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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이화보, 2023-04-12 22:21:02

이화 261호

이화 261호

Keywords: 전주이씨,이화

宗 訓 崇 祖 惇 宗 차 례 2. 신년사 4. 본원 소식 13. 지원 · 분원 · 종 · 봉 소식 16. 우리 민족사 속의 정유년(丁酉年) ………………………………………… 본원 고문 이용규(李鎔奎) 18. 새 정유년을 맞이며 ………………… 충남 부여군분원 상임고문 이길재(李吉宰) 20. 조선시대 국왕의 실(6) 24. 무상(無常) 것은 천명(天命)이다 ……………………………… 본원 제2문이사 이승창(李承昌) 28. 조선왕조 경연(經筵) 제도의 대적 계승 …………………… 령대군 병사공종장 이여성(李如晟) 31. 조선의 왕, 놀이와 만나다(11) ……………………………… 본원 문부위원 이상주(李相周) 34. 「육정․ 육사(六正․六邪)」 그리고 「대보잠․ 대루원기(大寶箴․ 待漏院記)」에 대 소고(溯考) ……………………………… 서울시지원 고문 이운(李雲珩) 39. 령대군 증손 문충공 주계군 이심원 부자(父子) 정려 … 전북대교 명예교수 / 논산조정서원장 / 연산교 유도장 이덕래(李德來) 43. 등록문재 제468에 깃든 대제국 순귀비 엄씨의 창의 정신 ………………………………… 이장 이사 이세림(李世林) 48. 영경묘(永慶墓)를 참배고!! ………………………… 경기도지원 문이사 이보(李輔澤) 50. 선대들의 발자취 견, 단대로 성 기대 ………………… 충북 충주시분원 자문위원 이영(李瑛薰) 52. 만로 보는 역사이야기 75 ………………………………………………………… 이전경(李田景) 54. 가끔은 나도 비자금이 있었음 좋겠어 …………………………………… 시인(길병원 원무과) 이진우 56. 종묘 추대제에서 ……………………………………………………………………… 김명 57. 칼을 찬 유자, 남명 조식 선생의 기상 …………………………………… 의릉봉장 이남식(李南植) 59. 국전쟁 때 중국군 참전과 남부두 철수 …… 강원도지원 상임부지원장 / 명예기자 이종(李鍾泰) 63. 문재 이모저모 64. 종묘제례보존 가입을 영니다 73. 조경재 건립기금 모금 성자 명단 76. 2017年度 廟・壇・陵・宮・殿・園・墓 祭享日 一覽 79. 丁酉年 “年賀廣告” ▲ 릉 의 겨 울 경 2017 / 1·2월 격월간 李花 (권 261) 발인/이섭 집인/이범직·이승창 발처/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소/서울 종로구 돈문로 89 우번/03131 전/(02)765-2124 스/(02)742-1676 인쇄인/이관우 인쇄처/동아문사 전/(02)2267-2775 발/2017년 1월 1일 등록/1973년 12월 31일 이지(http://rfo.co.kr) 이메일([email protected]) 값 2,000원(1년 정기구독 10,000원)


2 李花 261 존경는 종친 여러분, 안녕십니까? 다사다난던 병신년이 지나고 망찬 정유년 새를 맞이였습니다. 금년 도 종친 여러분의 건강과 복을 기원며 새 인사를 드립니다. 최근 우리는 국정농단 사로 국가적 위기 상을 맞이습니다.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대처 나가는 성숙 국민이 되도록 야겠습니다. 지난 종약원은 종친 여러분의 성원에 입어 조경단대제, 종묘대제, 사직대제, 건원릉친례, 구대제, 칠궁 등 5대 제과 왕릉 제 및 원․묘 제을 60여 에 걸쳐 무사 봉습니다. 경제도 어려운 상에서 각종 제과 종약원의 업무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종친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7년 정유년에도 종약원은 종친 여러분과 께 원무를 이끌어가며 발전을 꾀 고자 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종약원이 더욱 발전고 도약고 결실을 맺는 가 되기를 기원며, 우리의 염원인 조경재 건립을 위 착공을 는 가 될 것입 니다. 우리는 지난 2013년 11월부 종친 여러분의 염원이 담긴 조경재 건립을 위여 기금 모금 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상이 좋지 못 상에서 신 년 사 이사장 이섭(李台燮)


李花 261 3 도 십시일반 조경재의 건립기금 모금에 참여 주시는 종친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조선 왕조의 문를 계승 보존 나가는 손으로서 단 분의 선조 제 도 궐사서는 안 된다는 염원아래 우리의 숙원 사업인 조경재 착공을 위 발걸음 이 발자국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종친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과 관심이 조경재 착공을 위 발 역을 것입 니다. 종친 간 단결은 강 을 만들고 기적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끝까지 지켜봐 주시면서 조 주시기 바랍니다. 정유년 새에도 우리는 ‘숭조돈종’의 종으로 종사에 참여여 실는 가 되도록 노력 것을 다짐겠습니다. 5대 제과 왕릉 제 봉은 물론, 구대제의 원복원과 조선왕실 예를 위 장사업, 그리고 우리의 전문 계승을 위 전수교육을 계속 실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민국의 전문운동에 기여는 종약원 동을 만들어 우 리 모두가 동반 성장 것을 기대니다. 끝으로, 금년에도 종약원이 추진는 각종 숭조돈종 사업이 계대로 진되어 결 실이 맺어질 수 있도록 종친 여러분의 적극적인 성원을 부드립니다. 아울러 종친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복이 께 시기를 기원니다. 감사니다.


4 李花 261 이달의 보 ◇ 이장 소식 ◇ 본원 소식 ◇ 지원·분원·종 소식 ◇ 영광의 얼굴


李花 261 5 재단법인 이장 ◎ 의 안 ․ 2017년도 사업계 및 예산안 승인의 건 본원 소식 ■ 본원 고문 추대 ■ 부이사장 보직 변경 名 派 經 歷 名 을 으로 名 을 으로 允 中 전 례 총무 ․ 재정 錫 東 조 직 청년 ․ 여성 조직 2 泰 淵 완 전 부이사장 청년 ․ 여성 전 전북지원장 卿 東 조 직 문 基 榮 총무 ․ 재정 장 培 鎔 능원 자문위원 국중앙연구원장 鍾 一 장 전 례 聲 宰 장 장 元 湃 임영 자문위원 전 국의원 明 俊 문 조직1 重 根 장 장 學 源 덕원 자문위원 전 국의원 在 春 조 직 조직1 (2017. 1. 19일자) 제98 이사(2016. 12. 21) 장금 기 종친(2016. 11. 1 ~ 2016. 12. 31) 기일자 기자 금액 비고 11. 2 양섭 (亮燮, 덕양 14) 10,000,000 전 장 이사 11. 23 종 (鍾憲, 임영 16) 2,000,000 장 이사 11. 23 세림 (世林, 덕양 13) 1,000,000 종약원 이사 12. 14 승국 (양녕대군) 100,000 이장 재단원 12. 14 남웅 (南雄, 계양 20) 71,100 이장 재단원


6 李花 261 ◎ 의 안 ․ 2017년 예산 성 지침(안) 및 사업계 제출 심의의 건 ․ 제201 이사, 송년 개최의 건 ◎ 의 안 ․ 추가경정예산(안) 심의의 건 ․ 2017년 사업계(안) 및 예산(안) 심의의 건 ․ 2017년도 종묘전알례, 신년교례 개최의 건 ◎ 의 안 ․ 추가경정예산(안) 심의의 건 ․ 2017년 사업계(안) 및 예산(안) 심의의 건 ․ 2017년도 종묘전알례 및 신년교례 개최의 건 본원은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오 4시, 본원 강당에서 2016년도 송년다과를 가졌 다. 송년다과에는 섭 이사장, 고문, 자문위원, 이사, 감사, 지원장, 종장, 봉장, 이 장 임원, 분원장, 각 부 위원 등 180여 명이 참석다. 제658 상임이사(2016. 11. 30) 제659 상임이사(2016. 12. 21) 제201 이사(2016. 12. 21) 본원 2016년도 송년 및 2017년도 신년교례, 종묘전알례 개최


李花 261 7 2017년도 1월 5일 목요일 오전 11시, 사손을 비롯여 본원 임원 외 300여 명의 종친이 참반 가운데 종묘 영녕전과 정전에서 전알례를 올리고, 이어 11시 30분 본원 강당에서 신년교례 를 개최다. 신년교례는 주 총무이사의 사로 진된 가운데 사손을 비롯여 고문(규복, 동열, 목춘, 영, 완교, 용규, 용섭, 재천), 자문위원(계, 병 일, 원배, 정우, 정, 종목, 원, 근, 순복), 이사, 감사, 지원장(용, 종달, 순영, 승종, 병 ), 종장, 봉장, 분원장, 각 부 위원이 참석 가운데 치러졌다. 이날 섭 이사장은 신년사를 “종친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고, 종약원의 발전과 도약의 가 되기를 바란 다. 또 조경재를 착공는 가 되도록 종친 여러분의 관심과 도움을 바란다”고 말다. 이 어 사손은 “금년은 고종제가 대제국을 선고 제 즉위를 지 120년이 되는 이 다. 조선왕실의 예로서 조선왕실과 대실의 발굴에 앞장서고 대국민 보에 앞장서겠다” 고 말다. 이어 시루떡 절단, 용규 고문의 건배 제의에 모든 종친이 잔을 나눴다. 본원은 2016년 12월 24일 요일 정오, 본원 강당에서 2016년도 종묘․사직․구대제 및 왕릉 제 전수교육 종9기 수료식을 거다. 이 교육은 2016년도 본원 및 종묘제례보존 사업계의 일으로써 문재보법 제41조 제2 의 규정에 의여 중요무문재의 전수 및 보 존을 위여 중요무문재의 보유자가 그 보유 기능 또는 예능의 전수교육을 실시는 것이다. 종묘제례는 2000년도에 처음 교육을 실시고 사직대제는 2004년도에 각각 실시 오다가 본원, 종 9기 종묘 ․ 사직 ․ 구대제 ․ 왕릉 제 전수교육 수료식 거


8 李花 261 2008년도부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전승교육을 여 종1기생을 배출고, 2009년도부 종묘 · 사직 · 왕릉제 교육을 실시고, 2012년부 구대제를 추가 교육 왔다. 이번 종 9기 교육은 2016년 8월 13일에 개강여 12월 24일까지 매주 요일 19주에 걸쳐 매 5시간씩 95시간을 실시여 80명의 수료생을 배출다. 이날 수료식에서는 시 성적이 우수 이설, 이용림, 이계, 이종국, 이규, 박식 씨 등 6명이 창장을 받았 다. ■ 수료생 (80명) 명단 (무순) 신민경 박미숙 박식 이경섭 이경 이계 이관노 이관 이광기 이광 이규영 이규 이근 이기종 이기중 이길섭 이덕근 이덕기 이동구 이동규 이동석 이민섭 이민순 이범수 이병우 이상복 이상율 이석용 이선규 이성기 이성열 이승아 이승용 이완규 이용림 이용 이운강 이원선 이은우 이응욱 이장 이재민 이재열 이정길 이정식 이종구 이종국 이종달 이종배 이종철 이종 이준우 이진의 이찬우 이채은 이충노 이진 이연 이 이 이 이설 이성 이영 이수 이규 이근 조규영 조완 영분 이명 이윤경 이용재 이성범 이성 이종우 이식 이승목 이재 이유재 본원은 2016년 11월 19일 요일 18시 50분, 본원 강당에서 제3기 집례 ․ 대축 전문과정 교육 수 료식을 거다. 이번 교육은 본원이 2016년도 사업계에 의거여 문재보법 제41조 제2 의 규정에 의여 ‘중요무문재의 전수 및 보존 을 위여 당 중요무문재의 보유자가 그 보 유 기능 또는 예능의 전수교육을 실시’기 위 제3기 전문과정을 마련고 지난 8월 13일 개강 이래 매주 요일 오 4시부 오 7시까지 14에 걸쳐 42시간 동안 교육을 실시 것이다. 종묘 ․ 사직대제 전수교육 수료생 및 전례위원 종친을 대상으로 실시 이번 교육에서는 창 과 독축, 예의사 교육이 주된 내용이었으며 장 교육도 께 이루어 졌다. 이날 배출된 수료생은 선정기준에 따라 27명의 수료생과 청강생 3인이 배출됐다. ■ 수료생 (27명) 명단 (무순) 이관우 이도재 이명수 이범춘 이병기 이병준 이상율 이상익 이승묵 이영신 이은규 이은용 이인선 이재영 이재춘 이정선 이정 이종배 이종성 이정웅 이창용 이 이규 이수 이재 이정 이득우 ■ 청강생 (3명) 명단 (무순) 신정 이상명 이주엽 광주전남지원(지원장 達宇)은 2016년 12월 29일 지원 산 시.군.구 분원의 임원 종친 200 여 명과 께 송년의 밤 사를 갖고 이 자리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 270여 만원을 모금 본원, 제3기 집례 ․ 대축 전문과정 교육 수료식 거 광주전남지원, 송년의 밤 사 개최


李花 261 9 여 KBS광주방송국에 기다. 이날 사에 참석 이낙연(완 21대손) 전남 지사, 이은방(덕천 17대손) 광주광역시의장, 이정 재(령 19대손) 광주교육대교 전 총장의 축사 와 께 숭조 돈종의 덕담으로 성대 사를 치 렀다. 성금 모금 내역은 다음과 같다. 이달우 지원장(562,530원), 령대군 설공종(50만원), 령대군 석남공종(50만원), 령대군 심곡재종(50만원), 광주전남지원 청년이(20만원), 광주전남지원 여성이(20만원), 광주전남 종친 일동(24만8천원) 총계:2,710,530원 <광주전남지원> 경남지원(선은전봉)은 2016년 11월 4일 정 오, 수 지원장을 비롯 41명이 참석 가운데 경남지원 의실에서 조고제 681주년 신제 고유제를 봉다. 고유제는 마다 남 선은전 에서 봉 왔으나, 이번에는 우와 으로 선은전 출입로가 유실되어 경남지원 의실에서 진됐다. 봉무 제관은 관 수, 집례 강주, 대 축 봉, 알자 숙봉, 감찰 일, 전사관 명래, 집 사 성 종친이다. <경상남도지원> 제주도지원(지원장 哲男)은 2016년 10월 15일 제주시 조천읍 선1리 마을운동장에서 450여 명 의 제주도 종친이 참여 가운데 왕족의 자긍심 고취와 종친간 목을 다지는 제주도종친의 날 사를 개최였다. 이 사에는 섭 종약원 이사 장을 대신여 경동 부이시장이 축사를 대독고, 이어서 경사에도 참여는 등 제주도 종친에 게 더 없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제주별자치도지원> 경남지원, 조고제 신제 고유제 봉 제주도지원, 제주도종친의 날 개최


10 李花 261 진남군종(장 청수)는 2016년 11월 12일 오전 10시, 경기도 용인시 구성재(九星齋)에서 종 친 90여 명이 참반 가운데 진남군의 모친이신 숙의(淑儀) 창이씨 시제를 봉고, 이어 진 남군의 장남 거군(居平君)과 3남 봉성군(鳳城君) 시제도 께 봉다. 진남군 제546주기 기제사는 11월 13일 자 정, 경기도 고양시 벽오재(碧梧齋)에서 종친 40여 명이 참석 가운데 봉되었다. <진남군종> 익안대군 경남지(장 原純)는 2016년 12 월 23일 오전 11시, 경남지원 사무실에서 30명의 원이 참석 가운데 제34 정기총를 개최 다. 영광의 얼굴 연주(정종 / 덕천군 18대손) 종친은 충남 공주에서 1957년 고(故) 은상 (殷相) 종친의 4남으로 어나서 공주사범대과 국교원대교 교육대 원을 졸업고 웅천고등교 교장, 충남교육청 장관을 거쳐 2016년 3월에 공주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 취임였다. <덕천군종> 연주 종친, 공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취임 진남군종, 숙의 창이씨 시제 및 진남군 기제사 봉 익안대군 경남지, 정기총 개최


李花 261 11 일주( 정종 / 덕천군 18대손) 종친은 1953년 고(故) 은상(殷祥) 종친의 장남으로 어나 공주사범대과 동국대교 대원을 졸업고 국립공 주전문대 교수를 거쳐, 2001년 공주대교 사범대 교수로 임명된 2016년 7월 공주대교 안보과대원장에 취임였다. 부친인 고 (故) 은상(殷祥) 종친은 덕천군종 이사장과 릉봉 장을 역임 다. 일주 종친은 재 덕천군종 문유산자문위원의 위원으로 동고 있다. <덕천군종> 중구(重九, 성종 / 봉안군 15대손) 종친은 1979년 생으로 서울대교 와 동 대원을 졸업고 2016년 8월, ‘북 담론’ 논문으로 외교 박사 위를 받았다. 중구 종친은 재 서울대교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부친 동(東薰) 종친은 봉안군종 재무 이사로 종사에 참여고 있다. <봉안군종> 선(孝善, 중종 / 덕대원군 17대손) 종친은 2016년 11월, 제63 미국진공 국제에서 4500여 명이 참석 가운데 참석 대원 생 중 최고 수준의 연구결과를 보여준 2명의 수상자 중 명으로 선정 되어 국인 최초로 만 장상을 수상다. 선 종친은 국과 기술원에 재중이며 부친은 우(愚泰) 종친이며, 삼촌은 우덕(愚德) 종 약원 이사이다. 시주(時周, 정종 / 덕천군 18대손) 종친의 자부인 은승 씨는 2016년 2월 22일, 강릉원주대교 대원에서 ‘중부지역의 약 강수에 미치는 도시 및 에어로졸의 영’이라는 논문으로 이박사 위를 받았다. 재 강릉원주대교 연구교수로 근무중이다. 시주 종친은 주시분원 이사로 종사에 참여고 있다. <경기 주시분원> 일주 종친, 공주대 안보과대원장 취임 重九 종친, 외교박사 위 취득 孝善 종친, 만 장상 수상 時周 종친 子婦, 은승 씨 이박사 위 취득


12 李花 261 규봉(揆奉, 세종 / 광대군 19대손) 종친의 부인 박영숙 국교육개발 원 글로벌미래교육연구본부장은 2017년 1월, 국교원교육 제28대 장에 취임였다. 규임(揆任, 세종 / 광대군 19대손) 국영상제작 명예장은 최근 『링 사무사(思無 邪)』를 출간다. 『웰빙 기수련(氣修鍊)』 『웰빙 병각리(病却理)』 『웰빙 부사의(不思意)』 에 이어 4번째 출간이다. 이번 책은 삿된 생각을 지 말고 순진무구 ‘마음자리’에 들라는 뜻을 담고 있다. 揆奉 종친 妻, 박영숙 씨 국교원교육 장 취임 揆任 종친, 『링 사무사(思無邪)』 출간 11.30 조경재 성금 기 (완원군종) 12.7 조경재 성금 기 (인대군종) 사단법인 종묘제례보존 원 가입 안내 - 가 입 비 : 개인 10만원 이상, 단체 20만원 이상 - 원전 : 종묘제례 제관으로 우선 참여의 기와 종묘제례 전수교육을 수료 문재보법에 의 전수교육생, 이수자, 전수교육조교, 기능보유자로 선정될 기가 주어질 수 있음. - 국민은 : 817201-04-036370 (사)종묘제례보존 본원 방문


李花 261 13 지원·분원 소식 지원․분원명 (지원․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 진 경남 서마산(鎔植) 42 16.7.29(금) 11:00 진북농 3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종 소식 종명(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 진 안대군(致燁) 2016 16.10.9(일) 12:00 상암동 의공원 47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① 종 임원 변경 종명 신임 임원 변경일자 (임원선출일자) 경녕군 (鍾璇) 장 南永 16.3.5 총무 光根 16.8.1 ①안대군종 제봉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參班員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敬陵 德宗大王 昭惠王后 韓氏 10.15 정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410 경릉봉 (장 柱英) 宅珩 鶴九 韓二德 鎬洛 面鎬 燦鎬 弼薰 琯雨 和用 雲鎬 百鎬 齋鎬 敎成 在鎬 ① 恭陵 章順王后 韓氏 (睿宗大王妃) 10.16 정오 경기도 주시 봉일천리 347 창공릉봉 (장 鍾連) 용근 찬 경 락 종갑 종우 종명 영 원영 상국 영 정재 욱 ② 仁陵 純祖肅皇帝 純元肅皇后 金氏 10.20 정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150 인릉봉 (장 東宇) 龍德植 富烈 政炫 玄昌 益柱 義基 厚源 範春 鎔太 丙天 讚浩 寬柱 在鎬 鎬昱 ③ 懿陵 景宗大王 宣懿王后 魚氏 10.23 정오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30 의릉봉 (장 南植) 性大 周秉 魚興秀 政秀 春根 錫雨 範春 明承 光敎 商律 讚浩 富烈 道宰 鎬昱 ④ 齊陵 神懿高皇后 韓氏 (太祖高皇帝后) 10.29 정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350 제릉봉 (장 弘培) 鍾根 準學 韓榮基 潤鎬 羲榮 昌榮 來秀 鍾城 義榮 明九 仁國 賢德 炳學 鎬昱


14 李花 261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參班員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翼陵 仁敬王后 金氏 (肅宗大王妃) 11.1 정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184 익릉봉 (장 泰鎬) 金重采 昔柱 性大 在秀 鍾國 鎔太 海昌 孟壽 金連澤 富烈 金世中 鎬稙 俊在 在鎬 ⑤ 大嬪墓 玉山府大嬪 張氏 (景宗大王 私親) 11.9 정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130 대빈묘봉 (장 愚德) 道洙 相國 張榮鍾 潤鎬 興雨 富烈 鎬稙 商律 漢奎 宗林 柱雨 燦鎬 道宰 鎬昱 ⑥ 靖陵 中宗大王 12.9 정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355 정릉봉 (장 愚喆) 弼柱 漢範 慎必晟 富鎔 啓珩 漢奎 康根 義基 宗林 益柱 銀鎔 洪燮 天宰 商訓 ⑦ 溫陵 端敬王后 慎氏 (中宗大王妃) 음12.7 정오 경기도 양주시 일영리 240 온릉봉 (장 鍾一) 元燮 政柱 慎世範 富鎔 光燮 宗林 鍾德 錫泳 閔鎬 昌圭 義基 益柱 賢秀 鎬昱 ⑧ ①경릉제 ②공릉제 ③인릉제 ④의릉제 ⑤익릉제 ⑥대빈묘제


李花 261 15 ⑦정릉제 ⑧온릉제 릉제(9. 21) 릉제(10. 24) 순강원제(11. 27) 종7기 전수교육생 (2016년 종묘추대제 봉) 바로 잡습니다 257 72면 9줄 충원(경남 창원시)→원충(경남 창원시) 259 38면 1단 16줄 대민국 3년 → 대민국 30년 259 44면 2단 7줄 계였다. 이 분원보는 → 계였다. 이보다 앞서 분구되기전 구로구분원에서 1988년 1 월 발간 <구로(금천) 이보>인 이 분원보는 260 67면 6줄 봉안군종 → 덕양군 봉산군종중 67면 32줄 (봉안군) → (덕양군) 78면 12줄 怛周 → 炟周 / 서울시 은구 불광로 20길 2로 바로잡습니다.


16 李花 261 다사다난(多事多難)던 병신년(丙申年)은 가고, 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새가 밝아 왔다. 우리 역사속에서 정유년은 어떤 사건들이 있었으며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대적으로 제일 사건은 420년 전인 1597년에 일어 난 정유재란과 120년 전인 1897년에 단된 대제국의 선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천 선조께서 요청 명나라 구원병의 참전으 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산되어 장기전 양상 을 띠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연전 연승의 전으로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았다. 전세가 불리진 일본은 명나라와 강담을 열었으나 상이 결렬 되자 도요미 데요시(豐臣秀吉)는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공왔다. 이것이 이른바 정 유재란(丁酉再亂)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7월 원균 장군의 무 모 독전으로 조선수군은 칠천량 전에서 참를 당여 명장 이억기(李億祺) 장군을 비롯 조선수군은 전멸 상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남은 군선(軍 船)들을 수습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무찌 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이다. 1657년의 정유년에는 종께서 복수설치 (復讐雪恥)를 위 북벌정책을 추진게 되었 는데, 불만을 은 김자점 수 이언(李彦 標) 등이 청나라에 밀고으로 청나라 사문 사가 남별궁에 와서 사문 때 만조백관 모 두 숨죽이고 있을 때 영상인 이경석(李景奭) 이 나서서 모든 책임을 자임고 백마산성 (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는 사건이 있었 다. 1717년(정유년)의 숙종 시대를 거쳐, 1777 년인 정유년은 정조 께서 즉위 지 두 번째 되던 로 정치 · 경제 · 문의 개정치들이 준비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7월 28일 밤 11 시 무렵 정조가 계시던 경궁 존각(尊賢 우리 민족사 속의 정유년(丁酉年) 이용규(李鎔奎) 본원 고문


李花 261 17 閣)에 자객이 침입 정유역변(丁酉逆變)이 일어나기도 으며, 1837년에 정유년은 1834년 8세의 유충신 보령으로 즉위 종께서 안동 김씨로 대되는 세도정치 속에 서 왕권을 제대로 사지 못셨고 백성의 삶은 불안지기만 다. 120년 전 정유년에는 조선의 임금인 고종 께서 제(皇帝)위에 오르시고 국가 바뀌는 변가 있었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관으로 신여 1년여 동안 머무르시던 고 종께서 경운궁(慶運宮)으로 궁시어, ‘구 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 작)’에 입각 근대국가 수립에 요 기 구를 설치고, 연를 광무(光武)라 며 자 주국가의 면모를 과시 나갔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께서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공동에 건설 놓은 구단(圜 丘壇)에 나아가 대제국의 제 즉위식을 거시고, 자주 독립 국가를 천명셨다. 고종제는 룡(紅龍袍) 대신 제가 입는 룡(黃龍袍)를 입으시고, 사직단(社稷壇)이 아닌 구단(圜丘壇)에서 직접 늘에 대제 국(大韓帝國)임을 고셨다. 국를 ‘대제국’으로 것은 ‘삼’에서 유래 것으로 과거 중국 당나라에서 고구 려, 백제, 신라를 어서 삼이라 불렀는 데, 그 삼이 일 되었다는 의미에서 즉 삼의 옛 영와 역사를 계승는 ‘대’의 의미를 고신 것이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로 강 가 분리돼 각각 지역을 차지고 권을 다어 오다가 고려 때에 마, 진, 변을 으니, 이것이 ‘삼’을 것이다” 라고 고종의 발언은 국를 ‘대제국’으 로 정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정 ‘대’이라는 국는 공정 체 제로 출범 ‘대민국임시정부’를 거쳐 재 의 ‘대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1957년의 정유년은 6·25전쟁의 와 상 처를 극복 가면서 지금의 대민국을 만들 기 위 노력을 전개던 자유당정권 시기 로, 이렇게 참담고 어려웠던 때를 겪었을 까 는 60년 전의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모습은 먼 과거의 노라마처럼 우리에게 다 가온다. 역사는 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다. 정 유년의 역사적 교은 우리에게 재와 미래 를 지를 찾아 나가야 것이라고 생 각되기에 역사적 소를 적어 본다. <정종 / 덕천군 19대손> 이보 정기구독 기간이 금번 (권 제261)로 만료되는 종친에게는, 별도 로 지로용지를 첨부여 보내드립니다. 지로용지에 정 주소와 성을 기재 시고, 1년 청독료 1만원을 가까운 은이나 우체국으로 납부여 주시기 바랍 니다. 문의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부 (02)765-2124


18 李花 261 십이지신도에 나오는 동물 중 닭은 어둠 속에서 여명을 알리는 상서롭고 신력을 지 녔다고 여 서조(瑞鳥) 또는 길조(吉鳥)라고 다. 또 닭은 오덕(五德)을 지녔다고 칭송된다. 즉 닭의 벼슬[冠]은 문(文)을, 발 은 무(武)를 나내며 적을 앞에 두고 용감 싸우는 것은 용(勇)이며, 먹이를 보고 무 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 때를 맞추어 울어 서 새벽을 알림은 신(信)이라 다. 무속신나 건국신에서 닭 울음소리는 천지개벽이나 국부(國父)의 생을 알리는 초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계가 없던 시절의 밤이나 린 날에는 닭의 울음소리로 시각을 알았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면,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여 메를 짓고 제사를 거다. 자는 선조대왕의 실비와 어각이 모 셔져 있는 충남 부여군 충면 오덕리에 소 재 오덕사(五德寺)에 대 이야기를 며 선조대왕의 유적을 상고 그 유적지에 전 지는 닭의 신묘 유래를 기고다. 오덕사는 봉산 북녘, 금계산(金鷄山) 남 쪽에 위치 사찰로, 759년 신라 경덕왕 때 원가 창건다고 전진다. 지금은 비록 작고 아담지만 사찰의 서쪽 계곡과 능선 내에 넓은 대지에 조선시대의 와이 상당수 분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절의 세력이 게 융성여 가람의 규모도 상당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은 금계(金鷄)라는 동 물에서 유래는데, 금계는 5가지 덕을 가지 고 있는 동물로 알려져 절 이름을 오덕사라 고 였다. 1570년 송인수가 이 산의 봉 정상에 선 조대왕의 (胎函)을 안치고 실비를 세 웠다. 이런 까닭에 선조는 이 절에 ‘원객좌장 야(遠客坐長夜) 우성고사추(雨聲孤寺秋) 청량 개과천선(請量改過遷善)’의 어과 곤룡를 사으며 이를 모셔두기 위 어각을 세 새 정유년을 맞이며 이길재(李吉宰) 충남 부여군분원 상임고문


李花 261 19 웠다. 이 수로 인여 붕괴되고 1918년 주지 일스님이 칠성각을 새로 짓고 어각 을 옮겨 지으며 중창였다. 어각은 충청남도 유적 제9로 지정 되었으며, 유물로는 괘불과 영조 어, 곤룡 등이 전다. 그리고 대웅전 왼쪽에 있는 선조대왕 실비는 1984년 충청남도문재 자료 제117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1928 년 일본인이 손 것을 1961년 마을 주민 들이 복원 바 있다. 어각 유적 제9. 1994년까지 대웅전 우측 면 약간 높은 곳에 위치고 있었으나 1995 년에 원래의 자리로 알려지고 있는 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된 건물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대웅전 옆에 있었던 어각도 규모나 부재의 기, 상로 보아 당초의 것이 아니 고 또 번 옮겨온 건물로 보였는데, 최근 복원 때 ‘갑신 4월 13일’이라는 상량문이 나와 1904년에 옮겨진 사실이 밝졌다. 어각은 오덕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좌 측 에 위치고 있다. 어각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구되었는데, 우측 3칸 에는 마루가 달린 온돌방을 들여 작은 불 당을 만들고 좌측 1칸에는 넓은 방으로 사용 수 있는 온돌방을 들였다. 선조대왕실비 충청남도문재자료 제117. 1570년(선조 3) 안사 송인수가 봉산 꼭대기에 선조대 왕의 (胎函)을 안치면서 세운 실비이 다. 세월이 지나 글자가 지워지자 1747년(영 조 23)에 다시 세웠으며, 새로 세운 실비 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과 비머리와 비몸체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宣祖大王胎 室’이라고 적 있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지 기가 기록되어 있다. <종 / 령대군 19대손> 장기금 모금 안내 全州李氏를 대는 장재단인 이장는 정신과 숭조돈종 사상이 철 진양성을 위여 1987년 4월 1일자로 서울별시 교육감으로부 재단 법인 이장 설립 가를 받았습니다. 재까지 기본금 14억 여 원이 모금되 었으며 연 인원 1,347명 생에게 장금을 지급였습니다. 본원에서는 장의 성 방안으로 기본금 20억원을 모금여 진양 성을 위 장을 넓고자 노력고 있습니다. 이에 이장기금 모금에 동 참실 개인이나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드립니다. 국민은 817-01-0254-362 (예금주 : 재단법인 이장)


20 李花 261 지금까지 단종대왕의 실이라 알려진 실은 사천 곤양 세종대왕 실의 바로 옆 또 다른 봉산에 남아 있다. 이 실을 두고 세간에서는 이제까지 아래 견를 가져왔다. 세종대왕은 원손을 지극게 사랑 나머지 자신의 많은 왕자 들의 집단 실에서 원손만의 실을 사천 곤명에 있던 자신의 실 곁으로 그 이전시 의미심장 애정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인성대군의 실에서도 밝듯이 사천 곤명의 세칭 단종대왕 실은 결단코 단종대왕의 실이 아니다. 인성대군의 실 이다. 왜냐면 단종대왕의 실은 사천 곤 명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종대왕 실은 문종대왕 이전은 물론 즉위 당시까지 만 여도 숙부들인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들 과 께 아래와 같이 그대로 성주 진서산(鎭 棲山)1)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1) 진서산(鎭棲山)은 선석사(禪石寺)가 있어 선석 산으로도 불린다. 처음에 원손(元孫)의 를 경상도 성주에 안치였는데, 그 도국(圖局) 내에 장경(長庚)의 묘가 있었으니 바로 성원군(星 原君:종의 부마) 이정녕(李正寧)의 시조였다. 『세종실록』 25(1443년) 12월 11일 지중추원사 민의생(閔義生)과 동지중추원사 이진(李蓁)을 불 러 이르기를, “성주의 실이 장경의 무덤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 가” 니, 진이 아뢰기를 “그 사이의 거리가 겨우 1리로써, 만 일 초목이 무성지 아니오면 여 바라볼 수 있는 지점입니 다” 『세종실록』 26년 1월 5일2) 수에서 이르기를,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 명여 문을 좋아고 구경(九經)에 정며 단상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진되는 것입니다. 지금 왕세자의 실 이 성주의 여러 대군들의 실 옆에 기울어져 보(補土) 곳에 있으니 진실로 옳지 못니다. 『경(胎經)』의 땅을 가리는 법 에 의여 길지를 경기와 삼도에 널리 구게 소서” 니, 2) 이장경의 묘소가 봉 영역에 있음을 여러 왕 자들의 실과 연결지 않고 단지 원손(에 단종대왕)의 실과만 연결지어 문제를 삼은 것 은 원손의 신분 때문이라 여겨진다.(이 때문에 서인지 이장경의 묘는 성주 대가면 오(梧峴) 으로 이장되었다고 성주문원, 「塚墓」『星山 誌』,1988년에 기록되어 있다) 이장경의 묘소와 실과의 관련 기록은 『세종실록』 25년 12월 29일, 26년 1월 초3일에도 나온다. 조선시대 국왕의 실 (6) - 단종대왕의 실 - <집자 주: 본 고는 절된 도서인 『조선의 실Ⅰ』 (1999년 본원 발)에 실린 내용을 재집 것으 로써, 조선시대 국왕의 실을 제왕순으로 도과 께 설물을 연재다.>


李花 261 21 이에 따랐다. 『문종실록』 즉위(1450년) 9월 8일 문종대왕 때 단종대왕은 당시 세자 즉 동 궁(東宮)이었기에 여느 왕자와 다른 장지 (藏胎地)를 찾아야 다. 당시 세종대왕의 여 러 왕자들과 같이 살던 선석산의 단종대왕 실은 더구나 원래 보 곳이었다. 결과 다른 길지를 여 이전야 다는 주장이 아래와 같이 나왔다. 이제 동궁(東宮)의 실을 성주 가야산에 모시고 그 사역(四 域)을 정였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구천육백보, 서쪽을 구천오 백구십보, 북쪽을 사백칠십보로 여 (標)를 세우고 또 관 (品官) 이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여 수게 였습니다. 『문종실록』 원년 3월 6일 결과 실을 옮긴 곳은 곤양이 아닌 성주 의 가야산인 것이다. 이 가야산은 ‘가야산의 줄기’를 뜻다. 더욱 정 위치는 성주 의 법림산 중 봉산이다. 이는 아래 기록 에서 인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주 선석산에 주상전의 실을 봉안 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과 여러 군과 난신(亂臣) 유(瑜:금 성대군)의 실이 그 사이에 자리였고, 또 법림산에 노산군의 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실을 옮기고 금 성대군 및 노산군의 실은 철거게 소서.”니 그대로 따랐 다. 『세조실록』 4(1458년) 7월 8일 위 실록은 법림산에 있던 노산군으로 강봉 된 단종대왕의 실이 세조대왕 당시 철거되 었음을 알린다. 부언건대 이상의 여러 기 록을 여 볼 때 단종대왕의 어는 세전 (世傳)과 달리 세종대왕 때 사천 곤명으로 이 전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종대왕 즉위와 께 성주 법림산에 별도의 실을 세워 이전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단종대 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자 철거라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에 이왕직에서 단종대왕 어를 서울로 이전려고 사천 곤명에 전사(典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담은 기록은 없다. 즉 서삼릉에 단종대왕 실이 건립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사천 곤명에서 이전여 온 실은 인성대군의 실이 있을 뿐이다. 이왕직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나 서삼릉의 인성대군의 실이 바로 지금까지 알려진 사천 곤명 단종대왕의 실 에서 이장된 것이라고 본다. 이를 아래와 같 이 석고 싶다. 사천 곤명의 세칭 단종대 왕의 실은 이안 과정에서 인성대군의 실 로 바르게 인되었다. 이는 실로 천인공노 사실이지만 당시 공기에는 이왕가로 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사실인 관계로 일부러 보고지 않았고, 또 그 결과 문제 삼지 않 고 처리여 버렸을 것이다. 반면 성주 가천 법전동의 봉산에 석을 단종대왕의 실 석재로 보는 이유는 두 가 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법전 봉의 잔존 는 석들은 그 규모로 보건대 왕자, 왕녀의 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의 지대석(地臺 石)과 귀부(龜趺) 기 수많은 석은 분명 국왕의 가봉된 실이기 때문이다. 본래 석은 민묘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상당량이 땅 속에 매몰되었고, 그 가운데 1982년 세운 이 곳의 씨 가문의 묘소 석재로도 용되었다 고 본다. 둘째 이 법전 봉의 오른쪽 계곡 에 만 남아 있는 절의 명칭이 법림사라는 점과 관련지어서이다. 법림사란 절이 있었기 에 이곳은 때는 법림산으로도 불렸을 가능


22 李花 261 성이 높고 결과 단종대왕 실이 있었다는 성주 법림산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 추정에 입각여 보건대 법림사는 본래 단종대왕 실을 수는 원찰(願刹)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 이러 사실로 인여 단 종실의 철거와 께 동시에 찰(廢刹) 되 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여겨진다.3) 그리고 이곳이 단종대왕의 실이라면 지 3) 법림사는 단종대왕 실의 원찰 역도 맡았을 것이다. 이 사찰에 관 기록은 『星山誌』『法林 寺西瑟 菴在伽泉』로 전다:성주군청 문공보 실, 『내고장 星州』, 1985, p89. <가천면 법전 동의 法林寺의 鎭山에도 왕실의 를 안치 으로 법림사를 었다고 는데 산 아래에는 아직도 석이 굴러 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는 벌써 왕가로 옮겨 갔다고 다> 이 내용 도 이 실이 왕실 실임을 뒷받침다고 본 다. 그러나 법림사가 찰된 것은 이 실을 세 울 때가 아니라 세조대왕 당시 실을 괴 때라 여겨진다. 금 남은 그 석의 규모나 위격으로 볼 때 이 실은 단종대왕 재위 때 국왕 실로서 이미 가봉된 실이라고 본다. 지금 선석산 종대왕의 왕자들의 집단 실의 곁에는 세종대왕 때 원손이던 단종 대왕의 실이 있다. 이는 세종 23년(1441) 즉, 단종대왕 생년 윤 11월에 축조 것이 다. 이 실의 석은 우리 전시대의 관대 로 법림산으로 이전 때 같이 이전되지 않 고 남았던 것이 림없다. 석이 다른 왕자 들의 경우와 달리 우에 그다지 마멸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비는 오랫동안 매 몰되어 있다가 아마 방 이 발굴 조사 때 에 발견되어 다시 건립되어진 것이라고 여겨 진다. 법림산으로 단종대왕 어를 이전 문종 ① 봉 정상의 석 : 석 일부는 민묘의 석재로 사 용중임. ② 원손 때의 실 : 세종23(1441)년 세움, 성주군 월면 인촌 리, 경북 지방유문재 제 88. ③ 원손 때의 비 : 세종 23(1441)년 세움, 명문 <元孫胎藏(前)皇明正統六年閏十一月二十六日己丑立石 (後)>. ④ 원손 때의 胎誌 : 세종 23(1441)년 제작. 명문은 박락되고< … 辛酉七月七… >만 인됨. ① ② ③ ④


李花 261 23 대왕 때 이 선석산의 원손의 실(비 ) 을 매몰였다는 가정은 세조대왕 때에 같이 를 입은 서인 된 몇 세종대왕 왕자들 의 석이 심각게 손되거나 아예 없어진 점과 대비됨에서도 뒷받침된다. 원손의 실 은 괴 이전 문종대왕 때 이미 땅속에 매몰 였기에 세조대왕 당시 손되거나 아예 없 애버린 비극적인 운명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단종대왕 : 세종 23년(1441) 7월 23일 ~ 세조 2년(1457) 10월 24일, 재위 1452년~ 1455년. 조선 제6대 왕, 문종대왕과 덕왕 의 소생. 비는 정순왕 송씨. 는 위 (弘暐). 세종 30년(1448) 왕세손에 봉지고 부왕 문종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였다. 1455년 상왕이 되었으나 1456년 사육신들이 중심된 복위 기도가 발각되어 1457년 노산 군으로 강봉되고 영월에 유배되었다. 같은 금성대군이 그의 복위를 꾀다 사사되자 다시 노산군이란 왕족의 신분마져 서인(庶人) 으로 강봉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대군에 추봉되고, 1689년 복위되어 묘를 단종대왕 이라 였다. 시는 공의(恭懿). 중종왕자 영양군 족보 찬공고 중종대왕 넷째 왕자이신 영양군( 거) 아버님의 손 족보를 찬려 오니 전국 에 계신 손들께서는 모두 참여시어 알찬 족보가 찬되도록 조를 당부드립니다. 영양군 족보는 1977년 6월에 찬 40년이 지났습니다. 전국에 계신 영양군 손(영양군의 아드님 령군, 손자 군 ․ 능수, 증손자 능산 군 ․ 능봉군 ․ 능강수 ․ 능수 ․ 능안수 ․ 능계수 ․ 능주부정 ․ 금원령 ․ 금성령)께서는 아래 일정을 참고여 모두 동참 주시기 바랍니다. ◇ 수단기간 : 2017년 6월 말까지 ◇ 연락처(족보추진위원, 각 소종별 대) - 서울 이동주 : 010-8635-4737 (능봉군) - 광주 이길 : 010-8261-1143 (능강수) - 고창 이대용 : 010-9095-3945 (능수) - 강릉 이용 : 010-8791-5438 (능안수) - 청주 이우용 : 010-5492-6929 (능계수) - 부산 이덕종 : 010-3868-1357 (능수) ※ 능산군 손과 능주부정의 손은 종장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영양군 족보찬 추진위원장 이 남 연락처 : 062-265-8840 / 010-5338-8840


24 李花 261 사람은 사적 동물이므로 로 살아가기 는 곤란다. 서로 어울려 의사를 소면 서 살아가기 리 방법을 찾아 아의 권 익에 가 가지 않도록 노력며 꾸준 발전 오는 것이 인간의 집단이다. 그래서 가정의 부부·부자·제자매가 있는 것을 시작 으로 일가 종족(種族)이 성되어, ·제·충· 신의 윤리강상이 무언중에 천(踐行)되는 족(血族)인 당내간(堂內間) 일가사람들이다. 이런 소단위 가족의 질서를 가족의 문밖으로 옮기면 이웃이 있는데 여기서부는 사가 된다. 유교적 차원으로 미뤄볼 때 사는 가정의 연광장이다. 사를 넓게 발전면 국가가 된다. 이것이 사적 동물인 인간의 성공인 것이다. 국가에는 그 국가 안에 괄된 사람 은 바로 가정의 가족처럼 그 국가의 국민이 되며, 국가는 그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 기 위 국가의 국체(國體)를 정고 그 근 간인 법이 제정되고 국가를 치 운영에 있어 각 부문에 당의 법률이 있어서 국가 의 안녕질서를 유지 가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막론고 다름이 없다. 각각의 속과 언어 는 다를지라도 인간의 대원리는 같은 것 이다. 즉 법의 두리 안에서 신체의 자유, 인격의 존엄, 인권의 자유, 이익추구의 자유 권이 모두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각인이 자 기에게 주어진 인권을 존중듯이 상대방의 인권도 나와 같이 존중다는 것을 인식고 서로 존중 줌으로써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가 준되어 과 질서가 유지됨으로서 가정의 , 사의 , 국가의 , 나 아가 세계의 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서는 국가의 법과 질서가 있어 서 그것으로서 각인의 인권과 존엄을 보장 주며 사람들은 생의 안정을 가지게 는 것이 국가가 일이다. 소위 유교권인 아시 아에서의 중(中華)로 불리는 중국의 고대국 무상(無常) 것은 천명(天命)이다 이승창(李承昌) 본원 제2문이사


李花 261 25 가였던 당우(唐虞)의 요·순 시대로 거슬러 그 때의 정치를 경전을 살보면 요순은 인본주의로 가정윤리부 세워서 국가사로 발전였음을 알 수가 있다. 가정은 부부·부 자로 시작됨으로 우선 제를 덕목의 제일로 쳤다. 따라서 국가사는 충신(忠信)을 덕목 으로 생과 봉사를 덕목으로 세웠던 것이 다. 그러므로 요임금이 천를 다스림 초두(初 頭)에 씨(羲氏)와 씨(和氏)에게 일월(日 月)의 출몰을 살 시간을 바로 정고 사시 (四時)의 질서를 정립게 여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바르게 알리는 것을 맨 먼저의 정 책으로 였는데, 이는 백성의 의식주의 안 정을 기기 위서였던 것이다. 의식이 족 야 예절을 안다고 는 것은 인간정서의 불가 것이므로 우선 백성에게 의식을 자 급게 는 기를 만들어주는 것을 정치의 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며, 다음은 인간의 고 유성인 제를 급선무로 고 거기에 충신을 더여 이 제충신을 인간사의 달도(達道) 로 삼았던 것이다. 때문에 요 임금이 천를 순 임금에게 넘겨줌에 있어서 사악(四岳 : 領 議政과 같음)에 요가 넘겨주려니 사악이 사양고 도를 는 미천 순을 천거 니, 요는 그에게 천를 넘겨주었다. 이것이 유교철의 기본정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역대 유교경전에서는 요순의 정치 세계를 이루는 것을 지상의 목로 여 선 비[士]가 벼슬에 오르면 우리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드는 것을 최고의 선(善)으 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조를 위시 보더라도 임금이 경연(經筵)을 설치고 경연석에서 경 연관의 시강시독(侍講侍讀)을 여 임금의 문을 높이게 였고, 신 역시 요순시대 의 고요(皐陶)·기(夔)·직(稷)·설(契)처럼 어진 관료가 되는 것을 권장고 있는 것이며 따 라서 백성들은 요순시대의 백성으로 롭 게 살도록 는 것을 목로 였다. 세대가 변에 따라 제정(帝政)의 천가 왕정(王政) 천로 바뀌게 되었다. 제정은 제 왕이 천의 전수를 어진 이를 가려서 전수 였던 것이라면, 왕정은 천를 전 때 어 진 성이 아니라, 적 아들에게 전여 으로 이어가는 계승의 왕국 치를 말 다. 여기에서 늘의 명을 받아 늘을 대 신 여 천를 다스린다는 천명설(天命說)이 대두되었다. 늘이 그 왕의 덕을 보아 늘 이 명을 주어 임금으로 천를 다스리게 는 것이므로, 덕이 없으면 언제든지 천명을 거두어 다른 덕 있는 사람에게 천를 맡겨 다스리게 으로 천명은 무상(無常)다고 여 나라를 소유 군왕에게 덕을 닦아 선치 를 도록 권장 것이다. 그러므로 늘은 임금이 임금다운 덕을 상 실고 백성에게 정(虐政)을 던 나라 임금 걸(桀)에게서 천명을 빼앗아 덕이 있는 상(商:은<殷>)나라 (湯) 임금에게 그 천명 을 주어 상나라의 천를 만들어 주었고, 또 상나라의 군 주(紂)가 정을 니, 늘은 그 천명을 빼앗아 인덕을 갖춘 주나라 문왕(文王:이름은 창<昌>)에게 주어 그 아들 무왕(武王:이름은 발<發>)이 왕업을 완수케 서 천년왕업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러면 천명은 무엇인가? 사람은 늘이요, 늘의 뜻은 사람의 동를 보아 알 수가 있 다. 천명이란 인심(人心)을 말다. 인심의


26 李花 261 방을 보아 천명의 방을 알 수가 있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늘이 뽑은 자 즉, 국민이 뽑은 자는 대령이고 대령이 뽑은 자는 총리이고 장관일 뿐이다. 대령이 임명 이는 대령에 의 면되지만 대령은 늘에 의 뽑고 늘에 의 출되는 것 이다. 이 덕(德:선정을 여 백성의 칭송을 얻게 실체)을 간직느냐, 상실느냐는 모두 임금의 용심(用心)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남에 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사람 을 등용에 있어 군자를 가까이고 소인을 멀리라는 경계가 경전에서 우선으로 강조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천를 다스림에는 임금 자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정도(正 道)와 정직을 갖춘 인재를 등용여 께 다 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간사고 아 첨는 소인을 가까이 면 결국 나라는 어 지럽고 망며 천명은 옮겨 새 주인을 찾아 가는 것이 진리이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서중(泰誓中)>에, “늘이 보심은 우리 백성의 봄으로부 시며 늘의 들으심은 백성의 들음으로부 신다[天視 自我民視, 天聽 自我民聽]”라고 였는데, 이는 천명을 백성의 시청(視聽)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임을 말 것이다. 또 <맹자(孟子) 만장(萬章) 上>에, “유자가 있어 노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빨 수 있고, 창랑의 물이 리면 나의 발을 씻을 수 있다[有孺子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 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고 였 는데, 공자(孔子)는 제자들에게 “소자(小子)들 아 저 노래 소리를 듣느냐,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물이 리면 내발을 씻는다.’ 는 데, 이는 모두가 자기 자신이 취(取) 것이 다.”셨다. 공자의 이 말씀은 바로 모든 것 은 자기가 스스로 취 결과이지 다른 사람 의 이 아님을 말 것이다. 만고(萬古)의 군으로 자되는 걸주(桀紂)도 남의 이 아닌 자기가 스스로 정으로 얻어진 결과이며 그 구 많은 군왕들의 망성 쇠도 이 자취(自取)의 과정을 벗어나지는 못 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의 연산군이나 광군의 실상을 보더라도 이는 자취(自取)요 다른 사람의 이 아니었다. 문제라면 좌우에 가까이 것 이 소인들이요, 군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간 신의 아부와 아첨을 물리치지 못고 그들의 달콤 첨언에 빠졌기 때문에 불 결과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라 여 어찌 나 쁜 일만 있었겠는가마는 번 린 물에는 발만을 씻게 되는 것처럼 맑았을 때는 생각 지 않는 것이 인정(人情)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벌어진 청와대의 란도 대령으로서 대령이 야 본분을 잃었 기 때문이다. 대령은 대민국의 국민이 선거를 여 뽑은 천명(天命)을 받은 나라의 최고 수반(首班)으로서 당 각 부의 책임비 서진이 나열되어 있는데도 불구고, 사사로 운 사정에 치우쳐 외부인 농단인 소위 ‘최순 실게이’란 신조어 생과 께 간교 요 망소인(妖妄小人)을 불러들여 국정(國政)을 농락게 였다니 이것이 모두다 진실만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난국이 되도록 것은 진이던 가던 간에 대령의 불찰임엔 림없 다. 결국 국의 소추를 당여 법재 소에 기소 재 결을 기다리고 있고 정 국을 ‘조기 대령 선거’라는 유례없는 소용


李花 261 27 돌이 속에 말리고 있으니, 이는 세계 선진 국 반열에 도약는 대민국의 국격을 침 시는 동서고금에 없는 망국의 일로서, 참 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다. 우리 대령은 대민국 그 자체이다. 대 령의 불은 바로 대민국의 불이므로 참 으로 우리 국민들의 불이다. 이 사가 설 거짓이라고 더라도 그 책임은 대령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민국 대령으로서 이러 사가 일어나게 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잠시도 공(公)·사(私) 분간 (分揀)의 초점을 놓치면 사정(私情)에 빠지게 되니 그것이 곧 실정이요 망국의 보가 되 는 것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篇)>에서 자공(子 貢)이 말 것처럼, “은나라의 주(暴主) 주 (紂)의 불선(不善)이 이처럼 심지는 않았 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류(下流)가 되는 것을 싫어다. 그것은 천의 악이 다 거기[下流]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라고 것 과 같이, 사람이 번 사적 도의에서 벗어 나는 일을 여 류로 떨어지면 모든 악 것들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사리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동물인 인 간은 여럿의 사람에게 무리 일이 없이 사 의 도의에 따라 그 범주에 벗어나지 않고 자기일 자기가 착실게 뿐인 것이 다. 국민 각자가 자기 맡은 일을 자기가 면 된다. 때문에 공자는 “남은 남답고 아내는 아 내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는 신다워야 다.”라 고 가르쳤는데, 이는 각자 자기 자리를 지 면 국가사는 밝은 국가사로 발전다는 것을 말 것이다. 이상의 설수설은 자가 지금 우리가 직 면 국가적 난국을 보면서 그 자리에 맞게 동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금 자성 (自省) 보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명운 (命運)이 좌우되는 일이라 늘의 뜻대로 결정될 것이니, 우리 국민은 시류에만 덩 달아 뇌부동 일 만은 아닌 것 같다. 병신년의 여름은 유난도 덥더니 또 겨울 도 일찍 찾아와 추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500만 종친들은 이런 국가정세의 가 른 실을 지켜보면서 층 우리 자신을 반 성보고 좋은 일에는 더욱더 쓰고 잘못된 일은 즉시 시정여 자취(自取)의 우(愚)를 범지 말아야 것입니다. 정유(丁酉) 새 에도 우리 500만 종친들은 내가 일 내가 충실 고 그간의 소이 있었다면 우리는 다시 반성고, 숭조돈종의 종 실 천에 박차를 가여 늘에 계신 열성조(列 聖朝)의 존령(尊靈)이 내려주시는 복(福)을 많 이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천명(天命)이 다 시 우리 전주이씨에 돌아와서 종운(宗運)이 대성(大成)기를 기구(祈求)며 고르지 않 은 기에 감기 조심시고 종친어른님들의 각 가정마다 건강과 만복이 충만 시기를 축원니다. <종 / 양녕대군 16대손> 굴곡을 넘고 보니 7년이란 세월이 쩍 넘어 갔습니다. 옛날과 다름없이 시 대기고 있겠습니다! 세종왕자 광대군의 18대손 리 은 종 인사드립니다. 동방석재 대전 (041)753-3545 / 010-4403-8327 오랜 시간 동안 찾아뵙지 못여 죄송 마음 금 길 없습니다.


28 李花 261 경연(經筵)이란 군주와 조정 관료들이 유교 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논의는 제도이다. 서연(書筵)은 왕세자가 참여 교육제도로서 이를 담당는 관리를 경영관 또는 서연관이 라 다. 중국 나라에서 유래여 우리나 라에는 고려 중기에 도입되었으나 무신정권 때 지되었다. 조선시대 게 발달 경연 제도는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인격을 도야 고 정치와 정능력을 증진시기 위 마련 제도이다. 국왕의 덕을 기르고 치력을 상시켜 이상정치 실을 목적으로 기 때 문에 국왕이 중심이 된 조나 일반 정책결 정 과정과 다른 술과 중요 정치의 기 구로 발전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연에 관 상세 자료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 소정치의 기록유산으 로서 문적 가치가 매우 다 것이다. 조선시대 국왕은 어렸을 때부 끊임없이 나는 공부를 야 다. 사서오경(四書五 經) 등의 경서를 공부시켜 국왕이 사명감을 자각으로써 감성의 욕구를 억제고 이성 에 따라 동는데 있으며 역사공부는 과거 의 사례를 경계로 삼아 게을리 서는 안 되 기 때문이다. 국왕이 막강 권력을 쥐고 있 으므로 올바른 정치를 려면 문과 덕이 앞서야 므로 서연과 경연은 조선왕조 시대 세자와 국왕에 대 참으로 중요 교육련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연관과 서연 관은 식과 덕이 출중 자나 원로대신 중에서 발되었기 때문에 매우 명예로운 벼 슬이었다. 조선왕조의 초기에는 왕권의 기초를 다져야 는 과정이므로 조와 종은 왕권을 간섭고 제약려는 경연에 소극적 이었다. 조선 시대에 륭 임금인 세종, 성 종, 중종, 영조, 정조는 경연을 매우 중시 였으며 세조와 연산군은 경연을 지기도 였다. 세종대왕은 이미 서연을 문 조선왕조 경연(經筵) 제도의 대적 계승 이여성(李如晟) 령대군 병사공종장


李花 261 29 이 높은 경지에 올랐음에도 경연을 중시고 적극 참석여 재위 32년에 거의 매일 그리 고 루에도 수차 경연을 열어 론였다. 세종은 문무 관원을 돌아가며 독대(獨對)와 윤대(輪對) 때로는 야대(夜對)를 는 과정에 서 어떤 발언이라도 문제 삼지 않고 취사선 여 문과 문예술, 과과 기술, 정치 와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 기을 닦고 굳건 세워 우리 역사상 가장 륭 업적 을 남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종은 재위 동안 약 9,000의 가장 많은 경연을 열어 정치의 기준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 (經國大典)』을 완성는 등 문국가의 면모 를 립다. 신가 중종께 “고금 역사의 득 실(得失)을 구문(究問)고 대신들과 정치를 강론시라”고 아뢰니 “공의 말이 참으로 옳 다”고 받아들이며 “군자와 소인을 분별기 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내시(內侍)나 궁첩 (宮妾)을 가까이 고 어진 사대부를 멀리 면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될 것이다.”고 였 다. 영조는 경연을 신들의 실수를 날 카롭게 지적며 책으로 란과 갈등, 누적된 많은 부조리를 치유다. 조부 영조 에 의 서연(書筵) 교육을 잘 받은 정조는 문이 어느 신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오 려 신들을 가르치는 개군주가 되었다. 정조 이에는 세도정치의 발로 왕권은 쇠 고 경연은 유명무실져 결국 치욕의 망 국을 맞게 되었다. 중국 청나라 강제(1654-1722)는 유 (儒學)을 제대로 배워 비록 만주족이지만 유 으로써 족의 정신세계를 지배는 능력 을 갖추고 영를 가장 많이 넓다. 그러면 서도 그는 매일 문무백관과 께 자리에서 림원 사들로부 경연을 수강다. 묘 백묘(黑猫白猫)론으로 중국을 개 개방 덩 샤오 이 지도부 진오 공산당 서기는 10여 년 동안 각계 전문가들로부 강을 받았다 다. 대 중국을 이끄는 장관인 각 부처 부장과 위원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에 서도 부국강병을 위 솔선수범며 열심 공부는 의지를 가지고 실천고 있으니 세 계 2대 강국이 된 것이며 미구에 세계를 제 가능성 또 충분다. 권력자의 위는 그것이 작위(作爲)든 부작 위(不作爲)든 국가와 국민에게 나 영을 미친다. 조선왕조 시대 신는 어전에서 생 사여권을 가진 국왕에게 부당 것은 “아 니 되옵니다”라고 당당게 왕권에 맞서 논 쟁다가 떳떳게 사임거나 때론 장렬 죽음도 당다. 그런데 오늘날 같은 대명천 지(大明天地)에 국의 권력 심부를 중심으 로 일어난 접 정 질서문란과 비선 실 세들의 국정농단(壟斷) 비리를 공적 시스에 서는 이를 예방거나 제지지 못고 오 려 공조거나 방조 엄청난 국민의 분노와 저에 직면다. 국민은 심 정신적 공 을 겪고 국격은 심게 추락으며 그동안 땀으로 이뤄 놓은 국의 민주주의가 고 있는 실을 쓰라리게 경고 있다. 이는 구말, 일제강점, 전쟁, 정치적 란기 등 질곡의 역사를 겪어 오면서 전과 도의 는 무너지고 올바른 정치문가 정립되지 않 은 상에서 기본적인 국정 철과 사명감을 갖지 못 나머지 법치정에 대 무능과 불무치(不通無恥)의 결과라 겠다.


30 李花 261 우리는 조선 열성조(列聖朝) 시대의 륭 유산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이어 받아 발전 시지 못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니 옛 것을 본받아서 새 것을 창조야 다. 정치, 기업 등 사 지도층에 나서려면 철저 절차마(切磋琢磨)고 수신제가(修身齊 家)여야 다. 옥돌은 갈고 닦아야 빛이 나 니 자신을 수양야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 이다. 서연 제도를 계승 발전시켜 어렸을 때 부 지나친 경쟁을 지양고 민주사 질서 에 맞는 도리와 인성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 을 양는 교육신에 치중야 다. 인 간은 정실과 유에 들리기 쉽다. 무릇 공 직자는 공복(公僕)으로서 오직 국리민복을 위 공사(公私)를 엄격 구분고 명 법 치정을 구야 다. 경연 제도를 대 적으로 법제여 대령을 국의 원 등 고위공직자들은 사전에 엄격 검증절 차를 거쳐 선임되, 선임된 뒤에도 이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강론과 연찬(硏鑽)을 치도(治道)와 공직자로서 성을 갖춘 리더십 을 양성야 다. 촛불 민심은 성숙 시민 의식의 발로이며 민주공국으로서 발전가능 성을 보여준 세계사적 수범 사례이다. 이제 대민국은 조선을 고 민주복지사 로 새롭게 어나 정의롭고 성실게 노력 는 사람만이 대접받는 세상이 구되기를 국 민들은 갈망고 있다. <종 / 령대군 20대손> 왕 릉 소 식 ◇ 구리 동구릉 ․ 남양주 릉과 유릉 세계유산 조선 왕릉의 가치 상과 성숙 관람문 성 및 질서 보를 위 2017년 1월 1일부 돗자리와 음식물 반입을 금지다. ◇ 고양 서삼릉 릉 및 예릉 재 고양 서삼릉은 문유산의 보존․관리를 위 릉 정자각 및 예릉 정자각과 비각을 보수공사고 있다. 또 예릉 곡장 보수공사는 오는 2월 말까지 예정되어 있으므로 일 부 관람구역의 출입이 제된다. ◇ 여주 세종대왕 영릉 세종전에 전시되어 있던 유물들을 재 건립중인 세종대왕역사문관으로 옮김에 따라 세종전의 관람을 중지다. 세종대왕역사문관은 2017년 5월에 개관 예정이다.


李花 261 31 사람의 놀이인가, 귀신의 연인가. 1464 년 1월 4일 깊은 밤. 양 백성들은 성 을 뜨린다. 일부는 넋을 놓았다. 붉은 불꽃 이 밤늘을 수놓았고, 얀 불꽃이 별을 치솟았다. 경복궁 위의 창공에서는 무수 불꽃이 산며 긴 꼬리를 늘어뜨렸다. 별 빛나는 밤, 불꽃 연으로 왕궁과 도성은 아름답게 취갔다. 경복궁 밤늘이 꽃 보 다 려 불꽃쇼가 창일 때 북악산 정상 에서는 소 로켓가 굉음을 내며 어둠속으 로 거 사라졌다. 조선 백성들은 보지도 못 , 듣지도 못 ‘듣보잡’ 로켓 경에 빠졌다. 이 사는 세조가 즉위 10년째 마련 최 첨단 무기 발다. 밤늘에 밝은 불빛을 밝듯, 강대국으로 진는 조선의 을 과시 무대였다. 세조는 불꽃놀이를 작은 조선을 넘어 조선을 대내외에 알리 고 싶어 다. 이 세조의 야심 찬 불꽃 로젝다. 나라는 으로 유지된다. 신생국 조선의 왕들은 군사력 강에 심을 기울였다. 군 사력 신장은 신무기 개발이 심이다. 당시 첨단무기 제조 능력의 결정체는 약 기술력 이었다. 약 기술력은 불꽃놀이로 구됐다. 조선의 왕들이 불꽃놀이에 극 신경을 쓴 이유다. 왕들은 불꽃놀이를 단순 놀이가 아닌 치 위로 보았다. 백성들에게는 밤 늘에 불꽃을 수놓아 왕의 위엄을 알리고, 가상 적국 사신들에게는 조선의 군사력을 과 시다. 세조는 불꽃놀이 축제에서 조선사, 민족 조선의 왕, 놀이와 만나다(11) 세조, 소 로켓를 쏘다 이상주(李相周) 본원 문부위원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북극성의 거룩 를 받은 임금은 늘을 대신 땅과 사람을 다스리는 존재다. 천의 지는 왕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의 백성은 왕의 신가 아닌 경우가 없다. 왕 은 온 세상을 쥐락락 는 권력을 쥔만 업무도 과중다. 지위에 따른 역을 야 다. 왕은 버거운 업무에 지치고, 사람 관계에 스레스를 받았다. 이때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중 나가 놀이다. 조선 왕들의 놀이에 얽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집자 주>


32 李花 261 사 최초로 소 로켓를 개발 선보였다. 로켓 발사 성공은 명나라, 일본, 여진, 유 구의 약 기술을 뛰어넘는 최첨단 기술력 보유를 의미다. 로켓 발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축였고, 내치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더 인정받는 위엄 이었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를 쓴 미르치아 엘리 아데는 “아득 높은 늘에서 떨어진 운석 은 천상의 신성성이 있다”고 다. 옛 백성이 볼 때 운석은 별똥이고, 늘의 메시지다. 밤 늘의 별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늘은 때론 벼락불을 내린다. 백성은 늘이 내린 불꽃에 복종다. 그런데 세조는 불꽃을 만들어 늘로 쏘았 다. 최첨단 로켓를 늘로 쏘았다. 지상에 서 천상으로 불꽃을 쏜 세조는 조선 백성에 게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인에게 범접 수 없 는 위엄 군주가 아닐 수 없다. 임금은 불꽃 놀이를 국내외에서 절대자로서의 입지 를 꾀고, 성공 것이다. 세계 수준의 력과 불꽃놀이 조선초의 불꽃놀이 수준은 세계 정상급이 었다. 약 성능이 세계 수준인 덕분이다. 정 종 1년(1399)에 불꽃놀이를 본 일본 사신들 은 ‘사람의 이 아닌 천신(天神)의 조’라고 정도로 조선의 약 제조력은 뛰어났 다. 종은 불꽃놀이 때 약을 2배로 사용 게 다. 명나라 사신들은 음이 도성을 들고 염이 늘에 치솟자 ‘본국에서도 본적이 없는 기이 장면’이라며 낯빛이 변 다. 세종 때는 명실공 약기술이 명나 라를 제쳤다. 각국의 첩자들이 동는 가 운데 기술력 유출 염려 상에까지 이르렀다. 예조서 조는 세종 13년 10월에 임금 에게 중국 사신 앞에서는 첨단기술력을 시연 지 말 것을 상소다. 앞선 기술력 전수를 명나라가 요청면 거절기 든 실을 감 안 건의였다. 이에 명나라 사신 앞에서는 첨단 기술력의 약놀이를 자제다. 세조는 약기술을 더 발전시다. 마다 불꽃놀이에 깊은 관심을 명다. 8년 1월 2일 밤에는 경복궁에서 중전 등 왕실가족과 놀이를 관람다. 이 자리에 유구, 여진, 왜 사신들을 초청다. 열 에는 동생인 임영대군에게 불꽃놀이 발사대를 설치게 다. 다음 달에는 유구 사신으로부 불꽃 놀이 색깔 다변 기술력을 받아들인다. 놋 쇠가루와 녹나무[樟木] 기름을 기존 의 적색불꽃 외에 색불꽃을 개발다. 세조 10년(1464) 1월 4일 그동안 축적된 기술력을 새맞이 축제에서 맘껏 자랑다. 사는 랩으로 진됐다. 나는 경복 궁 원에서 예년처럼 상붕을 설치 축 를 발사다. 또 나는 북악산 정상에서 직 상(直上火)와 불살[火箭]을 쏘아 올렸다. 직상와 불살은 최신 개발인 소 로켓 이다. 최첨단 무기를 백성들과 외국 사신들 에게 공개 것이다. 양도성이 밝게 빛나 며 일대장관을 이뤘다. 거침없는 세조의 성 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였다. 사관은 그 장면을 다음처럼 기록다. “북악산의 꼭대기에 소 인 직상(直上火)를 설치 다. 저녁 일시(一時)에 께 쏘니 염(火焰)이 늘에 닿았다. 또 원에서 계속 불살인 전(火箭)을 쏘았다. 늘에서 천둥 과 벼락이 치고, 유성(流星)이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세조는 10년 12월 29일에도 여진인 21명, 일본인 3인을 입시게 뒤 경복궁 원과 북악산에서 일시에 를 쏘게 다. 천지


李花 261 33 가 진동는 소리에 왜인과 여진인 얼굴빛이 변며 두려워다. 세조가 북악산에 직상기를 설치 것은 나라 안위로 이 수 있다. 북악산은 국 의 산이다. 조는 2년(1393) 1월 21일 대사 성 유경의 건의에 따라 백악산을 신성 산, 국의 산으로 지정다. 4년(1395) 8월 28 일에는 백악산의 단에 제사를 올린다. 그 12월 29일에는 북악산에서는 경대부와 사서 인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다. 북악산 제 단에서는 국가적 사로 도성공사, 천재지변, 가뭄 등이 발생 때 제사를 지냈다. 세조는 국가의 안전을 기원는 신성 산에서 첨단 무기 발사를 것이다. 조와 세조, 중원을 꿈꾸다 세조는 무기를 개발여 국가 수의 산에 서 발사다. 이는 가슴속에 숨긴 중원 도모 대망의 은 아니었을까. 증조부로 조선 건국주인 조의 대망을 염두에 둔 동은 아니었을까. 세조는 9년(1463) 9월 8일, 사정전 양로연 에 종친과 문무대신 수십 명을 입시게 다. 이 자리에서 조의 시를 소개다. 引手攀藤上碧峯(인수반등상벽봉) / 一庵高掛斗牛中(일암고괘두우중)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 /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조선 건국주인 조가 잠저 시절, 삼각산 에 올라 지은 시다. 동구릉 입구의 비석에도 새겨진 시에는 조의 웅 기상이 담겨 있다. 중원으로 달려갈 연지기가 서려 있 다. 대어로 이면 다음과 같다. 거친 나무와 숲을 치며 르른 산 정상에 오르니 발아래 암자가 늘의 별 속에 잠긴 듯 은은네. 장차 눈높이로 우리의 땅으로 삼는다면 어찌 초나라 월나라 강남을 마다리요. 세조는 조의 시를 소개 뒤 문인들에게 답 글을 짓도록 다. 임금도 증조부인 조의 뜻을 받드는 격정의 어제시(御製詩)를 발다. 世界霧擁晦千峯(세계무옹천봉) / 淸風吹破大虛中(청취대중) 幾經燥濕風塵土(기경조습진) / 萬類乘光誰匿容(만류승광수닉용) 세계가 안개에 싸여/ 일천 봉우리가 컴컴더니 맑은 바람이 불어와/ 대(大虛)를 깨뜨리네 메마르고 축축 진의/ 을 몇 번이나 겪었는가만 온갖 물들이 빛을 받으면/ 그 누가 본 모습을 숨기리. 세조는 시에서 조의 중원 도모 의지 계 승 뜻을 다. 고난을 겪은 만백성에게 망이 될 것을 다짐다. 세조는 대신과 종 친들에게 조의 시를 상기게 다. 스스 로 시를 지어 대망을 밝다. 소 로켓를 개발 발사다. 일련의 동은 그저 우연 의 일치는 아닐 듯다. 에서의 계적 으로 움직임으로 보는 게 당다. 이는 세 조의 삶을 보면 이 수 있다. 세조는 문무(文武)에 두루 고 기개가 넘쳤다. 어릴 때 고승으로부 “아버지 인 종의 기상을 빼닮았다”는 가를 받은 임금은 13세에 군사련인 강무에 참여 사 슴 목에 살 7발 모두를 관 시는 능력 을 보였다. 16세 때 강무에서는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사냥다. 이 모습에 무사 이영 기는 “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다”고 감격 다. 이영기는 조를 수며 전 장을 다닌 무사다. 불꽃놀이는 조선왕실의 유다. 연말연시 에 유 성격이 있다. 또 군사력 과시 의 실성도 있다. 두 목적이 결된 축제에 서 세조는 로켓를 쏘았다. 또 성공시켰다. 세조에게 불꽃놀이, 로켓 발사는 단순 여 이 아닌 국운을 상승시는 놀이였 다. <세종 / 밀성군 19대손>


34 李花 261 1 조선왕조실록 「성종대왕실록」권62. 1475년 (성종 6) 12월 25일조에 보면 성종대왕께서 예조(禮曹)에 전지(傳旨)시기를 「어진이 [賢者]의 동을 보거든 그와 같아지기를 생 각[見賢思齊]1)고, 어질지 아니 자[不賢 者]의 동을 보거든 안으로 스스로를 되살 자신을 돌이켜 살은 본디 가지고 있는 마음의 떳떳 일 [見不賢內自省人情之常]이 라. 이제 내외의 모든 관청의 건물 벽에 《설 원》 2)에 나오는 〈6정(六正)〉과 〈6사(六 1) 견사재(見賢思齊) : 인(賢人)을 보고는 자기 도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이니, ․《논어집주 (論語集註)》이인(里仁) 제4에 보면 「見齊者冀己 亦有是善, 內自省者恐己亦有是惡」 ․《논어주소 (論語注疏)》에서도 「見彼賢則思與之齊等, 見彼 不賢則內自省察得無如彼人乎」라 였다. 2) 설원(說苑) : 옛 중국 (漢)나라 동중서(董仲 舒)와 사마천(司馬遷)의 뒤를 이은 경(經學), 문(文學) 목록(目錄學)의 자인 광록대부 (光祿大夫) 유(劉向, 기원전 77~기원전 6. 자 邪)〉의 글을 써서 게시여 관직에 있는 자 로 여금 경계여 이르고 격려여 쓸 바를 알게 라」셨다. 또 1483년(성종 14) 10월 13일조에서도 보면 승정원(承政院)에 전교시기를 「인군이 거울삼아 경계고 살 것은 「대보잠」(大寶 箴)3)보다 적절 것이 없고, 신가 경계 子政, 본명 更生, 漢高祖 劉邦의 아우인 楚元 王 劉交의 4세손)이 지은 책으로 전본(現傳 本) 20에는 선진(先秦)시대로부 서(西漢)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사사(史事), 유문(遺文), 일사(軼事), 전설 등 주지(主旨)에 따라 이루어 졌다. 3) 대보잠(大寶箴) : 옛 중국의 당(唐)나라 제2대 종(太宗: 李世民) 즉위시 쟁신(諍臣) 장온고 (張蘊古)가 중서성(中書省)에 재직고 있을 때 규감(規鑑)으로써 지은 글인데, 모든 (篇)이 운자(韻字)를 써서 지은 압운(押韻)으로 되어 있으며, 《당문수(唐文粹)》와 《고문 진보집(古 文眞寶後集)》 등에도 실려 있다. 그의 말이 위 곡(委曲)여 감계(鑑戒)로 삼을 만니 이에 의면, 「…저 반측(反側)는 자들을 안게 주시기를 봄의 볕과 가을의 이슬처럼 여, 「육정 ․ 육사(六正․ 六邪)」 그리고 「대보잠 · 대루원기(大寶箴․ 待漏院記)」에 대 소고(溯考) 이운(李雲珩) 서울시지원 고문


李花 261 35 고 살 것은 「대루원기」(待漏院記)4)보다 적 절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새겨서 걸게 였는데, 이제 또 내에게 엄 명을 내려 글 솜씨가 유능 자로 여금 그 뜻을 높고 (蕩蕩) 고, 고조(漢高祖)의 도량을 우시며, 온갖 일 어루만지기를 살얼음 밟듯 고 깊은 연못에 임 듯여, 전전(戰 戰)고 율률(慄慄)여 주문왕(周文王)의 소심 (小心)을 쓰소서. (安彼反側如春陽秋露巍巍蕩蕩 恢漢高大度撫玆庶事如履臨深戰戰慄慄用周文小 心)… 사람을 부리되 진심으로써 며, 말을 응 되 실로써 여, 정치의 대체를 괄고 응대는 말[詞令]을 억양(抑揚)소서. (使人以 心應言以行 包括治體抑揚詞令)…간쟁는 신 가 곧음을 맡았기에 감 전의(前疑: 임금의 앞 에서 모시고 있는 疑라는 官名)에게 아뢰옵니 다.」였다. 4) 대루원기(待漏院記) : 「대루원」은 아침에 대궐 로 출사(出仕)는 관원들이 대궐문 열리기까지 입조(入朝)시간을 기다리는 곳으로 경복궁(景福 宮)의 경우 영추문(迎秋門) 밖에 있었다. 이 「 대루원기」는 옛 중국의 송(宋)나라 왕우칭(王禹 偁,954~1001)이 지은 기문(記文)이다. 과거의 재상들이 국정에 관여 언급 이야기를 쓴 것으로 집정자(執政者)의 귀감이 되는 글이니, 이에 의면 「…인(賢人)이 초야에 있거든 내 장차 그를 등용 것이며, 간신이 조정에 있거 든 내 장차 그를 배척 것이며, 육기[六氣:陰・ 陽・風・雨・暗・明]가 지 못여 재앙이 거듭 되거든 자리를 여 기도 것을 청며, 오 [五刑:墨刑・劓刑・刖(剕刑・宮刑・大辟)]을 아직 버리지 못여 속임수가 날로 생겨나거든 덕을 닦아 바로잡을 것을 야겠다. (賢人在野我將進 之侫臣在朝我將斥之 六氣不和灾眚荐至願避位 以禳之 五刑未措欺詐日生請修德以釐之)… 이는 일국의 정사와 만인의 생명이 재상(宰相)에게 달려있음을 알 수 있으니, 삼가 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뜯음도 없고 칭찬도 없으며, 떼 지어 나가고 떼 지어 물러나와 지위를 도둑 질여 차지고 구차 녹만 먹으며 인원수나 채우고 몸을 온전 는 자가 있으니, 이는 또 취 것이 없다. 재을 맡은 大理寺의 왕 우칭은 글을 지어 「대루원」의 벽에 써 붙이도 록 여 집정자(執政者)를 이르노라.(是知一 國之政萬人之命懸於宰相可不愼歟復有無毁無譽 旅進旅退竊位而苟祿備員而全身者亦無所取焉)」 였다. (板)에 새겨 선정전(宣政殿)에 달고, 친 ‘대 루원기’를 써서 내리니 전문(殿門)밖 승정원 (承政院) 벽에 또 게시여 읽게 라.」 셨다. 이외에도 소고(溯考) 기록 근거를 제시 여 보면 「연산군일기」권 54. 1504년(연산군 10) 6월 1일조에서 임금(燕山君主)이 정원(政 院)에 전교기를 「대저 사람의 문이 비록 넓을 지라도 일을 는 데에는 그렇지 못 것은 곧 천성(天性) 때문이다. 「대보잠(大 寶箴)」은 옛 사람이 임금을 경계기 위여 지은 것이라. 반드시 벽에 걸게 여 드나들 며 보고 반성게 였으나, 어찌 이렇게 서 그 성을 바꿀 자가 있으랴마는, 지금의 간사고 불충(不忠) 것은 물러가서는 뒷말 는 사람이니, 잠계(箴戒)를 지어서 모든 관 사(官司)에 걸고 드나들 적에 경계를 삼게 이 마땅다.」 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9월 1일)」이 에도 살볼 수 있다. 「중종대왕실록」권 86. 1537년(중종 32)에 종종대왕께서도 《설 원》의 〈신술(臣術)〉을 승정원에 내리면 서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대보잠」을 써서 내전(內殿)에 걸어놓고, 「대루원기」를 써서 외전(外殿)에 걸어 놓았었는데, 이는 위‧아래 를 모두 경계시기 위서였다. 《설원》을 보니 관직에 있는 자에게 ‘6정’ 과 ‘6사’가 있다고 는데 그 말이 매우 좋았 다. 「근래의 일5)을 가지고 볼 때 더욱 깊고 5) 왕 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의 序 1 孝惠公 主 부마 延城尉 金禧의 아버지 김안로가 권신 (權臣)으로서 정권을 장악자, 1527년(중종 22) 3월 동궁(東宮: 仁宗大王)을 저주는 「작 서(灼鼠)의 변(變)」이 일고, 경빈박씨(敬嬪朴氏) 가 의를 받고 그의 소생인 복성군 미(福城君 嵋)와 께 귀양감에 예조서로서 앞장서


36 李花 261 절실다. 그러니 그것을 다시 새겨 「대루 원기」와 께 걸어놓고 경계는 도리를 보 존게 라.」 셨음을 살 수 있다. 또 속의 교(敎化)를 위 3조(三朝: 仁祖‧孝宗‧顯宗)의 원로(元老) 침신(忱臣)인 백 (白軒) 이경석(李景奭:定宗王子 덕천군( 厚生) 6대손) 어른도 1660년(종 1) 9월 15 일 올린 상서(上書)에서도 「《설원》의 〈6정〉과 〈6사〉 그리고 서(漢書)의 자사6조목(刺史 六條目)6)을 고사(故事)에 따라 경외(京外)의 대소 관아로 여금 각각 1씩을 베껴 여러 청사벽에 붙이도록 소서.」 셨다. 1645년 (인조 23) 우의정으로 계실 때에도 임금[仁 祖大王]께 상서 바도 있으니, 이는 그 당 세(當世)의 속을 교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 이보다 더 간명고 심적인 조이 없다고 생각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1533년(중종 28) 사사(賜死)케 였다. 그 정권을 장악 김안로는 그 좌의정 벼슬에 이르러서도 누차 옥사를 일으켜서 대사 景憲 公 섬(洪暹)・사간 文元公 이언적(李彦迪)・좌 의정 文憲公 이(李荇)・영의정 文翼公 정광 (鄭光弼) 등을 귀양보내도록 앞장섰으나, 결국 자신도 537년(중종 32) 10월 「정유 3」(丁酉 三兇:金安老・許沆・蔡無擇)으로 유배되어 사사 되었다. 그리고 문정왕(文定王后)의 오빠 윤원로・동생 윤원 제도 지나치게 무모 세도를 부리다가 조카 윤춘년의 상소와 으 로 말미암아 복잡게 얽 내력으로 귀양・처 되었다. 6) 자사6조목(刺史六條目) : 옛 중국 전(前漢) 나 라 7대 무제(武帝: 재위:기원전 141~기원전 87) 때 자사(刺史)가 지방・고을을 돌며 치정(治政) 을 살는데 있어 중점적으로 다루던 6개 조 을 말다. ① (土豪)들의 위법위와 약소 민에 대 . ②관료(官僚)들의 색(討索) 질. ③의옥적체(疑獄積滯)와 상(賞刑)의 남용 (濫用). ④견(偏見)에 의 인사정. ⑤관료 자제들의 청(請託)위. ⑥뇌물(賂物) 수수(授 受)위. 좀 더 옛 기록을 살 보건데, 1452년 (문종 2) 2월 20일 년체로 찬된 《고려 사절요(高麗史節要)》에 보면 제2권 고려 성 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9년인 990년 가을 7월조에 벼슬 우보궐(右補闕) 김심언(金審言) 이 「유(劉向)의 《설원》 〈6정6사설〉과 나라의 〈자사6조정(刺史六條政)을 온 나 라에 반여 알리고, 관청의 벽에 이를 써 서 근계로 삼기를 청옵니다.」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또 제4권 고려 덕종경강대왕(德宗敬康大 王) 3년인 1034년 여름 4월조에도 보면 벼 슬 동지중추원사 최충(崔沖)7)도 《설원》 〈6정〉과 〈6사〉의 글과 나라 〈자사6 조령〉을 안의 모든 청사의 벽에 써서 게 첨여 벼슬에 있는 사람으로 여금 조심 고 격려 바를 알게 도록 아뢰어 시 록 였다. 「숙종대왕실록」 권1, 1675년(숙종 1) 12월 18일조에 숙종대왕의 명에 의 교서관에서 간된 《정관정요(貞觀政要》8)에서도 보면 7) 최충(崔沖):[984(고려성종 3)~1068(고려문종 22)] : 자 浩然, 惺齋, 月圃, 放晦齎, 시 文憲, 본관 大寧, 1005년(고려목종 8) 갑과에 장원급제고, 1053년(고려 문종 7) 벼슬 중서 령(中書令)으로 관 로는 진양성에 여생 을 보내고, 도들을 9재(齋)로 나누어 문 12 공도(文憲十二公徒)를 배출였으며, 당시 동 공자(海東孔子)라 불렸다. 8) 정관정요(貞觀政要) : 중국 당(唐)나라 2대 임금 太宗[李世民:재위 626-649]과 신들과의 정치 상의 의론을 10권 40으로 분류여 기록 당나라 오긍(吳兢)이 찬 정치서로 ‘리더십’ 의 비밀을 낱낱이 친 역대 치자들의 제 왕(帝王學) 교과서이다. 23년간 이어진 정관 (貞觀)의 치(治)는 실로 「바른 것(正)을 가리 며 백성에게 보여줌(觀)을 뜻」이니, 위민이본 (爲民以本) 정신으로 군림는 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두려워는 군(賢君)으로서의 모습이 배어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역과(譯科)・몽(蒙


李花 261 37 중국 당나라 종 14년(640년: 신라선덕 9, 고구려 영류 23, 백제 무왕 41)에 진첨사 위징(魏徵)9)이 《설원》의 〈6정론(六正論)〉 과 〈6사론(六邪論)을 문장으로 올리면서 관 리를 선발 때 「〈6정>을 모범삼아 살시 고, 〈6사〉를 참고여 경계소서. 그의 재 능에 따라 취며, 그의 능력을 살서 임용 여 장점을 쓰고, 단점을 덮어주며 6정(六 正:6가지 바른 것)을 승진시고 6사(六 邪:6가지 사악 것)를 경계시면 엄 격게 지 않아도 스스로 쓸 것이고 권 장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 것입니다.」(審 其能以在之 用其所長揜其所短 進之以六正戒 之以六邪則不嚴而自勵不勸而自勉矣)라 상서 (上疏)니, 당(唐)나라 2대 임금 종(재 위:626-649)으로부 칭찬 받았다는 기록도 전다. 이 책자 《설원》이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으로 수용되었는지는 인 수 없으나 이미 살본 바와 같이 기록상 살볼 수 있는 것 은 고려 제6대 임금 성종문의대왕(재위: 982 學)・사자(寫字)의 교본으로 씌여져 1675년(숙종 1) 교서관(校書館)에서 간 일도 있다. 9) 위징(魏徵) : 중국 당(唐)나라 곡성(曲城) 사람으 로 자는 玄成, 시 文貞이니, 高祖(李淵, 재위 618~626)때 벼슬 비서승(秘書丞)이 되고, 2대 太宗(李世民)때는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 검 교시중(檢校侍中)이 되어 명리(明吏)라 불렸다. 위징이 서거니, 임금 종은 「짐(朕)은 일감 (一鑑)을 잊었노라」 였다 다. 위징이 종임금에게 간(諫)기를 「, 원컨대 신으 로 여금 충신(忠臣)이 되게 지 마시고 양신 (良臣)이 되게 옵소서」였다 니, 이 말은 명언(名言)가운데에서도 명언이다. 국조방목(國 朝榜目: 우리나라 文科第考 ・ 登科摠目)에 의 면 1605년(선조 38) 6월 28일 실시 정시(庭 試)에서 「옛 중국 당나라 太宗이 魏徵의 쓰러 진 비(碑)를 다시 세우도록 조칙」(唐太宗復 立魏徵踣碑詔)를 시제(試題)로 출제된 바도 있 다. 년~997년간)때 이미 《설원》은 국가 공공 기관에 지켜야 강령(綱領)으로 제시될 만 보적으로 읽음을 알 수 있다. 2 우리나라 역대 문에서 《설원》이 언급 되는 가장 대적인 사례는 치이념의 제시 로서 국가적으로 게시거나 은 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책자 《설원》에는 어떠 체 제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그 개관(槪觀) 이나마 단적으로 살보고자 다. 《설원》 권1 「군도(君道)」에서는 인군 [웃사람] 노릇는 도리로서 애민(愛民)‧경천 (敬天) 사상으로 ‘인군의 도’(人君之道)와 ‘인 군의 일’(人君之事)를 제시다. 「인군[웃사 람] 노릇는 도리는 정치를 간결고 번거 롭지 않게 백성[아랫사람]을 널리 사랑는 데 쓰고, 어진이를 뽑아 맡기는 일을 서두 르며, 귀와 눈을 넓게 열어 만방의 일을 살 야 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속에 단단 빠지지 않고 측근에 얽매이지 않으며, 마 음을 짝 열어 멀리까지 내다보고 우뚝게 자신의 주장을 세워야다」, 「인군[웃사람] 노릇는 일은 약이 되는 말에 있어 반드시 자기가 듣고, 반드시 자기가 이고, 반드 시 자기가 선고, 반드시 자기가 취고, 반드시 자기가 모으고, 반드시 자기가 보존 고, 반드시 자기가 실야다」고 지켜 야 조목으로 강조였다. 그리고 권2 「신술(臣術)」에서는 신[아 랫사람] 노릇는 방법에 대서는 순자(荀 子)의 《신도(臣道)》에서 영을 받아 나라 에 유익고 보조는 도리와 사상을 가지


38 李花 261 고, 어진 이를 천거[進賢]며, 명 이에 게 양보[讓賢]는 덕이 중요을 제시고, 아울러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지켜 ‘순’(順) 과 ‘유’(柔) ․ ‘충’(忠)과 ‘난’(亂)의 준, 그리고 ‘간’(諫) ․ ‘쟁’(諍) ․ ‘보’(輔)․(弼)의 준칙을 명 다. 인신의 술(人臣之術)로서 신[아 랫사람] 노릇는 위의 방법으로 지켜야 여섯 가지 바른 길 「6정」(六正) 곧 성 (聖:聖臣) ․ 양(良:良臣) ․ 충(忠:忠臣) ․ 지(智:智 臣) ․ 정(貞:貞臣) ․ 직(直:直臣)을, 그리고 지 말아야 여섯 가지 사악 길 「6사」 (六邪) 곧 구(具:具臣) ․ 유(諛:諛臣) ․ 간(姦:姦 臣) ․ 참(讒:讒臣) ․ 적(賊:賊臣) ․ 망국(亡國:亡國 臣)을 들어 「6정」을 면 영롭게[行六 正則榮] 되고, 「6사」를 범면 치욕스럽게 [犯六邪則辱] 되어 영와 치욕은 복과 재 앙이 오는 문이라 였다. ‘신’(賢臣), 어진 신[아랫사람]는 「‘6정’의 도리로 처신여 ‘6사’의 나쁜 방법은 시지 않는다. 그렇 게 여 위의 인군[웃사람]은 안고 백성 [아랫사람]은 잘 다스려져서, 살아서는 백성 들이 즐거워는 것을 보고, 죽어서는 백성 [아랫사람]들이 사모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신[아랫사람] 노릇는 방법이 다」라고 였다. 3 2천년도 넘는 옛 중국의 전(前漢) 시대 [고조 유방 기원전 202-제15대 유자영기원 8(210년간)]의 전적(典籍)을 교감(校勘) 고 정리여 인군[웃사람] 노릇는 도리 곧 ‘군도’(君道)와 신[아랫사람] 노릇는 방법 곧 ‘신술’(臣術)에 대여 「유」(劉向:기원 전 77~기원전 6)의 《설원》에서나마 기술 된 바에 의여 살보았다. 21세기 컴 인넷에 단순 옅은 지식의 전달에만 익숙 세의 우리에게 시사는 바가 게 가 슴에 와 닿음은 나만의 생각일까? 왜냐면 금언(金言)으로 삼을만 명구(名 句)들이 빼곡게 씌어있는 《설원》을 읽어 나가다 보면 에서 밥값, 몸값을 챙겨볼 여유도 갖고 있지 않고, 오로지 ‘도리 재기’ 식의 철밥으로 ‘우물안 개구리’들의 아귀다 말장난으로서의 쓸모없는 불(不 通)으로 올곧은 ‘삶의 깊이’도 천금으로 챙기 지 못면서 자기 위주만에 ‘얼뱅이’가 빙 (憑河)에 잠긴 듯 보잘 것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지껄임질 보다는 멀고 고리분게만 느껴질지는 모른다. 지만 유가(儒家)의 정 (正)과 사(邪)가 분별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격을 지과 동시에 인성윤리와 정치이 념들이 어느새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여 전 살아있는 의미를 지니고 다가선다. 결 코 낡은 이론으로만 치사스럽지만은 않기 때 문일 것이다. <성종 / 완원군 17대손> 별원원 가입 안내 - 가입자격 : 종친 개인이나 종 단체 - 원전 : 종보인 ‘이보’를 생 구독 수 있고, 종약원에서 실시는 각종 제 안내를 우선 드립니다. - 가 입 비 : 200,000원 이상 - 연 비 : 연 30,000원 이상 (가입 당연도는 연비 면제) - 가입문의 : (02)765-2124 종약원 조직부


李花 261 39 1. 서언 이심원(李深源;1454~1504)의 본관은 전주 이며, 자는 백연(伯淵), 는 성광(醒狂), 묵재 (默齋) 또는 진일(太平眞逸), 시는 문충 (文忠)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성리자다. 아버지 성군 위(偉)와 어머니 인천 채씨 사 이에서 장남으로 1454년에 출생다. 어머니 는 부사 신보(申保)의 딸이다. 조부는 보성군 (峇), 증조는 세종대왕의 령대군이다. 13세 때 두 살 위인 진 안씨 령 안근(安 瑾)의 따님과 결여 슬에 3남 5녀를 두 었다. 장남은 유령(幼寧), 차남은 유반(幼槃), 삼남은 유정(幼靖)이다. 장녀는 군수 송세충 (宋世忠), 차녀는 좌상 유부(柳溥), 3녀는 신 연(申挻), 4녀는 린(許麟), 5녀는 생원 덕 준(洪德濬)에게 출가를 다. 이심원은 갑자사 때 두 아들과 께 참 를 당으나 손자 이돈복(李敦復)은 나이 어린 덕에 살아남아 에 곡산군수를 역임 다. 이심원은 점재 김종직의 문에서 성 리을 수다. 이심원은 성격이 엄정며 문에 정 였으며, 전 다섯 번이나 성종대왕에게 글 을 올려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논술였다. 고모부인 임사이 간사 것을 알고 임금에 게 상소여 귀양보내게 였으므로, 조부로 부 책망을 듣고 불손다 여 유배를 갔 다. 1487년 실시된 종친과시(宗親科試)에서 장원여 종실의 영재라 칭찬이 자자다. 정암 조광조는 이심원을 가리켜 대군자 (大賢君子)라 고, 충재 최숙생은 절의가 은 정몽주와 다를 바 없다고 였으며, 계 이은 유종종실(儒宗宗室)이라 고, 고종 제는 명류종영(名流宗英)이라 다. 저서로 성광유고가 있다. 올로 주계군 이심원과 아들 이유령이 능 지처사된 지 513년이 되는 다. 조광조는 이심원을 문묘에 배여야 다고 였으 나 뜻을 이루지 못다. 이심원의 생애를 간 략 조명 보고자 다. 령대군 증손 문충공 주계군 이심원 부자(父子) 정려 이덕래(李德來) 전북대교 명예교수 / 논산조정서원장 / 연산교 유도장


40 李花 261 2. 이심원 정려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동 천마산1길 7에는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정려(旌閭), 이심원의 사우인 경충사(景忠祠), 성군(枰 城君) 이위(李徫)의 사우인 경운사(景雲祠)가 있다. 경충사 외삼문 앞에는 묘정비가 있다. 묘정비는 1984년 충남 논산시 두마면 엄사 리 돌뿐이[石浦] 마을에서 두마면이 계룡시 로 승격됨에 따라 이곳으로 사우를 이전 때 세워진 것이고 묘정비 바로 뒤에 2015년 7월에 세워진 성군 이위의 기적비가 있다. 경운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경충사와 출입문 을 달리여 주계군과 성군의 단소가 있었 는데 2015년 담장을 물고 성군의 단을 옆으로 이전고 그 자리에 성군 사우인 경운사를 새로 건립다. 관리사인 숭모당 아래에는 기와담장 안에 막돌로 3단의 기단을 쌓은 위에 정려가 있 다. 정려는 원의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과 기둥 사이는 살로 처리되어 있다. 정려 안에는 충남문재자료 제338로 지정된 이 칸에 나씩 두 점 있다. 쪽 칸에 있는 은 ‘충신주계군심원지려 (忠臣朱溪君深源之閭)’이고, 다른 칸에는 그 의 아들 이유령에 대 ‘충신이정증이유령 지려(忠臣吏正贈吏判幼寧之閭)’ 이다. 이 들 은 이심원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에 내린 사액이다. 정려의 내부에는 명정 과 께 중수기 등 소 4개가 있다. 정려 옆에는 경충사 사적비가 있다. 당시 사당과 정려는 경기도 장단군 춘리 (浦春里 : 재는 DMZ 내) 묘소 앞에 있었다 다. 사당과 정려는 주계군이 능지처사된 다음 100여 년의 세월이 러 병자, 임진란 이 많은 손이 장단으로부 충청도 연산 두마면 엄사리 돌뿐이[石浦] 마을( 충 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리)로 이주를 므로 1846년(종 12)에 손들이 의여 조정 의 가를 받아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 산 돌뿐이 마을로 이전였다가 1984년 계 룡대 건설로 그 지역이 철거게 되어 위 치로 이전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려와 3. 이심원에 대 왕조실록 내용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심원에 관서 서술된 것은 150여건에 이른다. 《성종실록》, 《연 산군일기》, 《중종실록》, 《명종실록》, 《영 조실록》, 《고종실록》에 이심원의 기사가 있다. 4. 이심원의 단소 경춘사 경내에는 두 곳에 단소가 있다. 나는 경춘사 경내에 있고, 다른 나는 정려 아래에 있다. 경춘사 경내에 있는 단은 경운


李花 261 41 사가 건립되기 전까지 경충사와 출입문을 달 리여 성군과 주계군의 단소가 있었다. 그런데 2015년 7월 담장을 물고 성군의 단을 옆으로 이전고 그 자리에 성군의 사우인 경운사를 새로 건립다. 성군의 단은 1999년 수립되었고, 성광의 단은 2000 년도 수립되었다. 성군의 단비는 4각 받 침에 비신을 세워 그 위에 가첨석을 올렸고, 성광의 단비는 귀부 받침에 비신을 세워 그 위에 운용문 이수를 얹었다. 각 단비의 비문 은 다음과 같다. 朝조 鮮선 王왕 孫손 枰 城성 君군 配배 宜의 寧령 縣 夫부 人인 仁인 川천 蔡채 氏씨 之지 壇단 醒성 狂광 李이 先선 生생 壇단 位위 성군과 성광공 단비 정려 아래에는 이심원 아들 이유령, 손자 이돈복, 증손 이영서, 손 이 등 4기의 단이 있다. 이들 단비의 비문은 각각 다음과 같다. 吏이 曹조 正정 郞랑 贈증 吏이 曹조 判 書서 全전 州주 李이 幼 유 寧녕 之지 壇단 配배 贈증 貞정 夫부 人인 河 東동 鄭정 氏씨 谷곡 山산 郡군 守수 全전 州주 李이 敦돈 復 복 之지 壇단 配배 令영 人인 平 澤 林 임 氏씨 吏이 曹조 正정 郞랑 全전 州주 李이 榮영 緖서 之지 壇단 配배 令영 人인 海 州주 吳오 氏씨 麻마 田전 郡군 守수 全전 州주 李이 平 亨 之지 壇단 配배 令영 人인 竹죽 山산 安안 氏씨 이유령, 이돈복, 이영서, 이 단(우로부) 5. 결어 이심원은 1454년(단종 2)에 출생여 1475년(성종 6) 주계부정(朱溪副正), 1485년 에 명선대부(明善大夫), 1487년 정의대부(正 義大夫), 1498년(연산 4) 주계정(朱溪正), 1504년(연산 10) 윤4월 28일 주계군(朱溪君) 이 되었다. 1478년 장단에 귀양가고, 1480 년 강원도 이천에 부처되었다가 1482년에 석방되었다. 1487년 종친과시에서 장원을 는 등 조선 초기 김굉, 정여창 등과 께 사림가 세력으로 등장는데 심적 역 을 다. 1504년(연산 10) 10월 1일 갑자사에 연 루되어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고, 두 아들도 죽음을 당다. 1506년 관작되었고, 1509년 복권되었다. 1517년(중종 12) 유림들의 계 (啓)에 의여 신원되었으며, 또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에 증였고, 무덤을 수는 군관을 두고 제사를 끊이지 않게 였다. 1775년(영조 51)에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내리고 별 도총관(都摠管)에 증직되었고, 1871년(고종 8)에 문충(文忠)의 시를 받았 으며, 고종 9년에 정1 록대부(興祿大夫) 로 증직되었다. 연산군의 악과 륜적인 동을 부추긴 간신 임사은 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 君)의 사위였다. 임사은 령대군의 손녀와


42 李花 261 인여 성군(豊城君)에 제수되었고, 장남 임광재(任光載)는 예종대왕의 딸 숙공주(顯 肅公主)에게 장가들어 천위(豊川尉)가 되 고, 막내 임숭재(任崇載)는 성종대왕 딸인 숙옹주(徽淑翁主)와 결여 원위(豊原尉) 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 력의 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차 남 임재(任熙載)는 김종직의 문에서 공부 다가 연산 10년 10월 28일 능지처사(陵遲 處死) 되었다. 임사은 그 아들이 살되던 날에도 일과 다름이 없이 그의 집에서 연 를 베어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였 다. 권력은 영원 것이 아닌 것! 연산조 때 늘을 찌를 정도로 막강 권력을 누렸던 임사도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루 아침에 땅으로 추락여 용사(勇士)에 의 쳐죽임을 당다고 실록은 기록고 있다. 이에 비 이심원은 문묘에 배되어야 다 고 상언될 정도로 사림의 거두로 등장 그 의 생애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조명 보았다. <조 / 익안대군 18대손> H ow to Nam e 이 동 우 성 명 전 서 - 전국 유명서점과 인넷 절찬리 매중 초 절으로 개정증보 발 - s령대군 15대손 東宇 s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서울시 지원 상임이사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서울시 서초구분원장(인릉봉 장) s서초구청 OK민원센장, 종민원실장, 서초2동장, 적계장 s국 역리사 검정관리 성명 시출제 위원장 KBS TV등에 160 출연 *채널A.TV.명랑결단에 박근, 노우, 김대중, 이승만 대령과 이병철, 이건, 구본무, 정몽구 장 등 이름이 출연 *명 신생아 작명, 개명, 아,상 *작명경력45년, 서초구청에서만 16년간 6,000여 명 작명 *서울시 작명의 달인 선발(2010년) *서초구민신문, 매일리스뉴스(논설위원) 이름설가 *(재)다산장재단 감사 *성균관대교 총동문 상임이사 기초수급자, 장애인 신생아 자녀 무료작명을 주며 일반인엔 유료명작명, 개명을. ◦수상 : 녹조근정장, 청백봉사상, 정부모범공무원상등 다수 ·이동우성명(작명 개명문의) 서울시 서초구 서운로 13 중앙로얄빌딩 1404 (양재역 1번 출구 서초구청 외교센 건너) H.P 010-2804-6438, 02)565-6438 카 : cafe.daum.net/name7(이동우성명 검색) 저자 이동우 낸곳: 솜미디어 정가 : 15,000원 개 정 증 보


李花 261 43 등록문재 제468, 명신여교 극기 · · 완문은 2010년 8월 24일 지정된 문 재이다. 대제국기에 제작된 명신여교( 숙명여자중고등교)가 개교 초기부 소장 였던 3점의 유물로써 교육사적인 가치가 다. 소유 및 관리자는 숙명여자고등교이 며, 숙명여자고등교 사료관에 있다. 1906년 5월 순귀비(純獻皇貴妃)가 설 립 명신여교가 개교 초기부 소장였 던 극기와 그리고 완문(증명서 또는 가문서)이다. 극기는 ‘明新女學校’라는 묵서와 께 건 곤감리 4괘와 극 문양을 정교게 새긴 에 물감을 바르고 명주 천에 찍어 제작 것 으로 묵서도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본을 떠 찍은 것으로 보인다. 괘는 검정, 극 문양은 붉은색과 란색이다. 대제국기나 일제강 점기의 극기들은 대부분 바느질을 서 만 들었지만, 이 극기는 물감을 사용여 날 염였다. 또, 4괘의 배치도 당시 제작된 극기들이 건괘와 곤괘를 대각선으로 마주보 게 던 것에 비 이 극기는 건괘와 이괘 를 마주보게 고 있어 이다. 당시로서 는 치 않았던 물감을 사용고 4괘의 배치 등록문재 제468에 깃든 대제국 순귀비 엄씨의 창의 정신 이세림(李世林) 이장 이사 명신여교 극기 명신여교 명 명신여교 완문


44 李花 261 가 이다는 점에서 극기 모양의 변천과 정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이다. 교육장에 서 발견된 최초의 극기라는 점에서도 역사 적 가치가 있다. 교 설립을 기념기 위 여 1906년 실에서 제작여 전달 것으 로 추정다. 극기 기는 가로 135cm, 세 로 105cm. 은 1906년부 사용던 것으로 나무 널 2매를 붙여 ‘明新女學校’라는 자를 양 각으로 새겼다. 조선시대 궁중 의 일반 적 양식처럼 가장자리 4곳에 액을 붙이고 초문(花草紋)과 운두문(雲頭紋)을 그려 넣 었다. 액 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면 보존상가 좋다. 기는 가 로 200cm, 세로 76cm. 완문은 1907년 5월 영친왕궁(英親王宮)이 명신여교에 발급 것으로 명신여교의 재정난 소와 운영자금을 마련 주기 위 도 신천·은율·재령·안악, 전라남도 완도, 경기도 주 등지의 지를 사다는 내용 의 공문서로 대제국기 실에서 근대교육 초창기에 설립된 교의 재정을 원음을 증명는 실문서이다. 완문의 경우, 대제 국 실이 교육 계몽 운동을 위여 명신여 교를 설립 및 원였다는 사실을 증명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다. 완문 기는 가 로 29.5cm, 세로 31.5cm. 순귀비와 창정신 순귀비(1854~1911)는 대제국 제 고종의 궁으로 본관은 영월(寧越)이며 1854년 1월 5일 서울에서 증 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어났다. 8세 때 입궐여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고 에 명성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을미 사변 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였고 1897년(고종 34) 자(皇子) 은 (垠)을 출산고 이 정식으로 귀인(貴 人)에 책봉되며 선영(善英)이라는 이름을 받 았다. 1900년(고종 37) 순빈(淳嬪)이 되고 1902년(고종 39)에 다시 귀비(皇貴妃)에 봉졌다. 지금으로부 120년 전, 병신년에 일어났 던 아관천은 친러인 이범진과 이완용이 공모여 경복궁에서 고종제와 순종제의 출을 실던 일이다. 거사 며칠 전부 그 당시 상궁이던 귀비는 가마를 고 궁 궐 출입을 자주다. 궁궐지기들에게는 나갈 때마다 몇 꾸러미의 (일종의 수고비)를 주었다. 궁궐을 지는 군인들은 처음에 경 계를 다가 의 맛에 빠져들어 귀비의 궁궐 출입에 대 아무런 반감이 없었다.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 가마 두 개 가 경복궁을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귀비가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 제가 몸을 숨겼다. 뒤의 가마에는 다른 궁녀 가 가마문 앞에 버고 앉았고 순종제가 또 바짝 뒤에 숨어 있었다. 신무문을 과 두 개의 가마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러시 아 공사관에 도착다.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을 비롯 친 러 대신들이 인천에 정박 있던 러시아 선에서 그 전날 미리 출동시 수군 120 명의 군인들이 삼엄 경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귀비의 지모와 배짱이 아관천을 성공시 것이다. 귀비는 1897년 10월 영친왕을 낳았다.


李花 261 45 그때까지 상궁의 신분이었다. 1907년 8월 17일 고종제가 사가 없는 순종제의 자로 영친왕 이은(李垠)을 결 정였는데 이로부미가 자신이 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에 1907년 12월 일본 으로 유질(留質)로 데려갔다. 귀비는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교에서 고된 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 름을 보게 되었고 이를 보고 애 다가 먹던 떡이 급체기도 다고 다. 귀비는 1911년 장스에 걸려 고생 다가 결국 7월 20일 년 58세 일기로 덕수 궁(德壽宮) 내 즉조당(卽阼堂)에서 승였 다. 영친왕은 애게도 어머니인 귀비 승시 곁을 지지 못채 일본에 체류 중 이었다. 승 순종제가 사시격인 ‘순’ 이란 시를 내린다.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같은 8월에 안 장고 원(園號)를 영라고 였으며 영 원(永徽園)은 순귀비의 묘다. 지금의 서울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 원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1 지정 되었다. 릉(洪陵)은 원래 명성의 능이었다. 대대로 왕가의 묘지로 쓰이던 였으며 명성 가 안장된 릉이라 불렀다. 명성 의 능이였던 릉은 고종제 승 1919년 2월 16일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장 며 옮겼지만 여전 영원을 릉이란 이 름으로 불리기도 다. 재 영원 외에 숭인원(崇仁園)도 있다. 자와 자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사이 에서 1921년 8월에 어난 장자인 이진(李 晉)의 묘(墓號)다. 자 내외의 1922년 국을 방문 루 전인 이듬 5월에 의문의 죽음을 당자 순종제의 명으로 옛 릉인 지금의 숭인원에 묻 것이며 억울 죽음을 애석게 여긴 순종제의 배려였다. 1911년 순귀비가 승자 빈궁(殯宮) 은 덕전(興德殿)으로, 궁(魂宮)은 영복당 (永福堂)으로, 처음 명정을 쓰는 곳은 석어당 (昔御堂)으로 정였다. 귀비를 영원(永 徽園)에 예장 뒤 신주를 영복당에 모셨다 가, 1913년에 덕수궁 내 영복당이 있던 에 그 신주를 모시기 위 제사궁(祭祀宮)인 덕 안궁(德安宮)을 건립였다. 덕안궁은 1929 년 5월 29일 귀비의 신주를 오늘날의 위 치인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으로 옮겨 모신 뒤, 그 는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에서 일반인 에게 매매였다. 덕안궁의 이설로 궁정동의 제사궁은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 되었다. 1905년(광무 9) 2월 11일 순엄귀비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친척 엄주익(嚴柱益)에 의 양정의숙( 양정고등교)은 진명여 교·명신여교 보다 앞서 1905년(광무 9) 2 월 1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설립되었는데 경제과 법률을 가르친 남교였다. 엄주 익은 기울어 가고 있는 국운을 바로잡고 나 라를 융성게 는 길은 올바른 교육뿐이라 는 교육구국의 신념으로 교를 설립 초대 숙장(塾長)에 취임였다. 1907년에는 순 귀비로부 구실 재산과 내금으로 교의 재정을 지원받았으며 1908년 경제과 도 신설였다. 부친 엄진삼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부 엄


46 李花 261 진일의 아들이자 사촌남동생인 엄준원(嚴柱 益)이 부친의 양자가 되었으며 1906년 4월 엄준원에 의 진명여교로 설립였다. 엄 준원은 여성의 신교육을 목적으로 순귀 비로부 교지를 사받아 창성동에 여교 를 설립고 초대 교장에 취임였다. 기존의 사립 여교들이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교임에 반여 진명여교는 국인 에 의여 설립된 최초의 여교였다. 설립 당시 2년제 보과에 8∼15세의 여생 70 명이 입였으며, 1908년 제1 졸업생 10명을 배출였다. 1906년 5월 명신여교를 용동궁(당시 박 동)에 설립고 5월 22일 입식을 거으 며 1906년 7월 개교축연을 경복궁에서 개 최다. 1908년 4월 명신고등여교(明新高 等女學校)로 교명을 변경으며 같은 12 월 사립 명신고등여교로 재인가를 받았다. 1909년 5월 1일 숙명고등여교(淑明高等女 學校)로 교명을 변경다. “숙명고등여교에서 4월 5일에 졸업예식을 설다고 는 데 귀비 전께서 설연비(設宴費) 수백 을 사였다.” 대매일신보 1910년 3월 25일 잡보 란에 ‘숙명교 졸업’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소식이 다. 그리고 이 4월 12일 대매일신보는 계소식을 전면서 숙명고등여교의 제1 졸업식 내용을 상세게 보도고 있다. 여교의 첫 졸업생은 김수정, 김정, 김보 경, 이상정 등 4인이다. 졸업식을 축기 위 각계 인사들이 출연금을 기부기도 고 연과 공책 등 물을 기부다고 그 내 역을 세세 소개고 있다. 제1 졸업식을 거으며 기예과를 병설 다. 1911년 사립 숙명여자고등보교(淑 明女子高等普通學校, 숙명여자중교/ 숙 명여자고등교)로 교명을 변경으며 예과 는 4년제 숙명여자보교로 개 병설 다. 재단법인 숙명여자고등보교 설립 인 가를 받았다. 1912년 기예과 제1 졸업식을 거다. 1919년 전교생 약 200명이 독립운동에 참 가고 독립만세 시위로 이은, 조경민이 체되었다. 1921년 3월 독립만세운동을 계 고 숙녀(淑女會)를 발족다. 같은 11월 운동를 개최여 20여 가지의 경기 를 진다. 1922년 3월 28일 교명 앞에 사립을 쓰지 않기로 으며 같은 4월 보 교를 지고 입시을 실시다. 1928년 6월 15일 교우지 ‘영란보(鈴蘭學 報)’를 창간으며 1930년 잡지 인쇄 교지 ‘숙명(淑明)’을 발간다. 귀비의 위임을 받은 엄주익은 연령 11세 이상 25세 이의 사족(士族) 여성 20여 명 을 모집여 여교를 열었다. 양반가의 여 성만을 입 대상으로 초기에는 귀족여교 또는 족여교(華族女學校)라 불리기도 였다. 일본인 부인인 연(淵澤)ㆍ촌정(村井) ㆍ정출(井出) 등 3인과 국인 부인 김소사 등 4인의 여교사로 여금 생을 가르치게 는 기숙사를 설치여 가난 자에게 숙식을 제공면서 교육을 실시였다. 초기 교원은 정경부인인 이정숙(李貞淑)이 교장이 었고, 일본인 여자인 연승(淵澤勝惠)가 감 겸 주임교사, 촌정ㆍ정출ㆍ김소사 등 3 인이 교사로 있었다. 국문ㆍ습자ㆍ작문ㆍ 수신ㆍ일문(日文)ㆍ독서ㆍ산술ㆍ조(造花)ㆍ 물ㆍ음악ㆍ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순귀비는 대련선사(1875~1942)에게 고종 38년(1901) 원금으로 일만금을 주었


李花 261 47 는데 대련선사는 은암(海恩庵) 광전(海光 殿) 등을 신축였고 또 고종 43년(1906) 에도 거금 6천원을 사받아 인사 대장경 정장(釘裝)을 보수고 불경 1,400권을 간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면 서 빠진 책을 보충게 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교육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공 바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귀비가 승 이 오늘날 숙명여 자대교가 생기까지 과정을 살보면 숙명역사관에는 창 당시의 명신여교와 교명을 바꿔 발전 숙명여교, 그리고 최 초의 민족여성고등교육기관인 숙명여자전문 교 등 숙명여대의 발전사가 고스란 담겨 있다. 숙명역사관에서는 조선 말기부 대제국 무렵까지의 근·대사 유물도 다수 볼 수 있 다. 자비가 1943년 숙명여자전문교 수 석 졸업자에게 사 대제국 실문장 자 개을 비롯 대제국 실의 교육구국 이 념이 구된 ‘명신여교 극기’(등록문재 제468, 복제), 자 영친왕의 사규삼(조 선시대 남자 아이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됐음 을 나내는 의식인 관례 때 입는 예복)과 의례용 복식 등이 전시돼 있다. 순귀비가 승지 어느 덧 106주년 이 되었다. 그 당시 전국에 6개의 여교가 있었으나 전부 외국인 선교사에 의여 설립 되었고 우리 민족의 으로 여교를 설립 지 않은 것은 오랜 동안 내려온 유교문와 도 밀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다. 그런데 그러 경 속에서 이를 분연 떨쳐 버리고 과감 여교를 설립 순 귀비는 참으로 대단며 당시 여성교육의 요성을 절감고 직접 교를 설립 그 위 대을 생각수록 경과 존경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 순귀비가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고 58세에 승 것은 당시 실과 더불어 설립 여교를 위서 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숙명여자고등교 사료관에 있는 등록문 재 제468의 명신여교 극기··완문 에서 순귀비가 꿈꿨던 대제국의 백년 지대계의 망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다. 오죽면 교육이 ‘百年之大計’라고 겠는가! 순귀비로부 대제국 실에서 근대 교육 교 설립에 재정을 원음을 증명 는 실문서인 등록문재 완문과 실 재산 과 내금(內帑金)으로 교의 재정을 지원받 았다는 기록 내용을 되짚어보며 지금의 전주 이씨대동종약원의 장재단의 모가 되었다 고 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장사업에 순귀비처럼 대까지 양성을 위 이름을 남길 종친들의 장모금 이 많았으면 는 바람이다. 을 양성 기 위서는 교육이 그리고 교육을 위서는 장사업이 당연 조건이 되어야 다. 섭 이사장님의 취임 목인 이장금 배가 운동(倍加運動)에 전주이씨 500만명 종친의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원이 절실 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양성을 위 교육은 가정과 사 그리고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다. 그 미래에 대제국의 예인 전 주이씨 종친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정신을 이어서 순귀비가 을 세우던 그 시대를 다시 열었으면 다. <중종 / 덕양군 13대손>


48 李花 261 경기도 여주시분원 이친목(장 揆葉) 원은 2016년 10월 25일 수(泰洙) 분원 장을 비롯여 원 30여 명이 강원도 삼척 시 미로면 사전리 산53번지에 위치 영경 묘(永慶墓)를 성묘고 돌아왔다. 지난 8월에 창립 36주년을 맞이 여주이 친목원들은 원들과의 목과 친목을 돈독 기 위여 매년 가을 나들이를 왔다. 일가 간 목과 친목으로 분원발전에 도 많은 기여를 온 자랑스러운 이친목 다. 이번 나들이는 조상에 성묘고 가을단 을 즐기며 아기자기 목 결집을 위여 영경묘 이씨 머니 묘소를 찾았다. 묘소 앞 에 잘 조성된 주차장에서는 영경묘 상을 보기 위 모두 차에서 내렸다. 머니의 묘 소는 천의 미인이 네 개를 벌리고 반듯 이 누운 상이라고 전들은 이야기가 생각 나 그 상을 보기 위서였다. 여주에서 출발 때는 그렇게도 심게 비 가 내리더니, 영경묘에 도착니 비는 멈추 고 맑고 청명 가을 날씨를 보여주었다. 주차장 입구 감나무에는 노랗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를 반겨 주었다. 진입로 입구 안내은 묘소까지 200m라고 알려주었다. 묘까지 올라가는 가른 길은 곳곳이 이고 굴곡이 심였다. 올라가기가 무척 이 들어 자는 일 중 맨 마지막에 묘소까지 올라갔지만, 묘소 아래는 낭떠러지 여서 묘소전경 사진나 찍을 수 없는 가 른 산중에 모셔져 있는 머니 묘소가 치 근고 불쌍게 보였다. 이분 머니가 전주이씨 500만 손을 배 출게 머니라고 생각니 마음이 암담 고 쓸쓸 기분이 들었다. 이곳 주민 들은 준경묘 영경묘를 왕릉으로 알고 많이들 찾고 있다는데 올라가는 길은 이고 굴곡이 심데다 오르기조차 이 들고 고개 길은 영경묘(永慶墓)를 참배고!! 이보(李輔澤) 경기도지원 문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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