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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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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Bridge Fellowship International, 2021-02-28 19:09:48

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3월23일~3월31일-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해설-2021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3월23일~3월31일 묵상과 해설

3월23일: 육체의 소욕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분쟁이 있으니(고전 3:3).

육체의 소욕
자연인 또는 불신자는 인간의 육적

소욕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육체의 소
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러한 대적 관계
는 우리가 중생할 때 시작되는데, 왜
냐하면 중생할 때 비로서 육적 본성이
무엇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육적 본성에 대한 자각이 생
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갈 5:16)라고 말했습니다. 즉
성령을 따르면 육체의 소욕이 사라져
간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다투기를
잘하고 사소한 일로 쉽게 신경을 곤두
세웁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럴 리가
없소!”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교인들이 있다고 단언하
고, 이를 육의 소욕과 관련짓고 있습
니다.

당신은 성경의 진리를 읽고 발끈
화를 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
신은 아직 육적이라는 증거입니다. 당
신의 삶 가운데 성화의 과정이 계속되
고 있다면 그런 정신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빛
성령님이 당신 안에 있는 잘못을

지적하시는 이유는 당신에게 그것을
당장 바로 잡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단지 당신에게 진
리의 빛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에 순응하기만 하
면 성령님이 당신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일단 빛이 들어오고 잘못이
인정되면 빛의 자녀로서 잘못을 고백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잘못을 다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자기변호를 하면, 스스로 어둠의 자식

임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럼 육체의 소욕이 없어진 표시가

무엇일까?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육체의 소욕이 가면 금방 알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를 당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당신이 그 기회를 어떻게 대하
고 있는지를 살펴보십니다. 이 테스트
는 실로 간단한 것입니다. 육체의 소
욕이 사라진 후 하나님이 당신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어 주셨는지를 깨달으
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경
험을 한 자가 되어 늘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해설: “당신은 성경의 진리를 읽
고 발끈 화를 낸 적이 있는가? 그렇다
면 당신은 아직 육적이라는 증거이다”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진리 = 육체의 소욕을 심판

“성령 충만하다”라는 의미는 원어적

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다”라는 것입
니다. 즉 성령의 지배를 온전히 받음
으로 인해서 육체의 소욕은 감소하고
성령의 소욕은 증가하게 됩니다. 육체
의 소욕은 시기, 다툼, 분쟁, 분열, 질
투, 원수 맺음, 우상숭배, 술 취함, 방
탕함과 같은 것들입니다(갈 5:16-21).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 지속적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
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 가차없이 난도
질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래
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가 성경
을 읽으면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왜
냐하면 자꾸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 책
망받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육체의 욕망을 거스려 살아
야 합니다. 육체의 욕망대로 살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영적 사망과 어둠에
지속적으로 빠져 드는 것입니다. 이러
한 영적 사망의 요소들로부터 회개하

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
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육체의 욕망대로 살아가기만 하는 사
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같이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고 까지 말했습니
다. 고린도전서 5:11에서 “신도라 하
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
배 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과는 함
께 먹지도 말라”라고 말합니다.

불신자가 아닌 성도라고 하는 사람
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심각한 죄를 심
각하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지속적으
로 육체의 욕망대로 살려고 할 때, 그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
니다. 그래야 그런 심각한 불의한 죄
에 빠진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
경의 진리는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것
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성령님의 역사 = 육체의 소욕을 거스
르는 진리의 영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성
령 충만한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반대되는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것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갈 때 성령의 아홉 가
지 열매도 맺어가게 됩니다(갈 5:22-
23).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삶의 모습이
확실한 데도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성
령님은 성도들 이 육체의 소욕 가운데
빠져갈 때, 분명히 책망하십니다.

챔버스는 “성령님이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실 때에는 당신이 잘못을 바르
게 고쳐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라
고 말씀합니다. 잘못을 지적 받았으면
내가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근본적으
로 나는 내 잘못을 고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고치려고 노력해도 고쳐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님의 책망은 성도에게 예수님의 빛을
받으라는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예수님
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의 세력이 물러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 가운데
비추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성령
님이 바로 잡아 주십니다.

성령님께 순종하여 잘못을 인정하면
육체의 소욕을 처리해 주십니다. 그래
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
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는 말씀은 성령을 따르면 육의
갈등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
스도인이라고 해도 육적 본성이 성령
의 소욕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다투기
를 잘하고 사소한 일로 쉽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습
니다.

우리는 육적 본성이 처리되지 못해
서 생기는 죄와 어둠을 성령님이 지적
하실 때 변명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 마음이 죄와 어둠을 시인해

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사라진 후
에 신기하고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내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3월24일: 자기 소멸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신랑의 친구가 되라
사람들에게 당신이 필수불가결한 존

재가 되면, 당신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벗어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역자
로서 당신은 신랑의 친구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섬기는 어떤 영혼이 예수님의 가르침
을 더 붙잡고 살려고 힘쓰고 있다면,
당신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올바
른 방향으로 쓰임 받아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손을 내밀어 그 사
람의 영혼이 겪어야 할 난관과 위기를
덜어주려고 나서는 식으로 막아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영혼을 예수 그
리스도로부터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을 만큼, 열 배나 더 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아마추어 하나님 노릇
을 하려 듭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남
의 일에 끼어들어 이런 저런 일은 “그
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하
나님을 방해합니다. 신랑의 친구가 되
기는커녕 남의 영혼을 놓고 우리의 값
싼 동정심을 내세우며 마치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주관하듯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언젠가 당신에
대해서 “그 사람은 도둑이었어. 주님
에 대한 나의 사랑과 비전을 앗아간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당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남의 영혼을 가지고 그릇되
게 기뻐하는 일을 삼가고 옳은 일에서
기쁨을 찾으십시오.

신랑의 음성을 기뻐하라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
했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
하여야 하리라”(요 3:29-30)라는 세례
요한의 이 말은 기쁨으로 한 것이지
섭섭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신랑을 보게 되지 않았습니
까! 이것이 세례요한의 기쁨이었습니
다. 이는 사역자의 철저한 자기 소멸
입니다. 요한은 이후로 남의 입에 다
시 오르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애에서 신랑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정신을 쏟으십시오. 어떠한 재
난과 실망과 건강의 악화가 올지라도,
사랑의 음성이 들릴 때는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전
에 먼저 삶을 난파시키는 예가 종종
있다는 것을 당신은 보아 왔을 것입니
다(마 10:34 참조).

묵상해설: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서 벗어난 사람이다”라는 의미는 무엇
인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사람 = 사람
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려는
사람

성도의 사역의 모델은 세례 요한입
니다.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로 자
신을 비유했습니다. 성도들의 사역도
신랑의 친구로서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
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마땅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챔버스는 만약 우리 자신이 사람들
에게 필수불가결한 사람이 되어서 그
들 삶에서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하
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다면 언젠가
는 그 영혼들에게 이렇게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도둑
이었어,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비
전을 빼앗아간 사람이야”라고 말입니
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
님을 따라가려고 자신을 떠나갈 때,
예수님을 원망하지도, 제자들을 원망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후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
는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님은 흥하여야 하고, 세례 요한 자신

은 쇠하여야 한다”라는 신랑의 친구된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쇠하고 있고, 예수님은 나를
통해서 흥하고 계신가?” “많은 사역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자기 종’으로 만
들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 순종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자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
문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예수님과 사람들 중
간에 서 있는 성령의 브릿지 역할만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아니라(쓸모
없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
나님께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함),
신부에게 신랑이 꼭 필요하듯 이 사람
들에게 신랑 되신 예수님만을 흥하게
해야 합니다. 챔버스가 말한 기준대로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
야 합니다.

첫째, 내가 봉사하는 어떤 사람의

영혼이 예수님의 교훈만을 붙잡고 예
수님께만 점점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둘째, 그 사람이 겪을 난관과 위기
를 덜어줄 마음으로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끼어들어 작은 하나
님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내가 봉사하는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겪는 난관과 위
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열 배나 강한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가? 아
니면 그러한 난관과 위기가 닥치지 않
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사람 = 사람들
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중매쟁이

무엇이 성공한 사역이요, 목회요,
신앙생활일까요?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
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
함이로다”(고후 11:2)라고 말하며 자

신의 소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스승으로, 아버지로 남게 해
드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 시대는 스승임을 자처하고, 영적
아버지요, 영적 어머니를 자처하는 시
대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제자들을 거
느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으
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셨
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한 분뿐이시
고, 우리 모두는 다 형제 자매라고 말
씀하셨습니다(마 23:7-8). 또한 사람
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
다. 즉 “000는 나의 영적 아버지입니
다”라는 식으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
다. 오로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마23:9).
또한 사람들에게 지도자라고 불리는
것도 좋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
지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3:10).

성도들은 지도자, 선생님, 부모를
존경하고 공경해야 하지만, 그러나 예
수님은 자기 스스로 그러한 존경과 공

경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보다 낮은 사람이 되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낮은 사람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에
서 중매쟁이로서만 역할을 감당하고,
모든 영광과 관심을 그리스도께만 향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삶의 성공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 요한이 소유했던
그 신랑을 소개하는 중매쟁이 친구로
서의 진정한 기쁨을 소유하기를 원합
니다. 챔버스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
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
는 세례 요한의 말은 진정한 기쁨으로
한 것이지 섭섭해서 한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실 수
만 있다면 내가 제자로 삼았던 사람들
이 다 예수님께로 가버려도 전혀 섭섭
해 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 역시 소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례 요한의 기
쁨을 소유한 성도야말로 하나님의 관
점에서는 온전히 성공한 사람일 것입
니다.

3월25일: 가장 힘든 사명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요 3:29).

주님께만 사람의 시선이 끌리게 하는


당신의 선함과 청렴 그 자체에 사
람의 시선이 끌리게 만들어서는 안 됩
니다. 그런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께 끌리게 하는 자석의 기능이 되어야
할 뿐입니다. 만일 나의 거룩이 남으
로 하여금 주님께 시선을 끌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어긋난 성결
입니다.

그런 거룩을 지닌 자는 ‘참으로 훌
륭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풍길 것입니
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랑의 참
벗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닌 내가 언
제나 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통로요 도구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만 나의 시선이 끌리게 하는 것
신랑에 대한 바른 우정과 충성을

유지하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심지
어 순종하는 일보다도 더욱 주님과 맺
는 우리의 도덕적이고 생명력 있는 관
계 수립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때
로는 순종할 일이 없을 때도 있습니
다. 할 일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의 생명력 있는 관계 유지인데, 그 어
느 것도 이것을 방해할 수 없도록 마
음을 굳게 하고 경계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때때로 순종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왔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내
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생애의
더 멋진 측면은 의식적인 순종의 계속
보다는 주님과의 참 관계를 유지하는
일, 즉 신랑의 친구가 되는 일입니다.
신자들의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
한 영혼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랑의 친구가 되기
는커녕 주님이 주신 무기를 가지고 주
를 대항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묵상해설: “선함과 청렴함 그 자체에
사람의 시선이 끌리게 해서는 안 된
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가장 힘든 사명 = 주님께만 사람의
시선이 끌리게 하는 것

우리가 만약 사람들에게 자기가 ‘참
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
며 존경하게 만들고 있다면 순서가 바
뀐 것이 아닌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챔버스는 나의 선함과 청렴의 가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끌리게 하는
자석의 기능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
니다. 만일 나의 선함과 청렴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시
선을 끌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순서가
어긋난 성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랑(예수님)의 참 친
구가 아닙니다.

자칫 내가 영광 받는 바리새인의
경건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흥하기(영광 받기) 때문

입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으
로 사역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광
야에서 철저하게 절제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임을 알았습니
다. 세례를 줄 때, 성령님이 임하시는
사람(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
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리고 거룩하고, 경건해 보이는 바리새
인들에게는 오히려 회개의 열매를 맺
으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는 거룩, 선
함, 청렴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사
람들이었습니다(요 5:44). 하나님의
영광인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는 사
람’은 언제나 자기 영광만을 구합니
다. 자기 선함만을 자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먹고 마시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귀신 들렸다’고 말하더니, 주님에 대
해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는 “음식을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마 11:18-19). 즉 세례요한이나 예수
님이나 바리새인의 관점에는 선함과
청렴이 결핍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
입니다. 바리새인의 주된 관심은 사람
의 선함과 청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의 선함과 청렴은 하나님의 영광과
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사명 = 주님께만 나의 시
선이 끌리게 하는 것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
님의 발을 씻길 때, 가룟 유다가 마리
아를 책망하며 “이 향유를 삼백 데나
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
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
12:5)라고 말했습니다. 입술로는, 말
로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사
랑하는 것 같았지만 가룟 유다가 그렇

게 말한 동기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 자루를 담당하
면서 실상 ‘도둑’이었기 때문이었습니
다(요 12:6).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선함과 청렴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
러나 마음의 동기가 진정으로 예수님
께만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향한 동기여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예수님께 시선이 끌린 마음의
동기여야만 변질되지 않은 구제와 봉
사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가난한 사
람들을 구제하면서도 마음은 돈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동기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
을 향한, 돈을 향한 마음의 동기에서
나온 구제와 긍휼 사역은 결국 하나님
의 영광을 가로채게 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는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
다면 신랑 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가로
채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

신의 선함과 청렴에 대해서 잘못 증거
되지 않도록,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
도께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어떤
다른 것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
록 경계해야 합니다.

챔버스는 주님이 주신 무기를 가지
고 주님을 대항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고 경고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하
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불신영혼을 구
원하라고 영적 무기를 주십니다. 그런
데 주님이 주신 영적 무기를 이용해
서,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이 아닌 ‘나’
에게로 향하게 하고 있다면 주님을 대
항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사람들
의 관심(인정과 칭찬)을 끌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을 몹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해 놓고도 자기 자신들
보다 더 지옥 갈 사람으로 만드는 사
람들이었습니다. 실상 그들의 전도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영적 무기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받기를 바랄 때, 바리새인
처럼 우리도 오히려 주님을 적대시하
는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높여 주어
도, 나의 시선은 제일 먼저 우리 주
예수님께 향하여야 합니다.

3월26일: 청결의 비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

청결과 순결의 차이
청결은 순결이 아닙니다. 청결은 순

결 이상의 것입니다. 청결은 하나님과
의 지속적인 영적 하모니로 인해 발생
하는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청결 안에
서 성숙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
님과의 삶이 바르고 내적 청결이 되어
있다 해도, 나의 외적 삶은 흠이 나고
상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은 우리를 방패로 둘러서 이런 상
처에서 보호받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가
항상 청결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
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꽃이 상처를 입으
면, 아무리 미미한 부분이라도 만사
제쳐놓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데 비전은 성품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즉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의 청결
하나님은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를

청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
서 보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
은 상처를 잘 입는 우리의 육신입니
다. 남과의 관계에서, 혹은 상대방과
의 의견 차이를 놓고 우리는 걸핏하면
외적 자아에 손상을 입힙니다. 자아의
내적 지성소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바깥마당도 하
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청결에 완전히
조화되어야 합니다.

바깥마당이 손상되면 즉시 영적 이
해력이 흐려집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지속한다
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 의미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도 거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된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 있다
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흠 없는
개인적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실제적
인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바라보
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 말하기
를,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묵상해설: ‘청결’과 ‘순결함’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청결’하다는 진정한 의
미는 무엇입니까?

청결한 상태 = 주님과의 영적 연합의
열매

‘청결’(purity)은 단지 ‘순결함’(in-
nocence)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
습니다. 챔버스는 “청결은 순결함 이
상의 것이다. 단지 순결한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영적 연합과 조
화의 결과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

서 ‘청결’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지
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내
적 삶이 청결하고 올바르다고 할지라
도, “우리의 외적 삶이 상처를 입고
흠이 나는 것을 보고서도 의도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시지 않는다.”라고 챔버
스는 말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항상 개인적인
청결을 통해서 영적 비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수
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비전
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청결한
마음에 부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앎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뜻 이외의 어떤 것으로
채우려 하지 않는 영적 순전함의 상태
입니다. 그런 영적 청결의 상태에 있
을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
계획, 자기 비전, 자기 목표로 가득차
있는 것은 ‘청결’의 영적 상태가 아닙

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인격
적으로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순결함(innocence)을 가지고 있을지
는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빈
약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받는 진정한
‘청결’(Purity)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청결은 하나님과의 지속적
인 영적 하모니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계획, 나
의 비전, 나의 목표가 개입되지 않는
주님에 대한 지속적인 영적 연합이 하
나님의 비전을 보게 하는 청결입니다.

청결의 축복 = 하나님의 영적 비전을
보는 축복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으면 성결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청결’을 요구받습니다. 우리는 성령님
의 음성을 들으면서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 거절할 것과 꼭 해야 할 것을
개인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남들
에게는 허용된 일이라도 나 자신에게
는 허용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
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사도라고 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비전을 보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악한 일에 대하여 판단
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고전 5:3).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
들에게 보내심을 받고 그들에게 사도
가 되었습니다.

성도들 역시 ‘보내심’을 받은 곳,
사역과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서는 하나님의 뜻만을 받아들이는 청
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
리 개개인의 청결을 만들어 가시기 위

해,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방법, 같은
때, 같은 내용으로 지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
법, 하나님의 자원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남들
의 영성과 자기 영성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보내심’이 무엇인지, 어디인지, 어떻
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성령님께 묻고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
라는 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두 마
음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
이 아닙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하나
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약 1:8
4:8).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두 마
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
라”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은 왜 그런
사역을 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오로
지 한 마음으로 청결한 사람은 “주님
이 이것을 나에게 원하신다는 것을 나
는 압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것
이 하나님을 보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챔버스는 주님과 하나님을 향한 청
결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사람과의 관
계에서도 마음과 행동의 구별됨이 있
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절해야 할
일, 생각해야 할 일, 만지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개인적, 인격적 교제를 유지하는 사람
이 청결한 영적 마음을 유지할 수 있
습니다. 그것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는 청결의 마음입니다.

3월27일: 성품의 비전

이리로 올라오라…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하나님의 승화와 사단의 승화
승화하려는 마음은 개인의 고양된

성품의 습관에서 나옵니다. 당신의 외
면적 생활이 당신이 아는 최상의 수준
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계
속 “친구여,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시험을 받
을 때의 황금률은 ‘더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면,
다른 종류의 시험과 특수성을 지닌 문
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사탄은 승화를 시험 전략으로 사용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판이합니다. 사탄이
당신을 높은 자리에 앉히면, 그는 당
신의 비뚤어진 거룩의 개념을 부채질
하여 당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지로 이끌어 갑니다. 마치 영적 곡

예를 하는 것 같아서 전전긍긍하며 감
히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당신을 은혜로 고양시켜 하늘 처소
에 앉히시면, 뾰족탑 위에 매달려 버
둥거리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마치
넓은 대지에서 활보할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성품의 승화에 따른 비전
금주의 영적 상태를 작년과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높
이 부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는 모두 더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바
라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즉
시 따를 수 없는 진리라면 아예 하나
님으로부터 더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
시오. 당신은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은혜의 성장은 당신이 뒷걸음질 치
지 않았다는 것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영적으로 얼만큼 전진
해 와 있는가를 아는 통찰력으로 판명
됩니다. 당신이 은혜 속에서 자랐다면

“더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
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육성으로 직
접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가진 성품의 통찰력에 대고 말씀하신
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
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성품의 성장
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계시하실 수 있는 수준에까지 우
리가 다다를 때까지는, 하나님이 ‘하
실 일’을 감추어 놓으십니다.

묵상해설: “사탄은 승화를 시험의 전
략에 사용한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
다. 그러나 그 효과는 판이하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승화와
사탄의 승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탄의 승화 = 땅에 속한 것에 연연
하게 만듬

챔버스는 하나님과 사탄이 공통적으
로 사용하는 것이 성도를 높이는 것,

곧 승화(elevation)라고 말합니다. 사
탄의 높임은 유혹의 전략입니다. 그리
고 그 효과는 하나님의 승화와는 완전
히 다릅니다. 사탄은 성도를 어떤 높
은 자리에 앉혀서 비뚤어진 거룩의 개
념을 부채질합니다. 비뚤어진 거룩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일천번
제와 같이 1000일 동안의 새벽기도를
드리면 지금보다는 나은 거룩한 사람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비뚤어진 거룩의 개념입니다. 주님이
시키시지도 않았고 주님이 감동 주시
지도 않은 활동을 우리는 ‘종교활동’
이라고 합니다. 종교활동은 성령의 감
동 없이 한 육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도 없을 뿐더러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비뚤어진 거룩의 개념을 가지고 1000
일의 새벽기도를 시작하면 어떻게 될
까요? 독감으로 몸이 아파서 하루 새
벽기도를 빠지면 이내 열등감과 자괴
감에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높은 뽀
족탑 위에 있는 사람처럼 1000일 중

에서 하루라도 빠질까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마귀는 점점 육신과 혈통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거룩’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성도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묶어버리려고 합니다. 나중에는 거룩
해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하다
는 거짓말을 속삭입니다. 그리고 육신
적으로 높아진 위치를 유지하도록 전
전 긍긍하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
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
데 현재 높아진 것(사람들의 인정, 칭
찬, 재물 등)에 연연하고 있다면 설사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에게 주어진 축
복의 결과물이라도 사탄에게 유혹의
수단으로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하나님의 승화 = 하늘에 속한 것에
연연하게 만듬

하나님은 성도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십니다(계 4:11). 하

나님은 현재 높아진 것에 연연하지 말
고, 현재 높아진 것을 전전긍긍하며
지키려 하지 말고, 더 높은 곳, 더 높
은 하늘 처소에 올라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며 넒은 대지와 평야를
걸어가게 하시는 충만한 자유를 부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이 높은 하늘
처소에 올라와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을 숨김없이 듣고 보면서 영적 비전
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
도들은 높아지는 것(승화되는 것) 만
큼이나 개인적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
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성품이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개인의 영적 성품
이 자라갈 때까지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숨기십니다. 모세에게는 광야의
40년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

의 하실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
님은 다윗도 13여 년 동안 다윗의 성
품을 다듬으셨습니다. 요셉도 형들의
배신, 종살이에서의 억울한 일, 그리
고 감옥살이를 통해서 다듬으셨습니
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통해서 하실
일을 보여 주시고 실행에 옮기게 하셨
습니다. 성도의 영적 성품과 하나님의
하실 일에 대한 계시는 비례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십자가상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뜻
만을 좇아가심으로 물리치신 것처럼,
성도는 사탄이 높이는 것에 대하여 영
적 분별력을 가지고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자리에만 나아
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고 듣는 복
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음성을 온전히 듣는 자리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온전히 계시하시기 전까지 요셉의 성
품, 다윗의 성품, 모세의 성품, 아브라

함의 성품, 그리고 바로 우리의 성품
을 다듬어가시고 영적으로 성장시키십
니다. 그것을 챔버스는 “하나님은 우
리 개인의 성품의 성장을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계시하실
수 있는 수준에까지 우리가 다다를 때
까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감추어
놓으신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승화는 바로 성도들을 하
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겸손의 자리까지 인도하는 역사입니
다.

3월28일: 주님이 오해하셨을까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
하되…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7, 8).

예수님에 대한 참된 충성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주님
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
씀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께 해를 끼
칠 수도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그릇
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해
가 되는 것은 주님께 불순종하는 일밖
에 없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분명히 하라고 하시
는 말씀은 무시하면서 내 생각에 주님
께 명예가 된다고 생각되는 일들만을
앞장세워서는 않됩니다. 비록 그런 일
이 설사 우리 주님을 많은 사람들로부
터 욕보임을 당하는 일을 막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제의는
조용하게 오지만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오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
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에 철저한 사
람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주님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습
니까? 예수님에 대한 충성은 내게 아
무 것도 보이지 않는 때와 장소에서라
도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나오는 것
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충성은
내 지식과 지혜로 내 신앙의 발판을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이성적
인 이해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앞
길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한 인격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식적으로 자신
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순종
즐거운 마음으로 미련 없이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주님이 어떤 것을 말씀
하실 때 당신이 따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신 나름의 생각에 따라, 어떤 것은

주님께 명예가 되지 않는다는 개념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당신이 주님께 불명예가 된다고 여기
는 일이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신은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에 대
한 당신의 아이디어 중 어느 편에 충
성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신실
합니까? 아니면 주님께로부터 나오지
도 않은 당신의 여러 견해와 교리에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
로 하라”(요 2:5). 순종이 제사보다 귀
합니다.

묵상해설: “주님이 나보고 분명히 하
라고 하신 말씀은 무시하고 내가 보아
서 주님의 명예가 된다고 여기는 일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주
님을 공중 앞에서 욕보이는 일을 막는
것이라 할지라도 옳지 못하다”라는 의
미는 무엇입니까? 또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획 = 하나님의 때에 하나
님의 방법으로 성취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런데도 베다니로 바로 가시지 않고 오
히려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은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한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제자들로서
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고 행동이
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요한복음 11:7-8
에서는 분명히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
놓이기를 선택하시는 말씀을 하십니
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던 자들이 있는 유대 지방
으로 다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님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나사
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으로는 안 가

시고, 왜 주님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
지방으로 가시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호하려면 유대
지방으로 다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우리
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까
지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상황과 조건’
을 따라 좇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격체
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사람의 기준과
관점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면, 정작 예수님의 뜻은 무시하고
예수님의 명예만을 지키려는 인간적
노력을 하게 됩니다.

성도의 태도는 오로지 “너희에게 무
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라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놀라
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
십니다. 그것이 예수님 자신에게 충성
된 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 하나님의 뜻만을 붙
잡는 성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요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바벨론,
앗시리아 등)에 끌려가는 징계를 하십
니다. 하나님의 성전까지 침략당하면
서 이방 나라에 심각하게 조롱과 멸시
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십니
다. 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
를 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
로 회복시키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는 조롱과 멸시받는 것
조차도 감수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때도 로마병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
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대가를 철
저하게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
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
려 하지는 않고, 그저 자신의 아이디

어와 관점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
님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이게 하는 일
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일에 나서려고 합니
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욕
보임 당하시지 않게 하려고 ‘자기 자
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
다. “내가 가난하면, 내가 무식하면,
내 직업이 변변치 못하면 예수님 욕먹
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성공과 자기 성취’를 통해서 예수님을
명예롭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성도들은 모범이 되는 열심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보
다 자기 성공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려는 것이 우선한다면 진정한 믿음
일까요?

내가 육신적으로 잘 되는 것이 예
수님이 잘되는 길이라는 생각을 버려
야 합니다. 챔버스는 “믿음은 이성적
인 이해가 아니다. 믿음은 내가 앞길
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한 인격체에게

의식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 자신
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
격체이신 주님이 하라는 것만을 바로
순종하며 실행하는 것이 ‘믿음’의 본
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어
떤 일이 예수님께 불명예가 된다고 생
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내는 일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
으로 어떤 일이 예수님께 명예가 된다
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하나님
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와 신조에
근거한 아이디어보다 인격체이신 예수
님 자신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
려야만 합니다.

3월29일: 예고 없는 방문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눅 12:40)

주님의 예고 없는 방문을 늘 준비하라
항상 예비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사역자에게 최대로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면할 수 있는 준비된 자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경험이 깊다 할지라도,
이 일만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의 투쟁 대상은 죄도, 난관도, 환
경도 아닙니다. 투쟁의 대상은 우리가
너무나 사역 그 자체에 매몰되어 언제
든지 아무 때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 약점은 우리의 신앙이
나 신조가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쓰
임 받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하는
때에는 좀처럼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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