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KNA Memorial Foundation Newsletter
Mar 2021
(통권 12호)
대한인국민회
유물 전시회
독립기념관
황기철 처장 한시준 관장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3.1절 102주년 기념식을 영상과 대면으로 거행
2020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맞아 총영사와 한인단체장이 로즈데일 묘지의 독립유공자 22명을 찾
아 헌화 및 참배를 했다.
1368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 USA • Tel (213)733-7350 • Fax (323)733-7352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Coronavirus 재앙을 이기고 우뚝 서는 그날을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 말씀을 다시 생각한다
민족의 큰 스승 “견디고 나아가기를 작정합니다”
도산 안창호
(1919년 6월28일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사)
(1878 ~ 1938)
“스스로 위로하여 지내소서”
(도산 선생이 1920년 4월22일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편지)
“희망을 가지면 기쁨이”
(1918년 8월29일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 국치일 연설)
“의심치 않고 낙관적으로 나가면 성공을”
(1924년 상해에서 동포에게 고하는 글)
“지금은 방황할 때가 아니고 전진할 때”
(1919년 12월7일 민단 주최 강연회 연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휴관합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산 역사를 보고 배우는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이 방문 및 안내 업무를 일시 중단, Coronavi-
rus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휴관합니다.
2020년 3월1일 로스앤젤레스시의 행정명령에 따라 오늘까지 방문자 안내 업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해제조치가 내려지면 더욱 전문적인 지식으로 역사해설 및 교육의 책임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3월1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KNAMF) 이 사 장 윤효신
부이사장 이창수, 민병용(학술위원장)
Korean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Foundation 총무 및 관리이사 최형호
1368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 재무이사 서경원 감 사 배국희
T. 323-733-7350 (기념관) T. 213-440-0033 (이사장) 이 사 권영신, 정종식, 클라라 원
www.KNAM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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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회보 발간 인사말
독립운동 행사를 대면으로 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우리모두가 뜻하지 않은 코로나 재난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힘드셔
도 전세계 각나라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 멀지않
아 곧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대면할 수 없는 요즈음이지만 소중한 인연들과 안 현재 휴관중인 저희 대한인국민회 기념관도 조속히
부 나눔이 행복이고 삶의 의미가 된다는 마음으로 재개관되어 여러분과 대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저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서 회보를 특집으로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만들었습니다.
2021년 3월1일
화보를 보시고 저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윤효신 이사장 다시 선출 총회를 마친 후 이사들이 한자리에 섰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총회 KNA Newsletter | 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2020년도 정기총회
를 1월29일(금) 오후 6시30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서 개최했다.
9명의 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최형호 총무이
사 사회로 이사장 인사말, 그리고 2020년도 사
업 및 재정보고와 2021년도 사업과 재정안 토
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 윤효신 현 이
사장을 민병용 부이사장이 새 이사장으로 추
천했고, 모든 이사들이 단일후보로 최종 선임
을 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3.1절 102주년 기념식을 영상과 대면으로 개최
2021년 3.1절 102주년 기념식을 영상과 대면행사 습니다. 그러나 2020년 3.1절 기념식 개최를 앞두
로 개최합니다. 고 갑자기 불어 닥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행사
를 취소하는 아픔을 가졌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전세계 만방에 외친 3.1절이 102
주년을 맞이합니다. 2021년 102주년 3.1절 기념식은 영상과 대면으로
초청인사 20여명이 참석하는 행사로 주최합니다.
2020년 봄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1년 비록 적은 인사가 참석하는 기념식이지만 1백년전
째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 그 만세 함성으로 코로나를 이기고 더 좋은 한인사
해 들어 백신접종과 예방수칙을 잘 지켜 나가면서 회를 만드는 의지로 승화시킬 것입니다.
한발씩 진정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3.1절 기념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신 분들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2019년 3.1절 100주년 기 다른 지역의 한인을 위해서 You Tube영상으로
념행사를 범동포의 참여 속에 역사적으로 잘 마쳤 보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해마다 동포연합으로 3.1절 기념식을 주최해 오고 있습니다.
3.1절 102주년 기념식 순서
국민의례 : 국기에 대한 경례•애국가 제창 사회 민병용 학술위원장
미국 국가 제창•순국선열을 위한 묵념
인사 말씀 …………………………………………… 윤효신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3.1독립선언서 낭독 ………………………………… 그레이스 송 미주 3.1여성동지회 회장
경축사 (대통령 경축사 대독) ……………………… 박경재 LA총영사
기념사 ………………………………………………… 홍명기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회장
축사 1 ………………………………………………… 제임스 안 LA한인회 회장
축사 2 ………………………………………………… 에드워드 구 민주평통LA 회장
축사 3 ………………………………………………… Ralph Ahn 도산 안창호 3남
3.1절 노래 …………………………………………… 미주 3.1여성동지회
미주 독립유공자 소개 및 안내말씀 ……………… 민병용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학술위원장
만세삼창 ……………………………………………… 박영남 광복회 미서남부지회 회장
기도 …………………………………………………… 박일영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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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미주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더욱 연구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발간을 축하하며
기고: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
2021년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발간을 진 기념재단과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을 미주지역 뿐만
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우리관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2003년 대한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국민들의 정성스러운 성 인국민회 총회관에서 발견된 귀중한 자료의 보존
금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우리관은 개관 이후 30여 과 활용을 위해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이어왔습니
년 동안 전시, 연구, 교육 등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 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라, 국제적으로도 한국독립운동을 선양하는 사업 었던 2019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소장 유물이 독
을 꾸준히 지속하여 왔습니다. 립기념관에 대여 형식으로 이관되어 더욱 견고하
고 긴밀하게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에는 코
미주 동포들은 일제에 빼앗긴 자유와 주권을 되찾 로나-19로 전세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우
기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해 왔기 때문에, 독립운동 리관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특별전시가 열리는 결실
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 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대한인국민회기념
주 한인 이민 1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관 전시 교체를 통해 미주지역 및 대한인국민회의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는 한편, 현지 독립운동사적
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미주 동포들의 열정과 노 지 조사와 관리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
력은 소중한 기반이자, 자산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입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한국과 미국사회
주지하다시피, 미주지역 독립운동은 대한인국민회 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의 귀중한
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 삶의 터전인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역시 같은 상황
주지역 한인의 최고기관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과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한국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인동포들을 대표
이같은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역사와 정신을 하는 역할을 했던 대한인국민회를 기억하며, 지금
오롯이 이어받아온 단체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 의 어려운 상황을 넘어 독립정신의 구현을 통해 전
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관은 대한인국민회 세계인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자
리매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21년도 회보 발간을 계기로 독립기념관과 미주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가 널리 알려질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기념 재단과 우호
적 관계가 더욱 돈독히 다져 나갈 수 있기를 기대
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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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독립기념관에 한•중역사관 만든다
수교 30주년기념, 김구 장개석 회동 등 투쟁사 조명
독립기념관은 2022년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를 연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기념관 내 전시관 8개 중 1개를 ‘한중 공동항전
기념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한다. 한국의 독 신익희 조소앙 등 임정 관계자들은 쑨원(孫文)의
립을 보장한 1943년 카이로회담에 앞서 백범 김 아들 쑨커(孫科) 등 국민당 핵심 요인들을 만나
구와 장제스(蔣介石)가 회동한 내용 등 일제에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했다.
맞서 한중이 공동으로 투쟁한 역사기록을 조명하
겠다는 것이다. 한중 우호관계의 역사적 근거를 당시 국민당 정부의 회의일지를 입수해 카이로회
제시하는 한편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람객을 담을 앞둔 1943년 7월 26일 백범은 장제스와 만
기념관으로 유치하려는 뜻이다. 다만 대일 관계 나 한국 독립이 회담에서 다뤄지도록 요청한 사
등에 부담이 될 가능성을 감안해 미국 OSS의 광 실이 있다. 이후 장제스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복군 지원 내용 등을 추가해 ‘국제관’으로 운영하 과의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관철해 그해 11월 카
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구가 선언문에 포함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중 공동 항쟁은 카이로선언과 대
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미국, 영국 등이 대일 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독립을 보장받은
전쟁 승리 이후 한반도를 공동관리 대상으로 삼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것이며 “‘계란으로 바
으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1943년 5월 임시정부는 위 치기’라고 했던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에 반발해 중국 충칭에서 ‘재중 자유한인대회’ 불굴의 정신을 해외에 알리는 것이다.
한시준 독립기념관 새 관장 취임식
독립운동은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독립기념관 제12대 관장으로 전 단국대학교 한시 한시준 관장이 1월25일 취임했다.
준(韓詩俊, 만66세) 교수가 임명되어 2021년 1월
25일 취임식을 가졌다. 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
게 만든 독립정신을 재생산하여 대한민국이 더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은 단국대학교를 졸업하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일도 필
고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독립 요하다고” 하였다.
운동사연구소 연구소장, 백범김구기념관 백범학
술원 원장을 역임하며 『한국광복군연구』,『한 한시준 관장 임기는 2021년 1월 22일부터 2024년
국독립운동의 역사』등 다양한 연구성과를 창출 1월 21일까지로 3년이다.
한 학자이다.
신임 한시준 관장은 취임사에서 “한국의 독립운
동은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역사이며, 독립기념
관의 존재와 가치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
이다”고 말하며 “ 이제는 독립기념관의 존재와
가치를 세계적으로 부각시키는 일을 추진해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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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독립기념관 주최 유물 특별전 포스터
대한인국민회 유물 특별전시회를 개최
독립기념관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유물 특별전을 개최했습니다.
전시 자료는 2003년 미국 L.A.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복원공사를 하던 중 다락방에서 발견된 2
만여 점의 일부로,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에 독립
기념관은 유물의 체계적인 보존과 활용을 위해 2019년 11월 대여형식으로 이관하였고, 이관 유물 중 역사
적 가치가 높은 81건을 우선적으로 선별하여 광복절을 맞아 특별 공개하는 전시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전시 유물로는 대한인국민회 설립 목적과 조직 구성이 담긴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비롯하여 대한인
국민회가 제작한 3·1독립선언서, 대한인국민회 태극기 등입니다. 멕시코 지역 한인들의 ‘국치일’ 행사
보고 문건과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사진 동판, 뉴욕 한인들의 한국광복군 후원 송금 안내문 등 시의성
높은 자료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2021년 3월1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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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유물 특별전시회(I)
대한인국민회에서 보관해 온 100년이 된 태극기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의 1938년 4월 17일 낙성식 축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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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유물 특별전시회(II)
독립기념관 제4전시실
1910년에 만든 대한인국민회 헌장
독립기념관 제3전시실
최형호 총무이사가 2020년 11월 17일
독립기념관 전시실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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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미주 독립유공자는 모두 323명
2020년 11월 순국선열의 날 LA출신 3명 발표
여성 31명•대한인국민회 임원진이 가장 많아
김필권 장고할아버지 조성환 전도사 박충섭의 부인 이(박)정경
2020년 11월 건국포장 2020년 11월 대통령표창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2020년 11월 대통령표창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그리고 대 맏형인 김성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대
통령 표창을 받은 미주 독립운동가는 몇명일까. 미 한인국민회 등에 독립기금을 계속해서 냈다. 그리
주방면 독립유공자는 모두 323명이다. 이는 미국 고 이(박)정경은 로즈데일에 잠들어 있는 독립유
과 멕시코, 쿠바에서 1908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 공자 박충섭의 부인이다. 부부가 함께 독립유공자
운동을 한 분들이다. 가 되었다. 리버사이드에서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
혜련 여사을 도왔고,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함께
국가보훈처는 일년에 세차례 국권회복운동을 한 했다.
애국자들의 공훈을 심사한 후 독립유공자를 선정
발표를 한다. 2020년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에 새 조성환 독립유공자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전도
로이 4명의 미주 애국지사가 자랑스럽게 선정이 되 사와 대한인국민회 나서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했
었다. 이중 3명이 로스앤젤레스지역에서 독립운동 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조정환 독립유공자(건
을 한 분이다. 국포장 애족장)의 동생으로 형제가 나란히 중국과
미국에서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태양화랑 대표 정
건국훈장 6등급인 건국포장은 김필권, 대통령표창 재덕 회장이 가족이다.
은 이(박)정경, 조성환 등 2명이다.
미주 여성독립유공자는 강(김)혜원, 이혜련 등 323
김필권 새 독립유공자는 장고할아버지로 남가주에 명중 모두 31명이다.
서 유명했고, 김성권, 강(김)혜원 부부독립유공자
의 가족이다. 대한민국 전체 독립유공자는 16,410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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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모두 22명 미주 독립유공자가 잠들어 있는
로즈데일 묘지는 한국의 작은 국립묘지이다
로즈데일 공원묘지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작은 한국의 국립묘지이다. 미국 땅에서 한평생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22명이 한 곳에 잠들어 있다. 인종차별과 힘든 노동을 하는 어려운 환경속에도 태평양 너머
에 있는 조국을 일제로부터 찾는데 앞장선 애국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지난 2020년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에 박충섭 애국지사의 부인 이(박)정경이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으
면서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분은 21명에서 22명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해마다 국민회 창립기념일, 3.1절, 광복절, 순국선열의 날 등 4차례 로즈데일
묘지를 찾아 헌화 및 참배를 한다. LA총영사가 부임을 하면 첫 공식일정으로 참배를 하는 곳이다. LA
한인회장도 그러하다.
앞으로 로즈데일 묘지의 독립유공자는 계속해서 숫자가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애국
지사 3 ~ 4명은 한국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할 것이다.
로즈데일에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 22명 이름 및 건국훈장 등급
독립장 (3) 한시대, 송헌주, 최진하
애국장 (1) 한재명
애족장 (8) 문(한)성선, 임준기, 임치호, 차(임)인재,
장인명, 안석중, 이암, 강영문
건국포장 (8)
박(한)영숙, 박충섭, 손덕인, 방사겸
대통령표창 (2) 이성례, 박(강)영복, 김종학, 마춘봉
구정섭, 이(박)정경
로즈데일 묘지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 미주 독립유공자는 모두 8명이다
독립유공자이름 건국훈장 등급 서훈 년도 이장 년도
1996
1 송종익 독립장 1995 1997
2002
2 홍언 독립장 1995 2002
2008
3 백일규 독립장 1997 2016
2016
4 백(김)낙희 건국포장 2016 2017
5 송석준 애국장 1990
6 김성권 애족장 2002
7 김(강)혜원 애국장 1995
로즈데일 묘지에는 모두 22명의 미주 독립유공자가 잠 8 임성실 건국포장 2015
들어 있다.
KNA Newsletter | 11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독립유공자 8명 후손에 훈포장 전달
박경재 총영사, 황보정걸 임치호 차인재 방사겸 신달윤 가족 초청
박경재 총영사는 2020년 10월20일 독립유공자 8명의 후손을 초청, LA총영사관에서 훈포장 전달식을 가졌다.
1905년부터 1945년 8월15일
광복 때까지 중국과 미국을
떠돌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
신한 이민선조 8명에게 한국
정부가 독립운동 공을 기려
훈포장을 전달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독립유공자를 대
신해 후손들이 LA총영사관
에서 훈포장을 받았다.
2020년 10월20일 박경재 석해 훈포장을 받고 고인의 활동을 되새겼다. 박
LA총영사는 ‘독립유공자 후 경재 총영사는 “독립유공자분들의 희생으로 우
손 대상 훈포장 전수식’을 열 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던 만큼 앞으로도 독립유
었다. 한국 정부의 훈포장 독 공자분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립유공자는 고(故) 홍보정걸 보답하겠다. 특히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에 적극
(건국훈장 애국장), 황보익준(대통령 표창), 임치 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
호(건국훈장 애족장), 차인재(건국훈장 애족장), 보 LA, 10월22일자)
방사겸(건국포장), 김대순(건국포장), 신달윤(대
통령 표창), 조원두(대통령 표창) 선생이다.
이날 훈포장 전수식에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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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할아버지 김현구는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아버지 듀이 김은 커뮤니티 칼리지 총장 자리 오르고
3세인 제롬 김 박사는 한국에서 코로나 연구에 앞장
미주의 이름난 독립운동가 후손이 코로나바이러스 할아버지 김현구 애국지사 3세인 제롬 김 사무총장
백신을 연구하는 세계적 의료기관 수장으로서 활
약하고 있다. 어난 한국에 나가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백신
연구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하와이에서 한평생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 김현구
독립유공자(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아들인 듀이 김현구 애국지사는 언론과 외교분야에서 독립운동
김은 하와이 커뮤니티 칼리지 총장이라는 자리에 을 벌였고, 1921년에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부회
처음으로 오른 자랑스런 초기이민 2세이다. 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김현구 애국지사의 손자이자 듀이 김 총장 “백신개발과 연구후 앞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 치
의 아들인 한인3세 제롬 김(한국이름 김한식) 박사 료제 개발도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마
는 한국에 있는 국제백신연구소 (IVI) 사무총장으 스크를 벗고 사람들과 밝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로 3대째 이름을 빛내고 있다. 비영리기구인 국제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신연구소는 1997년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
라 설립되었고, 한국정부가 2015년 본부를 서울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앞장을, 아버지는 교육에
유치했다. 앞장을 그리고 3세인 손자 재롬 김 사무총장은 코
로나 바이러스 백신연구와 보급, 그리고 치료제 개
“지금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심혈을 발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규모와 속도는 예상을 뛰여
넘습니다. 개발된 후에는 배부와 치료에 국제적인 제롬 김 사무총장의 약력
네트웍이 필요하고 선진국과 후진국 차별없이 공 △1959년 하와이 출생 △1980년 하와이대(마노아캠퍼스)
정하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생물학·역사학 학사 △1984년 예일대 의대 졸업 △1990년
듀크대 의대 전문의 취득 △2002~2016년 미국 국립군의
하와이에서 태어난 제롬 김 사무총장은 예일대 의 관 의과대학 교수 △2016년~ 미국 국립군의관 의과대학 겸
대를 졸업했고 평생을 각종 전염병 백신을 연구해 임교수 △2010~2015년 미군 후천성면역결핍증(HIV)연구
온 국제적 전문가이다. 프로그램(MHRP) 수석 부책임자 △2015년 제3대 국제백신
연구소 사무총장
“장기적인 관점에서 백신 개발과 관련한 국제공조
가 이루어져야 앞으로 올 수 있는 대규모 전염병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제롬 김 박사는 미국 육군에서 20년간 에이즈
(AIDS) 백신을 연구했다. 2015년 국제백신연구소
3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후 다시 연임이 되어 오
늘이 이른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할아버지 김현구 애국지사가태
KNA Newsletter | 1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도산 안창호, 김영옥, 세미 리를 가르친다
캘리포니아주 교육부, 인종학 교과과정에 채택
도산 안창호 김영옥 대령 세미 리 박사
2차 세계대전 영웅 김영옥 대령과 아시안 최초로 년 사이의 미주 한인들의 독립활동사 ▶20세기 초
올림픽에서 다이빙 종목으로 2차례 금메달을 따낸 미주 한인 커뮤니티 역사 ▶한인사회가 겪은 LA
새미 리 선생의 일대기를 초·중·고교 학생들이 폭동을 가르치는 한인들의 경험과 인종 관계 ▶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산 안창호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커뮤니티 ▶미국
의 K-팝 문화까지 7개에 달한다.
캘리포니아주 교육부 산하 교과과정심의위원회
(IQC)는 2020년 11월19일 김영옥 대령과 새미 리 인종학 과목에 한인사를 포함하기 위해 한인 커뮤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학습지도안(Lesson Plan) 니티에서 구성한 태스크포스팀에 참가해 학습지도
을 인종학 과목 커리큘럼에 포함하는 안을 통과시 안을 작성해 제출한 UC리버사이드 김영옥연구소
켰다. IQC에서 이날 채택된 한인사 관련 레슨 플 장 장태한 박사는 “한인 커뮤니티가 단합해 얻은
랜은 총 7개로, 앞으로 45일 동안 진행될 여론 수 노력”으로 “학습지도안은 한인 후손들에게 희망적
렴 과정에서 특별한 이의 제기가 없는 한 2021년 3 이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설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월 말 열릴 가주 교육위원회 미팅에서 최종 승인 하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받을 것으로 전망돼 한인 커뮤니티의 기대감도 상
승하고 있다. 한편, 가주는 2016년 통과된 주법에 따라 공립학
교 고등학생들이 인종학 교과목을 이수하도록 했
이날 채택된 레슨 플랜은 김영옥 대령과 새미 리 으며, 이를 위해 주 교육부는 인종학 커리큘럼을 확
선생의 일대기를 가르치는 내용 외에 ▶1920~1945 정하는 절차를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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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도산 안창호 선생 막내아들 랄프 안 인터뷰
“한인사회 좋아지고 독립기념행사 많아졌으면”
박경재 총영사는 2020년 10월16일 도산 안창호 3남 랄프 안 부부를
관저로 초청, 오찬을 하면서 부모님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경재 총영사는 랄프 안 부부 초청 오찬 의 자리나 역사를 알려주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으
면 좋을 것입니다.”
한인사회 큰 어른인 랄프 안(안필영) 선생은 코로
나바이러스의 어려운 시기에도 건강하고 활동적인 Korean American Patriots Descendent 모임
날들을 보내고 있다. 1926년생으로 올해는 만 95세 의 책임을 맡은 지도 오래 되었다.
가 된다.
한인커뮤니티의 독립운동 행사 때마다 부인과 함
“대한인국민회 이사분들 다 건강하시지요. 안부를 께 참석한다. 그리고 명연설을 하는 것으로 유명
전합니다. 우리 가족은 잘 지냅니다.” 하다. 친화적인 성격에 늘 명랑하고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마음을 보여서, 모든 분이 존경을 하고
랄프 안 선생이 코로나 1년의 세월을 어떻게 지냈 좋아한다.
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뷰 중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
오는 음성은 맑고 건강했다. 아버지 도산 안창호와 어머니 이혜련 여사에 대해
서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랄프 안 선생은 초기이민 2세들 중심에 우뚝 서있
으면서 미주 독립운동 소식을 서로 나누고, 크고 작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되는 한 대한인국민회와 흥
은 일에 자문역할을 하면서 1년을 보냈다고 했다. 사단, 도산기념사업회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
하겠다고 약속했다.
1백여명이 넘던 독립유공자 후손 중 생존한 분들도
양로원에 많이 계신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알려주 코로나 바이러스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한인커
었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그분들의 자녀인 3세와 뮤니티가 다시 본 모습대로 돌아가면 자랑스럽고
4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건강한 도산 선생님의 막내 아드님을 뵐 날이 다시
갖고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앞으로 대한인국민 많아질 것이다.
회 기념재단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해서 만남
(민병용 편집인)
KNA Newsletter | 15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도산 안창호 가족이 살던 옛집이 2013년
LA시 역사문화사적지 1059호로 지정되다
남가주대학(USC) 한국학연구소 건물로 사용
도산 안창호 가족이 살던 남가주대학교(USC) 안의 회관으로 사적지 54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년
옛집이 LA시 역사문화사적지로 지정된 사실이 뒤 후 도산 가족의 옛집이 사적지 2호가 되는 영광을
늦게 알려졌다. LA시는 2013년 12월11일 도산 안 안게 된 것이다.
창호 옛집을 Historic-Cultural Monument 1059
호로 지정 공시를 했다. 현재는 남가주대학교 한국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삼남인 랄프 안은 “이 집은 우
학연구소로 한국과 미국 연구에 앞장서고 있다. 리 가족이 1935년부터 1947년까지 살았다. 아버지
도산이 돌아가신 소식을 이 집에서 들었다. 독립운
한인사회에는 LA시 역사문화사적지가 모두 2곳이 동가들이 찾아 우리 가족을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된 것이다. 제1호는 1991년 10월2일 LA시가 1368 이혜련 어머니가 우리 오남매를 교육시킨 집”이라
W. Jefferson Blvd.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 고 회상했다.
자랑스런 LA시 역사문화사적지는 오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관과 함께 2곳이 되다
남가주대학 안의 도산 안창호 가족이 살던 옛집이 LA시의 역사문화사적지 1059호
로 지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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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유관순은 열사, 안중근은 의사인 까닭을 알고 계셨습니까
미주의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는 친일 외교관 저격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호국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입니다. 호
국 정신이란 외적의 침입, 천재지변 등 국가의 위
기 시적 극적으로 국가를 지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보훈이란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국가 유공 장인환 의사(오른쪽)•전명운 의사
자의 애국정신을 기려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
에게 훈공에 대해 보답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밖에 ▲ 순국선열 :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
도 헷갈리기 쉬운 호국, 보훈 용어에 대해 알아볼 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
까요. 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 항거하다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
▲ 열사 : 맨몸으로 저항해서 지조를 나타내는 사 을 받은 자
람
▲ 애국지사 :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
▲ 의사 : 무력으로 항거해 의롭게 죽은 사람 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
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
만세운동의 유관순 열사와 헤이그에서 자결한 이 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
준 열사, 그리고 민족을 위한 ‘총성’ 안중근 의사와 창을 받은 자
홍커우 공원 의거 윤봉길 의사, 이분들의 차이점을
느껴지나요?
열사는 맨몸으로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순국선열이란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사람이며, 의사는 무력으로 항거해 의롭게 죽은 사 순국한 자입니다.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일
람을 뜻합니다. 생사의 구분이 아닌, 호국정신을 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입니다. 독립운동 과정
어떻게 표출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표현합니다. 에서 순국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뉩니다.
KNA Newsletter | 17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미주 독립유공자 딸들이 떠나다
초기 2세 로버타 장, 캐리 윤, 메블 리 별세
로버타 장은 하와이 캐리 윤은 독립운
에서 국민회 회원인 동가 아버지 윤응
장금환 독립운동가 호와 독립운동가 김
의 딸로 태어났다. 도연 사이에 태어났
미국 천주교 수녀로 다. 부모가 모두 독
한국에 나가서 봉사 립유공자이다. 1942
를 했다. 평생을 초 년 재미한족연합위
기이민 및 독립운동 원회의 맹호군에서
로버타 장 자료를 수집했고 이 캐리 윤 한인2세 여성으로
(애국지사 장금환 딸) 민사 연구자로 3권 (애국지사 윤응호 딸) 훈련을 받았다.
의 독립운동 저서를 초기이민 2세 행사
펴냈다. 때마다 열심히 참석을 했다.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행사에 여
러 차례 참석했다. 192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했고,
2020년 10월5일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2020년 10월23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북가주에서 쌀농장 초기이민 2세인 위
을 경영한 독립운 니프레드 리는 강혜
동가 이재수의 딸이 원 독립유공자의 아
다. 평생 교사생활 들인 치과의사 김인
을 했고, 몬테벨로 과 결혼했다. 아버
교사 노조위원장인 지 제이슨 리는 하
초기이민 2세 케네 와이로 이민을 왔
스 김과 결혼, 하시 고, 1차대전에 미군
메블 리 엔다에서 살았다. 위니프레드 리 으로 참전했다. 아
(애국지사 이재수 딸) 아버지는 북가주에 (제이슨 리 딸) 버지는 시카고에서
도박장을 경영했고,
서 농사로 크게 성공했고, 임시정부와 대한인국 독립금을 여러 차례 냈다. 평생 부동산업에 종사
민회에 독립기금을 냈다. 했다.
2020년 9월9일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2020년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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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김완중 전 LA총영사, 현 외교부 기획조정실장
「나성에 가면」 출간, 한인 이민역사 등 소개
김완중 전 LA총영사가 LA에서 생활하고 느낀 점을 담은
수기집을 출간했다.
2021년2월4일 김완중 전 LA총영사는 ‘한국 밖의 한국, 나
성에 가면’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김 전 총영사가
LA에 머물며 경험한 미국 문화의 여러 모습을 소개했다.
김 전 총영사는 군더더기 없는 진솔한 표현으로 LA 한인
사회와 미국사회를 담았다.
특히 김 전 총영사는 수기집에 이민사회 한인 이야기를 많
김완중 외교부 기획조정실장과 책 표지 이 소개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가족 이야기, 대한인국민
회와 당시 이민선조의 조국독립운동, 한인 2세 등 차세대
의 정체성 고민, 한인 입양아 문제 등을 한국 독자에게 알릴 것으로 기대된다.
김 전 총영사는 “로즈데일 공원묘지, USC 한국학연구소인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이 머물던 집, 항일 비
행학교 사적지 등이 상징하는 한인들의 피땀과 애환을 한국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에서 약 11달러에 살 수 있다.
그리고 한편 김완중 총영사는 2017년 12월28일 LA총영사로 부임했고 2020년 5월12일 귀임했다.
외교부는 2020년 11월5일 김완중 전 LA총영사를 기획조정실장에 임명했다.
기획조정실장은 외교부의 모든 정책 및 기획 조정과 예산 편성·집행, 인사와 급여 등 외교부의 인사와
살림을 총괄하는 중책이어서 이번 보임은 승진 인사로 분석된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윤효신 이사장 등 이사 7명은 2021년 2월1일 창립 112주년을
맞아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를 찾아 헌화 및 참배를 했다.
KNA Newsletter | 19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홍명기 도산기념사업회 회장 사모 로리 홍 여사 별세
평생 사업 및 봉사의 동반자로 아름답게 후원을 하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홍명기 회장의 사업 및 봉 홍명기 회장과 로리 홍 사모
사의 평생 동반자인 로리 홍 사모(한국이름 서영
옥)가 2020년 8월21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냐”는 질문에 “기부금에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
만 작은 돈에서부터 큰 돈에 이르기 까지 한번도
로리 홍 여사는 홍명기 회장이 Dura Coat 사업 부인과 상의를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인이 한
시작과 주류사회에 우뚝 서도록 하는데 최고의 번도 거절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후원자였다.
홍명기 회장은 부인 로리 홍 여사에 대해 “40년을
남편 홍명기 회장과 자신의 이름인 Mike 같이 하는 동안 어려울 때마다 용기와 힘을 북돋
Myung-Ki 그리고 Lorrie Hong의 약자를 따 우어 준 친구이자 동반자이며 내조자였다”고 회
서 M & L Hong Foundation을 세우고 수많은 고하면서 “부인을 떠나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
자선사업을 하는데 조용히 도운 것으로도 유명하 고 말하고 싶다”고 안타까워 했다.
다. 홍명기 회장은 몸이 불편한 Lorrie Hong 여
사의 간병에 최선을 다하는 등 잉꼬부부로도 잘 추모 및 입관예배는 2020년 8월29일 하오 7시30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내가 커뮤니티 봉사에 후원 분 로마린다한국인재림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코
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모의 덕분”이라고 여 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가족장으로 거행되었고, 영
러 차례 말했다. 상으로 조문객이 참여하도록 했다.
그리고 하관예배는 8월30일 몬테시토 메모리얼
1939년 경남 화산에서 태어난 로리 홍 여사는 서 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울 위생병원 간호대학을 졸업한 후 간호사로 일
하다 지난 1968년 가족과 함께 도미했다. 미국에 윤효신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은 추모예
온 후에도 간호사 생활을 하던 중 1981년 홍명기 배에 영상으로 조사를 했고, 이창수, 서경원, 배
회장을 만나 결혼했다. 국희 이사와 함께 하관예배에 참석했다.
로리 홍 여사는 홍명기 회장이 51세의 늦은 나이
에 Dura Coat 회사를 차려, 오늘날 해외 대표적
인 한인기업인이 되도록 한 장본인이다. 홍명기
회장은 “다니던 미국 직장에서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을 때 간호사였던 로
리 홍 여사가 “가족의 생계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용기를 준 것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로리 홍 여사는 그동안 홍명기 회장과 공동으로
한 후원사업 외에도 홀트복지재단, 고아원, 학교
등에 후원금과 장학금을 소리없이 아름답게 지
원해 왔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도 관심을 가져 한인사회
와 미 주류사회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왔다.
홍명기 회장은 “기부금을 낼 때 부인과 상의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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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박경재 총영사는 2020년 12월28일 국민교육발
전 유공자 훈포장 전수식을 개최하고 남가주대학
교 Kenneth Klein 동아시아도서관 관장에게 국
민훈장 동백장을,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 선임과
학자 안혜정 박사에게 국무총리 표창장을 각각
수여했다. Klein관장은 USC내 한국학도서관 설
립, 대한인국민회 자료 복원 등 공로를 높이 평가
했다. 그리고 안혜정 박사는 남가주 과학기술이
공계 단체 활동지원과 한인 청소년을 위한 선도
적인 과학교육 공로를 인정했다.
아메리칸연합재단 이우호 회장과 공병호 TV대표, 임용근 전 오레곤주 상원의원, 한성주 장군 등이 2020년 10
월22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을 방문했다.
새로 출범한 제35대 LA한인회 회장단은 1월4일
한인역사박물관 민병용 관장의 안내로 한시대, 송
헌주, 장인명 선생 등 독립유공자들 묘소를 찾아 헌
화하고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제
임스 안 신임 한인회장(앞줄)이 헌화하고 있는 모습
을 장진영 부회장, 김영 이사장, 헬렌 김 부회장이
지켜보고 있다.
KNA Newsletter | 21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USC 한국학도서관 (Korean Heritage Library) www.usc.edu/korea
미주 독립운동 연구의 보고, 대한인국민회 유물 볼 수 있다
글: Joy Kim, USC 한국학도서관장
대한인국민회 인근에 위치한 명문대학 USC는 1880 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
년 설립 이후 줄곧 한국과 역사적 인연을 갖고 있다.
1900년대 초 일제 침탈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립 는 것 같다. 그 자료들을
지사들이 USC 인근에 정착해 초기 한인사회를 형성
했었기 때문에 캠퍼스 주변에 한국관련 유적이 여럿 KADA website에서 볼
남아 있다. 도산 안창호의 가족이 살던 집도 캠퍼스
내에 보존되어 한국학연구소 (1995 설립) 로 사용되 수 있다.
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가진 USC는
미서부 한국학 프로그램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42 http://digitallibrary.
년 첫 한국어강의를 개설했고 1977년 첫 한국학 전임
교수를 채용했으며, 현재 언어학, 역사학, 문학, 문화, usc.edu/cdm/land-
정치학, 국제관계, 영화학 등 다수의 한국학 전임교수
가 있다. ingpage/collection/
해마다 수백명의 한국 학생들이 유학 오고 있으며 교 p15799coll126.
포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학교이다. USC 한국
학도서관 (1986 설립)은 한국에 관한 모든 주제의 자 그외 미주한인관련 전자자 조이 김
료를 모으는 전문도서관으로서 미 전국적으로 명성이 료로는 다음이 있다. USC 한국학도서관장
높다. 단행본, 간행물, 영상자료, 고지도, 마이크로필
름, 수십종의 아카이브 등 15만 종 이상의 물리적 컬 •미주한인사진아카이브
렉션과 풍부한 전자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한미박물관구술사녹음아카이브
본 도서관은 출판되지 않은 유일본 문서자료들의 발
굴과 보존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여러 아카이브 •미주한인개인소장 아카이브
를 구축했는데 그 중 “미주한인 전자자료관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s (KADA)” 이 가장 활 •미주한인관련주요주제목록
발히 이용되고 있다. 미주한인 관련 여러 소장 자료
중 LA 한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대한인국 •현순 목사 아카이브
민회 자료일 것이다. 국민회 건물 보수 공사 중 다락
에서 2003년에 발견된 방대한 자료를 USC에서 2017 아직 다 전자화하지 못한 컬렉션도 많은데 데이비드
년에 15개월 한시적으로 대여 받아, 주어진 짧은 기간 현, 정한경, 조재길, 김영철, 고원, 김강, 안필립, 손원
안에 무사히 작업을 마치고 2018년 말에 깨끗이 정리 태, 김경보, 조갑석, 김찬희, 전낙청, 김난영, 양은식,
된 원본을 반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새미리, 김영옥, Sonya Sunwoo, Roberta Chang,
Richard Khim collection 등등이 있다. 그 외 우리
그런데 그 16년 전인 2002년에도 비슷한 작업을 했었 도서관 소장하고 있는 여러 아카이브의 전체 목록은
다. 즉 보수 공사 전 국민회 건물 안에 오랫동안 방 여기서 볼 수 있다
치되어 심하게 훼손된 5000쪽에 달하는 비슷한 자료 https://libraries.usc.edu/locations/east-asian-
를 구출해 깨끗이 정리, 전자화한 후 원본을 반환한 사 library/east-asian-archival-collections#korea
https://libraries.usc.edu/locations/east-asian-
22 | KNA Newsletter library/east-asian-archival-collections
미주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개인 기록물 (사진, 일
기, 서한, 서적 등) 은 이민사의 편린으로서 소중한 무
형자산이다. 이민 일세대가 연로해가면서 자손들이
자료를 물려받게 될 때 그 중요성을 몰라 폐기하는 경
우가 허다하다. 이자료들을USC 한국학도서관에서
모아 보존할 수 있도록 기증 및 대여를 고려해 주실 것
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연락처 Joy Kim [email protected]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3.1절 기념 행사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LA사적지 및 명소 14곳 현장 해설 그리고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를 영상 CD로 제작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 2020년에는 Coronavi- 특별히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의 도
rus로 인해 3.1절 연합기념식을 갑자기 취소해야 산 안창호 삼남인 랄프 안의 강연은 지난 11월5일
했다. 그리고 4월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행사도 끝 이준학 PD가 코로나 사태로 직접 자택을 방문 30
내 개최하지를 못했다. 분짜리 영상 촬영을 마쳤다.
또한 3.1절에 맞추어 갖으려던 한인학부모와 학생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사적지 및 명소 14곳의
초청 탐방행사는 9월30일 영상 CD로 제작했다. 그 설명은 60분짜리 영상 CD로 만들었다. 또한 10월
리고 독립유공자 후손 4명을 초청, 「우리 집안의 15일 진행한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
독립운동을 말한다」 강연은 10월15일 비대면의 를 1시30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했다. 이 영상에는
영상 CD로 만들었다. 도산 안창호 삼남 랄프 안, 전명운 의사 사위 표한
규, 김호와 하와이의 안창호 목사 손자 안형주, 노
영상으로 만나는 남가주 사적지 및 명소 14곳 탐방 백린 장군 손녀 노영덕 등 3명이 각각 15분 ~ 30분
은 9월14일부터 21일 일주일간 민병용 학술위원장 씩 가족의 독립운동을 직접 설명했다.
이 Skydigitalvideo의 Rick Kim 카메라맨과 함
께 해설 및 촬영을 모두 마쳤다. 역사 영상 CD 작품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의
홈페이지(KAHM.org)에 올려서 누구나 볼 수 있
한 곳마다 3분씩 설명과 옛 사진을 곁들여 처음으로 게 한다.
60분짜리 영상 CD 제작을 9월30일 완료한 것이다.
민병용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학술위원장이 헐리웃 등 14 2020년 10월15일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는 영
곳에서 영상작품을 촬영했다. 상작품에 나오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
서 윤효신 이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KNA Newsletter | 2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2021년 사업계획
1. 대한인국민회 창립 112년 기념행사
(2월1일,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 참배)
2. 3.1절 102주년 기념 연합행사
(3월1일, 대면 및 영상 기념식)
3.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발행
(2021년 3월1일과 12월15일 두차례)
4.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 행사
(4월17일,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 참배)
5. 광복절 77주년 LA한인회 주최 행사 참석
(8월15일, 범동포연합기념식)
6. 81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행사
(11월17일,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소 참배)
7. 미주 독립유공자 유해 한국 국립묘지 준비
8.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Website Up-Grade
9. LA독립운동 사적지 영문 안내서 제작
박경재 총영사는 윤효신 이사장 등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를 초청, 2020년 8월 30일 관저에서 오찬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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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2020년 행사일지
2019년 2월21일: 유인태 대한민국 국회사무총장 방문. 로
즈데일 애국지사 묘역 헌화 및 참배.
12월16일: 정기이사회 및 정기총회. 윤효신 새 이
사장 선출. 부이사장은 민병용, 이창수 이사. 2월27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긴급회의를 갖
고 29일 개최하려던 제101주년 3.1절 범동포연합
2020년 기념식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격 취소. 독립
사적지 및 명소 탐방(3월14일) 및 독립유공자 후손
1월10일: UC버클리 대학원생 3명 방문. 초청세미나(3월28일) 무기한 연기. 3월중 대한인
국민회 기념관 방문 안내를 잠정 중단.
1월14일: 윤효신 이사장 취임식. 권영신 전 이사장
에 감사패. (옥스포드호텔)
1월16일: 샌프란시스코 Oakland Cultural Cen- 2월29일: 3.1절101주년을 맞아 단체장 초청 로즈데
일 애국지사 묘지 헌화 및 참배.
ter 로즈메리 남 학예사 방문.
1월21일: 1월 이사회, 2020년도 사업계획 확정 및 4월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행사 취소.
총무, 재무, 감사 지명.
4월30일: 귀국하는 김완중 총영사에게 감사패 전
1월30일: 한국 대학생 미주방문단 이재수 단장 등 달.
20명 방문.
2월1일: 국민회 창립 111주년 기념식 개최. 단체장
등 70명 참석.
2월5일: LA총영사관은 운영기금 7만6천8백달러
를 윤효신 이사장에 전달.
2월10일: 한국 구세군(은평마을) 홍봉식 사관 등
18명 방문. 전라남도 광주 정시윤씨 가족 4명 방문.
2월11일: 단체장 초청 3.1절101주년 범동포연합행
사 1차 준비 모임.
2월11일: 서울신학대한 박명수 교수 방문. 한국기 윤효신 이사장이 6.25 참전용사에 마스크를 전달
독교사단법인 세컨하프 한홍기 목사 등 3명 방문.
6월1일: 윤효신 이사장은 6.25 참전용사에 마스크,
2월18일: 2월 이사회. 3.1절 101주년 범동포연합3 손 소독제, 보온가방 등 기증.
대행사 논의. (뉴서울호텔)
2월19일: 인천 제물포고등학생 방문
2월20일: 3.1절 101주년 범동포3대행사 준비를 위 6월3일: 한국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내외빈
70여명 및 기자 초청, 대한인국민회 유물자료 공개
한 2차 단체장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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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보
행사 개최.
6월4일: 6월 이사회. 회보 발행 결정. 오전 10시30분
박경재 신임 LA총영사 방문.
6월25일: 총32페이지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회
보 1천부 발행 및 우송작업. (편집인 민병용)
7월2일: 7월 이사회. 9월중 독립사적지 및 명소 탐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영상세미나를 개최했다.
방 영상 CD를 만들고,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의 영상CD는 10월15일 제작 결정. 10월15일: 「우리 집안의 독립운동을 말한다」 영
상CD 제작을 위한 비대면 강연회를 국민회 기념관
7월9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보안 카메라 시스템 에서 개최. 표한규, 안성주, 노영덕씨 발표.
공사.
11월9일: 제3회 도산 안창호의 날 기념식을 영상으
7월13일: 영화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교수가 제작한 로 진행.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흥사단, 대한인국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안내 브러셔 8박스 기증해옴. 민회 기념재단 등 3개단체 공동주최.
8월15일: 독립기념관은 11월22일까지 국민회 다락
방 유물 다시 빛을 보다 특별전시회 개최.
8월28일: LA총영사관 보훈담당 김대환 영사 방문. 11월17일: 81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은 취소하고,
박경재 총영사와 한인단체장 등 20여명 로즈데일
8월30일: 홍명기 도산기념사업회 회장 부인 로리 애국지사 묘소 참배.
홍 여사 장례식에 윤효신 이사장 등 4명 참석.
2021년
8월31일: 박경재 총영사는 9명 이사를 관저로 초
청 오찬. 1월29일: 2020년도 정기총회 개최. 윤효신 이사장
재선출. 임원진의 유임을 결정.
9월7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터마이트 예방 방역. 2월1일: 국민회 창립 112주년 맞아 이사 7명 로즈데
일 애국지사 묘지 참배.
9월10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새 시설 전시업체
김석현 이사 방문.
9월14일: 독립사적지 및 명소 14곳 영상 촬영. 카메
라 맨 릭 김.
9월29일: 9월 이사회. 민병용 학술위원장이 사적지
및 명소 14곳 영상 촬영 내용과 영상 CD 제작 보고.
10월2일: 아메리칸연합재단 이우호 회장과 공병호 대한인국민회 창립 112주년을 맞아 축하케이
TV 대표, 임용근 전 의원, 한성주 예비역 장군 등 크 촛불을 끄고 있다.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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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학생 영문 페이지
Postmemory : 한
Maddi Kim
I first began learning about modern Korean was working on an honors
history my sophomore year of college, which felt
like both a jarring revelation and an embodiment thesis on Theresa Hak
of the familiar. Despite the gaping distance
between my experience as a Korean American and Kyung Cha’s DICTEE, that
the narratives of colonization, political and artistic
suppression, war, partition, and dictatorship I discovered that there is
that characterized 20th-century Korea, these
narratives seemed to tell me something about a term for this experience
myself. Learning about Korean history thus also
constituted a strange form of self-discovery, and I of feeling haunted by a
was eager to learn more.
history through which
Part of this learning took the form of a
fellowship in South Korea one summer, where I one did not directly live.
conducted archival research and interviews on my
family’s involvement in the Korean independence That term is postmemory.
movement against Japanese colonization. That
summer, I heard stories and collected documents Coined by Marianne
about my great-great-grandfathers, Ahn Chang-
ho and Kim In-shik. I visited the Methodist church Hirsch to describe
that Ahn Chang-ho founded in Cheonan, South
Korea, and I visited the outdoor market where the intergenerational
Ahn and Yu Gwan-sun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protest, which eventually led to Yu’s arrest and haunting experienced by
murder by the Japanese colonial police. I learned
that my great-great-aunt, Ahn Yena, was Yu’s best the children of Holocaust Maddi Kim
friend, and that the Ahn family helped to shelter survivors, postmemory,
her during the period before she was arrested. I
learned about Kim In-shik’s role as the first Korean according to Hirsch, “is
to study Western music, his transposing of Korean
hymns and independence songs. Through this mediated not through recollection but through
research, I began to piece together a complex
family history of political and artistic resistance. an imaginative investment and creation” for
Learning about this history actualized feelings
of grief, longing, and resistance whose depths I “those who grow up dominated by narratives that
didn’t know existed within me.
preceded their birth...by traumatic events that
It wasn’t until my senior year of college, when I
can be neither understood nor recreated.” Seo-
young Chu adapts the concept of postmemory to
the Korean context through the term postmemory
han: “The second-generation Korean American
does not literally remember the war; rather, she
‘remembers’ the waras though she had been
alive back then.” Without proper mechanisms
for confronting and processing Korean history,
Korean Americans can often feel resentment, self-
loathing, and alienation through this experience of
postmemory han. We feel outraged and wounded
by these stories of colonization and war, and we
simultaneously feel guilty for the fact that we have
not experienced these histories for ourselves.
However, I think there are ways of confronting
Korean history that can allow us to feel a meaningful
connection to the past rather than alienation
from it. One way to do that is to recogn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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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existence of multiple and conflicting through both their revolutionary activities and
histories—instead of the dominance of a singular through the time and distance we have gained
narrative—and to think about the ways those from them: the world and our place in it gains
histories still persist today, interlocked with other both clarity and dizzying complexity. To remember
global histories of colonialism and imperialism. In our ancestors is to constantly re-remember them,
perceiving ourselves as members within a larger to reorient ourselves in the world left by their
global system, we can begin to feel like active legacy. In remembering the March 1st protests, I
agents in an ongoing network of histories rather celebrate my ancestors, and also recommit myself
than passive and isolated recipients of a traumatic to learning more about not only Korean colonial
past. This is what our ancestors have given us, history, but the global histories that envelop us.
Discovering My Korean Identity
Matthew Jinho Kim
Columbia University
Class of 2023(Sophomore)
Growing up, I hardly ever thought about I then read Barbara
what it means to be a Korean-American. Despite
my parents’ regular pleas, I refused to learn the Demick’s Nothing to
Korean language, intentionally distancing myself
from Korean culture to avoid being labeled a FOB. Envy, which chronicles
Through much of high school, the extent of my
Korean pride involved taking my white friends to the stories of North
Korean restaurants and boasting my ability to use
chopsticks. As far as I was concerned, I was an Korean defectors. The
American first and a Korean second.
stories I read were
So when I went to Korea for the first time
as a 16-year-old, I was totally shaken. Unable harrowing, and as I read
to communicate with my relatives, it became
abundantly clear to me that I had no meaningful them, my grandparents’
connection with my roots. Curious to learn more
about my family’s past, I began asking my mom escape suddenly became
questions. I learned that one of my great-great-
grandfathers was a leader in the independence so much more real, high-
movement against Japan. Both of my grandparents
escaped from North Korea, my grandfather as stakes. What if they
a prisoner of war and my grandmother with her
family. My great-uncle defected. Not from, but to hadn’t escaped? How
North Korea. He left his elite-status, pregnant wife,
and high-class education for an uncertain future. It many family members
seems he had it all, which is why I’m baffled and
left wondering. do I have in North Korea Matthew Jinho Kim
whom I will never meet?
How is it just that a line so
arbitrarily drawn by the US government 70 years
ago determined the fate of millions of Koreans?
As I discover more about my Korean identity,
I will always think about those who came before
me as well as those who have inevitably been
forgotten. I hope for a day of reunification, when
I can finally meet those who have been separated
from us. I hope for a day when human rights will
triumph over greed. Above all else, I hope for a
day when all Koreans can be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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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to a Freedom Fighter Jang Sung-Soon (장성순)
Brandon Byon
Downtown Magnet High School
12th Grade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those Koreans who
also known as the Sam-il-jeol (3-1), was an act of
resistance in the form of a protest led by Korean bravely stood their
independence fighters and citizens alike, in
an effort to stop the brutal treatments from the grounds to fight for our
Japanese occupation. The massive demonstration
began on March 1, year 1919, rallying against the rights to regain, long-
Japanese domination, gaining support of close
to 2 million participants. This event marked the waited independence
first and the largest uprising, before the Japanese
government brutally crushed the movement, for our home country,
killing 7,509 people, wounding 15,849, and
arresting 46,303 in the process. Korea. Every year I
This year marks the 102nd year anniversary question what would
of that historical movement. As a 4th generation
descendant of a freedom fighter (Jang, Sung-Soon; have happened and
장성순) who had fought for Korea’s Independence,
I cannot help but memorialize this day with mixed where would all of us
emotions of both sorrow and triumph.
be, if these courageous
I can only fathom the pain and sufferings that
my ancestors had to go through under Japanese and valiant patriots did Brandon Byon
Colonial rule. I still remember the stories that my not sacrifice their lives
mother had told me about how my great-great-
grandfather had suffered under the atrocities for our motherland;
committed by the Japanese for 13 long years
during his unjust jail sentence. The gruesome Korea would not be on the world map today.
torture methods of plucking every finger and toe-
nails, hung upside-down like an animal and water- Without the selfless sacrifice made by these
boarding him with pepper water, left a permanent heroes, our history would be vastly different.
dent in my memory. The thoughts and the images As a fourth-generation descendant of Korean
that were made in my head brings tears of pain independence freedom fighter and as a second-
down my face to commemorate and honor those generation Korean-American, I am proud of our
Koreans who had barbarically suffered through ancestors and their assiduous commitment to
the Japanese oppression. These hardships that triumph over trials and tribulations to finally leave
my great-great-grandfather endured makes my a country to future generations; with its rightful
heartache, while in remembrance of torments name Corea -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inflicted on him and what my family had to go
through watching this in agony. Annual commemoration is merely not about
how our ancestors protested the Japanese
As we commemorate Sam-il-jeol, we honor oppression, but it is also about survival, resilience,
fighting the battle triumphantly and leaving a
legacy for our children to follow. Let us memorialize
this day paying respectful tribute to our fathers
and forefathers and the ancestors before them,
by remembering and never forgetting where our
freedom and independence came from.
“Great-great-father, we remember you. We tell
stories of you to your children’s children. We will
never forget you, and the legacy of strength, courage
and the love for your county will live on through
your lineage. We thank you for your service, great-
great-grand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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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a Korean in American Society
Seri Yang
Geffen Academy at UCLA, 6th Grade
As a Korean in American society, I have many both Korean and
experiences that make my outlook of the world
different from my friends and peers. I am different, American holidays.
but not completely. I am part of both the American
and Korean cultures. I have things I pride in as well For example, New
as insecurities. I enjoy sharing my experiences as a
Korean American. Year's celebrations in
I noticed my experiences relating to this have Korea and America
changed since I was younger. When I was in
preschool, some of my friends would judge me are quite different. In
about eating rice and seaweed at lunch, as well
as home cooked Korean food. When I moved Korea, it’s a holiday to
to elementary school, I always felt very insecure
about eating Asian food at lunch, but then respect your ancestors
something changed. People started looking up to
me about the type of food I ate. Instead of saying and elders, enjoy
“Ew, she eats seaweed.” they’d say, “Ooh, can I
have some?” It made me feel more accepted, and traditional customs,
gave me pride about my culture. This pride grew
greater and greater as time passed, and Korean and bring in good
culture got more popular. I started to enjoy being
a Korean American. luck for the new year.
A big part of my cultural identity is being part of However in America, Seri Yang
both the American and Korean cultures. I celebrate the holiday is all about
partying. Staying up
till midnight, meeting with friends, and pop a
Martinelli’s. The way the two countries celebrate
that holiday is drastically different, and I get to do
it both ways. Each one has its perks, I'd say the
American version is more fun and lively while the
Korean version is more oriented around family, and
I get to experience all of it. Being Korean American
is part of my identity. I get to be in both worlds,
and that’s what I love about being a Korean in the
Americ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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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anbok
Eden Lee
6th Grade
La Canada Elementary School
One of my personal great joys in life is wearing
my hanbok. Every New Year, I rush to put on the
traditional Korean dress. My hanbok has colorful
striped sleeves and a long pink skirt, complete
with a beaded headband. It makes me feel more
connected to my Korean heritage because it is a
traditional wear that my grandmother had gotten
made for me in Korea. When I prepare to bow in
front of my relatives, I feel a sense of pride that I
get to be Korean and do something traditional with
my family. Even though I’ve always participated
in Korean traditions, being Korean American
sometimes feels as if I might not be Korean
enough. Celebrating New Years the Korean way,
eating Korean food, and learning Korean have
been experiences I’ve always enjoyed, and I’ve
learned not to take them for granted.
Last summer, I was pleasantly surprised to Eden Lee
discover that my family would be going to Korea
for a vacation. I thoroughly enjoyed the Korean
food such as Korean knife noodles, made by a chef
who was featured in a Netflix documentary.
Seeing Korean people on screen, or reading those people. Over the years, Korean culture and
books that star Korean characters, like Please Love cuisine has become more well known throughout
Umma by Gracie Kim, make me feel a bond to the world, and I am proud to be a part of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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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National Association (KNA)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as founded on and nationalism. In 1938, the new Hall was built to
February 1, 1909 in San Francisco as the first Korean- house the Association at 1938 W. Jefferson Blvd.,
American unification organization integrating Los Angeles, California, where it remains today.
National Association(evolved from Korean Kong Lip
Association) and Hawaii Collaborative Association. During WW II, the U.S. government instituted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Central Congress was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faced a danger
formed in 1911 to strengthen the independence of being grouped as Japanese subjects. KNA issued
movement worldwide, establishing branches in the certificate of Korean national origin to Koreans,
Hawaii, Manchuria, Russia, Mexico, and Cuba. providing protection for them. By the 80’s, Korean
United Presbyterian Church purchased the general
Following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assembly hall when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NA) represented the dissolved. In 1987, the City of Los Angeles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until the Shanghai designated the KNA Building as historical site.
Provisional Government, which was established in
1919. KNA was officially registered as a California Accordingly,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of
organization in April 1914. Recognized by the U.S. Los Angeles formed a “Korean National Association
government as the official representative of Koreans, Building Renovation Committee” on November
it carried out quasi-governmental functions such as 12, 2002 and began restoring the site as the
protecting the rights of the Koreans. “Korean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Hall” in
commemo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KNA moved from San Francisco to 36th Street in Los and Korean American immigration. Dedicated on
Angeles in 1936. It continued to publish Shin-Han December 9, 2003, the Hall stands tall to remind us
Minbo(New Korea), relayed news on independence of the KNA’s historical significance and to instill pride
movements throughout the world outside of in our Korean American roots for future generations
Korea, and inspired the spirit of independence to c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