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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email protected], 2020-06-22 01:46:49

朝鮮初期의 書体와 安平大君_2009.12.05

논문

朝鮮初期의 書体와 安平大君

書藝家, 金石學 : 韓 相 奉

글을 시작하며
1. 麗末 鮮初의 書藝
2. 安平大君“瑢”의 生涯
3. 安平의 眞蹟과 金石文
4. 安平이 남긴 庚午字와 木版本

글을 마치며

글을 시작하며

書란 문자의 표기된 현상을 말함이다. 寫字의 方法을 書法이라 하고 그 법의 예
술적인 것을 강조하여 書藝로 표현하고 있다. 또 문자란 大自然의 법칙과 그 현상
의 精氣를 뽑아서 創制 되었듯이 이러한 문자를 어떻게 표기해야만 그 문자가 뜻하
는 정신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예술적인 가치를 찾아 낼 수 있는가를
포함하는 뜻에서 書道라고도 한다.

書는 곧 全人敎育의 기초이면서 人書俱老를 내세워 天才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
라서 書는 죽을 때까지 써도 썼다고 할 수 없는 분야라 할 수 있겠다.

朝鮮의 王朝가 이룩되고 초기에는 나라 전체가 生活의 피폐함 緊張과 覇氣가 橫
溢하여 한창 建國의 奔忙期인 만큼 편안히 書藝를 연마 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
다. 그러므로 당시 서예상의 주류는 고려 말의 연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麗末鮮初의 書藝에 대한 선인들의 정신세계와 조형의식이 어떻게 형
상화 되었는가를 밝히고 예비적 검토를 바탕삼아 기존의 연구 자료들을 가급적 수
용하고 새롭고 자세히 살펴 가면서 여기서 나타난 당시 서가들의 書品과 書藝세계
를 논정하겠다. 또 속속 발견된 안평의 글씨와 金石文이 짧은 삶이지만 그가 남긴
예술세계와 업적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제 吉光片羽의 자료를 찾고 수
습하여 安平大君 李瑢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麗末鮮初의 書藝

高麗의 王朝는 禪宗佛敎의 理念으로 나라의 根本을 삼았다. 그러나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넘어서는 李資謙(1126년)의 亂, 妙淸(1135)의 난과 文臣이 난, 鄭仲夫등
의 武臣의 난(1170)등 內患과 몽고와 40여년의 抗爭, 그리고 굴복으로 이후 80여
년의 植民統治 속에서 朱子 性理學이 중국으로부터 받아 드려졌다. 書藝 또한 王羲
之, 歐陽詢 풍을 벗어나 變化를 가져 왔으니 燕京의 萬卷堂을 통하여 松雪 趙孟頫
(1254-1322)의 서체가 들어왔다.

그의 글씨는 姸媚華麗하고 纖細鋭利한 洗錬美를 일컫는다. 고려 말 송설체를 대
표하는 인물로는 益齋 李齊賢(1287-1367)과 杏村 李嵒(1297-1364)을 들 수 있다.
익제는 충숙왕 원년 28세 때 白頤正 문하에서 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고 중국 연
경에 억류되었던 忠宣王에 초청되어 만권당에 머물며 姚燧, 閻復, 元明善, 趙孟頫와
교유하며 학문과 서예가 날로 진전 되었다고 한다. 그의 史觀은 보수적이고 체념적
인 유교사관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를 정리하여 고려와 元의 학계에 교
량역을 하였으며 성리학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詩, 書, 畵 三絶이었고
특히 말을 잘 그렸는데 이는 조맹부로부터 사사하였기 때문이다. 글씨는 필의가 縱
橫遒勁하고 필력이 橫溢하였는데, 草書에 뛰어났고 行草로 쓴 글씨는 木版本· 海東

名迹에서 볼 수 있다. 또 그는 “書檜巖心禪師道號堂名後”에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
다”라고 하여 서예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 隸書를 잘 쓴 행촌 이암은 그의
외삼촌인 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文章도 능했는데 李尊庇(1233-1287) 손자이며 判
三司事 李瑀의 장자이다. 이암은 어려서부터 이미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으
며 1313년 (충선왕 5년) 17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암의 글씨는 뛰어나 당시 東國의 조맹부로 불렀으며 그림 또한 능하였는데 墨
竹을 잘 그렸다. 당시 조송설의 筆法정신을 얻은 자는 행촌 이암뿐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아 그가 송설체의 神髓를 체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암은 1349년 53세
때 왕위계승 賀礼使로 원나라를 다녀왔다. 조맹부를 지도 받은 적이 없으나 그가
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家學과 師弟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의 祖父 李尊庇는 安珦, 金喧, 李混, 朴全之 등과 柳璥의 門下로 제일 먼저 國
子監試 礼部試을 주관하고, 1279년 충렬왕때 密直副使가 되어 聖節使로 원을 다녀
왔다. 이때 조맹부는 45-55세 전후의 시기로 定武本(蘭亭敍)을 보고 왕희지에 심취
하였던 송설체의 완숙기라 할 때이며 당시 원과 고려 왕실의 밀접한 관계로 보아
이존비 역시 조맹부의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암이 송설체에 대한
지식과 공부는 가학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春川 淸平寺 文殊院寺 藏經碑”는 이암의 31세 작품이다. 이암의 조맹부 서예 수용
과정에 몇 단계 나눠질 수 있다. 수용전 작품은 결구가 강경한 필세를 보이나 연미
한 송설의 양향을 받고부터 조맹부와 흡사한 부드럽고 온아한 서품으로 변화하였
다. 중년을 넘은 그의 서풍은 송설풍을 점차 벗어나 활달하면서도 골기 있는 서품
으로 변모하였다.

이 시대의 碑의 頭篆으로 문수사 장경비가 걸작이며 엄격한 필획을 구사한 전형
적인 小篆으로 秦篆의 필의를 느낄 수 있다. 이암의 글씨로 神品에 속하고 禪覺王
師碑의 예서는 유일한 것이다. 慵齋叢話에서도 행촌과 자앙은 한 시기의 사람으로
그 필세가 서로 적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서법을 논하면 金生이 제일
이요. 다음은 행촌이라고 하였고, 그 밖에 恭民王(1330-1374)과 李岡(1333-1368)
등이 있다.

朝鮮은 建國理念인 朱子學派의 儒學을 崇尙함으로 學者들이 政治에 大擧 참여하
였다. 또 이들이 주장하는 학문의 기초가 統治의 기본 틀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조
선 성리학자들에게 絶對的인 影響을 끼친 書體가 바로 송설체라 할 수 있다. 려말
을 지나 조선의 安平大君(1418-1453) 瑢은 고려의 이암과 더불어 조송설에 뒤지지
않는 大家로 꼽힌다. 초기에 송설체의 書風은 약200년간 풍미하게 된다. 또 글씨를
진작 시키기 위하여 왕명으로 조송설의 墨蹟을 모아 인쇄하여 보급할 것을 校書館,
礼曹 弘文館에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 후 송설체의 보급은 확산 되었고 文宗, 世祖
, 安平, 成宗 등의 왕과 왕족들은 물론 集賢殿 學士들이 중심으로 조선사회 전반으
로 확산되어 인쇄물, 활자, 각종문서 사경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설체를 정착시킨 주역들은 세조(1417-1468)의 왕위 찬달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고 세조와 申叔舟등은 顔眞卿 류의 開國世代들의 서풍을 쓰고 있어서
일시적 송설체의 정착이 흔들리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殘存
한 書藝로 徐居正, 成任, 姜希孟 등이 송설체의 맥을 잇는 가운데 지식층들이 그의
이를 추종하였다. 특히 鄭麟趾(1396-1478)는 高麗史, 訓民正音 龍飛御天歌등 많은
서책을 편찬한 조선 초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天文學에 정통하여 歷代曆法同異의 저서가 있고 글씨는 송설체로 단아 정중
하여 매우 품격이 높아 朝廷의 高文大冊은 그의 글씨가 많다. 또 文宗(1414-1452)
은 조선 다섯 번째 임금으로 1445년 세종이 병으로 국사를 대신 보다가 1450년
즉위하였다. 천성이 너그럽고 성리학에 深精하였으며 文詞, 天文, 曆算, 聲韻과 百家
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모든 學文에 박통하였다. 글씨는 草書와 隸書를 잘
썼는데 조송설을 좋아하여 王右軍 서법과 혼용하여 썼다. 實錄을 보면 “등불아래서
글씨를 쓰더라도 精妙하여 0妙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金安老의 龍泉談寂
記에는 왕께서 楷法에 정통하였는데 굳세고 생동하여 晋人의 심오한 이치를 얻었
다.

石刻數本이 세상에 전하는데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로우나 진적이 드문 것이 안타
갑다라고 하였으며 또 조송설의 서법을 모방하여 精妙入神 하였고 寸簡, 尺紙라도
있으면 천금과 같이 귀중히 여겼다고 하였다. 列聖御筆속에 칠언절구의 초서가 있
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화려함과 정련함 보다는 호방하고 활달한 필치로 淸勁하고
생동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 安平大君 瑢의 生涯

안평대군(1418-1453)은 왕자 서예가로 이름은 瑢, 자는 淸之 호는 匪懈堂, 琅玗居
士, 梅竹軒으로 세종대왕의 세 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昭憲王后, 沈氏로 1428년 안
평대군으로 봉해지고 다음해인 左副代言 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 여러 왕
자들과 함께 13세 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詩文, 書, 畵에 모두 능하여 三絶이라 칭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
망을 받았다. 1438년 함경도에 鎭을 설치하자 왕자들과 함께 북변의 경계임무를
맡아 野人을 토벌하였다. 또한 도성의 北門밖에 武夷精舍를 짓고 南湖에는 淡淡亭
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
활을 하였다.

점차 조정의 실력자로 등장 文臣을 포섭하고 权臣 皇甫仁. 金宗瑞와 힘을 합쳐
首陽大君 측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의 하나인 黃票政事를 장악 측근인 문신들
을 요직에 앉혔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謝思使로 明나라로 가계됨으로써 外交的 주도
권을 빼앗겼다. 李澄玉을 시켜 鏡城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는 한편 武溪精舍에

서 장사들을 모아 무력을 양성하였으나 귀국한 수양대군에 의해 황표정사가 폐지되
어 실권을 상실하고 박탈당하였다. 다시 이듬해 9월 황표정사를 실시케 하는 등 실
권회복을 힘썼으나 다음 달 癸酉靖難으로 김중서, 황보인이 살해된 후 江華島로 유
배되었다가 喬洞島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그 후 1747년 영조 23년 영의정 金在魯
의 상소로 신원이 복관되었다.

3. 安平의 眞蹟과 金石文

안평의 眞蹟과 金石文으로는 근래 들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진적서화첩으로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일본 天理大 소장 夢遊桃園圖跋와 國室238호인 小苑花開帖. 현
재 이첩은 도난당하여 회수치 못하고 있다. 瀟湘八景詩卷(紙本 42☓35, 40☓19.5
32☓17.4cm)과 春夜宴桃李園序 (墨紙金泥(25.4☓11☓128cm)와 詞翰蘇黃後. 五言
絶句 二首 (紙本金泥 25☓51cm) 七言絶句 詩 (靑紙金泥 24.8☓18.9cm) 妙法蓮華
經 卷7 (正統本寫經)김명성 소장의, 紺紙金泥 地藏菩薩本願經(梅竹軒 筆帖: 37.4☓
19.7cm) 紺紙金泥 地藏菩薩本願經 (海東筆帖 25.3☓55cm) 또 다른 紺紙金泥로 쓴
地藏菩薩本願經部分殘片(朴先生手稿 24☓11cm) 3점과 최근 본인이 직접 확인한 福
泉庵重修普勸文과 中國浙江省 寧波市 月湖 서쪽에 소재한 天一閣의 般若說再送嚴上
座歸南序 書帖 (17.1☓28.8.12cm張 絹本) 그리고 澗松美術館 所藏本 再送嚴上座歸
南序 (14.3☓紙本) 또 다른 소장본 嚴上座歸南序 (25.5☓17.2cm 8張 絹本)등이 있
다. 금석문으로는 文宗元年 1450년 11월10일의 서법판본인 歷代帝王名賢集, 王羲
之眞行草, 趙孟頫眞草千字文이있고 또다른 眞草千字文(20-25☓9.5-11.5.總 14張
紙本 石刻鳥金榻 강릉 오죽현박물관 소장) 安平大君 筆帖 擣衣篇(木刻本)31☓
243cm 行草五言律詩(51☓123cm 木刻本) 匪懈堂集古帖의 李校理前書와 (27☓
18.5cm 石刻本) 世宗大王英陵神道碑. 沈溫墓表, 의왕시 내손동 慕洛山 자락의 朝鮮
國王子臨瀛大君貞間公之墓. 嚴上座歸南序(石刻本) 流水花開帖(木刻本), 勸農敎(中字
10張 木版本) 그 외로는 海東名蹟, 東國名筆, 靑邱名迹, 大東書法 조선후기 金文會
等 歷代古今法帖, 白斗鏞의 海東名家筆譜등 목각 또는 인쇄로 실려져 있다. 여기서
안평의 친필이 실려져 있는 복천암 중수보권문과 중국 천일각 소장 엄상좌귀남서와
간송본 또 다른 견본 8장으로된 엄상좌귀남서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복천암
보권문은 세종대왕 31년 (1449년)으로 世祖 (首陽)와 안평의 친필을 함께 볼 수 있
다. 이첩은 1960-70년대 잠시 문화재청에 소재파악이 되었으나 그 후 행방이 묘현
했다. 최근 나타나 기회를 얻어 소개한다. 책 표장에는 福泉室藏으로 총 11장으로
되었다. 첫 장에는 세조의 글씨로 眉師前……. 佛盖及殿額幷奉香燭等物하고 朝鮮國
王의 手結과 도장이 찍혔고, 바로 옆에 慈聖王妃의 도장, 그다음 貞嬪, 世子의 도장
이 찍혀있다. 그 다음 장을 넘겨보면 安平大君의 글씨로 俗離山 福泉寺 重修普勸文
恭惟聖上 中懷至德 誔膺天命 海絶朦艟 民安息食 某等 逢斯際會豈無慶躍應以陰功密

助…… 勝事致得 君享萬年之壽國有 無彊之体 和南謹扣, 正統十四年 十二月 日 供養
布施 同願 孝寧大君 手結, 首陽大君 臨瀛大君 手結 錦城大君 手結, 永膺大君 手結,
그 다음 장엔 和義君 桂陽君 義昌君, 漢南君 密城君 壽春君 翼峴君 永豊君의 手結
이 있다. 眉師는 信眉大師를 말함인데, 세종과 세조때 學祖大師와 함께 王室의 비호
를 받으며 㧕佛政策 속에서도 많은 布敎와 刊經 佛事를 이룩하였다. 이 중수 보권
문의 귀중한 자료로는 세종의 수결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수양의 글씨와 그 외 대군
들의 수결도 함께 볼 수 있는데, 다만 안평의 수결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엄상좌귀
남서는 묵서본이 3점과 석각탑본 다수가 전하는데, 먼저 중국 절강성 영파 천일각
에 소장된 첩은 국내 있는 2첩보다 안평이 친필일 가능성이 매우 짙다. 안평이 생
존할 당시 중국 조야와 藝壇으로부터 조선의 명필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
의 작품 또한 상당수가 중국 대륙으로 들어갔다. 세종 32년 (1450)년 3월 明의 사
신 倪謙이 안평에게 글씨를 청하자 안평은 하룻밤사이에 眞書, 行書, 草書 수백장을
써서 주었다고 했다. 예겸이 귀국한 후 명의 景泰帝에게 안평의 글씨를 바치니 황
제는 이것이 조맹부의 서체라고 매우 높이 평가했다. 특히 崔恒의 太虛亭文集(匪懈
堂詩軸序)에 명의 경태제는 안평의 글씨를 간행하라고 전교를 내렸다는 얘기가 있
을 정도로 안평의 글씨를 몹시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及是歲秋 大監 尹鳳奉使而
來 二公皆書問安否?…….且鐀文房室物 其欽慕可知己 二公之還也 獻所得書于帝 帝覽
而嘉之 卽詔繡梓 俾傳於世 鳳諆事甚詳……. 천일각은 중국 현존하는 藏書樓중 가장
오래된 개인 소유다. 明 嘉靖40년 (1561)무렵 范欽이 지었는데 현재까지 후손이 잘
보존해 오고 있다. 천일각에 소장된 般若說再送嚴上座歸南序 는 絹本으로 총12장인
데 10장을 차지하고 그 다음은 法春 斯智의 (一笻將一鉢)과 鳥川叟의 (帝里抛新院)
이 각각 1장씩이다.
반야설 재송엄상좌귀남서는 每行 13-16자이다. 末尾에 時景泰總御紀元秋元 秋 七
月 下澣이라하고 琅玗居士安平大君 瑢書라고 하였다. 경태 원년은 文宗卽立(1450)
해당하며 엄상좌가 寺刹로 돌아가려하자 안평이 전별문이 글을 지을때가 문종 즉위
봄이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7월에 지었는데 시기가 다소 차이 남은 혹 그 해 2
월 세종대왕의 昇遐와 함께 여러 가지 일로 늦어 진듯하다. 이 천일각 소장본을 발
견하고 2002년 5월 (월간서예)에 상세히 소개한 順天鄕大 朴現圭敎授의 노고가 크
다. 국내에도 천일각 소장본과 같은 안평의 서첩과 동일한 서문과 내용을 담은 서
첩과 탑본이 남아있다. 서첩은 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천일각본과 간송본의
글씨는 매우 흡사한데 다만 제목에 있어 간송본은 再送嚴上座歸南序인데 천일각본
은 般若說이라는 3자가 더 첨부되었다. 또 간송본은 紙本이고 천일각 본은 絹本이
다. 간송본은 매행 11-12자이고 천일각 본은 13-16자로 이루어져있다. 또 다른 엄
상좌 귀남서를 살펴보자. 이 서첩은 제목 없이 바로 본문으로 시작되는데 25.5☓
17.2cm며 총8장으로 매행 8-9자로 쓰였는데 2002년 12월 朝鮮王朝御筆展(藝術의
殿堂)에 출품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서첩은 많은 세월을 지나며 여러 차
례 裝潢을 하는 과정에서 비단이 조금씩 뒤틀려 글씨의 획 맛을 잃고 있어 혹자들

은 후대에 臨模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안평의 淸勁 秀麗한 運
筆을 읽을 수 있어 누구도 속단 할 수 없다. 비단의 상태 또한 수백 년을 지났음을
알 수 있어 앞으로 바른 연구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石刻本
엄상좌귀남서는 가끔 古書市場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예 序文이 없다. 본인도 1첩
을 소장하고 있는데 烏金拓으로 윤기가 돌고 칠흑같이 검다. 그 외에 또 다른 重刻
本은 己夫盖夏福昌君楨模刊 이라는 글이 刊記 옆에 비스듬히 쓰여져있다.

4. 安平이 남긴 庚午字와 木版本

글씨를 書寫함은 印制術이 발달하기 이전에 문서나 경전을 기록하여 후세 전하거
나 서로의 의사표시로 사용되고 혹은 功德을 쌓는 종교적 요구에 의해서 시작되었
다. 15세기 조선의 인쇄출판은 가히 절정기를 맞이하였는데 그 자리에 당대 최고
名筆인 안평의 붓끝에서 이루어졌으니 1450년 문종 즉위 원년인 경오 년이다. 그
해 주조된 大字가 1.6☓1.5, 小字는 1.4☓0.8이다. 경오자는 세종이 昇遐할 전후 무
렵에 그 王을 위해 鑄字所에서 印經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자 (文宗實錄卷 4,10月
戊戌)를 보면 儒生들의 請停上疏가 줄기차게 있어서 그 대신 正音廳에서 은밀하게
인경하여 10월 30일까지 주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庚午字本으로는 문종원년 8월에 인출된 十八史略과 뒤이어 나온 詳說古文眞宝大
全 근래 발견된 일본 京都大學 소장 歷代兵要가 있다. 또 景泰 2년 8월에 간행된
新編算學啓蒙(上. 中. 下)은 元나라때 주세걸이 지은 것으로 天元術에 의한 고차 방
정식과 급수를 다루는 책이며 1990년대 발견되었다. 번각본으로는 孝經大義가 있
고 목활자본 文篡과 朱文公校昌黎先生集 대 1.6☓1.5, 소 1.2☓0.8이 있다. 목판본
으로는 妙法蓮華經에 (세종30년) 안평대군의 발문이 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알
려지고 밝혀진 안평의 소위 경오자본 典籍들은 극소수이나 안평 개인은 천재 예술
가일 뿐만 아니라 15세기 조선 문화 황금기에 예원의 총수이자 文字文化의 中心이
기도 하다.

경오자는 세조원년 1455년에 개주되어 乙亥字로 바꾸어 졌는데 을해자는 姜希顔
(1419-1464)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大. 中. 小字로 하였고 아울러 한글 자본도
만들어 졌다. 특히 15세기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강희안
鄭蘭宗등 조선화된 송설체의 명가들이 등장하면서 또 한 번의 절정기를 맞이하였
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활자가 안평의 경오자, 강희안의 을해자 정난종의 을유
자이다. 우리 역사상 한글과 한자가 공존하면서 藝術과 産業의 두 측면에서 이렇게
문자문화가 활발하게 전개된 때도 드물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印制文化에
있어서 活字를 고안하고 뛰어난 서체로 꾸준히 개량하였으며 세계 인쇄사에 단연
독보적인 활자 왕국으로 자리하였다. 그 종류가 다양하고 鑄字의 技法이 정교하며
심지어 민간인들까지도 鑄成하여 一般大衆도 독서 면학의 저면확대에 기여한 점은

당시 나라와 국민의 높은 文化수준을 인식케 하기도 한다.

글을 마치며

본고는 려말선초의 서예 受用過程과 안평대군의 짧은 생애, 그리고 지금까지 남
아있는 墨跡과 금석문을 간추리고 조선초기 金屬活字인 경오자와 木版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 文化가 그 시대에 시작하여 定着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따
라야 했다. 그 과정에서 대체로 政治社會의 發展과 軌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판단된
다. 옛날의 문화란 처음 소수 特權階層에서만 사용하다가 점차 그 底邊으로 擴大되
기 마련이다. 조선은 이러한 문화적 基盤을 中央政策에 의해 一方的으로 推進된 것
이 아니고 각 地方으로부터 나름대로 바탕을 싹틔우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우리 선조의 뛰어난 지혜가 엿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송설체의 名家 안평은 조
선 초기 藝林의 한 획으로 朝鮮中期와 末期 秋史 金正喜로 마무리되는 우리 서예사
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1) 朝鮮王朝實錄 文宗元年
2) 韓國文集叢刊 卷2. 卷9. 4659. 益齋亂藁 下卷 7. 557 p.
3) 高麗末 朝鮮初의 書藝 : 예술의 전당 1996.(任昌淳)
4) 高麗史 卷11. 列傳 24 : 李嵒傳
5) 淡菴逸集 卷2. 附錄 p
6) 筆苑雜記 卷 1. 大東野乘卷 3.
7) 國宝 卷12.「韓國의 典籍」藝耕産業社 1985.(千惠鳳)
8) 韓國의 書藝 : 中央日報 : 177p.
9) 月刊書藝 : 美術文化院. 2002. 5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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