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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신학부 세미나 논문자료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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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kapc.org, 2022-05-23 10:25:32

2022년 신학부 세미나 논문자료집 2022

2022년 신학부 세미나 논문자료집 2022

2022 년 신학부 세미나

논/문/ 자/료/집

1

머리글

제 45 회 총회 신학부는 지난 총회 결의(총회절차,p.119-121)와 신학부
사업보고에 따라 맡겨진 과제, “사도신경에 나타난 'He descended into
hell'이란 구절에 대한 NAPARC 산하 교단들의 실태 연구 조사",
“현대교회에 은밀히 침투하는 ‘신사도 운동’, ‘알파코스’, ‘두 날개 양육
프로그램’에 나타나는 이단적 사상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연구",
"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개혁신학적 방향성과 목회적
이해” 등에 대해 지난 1 년간 자료를 모으며 연구를 지속해 왔고, 이를
토대로 지난 3 월에 신학부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 다. 각 분야에 대해
발제를 맡은 연구자들은 주제에 따라 그간의 분석한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참여한 모든 신학부원들의 진지한 토의를 거쳐 제 46 회 총회에 간단히 요약한 신학부 보고서(46
회 총회절차, p.141-142)를 채택하하여 보고하였고, 제 46 회 총회에서 이를 가결하였습니다.

신학부 보고서만을 읽어 보면, 보고서가 담고 있는 주제들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이해에 한계가
있음으로 인하여 그간의 연구, 토의의 산물인 발제자들의 실제적인 원고들을 총대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교단 산하 교회들과 회원 목사님들의 신학적 이해를 돕고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목회에 보다 유익할 것이라는 뜻을 모았습니다.

모든 논문들은 본 교단의 정체성인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을 선명하게 견지하였고, 본 교단과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함께 하고 있는 북미주개혁 장로 교단 협의회 (NAPARC)와 본 교단의
모태가 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를 비롯하여 합신총회, 고신총회의 결의문이나 각
교단 산하 이단, 사이비 대책 협의회의 연구조사 보고서 등을 참고하였습니 다.

이렇게 귀한 결실을 얻기까지 신학부 세미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신 준비위원장 장의한
목사님 (뉴잉글랜드노회)께 감사드리며, 부디 이 논문 자료들이 교단 산하 교회들과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참고자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2 년 5 월 13 일

신학부장 최동진 목사(남가주 노회)

2

<목차>

머리글 ……………………………………………………………………………………………………...2
사도신경에 나타난 “He Descended into hell”구절에 대한 NAPARC 산하 교단(PCA 를
중심으로)의 사용실태 조사(Research)- 방삼석목사(중부노회) ………………………………………4
‘신 사도운동’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비판 - 이윤석목사(뉴욕노회) ……………………………...15
‘알파코스’와 ‘두 날개 프로그램’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비판-김동수목사(뉴욕동노회) ………24
<별첨 자료> ‘알파코스’ 문제점 지적-조병수 교수……………………………………………………34
‘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학적 방향성-방동섭목사(서가주노회)

41
‘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론)의 목회적 이해-김미성목사(서북미노회)……………………...53

3

사도신경에 나타난 "He descended into hell" 구절에 대한 NAPARC 산하

교단(PCA 중심으로)의 사용 실태 조사(Research)

방삼석목사(중부노회)

지난 43, 44 회 총회에서우리의 영어권 자녀들이 공 예배에서 사도신경의 “He descended
into hell” 을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신학부에 위임한 질의 안건이 있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지옥으로 내려가다”(He descended into hell)는 조항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학부는 45 회 총회에서 사도신경과 이 조항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연구결과를
보고하였고, NAPARC 산하의 교회들의 사용실태를 따로 조사하여 46 회 총회에서
보고하기로 하였다. 본 연구는 이미 선행된 역사적 신학적 입장을 토대로, NAPARC 산하의
교회들이 그들의 사도신경과 이 조항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45 회 총회의 신학부 보고내용 요약 및 제안

1) 역사적 기원

라틴교부 루피누스(Rufinus A.D. 344/345-411)가 “사도신조”를 언급한 것을 볼 때,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신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그러나, 루피누스가 인용한 아퀼레이아 신조
이전의 사도신조에는 그리스도의 지옥(음부)하강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학부는
“5 세기 말까지는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표현이 없었고, 7 세기 이후에 로마 교회의
감독들이 서방교회의 예배의식을 로마화하려는 강력한 시도”로 추가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루피누스의 저작이 390 년 경인 것을 감안하면, “음부에 내려가시고” 조항이 포함된
아퀼레이아 신조의 기원은 적어도 적어도 4 세기 초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2
그러므로, 이 조항을 7 세기에 로마교회가 Forma Recepta 에 일부러 삽입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Schaff 와 Herzog 은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 조항이 처음 공식적으로

1 Rufinus 는 그의 Commentary of the Apostles’ Creed (Symbolum Apostolicum)에서 사도신경의
각 조항들에 대한 주석을 제공한다. 그가 소개한 아퀼레이아(aquileia) 신조에는 “He descended into
hell”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성령강림절 이후의 사도들이 각각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도록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고, 각자 다른 나라로 선교를 떠나기 전에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자신들의 말이 되지 않도록, 서로 다른 교리를 전하지 않도록, 함께 앉아 성령의
충만함으로 각자 한 조항씩을 말하여 그 전체를 그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공포하였다고 설명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루피누스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처럼, 전설은 사도신조의 권위를 사도적 기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볼 것은 신조가 지지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통일성에 있다는 사실이다.

2 필립샤프,『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교회사 전집 2 권(이길상,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492.샤프에 의하면, “Descendit ad infera”는 360 년 경에 작성된 아리우스파 신조들(synods of
Sirmium)에서 최초로 발견된다고 한다. See 샤프, 493.

4

언급된 것은 359 년의 Synods of Sirmium 이라고 한다.3 뿐만 아니라, 이 조항은 공식적인
신조에 포함되기 전부터 이미 4 세기 이전의 교부들과 작가들의 글에 등장하고 있었다.
2 세기 경 리용의 이레나이우스(AD 130-202)는 베드로 전서 3:19-20 절을 언급하며,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설명한다.4 그의 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s of
Irenaeus 에서도 이레니우스는 엡 4:9-10 절을 인용하며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을 언급한다.
예루살렘의 키릴(310-386) 도 그의 Catechetical Lectures 4 권 11 항에서 “He went down into
the regions beneath the earth.”를 설명하고,5 포이티어스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5-
367)도 On the Trinity(De Trinitate), 10.34 에서” the descent into the lower world”조항을
설명하고 있다.6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330-389)도 Oration on Easter(Orations 45.24) 에서
twofold descent 를 언급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장소로 가신 신비를
언급한다.7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339-397) 역시 On the Christian Faith 3 권에서 벧전
3:19 절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지하세계에 계셨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설득한다.8 처음부터
Apostles' Creed 에 실려있는 것 같지는 않아도, ‘음부하강’에 대한 고백이 아퀼레이아 신조나
Synods of Sirmium 보다 앞선 것은 분명하다.9

그러므로, 비록 이 조항이 처음부터 고대신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연옥 교리때문에 일부러 삽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게다가,
1440 년 Reginald Pecock(1395-1461)과 종교개혁 시대에 Walter Deloenus(1500-1563) 10와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6,24-1605,10,13)가 이 조항을 삭제하라고 제안했지만,11
Calvin 을 비롯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이 조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3“Descent of Christ into Hell” in: The New Schar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Funk & Wagnalls co, London & New york, 1909, Vol. III, 410-412.

4 It was for this reason, too, that the Lord descended into the regions beneath the earth, preaching His
advent there also, and [declaring] the remission of sins received by those who believe in Him. 1 Peter 3:19-
20. Irenaeus of Lyons, Against Heresies 4.27.2. 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427.htm

5 https://www.newadvent.org/fathers/310104.htm
6 “When He descended to Hades, He was never absent from Paradise (just as He was always
in Heaven when He was preaching on earth as the Son of Man), but promised His martyr a home there, and
held out to him the transports of perfect happiness.” 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10.34. Cf.,
https://www.newadvent.org/fathers/330210.htm
7 “If He descend into Hell, 1 Peter 3:19 descend with Him. Learn to know the mysteries of Christ
there also, what is the providential purpose of the twofold descent, to save all men absolutely by His
manifestation, or there too only them that believe.” See https://www.newadvent.org/fathers/310245.htm
8 Ambrose, On the Christian Faith, 3, 14, 111. Cf., https://www.newadvent.org/fathers/34043.htm
9 리차드 보검은 고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이 공인된 교리로 가르쳐지지는
않았지만, 다양하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져 온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다. Richard Baukham,
“Descent to the Underworld,” in: Anchor Bible Dictionary, vol. II. 156-158
10 이정석, “사도신경의 음부강하론” in: 총신대 동창회보, 1989, 10 월 16 일자

11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의 신약과 초대교회사 교수인 Charles E. Hill 이 2020 년에
사도신경 시리즈로 설교한 “He Descended into Hell” 내용 참조. https://journal.rts.edu/article/he-
descended-into-hell/

5

2) 신학적 해석들

지난 45 회 총회에서 신학부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혁파 신학의 입장을 대조하였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조항을 벧전 3:18-19 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성도들이 있는
장소인 선조림보에 내려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고
해석한다. 반면에 개혁파 신학자들 중, 헤르만 바빙크는 벧전 3:19 절을 전도가 아닌 승리의
선포로 보며, 뻘콥은 칼빈을 따라 음부하강의 조항을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통으로 해석한다. 신학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 번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50 번도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의 표현을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했다. 이
조항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은 실재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옥같은 고통과 쓰라림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거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의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부가 제시하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혁파 신학의 입장은 벧전 3:19 절에
나타난 ‘지옥’또는 ‘음부’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에서 서로 차이를 보인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지옥’을 실재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고, 개혁신학은 상징적인
개념으로 본다. 실재설과 상징설의 대조이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 안에서도 해석의 차이는
존재한다.12

12 이정석교수는 “사도신경의 음부강하론”에서 다양한 해석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다.
아래 내용은 http://theologia.kr/board_system/45616?ckattempt=1 에서 재 인용함.

루터교회는 사탄의 세력에게 그의 승리를 보이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이해하고 이를
승귀의 제 1 단계로 본다. 그리고 영국교회는 낙원과 음부를 동일시하여 3 일동안 낙원에 가
계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내려가셨다기 보다는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거나 혹은 음부적인 고통의 경험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상징적 이해에는 두가지의 입장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신조는 사도신경의 음부강하 구절을 3 일 동안 죽어 있었다는 단순한 의미로
이해한다. 대요리문답 제 50 문,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 지심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장사됨과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고
제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니,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해석을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반대하였다. 첫째로 쉬운 말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말을 쓰는 법이 없다. 음부강하의 의미가 단순히 바로 앞에 분명하게
언급된 "죽으시고 장사 되며"를 반복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 보다 더 난해한 "음부에
내려가시고"란 말을 사용할 리 만무하다는 문학적인 반론이다. 둘째로 사도신경과 같이
압축되고 간결한 신경에 쓸데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중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칼빈은 음부강하를 단순한 사망상태의 서술로 보지 않고 음부적인 고통의 영적
체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육적 고통으로 음부강하의 체험을 영적 고통으로
이해하고, 이 둘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형벌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대륙 개혁교회의 요리문답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44 문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6

이런 다양하고 대립하는 해석들때문에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을 좋게 여기는 의견들이
있다.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성도들을 불필요한 논쟁이나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조항을 고백하게
하며, 개혁파 신학의 다양한 해석들을 교육함으로써,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잘못된 해석을
미리 숙지하게 하고,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로 인한 은혜의 부요함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신조들은 교회 내부적으로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할 뿐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도전과 유혹으로 부터 성도들을 보호하는 장치이기도하다. 또한,
EM 이 KM 의 성도들과 이 조항이 삭제된 사도신조로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신앙의 일치는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조항에 대한
일치된 해석에 달려 있다. 루피누스가 열 두 사도들이 각각 한 조항씩 읆어서 만들어졌다는
사도신조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다름 아니라,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통일성 때문에 나온
것이다. 사도신조에 관한 전설은 교회가 땅 끝까지 흩어져 있어도 동일한 신앙고백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전제가 제시되고 있다. 초대 교부들이 언급하고 있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조에 추가 되었으며, 삭제 의견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이 그 문구를
수정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지역교회를 넘어서는 교회의
일치성에 대한 주의가 있는 것이다. 해석의 차이로 인해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보편 교회의 신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일치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

2. NAPARC 산하 교회들의 입장

이제 NAPARC 산하의 교회들이 이 조항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언뜻 NAPARC
산하의 교회들은 한인 교회들만큼 이 조항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영어판 사도신경에는 우리 한글판에는 이미 삭제된 조항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조항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일 뿐, 삭제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실재로 영어권 교회에도 이 조항을 빼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있고, 이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NAPARC 산하의 총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결의가 있었는지 또는
사도신경에서 이 조항을 삭제하고 사용하기를 권장하는지 확인 할 필요가 있다.

1)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https://www.pcahistory.org/ https://www.pcaac.org/bco/

있다. "사도신경이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을 첨가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도 나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7

1973 년 제 1 차 PCA 총회부터 2021 년 48 차 총회에 이르기까지 사도신경의 ‘음부하강’
조항에 대한 안건이 상정된 적은 없었다.13 1973 년 1 차 총회 절차에 인용된 대요리 문답
50 번은 ‘descended into hell’ 조항을 설명하고 있다. BCO(Book of Church Order) of PCA(55-
1)는 사도신조를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권하고 있다.

“55-1.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중이,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신조나 [신앙]고백을 사용해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적법하다.”14

이 때 사도신조의 특별한 조항을 문제삼거나, 신학적 해석을 다루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을 교회의 표준 신앙문서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총회는
‘음부하강’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대해서 달리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2004 년 제 32 회,
2005 년 제 33 회 PCA 총회록을 보면, 예배 순서에 인용된 사도신조에 이 조항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15 뿐만 아니라, 2008 년 달라스에서 열린 36 회 총회는 입교자가 그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 인도자는 예배 모범 57-5 를 따라서 사도신경의 내용으로 질문하도록
권고하며, 타교회에서 이명한 자를 당회가 BCO 12-5 를 따라 그의 신앙을 확증할 때도 이
조항이 포함된 사도신경으로 문답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6 2012 년 40 회 총회에서도, 교회
멤버쉽에 관하여 상정된 안건에 대하여 BCO 57-6 을 삭제하고 Jurisdiction(관할구역)에
관한 새로운 조항 46-7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하였다.

And be it further resolved that BCO 57-6 be removed and a new paragraph be added to
Chapter 46, “Jurisdiction,” (46-7), renumbering the subsequent paragraphs. The new
paragraph 46-7 would then read (new text underlined),

46.7. Persons desiring to be received as communing members (BCO 6-2 and 6-4) from
other churches shall present themselves for membership to the Session whose
responsibility it is to receive members (BCO 12-5). They shall be asked to give a
testimony of their Christian experience and required to answer the following:
1) Do you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I do.
2) Do you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rose again from the dea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and
from thenc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do.
3) Do you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I do. …17

게다가, 2008 년의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할
때는, 인도자가 BCO 57-5 에 의해 사도신경으로 문답하도록 아래와 같이 결정하고 있다.

13 See PCA Historical Center : Home Page (pcahistory.org)
14 https://www.pcaac.org/wp-content/uploads/2021/08/KBCO-ALL-2021.pdf
15 제 33 회 PCA 총회록 14 를 확인 할 것.
16 제 36 회 PCA 총회록 178-187 을 확인 할 것.
17 제 40 회 PCA 총회록 734.

8

The minister may then address those making a profession in the following terms:
(All of) you being here present to make a public profession of faith, are to assent to
the following declarations and promises, by which you enter into a solemn covenant
with God and His Church.
1) Do you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I do.
2) Do you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rose again from the dea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and from thenc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do.
3) Do you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I do.
…18

2018 년 46 회 총회록의 부록에 실린 예배 순서에도 사도신경의 내용은 동일하다. 이와 같이
PCA 총회는 사도신경의 ‘음부하강’ 조항에 대하여 삭제안건이나, 이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로 인한 안건의 한 번도 상정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PCA 내의 교회들 중에는 이 조항을 빼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19

2)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ARPC)
http://arpchurch.org/worship-with-us/

ARPC 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 대, 소요리문답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배 모범 제 5 장 7 절에서 “ARPC 교단의 Standard 교리는 서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조 같이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사용하는 신조들은
성도들의 신분을 ‘하나, 거룩, 보편적 그리고 사도교회’로 표현한다”고 천명한다.20

앞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ARPC 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단순히 개 교회의 차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의 신조안에서 성도들을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로 엮어준다는 인식을 시사하고 있다.

3) Canadian & American Reformed Churches(CanRC)
https://canrc.org/beliefs

CanRC 가 채택하고 있는 신조들과 신앙고백서들은 사도신조, 니케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그리고 벨직 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신조이다. 교단 산하 교회들이

18 제 40 회 PCA 총회 절차 738.
19 PCA 소속 목사인 Mark Jones 많은 남장로교회에 속한 교회들이 이 조항을 삭제한
사도신조로 고백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See Mark Jones, ”Keeping ‘Christ’s Descent Into Hell’
from https://www.reformation21.org/blogs/keeping-christs-descent-into-h.php
20 Cf., https://arpchurch.org/wp-content/uploads/2021/09/Directory-of-Public-Worship-click.pdf

9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총회가 신앙의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에도 “Who suffered for our salvation,
descended to hell, rose from the dead”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4) 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North America (FRCNA)
https://frcna.org/component/k2/itemlist/category/5

FRCNA 는 초대교회의 세개의 신조에 온전하게 동의한다고 설명하며, 그 역사적 연대를
아래와 같이 표시하고 있다.

(i) the Apostles' Creed(+-150 A.D.); (ii) the Nicene Creed (381 A.D.); and (iii) the
Athanasian Creed (500 A.D.).

사도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모두 ‘음부하강’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5) 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URCNA)
ttps://www.urcna.org/sysfiles/member/family/urcna_report.cfm?memberid=1651&p
ublic=1

URCNA 는 에큐메니칼 신조로서 사도신경, 니케안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채택하고
있다. 사도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에는 ‘지옥에 내려감’이 있고, 이 조항의 해석에
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참고하라고 각주를 달고 있다. 뿐만 아니라, Liturgical
Form 에 입교, 성만찬 때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도록 권면하고 있으며, 이 조항이
포함된 사도신경을 인용하고 있다.21

6) The Presbyterian Reformed Church (PresRC)
https://www.presbyterianreformed.org/doctrine

PresRC 는 교단의 교리문서들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문답을 채택하고
있다.

7) The 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HRC)
https://heritagereformed.com/about-the-hrc/doctrinal-standards-and-worship/

HRC 역시고대 신경들 중에 교리적 표준으로 사도신경, 니케안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채택하고 있다. 다른 NAPARC 산하의 교단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8) The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RCUS)
https://rcus.org/doctrine/

“The Apostles’, Nicene, and Athanasian Creeds have often been called “ecumenical,”
meaning general or universal, because they have been accepted by all true, historic Christian
churches.”

21 https://formsandprayers.com/liturgical-form/

10

“Our commitment to the Heidelberg Catechism enables us to provide clear training for the
youth of the Church, giving a balanced and succinct treatment of what a Christian is to
believe and how he is to live.”

위 교단 RCUS 역시 참되고 역사적인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인 사도신조와 니케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에큐메니칼 신조로 인정하고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균형된 지침서로 인정하고 있다.

9)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OPC)
https://opc.org/BCO/BCO_2020.pdf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제 2 장, B. 3 항에 신앙고백에 관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a. Individual believers are to publicly profess their faith in Christ before God and his people
in order formally to pledge their commitment to serve Christ and to be welcomed into all
the privileges of full communion with God's people.

b. It is also fitting that the congregation as one body confess its common faith, using creeds
that are true to the Word of God, such as the Apostles' Creed or the Nicene Creed.22

총회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에 대한 어떤 논의도, 결정도 없었다. 그러나, 총회
홈페이지 Q&A 란에 2017 년 12 월 13 일,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에 관한 해석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질문과 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Question: What was Christ doing in the 3-day interim between death and resurrection? I had
always been told that he was preaching salvation to captives from the flood. Can you give
me the scriptures used to support that or the view that the OPC holds and its supporting
arguments?

OPC 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제공된 답의 전문을 옮긴다. 중요한 부분은
특별히 강조하였다.

Answer

Thank you for your question. It’s not an easy one to answer. The view that Christ preached to
captives from the flood is based upon 1 Pet. 3:18–20, where it says,

For Christ also suffered once for sins, the righteous for the unrighteous,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made alive in the spirit, in which he
went and proclaimed to the spirits in prison, because they formerly did not obey, when
God’s patience waited in the days of Noah,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in which a
few, that is, eight persons, were brought safely through water.

22 https://opc.org/BCO/BCO_2020.pdf 강조는 본인의 것임.

11

The usual Reformed view is that Christ by his Spirit preached to the antediluvian generation
through Noah, a preacher of righteousness (2 Pet. 2:5). As to why they are called “spirits in
prison,” Matthew Henry wrote:

Because they were dead and disembodied when the apostle speaks of them, therefore he
properly calls them spirits now in prison; not that they were in prison when Christ
preached to them, as the vulgar Latin translation and the popish expositors pretend.23

The only authoritative information concerning Christ’s activities during the time his body lay
in the tomb would have to come from the Bible, and this is one subject upon which God has
chosen not to give revelation. The Apostles Creed has the phrase, “He descended into hell.”
What the OPC believes concerning Christ’s descent into hell is stated in the Larger Catechism:

Q. 50. Wherein consisted Christ’s humiliation after his death?
A. Christ’s humiliation after his death consisted in his being buried, and continuing in
the state of the dead, and under the power of death till the third day; which hath been
otherwise expressed in these words, He descended into hell.

The Heidelberg Catechism (a doctrinal standard of the continental Reformation) has this:

44. Q. Why is there added, He descended into hell?
A. That in my greatest temptations I may be assured, and wholly comfort myself with
this, that my Lord Jesus Christ, by His inexpressible anguish, pains, terrors, and hellish
agony in which He was plunged during all His sufferings, but especially on the cross, has
delivered me from the anguish and torment of hell.

OPC minister G. I. Williamson has written:

There is no phrase in the Apostles’ Creed that has caused so much difficulty as this:
‘He descended into hell.’ Also, there is disagreement as to what the ancient church
meant when it included these words in this earliest Christian confession. Yet in spite
of the difficulty, the church has never been willing to remove these words. How then
shall we understand them? We cannot possibly take these words to mean that Christ, after
he died, went to the place where lost men go to suffer forever. We know he did not go
there because he told the believing thief who died at his side that he would be with him
that very day in paradise (Luke 23:43). The biblical meaning must be that what Christ
suffered on the cross was itself a descent into hell. Now at first sight it might seem
ridiculous to say that Jesus, in a few hours of suffering, could have experienced hell to
the fullest. But remember, he was divine as well as human. Remember, too, that his
human nature was sinless. Just imagine how great the suffering must have been for him
when he was forsaken by God. Yes, because of the uniqueness of Jesus Christ, it was

23 메튜 헨리는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장소적 개념의 지옥(음부)에 가셔서 실지로 전도
또는 승리선언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노아를 통하여 설교하셨던 그 구원을 이루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을 옥에 갇힌 영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언약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죽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상징적인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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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sible for him to suffer the full measure of the infinite wrath and curse of God—what
damnation is for the wicked. And because he did, you and I can be sure that God’s justice
is fully satisfied, so that we shall escape that damnation. Here is the Christian’s solid
basis for hope. (The Heidelberg Catechism: A Study Guide [P&R], 76)24

3. 결론
지난 45 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신학부는 NAPARC 에 속한 총회들이 ‘지옥에
내려가사’조항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조항에 관한 특별한
안건이나 신학적 논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예배모범이나 총회의 예배순서에 이
조항이 포함된 사도신경이 인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지난 총회와 이번 보고서를
통해 종합된 내용을 요약하면, 1) 기독교의 가장 초기의 교부들이 ‘음부하강’을 언급하고
있으며, 2)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이 보편교회의 신조로서 사도신경을 채택하고 있고, 3)
개혁 교회들과 총회들이 신앙의 표준으로 인정한 교리문서들이 이 조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4) 이 조항을 삭제하려는 주장과 몇 몇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조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어권 자녀들이 공 예배에서 사도신경의 “He descended into hell” 조항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교회들은 그 조항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가르쳐,
이 조항을 고백하는 것이 칼빈을 비롯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부요한 은혜에 관한 고백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한 우리 총회의 교회들은 비록 이 조항이 삭제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성도들에게 개혁 신학적 해석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다른 NAPARC 에 속한 교회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신조를 통해 대변되는
개혁교회의 일치성 또한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방삼석목사는 개혁신학대학원 대학교(M.Div.)와 화란자유대학교
(M.Phil.)에서 공부하였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Ph.D.학위를 취득하
였다. 현재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담임목사와 센트럴신학교 조
직신학 분과장으로 섬기고 있다.>

24 https://www.opc.org/qa.html?question_id=596 G.I. Williamson 의 이 말 “비록 이 조항만큼
해석이 어려운 구절이 없지만, 그러나 그 큰 어려움과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조항을
결코 제거하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결론이다.

13

<참고문헌>
Ambrose, On the Christian Faith, 3. From https://www.newadvent.org/fathers/34043.htm
Charles E. Hill, “He Descended into Hell” form https://journal.rts.edu/article/he-descended-

into-hell/
“Christ’s Descent into Hell”, from https://www.opc.org/qa.html? question_id=596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IV, 11, from https://www.newadvent.org

/fathers/310104.htm
Gregory of Nazianzen, Oration on Easter 45, from https://www.newadvent.org/fathers/310245.

htm
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10. 34, from https://www.newadvent.org/fathers/330210.htm
Irenaeus of Lyons, Against Heresies, from https://www.newadvent.org/fathers /0103427.htm
Mark Jones, “Keeping ‘Christ’s Descent Into Hell” from https://www.reformation21.org/blogs/

keeping-christs-descent-into-h.php
Philip Shaff and Johan J. Herzog, eds., “Descent of Christ into Hell” in: The New Schar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London & New York: Funk & Wagnalls co, 1909,
Vol. III, 410-412.
Richard Baukham, “Descent to the Underworld,” in: Anchor Bible Dictionary, vol. II. 156-158
Rufinus, Commentary of the Apostles’ Creed, from https://www.newadvent.org/fathers/2711.htm
The Book of Church Order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from
https://opc.org/BCO/BCO_2020.pdf
The Book of Church Order of PCA, from https://www.pcaac.org/wp-content/ uploads/2021
/08/KBCO-ALL-2021.pdf
The Directory of Public Worship for the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from
https://arpchurch.org/wp-content/uploads/2021/09/Directory-of-Public-Worship-click.pdf
The Liturgical Forms of URCNA, from https://formsandprayers.com/liturgical form/
이정석,“사도신경의 음부강하론”, 총신대 동창회보, 1989, 10, 16, from
http://theologia.kr/board_system/45616?ckattempt=1
필립샤프,『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교회사 전집 2 권(이길상,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PCA 웹사이트 https://www.pca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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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비판

이윤석 목사(뉴욕노회)

(들어가며)
신사도운동의 발전은 1830년대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 Edward Irving), 1900년대의 아프리카 독
립교회, 아주사 부흥운동, 늦은비 운동, 1970년대의 은사주의운동, 1970년 중반의 중국 가정교
회운동, 1970년 남미의 풀뿌리교회운동, 빈야드 운동에 이은 토론토 블레싱과 1988년의 빌헤몬
의 예언적 사도운동들이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교회성장학의 대가인 맥가브란의 영향을
받은 피터 와그너는 많은 교회들이 정체와 퇴보를 겪는 목회 현장의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
고 세대주의 신학과 더불어 상기한 실천을 종합하여 매우 주관적이며 혼합적인 신학과 성령운
동들을 종합하여 왔다. 이런 신학과 운동은 세계교회와 더불어 한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
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사모함을 가진 교회들로 하여금 무분별한 수용과 더불어, 개혁신앙의 바
른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 사역과 경건에 대한 심각한 폐해를 주었
다. 이에 운동가들과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되, 대표적 주장자인 피터 와그너를 중심한 고찰로
서 이에 대한 단순하고 제한된 개혁주의적 평가를 말하고자 한다.

1. 대표적 신사도 운동가들
1) 신사도 운동가의 선두는 와그너(C. Peter Wagner, 1930-2016)이다. 그는 미국 풀러 신학교 교
회성장학과 교수였다가(1971-2001) 그곳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하라는 소위 ‘선지자’의 예언에 따
라 새로운 일을 하면서 신사도 운동의 대표적 활동을 하는 인물이었다. 1993년 Global Harvest
Ministries를 시작해서 2011년까지 총재로 있었고, Global Spheres 부총재(Vice- President)이며 사
도적 대사(Apostolic Ambassador)라고 자칭하면서 이 운동을 해 왔었다. 존 윔버(John Wimber)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각 지역의 영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 개념,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를 하
여 각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영과 투쟁해야 함을 강조하며, 오늘날도 선지자가 있음을 강조하
였고, 성경적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통치하는 사도들이 있다고 하면서 현대의 사도들의 존재를
강조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에 대한 독특한 ‘통치 신학’(dominion theology)을 제시함으로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을 주도적으로 담당했었다.

2) 현대 신사도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국제 기도의 집(IHOP)의 마이크 비클
(Mike Bickle)다. 그는 어거스틴이라는 예언자와 관련된다. 공식적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그는 1982년까지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일반적인 목회 사역을 하고 있었고, 그의 주변
에는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그들로부터 예언을 받았다. 그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24시간/7일 연속기도회를 강조한다. 또한 ‘다윗의 장막’에서 ‘대접을 채우는 24시간 기도’를 계
속하고 있다. IHOP과 Kansas Fellowship 교회는 거짓된 예언, 비윤리적인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
의 몸된 교회에 엄청난 피해를 미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을 하지 않으며 계시의 구속역사적 점진성과 일관성을 총체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3) 캘리포니아의 패사데나(Pasadena)에 있는 추수반석교회(Harvest Rock Church)의 안재호 목사
로서 ‘체안’(Che Ah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피터 와그너가 조직한 12사도회의 초기 멤버
이며, 2008년에 있었던 토드 밴틀리(Todd Bently)의 사도 임직식에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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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신사도 운동의 대표적인 소위 ‘사도’이다.

4) 체험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기적들과 성령에 대해 강조하는 잭 디어(Jack Deere)는 체험한 것
에 근거한 신학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일상적
인 삶에서의 인상들과 들을 수 있는 음성과 꿈과 환상 등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고 한다. 그 자신은 끈기 있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오늘날도 특별한 음성을 직접 듣는 성령의 사
역이 계속된다는 입장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5) Bill Hamon도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가 성경을 보충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성경과는 대립되는 말을 한다. 그의 독특한 교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the Manifest Sons of God’)에 대한 교리는 새로운 뛰어난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 온 땅을 영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정복할 것이고, 이것이 그들의 하
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를 ‘요엘의 군대’(Joel’s Army)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그리
스도 재림 이전에 이미 온전케 되어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입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
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는 물리적으로 재
림하지 않고 우리들 안에서 재림하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들림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늦은 비 운동(Latter Rain
Movement)’에서 가장 이단적인 교리이며 종말론적인 이단사상이다.

6) 한국의 목회자들도 이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이들의 영향 아래 신사도 운동에 참여하
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와그너의 주장 가운데서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 영적 도해, 소속
교회들에게 십일조를 받는 사도 네트워크에 대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동일하게 주장하며 참여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성령
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합류한 교회들이 많고, 지금도 여전히 유사한 종류의 집회를 가지고 있
다.

2. 신 사도운동의 주장
신사도 운동이 주장하는 것은 주로, ‘오중목회’(Five Fold Ministry, 엡4:11),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 ‘통치 신학’(Dominion Theology)강조, ‘7대 산 정복’(Seven Mountain Mandate or
Prophecy, 사회적 도구들 통치), ‘종말 시대의 부의 대 이동’(The Great End-Time Transfer of Wealth,
‘사도 소유권’), ‘종말시대의 대회심’(Great End-Time Harvest, 사도들의 초자연적 기적을 통함).
‘하나님의 아들들의 현현’(Manifest Sons of God, 하나님의 심판 집행 대리인) 등등이다.

1) 초대교회의 중보자, 예언자, 사도의 직임이 오늘날에도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중보자의 직무는 원수 마귀가 설치해 놓은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뚜
렷하게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선지자들의 직무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직무이며 전체의 질서를 잡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늘
날에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딛 1:5). 와그너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초기 100-
200년간을 제외하고는 사도시대의 성경적인 교회체제가 확립되지 못했기에 사도의 직임이 사
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의 직임 회복을 통하여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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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존 교회를 ‘낡은 가죽 부대’, 신사도운동을 ‘새로운 가죽부대’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가죽 부대, 즉 제 2의 사도시대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면서, 예
수께서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씀(마 9:17)을 인용하여 기존 교회를 낡
은 가죽 부대로 규정한다. 전통교회가 쓰임 받는 시대가 지났고, 새 가죽부대 즉 제 2의 사도시
대 교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3) 신사도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탄의 계략에 빠진 ‘종교의 영들’이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종교의 영은 종교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변화를 막고 현상을 유지하는 일을 맡은 사
탄의 사자이다”라고 하면서, 신사도운동을 방해하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
의 영’이란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사탄의 계략에 빠진 영들이라고 칭한
다.

4)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기존교회의 운영체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도와 선지자와 같은 개인
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전통교회의 운영조직인 당회, 공동의회, 집사회, 총회 등은 낡은 가죽부대에 속한다
고 하면서 제 2의 사도 시대에 이러한 통치 권세는 사도적 권위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것은 사도와의 인격적 동의에 따라 성립되는 관계이다. 이 관계 안에서 사도는 영적 권위를 가
지고 목사들을 지도하며 그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역의 문제들을 해
결하는데 도움을 주며 영적 아버지로서 목사를 격려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목사는 사
도의 삶과 사역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공급하는 일에 섬기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5) 전통교회의 교회 중심 사역을 거부하고 일터의 사도적 사역과 지역적 사도적 사역 등을 주장
한다.
와그너는 신사도교회의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은 교회의 사역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들의 현장
에서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는 교회사역 대신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젼으로 전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터에서 발생하는 삶의 영역의 사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그 주장하는 일터는 “재정, 과학기술, 가사, 운송, 농업, 군사, 정부, 법조, 통신, 사업, 체육”
등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도는 지역전체를 관할하는 사역의 직무를 맡았
다는 것이다. 지역적 사도는 특정한 지역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궁극적 사역을
받은 자들이다. 와그너의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는 교회의 사역을 부인하는 견해에서 발생한 것이다.

6) 사도적 선포는 특별한 권세와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신사도시대의 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지시를 받고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뜻
을 이루게 하는 것. 즉 신사도의 사도는 지역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회복되도록 선포
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 61:10-62:4). 현실적 적용의 예를 들면 사도들이 어떤 지역에 가서 지역
을 향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선포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7)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새로운 영적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사도 운동은 제2차 로잔대회(1989) 이후에 루이스 부쉬의 10/40 창의 이론과 함께 발달한 영
적 도해를 그들의 내용으로 수용한다. ‘동일시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 자신이 직접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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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관여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 드리고 회개하는 기도)와 ‘사도적 중보
기도’, ‘땅 밟기’(prayer-walking), ‘전략적 차원의 영적전쟁’(strategic-level spiritual warfare)을 행한
다. ‘영적도해’는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이 세상역사에서 대등한 세력으로 대립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탄이 점령한 특정 지역을 정하고 땅 밟기, 대적기도, 선포기도, 귀
신을 쫓아내기 위한 축사기도 등을 행한다. [세계영적도해]와 같은 도서들은 이런 이론을 전제
로 저술된 것이다.

8) 지역의 영들과의 싸움을 복음전파를 위한 사역의 주된 임무라고 주장한다.
와그너는 전통교회의 복음사역에서 영적 전쟁에 대한 강조가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 제2의 사
도시대에는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 전도자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는 마닐라 제2차 로잔회의에서 ‘지역의 영들’(territorial spirits)이란 주제로 강의했고, ‘지역의 영’
들에 통찰력이 있는 25명 지도자들로 구성된 싱크 탱크(think tank)를 구성하여 ‘영적 전쟁 네트
워크’(SWN)를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 영적운동의 수준을 정하였다. 기초적 수준의 영적전쟁
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고, 주술적 영적 전쟁은 사탄주의, 마술, 뉴에이지, 프리메이슨, 동양
종교 등 조직된 악의 세력을 대적하는 사역이고, 그리고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은 '지역의 영
들'과 같은 높은 지위의 어둠의 정사들과의 싸우는 사역이다. 영들을 대적해서 싸운다는 의미에
서 와그너는 사도를 “하나님의 군대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하
였다. 이런 신사도 운동의 주장인 세대주의의 이원론 사상과 유사하며, 영적도해, 영적전쟁, 축
사, 땅밟기 기도, 예언과 대적기도 그리고 선포기도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9) 전통적 신학교 교육은 영적 전쟁의 대항 능력을 상실했다는 전제하에 신학교육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와그너는 정규신학교육은 실제적 영적 싸움에 대항할 능력을 배양하지 못하고 아카데믹한 지
식 교육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와그너는 신사도운동에서 사도로 인정받은 350명의 탁월한 지
도자는 국제사도협의회(ICA)의 통계에 의하면 60%가 정규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다. 와그너는 정규 신학교육의 무용론의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 훈련체제인 ‘사도적 교
육협의회’(ACEA)를 결성했다. 와그너는 또한 자신이 세운 리더십 연구소(WLI)에서 사도적 교
육 내용을 가르쳤다.

10) 전통신학과 교리 등은 인간의 지식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열린 신학'을 주장한다.
와그너는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
한 인간의 시도이다.”라고 하며, 기독교는 핵심적 절대 진리가 있는데 이 절대 진리를 해석과 추
론의 과정을 거처 각자의 주관적 이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식에 의해 그는 칼
빈의 5대 교리인 툴립(TULIP)을 절대 진리의 범주 밖으로 옮겨진 사례라고 주장하며, 그 사상을
반박한다. 그의 견해는 칼빈주의적이 아니고 존 웨슬레 적이다. 와그너의 또 다른 신학적 견해
는 그의 삼위일체론이다. 와그너는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을 선
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자신은 삼위일체론자이지만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을 수
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열린 신학’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오순
절 성회, 연합 국제 오순절 교회가 양태론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
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도적 지도자들은 여전히 삼위일체에 대한 강한 개인적인 확신들을 가
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선택할 때에는 우리의 교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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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부담을 가볍게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11) 사도적 지도자들의 완전한 성화론(perfectionism)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교사들보다 사도들을 더욱 엄격하게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사도로 공인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와그너는 사도적 지도자들의 온전한
성화를 요구하면서 개혁주의 성화론 보다 웨슬리의 성화론을 선호하는 입장에 선다. 자신은 개
혁주의의 신학적 견해인 성경의 권위, 이신칭의의 교리, 만인제사장설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주
장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사도적 교리의 핵심임을 밝히지만, 루터나 칼빈의 주장
들을 타협함 없이 굳게 붙잡아야 할 절대적 진리의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한다.
특히 개혁주의의 성화론의 약점은 웨슬리의 성결론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그
너의 주장은 16세기 재세례파의 완전주의 성화론과 유사한 주장이다.

3. 일반적인 문제점들
1) 기본적으로 와그너와 그의 동료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의도에 맞
도록 적절히 변경하면서 논의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그너는 신약 시대를 율법
시대와는 다른 ‘은혜의 시대’라고 언급하면서, 그런 상황에서 예언자의 존재를 믿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두 종류의 대적자를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 하나의 대적자들은 그의 세대주
의적 해석에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언약 신학적 대적자들이며, 또 하나는 그의 수정에 반
대하는 세대주의적 대적자들이다. 결국 그는 양쪽 신학을 다 거부하는 셈이다.

2) 그는 성경의 본문이나 다른 성경 구절에 있지도 않은 ‘중보자’(intercessors)라는 직분을 삽입
하고 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
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독특한 직분으로 이를 언급하면서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직분이다”고 한다.

4. 근본적인 문제점들
1)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오늘날에도 예언자(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사도직과 사도 은사가 복원됨으로 그
들을 통해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며, 성경 시대 사도들이 행했던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기사와
표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성경의 필요성, 권위성, 명료성과 충족성을
말하는 개혁주의 성경관과 전혀 맞지 않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듯이, 사도들은 성령
의 말씀을 받아 썼고, 그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경에 봉인되어
있는 것들을 가르치는 직분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로 새로운 교리를 만
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
야 할 뿐이다.
와그너 등의 목소리는 오늘날 가장 세련된 형태로 제시되는 직통 계시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와그너는 이런 예언이 오늘날에도 있다고 생각하며 1999년에 Colorado Springs에서 2,500
명의 소위 예언자들과 예비 예언자들을 모아 전국 예언자 학교(the National School of the Prophets)
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런 주장과 활동들은 AD. 156년경 예언과 방언을 하며 은사운동을 주
도한 몬타누스주의(Montanism)는 이단 이래 동일한 흐름이다. 초대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
죄하였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사도나 선지자나 에언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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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종결된 것으로 해석했다.

2) 캔사스 시티의 국제 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IHOP) 대표로 있는 마이크 비클은
자신이 목회하는 메트로 교회(Metro Christian Fellowship)에는 예언적인 꿈, 이상, 그리고 환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자. 캔사스 선지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체계적으
로 성경해석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장 부정적인 방식인 풍유적인 성경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 이 방법은 해석자가 자의대로 성경의 의미
를 추출하여 무리한 영적인 적용(spiritual interpretation)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이들이 가르치고 시행하는 어린 양의 결
혼잔치(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는 기독교 복음에 핵심인 구원론의 왜곡이요 종말론적
변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신사도 운동가들의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사용하는 ‘사도’라는 용어이다. 일반적인 직통 계
시파는 1세기의 사도들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면서 예언 사역이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비
해, 이제 와그너 비롯은 이 운동가들은 그 예언 사역과 건강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오늘날의 사
도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와그너는 2001년부터 둘째 사도적 세대(The Second Apostolic
Age)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도 지
속적으로 계속된다고 주장함으로, 그동안 장로교 개혁 신학과 정통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
해 온 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었
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과 이런 주장들을
기억해야 한다. 신사도운동과 같은 노선에 대해 성경적인 개혁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

4) 사도들의 완전한 성결의 삶에 대한 평가
와그너는 사도적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바울과 같은 거룩한 삶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와그너는 사도가 완전한 존재는 아니라는 전제를 하고 있지만 신사도운
동의 사도들은 초대교회의 사도적인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운동가
들은 현실적으로 사도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추문에 휩싸여 있다. 정이철에 의하면, 문신의 사
도로 33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는 타드 벤틀리(Todd David Bentley), 선지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밥 존스(Bob Jones), 동성연애자인 대예언자 폴 케인(Paul Cain), 또 다른 성추문에 계속 휩싸인
거짓 사도 테드 헤거드(Ted Haggard) 등 신사도 개혁운동의 운동가들의 이력에는 빈번한 감옥
살이, 마약, 정신병력, 사탄과의 불루스, 동성연애, 어린 시절부터의 빈번했던 천사들과의 만남,
무당 계보의 가문 등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결혼 하면 질투 나니 독신으로 살아
달라는 예수의 부탁을 들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도와 선지자로 자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
여 기도하는 캔사스시티의 IHOP의 참석자들 중에도 위와 같이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
다. 피터 와그너는 자신들의 사도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사도들의 도덕적 절대 우월성을 주
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와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실정이다. 와그너는 완전한 성화론을 위해
칼빈의 전적 타락의 원리를 떠나 알미니안적 성화론을 따르는 경향으로 진화하였다고 볼 수 있
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성결을 신사도 성결의 모델로 언급하지만 사실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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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자로서, 죄인 중에 괴수이며 곤고한 자라고 자백했던 것을 무시하고 있다.

5) 신사도 운동의 세계관 평가
신사도 운동은 역사를 사탄과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의 이원론적 구도로 해석하며 세대주의적
신학에 근거로 세상을 본다. 이런 운동의 한 실례를 들면 ‘Back to Jerusalem’을 주장하는 자들이
다. 이러한 신사도운동의 세계관은 전통오순절교회에서 추방당한 늦은 비 운동, 캔서스 예언 그
룹, 빈야드 운동과 토론토 블레싱 등을 모태로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전부 이단적인 주장을 한
집단으로 확인된 것이다. 김재성이 말하는 것처럼, 신사도운동의 세계관의 큰 오류는 이런 세
계역사를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공중에 권세 잡
은 자를 물리치는 영적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영광
을 돌리는 것이다."

6) 신사도 운동의 이적의 구분 및 평가
와그너는 자신의 치유에 대한 결과를 참된 치유로 변증하지만 객관적인 확실한 데이터는 제시
하지 못한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1986-1987년 동안 치유한 환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다는 것
이다. 그 설문 조사에서 전혀 차도 없음 18%, 조금 좋아졌음 28%, 상당히 좋아졌음 25%, 완전히
좋아졌음이 29%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회신된 편지의 82%가 기도 후에 효과가 나
타난 것으로 보고 자신의 치유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서술하였다. 치유해 준 병의 종류가 무
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환자는 시간이 가면 좋아질 수도 있고 많이 좋아질 수도 있고 그리
고 완전히 치유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된 환자들이 즉석에 완전한 치유가 이루
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치유 사건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가 말하는
치유의 이적들은 다른 종교나 무속 신앙에서도 발생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기독교의 핵
심은 이적과 기사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인격적인 삶을 사
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가들을 구별해 내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현상적으로 말한다면, 괴이한 소리 현상
(짐승의 소리, 괴이한 웃음, 울음, 방언), 괴이한 육체 현상(몸이 진동, 고꾸라짐, 술 취한 행동, 몸
부림과 경련, 성령 춤), 육감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쓰러짐, 금이빨, 웃음, 예언/점, 영 전이
/Impartation), 샤머니즘적 주술행위(팔다리 교정, 천사 출현, 환상) 등의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라
주장하고 독려하는 집회나 교회는 신사도 운동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박영돈은
그들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한다는 생각으로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김광렬은 한국교회에서 교회성장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널리 사용되는 G12를 신사도 운
동으로 결론지으며, 방언의 은사나 성령세례를 추구하는 G12 운동의 지도자들의 저서들과 삶
의 모습 속에서 사도적 은사와 이적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제3의 물결과 밀접한 관계성을 본다.
김광렬은 그들의 신사도에 대한 설명 속에 제 3물결의 지도자 와그너의 가르침이 그대로 반영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7) 신약시대의 교회와 현대 교회의 차이
(1) 사도들이 생존하여 함께 하던 때에는 사도가 말로나 글로 가르친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계
시였다. 주님은 그 가르침을 사도들을 통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오직 이미
성경에 기록된 것만이 사도적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1세기의 그 사도들은 처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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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교회의 사도들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사도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직도 주어지던 시대였는데 반해, 우리 시대에는 주
의 재림 때까지는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없는 시대이다. 바빙크의 말처럼, “그 때 성경이 종결
되어… 특별 계시(revelatio specialis)의 새로운 구성적인 요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첨가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고 그의 사역은 성취되었으며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성경의 성문화된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3) 사도 시대의 이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계시를 확증해 주는 사도적 이적
(apostolic miracles)인데 반해, 우리 시대의 이적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며 사도적 이적과 같이 계시를 확증해 주며 선포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 제안)
신사도운동의 문제는 바른 신학의 상실, 그로 인한 성경의 핵심 진리와 개념들과 교훈을 왜곡
함, 부흥에 대한 오해로 교회의 외적 성장에 치우침과 예배 형식의 붕괴, 성령의 인격과 직분과
은사에 대한 극단적인 오해, 복음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
하거나 축소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은사로 교회 공동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미신자들을 그
리스도께 초대하게 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비성경적인 사도성과 은사 중심의
사역만을 강조한는 성령운동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개혁교회와 개혁신앙를 무너뜨
리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교회는 사도 시대의 교회와 현시대의 교회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고,
또 반드시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현대 교회가 바른 교회이려면 반드시 ‘사도적 교
회’(Apostolic Church)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1세기 사도와는 다른 사
도들이 있지 않고,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전처럼 성령님께서 친히 말씀으로나 꿈으로나 이
상(vision) 가운데서 직접 계시하시고 그의 뜻을 보여 주시는 일이 없다. 1세기 사도들이 바로 우
리의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교회는 사도 시대의 교회와는 다르다. 이런 점에
서 사도들의 교회와 현대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 시대의 교회는 아직도 계시가 주어
지는 교회였고, 현대 교회는 이미 주어진 계시에 근거하는 교회이다. 현대 교회는 이런 현저한
차이들을 염두에 두기에 우리들이 다른 것을 생각해 내거나 창안해 내기보다는 1세기 사도들
이 가르친 그 사도적 가르침(apostolic teaching)에 근거하여, 그 사도적 가르침을 보존하고 유지
하며 선포하고, 성령님께서 영감하여 그 사도적 가르침의 내용을 성경으로 기록해 주신 것을 존
중해야 한다.

그 동안 오직 교회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목회자들은 이를 위해 온갖 종류의 교회성장 프로그
램을 선호함으로 일시적 효과를 가져왔지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데는 실패하였다.
교회역사는 교회가 말씀 중심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항상 부작용을 경험한 것을 초대교회 이단
들과 중세 교회, 16세기 재세례파와 같은 영성주의자들을 통하여 보아왔다. 20세기에 오순절운
동의 여파로 나타난 주관적 성령의 은사체험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반면에 교회에 혼란을
주었다. 이런 은사주의 중심의 성령체험은 신사도 운동을 낳았고, 신사도 운동의 교회관은 기
독교 세계관까지 뒤 흔들어 놓았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통해 교회는 은사중심의 주관적 영적
체험에 의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성령에 감동된 계시의 말씀 중심
의 목회를 통해 올바른 교회로 견고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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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그리스
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건강한 신앙,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적 목회관을 가지고 참된 부흥과 교회 성장을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상기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본교단 산하 교회들은 신사도운동의 비성경적 위험성을 깊
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신사도운동에 동조하거나 참여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고: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의 총회결의>
1)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측은 제 57회(2007)와 59회(2009) 총회에서 신사도운동을 불건전한
사상으로 규정했으며 관련저술 탐독 금지와 강사 초빙 금지, 집회 참여 금지를 결의했다.
2)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신측은 94회 총회(2009)에서 그 이단성을 지적하고 참여금지를 결의했
다.
3)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은 100회 총회(2015)에서 신사도운동을 엄히 경계하라고 결의 했
다.

<이윤석 목사는 총신 신학대학원(M.Div)과 Westminster신학교(NT, Th.M),
Biblical신학교(OT, Th.M)에서 공부하였고, Reformed신학교에서 D.Min.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뉴욕 부르클린제일교회 담임목사와 동부개혁신
학교 교수로 섬기고 있다.>

<참고 문헌>
*정이철, 이인규 등이 저술한 문헌과 인터넷 기고문 등을 통해 한국의 신사도 운동을 분류하며,
그 이름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이런 참고 문헌에서 밝히는 신사도 운동에 속한 부
류는 저자들의 주관적인 연구 결과임을 전제로 한다.
김재성,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서울: 킹덤북스, 2013)
이인규, 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 (서울: 대림문화사, 2011)
정이철, 교회 운동에 빠진 교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피터 와그너, 정운교 역, 피터 와그너의 제 3의 바람 (서울: 하늘 기획, 2006)
피터 와그너, 김영우 역,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서울: 쉐키나, 2006)
김광렬, “21세기 성령연구: 제3물결에 대한 개혁신학의 평가” [개혁논총] 17권 (2011):133
이신열,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의 설교에 드러난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
판” 개혁논총 6권(2207): 149
김재성, “IHOP 과 마이크 비클의 문제점” http://www.christiantoday.us/18278
이승구, “신사도운동 등 다양한 예언운동의 근본적 문제점”
https://blog.daum.net/bjc3028/7209393
심창섭, “개혁신앙에서 본 신사도운동”, https://www.church-heresy.com/news/article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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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코스’와 ‘두 날개 프로그램’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비판

김동수목사 (뉴욕동노회)

본인은 알파코스와 두 날개 운동을 알아보고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I. 알파코스
알파코스(Alpha Course)는 영국 런던에 있는 '성 삼위일체 브롬프톤'(Holy Trinity Bromptom
Church) 성공회 교회에서 1976 년에 당시 주임신부였던 찰즈 만함(Charles Marnham)에
의해서 시작된 전도 프로그램이다.25 만함 신부는 불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비공식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한시간 동안 이야기(talk)를 하고,
한 시간 동안은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토론하는 시간으로 4 주 동안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다.26 알파코스는 1981 년에 존 어바인(John Irvine), 1985 년에
니키 리(Nicky Lee)에 의해 조금씩 변화를 겪었으며, 1990 년에 니키 검블(Nicky Gumbel)에
의해서 발전되었다.27 알파코스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누구신가 등 15 개 질문을
가지고 매주 한 번씩 모여 자유토론을 한다. 김성규는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talk]가
끝나면 잠시 차와 간식을 나눈 후, 소그룹 모임에서 토크[talk]에서 나온 주제들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무엇이든지 질문하고 이야기하며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 이
과정중에 합리적인 복음의 논리가 정돈되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소그룹에서
의문이 해소되어, 생동감 있는 신자로 태어나게 된다.”28 알파코스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주말 수양회다. 이 때 알파코스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들은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남은 삶을 최대한 선용할 수 있을까?'”29
등의 주제들에 대해 토론한다. 따라서 알파코스는 그들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전도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알파코스의 신학적 판단은 “성령의 능력에 한 표적과
기사를 체험하도록 하는 '능력전도'야 말로 가장 강력하며 성경적인 전도방식”이라고
믿는다.30

알파코스는 유명한 신학자나 기독교 리더들을 앞세워 그 운동의 성경적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예를 들어 패커(J. I. Pack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파코스는
복음의 열정이 있는 전도와 양육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으로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알파코스를 적용하여 좋은 열매를

25 김병훈, “알파코스란 무엇인가?” Accessed March 6, 2022 at http://kccnews.net/news/forum/5886
26 김성규, “알파코스란?” Accessed March 7, 2022 at

https://blog.naver.com/PostView.nhn?isHttpsRedirect=true&blogId=gilsans&logNo=20062203626
27 Ibid.
28 Ibid.
29 김병훈, “알파코스란 무엇인가?”
30 Ibid.

24

거두었기에 기꺼이 알파코스를 추천합니다.”31 한국교회에서도 조용기, 이동원, 김삼환,
김장환, 김의원, 최홍준, 전병금목사등이 알파코스를 현대교회의 강력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이라고 추천했다.

그러나 알파코스는 기성교단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삼의 물결의 가르침을
기성교단으로 도입한 운동이다. 구세군과 천주교의 지지를 얻어냈고 군소교단의 많은
교회가 그 전도 프로그램을 이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알파코스 운동은 에큐메니즘을
지향하는 만큼 그 교리에 있어서 비성경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알파운동은 존 윔버의
표적과 이사의 사역을 받아들여 능력전도 방법을 발전시켰다.32 그들의 회심의 현상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의 기쁨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생활양식으로의 회심을
의미한다. 알파운동이 의미하는 기독교적 생활양식은 반복되는 축복들, 초자연적
성령체험, 영적 파티, 놀이시간들을 말한다. 알파운동이 말하는 성령체험은 토하기, 웃음,
떨기, 쓰러짐, 짐승소리, 방언, 몸이 뜨거워짐, 몸이 타는듯함, 황홀경을 가리킨다. 이
현상들은 성령세례로 규정된다.

영국 더비셔 (Derbyshire)에 있는 개혁주의교회인 크리치침례교회(Crich Baptist
Church) 목사인 크리스 핸드(Chris Hand)는 알파코스의 이단적인 요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단지 추상적 개념으로서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고만 말한다.33 둘째,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자시고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알파코스는 인간론에 있어서 믿음 밖에 있는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엡 2:3)이고, 죄로 타락해 있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크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고 말한다. 넷째, 회심은 믿음과 회개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감정 정도다. 이와 함께 영국 월쌈스토우(Walthamstow)의
사우스그로브자유장로교회(South Grove Free Presbyterian Church) 목사인 고든 퍼거슨
(Gordon Ferguson)도 알파코스는 하나님의 공의적 속성을 무시한채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신론을 가르친다고 비판한다.34

총신대 신대원의 서창원교수는 크리스 핸드의 글을 인용하면서 “알파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며 알파에서 인간의 곤경은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처럼 심각한

31 Accessed March 6, 2022 at

https://blog.naver.com/PostView.nhn?isHttpsRedirect=true&blogId=mgm621106&logNo=2203190079

17

32 “The Dangers of the Alpha Course,” accessed March 7, 2022 at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alpha.html
33 Chris Hand, “The Alpha Course,” accessed March 7 2022 at

http://www.banner.org.uk/misc/alpha.html

34 Gorden Ferguson, “The Alpha Course in the Light of Scripture 1,” accessed April 17, 2022 at

https://www.bibleleaguetrust.org/the-alpha-course-in-the-light-of-scripture-1/

25

것이 아니며 알파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다.35
김광열교수도 알파의 문제점은 알파가 하나님의 직접계시와 사도적 차원의 예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들이 말하는 예언이나 계시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신자가 경험하는 성령의 감화나 조명의 역사 차원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는 21 세기의 ‘신사도’ 혹은 ‘제 2 의
사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받는 계시’를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36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병수교수도 알파코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성령론에 심각한 편향성을 나타낸다는 데 있을 뿐 이니라,
성령체험을 실현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인위적인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데 있다.
영국산 알파코스는 1999 년부터 한국교회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알파코리아), 그 후 놀랍게도 훨씬 더 많은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첨가된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요소들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본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37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의 이인규는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성령에 대한 양태론적인
표현, 가계저주론 그리고 교회마다 다르지만 주말수양회에서 행하여지는 빈야드운동의
현상적인 집회였다고 비판한다.38 본질적으로 알파코스의 표적과 기사를 중심한 능력전도
방법은 왜곡된 성령론에 기초한 것으로 바른 믿음과 거룩한 삶을 통한 제자운동을
저해하고 기형적 신비주의를 양산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서 알파코스는 합신에서는 참여금지(2009/94), 통합에서는 엄격배제
(2009/94/금이빨 사건 등), 기성은 복음적이나 가계치유는 경계 (2009)로 규정하고 있다.39
이와 함께 우리 교단 (KAPC)에서도 알파코스에 대한 엄격한 참여금지와 교류금지를
선언하는 것이 가한 줄 안다.

II. 두 날개
두 날개 운동은 부산 풍성한교회의 김성곤목사가 시작한 양육전도프로그램이다.
김성곤목사는 “초대교회는 두날개로 날았다 두 날개라는 표현은 셀교회운동을 하는
분들이 이름을 붙였다. 한 날개는 축제예배요 한 날개는 소그룹이다. 언제부터 교회는 한
날개를 잊어 버렸다. 잃어버린 날개는 바로 사단이 만들었다”라고 말했다.40 그는 “이제
잃어버린 한 쪽 날개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35 “알파코스, 그리스도는 없고 성령만 남았다,” accessed April 16, 2022 at

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1685

36 Ibid.

37 “알파코스 비성경적 요소들 첨가 성령체험 인위조작,” accessed April 16, 2022 at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9

38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accessed March 1 2022

https://researchheresy.com/board51/391.

39 Ibid.

40 오명옥, “두 날개의 신앙 교리적 문제들,” accessed March 16 2022

http://researchheresy.com/board51/1223

26

우리교회는 지금 셀그룹을 통해 잃어버린 한 쪽 날개를 회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41
그의 두 날개 양육시스템은 보수교단신학교총장들의 추천하에 한국의 수천개 교회가
이를 도입해서 실시하고 있다. 두날개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한 이인규에 의하면 두
날개는 알파코스 운동이 발전하여 생겨난 운동이다. 이인규는 알파운동이 G12 로,
G12 가 D12 로 바뀌고, D12 가 두날개로 바뀐 것으로 이해한다.42 알파운동에 빈야드가
접목되었고, G12 에는 신사도운동이 접목되었고, 두 날개에는 신사도운동 뿐
아니라, 다락방과 같은 심각하고 위험한 많은 이단성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43
이인규는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G12 는 신비주의적인 직통계시와 예언을 근거로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반적인 견해로는 G12 는 카스텔라노스가 알파운동과
순복음교회의 셀 조직을 변형시킨 것이며, 그것에 신사도운동적인 성향을 접목시킨
것”이라고 본다.44

현재 예장합동은 G12 가 이단성이 있다고 공식 규정하고 있다. G12 는 콜롬비아
보고타의 MCI 교회 목사인 세자르 카스텔라노스가 창시했다. 그의 책을 보면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나거나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수십번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중요한
문제도 아닌 일상적인 경우에도 직접 주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45 소위 “하나님의
음성 듣기”이며, 이 점에서 세자르 카스텔로노스는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을 신령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이 손으로 자신을 만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손길이 만지는 곳마다 무거운 죄가 벗겨진다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그는 이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말한다.”46 이인규는 “D12 두날개는 직접적으로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G12 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랄프네이버와 로렌스콩 계열의 G12 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47 싱가폴의 로렌스콩은 피터 와그너의 12 사도 중의
하나이며, 그가 주장한 셀교회의 명칭은 ‘신사도적 셀 교회’였다. 로렌스콩은 “1986 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하고 G12 를 도입하여 1986-91 년까지 70 개의 셀,
94 년까지 1200 개의 셀로 증식하였다고 주장”했다.48 그는 자신의 책 “신사도적 셀교회”
157 쪽에서 자신의 신앙공동체침례교회(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가 “성공적인
셀교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1991 년 존윔버와의 집회를 말하고 있다.

41 김성곤,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86; 재인용, 풍성한교회: 두 날개 성장학. 종교와 진리

6 월호. Accessed March 17 2022 at https://researchheresy.com/board51/1208

42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43 Ibid.

44 Ibid.

45 Ibid.

46 Ibid.

47 Ibid.; “풍성한교회: 두 날개 성장학,” 종교와 진리 6 월호. Accessed March 16 2022 at

https://researchheresy.com/board51/1208

48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27

그 책 157-160 쪽에는 쓰러짐, 거룩한 웃음, 성령의 기름부으심, 귀신축사, 성령춤, 바닥에
구르는 현상이 등장한다.”49

G12 는 다양한 단체로 한국에 도입 되었으며, 그 후 다양한 명칭으로 활동
중이다. 이인규는 G12 가 두날개와 동일한 한 부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거의 유사하거나 혹은 다른 용어로 사용하더라도 그 기본 셀조직과
신사도운동과의 연관성은 거의 대등소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건전한 신학과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현상적인 집회를 혼합하고 있다.”50 이 단체들은 교회성장이라는 구실로 그
프로그램을 미화하고 정당화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한 “교인수의 성장은 대부분
수평이동이며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현상적인 집회로 인한 일시적인 급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51 이는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므로서 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고 있는 이단교회들의
성장과 유사한 것이다.

이인규는 “‘두 날개’라는 의미는 건전한 신학과 건전한 성령의 역사의 양면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날개는 건전하지 못한 신학과 함께, 신사도운동의
잘못된 현상적인 영성운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불건전한 신학과 이단성이 농후한
영성운동의 양면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52 이인규에 의하면 “두
날개에서 가르치던 실제 내용을 녹취한 내용이 부산 풍성한교회의 서로 다른 몇
사람으로부터 제보 받았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두 날개는 알파나 G12 보다 더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음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53 두날개에 대한 이인규의 위의
평가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두날개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 합신 이대위의 검토에 의하면 두날개 사상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날개는 알파코스와 같이 단순한 양태론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자체를 공동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한 후에 비로소 삼위일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54 “셀그룹은 주님이 만드신 공동체요
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분의 임재와
능력과 목적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5 “주님의 십자가의 가장 큰 고통은 죄로
인한 공동체의 관계에서 분리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로 인해(죽음)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56

둘째, “두 날개는 가계저주론과 죄 유전론을 가르치고 있다.”57 죄는 버리지 않으면
상속되기 때문에 같은 죄가 흐르는 것을 끊으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고질적인 질명,

49 Ibid.

50 Ibid.

51 Ibid.

52 Ibid.

53 Ibid.

54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accessed March 10,

2022 at https://researchheresy.com/board51/1380

55 풍성한 교회, 제자의 삶, 66; 재인용, 오명옥, “두 날개의 신앙 교리적 문제들.”

56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57 Ibid.

28

알콜중독 등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두 날개는 아담이
지은 불순종의 죄가 그의 자손들에게 흘러내려 갔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피속에 죄가 흘러
이 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58 이는 문선명, 박태선, 박윤식등의 혈통유전설과 피가름
사상과 유사한 것이다. 두 날개의 ‘전인적치유수양회’ 교재를 보면 잠언 26:2 을
인용하면서 가계저주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잠언 26:2 은 가정에 닥친 저주나
조상의 죄 때문에 내가 받는 저주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이 전혀 아니며, 반대적인
의미로서 남을 이유없이 저주하지 말라는 뜻이다.”59

셋째, 두 날개는 사단은 죄를 통해 들어와 견고한 진을 구축한다고 말한다. “견고한
진은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에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지은 요새”다.60 “사단이
구축한 견고한 진은 혼연(Soul Ties)에서부터”이다. 김성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처들 대부분은 견고한 진이 되어
우리를 옭아매고”61 견고한 진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가정과 사회생활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내안에 견고한 진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파해야 한다고 말한다.62
“견고한 진을 파하는 방법은 내면의 쓴 뿌리를 발견하고 적은 쪽지를 불태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견고한 진 불태우기 의식은 다음과 같다. “견고한 진을 체크한 후 나눔은 하지
않고 소각장으로 나와서 각자 체크한 것을 소각로에 넣은후 함께 1 분 정도 기도한 후
조장이 ‘견고한 진’을 외치면 조원들은 ‘무너졌도다
3 번’ 선포한다. 조장이 ‘우리는’ 외치면 조원들은 ‘승리했다’ 3 번 선포한 후 견고한 진을
태우기 시작한다.”63 이는 무속적인 의식을 통해서 죄를 회개하는 방법인데 이것이
비성경적인 것은 말할 나위없다. 이인규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말한다.64

넷째, 두날개는 히브리서 12:15-17 절을 근거로 “예수를 믿어도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쓴 뿌리가 있다는 것”; “쓴 뿌리 때문에 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쓴 뿌리 때문에 축복의 문이 닫히고 삶의 전 영역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쓴 뿌리도 상속된다는 것”을 주장한다.65 그러나 히 12:15 절에서
말씀하는 “쓴 뿌리”는 신자에게 내재된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단적 사상으로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교회안의 거짓선생이나 위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58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59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60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61 김성곤,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 (아시아코치센터, 2001), 106.

62 Ibid.

63 “D12 다이아몬드 양육시스템 견고한 진 태우기 방법”;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 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64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65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29

다섯째, 두 날개는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하는 삼분법을 가르치며, 은사는 영을
뚫고 혼과 육이 나오는 것이다. 즉 자기안에 계신 성령님이 밖으로 나타는 것이 은사라는
것이다. 영접기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과 혼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66 나아가
신자의 영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도 지방교회나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사상으로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김성곤은 은사를 활용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말한다. 그는
은사론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말하기를, “육체가
빳빳할수록 성령이 나타날 수 없다. 내 육체의 굳은 마음이 성령님을 가둔다…굳은 몸을
푸십시오. 춤을 추십시오…찬양할 때 춤을 추지도, 박수치지도 않은 굳은 육체에는 성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경건이 아니라 경직이다. 성령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9 가지 성령의 열매이다”라고 말한다.67

여섯째, 두 날개는 또한 다락방의 교리인 기도 응답권, 사단 결박권, 천사 동원권,
천국시민권, 세계정복권 등을 수용하고 있다.

일곱째, 두날개는 신사도운동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영적도해사상” (그 지역을
묶고 있는 악한 영들의 지도); 견고한 진을 파하는 “선포기도”; 특이한 방언기도. 두날개는
현상적인 집회가 표현하는 쓰러짐, 진동, 입신, 웃음, 짐승소리, 투시등을 자연스러운
성령운동으로 언급한다.68 이는 빈야드운동을 수용한 것이다.

여덟째, 두날개는 기름부으심을 중생과 다른 사건으로 본다. 이는 신사도운동이
기름부으심을 하나님의 임재라고 가르치는 것과 유사하다. 나아가 신사도운동에서 소위
부의 이동, 가난의 영을 끊는다는 가르침처럼, 예수를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노골적인 기복신앙, 소위 번영신앙을 가르치고 있다.69 이는 조용기목사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아홉째, 김성곤은 두 날개 시스템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본래 두 날개로 하늘높이 날아올라 하나님의 임재앞에 이르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세워졌다”고 말한다.70 김성곤은
“주님이 12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비젼이 본인에게 위임되었고 본인 또한
제자들에게 2 천 2 만 비젼을 위임하고 있다”; “비젼이 위임되면서 권위역시 함께
위임된다”라고 가르친다.71 김성곤은 주님께서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교회가 셀교회였고
셀은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셀은 제 2 종교개혁이라고 말한다. 그는
셀교회가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교회라는 근거를 사도행전 2:42-47 절에 둔다. 그러나 이
구절은 셀교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김성곤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김성곤은 “‘두날개교회’는 개혁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세속주의를 근절하고
성경이 가르치고 제시하는 초대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으려는 ‘교회회복운동’이다.
건강한 교회로 회복되는 교회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스승의 삶을 믿고, 본받고,

66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67 3 차 집중훈련 강의, 전인적 치유 수양회 강의; 재인용, 오명옥, “두 날개의 신앙 교리적 문제들.”

68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69 Ibid.

70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71 Ibid.

30

따르며 스승과 같은 비전을 품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목숨 바치는 주님의 제자들의
교회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한다.72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는 알파코스, G12,
D12, 신사도운동, 빈야드운동, 다락방 등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두날개양육시스템을
만들어 교회성장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채택한 한국의 수천개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교리는 성경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단적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두날개시스템의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이 교회 전도에 유익하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나 기존교회의 틀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있고 두 날개 지상주의로 마치
두 날개 시스템이 하나님이 디자인한 교회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과거에
알파코스나 G12 나 D12 나 두 날개나 거의 동일한 방법과 위험한 사상과 교리가 있어
목회자들에게 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이 된다. 목회자들이 각자 분별해서 두 날개
시스템을 운용해야 하리라 여겨진다. 두 날개 양육 시스템에 위험한 이단적 사상을 배제할
수 없다면 이 시스템을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이고 이단적 사상을 배제하고 좋은 전도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다면 분별하고 유의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고 판단된다.”73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의 이인규는 “두날개는 건전한 신학과 건전한 성령운동을
슬로건으로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정통신학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더 이상 건전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단들의 사상을 일부
도입하였고, 또 성경적인 양육프로그램도 아니며,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을
접목함으로서 건전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74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도 두날개에 대해서 연구 조사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이 일부 교회 양적 성장을 바라는 목회자들에게
교회 전도와 교회성장에 유익하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나 기존교회의 틀을 파괴한
다는 점(제직회나 당회, 성가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목사중심으로 만드는 일)에서 위험
성이 있고 목사와 성도들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만들어 절대적인 복종관계로 만들어가
는 위험성과 교회를셀 그룹 리더들을 양산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가
지고 있으며 두 날개 지상주의로 마치 두 날개 시스템이 하나님이 디자인한 교회요, 기성
교회는 잘못된 교회인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리고 두 날개 시스템의
양육프로그램의 조속한 수정을
요구하며 “온전한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교회들이 이를 단호히 경계하고 금지하고
배격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한다.

본 발제자도 위의 비평들이 두 날개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날개는 알파코스와 빈야드의 비성경적 성령론 그리고 이단적인 신사도운동의 교리에
개혁주의신학 언어의 옷을 입혀 만든 셀그룹 중심의 양육전도 프로그램으로서
불건전하고 기형적인 교회성장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김성곤목사가 진정으로 두 날개의
비성경적 교리를 수정하며 바른 교회론을 진작할때까지 우리교단(KAPC)을 포함한

72 김성곤, 두날개를 말하다 (고양: 도서출판두날개, 2011), 24.

73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두날개 시스템에 관한 연구.”

74 이인규, “두날개(김성곤목사)의 문제점.”

31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두 날개 양육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교회부흥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가한 줄 안다.

III. 참된 성령체험
우리는 알파코스와 두날개의 공통점은 비성경적인 성령체험 현상을 바른 성령체험으로
둔갑시켜 수평이동으로 교인수를 증가시키고 이를 교회부흥으로 호도하고 교계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말씀을 중시하지 않고 혹은 왜곡하며 이상한 영적
현상을 성령체험이라고 속여서 우매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요한
웨슬리는 집회중에 사람들이 웃고 “펄쩍펄쩍 뛰는 것과 같은 열광주의는 사람들의
‘단순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사단의 책략이라고 보았다.”75 해너그라프는 진정한
성령체험과 가짜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짜 부흥운동은 예수님을 존중하는
대신 자아를 존중한다. 영원한 진리 대신 세상의 진리를 말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
떠들썩한 열광주의를 표방한다.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 대신 신비적인 성경 해석을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자기부인적인 사랑 대신 자아중심적인 사랑을 말한다.”76

교회 역사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의 임재함에 대한 간증을
남겼다. 에딘버러의 존낙스의 후계자인 로버트 부르스, 존 프레스톤, 죠지휫필드 등도
특별한 성령체험을 간증했다. 웨슬리도 올더스게이트에서 성령의 임함을 통해 자신의
죄가 씻어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죠나단 에드워드도 1737 년 어느날 숲속을 걸닐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처럼 고요하고 신선하게 보였던
이 은혜가 하늘 위에서 말로 나타낼 수 없이 탁월하게 나타나 보였다. 모든 생각과 상념을
삼키기에 충분히 위대한 탁월함을 가진 분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났다. 거의 한 시간
가량 나는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없어져 버리고 소멸된 것 같이 느꼈다.
어떻게 달리는 표현할 방도가 없다. 영혼의 열심이 먼지속에 파묻혀 버리고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 있었고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 영혼이 완전히 성화되고 신적이고 천상적인 순결로 깨끗해진 것 같이 느꼈다.”77
여기서 에드워드의 성령체험은 어떤 것인가?

마틴 로이드죤스는 참된 성령체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78 참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기죄로 인한 깊은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감을 가지고 깊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를 인해 이들은 계속되는 영적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기도와 간구로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렸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이와 반대로 가짜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환상이나 환각에
대해 말을 말이 한다. 이들은 퀘이커교도들처럼 성경의 가치를 절하하고 특이한 육체적
체험을 더 중시한다. 이들에게는 외경스러운 느낌이 없으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꼈다는
증거가 없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75 행크 해너그라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이선숙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9), 329.

76 Ibid., 206.

77 디 마틴 로이드 죤스, 성령론. 홍정식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86), 212.

78 Ibid., 22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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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참된 성령체험을 하는 자들의
또하나의 특징은 이들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예수님을 위해서 재산과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이를 religious affection이라고 말했다. 해바라기가 항상 해를 향하듯 성령의 내주하심을
입은 자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참된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있는 자들로서 주님을 위해 고난도 달게 받으며 바울과 같이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여기서 로이드죤스가 말하는 참된 성령체험은 중생후에 나타나는 성령충만의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오순절교회가 말하는 중생후 2차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또한
빈야드운동이나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캘빈은 1세기에
성경의 기록이 완성됨과 함께 예언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는 끝났다고 말했다.79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씀이 곧 성령이다라고 말씀했다 (요한6:63).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성경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어지면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씀한다 (고전12:3). 그리고 예수님을 주로 믿어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신 자이다 (롬5:5).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성령세례는 중생을 의미하며 중생이후 성령의
임함은 성령충만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엡
5:18). 그것은 우리가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범사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엡 5:19-20). 이는 우리가 매일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을 바탕으로 한다. 이같이 우리는 매일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을 통해 성령충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롬12:1-2).

이와같은 관점에서 알파코스와 두날개는 성경적 성령론을 바탕으로 한
전도양육프로그램이 아닌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본 발제자는 우리 교단이 교단 산하
교회들이 알파코스와 두날개의 전도양육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이에 대체되는
성경적 전도 양육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동수목사는 Westminster 신학교에서 공부하고(M.Div.), 동 대학원
에서 성경해석학으로 Ph.D.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바울신학원
원장과 Denver 신학교외 여러 신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섬기고 있다>

79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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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자료> 조병수 교수 알파 문제점 지적

본 기사는 예장합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병수 교수의 글로서, 이 자료는 합신 이대위 김성한
목사가 제공한 글임을 밝힌다<폅집자 주>.

▲ 조병수 목사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 독일 뮌스터 대학교(Westaeflische Wilhelms-Universtitaet)(Dr. theol.) 신약학/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1988-1990) /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1991-1994) /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현대교회는 목회를 위한 고민에 빠져있다. 나는 이런 고민에 관해 이미 2001 년
정암신학강좌에서 발표한 “셀 목회와 현대 목회의 전략”(신학정론, 19 권 2 호
2001 년)이라는 글에서 목회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개진한 적이 있다. 이런 목회 고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첫째로 어떤 방식으로 목회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이것은 목회의 성격에 대한 고민으로 신자들을 향한 목회를 가리키기 때문에 교회 내적인 성격을
띤다. 목회자들은 이런 고민을 예를 들면, 성경을 교육하거나 기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둘째 고민은 어떤 방향으로 목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목회의 방향에 대한 고민은 대체로 신자를 지향하는 목회이냐 아니면 불신자를 지향하는
목회이냐 하는 것으로 갈라지는 것 같다. 개략적으로 볼 때 아마도 알파코스란 이런 목회방향성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필자는 지난 2008 년 5 월 15 일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열렸던 알파코스 평가 세미나에서
두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하나는 알파코스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파코스와 소위 G12
셀목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지면상 알파코스의 성경적인 문제점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1. 알파코스의 요점.

영국의 성공회 신부들에 의해서 시작된 알파코스는 15 년 정도 걸린 교정 작업 끝에 한국에까지
보급되었다. 만함이 예수, 성경, 기도, 확신을 가르치는 4 주 코스를 만들었고(1976 년), 어바인이
주말수양회(성령의 날)를 더해 10 주 과정으로 확대한 것을(1981 년) 니키 리가
체계화했고(1985 년), 니키 검블이 15 개 토크 주제로 알파코스를 완성했다(1990 년).
언뜻 보면 알파코스의 요점은 ALPHA 의 첫 글자 해설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Anyone can come),
“배움과 웃음”(Learning and Laughter),
“식사”(Pa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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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도움”(Helping one another),
“질문”(Ask anything).

그러나 후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사실 이런 해설에는 알파코스의 정체가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과장된 포장이 있을 뿐 아니라(배움 같은), 게다가 많은 것(성령론 같은)이
감추어져 있다. 우선적으로 이 해설에서 드러나는 것은 초청을 통한 불신자전도, 식사를 통한 교제
상호도움이라는 수평적 관계이다.

2. 알파코스의 내용과 문제점.

알파코스가 무엇인지는 교과서처럼 중시되는 니키 검블의“알파 시작하기”(1998 년, 영문은
1994 년)에 명확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알파코스의 입문서로서 알파코스 운영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 한 권만 읽어봐도 알파코스의 전모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1) 불신자 전도(능력전도)의 문제점.
검블의 설명을 따르자면 알파코스는 전도를 위한 구상으로서 그 주안점은 불신자 전도에 있다.
알파코스가 말하는 전도는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전도이며, 전도를 전 인격(머리와 마음과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능력전도(이적)에 중점을 둔다.

알파코스는 고전적 전도(말씀)와 총체적 전도(사역)를 인정하는 듯이 말하면서도
능력전도(이적)에 주력한다. 바로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11 주 과정으로 진행되는
15 개의 토크가 사용된다. 이 모든 과정의 정점은 중간쯤에 놓여있는 주말수양회이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주일 점심에 끝나는 주말수양회는 주로 성령교육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처음에는 토요일 오전에 성령의 정체와 성령의 활동에 관해 각각 간략하게 교육(토크)을 하고
저녁시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지 집회가 열린다. 이 집회는
사역시간이라고 불리는데 이때 불신자 전도를 위해 성령 충격요법이 도입된다.

검블은 알파코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진정한 알파코스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알파코스가 말하는 성령의 충격을 가져다주는
능력전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방언이다. 알파코스는 성령충만의 방법을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파코스의 주말수양회에서 종종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

알파코스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방언을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까닭은 성경과 경험을 모두 다
비추어 보건데 방언은 사람들이 받는 최초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검블의 주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며 동시에 비역사적인 주장이다.

성경과 경험은 현상적으로만 보아도 방언이 언제나 최초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실수는 자칫하면 성령의 은사를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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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어보면 성령의 은사는 어떤 것이든지 성령에게서 왔다는 점에서 이미 모두
초자연적이다. 게다가 이들의 주장은 마치 사람이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알파코스의 말대로
하면 방언)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듯이 생각하게 만드는 오류를 저지른다.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바를 따르자면 신자들 가운데는 알파코스가 말하는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방언)를 가지지 않은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마치 소위 최초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아야만 전도가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람을 오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방언 은사
체험을 극심하게 강조하는 알파코스의 주말수양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
사용된다는 데 있다.

검블의 말을 따르면,“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라는 토크 끝에 자신이 성령을 초청하여
방언 은사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방언 은사가 내리기를 기도하겠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서 눈을 감고 성령을 받기 원하면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요구한다.
그가 이렇게 요구하는 이유는 몸의 언어가 사람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받을 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이렇게 내민 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는 표시가 된다고 그는 믿는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첫째는 사람에게 어떤 권위가 있기에 감히 성령을 초청하여 은사를 내리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이런 포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방언 은사와 관련하여 알파코스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방언 은사를 받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인위적인 방법을 더 사용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알파코스는 방언을 말하기 위하여 자기최면을 강요한다.

알파코스는 방언을 말하고픈 사람은 입을 열고 모국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 외의 다른 말로
말하기를 시작하라고 강요한다.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억지로(자의로) 아무렇게나 말하고는 방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도취(최면)행위이다.

둘째로 알파코스는 사람들에게 방언 따라 하기를 강요한다.

알파코스는 사람들이 방언을 받도록 기도할 때 가장 큰 장애가 심리적인데 있다고 본다. 첫소리를
내는 순간이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일단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보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알파코스의 진행자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런 어려움을 설명한 다음에 자신이나 다른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따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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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시작해보라고 권한다. 그런 후에 진행자는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천천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알파코스의 이와 같은 방언 조작행위는 협동설에 의존하는 것 같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알파코스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알파코스는
이것야말로 성경이 보여주는 사상이라고 강변한다.

2) 토크의 문제점.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알파코스에는 15 개의 토크가 준비된다. 토크는 요점, 예화, 적용이라는
세 가지 형식을 띠면서 대략 45 분 정도 소요된다. 토크는 주로 토의식(질의응답)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자주 참석자들은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토의를 좋아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알파코스에 의하면 토크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십자가에 달리심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알파코스는 하나님과의 관계란
회개와 믿음과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을 받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사적 체험을 가리킨다. 바로
여기에서 알파코스의 신학이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알파코스의 토크에는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 같은 교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알파코스에도
성장사다리라고 부르는 양육 체계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성령론에 치중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신학을 결여하고 있다.

알파코스의 신학적인 문제점은 대표적으로 교회론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 소그룹에 중점을 두는
알파코스의 교회론적인 문제점으로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알파코스는
12 명 정도로 이루어진 그룹을 가장 이상적인 크기로 간주한다. 알파코스가 이렇게 소그룹의
인원을 제한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알파코스가 소그룹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파코스는
절대로 2 명 또는 3 명으로 이루어진 소그룹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알파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파코스는 소그룹을 우정(사람들 사이의 관계)을 개발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여긴다. 이에 더하여 알파코스는 행사에의 참여가 마치 구원의 표증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경향이 매우 짙다.

그러나 알파코스의 교회론 문제는 이렇듯 일반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알파코스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검블이 쓴 “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는 마지막 부분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신약성경에 100 개가 넘는 교회에 관한 이미지와 비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를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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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미지이다.

검블은 교회(에클레시아)를 사람들의 모임(집회/회중)이라고 정의하면서, 전 세계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교회(핍박받는 교회, 제 3 세계 교회, 자유세계의 교회)와
지역교회(대규모교회, 중간규모교회, 소규모교회)로 구분한다. 그는 보편교회를 공간적으로만
이해하고 시간적으로는(과거, 현재, 미래) 이해하지 않으며, 지역교회를 성경의 지지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 성장학 연구가들의 견해를 따라 크기로만 구분한다(따라서 그의
교회론에는 성경구절이 하나도 인용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알파코스의 교회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입증된다. 검블의 주장을 살펴보면
교회(에클레시아)와 관련하여 주로 수평적 차원으로 회중을 강조할 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라는 수직적 차원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회중도 없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단락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은 교회에게 붙인 백성
개념이 전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백성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사실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검블의 생각대로 하면, 왕이신 하나님과 백성인
교회에 각각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둘째로 검블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됨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형제자매로서 사귐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는 단지 이 사실로 교회를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만
부각시킨다.

검블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훨씬 진리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예를
들면, 예정과 선택<엡 1:3-14>; 부활과 중생<벧전 1:3-12>).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예배든 사역이든 무엇에도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코스에서는 이 점이 너무나 약하다(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검블은 형제자매의 사귐을 모든 문화의 장벽을 초월한,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기분
좋은) 사귐으로만 설명하는 데서 문제점을 일으킨다. 이것은 교회론과 관련하여 너무나 보랏빛
나는 사귐만을 알려주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런 설명은 교회를 아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든다.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의미의 사귐만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진정한 사귐에는 신랄한 질책으로부터 나오는 고통도 있기 때문이다(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것처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관하여 가르치실 때 이런 점을
강조하셨던 것이다(마 18 장). 다시 말해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권징과 치리로서의 사귐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이다.

셋째로 알파코스의 지도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하는데 특히 성도들의 하나 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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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함을 제시하면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순전히
수평적인 차원에서만 설명한 것이다.

이와 달리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할 때 무엇보다도 수직적인 차원을
중요시한다(에베소서, 골로새서).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채,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의 관계만을 언급하는 것은 교회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도록 만든다.

불행하게도 검블의 책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하지 않으면서 몸인 교회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신 질서를 버리고 다시 무질서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엡 1:10).

신약성경은 교회론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또한 구별된 권위의
분량을 감당하는 직원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엡 4:11).

넷째로 신약의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거룩한 성전이라는 이미지가 도입된다.

알파코스는 신약의 교회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정의하면서 교회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성령론에 편중된 교회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교회가 삼위일체론적인 교회로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이 구절에 의하면 교회의 건립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은 목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건립의 범위이며, 성령은 건립의 도구이다.

또한 알파코스에서는 교회론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언급하면서 평신도 신학을 옹호한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설은 본래 구원론에서 나온 것이지 교회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직제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중점을 둔다.

마지막으로 검블의 책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이미지로 설명되는데, 여기에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목적이 빈약하게 서술되었다.

맺는 말.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간략하게 살펴보아도 알파코스는 성경이해에 결핍현상을 진하게 빗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해의 부재는 반드시 신학의 부재를 낳는다. 특히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성령론에 심각한 편향성을 나타낸다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성령체험을 실현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인위적인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국산 알파코스는 1999 년부터 한국교회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도입되었는데(알파코리아),
그 후 놀랍게도 훨씬 더 많은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첨가된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요소들이
첨가되었다기보다는 본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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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목회의 방향이 이렇게 설정되는 까닭은 아마도 목회자들이 현실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성장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 목회자들은 양적 부흥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알파코스 식의 “재미”가 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것 같다. 사실 현대의 목회에서는 재미
때문에 사람이 모이는 현상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진리의 전달은
소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사라지고 재미만 남는다. 진리에 의한 재미(요이 4; 요삼 3-
4)가 아닌 다른 재미는 교회를 위험하게 만들뿐이다.(목회와 진리수호제공)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9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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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학적 방향성

방동섭 목사(서가주노회)

I. 들어가는 글

최근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용어가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신학 저술이나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신학적 토론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한국 교회
내부에서도 신학을 연구하는 서클이나 학자들이 이에 관한 신학적인 논문 혹은 저술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다. 2014년 한국선교신학회에서도 이 주제의 시대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특집을 다룬바가 있다. 이렇게 활발하게 진행되는
토론이나 연구 활동은 교회와 선교의 미래적인 측면에서 고무적인 일이지만 염려가 되는
면도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 내부에서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용어가 많은 경우 잘 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용어의 지지자들
사이에도 혼선을 일으키면서 매우 다양한 의미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용어가 내포하는 신학적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선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염려가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II. 용어 사용의 혼동

그렇다면 이 용어의 사용이나 그 개념에 있어서 이렇게 혼동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선교적인 측면이다.

1. 역사적인 측면

우선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 사용이 교회 안에서 혼동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이 용어가 신학이라는 무대와 교회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 시간적으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어 사용에 혼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 용어가 처음 신학이라는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매우 최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 대 이전의 신학적인 저술이나 역사의
기록을 찾아보면 우리는 이 용어를 거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용어가 교회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유포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대럴 구더(Darrell L. Guder)가 편집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책이 출판된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북미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복음과 문화 네트워크’(The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의 토론과 신학적 연구의 결과로 출판되었다.

그렇다면 20세기 후반에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이렇게 교회 내부에서 대량 유포되어
갑자기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구 사회에서 최근 교회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쇠퇴하는데서 기인하고 있다. 한 때 기독교 국가라고 불렸던 서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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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에서 교회가 쇠퇴하면서 기독교 후기 사회가 되어가고,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사회로 변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구의 선교학자, 신학자,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본격적인 신학적인 토론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런 토론 과정을 통해 서구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교회 정체성 회복과 위기 극복의 목적으로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용어가 활발하게 사용되어지게 된 신학적
배경에는 선교 학자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사상적인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신학계에 등장하게 된 이 용어를 기독교 내부에서 모두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분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인 개념을 토론하는 기회를 충분하게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사람들이 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는 교회 내부에서 이미
유포되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이 용어가 신학적으로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했고 확실한 개념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마치 유행어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결국 용어 사용에 있어 혼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신학자들과 관심 있는 지도자들이 이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시간과 연구에 정진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선교적인 측면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혼동을 일으키게 된 또 다른 원인이 있다면 교회
내부에서 오래 동안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던 ‘선교하는 교회’라는 용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설명하거나 혹은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강조할 때 많은 경우 ‘선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 또는 ’선교 마인드를 가진
교회’(Mission-Minded Church)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해왔다. 일반 교인들에게 강한
선교적인 도전을 주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나 강의를 통해 이런 용어들을 많이
사용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들어와 기독교 후기 사회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교회는 점점 더 심각한 선교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이 아무리 ‘선교하는 교회’ ‘선교 마인드를 가진 교회’ 라는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선교적인 사명에 대해 강조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감동을 받거나 선교적인
도전을 받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선교하는 교회’ 혹은
‘선교 마인드를 가진 교회’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으며 더 이상 영향력을 줄 수 없는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 내부에서 선교적인 움직임이 축소되는 위기적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 함께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 내부에서 등장하게 된 선교 신학적인 개념이 있다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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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에 자주 올리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게 된 이 용어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처음부터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교회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기존에 사용하고 있었던
‘선교하는 교회’ 혹은 ‘선교 마인드의 교회’라는 용어와 거의 동일한 의미이지만 새롭게
표현되어 사용하는 개념으로 혼동하게 되었다.

III. 선교적 교회의 정의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는 대체 무슨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가? 이 용어는
‘선교’라는 단어와 ‘교회’라는 두 단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많이 사용하고 있는
두 단어가 연결된 용어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는 두 단어로 연결된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사람들에게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교에 대한 정의나
이해의 측면에서 쉽게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용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1) 우선 ‘선교적 교회’는 단지 타문화권 선교 사역을 강조하는 교회를 묘사하는
용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용어와 지금까지 교회 내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왔던 ‘선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라는 용어 사이에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용어 사이에 내포하는 의미와
지향하는 방향성에 있어서는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선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 올리는 생각은
무엇인가? 교회가 타문화권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해외 선교사를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가 해외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거나 혹은 이미 파송된
선교사를 협력하여 후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생각 할 것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해외
단기 선교에 보내거나,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자주 개최할 때 ‘선교하는 교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교회 주보나 교회 회지에 파송한 선교사나 협력하는 선교사 명단을 많이
올릴 때 사람들은 그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라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 반면에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선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라는 개념과 유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선교와 교회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는 신학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개념이 될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사를 타문화권에 많이 파송하거나 그들을 후원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선교적 교회’가 이런 사역을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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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선교적 교회‘를 강조한다고 해서 이런 사역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선교 개념을 이해할 때 전통적인 선교
개념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선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은 ‘선교’를 교회의
타문화권 사역이나 프로그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교회를 진정한 교회 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다.

2) ‘선교적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의
이원론적 ‘선교’ 개념을 넘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선교에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동안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파송 받은 선교사에게 선교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교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교인들에게는 단지 선교사를 후원하는 역할에 충실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교적인 교회’가 이해하는 선교의 개념은 소수의 전문적인 선교사들에게 선교
사역의 모든 것을 맡기고, 대다수의 교인들은 파송된 선교사들을 기도나 물질로 후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라는 단어 앞에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단어가 붙여졌을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백성으로서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과 소명”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적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교인이 선교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선교는 교회의 사역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회의 본질’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선교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으며
신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사상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동안 전통적인 교회는 오래
동안 이 사실을 간과해 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누구나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거나 또는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점을 매우 정확하게 인식하였던 사도였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에 대해서 말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
사도 베드로가 사용한 ‘선전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엑상겔로’(εξαγγέλλω)라고 하는데
‘왕을 대신하여 왕의 뜻을 전하는 행위’(declare)를 뜻한다.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위해
살아야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는 단지 그의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 불러 주신 것이다. ‘선교적 교회’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선교 사역을 단지
교회 내부에서 특별하게 헌신하고 파송된 사람들의 계층의 사역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선교의 사명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을 것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선교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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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교적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으로 끌어드리기 위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나 어떤 전략적인 접근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선교하는 교회는 성장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선교 개념에 대해 ‘교회성장학적’ 입장에서 접근을 했던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런 측면에서
선교를 실천하게 된다면 선교는 교회의 가시적인 성장이나 확장을 가져오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게 될 것이다. 교회가 선교하는 목적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 건물이나 조직 안으로 많이 끌어오는 것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좋은 위치에 보다 편리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교회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다면 엄청난 재정과
에너지를 사용하여서라도 다양한 종교 프로그램을 만들어 종교 수요자의 요구에 맞도록
공급하였다.

20세기 말 ‘선교적 교회론’이 새롭게 등장하였을 때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수명을 다해 가는
‘교회성장학’을 대신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교회 성장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또 하나의 교회 성장 전략은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실천할
때 그 목적이 교회의 가시적이고 숫자적인 성장을 통한 교회의 대형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교적 교회’는 지금까지 가졌던 선교 이해나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선교적 교회론’에서 강조하는 교회가 선교하는 목적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로서 그 나라를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선교적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통해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드리는 가시적 교회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서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선교하는 것이다.

4) ‘선교적 교회’는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 이후 점점 사라져
간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진입하면서 교회 안에서
교회가 붕괴되는 심각한 현상을 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교회들이 교회가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면서
흔들리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론이 서서히 그 의미를 잃어가는 현상을 보면서 이 시대의
교회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인들도 영적으로 방황하면서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이단이나 타 종교로 개종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현상의
일차적인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이 가시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에너지와 교회 자원들을 소진하는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교회는 단지 종교적인 상품을 공급하는 단체로 변질이 되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으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선교적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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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교회가 행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사역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체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 초기 300년 동안
교회는 매우 강한 선교적 특성을 갖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의 교회는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본분으로 이해하였다. ‘선교적 교회’는 바로 이러한 교회의 선교적
특성 혹은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우리가 ‘선교적 교회’를 교회
정체성 회복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교적 교회’는 “단지 교회의 삶의 또
다른 국면이 아니라, 교회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전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의 정립은 주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포스트모던적 시대에 직면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IV.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방향성

우리가 만일 ‘선교적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그 의미를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근거와 그 개념이 추구하는 신학적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1. 선교적 교회와 신론

최근 40년 동안 기독교의 선교의 방향성은 교회 내부에서 의미심장하게 변하게 되었음을
사려 깊은 선교 지도자들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 중심적 선교로부터
하나님 중심적 선교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대럴 구더(Darrell Guder)는
이런 관점에서 “교회 중심적 선교 이해는 금세기 동안 하나님 중심적 기독교 선교 개념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선교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전환되게 된 이유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각 속에 선교에 대한 심오하고 중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인식 변화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많은 지도자들이 교회의 선교에
관하여 처음부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출발하였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선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교는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라는 말도 된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선교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모르면 실천이 불가능한 선교다.
따라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교회는 선교를 실천할 때 가장 먼저 선교의 근거와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기독교의 선교는 무엇보다 신론적
이해를 근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존 스타트(John Stott)는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의 정체성은 반드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교에 그 기초를 두어야 분명하게 들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적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선교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께
근거를 두어야 ‘선교적 교회‘가 나가야 하는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선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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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이 세상에서 선교를 실천하려고 시도할 때도 그 당위성과 그 근거를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만큼 ‘선교적
교회’는 선교에 헌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적 실천이 없는 교회는
선교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선교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신론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지가 선교의 무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선교
현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신학과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선교하는 백성들로 세우시기 위해 또 선교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이 시대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교는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의 결과로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철저한 인류
박애 정신을 가진다고 해도 기독교 선교는 그런 마음에 근거하여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 위임하여주신 선교는 이 세상 사람들의 어떤 자선사업이나
사회사업과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선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새롭게 이해하게 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신구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또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주시기도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선교는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없이 시작되는 선교는 사실 진정한
선교일 수 없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가 세상에서 ‘선교적 교회’로 세위지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을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그의 성품을 배우고, 세상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를 정의를
내린다면 ‘선교적 교회’는 어떤 제도나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읽고 이
세상에 나가 선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교적 교회’이다. 맥닐(Reggie McNeal)은
‘선교적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구속적인 선교 사역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구원받고 그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선교적 교회’인 것이다.

2. 선교적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선교적 교회’를 다룰 때 놓쳐서는 안 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적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성이다. 앤드류 컥(J. Andrew Kirk)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통치 혹은 주권을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채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의 선교학 연구 분야에서 학자들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의 관계성을 다루는 것임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지도자들이 ‘선교적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성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선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벤 엥겐(Charles Van Engen)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하여 교회를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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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면 교회의 선교의 넓이와 깊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교회의 선교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처럼 주장을 하거나 하나님의 나라 어떤 영적 권세를 가진 것처럼 과도하게 자신을
나타내고 행동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 우선 교회의 기원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통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지상에서 존재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준다.
“교회는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것들에 대한 도구이며 표지이다.” 더 나아가 교회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종으로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해스팅스(Ross Hastings)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성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나라의 공동체이며, 그 나라의 종, 그 나라의 표지, 그 나라의 최종적
완성의 예표이다”라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죄악성으로 인해 다양한 문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때로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심지어 타락한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의
중심좌의 위치에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현재적으로 또 분명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로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이런 교회가 선교에 헌신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선교에 헌신할 때 교회는
가시적으로 성장하거나 그 힘이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의 선교는 “교회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관련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선교에 헌신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가 선교의 출발점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한다.

물론 지상의 교회가 선교적인 실천에 헌신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종 교회가 선교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런 표현들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하여 ‘세운다’ 혹은 ‘확장한다’는 신약의 어법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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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대한 신약의 어법은 “받는다” 혹은 “들어간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주인이신 주권적인 하나님께서만이 세우실 수 있고, 확장하실 수 있고,
완성하시게 될 것이다. 교회는 다만 선교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무엇인지
세상에 증거하고 알리는 사명이 있을 뿐이다. 앤드류 컥(J. Andrew Kirk)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련성에 대해 매우 적절하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나라의 의미와 관련성을 의식적으로 전파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선교적인
실천에 헌신할 때 교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단지 힘 있고
부유한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돈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선교를 실천할 때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이해하면서 긍휼과 자비의 사역, 치료와
회복의 사역, 정의와 개혁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선교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하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단지 어떤 종교적인 조직이나 단체가 선교
프로그램이나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을 매순간 경험하는 공동체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그 결과 이 세상 사람들은 ‘선교적 교회’의
증거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증거의 사역,
선교의 실천은 “우주의 재창조를 위한 새로운 인류의 표상인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이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종인 교회에 의해서만 실천될 수 있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소망 속에
살아간다. 교회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며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면 선교의 실천이다. “선교에 헌신하고 있을 때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기에 이 땅에서 그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선교의 사명에 헌신하게 된다.

3. 선교적 교회와 성육신

성육신(incarnation)은 선교를 개념화 하는 과정에 있어서 혹은 선교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가장 폭 넓게 사용되는 주제어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당연히 성육신의 주체는 성자
예수님이시다. 사도 요한은 성자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 ‘거하셨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케노’(σκηνόω)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장막을
치다'(encamp) 혹은 ‘거주하다’(reside)는 뜻이다. 영원하신 분이 우리의 이웃으로 오셨으며,
우리 가운데 거주하시게 된 것이다.

성육신은 이 세상이 창조되어지기 전에 선재하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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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신 것을
뜻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체휼하셨다”는 것은 ‘숨파테오’(συμπαθέω)라고 하는데 이것은
‘함께 고통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셨다. 벌코프(Louis
Berkhof)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님은 “무한자이시기에 유한한 관계
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으며, 초월자이시기에 이 세상 역사의 현장으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들어오실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 성육신 사건은 오직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성육신은 이처럼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성자 예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예수의 성육신적인 삶과 정신은 예수님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성육신을 통해 이루신 것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통해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다가오시는 방법이 성육신이었다면 우리도 세상에 다가가는
방법이 성육신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적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공동체이다. 예수님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교회는
내려가야 하고,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선교적 교회’가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선교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출발점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실 수 있었던 근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께서 자신을 비운 삶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빌 2:6-7). 여기 “자기를 비우다”는 것은 헬라어로 ‘케노’(κενόω)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예수님이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어떤 의미로든지 절대적이고 내재적인 속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전능하신 분이고,
전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선교적 교회’는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연약한 자를 조금 도와주는 사역에 관심을 갖는
개념이 아니다. 또 재정적으로 더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뭔가 원조해 주는 개념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로서 문제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전하는 교회가 아니가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죤 스타트는 기독교인들의 선교는 예수님의 성육신이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모든 진정한 선교는 성육신적 선교이며, 성육신은 정체성(identity)의 상실 없이
동일시(identification)되는 것을 요구 한다”고 하였다. 이런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이 요구된다. ‘거룩한 세속성’은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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