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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20 23:19:12

발행인칼럼_36

발행인칼럼_36

발행인 칼럼 36_ 샹소니에, 자크 브렐의 추억(Ⅱ)

정말,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회복의 심리학 36

샹소니에, 자크 브렐의 추억(Ⅱ)

정말,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01. 콩가루 집안 머니 아픈 덴 관심이 없다. 다들 빨리 죽기만 기다린다. 할
머니가 주머니에 돈을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콩가루 집
이런 집안을 본 적 있는지?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두 아 안에 ‘프리다’라는 딸이 있다. 내가 결혼할 여자다. 빨리 결
들과 딸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섯 식구다. 이 집엔 멀쩡한 혼해서 멋진 집에서 살기로 약속을 했건만 도무지 믿을 수
사람이 한명도 없다. 큰아들은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고, 가 없다. 프리다는 내 앞에선 결혼하자고 해놓고 집에 돌아
취하면 왕이나 된 것처럼 제멋대로 논다. 일요일 새벽에도 가서 날 싫어하는 식구들에게 얘길 들으면 생각이 싹 바뀌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왔는데, 이 인간이 꼴에 교회에 나가 고 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게, 이 집엔 하나같이 생각 없는
기도를 한다는 것 아닌가. 둘째 아들은 땡전 한 푼 없는 주 사람들만 사는지….
제에 분수를 모르고 허세만 잔뜩 들어 비싼 옷을 입고 차까
지 몰고 다닌다. 허세 떨 돈을 만들어내려고 사람들을 속인 그런 집안을 본 적 있는가? 혹시 자기 집이 그렇진 않은
다. 이 친구는 사는 것 자체가 사기다. 어머니는 교양이라 가? 바로 자신이 그중 한 사람은 아닌가? 자끄 브렐의 노
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못하고 입에 래 ‘이 사람들(Ces gens-la)’은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다. 사
서 나오는 대로 뱉는 사람이다. 그 생각 없는 집에 아직 할 기치고 허세부리고 앞뒤가 다르고 계산만 하면서 인생을
머니가 살아 있는데,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지 말을 제대 축내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
로 못하고 늘 손을 바르르 떤다. 하지만 식구들 누구도 할 지 묻는다. 제발 생각 좀 하면서 살자고, 계산하지 말고 사
람을 보면서 살자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갖고
브렐의 모든 노래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는 공연장에서 그 살자고 호소한다. 이처럼 그의 노래들은 한편의 시이거나
이야기들을 연기로 고스란히 보여준다. 손으로 허공에 그려가 소설, 드라마, 연극이다. 모든 노래에 이야기가 들어 있다.
면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렐의 공연 중 한 장면. 위선에 쩌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인간성 회복을 촉구하고,
불의에 저항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가 하면 영
90 웅을 기리기도 한다.

그는 공연장에서 철학과 사회사상을 담고 있으며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노랫말들을 연기로 보여준다. 다행히
유튜브에 들어가면 그의 공연실황이 흑백필름으로 꽤 남아
있다. 그중 어느 것이라도 보면 브렐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의 생각이 노래가 되고 연기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 속으
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무대는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항구도시 암스테르담. 이 도시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되었지만, 이 도시의 가장 빛나는 노래는 벨기에 출신의
파리 사람 자크 브렐이 부른 ‘암스테르담’이다. 암스테르담에서 함부르크를 오가는 뱃사람들의 애환을 실은 노래다.

02.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면, 듣는 이들은 저절로 주먹을 꼭 쥐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의심스럽다면, 아니 그 전율에 동참하고 싶다면 지
독자들에게 좋은 노래 한개 선물로 띄운다. 자크 브렐의 생 금, 구글이나 유튜브로 들어가 ‘Amsterdam, brel’이라고 검
애 최대 수확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목록에 올라 색어를 넣어보자. 몇 개의 흑백영상이 뜬다. 1964년 아니면
가야 마땅한 노래 ‘암스테르담(Amsterdam)’이다. 세계에서 1966년 실황이다. 어떤 것이라도 들어보라. 가슴이 먹먹해
가장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 하늘에서 내 질 것이다.
려다보면 물과 땅이 반반인 암스테르담, 그 항구도시의 뱃
사람들 이야기다. 누구라도 이 노래를 들으면 박진감 넘치 브렐의 ‘암스테르담’은 뱃사람들이 모인 항구 선술집의 저
는 멜로디 속에 체념과 절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감 잡는다. 녁과 새벽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친 뱃
하지만 심하게 비참한 이야기는 아니고 나이 들면 누구나 사람들이 술집에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취기가 돌면 그
맞이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체념이나 절망’의 사연이다. 이 들 입에서 거친 말들이 튀어 나온다. 어떤 이는 주먹을 불
제껏 해 볼만큼 해본 그들은 사실상 더 이상은 장밋빛 희망 끈 쥐고서는 “한몫 잡겠다고, 저 달도 따겠다고, 돛대 줄마
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쩌다 술 한 잔 기울이면 앞 저 삼키겠다고” 호기를 부린다. 뱃사람들은 술집 여자들과
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호기를 부리곤 한다. 바로 배를 부비면서 춤을 추다가 밖으로 나가 토하기도 하고, 끊
그런 사람들의 노래다. 이지 않고 술잔을 기울인다. 그들은 암스테르담과 함부르
크 항구의 창녀들을 위해, 금화 한 개에 기꺼이 몸을 바치
브렐은 이 노래를 1964년에 유럽 최고 무대인 파리 올랭피 는 아가씨들, 처지는 다를 바 없지만 그렇다고 사랑에 빠질
아 극장에 올려 청중과 평론가, 가수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수는 없는 항구의 여자들을 위해 건배한다. 이건 실은 자신
뒤이은 공연에서도 들려주곤 했다. 모든 공연에서 청중들 들의 고달픈 현실을 향한 건배가 아니겠는가. 오늘 고된 건
은 벼락을 뒤집어쓴 듯 전율했다. 올랭피아 극장에서 이 노 아무 것도 아니다. 내일도 오늘 같은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래가 울려 퍼지던 날 객석에 있었던 나나 무스쿠리는 “극 확신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한바탕 취
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 노래는 청중들뿐 하면서라도 바쁘고 힘들었던 날들을 묻고, 또 다가올 버거
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브렐 운 날들을 스스럼없이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 은인인 줄리엣 그레코는 이 노래를 너무나 흠모한 나머
지 직접 불러 녹음했고, 브렐을 끔찍이 아꼈던 샹송의 영원 가진 것 없는 삶이라고 해도, 많이 있지만 쫓겨서 힘들기는
한 별 에디트 피아프는 죽기 직전, 병고에 신음하는 가운데 마찬가지인 삶이라고 해도 잠시 시간을 내어 이런 음악 속
울먹이는 소리로 녹음했다. 브렐을 추앙했던 데이비드 보 으로 들어가면 미처 생각지 못한 환희의 세계가 열린다. 아
위(David Bowie)를 비롯한 많은 영미권 가수들도 불렀으며, 무리 바쁜 사람도 노래 한곡 들을 시간은 있다. 혼자 조용
지금도 계속 녹음되고 공연장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크 브렐의 폭포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삶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 된다.
브렐은 이 노래에서 약한 톤으로 시작해서 점점 세게 몰
아가는 ‘크레센도’의 진수를 보여준다. 마침내 절정에 이르 91

03. 아늑한 평온 속으로 들어가 눕고 싶다면 의 입에서 낱말들이 걸어 나온다. 3분20여초. 이 짧은 순간
의 침묵이 얼마나 긴지… 우리는 아늑해지고 스르르 눈이
성인이 된 뒤로 좀체 맛보지 못한 ‘아늑한 평온’, 그 희귀한 감겨진다.
감각을 체험해보고 싶은가. 구름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엄마 품에 안긴 따스한 평화를 지금 느껴보고 싶다면 1961년에 탄생한 이 노래는 벨기에의 한 방송사(RTB)에서
하던 일 멈추고 3분간 시간을 내보자. 시(詩)처럼 나지막이 주관한 ‘금세기 최고의 샹송’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2위
읊는 자크 브렐의 노래 ‘평원(Le plat pays)’을 맞이하자. 되 는 에디트 피아프의 영원한 고전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도록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켤 수 있으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였다. 브렐이 피아프를
면 좋겠다. 또는 강가나 거리, 산속… 어디든 오롯이 혼자 넘다니! 이 발표가 있고난 뒤 벨기에와 프랑스의 많은 사람
가 될 수 있는 곳이라면 더 좋겠다. 들이 ‘20세기 최고의 사기’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그들
말대로 이 노래가 당대의 최고가 아니라면 적어도 두 번째
브렐의 입에서 ‘평원’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깊은 평화 속으 자리는 차지할 수 있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더구나 듣는
로 인도된다. 그곳의 지명을 몰라도 그가 노래에서 그리는 이의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기로는 동서양을 통틀어 이에
그 땅으로 가고 싶어진다. 느긋해지면서 대지의 영원의 품 견줄만한 노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에 안기게 된다. 한없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이 노래가 가리
키는 평원은 벨기에의 북해 쪽이다. 아래 사진 벨기에의 북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모든 것 다 뿌리치고 단지 그리운
쪽 해안도시 크노크 하이스트(knokke heist) 같은 곳이다. 엄마 가슴에 안기고만 싶을 때, 브렐이 초대하는 ‘평원’으로
폴랑드르라는 이름의 이 지방은 60km에 걸쳐서 산이라곤 걸어가 보자. 불면의 시간을 달콤한 잠으로 바꿀 수 있다.
찾아볼 수 없고 낮고 평평하기만 하다. 브렐은 어렸을 때 이 노래는 그가 누구든 듣는 이를 조용히 위로한다. 힘을
이 지방을 자주 여행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영원한 고향 내라느니 평화를 찾으라느니, 그런 부연이 없다. 단지 대지
으로 삼았다. 바다와 땅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 북해에서 불 의 모습을 그려주고 나지막이 들려줄 뿐이다. 이 노래 한
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만 하고 하늘이 땅에 닿을 듯 개 건지면 곁에 천사를 두는 셈이 된다. 언젠가 우리가 돌
무척 낮다. 브렐은 이 지방의 하늘은 너무 낮게 걸려 있어 아갈 곳, 미리 그 냄새를 맡고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
서 지붕에 찢어질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고 했다. 그는 바 라. 브렐은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초대한다.
다와 땅이 온통 평평하며 하늘마저 낮게 깔린 폴랑드르 지 ※음원 사이트나 구글, 유튜브 등에서 ‘Le plat pays’를 입력하
방의 분위기를 노래로 묘사하고 싶었다. 면 이 노래를 얻을 수 있다.

“북해와 이어지는 여기는 마지막 벌판. 모래언덕이 파도를 벨기에의 폴랑드르 지방, 북쪽 해안도시 크노크 하이스트
맞아주고 바닷물이 쓸며 넘는 아스라한 바위들은 언제나 (knokke heist) 일대. 브렐이 노래하는 폴랑드르 지방의 평원은
늠름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안개와 동녘 바람에 맞서 꿋 지평선과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하늘이 지붕에 걸린 듯 낮
꿋이 버티는 그의 노래를 들어보라. 그는 하염없이 드넓고 게 깔려 있다.
평평한 땅, 나의 나라.” “북녘바람에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그의 노래를 들어보라. (…) 7월의 들판이 김을 뿜으며 요동
칠 때, 바람이 웃음 지으며 보리를 만들 때, 남녘에서 바람
이 불어올 때 그의 노래를 들어보라. 그는 하염없이 드넓고
평평한 땅, 나의 나라.”

귓전에 바람이 스치고 하늘과 땅과 바다가 선명하게 눈에
잡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그는 일절 사람들의
다툼이 끼어들지 않은 순결한 낱말들로 폴랑드르 지방을
노래했다. 그가 노래한 그 땅은 벨기에의 한 민족이 차지하
는 좁은 영토가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우리 모두의 고향이
다. 그가 잔잔하게 어쿠스틱 기타를 튕기고 마디마디마다
콘트라베이스가 ‘둥~ 둥~’ 묵직하게 받쳐주는 가운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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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샹소니에’ 자크 브렐(Jacques Brel. 1929~1978) 든지 알지? 맘씨 좋은 친구여, 자네가 내 아내를 보살펴주
길 바라네.”
04. 어느 죽어가는 남자의 이야기
남자는 이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아내의 정부(情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노래, 캐나다 가수 테리 잭스가 夫)를 떠올린다. 그놈보다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니 분통
불러서 세계 히트를 기록한 ‘Seasons in the sun’의 오리지 이 터진다. 놈의 이름은 앙투안이다. “앙투안, 내가 널 사랑
널은 자크 브렐의 ‘죽어가는 사람(Le moribond)’이다. 제목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지? 난 오늘 죽느라고 너무 힘든데,
그대로 몇 시간 뒤에 세상에서 사라질 한 남자의 이야기다. 넌 아직도 쌩쌩하구나. 이 봄에 죽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
이 노래는 언젠가 우리 차지가 될 죽음을 미리 떠올려준다. 나? 그래도 넌 애인이니까 내 아내를 잘 보살펴주겠지.”
우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무
슨 생각을 할 것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남자의 사연은 이제 아내 차례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안녕. 누구나 기차
다음과 같다. 를 타야 하지만 나 먼저 하느님께로 가는 기차를 탄다오.
봄에 죽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난 꽃을 밟으며 먼저 가리.
그는 죽고 있는 중이다. 왜 죽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주 젊 사람이 눈을 감는 거야 늘 있었던 일이고… 당신이 내 영혼
은 나이다. 죽어가는 그의 머릿속에 세 사람이 들어 있다. 을 보살펴 주리라 믿어.” 남자는 마지막으로 소원한다. “사
에밀이라는 이름의 단짝 친구,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아내 람들이 내 앞에서 웃으면 좋겠어. 춤을 추면 좋겠어. 미친
의 애인(情夫). 그들을 남겨두고 이제 눈을 감아야 할 시간 사람들처럼 놀면 좋겠어. 나를 구덩이에 밀어 넣을 때도 제
이다. 그 남자가 곧 우리 자신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남 발 웃으면 좋겠어.”
자는 친구 에밀을 떠올린다. 함께 술을 마셨고, 함께 여자
들과 놀았으며, 함께 기뻐했고 슬퍼했던 단 한명의 잊지 못 브렐은 공연에서 자신의 시선과 눈빛, 얼굴 표정, 음색, 손짓
할 친구다. 친구에게 당부한다. “이 봄에 죽는 게 얼마나 힘 들을 써가며 죽어가는 남자의 심정을 그린다. 친구와 연적
(戀敵), 아내를 노래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객석을 가리킨다.
청중은 죽어가는 남자의 친구가 되고, 원수가 되며, 아내가
되기도 한다. 이 짧은 시간에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겠는가. 그중엔 한스런 사람도, 뜨끔한 사람도 있을 거다.
이제 삶의 무대가 완전히 치워지는 시간, 남자는 고개를 떨
군 채 자기가 들어갈 구덩이를 힘없이 가리키며 웃음 짓는
다. 정말 가기 싫은데, 갈 수밖에 없는, 저항 불가능의 운명
을 맞이하는 자의 허탈! 그의 노래에 청중은 말문이 막힌다.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브렐은 듣는 이들을 죽음의 문턱으
로 데리고 간다. 얼마나 고귀한 체험인가. 나처럼 마지막
순간을 맞지 않으려면 잘 생각해보고 알아서 살라고, 죽어
가는 자가 살아가는 자에게 던지는 충고다. 이런 스토리를
머리에 넣어두고 그의 노래를 듣고 연기를 보면서도 무덤
덤하다면 그는 아직 살날이 창창한 사람이거나 생각이란
걸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일 거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
세상을 알차게 살 수 없다. 마지막 한 걸음, 오직 자신의 발
로 걸어가야만 하는 순간에 그는 기겁할 것이다.

93

05. 다시,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어 들어갔는데 로비에 서거나 소파에 앉아 TV 생중계를 묵
묵히 쳐다보는 모습들이다. 다들 충격적인 표정이었지만 큰
지난 달, 13일의 금요일. 나는 그날 파리에 있었다. 일로 고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표정이 아니라면 여기
단하던 차에 마침 짬이 나서 일주일도 안 되는 일정으로 파 서 지금 테러가 일어났다고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리에 갔다. 자크 브렐의 흔적이 있는 곳들을 둘러볼 셈이었
다. 바로 그날, 점심에 몽마르트에 있는 ‘티르 부숑’이라는 테러가 진압된 뒤 사람들은 꽃과 촛불을 들고 현장을 찾아
카페에 가서 크레페와 함께 커피를 주문했다. 브렐이 데뷔 갔다. 눈물이 글썽글썽, 그러나 고함은 없었다. 한 아랍계
시절에 일 끝나는 새벽마다 찾아가 친구들과 싸구려 빵과 남자는 붕대로 눈을 가린 채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바
술로 허기를 달래고 피로를 씻던 곳이다. 늦은 오후에 인근 닥에는 “무슬림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
의 ‘트루아 보데’라는 공연장에 잠깐 들렀다. 브렐이 데뷔했 해야 한다”는 글귀가 써져 있었다. 남자는 자기 의견에 동
던 곳이다. 그러고는 공화국광장 앞의 카페로 가서 커피를 의하면 와서 좀 안아달라며 두 팔을 벌렸고 지나가던 남녀
마시며 쉬고 있었다. 6시쯤, 이미 어두워진 도시에 바람이 노소, 다양한 피부 색깔의 사람들이 그를 껴안았다. 테러가
세게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날렸다. 생제르망 쪽에 약속이 지나간 자리에 사랑의 호소가 메아리쳤고, 사람들은 역시
있어 자리를 옮겼다. 호텔로 가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같은 언어로 화답했다. 에펠탑에 불이 들어 왔다. 그들이
생제르망의 부시 거리로 왔다. 그때가 8시 30분. 자유의 심장이라고 자부하는 그 타워에 자유, 평등, 박애의
3색기가 불빛으로 수놓아졌고, 국기 위에는 파리의 오래된
현지의 몇몇 젊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기로 했다. 이 슬로건이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흔들릴지언정 결코
친구들이 반갑게 포옹을 하더니만 약간 무표정한 얼굴로 침몰하지 않는다.(Fluctuat nec Mergitur)” 누군가는 그걸 보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다. 10분 쯤 전에 심각한 일이 벌어졌 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품격이 한눈에 잡힌다.”
다고 한다. 현장은 내가 좀 전에 커피 마시던 공화국광장
근처였다. 테러가 일어나 열 명쯤 죽었는데, 범인들이 자리 테러가 멎자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긴 바타클랑 극장 앞에
를 옮겨가며 계속 총을 쏘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 모인 사람들
어가고 있다고 했다.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해보니, 과연
끔찍한 테러였다. 세계가 발칵 뒤집히고 있었다. 내가 무슨 그날 밤에 1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뒤 앵발리드에서
인연이 있나. 올해 세 번 갔는데, 파리에 있던 날, 두 번이나 프랑스 대통령 주관으로 희생자 추모제가 열렸다. 대통령
테러가 일어났다. 우리는 줄리엣 그레코가 데뷔 시절에 청 과 장관들, 주요인사들, 유족들이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를
소하고 서빙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곳, 지금은 호텔로 바뀐 불렀다. 이어 세 명의 여가수가 나와 기타 반주와 함께 아
그 옛날의 ‘타부’라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재즈공연 주 조용조용히 어떤 노래를 130명의 영전에 바쳤다. 지난
이 열리고 있는 호텔 바(bar)였다. 호에 소개했던 브렐의 노래 ‘사랑만 있다면(Quand On N'a
Que L'Amour)’이 흘러나왔다.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눈가
나는 깜짝 놀랐다. 믿기지 않는 테러 때문에 놀랐고, 두 눈 에 이슬이 맺혔다. 이 숙연한 장면은 유튜브에 들어가면 볼
뜨고 테러를 맞던 그 도시 사람들의 태도에 놀랐다. 테러는 수 있다.
곧 세계의 가장 중요한 뉴스로 떴고, CNN과 BBC 등은 다른
방송을 중단하고 테러가 일어난 파리를 생중계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테러가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
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떤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연은 진행되었고 손님들
은 저마다 와인을 마시면서 공연을 즐겼다. 결코 흥겨운 분
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소스라치거나 호들
갑을 떨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거나 힐끗힐끗 뉴
스를 읽기는 하지만 큰 소리로 상황을 전하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밖에 나와 보니 수가 줄긴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야외카페에서 술이나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금요일
밤을 보내고 있었다. 호텔의 풍경도 비슷했다. 자정 조금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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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비롯한 그 나라 주요 인사들과 유가족들이 모인 11월 13일 금요일 밤. 테러 직전 미국 밴드 ‘이글스 오브 데스 메
자리에서 울려 퍼진 건 공격자들에 대한 분노보다 희생자 탈’의 바타클랑 극장 공연장면. 그들은 모든 연주 일정을 중단
들에 대한 추모가 먼저였다. 그들은 전쟁을 선포하는 노래 했고, 다시 파리를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가 아니라 인류애로 뭉치자는 노래를 불렀다. 테러 희생자
들에 대한 추모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중동에선 죄도 없 바타클랑 극장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오바마, 올랑드,
는 사람들이 폭격으로 수없이 죽어 가는데 어찌 파리의 희 안 이달고(파리 시장)
생자들만 추모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많다. 죽어간 모
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파리의 희생자들을 추 유족과 부상자들도 참가한 가운데 열린 추도식에서 올랑드는
모하는 것에 시비를 걸 순 없지 않은가.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을 것이며, 관용(톨레
랑스)의 국가원칙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구 어떤 곳에서라도 죄 없이 죽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지
금도 IS에 대한 보복 폭격이 감행되고 있다. 폭격을 중단해
야 한다는 의견도, 폭격을 넘어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두 쪽 다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판단을 못 내리겠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평화
를 바라고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나길 기대할 뿐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브렐의 위대한 사랑노래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사랑만 있다면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를 아침에 벨벳
외투로 덮어줄 수 있으리 / (…)사랑만 있다면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이 대포를 향해 말할 수 있으리 / 노래만으로도 진
군의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으리 / (…)그리하여 우리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어도 / 친구여, 사랑의 힘만 있으면 이 세상
전부가 우리 손안에 있다네”

브렐이 살아 있었다면 그 추도식의 부름을 받고 나와 이 노
래를 불렀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총칼과 보복하는 나
라들의 폭격기에 대고 “사랑의 힘만 있으면 이 세상 전부
가 우리 손안에 있다”고 호소했을 것이다. 위대한 사랑의
샹소니에(싱어송라이터) 자크 브렐은 1973년에 폐암에 걸
려 수술을 받았고, 75년에는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요양했
다. 그리고 2년 뒤 파리로 돌아와 요양지에서 지은 노래들
을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음반은 발매 첫날에만 65만장이
팔렸다. 브렐의 복귀에 대한 뜨거운 응원이었다. 그러나 그
는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해 10월 12일 마흔아홉
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요양생활을 했던 마
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에 안장됐다. 그곳은 화가 폴 고
갱이 잠든 바로 옆자리다. 한 번 더, 그의 호소를 공유한다.
“우리에게 사랑만 있다면, 이 세상 전부가 우리 손 안에 있
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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