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10
은총, 복
회복의 심리학 ⑩ 1996년 7월 17일. 뉴욕에 사는 로버트 존스(가명)는 출장
차 파리행 비행기를 타러 JFK공항으로 갔다. 수하물 수속
은 을 마치고 출국수속을 밟는 중에 우발적인 사건이 터져 탑
총, 승이 지체되었다. 비행기는 이 문제의 승객을 한 시간 가량
복 기다렸다. 결국 존스는 비행기에 짐은 실었으나 몸은 싣지
못했다. 비행기는 떠났고, 그는 일을 수습하러 사무실로 돌
박경욱(본지 발행인) 아가기 위해 급히 택시를 잡았다.
88 얼마 안 있어 택시 안 라디오에서 긴급뉴스가 흘러나왔
다. 존스가 놓친 비행기가 이륙한 지 12분 만에 롱아일랜드
상공에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자 230
명 전원 사망. 단 한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9.11
이전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항공기 참사였다. 폭발한
비행기의 이름은 TWA Flight 800.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이
끔찍한 사건의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날 공항에서 존스가 원한 것은 무사히 비행기에 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혀 원치 않은 사건이 벌어져 탑승자 명
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비행기를 놓치게 한, 결코 원치 않았
던 사건은 존스에게 일생일대의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다.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지만 인생에서 꼭 필요했던 일이 이
루어졌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적인 비유이긴 하다. 그래도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삶과 꼭 필요한
것이 이루어지는 삶, 당신은 어떤 삶을 바라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진정’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대여섯 살 꼬마부터 70 노인까지 저마다의 ‘버킷(bucket
: 물통)’에 원하는 것들을 가득 담고 있다. 책과 신문, 방송,
잡지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묻고 사람
들은 열심히 각자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 원하는 것
들의 목록)를 만든다. 아예 그런 걸 가르치는 강좌도 성업
중이다. 몇 년 전 대박을 터뜨린 어떤 책은 ‘강렬하게 원하
는 것은 끌려오게 마련’이라는 ‘끌어당김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을 인생성공의 절대법칙으로 내세워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함정에 빠지지 말 일이다. 원한다고 그것이 끌려
온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끌려온다고 해도 삶이 나아지리
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원하는 족족 성취하고 승승장구,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늘 뉴스를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것 로버트 존스가 놓쳤던 비행기는 이륙 후 12분 만에 공중 폭
을 성취한 사람들이 막상 손에 넣은 것을 열었을 때 그 파 되었다. (1996. 7. 17)
것이 ‘위조지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
은가.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축배가 될지 독배가
될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이성은 명백한 한계가 있으
며, 삶은 그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진정’ 당신이 원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지난 세기의 철인(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동시대
를 사는 사람들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
이 원하는 것은 ‘진정’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당신의 욕망은 타인이 당신에게 바라는
욕망, 타인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런 욕망이 우리의 삶을 가짜로
만들고, 우리는 가당치 않은 욕망들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원하는 것들의 목록
을 옮겨 적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이다.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얻을 만큼 얻어 봤지만, 자크 라캉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
그때마다 손에 넣은 것이라 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지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은
곤 ‘위조지폐’였음을 깨달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진정’ 당신이 원 총을 성취한다거나 복을 달
사람들은 이제 조용히 원하 성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은
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 하는 것인가?” 당신의 욕망은 당신 총을 입는다, 복을 받는다고
가득 채워진 버킷의 목록들 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라 말한다. 우리가 은총이나 복
을 죄다 비운다. 그리고 조 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당신의 욕망 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
용히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은 타인이 당신에게 바라는 욕망, 타 라 은총이나 복이 우리를 향
하늘에 맡긴다. 자신이 원했 인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한 욕망 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던 것들은 ‘진정’ 자신이 원 아무나 복을 입는 것이 아니
했던 것들이 아니었음을 고 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고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다.
백하고, 자기 의지의 한계를 불행하게도 사람을 가린다.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만약 우리의 그릇이 자신의
쇼핑목록은 사라졌다. 대신 그는 대담하게 더 큰 것을 생각대로 원하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면 하늘에
구한다. 그것은 ‘은총(grace)’ 또는 ‘복(福)’이다. 서 은총이 쏟아지고 복이 내려온다 한들 비집고 들어갈
은총(복)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틈이 없다. 은총 또는 복은 비워진 사람들에게만 내려온
구체적으로 뭔가를 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 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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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복)의 조건 할 도리 다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은총(복)의 실체를 탐구한 사람이 있다. 미국의 정신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은총(복)은 저만치 떨어
과 의사 스캇 펙은 자신을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만나 져 있고 뙤약볕 아래서 한탄할 때가 있었다. 원하는 것
분석하고 성공하고 실패한 사람들, 행복했고 불행했던 을 얻으려 죽어라 달려갔는데, 얻기는커녕 벽돌로 뒤통
사람들을 찾아 탐구했다. ‘왜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장 수만 얻어맞고서는 “왜 하필이면 나야? 잘못한 것 아무
면에서 그토록 현명한 결정을 하거나 어이없는 판단을 것도 없는데”하며 바보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을 때이
내리는가?’ 그는 답하길,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 다. 그래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이를 악물고 전
만 분명한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고, 그 힘 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졌을 때이다. 거기서 멈췄기
이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것 에 망정이지 삶이 계속 태
이다. “차를 몰고 가다가 어 클을 걸어오는 데도 태클의
둠 속에서 보행자를 칠 뻔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빌 게이츠나 워 주범이 내 안의 과한 욕망
했을 때, 브레이크를 밟았는 렌 버핏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은총 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계
데 앞차의 불과 1~2인치 뒤 은 다르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 그런 속 앞으로만 나아갔더라면
에서 멎었을 때 ……. 당신 데 우리는 굴러들어오는 은총을 종종 벽돌이 아니라 망치로 뒤통
도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 수를 얻어맞았을지 모른다.
보기 바란다. 대부분의 사람 발로 걷어차 버리곤 한다. 눈앞의 자잘
들도 자신의 삶에서 재난이 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 아닌가.
반복적으로 스쳐지나가고
있으며 실제로 일어난 사고
들보다 일어날 뻔한 사고들
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
가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존방식 혹은 사고에 대한 방어
능력이 개인의 의식적인 판단의 결과가 아님을 깨닫
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스캇 펙 「아직도 가
야 할 길」 중에서) 그는 그것을 ‘은총’이라고 했
다. 그런데 애써 은총을 비켜가는 사람들이 있
는데, 그들은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들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가 남긴 다음 몇 구절을 읽어보면 ‘은총의 조
건’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은총을 차지하
려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 있다.” “은총을 받아 하늘로부터 이토록 새로운 삶을
선사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무척
놀란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자기가 찾아 얻은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은
총을 소유할 순 없다 해도 은총이 기적처럼 올 때 우리
의지로 자신을 열어놓을 수는 있다. 우리는 자신을 은총
을 맞이할 기름진 땅, 은총을 맞이할 태세가 갖추어진
장소로 준비해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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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질 결과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일 그 자체에 전 은총(복)을 기다리며
념했을 때, 관계 그 자체에 성의를 다했을 때 은총은 기
적처럼 찾아오곤 했다. 일찍이 복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될 수
들은 원하는 것을 거머쥐려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사람 는 없다. 하지만 은총은 다르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 그
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만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런데 우리는 굴러들어오는 은총을 종종 발로 걷어차 버
준다. 인생은 전쟁터가 아니고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좀 리곤 한다. 눈앞의 자잘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 아
더 편안하게, 미처 바라지 않았던 것들조차 얻는 길이 닌가. 잡다한 쇼핑목록을 비워서 더 큰 것, 은총(복)을 받
있다고. 그 길은 할 도리 다 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을 수만 있다면 바깥세상이 아무리 출렁거려도 우리는
것이라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즐거움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불운의 연속이라 해도 그것의 궁극
유능하고 머리 비상하고 순발력 좋고 전투적인 사 적인 뜻을 알아채고 수용할 수 있다. 어떤 자리도 마다하
람들이 진정 성공한 예를 보지 못했다. 그런 일은 결 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도 거침없이 어울리며
코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돈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 스캇 펙은 조언한다. “은총으
과 명예조차 끝내 놓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 로 말미암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은총으로 말
미암아 우리는 따뜻이 맞아들여지고 있다. 우리가 더 무
다. 우리는 어떤 일순간을 보고 그 사람의 행·불 엇을 바라겠는가?”
행을 판단할 순 없다. 일생을 통으로 봐야
행복했던 사람인지 불행했던 사람 이런 명제가 있다. “은총(복)은 모든 물리법칙을 뒤집
인지 보인다. 는다!(The grace reverses the physical laws!)” 자잘한 것
버리고 더 큰 것을 구하자. 은총(복)을 기다리며.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은총을 소유할 순
없다 해도 은총이 기적처럼 올 때 우리 의지로
자신을 열어놓을 수는 있다. 우리는 자신을
은총을 맞이할 기름진 땅, 은총을 맞이할 태세가
갖추어진 장소로 준비해 둘 수 있다.”
_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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