 그러나 내가 실책을 여 나의 계이 어그러지면 세상은 나에게 어두운 세상이 된다. 분수는 사람이 살아가는 척도이다. 자기 의 분수를 모르고 막무가내로 도전을 면 와 부끄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여 노쇠 사람 이 젊은이가 오르는 등산로를 걷는 것은 무리다. 고도가 낮고 둘레 길을 걷 는 것이 노쇠 노인이 수 있는 보 운동의 분수에 맞는 것과 같이, 자기 분수 를 알아서 도전에 나서야 다. 경쟁에 나서는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려 생각을 는 이는 없을 것이다. 반 드시 승리를 려는 일념으로 나서는 것 이 당연 일이다. 질것을 알면서도 덤비 는 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는 미련 자이 다. 따라서 이 만용과 어리석은 자가 많으 면 많을수록 그만 세상은 지고 어지러워지며 세상 을 는 이가 많아 진다. 그것은 세상을 원망고 는 소 리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국가 사에서는 모든 책임 있 는 자리일수록 그 대는 선거를 여 선발며, 정진 임기가 있는 은 사 람이 그 자리에 영원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왜냐면 그 자리에 앉 을 주인을 선발는 것은 그 단체의 규정 에 는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의 선 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는 동 안 얼마나 그 자리에 주어진 의무와 책임 을 다여 세상에 믿음을 주었는가에 따 라 세상사람 들은 다시 그를 신임고 그 자리를 다시 맡길 것이다. 그렇지 못면 결국 수시변역의 진리에 의 다른 사람 에게로 그 자리가 돌아가는 것은 부정 못 연이다. 그러므로 천명(天命)은 무상(無常)이라 유덕자에 옮겨가는 것이 진리다. 재 유 지고 있는 그 자리는 언제 어떻게 변 지는 아무도 모르는, 오직 자기가 고 있 는 위의 선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선 면 그 자리를 지 수 있겠으나 악면 지금 그 자리는 다음에는 남의 자리가 된 다. 늘이 듣고봄은 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상 자기를 뒤돌아보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신칙며 늘 새로 워져야 그 자리를 지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가 각 기 경쟁을 는 것들이다. 왜냐면 나 아 닌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 속 에 서로 다이 없이 각자가 살아가는 것 은 자기 일에 충실고 다른 사람의 영역 을 범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영역을 떠
20 李花 282 나 남의 일에 참견거나 그 영역을 침범 면 다과 시비가 생기게 된다. 자기 일 에 충실 여 그 목를 달성는 것이 바로 순리이다. 이 순리를 따라 면 수 천수만이 서로 경쟁을 도 세상은 살기 가 좋은 세상, 세상이 될 것이다. 선의의 경쟁은 요 것이며 각인의 성 장에 도움이 되며 자기 발전의 지렛대이 다. 우리나라에는 4년마다 국의원 총선 이 있고 5년마다 대령 선거가 있다. 이 를 여 민주주의가 발전에 발전을 거 듭고 나라정책이 새로워져 경제의 성장 과 국가안보의 공고이 있게 마련이다. 번 선거를 치르고 나면 여야의 국이 달라지고 각개 보자들은 당락의 비가 갈린다. 이것이 성장이요 변이다. 국가 사의 발전과 각개인의 발전은 이러 아 경쟁을 겪으면서 이뤄진다. 요즘 모 방송국에서 개최 로 가수 경연에서 7인이 생되어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의 마음을 뭇게 녹여주고 있다. 일곱 명의 가수는 오랫동안 무명 가 수로 극의 길을 참고 온 끝에 의 자 리에 올랐다. 그들이 소에 자기의 무명 이란 남들의 멸시를 순리로 받아들이면서 극복지 않았던들 오늘의 영광이 있었겠 는가? 실을 직시고 자기위치를 바로 보고 좌절 없이 겸손 감내기에 오늘 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에 롯 진 임 영웅은 아버지를 다섯 살에 여의었지만 어머니와 머니의 넉넉 사랑과 바른 육으로 자라 자기의 소질과 재능을 살 렸다. 또 14세의 천재 가수 정동원은 그 조 부의 노래 사랑이 손자의 천재성을 발견 고 진로를 열어준 것이다. 손자가 7에 선발됨을 보지 못고 세상을 뜬것이 안 깝지만 정동원 아버지의 월 지인 지감과 정성어린 육은 손자손녀를 둔 노인들은 귀감으로 삼을 만 일이다. 이렇게 치열 선의의 경쟁에서 세상은, 아름답고 밝은 재와 미래를 인간에게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가 자기의 바른 생각으로 그때그때의 질서에 따라 겸손게 순응고 정성을 다으로 승리던 배던 자기성찰을 줄 안 다면 자가 승자에 대 시기질가 없 게 되며 승자가 자에 대 교만과 무시 의 경박 동이 없게 되므로 경쟁의 장 이 축제의 장으로 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사는 자기가 어떻게 느냐에 따라 지금의 내자리가 내일에도 내 자리로 남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자 리로 옮겨가느냐의 결과가 달려있는 것이 다. 그 누구든지 이 불변의 진리를 알아 상 살얼음을 밟듯이 조심조심 신중 오늘을 살며, 내일을 열어가야 재가 유 지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생각 보면 과 욕은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욕되게 다. 겸손 마음으로 거취를 분명 여, 그 때에 맞게 야 세상이 밝아진다고 본다. <종/양녕대군 16대 ‧ 始 40세>
李花 282 21 자교실 <집자 주> 금번 부 ‘자교실’ 코너를 마련여 자와 그 속에 담겨진 뜻을 되새겨 본다. 게재되는 사자성 어는 본원 부이사장(南里 李承昌)님의 글입니다. 人 性 本 善 仁 卽 惻 隱 사람의 성은 본디 착 것 인(사랑)이란 곧 상대를 측은 여기는 마음이며 ▩ 인성(人性) : 사람의 본성(本性). 맹자(孟子)는 인 성(人性)은 선(善)다고 였고, 사람은 어날 때에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 신(信)의 본성을 고 났다고 였음. ▩ 인(仁) : 사랑는 마음. 인은 사람[仁者人也]을 말는 것으로 마음의 덕이며 사랑의 이치[心之德愛之理]라 음. 《孟子》 ▩ 측은(惻隱) : 가엽이 여기고 애처롭게 여기는 마 음.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의 시 작임[仁之端]. 측은지심인지단(惻隱 之心仁之端) 《孟子》 人 : 사람 인 ‧ 남 인 性 : 성 성 ‧ 목숨 성 仁 : 어질 인 ‧ 어진사람 인 卽 : 곧 즉 ‧ 나갈 즉 本 : 본디 본 ‧ 근본 본 善 : 착 선 ‧ 친 선 惻 : 불쌍 측‧ 슬 측 隱 : 가엾을 은‧ 숨은 은 賦 命 上 帝 義 是 制 宜 착 성을 늘[上帝]로부 받았다 의(옳음)는 바로 사람 일에 옳은 것이다 ▩ 부명(賦命) : 사람은 늘의 천명(天命)을 받고 어났음. 그 천명(天命)은 바로 성(性)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中庸》 ▩ 상제(上帝) : 늘을 지칭는 것으로 조(造化) 를 주재(主宰)는 측면에서 늘 을 지칭는 말임. ▩ 의(義) : 의로움. 인(仁)이 애(愛)라면 의는 경 (敬)이며, 인이 가정적이라면 의는 사 적임. 인은 (孝)에 당고 의는 충(忠)에 당. 의는 마음의 견제[心 之制]요 사리의 마땅[事之宜]임. 수 오지심의지단(羞惡之心義之端) 《孟子》 賦 : 받을 부 ‧ 부세 부 命 : 목숨 명 ‧ 이름 명 人 : 사람 인 ‧ 남 인 性 : 성 성 ‧ 목숨 성 上 : 윗 상 ‧ 가 상 帝 : 느님 제‧임금 제 本 : 본디 본‧근본 본 善 : 착 선‧친 선
22 李花 282 국가무문재 종묘제례 제56 초대 인간문재(人間文化財)인 이재범(李在範) 선생은 종왕자 녕군 21대손이다. 1927년 12월 3일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덕동에서 어나 1987년 음력 7월 18(양 9.10)일에 61세로 작고였다. 묘소는 선 영인 덕동 못골 자좌(子坐)다. 이재범 선생은 농수산부에 재직면서 종묘 제례에 게 관심을 두었다. 종묘의 례(享 禮) 절차는 물론 기(笏記), 진설도(陳設圖), 축문(祝文), 제례복(祭禮服), 례동선(行禮 動線)을 연구다. 그 결과 종묘제례가 1975년 5월 3일 중요무 문재 제56로 지정되는 밑바이 되었 다. 이재범 선생은 1975년 8월부 1980년 8월까지 5년간 대동종약원 전례이사를 역임 다. 1982년 10월 17일에는 『전제례(傳統祭 禮)』의 교육자료를 발여 삼성동 무문 재 전수교육관에서 종묘제례의 전수교육에 진력다. 1984년 2월 16일에는 『전상례 (傳統喪禮)와 제례(祭禮)』를 발간여 궁중 상례와 종묘제례, 능 제례 교육자료로 용 다. 이로 인여 방 종묘제례를 복원여 봉는데 가장 기여를 다. 그의 작고 19년이 되던 2006년에는 종묘제 례에 관여는 들이 추모비를 건립을 추 종묘대제 복원과 이재범 선생 이재춘(李在春) 본원 제무부위원 (故)이재범(李在範, 녕군 21대) 제56 종묘제례 초대인간문재
李花 282 23 진다. 국가유공자로서 랑장을 받은 선생은 지 난 5월 31일 오전 11시에 국립대전충원 707 묘역에 이장됐다. 묘역의 석은 2개월 에 세워졌다. 이날 안장식에는 대동종약원 이귀남 이사장 과 국가무문재 제56 이기전(基田) ‧ 이 열(亨烈) 보유자가 을 보내왔다. 녕 군 종친들과 국가무문재 56 기전 보 유자를 비롯여 종묘제례보존 전수에서 이시구(時久) 장, 이재(在煥) 부장, 이 용(鎔太) 감사 등 전례부, 의전부, 제무부, 제복부의 차장 등 이수자와 전수자 30여 명이 참석였다. ù 약력 ù ∎1928.9.1(주민등록)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덕동에서 출생 ∎건국대교 정대원 석사과정 졸 ∎수습 정원 공채격 ∎농수산부 감리 ㆍ 기업 관리계장 ∎농검 대구지소 서무과장 ∎근정장과 랑장 수여 ∎농수산부 서기관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이사(1975~1980) ∎중요무문재 56 종묘제례 기능보유자[인간문재] ∎전주이씨 녕군종장(1982~1986) ∎가칭 전의례 연구원장 ∎각 교육원강사[민족사관] ∎실록 연구가 ù 논저 ù 『종묘제례(宗廟祭禮)의 금석(今昔)과 앞으로의 과제(課題)』 『민족주체사관론(民族主体史觀論)』 『원사육신설(原死六臣說)의 구성(虛構性)』 『원균(元均)을 바로 본다』 『원균정론(元均正論)』 ù 교육교재 ù 『전제례(傳統祭禮) 상권』[1982.10.17.발] §제1 : 종묘제례(宗廟祭禮) ú제1장 ‧ 개론- 제사의 의의, 제사의 대상, 제사의 종 류, 제사의 일시 ú제2장 ‧ 종묘- 종묘의 의의와 유래, 종묘의 영건, 종묘 의 구조 ú제3장 ‧ 종묘대제- 제관, 제수, 제기, 제례복, 제례악, 축, 제, 종묘대제기 ú제4장 ‧ 종묘 기 제- 고유제. 천신 §제2 ‧ 능제례(陵祭禮)- 능 제의 연, 속절제, 기신제 - 연, 기, 제봉도, 축식, 진설도, 능 제례복 §부록 ‧ 묘, 시, 존, 와 능 『전제례(傳統祭禮) 권』(자가 보유지 않았음, 권 을 소지고 계신 분은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상례(傳統喪禮)와 제례(祭禮)』-직원교육교재 [1984.2.16.발] §제1절 ‧ 개설(槪說) §제2절 ‧ 궁중상례(宮中喪禮) §제3절 ‧ 종묘제례(宗廟祭禮) §제4절 ‧ 능제례(陵祭禮) 종묘대제의 연 본래 종묘제례는 춘추동의 4계절의 첫 달 즉 [음력 정월, 4월, 7월, 10월]에 모시는 사시 대(四時大享)과 납일(臘日)의 오대 제(五享大祭)와, 영녕전에는 섭(攝行)으로 모시는 춘추 대(春秋大享)의 정시제(定時 祭)가 있었다. 또 나라에 일이나 길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그러나 순종 2년(융 2, 1908년) 6월 25일[양7. 23]에는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결 국 사이정(享祀釐正)을 반면서, 종묘 의 납대제(臘享大祭)가 지되고, 원구단 과 사직 등 23개의 국가제을 줄이거나 새로 이 정비게 이른다. 육군사(陸軍下士) 이재범(李在範) 국립 대전충원 707묘역
24 李花 282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는 종묘제례를 양 력으로 3월, 6월, 9월, 12월의 상순(上旬)으로 바꾸어 겨우 (香火)로만 6년을 유지여 봉다. 그나마 방이 되던 광복 원년(1945 년)부 결국 종묘대제는 1968년까지 24년 동안 지되는 안까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건국 22년(1969년)에는 광복 이 때 [24년] 지되었다가 이부 매년 1 올리 기 시작였다. 같은 12월 7일에는 마지막 인 순정 윤씨가 12월 7일에 제19실 에 부묘 즉 사(合祀)된다. 【종묘(宗廟)는 조(太祖) 4년(1395) 9월 29일에 창건 여, 27대 순종제(純宗孝皇帝)의 계비(繼妃)이신 순정 윤씨(純貞孝皇后尹氏)께서 1966년 2월 3일에 승 시어, 3년상을 마친 1969년 12월 7일에 정전(正殿) 19실에 추부(追祔)되면서 정전은 대왕 19위와 왕비 30위 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창건 574년 만에 그 역을 멈추고 재에 이르게 된다.】 【영녕전(永寧殿)은 세종(世宗) 3년(1421) 10월 9일에 창건여, 의민자(懿愍皇太子)께서 1970년 5월 1일 에 (薨)시어, 3년상을 마친 1973년 5월 6일에 16실에 부묘(祔廟)되고, 의민자비 이씨(懿愍皇太子妃李氏) 께서는 1989년 4월 30일에 (薨)시어, 1991년 9월 28일에 추부(追祔)되면서, 영녕전은 대왕 16위와 왕비 18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창건 570년 만에 그 역을 멈추고 재에 이르게 된다.】 1969년부는 순정(純貞孝皇后)의 부묘(祔廟)를 기(奇貨)로 사단법인 전주이 씨 대동종약원에서 주관여 연 1 종묘대제 를 올리기 시작다. 1971년에는 대동종약원에서 종묘대제를 주관게 되면서, 5월 2일 일요일에 처음 춘 대제(春享大祭)를 모시고, 이부 매년 양 력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대제를 봉고 있다. 그러나 광복 처음 모셨던 1969년과 1971 년의 종묘대제의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1972 년 5월 7일의 종묘대제[그림 1]에서 보듯이 우측의 세손(皇世孫)의 복식은 문무관의 당 복을 착용다. [그림 1]좌측의 찬례(贊禮) 와 [그림 2]집사(執事)들은 단령에 오사모 를 쓰고, 각대에 목를 착용다. 이렇게 어려운 상에서 방 종묘제례를 모시기 시작였다. 진설 또 제기의 부족 도 있었겠지만 모든 제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약설(略 設)이었다. [그림 3]제1실은 3위(位)인데도 불 구고 진설은 12변(籩)12두(豆)[그림 5]인 데 2변, 2두와 도량서직(稻粱黍稷)으로 3보 (簠)와 3궤(簋)인데 1보, 1궤에 삼생(三牲) 중 시성(豕腥) 만이 진설는 등 아주 빈약 상에서 종묘대제를 연 1 올리던 것을 [그 림5]정전(正殿) 제1실만이라도 정설(定設)로 진설여 대제를 모시기 위여 노력셨다. 1975년 5월 3일에 종묘제례가 중요무문 재 제56로 처음 지정되면서, 같은 7월 23일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종묘대 제봉위원를 구성게 된다. 이때 이재범 선생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산에 종묘대 제봉위원가 구성되면서 첫 전례이사를 맡 는다. 그 1986년 11월 1일에는 종묘제례가
李花 282 25 문재보법에 의거여 문교부( 교육부) 로부 중요무문재의 보유단체로 지정되 면서 대동종약원에서는 종묘제례보존로 승 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2001년 5월 18일에는 ‘종묘제례와 제례악’ 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무유산걸작으 로 지정되었다. 2011년 11월 5일부는 매년 추대제(秋享大祭)를 11월 첫 번째 요일 에 봉므로 1년에 2번의 제을 모시게 된다. 2015년 5월 3일에는 봄과 여름에 사용는 제기가 보되면서 이부 는 춘대제(春享大祭)에는 정전과 영녕전의 준소상(尊 所床)을 모두 정설로 진설 였다. 영녕전은 5실부 16실 은 2변 2두로 제였으나, 이부 12변 12두로 진설 는 등 많이 발전된 변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종묘대제는 명실상 부게 창건 652년 동안 이어와 지금도 국가무문 재 제56 보유자를 비롯 여 종묘제례보존에서는 이 수자, 전수교육생을 배출 여 문들을 다시 찾아 연구 는 등 옛 의식 그대로의 명 맥을 이어가려고 많은 사람들 이 노력고 있다. <종/녕군 21대 ‧ 始45세> 국가무문재 제56 보유자 n 제1대 이재범(李在範), 사제(司祭) : 1975.5.3.~1987.9.10. n 제2대 이은(李殷杓), 사제(司祭) : 1988.4.1.~2003.11.29. n 제3대 이기전(李基田), 의전(儀典) : 2000.12.14.~재 n 제3대 이열(李亨烈), 제수(祭需), 제기(祭器) : 2000.12.14.~2018.9.27. n 명예보유자 이열(李亨烈), 제수(祭需).제기(祭器) : 2018.9.27.~재 <자문 및 자료 時久 종묘제례보존전수> [그림1] 세손 이구(皇世孫 李久)[우측] [그림2] 제관 취위 종묘대제(宗廟大祭) [1972년 5월 7일] [그림3] 종묘대제 제1실 약설 [그림4] 초관 세손(皇世孫) [1972년 5월 7일] [1972년 5월 7일] [그림5] 종묘대제 정설 [그림6] 초대보유자 준소 정설 [2019년 5월 5일] [연대미상]
26 李花 282 서울대교 규장각 국연구원(원장 이)은 지난 5월 29일 금요일, 봉 이 명준(鶴峯 李明埈) 종친 유가족(이기로 선 성군종 부장 外)이 참석 가운데 소장 자료를 기받고 약식을 체결였 다. 이날 기자료는 총 4,896종 9,283책(고 도서 2,219종 6,153책, 고문서 1,458종 1,664점, 5점, 근대도서 1,214종 1,461책)으로, 이는 규장각에서 받은 기 증·기 중 최대 규모이다. 기자료 중에 는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 初雕本), 자치감강목(資治通鑑綱目, 明 內府刻本), 간찰첩(簡札帖) 등의 고도서와 교지(敎旨), 조입안(刑曹立案) 등의 고 문서가 되어 있으며, 국전쟁 이 출간된 귀본으로 근대도서로도 주목 만며, 임자식년사마방목(壬子式年司馬榜 目) 등 규장각 미소장 자료가 다수 되 어 있어 자료 충에 게 이바지 것으 로 기대된다고 규장각 관계자가 밝다. 선성군종 이기로 부장 등 유족 측 에 따르면 기자인 故 이명준 종친은 고 문 수집에 생 심을 기울였으며, 선 조들의 정신을 배우고자 바쁜 일상 속에 서도 수시로 청량리, 인사동 등지를 직접 발로 다니며 다방면의 자료를 수집셨다 고 다. 또, 수집 모든 자료의 내용 이나 간정보 등을 작고실 때까지 기 록을 남길 정도로 고문에 대 안목과 관심이 상당 높으셨다고 다. 고인께서는 선성군종장 봉직시에는 『선덕(宣德)지』(1991년 창간)를, 릉봉 장 시절에는 『인덕지』(仁德 1998년 창간)를 창간여 종 소식지를 문 창달을 위 애쓰셨다. 또 고인은 종친의 발전을 위 북녘 땅까지 구석구석의 일가들을 총망라고 세계 각국에 어져 살고 있는 전주이씨 선성군 일가들을 족보에 실어 선원 속보(신사보)를 발간시는 노력을 셨으 며, 선조들이 계신 곳을 영구 가치있고 故 봉 이명준(鶴峯 李明埈) 종친, 소장자료 규장각에 기다
李花 282 27 만인이 숭상 수 있도록 문재 지정업 무를 추진는 등 숭조사상이 철 분 이셨다. 앞으로 규장각은 기자료의 세부 목록 을 정비고 서지사, 원문 이미지 등을 이지를 제공여 연구자들의 술 동을 지원 예정이라고 밝다. <선성군종 제공> ☞ 규장각 국연구원 소개 국연구의 진과 소장 자료의 과적 보존.관리를 위여 2006 년 2 월에 기존의 규장각과 국문연구원을 쳐 새로이 출범 기관이다. 故 이명준(李明埈) 종친 약력 - 전주이씨 선성군 16 대손 - 1924.8.31. 충남 아산시 신창면 가덕리에서 출생, 2014.12.7 일 卒 - 전주사범교, 서울대 생물과 졸업 - 육군소위 임관, 6‧25 참전 예 - (주)만산업을 창업(1998 년) - 영의정 문공 노저 이양원 종친장(1987~2014) - 제 10 대, 제 11 대 선성군종장(1993~1999) - 정종대왕 릉봉장(1997~2003) - 대동종약원 장 별원(1993~2014) - 선성군 선원속보 7 중보 찬위원장(2001) - 문묘(노저,이양원사당) 건립위원장(2001) - 現 선성군종 이기로 부장 부친
28 李花 282 뼈1)를 감싸고 노닐던 얀 맥이 사의 칼질에 의 시런 를 내고 있다 목젖까지 져며드는 비린내 참을 길 없어 쇠주 병 채 마시는 찰나 갈매기 목쉰 소리 1) 뼈 : 대민국 白頭大幹을 뜻. 천년동안 얼어 붙었던 울의 門 녹여 내고 있도다 도여 도여 겨레의 리 옥졸라맨 악마의 손 날벼락을 치게 소서! <종/양녕대군 18대 ‧ 始42세> 겨 울 바 다 이병(李丙赫) 본원 제2문위원
李花 282 29 아이들의 천진난만 눈동자를 마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이 맑은 순수이 가슴속에 스며 저절로 방그레 미소가 러나올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에게 부모와 가족 다음으로 가슴 속에 각인되는 사람 은 초등교 선생님일 것이다. 가정의 울 리를 벗어나 교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정신세계를 이끌어주는 이와 만남이기 때 문이다. 성장는 어린이들에게 교사가 갖 는 의미는 그만 다. 생을 교직에 몸담고 살아온 자는 년 초마다 새 얼굴을 마주며 ‘게 될 나무는 떡잎 때부 알 수 있다.’ 는 옛 속담이 진리라는 것을 수없이 경었다. 새 년이 시작되어 맨 처음 아이들을 마 주 때 얼굴만 보고서도 그 아이의 장래 를 예감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일 년 동안 내 속깨나 썩겠는데? 저 아이는 착 일을 스스로 알아서 게 분명. 저 녀석은 어른이 되면 「장」자를 가슴 에 달고 무리를 이끌어갈 지.’ 고 생 각면 그 예상은 림없이 맞아떨어졌었 다. 자는 여기에 스승의 예측이 맞아떨 어진 옛이야기를 소개고자 다. 충청도 성에 채동이라는 아이가 살 고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청상에 로된 가난 어머니 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길쌈 이로 끼니를 잇는 이었으나 어머니는 채동이를 삼 십 리가 넘는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 다. 서당에서 채동이는 동들의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잡다 일 들을 채동이에게 시켰다. “야, 채동아! 얼른 마당 쓸어.” “야, 채동아! 걸레 빨아다 방 닦아.” 게 될 나무 이규 시인 / 소설가
30 李花 282 고 어느 아이든 인 부리듯 면 군 소리 마디 없이 시는 일을 였다. 그 런 드렛일을 마다지 않고 다 는 채 동이를 동들은 바보로 여기며 자기가 일도 채동이에게 시켰다. 채동이는 동들이 라는 대로 고 그저 묵묵 글 공부에만 전력는 것이었다. 얀 눈이 쌓인 어느 긴 겨울밤 입이 궁금 동들은 닭서리를 기로 고 아랫마을로 다. “야! 채동아, 네가 닭장 위로 올라가 닭 잡아!” 고 명령을 내리니 채동이는 닭장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닭장 위로 올라간 채동이에게 아이가 “계여수(鷄如數)?” (닭이 몇 마리냐?) “백의관이 이삼수(白衣紅官 二三數).” (얀 옷을 입고 붉은 관을 쓴 닭이 두세 마리다.) “몰착(歾捉)!” (모두 잡아라!) 이날 아침에 장님이 닭을 잡아먹은 적을 보고 웬 닭이냐고 물으니 아이들 이 장님께 드리려고 남겨놓은 닭고기를 대접며 어젯밤에 닭서리 일을 말씀 드리자, 장님께서는 닭값을 채동이에게 보내며 생각였다. ‘계여수?’라고 물은 녀 석은 장래 소과에 급제여 고을의 수령 은 수 있겠다. ‘몰착!’ 이라고 말 녀 석은 아무래도 도둑놈이 될 수밖에 없을 걸? 그런데 ‘백의관이 이삼수.’라고 말 녀석은 장래에 정승의 반열에 오를 게 분 명.’ 고 속으로 짐작였다. 세월은 러 채동이가 온갖 수모를 겪으 며 서당에서 공부 지도 어언 칠 년에 접어들어 이청춘이 되었다. 그러나 채동 이는 여전 서당에서 바보 노릇을 고 있었다. 그러던 봄 어느 날 장님께서 오 월에 시가 있고 가을에는 대과가 있으 니 서당에서 예비시을 치르겠노라고 시며 운자를 내놓았다. 동들은 저마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좋은 기가 왔노 라고 뻐기며 답안을 제출였다. 이날 채점 시 답안을 가져오신 장님은 채동이가 장원을 였다고 발는 게 아닌가. 동들은 모두 믿지도 않고 장 님의 채점결과에 승복지도 않았다. 그날 서당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고을의 사또가 물었다. “어제 서당에서 치른 예비시에 장원은 누구더냐?” “예, 채동이라고 인배나 다름없는 엄씨 아들에게 장원을 주었답니다.” 고 가소롭다는 듯 시둥 대답는 것 이었다. “대체 어떻게 썼길래 그 아이가 장원을 였을꼬?” “추고백 응생자 설월공산 양정 이라 고 썼는데 그런 것을 다 장원을 주었다고 친구들이 모두 난리다요.” “그래? 그러면 내일 꼭 그 채동이를 이 동으로 데리고 오너라.” 사또의 아들은 다음날 공부가 끝나고 채
李花 282 31 동이에게 다가가 “얘, 채동아! 너 우리 아버지께서 오랍 신다. 우리 아버지는 이 고을 사또님이다. 너?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누구도 부로 동서는 안 되는 줄 알지? 미리 일러 두니까 조심라.” 고 주의는 것이었다. 사또의 아들과 채동이가 동에 들어서자 동 마루에 높이 앉아있던 사또가 버선발로 뛰어 내 려오더니 차림새가 거지처럼 볼없는 아 이 채동이에게 맨땅에 엎드려 넙죽 절 을 올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사또 방의 아랫목에 모시고 “미거 제 자식 놈을 보살주십시오.” 고 간곡 부는 것이었다. 군수의 아들은 어리둥절 갈를 잡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 고을에서 아버지는 누구에게 도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지 못다. 서민 들은 말 것도 없고 내로라는 양반님 네들도 사또 앞에서는 꼼짝을 못고 사 또의 말 마디가 곧 법이요, 곤장이었다. 그런데 서당에서는 바보 인 취급을 받는 채동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는 아버 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얘야, 이 도련님을 잘 모셔라. 이분이 야말로 장차 이 나라를 이끌고 가실 인물이시니라.” 며 절을 올리라 명는 것이었다. 채동이가 쓴 시를 살보면 秋風古栢 鷹生子 雪月空山 虎養精 (추고백 응생자 설월공산 양정) 「가을바람에 잎이 모두 떨어진 고목에 매가 새끼 깔 알을 고 있고, 달빛만 차 가운 눈 덮인 산에 랑이가 웅리고 앉 아 봄을 기다리고 있다.」 는 뜻으로 재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읊은 것이다. 그 러나 내년 봄이 되면 매는 알을 까서 창 공은 매가 모든 날짐승의 왕이요, 랑이 는 산중의 왕으로 이 세상 모든 산짐승 위에 군림리라는 것을 암시는 글이다. 그 채동이가 시에 급제은 물론 대 과에 급제여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분이 바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다. 번암은 대과급제고 진주목사를 역임 자의 6대조와 교분이 두워 진주공 께 보낸 간찰을 지니고 있으며 위 이야기 는 자의 부친께서 들려주신 얘기다. 번 암의 역사적인 적은 사전이나 인넷을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기에 더 언 급지 않겠다. 다만 인물이 된 분들은 어려서부 꿈을 지니고 그 꿈을 끊임없이 노력 결과라는 공된 진리를 실천 분들이다. 꿈은 지는 목다. 목 없이 발 짝도 뗄 수 없으며 이룰 수도 없다. 어른 들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 되어서 무슨 일을 수 있겠어?’ 고 미리 기는 것은 삶 자체를 기는 것과 같다. 나이 많은 어른들도 꿈을 지니고 목숨이 다 때까지 정진는 것이 바람직 삶이 아 니겠는가. <종/령대군 21대 ‧ 始45세>
32 李花 282 보슬보슬 보슬비 내리는 서어나무 기로운 숲길 성스러운 고송(古松)의 서오릉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롱 빛으로 맑고 밝게 빛나고 싶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성군의 른 꿈 오롯이 숨 쉬는 애 사연 은물결 도치는 구름결 속에 간절 소망 떨기 어여쁜 꽃으로 곱게 곱게 어나고 싶습니다. 산소같은 역동적인 어깻숨을 내쉬며 동글동글 돌아가는 세월의 벤치에 앉아 서슬 른 역사의 뒤안길을 걸으며 새록새록 생각나는 간절 소망으로 찬찬 솟구치고 싶습니다. 박꽃 웃음 꽃불을 지다 인내의 순정으로 뜨거워지는 성왕의 깊고도 넓은 고매 성덕에 그윽 정성으로 가슴을 여미고 붉게 붉게 물들고 싶습니다. 맑은 미소 머금은 고색창연 늘가 넉넉고도 근 온정의 울림 르디른 의 성 울려 지는 서오릉에서 숭조 상문의 엄숙 떨림으로 오르고 싶습니다. <덕종/월산대군 17대 ‧ 始44세> 서오릉(西五陵)에서 이재기(李在璣) 월산대군종 부장
李花 282 33
34 李花 282
李花 282 35 양역(良役) 개 및 서연-경연 관료 녹천 이유 조선 기 종대에 정립된 군비 증강과 군제 개의 정책 기조는 종과 숙종대 에도 지속되었다. 종과 종대의 군비 증강은 군역(軍役)에 많은 문제를 유발 였다. 의주로의 천에서 1년 6개월 만에 도성 성(漢城)으로 귀 선조 조정은 급료병을 모집여 ‘련도감군(訓練都監 軍)’을 창설였다. 이전의 양인(良人)들의 병역은 국가에 국방의 의무를 다여 군 복무를 는 것과 그를 보조는 비용을 군로 납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양역(良役)’ 은 ‘군역(軍役)’이라고 다. 임진년(1592)의 일본군의 침입 이 진관(鎭關) 체제가 거의 무너지고 의병(義 兵)과 재정비 관군(官軍)에 의서 일본 군을 점령지에서 몰아내는 반격을 실시 게 되었다. 종전상에서 여러 문제가 있 었지만 조선의 반격과 최의 격는 명 나라의 원군에 입은 바가 다. 청종의 1636년 12월 침입에 의 인 조 조정의 굴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의 주도된 종과 종대의 군사력 강 정책 및 군비 증강은 백성들에게 부담으 로 돌아왔다. 그 징수에서 여러 가지 문제 와 비리들이 나났다. 숙종 조정에서는 1702년(숙종 28) 이러 문제들을 개 는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이라는 개 정책성 및 집기구를 만들었다. 제도를 개다는 용어로 ‘이정(釐整)’이라는 말 은 자주 쓰이던 말이다1) . 이 기구의 당상 1) ‘이정(釐整)’은 제도의 개을 의미는 전시대 일 반적인 용어이고, ‘경장(更張)’은 이정보다도 규모가 개을 의미다. 경장은 원래 거문고와 같은 악기의 여러 줄의 악기 줄이 느슨진 것을 다시 음 전주 이씨 종묘배 공신(4) - 녹천 이유(李濡)와 경종의 대리청정 - 이정(李政昊) 본원 문부 위원 / 이박사 / 고려대 경생연구소
36 李花 282 (堂上)에 가장 먼저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 이 전주이씨 광대군(廣平大君派) 종 실사대부2) 이유(李濡)[1645 ~ 1721]이다. 양역이정청의 주도자로 선임되었을 때의 이유는 병조서였다. 양역이정청에서는 2 년 인 1704년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 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이 라는 점진적인 개 정책안을 내어 놓았 다. 조선 육군인 오군(五軍)과 수군(水軍) 의 군제 개과 그 개적 운영 방을 제시 것이었다. 녹천(鹿川) 이유는 종대에는 사부 지, 사간원 정언 및 문관 수찬 및 교 리 등을 거치면서 숙종이 왕세자였을 때 의 세자시강원의 세자설서(設書)[정7], 세자사서(司書)[정6], 세자문(文學)[정 5]을 맡아 서연(書筵)에 깊이 관여 바 가 있는 왕실에서 신뢰는 문관 관료이 기도 다. 숙종 즉위 이에도 경연(經 筵)에 자주 참여는 중견 관료와 이의 대신(大臣) 3)이기도 다. 그의 관직 생 역에 맞도록 조으는 것을 의미다. 1894년의 갑오 년의 대개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좋은 명칭 이 붙여져 있다. 념과는 달리 갑오경장은 조선 고 종 조정이 1880년대부의 개의 연장선상에서 ‘주 체적으로’ 단 대개이었다. 조정 관제가 근대적 으로 재배열되는 대개이 골자였다. 2) 종실사대부(宗室士大夫)란 양반 중에서 그 시조(始祖) 가 조선 왕실의 대군, 군이었던 전주이씨 가문에서 4 대가 지나서[親盡], 원래의 종친(宗親) 신분에서 일반 문무 양반과 같은 사대부 신분으로 된 조선의 지배층 을 말다. 3) 대신(大臣)은 보 2 이상의 조정 고위 관료를 의미 다. 시임대신(時任大臣)은 재의 직임이 뚜렷게 되어 있는 의정부 및 6조(曹)의 서 및 대제(大提 學) 이상의 문관 및 무관을 의미다. 원임대신(原任 大臣)은 시임대신을 역임였으면서도 위원 성격의 시적 직무를 맡을 수도 있는 대신들을 의미다. 에서 지경연(知經筵), 곧 경연청(經筵廳) 4) 지사(知事)가 가장 알맞은 묘사로 보일 정 도로 국가 정책 성과 시에 깊이 관여 였다. 숙종대에 우의정, 좌의정 및 영의 정과 중추부 사(判府事)을 역임는 등 의 고위층으로도 약 종실사대부가의 인물이다. 그리고 숙종 말년 경종의 왕세자 대리청정 시절의 인연이 깊어서 이 경종 묘정에 배공신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극(貳極)의 대리청정 조선 국왕의 조정(朝廷)에서의 역을 단순시면 두 가지, 곧 청정(聽政)과 만기재가(萬機裁可)이다. 청정은 정(政)을 듣는다(聽)는 의미로 정(政)이란 재의 국정 운영과 정을 의미다. 조선 조정 은 의정부-중추부 및 6조(曹)로 성되어 운영되었다. 6조 예 내사(內司) 및 속아 문(屬衙門)에서 올라온 정(政)에 대 보 고를 제대로 잘 듣는 것을 의미다. 재위 시의 국왕의 공부인 ‘경연(經筵)’이라서 이 러 보고를 잘 듣고 국왕이 친 열람 이에 경연에 참여는 관료들과 께 중추부는 경복궁 동쪽에 위치 의정부와는 대로의 반대에 그 관아 건물이 위치여 있었다. 별위원 성격의 직무를 시적으로 맡기거나 의정부 및 6 조의 정책 시안에 대 의견을 내는 원임대신들이 진 있었다. 4) 『경국대전』의 경연청(經筵廳)은 정3 조직(관아)으로 승정원(承政院) 도승지 6방 승지들 모두 참찬관 이고 문관 부제이 참찬관으로 실무 최고위를 맡 는다. 그 아래에 실제 실 관료들이 경연을 운영 였다. 실무 최고위 관료보다 높은 관료는 지사(知事), 동지사(同知事)를 맡아서 국왕에 따라서 력적으로 운영되었다.
李花 282 37 논의도 보는 세미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5). 국본(國本), 곧 동궁(東宮) 왕세 자 시기의 세자시강원에서 는 ‘서연(書 筵)’은 조정의 정을 올바로 알아듣고 단 수 있을 정도의 공부와 론을 수 준의 유(儒學) 공부를 시는 것이었다. 조선의 정(正學)이 유이었기 때문에 유의 수준이 높은 신료를 ‘유신(儒臣)’이 라 였고, 대제(大提學)이나 대사성(大 司成)과 같은 자 관료가 조정의 정책 성과 운영에 기여는 정도가 컸다. 국 왕이 올바로 듣고 살보고 단을 내린 연에 윤(允許)고 실무를 처리는 담당자의 제안을 교정기도 는 교(下 敎)를 수 있는 것이었다. 교가 문서 로 작성되면 그것이 교서(敎書)였다. 국왕 이 재가(裁可)여 처리야 는 목수 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만가지 정도 나 된다는 의미의 만기(萬機)나 되었다. 이러 상당 수량을 꺼번에 소는 능력과 마음 자세를 배양 경우에는 성 군(聖君)으로서 국정을 수준 높게 운영 수 있는 것이었다. 국왕이 직접 청정(聽政)는 것은 친정 (親政)이라고 는 정상적인 국왕 중심의 조정 운영을 가리다. 그런데 국왕의 나 이가 연소거나 아니면 나이가 많아서 국정의 압력을 덜어놓는 조치가 취지기 도 다. 국왕의 나이가 어려서 머님 대 5) 김완 (2011)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사 왕대비나 어머님 대비가 발(簾)을 쳐 놓고 국왕의 옆에 앉아서 일시적으로 즉위 초 기에 청정을 같이 는 경우를 ‘수렴청정 (垂簾聽政)’이라고 다. 경연이라는 공부 를 많이 실시고 문과 경륜이 높은 유 신들의 진강(進講)을 많이 받은 에는 친 정(親政)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국 왕의 연세가 많아지시거나 와병이 있으셔 서 국정 운영 처결을 왕세자 은 왕세손 에게 전부 은 상당부를 맡기는 것을 ‘대 리청정(代理聽政)’이라고 였다. 조선 종(太宗)의 경우는 세종에게 일 찍 선위고 세종(世宗) 즉위 초기 상왕 (上王)이 되어서 군무에 대 처결권만을 그대로 사고 있었다. 종 상왕 시절 종묘 정전과는 별도의 조천묘(祧遷廟)의 이름을 종이 별궁인 양궁(豊穰宮)에서 ‘영녕전(永寧殿)’으로 지었다. 그런데 세종 의 32년 재위 말기에 선위지 못고 세 종 25년(1443) 맏아들 왕세자 문종(文宗) 에게 ‘대리청정’을 도록 조치였다. 조 선의 대리청정의 시작이었다. 이 경우는 명실상부 ‘이극(貳極)’이 성되는 기간 을 의미는 것이었다. 문종의 재위 기간 이 2년이라고 보는 것은 나의 범주 문제(categroization problem)를 가져 온 다. 대리청정 7년과 친정 2년을 구분면 서 앞의 7년 정도는 문종의 이극 치세라 는 점도 고려야 다. 문종과 비슷 경우가 보 장빈의 아 들이라고 는 경종(景宗)의 시대에도 나
38 李花 282 난다. 조선 기 숙종의 재위기간은 46 년으로 상당 긴 기간이다. 숙종도 그의 맏아들 경종(景宗)에게 숙종 43년(1717) 대리청정을 도록 였다. 원래 이보다 12년 전에는 숙종이 선위려고 였던 적이 있으나 조정 신료들의 만류로 그 뜻 을 거두었다. 이렇게 경종의 이극 치세 4 년과 친정 4년을 같이 살보아야 는 이유가 존재는 것이다. 북산성의 축성에 얽 인연 1717년 숙종은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 을 명고 10월 사직과 종묘에 고유제를 올리게 다. 사직단에 고유 사실은 정 조대에 찬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 軌)』에 수록되어 있다. 종묘 고유 여부에 대 논의 때에 녹천 이유는 중추부 사였다. 김창집이 영의정, 이이명이 좌의 정이었다 [『숙종실록』 숙종 43년 9월 9 일 경신 1번째 기사]. 대리청정 고유제를 거 날짜는 1717년 10월 3일이었다. 그리고 이 날짜의 실록기사에 숙종의 교 서(敎書)가 발되었다 [『숙종실록』 숙 종 43년 10월 3일 계미 1번째 및 2번째 기사]. 북산성을 축성야 다는 의견은 숙 종의 즉위 초기부 있었다. 조부 종과 부왕 종의 국비 증강 정책의 연속선상 에 있는 과제 중의 나였다.6) 지만 실 제로 그 논의가 도드라져서 실된 것은 숙종 38년(1712) 5월에 와서야 시되기 에 이른다. 실무조직이 구성되고 총융청이 그 사업을 실기 시작였다. 10월 8 일 정도 되어서 어영청, 금위영이 맡은 구 역이 완성되었다는 『숙종실록』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북산성의 축성은 군량미(軍餉)를 보관 는 창고와 조지서(造紙署)와의 연계성 등을 고려는 ‘춘대성(蕩春臺城)’의 축 성까지도 되어 있었다. 재도 남아 있는 조선 도성의 서쪽 인왕산 이서(以西) 지역에 성을 쌓는 사업이었다. 축성 및 운영을 담당 관청의 이름을 경리청(經理 廳)으로 자는 이이명의 계청에 숙종이 승인였는데, 이에 부사 이유가 이 사업을 맡아서 였다. 여러 반대 상소 등 의 문제가 많고 스레스를 엄청 받은 이 유가 사직을 청고 도성을 나가 버린 때 가 있었다.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 기간 이었다. 대리청정의 왕세자가 사관을 보내 어 부사 녹천 이유에게 도성으로 돌아 와서 경리청일을 계속라고 설득다 [『숙종실록』숙종 44년 윤 8월 13일. 무 오 2번째 기사] 그리고 경리청이 축성 비 용조달 방에 대서 보고자 왕세자 경종이 재가다 [『숙종실록』 숙종 44 6) 숙종대에는 남산성에 대 정책도 시되었다. 숙종 은 반기에 군비증강 정책의 일으로 전쟁시를 대 비여 사직의 위을 옮겨 모시는 신실(神室)인 ‘우 실(右室)’과 종묘의 신주를 옮겨다 모시는 신실인 좌 전(左殿)을 건립다. 재 UNESCO 세계문유산인 남산성 내의 광주유수(廣州留守)의 치소였던 광주 궁의 우강(右岡)에 좌전은 복원되었지만, 우강 방 의 우실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다.
李花 282 39 년 11월 8일. 무오 2번째 기사]. 북산성의 축성에 얽 인연과 경종의 왕세 제 책봉 1720년(숙종 46) 숙종은 경덕궁(慶德 宮) 융복전(隆福殿)에서 세상을 떠난다. 왕세자 경종이 즉위였다. 경종은 30세에 대리청정을 시작고 33세에 즉위게 되 었다. 녹천 이유는 숙종이 승 다음 인 1921년에 세상을 떠난다. 군역을 개 던 양역이정청은 경종 1년(1721)에 ‘양 역청(良役廳)’이 되었다. 이의 더 이상 의 군비증강은 없애는 조치인 균역법(均役 法) 정책이 시되는 영조때에는 ‘균역청 (均役廳)’으로 바꿈게 되었다. 군가 2에서 1로 줄어든 것이었다 . 숙종의 승년 및 경종 즉위년 이듬와 그 다음인 신축년(1721)과 임인년 (1722)은 대리청정 기간에 의정부 고위였 던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 명(李頤命), 조채(趙泰采)의 4대신이 사 사(賜死)되는 정국(政局)의 전이 일어난 다. 이 사건은 그들의 정적(政敵)이었던 김일경(金一鏡)과 그가 사주 것으로 나 중에 알려진 목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발생 것이었다. 1921년 사(後嗣)가 없을 것을 알게 된 금상(今上) 경종의 왕실 보전 조치가 내려진다. 1721년 9월 26일에 숙종과 숙 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과 그 부 인 달성 서씨를 왕세제(王世弟)와 왕세제 빈(王世弟嬪)으로 책봉는 의례가 인정전 (仁政殿)에서 거되었다 [『경종실록』 경종 1년 9월 26일 갑인 1번째 기사]. 재의 의동에 위치던 연잉군의 사저에 서 창덕궁의 동궁으로 이사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념으로는 경종을 원는 관료 세력과 영조를 원는 관료세력이 서로 경쟁 는 사색당쟁(四色黨爭)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되던 것이었다. 정적을 사사시 는 부정적인 정치적 경쟁을 저급 당 (黨派) 싸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 이었다. 그런데 숙종의 3 아들인 경종, 연 잉군(영조) 및 어린 나이에 사망 연령군 (延靈君)은 모두 이복 제였지만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되지 도 않는 것이 조선의 왕실 문였다. 금상(今上) 경종과 그의 왕세제는 숙종 대왕의 신주가 모셔진 전(魂殿)인 녕 전(孝寧殿)의 1721년 동대제(冬享大祭) 에서 초관과 아관으로 제사를 올린다 [『경종실록』 경종 1년 10월 8일 계 2 번째 기사]. 다음인 1722년 책봉 왕세 제에 대 청나라의 승인이 내려졌다[『경 종실록』 경종 2년 3월 26일 신 3번째 기사]. 왕세제 영조가 즉위고 경종의 국 상 기간 경종의 배공신으로 녹천 이유 가 선정되었다. <목조/안원대군 23대 ‧ 始42세>
40 李花 282 정년임을 고 나니 여가가 무여 어머니 봉양 시간을 늘이 기를 주 시네. 주야로 저리도 애절게 울어대는 앞산 뻐꾸기 울음소리 그리움에 속 는 마음 내 어찌 너만 못랴만 이심전심의 법열(法悅)을 너를 깨닫게 되니 미물 의 네가 도(道)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데는 선승(禪僧)보다 낫구나. 밤새 울어대는 개 구리 울음소리는 지자도 없는데 녀 석이 독창으로 시작자마자 동시에 창 으로 이어져 자지러질 듯 울어대다가 어 느 시점에서 일시에 딱 그치니 정말 그 그침의 동작이 참으로 신기다. 관악단 처럼 지자가 있어 지봉에 의 일시 에 그 울음소리를 그친 듯 정말 신게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 이부자리는 어 머니가 정리시고 내 이부자리는 내가 개서 장롱에 넣고, 밤새 엄마가 보신 좌변 기 소변을 앞뜰 밭에 버려야다. 소변기 을 들고 나가면서 반드시 소변 색깔에 변동이 있는 지 자세 살다. 왜냐면 1개월여 전에 어머니가 119 차로 안동병 원 응급실에 실려 가신 적이 있다. 그날은 일이라서 당직 의사가 자기공명촬영, 심 전도 검사 등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아침 에 본 변 색깔이 어떤 색깔(변 ‧ 변)이 었느냐고 질문던 사실을 기억고 있기 때문이다. “곡식에겐 그만 거름이 없다”고 누차 어머니께서 말씀시며 곡식이 자라고 있 는 밭에다 꼭 소변을 버리라고 신다. 여나 내가 귀찮게 여겨 아무데나 쏟아 버 릴까 시는 염려 때문이다. 이 염려는 치 매가 올까 미리 앞당겨 염려시는 기우 (杞憂)와는 다른 차원의 엄마의 말씀임을 귀, 어머니 봉양 일기 이병준(李炳俊) 본원 문부 차장
李花 282 41 나는 새겨 짐작다. 아침 식사 준비 쌀 앉기 전에 어머 니가 식전에 드시는 역류성위염, 압등 약을 드시게 보리차 컵 따스게 데워 서 드리고, 밥 조리를 시작는데 쿠쿠 밥 솥 구입지 오래되어 최근 압력밥솥을 사서 교체는데 엄마는 계속 어색 신다. 구닥다리라도 쓰시던 게 역시 고 좋 으신 모양이다. “보온이 지되었습니다” “백미 조리를 시작니다” “밥이 다 되었 으니 고루 저어 주세요” 이렇게 순서대로 전기밥솥이 얘기는 멘를 못 알아 듣 겠다 시니, 우선은 급 김에 잠시 내가 개인적 용무로 출 경우에는 종전에 쓰던 밥솥으로 교체 놓고 떠나야다. 불이 전 없으니 밥 짓는 일로 위급 사은 없을 듯서 다 생각이다. 아 침식사 엔 꼭 커를 드신다. 어머니 말 씀의 지론은 “야야, TV에 의사선생님이 나와서 얘기는데 루에 커 두, 세잔 은 몸에 좋다고 더라. 작년 겨울에는 커 에 김실이(여동생)가 사다 준 꿀을 숟갈씩 먹었더니 매년 지던 병원 신세 도 안 지고 잘 넘겼다” 고 누차 말씀시 니 덕분에 나도 꿀 커를 마시게 되서 이래저래 기분이 덩달아 좋게 느껴진다. 건강에도 나쁠 게 없으니. 점심은 아침 먹다가 남은 밥이 있으면 그 부족분은 라 면으로 개 또는 개 반으로 끓여 보 충기로 의 실다. 봄부 반찬은 집 앞 ‧ 뒤 밭에 돋아 나는 참나물, 참취, 곰취, 미나리, 씀바귀, 머위, 비름나물로 기본 반찬은 결다. 가끔 달래, 도라지, 더덕도 어디서 캐 오 시는지 엄마 덕분에 아주 귀 반찬으로 맛을 보게 된다. 이 충만된 복감으로 긴 장과 로감을 동시에 소 수 있어 다 스레 생각다. 채취 나물을 삶아 마 늘에 참기름 버무려서 장만는 건 엄마 의 소관이다. 나는 아직은 반찬 거리나 사올 줄만 알지 조리를 제대로 못 다. 그래도 참치 찌개, 꽁치찌게 정도는 김치 송송 썰어 넣 고 멸치 조금, 고추장 숟가락 서 제 법 간 맞춰 끓여낸다. 내가 맛보아도 영 맛이 아니나 엄마는 늘 “먹을 만다” 며 간단 내 조리 솜씨에 대 짤막 심사 이다. 저녁 준비 전에 볕에 종일 소독 된 좌변기를 방안에 원위치 시다. 저녁은 6시경에 조리서 6시 30분경이 면 식사를 도록 준비 다. 엄마는 시간 이 이르지 않느냐고 시지만 저녁 먹고 설거지 마치면 7시 30분경 되니 이른 게 아니라 생각되어 내 소신대로 이다. 저녁 설거지 에는 안게 TV 연속 극을 께 본다. 엄마는 보는 둥 마는 둥 시니 <기막 유산> 로는 재미가 있 으니 보시라고 도 반신반의 보는 척 시다가 8시 30분에서 9시 사이에 슬며시 주무신다. 그러면 나는 TV 살짝 끄고 사 랑방 서재로 간다. 독서도 고 대으
42 李花 282 로 원고 워드도 친다. 대이 얼마나 고 마운지 신(神)과 같은 느낌이 든다. 떠오 르는 생각을 지체없이 입력 저장 수 있 다는 게 신기(神技)가 아니고서야 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참으로 다스러운 것은 삼시 세끼 정량 의 소식(小食)을 거의 정시에 드신다. 나 도 인천 집에 있을 때 보다 식사 시간 관 리가 아주 잘 되는 느낌이다. 저녁엔 반주 곁들여본들 소주 석잔은 넘기지 않으니 건강에도 좋고 독서와 원고 쓰는 시간 관 리, 경도 이곳 고집이 정서적으로 안 정이 되어 안성맞춤이다. 로 등산 수 있는 코스도 야산이지만 젓고 멋진 왕복 서,너 시간 이면 충분 귀가 수 있는 코스로 이미 답사 보 놓았으니 당분간은 부러울게 없겠구나 는 느낌이 다. 임란나 어깨 증 정도는 병원을 내 시간에 다녀오면 되니까 별 불 을 못 느낀다. 궁금서 오는 지인들의 전를 받아보 면 “고생 되겠다” “지금 그 나이에 모실 부모가 계셔서 좋겠다” “참으로 복 받으셨 네요. 부모를 직접 모실 수 있다는 게 운이지요” 이런 인사를 는 분들이 대개 내 나이 또래 아니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 신 분들의 공된 얘기이다. 나는 소싯적 부 마음속에 새긴 약속이다. 내 어머니 는 요양원 만은 절대 안 보내겠다고, 그 마음속의 서약을 때가 되어 이 갈 뿐 이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이다. 엄마와 모자지간 천륜의 인연, 자식 된 자(者)로서 기본 도리와 내 자성(自性) 으로서 양심의 문제이다. 참사람의 가치란 남이 알아주는 것 보다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 실에 옮 겨가는 일이라 생각다. 내 자식들이 과 연 말년에 나를 어떻게 대우줄까 는 생각은 그야말로 요없는 과대망상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자기의 가치를 자기가 사유고 발견서 이고 이승 을 떠나는 게 자신을 최고의 격이 아니겠는가. 번 어나는 생(生)과 번은 꼭 갈 수밖에 없는 사(死)의 세계, 비록 짧은 인생사이긴 도 참삶의 격 이 어떠야 는지 자주 숙고 본다. 선조의 손으로서 종사(宗事)에 임여 의(義)롭지 못 누추 자취를 어지럽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 영이 이승을 떠나 과연 안 영면을 누릴 수 있을까를 생 각본다. 근묵자 근주자적(近墨者黑 近 朱者赤)이라 으나, 나는 비록 문방사우 (文房四友)와 벗여 근묵자, 근주자로 살 지라도 오로지 순백(純白)으로 청정고 소박게 그렇게 살다가 고고게 사라지 고 싶은 게 종심(從心)을 넘긴 나이에 절 실게 인식는 내 깊은 사유 (思惟)의 결론이다. <종 / 온녕군17대 · 始41세>
李花 282 43 때로 그립단 말은 아름답지만 당신에게 짐이 된다고 서 나의 그리움이 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으로써 당신 입장이 난처 지더라도 내 사랑는 맘을 욕 순 없습니다. 어렵게 당신께 걸음 다가서면 서둘러 두 걸음 물러서는 당신 그 또 당신의 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에 아무런 이유가 없 는 것처럼 당신 또 나를 멀리에 아무 이유가 없 는 까닭입니다. 지만 당신아, 그저 내 마음의 발걸음을 발짝 내디딘 것뿐인데 실 속에서 두 걸음 물러서는 당신을 담 담 바라보는 것은 어느덧 견디기 어려운 벌이 되고 맙니다. 당신은 이제 신앙으로 내 가슴 속 깊이 응어리져 기도 수밖에 없는 당신으로 새겨지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 지 않으렵니다. 그저, 당신과 께 수 있다면 같은 늘 아래 어딘가에서 언제나와 같은 결같은 웃음으로 당신, 지내실 수만 있다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준 신(神)을 이제, 믿어보려 니다. 내 죽어 줌 이 된다 도 결코 내지 않으렵니다. 가슴 속 꽁꽁 묻어둔 마디 ‘당신을 사랑니다’ <종/온녕군 18대 · 始42세> 당신을 사랑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이진우 길병원 원무과
44 李花 282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전설과 유래는 다양 모습으로 전온다. 근거는 미약 지만 조상이 꼭 전고 싶은 진실 의미 를 담고 있다. 역사는 기록이 없다고 지워 지지 않는다. 오려 전설로 구전되어 부 려지기 마련이다. 운봉 전역에는 산대 첩에 관 전설이 가득다. 1380년(우왕 6) 9월 조(太祖) 이성계(李 成桂) 장군이 이끄는 벌군이 남원에 도착 였다. 인월역을 점거고 약을 자는 왜구를 벌기 위 군이다. 먼저 승전 을 기원는 제례를 올린 여원치를 넘어 운봉 산을 여 나아갔다. 그 적을 따 라가 본다. 여원치(女院峙)는 예나 지금이나 남원과 운봉, 양을 왕래 때 반드시 거쳐야 는 영 · 남의 길목이자 군사 요충지다. 남원 시 내를 벗어나 닭뫼다리를 건너 가른 여원치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남원과 운봉을 잇는 24번 국도다. 다는 아아 고개는 옛 말이다. 계곡 아래 옛길은 산 중 넓은 신 작로로 대체되었고 지금은 씬 넓어진 장 도로가 굽은 리를 곧게 고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적 위는 극에 달다. 전라, 경상, 양광(충청) 삼도의 연 지방이 빌 정도로 가 막심여 공민왕 1년과 8년에는 서울인 개성에 계엄령이 내려지는 가 면, 심지어 우왕 때는 충주와 철원의 천 도설까지 구체되기도 였다. 이러 상 에서 산전는 기코 왜구를 섬멸고 국 운을 보전야 는 중요 싸움이었다. 당시 인월역에 진을 친 왜구는 진(금강 입구)에서 원수 나세와 최무선의 로 격 당 왜선 500여 척의 잔병들이었다. 상 로를 잃은 왜구 잔여세력은 소백산 줄기를 따라 남다가 우왕 6년(1380) 8월 운봉의 산대첩(荒山大捷)과 지명 유래 이남일(李南一)
李花 282 45 양의 사근내(수동) 역을 점거였다. 이 때 도원수 배극렴이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왜구 를 공격였으나 박수경, 배언 등 장수 2명을 500여 명의 군사가 전사는 참담 배를 당였다. 이처럼 왜구의 규모는 결 코 무시 수 없는 세력이었다. 승세를 왜구는 다시 남원성을 공격다 물러가 운봉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주둔 였다. 그리고 ‘장차 광주 땅의 금성산성(담 양)에서 말을 먹인 뒤 곧 북상리라.’는 소문 을 냈다. 조정은 긴장고 백성들의 민심이 게 동요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북방전에서 경이 많 은 조를 양광, 전라, 경상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고, 찬성사 변안열을 도체찰사 부장으 로, 왕복명‧우인열‧도길부‧박임종‧인계‧임성 미‧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왜구 섬멸 작전에 나서게 였다. 여원정을 지나 여원치 정상에 다다를 즈음 도로 오른 쪽에 ‘여원치 마애불’이라는 지 이 손을 내민다. 마애불은 도로 아래 암벽 에 오른 손을 가슴에 얹는 모습으로 석각되어 있다. 당시 일반 여객을 위 여관인 ‘여원 (女院)’이 설치되었던 자리다. 이곳에 전설이 서려 있다. 이 마애불은 당 시 여원의 주모였는데 분질던 왜구가 여 인의 젖가슴을 만지며 롱였다. 수모를 참지 못 여인은 비분여 칼로 자신의 젖가 슴을 도려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가 여원치 병막동에 주둔고 있을 때 여인의 원이 꿈에 나난다. 원수를 갚고자 전략 을 일러주고 연 사라진다. 병막동은 병 사들의 군막이 있던 곳으로 마애불 도로 건너 전주이씨 운봉 입조 묘소 아래들이다. 산대첩을 이룬 조는 여인의 을 달래기 위 여원치 석벽에다 오른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어주었다. 전설은 이어진다. 발 477m의 여원치 정 상에서 북쪽을 보면 우뚝 선 고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일명 조봉이다. 고남산이 조 봉(太祖峯)‧고조봉(高祖峯)·제왕봉(帝王峯) 등으로 불리는 것은 조가 산전를 앞두 고 승전을 기원는 산신제를 지냈다는 전설 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정상에는 제 단을 쌓은 석축이 남아 있다. 운봉 고원을 가로 질러 가산마을과 산대 첩비지가 있는 수산 사이를 지나 산 북쪽 목덜미에 당는 곳에 명석치(鳴石峙)가 있다. 당시 주변 바위들이 왜구를 격기 위 고개 위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 이 손도 써보지 못 채 산 전가 대승으 로 끝나자 억울여 울었다고 서 ‘울독치’ ‘웃도치’ ‘명석치’라는 유래가 전진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서무리 사창마을로 이 어진다. 산대첩을 일명 운봉정산전(雲峰 鼎山戰)이라 는데 그 이유는 사창마을 바 로 앞에 있는 정산봉에서 유래다. 정산봉 은 이곳 산에서 고려군이 주둔며 솥을 걸어 밥을 지었다는 솥 정(鼎)자에서 유래다. 지 금도 땅을 면 검정 숯이 나온다고 다. 드디어 정산봉에 진을 친 고려군과 인월역 을 점거고 있는 왜구와의 승부가 시
46 李花 282 작된다. 당시의 전을 살보자. 왜구는 칼과 창, 등으로 무장고 약 말을 이용였다. 인월역을 중심으로 산천을 자(垓字)로 방어선을 치고, 500여 미 전방의 동무 마을과 서무 마을의 양쪽 산등성이에는 왜구를 매복시켜 두었다. 고려군은 매복 방어선을 돌여 인월역 에 주둔고 있는 적의 주력을 격야 다. 먼저 여러 장수들이 정산봉 좌측 동무듬의 쪽을 공격였지만 대비고 있던 적 의 반격에 쫓겨 번번이 각였다. 이러 진 를 거듭는 동안 루가 기울었다. 조는 작전을 바꾸어 우측 길을 여 서무듬 산등성이에 매복고 있는 적을 유인였다. 예상대로 조가 전진자 매복 고 있던 적의 군사가 대거 어나왔다. 조는 의연게 살 대우전(大羽箭) 20발과 유엽전(柳葉箭) 50발을 쏘아 적의 얼굴에 명 중시켰다. 그러나 왜구들은 멈추지 않고 집 요게 기습을 감였다. 양이 꺼번에 충돌자 산천의 진 속에서 아군과 적 을 구별 수 없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차례에 걸친 적의 기습에도 불구고 진 에 뒤범벅이 되어 끝내 일어서는 자는 정작 모두 고려 군사들뿐이었다. 싸움에 밀린 왜 구들은 산 동쪽 기슭 준 산 위에 굳게 웅거며 대적였다. 조는 군사를 유리 곳에 나누어 지게 고, 이대중 등 10 여 명의 군사를 독려여 적을 올려쳤으나 결국 사력을 다 반격는 적에게 쫓겨 내려 오고 말았다. 실로 승를 가늠 수 없는 든 싸움이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상이다. 조는 다시 군사를 정돈고 진 격 나을 불어 총 돌격을 명였다. 군사들 은 개미떼처럼 산을 기어올라 적진에서 충돌 게 되었다. 급박 상 속에서 적의 장수 나가 창을 겨눈 채 장군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위급였다. 이를 본 장 이두란이 소리로 조를 부르며 말을 달렸다. “영공(令公)은 뒤를 보시오. 영공은 뒤를 보시오.” 거듭 소리치며 달렸으나 장군은 미쳐 손을 쓸 수 없는 상이었다. 이두란의 살이 먼 저 바람을 가르고 날랐다. 살은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꿰뚫었다. 싸움은 계속되었다. 말이 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바꿔 기를 여러 번 반복였다. 격렬 전가 계속되는 동안 적이 쏜 살이 조의 왼쪽 다리에 꽂자 살을 꺾고 더욱 세차게 적을 쳐 나아갔다. 군사들은 조가 부상 것을 알지 못다. 조가 살을 맞자 적이 몰려 와 겹겹이 위였다. 그 자리에서 적 8명을 베자 감 적이 달려들지 못였다. 기병과 께 가까스로 위를 뚫었으 나 싸움의 승는 가늠 수 없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조는 늘을 소리쳐 맹세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 겠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용기를 얻어 죽을 을 다 싸웠다. 그러나 적의 사기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적은 늘처럼 믿고 따르
李花 282 47 는 대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있었다. 십 사 오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 장수가 백말을 고 창을 두르는데 날래기가 어느 장수에 비 수가 없었다. 조는 적장 아지발도의 용맹을 아껴서 생 도록 명였다. 그러나 이두란이 말기 를 생려면 많은 우리 군사가 생될 것이 라 여 만류였다. 아지발도는 얼굴까지 당세구족(當世具足)이란 갑옷으로 무장고 있어서 을 쏠만 이 없었다. 그러자 조는 말였다. “내가 로 구 를 쏠 이니 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저 자의 목을 쏘아라.” 라고 말며 박차를 가 말을 몰았다. 이윽고 을 들어 구 꼭지를 쏘니 구 끈이 끊어져 구가 기울자 아지발 도는 급 구를 고쳐 쓰려 였다. 이 때 조는 두 번째 을 쏘아 구 끈을 맞니 구가 땅에 떨어졌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 두란이 을 당겨 적장의 목을 쏘았다. 적장이 죽었다. 적이 곡며 우는소리가 계곡을 진동니 마치 만(萬)마리의 소가 울 부짖는 것과 같았다. 전세가 기울자 상승세 를 우리 군사들은 총 공세를 무려 10배 가 넘는 왜구를 섬멸시켰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린 가 개울을 이루었다. 적은 겨 우 70명만이 덕두산을 고 지리산으로 달아 났다. 전 결과 노 말이 1,600여 , 빼앗은 병기와 적의 수급을 바친 것이 산을 이루었 다. 또 적이 린 가 산천을 붉게 물들 여 7일 간이나 마시지 못고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조는 생사고락을 같이 여러 장수들과 공적을 께 나누었다. 수산 서쪽 석벽에 「동고록(同苦錄) 정왜경신이신(征倭庚申 李紳)」이란 아 글자와 8원수 4종사의 이 름을 새긴 것이다. 적이 두려워 싸우지 못 장수들은 조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부딪치며 죄를 빌었다. 조가 생 전장을 누비며 던 준마가 여 덟 마리가 있었다. 그 중 운봉에서 던 말의 이름은 <유린청(遊麟靑)>인데, 산으로 죽을 때까지 살을 3대 맞았다. 31살에 죽자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고 다. 조는 개선 도중에 민를 막고 전주 오목 대(梧木臺)에서 잠시 머물며 전주이씨 종친 들을 불러 승전의 연를 베었다. 이로써 고려 4대 왜구 벌승첩 중의 나인 산대 첩은 왜구의 침략에 고전던 고려조정에 근심을 덜어주었다. 전 중에 일어난 전설 또 지명으로 남아 있다. 산대첩 때 죽은 왜구의 시체를 천 서쪽과 동쪽에 묻었는데 그 무덤을 동무덤 서무덤이라 불렀다 서 ‘동무(東茂)’ 마을과 ‘서무(西茂)’ 마을이 되었고, ‘바우라’는 암(血岩)은 산 아래 냇가에 바위가 왜구의 로 물들어졌다는 데서 유래였다. ‘인 리(引風里)’는 조가 바람을 끌어와 살을 쏘았다는데서, ‘인월리(引月里)’는 창 긴 박 전가 진되는 동안 날이 어두워져 달을 끌어올려 승리로 이끌었다는데서 유래 다.
48 李花 282 산대첩을 기리고자 비를 세운 것은 실로 197년 뒤의 일이었다. 1577년(선조 10) 당시 전라도 관찰사 박계이 고려사와 용비어천 가의 내용을 고증여 조정에 상소여 윤 를 받았다. 조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운봉 감 박광옥이 공사를 담당여 비를 세웠다. 산대첩비지의 위치는 운봉읍 수리 341번지에 있는 수산(花水山)이다. 가운 데가 반달처럼 솟아 있기에 반월산이라고도 는데 건립 당시 국(國風)이 이곳 명당 를 잡기 위 원래 있던 이씨 묘를 산 서쪽 기슭으로 이장 조성였다고 다. 건립 당시에는 전각(殿閣) 3칸, 전문(殿 門) 1칸, 외문(外門) 1간, 수직료(守直寮) 5 칸, 직사(直舍) 3칸이 있었고, 승장(僧將) 1 명과 의승(義僧)이 1개월씩 번갈아 가면서 관리였다. 일제강점기 말 산대첩비는 수난을 겪는 다. 망을 앞둔 일제는 일의식을 고무시 는 반시국적 유물들을 괴라는 지령을 내려 비를 고 비문을 쪼아 없앤 것이 다. 그러나 기록은 지워도 역사는 지울 수 없 다. 재 비석은 1957년에 새로 복원여 세 운 것으로 1963년 산대첩비를 비롯여 산대첩사적비, 산대첩기념비, 수산비각 비, 비대첩비각, 사적비각, 비각, 삼문, 어각 등을 30,321㎡(9,175) 부지 를 사적 104로 지정여 관리고 있다. <세종/영군 20대손 ‧ 始45세> 전 사기매 방지를 위 안내 종친, 종친 등)거나 종친의 산기관(예:숭조연구원, 전주이씨유적연구, 이씨족보 찬위원, 이씨가제작사 등) 또는 종친의 임직원인 것처럼 가장여, 전국의 종친들께 영상물(예:비디오잎 등) 및 책자(예:전주이씨 대관2, 전주이씨 보감, 전주이씨의 뿌리 등), 가 등을 매는 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전로 구입의사를 물어오거나 먼저 안내장과 책자를 보내고 추 일방적으로 대금을 요청는 등 다양 수법으로 매위를 고 있습니다. 이러 위는 도시민은 물 론 농어촌의 종친들께 무작위로 지고 있으며, 농어촌의 종친들이 그 사례를 소고 있으므로 지방에 거주고 계시는 종친들의 각별 주의가 요망됩니다. 본원에서는 모든 간물과 제작물은 반드시 이보에 공지고 있고, 각 지원과 분원, 종 , 봉 등을 여 보고, 또 보급고 있으며, 절대로 전를 이용여 매위를 지 않습니다. 영상물이나 책자 구입에 대여 전 안내를 받은 종친은 반드시 종약원에 인시기 바 라며 시 그것들을 받으신 분은 발처나 발송처로 반송시어서 더 이상의 를 입는 종 친들이 없도록 당부드립니다. 문 의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부 ☎(02)765-2124 / FAX(02)742-1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