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旧藏 金石文 / 韓相奉 1
秋史旧藏 金石文
韓相奉
金石學 書藝家
<차 례>
1. 글 앞에 3) 大唐故汝南公主墓誌銘幷序
2. 漢郙閣頌 4. 汪王墓碑銘
3. 雙修庵攷藏法書 5. 樂毅論
6. 글 마무리에
1) 大般若波羅蜜多經卷13
2) 長明燈臺
1. 글 앞에
글씨를 서사(書寫)함에 있어서 필첩(筆帖)을 근본(根本)으로 수련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모본(轉摹
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촬영기술이 발달되지 않던 옛날의 사
정으로는 오직 전사(轉寫)의 방법으로 영탑(影搨)에 의존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형이 변조(變造)되는 수가 있으므로 이에 크고 작은 오
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석의 탑본(搨本)은 진한(秦漢)시대
의 원적(原蹟)도 직접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이에 법첩(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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帖)에 원형을 이 비탑(碑搨)으로 복원할 수 있는 중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추사(秋史)(金正喜: 1796-1856)의 학문은 광대하다. 그
는 총명기예(聰明氣銳)하여 타고난 천품(天稟)과 훈척가문(勳戚家門)
출신으로 그의 예술세계는 시 · 서 · 화 (詩 · 書 ∙ 畵) 일치사상에
입각하여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청(淸)의 고증학(考證
學)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가 이룬 추사체는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써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
식을 갈구하였다. 추사, 그는 한국 서예사에 길이 할 것이며 한 시
대의 전환기를 산 지식인의 기수였다. 일본인 동양 철학자 후지츠카
치카시 (藤塚鄰)(1879-1948)는 추사를 청조학(淸朝學)의 일인자라
고 하지 않았든가? 본고에서는 추사가 청으로부터 받은 금석문(金石
文)중 몇 편을 골라 도판(사진)을 살펴보고 논하겠다.
2. 漢郙閣頌(郙閣頌) (紙本帖17x27cm)
도판(1)을 보면 동경 · 추사(東卿, 섭지선의 호) 秋史 동심정인(同
審定印) 백문(白文)과 추사진장(秋史珍藏) 이라는 주문(朱文)의 도장
이 있고 惟斯析里 處漢之右···로 시작된다.
<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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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송(郙閣頌)은 한삼송(漢三頌)이라고 하는데 이는 석문송(石門
頌), 서협송(西狹頌), 보각송(郙閣頌)을 말한다. 후한(後漢) 건녕(建
寧) 5년(172)에 새긴 것으로 구정(仇靖)짓고 구불(仇紼)의 글씨다.
서협송(西狹頌)과 같이 이흡(李翕)이 언덕을 의지하여 바위에 구멍
을 뚫는 대공사를 완성하여 사람의 왕래를 안전하게 한 것을 칭송
한 내용이다.
명(明)나라 지방관 신여손(申如損)이라는 사람이 중각(重刻)한 것
이라 하나 전부 중각이 아니고 일부분을 보착(補鑿)했다는 설이 있
다. 글을 보면 전의(篆意)를 함유하여 준경박무(遵勁樸茂)하며 고졸
한 맛이 풍부하다. 끝(도판2)의 석문(釋門)을 보면 14자 1행으로 구
성되어 있는데 추사선생의 고증을 확인할 수 있다. 아쉽게도 1장만
남아있어 더 이상의 내용을 알 수 없다. 보각송은 한비(漢碑)라도
전예(篆隸)의 맛을 가진 사각(四角)진 형태의 결구(結構)로 시종(始
終)하고 가로획을 길게 하여 파세(波勢)를 한 비와 같이 강조하지
않았다. 또 점획이 굵고 가는 것이 없고 같은 굵기로 운필하였다.
이 탑본(搨本)은 원말(元末) 명(明)초의 것으로 추정한다.
<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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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雙修庵攷藏法書 (紙本帖13,5x29,3cm)
이 帖의 표제(表題)는 추사의 40대 초의 글씨로 보여진다. 표갑의
능라금수(綾羅錦繡)의 비단 장식은 명초의 것으로 보이며 탑본 또한
明 이전의 것이다. 표제 글씨 쌍수암은 추사의 호(號)이며 교장법서
(攷藏法書)란 감추어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인데 당시 淸의 학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 인듯하다.
1) 大般若波羅蜜多經 卷第13 <도3>
도판(3)의 길상여의관(吉祥如意舘)
주문인과 완당인(阮堂印) 이라는 백문
인 이 찍혀 있다. 이 경은 唐나라 삼
장법사(三藏法師)인 현장(玄奘)이 번
역한 육백부(六百部) 大般若波羅蜜多
經의 일부분 본인데 해행(楷行)을 겸
한 글씨로 사경(寫經)적인 맛이 적고
자의(自意)적인 筆意가 썩여 있으며
당 사대가의 서품과는 격이 떨어지며
자유분방하고 횡획이 가늘고 파임은
굵은 운필을 하였다.
2) 長明燈臺
도판(4) 正喜의 백문인과 완당고정금석문자(阮堂考正金石文字) 주
문인과 김정희씨고정지인(金正喜氏考定之印 )이란 주문인 3과가 찍
혀져 있다. 장명등대(長明燈臺)는 불가(佛家)에서 등(燈)을 밝혀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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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무명)의 업(業)을 녹이고 수명(壽
命) 장수(長壽)를 기리며 래세(來世)
복덕(福德)과 안녕(安寧)을 위하여 불
전(佛前)에 밤낮으로 밝혀 두는 것이
다. 서풍으로 唐의 造像記(조상기) 필
의가 짙고 일도일각(一刀一刻)한 날카
로움을 보여주는 글씨다. 자형이 크고
작아 고르지 않다. 추사선생이 내력과
출전을 밝혔을 터인데 문집(文集)이나 <도4>
여타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탑본 또한 전
문이 아닌 불안전한 상태로 말미 부분은 누락되었다.
3) 大唐故汝南公主墓誌銘幷序
도판(5) 탑본의 원적(原跡)에 증씨감
상(曾氏鑒賞)이란 묵문(墨文)인이 각인
되어 있다. 당의 여남공주(汝南公主)의
묘지명으로 공주의 휘(諱)는 자롱(字
隴)이며 서적도(西狄道) 사람으로 당
태종 황제(太宗 皇帝)의 아우에 삼녀
(三女)라 하였다. 行書로 된 이 첩은 <도5>
경훈당첩(經訓堂帖)과 묵지당첩(墨池堂
帖)에 각이 되어 있다. 오래전 원비(原碑)는 없어졌다. 일설에 宋의
미원장, 불 (未元章: 芾 북송:1051-1107) 임서한 것이라고 하고 있
으나 본 첩은 우영흥(虞永興, 世南558-638)의 서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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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남은 隋와 초당(唐)에 걸친 당 사대가(四大家)이다. 묘지명의
글씨는 유아(幽雅)하고 청완(淸婉)하며 박대(博大)한 기운이 있다.
도판엔 빠졌지만 끝장 간기(刊記) 부분에 위창(韋昌)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朱文 소장인이 있다.
4. 汪王墓碑銘 (17,5x300cm)
도판(6,7) 일천이제동심정인(日泉
彝齊同審正印) 백문과 육예방윤(六藝
芳潤) 주문과 증재오세창가(曾在吳世
昌家) 주문 추사진장(秋史珍藏) 주문
녹의서화(綠意書畵) 백문 등이 찍혀져
있다. 첩의 곁 표제가 떨어져 나가 필
자가 개보수하고 장황(粧潢)하였다. <도6>
이 첩은 탑본이 아니라 묘비명을 쓴
것으로 필사자는 누구인지 알길 없다.
장백(長白) 예익(豫益) 찬(撰) 산음(山
陰) 양송(楊淞)書로 전형적인 예서로
등석여(鄧石如1743-1805)필의가 짙
다. 이 묘비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중국서법년표(中國書法年表)에 <도7>
도 빠져 있었다.
도판(8) 첩의 끝장의 밑을 보면 주문과 백문을 겸한 오역매(吳亦
梅 : 慶錫:1831-1879)의 亦梅過眼(역매과안)과 秋史審正(추사심정)
주문인과 素筌鑑藏書畵(소전감장서화)주문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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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樂毅論 (21,3x34cm)
본 첩은 도판(9) 표갑은 황금능라
(黃金綾羅)로 되었다. 표제 글씨는 樂
毅論 진전한화지실(秦篆漢畵之室)로
쓰였는데 추사의 30대 후반의 방정方 <도8>
(正) 단아(端雅)한 해서이다. 도장은
홍두산인(紅豆山人)이란 소형 주문인이 찍혀
있다. 겉장을 넘겨 내지에 붙은 추사의 도판
(10) 묵연연(墨緣緣)의 장황한 글을 읽을 수 <도9>
있는데 양모(梁摹) 당각(唐刻) 이후
북송의 중각본(重刻本)이 이루어 졌으
나 이 또한 만나기 어렵다. 근세에 속
된 모본이 나돌아 東人은 감별할 능
력이 없어 현혹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또 도판(11) 여초(如初)선생께서도 <도10)
묵연연을 일독하고 자신의 소견과 추
사의 높은 안목에 동참함과 동시 본 첩의 귀중함을 역설 하였다.
도판(12)을 보면 삼십육구초당(三
十六鷗草堂) 주문인과 김한제(金翰濟)
백문인이 찍혀있다. 삼십육구초당은
추사의 도장이고 김한제는 추사 12종
사촌 태희(泰喜)의 아들로 추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상무(商懋)의 아들이
<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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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추사의 손자인 셈이다. 도판(12) 탑본의 본문 첫줄 부분 밑을
보면 판독이 불능한 도장이 두과 찍
혀 있는데 특수 x선으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의론은 왕희지(王羲之
321-379, 307-365)의 세해(細楷)중
제일로 인정되는 것이다. 자세(字勢)
가 좋아서 수경(秀勁)하고 필법이 묘
를 다한 작품으로 말미에 영화 4년 <도12>
12월 24일 서부관노(書付官奴)라 함은 아들 헌지(獻之)를 칭함이다.
그런데 본 첩의 끝부분은 이 승교(异 僧榷)영화 4년 12월 24일로
되었다 우군(右軍)이 필론(筆論)중에 말하기를 내가 악의를 1편 써
서 아들에게 보내며 이를 소장케 한다. 다른 곳에 준적이 없으므로
악의의 법을 王氏 누세에 이를 배울 수 있으며 또한 배우기 어려우
니 스스로 태만치 말 것이다. 일단양 (日丹陽) 僧이 있는데 이것을
나에게 구하려 해도 줄 수 없다, 왕씨 가법의 비전을 전하려 필묘를
다해 이 작품이 생겼을 것이다. 악의는 전국(戰國)시대 연(燕)의 재
상인 악의의 언행을 논한 것이다. 그 외 왕우군의 소해(小楷)는 황
정경(黃庭經) 효여조아비(孝女曺娥碑) 동방삭화찬(東方朔畵灒) 고서
문(告書文)등이 있다.
6. 글 마무리에
후지츠카 치카시가 발표한 청조문화동전의연구(淸朝文化東傳の硏
究) 추사의 자필구장목록(自筆旧藏目錄)을 보면 위 발표한 내용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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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 있다. 다만 청의 주달(周達)이 보낸 예학명(瘞鶴銘) 한폭과 석
경 159책 당 개성석경탑본(唐 開成石經榻本)은 건융55년 초정(楚亭)
박제가가 연경에 가서 손성연(孫星衍)으로부터 기증 받은 것을 추사
께 초정이 준듯하다 진전잔자(秦篆殘字) 1책은 섭지선이 기증하였고
유태비잔자(劉態碑殘字) 1책 또 섭지선이 기증하였다. 평안관섭씨장
서 부본 신섭지지인 옹방강(平安舘葉氏藏書 副本 臣葉志誌印 翁方
綱)의 글이 있는 금석존(金石存) 15권 4책은 청의 오옥진찬(吳玉振
纂)으로 추사가 수장타가 김구경(金九經)선생께로 갔다. 추사가 청
으로부터 기증받고 또는 구입한 금석문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으나 뜻하지 않는 변고와 두 번의 귀양살이로 인하여 산일 되
었다. 그 후 한일합방이라는 일제의 압박 속에 술한 자료들이 외국
으로 빠져 나갔다. 요행히 남은 길광편우(吉光片羽)의 금석문이 일
본에서 근래 입수되고 또 국내의 비장한 자료가 속속 발표되고 있
다. 금석문의 중요성 과 書寫에 있어서 풀어야 할 문제점은 훗날로
약속하기로 하겠다. 앞에서 몇 가지 밝혔듯이 현재 우리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 서예공부에 대하여 방법론적으로 개선해야할 문제 또
한 하나 둘이 아니다. 중국의 학문과 금석문 자료만 漢字文化의 전
부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숱한 서예자료와 금석문이 산재하여있
다. 머지않아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우리들의 부단한 노
력과 각고는 연찬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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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1. 書の歷史 : 伏見冲敬著 : 二玄社
2. 中國古代書法史 : 朱仁夫 : 北京大學出版社
3. 淸朝文化東傳の硏究 : 藤塚鄰著 : 國書刊行會
4. 阮堂集 : 金正喜 著 : 文淵閣
5. 澗松文華 : 71号 : 韓國民族美術硏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