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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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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designcgs, 2020-09-13 19:22:48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빈민선교

) 프로그

odia) 프

게 복음을

외 리트릿

성을 고양

병원(유로 린 오가타 선교사

부탁했더니 오닉스 프로그램 출신인 스

었다. 스레이뻐의는 미국식 영어 발음

원활하였고 우리 유료치과 병원에서 리

C)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를 파송한 미
지을 헌금을 보내주어 최악의 빈민촌인

주었다. 닥터 린(Lynn)은 참으로 신실

d Anthony) 선교사
교부에서 행정 일을 보는 젊은 선교사였
ce International) 산하에는 많은 선교

선교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행정 일
선교사들은 2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비자가 무료였다(실제 가족 일인당 비자
다). 단기 의료팀이 미국에서 오면 약품

제 4부 땅 끝까지 | 149

이나 기구들을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다. 이렇게 공식허가를 받아야 CSI의
러나 매번 세관에서 허가를 받는 것은
세관 당국으로 직접 가서 하루 종일 기
전에야 공무원들이 내주는 허가서를 받
데 어려운 까닭은 그들에게 돈(뇌물)을
는 안토니를 이렇게 불렀다)선교사는

우리도 토니 선교사의 신세를 매번 졌
사무실에 갖다 주면 토니는 외무부 비자
실에 갖다 주었다. 또한 3년마다 나는
계획과 재정 관계(지출과 예산) 서류를
가를 받아야 했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께 선교비의 내역과 치과 병원의 치료
료 가치 등을 꼼꼼히 적었다. 특별히 모
산해서 계산하는 과정도 여간 복잡한
을 거쳐서 매번 정부 보고서류를 작성
토니가 모두 해 주었다. 정말이지 그의
금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나라(Closed
세월이 흘러 그도 지금은 오십이 넘었을

7. 닥터 톰 러브(Dr. Tom Love)
20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CD
Love)를 처음 만났다. 그는 북가주 오
업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이사회는

15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에 세관에서 허가를 미리 받아야했
실적으로도 보고 될 수 있었다. 그
은 고역이었다. 그때마다 안토니가
기다렸다가 오후 5시 문을 닫기 직
받아왔다. 매번 이렇게 비자를 받는
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토니(우리
깜뽕짬 주에서 짬족 선교도 했다.
졌다. 2년마다 우리가 여권을 토니
자과로 가서 비자를 받아 우리 사무
는 치과 의료 사역을 위해 치료 사역
를 정부에 제출해서 병원 사역의 허
이 아니었다. 매번 나는 토니와 함
내역, 그리고 이동 진료 사역의 치
모든 진료의 가치를 미국 달러로 환
게 아니었다. 까다롭고 힘든 과정
성을 해야했는데 그 골치 아픈 일을
의 수고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
d Country)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었을 것이다.

DS 이사회에서 나는 닥터 러브(Dr.
오클랜드에서 구강외과 전문의로 개
는 나의 캄보디아 선교사 파송 자격

을 심사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그때
터 러브는 이사회 정회원이었다. 이
회에서 그는 나의 파송을 적극 찬성
주었다. 그는 내게 매 3개월마다 회
보고서를 올리는 것만 주문했다.

나는 캄보디아에 도착한 2005
후반부터 이동 진료를 시작하면서
속한대로 이사회에 회계보고서를
출했다. 내가 보낸 보고서를 본 톰
2006년부터 베트남 진료를 끝내고
에 다시 합류하여 이동 진료에 나섰
두 번까지 그 멀리 미국에서 왔다.
에게 감동과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주변의 의사들을 권면하여 같이 왔
Dowling)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닥터
동안이나 함께 왔다. 메디컬 간호사
다녀갔다. 이동 진료에는 치과 의사
하다고 닥터 톰이 조언을 해주어서
갔다. 그래서 간호사도 일반의사를

닥터 톰 러브는 그때마다 두 플라
특수 장비를 갖고 왔다. 모든 발치
랑니 매복치도 특수 장비를 사용하
다. 7,8명의 환자들을 일렬로 의자
에 차례로 발치하는 신속한 기술은

때닥
이사
성해
회계

5년

서약

를제

톰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닥터 톰 러브

고 캄보디아로 와서 일주일씩 우리 팀

섰다. 그 후 그는 매년 왔고 어떤 해는

그의 불같은 열정은 주변의 많은 분들

다. 톰이 진료에 동참할 때는 그가 아는

왔다. 그들 중 닥터 톰 다울링(Dr. Tom

터 매트 리우(Dr. Matt Liu)는 두 해

사 캐트린(Kathline)도 권유하여 두 해

사뿐 아니라 일반 메디컬 의사도 필요

서 일반의사도 최소한 한사람이 같이 나

를 보조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라스틱 상자에 그 분만이 가지고 있는

환자들은 그에게 보내지는데 힘든 사

하여 순식간에 뽑아내는 재간을 발휘했

자에 앉혀놓고 마취를 한꺼번에 한 후

은 경탄할 만했다. 이렇게 하니 하루에

제 4부 땅 끝까지 | 151

100명 가까운 환자들을
돌본 적도 있다. 덕분에
다른 치과의사들은 살릴
만한 치아를 살리는 치료
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믿음이 신실한 부인 홀리
(Holly)도 가끔 같이 오
셨다. 홀리는 두 다리가 닥터 톰 러브
붓는 질환을 갖고 있음에도 함께 오셔

한해는 VVWM 팀이 베트남을 가야
캄보디아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규모
역 선상마을(Floating Village) 주민들
하고 마지막 이틀은 태국 국경근처에서
려진 씨탄 목사와 손을 잡고 추진한 일
께였다.

선상마을은 오래 전에 캄보디아로 이
은 땅이 없으므로 강이나 호수 주변에
유지한다. 특히 씨엠립과 맞닿아 있는
단을 이루며 살고 있다. 대대로 오랫동
인 베트남어를 사용한다. 선상은행, 선
이 즐비하다.

닥터 러브는 이동 진료 시 하루일과
의 시간을 반드시 가질 것을 가르쳐주
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파악한 후에 그에

15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브와 그의 부인 홀리(Holly)

셔서 남편을 도왔다.
야하는 데 가지 않고 그의 주선으로
모가 큰 메디컬 팀이었다. 씨엠립 지
들과 씨엠립 인근 시골마을을 진료
서 진료했다. 캄보디아에서는 잘 알
일이었다. 물론 우리 치과 팀도 함

이주해온 베트남인 주거지다. 그들
에 배를 띠우고 고기잡이로 생계를

똔래삽 호수에는 선상마을이 대집
동안 살아왔고 언어는 자신들의 말
선상주유소, 선상교회, 선상상점들

과를 마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경건
주었다. 그날 하루 동안의 진료 사역

에 대한 개선책을 세우라는 주문이

었다. 그는 서로 잘한 것을 칭찬하
로 바로서기를 간구하는 시간을 갖
불같은 믿음과 열정 그리고 캄보디
다. 우리 사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우리 사역을
주신 주님의 손길에 감사드린다.

닥터 톰을 간력히 소개해 보자.
해군 산하 해병대대의 위생병으로
복무하였다. 군 제대 후에 미시간
과 전문의를 개업하였다. 또한 그는
Veteran With Mission/ VVWM) 이
동안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캄보
였기에 그의 관심이 높았으리라 생
의하면 51년 간의 구강외과 전문의
동안 20개국 나라에 걸쳐 약 80번에
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동의 난민촌과 서부 아프리카 크리
하는 치과 기구를 사용하여 매복치
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8. 나의 소중한 동역자 황기수
우리는 캄보디아에 안착하자마자
미국을 떠나기 전 본 교회(웨스트민
로부터 캄보디아에 가거든 이영희

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영적으
갖도록 철저히 교육했다. 우리는 그분의
디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잊을 수 없

함께 일하고 우리를 지도해준 그에게
을 위해 특별히 그분을 선택해서 보내

. 톰은 나이 17세에 해군에 입대하여
로 파견되어 샌디에고 팬들튼 캠프에서

대학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구강외
는 베트남 참전용사 선교회(Vietnam
이사로 매년 베트남을 방문하여 2,3주
보디아는 베트남 바로 옆에 있는 나라
생각된다. 닥터 톰이 최근 보낸 소식에
의로의 활동이 끝나간다고 말하였다. 그
에 가까운 선교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
고 술회하였다. 더 나아가 내년에는 중
리스천 치과 의사들에게 배터리로 작동
치를 제거하는 법을 일주일 동안 가르치

선교사
자 이영희 선교사부터 만나기로 했다.
민스터 장로교회) 담임인 백창호 목사
희 선교사를 찾아보라는 당부가 있었기

제 4부 땅 끝까지 | 153

때문이다. 이영희 선교사
는 초등학교 교장 출신으로
부산에서 오셨으며 파송교
회는 백 목사의 모 교회였
다. 우리는 이영희 선교사
를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
녀는 캄보디아 국립공대 학 황기수 선교
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교였다. 그녀는 황기수 선교사와 그의
하혜자 권사와 정기적으로 기도회 모임
회에 참석했으며 그 자리에서 황기수 선

황기수 선교사(장로)는 WEC 선교부
보디아에 오셔서 히즈 차일드(His Ch
지고 있었다. 그를 파송한 교회는 필라
주 고신)였다. 그는 2년 동안 고아원 건
학에서 언어공부 과정을 소화했다. 50
는 크메르어 철자와 문장을 써서 익히
는 철저히 언어공부를 한 덕분에 교회
을 때 황 선교사는 나보다 한 살 많은 6
교를 하고 계셨다. 그는 교회개척을 위
서 가까운 껀달주 따배 마을을 발견했
로 전 크메르 루주(Khmer Rouge) 소
을이다. 유엔은 호수 주변으로 6m x 1
게 나눠주었었다. 집들은 전부 나무 집

15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교사와 아내 전신자 선교사

그 학교는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학
의 부인 전신자 권사, 미국에서 오신

임을 갖고 있었다. 우리도 그 기도
선교사 내외를 만났다.
부 소속으로 1999년 8월 14일에 캄
hild)라는 고아원 건축공사를 책임
라델피아에 있는 제일장로교회(미
건축을 마치고 6개월간 프놈펜 대
0개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도록 그
히고 현지인과 회화를 연습했다. 그
개척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났
63세였고 유창한 캄보디아어로 설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프놈펜에
했다. 따배 마을은 유엔 평화협정으
소속 군인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마
15m의 땅을 크메르 루주 군인들에
집이다. 종려나무 잎사귀로 지붕과

벽을 막고 침수를 피하기 위해 높이
이곳 동장 뿌뽄은 전쟁 중에 한 팔
라언이다. 황기수 선교사는 이들 동
하여 결신(決信)케 했다. 그는 그 동
리 부부도 관심이 많아 이 가정교회
에게 믿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그녀
우리도 이 교회 개척을 돕기 위해 병
를 나가기도 했다.

황 선교사는 프놈펜 시내 중국대
고 긴 4 x 15m 3층 집에 대학생 5,6
경을 가르쳤다. 이를 학사라 부른다
해 운영하면서 그들을 주일학교 선생
학시키거나 혹은 신실한 믿음을 가

그들 중에 제일 애지중지하던 학
이하”다. 황 선교사는 그에게 데이
이라 부르며 장래 목회자로 키워 교
가지고 계셨다. 황 선교사는 다윗을
학교에 보내려고 나에게 미국 선교
신 선교사 헤이든을 소개하여 방과
다윗은 매일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
설 때 가끔 황 선교사가 기도하고 떠
면, 다윗이 기도를 하고 떠나자고 먼
다. 그런데 신학공부를 위한 미국 비
민스터 신학은 포기하고 한국으로

이 기둥을 지어 그 위에 초막을 이었다.
팔을 잃은 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밍쩜
동장 내외를 성심껏 섬기고 복음을 전
동장 집에서 가정교회를 시작했다. 우
회에 몇 번 참석했다. 부인인 밍쩜라언
녀는 동네 사람들을 앞장서서 전도했다.

병원이 쉬는 토요일에 이동 치과 진료

대사관 뒤쪽 동네에서 오래 사셨다. 좁
6명을 입주시켜 새벽기도회를 갖고 성
다. 그는 이 학사 사역을 꾸준히 여러
생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신학교에 진
가진 청년들로 키웠다.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써
이비드(David)란 이름을 붙여주고 다윗
교계의 기둥이 되게 할 원대한 계획을
을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
교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독
과 후에 자주 만나 영어를 배우게 했다.
했다. 매일 아침 같이 차를 타고 집을 나
떠나는 것을 잊은 채 자동차 시동을 걸
먼저 말할 정도로 신실한 청년이 되었
비자를 받기가 어려웠다. 결국 웨스트
로 방향을 바꿔 원서까지 받아 놓았다.

제 4부 땅 끝까지 | 155

그런데 그 시기에 엉뚱하게 이성문제가
탁으로 같이 성경공부를 하던 여학생과
것이다. 이 여학생은 매주 주일학교 교
의 고백으로 이를 알게 된 황기수 선교
그러나 그는 그녀와 학력 차이가 커서
에게 그 처녀와의 결혼을 강력히 권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결국 다윗은
을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한 일꾼으로 키
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옆에서
하고 안타까웠다. 캄보디아 사회는 성
들이 아내와 아이들을 버려두고 가정을
도덕성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서 그런

이제 황 선교사의 사역을 잠깐 소개
집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그의 학생으
이 초등학교 선생이 유치원 선생 짠튼
사가 짠튼을 만나면서 그의 사역은 새
이 일한 곳은 따께오 주에 있었다. 그곳
었는데 그 동네는 품트머이라고 불린다
하여 실크를 짜내는 전통적인 캄보디
경제가 제법 안정된 오래된 동네였다.

그 당시 품트머이 동네(새 동네) 유지
하여 학교 내에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
가 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유지들이 약
치원은 곧 운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

156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가 터져 버렸다. 현지인 목사의 부
과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린
교사로 봉사하던 처녀였다. 여학생
교사는 다윗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서 결혼을 못하겠다며 거절했다. 그
고했던 황 선교사의 실망과 낙심은
은 학사를 떠나버렸다. 너무나 다윗
키우고자했던 황 선교사의 꿈이 하
서 그를 지켜보는 우리도 너무 민망
성도덕이 문란한 편이다. 많은 남편
을 떠난다. 그곳은 아직 성에 대한
런 성 문제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개하자. 그가 2004년 학사 사역으로
으로 초등학교 선생이 한 분 있었다.
튼을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황 선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짠튼 선생
곳은 프놈펜에서 약 90분 거리에 있
다. 그 마을은 농사와 함께 양잠을
디아 시골 마을이었다. 따배와 달리
.
지들과 초등학교 교장은 서로 합의
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만큼 여유
약속한 자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유
그래서 짠튼은 자기 친구를 통해 황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동
은 사역지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보
다. 그 유치원 선생은 믿음이 좋은
을 크게 개축하고 유치원 선생을 늘
생했다.

이 일로 황 선교사는 교장 선생님
그리고 동네 유지들을 모아 성경공
를 인도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
고 운전하고 가서 성경을 가르치는
생이 대학에 진학하면 학사에 머물
년에는 필라델피아 본 교회(제일장
2013년에는 마산 고신교회의 후원
다. 2016년에는 미국 본 교회 담임
쳐온 동네 어른들 36명이 세례를 받
는 이름으로 정식교회를 그곳에 설
고 오후에는 어른들이 예배를 드렸
결된 땅 40mx90m를 구입하여 20
헌당 예배를 드렸다.

우리 치과 의료팀은 황 선교사가
부터 세 번의 치과 이동 진료를 하여
선교사는 치과 사역을 매우 좋아했
력이 없는 현지인들을 어떻게든 돕
리도 힘이 닿는 대로 돕기로 했다.
이미 그곳에 예정되었는데 이 또한

동네를 답사한 황 선교사는 앞으로 좋
보고 유치원 운영과 증축을 돕기로 했
크리스천이었다. 황 선교사는 유치원
늘렸다. 비로소 제대로 된 유치원이 탄

생님과 친해지고 교장과 몇몇 선생님들
공부까지 시작했다. 그는 이 성경공부
두고 목요일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
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곳 고등학
물게 하여 그들을 계속 지도했다. 2011
장로교회)의 후원으로 부지를 구입하고
원을 받아 유치원 겸 주일학교를 지었
임 목사를 모셔 와 그동안 열심히 가르
받도록 했다. 그 후 “베델동산 교회”라
설립했다. 오전은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
렸다. 2016년에는 유치원 부지 뒤로 연
018년 본당 예배당을 지었고 2019년에

가 이 동네 성경공부를 시작하던 시절
여 황 선교사의 선교를 도왔다. 황기수
했다. 마땅한 병원 시설도 없고 삶의 여
돕고 싶은 황 선교사의 마음을 보고 우
올 2020년 6월에도 치과 진료 사역은
한 황 선교사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제 4부 땅 끝까지 | 157

때문이다. 정말 감회가 새롭고 의미가
베델동산 교회는 이미 성인이 된 36명의
인으로 얻었다는 것이다.

내가 철수한 뒤부터는 닥터 마까라
를 나갔다. 그런데 최근에는 황기수 선
료사역을 나가려고 있는데 코로나(CO
사역이 중지되어 이 사역계획도 연기되
는 불교문화가 뿌리 깊어 어른이 된 성
경이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 개척 시는
은 겨우 두세 가정 정도인데, 품트머이
과 청년들의 열매를 갖게 되었으니 주께
축복하신 것이다.

황기수 선교사는 나의 영적 지도자였
황 선교사 내외는 이제 미국에 돌아갈
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캄보디아에
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주님께 올려드

9. 캄보디아 한인 1호 강창윤 선교
필자는 캄보디아에 도착해서 맨 먼
국 선교사를 찾았다.마침 그 분이 한 골
데 그 분이 강창윤 선교사다. 강 선교사
Church)는 킬링필드로 가는 길목 프놈
해보니 어른 교인들이 많았고 튼실해
을 설립할 때 직원을 추천해달라고 부

158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가 남다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명의 농부들과 동네 청년들을 세례교

라가 자기들의 수입으로 이동 진료
선교사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동 진
OVID 19) 사태로 모든 예배와 진료
되었다고 하니 안타깝다. 캄보디아
성인을 전도하기는 무척 어려운 환
는 젊은 학생들이 대상이고 어른들
이 베델동산 교회는 풍성한 어른들
께서 황기수 선교사의 사역을 크게

였고 우리는 좋은 선교 동역자였다.
갈 집도 없다. 어떻게 하든 캄보디아
에 사랑과 헌신을 바치며 사는 분이
드린다!

교사
먼저 캄보디아 땅에 발을 내디딘 한

골목 내에 사신다기에 만나 뵈었는
사가 개척한 품말교회(Phum Marl
놈팬 교외에 있었다. 예배에도 참석
해 보이는 교회였다. 내가 치과병원
부탁했더니 현 기공소장 소반꼴 예

(Sovankol Yee)와 사반니를 추
천해 주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
다. 나의 신실한 해잉 양이 강 선
교사 교회 근방으로 이사해서 그
녀를 그 교회로 보냈다. 그후 그
녀는 믿음이 성장하고 전도 훈
련을 잘 받아서 지금은 정기적
으로 주변 마을에 나가서 전도
하고 있다.

간략하게나마 강 선교사가 제
1호 선교사로 캄보디아에 오시게된
전부터 중국선교를 자원하였으나
렸다. 당시 교단(합동 개혁교단)에서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
에 포기하였다. 그 후 1년여 훈련을
이 와서 만나보니 아직도 캄보디아
다. 그때 캄보디아는 전쟁중이어서
도 그곳에 꼭 가야하는가는 생각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가사처럼
이 순종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동안 교제하고 있던 자매가 동
기 하고 주 자매에게 연락했더니 자
만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래서 1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10월 말에 결

강창윤 선교사와 함께 한 아내 주지옥 선교사

된 사연을 들어보자. 강 선교사는 오래
신학을 마치기까지 선교의 길이 안열
서 선교훈련을 받고 있을 때 캄보디아

들었으나 아직 한국선교사가 없다는 말
을 마칠 즈음 교단 내 선교부에서 연락
아선교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
서 아무도 자원하는 선교사가 없었다.나
이 들었으나 어릴 때부터 부르던 찬송
럼 주님이 나를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

동의하면 가겠다고 교단 선교부에 이야
자매는 캄보디아가 어디인지도 모르지
1992년 총회(합동 개혁)에서 캄보디아
결혼하였다. 우리는 캄보디아로 신혼여

제 4부 땅 끝까지 | 159

행겸 답사를 다녀온 후에 1993년 1월
아오고 있다.

최근에 강 선교사가 캄보디아 교회
과 같이 나누어 주었다. “제가 이곳에서
하게 만든 것들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교회 초창기에
로 교회들이 자리를 잡고 일어섰지만.
회의 참된 사명과 NGO단체의 차이를
많이 보았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사역을 진행하는
일시적인 행사위주의 일을 하는데 차이
교회들이 NGO단체들에게 영향을 끼치
사역을 따라 함으로 교회들의 자기 정
님의 교회가 참된 복음의 메시지를 잃어
실해가는 모습은 매우 아쉬운 모습이

10. 공 베드로 OMF 선교사와 함께
우리가 프놈펜에 도착한 후에 닥터
에 한국 선교사 두 분이 계신다고 소개
사로 프리뱅 주에서 교회개척과 유치원
분이 바로 공 베드로 선교사였다. 공 선
여 매우 사역을 잘 하고 계셨다. 닥터
수마을교회(Jesus Village Church)에
전 예배에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어서

16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

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아픔을 다음
에서 겪은 일 가운데 저를 가장 당혹
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잘 모른
에 기독교 계열의 NGO들의 열정으

.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들이 교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는 모습을
을 가르치고 교인들이 말씀대로 살
는 반면에, 단체들은 프로그램이나
이가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치기보다는 오히려 NGO 단체들의
정체성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
어가면서 표류함으로 그 능력을 상
아닐 수 없다.”고 소식을 주었다.

께한 사역들
터 추 내외가 오셔서 캄보디아 OMF

개해 주었다. 한 분은 조학연 선교
원 사역을 하시는 분이고, 다른 한
선교사는 시내에서 교회를 개척하
추 내외도 공 선교사가 개척한 예
에 출석하고 있었다. 닥터 추가 오
서 한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공 베

드로 목사를 뵙게 되었
다. 공 목사는 마침 고
향이 전남 고흥 분으로
나와 동향이었다. 또
한 부인 김선아 사모님
은 매산 학교 후배이기
도 했다. 이런 인연으
로 같은 OMF 선교부
소속인 닥터 추 내외와 공 베드로
공 선교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는
께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군병원 내에 치과를 개업
회장으로 계신 공 선교사가 오셔서
장학생 한 사람 추천을 부탁할 때도
추천해 주었다. 그분이 닥터 분따다
문에 많은 젊은이들을 알고 있었다
교사의 추천으로 만났다. 레악까나
고 현재는 치과 이동 진료 사역을
하고 있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가 밤
업할 때 공 선교사께서 신실한 써일
일라는 유복한 가정의 고명딸로 공
서 멀리 떨어져 있어 통학이 어려워
라는 회계학을 전공하여 유료 치과
자로 일을 맡았다. 그녀는 전적으로

선교사(왼쪽에서 두번째)의 사역 현장

는 매우 긴밀한 공조 속에서 사역을 함

업할 때도 당시 캄보디아 한인 선교회
서 축사를 해주었다. 치과대학에 보낼
도 그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훈분따를
다. 공 선교사는 학사를 운영하셨기 때
다. 예쁘장한 19살 난 레악까나도 공 선
나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하

하시는 정병설 선교사의 매니저로 일
밤 선교로 유료 치과(For Profit)를 개
일라(Serila)를 소개해 준 일이었다. 써
공 선교사 학사에 있었는데 집이 시내에
워 학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훗날 써일
과병원의 재무를 담당하는 리셉션 책임
로 믿을 수 있는 자매로 업무능력 또한

제 4부 땅 끝까지 | 161

뛰어났다. 그녀는 학사에서부터 알게 된
시골에 내려가서 목회하며 유치원도 운
어머니가 그 목사 후보생과의 결혼을 극
니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허락을 얻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시골 사역지로 보
의 직원을 잃게 되어 크게 아쉬웠지만
쁨으로 보낼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써
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주
다. 그러나 2주 만에 은행을 그만두고
에 정식 직원이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
사건이었다. 알고 보니 은행에 취직해
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믿는
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고 한다. 눈에
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신의 삶을 드리고자하는 써일라의 선택

공 선교사는 미국 아틀란타의 후원
나 우리와 함께 이동진료 사역에 나섰다
가의 디지털 X-ray와 운용 프로그램이
잘 썼는지 모른다. 공 선교사는 캄보디
척한 교회마다 성공적이었는데, 한국
면서 지금은 현지인들에게 교회를 모
를 추억할 때마다 그분의 너그러운 성품
화를 잘 이해하여 많은 타지 선교사들

16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된 신실한 목사 후보생과 결혼해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써일라
극구 반대해서 써일라는 그분이 아

고집을 피우다가 마침내 어머니의

보내면서 믿을만한 BAM 유료 치과
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선교이기에 기

써일라는 그녀가 사랑하는 목사님
주선하여 은행에 취직한 일이 있었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 당시 은행
아니었기에 이는 모두에게 놀랄만한
해서 업무를 보는 일에 조금도 기쁨
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역의 현
에 보이는 것만 믿고 돈으로만 판단
지 않는 참된 가치와 복음을 위해 자
택은 두고두고 내게 교훈이 되었다.
원교회에서 치과 팀이 오면 세 차례

다. 그때 그곳 닥터 황이 기증한 고
이 들은 컴퓨터를 얼마나 유용하게
디아에 교회를 세 개나 개척했다. 개
국 OMF 선교회 디렉터로 들어가시
모두 넘기셨다. 사랑하는 공 선교사
품과 함께 누구보다 캄보디아의 문
들을 돕던 모습이 떠오른다. 교회 개

척도 탁월하게 하셨던 멋진 선교사
분과 함께한 캄보디아의 사역은 나
복된 시간이었다.

11. Dr. Yewon과 Dr. Chern C
2004년 1월 캄보디아 비
전여행 때 내가 치과 의료선
교사(OMF) 내외를 인터뷰할
수 있도록 CDS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분들이 바
로 닥터 예원과 천천 추 선교
사 내외 분이다. 이렇게 만난
닥터 추 내외는 나의 캄보디
아 의료 선교 사역에서 가장 닥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다. 이분들은
게 자세히 알려주었고, 내가 데리고
개해 주었는데 그가 닥터 쏙하 미어
대생들 중 유일한 크리스천이었다
전도할 학생들도 물색해 주었다. 두
서 일하고 계셨다. 이분들은 1996년
디아에 선교의 문이 열린 초기에 들
다 캄보디아 언어 크메르어를 유창
부인 천천 추는 특별히 언어에 재
향적이어서 현지인들과도 소통을 매

사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나의 신앙여정에 큰 위로와 도전이 되는

Chern Choo 선교사

닥터 예원(오른쪽)과 닥터 천천추 OMF 선교사

은 캄보디아의 치과 의료계 실상을 나에
고 일할 졸업반 크리스천 치대생을 소
어스다. 그는 치대 졸업반 학생으로 치

다. 또한 내가 진료를 하면서 가르치고
두 분 다 유일한 국립치대(정원 25명)에
년에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분으로 캄보
들어왔다. 젊은 나이에 들어왔고 두 분
창하게 구사했다.
재능을 가진 특출한 분이며 성품이 외

매우 잘했다. 한때는 신참 OMF 선교

제 4부 땅 끝까지 | 163

사들의 언어교육을 평가하는 심사관이
의가 없어서 중요한 교정학을 제대로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본인이 직접 싱
공부한 후 교정 전문의가 되어 돌아왔
전문의를 양성하고 있다. 이분들은 나
회에 소개하여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전









O
목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닥터 추 선교사
기 이동진료팀이 기증한 새 디지털 손
서 쓰게 하고 본인들이 이동 진료를 나
닥터 예원은 ADC 유료 병원에서 임
공부를 맡아 캄보디아 말로 잘 가르쳤
만들어져 있었다. 닥터 천천은 내가 좋
않게 잘 만들어 와서 우리를 즐겁게 해
할 때부터 마지막 철수할 때까지 서로
님께서 이렇게 좋은 동역자들을 예비

16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이기도 했다. 닥터 천천은 교정 전문
가르치지 못하는 캄보디아 상황을

싱가포르 치대에서 3년간 교정학을
왔다. 그 후 대학원에서 그녀는 교정
나를 캄보디아 기독 치과 의료 선교

전도 및 치과보수교육에서 내게 가
르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기성의 의사들이 제대로 배
우지 못한 근관치료학과 실습, 틀니
제작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때 추
선교사 부부는 모든 OMF 선교사와
가족들을 나의 ADC 유료 병원으로
보내 ADC 유료병원에 도움을 주었
다. 닥터 추 내외가 다니던 교회는
OMF 소속 한인 선교사 공 베드로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교회다. 단
손 X-Ray를 우리 ADC 유료 병원에
나가면서 빌려 쓰고 돌려주곤 했다.
임플란트 교육 전에 시행하는 성경
쳤다. 그의 성경공부 슬라이드는 잘
좋아하는 치즈 케익을 전문가 못지
해주었다. 우리는 처음 만나 인터뷰
로 호흡이 잘 맞는 동역자였다. 하나
비해 놓으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12. 피스(Peace Chelvanyaga
피스 선교사는 OMF 독신 선교사
강외과 전문의다. 그녀는 인도계
시아인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치대
도 일하였다. 닥터 피스는 닥터 마
게 구강외과 실기를 가르쳐주신 고마
이다. 나의 CSI 병원과 For-Prof
에서 어려운 구강외과 환자들과 구강
자들을 친히 진단 해주었다. 또한
IU 치과대학 대학원 구강외과 교수
우 온화하고 학식이 뛰어난 분이다

13. 울산 대흥교회와 이흥빈 목
나는 사역의 재정적인 후원 대부
에서는 유일하게 울산 대흥교회(통
교회와의 연결은 뜻밖의 방법으로
이 LA 한인 타운 노인아파트에 사시
장모님은 노인반 기도회에서 나의
도를 드리고 계셨다. 울산 대흥교회
담당 목사이신 최성일 목사와 장신
최성일 목사께 선교사 한 분을 추천
가 나를 추천하신 것이다. 십여 명의

am) 선교사

사로 구

말레이

대교수로

마까라에

마운 분

fit 병원

강암 환

그녀는 피스 선교사

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성품이 매

다.

목사
부분을 미국에서 받았다. 그리고 한국
통합)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울산 대흥
이루어졌다. 이미 고인이 되신 장모님
시면서 등대 교회에 출석하고 계셨다.

선교사역을 위해 정기적으로 중보 기
회 이흥빈 담임목사는 등대교회 선교부
신대 동기였다. 어느 날 이흥빈 목사가
천해 달라고 요청하셨고, 그때 최 목사
의 파송 선교사(전부 파트타임)가 이미

제 4부 땅 끝까지 | 165

울산 대흥교회 모습 (현 김기현 담임목사 시무)

있었지만 캄보디아는 내가 처음이었다
나는 한국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기다

흥빈 목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 목사
나의 치과 의료 선교사역 내용을 당회에
락이 있었고 귀임한 후 한 달 정도 뒤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 후 울산
주어 캄보디아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
년 12월 15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은
목사가 취임하여 사역하고 있다.

나의 후임선교사 닥터 데이비드 구(
캄보디아로 파송을 받았다. 그러나 구
역 후에 국제 YWAM에서 이라크 커디
서 대흥교회는 지금도 이라크의 구금성
떠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하실 일이다. 그곳이 캄보디아든 이라크
리들은 순종할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166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이흥빈 원로목사

다.
기다렸다. 마침내 인터뷰를 한 후 이

사는 주일예배 후 임시당회를 열어
에 설명케 하셨다. 그 후 당회의 허
에 다른 두 분의 선교사와 함께 파송
대흥교회는 꾸준히 선교비를 보내
었다. 참고로 이흥빈 목사님은 2019
은퇴하시고 지금은 6대 김기현 담임

구(구금성)도 나와 같은 절차를 밟아
구 선교사는 캄보디아에서 1년간 사
디스탄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

성 선교사를 계속 후원 중이다. 어
리 가득 선포되는 것이 주께서 기뻐
크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우
여 어서 오시옵소서!

캄보디아의 소수

인구 1500만을 자랑하는 캄보디아는
부 산지에 24개 부족이 살고 있다. 그
부농(Bunong)족은 우리 선교사들과는
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인구
37,500명으로 소수민족 중에서 규모가
편이며 몬둘끼리 주에 살고 있다. 이들은
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베트남 땅
도 그만큼 부농 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도 국경을 넘어 서로 교류가 활발하다.
부농 족은 단순한 미신을 믿고 있었기 때
양이란 마을은 우리 선교부의 데이비드
예수마을이다. 이 마을의 5,60가구 중 두
수마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험한 길을 뚫고 오래양에
담교회에 1회 등 모두 네번에 걸쳐 부농족
알파벳을 사용하여 만든 부농어 찬송가를
무 가지를 두껍게 엮어서 오두막을 짓는
그맣게 만들어서 눈병이 많았다. 지금은
큰 부스라 동네에는 500명이 모이는 교
임목사는 친틴이다. 또 300명이 모이는
교회 담임목사는 얀트롤이다. 놀랍게도
고자하면 무엇이든 이루실 것이다!
몬둘끼리 주 북쪽은 라타나끼리로 재라이
도 세 번에 걸쳐 진료를 나가서 크랙 맬로
경번역 선교회(Wycliff)에서 현재 재라이
주택은 거의 개량된 나무 집이다. 캄보디
루속히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그분의
모아 기도한다.

수민족을 위한 선교


그중
는매
구는
가큰
은베
땅에

같은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달라

때문에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그 중의 오래
에버렛이 자주 방문 사역하는 곳으로 일명

두 가구만 빼고 전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

에 1회 이동진료를 나갔다. 부스라에 2회, 다
족을 위한 이동 진료를 했다. 이들은 베트남
를 쓰고 있었다. 이들의 전통 가옥은 종려나
는 것인데, 추위를 막기 위해 문이나 창을 조
은 거의 모두가 개량된 가옥에서 산다. 가장
교회(Vihear Nom Paug Chi Vet)가 있고 담
는 교회(Vihear Lumper)가 가까이 있는데 그
온 마을이 다 교인인 셈이다. 주께서 하시

이 족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라타나끼리에
로우 OMF 선교사의 교회개척을 도왔다. 성
이 어로 성경번역을 하고 있다. 그들의 현재
디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들이 하
사랑과 은택을 누리는 캄보디아이길 두 손

제 4부 땅 끝까지 | 167

“오직 성령이 너희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

사마리아와 땅 끝
내 증인이
(사도행전

168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끝까지 이르러

되리라.”
1장 8절)

새로운14장 후기

지나온 캄보디아의 14년!
쏜살처럼 흘러간 세월은 모두 하
아니고서는 어느 것 한 가지도 이룰
다. 앞만 보고 달려온 14년 사역을
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은 사뭇
캄보디아로 들어갈 때 나의 계획
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을 향한 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치료 사역이
디아의 빈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년부터 치과대학(IU)에서 가르치는
감당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의 젊은
거웠다. 병원과 학교사역 그리고 이
진료를 다니면서 학생들과 캄보디아
고 심어줄 수 있어서 큰 보람이고 기
선교현장에서 재정에 어려움을
해 유료 치과 병원을 운영함으로써
을 더 풍성히 다닐 수 있었다. 하나
않은 놀라운 선물이었다. 그리고 모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인이 된 현지

운 태동을 꿈꾸며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룰 수 없었던 순간들이고 사역들이었
을 마무리하면서 돌이켜보니 나의 계획
뭇 달랐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획은 국립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이었다. 칫솔도 없고 치아도 없는 캄보
는 복된 14년이었다. 감사하게도 2009
는 사역도 함께 열어주셔서 기쁨으로
은이들과 함께 하는 사역은 너무나 즐
이동 진료 사역은 힘이 들었지만, 이동
디아 주민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
기쁨이었다.
겪던 차에 비즈니스 선교(BAM)를 통
써 재정에 큰 힘을 얻고 이동 진료 사역
나님이 우리 사역에 베풀어주신 예기치
모든 사역을 마치고 떠나오면서 내가
사역 파트너 닥터 마까라에게 현지 치

제 4부 땅 끝까지 | 169

과 병원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
지금도 닥터 마까라가 운영하는 그 병
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제는 그들도 자신이 번 돈으로 병
이동 진료 사역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 오직 주께서 닥터 마까라에게 불같
당하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를 잘
우심으로 더욱 번창할 수 있기를 기도한
를 믿는 믿음 때문에 혼기를 놓치고 시
간절히 기도한다. 믿음이 좋은 신랑감
행복한 가정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을 치과대학생들에게 열심히 뿌렸지만
진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줄기가 자
를 간절히 기도한다.

2017년 12월 17일 캄보디아 사역을

17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였다.
병원이 잘 되고 있으니 얼마나 감격

병원이 없는 오지의 민족들을 위해
다.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역이
같은 믿음을 주셔서 이 사역을 잘 감
잘하는 랭찬행의 쌀가게가 주의 도
한다. 불교국가에서 오직 그리스도
시집을 가지 못한 네 처녀들을 위해
감들을 그들에게 보내주셔서 그들이
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동안 복음
만 열매는 매우 적었다. 하지만 뿌려
자라 튼실한 열매를 맺는 날이 오기

마치고 캄보디아로부터 미국의 집

으로 귀국했다. 내가 떠나던 날 마
장내를 숙연케 했다. 내게는 놀랍고
닥터 마까라 고백은 나를 울컥하게

간증 “마지막 송별식장에

내 이름은 닥터 마까라입니다. 내
의대 졸업반 학생이었습니다. 나의
터 쏙하 미어스의 소개로 졸업하기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독실한 불교집안 출신입니다
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은
경을 처음 겪었기 때문입니다. 직원
르고 성경책을 읽고 하나님에 대해
은 매일 아침 반복되었습니다. 나의
고 학비를 버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기 전까지 받았습니다. 졸업 후에는
했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멀리
니다. 난 닥터 조와 그의 팀원들이
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
진료 사역에 많은 시간과 돈을 할애
가 어려웠습니다.

난 가끔씩 닥터 조가 왜 아름다운

마지막 파티에서 닥터 마까라의 간증은
고도 큰 감동이었다. 지금도 사랑하는

게 만든다.

에서의 마까라의 간증”

내가 처음 닥터 조를 만났을 때는 국립
의 절친한 친구요 클래스 메이트였던 닥
기 5개월 전에 닥터 조를 만나 함께 일

다. 일을 시작하는 첫날부터 먼저 찬송
은 대단히 이상해 보였습니다. 이런 광
원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노래를 부
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활동
의 목적은 닥터 조로부터 의술을 배우
는 파트타임 일을 하며 75불씩 졸업하
는 풀타임 치과의사로 일을 하기 시작
리 시골까지 이동 진료를 따라 나갔습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열정
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이동
애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해하기

운 미국의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가

제 4부 땅 끝까지 | 171

난한 나라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그렇
게 힘들게 고생하는지 이
해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했
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것
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나
도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 닥터 마까라
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난 자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나
서 나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며 잘
에게 함께 일하자고 권면도 했기 때문
들렸습니다. 왜 그런 좋은 제안을 선뜻
이 길을 가야하는지는 훗날 깨달았습
아를 향한 숨은 열정과 순수한 사랑 때
수를 받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돕
사람 돕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난 함께 일하면서 그의 분명하고 단
는 혼자 있을 때면 후일 나도 그처럼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때로는 호
을 동동 구르면서 큰소리로 야단을 치
큰 사랑과 잘 하라고 하는 염려에서 나
습니다.

2007년! 마침내 나는 그동안의 그의

17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라 가족

자주 내가 왜 이런 힘든 일을 해야
나의 동기들은 유명한 치과 병원에
잘 나가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나
문입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흔
뜻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왜 내가
습니다. 그것은 닥터 조의 캄보디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보
돕는데 캄보디아인인 내가 내 나라
는 것입니다.

단호한 지도력을 보았습니다. 나
훌륭한 지도력을 가질 수 있을까
호되게 책망을 하고, 때로는 두 발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

그의 가르침과 전도를 받아 믿음이

생겨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
친구들과 나의 가족 친척들은 더 많
될 수 있는데 왜 가난한 선교기관에
느냐고 못마땅해 합니다. 그러나 이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닥터
는 부자가 되었을지 몰라도 복음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성경구절 한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제
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닥터 조와 그 가족에
다. 우리는 영원히 닥터 조와 그의
감사합니다. 마까라 올림

이 작은 책은 작년 2019년, 김경
지금은 Global Dental Alliance로
과물이다. “기억이 생생할 때 기록으
김 선배의 충고대로 캄보디아 의료
장으로 있는 김선웅 목사의 도움으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5월부터 8월
을 다녀왔다. 9월 1일에는 보름간에
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해를 넘겨
수 있었다.

으로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내
많은 돈을 다른 곳에서 받으면 부자가
에서 일을 하면서 멍청한 짓을 하고 있
이제 나를 부르신 주님 안에서 그분의

터 조를 나에게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나
도 모르고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못했을

한마디를 나누고 싶습니다.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
꾸겠느냐”(마태복음 16:26)는 예수님의

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
의 가족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경수 선배(한미치과 의료선교회 회원/
로 바뀜)의 조언을 듣고 실천에 옮긴 결

으로 남겨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료 회고록을 쓴다. 겨자씨성경연구원 원
으로 2019년 3월 초부터 회고록을 쓰기
8월 말까지 에티오피아 의료선교 사역
에 거쳐 출애굽의 땅 이집트 여행도 다

올 2020년 4월에야 드디어 탈고를 할

제 4부 땅 끝까지 | 173

오 내가 사랑했던 캄보디아!
나는 과거 14년 동안의 사역을 회고하
졌다. 선교지에서 함께 사역하며 울고
료팀 멤버들, 이동 진료를 하면서 만났
도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의료 선교를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어찌 내가 잊
께서 베푸신 은혜인 것을 고백하지 않
의료 선교 여정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

학교 교수들과 나누는 환송만찬

인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올 2020년
속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곳으로
지 기대가 된다. 모든 선교 사역의 주체
힘차게 고백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
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이제는 내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캄보디아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
회들의 마음이어야 하겠다. 나는 오늘

17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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