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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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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idge Fellowship International, 2021-02-28 19:09:48

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예상하지 않는
때에 오십니다. 또 오셔도 논리적으로
연결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오십니다.

사역자가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고 없이 오시는 주님의
방문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봉사나 예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 때고 맞을 수 있는
생동하는 영적 실재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어린아이의
경이로운 자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관습적인 종교적 태도를 버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

를 하려면, 교회 다니는 것을 교양 정
도로 보는 관습적인 종교적 태도를 버
리고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유행으로 보는 세상의 풍조를
피해 주님께 시선을 모으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비실제적이고 환상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의 번뇌와 열띤

생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실 때, 준비된 자는 우
리들뿐일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마십
시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세상 땅을 밟은
지고의 성자라 할지라도 그를 무시하
십시오.

묵상해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들
의 봉사나 예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
도를 아무 때이고 맞을 수 있는 생동
하는 영적 실제이다”라는 의미는 무엇
입니까? 성도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
어야 할까요?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 =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필요
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
스도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제적
으로 싸워야 할 대상은 일(work)로
인한 분주함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교
리와 신조가 옳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을 만나고 있지 못하면 올바른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봉사와 예배를 열심히 하고
있더라도 늘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
어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챔
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하려면 교회 다니는 것을 교양 정도로
보는 관습적인 종교적 태도를 버리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곧 예수님을 만
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
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그런 사람을 소
개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시므온
은 어느 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태어난 지 8일밖에 되지
않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메시아를 만날 것

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
던 그는 태어난 지 8일밖에 안 된 예
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
다. 어떻게 태어난 지 8일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기를 보고서 그가 ‘그리
스도’이심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평생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약
속을 붙들고 (믿음 가운데서) 예수님
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
므온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예수님
이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것
입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 하는 사람 = 예
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

육신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 즉 나에게 행복
을 주는 분, 나에게 지혜를 주는 분,
나에게 능력을 주는 분, 나에게 기적
을 베푸는 분과 같은 육신적 관점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
수님이 설사 눈앞에 서 계셔도 예수님
을 만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이 태어날 곳을
헤롯 왕에게 물어봤을 때, 율법학자들
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해 주었지만,
그들은 동방박사와 함께 예수 그리스
도를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성경박사들이었지만 예수
님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
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미 선한 행위
로 의롭다 함을 입어 천국 가기에 합
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
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선한
행실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
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는 말
씀, 기사, 이적 등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만
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
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소

수의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를 ‘그리스도’
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주신 것
처럼 늘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우리
를 방문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조용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
리 삶 가운데 방문하셔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
십시오!

왜 우리는 늘 예수님을 만나려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까? 챔버스는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하는 때에는 좀
처럼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예상하지 않는 때 오십
니다. 오셔도 논리적으로 연결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십니다. 사역자가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고 없이 오시는 주님의 방문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라
고 말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 때고 맞을 수 있는 생동하는 영

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방문을 늘

준비하고 있으려는 마음을 혼란과 혼
동에 빠뜨리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
다. 챔버스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세상
땅을 밟은 지고의 성자라 할지라도 그
를 무시하라”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며,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 인생
에 계속되어야만 하는 소중한 사건이
기 때문입니다.

3월30일: 열린 마음 닫힌 마음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사 59:16)

중보와 예배
많은 사람이 기도를 중단하고, 하나

님에 대해서도 닫힌 마음을 가지게 되
는 이유는 기도를 감상적으로 보기 때
문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
기도가 유익하다고 늘 말합니다. 그래
서 기도를 해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영혼도 고양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사야는 하나님이 그런 식의 기도를 보
고 아주 놀라셨다고 시사하고 있습니
다.

예배와 중보는 함께 가야 합니다.
중보 없는 예배나 예배 없는 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중보란 우리가 기
도하는 이웃에 관해서, 그 사람이 그
리스도의 마음을 붙잡도록 우리가 더
욱 분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기도가 어떻

게 응답되는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인지를 알 수
가 없네요!”라고 하나님과 논쟁을 벌
이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이런 식의
논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
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경배
하지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찾지도 않
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굳어
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이 닫히게 될 것입니다.

중보와 연합
주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

님과 연합하려고 우리 자신을 더 분발
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
가 기도하는 자들에 관해서 그들이 주
님의 마음과 일치할 수 있도록 기도하
고 있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 속에서 사는지, 굳어진 마음과

독단적인 태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는 않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
니다.

중보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사59:16 상반절). 그럼 당신이 중보
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와 거룩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보는 노동입니다. 중보
의 사역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것도 온
힘을 쏟아야 할 중노동입니다. 중보에
는 함정이 없습니다. 복음의 설파에는
함정이 있지만, 중보기도에는 그런 것
이 없습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굳어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까지
도 마음이 닫혀지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와 가족을 위한
기도는 많지만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부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로 하는 기도 = 하나
님 생명이 자라는 길

챔버스는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자라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그의 책, 『간구』에서 “기도
는 자기 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고, 기도는 명상도 아
니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
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 기초는 사람
의 열심, 사람의 필요, 사람의 의지가
아닙니다. 기도의 토대는 구속이며 기
도생활의 구심점은 인격적인 성령님이
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과 마음을 드러
내 주십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 아버
지의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을 따라하
는 기도입니다. 영적으로 늘 깨어 있
는 사람은 에베소서 6:18의 말씀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기
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
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
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중보기도(간
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굳어져 있
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므로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기도
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이 알려집
니다.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면 성화되
어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챔버스는
“성화의 값은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축소하고 하나님께 대
한 관심을 최대로 확대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화는 하나님의 관점
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하나님 아
버지의 마음과 뜻이 부어지고 있지 않
다면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 여전히
상식적으로 자기 유익만을 위해 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로 하는 기도 = 성령
으로 하는 기도

우리는 어떤 경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
주하시는 성령님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롬 8:26) 만
약에 많은 기도를 마친 후에 한숨이
나오면서 염려, 걱정, 근심, 원망, 불
평, 후회, 저주가 나온다면 그것은 성
령으로 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한숨이 나옵니까? 바로 내 생각,
감정, 의지를 가지고 육체가 원하는
바를 주님께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성
령으로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기쁨과
평강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으로 하는
기도만이 근심, 걱정, 돈 사랑, 세상
사랑, 자기 사랑에 묶여있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왜 성도들이 기도합니까? 아이가 부
모에게 용돈 달라고 조르는 일처럼 아

버지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서 조르는 일이 기도입니까? 절대 그
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
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도는 무익
한 기도입니다. 성령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마음이 더 심해지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마음까지 더 심해집니다.

자기가 원하는 데로 떠났던 요나처
럼 행하는 불순종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십니
다. 내 뜻이 복종하는 것만 남아있습
니다. 복종하면 생명이 넘칩니다. 이
를 깨닫게 해 주는 성령 하나님을 통
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관심사를 알려
주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기도하여 하나
님의 관심사를 알게 된 성도는 중보하
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
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중보
자(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신

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사 59:16). 그
래서 하나님은 늘 중보자를 찾으십니
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사 6:8). 하나
님은 지금도 이사야처럼 “나를 보내소
서!”라고 반응하는 중보자를 찾고 계
십니다. 중보자의 길은 외롭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중보자들의
삶은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중보자에
게는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해집니다. 하나
님의 관심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증
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이외의
사람들, 사회, 민족, 열방을 위하여 중
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3월31일: 비판과 위선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
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
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
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요일 5:16)

남을 비판만 하는 영적 위선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영
적 위선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
을 보면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하지
않고 비판만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을 보게 되는 것
은 우리의 통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직접
꿰뚫어보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
리가 이 계시의 근원에 유념하지 않으
면, 비판은 잘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
시는 것은 잊게 됩니다.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

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
명을 주시리라”(16절). 당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고 시간을 쓰면 위선이 된
다는 것을 아십시오.

주님의 영혼의 진통이 있는 영적 중보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지워 주

신 가장 미묘한 짐은 다른 영혼을 볼
수 있는 안목의 부담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영혼들의 잘못이 우리의 눈에 띄
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
에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 그리스도
의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 중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중보하면,
하나님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
명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
을 모셔 들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
다. 그것은 우리가 중보 하는 사람들
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이 우
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

이 그런 영적 상태에서 깨어있어야 한
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서도
주님의 영혼의 진통을 보실 수 있으신
가요? 우리는 우리가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
면, 주님이 지금도 겪으시는 영혼의
진통을 우리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혈을 쏟아 중보하는 일을 배우도
록 합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중보자들로 인정해 주시고
크게 기뻐하시도록 합시다.

묵상해설: “당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
배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바로 잡으려
고 시간을 쓰면 위선이 된다는 것을
알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남
의 잘못이 보이는 것과 영적 분별력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남의 잘못에 대한 위선적 반응 = 비
판만 일삼는 판단과 정죄

남의 잘못을 보는 것은 나의 인간
적인 통찰력 때문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영적 책임을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따라서 남의 잘못이 보
이면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중보하
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형제가 죄를 지으면 찾아가서 권면하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
으면 두 세 사람이 같이 가서 권면하
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
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가 권면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15-17).

성도와 교회가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권면하는 것은 믿음의 형제를
얻는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남의 잘
못과 실수를 볼 때 먼저 해야 할 일
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잘못과
고질적인 실수가 있지는 않은가”라는

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챔버스가 지적한 대로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시간
을 쓰기 전에 하나님을 경배하듯 하나
님의 말씀을 경외하여 그 말씀을 나에
게 먼저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남을 정죄
하지 말라”(눅 6:37 마 7:1)라고 하십
니다. 이 말씀은 남의 잘못과 실수에
대하여 권면이나 충고할 필요가 없다
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자기 안의
잘못과 실수를 먼저 보라는 말씀입니
다.

그래서 주님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
이다”(눅 6:42)라고 하십니다.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지 않고 남의 잘못
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39). 믿음의 형제자매를 온전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주님 앞에서 온전하
게 되어야 합니다.

남의 잘못에 대한 영적 반응 = 영적
분별력을 가진 중보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안에서 예수님처럼 안타까
움을 가지고 죄에 빠진 형제와 자매들
을 위하여 중보함으로 인해 생기는 영
적 진통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4:19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해
산하는 수고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중보하며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에게 영적 분별력이
부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에 대하여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중보
했습니다. 바울은 이 영적 분별에 대

하여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
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
니하느니라”(고전 2:15)라고 말합니다.
육적인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신
령한 판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신
령한 판단은 비판이 아닙니다. 이 영
적 분별력을 가진 판단이 바로 영적
중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서
중보는 하지 않고 매일 사람들의 죄와
허물이 쉽게 눈에 보인다면 정말 하나
님의 영이 역사하는 지를 점검해 보아
야 합니다. 마귀의 영은 사람의 죄와
허물을 잘 보게 해줍니다. 마귀의 영
이 역사하면 거기에는 비판만 하는 판
단과 정죄가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면 사도 바
울이 고린도 교회에 했듯이 자녀에게
하듯이 권면합니다. 그리고 영적 분별
력으로 문제의 근원에 대하여 권면하
고 말씀에 근거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영적 중보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 사역
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위하여 중보

했고, 모세는 광야에서 반역하는 이스
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했고, 다니엘
은 조상과 자기 세대의 죄 까지 대신
회개하는 중보를 했습니다. 그들은 생
명을 살리는 중보 사역을 감당했습니
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의 진통
을 발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중보를 기억하시고 롯과
롯의 가정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모
세의 중보를 기억하시고 광야의 이스
라엘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또한 다니엘의 중보를 기억하시고 이
스라엘의 회복을 성취시켜 주셨습니
다.

챔버스가 “심혈을 쏟아 중보하는 일
을 배우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중보자들로 인정
해 주시고 크게 기뻐하시도록 합시
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의 진통을 품은 중보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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