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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이화보, 2023-04-12 22:21:59

이화 259호

이화 259호

Keywords: 전주이씨,이화

宗 訓 崇 祖 惇 宗 차 례 2. 권두언 4. 본원 소식 12. 지원 · 분원 · 종 · 봉 소식 15. 조선시대 국왕의 실(4) 19. 꽃말을 가슴에 갈무리 날의 추억 ……………………………… 본원 문부 위원 이병준(李炳俊) 21. 비운의 단경왕(端敬王后)와 삼인대(三印臺) … 전북대교 명예교수 공박사/ 연산교 유도장 이덕래(李德來) 25.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 이강식(李康植) 28. 전전례인 집안[堂內] 복제(服制)를 살보며, 문제에 제언을 첨다 ……………………………… 본원 제2문이사 이승창(李承昌) 32. 문재 이모저모 34. 광복과 대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속에서 … 강원도지원 상임부지원장 / 명예기자 이종(李鍾泰) 39. 대제국 공사관의 역사적 무게 …………………………………………………… 북미주지원장 이내원 41. 국립중앙박물관 게시자료를 바로 잡은 소감 ……………………………………… 전성군종장 이성(李誠薰) 43. 서울 금천구분원 창립 20주년을 바라보며…. ……………………… 서울 금천구분원 자문위원 이중(李夏中) 45. 조선의 왕, 놀이와 만나다(9) ……………………………… 본원 문부위원 이상주(李相周) 49. 구단 궁우를 자세 알자 ……………………………… 본원 총무부차장 이수(李興秀) 51.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 길병원 원무과 이진우(李鎭宇) 53. 만로 보는 역사이야기 73 ………………………………………………………… 이전경(李田景) 55. 전에 관 기록 ……………………… 무림군종 문이사 이일(李豊一) 58. 2016 健元陵 親享禮 奉行委員會 64. 조경재 건립기금 모금 성자 명단 ▲ 2016 건 원 릉 친 례 2016 / 9 ·10월 격월간 李花 (권 259) 발인/이섭 집인/이범직·이승창 발처/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소/서울 종로구 돈문로 89 우번/03131 전/(02)765-2124 스/(02)742-1676 인쇄인/이관우 인쇄처/동아문사 전/(02)2267-2775 발/2016년 9월 1일 등록/1973년 12월 31일 이지(http://rfo.co.kr) 이메일([email protected]) 값 2,000원(1년 정기구독 10,000원)


2 李花 259 존경는 종친여러분 안녕십니까? 지난 3월 임원 개선 시, 전례담당 부이사장에 취임 정종대왕 제4왕자 선성군 17대손이며 시조 41세 윤중(允中)입니다. 지난여름 우리를 몹시도 들게 던 무더위도 시원 가을바람에 물러나는 절기입니다. 종친 여러분의 건강과 가정에 만복이 가득 시길 기원니다. 우리의 선조이신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제은 조선과 대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도 일부 중단 없이 봉되어 왔으나, 광복 란기와 6.25전쟁으로 인여 10여년 궐사(闕祀) 였습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1957년 5월 24일(음) 조고제 건원릉에서 첫 제을 모시고, 왕실의 모든 제을 복원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첫째로, 대제국이 1897년 천명(天命)을 국제사에 선 구단 대제는 일제가 구단 을 어 철도을 세워 제천의식이 중단되어 오다 2007년 우리 종약원이 구단 내 궁 우(皇穹宇)에 위를 복원여 봉안고 2008년부 매년 10월 12일에 고종제께서 거 셨던 자주 독립과 국민안을 기원는 구대제를 복원여 봉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의 제과 우리가 나아갈 길 이윤중(李允中) 본원 부이사장 권 두 언


李花 259 3 둘째로, 사적 125로 지정된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진 대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 져 있습니다. 종묘제례는 1975년 국가무문재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세계문유산으로 지정 되고,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문유산으로 선정되어 우리 문유산의 우수성과 독창 성을 국제사에 널리 알리게 되었으며, 종묘제례악과 께 세계적인 의례로 5월과 11월에 제을 봉고 있습니다. 셋째, 나라의 안녕과 농사의 요를 기원는 제으로 일제 강점기에 지되었던 사 직대제는 1988년 복원여 2000년 국가중요무문재로 지정되어 매년 9월에 봉고 있 습니다. 넷째, 조선 왕릉 제은 광복 제을 복원고 각 능마다 봉를 구성여 제을 봉고 있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오랜 전으로 2009년 유네스 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3년 신청 조선 왕릉 제의 국가무문재 지정 신청 은 더 많은 예제의 원을 요구고 있습니다. 예제 복원을 조선왕릉 제이 국가무문재 지정은 물론 국제 사에 널리 인정받 는 그 날을 위 노력야 되겠습니다. 조선 왕조의 제은 우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선과 대제국의 제을 받드는 소임을 맡아 책임을 다고 있으며, 조선의 왕과 을 사손으로 이어 조선왕조의 제에 대 무의 문 전을 계승는 제이 충 사상의 근간이라 생각 니다. 몇 년 전에 비 각 제에 참석 인원이 감소고 있습니다. 제에 많은 관심과 참반을 부드립니다. 500만 종친 여러분! 우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종(宗訓)이 숭조돈종(崇祖惇宗)입니다. 왕실의 예로 자긍심을 갖고 조상을 잘 받들고 종친 간에 돈목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 야 길입니다. 열성조의 음덕이 충만시고 절기에 건강시고 댁내 복이 가득 시기를 기원니다. 감사니다. <선성군 17대손>


4 李花 259 이달의 보 ◇ 건원릉친례 봉 ◇ 이장 소식 ◇ 본원 소식 ◇ 지원·분원·종 소식 ◇ 영광의 얼굴


李花 259 5 조 고 제 승 608주 기 2016년 健元陵親享禮 봉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건원릉 친례가 지난 6월 27일 월요일 정오, 문 재청 조선왕릉관리소가 주최고 본원이 주관 가운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 재 동구릉 내 건원릉 침전에서 봉됐다. 이번 제은 오전 11시 40분에 동구릉 정문-건원릉에 이르는 어가렬이 재 됐고, 정오부 건원릉 정자각에서 은(殷弘) 본원 전례이사의 집례에 따라 초 관 사손(皇嗣孫), 아관 승욱(韓昇煜) 안변씨종친장, 종관 응찬(應贊) 선성군종장이 각각 작다. 이날 제에는 종4기 교육생들이 생수 400병을 기증다. (제관명단 및 성자 명단 58면 참조)


6 李花 259 재단법인 이장 본원 소식 ◎ 의 안 ․ 2016년도 사직대제 임무․예산(안) 심의의 건 ◎ 기사 ․ 조경재(가칭) 업무 추진위원 구성의 건 본원은 7월 15일 금요일 오전 11시, 본원 강당 에서 2016년도 지원장 의를 개최다. 이날 에는 섭 이사장을 비롯여 본원 부이사장단과 각 지원에서 참석 주신 지원장이 참석여 종약 원의 운영 사과 진 사업을 전달고, 각 지원 과 조 업무에 대여 논의다. 본원은 7월 20일 수요일 오전 11시, 본원 강당 에서 2016년도 종장 의를 개최다. 이날 의는 섭 이사장을 비롯 본원 임원진과 60 개 종 장 등 80여 명이 참석 가운데 종 약원 운영 사을 보고고 재 진고 있는 조경재(가칭) 건립에 대 안내와 께 기금 모금 에 대 조를 당부다. 본원, 2016년도 종장 의 개최 본원, 2016년도 지원장 의 개최 장금 기 종친(2016. 6. 16 ~ 2016. 8. 31) 기일자 기자 금액 비고 8. 25 진(和鎭, 령 16) 20,000 제655 상임이사(2016. 7. 15)


李花 259 7 본원에서는 금년도 사업계에 의거, 8월 13일 요일 오전 10시 본원 강당에서 2016년 전수교 육 종9기 개강식을 가졌다. 이번 전수 교육은 문재보법 제41조 제2의 규정에 의여 “국 가무문재의 전수 및 보존을 위여 당 국가 무문재의 보유자가 그 보유 기능 또는 예능의 전수교육을 실시”에 따라 작년에 이어 이루어지 는 교육이다. 이날 개강식에는 지원, 종, 봉 의 추천을 받은 교육생과 종묘제례보존 원 등 88명의 수강생이 참석 가운데 본원 임 원진의 인사말에 이어 강의가 시작됐다. 이번 교육은 금년 12월 24일까지 19주 동안 매주 요일마다 오전 10시부 오 3시까지 매 5시간에 걸쳐 종묘·사직·구대제 및 왕릉 제 에 대여 교육을 받는다. 또 본원은 8월 13일 오 4시, 본원 강당에서 전수교육 수료자 및 전례위원을 대상으로 제3기 전문과정 교육을 개강다. 전문과정 교육은 2014년 집례 및 대축의 전문과정을 시작 으로 실시되어 재 70명의 수료생이 배출됐다. 금년에는 33명의 교육생이 창과 독축, 예 의사 교육을 실습과 장교육으로 받게 되며 11월 19일까지 14에 걸쳐 매주 요일 오 4시부 7시까지 진될 예정이다. 본원 전례부는 8월 10일 수요일 오전 11시 본원 상임이사실에서 윤중 전례담당 부이사장의 진으 로 은 전례이사, 기전 이사, 열 이사, 건웅 이 사, 우 이사와 위원 6인(상윤, 우, 동성, 재, 복용, 용), 강덕 사무총장이 참석 가운데 전례 부서 간담를 개최다. 이날 간담에서는 종 9기 전수교육 강의 요청 및 건의사을 대로 강의 방법을 시대에 맞게 개 선는 방을 권장고 창과 독축에 요 강의 시간 연장, 사가제례 시간을 보강는 방안을 논의다. 또 조선왕릉 제의 국가무문재 지정 신청이 문재위원 심의결과 부결됨에 따라 국가무문재 지정을 위 다수의 노력을 기울이고, 왕릉제 축식 일 부 변경에 대서는 매년 릉(洪陵) 제만 서기년을 사용고 다른 제은 축식 그대 로 사용을 전달다. 본원, 전수교육 종9기 개강 및 왕릉제(집례·대축) 전문과정(제3기) 개강 본원 전례부, 이사 및 위원 간담 개최


8 李花 259 전승종 6기(장 千柱)는 7월 2일 문사 의 일으로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공산성 일대에서 제3 역사문방 사를 가졌다. 전승교육 종6기는 원 간 친선도모와 역사 장 답사를 여 역사의식을 고취시기 위 여 매년 문사를 갖고 있는데 금년에도 3월 정 기총에서 예산승인을 받아 백제권 문방을 마로 잡고 진됐다. 충근 고문(령군 18대손)과 이복례, 김미경, 김옥란 여성원을 모시 고 부여 공산성에 도착 문설사의 설을 듣고 무령왕릉을 거쳐, 낙암, 고란사, 백 마강으로 이어지는 돗단배 선상유람을 즐기고, 삼국시대 사비성 백제왕궁을 재 백제 문단지에 도착여 사비궁, 사찰인 능사, 백제역사문관을 관람여 백제역사와 문를 느 껴보는 시간을 가졌다. <千柱 장> 경기도지원(지원장 琓善)은 7월 25일 오전 11시 수원 J.마리스 웨딩뷔에서 115명이 참석 가 운데 2016년 상반기 운영가보고를 개최다. 이 자리에서 새로이 선임된 승동(재정2부지원 장), 재(조직1부지원장), 기(조직2이사) 3명의 임원에게 선임지서를 수여으며, 2016년도 경 기도지원의 상반기 동상을 참석 관계자들에 게 보고를 드리고 경기도지원의 발전 방안에 대 발 론을 는 순으로 진을 다. <경기도지원 명예기자 이장덕> 경기 고양시분원은 7월 15일 금요일 정오, 싱 싱어에서 130명의 종친이 참석 가운데 2016년도 계단대를 개최다. <경기 고양시분원> 전승교육 종6기, 제3 역사문방 사 경기도지원, 2016년 상반기 운영가보고 개최 경기 고양시분원, 계단대 개최


李花 259 9 미국 시카고분원(분원장 완수)은 7월 17일, 미 국 글렌뷰 소재 블루스 메모리얼 우드에서 40여 명의 종친 및 가족들이 참석 가운데 여름 야유를 갖고 친목을 다졌다. <미국 시카고분원> 완창대군 안양군종(종장 敦模)는 4월 1일 전남 영암군 소면 선계리 소재 소사 사당에서 100여 명의 손이 모여 완창대군, 영성대군, 밀 양군, 천군, 안양군의 사를 봉다. 이날 사에는 종웅(鍾雄) 완창대군종장이 초관으로 봉무다. <대구광역시지원> 의군 칠원도정공 종중(장 錫洪)는 7 월 24일 오전 11시부 오 4시까지 경기도 송 추에 위치 종 사무실에서 의군 손 50여 명을 초대 가운데 돈종를 개최였다. 이번 사는 의군 보(2014년 갑오보)를 찬 봉였고, 선원(璿源)의 근본을 지며 숭조 돈종는 기을 진작시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이날 다른 문중에서 참석 분들의 봉심도 이루어졌다. <의군 칠원도정공종중> 진남군종(장 청수)는 최근 인넷 선원속보를 구축기 위 사업을 구고 동시에 이지(주소:www.jrjn.kr 전주이씨진남군종중)도 구축여 운영고 있다. 진남군종는 그동안 선원속보를 7차례(1864,1900,1929,1958,1975,1989,2004)에 걸쳐 책자로 발간으나, 책자가 없으면 볼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컴상에서 열람 수 있으 며, 변동사(출생, 사망)을 1년에 번씩 업그레이드 여 책자로 발 경우 제작기간을 미국 시카고분원, 여름야유 개최 완창대군 안양군종, 소사에서 사 봉 의군 칠원도정공종, 의군손 돈종 개최 진남군종, 이지 구축


10 李花 259 단축게 될 것으로 전망다. 또 이지도 구축여 종중소개, 뿌리구, 인넷 선원속보, 지종, 종중자료실, 열린마 당, 공지사, 게시 등을 운영면서 종에서 일어나는 사과 각종사 등 종친이면 누구나 쉽 게 접 수 있게 구축였다. <진남군종> 7.20 조경재 성금 기 (안창대군종) 7.27 조경재 성금 기 (이우철, 덕 16대손) 8.17 조경재 성금 기 (경기 고양시분원) 8.24 조경재 성금 기 (이정수 본원 이사) 7.8 ‘동광’ 기증 (이동명, 무림 19대손) 본원 방문 ■ 258 70면 8줄 봉안군 금림군 速系 → 봉안군 금림군 涑系로 바로 잡습니다. 바로 잡습니다


李花 259 11 동 정 용규(鎔奎, 덕천군 19대손) 본원 고문은 지난 7월 15일 경기문재단 대의실에서 경기도불천위문중의 초대 장에 추대되었다. 용규 고 문은 경기도불천위문중의를 조직여 불천위에 대 술세미나와 종가와 종손, 종부들에 대 연찬 등 다양 사를 진여 경기문 재단 산 조직기구로 구성겠다는 부를 밝다. 본원 섭 이사장의 부인 이자 여사가 8월 23일 일더케이경주에 서 열린 국YWCA 전국원대 자리에서 국 YWCA연가 수여 는 YWCA대상을 수상다. 이자 여사는 서울YWCA 국제친선부위원을 시작으로 지역YWCA출신 첫 국YWCA연 장을 역임고 국소 비자단체의 장을 역임다. 중근(重根, 완창대군 18대손, 부영그룹 장 겸 우정교육문재단 이사 장) 본원 부이사장은 8 24일 대상공의소에서 2016년 2기 외유 생 장금 수여식을 갖고 국내 대에 재중인 아시아, 아리카 출신 대생 100명에게 총 4억원의 장금을 전달다. 영광의 얼굴 의준(義俊, 경녕군 17대손) 종친은 1957년 생으로 8월 23일, 남대 교 대원에서 ‘교사의 습권과 교권에 대 인식이 자기능감에 미치는 영’이라는 논문으로 정 박사 위를 받았다. 의준 종친은 기아자동차 봉선지점에 근무중이며, 본원 청년부위원과 광주전남이 장을 역임다. 재 광주 남구분원 부분원장으로 종 사에 참여고 있다. <광주전남지원> 義俊 종친, 정 박사 위 취득 鎔奎 고문, 경기도불천위문중 장 추대 이자 여사, YWCA 대상 수상 重根 부이사장, 우정교육문재단에 장금 전달


12 李花 259 애(수춘군 17대손) 종친은 1982년 생으로 경원대교 장금으로 독 일로 유, 독일 DAAD 장금을 받아 인체, 설치미술분야를 전공며 개인전 4, 그룹전 7의 전시를 갖고 최근 독일ZONTA 미술상을 받 았다. 부친은 수춘군종 대의원으로 종사에 참여고 있는 영종 종 친이다. <수춘군종> 지원·분원 소식 지원․분원명 (지원․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진 서울 송구분원(泰鍾) 25 16.6.17(금) 16:30 진또배기 닭마리 6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1 서초구분원(周官) 29 16.6.21() 18:30 스스뷔 사이어룸 73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 東宇 신임 분원장 ◯2 부산 동구분원(康碩) 39 16.5.19(목) 18:30 성뷔 5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3 강서구분원(院宰) 26 16.5.29(일) 12:00 캐슬뷔 3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4 대전광역시지원(承鍾) 26 16.6.4() 11:00 구 충남도청 의실 9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5 서구분원(正來) 26 16.5.7() 11:00 생교육문센 60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6 동구분원(文濟) 26 16.5.20(금) 11:00 양순두부 53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7 유성구분원(殷奎) 39 16.5.24() 11:00 유성구 새마을금고 4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8 강원 천군분원(東一) 40 16.6.14() 11:00 낭천가든 2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9 전남 여수시분원(吉龍) 46 16.4.21(목) 10:30 국체육관 250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10 경북 경주시분원(起樂) 46 16.7.11(월) 12:00 계림정 22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 말문 신임 분원장 울진군분원(圭元) 39 16.7.23() 10:30 우촌 67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11 제봉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參班員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隆陵 莊祖懿皇帝 憲敬懿皇后 洪氏 4.9 정오 경기도 성시 안녕동 636 융릉봉 (장 起澤) 善徽 厚源 洪起春 揆錫 正鏞 景用 鎬昱 明承 載永 範春 宗林 贊浩 柱燁 光杓 ◯12 애 종친, 독일ZONTA 미술상 수상


李花 259 13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參班員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長陵 仁祖大王 仁烈王后 韓氏 6.17 정오 경기도 주시 갈리 210 장릉봉 (장 演柱) 海龜 讚鎬 韓東鶴 起鎔 趙源 均 炳學 寬周 商律 在鎬 性圭 明承 俊在 道宰 鎬昱 ◯13 寧陵 孝宗大王 仁宣王后 張氏 6.23 정오 경기도 여주시 왕대리 200 녕릉봉 (장 泰洙) 貞永 文基 張世益 晃周 相春 在珏 逸鏞 南揆 龜喜 敬喜 大盛 康仁 秉爀 揆和 ◯14 ◯1 서울 송구분원 ◯2 서울 서초구분원 ◯3 부산 동구분원 ◯4 부산 강서구분원 ◯5 대전광역시지원 ◯6 대전 서구분원


14 李花 259 ◯7 대전 동구분원 ◯8 대전 유성구분원 ◯9 강원 천군분원 ◯10 전남 여수시분원 ◯11 경북 울진군분원 ◯12 융릉제 ◯13 장릉(長陵)제 ◯14 녕릉제


李花 259 15 예조에서 계(啓)기를, “이제 장차 길 때를 가리어 를 봉 것이오니, 청컨대 전례에 좇아 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 여 길지를 도록 소서.”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즉위년(1491) 8월 14일 실증고사(胎室證考使)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진양(晉陽)으로부 돌아와 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다. (이 실) 산은 진주에 속 (縣)인 곤명(昆明)에 있다. 『세종실 록』 즉위년 10월 25일 실도감에서 진주의 실에 시위는 관(品官) 8인과 수 8인을 청니 상왕(上王)이 그 말을 따르다. 『세종실록』 즉위 년 11월 초1일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실에 돌난간을 설치면서 땅을 서 지맥을 손상시켰으니, 지금 진주의 실에는 돌난간을 설치 지 말고, 다만 나무를 사용여 난간을 만들었다가 썩거든 이를 고쳐 다시 만들 것이다. 이를 일정 법식으로 삼을 것이다.” 다. … 실도감 제조 김자지(金自知)에게 동옷(襦衣)과 모관 (毛冠)과 신을 주다.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초3일 예조에서 계(啓)시기를, 실을 진주로 옮겨 봉안 때에, 를 모시는 곳에는 채붕(彩棚)1)을 짓고 나(儺戱)를 베게 1) 채붕(彩棚)은 채붕산(彩棚山), 채산이라고 불리는 며, 그 지나가는 주(州縣)에는 다만 관문에만 누각을 짓고 의장(儀裝)과 고악(鼓樂)을 갖추며, 교외(郊外)에서 맞이고, 각 도의 감사와 수령은 자기의 관내를 넘어오지 못게 것입 니다.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초5일 성(判漢城) 권(權弘)이 상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영 돈녕(領敦寧) 유정(柳廷顯)으로 안사(安胎使)를 삼았는 데, 정이 의금부의 관직을 겸고 있으니, 관(刑官)으로서 일을 실시 수 없습니다.” 니, 상왕이 말기를, “그렇다. 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상경(韓尙敬)으로 이를 대신게 라.” 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초5일 길창군(吉昌君) 권규(權珪)가 유사(留後司)로부 임금의 를 받들고 진주 곤명을 여 가는데, 모의(毛衣)와 모관 (毛冠)을 내려주었다.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11일 채색으로 장식는 문이다. 이를 설치는 경우 는 국가적인 경사나 사신 접대 등에 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을 받들어 모루(慕華樓) 에 거동여 칙서(勅書)를 맞아들이는데, 경복궁 문 밖에 채붕을 만들어 세우고 여러 가지 극을 꾸며 서 맞았다> 『세종실록』 3년 9월 21일. 이 채붕에 관여는 『고려사』, 성(成俔)의 『용재총』, 이익(李瀷)의 『성사설』 「채붕」에도 나온다. 산대놀이에서 산대(山臺)도 사실은 채붕이라고 다. 조선시대 국왕의 실 (4) - 세종대왕의 실 - <집자 주: 본 고는 절된 도서인 『조선의 실Ⅰ』(1999년 본원 발)에 실린 내용을 재집 것으로써, 조 선시대 국왕의 실을 제왕순으로 도과 께 설물을 연재다.>


16 李花 259 위 기록은 세종대왕의 실 가봉(加封)이 즉위(1491)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가봉은 왕자 때의 실을 좀 더 고 려게 국왕 의 실로 꾸미는 것이다. 대개 이전기보 다는 그 자리에서 가봉 경우가 많다. 그러 나 세종대왕 실은 가봉 당시 다른 곳으로 부 별 이전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 기록에서 세종대왕의 실은 처음 가봉 였을 때에 나무 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가봉된 실에서 돌난간 식이 아직 정례되지 않은 데서, 또 나는 백성을 아 끼는 세종대왕의 배려일 수도 있다 여겨진 다. 아마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 진다. 왜냐면 조선 국왕 실의 모범이 되 었을 고려 국왕들의 실에 돌난간이 없기 때문이다. 곤양의 소곡산(所谷山)에 세종대왕 실을 세우고 그간 진주에 속던 곤양을 남군과 여 곤남군으로 아래와 같이 승(陞號) 였다. 이 곤남군은 이 곤양군으로 개칭, 조 선왕조 말기까지 지속된다.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을 남과 여 승격시켜 곤남군 (昆南郡)을 만들었다. 처음에 왕의 를 곤명 땅에 매안(埋安) 여, 곤명 사람들이 따로 고을을 설치자는 주청이 있으므로, 경상도 감사에게 명여 가부를 살서 알리라고 던 것인데, 요 새 와서 감사 신상(申商)이 계(啓)기를, “곤명을 남과 여 따로 고을을 설치는 것이 마땅니다.” 고, 아울 러 지도를 올렸다. 임금이 말기를, “지으로 보면, 곤명이 남 와 야 겠으나, 곤명을 빼앗아서 남에게 주면, 진주 사 람이 반드시 원다 것이니 어떻게 느냐.”고 니, 조 서 권윤(權輪), 공조서 이적(李迹) 등이 아뢰기를, “진주 는 일찍이 대도부(大都護府)로 승진되었는데 목(牧)으로 내려 졌으니, 지금 어(御胎)를 매안 연고로써 다시 그 전대로 올 려주는 것이 의 것 같습니다.” 였고, 원숙, 김의정 등이 아뢰기를 “곤명이 진주 사람의 에 시달리어 따로 고을을 만 들려고 적이 오래였고, 또 진주는 지도 넓고 인물도 많아 서, 남방의 으뜸을 차지고 있으니, 백 쯤 되는 곤명이 떨어 져 나간다 도 별 영이 없을 것이며, 물며 지금 어를 그 땅에 매안지 아니였습니까. 곤명은 남에 쳐, 따로 곤남군 을 만드는 것이 사리에 당 줄 아옵니다.” 였다. 임금이 원숙 등의 제안에 따랐다. 『세종실록』 1년 3월 27일 본래 고구려 곤명이며, 신라 때 칭는 자세지 않다. 고려 종이 진주에 예속시켰고 본조 세종 원년에 군(郡) 북쪽 소곡산 에다가 어를 안치고, 남군을 쳐서 곤남군으로 승격였 다. …. 『신증동국여지승람』「곤명군 건치연」 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 원년 기(1419년)에 어 를 에서 20리 북쪽 소곡산에 안치고, 남을 곤명에 쳐서 곤남군으로 승격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 곤남군」 세종대왕의 실은 임진왜란 중에 전(戰 禍)를 입었다. 어를 봉안였던 백자아리 등 그릇들은 깨지고 백자는 9조각, 자는 6 조각으로 깨어진 채 돌아리에 들어 있었으 며, 돌난간도 일부 석주(石柱)와 죽석(橫竹 石) 등이 손되었다고 다. 이를 정유재란 때 사천에 주둔 바 있는 왜장 도진의(島 津義弘)의 소으로 보는 견가 있다. 전란 선조 34년(1601) 2월 27일부 3 월 22일까지 예조당상, 관상감, 선공감제조 의 동역(董役) 아래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보수공사는 백자에 기물을 수습여 넣었고 다시 지를 작성였는데, 지에는 앞면 <世宗大王胎室>, 뒷면 <皇明萬曆二十九 年三月二十二日改藏>이라 새겼다고 다. 그 이 봉의 소(火巢) 내에서 인조대 왕 21년 8월 5일에 실사건이 발생여 이 에 대 경상감사의 징계가 있었다. 이는 『봉등록』 인조대왕 21년 계미 8월 5일 의 기록에 나온다.


李花 259 17 또 아뢰기를, “곤양에 있는 세종대왕 실 난간석에 (頉) 이 있는 곳을 영백(嶺伯)의 장계에 따라 이제 곧 개수(改修) 려고 오나, 이러 농번기에 백성을 부역(赴役)시는 것이 염 려되오며, 또 봉내(封內)에 이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 우선 장마철이 지나기를 기다려 공역(工役)을 시작는 것이 마땅 듯니다.” 니, 임금이 옳다고 였다. 『영조실록』 6년 5월 10일 세종대왕과 단종대왕의 봉은 경상도 곤양군에, 예종대왕의 봉은 전라도 전주부에, 종대왕의 봉은 충청도 대군에 있 는데, 장차 비를 세우려 에 있어서 석이 이지러져서 고쳐야되 므로, 예조당상과 선공감 감역 각 1원(員)을 보내서 그 일을 감 독게 것을 명였으니, 선조(先朝) 신묘(辛卯:숙종 37)년 의 전례를 적용 것이었다. 그 뒤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등록 (謄錄)을 가져다가 상고 보니, 서산에 있는 명종대왕 실의 석을 중건 때에 예관(禮官)이 진달(陳達) 것을 따라서 석 뒷면에 씌여진 명나라 연는 처음대로 쓰고, 그 아래에 ‘아 무 아무 달 아무 날에 개석다’고 주(註)였습니다. 지금 이 곤양군의 두 실의 석은 이번에 처음 새로 세우는 것이니 만, 뒷면에 마땅 崇禎紀元後 몇年 支干 몇月 몇日,2) 전 주의 실 석의 뒷면에는 당초에 새긴 중국의 연를 써서 새 겼으니, 지금 고쳐 세우는데 있어서도 또 당연 지금의 연로 써 새겨야 될 것입니다.”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3) 위는 이 실의 개수와 관련된 또 다른 기 사이다. 개수는 영조 7년(1731)과 1734년에 도 있었다. 1731년에는 박문수(朴文秀)의 장 계(狀啓)에 따라 시된 석주(石柱)와 죽석 (橫竹石)의 보수였고, 1734년에는 단종대왕 의 실과 비도 세웠다. 이상 사실은 사천군 곤명면에 조선시대부 전온 『세종대왕실석난간수개의궤(世 宗大王胎室石欄干修改儀軌, 선조34, 1601 2)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운 명나라에 대 보 은(報恩),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를 친 청나라에 대 적개심,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는 민족적 자존 심 등에서 조선은 명나라가 망 이에도 명나라 의 의종제(毅宗皇帝)의 연인 숭정(崇禎)을 연 로 많이 사용였다. 3) 이 밖에 이 실을 소개 글로는 사천군, 『내고장 傳統』, 1982, PP.45-46. 년)』, 『세종대왕단종대왕실수개의궤(영조 6, 1730년)』, 『세종대왕단종대왕실석 수립시의궤(영조10, 1734년)』에 소상게 실려 있다. 1966년 7월 위 의궤를 발견고 조사 사천군수 김상조(金相朝) 씨는 실 장을 찾았는데 그 감 일단은 ‘괴된 실을 눈 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라고 술였다. 여느 실과 마찬가지로 일제시대 어가 서 삼릉으로 이전된 뒤 심게 손 방치되었 고, 민묘가 들어서 그 참상을 더였던 것이다.4) 그는 즉각 당시 그가 소속된 문 재조사단체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 調査團) 의 일원인 정영 교수에게 이 참상을 서신 으로 알렸다. 결과 동년 12월 9일에 신라5악조사단 지 리산지구조사 제2차 조사단 단장 김상기(金 庠基), 진섭(秦弘燮), 박경원(朴敬源), 수 영(黃壽永) 등이 장을 조사였고, 이듬 1967년 6월 10일-11일에도 제2차 실괴 참상 재조사를 실시였다. 이 조사를 기여 1967년 7월 1일에 『세 종단종실수개급석견립의궤(世宗端宗胎室 修改及表石堅立儀軌)』를 『고고미술자료 제 16집』으로 영인였다. 이어 동년 8월에는 신라5악종술조사단에서 「단종․세종대왕 의 실조사」라는 제목으로 계에 발 였다.5) 4) 세종대왕 실의 괴는 1928년 이전에도 있었다. 이는 이왕직의 복명서인 『胎封』에서 인된다. 이 왕직에서 어를 이봉러 갔을 당시 난간 8개가 분실되었고 1개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고 다. 당시 15여 년간 수고 있었던 달문 씨에 의면 10여 년 전(1918년경)부 봉에 몰래 장사지내 는 암장(暗葬)이 많았다고도 적 있다. 실 이안 석물은 사천 곤명면에서 영구 기념다고 기에 무상으로 양여(讓與)되었다고 적 있다. 5) 신라5악종술조사단, 「세종․단종대왕의 실조


18 李花 259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선생은 세 종․단종대왕의 실의 참상을 아래와 같이 적 고 있다.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세종․단종 대왕 실 복원을 소문이자 궐기문인 것이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 성주로 받들어 지는 이며, 대왕의 위대 성업은 우리 민족의 문적 밑천이 되고 있음은 여기에서 새삼 논 나위도 없는 바이다. 이러 우 리 민족의 양이며 은인인 세종대왕의 유적 가운데에는 이 봉 이야말로 영릉(英陵) 다음 가는 신성고도 소중스러운 곳으로 과거 악독 일인(日人)의 손에 더럽진 것도 천고에 잊지 못 민족적 원사(怨恨史) 이거늘 우리 겨레 가운데서 이처럼 이 성역(聲域)을 유린 자가 생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여도 있 을 법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에 대여 이 나라 국민된 자들로 서 분노를 느끼지 아니 사람이 누구이며 늘에 계신 대왕의 영령께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 사람이 있으랴. 그리고 이것은 우 리의 일대 수치로서 어찌 부끄러워 인의 눈에 띄게 수가 있 사」, 『考古美術』 제8권 제8 권 85, (1967. 8). 으며 인에게까지 알릴 수가 있는 일이랴. 그러므로 이 사실을 붓으로 쓰는 그 일 조차가 부끄러운 노릇일 것이니 오인(吾人)이 지금까지 메스컴에 소지 아니는 것도 그의 본의는 실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불상스럽고 망측 과거의 일을 그 대로 과거에 붙 버린다 더라도 이 두 봉의 완전 복원이야 말로 결절(潔切)고도 시급 일인 것이니 이는 실로 오인(吾 人)에게 부여된 일대 과제인 것이다. 아래 역시 세종대왕 실과 관련된 기록이 다. 이 기록은 봉산의 송림 관리가 소중 게 다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 겠 다. 다만 기록자가 세종대왕 실이 보성군 에 있다고 잘못 기록였다. 전라도 보성군에 비바람이 게 일어 세종의 실산(胎室山) 의 소나무 70여 그루와 잡목이 다 부러지고 바닷물이 사납게 넘 쳐 염막(鹽幕) 13개소와 민가 42가 몰되었으며, 남녀 5명 이 익사였다. 경상도 곤양군에도 비바람이 일었다. 『명종실 록』 즉위년 7월 19일 ④ ① ② ③ ①,② 서삼릉 실 ③ 『海東地圖』, 「昆陽郡」에 나난 봉. ④ 실 : 경남 지방기념물 제 30, 봉산 봉 자리에는 민묘가 있고, 석은 괴되어 나뒹굴다가 봉 아래로 옮겨져 일부가 이처럼 보존되고 있다.


李花 259 19 지금부 11여년 전인 2005년 개천절, 청 계천 개기념 걷기대에 참가다. 9시 30 분경 식전 사로 삼성 농구 치어걸 의 공 연에 이어 극무 공연이 있었고, 마사이족 의 워 시범 사가 있었다. 사가 끝날 때마다 박수치는 문는 아직 도 어색여 뿌리 내리기에는 참은 이르다 는 느낌이 들었다. 박수소리가 없으니 뜻 깊 은 사이지마는 썰렁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 대 참가는 6.7km 청계천 걷기대 구간을 최단시간 내에 선두로 주(走破)이 목이니 식전사에는 별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니었다. 10시경 윤방부 대장의 개선언 에 이어 이명박 시장의 축사가 끝나고 10시 20분경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징소리에 맞춰 나는 즉시 맨 선두 기수단 옆에 바짝 붙어서 출발다. 맨 처음 시작 빠른 걸음의 보 은 끝까지 같은 수준으로 유지면서 걸어 결국은 기수단도 제고 결승점에 도착니, 목지점에 ‘띠’가 아니고 개선문 같은 선 아취 기둥을 세워서 완주 인과 께 과 시는데 내가 제일 먼저 도착 최초 과 자임을 내 스스로 인 셈이다. 소요시간 은 45분으로 소 30여년의 주말산(山行) 으로 단련된 체력이 몫 셈이다. 내 체 력을 직접 측정, 검증게 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목지점에서 주최 측이 준비준 식빵과 생수로 간단 점심을 때우고 귀가길엔 별 바쁜 일도 없고 서 청계천변을 오전 걷 기대 역코스의 반대방으로 걸어서 귀가 기로 마음먹고 청계천변의 잘 꾸며진 보도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보도 앞 단에 나무 와 꽃들의 <꽃말>에 대 안내 지만의 내 용이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지 눈에 띄는 대로 그 꽃말들을 모두 적어보기로 작정고 노에 짬짬이 적어 내려가는데 기분이 아주 상쾌다. 47년 만에 청계천을 원모습 그대로 복원 꽃말을 가슴에 갈무리 날의 추억 이병준(李炳俊) 본원 문부 위원


20 李花 259 그 역사의 장에 서 있는 가슴 뿌듯과 오 늘의 복원을 위 심을 기울인 섬세 손 길이 가까이서 진게 느껴져서 코잔등이 시 짐을 느꼈다. o 찔레 - “온”의 꽃말, 색, 연분으로 5월에 다. 장미과(科)로 기가 좋아서 수원료로도 사용된다. o 능소 – 양반집 정원에서만 심을 수 있어 “양반꽃”이라고 다. 늦여름 려 색 꽃이 는 능소과 넝쿨 식물이다. o 옥잠 – 꽃말은 “추억” 옥비녀같이 생긴 꽃이 여름에 는 백과로 여러살이 (草) 이다. o 왕원추리 – 여름 근심을 잊게 만 아름다운 꽃이 다고 여 “망우초”라 불리는 백과 여러살이 이다. o 능수버들 – 늘어진 가지가 물이 오르면 봄을 느낄 수 있는 버드나무과 나무로 뿌리는 물을 정시고 잎은 대기를 정 시 다 . o 물억새 – 산과 들에서 자라는 억새와 같이 물가에서 자라므 로, 물억새라고 부르는 벼과 여러 살이 이다. o 버들 – 우리나라 산식물이며 줄기로는 , 바구니, 등공 예을 만듦으로 “버들”이라 부른다. 버드나무과로서 물가에 서 자란다. o 꼬리조나무 - “, 소녀의 꿈” 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여름철 꿈을 머금은 진분색 꽃이 는 장미과 나무이다. o 노랑꽃창 – 물(水)을 정는 성이 있는 분꽃과, 여러 살이 로 여름철 노랑꽃이 므로 “노랑꽃 창”라 다. o 부처꽃 – 줄기에 이 있는 부처꽃이라서 “부처꽃”이 라고 다. 여름에 진색 꽃이 는 부처꽃과 여러살이 이 다. o 담쟁이 - “ 약자를 찾으려고 자꾸만 뻗어가는 처녀 마음”이 담긴 도과 덩굴성 식물이다. o 별개미취 - “추억, 너를 잊지 않으리” 라는 꽃말의 보라색 꽃이 초여름부 가을까지 는 국과 여러살이 이다. o 부처꽃 - “부처님께 바쳐진 꽃” 이라고 서 붙진 이름 으로 5~8월에 진색 꽃이 는 부처꽃과의 여러 살이 이 다. o 스렁(狼尾草) - 부드러운 강아지 꼬리같은 꽃이 여름에 자색으로 는 벼과 여러 살이 이다. * 狼 : 이리랑 字임(개과에 속나 늑대는 아님) o 달뿌리 – 줄기 마디에서 뿌리가 나오면서 자라기 때문에 “달뿌리 ”이라고 다. 벼과에 속는 여러 살이 로 속 이 비어있어 습지 모래땅에 잘 자란다. 근 3시간 이상을 소요며 다 적고 보니 소에 무관심으로 지나친 박꽃, 나꽃, 수세미, 조롱박, 박꽃들은 그야말로 친근 우리 식물인데, 꽃말이 별도로 없는 걸까 궁 금게 느껴졌다. 안내 말이 없는 걸로 봐 서는 그 꽃이름 자체가 꽃말일 수도 있겠구 나 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꽃말에 어울 리는 주제로 시(詩)를 지어 보는 것도 참 재 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구석에 시정(詩情)이 도도게 우러 나오는 상쾌고 기분 좋은 서정의 루였 다. 많은 식물들의 아름다운 꽃말들을 지어 준 것은 우리 인간일진대, 식물들은 자연 경과 조를 이루어 우리 인간들에게 무정 의 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선사면서 자기 이 름(꽃말)에 어울리게 역을 제대로 수고 있건만,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부모가 애지중지 지어준 자기 이름 석자도 제대로 간수(看守)지 못여 무정의 욕 과 추 위들로 인여 온 거세개(擧 世皆濁) 되어버린 세를 바라보며 이 꽃말 들이 전주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번쯤 제 대로 새겨볼 수만 있어도 우리 인간의 마음 도 순되고 이웃들에게 좀 더 너그럽고 인 정스러운 배려의 삶을 영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아! 청계천에 어난 꽃말들의 감격스런 아 름다운 정경(情景)과 어우러질 무수 발길들 을 생각며, 내 조국 수도 서울의 경이 청계천 개을 계기로 층 업그레이드되고, 이 청계천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뻑 받 는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나기를 기원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자연의 에 근 안긴 예사롭지 아니 루를 보낸 듯 가슴 뿌듯 감동을 마음에 새긴 상쾌 루였다. <온녕군 17대손>


李花 259 21 1. 서언 전라북도 순창군 덕면 강천산길 270(청 계리 995번지) 일원에 대불교 조계종 제 24본사 선운사(禪雲寺) 말사인 강천사(剛泉 寺)가 있다. 강천사는 지금으로부 약 1130 여 년 전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강천 산을 찾아온 도선국사가 부처님바위를 보고 부처님도량으로 적당을 인고 창건다 다. 그 옛날에는 12개 암자에 1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대 가람(伽藍)이었으나, 조 선조의 억불정책과 임진란(1592년)을 거치면 서 5층 석만 남고 사우(寺宇)는 소실되었 다. 선조 37년(1604년) 소요대사가 중창으 나 국전쟁(1950~1953) 때 다시 소실 된 것을 1959년에 상로 복원되었다. 강천사 바로 앞 계곡에 놓인 아치다리를 건너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지붕의 비 각 안에 높이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 정도 되는 비가 있다. 이 비를 “삼인비 (三印碑)”라 고 이곳을 “삼인대(三印臺;전라 북도 유문재 제27)”라 다. 삼인대는 중종대왕의 정비 단경왕(端敬王后) 신씨(愼 氏)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단경왕 신씨와 삼 인대에 대여 간략 서술고자 다. 2. 단경왕 신씨 단경왕 신씨(端敬王后 愼氏)는 연산군 때 좌의정이었던 아버지 거창 신씨 신수근(愼守 勤)과 어머니 청주씨 사이에서 1487년(성 종 18) 1월 14일 어나 1557년 12월 7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씨는 1499 년(연산 5) 13살 되는 에 살 아래인 진 성대군과 인여 부부인에 봉졌다. 궁 (宮)에서 기거던 진성대군은 결 다음 (1500년) 2월 7일 사저(私邸)로 이사를 다. 1506년 9월 2일 새벽 성안(成希顔), 박 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에 의 중종 반정이 성공여 진성대군은 1506년 9월 2 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고 연산군은 비운의 단경왕(端敬王后)와 삼인대(三印臺) 이덕래(李德來) 전북대교 명예교수 공박사 / 연산교 유도장


22 李花 259 위되어 강도 교동에 안치되었고 다음날 인 9월 3일 왕은 연산군에 봉졌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정비 신씨는 왕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燕山君)을 위 중종반정을 반대기 때문에 성안 등 반정추진에 의여 살 당으므로, 역적의 딸이라 여 왕비도 위(廢位)시켜야 다고 주장다. 중종은 정 비 신씨는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위 수 없다고 였으나, 반정의 강압에 굴복여 결국 출기에 이른다. 신씨는 처음에 인왕산 아래 세조의 부마 성위 정조의 집으로 쫓겨난 거처를 친정으로 옮겨 71세가 되던 인 1557년 12 월 7일 많은 이 세상을 직다. 233년 이 지난 영조 15년(1739년) 5월 5일에 단경 왕(端敬王后)로 추존되었다. 단경왕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의 본관 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는 소당 (所閑堂)이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 인이다.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朴元宗) 등이 장차 연산군을 고 진성대군(晉成大 君:중종)을 임금으로 추대 뜻을 고 연산 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그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그 어느 이 더 중 냐고 물어보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면서 지금의 임금은 비록 악나 총명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였다. 그는 1506년 9월 2일 동생 신수영(愼守英)와 께 살되 었다. 신씨의 위와 관련서는 치마바위 일가 전지고 있다. 신 씨는 남인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군에 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이 임금이 된 것을 게 기뻐지 않았다. 반정세력들의 계속되는 왕비 위 종용에 시 달리던 중종은 조강지처인 신씨에게 자신의 난처 사정을 어놓 았다. “전, 왕위만 보전된다면 신첩이야 어디 간들 무슨 상관 이 있겠습니까? 고 신씨는 중종을 위로였다. 마침내 신씨는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서인이 되어 궁궐을 떠났다. 공신들의 압력에 밀려 조강지처를 위지만 신씨에 대 애정이 남달리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그리워질 때마다 높은 누 각에 올라가 그녀가 살고 있는 본가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 곤 다 다. 신씨는 이 사실을 전 듣고 중종의 애 그리 움의 정을 달래기 위 집 뒷동산에 올라 정상에 있는 바위에다 결시절 즐겨 입었던 분색 치마를 쳐 놓고 염없이 눈물을 리다 산을 내려오곤 였다. 중종도 바위에 쳐진 분색 치마 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 그리움을 달래곤 였다 다. 3. 중종반정의 주축인물 중종반정의 주축은 성안(成希顔), 박원종 (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다. 성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식이 깊고 치 밀며 성격이 대담였다. 성종 24년(1493 년) 7월 1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494 년 9월 2일 성절사(聖節使) 질정관(質正官)으 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495년(연산 1) 8월 25일 부교리, 연산 10년(1504년) 윤4월 26 일 조참을 거쳐, 연산군이 양도(楊花 渡)의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락을 즐길 때, 자적이고 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가 연 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동년 12월 7일 성 안을 좌천시라는 어명에 의 1506년 종9 말단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반정이 성공자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졌다. 관직은 조서 에서 곧 이조서를 제수받고 숭록대부에 올 랐다. 박원종은 1492년(성종 23) 8월 7일 동부승 지(同副承旨), 11월 17일 공조참의(工曹參 議), 1494년 8월 28일 병조참의(兵曹參議), 1498년 7월 28일 이조참의(吏曹參議), 11월 9일 동부승지(同副承旨), 윤11월 8일 우부승


李花 259 23 지, 1500년 2월 18일 안도 병마절도사, 2 월 27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6월 11일 성부 우윤(漢城府右尹), 1502년 6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7월 3일 북도절도사(北 道節度使) 등을 거쳤다. 반정이 성공자 정 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 며, 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 었다. 유순정(柳順汀)은 1487년 3월 18일 문과에 격여, 1491년 4월 19일 부수찬, 1493년 10월 18일 안도 사, 1498년 1월 5일 납, 9월 14일 문관 교리, 1499년 5월 6일 사부집의, 1503년 5월 10일 공조참, 1504년 5월 16일 안도 관찰사, 1506년 7 월 24일 이조서 등을 역임다. 반정이 성 공자 정국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숭정대부 에 우의정으로 제수되었으며, 청천부원군이 되었다. 4. 삼인대(三印臺) <삼인대 전경> 중종[부인 10명, 자녀 9남 11녀]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씨를 출는 것을 처음에 는 적극 반대으나 결국 정국공신(靖國功臣) 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왕비로 책봉 지 7일 만에 위시고 다음인 1507년 8 월 윤여(尹汝弼)의 딸인 숙인 윤씨를 새 왕 비(장경왕)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장경왕 는 원자(元子;인종)를 낳고 산병으로 중종 10년 3월 2일,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 에서 이 세상을 직다. 장경왕가 사망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순창군수 충암(忠庵) 김정(金淨), 담양부사 눌 재(訥齋) 박상(朴祥), 무안감 석(石軒) 류 옥(柳玉) 등 세 사람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 에서 밀를 여, 죄 없이 위된 신씨를 복위시는 것이 대의에 당다고 의견을 모으고 죽음을 각오고 비 신씨의 복위 봉사(封事:임금이 로 보도록 완전 봉 서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봉사를 올리 기 전 각각의 직인(職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 어 놓고 결의 장소가 “삼인대(三印臺)”다. 여기서 삼인(三印)이란 세 사람의 직인을 뜻 다. 다음은 봉사문 일부를 발췌 것이다. [중종 22권, 10년(1515년) 8월 8일,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옛 왕비 신씨(愼氏)가 물리침을 입어 밖에 있은 지 이제 거의 일기(一紀;12년)가 됩니다. 신은 그 당초의 연유를 상세는 모 르겠으나, 무슨 까닭과 무슨 명분으로 이런 비상(非常) 놀랄 만 일을 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대저 임금이 대을 계 승고 왕위에 오르면 먼저 부부의 도리를 바루어 천지와 같게 서, 안으로는 음교(陰敎)를 다스리고 밖으로는 양덕(陽德)을 다스려, 묘사(廟社)·신기(神祇)를 나란 주재여야 는 것 입니다. 대저 배(配匹)은 그 중대이 이와 같아서, 진실로 어 버이에게 승순지 못거나 종묘사직에 죄를 얻음이 아니면, 비 록 작은 물이나 미세 잘못이 있더라도 결코 끊어 버리는 의 리가 없거늘, 물며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이 척(廢斥)였음 에리까? 그 어찌 천심(天心)을 누리고 종조(宗祧;종묘)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장경왕께서 돌아가시고 곤위(壼位;중전)가 다시 비었으 니, 정 도로 바로잡을 기이고 또 구언(求言)시는 때를 당 였으므로 신 등이 급급 아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 께서는 써 공경스럽게 시어 능 천심(天心)을 누리소서. 신 등의 구구 와 답답 생각이 아직도 많으나, 모두 다 말씀드리지 못니 삼가 전께서 굽어 살소서.”였다. 이 상소에도 불구고 대사 권민수(權敏 手), 대사간 이(李荇) 등의 반대로 신씨는 복위되지 못다.


24 李花 259 5. 결어 1515년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 창군수 김정(金淨)이 봉사(封事)를 올려, 비 신씨의 복위를 청였다. 8월 11일에 대간이 이 상소가 간사 의논을 낸 것이라 여 그 들을 의금부에 잡아다가 그 저의를 추국자 고 계청였다. 이 계청은 대사간 이(李荇) 의 발의에 의 것인데, 이의 생각은 중종 의 계비 윤씨가 아들을 낳고서 죽었으므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이미 정졌는데 만약에 신씨를 복위여 신씨가 아들을 낳게 되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 이유로 신씨의 복위를 반대 것으로 사료 된다. 마침내 박상 등은 8월 23일에 장일백(杖一 百), 도삼년(徒三年), 진고신(盡奪告身:지낸 벼슬을 모조리 삭는 것)에 조율되자, 문관에서 박상 등의 방면을 계청였고, 24 일에 박상은 남에, 김정은 보은에 도배(徒 配;도에 처 뒤에 귀 보내는 것)되고, 26일에는 조계(朝啓) 때 이조서 안당(安瑭) 이, 조강(朝講)에서 경연관이, 부제 김근사 (金謹思)가 박상과 김정 등의 용서를 계청 였다. 권민수, 이 등은 박상의 처벌이 옳다고 고, 김근사, 김응기, 안당 등은 언로를 위 상소 자를 처벌 수 없다며, 언로를 막으려 이, 권민수를 오려 직시라 고 다. 11월 22일 정언 조광조가 박상 등 의 처리와 관련여 사직을 청였고, 28일 김근사 등이 박상 등의 문제와 관련여 전 대간과 조광조의 상소에 대 다시 상소 는 등 12월 말까지 박상 등의 처벌에 대 옳고 그름이 최대 이슈가 되었다. 삼인비는 신씨가 단경왕로 추존된 인 1744년(영조 20) 4월에 세운 것으로, 여 (洪汝通), 윤겸(尹行謙), 유춘(遊春恒) 등 전북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여 대자인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 서를 썼다. 1977년에 정 보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비각 옆에는 비문의 내용을 대문으로 번역 비가 있다. <익안대군 18대손> 별원원 가입 안내 - 가입자격 : 종친 개인이나 종 단체 - 원전 : 종보인 ‘이보’를 생 구독 수 있고, 종약원에서 실시는 각종 제 안내를 우선 드립니다. - 가 입 비 : 200,000원 이상 - 연 비 : 개인 3만원 / 단체 5만원 (가입 당연도는 연비 면제) - 가입문의 : (02)765-2124 종약원 조직부 사단법인 종묘제례보존 원 가입 안내 - 가 입 비 : 개인 10만원 이상, 단체 20만원 이상 - 원전 : 종묘제례 제관으로 우선 참여의 기와 종묘제례 전수교육을 수료 문재 보법에 의 전수교육생, 이수자, 전수교육조교, 기능보유자로 선정될 기가 주어질 수 있음. - 국민은 : 817201-04-036370 (사)종묘제례보존


李花 259 25 세종은 정조와 더불어 조선의 왕 중에서 드문 자 군주였다. 스스로 공부를 좋아 고 쉼 없이 노력으며 다양 도전을 시도 고 또 그만의 성과를 냈다. 결국 세종은 문적 과적 성과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 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이 어 떠는지 궁금지는 것도 당연다. 아쉽게도 세종의 어린 시절의 일는 거의 전지지 않고 있다. 사람이다 보니 어릴 때 부 총명다던지, 똑똑 말을 다던지 는 옛날이야기가 나쯤은 있을 것도 같은 데 아무런 이야기가 전지지 않는다. 세종 의 어린 시절이 너무나도 범던 것일까. 아니면 미처 전지지 않는 걸까. 부족나 마 세종의 결점이나 어린 시절을 이야기 주는 것은 아버지 종이다. 종은 슬의 자식이 29명으로 조선의 왕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다. 물론 령이나 충녕, 성녕대군은 조강지처인 원경왕의 자 식이니 다른 자식들에 비면 그나마 나았겠 지만, 그래도 세자에 비면 비교적 관심에 벗어나 있었다. 종에게 충녕은 귀엽고 사 랑스럽지만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명도 막동(莫童)이라고 지었고(종 13년 12월 30일), 종은 충녕에게 이렇게 말 다. “너는 일이 없으니 안게, 좋아 는 것을 마음껏 라.” 세종은 셋째 아들이니 왕위를 이을 수 없 었고 종실 출신이니 벼슬로 달 수도 없 다. 그런 것쯤이야 참으면 되는 일이지만, 여 역모에 쓸리지 않도록 생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야 다. 결국 욕심도 망도 없었으니 바라는 것이나 마음껏 라 는 말이겠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 들에게는 더없이 잔인 말이었다. 생은 족지만 노력을 요가 없고 고생 요도 없다. 그 대신 아무도 인정 주지 않았으며 무엇도 수 없고 무엇도 락되지 않았다. 오려 숨죽이고 조용 살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이강식(李康植)


26 李花 259 아야만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모든 이유는 아들이 아니라는 것 나 때문이었다. 그 렇다면 충녕대군에게 아무런 야심이 없었을 까? 아버지에게 륭 아들이라고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다는 그런 망은 없었을까? 여덟 살 때부 아버지와 나라의 기대와 지지를 몸에 받아가며 세자 교육을 받았 던 양녕과는 달리 충녕은 스스로 공부를 다. 어린 시절부 책 읽는 것을 좋아는 천생 책벌레였다. 비록 왕위를 계승 수는 없지만 왕족이라는 신분은 마음 놓고 공부 수 있는 여건을 마련 주었다. 지만 세종은 생 동안 모든 일을 때 결코 쉬운 길을 선지 않았다. 들고 멀 리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정석을 밟아 나갔고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결코 멈추는 일이 없 었다. 그런 성격은 세종 자신을 만들어 내는 데 충실게 작용다. 세종 스스로 번 보 면 모든 걸 외운다고 말 적이 있었고, 수 많은 신들의 이름, 내력, 가문 등등을 모두 외워 두어 설령 몇 년 보지 못더라도 번 보면 곧 기억 냈다고 다. 지만 머리가 좋은 것 외에도 세종 본인이 끊임없이 노력 고 배웠던 것을 되살리는 인내와 끈기에 입은 바가 컸다. 세종은 스스로 말기를 번 잡은 책은 100번씩 읽었다고 다. 세종이 아직 세자가 아닌 충녕대군이었을 때 병이 났지만 계속 책을 읽자 종이 걱정 나머지 관들을 시켜 책들을 모두 빼앗 아 버렸다는 일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유일게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이 남아있어 세종은 이 책을 보물처럼 아껴 읽 었다는 이야기가 전다. (세종 5년 12월 23 일). 이 이야기가 대에도 길이 전지는 미담 이 된 것은 사실인데 가지 재미있는 점은 세종이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느냐는 것이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일찍이 대제 벼슬을 지낸 윤(尹 炯)과 대를 면서, 자신이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이 책만을 1,100번을 읽었다는 말 이 전다. 시대가 르면 를수록 상은 더욱 드라마게 바뀌고 읽었던 숫자가 부 려지고 있다. 지만 정말 몇 번이나 읽었 을까라는 질문은 속되다. 책은 권이라도 성실게 읽기 어려운 법이고, 읽은 수가 세종의 업적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 만 조금 과장이 될 뿐이다. 아무 세종은 스스로 고 바에 따르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고 궁정에 있더라 도 가롭게 지내는 적이 없었다고 만 일을 찾아서 고 공부 자체를 즐기는 사람 이었다. 스스로 잘난 척 는 이야기라고 자니 이 세종이 생 공부고 연구였다 는 것을 생각면 그저 꾸며낸 이야기만은 아닌 듯다. 어떻게 보면 충녕대군은 왕가의 별종이었 다. 아버지 조 이성계는 물론이요, 아버 지 종까지도 모두 무가(武家)의 출신으로 글 보다는 무예에 월 재능을 보였고, 몇 대에 걸쳐 경도를 동 무대로 삼아 말을 달렸던 집안이었다. 물론 조도 책 읽기를 좋아다고 고 물론 종 역시,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 경력도 있었다. 지만 충녕 대군은 공부를 좋아되 반대로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다. 실제로 세종이 즉위 뒤 상


李花 259 27 왕인 종이 사냥을 권유면서 이렇게 말 정도였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지 않으시나 몸이 비 중시니 때때로 밖에서 놀아 몸을 존절 셔야 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나를 벽 수가 없으니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 사(武事)를 강습야겠다.” 그렇게 본다면 세종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 었을까 는 오가 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려면 밖으로 다니 기보다 방안에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였 다. 그리고 젊었을 때나 날 왕으로 즉위 이로나 세종의 성은 침착고 과묵다. 식은 물론 열의까지도 웬만 신들을 능 가으며 무엇보다도 잠을 줄여 책을 읽고 업무를 보았을 정도로 성실다. 지만 이 러 세종의 장점들은 양녕대군이 엇나간 뒤, 그리고 즉위고 나서야 드러난 것들이 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글공부만 열심 는 별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다. 종이 그를 선는 점에서 세종은 곧잘 운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지만 양녕 을 고 다음 세자로 충녕대군으로 선 을 때 그 선을 받아들인 사람이 세종이라 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아들인 세종은 부모의 기대를 받지 못지만, 아무 도 칭찬 주지 않는 일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일을 스스로 선다. 아마 왕족으로서의 안존 삶에 만족다면, 은 양녕대군이 엇나가지 않았더라면 충녕대군은 문을 좋아고 예술에 깊은 왕족으로서 일 생을 마쳤을 지도 모른다. 지만 충녕대군은 이같은 사실에 절망을 거나 나지는 대신 노력다. 그러 모습은 차츰 무너져가는 양녕의 실과 비교되어 더욱 빛이 났으며 결국은 유교국가 의 원칙이나 다름없는 적자 계승을 첫째와 둘째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게 되었다. 고난 그리고 본인의 의지를 여 세종은 실에 절망거나 은 무력으로 야심을 성 취지 않고 자신이 가장 잘 수 있는 일 을 찾아냈다. 빼어난 식을 아버지에게 자 랑고 엇나가는 을 야단 칠 수 있었던 충 녕대군이 마음속에는 이나 작은 보다 도 빼어나고 륭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자 신감과 긍지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 때문에 나라의 세자라는 무거운 짐이 갑자 기 어깨 위에 놓여졌을 때도 망설이지 않고 방지도 않았다. 이처럼 각박 실에 굽지 않고 긍정적으로 스스로의 길을 찾아 냈던 것이 세종의 능력이었다. 결국 셋째 일 뿐이었던 충녕대군은 오려 보다도 뛰 어난 왕재임을 아버지와 신들에게 납득시 수 있었다. 더여 이 수 십 년간 조선 의 관리들은 부지런 임금 밑에서 감 게 으름을 울 수 없이 열심 일으며, 마침 내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다. 참고문 『문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 읽기』, 주경철 지 음, 청아출사 사계절 『세종, 나는 조선이다』, 37~43p. 『나의 역사수업』, 윤종배 이 지음, 청아출사 『조선왕조실록』 <령대군 18대손>


28 李花 259 오늘날 시대적 변천에 따라 생의 다변 로 집안 즉 당내(堂內) 일가의 개념이 되 어 가고 있는 것이 안까운 실정이다. 소위 당내 일가란 유교사상에서 ‘고조부(高祖父)를 께 는 촌[同高祖八寸]’을 단계로 고 있다. 그러므로 촌까지를 ‘유복지친(有服之 親)’이라 부르며, 촌을 넘은 일가 간을 ‘무 복지친(無服之親)’이라 고 있다. 그런 개념 에서 조선왕조왕실의 종실(宗室)도 왕 의 손(玄孫) 즉, 대군(大君)과 왕자군(王子 君)의 증손(曾孫)까지를 제고 있다. 지금 모두의 생권이 산되어 세계된 산업사의 실에서 촌까지는 고사고 조부모·부모·제자매의 지친(至親)간에도 전 례에 맞는 복제(服制)를 지 못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실에서 골동(骨董 化)된 『사례람(四禮便覽)』에 도설(圖設)된 본종(本宗)의 복제(服制)를 들춰본들 무슨 과가 있겠는가마는 실이 여다여 망 연 버려두는 것 보다는 온고지신의 차원에 서 번 살보아, 집안 친척의 촌수(寸數)와 그에 따른 사자(死者)에 대 생자(生者)가 슬을 나내는 상예(喪禮)로 치르는 복제제 도(服制制度)만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그런 지도 모르고 망연 실에 맹종는 것보다 는 나을 것으로 생각여, 지금 이 본종촌수 (本宗寸數), 직계(直系)와 방계(傍系)를 알아 보고 그 복제를 살보려다. 직계는 나를 기준으로 나의 고조와 나의 손까지를 구족(九族)이라며 이구족의 종 (從:직계)·(橫:방계)을 괄여 당내일가 촌간이라 다. 다시 말 직계가 위로 고 조에서 아래로 손까지라면, 방계는 나를 기준여 남(男) 제 촌과 여(女) 자매 촌까지를 말다. 구분여 말면, 아버지 렬의 백숙부모·당숙·재당숙, 고모·당고모·재 당고모자매까지, 아버지 렬의 종조부모· 재종조부모까지, 대고모·종대고모까지, 증조 부의 렬인 종증조부모, 증대고무까지이며, 전전례인 집안[堂內] 복제(服制)를 살보며, 문제에 제언을 첨다 이승창(李承昌) 본원 제2문이사


李花 259 29 방계(傍下系)도 이에 준여 남자 조카·당 질·재당질, 여자 질녀·당질녀·재당질녀이고, 종손·재종손, 여자 종손녀·재종손녀이며, 남 자 종증손, 여자 종증손녀, 이렇게 어 구 족, 이를 이른바 ‘동 고조 촌’이다. 복제(服制)는 당내 촌 일가 간의 친소에 따라 생자(生者)가 사자(死者)를 위 상복(喪 服)을 입고 슬의 정을 극진 는 예인 데 그 예의 경중을 복제(服制)의 박(厚薄) 으로 출였던 것이다. 그 제도를 송(宋)나 라 유(儒賢) 주(朱熹)의 『주자가례(朱子 家禮)』를 간추려 정리 도암(陶庵) 이제(李 縡)의 『사례람(四禮便覽)』 본종복지도(本 宗服之圖)에 의여 소위 ‘동 고조 촌’ 당 내일가의 실제(實際)를 살보아, 소원져가 는 우리 친족관계를 다시 되돌아보아 반성 는 계기로 삼아 보려 였다. 복제(服制)의 명칭 ㄱ. 참최(斬衰) 삼년, 상복(喪服)의 단(端)을 꿰매지 않는다. 부친에 대 복이며 아버지 가 적자(嫡子)에 대 복(服)이다. 승중손(承 重孫)일 경우 조부에 대 복이며 적손에 대 복이다. 상기(喪期)는 총27개월인데, 초상 서부 13개월이 소상(小祥), 25개월 대상(大 祥)을 마치고, 간 1개월 즉, 27개월에 담제 (禫祭)를 고 담제 에 날을 가려 길제 (吉祭)를 끝으로 삼년 복을 완전 벗는다. 다만 부재모상(父在母喪)은 초상 일부 11 개월 되는 달에 날짜를 정여 연상(練祥)을 지내고 13개월에 대상(大祥)을 고 15개 월에 담제를 끝으로 장기(杖朞)의 상기(喪期) 를 마친다. ㄴ. 자최삼년. 상복의 단을 감친 것이다. 아 버지상[外艱喪]에는 참최복을 입고 어머니상 [內艱喪]에는 자최복을 입는다. 부모에 대 자녀가 상례(喪禮)를 는 복제이다. 아버 지가 계신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 기를 다. ㄷ. 자최부장기(不杖朞). 조부모에는 대 복제이고, 증조부모와 고조부모에는 자최 삼 월이며, 승중손(承重孫: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조부모의 상을 입는 적손)일 경우는 조·증·고 조부모의 상복을 참최 삼년, 자최 삼년으로 입는다. ㄹ. 대공(大功) 9개월, 이 대공복을 입을 친 척은 바로, 중자부, 질부, 출가 고모, 자매, 질녀, 종제, 종자매이다. 그러나 종자매는 출가를 면 소공(小功)으로 강복다. ㅁ. 소공(小功) 5개월, 이 소공복은, 수· 제수, 당숙, 재종제, 당질, 당고모, 출가 종자매, 당질녀, 종손, 종손녀의 복제이다. 단 당고모·종손녀는 출가면 시마(緦麻)로 강복 다. ㅂ. 시마 3개월. 종증조(從曾祖父母)·종증조 고모, 재종조부모·재종조고모, 재당숙부모·재 당고모, 출가 당고모, 촌제·자매, 재당 질·자매, 종손부, 재종손, 종증손·자매의 복제 이다. 1. 참최 : 부친(父親) 참최삼년 상복(喪服) 의 단(端)을 꿰매지 않은 것을 이르는데, 이 는 (血統)의 이어짐을 상징다고 기도 며 모친 자최삼년 상복은 단을 감친 것을 말는데 더 이상 이어나갈 여지가 없이 어 머니에서 끝남을 상징다고 기도 다. 그러므로 참최복은 직계인 아버지에 대 아 들·딸의 복이다. 자최복은 어머니에 대 자 녀의 삼년 복이며, 직계인 조·증·고조부모에


30 李花 259 대 복이다. 단 적장자의 참척(慘慽)을 당 을 경우에는 부모가 참최 삼년 복을 입고, 중자(衆子)에게는 부장기(不杖朞)를 며 딸 에게도 같이 나, 출가를 으면 대공으로 강복(降服)을 고, 친정부모의 상복도 기년 복으로 강복(降服)여 입는다. 그것은 출가 외인으로서 시가(媤家) 시부모의 삼년 복을 입어야 기 때문이다. 2. 조부모복은 자최부장기이나 승중(承重) 일 경우는 참최·자최 삼년이고, 증조부는 자 최 오월이나 승중일 경우에는 참최 삼년이 며, 고조부에게도 자최삼월이지만 승중일 겨 우는 참최삼년이다. 이와 같이 직계적에 대 숭고 개념적 가치는 변서는 안 되 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아들에 대 부모복제는, 장자(長子)는 참최 삼년이며, 중자(衆子)는 부장기(不杖朞) 이며, 딸은 출가 전에는 부장기이고, 출가를 면 대공(大功) 9월 복으로 강복(降服)을 다. 4. 손자에 대 조부모복제는, 적손은 부장 기이고, 중손(衆孫)은 대공이다. 5. 증손에 대 증조부모복제는, 적증손이 면 부장기이며, 중 증손은 시마 복이다. 6. 손(玄孫)에 대 고부모의 복제는, 적 손은 부장기이며 중증손은 시마이고 여(女) 는 시집가면 복이 없다. 7. 여식은 출가 전에는 부모제의 복을 본 종의 제도대로 따르지만 출가 뒤에는 각 일등씩 강복이 되어 부모삼년 복은 기년복으 로 강등이 된다. 만일에 이을 고 친정으 로 돌아와 생 경우에는 본종(本宗)의 원 복(原服)을 그대로 복여 입는다. 출가 면 강복기년을 는 것은 딸은 출가면 종부(從夫)의 예(禮)를 따라 시가의 본종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상은 본종(本宗) 복제(服制)를 말 것으 로 ‘동고조촌’인 구족(九族)의 복제를 살 보았다. 구족은, 나[本人]에서 시작여 위로 아버지·아버지·증조아버지·고조아버지 와 아래로 아들·손자·증손자·손[고손자]까 지의 직계상를 말며, (橫)으로 나를 위 시여 우(右)의 제·사촌제·육촌제·촌 제, 좌(左)의 누님누이·사촌누님누이·육촌누 님누이·촌누님누이로 발전여, 고조를 께는 집안[堂內] 일가로 성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동고조 당내 일가의 고귀 복친 (服親)의 가치가 얼마나 숭고지를 알 수 있 다. 이 촌수에 따르는 예의절차가 바로 서는 길은, 인륜강상(人倫綱常)인 오륜삼강(五倫三 綱)이 바르게 실천되어 가정윤리가 바로 섬 에 있고, 가정윤리가 바로 서면 국가 사의 안녕질서가 바로 서서 소위 치국·천가 구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수수만년 인류 역사를 겪어 오면서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답 게 살아가는 강상(綱常)의 질서를 집대성여 온 인류에 알도록 교 것은, 동양의 대성인(大聖人) 공자(孔子)께서 유(儒)라는 철 (哲學)을 세워 가르치면서부였다. 이 유의 원초적 기원은 ‘요(堯) 임금의 극 명준덕(克明峻德)여 이친구족(以親九族) 신데 구족기목(九族旣睦)이라’ “준덕을 밝 서 구족을 친게 니 구족이 이미 목 였다”라고 것과, 순(舜) 임금의 ‘부완모은 (父頑母嚚)며 상오(象傲)나 극이(克諧以 孝)여 증증예(蒸蒸乂)여 불격간(不格姦)’ “아버지는 완악고 어머니는 시끄럽고 상이


李花 259 31 거만나 성으로 온게 여 끊임없이 다스려 간사에 이르지 않게 였다”라고 , 이 요임금과 순임금의 인륜적인 우정 신(孝友精神)을 계승 집대성 것이 바로 유 교 철인 것이다. 이렇게 요·순이 왕천 이 가정 윤리를, 공자께서 괄집성여 ‘도(道)’를 세우고 ‘유 (儒)’라 명명여 세상을 교되 그 실천적 인 기본원리는 ‘인(仁)’이라고 천명(闡明)였 던 것이다. 이 ‘仁’은 사랑의 원리로서, 인간 세상의 발전과 를 구는 원천은 ‘사 랑’에 있으며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 라 ‘친 이를 친게 는 것이 인[親親之 謂仁]이라.’여 차등적인 사랑을 말는 것 으로, ‘가까운 데서부 먼 곳으로 발전[自近 至遠]’가는 사랑으로, 이 ‘仁’의 성공이 바 로 천라고 보았다. 따라서 아성(亞聖)인 맹자(孟子)는 ‘仁’의 사랑에다, ‘부끄러움을 알아 마음을 억제고 일을 마땅 다.’는, 의(義)를 더여 ‘인의(仁義)’를 방서 세 상을 사랑과 염치가 동된 ‘인의’의 차원 높 은 인간사로 승 발전시려 것이다. 이 유교철의 가치은 바로 인의(仁義) 의 발로인 복제(服制)안에 소상 밝져 있 다. 소위 ‘동고조촌’의 지친 간에 생자(生 者)가 사자(死者)에 대 슬의 시를 관계 의 친소에 따라 그 복제를 정고, 질서정연 게 알맞은 차등으로 장단의 절차를 두어 원근의 온도차를 지롭게 나낸 것이 바로 ‘仁’의 사랑과 ‘義’의 염치가 생사유명(生死幽 明)에 연결는 복제인 것이다. 오늘날 거의 완전 무너져서 엄중 부모 님의 참·자최의 삼년 복은 고사고 달 동안도 지 못고 생전에 달려 나가 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떻 게 삼·사촌의 복제를 챙기겠으며 삼·사촌의 복제가 지되었는데 오·육촌의 복제를 논 여가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복제의 전례(典 禮)가 무너짐과 께 ‘동 고조 촌’ 일가의 친의가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괴되어가고 있음이 실이니 안까운 일이다. 이는 생 의 다양성으로 인여 사방에 어져 있기 에 부득이 불요 불목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극복고 지친간의 정의를 돈독 기에 써 어진 일가의 돈목을 다시 금 이뤄 인성을 바뤄나가야 것이다. 이 문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이를 지켜나갈 방법을 찾아서 지롭게 구족의 친 의를 공고 야 것이다. 이는 국가의 가정의례에 대 정책부재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아무리 산업 사 경제위주의 시대라고 지라도 가정윤 리에 대본(大本)인 우목족(孝友睦族)에 관 계되는 복친(服親)의 상사(喪事)일 경우에는 넉넉 별가(別暇) 내지 가(特暇)를 실시 여 우목족의 전례를 수 수 있는 최소 의 장(場)을 만들어 줘야다. 제언컨대 ‘父母喪’에는 적어도 30일정도의 상가(喪暇) 를 내주어 부자(父子)간의 인륜을 만분의 일 이라도 이게 며, 여 복친에도 그에 준는 상가를 주어서 생자와 사자간의 마지 막 슬 정을 만분의 일이라도 수 있도 록 는 것이 무너지는 윤리를 조금이나마 만는 길이라 생각다. 경제 성장의 진 가(眞價)는 바른 인성에 가정윤리의 립에서 만이 빛을 발게 되기 때문이다. <양녕대군 16대손>


32 李花 259 <문재 이모저모> 근대사의 장, ‘고종의 길’ 복원된다 문재청(청장 나선)은 올 아관천 120주년을 맞아 일 명 ‘고종의 길’(왕의 길)을 복원다. ‘고종의 길’은 을미사변(1895) 이 1896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 동 길로 추정된다. 대제국 시기에 미국공사관이 제작 정동지도에는 선원전과 미국대사관 사이의 작은 길을 ‘왕 의 길(King's Road)로 시고 있다. ‘고종의 길’ 복원은 2011년 정동부지 교 시 미국과의 의에 따라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부지 사이에 경계 벽을 설치는 것으로, 그동안 미국무부 재외공관관리국이 지조사 등 총 4차례의 설계 검과정을 거쳐 지난 6월 설계 안을 최종 승인에 따라 문재청은 오는 9월 ‘고종의 길’ 복 원사업을 착공여 내년 말 완료 계이다. , ‘고종의 길’ 복원과 께 정동부지에 선원전(璿源殿) 영역의 복원도 시된다. 문재청은 진전(眞殿)인 선원전, 빈 전(殯殿)으로 사용되던 덕전과 전(魂殿)인 복전 등을 복 원 계이며, 주요전각을 비롯 부속건물과 배숲(상림 원), 지, 궁장 등도 복원 나갈 예정이다.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원복원ㆍ정비 추진 문재청은 서울별시 중구청(구청장 최창식)과 께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 서울 중구 정동길 소재)'을 내 년부 원복원ㆍ정비 2021년까지 마무리기로 다.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이 명성를 시 1895년 의 이듬인 1896년 2월 11일부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 임금이 신여 국정을 수며 대제국 건설을 구상였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곳이다. 1890년(고종 27)에 르네상스 양 식으로 건립되었지만, 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괴되어 재는 부분만 남은 상다. 이곳에서 고종 임금은 친위 기병대를 설치는 안건 (1896.6.8.)과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 안건(1896.8.5.)을 반였으며, 민영을 명전권공사에 임명(1897.1.11.)여


李花 259 33 <문재 이모저모>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는 등 일 본을 비롯 열강으로부 주권 복을 위 적극적으로 노력 였다. 또, 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사(享祀, 제사)를 모두 옛 역서(曆書)의 예대로 거도록 조령(1896.7.24.)을 내리는 등 천자의 독립된 나라임을 알리기 위 준비를 곳이기도 다. 그 결과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궁 (1897.2.20.)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단을 건축고 구 의례를 거 제로 즉위여 대제국을 선 (1897.10.12.)기에 이르렀다. 내년에 복원이 마무리되는 ‘고종의 길’이 마지막으로 닿았던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복원ㆍ정비 사업까지 완료되고 나면 재 중ㆍ장기적으로 진 중인 구단 정비사업 등과 께 당시 외 세 열강에 맞서 자생적인 근대 국가를 추구던 고종 임금의 삶 을 넓게 살볼 수 있는 소중 역사교육자료가 될 것이다. 문재청, 정조 어찰첩 보물로 지정 문재청은 8월 30일, 「정조 어찰첩(正祖 御札牒)」과 조선 경국전 등 9건을 보물 지정예고 다. 정조 어찰첩은 정조가 1796~1800년까지 4년간 좌의정 등 고위직을 역임 심지에 게 보낸 어찰로 300에 달는 다양 내용의 어찰이 날짜순 으로 6첩 장첩되어 있다. 이 어찰의 내용은 대부분 정사(政事) 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당시의 정치적 상을 이는데 게 기여 수 있는 매우 귀중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서간문의 격식과는 다른 부분들이 있는데, 발신자인 정조의 지에는 발인일자가 없으나 수신자인 심지는 수신 일자와 시간을 기록고 있어 대에 남길 목적임을 알 수 있으며, 어 찰에 사용 지질이 다양여 긴급 사안에 대서는 지질이 나 격식을 따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글과 이두식 , 속담과 구어 등 실용적 문체를 구사 점도 주목 부분 으로 조선 시대 서간문의 식을 연구는 데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출처 : 문재청 보도자료>


34 李花 259 자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당시 강 릉읍 장인 ‘본정’( 성남동 시부 광장) 상점에서 러나오는 일본 천의 “나는 이 시각 전국민이에게 알리노니 일본국은 연 군에 전쟁을 종식고 전 복을 선 다.”라는 복 선언문을 기억다. 그때 나는 장에 있던 사람들과 께 대독립을 외치 며 기쁨을 었다. 『국대사119대사전』에 기록된 광복 의 기쁨을 증언으로 남긴 몇 분의 감를 적 어본다. 이승(술원 원로원, 당시 50세) 나는 조선어 사건으로 무소에 수감 중 방을 맞았다. 정오 방송 시간 에 소식을 알고 께 갇있던 이극로, 최 배, 정인승이 감방문을 열고 나에게 “우리 가 독립게 됐다”라고 말주고 우리는 너 무도 감격 서로 얼싸안고 대독립 만세를 삼창고 기쁨의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강신(동아제약 장, 당시 18세) 대생이던 나는 그날, 반복되는 방송을 듣고 방이 됐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벅찼 다. 다음날 치안유지를 위 문중에서 도대가 조직돼 나도 거기에 참가다. 정재(전 국의원, 당시 16세) 그때는 교마다 돼지를 쳤었는데 생인 나는 복 방송에도 돼지우리에서 돼지똥과 씨름을 고 있었다. 갑자기 일본인 검도 선 생이 교무실에서 울면서 뛰쳐나오고 국인 음악선생이 “우리 겨레가 이제야 렸다”라 고 소리쳤다. 나는 돼지똥에서 려나 공부 를 마음대로 수 있게 됐다고 기뻐다. 『국대사119대사전』에 기록된 1945 년 10월 10일의 내용을 보면 ‘김일성,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라는 제목 에 33 세의 김일성이 등장다.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등장은 북의 정치적 전점이었다. 이전까지의 김일성 권 력 장정이 수면 에서 진된 것이었다면 광복과 대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속에서 이종(李鍾泰) 강원도지원 상임부지원장 / 명예기자


李花 259 35 분국(分國) 창설은 그것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33세의 새란 김일성이 노련 정치가인 박영과의 담에서 분국 창설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겠다는 것 자체가 북권력의 방을 예고 주는 것이기도 다.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소련군정의 뒷받침 을 받는 김일성에게로 권력은 모아져 갔으며 재 북 노동당의 모체가 바로 45년 10월 에 만들어진 북조선 분국이었으며 조선노동 당도 분국 창설의 계기가 된 서북 5도당의 책임자 및 열성자 대를 당 창립대로 잡 고 있다는 점 역시 분국이 김일성의 권력을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월 5일부 8일까지 양에서는 서북 5 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를 위 예비 의가 열렸지만 결론 없이 대립만 다가 분 국 창설의 과제를 10월 8일 밤의 박․김 비밀 동으로 떠넘겼고 결국 분국창설은 열성자 대에서 마무리됐다. 갈등은 꿈거렸지만 대가 소집되기 직 전에 있었던 김일성과 박영 비밀동이 갖 는 정치적 무게에 입어 분국창설은 문 제없이 과됐다. 그러나 소란이 없을 수는 없었다. 박․김 비밀동을 처음으로 공개 전 노동 당 고위 간부였던 서용규의 증언이다. ‘김일 성측은 대 첫날 박영과의 비밀의에서 의 의사 즉 서울 중앙의 지도를 받는 중 간지도기관인 북조선 분국창설을 양다는 내용을 설명다. 그러자 정달 등 일부가 반대고 나섰는데 그처럼 중요 결정을 당 중앙위원의 론을 거쳐서 야지 어떻게 총비서 박영 개인과의 의로만 결정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같은 의는 박․김 비밀의를 깨기에는 너무 미약다. 열성자 대는 박․김 동의 의에 따라 진됐다. 김일성는 입북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권력의 중심부에 바 짝 다가섰고 박영이나 국내는 자신도 의 식지 못는 사이에 권력의 심으로부 걸음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분국 창설이 결정됨에 따라 지도기관이 선출됐다. 김일성은 북 공산당을 완전 장악기 일 보직전까지 다가갔으나 박영의 은 여전 강고 국내의 저도 만만치는 않았 다. 우선 김일성 자신이 책임비서로 선출되 지 못고 김일성의 심인 김책과 최용건 도 집위원으로 선출되지 못다. 김일성이 왜 책임비서가 못됐을까? 서씨는 이렇게 다 시 설명다. ‘책임비서 자리가 김용범으로 돌아간 이유 는 김일성이 국내 기반이 충분치 않아도 소 련 공산당 약소민족 국에서 공작원으로 견 정도로 믿을 만 인물이라는 점, 국내 공산주의 계열의 벌에 속 있지 않다는 점, 방 직 북부 중심지 양에서 당 조 직의 기반을 구축 나간 점, 소련군정과 김 일성 측이 강력 추천 점 등을 들 수 있 다. 김일성도 책임비서로 추진되기는 으나 사양는데 그 이유는 우선 나이가 젊고, 국 내 동가를 앞세워야 는 당시 상에서 김용범과 같이 국내 무소에서 나온 경우가 아닌데다가 10월 당시처럼 38선이 유동적인 상에서는 소련공산당 전력(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를 양으로 삼고 오려는 것) 을 바로 집기 어려웠던 사정 등이 작용 다.’


36 李花 259 그러나 소련군정의 정치사령관 레베데의 의견은 다소 다르다. ‘김일성이 분국의 책임비서가 되지 못 것은 김일성의 역부족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치 련이 되어 있지 않은 그를 전면에 부 상시기는 이르다고 단다. 본인이 레닌 사상에 대 이도 적어 정당을 이끌만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빨치산 련만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뉘앙스는 다르지만 두 증언자 모두 김일성 일가 전반적인 권력을 잡기에는 아직 시기 상조였다는 점을 지적고 있다. 대가 진 되는 동안 사사건건 김일성와 국내가 대립고 김일성 측의 의견이 상당 무시된 것은 그같은 사정을 반영고 있다. 대 첫 날부 시작된 김일성와 국내의 시끄러 운 대립은 대기간 줄곧 계속됐다. 『국대사119대사전』에 기록된 1948 년 4월 19일의 내용을 보면 ‘김구 남북상 위 방북’이라는 제목 에 송남(당시 김 규식 선생 비서)의 고에 따르면, 김구 선생 은 1948년 4월 19일 남북상을 위 방북 려으나 일반 군중, 생단체, 기독교단 체, 부녀단체, 월남동 등 4-5백명이 모 여 김구의 저 ‘경교장’을 에워싸고 방북 결 사반대 의를 다. 이대로 간다면 국은 영원 분단되고 상 를 리게 된다고 며 오 2시경, 비서 선우진, 장남 김신과 께 자가 뒷담을 몰래 넘어 자가용 승용차 를 이용, 군중을 방북을 결다. 이날 6시 45분경 북 여에 도착 일 은 북에서 보낸 승용차를 갈아고 양 도착, 상수리에 있는 각에 안내되어 김두 봉의 내방 안내로 인민위원 사무실에서 김 일성과 상봉 숙소로 안내됐다. 4월 21일 6시 30분 서울에서는 김규식을 위시 남측 민족자주연맹 대인 원세, 김성숙 등 16 명으로 구성된 남의 대단이 김규식의 승 용차를 두로 11대의 승용차가 줄지어 방북, 여에 도착 열차으로 22일 오전 6 시경 양에 도착, 상수리 각에서 미리간 김구와 조우여 식 중 11시쯤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규식 일을 예방, 김일성과 인 사를 나누었다. 김두봉은 과거 연전문 시 대 김규식의 제자였고 중국에서는 때 독립 운동의 동지였다. 이렇게 남북 연석의가 개최되었다. 남북 연석의는 1948년 4월 19일부 26일 양에서 열려 남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는 쟁을 결의 것이 출발이었으며 당시 북 은 반도 전역의 총선거 실시는 UN결의 를 수기 위 견된 UN국 임시위원 단의 입북을 가로막았으며 내부적으로는 인 민의에서의 법초안 마련, 인민군 창설 주요선언, 국유 등 사주의 개조작업을 진여 독자정권 수립을 진시켜 나가고 있었다. 남북담이 진되는 사이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등 4김 담이 김두봉이 제 의여 연백야에 공급되다가 중단된 수리 조 개방 문제, 남에 공급되던 전력의 지 속적인 송전 문제, 조만식의 월남 용 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국내 이장 문제 등에 관 논의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 개방, 전력 송전에 대서는 즉석에서 수 락고 조만식과 안중근의 이장 문제는 뒤로 미뤘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국


李花 259 37 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 몇일 뒤 김일성 은 다시 수리조과 전력 송전을 중단고 모든 약속 이을 무 다. 결국 남북 담은 무성과였으며 이 대민국 정부 수 립 과정에서 이들 일정부 수립 노선을 채 였던 인사들이 남에서 배제되는 결과 만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미소 냉전체제의 국제정세 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고 일국가 수립의 노력은 분단시 대의 중요 민족적 과제라고 수 있다. 남북상이 민족의 꿈으로 사라질 것을 예견 면서도 무지 자가 북을 결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자기의 의무를 완수겠 다는 애국적 동으로 가되기도 지만, 으로 그들의 북은 김일성 단독 정권 수립 책략에 이용된 것이었다고 가되기도 다. 이 북은 대남전략에 입각여 정당, 사단체 연석의 또는 정치상 의를 남 북관계와 일 문제를 의는 의체 식 으로 지속적으로 주장왔다. 1970년대에 들 어와 당국간 담인 남북 조직위원가 가동 되어 불완전나마 사실상 서로의 실체를 인 정 에도 이 연속의 주장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 명칭은 시기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으로 각계를 대는 인사들 이 모여 남북의 입장을 떠나 개인적인 의사 를 명고 이를 집여 결론을 낸다는 것에는 변이 없다. 1948년 8월 15일은 대민국 정부수립이 되었다. 윤치영 당시 제의원 고(날 내무장관, 서울시장 역임)에 따르면 1948년 2월 23일 당시 남의 대의입법은 UN결의에 따른 가 능 지역 내의 총선을 본의에서 가결 다. 단선을 둘러싼 격심 대립은 입법의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규식 의장 등 주 로 관선의원들은 남북 정치 세력 간의 상 을 일정부 수립을 방, 이를 반대 고 민선의원 측은 UN 결의를 지지다. 결 국 김규식 등 관선 28명의 의원이 사 가 운데 대민국 입법의원 본는 단선을 가결 다. 이와 께 미군정 당국은 입법의원에 의 제정됐던 입법의원 선거법을 기초로 임기 2 년, 정원 200명 등 전문 57조로 된 국의원 선거법을 3월 17일 미군정법령 175로 공 다. 자유, 등, 비밀선거의 원칙이 채 됐으나, 일제 부역자만은 제외되었다. 또 김 동성, 김법인 등 15명을 중앙선거위원으로 임명, 중앙선거관리 위원를 구성다. 이어 3월 20일부 4월 9일까지 유권자 등록을 받고 784만871명이 등록된 선거인명부로 948명의 입보자 중 95.5%의 율로 제 주도 동 사건 발생으로 200명 중 198명만 선출되고 이승만 박사가 의장으로 선출, 이 로써 대민국의 국 즉 개국가 생됐 다. 1948년 8월 15일 11시 20분 중앙청 광장 에서 맥아더장군 부부를 비롯 사절단과 정 부각료, 시민들이 운집 가운데서 성대게 기념식이 치러졌는데 초대 대령으로 선출 된 이승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연설문을 낭 독다. ‘지금 우리는 방을 기념는 동시에 대민국이 새로 생 것을 겸여 경축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거대국이 대민국 정부가 복되어서 4천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쟁여 온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건국 기초에 요소될 만 몇 조건을 간략 말려 니다.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38 李花 259 될 겁니다. 공산주의의 괴적 운동에 중대 문제를 결 만 지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가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 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더 유감으로 생각는 것입 니다.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쳐 보이는 이때에 민주주의를 채 용기로 30년 전부 결정고 실여 온 것은 또 간단없이 실천야 될 것입니다. 민권과 개인자유를 보장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시 주의서 개인의 언론과 집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야 것입니다. 우리가 40여 년 동 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지 못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략) 가장 중 대 바는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감과 굳센 결의입니다. 이것을 신뢰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굴지 않고 문제를 결 며 장애를 극복여 이 정부가 대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없이 민주주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명되도록 매진 것 을 선언니다. 대민국 3년 8월 15일 대민국 대령 이승 만’ <임영대군 16대손> 본원 문부에서는 종나 소종 에서 발고 있는 종보를 수집고 있습니다. 종보를 발고 있는 단체 에서는 종약원에서 기증주시면 감사 겠습니다. 문의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부 (02)765-2124


李花 259 39 국외소재문재재단은 최근 이른바 ‘임캡 슐’ 발견 경위와 그 내용을 언론 공면서 구 공사관 복원 공사는 연내 마무리 되며 재 개관은 내년 2017년 봄이 될 것이라고 밝 바 있다. 인이라면 누구나 비상 기심과 관심 을 가질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고종제가 국권 수의 마지막 망인 대 미 외교의 성를 위 1891년 무려 2만5 천달러에 구입던 공사관이니 115년 전의 원 복원 내부가 궁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 민족운동가나 독립운동가를 비롯여 오늘날의 동 지도자 및 역사 교 육 운동가들이 느끼는 이 공사관의 역사적 무게와 가치는 사뭇 다르다. 고종제의 국권 수 의지와 일제에 의 의 국권 상실의 역사, 그리고 재미 인 들에게는 미 외교와 이민 역사의 본이라 는 의미도 있다. 수집된 자료에 의면 일제 강점기 미국 내 일 독립 운동가들은 나라는 없어졌는데 도 이 공사관 건물 사진으로 만든 우엽서 를 주고받으며 국권복을 추구였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쇄된 공사관을 나의 유적 건축물로 본 것이 아니고 대제국의 국이 라는 엄청난 무게가 담긴 전으로 여기며 줄기찬 독립운동과 사적 모금운동으로 상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동 대부분을 감당여 광복에 기여였다. 대제국 공사관의 역사적 무게 이내원 북미주지원장 집자 주 : 주미 대제국 공사관은 미국의 수도 워싱 D.C에 위치 건물로 1889년부 16년 동안 자주 외교의 장으로 용되었던 공간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기능이 정지되고, 1910년 일강제병 일본이 강제 매입여 다시 아버렸다. 광복 미국인사와 대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되찾고자 노력였으며, 2012년 10월 18일 문재청이 재매입였다. 재 국외소재문재재단에서 관리와 운영을 고 있으며 공사관 복원 및 리모델링 사업을 진고 있다. 이 글은 국일보 미국(2016.8.4.일자)에 실린 기사를 인용다.


40 李花 259 국외소외문재재단 오수동 사무총장은 기 자견 중 복원 공사비가 얼마나 소요되느냐 는 질문에 구입비 350만 달러, 복원 공사비 1천300만 달러 정도라 답고 기자단을 놀 라게 바 있다. 구 공사관 지역은 D.C의 역사 보존 지역으 로 고건물 복원 전문가 자격증을 가진 사람 만이 일을 수 있고 대민국 정부도 100 년의 세월을 거슬러 원 복원려고 엄청난 복원 경비를 과감 집는 것으로 보인 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부의 최 상층부 결정 권자들이 이 공사관 건물의 역사적 무게와 가치를 누구보다도 인정고 있는 것으로 보 여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 워싱 지역 인들은 2003년 이민 100주 년 기념사업 구 공사관의 구입 수를 위 모금운동을 벌여 비록 성공은 못지만 예치금 8만 달러를 문재청에 기증고 생 생 역사교육의 장으로 꾸며달라는 청원을 바 있다. 이와 같은 연적 지역적 연관성으로 인 워싱지구 8개 인와 연대는 워싱지 구 인연는 지난 7월 20일 자문이사들 을 초청, 이 공사관의 재 재관을 어떻게 가 장 뜻있고 생산적인 기념사로 장식 수 있겠는가 의견을 나눈 바 있다. 그 결과 ① 수운동의 본 고장이자 직 지역의 연로써 동들이 망는 가장 의미있고 생산적인 문사를 정부에 제시 여 나의 선으로 참고케 다. ② 문 사는 이 공사관이 대제국에서 단절되었 으니 이를 복원 승계는 의례로 왕실 사 인 어가렬을 재여 전 새로운 국 전문를 유사 이래 처음으로 워싱에 소 개여 국의 유구 역사와 문적 다양성 을 세계인에게 보다. ③ 재미 인들의 자부심을 북돋워 연가 집중는 뿌리 정치 참여운동과 정치력 신장운동이 더욱 성되어 위안부 문제 의결의 득과 세계 인권 문제 성공, 버지니아 동병기 성공 과 같은 실적 성과를 더욱 촉진는 생산 과를 기대 보자는 것이다. 재미 인들 의 정치력 신장은 국 외교력의 보강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선제적, 자성 사로 1세 기 만의 유일 기를 일실지 않기를 바 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상당 국가적 재정부담을 예상 야 는 만 1천 300만 달러의 복원공사 를 책정 만 대제국 공사관의 역사적 무게를 인지는 중심 책임자의 검와 결단 에 달렸다고 겠다. <관련 기사 42면에 계속> 장기금 모금 안내 全州李氏를 대는 장재단인 이장는 정신과 숭조돈종 사상이 철 진양 성을 위여 1987년 4월 1일자로 서울별시 교육감으로부 재단법인 이장 설립 가 를 받았습니다. 재까지 기본금 14억 여 원이 모금되었으며 연 인원 1,323명 생에게 장 금을 지급였습니다. 본원에서는 장의 성 방안으로 기본금 20억원을 모금여 진양성을 위 장 을 넓고자 노력고 있습니다. 이에 이장기금 모금에 동참실 개인이나 단체의 적극 적인 참여를 당부드립니다. 국민은 817-01-0254-362 (예금주 : 재단법인 이장)


李花 259 41 자는 지난 6월 14일 성종대왕 14개에 서 주관 국립중앙박물관 견 사에 참석 을 다. 박물관 견 중 전성군 종 친이 “전성군의 모친 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어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귀인 안동권씨”라 다. 그런데 종친은 “이 박물관 전시실에 게시되어 있는 조선왕조계 보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였다. 그 래서 직접 인 보니 ‘귀인 권씨’가 아닌 ‘숙원 권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자는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고자 종친을 비롯 성종왕자 14개 장님과 이 야기를 나누었다. 즉 “지금 견이 중요 게 아니라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 무 엇보다 시급다”는 점을 이야기 다. 기록 수정을 위 먼저 조선 중․근세관 담 당자와 연락을 취 수정 절차에 대 상의 였다. 그런데 담당자는 자에게 ‘수정을 요청 자격과 조건이 안 된다’며 대교수 와 같은 역사자들의 모임에서 결정 사 이고, 동시에 전주이씨 기록물은 자손들이 미여 기록는 경우가 많아 사실적인 자 료가 요다고 전다. 이에 자는 다음 과 같은 절차를 밟아 기록 수정을 기로 다. 귀인 권씨를 숙원 권씨로 바로잡다 먼저 전성군 족보에 기록된 자료와 귀인 권씨의 묘비를 찍은 사진을 수집다. 그 인넷 자료를 검색 첨부고, 전주이씨대 동종약원에 비치된 자료인 『선원계보기 략』, 『선원강요』를 취 관련 기록에 대 증거를 수집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기 위 방문여 4층 역사관에 비치된 자료를 사진자료로 수집기 위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성종대왕에 대 기록물만 수십 권에 달고, 무엇보다 잘 보이지도 않 국립중앙박물관 게시자료를 바로 잡은 소감 이성(李誠薰) 전성군종장


42 李花 259 는 작은 글씨의 자로 기록되어 있어 읽기 가 수월지 않았다. 차근차근 돋보기를 글씨를 읽어 나가다 보니 어느덧 6시간이 쩍 지났다. 머리는 아고 정신은 미 져 자료 수집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었다. 지만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고자 는 열망에 다시 을 내어 수정에 도움이 될 만 자료를 찾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관련 자료를 발견고는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자료는 바로 『선원속보』와 『만가보』였 다. 그 책자 속에 ‘귀인 권씨’라고 분명 기 록되어 있음을 발견 이부는 머리 아 것도, 정신이 미 지는 느낌도 전 들지 않았다. 그 자료와 당 부분을 대으로 촬영 돌아오는 길에 대서점에 들러 관련 자료가 더 있나 찾아보기도 다. 모든 자료를 취 문서서 다시 국 립중앙박물관 중․근세관 담당자를 찾아 제출 다. 당시 담당자는 2주 에 연락을 준다 고 여 기다렸으나 3주가 지나도 연락이 오 지 않았다. 답답 마음에 박물관을 방문 여 조선왕조계보를 인는 순간 가슴이 뭉 짐을 느꼈다. 그 이유는 ‘숙원 권씨’에서 ‘귀인 권씨’로 수정되어 있는 것을 직접 인 기 때문이다. 그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구나 는 성 취감에 박물관을 나오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 워졌다. 또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자료 수 집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 나며 조상님의 자리를 제대로 돌려놓은 것 같아 손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록 수정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며, 이 번 일을 계기로 성종대왕 전성군종가 더 욱 발전고 성되기를 조상님께 기원 다. 제 자리를 찾은 귀인권씨 머니의 계를 자손만대에 전지기를 간절 바라 는 마음이다. <전성군 14대손> <40면에 이어> 120년 전 대제국 주미공사관 '임캡슐 발견 -주미 대제국 공사관 보수공사 중 15점 발굴문재청과 국외소재문재재단은 2016년 4월 29일, 주미대제국공사관 보수 및 복원공사 중 공사관 집무실 벽난로 속에서 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 일습을 발견다. 공사관 건물 2층 벽난로 체 과정 중 발견된 자료는 엽서와 명, 전시 및 결식 초청장, 리스마 스·신년 카드, 성경교 초대장 등 총 15점이다. 이 중 주목 만 것은 1892년 워싱DC에서 개최된 가 조지 로버 브뤼네의 전시 초대 장과 미국 제26대 대령 시어도어 루스벨의 딸 앨리스의 1906년 2월 결식 초대장이다. 두 발굴 자 료는 유 시기와 초청주체, 수신 및 발신 주소 등이 모두 인돼, 당시 공사관의 대외 동상을 잘 보여 주는 귀중 자료로 가된다. 미국을 주 무대로 동 캐나다 출신 경가 조지 로버 브뤼네는 1892년 워싱DC에서 전시를 열고 공사관 측에 초대장을 발송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로운 점은 이 초대장과 1893년 촬영된 공사 관 내부 사진 속에 등장는 서양 2점의 관계인데, 공사관 1층 객당 내부 사진 속 서양와 브뤼네의 이 매우 유사 브뤼네의 작을 공사관에서 입수을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수동 재단 사무총장은 “ 이 시기는 일제가 대제국의 외교권을 박기 위 강제로 체결 을 사늑약으로 공사관의 공식 동이 정지된 다음 라는 점에서 외교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다. 재단은 이들 자료를 발굴 국립문재연구소 문재보존과센로 옮겨, 보존 처리 중이다. 주미 대제국 공사관은 2015년 10월부 복원공사 중이며, 내년 상반기에 박물관의 모습으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李花 259 43 지난 5월 28일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서 울별시지원 금천구분원(분원장 在福) 창립 20주년 기념일이다. 서기 1995년 3월 1일자로 서울별시 자 치구 정구역 개에 따라 구로구 1개의 구 가 구로구와 금천구로 분구가 됨에 따라 구 로구분원이 구로-금천구분원으로 명칭이 바 뀌게 되었다. 1년 1996년 3월 금천구 지 역 종친 대식(大植), 규웅(揆雄), 기상(起相) 그리고 자가 중심이 되어 금천구분원 창립 준비위원를 구성고, 시동, 독산동, 가 리봉동 분를 모체로 여 금천구분원 창립 을 추진였다. 1996년 5월 28일 독산동 중앙가든에서 내 외귀빈과 종친 150여 명이 참석 가운데 전주이씨 금천구분원 창립총를 개최고, 남용(南鎔) 종친을 분원장으로 추대고 정식 으로 발족였다. 금천구분원은 창립 기념으 로 돈종야유를 겸여 건원릉, 숭릉을 참 배였으며, 농촌일손돕기 봉사동을 면 서 숭조돈종을 제일로 는 분원으로 발전 였다. 2002년 제3대분원장으로 용섭(龍燮) 종친 이 추대되면서 분원은 물량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게 되었다. 매월 정기적으로 임원를 마치고, 연수시간을 마련여 <조 선왕조500년사>강좌를 였고, 2003년에는 돈종연수를 삼척 준경묘, 영경묘에서 개최 였고, 이금천장의 설립을 추진였 고, 불우종친 돕기 운동을 벌였다. 또 2005 년에는 <조선 왕조 500년사>강좌 내용의 결 과물을 정리여 <간추린 우리 조상의 발자 취>라는 책자를 국으로 500부를 발간였 다. 이러 분원 동은 종약원으로부 인 정을 받고, 2006년 종약원의 우수분원으로 선정되어, 정기 총석상에서 <금천구분원 기>를 이사장으로 부 직접 수여받았다. 또, 2006년에는 <돈종체육대>를 개최 여 종친과 지역주민 그리고 서울시지원, 각 구 분원 종친들과 께 즐겁게 체력을 단련 서울 금천구분원 창립 20주년을 바라보며… . 이중(李夏中) 서울 금천구분원 자문위원


44 李花 259 시켰다. 2008년에는 7월 1일자로 <全州李氏 衿川報>를 창간여, 종친과 종친간의 사이 를 이어주는 소의 가교역을 고, 종친 간의 종사 정보를 상 교며, 분원동 을 널리 보기 위여 발간였다. 또 2009년에는 진안대군종(장 弘培) 와 돈종약을 맺고, 청덕사춘제, 추제참 반과 정기총, 체육대, 돈종야유 등에 상 참석, 교류면서 숭조돈종을 실천고 있다. 그 뒤를 이어 6대 강식(康植) 분원장, 7대 기(起赫) 분원장을 거치면서, 계속 발 간 <全州李氏衿川報>는 2013년에 와서 창 간 5주년 및 지령20를 맞이였다. 그리고 2014년 서울시지원주최 제7 돈종체육대 에서 종우승을 였다. 2015년, 제8대 분원장으로 취임 재복(在 福) 분원장은 <全州李氏衿川報> 제1부 제20까지를 본여 책자로 간였고, 서울시지원 주최 제8 돈종체육대에서 종 우승을 달성록 단여 금천구분원이 연이어 2년 우승을 고, 2연를 거두었다. 우리 금천구분원의 발전상을 좀 더 자세 말면, 첫째로 <간추린 우리조상의 발자취> 발간과 종보이라 수 있는 <간추린 우리 조상의 발자취> 간이다. 둘째, 이금천장 설립운영이다. 이 금천장는 지역 인재양성을 목로 재 까지 초 ․ 중 ․ 고 ․ 대생 30여 명에게 장금 을 지급다. 셋째, 금천구분원 돈종체육대 개최이다. 2006년부 시작된 돈종체육대는 금천구 분원 종친간의 단출 사로 시작였는데, 어느새 서울시지원 체육대의 모가 되어 6째부 중단고 서울시지원 체육대에 적극 참여고 있다. 넷째, <전주이씨금천보> 발간이다. 2008년 7월부 <전주이씨금천보>를 간여 종친 과 종친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역과 종사에 대 의견과 정보교 및 종사동참의 광장으 로 만들고, 우리 분원의 동을 널리 보 기 위서 발간을 계였다. 이 분원보는 <서울시지원보>의 생을 촉진 촉매시켜, 1988년 12월 30일자로 <서울시 지원보>를 창간게 된 계기를 만들었고 선성군대종 보 <宣德>지 간 (1991창간)을 촉진 시켰고, 더 나아가 릉봉 보 <仁德> 지의 간(1998 창간)을 촉매시켰다. 우리 금천구분원이 이렇게 발전고 있는 것은 창립 때부, 재까지 20여 년 간 종 사에 참여 10여분의 원로종친님들이 계셨 기 때문이다. 이 10여분의 종친님들은 금천 구분원 창립때부 20년간 결같이 종사에 신신 분들이다. 우리는 이러 종친분들 의 유지를 높이 사고, 존경면서 박수로 경의를 고 장 세를 드렸다. 또 20여년동안 분원 사무실을 무상으로 임대 주신 종 고문에게는 이 금뱃지를 가슴에 달아 드렸다. 우리 금천구 분원이 이렇게, 2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고, 모범적이며 선도적으로 발전는 것은, 묵묵 참여시는 종친 모 두의 노력과 력의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분원에 대 여러 종친님들의 남다 른 애착과 정성과 집념, 그리고 숭조돈종의 정신이, 요즘 세계적인 AIPha-GO 보다 그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선성군 17대손>


李花 259 45 9. 신궁(神弓) 조, 초를 사랑 감성의 군주 조선은 1392년 7월 17일 역사적인 건국을 다. 새 나라는 기강 립을 위 다양 준칙을 속속 발다. 건국 3일 인 7월 20일, 사부에서 상소를 올렸다. 주제는 임 금의 안일과 욕망 억제다. 내용 중의 나가 꽃 감상 자제다. ‘초(花草)를 완상(玩賞) 는 것은 인성(人性)을 치고 정욕(人情)을 방게 오니 삼가 셔야 니다.’ 초 는 꽃이 는 과 나무다. 또는 꽃이 없더 라도 관상용이 되는 식물을 일컫는다. 완상 은 깊이 빠져 즐기는 것이다. 사부는 아름 다운 꽃과 식물은 임금이 어진 심성을 도야 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지극 사적인 취에 빠져 중심을 잃게 되니 가까이 지 말라는 청을 것이다. 신가 본 새 나라, 새 군주의 덕목 중 나가 ‘꽃 관람 금지’였 던 셈이다. 이에 대 건국 군주 조는 “알 았다”고 즉답 다. 조는 늘이 내린 무인(武人)이다. 잘 쏘는 민족의 역사에서도 전무무 신궁 (神弓)이다. 고구려를 건국 동명성왕, 당나 라 종 이세민의 눈을 명중시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 등을 뛰어넘는 걸출 명사수 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용비어천가 등에 기록된 조의 솜씨는 가 천의무봉(天衣 無縫)이다. 늘의 선녀가 입은 옷은 바느질 적 없이 완벽다. 과녁을 명중시는 조의 솜씨가 그랬다. 수많은 신궁의 기록 조선의 왕, 놀이와 만나다(9) 이상주(李相周) 본원 문부위원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북극성의 거룩 를 받은 임금은 늘을 대신 땅과 사람을 다스리는 존재다. 천의 지는 왕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의 백성은 왕의 신가 아닌 경우가 없다. 왕 은 온 세상을 쥐락락 는 권력을 쥔만 업무도 과중다. 지위에 따른 역을 야 다. 왕은 버거운 업무에 지치고, 사람 관계에 스레스를 받았다. 이때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중 나가 놀이다. 조선 왕들의 놀이에 얽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집자 주>


46 李花 259 중 세 가지만 살다. 첫째, 건적과의 전다. 1362년 고려 수 도 개경이 건적에 의 락됐다. 고려군 의 반격이 시작됐다. 20만 명의 고려군이 개 경을 위다. 총사령관은 정세운이고, 주요 장수는 조를 비롯여 최영, 이여경, 안우, 이방실 등 당대의 명장들이었다. 고려군은 건적의 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다. 적 의 정예부대가 진 동문을 공격 승기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27세인 조는 살로 말을 적장을 거 쓰러뜨리는 신기를 과 시며 궁성에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둘째, 요동 정벌이다. 1370년 조와 지용 수가 지는 고려군이 오녀산성에서 동녕 부 추장 고안위를 위다. 고안위의 저 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려군의 군량미가 바닥 났다. 조가 나섰다, 전(애기살) 70개로 성곽을 지는 70명의 군사를 모두 명중시켰 다. 셋째, 왜구 격다. 1380년 남도를 노략질 던 왜구가 고려군의 반격에 지리산으로 숨 어 들었다. 왜구의 장수는 16세 소년 아기발 도(阿只拔都)였다. 용감 그는 10배나 많은 군사력을 바삼아 고려군 진영을 거 돌 다. 그는 철갑 갑옷과 얼굴까지 가린 구 를 쓰고 있었다. 살이 그의 몸을 뚫을 수 가 없었다. 조는 로 아기발도의 구 끈 을 맞췄다. 이 충격으로 아기발도의 입이 열 렸고, 이지란의 살이 입을 꿰뚫었다. 전라 북도 운봉에서 벌어진 산전다. 고려 말 란기를 수습고, 백성에게 꿈 을 주는 나라를 건설 조의 가장 은 로 대되는 무력이다. 강 군사력으로 원, 명, 여진, 왜 등 주변 국가들의 위으로 부 백성을 지 수 있었다. 조는 ‘을 든 님’으로 상징된다. 역사가 기억는 신궁 으로 대업을 이룬 영웅이 꽃이나 나무에 빠 지지는 않을 듯다. ‘꽃 관상을 자제 소 서’라는 사부 상소에 대 “알았다‘는 짧 은 마디는 당연 듯 보인다. ‘을 든 영웅’과 ‘꽃을 든 남자’ 지만 ‘을 든 영웅’에게는 ‘꽃을 든 남 자’의 감성도 있었다. 조는 임금이 된 뒤 산적 국사를 처리야 다. 말 달리며 천 를 령고, 창공에 을 쏘며 웅대 부를 치던 기상을 구중궁궐에서 나라 운영 에 대 고민으로 전야 다. 책을 읽어 야 고, 격식을 차려야 고, 수많은 결재 서류를 인야 다. 새 나라 건설 주역들 의 다채로운 역관계, 새 나라 건설 동참을 거부는 고려의 유신들, 여전 계속되는 명과의 갈등, 눈 여겨봐야 는 여진과 왜의 동 등으로 마음 날이 없었다. 왕의 일은 그야말로 만기(萬機)였다. 야 일이 1만여 개라는 의미다. 그런데 건국 군주에게 만기는 단순 업무 과다가 아니다. 신에게 치의 빌미도 보 여서는 안 되는 의미도 있다. 만기(萬機)의 출처는 서경이다. 나라 우임금의 신에 고요모가 있다. 그가 우임금에게 아뢰었다. “삼가고 두려워 소서. 제들에게 안일과 욕심의 빈을 용지 마소서. 루 이 사이에도 만기입니다.” 고요모는 만기를 만 가지 기미로 썼다. 왕의 동들은 미세 기 미에 불과 지만 자칫 돌이 수 없는 결과 를 가져올 수 있음을 말 것이다. 임금은


李花 259 47 언을 삼가고 조심 치의 빈도 보이 지 말라는 조언이다. 조는 냉각되는 명나라와의 정치적 갈등 을 결고, 백성의 삶의 질 개선 비전을 실천고, 개인적으로도 ‘의 모범’이 되는 생을 야 다. 세상을 바꾸고, 더 좋은 나라를 건설야 는 임금은 늘 고민다. 열과 께 스레스가 쌓이는 삶이었다. 왕의 부담을 잘 아는 이는 주변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임금의 그림자와 같은 관이다. 루는 관 김사이 깊은 고민을 는 임 금을 각정으로 안내다. 개경의 각정에 는 아름다운 꽃이 어 있었다. 왕은 모처럼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고 작은 꽃 들이 사게, 수줍게 자를 뽐내고 있었 다. 예쁜 꽃들의 아름다운 기는 가슴을 조 용게 다독여줬다. 초와의 대를 링을 왕은 안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름다움, 링은 중독성이 있다. 왕은 식이 요 때마다 꽃밭이 눈에 어른거렸 다. 왕은 1년 11월 10일 각정 수리를 명 다. 1년 뒤인 2년 6월 3일 각정을 다시 정 비도록 다. 초 링을 위 원(花園) 을 찾은 뒤의 조치였다. 제대로 된 꽃밭을 꾸미겠다는 의지다. 김사은 색 각정 을 깔끔게 수리고, 정원도 새롭게 단장 다. 신는 군주의 취미에 관여지 말라 임금은 새로운 꽃밭을 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공사 진척 과정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각정은 궁궐 밖에 있다. 왕이 궁궐 을 비우고 원공사 장을 가거나 꽃구경을 는 것은 쉽지 않다. 왕은 측근들도 모르게 잠적다. 가끔 임금의 소재 악이 안 되는 사가 발생다. 왕은 각정에서 꽃을 감 상곤 다. 조실록 2년 7월 19일에는 ‘임금이 미(微行)으로 원(花園)에 가셨다’ 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각정 수리 상을 직접 인고, 꽃 감상을 위 미에 나선 것이다. 왕은 장에서 건설 비용, 나무와 꽃 의 종류, 돌의 배치 등을 보고 받는다. 또 비 용의 과다 지출 여부도 인다. 장 인 을 임금은 수고는 사람들을 위 잔치 를 베었다. 이 보다 달 전인 6월 7일에는 좌산기상 시(左散騎常侍) 안경검 등 간관들이 원 공 사 중지를 요청다. 산기상시는 국왕에게 조언, 왕의 정에 대 수정 요구, 법제 제 정, 관리임명 동의, 과거의 고시관을 담당 고려의 관직이다. 조선건국 직에는 고려의 제도가 이어졌다. 조는 간관의 주장에 ‘군 주의 취미에 관여지 말라’며 단칼에 거절 다. “임금을 궁궐 안에만 머물게 려는가. 각정은 고려 왕조에서 만든 원이다. 원 을 유지며 새롭게 정비 관상을 려는 데 잘못된 일인가. 나라의 안위에 관계된 일 이 아니면 앞으로 말지 말라.” 조가 좋아 꽃과 나무는 무엇일까. 왕 이 정 꽃을 유별나게 좋아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를 왕의 마음을 잡은 초 를 짐작 수는 있다. 먼저, 꽃과 과실이 께 있는 배나무다. 신 궁인 조는 배나무에다 솜씨를 자랑다. 조실록 총서의 기록이다. ‘잠저 시절에 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고 과녁에 을 쏘았다. 배나무가 백 보(步)밖에 서 있


48 李花 259 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개 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이 조에 게 쏘기를 청다. 번 쏘니 배들이 다 떨 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다. 여러 손 님이 복다.’ 왜구를 격 산대첩의 고 전라북도 에는 조와 배나무의 사연이 배어 있다. 진 안 마이산, 임실의 성수산 청실배나무는 왕 이 되기 전에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 실배나무는 국 산종으로 진안 마이산, 정읍, 임실 성수산에서만 발견된다. 또 조 는 건국에 기여를 무대사가 명상 던 굴에 석왕사라는 절을 세우고 주변에 배나무를 직접 심었다. 왕과 인연이 깊은 배 나무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왕조시대의 영광 을 생각고 있다. 만월문을 지나면 둘레 아름 반에 이르는 돌배나무 고목 그루가 오늘도 나이를 세고 있다. 배나무와 버드나무를 사랑 임금 다음, 신덕왕와의 사랑을 맺어준 버드나 무다. 잠저 시절에 길을 가던 조는 목이 말랐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다. 여인은 주박에 우물을 뜬 뒤 버드나무 잎 을 띄웠다. 의아 는 길손에게 여인은 말 다. “급 오신 에 바로 물을 드시면 체 수도 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드시도 록 버드나무 잎은 올렸습니다.” 지로운 그 여인이 신덕왕 강씨다. 버드나무는 아스 린의 원료가 된다. 라스는 임산부 의 증 소책으로 버들잎을 씹도록 다. 버드나무는 소염, 진, 균, 배뇨, 신경쇠약 소, 우물정 등의 다양 약가 있다. 우 물가의 여인이 버들잎은 띄운 것은 균을 의식 위일 수도 있다. 조는 천의 신궁으로, 고려 말의 란 기를 잠재우고 새 나라 조선을 건국다. 백 성을 사랑는 따뜻 마음과 정세를 보는 예리 단력도 지녔다. 그러나 강 면만 이 조의 모습은 아니다. 꽃과 나무를 사랑 는 섬세고, 감성적인 면도 간직 따뜻 인간적 면모의 임금이었다. <밀성군 19대손> 전 사기매 방지를 위 안내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을 사칭거나 종친의 산기관 또는 종친의 임직원인 것처럼 가장 여, 전국의 종친들께 영상물 및 책자, 가 등을 매는 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본원에서는 모든 간물과 제작물은 반드시 이보에 공지고 있고, 각 지원과 분원, 종, 봉 등을 여 보고, 또 보급고 있으며, 절대로 전를 이용여 매위를 지 않습니다. 영상물이나 책자 구입에 대여 전 안내를 받은 종친은 반드시 종약원에 인시기 바라며 시 그것들을 받으신 분은 발처나 발송처로 반송시어서 더 이상의 를 입는 종친들이 없도록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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