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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email protected], 2020-06-21 01:26:24

안평대군이 쓴 임영대군 묘표(석각본)와 행초 오언율시(목각본)에 대하여

anpyeong-02

1. 글을 시작하며

조선의 왕조가 이룩되고 초기엔 나라전체의 생활은 긴장과 패기가 횡일(橫溢)해서 서
예상에도 많은 영향이 있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추측컨대 그것은 필세의 기분적(氣分
的)인 정도라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건국의 분망기인 만큼 사람들이 한가히 서예를
연습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서예상의 주류는 고려말의 연장으로 조
자앙(趙子昻)의 송설체(松雪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당
시 문인 명사들과 특히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이 서예술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본
다.

안평대군은 학문과 문장 서예와 덕행으로 당시 정치권은 물론 학계와 원원(苑園)에서
절대적 존경을 받으면서 일종의 문예부흥의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를 우군자앙(右軍子昻) 또는 청지우군(淸之右軍)이라 일컬는데 모두 송설체만 쓴 것
은 자못 가소로운 일이다. 동사백(董思白.董其昌)이 천글자가 하나같이 똑 같다고 하
여 조맹부(子昻)를 배척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는 안평
대군의 글을 혹평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36세의 짧은 나이지만 보통사람에
몇배의 문화운동과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의 서품은 개이적인 평가보다도 그를 축으
로한 서예의 발전과 성황을 조선 서예상에 절대의 위대성을 발휘하였으며 역사적 의
의 또한 크다.

이제 필자는 문헌과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안평이 쓴 임영대군모표의 석각본 글씨와
행초오언율시 목각본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 안평대군의 진적(眞蹟)

안평은 13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고 그의 활달한 기풍과 천성이 뛰어났
을뿐만 아니라 궁중내부에 소장된 많은 진적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또 스스로 서화를
수집하였기에 안목 또한 높았다. 신숙주(申叔舟) 의 보한재(保閑齋) 화기(畵記)에 의하
면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다고 한다.

안평은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그의 많은 소장품을 접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사대부와 서화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현존하는 그의 진적으로는
일본 천리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발문이 대표적이고 그 다음 국보 238
호인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의 봉시(蜂詩)행초첩이며 또 어느 개인 소장품인 묘법연
화경(妙法蓮花經) 권칠(卷七) 정통본사경과 또 다른 행초시편 일부를 소장한 글씨가
남겨진 진적으로 전부이다

3.  안평대군의 비문 글씨

안평대군이 쓴 비문으로는 세종대왕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이 비에 대한 문
중실록을 엿보면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가 글을 짓고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전액(篆額)과 비문을 썼다. 1450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에 영릉(英陵)을 조성, 1452
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후 예종 1년 1469년 경기도 여주로 옮겨 천장도감(遷葬都
監)에서 비를 그 자리에 묻었다. 그리고 1973년 발굴되어 현재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
종대왕 기념관 뜰에 옮겨놨다

그 다음 경기도 수원시 이의동 산 13 번지에 있는 심온묘표(沈溫墓表) 다. 심온은 그
의 장녀가 세종대왕의 비(碑.昭憲王后) 로 간택되어 국구(國舅) 로써 청천부원군(靑川
府院君)에 봉해졌고 영의정으로 배수되었다. 그러므로 외손인 안평이 모표를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능안마을(槿域書畵徵에는 果川으로 됨) 모락산(慕落山)
자락에 있는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朝鮮王子臨瀛大君貞間公之墓)는 구전과 문

헌으로만 전하여 왔던 안평의 비문 글씨였다. 필자가 수
년전부터 경기도 일원의 금석문을 조사 하든바. 안양 근
처 야산에 임영대군모표가 있다는 수소문 끝에 지난 6
월 중순 답사하여 탑본(榻本) 하였다.

모표의 전면은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14자. 측
면은 개국오백삼십삼년알봉곤돈병월일중건신좌 (開國五
百三十三年閼逢困敦병月日重建辛坐 ) 19자로 높이
1425cm 폭 50cm 좌폭 22 cm로 조그마한 묘표이다.
석질은 근대에 많이 사용하는 보령남포오석(保寧藍浦烏
石)이며 6.25 를 겪은 총상의 흔적이 뚜렷하다.

모표 측면 돈(敦)자와 중건(重建)자는 쪼은 자욱이 있다.
글씨의 서체는 조맹부의 해서체로 획이 가늘고 날카로
우나 방정하고 깔끔한 맛이 없다. 위창(韋昌)선생의 지
적대로 표일한 기색이 없다.그러나 역시 범상한 글씨는
아니다.

아무튼 이 모표의 글씨는 후대 안평의 글씨를 집자한
듯하며 알봉곤돈(閼逢困敦)은 고육갑(古六甲)의 간지(干
支)로 갑자년이니 개국 오백삼십삼년을 따져보니 일제의
침략하인 1924년(大正13년)이다.

현 모표의 위치는 묘의 상석 앞이 아닌 좌측 2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상례(喪
禮)로 보아 묘표의 자리가 서 있을 곳이 아닌 듯 하다. 묘지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대군의 사당도 있다. 임영대군의 18대 후손 이택(李澤)선생 말은 본래 신도비인지 모
표인지 비석 이 있었으나 땅에 묻고 현재의 모표를 세웠다고 한다.

이제 임영대군의 묘표는 안평대군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것이 확인되었으니 금석을 찾아 헤맨 보람을 느끼며 묘표의 글씨에 대한 사실고증은
앞으로 또 풀어야할 숙제 이다.

4. 안평대군의 석각탁본과 목각탁본의 필적

안평이 쓴 글씨는 석각의 또는 판각을 하여 탁본을 한 후 장황(粧潢)으로 꾸며져 세간
에 알려진 작품으로는 조선중기의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 해동명적(海東名積) 동
국명필(海東名筆) 청구명적(靑邱名積) 대동서법(大東書法)과 후기의 김문회(金文會) 역
대고금법첩 (歷代古今法帖) 백두용의(白頭鏞)의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등에 널리
소개되어있다.근래 새로 발견된 석각판본 안평의 진초천자문과 목각판본 행초오언율
시를 잠시 살펴보자.

석판본으로는 진초천자문(진ㅊ천자문은 수(隨)나라때 승려인 지영(智永 왕희지의 7대
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과 송엄상좌귀남서(送嚴上座歸南序) 같은 판본이 대표적이고,
목판본으로는 지난 6월 한국고미술경매에 출품된 행초오언율시(51 ×123cm 6폭)는
현재까지 알려진 어떤 판각본보다도 자획이 살아있어 마치 금방 쓴 듯이 보존 상태가
좋다.그러므로 이 작품은 매우 높이 평가해야할 귀중한 자료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있
는 것으로 사료된다. 행 초가 어우러진 활달한 운필은 아마도 안평의 전성기를 맛 볼
수 있는 듯하며 그가 쓴 이백시 도의편(도衣篇) 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등 여러 행초
글씨를 비교하여도 이만한 득의의 작품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앞부분 몇장이 떨어져 나갔지만 대자 글씨로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귀한 첩이
다.이러한 반면 석판본을 번각하고 다시 여러 사가(私家)에서 찍어 내다보니 조악한
판본도 수없이 많다 .따라서 석판본과 목판본에 대해서 잠시 비교 검토해보기로 하자.

1979년11월 본지에 발표한 석각본 안평대군 진초천자문(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소장
본)에 대하여 안평이 아닌 조맹부의 해서와 초서로 쓴 천자문을 석각하여 새긴 것이
라고 지난4월에 보도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석각본과 판각본에 대하여 확
실히 지적해주고 싶다.

필자는 석각본 조맹부 천자문과 조선후기 목판본 진초천자문 그외 여러 종류의 천자
문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훗날 이러한 경우를 대비하여 판본의 크기와 지질보존상태
와 시대 및 나라의 구별까지 조사해 두었다.먼저 안평의 진초천자문 말미에 애기필법
명공각석욕여동지자공지 청지(愛其筆法命工刻石欲與同志者共之 淸之) 라고 하였다.그
필법을 좋아하여 이름난 석공에게 새기게 하고 더불어 동지들과 함께 즐기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자칫 잘못 이 해석으로 조맹부의 천자문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
각이다.
왜냐하면 첫째,안평의 진초천자문과 조맹부의 진초천자문의 글씨 자획을 비교해 보았
는지. 둘째,안평의 발문글씨와 조맹부의 글씨를 상세히 대조해 보았는지,물론 석각본
과 목각본을.셋째,안평의 진초천자문은 현재14장이 남아있다.20~25cm ×9.5~11.5cm
로 해서 1항초서 1항 행간의 10자씩 1장당 4항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해서와 초
서의 운율은 같다.반면 조맹부의 석각본 해행천자문의 글씨는 해서나 행서의 글씨 자
체가 안평의 서체보다 획이 굵고 전체적으로 크다. 또 15.5~15.8cm ×26~26.1cm로
1항10자씩 해서 1항 행서 1항씩 1장당 6항씩 이루어져 있고 지질은 중국의 화선지이
다. 후대의 목각본 은 12 ×22cm로 1항10자씩 해서 1항 초서 1항씩 매장당 5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역시 지질은 중국의 화선지이다.
5. 글을 마무리하며
서예술에 있어서 비각과 목각,탁본은 우리의 전통예술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그것
은 독특한 예술적 매력과 풍모로써 인류사회의 문화예술 가운데 독창적인 영역을 구
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첨단과학문명에 밀려 도외시 되어 필요불
가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방법과 전통기법이 사라져 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광활한 중국대륙을 종횡하였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호태왕의 비각(碑刻)이
아니었으면 그의 위대성과 고려민족의 우수성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 이 역사적 자료
또한 탁본이라는 순수방법을 통하여 고증케 되었으니 서예술에 있어 금석고증이 얼마
나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저 서성 왕희지와 안진경은 좋은 석공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 자신의 글을
친히 붉은 글씨로 돌에 새겼다고 하지 않는가?그러므로 비각 예술은 곧 서예술의 체
현(體現)이라고 할 것이다.

선인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줄 알면서 이것을 조사 관리
하지 못하는 정부나 담당관청의 절대부족의 인력과 흡족치 못한 재정지원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은 산하에서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금석문이 공해와 산성비로 마멸되어 가
고 있다.

중국은 우리보다 잘 살아서 그 많은 비림을 짓고 현재도 비각과 번각비를 세우는가?
옛부터 우리나라는 석비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큼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이제 동방문화의 우수성과 훌륭한 선인들의 뜻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온 세계에 알려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中國藝術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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