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2월1일~2월6일 묵상과 해설
요한복음 6장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2월1일: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
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고전 1:17).
하나님의 보좌 앞에 바쳐진 구속 사역
의 진통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부르
신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분
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복음’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복음
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성화가 종국적인
목적인 듯이 강조하는 경향이 짙습니
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자
신의 구원이나 거룩의 체험을 말할지
는 몰라도, 성화 자체가 선포의 목적
인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높이도록
소임을 받았습니다(요 12:32 ).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저 ‘나를’ 성도로 만
들기 위해 구속의 수고를 감내하셨다
고 말하는 것은 구속의 영향력을 지나
치게 축소하는 것이고, 구속의 역사를
하찮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은 온 세상을 향한 것이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보
좌 앞에 고스란히 바치기 위해 구속의
진통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참여하는 복음선포
사역
우리가 구속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구속의 실제적인 파워를 증명
하는 예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
이 결코 궁극적인 구속의 끝이 아닙니
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이라면 우리가
구원과 성화를 위해 청하는 온갖 요청
으로 인해 진저리를 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우리 자
신의 축복을 위해서, 또 자신이 벗어
나고자 하는 여러가지 일들에 관련해
서 하나님을 몹시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실체
의 반석을 접하게 되면, 다시는 개인
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유일한 소망은 복음을 선포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상심, 환
멸, 고난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복음
에 대한 확고부동한 헌신 가운데 영화
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참여하는 것이 궁극적인 영화
입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구원(salvation)과 성화
(sanctification)를 설교하기 위한 것
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높이
기(lift-up) 위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과 성화를 설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예수님만을 높이
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목적일까요?
복음의 실체 =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
복음은 기쁜 소식(Good News)입
니다. 죄인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
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몸
소 기쁜 소식이 되신 것입니다. 죄에
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소망 되
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기
쁜 소식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경험하는 구원과 성
화를 증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구속으로 인한 구원과 성화의
근원과 자원이 되신 예수님 자신을 높
이며 증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
장에서 육신적인 자랑거리(할례, 율법
준수 등…)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
도의 삽자가”만이 자랑거리라고 말합
니다. 즉 바울의 모든 삶의 목적은
‘복음선포’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
음 자체이신 예수님이 기쁜소식이 되
기 위하여 꼭 증거해야 할 내용이 무
엇일까요? 즉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의
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통
과하는 죄 사함의 은혜(the grace of
forgiveness)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
를 들자면, 사형수가 있는데, 사형수
에게 굿뉴스는 “사형을 피할 길이 있
고, 사형뿐만이 아니라 감옥 생활에서
자유를 얻을 길이 있다”는 것이 굿뉴
스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형수가 “나
는 사형수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생명을 구해 줄 도움은 필요없다”라
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은 “감옥에
서 해방되거나, 사형에서 벗어나고 싶
지도 않고, 그냥 죽는 편이 좋다“라고
생각한다면 사형을 면할 길, 감옥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 굿뉴스가 되지 못합
니다.
또 한 가지 예로, 시한부 인생을 살
고 있는 암환자에게 굿뉴스는 암에서
치유받고 해방되는 길이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런데 만약 암환자가 자신은
단지 ‘감기’ 정도에 걸린 것이지 ‘죽을
병’에 걸린 것이 아니어서 좀 쉬고나
면 나을 병이라고 생각한다면, 암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 그에게는 굿뉴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의 은혜가 부어지는
근원이요, 생명의 물줄기 자체이심을
깨달은 사람이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
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주된 관심사와
주된 목적은 “복음선포”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높이는 선포”가 되어야 합니
다.
복음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 = 하나님
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은 10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10
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한 명만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
니다. 그 한 명의 고침받은 나병환자
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었습니
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구속을 말씀하기 시
작하자, 많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수많
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떠났다고 말
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
람,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너
희도 나를 떠나려느냐”)을 받고 믿음
으로 응답하기를, “영생의 말씀이 주
께 있사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이 영생의 근원되심을 경험한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험한 사람임을
증거하는 말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다
는 의미는 나 자신이 “영적 사형수”라
는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이
소망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
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은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셨습니까? 이 죄 사함의
은혜로 인하여 당신의 삶을 복음 자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
로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렸습니까? 그
렇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의 삶을 경험
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
한 증거입니다.
2월2일: 억누를 수 없는 소명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
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주님의 ‘제자’ 되는 조건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지
않는지 조심하십시오.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구원 받은 사실을 증거 할 특
별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선포에 대한 소명은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은
복음선포의 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선포의 소명을
억제할 때 자기에게 생기는 고통에 대
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
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구
도자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복음선포의
소명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습니다. 구
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기 때문
입니다.
“내게 오라 그리하면 내가 구원하리
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런데 우리 주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제
자의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우
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만 제자가 되는 일은 선택적이고 특별
한 소명입니다. “만약 아무든지…”(막
8:34).
주님의 ‘나팔수’ 되는 조건
바울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입장에서 한 것입니다. 종이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로 가
야 하는지에 대해 주인에게 물어볼 자
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
시게 하려고 우리를 떼어진 떡과 부어
진 포도주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행한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부름을 어깨 너머로 듣
게 되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고통이
시작됩니다. 모든 야망이 꺾이고 생의
온갖 욕구가 사라지며 일체의 전망이
닫혀 버립니다. 남는 것은 오직 복음
을 위하여 택정되었다는 사실뿐입니
다. 일단 부르심을 받은 자가 딴 길로
들어서려고 행동하면 화가 있을 것입
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로잡을 때
주의 손을 뿌리치게 하려는 경쟁자들
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구령에 참여해야 합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
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는
사람 = 구원받았으나 제자 되지 않은
성도들
챔버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
로 많은 사람이 쉽게 구원(중생)을 받
지만 모든 사람이 제자의 길로 나아가
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접했지만 제자의 길로 나아가지 못
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에 귀를 막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관리들 가운
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관
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왜 드러내
지 못했을까요? 성경은 말하기를, 바
리새인들을 두려워했고, 예수님 믿는
다는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
워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
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라
고 성경은 말합니다(요12:42-43).
하나님의 부르심에 왜 귀를 막고
있을까요? 바로 다름 아닌 사람의 영
광과 증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
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영광과 사람의 증거, 사람의 인정, 사
람의 칭찬, 사람의 존경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선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된 그리스
도인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가치를 이 땅에서 살면서 실현해
나가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화’가 미
칠 것이라는 진정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9:16).
이사야 선지자는 선지자로 부름 받
고 3년 동안 옷과 신발을 벗고 맨몸
으로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가 자신
이 벗고있는 모습처럼 앗시리아에 끌
려갈 것이라는 증거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사람의 영광
과 증거를 고려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깨 너머로 듣게
되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고통이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야망
이 꺾어지고 생의 온갖 바람들이 사라
지고 일체의 전망이 닫혀버린다는 것
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
여 선택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됨을 거부하는 이유 =
사도 바울이 말한 배설물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나를 사로잡으실 때 주님
의 손을 뿌리치게 하려는 경쟁의 대상
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챔버스는 충고
합니다. 현재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당신이 선택받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
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내미시는 부르심의 손길을 뿌리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일단 육신적으
로 성공하고 나서 그 부르심에 반응하
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내가 먼
저 이 땅에서 성공한 자라는 사람들의
영광과 증거를 받은 후에 주님의 부르
심에 나서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성공한
내용들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혈통, 교육, 사회적 지위, 도덕적
명성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
나 그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
같은 것으로 여기고 다 무가치한 것으
로 버렸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로막기 때
문이었습니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습
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무가치해서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한 것을 추구
하고 있다면 당신은 주님의 부르심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
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의 육신에
좋은 것들, 즉 돈, 명예, 지식, 권력
등은 배설물의 냄새가 나는 더러운 것
들이요 악한 냄새가 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육신의 자랑거리는
주님의 손을 뿌리치게 만드는 경쟁의
대상들입니다. 육신의 자랑거리를 추
구하면 주님께 순종하는 ‘종’의 자세
가 아니라 주님과 협상을 하려는 교만
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자꾸 주님
께 왜 그런 식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
냐고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주님의 종이 된
제자는 주인이 원하는 데로 행하게 됩
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종이 되면 우
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주인에게 물어볼 자유
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선택받은 주
님의 제자는 복음이 선포되는 일이라
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주님께 따지지 않고 그저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성도가 하
나님의 나팔수입니다. 하나님의 나팔
수가 되는 길은 고통과 핍박이 따릅니
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
러나 챔버스가 말한 대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주님께 물어볼 자유가 없는 주님의
‘종’입니다. 오로지 “복음을 위하여 택
정함을 입었다”(롬 1:1)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떼어진 떡과 부
어진 포도주같이 된 하나님의 일꾼들
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나팔
수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팔
수로 영혼구령에 참여하시지 않겠습니
까?
2월3일: 세상의 찌꺼기같이 된 삶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고전 4:13).
세상의 찌꺼기 같이 된 제자
이것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복음
의 시종들이라고 부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이 들어맞지 않는 것은 세상의 찌
꺼기 같이 되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는 말은 거룩의 증거가 아니고, “복
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는 증거입니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
지 말라”(벧전 4:12)고 베드로는 말했
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일들을 이
상히 여긴다면 겁쟁이라는 증거입니
다. 우리는 꺾이고 굽혀지지 않으려고
갖가지 방책과 핑계를 찾습니다. 사실
원한다면 당신은 겨우 턱걸이로 구원
받을 수도 있습니다. 즉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당신을 택정하지 않으실 수
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은 “나는 세상
의 찌꺼기같이 취급을 받더라도 복음
만 전파된다면 상관없다”는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구속적 실체의 기적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복음의 실체
를 위해 순교를 자원하는 자입니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비천함, 부도덕,
배신, 그리고 부정직과 같은 것들로
싸여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 아예
못본 척하며 외면하려 합니다. 그리고
낙심하며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
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
속적 실체는 기적을 낳습니다. 바로
지독하게 악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조차
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 수 있습니
다. 그들의 악함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을 바닥나게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택정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훌륭
하게 바꿔놓으실 수 있는지를 보이시
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짜
목적은 바로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
기”(갈 1:16) 위하여 자기를 구별했다
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묵상해설: “고린도전서 4:13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맞지 않는 이유는 세상
의 찌꺼기 같이 되지 않으려고 요리조
리 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특별히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
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것 = 세상의 찌꺼기처럼 되는 것
우리는 종종 “그런 특별한 일은 사
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가 우
리를 위해 갈꼬”라고 말씀하실 때 하
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어깨 너머로 들
은 이사야처럼 성도들도 주님의 부르
심을 늘 듣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부
르심에 반응하는가 아닌가입니다. 성
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
로 살아가는 목적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
입니다(고후 5:15).
성경은 예수님께 남은 고난이 있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사도 바울 자신
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합니다(골
1:24).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불
신영혼을 구원하시려 고난당하고 계십
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메섹에서 사
도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
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영혼
을 살리고, 성도들을 보호하시려고 핍
박당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핍박당하시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성도가 주님의 제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자로 살아가
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
에서 찌꺼기같이 될 수 있습니다. 왜
냐하면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살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
수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해서 따라 나
서겠다는 율법학자에게 말하기를 “여
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
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
이 없다”(마 8:20)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인
간적으로 볼 때, 세상의 찌꺼기처럼
된 상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
게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헛된 소망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
도 바울은 복음선포를 위하여 전 생애
를 주님께 드릴 때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고
백합니다(고전 4:13). 그런데 왜 우리
에게는 이 바울의 고백이 적당하지 않
을까요?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지 않으
려고 요리조리 피하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것 = 세상과 관계를 끊는 것
하나님은 최초에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
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빼
앗깁니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의 통치
자인 “세상 임금”으로 등극합니다.
이런 세상을 주님은 가만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
시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
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미 심판과 정죄를 받은 사
람”(요 3:18)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 따로 계산해 볼 필
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은 이미 정죄와 심판
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정해
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 세상
에서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세
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를 미
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러나 성도가 세상에 속해서 살면 세상
이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씀하
셨습니다.
왜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
리면서 살려고 부단히 헛된 것들(사도
바울이 말한 배설물)을 추구하며, 그
것이 성취되기 전까지 주님의 부르심
에 응답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사랑하
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열심히 사역한 동역자들 중에서도 “세
상을 사랑하여 자기의 길로 간 사람들
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찌꺼기가 되더라도 ‘예수 사
랑’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누리면서 ‘세상사랑’으로 인해 자기
길을 선택할 것인가?
2월4일: 나를 사로잡는 주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 5:14).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강권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정복당해
살면서 궂은일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바 되었다는 뜻
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는 대부분 자기의 경험에 얽매여 있습
니다. 바울을 붙잡아 맨 것은 오직 하
나님의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당신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
람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영이 자유
롭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
로 거듭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
엇을 해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기를 좋
아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런 간증은 영원
히 없어집니다. 그 대신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
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초보적인 증거를 벗어나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칭찬, 비난, 핍박, 또는
보상을 받을 때,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
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됩니
다.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의 힘으로
이끌리지 않은 자는 주를 위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열매 맺게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의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붙
잡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바울답
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에 대
해 구구한 평을 했을지 모르지만, 바
울 자신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와 그리스도
의 사랑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
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
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
의 능력에 대한 증표를 남깁니다. 결
코 당신의 개인적인 거룩에 관심을 끌
게 하지 않습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바
되었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
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삶 = 성령에
지배당하는 삶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이 강력하게 휘어잡는다고 말합니다
(고후 5:14).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였다”라는 의미는 “지배당하다”라
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삶을 살았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사도
바울을 복음 증거하는 일에 전혀 주저
함이 없게 만드는 강권하시는 능력이
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능력 있는 자
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사
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권하시는 주의 능력이 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
게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스도인은 성령의 외적 은사로만 일하
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
스도인은 ‘예수 사랑’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자유롭게 하나님께 자신
을 내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성령의 외적 은사를
받고 변질되거나 타락합니다. 바로 우
리의 영적 생명인 ‘예수 사랑’을 잃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예수 사랑’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사랑’을 버렸
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버렸
을 때, 하나님도 사울 왕을 버리셨습
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수년 동안 자
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모
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단지 다윗만 제외하고 말입니
다.
왜 사울 왕은 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면서도 하나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자신도
버림받은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바로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 경험에
매여 사는 삶”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
에 근거하여 “다윗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다“라는 자기 생
각에 빠져 하나님의 생각에 관심을 갖
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사랑’을 잃는 이유는 자기 경험
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을
의지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없이
자기 판단으로 움직입니다. 그럴 때
예수사랑을 더욱 더 잃어버리게 됩니
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마음 = 성령님
을 구하는 마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하기
를 좋아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
람은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행 1:8)
라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달은 사람입니
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성령
세례를 받고 능력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늘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하라, 찾으라, 두드
려라”(마 7:7; 눅 11:9)는 말씀을 자
기 경험에 매여서 해석한 사람은 하나
님께 강청하는 기도를 하려 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
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강청하면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연히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
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
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
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
시기 때문입니다(마 6:8).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를 하라고 하
신 목적과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
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
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
느냐 하시니라”(눅 11:13). 강청하는
기도 즉 열심 있는 기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응답을 얻을 수 있
다는 왜곡된 관점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무익한 기도입니다. “강청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지 육신
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기도 응답을 주
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기도를 주님께 드려도 하나
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하지 않으면 허
공을 치는 메아리와 같을 수 있습니
다. 많은 기도와 금식 자체에 크레딧
(credit)을 두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많은 기도와 오랜 기도를 드릴까요?
자기 필요를 채워달라는 어린 아기의
울부짖음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도 더
이상 어린 아기의 울부짖음 같은 자기
필요를 채워 달라는 ‘응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
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구하는 기도
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마음은 늘 성령 충만을 구합니
다.
2월5일: 당신은 제물이 될 수 있는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
니(빌 2:17).
산 제사로 바쳐진 삶
당신은 신실한 종들을 위해 봉사할
용의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믿음
과 사역을 위해 희생제물처럼 당신의
삶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직
제물이 될 수 없어. 하나님이 내 일을
지정해 주시는 것을 원치 않아. 내 희
생 장소는 나 스스로 찾을 거야. 나는
내 봉사를 인정해 주고 ‘잘했다’(마
25:21)라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사람
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영웅이 아닌 섬김의 종
당신은 비천에 처할 수 있습니까?
의연한 영웅주의의 기상으로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것과 하나님이 정해 주
신 남의 발등상 노릇을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당
신에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
고”(빌 4:12)라고 말할 수 있도록 가
르쳐 주시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길을 따를 수 있습니까? 당신의 봉사
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미미한 일일
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당신은
남을 위해 쓰임을 받고 닳아 없어질
수 있습니까? 남에게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일에 발 벗고 나
설 수 있습니까?
어떤 성도들은 궂은일을 할 줄 모
릅니다. 그래서 평생 지체 높은 거룩
한 성도로 남아있게 됩니다. 천한 일
은 그들의 위신과 체면을 손상시킨다
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도의 비천함을 본받는 것보다 더 존귀
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있겠습니까!
묵상해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
과 사역을 위하여 희생제물처럼 우리
의 삶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산 제사로 사는 성도 = 영웅의 주님
이 아닌 섬김의 주님을 아는 성도
“자기 사랑“이 처리되지 못하면 산
제사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도, 사람에
게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
으로 인한 영웅주의적 태도로 하나님
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을 남의 발등상 노릇을 하며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천지 차
이입니다. 산 제사가 되려면 ‘종의 자
세’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도 ‘섬김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립
보서는 그러한 예수님을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웅
으로 이 땅에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복종하신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기 위해서 어떠
한 비천한 환경도 거부하지 않으셨고,
어떠한 조롱의 상황도 거부하지 않으
셨기에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
를 구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
리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빌 4:12)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비천한 환경이나, 부요
한 환경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사
람들의 조롱 등, 어떠한 것도 그가 산
제물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의 장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사랑으
로 인해 영웅주의에 빠져있을 때, 우
리는 남들이 보지 않는 성령님이 감동
시키셔서 행하게 하는 미미한 작은 일
들을 행하지 못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인해 영웅주의에 빠
져있으면, 남의 발등상되고, 남의 종
되는 상황을 못 견딥니다. 왜냐하면
늘 고고하고 품위있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
오. 예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한 “양”
은 자신이 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
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미미한 작은 일
들을 행했고, 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크레딧을 주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산 제사로 사는 성도는
예수님이 영웅으로 이 땅에 사신 것이
아니라 섬김의 주님으로 사심을 알고
자신도 섬김의 종이 되려는 사람입니
다.
산 제사로 사는 성도 = 하나님의 기
준으로 섬김을 행하는 성도
창세기 4:4에서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씀합니
다. 자기 경험, 자기 지식, 자기 지혜
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
대로 제사를 드린 아벨과 아벨의 제물
을 주님은 열납하셨습니다. 가인은 수
확물(harvest)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의 기준이 아닌 자기 지식과 자기 생
각대로 제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
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
나님의 기준으로 예배드리지 않으니까
‘죄’가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슬그머니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앞
에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
봉사, 헌신, 헌금, 기도가 아니면 하나
님은 열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
에 보기 좋은 것들, 즉 눈에 보기 좋
은 사역, 헌신, 봉사 등은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난 자기 식의 것들이 너무
나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들은 자
기 부인되지 않은 것들이기에 온전한
영적 섬김이 아닙니다.
가인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
지만, 오로지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헌신을 드리는 것은 ‘의롭다는
증거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
고 사람의 눈에는 피를 뿌리는 어린
양의 피로 드리는 예배보다 눈에 보기
좋은 수확물로 드리는 가인의 예배가
더 눈에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
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인 육신
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서 나오는 세상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보시
기에 가증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봉사, 헌신한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
님의 기준-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가
없는 어떤 봉사와 헌신도 다 가인의
예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래서 하나님의 기준대로 예수 보혈을
의지해서 드리는 예배와 봉사만이 산
제사가 된 것들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입니다.
2월6일: 하나님의 불사름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딤후 4:6).
희생의 제단
내가 제물의 피로 부어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감상이 아닌 의지의 표
현입니다. 하나님께 당신이 부어질 준
비가 되었다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길을 택하시든지 불평이나 결과
를 놓고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개별적으로 위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거나 할 처지가 못 됩
니다.
외면적으로 보면 당신의 생활에 아
무런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
나 당신의 의지와 뜻에는 분명한 변화
가 일어납니다. 뜻을 굳히고 위기를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외부적인 문제
로 거리낌이 생기더라도 그 희생 대가
를 따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이 점에 있어 의지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밀려가면 결국 자
기 연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파괴의 제단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
지어다”(시 118:27). 제단은 불을 의
미합니다. 불로 태워 순화시키고 성별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즉 하나
님이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
하지 않은 것을 모조리 파괴하기 위함
입니다. 그런데 파괴하는 자는 당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제단
뿔에 희생물을 묶어 맬 뿐입니다.
불이 붙을 때 자기 연민에 빠져서
는 안 됩니다. 이렇게 태움을 당하고
나면 나를 누르거나 억압하는 것이 없
어집니다. 위기가 와도 그전처럼 당신
을 흔들지 못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불사름을 당했습니까? 하나
님께 당신이 제물로 바쳐질 준비가 되
었다고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께
약속한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
니다.
묵상해설: 산 제사로 주님께 부어질
준비가 된 사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증거는 왜 중요합니까?
산 제사로 준비된 성도 = “하나님의
뜻”만을 인생의 목적 삼은 성도
아브라함이 하루아침에 이삭을 드리
는 시험 가운데 자신을 산제사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
닙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위기를 통
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산제
사로 준비되어져 갔습니다. 아브라함
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도 아브
라함을 산제사로 받기를 원하셨던 것
이지, 이삭을 제물로 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성도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아
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줄로
믿고, 믿음으로 자기 자신과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서 산제사로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지
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
게 산 제사로 준비된 자의 증거는 “하
나님의 뜻”이 인생의 목적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아무런 변
화가 없을지라도, 달라진 것이 있는데
바로 ‘나 자신의 뜻(will)’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붙들린 바, 매여진 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8:27에서 말하는 나의
의지, 나의 목적, 나의 마음이 하나님
의 뜻(제단 뿔)에 매어졌을 때, 우리는
산제사로 부어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제단 뿔에 매인 제물은 불로 태워져
순화되고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매여 성령의 불로 태워져 거룩하게 구
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제사로
주님께 드려지고자 할 때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성령의 불로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
는 자아(self)가 태워져서, 부인되고,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하
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
나님의 방법대로 실현해 나가는 성령
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산제사로 준비된 성도 = 마음 안의
알곡과 가라지가 타작된 성도
희생제물이 불로 태움을 당하고 나
면 모든 육신적 모습이 사라집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마지막 때의
성도와 불신영혼을 비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심령 안의 가라지라는 어
둠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은 말씀인데 이 말씀이 심
겨지고 뿌리내려 자라는 것이 ‘마음
밭’이고 이 마음 밭에서 자라난 말씀
으로 ‘하나님 나라’가 나의 마음과 인
생에 충만해집니다(마 13장). 문제는
마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와서 가
라지(잡초)를 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에
마귀가 세상을 통해서 뿌리고 간 잡초
들(거짓된 가치관, 상처와 아픔의 감
정들, 뿌리 깊은 왜곡된 생각들 등…)
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마 3:11).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불태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히 12:29). 예
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도되기 전
에 마귀가 몰래 뿌리고 간 잡초같은
것들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치 성령의 능
력을 힘입어 악한 영을 몰아내면 하나
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라고 말
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성령
님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중에 있는
가라지를 몰아내주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뿌리고 간 가라지는
최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알곡이 자
라면서 잡초도 같이 자랍니다. 그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좋은 씨앗을 뿌리셨는데 언제부턴가
잡초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하는
종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
인이 말씀하기를 “원수가 몰래 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종들은 빨리 잡초를
뽑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잡초
를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
다. 왜냐하면 알곡마저 뽑힐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가 알곡과 가라
지가 정리되는 추수 때일까요?
챔버스는 “하나님은 당신이 개별적
으로 위기를 통과하게 하신다”라고 말
합니다. 이 위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심령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고
성령의 타작 마당에서 가라지가 불태
워져 처리됩니다. 이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챔버스는 조언
합니다. 이렇게 가라지가 불태움을 당
하고 나면 나를 누르거나 억압하는 것
이 사라집니다. 어떤 위기도 나를 흔
들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