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鹽商安岐의 書譜와 書畵收藏에 對하여
韓相奉 (韓國書藝金石文化硏究所)
1. 序論
2. 安岐의 生涯와 活動
3. 書譜의 種類
4. 安岐의 書譜刊行과 그의 書藝觀 그리고 鑑識眼
5. 結論
1. 序論
朝鮮 鹽商安岐(1683~1745) 字는 儀周, 号는 麓村 또는 松泉老人이다.
중국 淸나라 康熙와 乾隆年間(1622~1795)에 중국에서 활동한 朝鮮人 염
상이자 書畵收藏家였다. 그는 祖父때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歸化를 하였는
데 조선에서 어떻게 중국을 건너갔는지? 또 출신과 本貫에 대하여 알려
진 바가 없다. 그의 조부 安三은 강희제의 權臣인 明珠(1635~1708)의 家
人이었고 父 安圖(本名:尙義:字는易之)는 명주 아들인 明揆敍(1674~
1717)의 家人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안기의 家系를 언급한 가장 자세한
것은 1752년 蕭奭(生卒未詳)이 쓴 「永憲錄」에 記述되어 있다. 또 안도
의 아우 安葑이라는 이도 있었는데 그는 강희제의아들인 允襠
(1683~1726)의 僕이었으며 揚州에서 역시 염상을 종사하였다고 한다.
安岐는 아버지와 더불어 天津과 揚州를 오가며 권신인 명주의 비호아래
소금장사로 많은 富를 축적하였다. 그의 本業은 염상이나 많은 財力으로
중국 歷代의 수많은 古書畵를 수집하는 열정을 가졌다. 또 안기는 書譜
번각본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그가 세상을 등지기전 墨緣彙觀(1742년
序)이라는 冊도 저술하였다. 묵연휘관은 그가 살아서 수많은 서화를 감상
하고 느낀 의미를 墨과 因緣이 있어 그의 古雅한 자기의 예술세계를 접한
것에 대한 감회의 표현한 말이다. 책은 書法篇 2卷과 名畵篇 2卷으로 이
루어 졌으며 時代別로 서화작품들의 감상에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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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 수많은 수장가들 과 그들의 印章 題跋 작품 수집 경위에 대한 언급은
18세기 회화사와 서화수집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지침서로 인정받
고 있다. 그의 연구와 자료가 빈약한 국내에서는 몇 편의 논문이 있을 뿐
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발표된 자료를 바탕으로 嘉慶 己卯年 秋九月의 樓
雲山館 黃至4珍藏이었던 書譜 跋文을 여기서 논하여 보고자 한다.
2. 安岐의 生涯와 活動
안기 그는 어려서부터 讀書를 좋아하고 法帖과 名畵를 사랑하였으며
특히 鑑賞과 收藏에 뛰어나 當時의 作家들은 대부분 그의 소장 작품이었
다. 특히 현재 대만과 북경 故宮博物館에 전하여지는 수많은 작품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는 점 게다가 그 자신의 수장품 중 좋은 것은 乾隆皇帝
御府에 進上되었다.
나머지는 江南지방으로 흩어져 버렸는데 정리는 墨緣彙觀을 저술하여
감상과 수장이론을 수립하고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
고 있다.
蕭奭이 쓴 永憲錄을 보면 안기의 형제에 대해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그의 형제는 세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의 둘째
형이 吳鎭과 沈周의 그림을 소장하여다는 기록과 안기 초상화인「麓村高
逸圖」의 발문 중에 奉題麓村三兄淸照 “녹천의 셋째형이 초상에 제하다.
라는 내용을 토대로 알 수 있다. 그 형제들의 이름은 확인이 되지 않으
나 안기는 그중 三男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 徐方達 교수는 묵연
휘관을 기록 정리할 때 安元忠이라는 아들이 있어 출판에 참여한 것으로
말하였다. 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서화애호 취미에 영향을 받아 王鑑의
「倣山水畵冊」에 그의 收藏印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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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岐의 家系圖>
安三 安圖(本名 : 安尙儀․字 易之) 長子 : 安某
鹽商(明珠의 家人) 鹽商
明揆敍의 家 次子 : 安某
安葑
鹽商 安岐(1683-1745)
允襠의 僕 鹽商
書畵收藏家
安元忠(18세기)
書畵收藏家
安氏一家는 조선이라는 모든 기록에 보이는데 실제로 안기는 모든 그림중
에 朝鮮人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16세기 이후 中國으로 넘어간 조선인이
많았다 해도 안기처럼 조선인 출신임을 공식적으로 표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民族意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기
의 집안이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으로 다음 두가지로 추론할 따름이
다.
丁卯胡亂(1627)과 丙子胡亂(1639)으로 이어지는 淸의 두 차례 침략 기간
동안 중국으로 끌려갔거나 넘어간 조선인이 많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에 跳越한 조선인들은 封禁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
을 숨긴채 金三, 朴二, 徐七등과 같은 성 다음에 숫자를 붙여 이름으로 만
들었다. 안기 조부의 이름이 安三인 것을 보면 당시 관행으로 볼 때 본명
이 아닌 오히려 도월한 조선인 또는 被가人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周凱(1779~1837)의 「內自訟齋文集卷8」에는 안기의 집안은
조선에 온 淸의 사신을 따라 갔다는 것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使臣 明
揆敍와 관련해 추론의 여지가 있어 추측케 할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안기가 염업을 시작한 계기는 아버지 尙儀의 가업을 이은 것이며 젊은
나이에 염상이 되었다. 안씨 일가가 중국에서 염상이 된 시기는 모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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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주의 政治的 전성기와 상당히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淸末학
자 端方은 안기를 천한휘상<徽商賈之賤> 천하에서 제일가는 염상<爲鹺
商甲天下>라고 평한 바 있다. 여기서 그가 안기를 휘상이라고 한 것은 안
기가 徽州출신 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江南지역, 특히 양주지역에서 활
약하였던 상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안기는 청나라 시대 양주지역의 최고염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
다. 그의 名聲은 단순히 巨富에 그치지 않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활동했던 양주지역의 염상들은 書院과 도로를 건설하고 敎育과 慈善사업
을 펼쳤고 원림을 경영하며 圖書를 수집하거나 雅會를 개최하며 文人과
知識人들의 創作活動을 도왔으며 화가들에게 창작환경을 提供하고 書畵를
수집하여 공급함으로 書畵市場을 형성시켰고 戱班을 운영하거나, 出版業
을 열어 文化市場 또한 활성화 시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안기의 명성은
바로 당시 양주 지역 염상들이 儒商으로써의 활동, 문화후원자로서의 기
여에 이바지 했다고 할 수 있다. 안기의 문화예술 후원을 알아보기 위해
서 동시대 활약하였던 유명한 화가 王翬(1632~1717)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왕휘의 字는 石谷이고 江蘇 常熟사람으로 안기 당시 화가인
데 그는 안기를 위하여 모두 4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 마지막 당시 84세
되던 해의 <雲山競秀圖> : 墨筆設色(365×438.5) 天津藝術博物館 소장을
보면 그는 안기의 장수를 기원하였다.
강희 을미(1715) 9월 녹촌선생의 탄신을 봉축하며 아울러 가르침을 바
랍니다. 오목산인 왕휘<康熙 乙未 九秋 奉祝 麓村 先生富誕幷祈 敎正,
烏木山中人 王翬>라는 題文을 달았다. 그리고 卷末에 이런 內容을 썼다.
"녹촌선생은 풍류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서화에 조예가 깊었으며 작품평
가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존경을 바고 있다. 이전에 소주의 규방에 그와
어깨를 만지며 마음을 터놓고 교류할 때 나의 보잘 것 없는 작품을 잘못
좋아하시기에 걸어두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였으나 저속함을 아랑곳 하지
않으시기에 이 그림을 그려 증정한다. 이전에 선생은 방치된 작품을 수
집하여 古今의 名蹟이 대나무 상자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
중에 배를 타고 방문하여 미공개 된 진귀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실질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만 진주가 눈앞에 있지만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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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을 더럽힐까 두려웠을 뿐이다. 常熟 海虞의 耕煙野老 왕휘가 다시 題
를 쓰다. 이해 나이 84세 麓村先生主盟風雅, 深志翰墨 鑑別品題 尤爲海
內所推重 囊者把臂吳閨 論心道故 謬嗜 拙筆極口弗置 不揣芙陋 寫此爲贈
向聞搜羅藏葉 古今名迹 充盈筐箸 他日扁舟造訪 倘許盡窺珍秘 則敎我實多
但恐珠玉在前 只益形穢耳 海虞耕煙老 王輩再題 時年八十有囚.
이 작품은 왕휘의 만년 작품으로 왕휘가 안기를 매우 소중하게 존중하며
그의 수장가로써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그림은 안기의 安儀周家珍藏(朱文)이라는 수장인은 두 사람의 관
계를 분명하게 말하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왕휘는 죽기 전, 1717년 안기를 위하여 <仿 李營丘小景>을 그렸는
데 이 그림은 왕휘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화제는 杜甫의 <南隣>의 마지
막 두구인데 이 시는 두보가 사천의 두보 초당에 거하고 있을 때 이웃에
은거하고 있던 錦里先生을 방문하고 귀가하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흰 모래와 푸른 대나무에 쌓인 강촌에 해가 저물고 사립문에서 서로
전송하려는데 달빛이 새로 떠오르는 구나. 정유년 겨울 이영구의 소경도
를 모방하여 그린 그림을 녹촌 선생에게 지적받고자 한다. 왕휘 ,
白沙翠竹江村暮 相送柴門月色新
丁酉 冬日 寫營丘小景 寄麓村先生 止正之 王翬
이 밖에도 안기는 청초의 周彛尊 焦秉貞 楊晉 徐洛 등 常熟 지역의 화가
들과 긴밀한 관계도 있었다. 참고로 그의 다양한 소장인은 아래와 같다.
<사진1참조>
安儀周家珍藏, 朝鮮人, 安岐之印, 麓村, 儀周珍藏, 儀周鑑賞, 安氏儀周書畵
之章, 安, 朝鮮安麓村, 珍藏書畵印, 朝鮮安岐珍藏, 古香書屋, 翰墨林, 翰墨
林鑑定章, 思原堂, 心賞, 與古爲徒, 御題翰墨林, 御題圖書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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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書譜의 種類
孫過庭에 대해서는 명확한 傳記도 없고 生沒年度도 알 수 없다. 그의
出生地도 吳郡(江蘇省 蘇州市) 陣留(河南省 陣留縣) 富陽(浙江省 富陽縣)
등 여러 설이 있으며 官職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다. 다만 生沒에 관해서
는 書譜中에 두 곳에 작은 구절로부터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하나
는 「余志學之年 留心翰墨」「본문48행」志學의 年「十五歲」부터 한묵에
마음을 품었으니 곧 15세부터 서예에 마음을 두어 정진했으며 그 둘째는
「時逾二紀(본문51행) 二紀 24年을 넘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서보를
撰한것이 四十歲가 된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행의 垂拱3年(6277, 寫記로 기술하였는데 이 기술
은 최초 수공 元年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서보가 손과정의 진적이라고 한
다면 草橋는 元年에 거의 완성되어 3년 후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
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손과정의 生年은 아마 646년 이전이
었다는 것이다. 646년부터 687년 전후라고 하면 唐 王朝를 통일하고 王
羲之의 書를 사랑했던 太宗((597~649)이 승하하고 高宗(628~683)과 則
天武后(624~705)의 시대로 虞世南, 歐陽詢, 諸遂良등이 初唐 三代家로
이미 없었고 왕휘지의 전형적인 서법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다.
이러한 징조가 보이는 新書風에 대한 전통존중의 사상을 준수하려는 書
論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개성을 존중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이윽고
張旭이나 懷素 顔眞卿에 의한 서법이 일변하여 가는 古法에 대한 新法 즉
新古典主義 서법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이제 서보의 全文을 읽고 나면 놀
라운 것은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東洋獨自의 예술인 書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 표현 方法이나 工夫하는 방법이 1200년 전에도 이와 똑
같은 생각을 갖고 고심하였다는 것이다. 즉 「書는 전통예술」이라고 하
는 것과 서의 전통이라 하는 것, 즉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歷史중에서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 표현이 제각기 변화해도 그 본질
을 간과하지 않고 계속 전승되어 오는 것은 아마 이와 같이 의미 깊고,
간절했던 손과정의 서보와 같은 서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
부터 草書의 서법에 있어서나 서론에 있어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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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익히 아는 사실이다. 지금도 서보를 臨書할 때 가장 널리 체
본으로 사용하는 것은 역시 眞蹟本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 진적
본의 중간부에 해당하는 제148행 째의 行末部에「韓末伯英下少一百六十
餘字」라고 하는 메모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보의 본문 중에
160여자가 소실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왜 이와 같은 글 가운데 중
간부분이 떨어져 나갔는지 지금까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또 서보의 刻
本은 여러 종류가 전해오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세 종류의 판본을 들 수
있다. 첫째, 眞蹟本 : 則天武后의 垂拱 3年(687)에 寫記된 草稿眞蹟이라
칭하는 것으로 본래 淸의 內部에 있었고 지금 故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
으나 唐, 宋人의 臨本이라는 말도 있다. 둘째 薛氏本 : 宋代 元祐2年
(1087)에 薛紹彭에 의해서 각한 것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
며 元祐本이라는 별칭으로 불리 우며 敦厚하고 渾熟하다는 평이 있다.
셋째:安氏本(天津本) : 淸代 康熙五十五年(1716) 麓村 安岐에 의하여 翻
刻한 것으로 천진에서 8년간에 걸쳐서 간행한 精刻本이다.
정묘함이 보이는 각이긴 하나 당시에 이미 진적본에는 결단 부분이 보
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단 부분은 元祐本에서 보충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곧 그것은 書法의 기본적 기법인「執, 使, 轉, 用」에 대하여 기
술한 것이다.
훗날 안기의 판본은 康山에 부임한 관리가 草堂벽에 붙어 있는 서보각
본을 떼 가지고 離任때 가져가다 長江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다 유실되고
말았다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
4. 安岐의 書譜刊行과 그의 書藝觀 그리고 鑑識眼
안기가 조선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燕行을 통한 朝鮮文人들과 淸人들과
의 교류였으며 특히 柳得恭, 朴齊家, 李德懋등의 北學派 학자들 사이에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有名한 서화감식가였다는 점보다는
中國에서 성공한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더 깊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舊韓末 崔南善(1890~1957)이 1900년에 端方이 편찬한 묵연휘관을 입수
하여 자세한 정보가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전히 안기와 그의
저록 수장품에 대한 인식은 미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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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안기의 수장품 중 일부가 국내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있다. 이를 추
측케 하는 자료로 한말 譯官이자, 서화감식가였던 서예가 葦滄 吳世昌
(1864~1953)이 입수한 孫虔禮書譜로 안기는 손과정 書譜를 1716년 天
津에서 판각하였으며 이 천진본은 三希堂, 亭運館本과 더불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표적인 판각본이다.
오세창이 소장한 판본은 原本이라기 보다 飜刻本일 확률이 크다고 본
다. 여기 중요한 것은 帖尾에 위창이 안기 대하여 알게 된 경위와 그를
감상 수장의 名家라고 높이 평가한 跋文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런데 필
자가 소개하려는 서보는 嘉慶 己卯(1819) 秋九月 仁和介園 黃至4 識가
있는 書譜 後尾의 글들이다. <사진 2 참조>
첫 장은 안기의 글을, 둘째 장은 乾隆 戊寅 長夏 古歙 王廷璋 識의 글
과 마지막은 光緖 戊寅 十月 汪董의 跋이다. 여기서 비록 짧은 글이지만
안기의 서예감식 과 그의 思想을 엿 볼 수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되리라 본
다. 본래 이 발문은 왕동이 또 다른 서보의 후미에 붙여 있는 것을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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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옮겨 쓴 듯하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우측의 글은 唐나라 孫虔禮의 書譜 序文이다. 草稿가 대대로 墨林의 보
배로 전하여 왔는데 宋나라 太淸樓秘閣續帖에도 刻本이 함께 있다. 구하
려고 마음을 먹어 왔으나 지금까지 구하여 보지를 못하였고 오직 停雲館
에서 각한 것만 보았을 뿐이었다. 丙戌年間에 眞定 梁相國의 집에서 이
眞蹟을 얻게 되었으니 마치 至寶를 얻은 것 과 같았다. 맨 위에는 宋佑
陵이 題를 한 “千竝宣政諸璽”가 있었다. 다만 漢末 (伯英:후한의 張芝의
字)의 부분 아래로부터 166字가 모자라고 또한 “心不厭精” 밑으로 30字가
모자라는데 어느 때에 빠져 잃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펴놓고 마주 대함에 선대의 훌륭하신 분들이 고심
하면서 저술하신 수천마디의 언어에 정신을 기울인 것이 원래 먼 훗날에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고자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
므로 吳傳朋이 이르기를 “글씨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손과정으로 指南을
삼아야 한다.”라고 한말이 헛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이 眞蹟을 가지고
停雲觀에서 판각한 것과 비교하여 보니 참으로 毫釐의 차이가 千里의 어
긋남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하겠다.
생각하여 보니 文氏 父子가 글씨로 저명하고 겸하여 鉤摹도 잘하였는데
그의 문하인 土章 簡씨가 鉄筆을 가장 잘 하였는데도 어찌 큰 차이가 난
단 말인가. 마땅히 이 각본으로 飜刻을 하여 잃어버린 부분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나의 바로 잡고자 하는 마음은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이에 돌에
다 重摹를 하려 하였으나, 다시 생각함에 초서를 판독하기가 어려워 여러
사람에게 물어도 다 해독할 수가 없었다. 마침 香泉 陣太守(淸:陣奕禧의
号, 詩․書․畵에 能함)가 南安 假道 津門을 補修하려고 가다가 배를 머물게
하고 沽水 草堂으로 나를 방문하여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 첩을 꺼내어
서로 함께 펼쳐보고 釋文을 하여 한 책을 만들어 이 첩 뒤에 붙여 놓았
다. 비록 이 일을 후세에 공로가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古人을 등
지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孫虔禮께서는 알아서 역시 나를 허락하시리
라 麓村에서 安岐가 짓고 아울러 쓰다.
右唐孫虔禮 書譜序稿 代爲墨林 所寶相傳 宋太淸樓 秘閣續帖 俱有刻本 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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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心訪 求迄未之見 惟見停雲館 所刻耳 丙戌歲從 眞定 梁相國 家得 此眞蹟
如獲得之寶 以下省略 …… <사진 3 참조>
첫 글은 녹촌 안기의 손과정 서보에 대한 각본들의 출처와 본인도 애타
게 구하려던 그간의 사정과 진정 양상국 집으로부터 진적을 획득한 기쁨
과 서보의 보존 상태를 밝혔다. 그리고 번각을 하여 빠진 부분을 바로
잡고 해석문까지 붙여 놓았다는 사연은 훗날 그가 진문에서 서보를 각하
게 되는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근세에 “有千金帖”이 있었는데 그중 첩 하나는 곧 墨林 項氏의 “萬歲通
天”이고 또 하나는 退谷 孫氏의 “萬歲孫過庭書譜”이다. 通天은 朱竹坨
(朱彛尊의 号) 先生때에 이미 勢家 집으로 흘러 들어가서 그 뒤로는 마침
내 얻어 볼 수가 없게 되어 書寶의 진적은 이미 떠나버렸고 손과정의 서
보는 진정 양상국에게로 돌아갔고 梁夏는 녹촌 안씨에게 돌려주어 이에
雙鉤摹刻을 하였으며 진태수 향천이 별도로 석문을 지었다. 또한 神物의
출현이 때가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 것인가?
退谷이 지은 庚子 銷夏記를 살펴보면 책중에 “五乖也”아래 130字가 부
족하였는데 이 본에는 빠진 것이 없다. 또 漢末의 張伯英 아래로부터
168자나 모자라는데 이 본에는 166글자가 적고 또 이본에는 “心不厭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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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30글자가 빠졌는데 記文이 없으니 곧 첩 속에 없는 글자가 혹시라
도 옛날에는 있었다가 훗날 없어졌거나 혹은 옛날에 잃어 버려서 후일에
보충을 하여 그 글자 수가 같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전에 필사된 것이 우
연히 잘못된 것인지 모두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書譜를 상고하여
보건데 宋代에 碑閣續帖에서 각을 하였고 太淸樓에서 再刻을 하였으나 지
금은 찾아 볼 수가 없다. 文氏가 각을 한 停雲館版이 나오면 숨어서 감
추어져 버렸다. 그러나 기록에 宋刻本楷書寶와 香泉이 저술한 釋文이 있
으니 이끌어 논설을 하지 않는다면 손씨의 글씨를 보지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다. 見聞이 넓지 못하면서 가볍게 말을 붙인다면 金石의 은미함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더구나 經史같은 여러 서적의 번잡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겠다. 이 첩이 지금 나에게 돌아왔으나 나는 鑑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지라 珠玉移徒 雲煙變滅이라 하니 마음속에 감회가 생긴
다.
이에 기록한다.
乾隆 戊寅年 긴 여름 古歙의 汪廷璋쓰다. 韓江의 孝經堂에서 近世有有
千金帖 帖一則 墨林項氏之 萬歲通天一則 退谷孫氏之 孫過庭書譜也 通天當
朱竹坨先生, 時己轉入勢家後 竟不得見而 書譜 眞蹟旣去 以下省略…‥.
<사진 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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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글은 고흡은 왕정장이 墨林의 두 가지 보배인 萬歲通天과 孫過庭
의 書譜라고 하였는데 만세통천의 朱竹坨선생때 세도가 집으로 들어가 종
적이 묘연하며 손과정의 서보는 양상국에서 녹촌 안씨에게로 들어갔는데
그 후 雙句摹刻을 하였으며 여러 곳 부분 부분을 보충하여 빠짐없다. 라
고 하였다. 宋의 진적본이나 太淸樓 각본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행
여 停雲館판이 나온다 해도 곧장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므로 安岐의 판각
본에 향천의 석문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손과정의 글씨를 보지 못함과 같
다는 자신의 겸양한 느낌의 글을 적고 있다.
五揚이 얼마 전에 書譜刻本 중에 최고의 善本이 있었는데 곧 麓村 安氏가
津門에서 刻을 하고 陣太守 香泉이 釋文을 한 것이었다.
이 책은 바로 嘉慶 年間에 黃君 介園이 重刻을 한 것을 취한 것인데 안씨
각본과 비교하여 봄에 다만 문드러진 곳의 필획이 조금 부족하였을 뿐 터
럭만큼도 어긋난 곳이 없었다. 道光 年間에 丹徒 包氏가 각한 刻本과 비교하
여도 훨씬 나은 곳이 많았다. 지금 이 책은 儀徵 張午橋에게 돌아간다.
이 책은 太守 安石이 일찍이 曾賓谷 선생을 위하여 가지고 온 것이니 江
西가 소유하였던 惟歸鶴軒 包氏本이다.
안씨가 보기 드문 것이라 부탁한 것이니 이 책은 역시 당시의 으뜸가는
책이라 하겠다. 光緖 戊寅年 十月 汪董은 跋하다.
吾揚向有 書譜刻本之 最善本 卽 麓村安氏 刻於津門有 陣香泉太守釋文者 此本乃 嘉
慶間爲黃君介園重刻取與安本對校 但爛漫處稍 逝其筆畵之間 豪無差謬轎 以下省略
<사진 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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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光緖년간에 왕동이라는 사람의 글로 近來에 서보의 판각본 중에
제일 뛰어난 선본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녹촌안기의 진문에서 각한 향
천의 석문본이라고 하였다. 이 판각본을 바로 嘉慶 24년 9월 黃介園이
重刻한 것이라고 하였고 터럭의 오차도 없었다고 하였다. 이 본은 道光
년 간 包氏가 번각한 본보다도 뛰어났다고 하였다. 이 본은 장오교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또 太守 安石이 일찍이 曾賓谷 선생을 위하여 가져
왔고 江西라는 이가 가지고 있던 包氏本이다 라고 했다.
또 당시 안기가 보기 드문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 판은 번각하기 전
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서보 끝 부분에 안기의 글과 그 외 왕정장과 왕동의 글을
살펴보았다. 이제 서화 감식에 대한 글은 안기의 저술인 墨緣彙觀의 서
문의 글로 대신한다. “나는 본래부터 성격상 세상물정에는 어두웠지만 늘
소박한 뜻을 품고 있었다. 靑年시절부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풍악과
기생놀이, 거문고와 바둑의 기예를 모두 즐기지 않았다. 오로지 古今의
書畵의 名品을 좋아하며 나 스스로 즐겼다. 매번 마치 친한 벗을 만난
것처럼 어루만지며 노느라 하루 종일 싫증이 나지 않아 거의 밥 먹는 것
도 잊을 정도였다. 나 스스로도 事物에 빠지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天性的으로 좋아하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나의 보는 안
목이 날로 진보하자 남북의 동지들과 인사들이 내가 감정에 뛰어나다고
잘못 생각하고는 서예와 명화를 가지고 나에게 감정을 부탁하였다. 라는
말과 같이 안기는 서화에 심취하였고, 수많은 명품이 그에 눈을 거쳤으며
題簽과 跋文을 남겼다. 그 날 그 날의 感想의 記錄을 정리하여 훗날엔 묵
연휘관이라는 18세기 서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結論
이상으로 조선염상 안기의 中國에서 삶과 활동을 통하여 개략적이나마 파
악하였고 그의 서예관과 감식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안기가 저술한 묵연
휘관은 18세기 중국 서화계의 지표가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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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안기는 서화 감식가로써의 글은 많이 발표되었지만 정작 書譜에 대한 평
은 양주화방록 상권에 염상 安氏는 양주에서 염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손과
정 서보를 판각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康山 草堂의 벽에 붙어 있다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글과, 葦滄이 소장하였던 강희 55년 안기가 번각한 서보에
글을 읽을 수 있다. 위창은 그저 서화감상과 감정의 名家라고 평가하는 발
문이 있을 뿐이다. 여기 가경 연간의 서보 발문 말미의 세편의 글들은 안기
에 대한 연구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안기는 이국에서 활
동한 조선인으로써 中國美術史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앞으로 그의 家係와 安氏의 문헌록을 통하여 조선 어느 지방의 출신인지
경력과 移住의 경위와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그가 수장 하였던 작
품들의 목록이 하루속히 조성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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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黃晶淵의 「安岐와 墨緣彙觀 硏究」(1998年)
3. 18세기 淸에서 활동한 朝鮮人 收藏家 安岐 (韓國古美術 2000年)
4. 蕭奭「永憲錄」 (上海中華書局 1959)
5. 周凱「安儀周記事」 「內自訟齊文集」卷8
6. 肅宗實錄 40, 6月 11日 乙酉條
7. 柳得恭「羅兩峯」 「灤陽錄」「국립중앙도서관장」위창古-2817-18」
8. 崔南善 「古事通」」(三中堂 1939)
9. 揚州 畵舫錄 上卷 1 (李斗,中華書局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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