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KNA Memorial Foundation Newsletter
June 2020
박경재 LA 총영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방문
유물을 16년만에 독립기념관에 조건부로 이송
1368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 USA • Tel (213)733-7350 • Fax (323)733-7352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 지금은 미주 독립운동 역사를 전시하는 기념관이다.
We Must Pass On our Roots and History
Helen Kim, President of Next Generation Advocates
As we commemorate the 101st anniversary of the embedded in our roots and must be praised and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삼일절), let us lifted to our next generation, for they will be the ones
also remember that we as the descendants of the to continue our legacy of survival after we are long
first generation Korean Americans, have the duty gone.
to preserve our roots and keep heritage alive to
continue the legacy for our future generations. Korean Americans have a special advantage, for
we share the history and cultures of two of the
Korean Americans have played a vital and crucial role most powerful countries in the world today. With
in supporting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is in mind, let us continue to build upon Korean
of the 1900's -- this involvement also had a roots by instilling the values of the martyrs of the
significant impact in shaping our 117 years of history Korea Independence (독립운동) along with the hard
as immigrants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he selfless work ethics and survival skills of that of the Korean
revolutionary patriotism shown by our immigrant American immigrant pioneers.
forefathers was not only historical, but was also a
major component that helped set our roots in this Our future generations shall continue to thrive and
country and became the backbone that will carry our build upon our legacy, so long as we continue to
future generation. teach and pass on down our history. Today, we
celebrate our Independence fought for by our
Preservation of our Korean language, and continual Korean forefathers and our Freedom to live earned
teachings of our Independence Movement is by our immigrant parents. May God bless our future
imminent, for without the Independence from the generations.
Japanese colonial rule, we will not be here today
as a free person. The long struggle to survive and 대한독립 만세!
the strength to endure are characteristics that are
June 20, 2020
표지 사진 설명 : 1. 박경재 신임 LA총영사가 6월4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을 방문, 윤효신 이사장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2. 유물4인위원이 김완중 총영사 (왼쪽)와 김영임 독립기념관 자료부장이 11월22일 이송식 후 함께 섰다.
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이취임식 후 1월14일 함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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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회보 발간 인사말
독립운동 역사를 아끼고 교육합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립니다. 하하는 메시지를 써주셨
COVID-19로 예기치 못한 어려운 날들입니다. 습니다. 32페이지의 내용
모두가 건강을 중시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으로는 차세대 영문 페이
지, 홍명기 회장님 인터
미주 독립운동 역사를 연구하고 발굴하며 교육하는 뷰와 행사 사진 등 다양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도 준비된 행사를 중단해야 하게 꾸몄습니다.
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는
이겨낼 것입니다. 승리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 2009년부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회보를
을 되찾아오는 날 귀중한 사업을 여러분과 함께 정기적으로 발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호까지
펴 나갈 것입니다. 는 사진을 많이 실어서 보는 회보의 성격을 띄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2020년 6월부터는 읽는
어려운 시기이지만 회보(Newsletter)를 정성스레 회보로 오랜 편집의 틀을 바꾸었습니다.
펴냈습니다. 역사를 사랑하고 아끼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회보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는 대화의 광장입니다.
이번호의 특집으로는 대한인국민회 유물을 대여로 코로나의 어려운 이 시기를 모두 건강하게 잘
독립기념관에 보내기까지의 역사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이 회보 발간을 축 지내실 것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6월20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방문 및 안내업무를 일시 중단합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산 역사를 보고 배우는 기념관의 방문 및 안내업무를 일정기간 하지 못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2003년 12월 개관이후 미주 독립운동 사진 및 유물 그리고 영상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념관을 수많은 분들께서 직
접 찾아 주셨습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들은 그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1백년이 넘는 초기이민사와 독립운
동의 역사를 해설해 드렸습니다.
지난 3월이후 로스앤젤레스시의 코로나사태로 인한 행정명령에 따라 방문 안내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제조
처가 곧 내려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앞으로 더욱 전문적인 지식으로 역사해설 및 교육의 책임을 다 해나갈 것입니다.
2020년 6월20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및 이사 올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임원 및 이사 명단 •
Korean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Foundation 이 사 장 윤효신
부이사장 이창수, 민병용(학술위원장)
1368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 총무이사 최형호
T. 323-733-7350 (기념관) T. 213-440-0033 (이사장 윤효신) 재무이사 서경원
이 사 권영신, 배국희, 정종식, 클라라 원
www.KNAM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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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
회보 발간 축하 메시지
2020년도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회보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독립기념관은 지난 2003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유물이 발견
된 이래로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특히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 해에는 대한인국
민회 총회관 소장 유물이 독립기념관에 대여 형식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유물이 이관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주신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으로 이관된 유물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목록 정리와 자료분석, DB구축 등의 과정을 통해 연구, 전시, 교
육에 활용할 것입니다. 더불어 유물들은 전문적인 보존처리를 통해 영구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
일 예정입니다.
올해는 국민회 창립 111주년으로 독립기념관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소장 유물의 공개행사 및 특별
전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110여년 전 미주지역으로 초기 이주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
리고 고국을 위해 진력하신 선열들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전세계의 많은 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는 미국도 역시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인들의 구심점
이 되어준 대한인국민회를 기억하며 지금의 어려운 시국에도 미국에서 한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더
욱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6월 20일
3.1절 101주년 연합기념식 취소합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LA한인회, 그리고 61개 동포사회 단체 및 기관 등과 함께 3.1절 101주년
범동포연합기념식을 2020년 2월29일(토) 개최하기 위해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에 대한 우려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예방과 안전, 그리고 생명 중시의 뜻을 존중하여 2월29일 기념식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독립사적지 탐방(3월14일) 및 애국지사 후손 초청 세미나(3월28일)를 가을로 연기합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을 방문하시는 분을 위한 안내 업무를 2020년 3월부터 일시 중단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깊은 이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2월27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윤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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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박경재 신임 총영사 공식 업무 시작
로즈데일 미주 독립유공자 묘소 참배
참배를 하는 박경재 총영사와 부인 박경재 신임 LA총영사가 5월18일 로즈데일 애국지사 공원묘지를 참배하
는 것으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17일 도착한 박경재 LA총영사는 로즈
데일 내 한인 독립유공자 묘역을 둘러보고 한시대 가족 묘지에 헌화했다.
민병용 한인 역사박물관장은 박경재 총영사 부부에게 미주 한인 이민역사
와 독립운동을 자료와 함께 설명했다.
이날 박경재 총영사는 동영상 인사를 통해 “우리 선조의 독립운동 요람이
자 해외 최대 한인사회가 형성된 남가주, 네바다, 뉴멕시코, 애리조나 지
역에서 동포 여러분을 모시게 돼 영광”이라며 “코로나19 사태에 중책을 맡
아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취임인사를 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육부에서 근무 후 공직을 떠났지만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라며 “앞으로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재외국민 보호, 동포
권익 신장, 한국 기업 지원 등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박경
재 총영사는 6월4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을 방문, 윤효신 이사장의 안
내를 받았다.
김완중 전 총영사 귀국
“지원해준 동포에 감사를”
2020년 5월14일 한국으로 떠난 김완중 LA 총영사 면서 동포사회와 함께 차세대를 육성하고 후원하
가 지난 2년 반 동안 총영사직 수행을 지원해 준 한 는 일”이었다며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로 동포
인사회에 감사를 드린다며 동영상으로 이임 인사를 사회가 어려움을 겪고있지만 특유한 한민족의 저
했다. LA 총영사관은 11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력으로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할 것으로 확신하고
김 총영사가 일일이 귀국 인사를 하지 못한다며 화 또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상 이임인사 동영상을 공개했다.
김완중 총영사는 “지난 2년 반 동
안 문재인 정부 초대 총영사로 일
할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고 지원해
주신 동포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감
사의 말씀을 전한다”고 인사를 했
다. 그리고 “(임기 중) 보람이라면
동포사회가 당당한 주류사회의 일
원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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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유물이 돌아오는 그날을 위해
한미박물관이 역사를 중시하기를
특별 인터뷰: 홍명기 M & L Hong Foundation 회장
M & L Hong Foundation과 물을 독립기념관으로 잘 보내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사업 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그동안
을 펴나가고 있는 홍명기 회장 너무 큰 수고를 했다는 말을 잊
을 코로나사태로 어려운 시기 지 않았다.
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 현재 한미박물관의 이사장을
보 발행을 위해 직접 인터뷰를 맡고 있고, 2019년 말에는 2백
했다. 만달러를 건축기금으로 내면서
한미박물관이 역사를 중시하기
“코로나바이러스로 강금생활 를 바랬다.
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모두가 그러하지요. 불편한 점 홍명기 회장의 도산 안창호에
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대한 존경과 사랑을 높고 깊다.
좋아진 것도 있지요. 공해문제이지요.” 무엇보다 리버사이드 시청 앞의 도산 동
도 치료중인 부인 로리 홍 여사를 위해서 많은 시간 상 건립, 도산이 세운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복원, 도
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산안창호의 날 기념의 뜻은 바로 도산의 정신을 꽃
피우고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만나뵈면 먼저 건강함이 넘쳐나고, 봉사의 의욕이 “1956년에 UCLA로 유학을 왔고, 어려운 때에 이
충만함부터 느껴진다. 혜련 여사와 필립 안께서 베풀어준 도움을 잊을 수
지난 20년 한인사회의 가장 큰 봉사 프로젝트를 모 가 없습니다. 흥사단에 나갈 때마다 맛있는 점심을
두 성공적으로 마친 큰 인물이시다. 한인사회에서 많이 먹었습니다. 고마움과 존경심이 큽니다.”
가장 존경받는 분이시다. 도산 안창호 동상 설립, 대 2002년에 수산 안을 모시고 한국에 나가서 김대중
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 복원, 남가주한국학원 재정 대통령을 만난 일, 어느 날 갑자기 대한인국민회관
위기 타결, 한인 정치가 배출 지원 등은 모두 홍명 복원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도산을 한없이 존경하
기 회장의 최고의 작품들이다. 기 때문이었다.
그중 2003년 대한인국민회관 복원공사를 하면서는 홍명기 회장은 앞으로 M & L Hong Foundation
천장에서 유물을 대거 발견한 일을 손꼽는다. 한편 을 통한 사업을 더욱 알차게 펴나갈 뜻을 밝혔다. 지
으로는 너무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큰 보람을 느꼈 역사회 발전은 물론 인류복지를 위한 사업을 중시
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는 11월 선거에서 미셀 박 스
틸, 영 김 두 연방하원 의원 후보의 당선, 데이브 민
“귀중한 유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였습니다. 애 의 주상원의원 선출을 위해 적극 후원하고 있다. 그
국지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리고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만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새로 평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강조했다. 차세대를 위한 지원에는 쉼이 없을 것이
비록 16년이라는 긴 세월이지만 대한인국민회 유 라는 홍명기 회장에 존경의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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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 3.1절 101주년 기념행사를 뜻깊게 ”
1차 및 2차 단체장을 초청, 회의를 통해 준비
1차 회의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서 3·1절 101주년 행사와 관련해 단체장 모임이 2월11일 열렸다.
참석한 20여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3대 행사 논의
2월29일 기념식은 범동포연합으로 개최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사장 윤효신)은 2월11일 국민회 기념관에서 단체장 모임을 갖고 101번째를 맞는 3·1절 기념
행사에 대한 논의를 했다. 한인 단체들이 뜻을 뭉쳐 연합 행사로 높은 뜻을 기리자는 취지다. 2월29일(토) 열리는 3·1
절 기념식을 ‘범동포연합’으로 열기로 했다. 오전 11시, 행사 장소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다.
눈길을 끄는 것은 차세대를 위한 역사 탐방이다. 제퍼슨가 도산 스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 카타리나 흥사단,
USC에 있는 도산의 옛 집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3월 14일(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반 가량으로 예정된 여정에는
80명의 참가를 예상하고 있다. 주로 한인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지만 일반인의 참석도 가능하다. 회비는 없다. 이
행사는 코로나 사태로 가을로 연기되었다.
2차 회의 2차 단체장 초청회의를 2월20일(토)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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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3.1절 앞두고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 참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한인단체장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2월 29일 3·1절 101주년기념으로
한인단체장들과 함께 로즈데일 미주 독립유공자 묘소를 찾았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3·1절을 앞두고 개최 합기념식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취소했지만 어려운
하려던 대규모 기념식을 대신하여 한인단체장을 시절 독립운동의 주인공인 미주 애국지사의 나라
초청, 이민 선조들이 묻혀 있는 로즈데일 묘지의 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서 묘소를 찾았다”고 말
미주 독립유공자 묘소를 찾아 2월29일 헌화하고 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 참배에는 미주3·1여성
참배했다. 동지회(회장 그레이스 송), 자유민주통일 미주연합
회(회장 임태랑), 흥사단 미주위원부 임원진 등 20
윤효신 이사장은 “당초 예정됐던 대규모 범동포연 여명이 참석했다.
장태한 교수 저서 ‘미주한인사’ 출간
"자신의 역사를 모르면서 자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
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 동포연구소 장태한(사진)
다. 한인의 역사는 정체성 확 소장이 한인들에게 의미있
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 는 책을 출간했다. 바로 고
려대 출판문화원에서 발간
합니다. 자랑스러운 한인으 한 '미주한인사(표지)'다.
로 성장해야 공동체 활동에
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장태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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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독립유공자는 모두 309명, 여성은 30명
2020년 3.1절에 이진묵 · 임베시 2명 발표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원회에 북미대한인학생회 연
정부수립 1년후인 1949년부 합회 총회 부회장으로 참석
터 일제로부터 나라를 찾는 했다. 그리고 1944년 샌프란
데 한 삶을 바친 독립유공자 시스코 전시정보국(Office
를 처음으로 선정해서 발표 of War Information)에서
를 했다. 단파 일본어방송으로 미국
이 일본에 벌인 심리전에 참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했다.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독
립유공자(애국지사)는 모두 이화여전을 나오고 1924년
309명이다. (도표1 참조) 여 하와이에 도착한 임베시는
성은 30명. 국가보훈처는 1년 이승만 박사의 기독학원 일
에 세차례 독립유공자를 선정 발표한다. 3.1절(3월1 을 도왔다. 1928년 김경씨와 결혼, 시카고에서 식당
일)과 광복절(8월15일) 그리고 순국선열의 날(11월 을 경영하며 도산 안창호, 이승만 박사, 서재필 박사
17일)이다. 독립운동 기간은 1905년부터 1945년이 등 독립운동가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다.
며, 활동지역은 미국 그리고 멕시코, 쿠바이다.
특별히 도산 안창호와 교류가 많았다. 그리고 임병직,
미주 독립운동가인 이승만 박사는 1949년 건국훈장 김 마리아, 유일한과 친교를 갖고 후원을 했다.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남편 김경은 1933년 시카고 세계만국박람회에 나갈
는 1962년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되 정도로 재정이 튼튼했고, 독립운동에 아낌이 없었다.
었다. 2020년 3.1절까지 발표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한평생 번돈을 교포와 조국을 위해서 썼고, 이번에 남
15,931명이다. (건국훈장은 모두 7등급으로 분류) 편에 이어서 여성으로 독립유공자가 된 것이다. 임베
시는 21살 때 금주가를 작곡, 찬송가에 실려 있다.
국가보훈처는 2020년 3.1절을 맞아 106명의 새 독립
유공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미주 방면으로는 로스앤 <도표 1>
젤레스에서 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이
진묵 목사, 그리고 시카고에서 독립금 지원을 한 임 미주 독립유공자 309명
베시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진묵 목사는 건 국가보훈처 발표
국포장을 그리고 임베시는 대통령장을 받았고, 남
편 김경(애국장)과 함께 부부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2015년까지 모두 217명
올렸다. 2016년 43명
2017년 33명
연희전문을 졸업한 이진묵은 1937년 미국에 유학을 2018년 9명
왔다. 버클리의 태평양 신학교를 마친 뒤 1940년에 2019년 5명
로스앤젤레스의 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2020년 2명
했다. 1943년 10월 북미대한인학생회 부회장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특별위원으로 독 모두 309명
립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1944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
(이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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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단장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 독립금 모으다
어머니 남편 동생 부부 5 명이 애국지사
맏사위 맏딸 어머니 맏아들 며느리
김성권 강혜원 황 마리아 강영승 박원신
애족장 (2002) 애국장 (1995) 애족장 (2017) 애국장 (2016) 애족장 (1995)
7월의 운동가에 중가주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창 미주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단, 독립금을 모은 강혜원 초대단장이 선정되었다.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해마다 월별로 1. 1993년 4월의 독립운동가 노백린
12명의 독립운동가를 발표하는데, 7월에는 미주 여 2. 1996년 1월의 독립운동가 송종익
성독립유공자인 강혜원 단장이 뽑힌 것이다. 3. 1996년 4월의 독립운동가 서재필
4. 1996년 6월의 독립운동가 유일한
강혜원 단장은 1919년 한국의 3.1운동후 중가주 다 5. 1996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전명운
뉴바에서 8월5일 여성단체 대표들과 대한여자애국 6. 2003년 1월의 독립운동가 김 호
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일본 물건 안 쓰기, 고기 안 7. 2004년 4월의 독립운동가 이 강
먹기 등으로 모은 돈을 대한인국민회와 상해 대한민 8. 2004년 6월의 독립운동가 문양목
국임시정부로 보냈다. 9. 2005년 8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10. 2008년 3월의 독립운동가 장인환
또한 가족 중 5명의 미주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는 등 11. 2009년 6월의 독립운동가 윤병구
명문 독립운동 가정으로 유명하다. 어머니 황 마리 12. 2010년 12월의 독립운동가 백일규
아 여사는 건국훈장 애족장(2017), 강혜원은 애국장 13. 2011년 7월의 독립운동가 홍 언
(1995), 남편 김성권은 애족장(2002), 남동생 강영 14. 2013년 5월의 독립운동가 차경신
승 박사는 애국장(2016), 동생 부인 박원신은 애족 15. 2013년 8월의 독립운동가 강영소
장(1995)를 각각 받았다. 16. 2015년 7월의 독립운동가 송헌주
17. 2016년 2월의 독립운동가 한시대
강혜원 김성권 부부 독립유공자는 로즈데일묘지 18. 2018년 6월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에 안장되어 있다가 2017년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19.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모셔갔다. 20. 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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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북가주 한인비행학교 설립100주년 맞았다
노백린 장군과 김종림 애국지사의 꿈
상해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과 백미대왕(Rice 북가주비행학교의 설립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Kang) 김종림이 세운 북가주 한인비행학교가 올 의 무장독립운동지원 계획 중 하나였다. 또다른
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9년 2월20일 북 하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도산
가주 쌀농장지대인 윌로우스에서 한인비행사를 양 안창호의 관심과 지원이 컸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하는 학교를 세운지 한세기를 맞이했다. 무엇보다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무 곽림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역사적인 이날을 기억하 는 매달 6백달러씩 비행학교를 지원하기로 결정
는 두가지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 첫째는 미주독립 했고 모금 활동을 폈다. 하지만 독립군 비행사들
운동과 한인비행학교 설립 100주년기념 세미나를 을 앞세워 도쿄 공습에 나서겠다는 노백린과 김종
개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 림의 꿈은 1년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문해서 비행사 양성의 큰 뜻을 가진 독립운동가의 1차대전 종전으로 곡물사업의 특수가 사라진 데
숨결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월부터 다가 1920년말 캘리포니아주 전역에 대홍수가 일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비상사태로 100주년 기념 어나 김종림의 쌀농장은 파산위기를 맞았기 때문
행사를 취소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다. 비행학교의 운영비 지원이 끊어져 한인비행
학교는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대한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
은 해외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 노백린은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가 국무총리 서리
와이에 1916년에 도착했고, 박용만의 대조선국민 를 맡았고, 1926년 1월22일 중국에서 숨을 거두
군단에서 별동대 주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노백린 장군의 손녀
리고 육군 출신인 그가 비행학교를 세운 것은 미주 인 노(이)영덕 권사(동양선교교회)는 “할아버지
한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가 독립군 군복을 입고 남대문으로 서울에 입성하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의 중요성을 경험한 미주 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끝내 안타깝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하나로 조종사 양성에 관심 다고 말했다.
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가주비행학교 교사인 한장호씨는 101세까지
북가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세운 노백린 로스앤젤레스에서
교장은 일본과 살다가 세상을 떠
전쟁을 하는 날, 났고, 비행학교 자
도쿄로 날아가리 료를 남가주대학
라는 꿈을 가지 동아시아도서관에
고 있었다. 훈련 기증을 했다.
을 시키던 교사 한인비행학교는 대
한장호는 “일본 한민국공군의 뿌리
천황궁을 폭파 이다. 창군 71주년을
하겠다”고 다짐 맞이한 공군의 기원
을 했다고 기록 으로 오늘 자리 매김
에 남겼다. 을 했다.
노백린 장군(중앙)과 비행학교 학생들
KNA Newsletter | 11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초기이민 3세로 한인사회를 위해 많은 봉사를”
어머니 메리 손과 삼촌 세미 리 박사의 길을 걷는 데비 손 변호사
초기이민 2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을 손
으로 꼽으라면 단연 세미 리 박사이다.
그는 미국과 세계를 크게 놀라게 한 기록
을 가지고 있다. 세미 리 박사는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두차례나 미국 다이빙 선수로 금메달을
따냈다.
미국 선수 가운데 키가 가장 작고, 거기다 세미 리 박사의 아버지 이순기씨는 이승만 박사를
가 인종차별이 심할 때다. 동양계 특별 적극 지지한 독립운동가이다. 현재 로즈데일 묘지
히 한인2세가 백인선수를 누르고 2회 연 에 부인 전은기씨와 함께 묻혀 있다.
속 10m 하이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바로 위의 누님인 메리 손 (1916 ~ 2010)은 LA교
말이다. 육구의 유명한 교육자였다. 40년간 교사로부터 장
학관까지 승진을 했고 2중언어 최고 책임자였다.
USC를 나온 뒤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었고 한국전 은퇴 후에는 8가에 있는 윌튼플레이스초등학교에
쟁 후인 1954년에는 미군의관 소령으로 아버지 나 는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금과 그의 이름이 새겨진
라 한국 부평에서 복무를 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학교 건물이 우뚝 서있을 정도로 존경을 한몸에
의 국민보건 및 스포츠위원 15명에 오르는 최고의 받았다.
영광을 한 몸에 받았다.
이번에 세미 리 박사 집안에 또 하나의 경사가 났다.
세미 리 박사를 “작은 영웅”이라 부른다. 항상 유머 메리 손의 큰딸 데비 손 변호사가 전국아태변호사
가 넘치는 분이다. 연설을 할 때마다 관중을 잘 웃긴 협회(NAPABA)에서 주는 여성리더십 어워드와
다. 그리고 백인들 앞에 서면 더 당당한 모습이다. 대니얼 트레일 블레이저 어워드 등 동시에 유명한 2
지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그를 기리는 두 개의 상을 받은 것이다.
가지 역사가 이루어 졌다. 항상 삼촌인 세미 리 박사를 가장 존경했고, 어려서
부터 “삼촌과 같이 유명하게 되겠다.”고 다짐을 했
첫째는 올림픽과 노르만디에 Dr. Sammy Lee 었다. 데비 손 변호사는 연방정부 무역대표부 차관
Square가 만들어졌다. LA시가 2010년 8월5일 그 보를 지냈고, 현재 미국의 대형 로폼 대표이다.
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다. “앞으로 초기이민 3세로서 어머니처럼, 또 삼촌 세
미 리처럼 한인커뮤니티를 위해서 더욱 많은 봉사
두번째는 그의 이름을 딴 Dr. Sammy Lee Medi- 를 하겠다”고 말했다.
cal and Health Science Elementary Magnet
School이 2013년 11월12일 1가길에 개교를 했다.
우수 초등학교로 평가가 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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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교 고문을 저격한 전명운 애국지사
마가렛 전 표 둘째딸 별세, 장례식 엄수
이름난 미주 애국지사의 딸이 우리 곁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페리정거장에서 1908년 3월23일, 장
인환 의사와 함께 친일외교 고문 듀함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의사(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둘째딸
마가렛 전 표 여사가(한국이름 전경용)가 향년 98
세를 일기로 지난 5월26일 별세했다.
고별의식은 29일 오전 11시 Holy Cross 천주교 묘
지에서 남편 표한규씨와 교인 친지 등 10명이 참석
한 가운데 최대재 신부 집례로 엄수되었다.
1923년 5월10일 출생한 마가렛은 아버지가 독립운
동으로 옥중생활을 했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면서
언니 로즈메리 전(한국이름 전경숙)과 함께 천주교
고아원에서 자랐다. 학교를 마치고는 수녀가 되었
고, 부모의 나라 한국에 나가서 사회봉사와 영어교
사로 근무를 했다. 이때 남편 표한규씨를 만나서 결
혼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홀트양자회 롱비치
지부 책임자로 한국고아의 미국 입양 관계 일을 했
다. 그리고 오랫동안 쇼셜워커로 남을 도왔다.
언니 로즈메리는 OSS작전에 참가한 이태모씨와 결
혼을 했고, 전명운 의사의 첫 사위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됨으로 2명의 애국지사가 나오는 자랑스런 집
안이 되었다.
마가렛 표 여사는 광복절 등 독립유공단체 모임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조의를 표했다.
남편과 참석을 했고, 언제나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옛 친구들을 만나면 반가워했다. 미주 독립운동가 전명운 의사는 1947년 11월 1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남편 표한규씨는 “몇달전부터 노환으로 활동이 어 위티어의 천주교 묘지에 오랫동안 묻혔다가 1994
려웠고, 큰 고통없이 조용히 잠들었다.”고 말했다. 년 4월3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도산 안창호의 3남 랄프 안은 마가렛 표 별세소식
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딸이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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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왼쪽에서 3번째) 일행이 방문했다. (2020. 2. 21)
▲ 2020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일 기념식 후 Cake Cutting을 하고 있다.
▲ 김연철 통일부 장관 일행이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를 참배했다. (2019.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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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 서울 시립대 학생들이 방문했다. (2020. 2. 17)
▲ 세계평신도 미주대회 대표들이 방문했다.
▲ 한국기독교 청소년 미주방문단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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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제2회 도산 안창호의 날 기념식
제2회 도산 안창호의 날 행사를 공동주최한 도산기념사업회 홍명기 회장, 흥사단 민상호 회장,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권영신 이사장이 뮤지컬 도산을 주최한 팀에 감사패를 전달했다.
도산 안창호를 주제로 한 Talk Show의 사회자 김남희씨,
패널리스트 민병용, 홍명기, 최창호씨
2019년11월9일 가든스위트 호텔에서 열린 제2회 도산 안창호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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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C 동아시아도서관 Kenneth Klein 박사의 은퇴에 부쳐
특별기고: Joy Kim, USC 한국학도서관 관장
미주 한인이민사 사료 발굴과 보존에 공헌을 많이 한 USC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평
동아시아도서관장 케네스 클라인 박사가 6월 말에 은퇴하 균적으로 북미 대학 동아시
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거의 40년에 걸친 그의 한국 관련 아 도서관 장서는 중국자료
노력과 공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이글을 쓴다. 60%, 일본자료30-35%, 한
국자료 5-10%로 구성된 데
LA한인타운의 토박이 비해, USC 동아시아도서관
만 이례적으로 한국학 자료
클라인 박사는 토박이 LA 출신으로 한인타운8가와 버 가 50% 가까이 된다. 뿐만
몬트 근처에서 나서 자랐다. 결혼 후에도 8가와 9가 사 아니라 USC 의 중국어, 일
이 마리포사에서 살았으므로 1950-1980년대의 한인타 본어 자료는 “장서 Collection”이라고 부르는 반면 한
운의 변화와 발전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산 증인이 국자료만 “한국학도서관Korean Heritage Library”
라 할 수 있다. 클라인 박사는 후버초등학교, 버질중 이라는 격상된 이름을 갖고 있는 사실에도 USC 한국
학교, 벨몬트고등학교를 졸업 후 UCLA 에 진학해 역 학도서관의 특별한 위상이 나타난다. 이 전세계에 유
사학 학사, 중국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3년엔 문
헌정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 례없는 현상은 LA 한인들의 적극적인
후 1983년 부터 USC 도서관에서 후원 뿐 아니라 클라인 박사의 지원이
38년간 동아시아도서관 관장으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근무하며 한국학 진흥과 재미한인
이민사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도산 안창호 가족 가옥 발견 및 보존
USC 가 미주 내 주요 한국학 센터
로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LA 한인이민사 전문가인 클라인 박사
에 의하면 USC 와 한인사회의 각별한
USC 한국학도서관 설립 인연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을 피해
www.usc.edu/korea LA 로 망명해 온 초기의 독립지사들
이 USC 인근에 정착해 한인타운을 형
USC 한국학도서관 (Korean 성하기 시작한 1900년대 초 부터 시작
Heritage Library) 은 클라인 박 됐다.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돌
사가 USC에 부임한지 3년 후인 아온 Florence Sherman 부인이 1890
1986년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클라인 박사가 중추적 년대에 USC 인근에 Korean Mission House 를 설립
역할을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후 본 도서관이 전 해 한국 학생들의 유학을 돕기 시작하면서 신흥우, 임
례 없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클라인 박사의 영신 등이 USC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초창기 한인들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 북미주에서 50여개의 은 LA Bunker Hill 지역에 모여 살았으나 인구가 늘
대학이 중국, 일본 자료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도서관을 면서 점차 USC 인근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샌프란
운영하고 있는 반면, USC만 유일하게 한국학 장서가
KNA Newsletter | 17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시스코에 있던 국민회가 1937년 LA로 이사올 때 USC 료는 미주 내 학자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발히 이
근방 현재의 위치에 정착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 용되어 여러 책, 연구논문, 다큐멘터리 등에 기여했다.
이다. 그 중 도산 안창호 가족도 있었는데 그들이 1937 클라인 박사가 맨 처음 발굴한 이민사 자료는 일제에
년 부터 1946년 까지 거주한 임대주택이 USC 소유였 맞서 싸우기 위해 1920년대 중가주 레드우드시와 윌로
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말하자면 USC 우스에 있던 한인항공학교에서 훈련 받은 비행기조종
가 안창호 가족의 임대주였던 셈이다. 도산이 중국 등 사들의 사진이었다. 그들의 후손으로 부터 1987-1988
해외에서 독립 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부인 혜련 여 년 기증 받은 사진 자료를 조사해1989년 "The Ko-
사는 그 집에서 5남매를 홀로 키우며 미주 한인들의 rean pilot training school of Willows" (Wagon
독립 운동 본부 역할을 했었다. 이런 역사적 집 을 Wheels 29:2 (Fall 1989)) 이라는 기사를 발표했고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클라인 박사이다. USC 도서관에서 관련 전시회도 열었다. 이런 노력이
USC 설립 (1880년) 당시엔
그 집이 캠퍼스 밖에 있었으 오랫동안 사장되어 잊혀져
나 점차 학교가 발전, 확장되 있던 Korean Pilot School
면서 캠퍼스의 일부로 흡수 의 역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되어 1986년 발견 당시엔 공 을 불러일으켰다. 본국KBS
대 유학생회 사무실로 쓰고 포함 여러 매체에 클라인 박
있었다. 그 후 1990년대 초 사가 재발견한 항공학교가
공대 새 건물 부지를 마련 보도된 후 한국의 역사학자,
하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할 공군 관련자, 등등 많은 이
계획이 세워졌을 때 클라인 들이 클라인 박사를 찾아왔
박사 와 동료가 합심하 다. 그 중 여러 핵심 인사들
여 그 집의 역사적 , 상 이 클라인 박사가 발굴, 보
징적 중요성을 대학에 알리 존한 자료로 인해 한국의 공
고 보존을 촉구했다. 그 결 군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
과 대학 당국은 그 건물을 캠퍼스 내 현재의 장소로 이 다고 말했다. 이 자료들의
전하고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후 2004년 중요성을 나타내는 최근의 한 예로 올해 김포에서 개
대학은 거액의 예산을 투입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 관 예정인 대한민국국립항공박물관 (National Avi-
‘‘Dosan Ahn Chang Ho House’ 란 공식 명칭을 부 ation Museum of Korea ) 에서도USC 가 제공한 여
여하고 2006년 부터 USC Korean Studies Institute 러 사진이 영구전시될 예정이며 그 중 일부는 조형물
(한국학연구소) 로 사용하고 있다. 로 재탄생하여 건물 앞에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클라인 박사의 노력으로 USC 미주한인기록관은 수 많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은 재미 한인들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몇 예
(미주한인전자기록관) 설립 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정한경, 김난영, 전낙청, 현
순, 양은식, 김찬희, 손원태, 김영철, 고원, 조재길, 필
클라인 박사는 한인 이민사 자료의 발굴 및 보존에 미 립 안, 새미 리, 김영옥, 소냐 선우, 데이빗 현, 로버타
국학계의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지난 35년 간 많 장, Korean American Story.Org, 등등.
은 정성과 노력으로 구축한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미주한인전자기록관)은 미주한인 대한인국민회 사료
관련 사료 최고의 보고이다. 이 기록관이 제공하는 자
대한인국민회 건물에서 2003년에 발견된 자료를 U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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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가 최근 전산화한 사실은 언론에 여러번 보도 되었지 상태로 정리하여 전자화된 복본과 함께 돌려준 것 처
만 그 이전 2001 년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재 럼 새로 나온 자료도 무료로 정리하기를 제안했다. 그
건 공사 전의 국민회 건물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지붕 로부터 16년이 지난 2017년 9월 말에 자료를 인계 받
도 새고 먼지, 더위, 쥐, 벌레 등에 노출된 폐가 상태였 았으나 약 3만 점의 손상된 자료를15개월 안에 작업을
다. 그 건물 안 홀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기록물들 마쳐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이 따라왔다. 이 일을 기
이 무더기로 방치되어 곰팡이와 벌레에 손상되고 있음 간 안에 완수하기 위해 클라인 박사가 겪은 고초는 필
을 한 익명의 한인이 USC에 알려왔다. 이 소중한 자료 설로 설명하기 어렵다. 처리 가능한 상태의 18,000면
의 보존을 위해 USC는 당시 국민회 건물의 소유주인 을 추려 아카이브 규격에 맞춰 고해상도로 스캔하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양해 각서를 맺고 시급해 작 작업을 마치고 벌의 전자 이미지 본과 함께 정리된 원
업에 착수했다. 클라인 박사와 동료가 약 5000점의 손 본을 계약기간 안에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상된 자료들을 구출하여 냉동 처리로 벌레들을 박멸한 그의 희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후 그 자료들을 깨끗이 정리, 복원, 목록하는 데 일년 일을 묵묵히 완수한 후 지병에서 회복하느라 몇 개월
이상이 걸렸다. 이듬
해 2002년 양해각서 병가 까지 내야 했다. 클라
의 내용 대로 깨끗이 인 박사의 희생적인 노력으
정리한 원본 5000 점 로 인해 이 중요한 사료를
을 두 벌의 고해상도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
복본 파일과 함께 교 었음을 후대의 학자와 후손
회에 반환한 후 해 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으
당 이미지는 USC 면 좋겠다.
Digital Library에
공개하여 학계 뿐 아 이와 같이 클라인 박사의 37
니라 후손, 모든 일 년 간의 숨은 노력은 전 세
반인들이 인터넷을 계의 학계 뿐 아니라 미주
통해 편리하게 이용 한인 후손 대대로 물려줄
할 수 있도록 제공하 수 있는 찬란한 사회적 유
고 있다. 산으로 남게 되었다. 클라
인 박사는 매우 겸손한 선
그후 2003년에 국 비적 인격을 지닌 인물로서
민회 건물 재건 공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는 것
사 중 다락에서 3만 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
여점의 또 다른 미 나 그의 은퇴를 계기로 한
주 한인들의 독립운 인 사회가 그에게 감사하
동 관련 기록 (1907- 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
1947) 이 발견되었 록 공적 기회를 만들 수 있
다. USC는 이미 전 기를 바란다.
해에 5000점의 비슷
한 자료를 더 나은
2020년 6월5일
KNA Newsletter | 19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유물, 대여로 독립기념관 이송
김완중 총영사와 유물4인위원 ( 권영신, 최형호 ) 수고로 결실
정영조, 변홍진
애국지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역사적 유물이 고국 대한인국민회 독립운동 자료는 이미 한국 국가기록
으로 갔다. 원에서 국가기록물 제5호로 지정할 정도로 귀중한
미주 최고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소장자료 독립운동 사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약 3만점이 2019년 11월25일 대여조건으로 한국 독
립기념관으로 이송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유물을 받은 후 목록정리
관 복원공사중 2003년 8월12일 천장에서 발견한 후 와 자료분석, DB 구축 등의 과정을 통해 연구, 전시,
16년만에 성사된 것이다. 교육에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지난 2월14일 한국에서의 대한인국민회 유물대여식
그동안 참으로 어려운 날들이 많았다. 훼손되어가 에 유물4인위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나
는 유물을 빨리 한국으로 보내서 화학처리나 전문 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를 초청했지만 한국
연구가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유물이 만들어진 미국 의 코로나사태로 연기되었다. 독립기념관은 6월중
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끝없이 오갔다. 한국 한국 언론사를 위해 유물설명회 그리고 8월15일에
행을 찬성하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반대측 단 대한인국민회 유물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
체 사이에 결국 소송의 과정까지 갔다.
유물4인위원의 큰 수고,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
그러나 2016년 1월15일 LA중재법원 판결은 “유 사들의 지원으로 유물에 대한 모든 어려움을 이기
물은 남가주대학의 스캔과 디지탈 작업화를 거 고 한국의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한국
친 뒤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대여조건으로 보내 이송이 벌써 8개월째가 된다. 앞으로 로스앤젤레스
고, 언젠가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박물관에서 연 에서는 한인 박물관과 수장고를 잘 지어서 유물이
구보존 할 수가 있을 때에 돌아온다.”였다. 그후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학자
2017년과 2018년 사이 남가주대학이 스캔 및 디 들은 미주 독립운동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어가기
지탈화 작업을 마쳤고 유물4인위원(권영신, 최형 를 기대한다.
호, 정영조, 변홍진)은 김완중 LA총영사의 노력
으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드디어 2019년 9월4일에는 유물4인위원이 합의서
에 서명을 했고, 9월22일 독립기념관으로 보내는 이
송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9월25일에는 발견이
후 16년만에 독립기념관으로 보냈다.
이번에 한국으로 간 유물은 20박스 분량으로 서류
로는 약 3만장에 이른다. 처음부터 대한인국민회 북
미총회관이 소장하고 있던 8박스 분량의 서류 및 공
문 1만장, 그리고 복원 공사중 천장에서 발견한 7박
스 분량의 2만장, 신한민보철, 책, 사진, 태극기 등
이 이번에 모두 간 것이다.
20 | KNA Newsletter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유물관련 연표
(2002년 ~ 2020년)
● 2002년 ● ● 2008년 ●
2월1일: 흥사단 미주위원부와 나성한인연합장 1월4일: 남가주대학(USC) Ken Klein 동아
로교회, 미주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는 2003년 1 세아도서관 관장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월13일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으며, 대한인국민 USC에서 새로 발견한 유물의 목록 작성을 위한
회 북미총회관을 복원하기로 뜻을 모음. 회의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11월12일: 대한인국민회 복원위원회 결성대회 개
최. 위원장은 홍명기 도산기념사업회 회장. KNA Newsletter | 21
● 2003년 ●
8월12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복원위원회(위
원장 홍명기)는 공사중 천장에서 태극기, 사진, 서
류, 문서 등 유물 발견(7박스 분량).
12월9일: 대한인국민회와 미주한인이민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사진과 유
물을 전시할 기념관의 개관식 거행
● 2004년 ●
2월25일: 국민회관 복원위원회는 발견한 유물중
기미독립선언문과 동판 등 4점을 처음 공개.
8월11일: 국민회관 복원위원회는 2차 복원을 위
한 기금모금 만찬을 개최. 미공개 유물 5점 공개.
총 21만달러 기금 모금(옥스포드호텔).
● 2005년 ●
8월24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복원공사중
발견한 유물을 한국정부 미주지역 유적지 실태조
사단(단장 한철호)에게 공개.
12월12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기념관에서 이
사회를 열고, 유물처리 및 내년도 사업계획을 논의.
● 2006년 ●
9월26일: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홍선표 책임연구위원, 김도형 선임연구위원은 천
장에서 발견한 유물은 희귀 사료라고 확인.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 2009년 ● 홍선표 책임연구위원(단장)과 김도형 선임연구위
7월10일: 제4차 운영위원회를 열고 나성한인연 원, 조성진 연구원, 유필규 연구원은 28일까지 2차
합장로교회에서 보관중인 유물의 조속한 목록작성 유물 실사를 마침.
과 보존을 위해 독립기념관에 공문을 보내기로 함. 12월5일: 국가보훈처 이경근 보훈선양국장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임원은 유물이관에 대
● 2010년 ● 한 협의.
10월31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잔 서 대표이
사장과 윤효신 부이사장, 권영신 이사는 한국 국 ● 2013년 ●
가보훈처를 방문, 운영기금 지급 및 유물처리 등 4월9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이사회를 열
사업계획 논의. 고 유물을 한국 독립기념관에 보내는 안건 토의.
5월31일: 정기이사회를 열고 유물을 한국으로
● 2011년 ● 보내는 문제를 논의.
7월15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나성한인연 7월19일: 정기이사회를 열고 유물을 한국으로
합장로교회는 LA총영사관을 통해 국가보훈처에 보내기로 만장일치 결의.
복원공사중 발견한 유물의 실사를 요청. 8월9일: 정기이사회를 열고 유물을 한국으로
12월16일: 국가보훈처 장재욱 기념사업과장과 배 보내는 구체적 방안 및 시기를 논의.
미숙 주무관이 자료실사 협의 위해 국민회 기념관
방문. ● 2014년 ●
12월23일: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월3일: 국가보훈처 이경근 보훈선양국장과 잔
홍선표 책임연구위원(단장)과 김도형 선임연구위 서 대표이사장은 국민회 유물처리 문제를 서울에
원, 조성진 연구원, 유필규 연구원 등 4명은 29일 서 만나 논의. 윤효신, 배국희, 민병용 이사 참석.
까지 유물의 1차 실사. 5월27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운영이사회
를 열고 한국 방문중 국가보훈처 국장과 실무자
● 2012년 ● 면담 내용을 보고. 유물의 한국이송 방안 논의.
4월16일: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월10일: 운영이사회를 열고 유물이송과 기념관
관리문제를 논의.
22 | KNA Newsletter 6월23일: 운영이사회를 열고 유물보존 사업 및
교부금 신청을 논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미
국노회 관계를 설명.
7월15일: 운영이사회는 유물의 한국 이송을 위
한 공청회 개최 안건을 논의. 반대의견을 제시하
고 있는 한인사회 인사를 만나 의견을 듣기로 함.
7월16일: 권영신, 윤효신, 배국희, 민병용 이사
는 이자경씨와 변홍진씨를 만나 유물의 한국이송
반대의견 청취. 17일에는 제임스 안 한인회장과
제프 고 사무국장을 만남.
7월29일: 역사 유물보존에 관한 운영이사회 개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최. 8월19일 공청회를 열기로 결정. 9월24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상오 11시
8월13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5명의 이사는 기념관에서 유물을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기자
8월19일에 열기로 한 공청회를 연기하고, 긴급운 회견.
영이사회를 8월18일에 개최하기로 결정(대한인국 9월26일: 흥사단 미주위원부 등 4단체는 서동성
민회 기념관). 변호사와 던컨 리 변호사를 통해 나성한인연합장
8월18일: 긴급운영이사회를 열고 9월5일에 대 로교회 박일영 담임목사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
한인국민회 유물을 한국으로 보내는 공청회를 개 단 민병용 이사장을 상대로 유물의 한국이송을
최하기로 정함. 준비위원은 윤효신, 배국희, 민병 반대하는 소송 제기. (11월12일 소송을 정식 LA
용 이사. County 법원에 제기)
8월28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한국일보와 9월30일: 민병용 이사장과 권영신, 배국희, 최형
중앙일보에 공청회 개최 광고를 냄. 호 이사와 박일영 담임목사는 Dennis Chang 변
9월4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유물을 한국 호사와 소송대비 2차 회의.
으로 보내기 위한 공청회를 한인회관에서 개최. 10월14일: 민병용 이사장과 권영신 이사 등은
한인사회 단체장 등 75명 참석. 26명의 발언자들 Dennis Chang 변호사와3차 회의. 한미역사보존
이 고국행의 반대의견을 밝힘. 위원회의 TRO에 대비.
10월15일: 민병용 이사장과 권영신, 윤효신, 배국
희 이사와 유물 이송 반대측 김시면, 서동성, 이자
경씨와 첫 회의.
10월20일: 민병용 이사장과 권영신, 윤효신, 배국
희 이사는 홍명기 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공동
이사장을 방문, 유물 이송 입장 설명.
9월11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기념관에서 10월20일: 최형호 관리이사와 박일영 담임목사는
이사회를 열고 잔 서 이사장 후임에 민병용 부이 독립기념관을 방문, 윤주경 관장과 유물 문제 등
사장을 새 이사장으로 선출. 협의.
9월22일: 민병용 이사장과 권영신, 윤효신, 최형
호, 배국희 이사는 남가주대학을 방문, Dr. Ken
Klein, Joy Kim과 UCLA 조상훈 사서와 유물관
계 회의.
9월23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과 나성한인연
합장로교회는 유물의 한국 이송을 반대하는 측의
소송 통보에 대응하기 위해 Dennis Chang 변호
사를 선임. 통역은 김부운씨.
KNA Newsletter | 2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11월6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이사회를 열 8월28일: 8월 정기이사회. 유물 중재재판 및 대
고 유물 한국 이송을 위한 MOU 체결 준비 및 홍 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운영의 효율성을 논의.
보용 뉴스레터 발간, 12월11일 이사 정기총회 개 12월9일: 대한인국민회 유물관련 중재재단에 관
최 결정. 하여 Dennis Chang 변호사와 최종 면담(참석자
권영신, 박일영, 최형호, 민병용, 배국희)
● 2015년 ●
1월12일: 1월 첫 이사회(이사장 권영신). 새해 ● 2016년 ●
사업계획 및 유물의 중재재판 준비. 1월9일: 임시이사회를 개최하고, 중재재판 관
1월22일: 문화재찾기한민족네트워크의 서상기 계 논의(국민회 기념관)
국회의원(새누리당)과 안민석 국회의원(새정치 1월13일: Dennis Chang 변호사 사무실에서
민주연합)이 LA를 방문, 유물처리 문제를 협의 중재재판 준비를 위한 회의. 권영신 이사장 등
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및 반대측 인사 참석.
들과 협의. 1월15일: 대한인국민회 유물 중재재판(판사
2월12일: 권영신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 Jon Mayeda)에서 대여를 조건으로 하는 한국이
장과 윤효신 부이사장, 민병용 학술위원장은 유 송 판결. 유물4인위원에 권영신, 최형호, 정영조,
물의 한국이송을 반대하는 김시면, 정영조, 서동 변홍진 선임.
성, 이자경씨와 만나 상호의견을 교환. (뉴서울
식당) 1월21일: 대한인국민회 유물보존 처리를 위한
3월17일: 3월 이사회. 유물 중재재판의 자료 준 합동 기자회견 개최(국민회 기념관).
비 및 3월28일 미주 애국선열 공훈을 기리는 기념 2월26일: 독립기념관 홍선표 연구위원 LA도착,
식 논의. 29일까지 대한인국민회 유물 목록 작성
4월15일: 유물4인위원과 남가주대학(USC)은 1 4월15일: 남가주대학, 대한인국민회 유물 목록
차 회의를 갖고, Ken Klein 박사와 Joy Kim 관 작성 작업 시작
장은 유물의 목록 작성을 시작 6월3일 마침. 5월9일: 대한인국민회 유물4인위원(권영신, 최
4월21일: 대한인국민회 유물 관련 Dennis 형호, 정영조, 변홍진) 회의 개최(뉴서울호텔)
Chang 변호사 사무실에서 중재재판 시작 서명. 6월3일: 남가주대학은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목
참석자 권영신, 박일영, 박광우, 윤효신, 배국희, 록 작성을 마침.
민병용.
6월5일: 대한인국민회 이사들이 유물 관련 중
재재판 준비를 위한 회의. (국민회 기념관)
6월10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의 Dennis
Chang 변호사와 중재재판을 위한 회의.
6월25일: 6월 이사회. 유물 중재재판 과정 및 광
복70주년 현기식 행사 준비 논의.
8월20일: 권영신 이사장은 북가주 김동국 회장
사무실 방문. 유물 보존사업을 위해 3만달러 지원
받음.
24 | KNA Newsletter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6월9일: 유물 4인위원 2차 회의(뉴서울호텔) ● 2018년 ●
7월12일: 정기이사회, 남가주대학과 유물 Scan 11월18일: 남가주대학(USC)은 지난 1년간 Dig-
작업 논의. ital화 작업을 마친 유물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
8월19일: 국민회 유물4인위원(권영신, 최형호, 단에 반환함.
정영조, 변홍진) 회의 (뉴서울식당)
8월25일: 유물관련 Dennis Chang 변호사 방문 ● 2019년 ●
협의. 2월12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호텔)
8월26일: 이기철 LA총영사를 방문, 유물의 한 3월1일: 남가주대학(USC) 동아시아도서관
국 보내기 설명. Dr. Ken Klein과 한국전통도서관 Joy Kim 관
9월10일: 정기이사회, 남가주대학과 유물 Scan 장은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Digital화 보존 작업
계약서 작성 논의. 을 마치고 처음으로 공개 (libguides.usc.edu/
10월5일: 남가주대학 Dr. Ken Klein과 유물관 KADA)
계 회의. 3월4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호텔)
3월7일: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은 유물4인위
● 2017년 ● 원과 MOU 협의.
1월20일: 유물4인위원은 남가주대학 관계자와 3월14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호텔)
유물의 Digital 문제 협의. 4월9일: 김완중 총영사는 유물4인위원을 총영
1월24일: 남가주대학(USC)과 유물4인위원은 사 관저로 초청 회의.
최종 절차를 협의. 6월3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호텔)
1월31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식당) 6월22일: 유물4인위원과 서동성 변호사와 회의
4월4일: 남가주대학(USC)은 대한인국민회 유 6월24일: 유물4인위원은 김완중 총영사와 독립
물 목록표 확인 및 사진 촬영 마침. 기념관으로 보내기 위한 협의서 상의.
5월15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식당) 7월3일: 유물4인위원 회의 (뉴서울호텔)
5월22일: 남가주대학(USC) Dr. Ken Klein과 7월4일: 남가주대학(USC)는 대한인국민회 유
유물 관련 회의 (대학 도서관) 물 중 3.1운동 및 독립기금 모금에 대한 자료를 처
6월21일: 유물 관련 Dennis Chang 변호사와 음 공개.
회의.
9월8일: 유물4인위원은 남가주대학(USC) Dr. KNA Newsletter | 25
Ken Klein과 회의.
9월25일: 유물4인위원은 Dr. Ken Klein, Joy
Kim과 유물 관련 최종 합의. 대한인국민회 기념
재단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보관중이던 유
물을 오후 3시 남가주대학(USC)에 Digital화 작
업을 위해 전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7월13일: 유물4인위원과 김완중 LA총영사, 서 고가 준비되면 돌아옴. 4인위원에 감사패 증정.
동성 변호사와 회의. 11월22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한국독립기념관
8월20일: 유물4인위원은 김완중 LA총영사와 이송을 위한 포장 작업. 4인위원과 대한인국민회
협약서 영문 최종 의견 조율. 8월26일에 영문 협 기념재단 이사장, 독립기념관 김영임 자료부장 등
약서 최종 타결. 8월28일 유물4인위원은 최종 조 이 입회 작업.
율 가서명.
9월4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독립기념관 대여
를 위한 협약서 체결식 및 기자회견을 오후 2시 기
념관에서 개최. 4인위원 및 신주백 한국독립운동
사연구소 소장과 김완중 총영사 등 참석. 협약서
및 부속서류 영문 서류 등 3부를 각각 서명.
9월10일: 유물4인위원 회의. (용수산) 11월25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을 2003년 8월12일
9월24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한국 독립기념관 발굴된 후 16년3개월만에 항공편으로 독립기념관
이송을 위해 운송업체 방문 견적서 작업. 으로 보냄.
10월8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이송 운수업체 Pro
Pack 대표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방문. 유물 확인. ● 2020년 ●
11월19일: 한국 독립기념관 김영임 자료부장과 2월14일: 독립기념관은 유물4인위원과 대한인
이현희 연구위원은 유물 2만여점에 대한 검수 및 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확인작업을 실시. 권영신 이사장과 윤효신 부이사 담임목사를 유물대여식에 초청. 참석자: 권영신,
장, 민병용 학술위원장이 참관. 최형호, 서동성, 윤효신, 박일영 목사, 김완중 LA
11월20일: 유물4인위원과 독립기념관 김영임 자 총영사. 코로나바이러스사태로 8월15일로 연기.
료부장과 운송 등 협의. 4월30일: 윤효신 이사장과 최형호, 배국희, 민병
11월21일: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한국 독립기념관 용 이사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김완중 총영사
이송 기자회견. 대여방식으로 보내고 미국에 수장 를 방문. 대한인국민회 유물을 보내는데 수고한
총영사에 감사패 전달.
6월초: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대한인국
민회 유물에 대한 기자회견(예정)
8월15일: 독립기념관은 광복75주년 기념, 대한
인국민회 유물전시회 개최(예정)
권영신, 최형호 유물4인위원, 서동성 변호사, 윤효
신 기념재단 이사장,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박일
영 담임목사 등 참석 예정.
(자료 정리: 민병용 회보 편집인 겸 학술위원장)
26 | KNA Newsletter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16년만에 독립기념관으로 간 유물 이야기
윤효신 부이사장의 숨은 봉사 빛났다
대한인국민회관 복원공사 중 유물을 천장에서 을 보인 것이다. 윤효신 부이사장은 두차례에 걸
2003년 발견한 후 독립기념관으로 가기까지는 16 친 대한인국민회 유물에 대한 독립기념관의 실사
년이라는 짧지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돕는 일에 적극 나섰다.
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첫번째가 2011년 12월23일 ~31일 그리고 두번째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들 사이에도 찬반으 가 2012년 4월16일 ~ 28일이다. 모두 3주간 함께
로 의견이 엇갈렸다. 화학처리나 보존을 위해 한 작업을 한 것이다.
국으로 가야한다고 많은 이사들이 생각을 했지
만, 한두 이사들은 이곳에 꼭 남아있어야 한다고 한국에서는 홍선표 책임연구위원 등 4명의 전문
주장했다. 가가 달려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한인국민
회 기념관에 나와 먼지가 나고 훼손될것 같아 만
또한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 지기 조차도 어려운 공문 한장 한장에 대한 목록
회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사이에도 미묘한 기 작성, 복사 등 고된 작업을 도왔다.
류가 흘렀다. 유물 이송문제로 교회의 노회 가입
이 늦어지자 교회측 이사들은 안절부절했다. 그 “얼마나 귀한 유물입니까. 한장 한장이 독립운동
때는 모두가 함께 걱정을 했다. 의 산 역사물이니까요. 혹시나 훼손될까바 한순
간도 소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반대측 인사들의 소송에 충격을 받은 실사작업을 돕는다는 보람에 날짜가는 줄도 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당시 이사장은 도의적인 랐습니다.”
책임을 지고 그 자리를 결국 내려놓기까지 했다.
독립기념관 실사팀이 모든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
2016년 1월15일에는 LA다운타운 법원에서 유물 치고 떠난 뒤에나 쉴 수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을 한국 보내기에 대한 최종 중재재판이 열렸다. 홍선표 책임연구위원은 윤효신 부이사장의 도움
그런데 솔로몬의 판결이 나왔다. 남가주대학에서 에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유물의 화학처리, 복사, 보존, 스캔 그리고 디지
털화 작업을 모두 마치고 독립기념관으로 가도록
하는 판결이 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측과 소송
을 제기한 반대 측이 한가지씩 주장에서 각각 승
리를 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에는 독립기념관으
로 보내기로 한 결정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리
고 반대측에는 남가주대학의 보존 처리 후 한국
에 대여조건으로 갔다가 다시 오는 것에 힘을 실
어준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유물의 보존 및 관리를 하는데 16
년동안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숨은
봉사자가 있었다. 바로 윤효신 부이사장이 끊임
없는 유물사랑과 관심, 후원 그리고 봉사의 마음
KNA Newsletter | 27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차세대 학생 영문 페이지
Growing Pride of a Korean American
UC San Diego Andy Lim
My parents were one of many parents who immigrated to the Untied
States of America pursuing the ideals of the “American Dream” and the land
of opportunity. They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hen I was
two years old, landing in a neighborhood called Koreatown in Los Angeles,
where there was a high concentration of Korean immigrants. As such, I
grew up as a Korean American in an area full of other Korean Americans.
Despite this, Korean history and culture was not something that was of much
importance to me.
Growing up in a private school that mainly consisted of White and Latino students and teachers,
I tended to try and stay away from my Korean culture at school. My peers were not exactly
knowledgeable about Korea, after all. The only relevant topic when it came to Korea was figure skater
Kim Yuna, food like kimchi and gim, or laver, and the fact that there was a North and South Korea.
Korea was rarely, if ever, mentioned at school and was not something that I would talk about even
with my Korean American peers as a young child.
Though Korea was barely ever mentioned at school, my parents did their best to teach me about
Korean culture. My Saturdays would be spent going to Korean school in the morning and the Korean
cultural center in the afternoons. At Korean school, I was taught the Korean language and history. At
the Korean cultural center, I would participate in classes that taught Korean traditional instruments like
gayageum and haegum, along with other activities like calligraphy and go. Being an immature child,
however, I was content with being able to speak Korean on a conversational level with my parents and
did the bare minimum at Korean school. My interest and pride in Korean culture was shallow, and it
felt as if it was mostly the same for some of my Korean American peers. Most of them were at Korean
school and the Korean cultural center due to their parents’ wishes. Having pride in my background as
a Korean was a difficult concept for me, who had grown up in America for most of my life. How could
I have pride in a country that was 5700 miles away, seemed so small, and my American peers did not
know much about?
As I grew up, however, my pride in Korea began to grow. In this fickle age of the Internet
and social media, many elements of Korean culture continued to trend. K-pop rose in popularity
worldwide with artists like PSY and BTS going viral. Korean skin care products became well known
for their effectiveness. The concept of “mukbangs” and Korean food continued to trend in the world
of social media. Even with the COVID-19 outbreak, Korea had handled the situation in an exemplary
fashion, responding quickly by providing tests and sharing hospitals and doctors between regions
when unavailable in others. Korea quickly became a country that most everybody knew about in one
28 | KNA Newsletter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form or another.
For a while, I was content with just that. To me, Korea had gone from a small country whose
relevance in America was relatively small, to a country that most everyone knew about. After
attending a musical about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named Ahn Changho, however, my
thoughts changed once again. I felt that just as modern Korean culture had become known
worldwide, so should traditional culture and history. The musical taught me about the brave actions
of many independence activists, but what stuck out to me was that Ahn Changho was also a Korean
American. He had come to America with his wife for better education, and quickly became one of the
first leaders of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Even after having kids and a family to care for, he
decided to go back to Asia and participate in anti-Japanese activism to fight for his country. His story
inspired me to learn more about influential Korean figures and to strive to become someone who
could spread Korean culture, history, and pride.
Being a Korean American was something that did not mean much to me. I considered myself to
be mostly an American, not caring much for the land my parents had immigrated from. I thought that
there was no real need to learn about Korea, a country I could not even remember living in. As I grew
up, however, it became evident that my way of thinking was wrong. I should learn more about my
background, strive to teach others about my culture, and set an example as a Korean American.
What does it mean for us to study history?
President of WOW Korea: Joonho Son
from Arnold O. Beckman High School
In a precise term, history is the combination of incident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Some causes created the effects, the numerous effects
created some incidents, and lastly, the chains of incidents created the history.
Therefore, studying history should not be as simple as just memorizing the
events done by some famous people as well as providing ratings to those
incidents. If history only includes the events from the past, then the footprints
of our ancestors would not be necessary for us to know.
However, realizing the extreme significance, people still preserve, learn, appreciate, and spread
history to our community.
Then, what can one learn from learning history?
First is that people are able to figure out the solutions to the problems that currently exist in
modern society. For example, Korea has been continuing to debate about issues like ‘Dokdo’,
‘Comfort Women’, ‘Yasukuni Shrine’, ‘Rising sun flag’, and more, with Japan. In order to settle these
debates, it is important to approach Japan in a logical way rather than an emotional one: these are
not just the issues from the past that can be simply forgotten by people. In fact, it is an ongoing
KNA Newsletter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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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blem in our society. Even until now, the Japanese government has never apologized for the
brutalities they have done from the past.
Not only that they are being ignorant, but they are also educating inaccurate facts about the incidents
during the era to the younger generations. The way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is handling
the situation may even cause bigger problems in the future; therefore, people need to realize the
necessity of educating accurate history in order to solve these.
History also allows people to view the societal and political issues without skewed perspectives:
besides the views of adults, one would be able to create his/her own views of the world in a unique
way.
Then, one with the knowledge to properly face societal issues can ultimately become a mature
democratic citizen. It may be difficult for one to have his/her own unique views from the beginning
and carry on the actions. Once one has enough familiarity with historical issues, there are more
possibilities for him/her to be more interested in ongoing current issues that are involved or related
to those as well. One’s ability to shape and critique modern world issues mostly comes from the
learnings of history.
Finally, by learning about one’s roots and cultures, he/she is able to accept and develop his/
her identity in an appropriate way; for instance, Koreans cannot ignore the hardships done by the
ancestors to achieve independence from Japan during the era. People like Kim Gu, Jung-Geun Ahn,
Gwansun Ryu, Bong-chang Lee, Changho Ahn, other Independence Leaders, and countless unknown
individuals who died while chanting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can never be forgotten. In fact,
the occurrence of this may only be possible with the proper education provided. Ultimately, one
would be able to remember what his/her ancestors have done to create the present as it is right now
and, furthermore, spread the words to others for a better society.
The Fight for Freedom and Independence
Cadence Sang yu Chung
6th grade, Monte Vista Elementary
This year we commemorate the 101st year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of 1919. This was the first act of protest against the Imperial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On this day, close to a million Koreans participated in this nationwide
massive demonstration, rallying against Japanese domination, marking the
event as the first and the largest uprising. Sadly, Japanese government
brutally crushed the movement, killing 7,500 and arresting 47,000.
One of organizer of the movement was a 16-year-old female student named Yoo Gwansoon, who
gathered people from her village and neighboring villages to join the demonstration. Shortly after, she was
arrested and tortured by the Japanese soldiers, fell ill in her prison cell and passed away at the age of 17.
30 | KNA Newsletter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The March 1st movement by far is the most important movement in Korea’s history. Even though
the protest against the Japanese did not succeed, it played a crucial role in bringing the Korean
people together, sparking a flame which will later help Korea gain its independence.
Japan’s control of Korea lasted additional 24 years since the March 1st Movement of 1919. At last,
Korea gained its freedom and independence on August 15th, 1945 after 35 years of brutal Japanese
occupation.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and remember the March 1st Movement, not only of the famous
activists like Yoo-Gwansoon, Ahn Joong-goon, Ahn Chang-ho, Kim Gu and Yoon Bong-gil, but of the
bravery and patriotism of million ordinary Korean citizens. The citizens who stood up to the Japanese
forces.
We honor them all. We will never forget their struggle to keep on fighting for freedom and
independence,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We should be proud of our Ancestors
Phillip Han
8th Grade, La Canada High School
As an American-born Korean I was born to welcome and be matured into
Korean culture. As a Third Generation Korean I learned about Korean culture
from my Korean class, family, and school. I value the experiences that I have
been given from the Korean culture. I believe in preserving the ways and the
ideals of Korean culture so future generations could know about their origin
and heritage. The March 1st movement (삼일 운동) and the independent activists
(독립운동가) were some of the aspects of Korean History that intrigued me. My great grandfather was
an Activist (독립운동가) who lays resting at Seoul’s National Cemetery (국립묘지) which i had the privilege
to visit last year. My grandfathers lived through the devastating Korean War. My father lived through
an era of Korea that was rebuilding, reinventing and working very hard to become one of Asia’s top
nati ons.
I also visited The War Memorial of Korea which I really enjoyed and would highly recommend.
Korea has survived the colonization from Japan, experienced massive casualties in the Korean War.
Still present is the constant threat from North Korea. I was very fortunate to visit Korea many times
since I was little. Korea now is a very modern country. They have so many nice things that surprise me
every time I go. It’s hard to believe that Korea went through so much in the last 100 years. We have
evolved from a war torn country to some of the best electronics manufacturers, amazing food culture,
world famous K-pop and much more. I believe it is our culture and our history that makes us Koreans
very determined. We should be proud of our ancestors and elders who have suffered to make what
Korea is today. Stay true to your roots and be proud of your Korean Culture.
KNA Newsletter | 31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NA)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as founded on and nationalism. In 1938, the new Hall was built to
February 1, 1909 in San Francisco as the first Korean- house the Association at 1938 W. Jefferson Blvd.,
American unification organization integrating Los Angeles, California, where it remains today.
National Association(evolved from Korean Kong Lip
Association) and Hawaii Collaborative Association. During WW II, the U.S. government instituted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Central Congress was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faced a danger
formed in 1911 to strengthen the independence of being grouped as Japanese subjects. KNA issued
movement worldwide, establishing branches in the certificate of Korean national origin to Koreans,
Hawaii, Manchuria, Russia, Mexico, and Cuba. providing protection for them. By the 80’s, Korean
United Presbyterian Church purchased the general
Following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assembly hall when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NA) represented the dissolved. In 1987, the City of Los Angeles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until the Shanghai designated the KNA Building as historical site.
Provisional Government, which was established in
1919. KNA was officially registered as a California Accordingly,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of
organization in April 1914. Recognized by the U.S. Los Angeles formed a “Korean National Association
government as the official representative of Koreans, Building Renovation Committee” on November
it carried out quasi-governmental functions such as 12, 2002 and began restoring the site as the
protecting the rights of the Koreans. “Korean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Hall” in
commemo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KNA moved from Sam Francisco to 36th Street in Los and Korean American immigration. Dedicated on
Angeles in 1936. It continued to publish Shin-Han December 9, 2003, the Hall stands tall to remind us
Minbo(New Korea), relayed news on independence of the KNA’s historical significance and to instill pride
movements throughout the world outside of in our Korean American roots for future generations
Korea, and inspired the spirit of independence to come.
Opening ceremony of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Jefferson Blvd. in Los Angeles. (April 17,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