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내하는 자의 결말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
기시는 이시니라 (약5:10-11)
이곳 본문에서는 곧 닥아 올 주의 재림을 생각하며 인내하기를 권면한데 이어서, 구약의 선지자
들을 인내하는 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어서 인내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말
한 선지자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겪은 고난
과 고통의 순간 순간들이, 현대사회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교훈이 된다. 선지자들은 주의 말씀의 대언자로 순종하여 살아가면서 누구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잃지 않고 온전히 그 고통을
참아 내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과 욕구를 버리
고 오직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끊어야 하
는 것들과 버려야 하는 것들과 보지 말아야 할 것들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내 속
에서 원했던 이것들은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고 결국은 죄악으로 그리고 불순종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인내로서 소망 가운데 그러한 고난을 이겨낸 선지자들,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예
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다니엘 등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고 있는가? 특히
‘인내하는’으로 번역된 ‘ 휘포메이난타스 ὑπομείναντας ’의 원형 ‘휘포메노’는 ‘~아래에’란 전치
사 ‘휘포’와 ‘머물다’란 의미의 ‘메노’의 합성어로서, 어떤 고통과 핍박 아래에서도 버티고 견디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흔들림없이 자기의 믿음을 버티어 낸 자들을 가
리킨다. 이러한 자들이 야고보 당시에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을 복되다 한 것이다. 바로 믿음의 수
많은 선지자들도 거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 하셨는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
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이겨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과 인내로 인한 최종 결말의 축복을 받은 자를 제일 먼저 꼽
을 수 있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욥이다. 그러나 욥은 실제로 고난 중에 좋은 인내를 보였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처절한 형편 때문에 심한 불평을 늘어놓은 자이다. 그는 더 견디
기를 포기한 자같이 불평하며 울부짖으며 한탄한다. 그런데 왜 욥을 예로 들었을까? 그것은 욥이
당한 고통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어느 인간이라도 그
와 같은 고통을 겪는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불평
은 수없이 했지만 끝까지 참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좋은 모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칫 오해
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욥의 인내가 모범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욥의 인내가 과
연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주께서 주신 결말이라고 했을까? 그 다음을 보게 되면
‘주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평을 하고 견디지 못해 원망을
해도 주님은 그것을 보지 않으시고 끝까지 주님께 붙어있는 그 모습을 보신다는 사실이다. 욥은
그 극심한 고난을 이겨낸 후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복, 자녀의 복, 장수의 복, 그리고 영생의
복까지 누린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살았고, 살고 있는 인생 중에 그와 같은 고난 뒤에 엄청
난 축복의 결말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11절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보면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다윗의 시편 가운데서도 주는 자비로우시며 은
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시라고 노래하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욥과 같이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잃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며 끝까지 인내하
며 견디어 낸다면,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더 많은 하늘과 땅의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3) 맹세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약5:12)
본절에서는 맹세 금지에 대한 명령이 나온다. 맹세에 관한 것들은 이미 1장과 3장에서 혀와 관련
이 되어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 장과 무관하게 갑자기 취급하는 것은, 이
맹세의 문제가 고난 가운데서도 혀를 바르게 사용해야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맹세의 문제는
이미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원래 ‘거룩한 대상을 굳게 잡다’란 뜻에서, 후에 ‘맹세하다’
란 뜻으로 의미가 바뀐 용어이다. 고대에는 맹세를 하게 될 때에 두 당사자 사이의 증인으로 여
호와의 이름을 세우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이 20년 만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도망쳐 나올 때, 뒤쫓아온 외삼촌과 길르앗 산
에서 만나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언약을 맺을 때에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증인이시니라’ 라고
하였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맹세를 경솔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맹세한 것이
근본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애굽기에서는 재판장 앞에서 자신의 진실함을 보이기
위해 맹세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거짓 맹세는 완전히 금지된 것이었다. 한편 이것을 역으로 이용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면서 맹세를 금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
하기 위해서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남발하였기 때문이다. 출20:7절의 십계명 중
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곧 죄이다. 그런 죄는 짓지 말아
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 라고 대답하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오’ 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서 정죄받음을 면하라고 한다. 여기서 이 말을 원어로 그
대로 직역하면 ‘정죄받음을 면하라’는 말은 ‘정죄아래 떨어지지 않도록’ 이라는 의미이다. 믿는 자
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속
임수로 이용하거나 거짓을 말한다면 곧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다.
<행함의 랩소디 열> 맹세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중세사회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면 죄를 사해 주기 전에 죄인에
게 일을 시킵니다. 어디 순례를 다녀오라, 구제사업을 하라, 연보를 하라는 등의 일을 시키고 그
것으로 회개한 증거가 있은 후에야 죄를 사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와서
죄를 고해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실수를 해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없는 얘기를 퍼뜨려서 많은
명예를 손상시켰는데 그 큰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용서를
받겠습니까? 그 신부가 하는 말이, 내일 아침에 큰 주머니를 가지고 오는데 그 주머니 속에 닭털
을 가득 넣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신부 하는 말이 “전에 당신이 몇 집이나 가서 예기를
했는지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대문에 이 털을 하나씩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어 이 여인은 뛰
어다니면서 털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되었습니까?” “아니요.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소.”신부는 그 여인이 내민 주머니를 다시 돌려주면서, 그녀가 놓고 온 털을 다시 모아가
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하기를 “바람이 이렇게 부는 날에 그 털을 어떻게 다
시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는 꼭 다시 모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모아올 수
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신부가 하는 말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기는 쉽지만은 한 번 하면 다시
모을 수는 없는 것이요. 우리가 말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아시오? 당신 죄가 얼마나 큰지 당
신은 아시오?” 단단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
는 맹세에 관한 문제는 이미 전에 말씀드렸던 혀의 바른 사용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면 야고
보서를 끝맺으면서 왜 갑자기 맹세에 대한 문제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혀를 바
르게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보시면”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라고 본 절이
시작하고 있는 것은 현재 믿음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해서 더욱 친근하게 닥아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무엇보다도’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 번역된 ‘프로 판톤’이
라는 말은 이 맹세에 관한 교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왜 성경은
맹세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첫째는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으로 인해 지켜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
인지 막14:27절부터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실 것을 암시하시면서 “너희가 다 나
를 버리리라” 고 하실 때에 베드로는 자신있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 라고 호언
장담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주목하시면서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그 말씀에 힘있게 말하지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때 옆에 있었던 다른 모든 제자들도 덩달아서 맹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막상 일이 닥치니까 그런 그들이 다 도망가고 그나마 베드로만이 대제사장의 뜰안까지 따라갔지
만, 아랫뜰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의 질문에 세 번씩 부인하고 말았던 것
입니다. 심지어 세 번째 사람의 ‘너도 예수의 도당’이라고 추궁하는 말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
면서 이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까지 아깝지 않게 드리
겠다던 사람이,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사람이, 불과 몇시간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번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연약한 존재이므로 맹세의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맹세는 그 자
체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허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거든요.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까지 했지만 몇시간 후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장담을 한 거예요. 그 속엔 자신도 알 수 없는 허위, 즉 거짓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미래에 대한 약속과 이로 인한 장담을 한 것이예요. 사람이 맹세를 하
게 되는 가장 흔한 경우인 거예요. 특히 남녀 간의 애정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할
때, 남자가 흔히 하는 멘트가 뭐예요? “평생 너의 울타리가 되어줄께 라든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
가 되도록 함께 살자”등등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여자들은 정말
믿고 결혼했는데 속았다 이거지요.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이런 멘트도 없으면 여성들은 저 남
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해서 결국 돌아서게 됩니다. 남자들의 맹세가 허위,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고 결혼하게 됩니다. 왜요? 그 당시는 기분이 좋거든요. 진실로 받아들여지거
든요.
미국의 대학생들은 대부분은 재학중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공부합니다. 이것은 낮은 이자로 쓰
고 졸업 후에 갚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에 갚지 않아서 골칫거리 라고
합니다. 이는 믿고 주는 미국사회의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호텔 숙박객들이 방의 물품을 슬쩍 가져감으로 생기는 손실이 연간 15억 달러에 이른다고 해요.
이 액수는 숙박객 3명 중 1명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간다는 통계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신용거래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예요. 지식층인 의사와 간호사도 병원의 물품을 가져갑니다.
그 손실액은 연간 1베드당 1천 달러라고 합니다. 결국 병원 운영비가 점점 높아져서 그 손실액을
환자들이 부담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귀한 헌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목사나 부흥사들의
배임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죠. 과연 성도들 중에서 가룟 유다를 비판할 자는 몇이나 될까요?
인간은 이만큼 연약하고 죄성이 가득 차 있기에 맹세를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켜지지 않는
맹세를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맹세 그 자체가 거짓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예요. 이것은 의도적인 것
이지요.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손해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예요. 평상시에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 어떻게 합니까? ‘내 목을 걸고’ 라든지 ‘내 성을 간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맹세가
어긋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아도 실제로 목을 걸어서 맹세를 지키지 못해서 죽었다는 경우는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그거 때문에 성을 간 사람도 못 봤어요. 이 세상은 맹세조차도 믿을 수 없는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성도들 조차도 예외가 아닙
니다. 즉 성도들 역시 교회 직분이나 신앙을 걸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도 거짓
을 말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본인의 명예는 물론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맹세
하셨는가? 입니다. 창22:16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
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거예요. 맹세는 보통 그 대상이 사람과 사람끼리 이루어
집니다. 신명기 7장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22장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맹세한 것이예요. 히브리서 6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맹세하는 이유를 들
었어요. 13절 보시면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했다고 했습
니다. 왜요? 그것은 17절 보시면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
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 라는 거예요. 성경에는 맹세에 대한 것
들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좀 전에 말씀드
린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 때문에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하나는 지금 말씀드린 거짓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법정 선서나 침례(세례) 또는
봉사서약까지 금할 것인가? 정치권에서 청문회 하는 것을 보면 선서까지 했는데도 거짓을 말하고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맹세는 금하지 않으셨으나 허세를 부리며 거짓을 말
하며 성실을 가장하는 수단으로 맹세하는 것은 금하신 것입니다. 거짓을 가리기 위한 맹세, 이것
은 십계명 중에 제 9계명을 어긴 것이 되는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롬 피크에 가면 거목의 잔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나무는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자동차로 달리다가도 눈에 띄면 멈춰서서 보면서 누구나 명상에 잠긴다고 해요. 식물학자는 그
나무의 연륜이 4백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콜롬버스가 미국을 발견했을 때, 그 나무는 떡잎이 나
온 상태였어요.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왔을 때에도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작았어요. 이 나무
는 그동안 열 네 번이나 벼락을 맞았어요. 4세기 긴 세월 동안 산사태나 폭풍이 몇 번이나 내습했
지만 살아 남았어요. 그 근처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진 뒤에도 그 나무만은 견뎌냈어요. 그러나 결
국 그 나무도 쓰러지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하찮은 딱정벌레 때문이었어요. 수많은 딱정벌레들이
나무의 외피를 뚫고 침입했던 것이예요.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딱정
벌레들의 줄기찬 공격에 의하여 그 거대한 나무의 생명력이 파괴되어 갔던 것입니다. 거짓말은
이 딱정벌레와 같습니다. 더군다나 거짓을 감추기 위한 맹세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영혼이, 그
즉시 활활 타는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평생 사시는 동안에 그런 일이
없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본문 보시면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지니” 라고
했습니다. 왜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66:1절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
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늘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수
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발등상도 땅도 하나님을 두
고 맹세하는 것이 되는 것이예요. 행 7:49절에도 이사야서 말씀이 인용됩니다. 그런데 50절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내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나
땅이나 우주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을 놓고 맹세한다
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 또는 능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5:35절에서는 예루살렘으로도 맹세
하지 말라고 했어요.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 있는 곳이예
요.
또 오 늘 본문 보시면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라고 하고 있어요. 아무 다른 것은 모
두 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까닭입니다. 머리로도 하지말라(마5:36)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 인간은 머리칼 하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것 역시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맹세는 여호와 하
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
가 결정해야 될 일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그 다음 보시면 “오직 너희가 그렇
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심판
이 있다는 것이예요. 그것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마5:37절에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
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옳다, 아니다를 넘어서는 것은 악에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야고보의 말씀처럼 자신의 능력을 믿고 무분별하
게 맹세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솔직히 말하는 습관을 가
져야 하겠습니다.
2. 고난 중의 기도와 책임 질 사역 (약 5: 13ㅡ20)
1) 고난의 때와 행복할 때의 믿음의 자세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양할 지니라 (5:13)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그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가를 13-18절 까지에서 구체적
으로 말씀하고 있고, 13절에서는 기도할 것을 의문문과 명령문을 사용하여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를 말하고 있지만 이 내용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말씀하고 있다.
그들에게 ‘고난 당하는’ 이라고 하고 있다. ‘악한’ ‘위험한’ 등의 형용사 ‘카고스 κακόϛ ‘와 ‘수난’
‘고난’을 의미하는 명사 ‘파도스 πάδοϛ ‘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불행을 겪다’ ‘고난을 당하다’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 고난의 의미는 선지자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이 당하는 고난일 수도 있으며
본인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일 수도 있고,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일 수도 있다. 일반적인 즉
누구나가 당할 수 있는 고난이다. 이에 대해서 본문은 적극적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렇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도를 하는가? 대부분이 내게
지금 닥치고 있는 고난을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
는 고난이거나 혹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고난이거나, 나의 죄 때문에 오는 하나님의 징계
의 차원인 고난이라면 없애 달라고 해서 과연 그 고난이 없어질까? 혹 그런 고난이 일시적으로
없어진다고 해서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고난이 올 때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또한 하나님을 힘입어 내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즐거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에 즐거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즐거워하는’
으로 번역된 ‘유뒤메이 εὐθυμεῖ ‘라는 단어는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고 기쁜 것을 나타내는 동사
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 즐거워하는 찬송을 올려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고난을 당했을 때는 울며 불며 때로는 금식하며
밤을 지새워 가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며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
서는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입을 싹 닦는 것이다. 그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소
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해결된 문제는 운이 좋았거나 나의 능력이거나 다른 어떤 사람들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태도가 아니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문제 해결이나 해결이 되지 않았거나 혹은 외적 환경이나 내적 어떤 감
정 등에 상관없이, 어떤 결과이던, 어떤 상태가 되든 항상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송
하며 찾아야 할 것이다.
2) 의인의 기도의 힘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5:14-16)
교회 내에서 혹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요구
하고 있다. 질병은 성도를 육체적 고통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정신적, 영적으로도 쇠약하게
만든다. 때문에 어떤 성도가 급작스런 병에 걸렸을 경우에 병든 성도가 교회로 가서 기도를 받기
보다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도록 하고 장로들은 기꺼이 가서 기도해 주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병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간 앓고 있는 환자인지 단기간의 환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장기
간일 경우에는 공동체애서 계획을 세워서 문병과 기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장로들’을 청하라고
했다. 그러면 먼저 장로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 부분은 교파마다 다른 의견들을 내고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연장자’란 뜻이다. 교회 직분에 대해서 ‘장로’ 라는 ‘프레스뷔테로스 πρεσβυτέρους
‘ 라는 단어가 쓰이면, 단순히 연장자란 의미를 넘어 교회 행정과 가르침 등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교회의 대표자들을 의미했다. 또한 딛1:5,7절에서 ‘감독’ 이란 용어도 같은 용어를 달리 표현한 것
이다. 그들의 임무는 온 양떼를 돌보며 치리하며 가르치는 일을 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주로
목사, 감독 등으로 불리워지고, 어느 교파에서는 목사와 장로로 행정과 목양을 나누어서 역할을
맡기고 또 어느 교파에서는 감독과 목사와 장로로, 또 다른 교파에서는 목사(엡4:11)와 집사로 나
누기도 하고, 어느 교파는 장로라는 명칭만 사용하는 교파가 있고, 심지어 어느 교파는 특별한 명
칭이 없이 형제라고 만한다. 이런 조직의 다른 형태는 서로가 옳고 그름의 다툼의 문제가 되어서
는 안되고, 궁극적인 사역의 목적이 같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용납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장로들’ 이라고 부르는데 좀전에도 설명했듯이 목양에 관한 것은 현대에선 목사라고 일반적으로
명명하므로 ‘목사’ 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또한 ‘장로들’의 복수를 사용하게 된 것은, 만일 목사 한
사람이 혼자 병자의 집에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한 후 그의 병이 나았다면, 그 목사는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이고 또 환자나 동행한 사람들의 입을 통한 소문은 결코 교회나 목사 개인에게 좋은
영향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함께 간다면 누구로부터의 능력인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게 되면 ‘기름
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름’에 해당하는 ‘엘라이오 ἐλαίῳ ‘를 바르는 것은 고대사회에 사
용하던 일반적인 치료 행위였다. ‘엘라이오’는 올리브 기름을 의미하는데, 장로로 불리운 오늘날의
목사들은 이 기름을 바르며 기도를 해주어야 했다. 눅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 만
난 자를 응급치료 할 때에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병자를 위하여 기
도할 때에 준비가 된다면 실제 치료 행위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치료 행위를 병행할 때에 환
자에게도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치료행위
와 기도가 함께 이루어질 때에 ‘주의 이름으로’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함
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깨끗이 낫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들이 하는 기도는 반드시 ‘믿음의 기도’여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구원하리니’ 라고 했는데,
이 구원은 종말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육체적 질병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환자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 8장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고 깨끗이 나아서 일어났다는
장면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야고보는 질병이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을 때에 라도,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질병이 죄와 연
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의 기도에 의해서 병 나음 뿐만이 아니고 죄사함의 결과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죄 때문에 온 병이 기도로써 나았다는 것은 그 원인인 죄도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미래수동태의 단어인 ‘아페데세타이’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절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죄와
관련된 질병에 걸린 자들은 먼저 죄의 고백을 하라고 한다. 그것도 ‘서로 고하며’ 서로 시인하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있은 후에 반드시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서
로 고백한 당시 뿐만이 아니라 그 후에 또 서로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후의
기도는 도고 기도이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다. ‘의인’은 누구일까? 물론 믿
음의 기도로 병자를 일으킨 목사들도 해당이 되지만 서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사함을 받은
심령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 바로 기도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66:18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도 듣지 않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그리고 회개한 후에 하나님 앞에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전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행함의 랩소디 열 하나> 고난 중에는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
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
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
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
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
라(약5:13-18)
고난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준비를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은 고난 중의 대처방법으로써 기도를 권면하고 있어요. 특히 13절은 기도에 대한 것을 말씀하기
전에 신앙의 기본자세, 곧 태도를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은 원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3
절 함께 보시죠.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이 말씀을 볼 때에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과 슬픔을 당할 때도 있고 형통한
가운데 기쁨을 누릴 때도 있습니다. 성도라고 하여 마냥 축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난
만 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시 사철 낮과 밤이 있듯이 인생은 누구나에게 낮과 밤이 있으며 사막
의 길을 갈 때도 있고 오아시스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오늘 우리가 본 절을 주
목해야 하는 것은 고난과 기쁨이라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확실히 가르쳐주
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난과 역경이 오면 기도하고 즐거울 때면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고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생 때, 공부를 할 때나 운동을 할 때도 기본을 잘 연마하고 원칙을 잘 지키면 공부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고 운동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잘하면 기회가 났을 때, 찬스가
생겼을 때, 그 기회를 잘 살릴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고 실패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 하나님께 기
도하기 보다는 연민이나 원망, 불평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 감사
하고 찬송을 드리기 보다는 자기 자랑에 빠지거나, 교만, 안일에 빠져 오히려 하나님을 잊게 되는
거예요.
1982년, 마이클 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
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어요.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어요. “여왕 폐하!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
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어요.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
였어요. 페이건에게는 사 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정
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 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
만 본다는 것이었어요. 사나이의 얘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
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 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이었어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이었어요.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을 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시50: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언제나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두번째 문단은 14-16절까지입니다. 고난, 고통의 가장 대표적이며 누구나에게 닥
쳐올 수 있는, 병으로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질병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
넣고 육적, 정신적으로 쇠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성도가 교회로 가기
보다는 교회의 장로들을 집으로 부르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 라는 말
은 ‘연장자’란 뜻이예요. 그러나 교회 직분에 대해서 이 단어가 쓰이게 되면 단순히 연장자란 의
미를 넘어서 가르침과 행정등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교회의 대표자들을 의미했어요. 딤전 5장, 벧전
5장, 요이 1장에서는 교회의 핵심 직분으로 나타나 있고 딛 1:5절에서는 감독으로 나와 있으며
행 20장에서는 ‘장로’를 ‘감독자’로 달리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들의 임무가
온 양떼를 돌보며 교회를 치리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에베소서 4: 11절에서 언
급하고 있는 목회에 전념하는 목사로서 부르게 된 것이예요. 때문에 이 당시 목사들은 병든 성도
가 자신들을 청한다면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써 당연히 가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을 청하라고 했어요. 목사가 한 사람일 경우에는 믿음이 신실한 다른
직분자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예요. 그러면 왜 여러 명을 청하라고 했을까요? 만일 목사 혼자
가서 기도했는데 병이 나았다면, 그 목사는 자만심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간다
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 때문에 병이 나았다고 자랑하거나 자만심에 빠지지 못할 것
입니다. 여럿이 함께 방문하는 것은 치유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교만을, 마귀의 미혹을 사
전에 방지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다음. 이렇게 방문해서 어떻게 해
야 할까요? 여기 보시면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름은 올리브 기름을 의미합니
다. 병자의 요청을 받은 목사와 다른 사람들은 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어야 했어요. 사 1:6절에 보시면, 매를 맞아서 온 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났을 때, 그것을 기름
으로 부드럽게 해주고 싸주라고 했어요. 고대 세계에서 병자의 치료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일반적인 치료 행위였어요.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 만나자를 응급처치하는 과정에서 눅 10장에
보시면 포도주와 기름을 사용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병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 치료행위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의학이 발달된 현대에 똑같이 따라했다 가는 큰 변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 당시는 의
사도 의약품도 구하기 힘든 시대였던 것을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실제 치료행위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 모든 행위가 주의 이름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이예요. 병자의 치료를 위해
취해야 할 행동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비롯되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의학
의 힘을 빌릴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할 때에 15절 보시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
키시리라”믿음의 기도가 확실히 병을 낫게 해준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병든 자를 위해 행하는 믿
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와 ‘일으키시리니’ 라는 말
은 종말론적인 의미와 부활에 대해서도 사용된 단어들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적 질병으로
부터 해방되어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도 중에 병든 자가 있을 때에 교회
책임자인 목회자와 그리고 함께한 자들이 병든 자를 방문해서 믿음으로 힘써 기도할 때에 하나님
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보시면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목사들의 기도의 결과 병
든 자가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거예요. ‘혹시’ 라는 말과 ‘범하였을지라도” 라는 말은 과거의 범
죄가 현재에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육체적 질병이 때로는 죄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 내용이 질병과 죄가 보편적으로 꼭 관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
니다. 질병이 죄와 관계가 있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역대하 16장에 보시
면, 남쪽 유다 왕국의 세번째 왕 아사와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간에 충돌이 생깁니다. 북 이스
라엘 왕이 큰 성을 쌓고, 서로 왕래를 못하게 하지요. 그때 유다왕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
궁 곳간의 은 금을 내어다가 아람 왕에게 갖다 주고 구원병을 요청해서 북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치게 됨으로 북 이스라엘이 성 쌓기를 중단해 버립니다. 그때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왕 아사에게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책망합니다. 아사왕은 책망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하나니를 옥에 가
두고 잘못을 지적하는 백성들 몇을 학대하였어요. 그리고 또 아사왕 39년에 아사의 발에 병이 들
고 위독했어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병 낫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함으로 2년 후에
결국은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관계가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요 9장에 보시면 예수
님께서 날때부터 소경된 자가 소경된 원인이 그의 죄 때문도 그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말
씀하심으로써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밝히신 것이예요. 욥의 경우도 마찬가
지예요. 욥 2:7절 보시면 사탄이 하나미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 그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
가 났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의 사탄의 일시적인 도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군데 있지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후 12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질병,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더 큰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한 선하신 뜻입니다. 다른 또 한군데가 더 있어요. 전
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번뇌와 분노
로 인한 질병이예요. 병은 많은 경우 마음에서 오기도 합니다. 암의 경우 50퍼센트 이상이 스트레
스와 관련이 있다고 하지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본 절의 경우는 육체
적 질병과 죄를 연결시킬 수 있으므로 그로 인해 마땅히 하나님께 용서함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
니다. 죄를 회개할 때에 ‘사하심을 얻으리라’. 그래서 죄로 인한 질병이었을 경우에 병든 자는 이
렇게 기도하라는 거예요. 16절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그 질병의 치료를 위해 질병의 원
인이 된 죄의 고백을 먼저 하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즉 질병이 죄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 죄를 서
로 서로에게 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상대방을 위한 도고기도가 되는 거예요.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한다면, 도고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적
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계속해서 하라는 거예요. ‘의인의 간구는’ 즉 목사님들, 그리고 거
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예가 민 11장에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어 사르실 때, 모세가 기도하여 꺼지
게 한일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교회 현장에서도 병든 자나, 어느 가정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전 성도가 합심으로 기도했을 때,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가끔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의인은 어느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칭하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눅든
지 해당이 되고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쳐칠 수상의 일화 중의 하나입니다. 2차 대전 중에 의회에서 중요한 결의안을 토의하고 있
었어요. 의장이 쳐칠 수상을 보니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어요. 신경질적인 의장은 즉석에서 쏘아
붙였어요. “여러분,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려는 자리에서 우리의 수상은 졸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머리를 번쩍 든 쳐칠은 큰소리로 외쳤어요. “무슨 소리요. 나는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
조국을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었소!” 쳐칠 수상은 국회에 참석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최대의 위기를 당할 때에 최고의 지도자가 기도를 하며 하나님
의 도우심을 받으므로 영국은 피해가 적은 편이었고 미국과 함께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우리 한국도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마 9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신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후에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큰 무리들 가
운데서 변론을 하고 있었어요. 변론의 이유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 때문이었어요. 아이의 아버지
가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예수님이 안 계셔서 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지를 못했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명령하시매 귀신이 떠나가고 아이의 벙어리 귀머거리가 고침
을 받아 정상인으로 되돌아오지요? 제자들이 나중에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
니라”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17, 18절은
기도 응답과 능력의 사례로 엘리야를 들면서, 보통 성도들처럼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자신들이 고귀한 신분의 엘리야 선지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같을 거예요. 그러나 엘리야 또한
다른 인간과 다를 바없이 동일하게 갈등하고, 회의에 빠지고, 지치고,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예요.
그런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되어 기도로 큰 능력을 행하였다면, 야고보서를 받아
본 수신자들은 물론, 모든 시대의 성도들 특히 오늘의 우리들 역시 엘리야처럼 될 수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주지 않으셨고, 다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엄청난 비를 그 후에 내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가 다시 내릴 때, 땅
은 땅의 열매를 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 이 시대의 진실된
성도가 병자를 위해 하나님께 진실히 기도한다면, 병자가 치유되는 은혜를 맛보고 교회 공동체에
서 자신의 역할을 더욱 힘차게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렘33: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난당할 때에 주께 부르짖
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기도 응답의 능력자 엘리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약5:17-18)
앞절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라고 했다. 성경 가운데서 엘리야와 엘리
사를 들 수 있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누구를 존경하고 좋아할까? 엘리사의 스승이기도 한 엘
리야이다. 또한 그는 에녹과 같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승천한 사람이다. 그가 보여준 기도와 그
에 따른 응답과 그리고 능력은 그 과정 가운데에 엄청난 시련과 움직이지 않는 믿음의 인내가 성
경을 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붙들어 맨다. 그러한 그를 본문에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이라고 한다. 성정이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단어는 합성어인데 ‘비슷한 경험을 한’
‘같은 감정과 같은 행동의 생각을 가진’이란 뜻으로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위인들을 대하면서 나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혹은 나는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는 ‘무관심’의 명패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고 있다. 야고보는 그렇지가 않다고 지금 말한다.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다. 바로 당신도 그와 같은 기도 응답의 사람, 곧 능력자일 수 있다고 주문한다. 하나님 앞에 의
로운 사람이라면 당신도 엘리야처럼 기도 응답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엘리야가 행한 기도와 그 응답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그 기도가 응답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
였다. ‘간절히’로 번역된 ‘프로슈케 προσευχῇ ‘는 ‘기도’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프로쉐윅사토’ 라는
말도 ‘기도하다’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직역하면 ‘그가 기도로 기도하였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표현인 것이다. 히브리 언어에서는 중요하거나 강조할 때, 혹은 지난 사건에서 강하게 주입시킬
때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 칭함 받기에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자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러한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것은 어
디까지나 하나님 기준인데, 엘리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의 기도로 인하여 왕상 18: 1절에서는
비가 오지 않은 기간을 ‘3년’이라고 했는데, 야고보는 3년 6개월이라고 언급했고, 눅 4:25절에서
예수님께서도 ‘3년 6개월’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가뭄 기간이 정확히 3년 6개월이었던 것이 확실
하다.
‘다시 기도한 즉’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로 3년 6개월 간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게 되고 식물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병든 자나 혹은 어떤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성도를 위하여 교회 혹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어떤 공동체가 기도할 때에 가장 요구되고 있는 것
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진심이 빠진 의무적이거나 형식적
이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 합심기도나 도고기도는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심 기도하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 된 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
러 명의 목사 또는 직분자들이 기도하는 중에 ‘의인’이 있을 때에 기도가 응답되었듯이 ‘의인 된
자’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소용이 없다. 또 다른 하나는 ‘간절히’이다.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자라 하더라도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면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까지 기도하시지 않았는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반드시
기도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의인의 기도로 병자가 치유되는 은혜를 맛보면 그는 교회
공동체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큰 일꾼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땅
이 열매를 맺듯이 되는 것이다.
4) 마지막 권면,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
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약 5: 19-20)
야고보는 이 편지의 마지막 끝 부분에 까지도 목회자적 양심과 관심과 의무를 가지고 끝마치고
있다. 그것도 인사나 축복의 형식이 아닌 진심을 담은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에게 전하고 있다. 예
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나 그 백성들이 각 지역마다 장소마다 모여서 교회 공
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물론 첫째는 각
개인이겠지만, 그러나 개인은 교회에 들어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첫째로 중요한 것
은 영혼 구원, 가르쳐 세우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부탁하신 것이 이것
이다. 신약성경은 이 부분을 수도없이 직 간접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명령하며 강조하며 권면하
고 있기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일 먼저 영혼 구원을
신앙생활의 실천 사항으로 두어야 할 것이고, 특히 목회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인도
자로서, 교회지도자로서 자나깨나 행동 하나 말 하나에까지 성도를 대할 때에 내게 맡기신 영혼
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근래에 쏟아지는 교회에 대한 비난은, 교회에 대한 그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에 거기에 비례한 실망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어느 자매는 내게 교회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와 같은 가난한 사람은 관심이
없어요. 일 때문에 몇 주일을 출석을 못해도 전화 한 번 없어요. 10년을 다녔는데 한 번도 담임목
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이 안 나와도 그럴까요? 오늘날 교회는 주식
회사예요.” 기가 막힐 표현이었다. 야고보 사도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둘째로 중요한 것은 선교이다. 가난과 질병과 냉대와 억압에 고통 당하는 자들을 찾아가는 선교
를 말한다.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관심이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가 그 일에
앞장서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또한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틈틈이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 좋은 빌미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난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엇
일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것에 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은 교회
가 세상의 미혹에 넘어가서 세상과 똑같이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과 연결되는 것은 세
상의 부와 권력과 사치와 일락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문어발처럼 그 세력을 확장하고 큰 건물을 짓고 그것을 지키려고 가족, 친척 모두를 끌어들여 자
신의 부, 그리고 재산을 지키고 있다. 내 것이니까, 내가 이룬 것이니까. 남 주기 싫은 것이다. 그
맛에 중독이 되었으니까, 남에게 주기 아까운 것이다. 부자들의 세습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
논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교회가 그 길로 가겠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교회의 그 엄청난 부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이다. 또한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이다.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
님으로부터이며 그분의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드린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그리고 각 개인은 그와 같은 세상적 미혹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혹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이
시대에 가장 복된 자이며 참된 종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
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
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
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
<행함의 랩소디 열 둘> 약5:19-20 미혹에서 돌아서게 하라
네델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이었어요. 화가가 되기 전 그는 벨기에의
탄광에서 일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전도를 했어요. 어느 날 한 노동자가 입고 있는 색다른 옷
에 눈길이 끌렸어요. 이 노동자는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던 거예요. 그의
잔등 쪽에는 본래 포장 천에 쓰여졌던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 글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
니 취급에 주의할 것’ 이란 글이었어요. 그 순간 고흐는 새로운 깨달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정말 인간이란 깨지기 쉬운 것이다. 나는 전도사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주 깨지는가! 날마다 하나
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나를 지켜야한다.” 라고 일기에 적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
을 다짐하고 결심하고 맹세하지만,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를 깨뜨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편지의 마지막 부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사조차도 생략하고 권면을 하고 있어요. 아주 간절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다
급함 때문이고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한번 미혹 당해 떨어져 나가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되돌아
오기가 어려워지는 거예요. 실제로 교회 안에서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떨어져 나온 영
혼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를 않거든요.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거예요. 그 영혼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것이고, 그래서 마음이 더욱 다급해지는 것입니다. 앞의 문단에서 병든 자를 위해 믿음
의 기도를 그리고 권면을 하다가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잃은 양들을 생각하게 된 것이예요. 요
한1서도 보시면 이와 유사한 끝맺음이 나오고 있어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
리하라” 축복이나 인사로서의 끝맺음이 아닌 것은 목회자로서의 깊은 관심과 염려를 말해주고 있
는 것입니다. 19절 중간에서 ‘미혹되어’ 라는 말은 ‘옆 길로 빗나가게 되다’ 즉 정도에서 벗어난 것,
즉 나쁜 길로 들어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참된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다로 쓰였어요.
변절된 것을 말하지요. 어느 성도가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멀리 이사를 해서 그 곳에서 신앙생활
을 잘하고 있다면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교회를 다니지를 아니하고 옆 길로 빠져 세상
으로 다시 돌아갔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된 목회자는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그를 위하여 걱정하고
근심하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 뿐이 아니고 다른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요 14:6절에서 예수님
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고 하신 대로, 그 영혼은 회개 자복하고 주님께로 다시 돌이키는 방법밖에는 아무것도 이세상에
없습니다.
그 일을 오늘 19절 마지막은 “누가 돌아서게 하면” 믿음에서 떠난 자들에게 성도들이 도움을 주
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 한 지체를 이룬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형제나 혹은 자매가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할 때,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둬
서는 안되는 것이예요. 교회를 며칠 다니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몇 가지 이유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들은 모두 다 교회의 문제이고 교회의 책임이 되는 것이예요. 그 사람들은 그 교
회 성도들의 자세나 태도라든가 예배에서의 예배다움이라든가 목사님의 설교라든가 외형적인 것
의 부족함이 이유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1, 2년 혹은 몇 년 다니다가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어
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게 세가지를 추려본다면, 그 하나는 성도 간의 교제에서 오는 문
제예요. 성도 서로 간의 혹은 목사와 성도 간의 소통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서로 간에 정상적
인 교제를 나누지 못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다툼으로 발전하지요. 이렇게 되어서 둘이 싸
우게 되면 이미 늦어버려요. 싸운 당사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남을 것 같은데
결국은 다 떠나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다른 하나의 문제는 욕구 해결의 문제예요.
욕구라고 하니까 세상적인 욕구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것은 거룩한 욕구입니다.
누구나 믿음이 조금 들어가게 되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
니다. 이것도 여러가지로 나오지만, 대표적인 것이 전도와 선교를 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예요. 봉사도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자기의 재능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거예요. 이
것은 행13:34절에 보시면,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라고 했어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
에게 주신 믿음과 같은, 자기의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그런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예요. 하나님 앞
에 드리고 싶어하는 것, 물질이던 재능이던 그것은 바로 거룩한 욕구인 것이예요. 그것을 못하게
하고, 즉 어떤 제도적 장치나 기술적 수준으로(예를 들면 수준 이하라고 하는) 막아버린다면, 하나
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교육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교육과 그것에 필요한 훈련을 시키는 곳이어야 합니
다.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을 보고 “구원받으라” 라고 해보세요. ‘구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한
국에서 옛날에 1원짜리 동전을 사용했을 때는 아마도 돈 주는 줄 알았을 거예요. 구원이니, 성령
이니, 은혜니 하면서 무슨 말인지 뜻인지 모르는 사람을 앉혀 놓고, 수준있는 설교를 한다고 갖은
미사여구, 신학적 용어를 동원해서 한다면 알아 듣겠어요? 다음 주에는 안녕히 계세요가 되는 것
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졸다가 떠나버린 것입니다. 설교 중에 예화를 드는 것도 그런 것을 방지하
기 위한 것이예요. 예수님도 예화를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신앙은 아주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부터 튼튼해야 미혹을 당하지 않아요. 마귀가 마음 속에 들어와서 장난질을
치지 못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장로였던 사람이 이사를 와서 등록을 해도, 교회 프로그램 속에 있
는 기초성경공부부터 참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신앙의 점검도 해보고 복습도 하는 거
예요. 호4:6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백성과
제사장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
니 나도 너를 버려” 버리시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네 자녀들까지도 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어요.
2016년 말경에 일어났던 국정농단 사건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저는 하나님께서 한국교
회와 성도들을 향한 경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
이지만,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의 기간이 지난 뒤,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에 속해 있는 광나루에 있는 신학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신학대학 출신의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을 두 세번 들었습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입니까? 또 그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불교 골수 집안이예요. 어머니 육영수 여사는
사비를 들여 절을 크게 지었던 사람이예요. 결국 어머니도 총에 맞아 죽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
통령도 총에 맞아 죽었어요. 엄청난 정신적 멘탈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예요. 그런 특별한 환경
에 놓인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왔다면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치료했어야 했습니다. 구원을 경험하
게 했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움 당할 때 기도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
은 그 영혼을 다시 미혹하고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마귀가 주관하는 세상으로 돌아가
게 된 것이예요. 오랜 시간 붙잡혀 있었던 마귀의 세력, 미혹의 세계에서 돌아서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현대 한국교회의 아주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눅 10장에서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레위인과 제사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누가 강도 만난 자
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누구겠어요? 관심을 갖고 잘 돌봐 준 그가, 늘 지옥의 땔 나뭇감 들이
라고 멸시하던 그 사마리아인 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까지 철저하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하는 거예요.
오늘 19절 마지막 부분 보시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실제로 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사람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사후약방문’ 이란 말이 있지요?
약방문은 오늘날의 처방전이예요. 사람이 죽은 후에 처방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물론 현재
진리에서 떠났다고 완전히 죽은 생명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힘들다
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성도가 들어올 때에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 합니다. 기
존의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계신 후에, 마 28장에 보시면 제자들을 따로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불러 마지막 분부하시는 명령이 나옵니다. 18절부터 보시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
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마지막 2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
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
니라”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이 제자 삼아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는 것이예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이 땅의 교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최대의 명령이예요. 이 명령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실행한다면, 미혹되어 떠나는 자는 없을 거예요. 특히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미혹된 자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래
서 야고보는 미혹된 자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의 소중함을 성도들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야고보서 제일 마지막 부분에 간곡히 부탁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예요. 20절 함께 읽어봅시다. “너
희가 알 것은” 야고보의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지요?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미혹된 자를 진리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그가 영벌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예요. 물론 그를 구원하는 궁극적 능력은 하나님께
만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한 죄인을 생명으로 건
지시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진 자들이 이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열정은 성령을 받은 자에게 나타
나는 뜨거움의 감추어진 모습입니다. 바로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과 열정이, 미혹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가장 큰 하나님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미국에 처음 와서 보고 느낀, 제게 큰 도전을 주었던 교회를 소개하고 마치
겠습니다. 그 하나는 보스톤 하버드대학 지역내에서, 미국교회에서 장소를 빌려 오후 시간에 예배
를 드리고 있는 버클랜드 침례교회입니다. 그 당시(1997년) 보스톤에서 남쪽으로 약 80마일 떨어
져 있는 스프링휠드 한인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는데, 버클랜드 교회의 소문에 끌려서 어느 주
일예배 후에 그 교회 2시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교회를 빌려서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20분 전에 도착하였는데, 교회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올갠 소리에 잠시 걸
음을 멈추었습니다. 올갠의 소리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1913년에 나온 아일랜드의 민속음
악인 ‘오, 대니보이’였습니다. 이런 음악이 예배에 가능한가? 예배음악이 얼마나 많은데….왜 이 곡
일까? 그러나 곧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불신자가 처음 교회를 방문하면 전혀 부담이 없
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껏 나에게 있었던 교회예배와 의식에 대한 고정 관념의 벽
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곧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어요. 잠시 묵도를 하고 고개를 들
어 살피게 되었어요. 그것은 거의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지를 않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어요. 의
자 정돈을 하고 주보를 접고 청소를 하고 등등, 예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인원이 대략
40여명이었어요. 나중에 예배 인원을 보니까 그 보다 늦게 온 사람은 서너 명 정도였습니다. 예배
를 드리면서 보니까 예배의 어떤 형식이 전혀 없었어요. 여느 한인교회와 달리 사도신경이나 주
기도문이나 교독문이나 심지어는 축도까지도 없었습니다. 마치 어느 미국침례교회에서 예배드리
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것은 설교자가 목사님이 아닌 일반 성도였어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교회는 설교자가 담
임 목사님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어요. 제가 갔을 때는 버클랜드교회에서 파송된 개척 팀이 세
운 교회를, 담임 목사님이 순회 방문을 하던 시기였어요. 이 교회에서 팀을 파송해서 세운 교회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20군데가 된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많
다고 합니다. 약 6개월간 그 교회에서 주일 오후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담임 목사님의 설교는 두
번 뿐이 듣지를 못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나 표현이 4명의 다른 설교자들(두 분은 전도사이고 두
분은 평신도였음) 보다 훨씬 서툴렀어요. 담임 목사님은 한국어가 능숙치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설교자들은 대부분 하버드와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있는 분들이었어요. 너무나 신선했고
귀한 예배였던 것입니다. 예배 후에 계속되어진 애찬과 함께 있었던 성도의 교제도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하루속히 어떤 의식과 형식과 복음적이 아닌 전통이나 관습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성도
들을 가르치고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성령충만한 성도는 절대로 미혹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철저하게 훈련된 자들은 오히려 미혹에 비틀거리는 자들이나 빠진 자들을 다시 돌
아서게 하는 큰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차례 * 책을 열며
1. 시험속에 피어난 믿음의 노래들 (약1: 1-18)
1.믿음이란? *랩소디 하나 2. 시험이란? 3. 시련이란?
4.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5. 믿음에 근거한 프라이드를 가져라 *랩소디 둘
6. 유혹의 원천인 욕심에 속지말라 7.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2.검증되어야 할 믿음, 검증되는 믿음 (약1:19-3:12)
1. 행위와 믿음의 문제 (1: 19-1:27)
1) 거듭난 자의 듣고 말하기는 이렇게 하라 2) 들은 바를 실행하는 자 3) 경건의 또 다른 정의 *랩소디 셋
2. 이웃을 향한 믿음의 자세 (2: 1-13)
1) 교회 안에서의 차별행위 *랩소디 넷 2) 차별치 말아야 할 이유와 차별 행위 3) 긍휼함을 얻는 계명
3. 행함으로 판별되는 죽은 믿음과 참된 믿음 ( 2:14-26)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2) 의롭다고 인정받은 아브라함 3) 라합의 믿음의 출처 *랩소디 다섯
4. 바른 언어 생활 (3: 1-12)
1) 말 실수에 대한 경계 2) 혀의 특성 3) 잘못 사용되는 혀의 해악성 4) 성도가 사용하는 혀의 모순성 *랩소
디 여섯
3. 믿음과 세속적 삶의 문제 (약3: 13-5: 6)
1.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의 대조 (3: 13-18)
1) 선행으로 증명되는 참된 지혜 2) 세상의 악한 지혜 3) 선한 지혜의 특성들 *랩소디 일곱
2. 세속적 욕망과 성도의 합당한 자세 (4: 1-12)
1) 정욕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2) 세상 정욕은 곧 영적 간음이다
3) 하나님 앞에서의 바람직한 자세 4) 상호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랩소디 여덟
3. 자기 뜻대로 사는 세속적 삶 (4: 13-17)
1) 자기 뜻에 도취된 어리석은 인생
2) 주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성도의 자세 *랩소디 아홉
4.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 (5: 1-6)
1) 말세에 탐욕스런 자를 향한 경고
2) 부정한 축재자의 만행
4. 고난에 대한 올바른 준비 (약 5: 7-20)
1. 믿음의 인내 권면과 맹세 금지 (5:7-12)
1) 주의 재림때까지 인내하라 3) 맹세하지 말라 *랩소디 열
2) 인내하는 자의 결말
2. 고난 중의 기도와 책임 질 사역 (5: 13-20)
1) 고난의 때와 행복할 때의 믿음의 자세
2) 의인의 기도의 힘 *랩소디 열 하나
3) 기도 응답의 능력자 엘리야
4) 마지막 권면,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라 *랩소디 열 둘
저자 소개
최우섭
1944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동국대학교에서 식품가공학과를 전공 중
에 군에 입대하였다. 평화시장 새마을금고 설립에 참여하여 2년 만에 전국 최고의 실적을 올림으
로, 대통령 표창과 모범 회계원 상을 받는데 공을 세움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개인 삶에 닥쳐온
위기 때문에 사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련 가운데 교회생활을 떠난지 15년 만에 극적으로 예
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후 침례교 신학교와 카나다 크리스챤 칼리
지 등에서 신학 공부와 수련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낙후 지역에서
창일침례교회를 개척하였고, 10년 째 되던 해에 교회가 부흥이 되면서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있다는 자신 안의 갈등 끝에 교회를 사임하였다. 후임 목사와 성도의 지원으로 미국에 파송선교
사로 떠나게 되었고, 마이애미와 뉴욕시와 인근 뉴윈져에 있는 교회 등에서 담임으로 수년 간 섬
기던 중, 건강 검진을 통하여 중병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곧 치료에 돌입하였고, 6년 뒤에
이식수술을 하였다. 병 치료 중에나 이식을 받은 후에나 끊이지 않는 열정으로 여러 교회와 선교
회 등에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말씀을 전했다. 지금은 은퇴하여 뉴욕 롱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
면서, 육신은 쇠약하지만 선교회의 설교자로, 가르치는 자로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집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을 열며
우리 말로 광시곡이라고 하는 ‘랩소디’라는 악곡의 형식 중 하나에 마음이 뺏긴 것은, 2016년 초
새벽기도 중에 야고보서를 강해해야겠다는 충동을 받으면서였다. 클래식 음악에서 완성된 곡을
우리가 들을 때에는 그 속에 감추어진 작곡자의 영혼을 대하는 듯한 느낌과 그것이 우리에게 주
는 감동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 깊숙히 전해져 오는 낭만의 자유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그 곡의
악보 하나 하나에 표기된 음표나 규칙들을 보면, 마치 수학의 공식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다운 선율로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마치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신앙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서 연일 계속되
어지는 영혼 깊숙히 끓어오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받은 은혜가 찬송으로 승화되어져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요 감사요 신비이다. 그러나 시
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누리고 있는 예수 안에서의 믿음의 자유가, 사람들이 정한 어떤 규례와 조
직과 의식 속에서 조금씩 침체되어지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 침체의 국면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에게 둘러져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서, 행동하는 신앙의 모습으
로 바뀌어 질 때에 비로서 가능한 것이다.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한 시련에 대한 인내와 신앙생활의 의
무와 책임을, 성령 안에서 믿음 위에 굳게 선 행함으로 나타날 때에,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
한 열정이 마치 음악의 ‘랩소디’ 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열정을 품은
행함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설명해 준다.
모세의 생애를 흔히 40년씩 셋으로 구분한다. 바로의 궁중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그리
고 출애굽하는데 40년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그 중 마지막 40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장 왕성
한 활동을 한 시기가 된다. 인생 후반부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 구출이라는 하나님의 사명의
용광로 속에 자신의 열정을 내던짐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로서,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님을 대
면한 자로서 영광스러운 생을 마감한다.
7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육체적인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데, 유독 꺼지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을 감추거나 억누를 수 없어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 첫 번 째로 이 글을 완성하여
선을 보이게 되었다. 신앙이 없는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몇 건의 간증과 설교를 함께 넣어보았
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신 임권호 목사님과 정 제임스 목사님, 예림
기획의 임현미 사모님께 감사를 드리고, 늘 옆에서 어렵고 힘들 때도 묵묵히 기도로서 응원해 주
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책을 첫 번 째로 선물한다.
2019년 4월에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스미스타운에서 최우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