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33
내가 ‘당한 것들’과
‘해댄 것들’
회복의 심리학 33
내가 ‘당한 것들’과
‘해댄 것들’
※꼭지가 '빡' 돈 사람들의 이야기(영화)를 보고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리커버리) 대표
한 달 쯤 됐나? 새벽에 하도 잠이 안 와 잠을 청할 셈
으로 영화를 한편 골라서 봤다. 그런데 이런! 너무 쇼킹
하고 재밌어 잠을 그만 망쳐버렸다. 얼마 전까지 극장
에서 상영했던 이 영화의 제목은 ‘와일드 테일즈(Wild
Tales)’. ‘오싹한 이야기들’이란 뜻의 이 영화 포스터엔 ‘참
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 각 20분 짜리
6개의 단편을 묶은 아르헨티나의 옴니버스 영화다. 웬만
큼 재밌지 않고서는 런닝타임 120분씩이나 되는 영화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보기가 힘들다. 이 영화는 이
야기 한 개당 20분씩이니 딱 좋다. 한두 개 보다가 자면
되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완전히 빗나가 120분 동안 졸지
않고 6개를 다 봤다. 그중 1번, 2번 이야기를 올린다.
어떤 기자가 이 영화에 쌈박한 코멘트를 달았다. “새
로운 화병 통치(通治) 복수극의 탄생! 분노한 자들이여
영화관으로!” 그렇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 ‘빡’ 도
는 상황들과 복수를 그린 영화다. 사람이 빡 돌면 어떻게
될까?
5월 21일 개봉한 아르헨티나 영화 ‘와일드 테일즈’의 포스터.
극장 상영은 종료되었고 TV로 볼 수 있다.
공짜표로 비행기에 탄 사람들. 그들에게는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
1. 이 비행기는 누구를 싣고 어디로 가는가 시작된다. 왼쪽 남자는 음대 교수, 오른쪽 여자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남자 친구가 있나요?” 있었는데 헤어졌다
제1화 ‘파스테르나크(Pasternak)’는 짧고도 강렬하 고, 성격에 문제가 많은 남자였다고 한다. “뭘 하는 남자
다. 미리 말하는데, 엉뚱하고도 재밌게 시작된 이야기가 였나요?” 클래식 연주자였다고 대답한다. “지금도 연주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어, 어, 어…” 하다가 마침내는 소 를 하나요?” 트러블 메이커라서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
름을 돋게 한다. 지난 1월에 있었던 독일 루프트한자 소속 었단다. 음대 교수 남자의 머릿속에 ‘혹시?’ 하고 퍼뜩 집
저먼윙스 항공기의 고의 추락사고를 쏙 빼닮았다. 남프 히는 게 있다. “가만있자, 이름이 어떻게 되죠?” 헤어진
랑스 알프스에 비행기를 추락시킨 부조종사가 이 영화를 애인의 이름은 ‘파스테르나크(Pasternak)’.
보고 범행을 결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조차 든다.
보다시피 소형 여객기에 승객이 3분의 1쯤 찼다. 상당
수는 공짜표로 비행기를 탔다. 이 사진 속 남녀의 대화가
“저런, 그 친구 내가 잘 알아요!” 교수의 기억에 그는
괴팍한 친구였고 실력도 변변찮았다. 교수는 대놓고 그를
혹평한 적이 있다. “너는 절대 음악을 해서는 안 돼. 성공
할 확률이 제로야.” 졸업한 뒤 그의 소식을 못 들었는데,
지금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애인이었다니 세상 참 좁다.
남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앞자리의 할머니가 일어서
더니만 이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저도 그 사람 알아요. 그
가 초등학생 때 제가 담임이었죠. 그 학생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파스테르나크
를 도마에 올려놓고 그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는
지 각자 성토를 하는데, 옛 애인이었던 이 여자는 당혹스
러우면서도 한편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헤어지길 참 잘했
고, 이별을 통보한 자기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전
적으로 파스테르나크에게 있었으니 죄책감을 가질 이유
도 없어졌다는 식이다.
“우리가 어떻게 한 비행기에 타게 된 거지.” “대체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이들 세 사람 뿐이 아니었다. 기내 여기저기서 파 실로 뛰어가 문을 두드린다. 그는 파스테르나크를 진료
스테르나크를 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들 좋지 않 하던 정신과 의사다. “이보게 파스테르나크. 진정하게
은 기억들이었고, 그들은 파스테르나크를 따돌린 경험 나. 하는 수 없어 진료비를 올린 것이지 다른 뜻이 없었
이 있었다. 이 작은 비행기에 탄 얼마 되지도 않는 승객 네. 앞으로 진료비를 받지 않겠네. 마음을 돌려요.” 파스
대부분이 파스테르나크를 알고 있다니 정말 골 때리는 테르나크는 아무 대답이 없고 비행기가 굉음을 내기 시
우연이다. 슬슬 감이 좀 잡히지 않는가. 대부분 공짜표라 작했다. 의사가 망치로 조종실 문을 부수는 동안 조종실
고 했다. 그들을 이 비행기로 초대한 사람은 파스테르나 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먼윙스의 고의 추락사고와
크이고, 그도 지금 이 안에 있다.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파스테르나크는 대체 이 비행기
교수다. 이상하다 싶어 승객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파 를 어디로 끌고 가서 추락시키려는 것일까? 자기에게 상
스테르나크를 아시는 분 더 계시나요?” 전원! “아니 이게 처를 준 또 다른 두 사람, 그들은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교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행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을 덮친다. 아
래 사진을 보라.
비행기가 날아가는 꼴이 정상이 아니다. 좌우로 요동
치고 있다. 초대자는 조종실 안에 있다. 한 남자가 조종
전직 고리대금업자, 현직 시장 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2. 그러다가 쥐약을 먹는 수가 있다
한 남자가 식당에 찾아왔다.
제2화 ‘원수는 식당에서’. 어느 비 오는 날 저녁에
이 남자가 식당에 찾아왔다. 그다지 점잖아 보이진 않는
사람이다. 식당 여종업원을 대하는 태도가 벌써 수작을
거는 눈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행간에 희롱기가
숨어 있다. 많이 해본 솜씨다. 여종업원의 이름을 ‘클라
라’라고 해두자. 가만히 보니 이 남자, 기억 속에 똑똑히
박혀 있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전직 고리대금업자이
고 지금은 시장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못 알아
보고 있지만 클라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원수
다.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아버지가 자살했다.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죽은 뒤 이 남자가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추행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죽
고 집이 파산해 식당에 나와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던 중 그 원수를 만나 서빙하고 있는 것이다. 클라라는
어떻게 했을까?
클라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방에 들어가 작이다.
오른쪽 창문으로 보이는 아줌마(식당주인)에게 털어놓 “클라라, 이 의미 없는 삶에서 아주 뜻 깊은 일을 할 수
는다. 여기서 그 원수를 만났다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가서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말겠 있는 기회가 온 거야.” 아줌마는 손에 쥐약통을 들고 있
다고. 아줌마가 정색을 하고 어이가 없다며 클라라를 나 다. “쥐약도 유통기한이 있나?”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효
무란다. “아니 그런 원수에게 고작 욕이나 하고 말겠다 과가 있겠지.” “그냥 실수로 섞여 들어갔다고 하면 돼.”
고?” 클라라는 의아해하고 아줌마는 한쪽 구석을 뒤지더 “설령 감옥에 가도 거기가 여기보단 나아.” 계속 듣다 보
니만 작은 통 하나를 찾아가지고 와서 던지는 말들이 걸 니 이게 농담이 아닌 거라. 클라라는 행여 어떻게 될까
싶어 아줌마를 말렸다.
식당 주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쥐약통’이다.
이 아줌마 봐라! 클라라가 서빙하러 간 사이 남자가 약이 든 프렌치 프라이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 아들의 복
주문한 음식(프렌치 프라이)에 진짜로 쥐약을 섞어버린 통이 시작되었다. “설마?” 아줌마가 대꾸한다. “쥐약을
다. 클라라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모르고 쥐약 탔어.” 화들짝 놀란 클라라는 테이블로 달려가 접시를
으로 버무린 프렌치 프라이를 갖다 주고 남자에게 붙잡 빼앗는다. 남자는 클라라의 불손한 태도에 잔뜩 화가 났
혀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 다. 몇 마디 고함을 치다가 그만 배를 움켜쥔다. 이 광경
자의 수작을 피해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복수하겠다 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클라라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화
는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 클라라는 천성이 그럴 위인 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에라 모르겠다.” 남자의
이 못되었다. 잠시 후 남자의 아들까지 합석, 둘이서 쥐 면상에 프렌치 프라이 접시를 날려버린다.
“어떻게 요절을 내지?” 생각에 잠긴 식당 주인 앞에 주방 칼이 있다.
이 끔찍한 장면은 사진으로 보여주기가 좀 그렇다. 순식간에 남자가 죽었고 아줌마는 범행현장에서 체포
다른 사진을 보면서 그냥 말로만 하자. 클라라는 남자의 되었다. 감독은 복수의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려
면상에 음식접시를 날렸고 남자는 쥐약이 몸에 퍼져 무너 는 의도였을까? 영화로 대신 복수해 줄 테니 맘속에 품
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가씨의 은 원한일랑 영화로 풀고, 한순간 화를 참지 못해 인생을
목을 비틀었다. 이때 대책 없는 식당주인이 뭔가를 들고 그르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
주방에서 나왔다. 주방용 칼을 남자의 등에 여러 차례…. 었을까?
영화 '와일드 테일즈'의 데미안 스지프론 감독. 3. 때론 ‘복수’의 주인공이 되어
촬영 현장에서.
물론 ‘홧김에 복수’는 금물이다. 그러나 감독이 겨우 그
정도나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관객도 머리가 있
지, 앞뒤 다 재면서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
가 되어 보기도, 가해자가 되어 보기도 한다. 영화가 전개
되는 내내 “제명대로 살자면 조심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사람 꼭지 돌게 만들면, 그게 죽고 살
일 아닌 다음에야 영화라도 보면서 푼다지만 도가 지나쳐
아주 병신을 만들고, 가해자가 도리어 큰 소리 치고 나오
면 정말 쥐약을 타버리는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살면서 큰 죄는 짓지 말아야겠다. 누구 가슴에 대못을
박지는 말아야겠다.” 죄를 지었으면 사죄라도 해야지 적
반하장으로 나가면 공짜 비행기표를 받는 수가 있고, 복
수의 저녁식사에 초대받는 수가 있고, 누가 몰래 쥐약을
타는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섯 편의 이야기를 다 하면 이 재밌는 영화에 초를 치
게 된다. 속에 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잖아도
화를 풀지 못해 병이 되는 마당에 ‘그만 내려놓으라’는 아
름다운 말에 넘어가 진짜 ‘내려놓기’만 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시간 나면 한번 보시라. 복수의 주인공
이 되어 보시라. 그러면서 자기도 지은 죄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비로소 당한 것과 해댄
것을 묶어서 퉁칠 수 있지 않겠는가. 심화(心火)까지 기승
을 부리게 되는 여름, 유머러스하고 통쾌하며 소름이 돋
기도 하는 멋진 복수극으로 초대한다.
[영화정보]
•영화명 와일드 테일즈(Wild Tales. 2014년 제작)
•장르 코미디, 드라마, 스릴러 상영시간 122분 감독 데미안 스지프론(Damian SZIFRON. 아르헨티나)
•한국 개봉일 2015. 05. 21. •주요기록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및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전미 비평가 협회 외국어 영화상 수상, 미국 ‘더 타임즈(The Times)’의 ‘2014년 최고의 영화 10편’에 선정,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총 36개 부문 후보 및 23개 부문 수상
영화 포스터(아르헨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