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11
어떤 친절
회복의 심리학 ⑪
어떤 친절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리커버리) 대표
1910년대 후반의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신문팔이를
했던 어떤 청년이 피츠버그의 한 가구점 점원으로 취직
했다. 늦가을비가 내리던 추운 날이었다. 가게 밖에서
어떤 할머니가 비를 맞으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은 가게 문을 열고 나가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
니는 “난 가구를 사려는 게 아닌데…”라고 말했지만 청
년은 할머니를 난로 옆 의자에 앉도록 하고 따뜻한 차를
한잔 대접했다. “왜 거기 비를 맞고 서 계셨죠?”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우” 그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비가 그
치자 할머니는 청년의 명함 한 장을 받아들고 떠나갔다.
얼마쯤 지나 가구점 점원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도착
했다. 할머니의 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어머니를 잘 대
해준 청년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의 사무실
로 청년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년은 편지를 보
낸 사람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할머니의 아들은 다름
아닌, 당대의 갑부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였다. 직접 만나서도 청년의 인간미 넘치
는 태도에 반한 카네기는 청년에게 선물을 안겨주었다.
“스코틀랜드에 내 별장을 짓고 있는데, 거기 들여놓을
가구들을 모두 당신이 납품하시오.” 청년은 더 이상 가
구점 점원으로 일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자신이 직
접 가구점을 차려 엄청난 금액의 가구를 카네기 별장에
납품했다. 청년의 가구가 카네기 별장을 장식했다는 소
문이 나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주문이 쇄도했다.
미국 시카고의 AON(에이온) 본사.
신문팔이, 가구점 점원이었던 클레멘트 스톤이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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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할머니의 명찰을 보고 접대한 것이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 누군가 비 맞고 서 있으니까 선의를 베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모시고 들어 왔던 것이다. 할머니는 청년이 무심코 나누었던 많은 친절들,
그 대상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빈털터리 청년의 팔자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가구 ‘계급장’보다 ‘사람’을 먼저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우
점으로 큰돈을 벌었고, 이어 보험회사를 설립했다. 그 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거의 본능적으로 그 사람의 지위
의 보험회사는 미국 대공항기에 승승장구했고, 훗날 패 를 식별한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정도의 선으로 대해야
트릭 리언 그룹과 합병해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재보험 할지 판단하고 행동한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돈이 있어
사)로 발돋움했다. 그 보험사의 이름은 ‘AON(에이온)’. 박 보이는지 없어 보이는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 인상
지성이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에 큼지 에 따라 대접도 달라진다.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막하게 로고가 박힌, 바로 그 보험회사다. 1970년 포츈 사회적 편견에 의해 결정된다. 내 눈 앞에 어떤 사람이 있
(Fortune)지는 그를 미국 50대 갑부의 한 사람으로 선정 다. 그 사람의 신분이 보이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인간이
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클레멘트 스톤(W. Clement Stone. 보이는가. 딱 그만큼이 내 수준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
1902~2002).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금 도달한 수준이 딱 그 정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자랐다. 돈이 없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6살 때부
터 시카고 남쪽에서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나중에 검정고
시로 고졸 자격을 얻어 노스웨스턴 대학에 들어갔고, 대
학 졸업 후 디트로이트 로스쿨까지 다녔다.
클레멘트 스톤은 미국 세일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 카네기
물로 손꼽힌다. 특히 세일즈 교육 분야에서 그는 교과서 (Andrew Carnegie. 1835~1919)
로 통한다. 철저한 교육투자, 세일즈맨 교육에 대한 헌신
으로 오늘날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다. 집필가로서도 세
계적인 명성을 날렸다. 그는 앤드류 카네기의 경영학을
연구, 이론을 정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체험을 가미하
여 나폴레온 힐과 함께 ‘성공학(Science of Success)'의 학
문체계를 세웠다. 이른바 미국의 ‘성공학’에서 클레멘트
스톤은 나폴레온 힐과 함께 양대 기둥의 하나이다. 1970
년, 미국 50대 갑부로 꼽혔던 클레멘트 스톤은 ‘아름다운
부자’로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데 3억 달러 이상을 기부한 사람이다.
가구점 점원 클레멘트 스톤이 베풀었던 ‘친절’을 영업 클레멘트 스톤
자질 정도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값어치가 없다. 사람을 (W. Clement Stone. 1902~2002)
대하는 그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청년은 그때 잠재고
객을 상대로 영업을 한 것이 아니라 비 맞고 서 있었던
한 명의 ‘사람’을 대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카네기의 엄마’
라고 명찰을 달지 않았고, 귀부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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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앞에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신분이 보이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인간이 보이는가. 딱 그만큼이 내 수준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 도달한 수준이 딱 그 정도라고 보면 맞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인수를 결정한 후 인터뷰 장면(1976)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이라는 사람이 있다. 위대한
철학자였던 후설(Edmund Husserl)의 문하에 있던 철학자이자 수녀였
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대상 명단에 올랐고, 주위의 도움으로 얼마든
지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혼자서만 체포를 피하는 ‘특권’을 마
다하고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에 의해 성녀로 시성된 에디트 슈타인은 영적 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인
물이다. 그가 자신의 학문과 수도생활에서 평생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은 말
을 남겼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이방인(異邦人)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웃이요 형제입니다.” 그 사람의
소득, 신분, 출신지역, 성격, 피부색, 소속집단과 관계없이, 그가 누구
이든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는 것. 배운 사람과 아직 더
많이 배워야 하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 이런 말이 있다. ‘악인원리(惡人遠離) 귀인상봉(貴人相
逢) : 악인이 멀어지고 귀인이 찾아오기를.’ 그걸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
다. ‘내게 악인이 오지 않기를, 내가 악인이 되지 않기를. 내게 귀인이 찾
아오기를, 내가 귀인이 되어 있기를.’ 사람은 누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살 수밖에 없기에 인생의 성패도 결국 사람에 달려있다. 내 인생에 귀인
(貴人)이 드느냐, 악인(惡人)이 드느냐는 먼저 내 스스로 악인이 되지 않
고 귀인이 되는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내가 귀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친절한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안다. 모름지기 친절의 출발은
내 앞의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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