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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이화보, 2023-04-12 22:02:22

이화 266호

이화 266호

Keywords: 전주이씨,이화

宗 訓 崇 祖 惇 宗 차 례 2. 권두언 4. 본원 소식 15. 지원 · 분원 · 종 · 봉 소식 19. 종묘답사기 ……………………………… 본원 문부 위원 이승종(李承鍾) 25. 종묘 추대제 3대(三代) 봉무 이야기 ……………………………… 본원 전례부위원 이병(李炳學) 27. 승경원 건립을 위 나의 제언 ………………………………… 의릉봉장 이남식(李南植) 28. 옥계도정 농맹아(聾盲啞)공 신도비의 예술성 … 익안대군 익부원군종 총무이사 이상구(李相九) 32. 연산군 숭모 중추절 작례를 마치고 ……………………………… 연산숭모 장 이은(李殷浩) 33. 만로 보는 역사이야기 80 ………………………………………………………… 이전경(李田景) 35. 준경묘(濬慶墓) 참배 ………………………… 경기도지원 문이사 이보(李輔澤) 37. 영친왕과 의친왕을 본 명칭으로 정명(正名) 드려야 …………………………… 본원 제2문이사 이승창(李承昌) 40. 추계 여 및 숭조돈종 종묘추대제 참관 ………………… 충북 충주시분원 자문위원 이영(李瑛薰) 42. 전주이씨도청년 조상의 발자취를 찾다! …………………………… 제주도 계성군 청년장 이철 44. 2017년도 뿌리교육 소감문 …………………… 국외국어대교 1년 이소정(李昭定) 47. 고양 칠공자 묘와 연산군 금비 ……………………………… 본원 문부 위원 이병준(李炳俊) 51. 조경재 건립기금 모금 성자 명단 56. 2017 사직대제 봉위원 및 제관명단 58. 2017 구대제 제관명단 59. 2017 칠궁제 제관명단 61. 2017 종묘추대제 봉위원 및 제관명단 64. 별원원 가입을 영니다 ▲ 2017년 11월 4일에 봉 종묘추대제 2017 / 11·12월 격월간 李花 (권 266) 발인/이섭 집인/이범직·이승창 발처/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소/서울 종로구 돈문로 89 우번/03131 전/(02)765-2124 스/(02)742-1676 인쇄인/이관우 인쇄처/동아문사 전/(02)2267-2775 발/2017년 11월 1일 등록/1973년 12월 31일 이지(http://rfo.co.kr) 이메일([email protected]) 값 2,000원(1년 정기구독 10,000원)


2 李花 266 권두언 이성재(李聖宰) 본원 부이사장 종친 여러분 안녕시지요. 가을 단 물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입동이 지나고 대설을 앞두고 있습니 다. 다난던 도 마무리를 지어야 때입니다. 그동안 바쁘고 들었던 일상을 잠 시 미뤄두고 정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전주이씨는 선조의 얼을 받들어 수신제가고 이웃과 나라에 봉사며 숭조돈 종을 실천고 있습니다. 또 조선왕실과 관련된 수많은 문유산을 지고 보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종친 여러분의 열성적 성원의 결과라 생각니다. , 과거와는 달리 대는 과문명이 발달고 경제력이 성장여 우리나라는 선 진국 수준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을 이루다보니 대인 들은 인문적 소양이 부족여 정신적 위기감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안까운 일입니다.


李花 266 3 그러나 이러 문제의 결을 기대 수 있고 윤리 도덕과 철적 기반이 될 수 있 는 것은 종사에 참여여 숭조돈종을 실천 나가는 종친 동입니다. 조선시대 유 과 성리이 정신적 인성교육의 소양이 되었듯이, 이 시대에 적절 인성교육의 자 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전주이씨는 우리의 중시조이신 조 고제께서 1392년 7월17일 조선왕조를 창건시어 1910년 8월 29일 왜구의 강제병까지 518년 동안 단일민족 단일 성씨로 왕조를 이룬 나라는 세계어디에도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자랑스럽게 생각니다. 위대신 세종대왕님께서 세계 최고의 문자, 글을 창제신 것을 우리 전주 이씨는 물론 온 국민은 자부심과 긍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종약원은 최근 다시 번 ‘전주이씨’의 저력을 인였습니다. 전주에 건립예정인 승경원(承慶院)의 건립 기금모금운동이 전국적으로 산되고 있 는 것입니다. 국내는 물론 외까지 남녀노소를 막론고 십시일반 모금운동에 참여 고 있어 대단 기쁘게 생각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정성과 조가 우리의 본(本鄕)인 전주에 승경원이 세워질 날 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전주이씨의 동심은 과거에도 이관 건립, 장기금 조성, 세손 정착 기금 모금 등 다양 곳에서 발되었습니다. 전국에 계신 종친 여러분의 단된 모습이 종약원의 오늘이 있게 는 것입니다. 이에 보답고자, 종약원은 종친 여러분의 뜻에 부응여 승경원 건립이 조속 시 일 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고 있으며 우리 모두 동참 것을 500만 종친에게 당부 드립니다. 다가오는 망의 새에 종친여러분의 가정에 복 가 되기를 손 모아 기원 니다. <종/령대군 19대손 ‧ 始43세>


4 李花 266 국 민 안 년 감 사 2017 社稷大祭 봉 국가의 안녕과 년을 기원는 2017 사직대제가 문재청과 국문재재단이 주최고 본원이 주관 가운데 지난 9월 23일 요일 오 7시, 서울 종로구 사 직동 사직단에서 봉됐다. 사직대제는 지의 신[社神]과 곡식의 신[稷神]에게 나라의 안과 년을 기원 며 제를 올리는 제례로, 종묘대제와 께 가장 고 중요 국가의례였다. 사직 대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단되었다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 1988년 복원되었고, 2000년 10월 국가무문재 제111로 지정되면서 매년 가을에 봉 고 있다. 금년 사직대제의 봉은 사직대제가 원래 야간에 봉된 점을 감안여 원복 원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매년 시던 어가렬은 실시지 않았다. 이날 제에는 건웅(建雄) 사직대제 예능보유자의 도집례와 복용(福用) 사직대제 이수자의 집례로 1시간 30분 동안 제례가 진되었고, 제이 끝난 제수를 일 반인에게 공개였다. 이날 제관으로는 사 초관 사손, 초관 윤철중, 직 초관 이도수, 직 초관 이갑재 이사가 봉무다. 이번 사직대제는 종로구청, KBS국방송, MBC,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보존, (사)아악일무보존에서 원다. <봉위원 및 제관명단 56면 참고>


李花 266 5 2017 圜丘大祭 봉 고 종 제 즉 위 식 재 사 도 열 려 본원은 지난 10월 14일 요일 정오, 서울시청 광장에서 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 제천의례인 구대제를 봉다. 이번 대제는 금년이 대제국 선 120주년을 기념여 서울시청 광장에 단을 쌓아 구단을 재여 봉다. 대제에 앞서 대실문원 주관으로 오 전 10시 30분부 어가렬, 고천제(왕이 구장복 차림으로 구단에 올라 분 고 제위에 오름을 천제에 고), 고종제즉위식(고천제가 끝나고 제가 군신 의 부축의 받아 금교를 앉고 산 등이 어보를 올리고 삼고두 만세만세만만세 를 외침), 대제국 선식(반조의, 원래는 등극의 다음날 덕수궁 극전에서 야 나 시간과 장소의 제약에 따라 가설 구단에서 재)이 거됐다. 구대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유산이자 중요무문재 제56인 종묘대 제, 중요무문재 제111 사직대제와 께 ‘천지인(天地人)’을 상징는 대적 인 국가 의례이다. 세조 이에 지됐다가 고종제가 1897년 대제국을 선 고 덕수궁 석조전에서 출궁 구단 제단에서 대제를 지냈으며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다. 광복 이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는 복원됐으나 일제가 구단의 제단을 물어버 린 뒤 이 들어서면서 를 잃은 구대제만 복원되지 못으나 2008년부 구대제의 제을 올리고 있다. 구대제는 왕이 늘을 받드는 둥근 제단(구단)에서 늘을 다스리는 신(神) 인 천상제(皇天上帝), , 달, 북두칠성, 별자리 28수(宿), 천둥, 바람, 구름, 오 (五行) 등 16신위에 제를 올리는 의식이다. 정월에는 년을 기원는 기곡제로 지냈고, 동지에는 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의례로 지냈다. <제관명단 58면 참조>


6 李花 266 2017 七宮祭 봉 10월 23일 월 요 일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왕의 생모인 일곱 궁의 신위가 모셔진 칠궁(七宮, 사적 제149) 제이 지난 10월 23일 월요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 재 칠궁에서 봉됐다. 칠궁은 1725년(영조 1) 영조대왕의 생모이자 숙종대왕의 궁인 숙빈 최씨의 신 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년(고종 19) 불 없어진 것을 이 듬 다시 세웠으며, 1908년 저경궁(儲慶宮,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 대빈궁(大嬪宮, 경종의 생모 옥산부대빈 장씨), 연궁(延祜宮, 추존왕 진종의 생 모 정빈이씨), 선궁(宣禧宮,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생모 목유비박씨) 등 5개의 묘사(廟祠)를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다가 1929 년 덕안궁(德安宮, 영왕의 생모 순귀비엄씨)도 옮겨 와서 칠궁이라 였다. 이날 제에는 상(商訓) 전례부 차장과 병(炳學) 전례부위원의 집례에 따라 405명의 종친이 참반 가운데 봉됐다. , 칠궁은 지난 2001년 칠궁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2005년부 매년 10 월에 봉고 있다. <제관명단 59면 참조>


李花 266 7 2017 宗廟 秋享大祭 봉 11월 4일 요 일 2017년도 종묘추대제가 11월 4일 요일, 종묘 영녕전과 정전에서 봉됐다. 종묘추대제는 문재청 국립무유산원이 주최고 본원이 주관 가운데 종 묘제례악보존와 사단법인 아익일무보존 원으로 봉됐다. 그동안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는 종묘대제가 국제문사로 추진는 과정에서 본래의 제례의 존엄성과 중요성이 잃어가고, 관광객 및 내빈 위주의 사로 치러지고 있어, 1975년 중요무문재 지정과 아울러 2001년 유네스코 무 유산으로서 가치를 보존 계승기 위여 연 2에 걸쳐 종묘대제를 봉기 위 본원에서 수차에 걸쳐 문재청에 건의 결과 2011년도부 매년 11월 첫 째 요일에 봉기 시작다. 금년 종묘추대제는 오전 10시부 12시까지 영녕전에서, 오 1시 30분부 4시까지 정전(공신당, 칠사당)에서 상(商訓) 전례부차장과 기전(基田) 종묘제례 기능보유자의 집례로 사손이 정전 1실 초관으로 봉무여 원대로 봉 다. 이번 대제에 사용된 제수 찬은 민속주왕주의 왕주 12말과 울창주 1.5말, 국순당의 차례주 56박스를 기증고, 우덕 이사는 40개를 기증다. <봉위원 및 제관 명단 61면 참고>


8 李花 266 제668 상임이사(2017. 11. 22) 본원, 종 10기 종묘․사직․구대제․왕릉 제 전수교육 수료식 거 제667 상임이사(2017. 10. 26) 본원 소식 ◎ 의 안 ․ 2017년 종묘추대제 봉의 건 ◎ 의 안 ․ 2018년 예산 성 지침(안) 및 사업계 제출 심의의 건 ․ 제203 이사, 송년 개최의 건 ․ 2018년 사직대제 봉일자 변경의 건 본원은 지난 11월 11일 요일 정오, 본원 강당 에서 2017년도 종묘․사직․구대제 및 왕릉 제 전수교육 종10기 수료식을 거다. 이 교육은 2017년도 본원 및 종묘제례보존 사 업계의 일으로써, 문재보법 제41조 제2 의 규정에 의여 중요무문재의 전수 및 보존 을 위여 중요무문재의 보유자가 그 보유 기 능 또는 예능의 전수교육을 실시는 것이다. 종묘제례는 2000년도에 처음 교육을 실시고, 사직대제는 2004년도에 각각 실시 오다가 2008년도부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전승교육을 여 종1기생을 배출고, 2009년도부 종묘, 사직, 왕릉제 교육을 실시고, 2012년부 구대제 추가 교육 왔다.


李花 266 9 본원, 2017년도 종장 의 개최 서울별시지원, 제10 돈종체육대 개최 이번 종 10기 교육은 금년 4월 22일에 개강여 11월 11일까지 매주 요일 28주에 걸 쳐 매 5시간씩 140시간을 실시여 48명의 수료생을 배출다. 이날 수료식에서는 시 성 적 우수자로 이강문, 이장길 씨가, 모범 수료자로 이찬 씨가 창장을 받았다. , 종10 기 교육생 일동은 본원 강당에 전자벽시계를 기증다. ■ 수료생 (48명) 명단 김광연 변미숙 복익채 이강문 이강오 이건 이경근 이고근 이광재 이광 이긍열 이기영 이남 이남 이대 이덕 이동균 이동근 이만근 이상은 이석장 이순천 이승문 이승우 이승욱 이영구 이영수 이영 이왕 이원근 이윤 이장길 이종갑 이종배 이준우 이찬우 이철수 이찬 이 이성 이은갑 이종 이영 이은석 이 이찬 이재원 이재 본원은 11월 14일 요일 오전 11시, 본원 강당에 서 2017년도 종장 의를 개최다. 이날 의 는 섭 이사장을 비롯 본원 임원진과 52개 종 에서 장 등이 참석 가운데 종약원 운영사 보고, 종 정기총 개최 및 결과 보에 대 안내, 승경원 건립 추진 경과와 종 성 납부 을 전달다. 서울시지원(지원장 明俊)은 10월 22일 일요일 오 전 10시, 서울 금천구 독산동 소재 두산초등교 운동장에서 9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제10 돈종체 육대를 개최다. 명준 지원장의 개사, 섭 이사장의 축사에 이 어 구 청년이사와 고순복 여성이사가 대선서를, 기송 이사의 인솔로 준비체조를 마치고 원로 종친 을 위 선리기 게임을 시작으로 달리기, 굴 렁쇠굴리기, 제기차기, 줄다리기, 박리기, 구 등 다양 경기를 였다. 이번 대에서는 구로구분원이 우승기와 상금을, 금천구분원이 준우승, 강서구분원이 3등상 을 받았고 운권 추첨 상으로 대장(명준 지원장)은 대김치냉장고를, 명예대장(재천 전 서울시지원장), 섭 이사장, 사손은 대고급 벽시계를 찬으며 원로종친, 부지원장, 임원, 분원장, 종친 등이 60여 종의 운상을 기증다. <서울시지원>


10 李花 266 대구광역시지원, 종친 돈종 개최 경기 주시분원, 조직 성 위 공무원 청년 구성 장금 기 종친(2017. 9. 1 ~ 17. 11. 20) 기일자 기자 금액 비고 10. 26 진(和鎭, 령 16) 20,000 대구시지원(지원장 鍾達)은 10월 18일 논메기 식 당에서 종친 돈종를 개최다. 이날 돈종에는 고문, 분원장 등 70여 명이 참석 가운데 숭조돈 종 정신으로 는 루를 보내며 2부 사에 서는 정신(正信) 종친의 마술쇼를 관람다. <대구시지원> 경기 주시분원(분원장 元周)은 11월 13일 월요 일 18시 30분, 분원 조직 성를 위여 주시 관내 근무고 있는 종친 공무원들로 구성된 ‘공무 원청년’를 조직였다. 관내에는 200여명에 이르 는 종친 공무원들이 분야별로 근무를 고 있는 것 을 착안여 공무원들로 구성된 청년를 조직 것이다.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종친이라기 보다 는 민원인이라는 인식이 많고 시 종친이라는 이 유로 각종 청이나 업무에 지장을 초래 것을 우려고 종친는 부친만이 참여는 것으로 인식는 경우가 많아 이를 불식시고 재 진이면서 미래지적으로 언제든지 종친에 참여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수 있도록 는 계기를 마련주고자 노력을 것이다. 사에는 소령원수길원봉장 승중(덕양군 12대손), 부분원장 성렬(주시산림조장, 완 원군 18대손), 부분원장 천재(전 경기도청 국장, 령대군 19대손), 차기 분원장 대(완원군 17대손), 청년장 찬근(안군 16대손), 총무이사 익선(임언군 16대손) 등 10여 명과 주시 청 공무원 치선(임언군 16대손), 법주(덕천군 18대손), 주(안군 16대손) 등 10여명을 20명이 참석였고 참석 공무원 종친들에게는 ‘이’ 뱃지를 분원장이 직접 달아 주었으며 상 유대를 강면서 숭조돈종을 적극 실천 나가기로 였다. <경기 주시분원> 재단법인 이장


李花 266 11 경기 고양시분원, 계단대 개최 9.20 영산군종 9.27 온녕군종 9.28 서울 강서구분원 10.26 종10기 일동 10.26 계성군종 10.26 정석군 원공종 승경원 건립기금에 동참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10.26 릉봉 11.14 소세자종 경기 고양시분원(분원장 忠九)은 지난 7월 27일 목요일 정오, 120명의 종친이 참석 가운데 마상 로 싱싱어에서 계단대를 개최다. <경기 고양시분원> 본원 방문 (승경원 성금 기)


12 李花 266 炳俊 종친, 세계문상 대상 수상 芝英 종친, 이박사 위 취득 알 림 본원 산 단체장(지원장, 종장, 봉장, 분원장 등)이 변경된 경우 이름(자), 대수, 종사경력과 직, 연락처를 사진과 께 보내주시면 본보 동정 인사란을 신설여 게재 예정입니다. 우이나 메일([email protected])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동 정 경동(卿東, 종/령군 16대손) 부이사장은 지난 11월 21일, 국립대 미술관 서울관에서 문체육부가 선정 ‘2017년 문예술발전공로자’로 선정되어 관문장을 받았다. 경동 부이사장은 양천문원장, 서울시 문원연장, 국문원연장을 역임며 지역문의 다양 동 으로 지역의 문발전에 기여 공을 인정받았다. 령군종장, 본원 부이사장으로 종사에 참여고 있다. 영광의 얼굴 병준(炳俊, 종/온녕군 17대손) 종친은 지난 10월 23일 (사)세계문인 에서 주최 제12 세계문상에 ‘경과 족자의 운명’이라는 제목 의 수로 대상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장 어머니 상>을 (사) 세계문 인 최초로 제정여 동시에 수상게 되는 영광을 안았다. 또 지 난 5월 ‘내 마음자리에 그대가 머물고’ 작집을 출여 시 중에 있 으며, 재 본원 문부위원이며, 온녕군종 감사, 온녕군 산군 종중 사무장으로 종사에 참여고 있다. 지영(芝英, 종/성녕대군 19대손) 종친은 1974년 생으로 숙명여대와 동 대원을 졸업고 이박사 위를 받았다. 재 성균대교 연구 교수로 재직고 있으며, 부친 재순(在淳) 종친은 순천시 분원 전례이사 이다. <전남 순천시분원> 卿東 부이사장, 관문장 수


李花 266 13 正基 종친, 군단장 취임 哲熏 종친, 군대령 진급 俊浩 종친, 군대령 진급 相培 종친, 광주시 전략산업본부장 취임 정기(正基, 인성군 12대손, 육사 41기) 종친은 1962년생으로 1985년 3 월에 임관여 제5사단 27연대장, 이라자이사단민사조본부장, 아 칸재건지원단장, 미연사작전처장, 제32보병사단장, 제2작전사령부 참 모장을 역임고, 중장으로 진급 지난 9월 29일 육군 제7기동군단장으로 취임다. 부친은 고 지용(智鎔)씨다. <인성군종> 철(哲熏, 도조/완창대군 20대손, 사 47기)은 지난 9월 군대령으 로 진급다. 국방대원과 군대을 수료고 재 단국대교 대 원에 재중이다. 부친 근(亨根) 종친은 전남 순천시분원 부분원장이 다. <전남 순천시분원> 준(俊浩/俊鏞, 조/의안대군 15대손, 사 50기) 종친은 지난 9월 군 대령으로 진급다. 부친인 규성(圭成, 경영박사, 사 24기) 종 친도 군대령으로 예여 충남 아산시 분원 이사로 참여고 있다. <충남 아산시분원> 상배(相培, 정종/진남군 19대손) 종친은 전남대대원을 수료고 영국 런던대교(UCL) 도시재생분야를 전공, 1988년 제3 지방고등고시에 격여 최초로 광산구 지방건축 사무관으로 봉직다. 도시계기술 사, 조근정장을 받았으며 재 광주광역시 전략산업본부장으로 근무 고 있다. <진남군종>


14 李花 266 宗宣 종친, 자부 사무관 승진 珍珩 종친, 뇌전증 치료제 연구 병진 종친, 조고제역 맡아 恩知 종친, 국제배드민대 복식우승 종선(宗宣, 조/익안대군 19대손) 종친은 지난 6월 정자치부 사무관 으로 승진다. 부친 명래(明來) 종친은 경남지원 사무국장을 역임고 재 경남지원 부지원장으로 종사에 참여고 있다. <경상남도지원> 진(珍珩, 성종/견성군 17대손) 종친은 미국 스드의대 신경과 겸 스드공대 바이오공과 교수는 뇌 연구가로서 일부 뇌 질 연구를 끝내고, 내년 3월에 첫 제으로 뇌전증 치료제를 출시다. 진 종친은 서울대 전기공과를 졸업고 스드대에서 전기공 석, 박사를 받았다. 부친은 민우(民雨) 종친이다. 병진 서울 성동구분원 부분원장은 지난 10월 26일 성동문재단이 주 최고 서울 성동구 일대에서 개최된 성동문축제에서 조고제 역 을 맡아 성동구청장과 께 서울숲-뚝섬역사거리-살곶이체육공원에 이 르는 사냥차 레이드에 참여다. 은지(恩知, 중종/덕양군 16대손) 종친은 창덕여고 1년생으로 지난 11월 13일부 19일까지 열린 밀양 원천 요넥스 코리아 주니어 오 국제배드민대에 13개국 1,100여 명의 선수가 참여 가운데 17세 이 복식에서 우승여 금메달을 차지다. 용섭(鏞燮) 본원 고문 의 손녀이다. <덕양군종중>


李花 266 15 지원·분원 소식 지원․분원명 (지원․분원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 진 광주 동구(承鳳) 27 17.4.28(금) 11:00 지원 의실 45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明鎬 신임 분원장 ① 전남 완도군(澈) 30 17.7.15() 11:00 완도읍사무소 70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② 종·봉 소식 종․봉명 (종․봉장) 수 일시 장소 참석 인원 중요의제 사 진 완대군(東宰) 31 17.6.18(일) 11:00 묘량복지관 400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③ 계성군(容輝) 2017 17.10.22(일) 종 사무실 66 △예산 결산 사업계 승인 △임원 개선: 坤雨 신임 장 제봉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在位者 主 管 祭 官 名 사진 자료 初獻官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光海君墓 光海主 妣 文化柳氏 8.22 정오 경기도 남양주시 송릉리 200 광주숭모 (장 載天) 輔兢 柳三鉉 富鎔 洸鎔 福用 鍾祐 承鎔 範春 道宰 載興 柱燁 武鎔 鎬昱 ④ 徽陵 莊烈王后 趙氏 (仁祖大王 繼妃) 9.20 정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110 장릉봉 (장 演柱) 義鎔 丙天 趙源峽 鎬昱 愚弘 範春 宗祐 載興 載永 柱燁 明承 道宰 亨洙 在鎬 ⑤ 孝陵 仁宗大王 仁聖王后 朴氏 9.27 정오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300 릉봉 (장 忠九) 鏞燮 愚弘 朴勝秀 富鎔 應林 福用 起鐘 載興 俊在 和用 光九 殷雨 錫雨 南懋 ⑥ 懿陵 景宗大王 宣懿王后 魚氏 10.1 정오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60 의릉봉 (장 南植) 규대 周秉 어범식 光敎 선구 김경선 제 기종 진구 관우 수 부열 錫雨 욱 ⑦ 洪陵 明成太皇后 閔氏 (高宗太皇帝后) 10.8 정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260 릉봉 (장 東宰) 皇嗣孫 種祐 閔在植 厚源 洸鎔 羲天 富烈 鎬稙 柱燮 杓儀 起先 廷傑 亨洙 鎬昱 ⑧ 宣陵 貞顯王后 尹氏 (成宗大王 繼妃) 10.11 정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258 선순릉봉 (장 錫雨) 근우 달 윤용 명승 준구 우 수 수 승구 진우 도 용우 동성 仁陵 純祖肅皇帝 純元肅皇后 金氏 10.20 정오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200 인릉봉 (장 東宇) 福用 鎬昱 金澈東 富鎔 益柱 宗林 富烈 尙馣 鎔太 明承 讚鎬 在鎬 道宰 義基 ⑨ 敬陵 德宗大王 昭惠王后 韓氏 10.21 정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428 경릉봉 (장 柱英) 창 구 용석 윤 곤우 찬 관우 백 구 석우 상국 교성 병 ⑩


16 李花 266 廟壇陵 園號墓 尊 號 日 時 場 所 在位者 主 管 祭 官 名 사진 初獻官 자료 監 察 亞獻官 贊 者 終獻官 大 祝 典祀官 陵 司 祝 史 齋 郞 執尊者 執事者 謁者 解說 光陵 世祖大王 貞熹王后 尹氏 10.27 정오 경기도 남양주시 부리 510 광릉봉 (장 鎬應) 皇嗣孫 鎬根 尹寧達 厚源 輔兢 潤鎬 鍾明 杓儀 鎬瑾 光在 燦鎬 正在 鍾祐 ⑪ 齊陵 神懿高皇后 韓氏 (太祖高皇帝后) 10.29 정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370 제릉봉 (장 弘培) 鐘根 準學 韓昇煜 鎬洛 明九 潤鎬 鍾國 鍾城 義榮 仁國 來秀 炅在 賢秀 鎬昱 翼陵 仁敬王后 金氏 (肅宗大王妃) 11.1 정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270 익릉봉 (장 泰鎬) 金達中 東九 盛柱 鎔太 揆榮 俊在 宗林 金容福 富烈 海昌 廷傑 金辰洙 道宰 在鎬 ⑫ 莊陵 端宗大王 11.10 정오 강원도 영월군 영리 200 장사릉봉 (장 載天) 昌鎔 明承 鄭允根 富鎔 嚴大鉉 福用 範春 載興 俊在 性圭 鎔太 讚浩 道宰 在鎬 ⑬ 릉 제 : 집례 炳學, 찬례 商訓, 집준 宗林, 근시 道宰‧, 龍宰 광릉 제 : 집례 鎬洛, 찬례 炳學, 좌장례 龍宰 , 우장례 龍宰, 근시 承允‧勝在, 집준 鎔太‧讚浩, 찬인 華永 ①광주 동구분원 ②전남 완도군분원 ③완대군종 ④광군묘제 ◇ 전 사기매 방지를 위 안내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을 사칭거나 종친의 산기관 또는 종친의 임직원인 것처럼 가장여, 전국의 종 친들께 영상물 및 책자, 가 등을 매는 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본원에서는 모든 간물과 제작 물은 반드시 이보에 공지고 있고, 각 지원과 분원, 종, 봉 등을 여 보고, 또 보급고 있으며, 절대로 전를 이용여 매위를 지 않습니다. 영상물이나 책자 구입에 대여 전 안내를 받 은 종친은 반드시 종약원에 인시기 바라며 시 그것들을 받으신 분은 발처나 발송처로 반송시어서 더 이상의 를 입는 종친들이 없도록 당부드립니다.


李花 266 17 ⑤릉제 ⑥릉제 ⑦의릉제 ⑧릉제 ⑨인릉제 ⑩경릉제 ⑪광릉제 ⑫익릉제


18 李花 266 ⑬장릉제 ⑭숭릉제(10.7) ⑮공릉제(10.15) ◯16릉제(10.24) ◯17순창원제(11.8) ◯18대빈묘제(11.9) ◇ 장기금 모금 안내 ◇ 全州李氏를 대는 장재단인 이장는 정신과 숭조돈종 사상이 철 진양성을 위여 1987년 4월 1일자로 서울별시 교육감으로부 재단법인 이장 설립 가를 받았 습니다. 재까지 기본금 14억 여 원이 모금되었으며 연 인원 1,389명 생에게 장금을 지급 였습니다. 본원에서는 장의 성 방안으로 기본금 20억원을 모금여 진양성을 위 장 을 넓고자 노력고 있습니다. 이에 이장기금 모금에 동참실 개인이나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드립니다. 국민은 817-01-0254-362 (예금주 : 재단법인 이장)


李花 266 19 종묘답사기 이승종(李承鍾) 본원 문부 위원 결식 등 별 일정이 없는 주말의 여 유로운 시간은 덤으로 얻은 것 인양 같은 짬 임에도 쫓기지 않는 오래 간직고 별 이 있다. 상냥 이발사의 정성스러운 가위질에 매 료되어 단골손님이 된 뒤로 정기적(?)으로 들 러 이발을 늘어진 시간을 중부교육지 원청에 근무면서도 10분 남짓 지척에 있 는 종묘를 찾지 못 게으름을 벌충 소중 기로 삼았다. 종로3가역과 인접 종묘공원은 대식 주차공간으로 빈번게 드나드는 차량을 곁 에 두고 공사장으로 변여 공간이 많지 않 은 나무그늘을 찾아 릴없는 시간을 때우는 수많은 노인들의 쉼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때 잘 나가던 산업 전사들의 떠들썩 여 론광장이자, 생동감 없는 메마른 식의 장 소였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짙은 장을 고 이들과 수작을 거는 대 어(解語 花?)들의 적나라 모습은 인류문유산인 종묘 앞길을 차단다시 여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일순 당게 다. 외국인을 비롯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종묘 주변을 노인들의 적절 식공간과 쾌 적 관광코스로 개발 과적인 정비 방안 은 정녕 없는 것인지? 정전 : 공적이 뛰어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모셨다 종묘는 종묘공원에서 외대문 담 나만 지나면 씬 안락 식공간이 있건만, 좁 디좁은 공원에 다닥다닥 붙어않은 노인들의 답답 모습은 만주의 극심 년을 여 남쪽으로 난을 간 왕룽 일가가 어느 부잣


20 李花 266 집 담벼락에 덧대어 겨우 기식(寄食)는 그 모습과 너무나 사다. 북악을 주산으로 여 법궁 경복궁을 앉 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리에 따라 궁 궐의 왼쪽인 동쪽에 나라를 창건 조를 모신 묘인 종묘를 배치고, 오른쪽인 서 쪽에 지를 관장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관장는 직신(稷神)을 모신 사직단을 두어 양궁궐 배치를 완성으니, 고대 중국의 전적 도성구성계을 따른 것이다. 삼국을 일고 반도의 일국가로 오백년을 지속 고려가 체제모순과 대외적 여건을 극복지 못고 봉건왕조의 말기적 증상을 보일 때 난무 십자왕위 도참설은 남경(南京)인 양을 중심으로 이씨(李氏) 왕조의 출을 일찍이 예언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도참설을 차단고자 양에 무성게 자란 오얏나무를 베어버리는 임무를 부여 관리, 벌리사(伐李司)를 견 까지 였으나 끝내 조선왕조의 출을 막지 못으니, 도봉구 번동은 무성게 자란 오 얏나무를 베어버리는 임무를 띤 벌리사에서 유래된 별 지명이다. 대청 정갈 단에는 오얏나무의 농익 은 붉은 열매는 7월의 염천(炎天) 아래 족 (血族)이란 가늘고 긴 연(緣)을 고 내 가슴 을 뭉게 고들었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종묘 유의 엄숙 분위기가 느껴지고 깔끔게 정비된 출입로 에는 종묘를 찾은 관광객들의 사뿐 발걸음 이 조용게 수놓아 진다. 박석을 정연게 깔아 신령들이 다니는 신로는 왕릉의 참도(參道)와 같은 맥락이다. 종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대 청은 제례에 바칠 , 축문, 백을 보관고 제례를 주관는 제관들이 대기던 곳이며, 제례에 종사는 집사들의 집사청도 딸려있 다. 남쪽의 망묘루는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잠시 머물며 선대왕들의 공덕을 기리던 곳이 다. 망묘루 앞에는 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났다는 천원지방을 상징는 연못은 중앙에 둥근 섬을 만들고 연못의 둘레는 정방으로 절도 있게 둘렀다. 전적인 정원의 연못에는 소나무나 꽃이 아름다운 나무를 심는 것이 보이나 망자 (亡者)의 공간을 상징여 나무를 심고 못 에는 물고기를 넣지 않았다. 망묘루 뒤에는 조선왕조의 종묘와는 아 무런 관련이 없을 듯 고려 공민왕과 왕이 몽매에도 잊지 못던 몽골출신의 정비(正妃)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공민왕 신당이 소박 게 자리다. 조선왕조의 종묘에 이색적으로 배된 고 려31대 공민왕은 조선건국과 별 인연이 있다. 경도 영지방에 설치되었던 원나라 의 쌍성총관부를 때 조와 조가 고려군과 세여 잃어버린 영를 는데 공을 세웠고, 공민왕은 조를 동북


李花 266 21 면병마사로 임명여 고려조정에 진출 발 이 마련되었다. 역성명을 여 왕조를 창건 뒤에도 고려 조와 7왕의 묘(廟)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연천군 미산면의 숭의전에서도 그 적을 볼 수 있으니, 지난 세월 최고 치자 를 결코 대지 않는다는 규범적 예우에 대 보상심리는 아닐 런지? 조선왕조 창업당시 성씨를 바꾸는 등 절 손에 이를 정도로 왕씨 성을 가진 수많은 사 람들을 참게 도륙던 역사의 멍울을 공 민왕 신당에서 아이러니게 다시 돌아보게 다. 대청에서 선대왕의 공덕을 기린 임 금과 세자가 제사를 준비는 재궁으로 가는 길은 참도가 없는 지름길로, 길 양옆에는 오 랜 세월 거친 상을 이겨낸 아름드리 갈참 나무가 운검(雲劒)처럼 장중게 서있다. 군데군데 참나무에이즈로 불리는 참나무 시들음 병의 침를 막기 위 어색 비닐 붕대가 수 백 년 시간을 넘고 넘어 근본을 괴려는 광릉 긴 나무 좀 벌레의 공격에 대비고 있다. 재실은 북쪽 정중앙에 임금이 제사를 준 비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 재실, 서쪽에는 어목욕청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정문으로 들어와 이곳 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서문 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사를 올렸다. 정전은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이어 진 정전의 앞부분에는 박석을 깔은 넓고 넓 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동문으로는 임금을 비롯 제관들이, 서문 으로는 제례악을 연주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다. 1395년 신실 7칸을 창건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19칸에 이르는 일자의 긴 건 축물이 되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남쪽 담장 안에는 동쪽으로 공신당을, 서 쪽으로 칠사당을 두었고, 서문밖에는 제례악 을 준비는 악공청을 두었다. 성리의 세계관이 지배던 조선시대에 는 사람이 죽으면 은 양의 성질을 갖기 때 문에 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의 성질을 갖 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또 이 미 어져버린 조상의 과 백을 정성과 공 경을 다여 제사면 다시 모여서 제수음식


22 李花 266 을 다고 여겼다. 세계문유산인 종묘는 을 모시는 곳이 요, 음지 왕릉은 백을 모시는 장소로 이런 성리적 세계관과 궤를 같이다. 정전에는 조선 27대 왕 중에서 비교적 자 취를 많이 남긴 19명의 왕과 왕비 49위만을 모셨고, 왕릉에 모셔진 추존 왕이나 재위기 간 등이 짧은 왕들은 정전 옆에 있는 영녕전 에 별도로 모셨으니, 조차도 손들로부 공적에 따른 차별(?)대우를 받았나보다! 실과 월랑을 여 102미에 이르 는 정전은 19칸을 구분는 20개의 기둥이 근엄게 서있고 단청도 지 않은 처마에 살짝 기교(?)를 부린 2익공 건축양식으로 단 순면서 장중여 엄숙이 저절로 묻어난 다. 임금이 참관는 자리에서 지던 국가 적 습진(習陣)을 치고도 남을 만 넓디넓 은 월대위에서 정연게 여지던 일무 와 장엄게 울려 지던 종묘제례악은 엄숙 의식을 범접 수 없는 신성과 더 불어 결집된 기(氣)를 나라의 안녕과 민 복(民福)을 기원는 자리이기도 다. 본래 종묘제례는 4계절 첫 번째 달인 정 월과 4월, 7월과 10월에 거되었으나 지금 은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과 11월 첫 번 째 요일에 지낸다. 넓은 월대위에서 엄숙고 장엄게 쳐 진 제례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어 연신 고개 를 갸웃대는 른 눈의 이방인과 정숙을 바 라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의 재잘거리며 뛰노 는 순진무구이 마냥 부럽다. 공신당에는 조부 마지막 임금 순종까 지 27대왕과 세자로 대리청정을 던 두 분 의 추존왕,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장조와 익 종을 보좌던 공신을 총 83위의 위 를 모셨는데, 조조에는 두란으로 알려 진 양렬공 이지란, 세종조 익성공 , 세조 조 충성군 명, 성종조 문충공 신숙주, 선 조조 문성공 이이와 문순공 이, 고종조 충 정공 민영 등의 공신이 배되었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도는 다섯 명의 왕만 모시는 5묘제 제도였으니, 조와 왕의 직 계 4대까지만 모시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왕 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종 묘배공신은 자신이 보좌 국왕의 신주가 종묘에서 나가면 같이 나가야 는 운명으 로, 왕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갔지만, 떠나는 배공신의 신주는 손에게 주어서 불우 도록 다. 건국 조가 최초 종묘를 건 설 때에 5칸의 정전을 지은 것은 바로 다 섯 왕을 모시기 위 5묘제의 제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종묘에 모셔진 국왕이 많은 공덕 이 있을 경우에는 종묘에서 옮겨지지 않았고 이런 국왕의 신주를 불천위(不遷位)라고 였 으니, 종묘배공신이 영원 종묘에 머물려 면 자신이 보좌 국왕이 불천위가 되어야 가능다. 종묘의 정전은 19위의 왕을 모시는 19칸 으로, 최초의 5칸 보다 규모가 커진 것은 14 위의 왕이 불천위가 된 결과였고, 왕을 모시


李花 266 23 는 배공신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니 최초 의 3칸이었던 공신당은 16칸으로 대 늘어 났다. 때 95명까지 배되었던 공신은 12 위가 떠나고, 재 배된 83명의 면면을 살 보면 결같이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 문신들로, 국초 양렬공 이지란을 제외고는 임진왜란을 극복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의 무신은 철저 배격된 문신 우월주의에 치우 친 조선왕조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임진왜 란이나 병자란 같은 전대미문의 대병(大 兵禍)를 겪은 것도 이러 지나친 문신 우월 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신당에 비여 소박게 자리 잡은 칠 사당은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이 아무 없이 잘 리도록 기원는 사당이다. 칠사(七祀)란 봄의 신으로 인간관리 신인 사명지신(司命之神)과 출입을 관장는 사 지신(司戶之神), 여름의 신이자 부엌의 신인 사조지신(司竈之神), 가을의 신이자 도성의 문을 관장는 국문지신(國門之神)과 상벌을 주관는 공려지신(公厲之神), 겨울의 신이자 여의 신인 국지신(國行之神)과 지붕 신인 중류지신(中霤之神)에 대 제사를 의미며,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속신앙과 유교사 상이 결된 국가의 중요 의례였다. 전사청은 종묘제례에 올릴 음식을 장만 고 제물과 제기 등 제사에 요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던 곳이다. 전사청 건물은 “ㅁ”자 건물로 배치되었고 좌우 각에는 온 돌방과 마루방을 두었다. 엄숙 제례사는 음식조차도 엄격 사 전 검사를 거친 뒤에 진설되었다. 성생위는 제례에 바칠 소, 돼지, 양을 검사는 석 (板石)으로 제물로 생되는 생물들을 살본 다는 재치 넘치는 이 눈에 띈다. 영녕전은 정전의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 여 지은 별묘(別廟)로 건물의 명칭은 ‘왕가 의 조상과 자손이 께 길이 안 라’는 의미로 명명되었다. 정전의 규모보다 조금 작은 16칸의 신실에 16대의 왕과 왕비를 여 총 34위를 모셨다. 건물 중앙 4칸의 별 신실은 조대왕 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신실보다 높이가 높은 것이 정


24 李花 266 전과 다르다. 이곳에 모신 16위의 왕들은 모두 정전에 서 옮겨온 분들이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가 에 배된 단종과 정순왕, 말 정략 결의 생양이었던 의민자 영친왕과 창덕궁 낙선재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이방자 자비는 처음부 영녕전에 모셔졌다. 백두대간의 북정맥 줄기가 도봉산과 북 산으로 이어지고 줄기가 보봉을 거쳐 북악산을 일으 뒤 그 동남쪽의 맥을 따라 이어진 곳에 종묘가 있다. 철저 수지리 설에 입각여 천명당이라는 양의 지기 를 따라 구성된 종묘는 500년을 버 정신 적 디딤돌이 되었고, 조선의 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주둔던 왜적들이 비백 산여 달아난 장소이기도 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최대 배제여 단순고 엄숙 분위기를 자아 내고 단순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 를, 엄숙속에서 왕조의 신성 권위를 엿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제례 와 제례악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존여 실 고 있는 유일 곳이다. 을 모신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유산으로 등재되 어 백을 상징는 왕릉과 더불어 보존대상이 되었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구전 및 무유산걸작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광군 때의 대적 간신이었던 이이첨은 임진왜란 당시 세조임금을 모신 광릉의 능참 봉으로 미관말직에 있었으나, 왜적의 눈을 여 몽진을 떠난 의주의 선조에게 세조의 어진을 무사 전달여 일약 주목받는 신 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고, 종의 사 2 번에 걸쳐 수많은 선비들의 로 얼룩진 치 열던 예송논쟁도 상주의 복상기간을 두고 벌인 관념적 최고 가치에 대 논쟁의 결과 였다. 충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조선사가 추구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는 지 적 목성에 몰된 극단적 식주의의 단면 을 볼 수 있으니…. 오랜 세월 무성게 자란 엽수는 소나 무가 주종을 이루는 왕릉 숲과 비교되며 뜨 거운 염천의 늘을 잊게 만들고, 숲길을 걷 는 방랑자는 지난시절 려 영를 누리던 이곳 주인들의 영의 안식처 까지 이어지는 긴 연을 부러워다. 불교를 왕조를 지는 이념체계로 삼고 세와 내세를 망라는 불교지상주의에 빠 졌던 고려왕조는 말년에 그 가 극에 달 여 불씨잡변(佛氏雜辯) 같은 날선 비을 부르고 결국 조선이란 성리을 바으로 나라가 생기에 이르렀으니…. 척불(斥佛)을 국시로 삼은 조선왕조의 종 묘에서 떼를 지어 몰려가는 중들의 닮은 모 습에서 유래된 때죽(=떼중) 나무의 시(顯 示)는 언 수 없는 감정의 교차를 일으 고, 얗고 예쁜 꽃으로 벌들을 유여 여름에 스님의 머리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 는 열매로 변신 때죽나무의 기개는 올올 기 그지없다. <종/양녕대군 16대손 ‧ 始40세>


李花 266 25 종묘 추대제 3대(三代) 봉무 이야기 이병(李炳學) 본원 전례부위원 내가 종묘대제를 처음으로 참반 것은 2004년도다. 정전2실 제관으로 봉무 아버 지를 모시고 온 가족들이 종묘를 방문게 되면서다. 아버지는 종대왕 제4왕자 성녕대군 종 대의원으로 종사를 시고, 나도 대군 아버지의 묘제에는 발게 참석고 있던 시기였다. 마침 아버지가 종대왕과 원경왕 의 신주를 모신 정전2실의 제관을 시게 됐다. 소에 관심이 많던 나는 어머니, 아 내, 아들, 조카, 고모님들을 모시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엄고 엄숙 제을 참반 수가 있었다. 그 날의 감은 고 집 거 실 중앙에 자리 잡은 지막 빛바랜 기념 사진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듯 너무도 생 생게 기억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계기로 종약원 종묘제례보존에서 실시는 전승교육을 받고 능제부(제복부) 위 원을 거쳐 전례부 위원으로 동지도 10년 이었다. 이 기간에 구대제, 종묘대제, 사직 대제, 조경단대제, 칠궁제, 왕릉제 등 수 많은 제을 참반고 제관으로 봉무왔다. 올 종묘 추대제는 조금 별 계기로 삼고 싶어 몇 달 전부 마음속으로 준비를 였다. 연로신 아버지의 제관 봉무가 앞 으로 쉽지 않을 듯여 관으로 봉무시도 록 고, 9월 20일 공군에서 제대 2기 가까스로 복 아들이 께 봉무는 계 을 세운 것이다. 공직에서 은 고에서 자급자족 정 도의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는 건강신 인데 가끔 어지럽다고 신다. 대제가 봉 되는 2시간여를 볕아래 월대에 서 계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수시로 건강 상를 인곤 였다. 분방을 작성는 종친께 사정을 말씀드려 어렵사리 영녕전 2실에 아버지는 초관, 아 들은 용찬, , 작을 드리는 내봉에 배정되었 다. 내친김에 나는 당상 찬의가 되어 아버지 를 신위전에 모시고 제 전반에 도움을 드


26 李花 266 아버지 아들(자, 사진왼쪽) 손자, 삼대가 종묘대제에 께 봉무 기념사진. 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영녕전 제에서 는 당 찬의로 분방이 되었다. 고인 가에서 농사일로 늦게 올라오신 아버지는 습의에는 참석을 지 못고 손자 와 께 나에게 제 전반에 대 습의를 받 으셨다. 제관으로 봉무 경이 있는 아버 지는 잡는 법, 국궁사배, 승강계법, 전작, 삼상, 집찬관지, 올리는 법 등을 아주 진지게 연습셨다. 대제 날 이른 아침을 먹고 3대는 종묘로 다. 전례위원들의 집결시간이 7시라 제 관인 아버지와 아들도 께 일찍 도착였 다. 아버지는 전례위원들과 인사도 나눌 수 있었다. 복을 도와주신 제복위원님들 덕분 에 아버지와 아들도 무사 복을 마치고 나와 께 3대가 종묘의 멋진 단을 배경으 로 기념사진도 찍을 수가 있었다. 각 실별 제관들의 인원 점검이 끝나고 드 디어 9시 30분에 영녕전을 제관렬이 시작되었다. 당의 마이 앞에서 찬의로 봉무며 제 내내 아버지가 서 계시고 이 동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계단 을 오르실 때 시 넘어질까, 월대에 서 계 시다 쓰러지지 않을까’ 는 걱정이었는데 륭게 봉무를 셨다. 내봉으로 신실에서 봉무 아들은 볼 수 없었지만 아빠가 일러 준대로 아버지께 잘 전달다고 였다. 영년전 제을 마치고 정전제 준비로 바 쁜 나는 아들에게 아버지 잘 모시고 가라 는 짧은 인사를 였다. 아버지는 제 손자와 께 집 앞 노래방에 가셔서 두 시간 이상을 겹게 보내신 내려가셨다. 다음날 아버지께 전를 올렸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제 제에 초관으로 봉무신 감이 남아 있었고 열성조의 신위에 작을 신 자부심이 대단셨다. 아들 또 아 버지, 아버지와 께 종묘대제에 께 봉무 것을 뜻 깊게 생각여 나를 감동시켰다. 나 또 일부 전례위원들의 전언처럼 이 날 의 제에서는 소보다 더 긴장고 목소리 에서는 강 을 느낄 수 있었다. 건강이 락여 관으로 봉무실 수 있 었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아빠의 제안을 쾌 수락여 께 봉무 아들이 고맙다. 그리고 이번 기를 종사에 매진 수 있도록 배려 주고 종묘대제 때마다 늦은 시간까지 예물로 올리는 에 매듭을 매어주 는 아내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고 싶다. 2017년 종묘 추대제에는 내가 소원던 아버지를 관으로 모시고 아내가 매듭을 매 어 준 를 올리고 아들이 께 봉무여 온 가족이 참여 뜻 깊은 대제가 되었다. 이제 우리 집에는 잊지 못 또 장의 기념사진이 추가 되었다. <종/성녕대군 19대손 ‧ 始43세>


李花 266 27 승경원 건립을 위 나의 제언 이남식(李南植) 의릉봉장 섭(台燮) 종약원 21대 이사장님의 구심 력으로 2013년 2월 29일 종약원 제193 이사가 열렸다. 이날 전주이씨 500만 종친 의 염원인 실묘(失墓)되어 궐사(闕祀)된 15위 양위분(2세~16세)의 위를 모실 사당을 건 립고 제을 봉 수 있는 ‘가칭 조경재 건립추진위원’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2세 자연(自延) 선조로부 16세 인(璘) 선 조까지 15위 양위분의 제을 봉 수 있 는 사당을 건립기로 결정다. 조선왕실 손으로서 단 분의 선조제도 궐사서 는 안 된다는 종친 모두의 숙원사업을 진 고자 건립기금으로 20억원을 목액으로 정고 2013년 11월부 모금운동을 전개 였다. 그 11월 8일 광대군 이상종 종친 이 개인 첫 번째로 30만원을 성금였고 단 체로는 처음으로 11월 15일에 충북음성군분 원(분원장 이은규)이 200만원을 성금다. 2017년 8월 재 개인은 533명과 지원, 분 원, 종, 봉, 기 단체에서 총 11억2 천7백여 만원으로 집계되어 시작부 만4년 이 되었는데 아직도 목액달성을 못 실정 이라 유감이다. 우리가 ‘500만 전주이씨’ 라고 는데 종 친 분 분이 천원씩 100만명이 성금면 10억원이 되는데 모금액이 모이지 않는 것이 안깝다. 지난 9월 26일 요일 전주에서 개기 고 유제를 봉였다. 고유제에는 섭 이사장 님외 임원진과 전라북도지원 건지산 봉 원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종친이 참석 가운데 엄숙고 경건게 진됐다. 전주는 우리 전주이씨의 성지이며 선이 다. 이러 곳에 승경원(가칭 조경재의 정 된 명칭)을 건립은 조경단, 조경묘, 경기전 과 께 숭조돈종의 정신문로 손들을 위 뿌리 상징의 영구적인 교육의 장으로 빛 내고자는 고귀 숭조전 사업인 것이다. 승경원 건립을 위 금년 내 목액이 달 성되어 착공 수 있도록 종친 모두가 성숙 된 숭조돈종의 정신일념으로 솔선수범여 적극적으로 모금 참여에 동참 주시기를 당 부다. 아울러 붉은 닭의 정유년을 보내 고 달려오는 금개의 무술년(戊戌年, 2018년)에 모든 종친이 모은 으로 승경원 건립을 준공여 더더욱 결속된 돈종으로 운의 보람된 일들이 기록되기를 간절 바란 다. <정종/정석군 16대손 ․ 始40세>


28 李花 266 옥계도정 농맹아(聾盲啞)공 신도비의 예술성 이상구(李相九) 익안대군 익부원군종 총무이사 1. 서언 조고제 3남인 익안대군의 증손 동은 계가 명선대부요, 직이 옥계도정으 로 생애에는 많은 사료와 일가 있으련만 애석게도 전여 오는 사적 자료는 극 일부분 이어서 안까운 일이다. 장광(壯光) 때에 사육신, 생육신과의 절의가 같아 죽은 자와 살아 남은자의 사연이 어찌 몇 권의 책 으로 언급 수 있겠는가? 생을 은둔생 로 일관였고 수차의 병란과 재 등으로 소멸되고 오직 공의 신도비 내용이 거의 계인 듯다. 신도비 역시 임술년(1922년) 매절에 건 립되는 과정에서 글을 지은 정대부 비서원 승지를 지낸 김녕은 ‘공이 돌아 가신지가 400년이나 되어서 문이 재에 다 없어져 언을 능 다 전지는 못나 별 나 난 일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서 족 내세(來世)에 밝게 드리웠거늘 물며 대 (大賢:栗谷)의 말씀이 금석(金石)과 같이 믿을 수 있어 글을 지었다’고 ‘예조서와 이조서를 지낸 당대 최고의 서가 윤용구 가 글을 쓰고 공의 13대손 돈식이 건립였 다’ 기록되어 있다. 공을 추앙여 춘추로 사는 논산 소재 충곡서원과 조정서원의 옥 계도정 사료 역시 공의 신도비 내용에 계 를 벗어나지 못고 있다. 우리 문중의 자가 옥계도정공 생애에 관 여 고찰 바 있지만 읽지 못 독자가 있을까여 간략게 설명고 이번에는 충 석촌 윤용구가 쓴 옥계도정농맹아이공신도비


李花 266 29 신과 절의를 벗어나 충남 논산시 벌곡면 조 령리 산기슭에 누각도 없이 알몸으로 우뚝 서있는 신도비의 예술성을 조명고자 다. 비문의 글씨를 쓴 윤용구에 대 자료를 검 면서 새로운 사실을 인지여 조선왕조 와 윤용구와의 관계, 우리 문중의 애국자사 부자와의 절의, 윤용구는 누구이며 옥계도정 신도비의 예술적 가치에 대여 조명여 본 다. 2. 농맹아 옥계도정의 삶 옥계도정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는 과정을 보고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 고 은둔생을 였다. 단종의 복위과정에 서 안대군, 금성대군, 의군, 남군, 영 군, 중추원 부사 이양 등 6명이 죽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옥계도정 뿐이다. 단종대왕이 승다는 소식을 들은 옥계도정은 산으로 들어가 곡고 북극성을 바라보고 눈물 을 리면서 식며 말다. “지금의 세상 일은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고[聾],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盲], 입이 있어도 도저 말 수가 없도다[啞].” 옥계도정은 귀먹 고 눈멀고 벙어리 계삼아 서울의 동문 밖 에 거여 농맹아(聾盲啞) 석 자를 여 써서 붙이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었다. 이 고종명 때까지 북쪽을 앉지 않 고 자식들에 ‘너들은 단종의 신 이니 두 군주의 마음을 고서 벼슬여 녹을 먹지 말라’였다. 세조가 등극여 영고 절개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고 존경받는 도정공을 기용 고자 사자(使者)를 여러 번 보냈지만 때마다 거짓으로 앞을 보지 못는 동을 여 절 의를 지켰다. 이와 같이 도정공의 충정과 절 의를 공경고 사모는 자 많아 1819년 충 청남도 문재 12인 충곡서원에 백제장군 계백, 사육신 등과 더불어 종으로 배 여 음력 3월과 9월 중정 일에, 또 논산시 문유적 제23로 지정된 조정서원에 주 으로 배여 음력 3월과 9월에 지역의 유림들이 사(享祀)고 있다. 3. 조선 23대 순조임금과 윤용구 옥계도정의 신도비문을 쓴 석촌 윤용구는 철종 4년(1853년)에 출생여 1939년에 사 망 인물이다. 조선 23대 순조 임금과 순원 왕 김씨 사이의 셋째 공주는 덕온공주로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서 어난 마 지막 공주로서 윤용구는 덕온공주의 아들이 다. 순조임금의 외손자로 15세에 돈령부 직장,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 이 규장각 상대 림 대교 직각 사인부제 이 조참의 대사성 도승지 예조서 이조서를 역임다. 1895년 을미사변 이 지부, 법 무, 내무대신 등 10여 차례 임명받았지만 취 임지 않았으며 경술국치 이 일제가 1910년 10월 은사금과 남작의 작위를 내리 자 “어찌 또 다른 군주를 모실 수 있겠는가” 라고 거부다. 이것은 1910년 우리 문중의 애국지사 이순 부자의 경과 절의가 일치 며 애국지사 이순은 군주에 대 충정의 절명시 2수를 남기고 음독였으며 석촌 윤 용구는 그 을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서 스 스로 장위산인이라 부르며 세상사를 멀리 고 대[竹]와 난(蘭)을 주로 그리며 나라 잃은 울분을 먹과 붓으로 일제에 대 무언의


30 李花 266 거였으리라. 이 시기에 문신이며 서가 석촌 윤용구는 많은 작을 남겼는데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 간공(文間公) 장석(韓章錫) 신도비, 경기도 광주의 선성군 신도비, 연산의 옥계도정 신 도비가 있다. 으로는 계룡산 동사의 삼은각, 순천의 선암사 누각 강선루(보물 400), 달성의 광거당, 창원의 소담동 사미 루가 있다. 4. 석촌 윤용구가 쓴 옥계도정공 신도비의 예술성 이렇듯 구말 나라를 잃은 울분을 묵으 로 무언의 변을 여 많은 작을 남겼다. 석촌이 많은 작을 남겼음에 경매시장에 의 그림이 수 백만원에 거래가 되고 있다. 2013년 9월에 방송국에서 진되고 있는 진명에 석촌 윤용구가 쓴 세 글자 의 감정가가 일천만원을 기록여 모두가 놀 라워였다. 왜 이러 상이 이어지고 있 을까? 조선 말기에 고관대작을 지내고 일제 가 은사금과 남작(大臣)을 주고자 유 였 으나 이를 완강 거부고 울분을 먹과 붓 으로 선비의 올곧은 정신이 작에 베어 그 러지 않을까? 농맹아 옥계도정의 신도비를 쓴 사람이 석 촌 윤용구라고 조명이 되면 어떠 변가 일어날까 의심스럽다. 자는 물질적으로 계 산여 가치를 셈는 것이 아니며 농맹아의 충의 정신 세계와 순조 임금의 외손자로 구 말 문신이요 서가로서 두 군주를 섬기려 지 않은 정신의 결정체이거늘 어찌 금전으 로 계산 수 있겠는가? 공의 16대손인 자는 오늘도 당대 최고의 서예가 석촌이 쓴 신도비 글씨를 나나 눈여겨보며 농맹아 옥계도정 조부님의 숨결을 느껴본다. 5. 맺는말 가지 미로운 일은 농맹아 옥계도정공 의 신도비를 쓴 석촌 윤용구는 우리 사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았던 김수 추기경의 고모부라는 점이다. 김수 추기경이 생전에 자신의 가족사에 언급을 지 않았지만 추기 경의 가문 역시 애국지사의 가문이다. 경술국치에 분개여 장렬 순국의 길을 선 김영덕 의사가 김수 추기경의 님이요, 석촌과 처남매 지간으로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제의였으나 거부 것도 가 족사의 내면을 보아 충분 이 수 있을 것 같다. 석촌 윤용구는 조선 왕조의 외손자 이며 옥계도정의 충신과 절의가 본인의 내면 과 같아서 글씨를 썼을 것이고 구말 같은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며 순국의 길을 선 이순과 석촌 역시 은사금과 남작의 작위를 거부고 초야에 묻 생을 마감 것은 오직 충신과 절의의 맥을 같이여 우 리의 문중과 인연이 있었음을 알았다. 조선의 개국 일등공신이요 정사공신 일등 공신 우리 시조 익안대군의 순고 충신 과 절의로 마지막 유을 남기신 충전가 (忠孝傳家)는 아드님 익부원군이 몸소 실천 였다. 전주이씨로는 맨 처음 세종조에서 청백리에 뽑다. 어린 단종을 지기 위 여 사육신, 생육신과 같이 절개를 지 옥계 도정, 명종조에 구의 견제에도 아랑곳 지 않고 직언며 백성을 게 여 두 번째 청백리에 오른 나주 목사 이몽, 임진 왜란 때에 이공겸 내외는 부친을 등에 업고 난다 왜병 무리와 마주치자 아버지는 자


李花 266 31 식 내외라도 길 원으나 자 이공겸은 왜병에게 너는 부모도 없느냐 라며 아버지 대신 나의 목을 치라자 부인 또 남 앞 을 막으며 나를 죽이라 여 왜놈에게 죽으 니 영조 51년(1775)에 열정려가 내려진 사 실, 의병을 일으 송정공 이세무, 구말의 순국열사 이순 가로 이어지는 충전가의 유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또 옥계 도정공의 또 다른 묘갈명을 지은 문신이요 애국지사 김복, 신도비를 써주신 역시 구 말의 문신으로 당대 최고의 서가이며 재도 고미술 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석촌 윤용구를 음미며 농맹아 옥계도정공 의 신도비를 대면 충신과 절의의 정신은 당연 일이다. 상업적 시각이 아닌 예술적 측면으로 보아도 귀중 가치가 있을 것이며 우리에게 많은 뉘앙스가 다가 올 듯다. 뭇 사람이 세상에 어나 본분을 알고 스스로 자족며 자존심을 지켜 살아간다는 것은 실 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시조의 유 충전가를 이어 왔던 선조님들과 석촌 윤용구와 같이 구말 소용 돌이 속에 민도 아니고 높은 벼슬에 있었 던 사람으로 처신의 본보기로 보여준 선비의 정신은 우리의 가문과 일맥상는 것 같 다. 세대전의 석촌이 존경스럽다. “농맹아 아버지의 신도비를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심정으로 공손 인사드린다. <조/익안대군 19대손 ․ 始42세>


32 李花 266 연산군 숭모 중추절 작례를 마치고 이은(李殷浩) 연산숭모 장 금년 추석연는 여느 보다 길어서 온 국민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가위를 보 낼 수 있었다. 연산숭모(장 殷浩)는 양대 명절인 설과 가위, 청명제(4월 2일)에 1년에 3번의 예를 올림이 기본이 되어 있다. 지난 9월 17일 작례 준비의에서 뜻 깊고 아름다운 10월 9일 글날에 작례를 올리기로 의결고, 제찬 준비는 새로 선출 된 신임 총무이사인 본인이 기로 다. 또 집부 위원은 모두가 일찍 재실에 모여 예 올릴 준비를 마치기로 고 또 간단 습의로 실수 없는 예를 올릴 것을 다짐였 다. 연산숭모의 중추절 작례는 마다 는 사로써 집부의 에 의 올는 무축단배로 의결되어 관은 신문(慎門:三門 중에서 명절 때마다 돌아가며 관을 배정 )에서 맡았으며 전례를 담당는 관주 이 사와 용 이사가 수고 주셨다. 아침 일찍 두 이사와 집부가 재실에 모 여 자기가 맡은 일들을 차질 없이 며 예 를 올릴 수 있도록 진설과 등 모든 준비 가 마무리되었다. 집위원 25명이 참석여 묘정 진설상 양 신위 앞 월대 아래에 도열 여 관 작으로 뜻 깊고 경건며 아름다 운 예를 올렸다. 작례를 치러진 음복에서는 참반 신 30여 명의 주민들과 묘정 방는 분 들과 같이면서 양로왕에 대 잘못된 기 록을 설며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였다. <정종/덕천군 17대손 ․ 始4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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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花 266 35 준경묘(濬慶墓) 참배 이보(李輔澤) 경기도지원 문이사 높고 른 가을 늘아래 산은 울긋불긋 오색이 찬란 아름다운 단의 계절을 맞이 여 경기도 여주시 이친목(장 이규엽) 원 30여 명은 지난 10월 27일 강원도 삼 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두산에 모 셔진 17세 양무장군(陽茂將軍) 묘소를 참배 고 돌아왔다. 올로 37주년을 맞이 여주이친목는 목과 친목이라는 모임으로 결집되어 만나 면 안부를 주고받으며 더욱 친숙지면서 오 늘의 여주분원 발전에 이 되어왔고 일가간 친목라는 끈끈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친 목은 더욱 결집되어 분원발전에 이 되었 다. 지난 영경묘(永慶墓) 참배에 이어 다시 준경묘를 찾은 60대, 70대, 80대 원들이지 만 800m 되는 가른 고갯길을 낙오자 없이 정상에 오르니 묘소까지 1,000m 지를 걸 으며 곧게 늘을 치솟은 소나무들이 우리를 반겨 주어 기분은 상쾌다. 올로 7번째로 참배를 게 된 자는 올 적마다 비가 내려 진입로 길이 진길이어서 애를 먹었지만 이번에는 청명 늘아래 주 위 산들은 단철을 맞아 청색과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어져 가을 단 길을 따라 가 는 준경묘 참배는 더욱 즐거웠고 상쾌다. 묘소 앞 넓은 광장을 따라 정자각 앞에 당 도니 정자각은 굳게 닫있고 옆에 있던 샘는 정자각 앞으로 이전고 쪽바가지를 갖춰놓았다. 갈증이 나던 일들은 쪽바가지 로 물을 떠서 마시고 갈증을 소니 기분 은 날아갈 것 같고 공기 또 상쾌서 모두 들 즐거웠다. 정자각 문이 닫 있어 묘소까지 걸어서 올라가 참배를 고 묘소 앞 전경을 바라보 니 의 그림 같았다. 넓은 광장에 정자 각과 수라간이 외로이 묘소를 지켜주고 주위 의 산은 울창고 단계절을 맞아 더욱 보 기도 아름답고 묘소 앞 광장은 500만 우리 일가들 초대 장소로 보였다.


36 李花 266 별원원 가입 안내 - 가입자격 : 종친 개인이나 종 단체 - 원전 : 종보인 ‘이보’를 생 구독 수 있고, 종약원에서 실시는 각종 제 안내를 우선 드립니다. - 가 입 비 : 200,000원 이상 - 연 비 : 연 30,000원 이상 (가입 당연도는 연비 면제) - 가입문의 : (02)765-2124 종약원 조직부 지난 4월 제 때는 나뭇잎이 떨어져 앙 상 나무로 좌청룡(左靑龍)이 부실 보였는 데 가을산은 숲이 울창여 좌청룡 우백 (右白虎)가 선명게 보였다. 누가 좌청룡이 미약 전주이씨 손은 장손들이 약다 는 설이 전지지만 이날 좌청룡 우백는 선명게 보였다. 재 이 곳 주민들은 두 묘소를 왕릉으로 부르며 백우금관(白牛金棺) 설가 전져 오 고 있다. 설에 의면 장군의 아들이신 목 조대왕(穆祖大王)은 돌아가신 아버지 묏자리 를 찾아 매고 있을 때 도승과 상좌승이 앉 아 산줄기를 보며 저곳에 묘를 쓰면 5대에 임금이 나온다고 였다. 이 말을 들은 목조 대왕은 간곡 간청여 그 자리를 알게 되 었는데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개제(開 土祭) 때 소 1백 마리 를 잡고 관은 금관을 써야 이 있다는 것 이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법을 쓰기 로 고 처가에서 기르 는 소 백우(白牛)를 백우(百牛)로 대체고 금으로 관을 만들 이 못 되어 금 빛깔 이 나는 밀짚 또는 귀 리 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의 모양을 만들어 금관을 대신 장례를 모셨다고 여 백우금관 설가 생되었다 며, 백우(百牛)를 백우(白宇)로 대신여 1 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다. 또 준경묘는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 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 산이 있어 주변의 산 5봉의 수명이 각각 1백 년이라 여 도 5백년의 조선왕조 수명이 되었다고도 다.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자리 에 안치되어 계신 아버지를 자랑며 참배 기를 권다. <조/의안대군 18대손 ․ 始40세>


李花 266 37 영친왕과 의친왕을 본 명칭으로 정명(正名) 드려야 이승창(李承昌) 본원 제2문이사 명칭[이름]이란 어느 물건이던 고유적으로 붙어진 존엄이요 가치이다. 우주삼라만상(宇 宙森羅萬象)이 종으로 밀밀나 모두가 이 름이 없는 것이 없다. 물건이 있는데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가지가 없는 물이다. 물건 이 있으면 그 물건에 맞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바르게 불러줘야 그물건의 존재의 가 치가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는 주인공은 바로 사람이다. 늘 즉 자연의 섭리를 사람 이 받들어 다스려서 인간에게 유익게 사 용 수 있도록 재성(財成)는 것은 바로 사 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물건을 그 이름에 맞게 요리 는 주인이기에 사람이 없으면 우주 삼라만상 은 그 가치가 존재되지 않는다. 왜냐면 천 지만물은 사람이 주인이며 그것을 적재적소 에 존재게 여 그 가치와 존엄을 가지게 는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있어서의 명칭은 참으로 엄중 것 이다. 그 명칭이 바르게 쓰이지 않을 때는 그 세계는 윤리와 질서가 문란게 되어 바 른 정의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즉 상 좌우 의 자리가 바뀐다거나 군신부자제의 서열 이 도치되었다고 가정면 이는 인간의 사 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자로(子路) 가 “위군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려 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시렵니까?[子 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논어13권’. 니, 공자께서 “반드시 이름[名]을 바룰 것 인져[子曰 必也正名]”였던 것이다. 이는 당 시 위군(衛君)은 아버지를 내친 첩[黜公輒:첩 은 위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우선 그 이름 을 바로잡아야 다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리지 않아야 말을 기가 순 조로운 것이다. 아들을 아버지라 고 신 를 임금이라 다면 말이 되겠는가? 을 아 우라 고 아우를 이라 다면 되겠는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고 아들을 아들이라


38 李花 266 며 임금을 임금이라 고 신를 신라 야 말기가 떳떳고 순조로운 것은 당연 것이다. 그러므로 명정언순(名正言順)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맹철인 유교의 가르침에는 이름을 중 여긴다. 조선왕조를 개국면서 제일 먼저 <경국대전>이란 치국의 근간인 법전을 지었다. 이는 국가기구 구조조직의 전반에 대 명칭을 정 것이다. 우선 이전 (吏典)·전(戶典)·예전(禮典)의 동반관계와, 병전(兵典)·전(刑典)·공전(工典) 서반관계를 정고 그 부속관아를 결정였다. 이는 경 국제세를 에 있어 그 기구의 명칭과 직위 를 정여 상존비의 지위질서를 정 것이 다. 이전(吏典)에는 맨 먼저 대궐 왕궁의 중 궁전내전[中宮內殿]에 속 내명부(內命婦)를 세웠다. 나라를 운영자면 왕실이 제자리를 잡아야 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명부를 살보자. 빈(嬪) 정일 (正一品)에서 숙원(淑媛) 종사(從四品)까지 중궁(中宮) 이외의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8 명의 명부(命婦)가 있으며, 그 이외의 궁인직 (宮人職)에 매인 상궁(尙宮) 정오부 주변 궁(奏變宮) 종구까지 27명의 궁인(宮人)이 있어 왕궁내전의 대소사를 담당고 있었다. 또 내명부에 딸린 세자궁(世子宮)에도 세 자빈(世子嬪) 이외에 세자를 가까이 모시는 양제(良娣) 종이부 소(昭訓) 종오까 지 4명의 세자궁명부가 있었고, 그 외에 궁 인직에 매인 수규(守閨) 종육에서 상의(尙 醫) 종구까지 9명의 궁인이 있었다. 이외에 외명부(外命婦)도 있으나 언급을 줄인다. 이렇게 법전을 예로 든 것은 명칭인 이름 이 얼마나 중요며 명칭이 지닌 의미가 얼 마나 지를 살보려는 것이다. 이 이름이 정지지 않으면 국가사는 무질서의 란 을 겪게 될 것이다. 위에 내명부를 거론 것은 왕실의 적·서 의 명칭을 구분려는 것이었다. 임금의 적 처인 중전의 소생 아들딸은 대군이요 공주이 며, 빈(嬪)의 소생 자녀는 왕자군이며 옹주로 명명였다. 빈의 소생인 아들을 왕자군이라 것은 종실 및 성 공신들의 봉군과 분별 기 위서 왕의 아들임을 기 위 것이었다. 그리고 계를 두지 않고 무계로 여 왕자의 권위적 체면을 정일(正一品) 앞에 세워 주었다. 이는 왕자는 적서의 구별 을 두었으나 왕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지위임 을 인정 것이기도 다. 이렇게 번 정진 적(嫡)인 왕비(王妃)와 서(庶)인 빈(嬪)은 불역의 명칭이다. 관직에 있어서도 계를 두되 정과 종을 두어 상 의 차등을 구분고 반열도 동반과 서반을 구분여 문관직은 동반에, 무관직은 서반에 소속시켜 중앙과 외부의 직임을 구분였고, 당상관과 당관의 계를 두어 당상관은 진 급의 계를 두지 않았고, 당관은 진급의 계를 두었다. 이것 역시 명칭이 갖는 가치 요 존엄인 것이다. 이러 명칭의 계가 만 약 무너진다면 위계질서가 괴됨으로 국가 사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또 공맹철 유은 중국 고대로 소급 여 요순(堯舜) 시대로부 내려온 정치철이 다. 요순의 정치철은 제충신에 있었다. 그러므로 요(堯)가 천를 아들에게 전지 않고 부모에 는 가난 순(舜)에게 전 였고 순 역시 아들에 전지 않고 어진 우에 게 전였다. 우임금 나라에서부 인


李花 266 39 아들에게 전였다. 그러므로 우리 유교국가 에서는 그 역사적 전을 이제삼왕(二帝三王) 으로 칭며 그를 왕도정치의 완성을 이룬 시대로 보고 정치지도자인 유교국가의 군 (賢君)·명왕(明王)은 최고최상의 지치시대의 준으로 삼고 정치를 왔다. 유교문를 숭상 우리 조선왕조의 정치 철은 숭유배불로 공맹의 유을 숭상고 사대교린의 외교를 서 삼의 삼천리강 에 조선왕국의 천년기업을 꾀였다. 그리고 중국 중의 문명과 문를 숭상여 우리나 라를 소중의 문명국가로 만들려고 유을 가르쳐서 무수 인재를 양성여 중국 중 문명에 비견는 소중의 문를 달성였 다. 결국 중국을 대국으로 받들고 이웃나라 일본과 교류며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꾀 왔다. 오랑캐는 믿음이 없는 법, 임진왜란을 겪고 병자란의 시련으로 나라가 되었 으나 유으로 길러낸 선비정신은 나라를 부 시켜 숙종·영조·정조의 명군이 계계승승 여 국운을 부시켰다가 불도 육십년간 의 외척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국운이 다시 쇠되고 대원군 십년간의 쇄국정책으로 국 력이 기울더니 결국 왜국 일제의 침로 나 라를 송두리째 상실였다. 고종 임금은 개국506년 1897년(4230) 정 유년을 맞아 청(淸)나라의 간섭에서 독립을 선언며 조선왕국을 대제국(大韓帝國)으로 세계만방에 선고 조선왕인 고종왕은 원 구단(圜丘壇)을 쌓고 천상제(皇天上帝)에 천제(天祭)를 고고 당당 제위(皇帝位) 에 오르시어 천자(天子) 고종제(高宗皇帝) 가 되셨다. 그리고 개국 조이신 조대왕을 조고제(太祖高皇帝)로 추존고 칠대선왕 을 제(皇帝)로 추존였다. 이 얼마나 거룩 쾌거인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게 만든 것이다. 왕국일 때는 종실지친인 왕의 제[伯叔] 와 중자(衆子)들을 대군(大君) 또는 왕자군(王 子君)으로 봉지만, 제국이 되었으므로 종 실인 제의 백숙과 중자들을 친왕(親王)으로 봉였던 것이다. 지금 고종제의 제분과 제의 중자들은 군(君)이 아니라 당연 친 왕(親王)으로 봉게 된 것이다. 지만 일제의 강압에 36년간 박를 당 나머지 모든 것이 그들의 농간으로 알고 있 었기에 올바로 지어진 명칭인 영친왕(英親王) 과 의친왕(義親王)의 봉(封號)를 일제(日帝) 의 농간이라고 착각을 여 스스로 영친왕의 친자를 빼고 영왕이라 칭고 의친왕의 친자 를 빼고 의왕이라 칭여 서책에 기록고 입으로 칭는 우를 범고 있었으니 심 스럽다. 앞으로는 영왕 의왕이라 기록된 것을 영친 왕 의친왕으로 바로잡아 기록고 영왕·의왕 이 아닌 영친왕·의친왕으로 바른 명칭을 되 찾아 들여야 마땅다. 정명(正名)을 말는 길에 ‘구단’에 대서도 ‘원구단’으로 이름 을 바로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사족을 붙이 면서 이로는 영친왕 의친왕의 본명칭대로 바르게 기록고 바르게 불러드려야 을 당 부 드린다. <종/양녕대군 16대손 ‧ 始40세>


40 李花 266 추계 여 및 숭조돈종 종묘추대제 참관 이영(李瑛薰) 충북 충주시분원 자문위원 충북 충주시 분원은 매년 1번씩 추계 여 을 선대 왕들의 업적과 연고지를 방문여 참반다. 올는 2017년 11월 4일 종묘추 대제를 참관였다. 충주시분원은 34명이 숭조돈종의 정신으로 8시 문관을 출발 다. 이상 충주시분원장의 인사에 이은 각 자 자기 소개는 왕손이라는 자긍심이 묻어 나왔다. 문이사 이찬재 씨는 2017년 종묘 추대제에 관련된 자료를 장의 유인물로 작성여 설명다. 10시부 시작되는 영녕전 사에는 참석 이 어려워 께 있는 창경궁을 보기로 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왕 , 예종비 인순왕, 덕종비 소왕 3분의 비를 모시기 위 옛 수창궁 에 창건 궁 이다. 조선 중기의 궁문인 창경궁 문으 로 입장여 옥천교를 지나 명정문을 들어서 니 명정전이 위엄을 자랑다. 임금이 신들과 경연을 열어 문을 논의 던 숭문당과 인정의 설명을 듣고 경전 과 명전, 양당의 역사를 듣고 나니 궁금 증이 렸다. 바람을 관측던 기대를 올 라서 왕실에서 를 묻던 석실인 성종의 실을 보고 성종왕자 경명군 14대손 이영씨 가 사진을 찍었다. 1909년에 춘당대 앞 권농장 자리에 만든 연못인 춘당지는 단과 어우러져 너무 아름 다웠다. 일은 기념사진을 찍고 규모도 고 숲이 너무 아름다운 원을 걸어 창덕궁 으로 넘어갔다. 일제의 왕권 손 적은 사 라졌다. 그러나 궁궐에 동물원을 만들어 벚 꽃과 동물을 구경는 창경원으로 만들었다 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는 곳이어서 감가 새로운 관람이 되었다. 일은 창덕궁을 넘 어가 종묘추대제를 보기로 다. 단체 사 진을 촬영고 점심을 먹고 정전에서 13시 30분에 시작되는 추대제를 보기 위서다. 접수는 곳에 충주시분원에서 10만원 금고 주덕분장이 5만원 성금 내고 종 묘대제참반이라는 비를 달고 입장니


李花 266 41 사단법인 종묘제례보존 원 가입 안내 - 가 입 비 : 개인 10만원 이상, 단체 20만원 이상 - 원전 : 종묘제례 제관으로 우선 참여의 기와 종묘제례 전수교육을 수료 문재보 법에 의 전수교육생, 이수자, 전수교육조교, 기능보유자로 선정될 기가 주 어질 수 있음. - 국민은 : 817201-04-036370 (사)종묘제례보존 손들의 좌석도 준비되어 있었다. 19칸의 정 전은 목조건물로는 가장 길다고 다. 월대 위로 보이는 장엄 정전을 바라보니 감동적 이었다. 관과 집사는 동에 도열 있었 다. 제례악에 사용는 종과 경이 눈에 띄었고 위와 제물이 차려진 각실 앞에 관 복을 입고 집사들이 이동는 모습도 예를 갖춘 엄숙이 엿보였다. 제례악을 연주는 악사들은 붉은색 예복을 입고 등장는 모습 에서 장중을 느꼈다. 집례자의 에 따라 신관(강신)에 초관, 아관, 종관, 음복 례, 망료의 순서로 제가 진되었다. 장엄 종묘제례악이 울려 지고 엄숙 동작의 일무는 시선을 집중시기에 충분였다. 고 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춤과 음 악이 조를 이루는 경건 분위기를 고양시 고 있었다. 종묘제례의식은 중요무문 재 56로 보존의 가치가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 계무유산으로 선정되 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유산이기에 더 욱 자랑스럽다. 종묘제례는 국가 사로 매년 5월 첫째 일 요일에 거고 있다. 건축 가치가 높은 종묘 는 일본의 최고 건축가 들이 보고 기절였다는 이야기가 전지고 있다. 2012년에 리움미술관에서 별강연을 위 국에 온 캐나다건축가 랭게리는 종 묘에 감동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건물이 주는 고요고 장엄을 느끼기 위 문을 열기 전에 관람게 달라고 였다고 다. 종묘를 보기 위 가족들을 이끌고 방 문였다고 니 우리의 문유산은 세계적 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고궁을 관람면서 느끼는 조상의 위업과 는 또다른 감명을 받고 조선왕조의 손으로 나 음덕을 받고 돌아온 보람찬 참반이었 다. <성종/경명군 14대손 ‧ 始42세>


42 李花 266 전주이씨도청년 조상의 발자취를 찾다 ! - 조선왕조 동지 답사 참배 - 이철 제주도 계성군 청년장 전주이씨 계성군 제주별자치도청년 (장 哲憲)는 도종친(장 )의 원아 래 지난 11월 4일부 6일까지 3일 동안 청 년 임원․이사 30명과 계성군 도종친 장단․상임이사 등 44명이 참여 가운데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 다. 청년 답사단 일은 2015년도 조선왕릉 41기(왕릉 24 ․ 왕비릉 17)를 참배데 이어 두 번째 답사로 금년에는 종묘추대제 참관 을 시작으로 조선왕조 동지 전주, 삼척, 영 3개 지구 중에서 북 영지방에 있는 덕안릉[목조], 지숙릉[익조], 의순릉[도조], 정릉[조]을 제외 남의 2개 지구, 8 개소를 참배 답사는 자리를 마련다. 첫날에는 600여년의 장구 세월 속에서 도 원 그대로의 를 갖추고 있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영녕전 추대제를 참관고, 오에 다음 참배 답 사지로 양무(李陽茂) 장군 내외의 묘가 있고 잠시 이주여 살았던 곳인 삼척시로 이동 였다. 삼척은 양무 장군이 아들 이안사[목조]와 친족, 추종 세력 등 170여 가구 1천여 명과 께 전주에서 이주여 살다가 돌아가신 곳 이며, 이에도 목조대왕 중심으로 일정기간 동안 살다가 경남도 영지방으로 다시 이 주였다. 둘째 날, 5일은 삼척시에 있는 조고제 의 5대조이자 목조의 부친인 양무 장군의 준 경묘(濬慶墓)를 찾아 참배 묘를 두산 과 청옥산 자락, 무릉도원 계곡에 왕기가 서 린 천의 명당지에 모시게 된 수를 살 고, 인근 지역의 양지바른 동산에 모셔진 장 군의 부인 영경묘(永慶墓)에도 께 참배를 였다. 목조대왕이 부친 양무 장군 내외와 께 10여 년 동안 살았던 곳인 구거유지(舊居遺 址, 국가사적 제524 지정)를 답사고 나 서, 다음 선지인 전주시로 5시간여 동안


李花 266 43 이동을 면서 계성군 종친청년의 역 과 나아갈 길 등에 대서도 심도있는 론 은 물론 종장단의 조언과 덕담을 듣는 정겨운 시간을 가졌다. 셋째 날, 6일은 조선왕실의 발상지이자 조고제 선친들의 본인 전주에서 우선 경 기전(慶基殿)을 찾아 시조 사공공 내외분의 위가 모셔진 사당에서 참배를 고, 또, 조고제 어진을 비롯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임금의 어진이 모셔진 조 어진(太祖御眞) 박물관을 답사였다. 이어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물리치고 대승 을 거둔 양으로 개선을 다가 조상님 들이 살았던 이곳에 들려 축연를 베었 다는 오목대(梧木臺, 전북기념물 제16)에 올라 전주 시가지를 눈에 내려다보며 조상 님의 숨결과 대자연의 정취를 만끽 수 있 었다. 또 전주 옥마을 내에 위치 전옥 으로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고종제의 손자 이석 손이 사는 승광재(承光齋)를 방문여 실의 다양 문체을 볼 수 있는 모처 럼의 기가 되었 다. 마지막으로 전 주이씨 시조 이 (李翰)공 내외의 묘 가 모셔져있는 조 경단으로 이동여 동 참배여 조 선왕조 동지 답 사 참배에 대 3 일간의 여정에 대 미를 장식였다. 이러 조선왕조 동지 답사 참배 는 주변의 맑은 공기와 삼림욕 기 좋은 른 잔디밭과 울창 숲으로 둘러쌓여 대자연 의 정기를 이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당 자리이자 최적의 정원으로도 손색이 없음을 눈에 알 수가 있다. 또, 이러 조선왕조 동지를 청년원 들이 부인과 자녀 등 가족이 께는 숭 고 견과 경건 참배의식을 여 조상 의 숨결을 느끼며 마음을 께 수 있는 기 였을 뿐만 아니라 2015년 말에 조선왕릉 참배에 이어 전국에서 처음으로 다시 시 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켜 전주이씨 종친의 발전과 종친 가족의 단을 모색 나가는데 계성군 제주도청년가 앞장서 수 있다는 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는데 의미가 있다고 겠다. 따라서, 조선왕조 생에 대 격 높은 가치를 일깨워 줌으로써, 종친 손들에게 자존과 자긍심을 고취시켜 나가게 될 것으로 기대가 되고 있다. <성종/계성군 17대손 ‧ 始45세> 이양무 대장군묘(준경묘) 참배 기념


44 李花 266 2017년도 뿌리교육 소감문 이소정(李昭定) 국외국어대교 1년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들려서 꽃 좋고 열매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도 아니 그쳐서, 내가 되어 바다에 가노니” 국어시간에 배워서 우리에게 친숙 용비 어천가의 구절이다. 기반이 다면 어떠 시련에도 굴지 않고 영광을 이어나 갈 수 있단 뜻이다. 이번에 참가 선성군 명산종중의 뿌리교육은 용비어천가의 구절이 의미는 바를 몸소 체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디서부 시작여 어디로 가게 되는가? 어떤 이에게는 심오고 철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간단 답이 있다. 우리의 시작, 즉 뿌리는 당연 우리의 조상 이다. ‘선성군’라는 나의 커다란 나무가 조상님들이 일궈 놓은 땅과 뿌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나무를 이루는 줄기 와 잎, 열매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 또 먼 날 누군가의 조상이 되어있을 것이다. 연이란 것은 이렇게 긴밀게 연결된 관 계다. 뿌리교육 장소에 도착서 주변을 돌아보 니, 처음 뵙는 분들과 나와 같은 또래의 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 이 나와 같은 조상님에게서 이어진 사람들이 라고 생각니 무척 신기다. 설날이나 추 석에 제사를 지내기 위 서울 집에 갔을 때 집에는 많은 친척이 모였다. 나는 이것 을 무척 자랑스러워곤 다. 다양 지역 에 살고 있지만 같은 조상에서 비롯된 사람 들이 조상님을 기린다는 나의 목적을 위 모여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뿌리교육에서도 우리들은 그 쉽지 않은 일을 당당 보여주었다. 그 사실 자체가 무 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교육을 받기에 앞서, 선성군 아버님의 묘소를 참배였다. 그런데 대축 분께서 읽 으신 축문의 내용이 궁금였다. 대 입 등 친숙 단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자어로 이루어져 있어 알아듣기가 들었 기 때문이다. 다 참배가 끝난 , 장님


李花 266 45 께서 우리가 참배와 축문의 내용을 친절 게 설명주셨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 많은 자손들을 보시면서 선성군 아버님께 서는 천상에서 어떤 생각을 고 계실까? 참배가 끝난 다 같이 선덕재에 모여 뿌 리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을 받기 전에는 족보라는 것을 본적도, 보는 방법도 몰랐었 다. 그러나 장님의 설명덕분에 전자 족보 라는 리 시스에 대서 알게 되었고 나중에 나의 직계 조상님을 찾는 과정을 족보에 조금은 친숙졌다. 족보라고 면 글씨가 빼곡 낡은 종이 두루마리의 이 미지를 떠올렸는데 인넷에 익숙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족보를 전자 점에 서 뿌리교육을 위 어르신들의 섬세 배려 가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건원릉에서 조고제를 참배였다. 교 국사 시간에 조선을 건국 신 분이라고만 배웠던 인물을 고제 아 버님이라고 부르니 기분이 무척 묘다. 또 이렇게 륭고 유명신 분이 나의 조 상님이라고 생각니 뿌듯고 나의 뿌리에 대 자부심이 생겼다. 자랑스러움은 의정부 고산동 조상님들의 묘소를 둘러보는 여정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돌계단을 올라가니 잠들어 계신 많은 분들이 손인 우리를 반겨주셨다. 비가 왔음에도 불구고 분씩 찾아뵙는 일은 들지 않 았다. 많은 비를 맞으면서 열정적으로 설명 시는 장님을 보면서 선조님에게 부끄럽 지 않은 동을 야 다고 생각기 때문 이다. 묘소에 잔디가 잘 자라야는데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을 많이 는데 여러분들이 온 덕분에 비가 왔다는 말씀에 또 가슴에 와 닿았다. 묘소를 참배 때마다 마음속으로 조상님 의 많은 손들이 잘 성장서 대에 들어 가고 날 조상님들처럼 륭 일들을 낼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모든 참배가 끝나고 모인 장소 뒤은 무 척이나 넓은 땅이었다. 장님은 그 넓은 땅 이 우리의 위이고, 선성군를 위 사용 될 것이라고 말씀주셨다. 조상님들께서 남 기신 지가 손들을 위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나 또 자손들을 위 많은 것을 남 겨두어야겠다고 생각다. 뿌리 교육을 손들은 관계의 소중을 깨닫고 미래의 손들을 위 노력야 것이다. 뿌리교육 의 소중과 요성에 대 실감는 순간이 었다. 식사를 면서도 새로운 경을 였다. 나와 같은 뿌리를 가진 아이들을 만난 것이 다. 그동안은 최대 6촌 정도의 친척 외에는 만날 수 있는 기가 없었다. 처음 만난 나 의 먼 친척들은 처음엔 어색 듯 지만 금 방 이야기를 시작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수 없는 경들을 뿌리교육 덕분에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뿌리교육을 시작기 전에는 ‘조상님’ 이라는 존재가 막연고 어려운 존재로 느껴


46 李花 266 H ow to Nam e 이 동 우 성 명 전 서 - 전국 유명서점과 인넷 절찬리 매중 초 절으로 개정증보 발 - s령대군 15대손 東宇 s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서울시 지원 감사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서울시 서초구분원장(인릉봉 장) s서초구청 OK민원센장, 종민원실장, 서초2동장, 적계장 s국 역리사 검정관리 성명 시출제 위원장 KBS TV등에 160 출연 *채널A.TV.명랑결단에 박근, 노우, 김대중, 이승만 대령과 이병철, 이건, 구본무, 정몽구 장 등 이름이 출연 *명 신생아 작명, 개명, 아,상 *작명경력45년, 서초구청에서만 16년간 6,000여 명 작명 *서울시 작명의 달인 선발(2010년) *서초구민신문, 매일리스뉴스(논설위원) 이름설가 *(재)다산장재단 감사 *성균관대교 총동문 상임이사 기초수급자, 장애인 신생아 자녀 무료작명을 주며 일반인엔 유료명작명, 개명을. ◦수상 : 녹조근정장, 청백봉사상, 정부모범공무원상등 다수 ·이동우성명(작명 개명문의) 서울시 서초구 서운로 13 중앙로얄빌딩 1404 (양재역 1번 출구 서초구청 외교센 건너) H.P 010-2804-6438, 02)565-6438 카 : cafe.daum.net/name7(이동우성명 검색) 저자 이동우 낸곳: 솜미디어 정가 : 15,000원 졌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지금은 나의 수많 은 조상님들은 얼굴도 모르지만 친숙고 감 사 분들이라고 생각고 있다. 집에 와서 전자족보를 조상님들이 어난 곳, 지 내신 관직 등을 찾아보며 많은 분들이 옛날 부 우리의 ‘집’을 빛내기 위 수많은 노력 을 셨음을 깨달았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꿋꿋게 버 수 없다. 뿌리가 제대로 밑을 지줘야만 줄 기와 잎, 열매는 륭게 각자의 일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 입이라는 영 양분을 얻었지만 그것이 100센 우리의 덕이라고 생각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우리 를 믿고 지지준 부모님, 멀게는 우리가 이 시대에 어나서 존재 수 있도록 주신 조상님께도 감사야 것이다. 뿌리를 굳 건 지고 지속적으로 수주는 나무는 오래오래 유지될 것이다. 뿌리 교육을 계속 는 , 선성군는 건강고 나무 로 자라 달콤 열매들을 얻을 것이다. 마지 막으로 이러 과정을 준비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다. <정종/선성군 18대손 ․ 始42세> 개 정 증 보


李花 266 47 고양 칠공자 묘와 연산군 금비 이병준(李炳俊) 본원 문부 위원 <서(序) : 온녕군 손들의 참 / 연산군이 왕이 되어 성종실록을 찬는 과정에서 사림의 거두 김종 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도선이 되어 무오사, 갑자사, 병인사로 많은 사림 선 비들이 무참게 죽임을 당였다. 이때 온녕군의 손자 6공자가 점재 김종직 문에서 문을 익는데, 무군은 사림와 더불어 세론(世論)을 어지럽게 였다는 죄로 경도 온성 등지로 유배되고 독 고문을 당였고, 유자광, 임사 등의 간(諫)을 받아들인 연산군에 의 참수을 당였다(갑자사, 1504년 음 6월 5일). 2년 뒤 병인사에 우산군을 비롯 6공자가 날시에 사사(賜死)를 당였다 (1506년 음 6월 24일). 조선국을 어 온녕군 만 참를 겪은 왕족이 또 있겠는가? 중종반정 이 복권되었으나, 멸문지의 은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자는 온녕군 17대손으로 6공자 중 셋째인 산군(정)의 15대손으로 <조선일보, 박종인님의 땅의 역사의 글>을 전제여 지나간 역 사를 재에 재조명 보고자 다.> 우산군 이종 가문의 멸족 조선 3대 임금 종과 궁 영월 신씨의 셋째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1407~1453) 은 아들이 없었다. 여 동생 근녕군(謹寧君) 이농의 둘째 아들 우산군(牛山君) 이종을 양 자로 들였다. 우산군과 아내 문 류씨 사이 에 여섯 제가 어났다. 모두 총명여 입 신양명니 가문이 번창였다. 둘째 아들 무군 이총은 나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 다. 1504년 이총이 죽었다. 무오사로 경도로 유배 중이던 이총은 갑자사 때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당 뒤 거제도로 다시 유배당다. 그리고 교수을 당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 시신에게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벌, 능지(陵遲) 을 가다. 그 목은 서울 거리에 걸어놓았다. 남은 시신도 온전지 못다. 이듬 음력 1월 26일 자 실록에는 당시 왕이 내린 명령


48 李花 266 이 적 있다. “이총의 뼈를 부순 가루를 강 건너에 날려버리라.” 총명되 불우던 사내가 바람에 날아가 고 가 지났다. 이총의 아버지 우산군 이종, 맏 이원과 네 동생 정, 간, 변, 건이 죽었다. 각기 다른 곳에 유배됐던 사내들이 같은 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기 1506년 음력 6월 24일이다. 우산군을 이들 일곱 부자를 칠공자(七公子)라 다. 가문 을 적도 없이 없애버린 그 군주는 연산군 이다. 극조정과 가생 조선 9대 임금은 성종이다. 수에서 전 는 설다. 어느 날 조정의에 문득 보니 장차관 가운데 극(克)자 돌림을 쓰는 자가 여 럿 보였다. 영의정 이극배, 우의정 이극균, 병조서 이극증, 조서 이극감, 공조서 이극기, 병조참의 이극규, 좌례 이극견까지 국무총리부 의전 담당 비서까지 여덟이나 되었다. 모두 광주 이씨다. 세간에서는 이를 일러 극조정(八克朝廷)이라 다. 가문이 그리 창대니 왕이라고 부러움 이 없을 리 없다. 여 성종은 지금 서울 정 동에 있었던 광주 이씨 종가를 빌려 자손을 낳았다. 수에서는 이를 가생(換家誕 生)이라 부른다. 공식적으로 성종은 왕 4명 과 궁 8명으로부 왕자 16명, 공주와 옹 주 12명을 두고 나이 37세에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성종의 첫아들은 대궐 안에서 어났 다고 돼 있으니 가생에 따른 덕과 득은 이 왕자에게 미치지 못다. 그 아들이 연산 군이다. 군 연산군 성종의 맏아들로서 세자가 된 연산군은 그 누가 보더라도 조선 왕실 정성을 잇는 계자였다. 문제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였다. TV 드라마는 물론 영 소재로도 단골로 등 장는 비 윤씨와 연산군 이야기다. ‘…어 느 순간 성종 사랑을 상실 윤씨가 임금님 얼굴에 손자국을 내버리고, 민으로 내쫓 긴 윤씨는 결국 사약을 먹고 죽었다. 영민 던 아들 연산군은 왕이 되고 10년이 지나서 야 이 사실을 알고 ‘미쳐 버려’ 극악무도 만을 저지르다 위되었다….’ 친모 이야기 를 듣고서 연산군은 ‘윤씨묘’로 남아 있던 어 머니 묘를 왕릉으로 격상시고 릉이라 명 다. 릉은 원래 지금 서울 경의료원 자 리에 있었다. 그래서 릉 주변 지역을 지금 기동이라고 다. 릉은 지금 고양 서삼 릉으로 옮겨져 있다. 그러니까 연산군은 불 우 가정사가 만든 군이었지 날 때부 괴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조선 정치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쟁사다. 정도전으로 대되는 신사대부 세력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이래, 전주 이씨 왕실 권력과 사대부 관료 권력은 주도 권 경쟁을 벌이며 500년을 존속다. 연산군 시대는 약된 권력을 신권으로부 과격 게 수려는 시대였다. 이런 관점에서는 “연산군은 과격 왕권주의자였지 군은 아 니었다”라는 가도 가능다. 지만 정치는 백성을 위이다.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 를 보았던 종도 선정(善 政)을 베었고, 세조 또 마찬가지였다. 백 성까지 력으로 압면, 군(暴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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