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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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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designcgs, 2020-09-13 19:22:48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_inside_web

보통 물을 거의 식수로 사용할 수 없
물탱크에 물을 담아 캄보디아 사람들
보디아의 물 공급을 위해 우물 파기 사
물을 파주었고 우물이 있는 동네 주민

의 헬퍼 스레이몸(Sreymom) 집을 방문
들게 물을 길어와 식수로 사용하고 있
파주었다. 변소도 없어서 수세식 화장
이 깨끗한 물을 마시며 청결한 환경 속
보았을 때의 보람은 참으로 컸다.

기에는 턱
파서는 지
래서 우리
서 두 곳의
공급했다.

몬둘끼리 부스라 전통의상

래아비히어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우리
달러를 들여서 우물을 파주었다. 모든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99

우물 사역은 미국 본 교회(오렌지힐 장

장학금 지급 사역
우리는 국립치과대학생 두 명
(분따와 삼보)에게 칠 년 동안 장
학금을 지급했다. 이 두 명의 학
생은 우리 치과 병원에서 먹고
자고 병원도 도우면서 학교에 다
녔다.
그 외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도 닥
장학금을 지급했다. 국립의대를 다니는
한 명, IU 의대 한 명, 그리고 UP 치대
급했다. 사실 이 장학제도는 메디컬 의
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귀한 사역이었
회 선교팀을 이끌고 캄보디아에 오셔서

봉톰의
봉톰은
청소부로
영접한 후
도했다. 그
있었다. 그
로 자랑스
구전 전도에 탁월한 봉톰의 전도 장면 의 경험을

10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장로교회)의 후원이었다.

닥터 이동우 집사의 캄보디아 선교 진료

는 한 명을 2년간 도왔고, IU 치대
대 한 명에게 4년 동안 장학금을 지
의사 이동우 집사(인랜드 한인교회)
었다. 이 집사는 세 번이나 인랜드교
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의 전도사역
은 30대 후반의 독신으로 치과 병원
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을
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

그녀에게는 특별한 전도의 은사가
그녀는 예수님과 결혼했다고 스스
스럽게 여기면서 가난한 환경 출신
을 살려 특별히 극빈자들에게 가까

이 다가갔다. 그녀가 말로 직접 전
주었다. 후에 봉톰은 구전 전도회의
도로 전도에 남다른 은사를 가진 자

아내 티나 선교사의 아름다운
특별히 아내 티나(영자) 선교사
캄보디아인을 향한 마음은 매우 헌
적이었다. 무슨 일을 만나든 그녀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산
한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또한 선천
으로 밝고 쾌활하여서 현지 직원들
훈련하고 격려하는 사역에 탁월했다
냐를 훈련하고 교육해서 그녀를 병
이동진료 사역에서도 원활하게 돌
접대하고 직원들의 음식을 챙기며
역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
는 언젠가는 떠나지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이는 사역을
에 최선을 다하였다.
캄보디아 민족을 향한 아내 티나
리스길라와 베베 집사 같은 모습이
회를 세우고 도우며 우물을 필요로
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꿈나무들에
육하고 병원에서는 함께 동역함으로

전하는 복음은 그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의 초청강사로 부름을 받고 간증할 정
자매였다.

동역과 헌신

사의

헌신

녀는

산적

천적 비록 우리가 불완전 할지라도 깨진 항아리와
들을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다. 병원 리셉션니스트로 일하던 라차

병원 매니저로 봉사하게 하기도 했다.

돌아갈 수 있도록 돌아보며 선교사들을

현지 사람들을 환대하였다. 티나는 사

사하라고 직원들에게 격려하였고 “우리

이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이며

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맡겨진 일

나 선교사의 동역과 헌신은 바울에게 브
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캄보디아에 교
로 하는 곳에는 우물을 파주고 돈이 없
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며 집에서는 양
로 캄보디아에 복음의 불을 지폈다.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01

“내 형제들
너희가 여러 가지 시

온전히 기쁘게
이는 너희 믿음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인내를 온전히
이는 너희로 온전하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야고보서 1장

10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들아
시험을 당하거든
게 여기라
음의 시련이
줄 너희가 앎이라
히 이루라
하고 구비하여
게 하려 함이라.”
장 2-4절)

9장 치과대학

사립대학(International Unive
칼럼 드와떼 선교사(치과대학 설
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초
경지역에 있던 태국 난민 수용소에
그분이 뉴질랜드 원투원(One 2 On
수용소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1993
로 이주하여, 빈민치료 의료사역과
교도소 사역도 병행했다. 지금도 빈
진행되고 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교사는 IU총장의 권유로 IU 대학 안
과대학 설립에 대한 요청을 의뢰받
안에 치과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래 일하셨다.
어느 날 칼럼 드와떼 박사가 나를
왔다. 캄보디아 치과 의료선교회 회
레이(Serey)로부터 나에 대한 소식
던 것이다. 그분은 내게 IU대학에서
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는

학에서 가르치기

ersity)
설립자)를 만난 것이 내게는 선교 소망
초기 캄보디아 내전 당시 캄보디아 접
에서 피난민 치료사역을 했다. 그런데
ne)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난민
3년 파리 평화협정 이후에는 프놈펜으
과 함께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빈민치료사역과 교도소 사역은 활발히
이 흘러 2006년 당시에 칼럼 드와떼 선
안에 치
받고 IU
으로도 오

를 찾아 IU 치과대학 드와떼 학장
회장 써
식을 들었
서 강의
2007년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03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나
고 인도하셨구나!”하는 감사와 기쁨으
대학에서 가르치기를 나는 얼마나 열망
급 기술과 정보를 어떻게든 낙후된 캄보
이 이제야 현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즉
치료학(신경치료) 한 과목을 가르치기
섯 명이었지만, 정말 재미 있고 보람을
학은 당시 캄보디아에서 가장 뒤떨어져

일 년간 안식년(2008년 1-12월)으
도 나는 대학에서 사용할 학습 자료들
가주대학(USC)을 방문하여 그 학교
과장교수께 부탁해서 가져와 사용했
(Undergraduate) 근관치료과 담당 교
Berdan)를 만났다. 나는 캄보디아 치대
야라 교수에게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
보고 적극 도와주었다. 언제든지 필요
다. 최근 2019년 4월 남가주 치과대학
월 치과사역(2019년 6-8월)을 위한 국
의 업데이트를 부탁했는데 두시간이 넘
주고 만나줄 정도로 멋진 베르단 박사였

에디오피아 명성병원 사역
에디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
을 가진 최고 수준의 병원이었다. 나는

10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나는 그때 “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
으로 가슴이 벅찼다. 캄보디아 치과
망했던가! 미국에서 배우고 익힌 고

보디아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던 꿈
즉시 환영하고 수락했다. 우선 근관
기 시작했다. 제 1회 학생 수는 열다
을 느낀 복된 시간이었다. 근관치료
져 있었다.
으로 미국에 돌아와서 쉬는 동안에
들을 부지런히 준비했다. 모교인 남

실습 매뉴얼을 당시 근관치료학
했다. 다음 안식월 때는 USC 치대
교수인 야라 베르단 박사(Dr. Yaara

대 근관치료 교육의 열악한 환경을
청했다. 그녀는 나의 사역을 귀하게
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도 건네주었
학(USC) 방문 때도 에디오피아 3개
국립치과대학 신경치료 강좌 자료들

넘도록 나를 위해 자료들을 복사해
사였다.

위치한 명성병원은 부속 의과대학
는 그 병원에서 다섯명의 현지인 치

과 의사들을 3개월동안 교육시켰다
경치료, 아말감, 보철 등)에 관한 기
의과대학 도서관에서 열심히 도서
성병원은 한국의 김삼환 목사(전 서
방문했을 때, 한국전에 참전한 에디
든 그들을 돕고 싶은 나머지 그 나라
립한 선교 교육병원이다.

학생들과의 교류
나는 안식년을 마치고 2009년 1
때 IU 치과대학의 현실은 치주과목
치료 과목을 가르치면서 잇몸치료도
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성경도 함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학생 한 사람
정 성경공부에 참석했는데 아마도 선
다. 그 후 5,6명이 꾸준히 참석해서

신경치료 전문의 과정
시간이 흘러갈수록 치과대학(IU
근관치료학(신경치료)이 매우 약한
섭 끝에 오스트레일리아 근관 치료
Abbott)과 뉴질랜드 치대 근관 치료
여 세 분의 과장 교수와 두 분의 평
근관 치료학 과정의 책임교수는 닥

다. 내가 가르친 내용들은 치과 전반(신
기본 교육이었다. 아내 티나 선교사는

분류 작업을 도와주었다. 원래 이 명
서울 명성교회 담임)께서 아프리카를
디오피아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어떻게
라의 수상과 대화한 결과 2004년에 설

1월, 다시 캄보디아 IU로 귀임했다. 그
목(잇몸치료)도 굉장히 부실해서 신경
도 병행해서 가르쳐야 했다. 나는 학생
가르쳤다. 학교 내에서는 전도를 할 수
람을 제외하고는 14명 모두가 첫 시간 가
선생에 대한 예우차원의 배려였던 것 같
성경을 개인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U) 학장 칼럼 드와떼 박사는 캄보디아
한 걸 알고 고뇌했다. 그의 끈질긴 교
료학 과장 두 분(Steven Cohn, Paul
료학 과장 한 분(Peter Cathro)을 합하
평교수를 초빙할 수 있었다. IU대학에
닥터 캐트로(Cathro)였다. 그들은 남반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05

구에서 7시간의 비행

을 마다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윤번제로

근관치료의 고가 재료

와 도구들을 가지고 와

서 캄보디아에 신경치

료전문의 과정을 세우

고 가르쳤다. 스티븐 콘 교수

교수가 확보되었으니 학생모집을 해

으려 했으나 지원자가 없었다. 다급해

는 졸업생들을 설득했다. 나의 제자 세

람 그리고 내가 학생으로 지원해서 다

때 나는 가르치고 있던 교수였지만 전

료학은 캄보디아에서 인기가 없었다. 치

무면허 의사들이 싼 값에 적당히 치료

지 않았던 것이다. 국립대 출신 의사 한

힘들었는지 한 달 후에 그만두어 네 사

마침내 네 명의 학생으로 IU 대학 안

되었다.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

공부를 시작해서 75세에 끝을 냈으니

니고서는 불가능한 학업이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수고와 정성을 보

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료 전문의가 캄보디아에 탄생했다. 공부

106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수(오른쪽 두번째)와 함께 한 수업장면

해야했다. 우리는 7명의 학생을 뽑
해진 나머지 칼럼 드와떼 박사와 나
세 사람과 국립대 출신 의사 한 사
다섯 명이 학생으로 모집되었다. 그
전문의는 아니었다. 그 당시 근관치

치료비가 낮아 수익성이 떨어졌다.
료를 해주었으므로 거의 타산이 맞
한 사람은 생각보다 전문의 과정이
사람의 학생들이 공부하게 되었다.
안에 신경치료 전문의 과정이 개설
해내고 뿌듯했었다. 내 나이 72세에

말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

보고 매우 감동받았고 또한 많은 혜
후(2017년) 마침내 네 사람의 근관치

부를 마지막까지 마치는 과정 속에

서 나는 나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
주셔서 무사히 어려운 과정을 통과

나는 개인적으로 3년간 신경치료
배웠다. 뽑아야 될 것을 뽑지 않고
들에게 베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으로 2019년 6월부터 8월까지 에티
르치기도 했다(14장 참조).

IU대학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학
학) 분야가 열악하고 틀니분야도 매
래서 2018년까지 나는 캄보디아 IU
주학, 틀니)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수하고 올라오면 상급반 학생들
치과의사가 반드시 알아야할 항목

3년간 신경치료 전문의 과정을 마친 네명의 학생들
스티븐 콘 교수, 쏨비챗 학장)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께서 힘을
과할 수 있었다.

료 전문의 과정을 마치면서 많은 것을
원치를 살려서 치료하는 시술을 환자
치아에 대한 신경치료 교육의 연장선
티오피아 국립 치과대학과 병원에서 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치주학(잇몸치료
매우 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IU에 있는 동안 세 과목(신경치료, 치
가르쳤다. 아래 학년에서 기초과목을
들은 모두 내가 맡았다. 나는 성심으로
목을 세밀하고 촘촘하게 학생들에게 가

들과 교수님들 (왼쪽 두 번째 부터 얀 마커스 교수,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07

르쳤다. 뿐만 아니라 나의 치과병원에
힐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2017
2018년도에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서
왔다. 그때는 아말감 충전 과목에 대한
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졸업
충전과목에 부정이 발각되어 학생들이

IU대학 학생들

사장과 환송영을 베풀어 주었다. 잊을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하게 베풀어주신

후담이지만, 성적 처리 과정에서 원
을 가하기도 했다. 학생들을 많이 떨어
라는 요구였는데 그때 무척 힘이 들었
든 상관하지 않고 원칙대로 60점이 안
가는 교실의 약 2/3가 떨어져서 그들이
록하고 수정하느라 나 역시 무척 혼이
컸다. 나는 그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서

108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에서 임상실습을 겸해서 실무를 익
7년 12월에 공식 은퇴 후에도 나는
서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 재 강의와 함께 다음 학년의 학
업반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아말감
이 5주에 걸친 재 강의를 들어야했

기 때문이다. 2018년 모
든 학기를 마치고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는 내
가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졸업반 6학년생들과 이
미 졸업한 학생들이 힘
을 합쳐서 성대한 환송
연을 베풀어 주었다. 또
한 학장과 교수들이 감
을 수 없는 순간이었고 만남이었다.
신 커다란 특권이었다.
원칙주의자인 나에게 학교 측이 압력
어뜨리지 말고 적당히 합격시켜 달
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
안되면 무조건 다 떨어뜨렸다. 언젠
이 재시험을 쳐야했고, 그 과정을 기
이 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보람은
서 치과의사가 갖추고 익혀야할 기

본 지식과 덕목들을 학생들에게 훈

국가고시 제도 도입
전에 캄보디아는 치대 신입생 선
이 있어 들어온 학생들도 있지만 적
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간의 실력
되는 학생들을 상급반으로 진급시키
한참 후에 영향력 있는 장관의 아
를 마치고 돌아와서 국립보건대학
학(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등)이
하자마자 모든 의과대학과 치과대
했다. 그때까지는 국가고시 없이 졸
던 것이다. 마침내 의치대 국가고시
법이지만 미국의 시험문제를 복사해
시험문제를 출제하도록 명령했
다. 국립치과대학 학생들은 국가
고시 제도에 반대하여 시험을 보
이콧하기도 했다. 그러나 IU에서
는 열심히 가르쳤다. 나는 미국에
서 학창시절에 이미 그 시험을 치
룬 경험이 있었기에 학장은 내 경
험을 믿고 학생들을 위한 필기시
험 준비 수업을 내게 권했다. 미
국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지 까

훈련했다.

선발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심했다. 실력
적당히 돈을 써서 들어온 학생들이 많았
력 편차가 컸다. 치대 공부할 실력이 안

키자니 대학도 고민이 컸다.
아들이 UCLA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
총장으로 부임했다. 모든 의료관계 대
이 보건대학 산하에 있었다. 그는 부임
대학에 면허 국가고시를 치르도록 명령
졸업 시험에 합격만하면 면허를 주었
시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그는 비록 불
해서 학교에 주면서 이 가운데서 필기

기말시험을 감독하는 조원제 교수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09

마득히 오래 전 일이지만 나는 흔쾌히
도왔다. 나도 국가고시 시험 문제를 그
지않게 땀을 흘려가며 공부해서 가르
물학 과장 김각균 교수가 오셔서 함께
익한 시간이었다.

국가고시는 차츰 정착되어 갔고 비로
되었다. 학생들 간의 실력 편차도 많이
시 자격시험 문제 중 약 200-300문제
하였다. 그중에서 문제를 출제하기 때
그리고 의치대 신입생은 보건복지부에
입시생들은 희망학교를 순위대로 써 내
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의치과
는 과정에서 부정입학이 많았었기 때문
할한 이후 부정 입학이 어려워짐에 따
로 들어오고 있다.

미생물학 교육
필리핀에서 아시아권 치과 칸퍼런스
떼 학장과 서울치대 미생물학과 과장
자리에서 드와떼 학장은 김 교수에게 캄
약성을 호소했고 고맙게도 김 박사가
방문해서 가르쳐 주게 되었다. 나중에
사님이셨고, 지금도 김 박사는 드와떼
미생물학을 가르치고 계신다.

11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학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학생들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학생 못
르쳤다. 이때 서울대학교 치대 미생
께 가르쳤다. 참으로 학생들에게 유

로소 실력 있는 학생들이 응시하게
이 해소되었다. 지금도 미국 국가고
제를 골라 내어 캄보디아어로 번역
때문에 시험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에서 선발하여 각 대학에 배치한다.
내서 성적 순위대로 대학을 진학하
과 대학들이 직접 학생들을 선발하
문이었다. 이제 보건복지부에서 관
따라 실력 있는 학생들이 정상적으

스가 열렸을 때다. 거기서 IU 드와
김각균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
캄보디아 미생물학 과목에 대한 취

가 겨울 방학(2012년) 2개월 동안에
에 알고 보니 김 박사의 아버지는 목
떼 학장이 계신 캄보디아 대학에서

치대에서 가르치던 십 년(2007년
로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많은 애정
시에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
다 사역의 열매는 적었으나 언젠가는
둬주시리라 믿는다. 그 열매 거둘 날
보디아를 떠났다. 눈물로 씨를 뿌리
단을 거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
었다(시 126:5-6).

치주학 교수를 양성하기 위한
닥터 셋 마나(Mana Sett)는 기
수 있고 실력도 좋아서 나는 그녀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임플란트 강의를 하
김(오스탬 구강 외과 임플란트 강사
생 하나를 미국에서 치주
학 교수로 양성하고 싶다
는 꿈을 얘기했다. 그는 마
침 자신의 동기인 UCLA
2년제 프로그램(UCLA의
DDS학사 자격)의 디렉터
라면서 그를 소개해 주겠
다고 했다.
나는 존 김으로부터 친 임플란

년 가을 - 2018년)을 돌아보면, 참으
정을 쏟고 열심히 살던 시간이었다. 동
하는 일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생각보

는 내가 뿌린 복음의 씨앗을 주께서 거
날을 소망하면서 나는 2018년 10월 캄
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의
신뢰함으로 나는 캄보디아를 떠날 수 있

미국 유학
기업가의 딸로 UCLA의 학비를 감당할

를 치주학 교수로 양성하고 싶은 꿈을
하기 위해 네 번이나 캄보디아에 온 존
사/ GDA에서 파송)에게 캄보디아 학

란트 강의를 하고 있는 닥터 존 김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11

구 스티브 리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서
특별히 캄보디아 학생 하나를 배려해서
학을 고려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였다
몇가지 자격을 갖추면 입학을 고려해보
제 프로그램은 시험 성적순으로 선발하
인 의사들이 합격하였다.

나는 즉시 셋 마나에게 UCLA 2년제
& II의 시험을 보도록 권면했다. 닥터
문하며 Part I & II 시험을 통과했지만
금 그녀는 아버지의 병간호 때문에 미국
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치주학 교
르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하기 때문이다.

닥터 조원제 교수와 IU 치과대학생들

11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서 내가 직접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서 UCLA 2년제 프로그램에 특별입
다. 그랬더니 회답이 오기를 그녀가
보겠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이 2년
하기 때문에 대다수는 우수한 인도

제 프로그램을 위한 토플과 Part I
터 셋 마나는 세번에 걸쳐 미국을 방
만, 토플시험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

국에 오지 못하고 치과의사로 일하
교수가 되어 캄보디아 학생들을 가
은 그녀의 꿈이자 나의 소망이기도

캄보디아 문화체험

캄보디아의 크메르어는 인도 북부에서
전해 내려온 산스크리트어에 그 기원을
둔다. 자음이 33개 모음이 35개로 복잡
하다. 쓰기도 어렵고 발음도 어렵다. T
발음 나는 것이 네 가지나 있다. 고등학
교를 졸업한 현지인도 어떤 단어는 고
개를 갸우뚱거리며 읽어낸다. 컴퓨터로
타이프하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모
붙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문자를 매우 귀
승들의 반대가 거세다. 이웃나라 태국은
고쳤는데 캄보디아는 아직도 옛날 형태
적으로 크메르어를 볼 때 나라의 발전을
캄보디아는 계층마다 다른 언어체계를
이 있고 일반 서민층이 쓰는 말이 따로
도 서민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
다. 성경은 승려들이 번역한 것이어서
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하루속
원한다.

험 ▶ 크메르 언어




T



모음이 자음 위에도 아래에도 그리고 옆에도

귀하게 여긴다. 특히 문자 개혁에 불교계 고
은 같은 언어라도 개량하여 타이프가 쉽도록
태를 고수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객관
을 위해 문자 개혁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사용한다. 승려계급이나 지식층이 쓰는 말
로 있다. 언어를 언어학교에서 열심히 배워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

고급 단어들로 쓰인 것이 많다. 성경이 서
속히 캄보디아에 문자 개혁이 일어나기를 기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13

"하나님 앞과 살아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

너는 말씀을 전
때를 얻든지 못 얻든

범사에 오래 참음과
경책하며 경계하며
(디모데후서 4장

11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아있는 자와
리스도 예수 앞에서
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전파하라
든지 항상 힘쓰라
과 가르침으로
며 권하라.”
장 1-2절)

10장 유료 치과

유료 치과병원 설립계획
이제부터는 어떻게 CRM의 비즈
의 산하사역으로 치과병원을 세우게
니까 나는 두 개의 치과 병원 사역
작한 빈민선교부의 계속된 치과 사
의 유료 치과 병원 사역은 비즈니스
로운 병원 사역이었다.
나는 2008년 일 년 간의 안식년을
년 1월에 귀임했다. 내가 안식년으로
에서 장소(빌딩)가 필요하다고 나가
침례선교병원은 뚤꼭으로 임시 이
임시로 뚤꼭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리 집에 보관했다. 나중에 라타나
겨 병원을 오픈했다. 그 당시 나는
750 달러나 되어 부담이 되었다. 빈
교부에서 비즈니스 밤미션(Busines
다(Enterprise International - CR
그때 밤미션(BAM)의 책임자는
병원(For Profit) 설립 계획을 세워

과병원 (For Profit)

즈니스 선교부(Business as Mission)
게 되었는지를 소회하고자 한다. 그러
역을 한 셈이다. 하나는 2005년부터 시
사역이고, 이제부터 소개하려는 2009년
스 선교부의 이윤을 내는(for profit) 새

을 미국에서 마치고 캄보디아에 2009
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 캄보디아 군
가라고 해서 우리 치과병원이 있는 남
이전 해야 했다. 그때 일부분의 장비는
, 나머지는 장소가 협소해서 대부분 우
나 플라자(Ratana Plaza)로 장비를 옮
뚤꼭 임시병원에 매월 치과 분담금이
빈민선교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선
ss as Mission)을 하라고 권면해 주었
RM에서는 밤미션을 이렇게 불렀다).
콜린 크라웰이었다. 그가 “유료 치과
워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5만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15

달러 펀드로 유료(For Profit(BAM)) 치
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기로 하고,
개와 X-ray 등을 갖춘 병원 설립계획
펀드에 대한 승인이 밤(BAM)으로부터
나섰다. 진료의자와 X-ray 기계는 캄
머지 유료 치과 병원에 필요한 재료들
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좋은 치과
야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는 200
개업할 수 있었다.

뚤꼭의 유료 치과 병원 사역
우리는 뚤꼭에 유료치과병원(BAM)
로잔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텐트 메이
한 것을 긍정적으로 도입한 것이었는데
사역은 내가 미국 치과 면허 소지자였
물론 힘든 점도 많았다. 새로운 치과 장
지에서 구입할 수 없어서 모두 미국에
기기에 있어 최첨단 장비는 미국제가 최
캄보디아로 장비와 재료들을 들여오느
유료 치과 병원의 주 고객은 한인 선
류층 사람들, 그리고 한인 비즈니스맨들
도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돈이 조금씩
38,000 달러도 갚을 수 있었다. 우리는
러만 썼던 것이다. 개업한지 5년 만에

116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치과 병원 설립계획을 세워 요청했
제대로 장비를 갖춘 치료 의자 두
획이었다. 마침내 요청한 5만 달러
터 떨어졌다. 그때부터 장비구입에
캄보디아 현지에서 구입했지만, 나
들은 모두 미국에서 사와야 했기 때
과 장비나 재료들은 미국의 것이어
09년 4월, 뚤꼭에 유료 치과 병원을

)을 개업해서 수입을 낼 수 있었다.
이킹(자비량) 사역을 호의적으로 평

데 상당히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였던 덕을 톡톡히 본 것이 사실이다.

장비와 기기와 재료들을 프놈펜 현
에서 공수해 와야 했다. 치과 장비와

최고였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에서
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선교사, OMF 선교사, 캄보디아 상
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
씩 벌리자 처음에 본부에서 빌렸던
는 그때 5만 달러 중에서 3만 8천 달

빚을 다 갚은 셈이다.

유료 치과 병원 초기에는 한인 선
카운트 해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보디아 치과 병원에 비해서 비싸도
실력을 갖춘 병원이었기에 주변의
원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진료
빈민 베트남 어린이들과 선교사들이
영하는 신학교의 신학생들이었다.

똔네바삭 강변의 선교병원 신축
임시로 있었던 뚤꼭의 빈민 치과
똔네바삭 강변으로 새롭게 자리를
을 주로 치료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선교부
라 해도 1달러라도 내게 했다. 그들
적인 목적에서였다. 그곳 사람들은
들의 노력 없이 선교사나 외부인에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다. 우리는
나쁜 습관을 고쳐주려고 애를 썼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인
그때 나는 IU 치과대학에서 학생
유료 치과 병원을 동시에 운영하다
씩은 이동진료 사역도 나가야해서
까라와 함께 시술하고 닥터 분타가
수 있었다. 유료 치과 병원은 IU 치

선교사들에게 진료비를 25퍼센트 디스
는 계산이 복잡해서 폐지했다. 다른 캄
도 손님이 많았다. 현대식 장비와 함께
평판이 좋았고 나중에는 유료 치과 병
료할 수 있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 데려온 환자들 그리고 선교사가 운

축 이전
과병원은 동남쪽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옮겼다. 여기서는 캄보디아 현지인들
의 치료비는 10퍼센트 정도만 본인이
사역 펀드에서 보조해주었다. 극빈자
들에게 자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
은 이미 도움 받는 것에 길들여져 자신
에게 의존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는
사역이나 치료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고 어떻게든 그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식전환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했다.
생들을 가르치면서 빈민 선교 병원과
다보니 너무 바쁘고 힘이 들었다. 가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닥터 마
가 조수로 도와주어서 그나마 숨을 쉴
치과대학의 학생들을 도와서 그들이 실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17

습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선
실습을 했다. 유료 치과 병원에서 임플
서 우리는 마까라를 미국으로 보내 임
그러나 그의 미국비자가 순조롭지 않았
가 모두 애를 태울 때 CRM 총재(Dr.
Sam Metcalf)가 재정보증을 해주었
다. 비자가 해결된 닥터 마까라는 우
수한 성적으로 임플란트 과정을 마
치고 돌아왔다. 나중에 GDA(Gloval
Dental Alliance)에서 파송한 존 김
(Ostem회사 임플란트 강사)이 네 번
이나 자비량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
여 우리 유료 치과 병원에서 임플란
트 기술을 강의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
를 갖고 캄보디아 환자들에게 양질의 의

시간이 흘러서 내가 2017년 12월에
귀국했다가, 다시 2018년 5월에 잠시
치과 병원에 한국인 환자들이 거의 떨
은 다 그대로인데 한국인 환자들은 모
자신이 사는 지역의 기관과 조직을 신
러나 한인들은 지역의 기관이나 조직보
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떠
나버렸다. 이런 문화적인 차이를 닥터
이 미안했다.

118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선교병원 치과에도 학생들이 와서
플란트 치료는 필수적이었다. 그래
임플란트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
았다. 그의 미국 비자 문제로 우리

CRM 총재 샘(Sam) 박사와 닥터 마까라

리는 최신식 임플란트 기술과 정보
의술을 베풀 수 있었다.
캄보디아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해 살펴보니 유료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미국 환자들
모두 병원을 옮긴 것이다. 미국인은
신뢰하고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그
보다는 한국 사람끼리 믿고 의존하
떠나자 그들도 몇 사람만 남고 다 떠
터 마까라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 많

캄보디아 기독 치과 의료선교회
나는 매월 캄보디아 기독 치과 의
서 Partial Denture & Full Dentu
년 정도 강의했다. 예원추 선교사와
도 맡게 되었다. 세 과목은 기존 의
배우지 못한 과목들이었다.
이 강의들은 캄보디아에서 제
Fellowship)에서 열렸다. 30분 동
목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고 그 후 한
다. 탕 목사님이 많이 바쁘신데도
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
는 믿지 않은 의사들도 적극 초대했
을 맡았다. 회장인 닥터 써레이(Dr
인은 IU 대학에서 내가 가르친 제자
강의는 한 시간 정도 진행하고 나
에서 가져간 치과 재료들이 많은
날 캄보디아 기독치과 의료선교회
었다. 그때는 닥터 마까라(Dr. Mak
요청에 따라 이동진료 사역을 진행
행해서 매우 효과적인 사역과 진료
(Dr. Serey)가 10년간이나 기독치과
을 잘 수행했다. 내가 귀국할 즈음
색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가르친
녀를 두고 있다.

회와의 협력사역
의료선교회 모임에 나갔다. 나는 거기
ure와 근관치료학, 두 강좌를 개설해 2
와 천천추 선교사의 주선으로 보수교육
의사들이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제대로

제일 큰 뉴라이프 교회(New Life
동안 탕백홍(Taing Vek Huong) 담임

한 시간 정도 강의를 진행하는 형식이
불구하고 시간을 냈던 것은 치과의사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임에
했는데 내 강의는 닥터 천천추가 통역
r. Serey)는 이 교회 집사였고 그의 부
자였다.
나머지 시간은 실습을 병행했다. 미국
도움을 주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 훗
회 주최로 이동진료 사역도 나갈 수 있
akara)가 이동장비들을 가지고 그들의
행했다. 그때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동
료를 할 수 있었다. 신실한 닥터 써레이
치과선교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사역
음에는 세대교체를 계획하고 후임을 물
크리스천 치과의사와 결혼하여 두 자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19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
자유가 있느

(고린도후서 3

120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영이 계신 곳에는
느니라.”
3장 17절)

11장 치과대

집에서 시작한 대학생 성경공부
새로 생긴 IU대학의 1회 치과대
나의 선교 역점은 ‘학생들에게 성경
에서는 엄격히 성경공부가 금지되어
집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놈펜에 CCC 캄보디아 본부가 있었
외과의 김현태 의사 한 분이 계셨다
서 경험이 많은 그 분께 복음제시를
진 두 사람과 함께 4영리를 가지고
한 사람(Leng Ravuth)이 4영리를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서 그러한 고
우 고무적인 환경 속에서 치과대학
내가 집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나는 ICF에서 만난 짐 스튜어트(Ji
학교 졸업)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해 주었다. 그런데 스튜어트 선교사
아 말로 통역(그때 통역은 영어를 좀
이 되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병원의

대학생(IU) 선교


대학생은 열다섯 명이었다. 대학에서의
경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내

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해도 직접
고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 프
었는데 그 곳 CCC에 소속된 한인 일반
다. 우리는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를 부탁했다. 그는 캄보디아 CCC 스텝
고 와서 복음을 제시했다. 그 자리에서
를 통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영접했다.
고백은 결코 쉽지가 않아서 우리는 매
학의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을 가르치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았다.
im Steward) 선교사(웨스트민스터 신
는 쾌히 오셔서 가정 성경공부를 인도
사의 영어 성경공부가 제대로 캄보디
좀 잘하는 학생이 통역을 맡고 있었다)
의 원목이신 남침례교 소속 싸칼 선교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21

사(DTS 신학교 졸업)께 부탁했다. 스
17절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을 전했는데 그때 춤챈다(Chum Chen
로 영접했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
에게 임하셔서 세속의 모든 사슬로부터
로 첸다의 신앙은 무럭무럭 자라서 많
섬기고 있다.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층에도
뀜)가 왔다.

그들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먹고
려졌다. 학교에서 거리가 멀다는 핑계
않았다. 과거에 그들의 형편이 어려울
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짐 스튜어트 선교사(뒷줄 가운데)와 춤챈다(아랫줄 왼쪽

122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스튜어드 선교사는 고린도후서 3장
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씀
nda)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
이었다. 성령의 강력한 도전이 첸다
터 그를 자유케 했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열매를 맺고, 지금도 교회를 잘
도 변화(빈민층에서 중산층으로 바

살만해지자 성경공부에 관심이 흐
계로 집으로 초대해도 잘 참석하지
울 때는 같이 식사하고 공부하는 것
. 처음에 6,7명이 참석했었지만 차

쪽 두번째)

츰 줄어 나중에는 한두 명만 나왔다
같았다. 그때 통역으로 수고해준 형
로 그는 성경공부도 참석하고 통역
사아누꾸 빌에서 치과 병원을 개업

이반타딕의 카페 레스토랑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며 사역을
교사 닥터 이반 타딕(Ivan Tardic)
게 되었다. 우리는 아래 1층을 카페
을 만들었다. 새로운 분위기에서 학
율이 높아졌다.
그 당시 캄보디아장로교 신학교
교 옆 건물로 옮겨가자 그때부터 우

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캄장신) 조봉기 목사의 성

다. 그들도 내 체면을 고려해 와 준 것
형제는 닥터 쏘페악(Sopheak Nogr)으
역도 도와서 성실하게 봉사했다. 지금은
업해 있다.

을 하다가 독일 교회의 후원으로 기공선
)이 한 건물 전체를 세를 얻어 사용하
페식당으로 꾸미고 2층에 성경공부방
학생들을 다시 초청하자 학생의 참석

교(캄장신)의 조봉기 목사가 우리가 학
우리에게 오셔서 성경공부를 인도해 주

성경공부 인도

제 3부 캄보디아에서 | 123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데이브 에버렛 선교사

셨다. 조 목사는 직접 키보드를 연주하

다. 10-12명 정도의 학생을 꾸준히 가

그는 캄보디아 말을 매우 유창하게 구사

그때 카페식당은 풀타임 운영자가 필

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오신 맷 컬러프 선교사로

하여금 카페를 운영하게

했다. 그러나 맷 컬러프

가 운영하던 카페는 장

사도 잘 안되고 독일 교

회의 후원도 끊겨서 결국

이반 타딕이 시작했던 카

페는 문을 닫게 되었다. 삼뽀아에게 치

124 | 오 나의 사랑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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