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11월1일~11월7일 묵상과 해설
11월1일: 외길로 가는 삶
너희 몸은…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
하느냐…(고전 6:19).
성도는 사적 생활의 파괴 가운데 주님
과 교제한다
엄밀한 뜻에서 우리에게 개인 생활
이란 없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또 하
나의 세계를 이루고 사는 나만의 사적
생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에 동참한다는 원리에 배치됩니다. 하
나님은 성도들의 사적 생활을 파괴하
셔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한 통행로
를 만드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한 길을 만드십니다. 그
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치
된 사람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에 동참하
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 일어납
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들여 하나
님 자신과 교제를 나누게 하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
해가 됩니다.
성도는 비탄의 상처 가운데 주님과
교제한다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일은 주님의
반석 위에 우리를 굳게 세우시는 것입
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속 목적이 이
루어지는 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어
떤 일이 있어도 감내할 수 있는 뿌리
깊은 신앙의 터전이 잡히게 하십니다.
왜 우리가 비탄의 상처를 피해야 합니
까? 우리의 비탄을 통해 하나님은 우
리가 자기 아들과 교제할 수 있는 길
을 여십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닥
치는 고통의 재난에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자기 연민으로 죽어
갑니다. 소위 성도들의 동정이 실은
우리의 죽음을 부채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
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나와 교제를
가지라.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
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지금 우리
의 깨어진 심장으로 세상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내신다면, 우리의 가슴
속에 비탄을 자아내시는 하나님께 감
사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은 자기 성도들의
사적 생활을 파괴하신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성도의 사적 생활 파괴 = 성전 된
공적 생활 건설
하나님이 성도들의 사적 생활을 파
괴하시는 이유는 복음에 동참하라는
부름에 합당한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
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
님을 통해서 성도의 사적 생활을 파괴
하시고 새로운 영적 DNA로 살아가도
록 다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
약 성도가 받은 큰 축복입니다.
세례 요한도 성령의 내주가 있던
신약 성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
에 대하여 의심을 가져서 제자를 보내
예수님께 그리스도이신지를 묻게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의 어떤 사람도 성령님이 내주하시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의 임재가 충만한 곳입니다. 성도의
사적 생활은 더 이상 없게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니까요!(고전
6:19).
성도의 사적 생활을 파괴하시는 주
님은 성도가 성전 된 삶을 살도록 영
적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영의
세계에는 어떤 영들이 존재합니까? 하
나님의 영, 세상의 영, 사람의 영이
있습니다(고전 2:11-12). 성도는 성도
의 사적 생활을 파괴하시려는 성령님
의 역사와 성도를 죽이려는 마귀의 정
죄의 역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
다. 그리고 사람의 영은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 곧 살리는 영이 있
습니다. 성도를 전적 순종으로 이끌어
약속을 성취시키는 영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영(엡 2:1)에서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듭나
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5-6). 즉 하
나님의 영은 살리시는 영입니다(요
6:63).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회개하
게 하시는 이유도 성도를 살리시기 위
함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그 목적
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빛, 생명, 진
리, 영생, 평강을 주시는 영입니다.
둘째, 마귀의 영 곧 죽이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과는 반대로 마귀의 영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영적 죽
음으로 내몰았듯이 거짓말로 성도를
불순종에 빠뜨려 죽게 하려는 살인자
입니다(요 8:44). 사람이 마귀의 영에
휘둘리면 거짓의 어둠에 빠져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영적 생명을
빼앗아가는 도둑의 영입니다.
셋째, 사람의 영 곧 무엇엔가 소속되
는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의존적으로 존재합니
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
떤 ‘영’과 접촉하며, 그 영을 받아들이
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한
후, 창녀 역할을 하는 여사제와 관계
함으로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의 영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합하
는 사람은 성령과 하나가 되는 ‘영’이
됩니다. 주님과 합한 영이 아니면 그
반대의 영, 바로 마귀와 합한 영의 상
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증거= 회개의 마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아직 마귀의
영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우상의 예식을 하게 되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우상숭배에서
일어나는 창기와 합하는 부정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도
자기 성공을 위하여 믿지 않는 세상과
멍에를 함께하기를 즐겨하기 때문에
‘돈’과 ‘성공’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
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소멸하는
길에 서기도 합니다. 실상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 성도라는 증거
는 회개입니다. 회개된 심령 곧 말씀
으로 씻음 받은 심령이 아니면 더 많
은 악한 영들이 와서 살게 됩니다(마
12:43-45).
바리새인처럼 외적 선행을 많이 행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여전히 마귀가 주인 노릇
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더 악한 일곱 영들 곧 위선의 영, 외
식의 영, ‘돈’ 사랑의 영, 부모 불공경
의 영,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영,
예수님을 대적하는 영, 성령님을 훼방
하는 영이 역사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
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일에 앞장
서게 된 것입니다.
회개는 성도가 말씀으로 씻기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님의 역사하심
으로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분명히 어디엔
가는 소속이 되어야 하고, 또 소속되
어 있는 영입니다. 즉 사람의 영은 그
리스도의 영 아니면 마귀의 영에 소속
되는 영입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
에 소속되기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마
귀의 영에 소속되거나 해야 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성령님께 속한 심령은 비탄의 마음
을 가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예수님과의 교제가 열립니다. 택
한 자들이 주 예수님과 교제 가운데
들어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
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하나님의 목적
이 성취된다면 성도의 가슴속에 비탄
을 자아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11월2일: 나의 순종과 타인의 축복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순종을 통해 자기부인된 제자가
된다
우리 주님은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
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할 바
를 강조하여 말씀하시지만, 수단을 동
원하여 우리가 억지로 하도록 만드시
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한마음
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 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만
약…하려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이셨습
니다. 즉 당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를 부인하고….” 즉 자신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를 위해 포기하라는 것입니
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에서 누가 제
자가 되고 안 되는 영원한 입장에 관
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순서에 따라 주님 자신에게 가치가 있
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
의 말씀은 그토록 냉엄하십니다(눅
14:26 참조).
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이
확산된다
우리 주님은 내게 규칙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제시하시는
기준을 분명하게 보여 주실 뿐입니다.
주님에 대한 나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
라면, 나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주저없이 행할 것입니다. 내가 주저하
면 주님과 경쟁이 되는 다른 무엇을
내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자
신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순종하도록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주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내가 주님
께 순종할 때, 나는 나의 영적 숙명을
가름합니다.
나의 개인 생활은 소소한 일들로
짜여서 주목될 것이 없는 미미한 일과
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같이 작은
일들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할 때, 나
는 나의 순종을 통하여 수천 개의 일
들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이 인간의 영
혼에서 순종의 지점에 이르면, 그것은
항상 창조의 일을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구속
은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생애로
세차게 번져갈 것입니다. 순종의 행위
뒤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실재가 있
기 때문입니다.
묵상해설: “우리 주님은 순종을 강요
하시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무슨 의
미입니까?
자기 부인된 순종 = 창조역사 성취의
통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
나님으로부터의 자기 중심적인 독립성
을 거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순종은 같은 몸 안에서 움직이
는 오른발, 왼발, 또는 오른손, 왼손과
같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
랑하는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챔버스의 말처럼 “주님은 당신
에게 우리가 순종하도록 우리를 돕지
않으신다. 내가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
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
랑하도록 도울 수 없습니다. 그냥 사
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순
종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성도를 자꾸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본능’이
역사하는 통로가 자아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부인되어져야만 온전히 순종의
길을 가게 되고, 순종한 후에는 창조
의 일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먼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독립선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님 중심적 삶을 떠난 사람은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그 지경이 심
히 어렵게 되어 소망이 없는 자처럼
됩니다. 그러나 탕자인 둘째 아들에게
도 소망은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사는 사람들은 ‘종’
(slave)들마저도 풍요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은 탕자는 아버
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버
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유일한 소
망 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떠
난 사람에게는 탕자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중심적 삶의 열매로서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
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자아) 독립선언을 한 것입니다. 아담
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
은 아버지께 재산을 요구하고 떠난 탕
자처럼, 그들도 하나님께 자기중심적
삶을 살겠다고 선포한 것이라는 의미
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에 대한
자기 독립선언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
까? ‘저주’였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저주가 운데 놓였습니다(롬
8:2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모든 피
조물도 신음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
습니다. 창세기 3:16에서 하나님은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의 범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
다. 사람에게 임하는 저주는 하나님
의식이 아닌 자아의식에 따라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은 하나님 말
씀을 왜곡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
각에 비추어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부인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자기중심적으
로 해석하고 적용해서 하나님의 뜻과
는 정반대가 되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선택사항이 아닌 명령
으로 받은 증거 = 자기 부인된 순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
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명령은 선택사
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예수님
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았고,
그 하나님의 명령은 바로 영생 그 자
체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계명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영생’을 계속 소유하게 하
시는 영생의 자원이었습니다. 선악과
는 사람을 범죄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
라, 사탄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영원
토록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 보
호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먹
지 말라”)대로, 삶 가운데 계속 선택
했다면 에덴동산에서의 영생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님의 명령인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마귀와 더불어 분석하고 판단했을 때,
사람은 영적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에덴동산에서의
영생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는 하나님 말
씀을 있는 그대로 ‘명령’으로 받는 자
세입니다.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
앙은 마귀적인 거짓 신앙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주
님의 명령으로 받지 않고, 자기 중심
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의 구
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자
기 생각의 부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
가의 고난에 대한 대해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님을 간곡히 말립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의 역사를 간파하시
고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6:24
). 하와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계명
을 다시 확인하고 행했다면 속지않았
을 것입니다. 둘째, 자기 목숨과도 같
은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사랑을 부인
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
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눅 14:26).
아담이 하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
다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
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11월3일: 예수님의 몸종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
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나의 자주성을 내 손으로 끊기
내 안에 주님이 사십니다. 이 말씀
은 나의 자주성을 내 손으로 끊고 예
수님의 지상 권위에 항복함을 뜻합니
다. 아무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
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일년 365
일 내내 이 점을 놓고 강조하실지 모
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억지로
항복시키시지 않습니다. 이 일은 자신
의 자주성의 껍질을 깨고 내 인격을
그리스도와 합치시킴으로써 해방을 갖
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나의 이상
의 성취가 아닌, 예수님에 대한 전폭
적인 충성을 뜻합니다.
내가 일단 그곳에 이르러 있으면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극소수의 사
람들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무
엇인지를 압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
39). 이 말씀의 적용이 있을 때 나는
강철 같은 성도가 됩니다.
나의 권리를 자진하여 던지기
당신의 껍질은 깨어져 있습니까?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경건한 사기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나는 나 자신을 포기
할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께 항복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부숴지든 조건
을 붙이지 않을 것인가”라는 자기 붕
괴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나의 지
식, 나의 방법을 통한 자아실현으로부
터 깨어져 나가야 합니다. 그 지점에
당도하면, 즉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내가 주님께 연합된 것을 초자연적으
로 알게 됩니다.
기독교의 열정은 내가 자신의 권리
를 자진하여 던지고, 그리스도의 몸종
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할
때까지는 성도의 길을 한 발도 내딛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오직 통로요, 도
구요, 매개체입니다.
묵상해설: “자아 실현으로부터 깨어져
나가야 한다”라는 말은 어떻게 구체적
으로 삶에 적용됩니까?
기독교적 방식의 자아 실현도 버리라!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아가기
로 결단하고 주님께 모든 권리를 양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
리는 길은 자기중심성에서 하나님 중
심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기독교인
으로 살면서도 여전히 자아실현에 목
숨을 거는 경우를 봅니다.
성공한 목회자가 평생의 소원입니
까? 아직도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간증
할 수 있는 놀랍고 희생적인 사역을
한 평신도 사역자로 인정받고 싶습니
까? 아직도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기독교적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
가 번성하고 사회 기득권적인 위치에
있을 때는 더 많은 사람이 기독교적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교회
에 들어옵니다.
주님의 목표는 자아실현으로부터 성
도가 깨어져 나가도록 하시는 것입니
다. 그래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
게 만든 죄의 본성인 자기 독립성(자
기 자주성)을 끊고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실현
의 욕구를 끊지 않고서 하나님과 연합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
아실현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끊으려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합니다(눅 14:26).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목
숨같이 여기는 자아실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과 바꿀 수 없는 자
식, 부모, 배우자, 비즈니스, 명예, 권
력, 자기 지식, 자기 지혜, 목회 성공
과 같은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
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 같은 것들을 버리는 것이
순교보다 어렵다!
챔버스는 “당장 순교하는 것보다 매
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성도에게 자기를 위하여 죽
어 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순
교해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의 목
숨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챔버스는 말하기를, 사람이
예수님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목숨
을 버리는 일은 인간 본성과는 반대되
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엄청난 대가를 치
르시고 우리는 그 구원을 쉽게 얻었지
만 이 구원이 내 삶에서 드러나는 것
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입니
까? 바로 자기 목숨을 지키는 방법과
방편들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자기 목숨과
도 같은 돈, 지식, 명예와 권력을 자
꾸 비워가라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길
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기반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인 돈,
지식, 시간, 명예, 권력을 버릴 수 있
습니까? 바로 ‘사랑’을 실천하고 실현
하는 수단으로 기꺼이 자기 목숨의 존
재기반인 돈과 지식, 시간, 명예를 내
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이 사람의 본능과는 정반대인 것처
럼,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인 돈과 시
간 등을 남을 위하여 사랑의 실천 수
단으로 기꺼이 내어주는 것 역시 사람
의 본능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죽음
을 통한 순교는 단 한 번이면 되지만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
은 매일 매 순간 해야만 하기에 어려
운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
성을 거슬러 자기 목숨의 존재기반을
전부 ‘사랑’의 수단으로 내어주는 것
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
자가의 길에서 자아실현을 버리고 예
수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그리
스도에 대한 충성의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챔버스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무엇인지를 안
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일까요? 챔버스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 말씀의 적용이 있을 때 나
는 강철 같은 성도가 됩니다”라고 말
합니다. 자기 목숨, 자기 생명, 자기
영광을 잃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 하
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은 성도
는 ‘자아실현’의 길을 버리고, ‘예수
실현’의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자
아실현은 예수 실현을 방해하고, 예수
실현은 자아실현을 방해합니다. 그래
서 예수 실현을 위해서 드리는 ‘순종’
이 값진 것입니다.
11월4일: 전진과 후퇴의 삶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
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복음은 사람이 반응을 보일 수 있게
인도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사람들이 반
응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주
어야 합니다. 그 반응의 책임은 개인
에게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당
신은 남을 위해 대신 행동해 줄 수
없습니다. 각 개인이 의식적으로 반응
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은
복음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일단 복음
에 반응을 보이면, 그 사람은 결코 과
거의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 나님의 성령에 의해 진리를 깨
닫고도 그냥 잠자코 서 있는 어리석은
대중에 끼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자
신을 진리에 던지는 순간, 나는 살아
납니다. 그 이외의 삶은 사는 것이 아
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는 순간은 의지를 다해 행동으
로 옳기는 순간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찌르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무런 반응
을 받지 못한 채 그냥 당신을 지나가
게 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
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성도는
가장 연약한 자라도 행동하는 순간에
해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
신 능력이 그의 편에 있음을 즉시 알
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나아오기도 하고, 잘못을 고백하기도
하며, 또 뒷걸음질 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전진과 후퇴의 패턴은 우리가 다
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터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
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주님과 교
제를 회복해야 할 것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행
동으로 옮겨 주님과 교제하라는 뜻입
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로 오라”는 말씀에 복종하는 자
는 그 즉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생명
이 밀려들어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
결과 세상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세력
인 육과 마귀를 마비시킬 수 있습니
다. 그것은 당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
라, 당신이 하나님의 구속 능력에 연
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묵상해설: 하나님의 초대인 “오라”(마
11:29)는 메시지는 왜 중요합니까?
‘오라’는 초대에 응하는 것의 중요성
=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초자연적
생명이 연결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하
나님은 ‘하라’(Do for me)라는 말씀
보다 나에게 ‘오라’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초자연
적 생명에 연결되어야만 무엇을 하더
라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
해 일하더라도 오히려 육과 마귀에게
억압을 받기 때문입니다. 봉사하고 나
서 짜증이 납니까? 헌신하고 나서 남
들의 비협조와 헌신 없음이 화납니까?
봉사와 헌신을 하고 오히려 육과 마귀
에게 억눌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오라’는 메시지에 따라야 합
니다. 그러면 주님과 교제하게 되고,
주님과 교제하면 주님의 임재가 역사
하여 육과 마귀를 마비시킬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생명이 내 안
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역을 하든지 예수님
이 하셨던 순종의 모범대로 해야 합니
다. 자기중심적 삶이 청산된 예수님을
실현하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
의 전진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에서만
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4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
을 돌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리고 십자가에서는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
십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의 100퍼센
트 온전한 성취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100퍼센트 순종하여 행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버
지께서 명령하신 이 땅에서의 삶을
100퍼센트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셨다
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역하
신 시간이 얼마였습니까? 수십 년을
사역하셨나요?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
하셨나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전도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은 하
나님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모든 일생
의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
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바로
성도의 순종을 통로로 삼아서 이뤄집
니다.
‘오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이유 = 자기 중심적 상황판단
사울 왕은 백성이 떠나가고, 제사장
은 오지 않고, 블레셋은 모여드는 불
리한 상황에 놓입니다. 성도의 삶 가
운데서 이러한 상황은 수시로 찾아옵
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
를 붙잡고 나아가지 않으면 자기중심
적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울은
자기중심적 삶으로 빠지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맘대로 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예배
는 합당치 않은 예배였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
계는 왕과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백성
은 왕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고, 왕의
명령을 지켜야만 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해 드려야만 했
습니다.
사울 왕의 죄는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 왕
이 되기를 선택한 영적 반역행위입니
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으로 나
아가 세상원리대로 살면 살수록 하나
님과 원수가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
니다. 거기에는 영적 어둠이 가득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둠이 역사합니다.
어둡기 때문에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어둠이 깔
려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
의 사사 또는 선지자의 인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을
거부하는 것은 그 주의 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주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요 13:20).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운 권위자에게도 순종합니
다.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기 때문입
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많은 이방 나
라들이 왕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주변 나라들은 강대한 것처럼 보였
습니다. 왜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통치보다 사람의 통치를 선택했을까
요? 자기중심적인 ‘자기만족’을 원했
기 때문입니다. 더 효율적인 통치, 더
적극적인 통치를 외면적, 표면적인 이
유로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을
위한 통치를 원했습니다.
최초에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
이나 왕이된 사울이나 잘못된 상황논
리에 빠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즉 교회의 의
식과 예식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
랑하는 증거가 아니요, 무엇이든 하나
님의 기준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온
전히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11월5일: 고난에의 동참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
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와
상관없는 경험들을 사용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
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시기 위해
서 당신에게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수많은 경험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같은 경험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장중
에서 유용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만나는 문
제들을 통한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영
혼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
게 하십니다.
“아, 나는 그 사람은 감당할 수 없
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 못 할까
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경험을 많이 주시지 않
았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경험
들로 시간 보내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
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보통사람들의 고난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고 나에게
고난의 문을 지나게 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되어
있을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교회사에서
점철되고 있는 일반적인 경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회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들의 아이디어에
서 나온 지름길을 사용하여 속행시키
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항상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개인의 야망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
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변화를 받
아 자신의 육적인 결단들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째서 하나님이 그
런 길로 인도하시는지 정확히 모릅니
다. 안다면 영적 교만에 빠질 것입니
다. 하나님이 왜 고난으로 우리를 연
단시키시는 지 당시에는 깨닫지 못합
니다. 대개 오해하면서 고난의 문을
지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음이
오는 장소에 도착하면, “아, 나는 몰
랐는데,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고 계셨
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묵상해설: 왜 하나님은 나와 아무 상
관도 없는 수많은 경험 속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신다고 말합니까?
나와 상관없는 경험의 의미= 나 자신
의 주장이 끊어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통로
오스왈드 챔버스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수많은 경험으로 데리고 다니
시는 목적을 “그같은 경험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장중에서 유용해질 수 있도
록 되기 위한 훈련이다”라고 단정지어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
님의 사역을 위해 유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만하면 하나님이
어느 정도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와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과
사건이 터졌을 때, “아! 나는 이렇게
무능하고 무익한 사람이구나!”라며 마
음에서 탄식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밀
착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사람처럼 우리 자신을 인
식하게 만드십니다.
모세의 40년 광야생활, 요셉의 종
살이와 감옥살이, 다윗의 망명생활같
은 것들이 그들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
는 경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관
없어 보이는 경험들 속에서 그들은 모
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용한 자로 다듬어
졌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
이 먹구름 같은 고난들을 때로 몰고
오시는 이유는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
나님이 구름을 몰고 오시는 이유는 모
든 고난들을 통하여 성도들이 더 이상
그릇된 것들을 배우지 않고, 오히려
점점 믿음이 단순해져서 하나님을 마
치 어린아이와 같이 대하게 하는 것이
다”라고 말합니다.
욥이 고난을 끝자락에 고백하기를
주님이 하시는 일과 영광을 눈으로 본
다고 말합니다(욥 42:5). 욥은 고난에
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귀로 듣던 관계
에서 눈으로 보는 관계로 성장했고,
더욱 단순한 관계가 됐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내가 하나님
에대하여 더욱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
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순종을 할
때도, 예전에는 왜 순종해야 하는지
꼬치꼬치 따졌지만, 모든 먹구름 같은
고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이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더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이 영적성장의
증거입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도망 다녔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있어서 ‘왕’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선생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
재가 떠난 사울 왕의 면면을 다 보았
습니다. 어떤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지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시면 어떤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지를 보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에게 서 성령을 거두지 말
아 주십시요!”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
던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경험의 의미= 나 자신
의 권리를 던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
참하는 통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서 갈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도망갈
때, 두 경우의 공통점은 어떤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의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이 십자가의 길 곧 순종
의 길에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나의
불순종의 결과인지를 겉만 보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상황 가운데 있는 당사
자는 내가 당하는 고통이 욥처럼 의인
이 겪는 훈련인지, 아니면 요나같이
불순종의 결과로 큰 고기 뱃속에서 어
둠 가운데 있는 것인지를 직감합니다.
죄의 결과로 얻는 고통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당연한 죄의 열매이기 때문
입니다. 죄의 결과로 얻은 고통은 고
난이 아닙니다. 징계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서 얻는 고통은
피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의 고통은 피할 수도 있지
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기 때문
에 고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고통의 자리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
것이 참된 ‘고난’입니다. 성경에 나오
는 의인, 욥이 당한 고통도 그래서 고
난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원망하고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고통은 ‘징계’입니다.
성도는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십자
가의 길을 갑니까? “아무것도 없는
자”(고후 6:10)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
다. 나의 보화를 소유하지 않고 기꺼
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아무 것도 없는 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돈’을 소유하기를 포기하고
기꺼이 형제를 위하여 돈을 사용하고
‘돈이 없는 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
니다. ‘내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 시간을 나눔으로써 ‘내 시간을 소
유하지 않는 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
니다. 돈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
면 나는 가난해지고 여유가 없어질 것
입니다. 현실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
기반이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
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무명한 자 같
으나 유명한 자” 그리고 “가난한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하는 자” 그리
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라고 말합니다
(고후 6:9-10). 이 땅의 것을 버리는
만큼 하늘의 것을 받게 됩니다.
11월6일: 믿음의 프로그램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
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자
기 오빠를 고쳐 주셨을 것이라고 믿었
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각
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르
다 자신도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
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
다의 믿음은 미래에 성취되는 믿음이
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자
기의 것이 될 때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서서히 마르다는 자기의 신앙고백이
실로 자기 것이 되는 단계에 이르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러하외다 주
는 그리스도시요…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주님이 당신을 이런 식으로 다루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친밀
한 교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교육을 시
키고 계십니까? 주님의 질문을 똑바로
받으십시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당
신은 무슨 의심으로 고민하고 있습니
까? 당신은 마르다처럼 당신의 신조가
참신앙으로 전환되는 경지에 이르렀습
니까? 그렇게 되려면 당신이 겪는 개
인적인 문제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
엇인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 그리고 버리는 것
믿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정신적
믿음의 프로그램에는 나 자신을 맡기
고, 이것과 상관없는 것들은 모두 버
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개인적
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를 이 같은 확
신 속에서 도덕적으로 던지고, 다른
것과는 타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렇게 세세하고 철저하게 믿는 것은 예
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던져 맡긴 후,
주님에 의해서만 만사가 지배되도록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대면
하고 서면, 주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
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당신이 정말
믿으면 믿음의 생활이 호흡처럼 자연
스러워져서, 왜 그전에는 주님을 신뢰
하지 못했는지, 어리석은 자신을 깨닫
고 놀라게 됩니다.
묵상해설: “예수님은 마르다의 믿음이
자기 것이 될 때까지 인도하셨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성도를 그렇게 인도하
십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만남=부활
생명이신 주님과의 만남
성도의 믿음이 자기 것이 될 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주님이시고 하
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믿어지는
때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좋은 선생
님, 능력 있는 예언자, 자비로운 치유
자 정도의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
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단계에
이르도록 주님은 계속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
1:14)이심을 계속 증거 하십니다. 그
래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이라도 믿으라고 말씀하
시곤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
한 분이심’을 빌립에게 말합니다. 예
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
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자
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심
을 증거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예수님
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일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은 부
활하신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
람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
으로 만난 사람은, 십자가상의 예수님
안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었고, 부활하
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안
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정체성
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님은 현재 살아계시기에 내 옆에서 나
와 같이 교제하시는 분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In Christ
alone)로 사는 사람입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해되는 시
점과 출발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의 생명에 온통 사로잡힐 때라고 말합
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여
동안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다 이해하고 있지 않았
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르쳐 주
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
다(참고, 요 16:12-13). 부활하신 예
수님의 생명에 온통 사로잡힌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생명의 예수님과의 만남 = 하늘
지혜가 열리는 길
자신의 삶 가운데 부활하셔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모시면
그에게는 하늘의 지혜가 열리고, 마치
닫혀있는 세계가 열리듯 예수님의 말
씀이 이해되고 풀어집니다. 자기 생각
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
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에게 영적 지식
이 풀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
수님과 관계된 일 이외의 여러 가지일
들에 대해서는 매력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이해를 갈
망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부활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영
원한 것을 추구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부활생명을 주셨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인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지속적으
로 생명을 공급하시고 충만하게 하십
니다(엡 3:19).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영생을 공급받고 충만해
집니다.
어떻게 주님과 친밀해질 수 있습니
까? 사랑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은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당
신을 보려고 무덤으로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자신을 드러내
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거룩한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
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마리아야!”라
고 부르시며 그녀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도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입혀주
셔서 영적인 눈과 귀를 뜨게 해 주십
니다(요 14:21). 부활의 주님은 주님
을 사랑한 순서대로 나타나주셨습니
다.
챔버스는 믿는 것은 맡기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믿음이 진정으로 나 자
신의 될 때는 부활생명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
을 때입니다. 챔버스는 우리에게 도전
의 말을 주기를 “당신은 마르다처럼
당신의 신조가 참 신앙으로 전환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까?”라고 합니다.
지식적인 신조를 소유한 단계에서 믿
음의 실재를 소유한 신앙의 단계로 전
환된 시점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입니
다. 그래야만 만사를 주님께 맡기는
믿음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1월7일: 환경의 섭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중보기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려가는 것
성도들의 생활 조건은 하나님이 예
정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생애에는 우
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
리로 당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
황 속으로 끌어넣으십니다. 그러나 성
령님은 당신이 처한 여건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여러 처소
와 사람들과 갖가지 상황 속으로 밀어
넣고, 당신 속에 내재하는 성령님이
당신이 처한 형편에 가장 적합한 중보
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 앞에 손을 내밀고, 내가 이것저
것을 조심껏 지키면서 나의 섭리를 이
루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모든 여건과 환경은 하나님
의 장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처한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