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23
엘비스Ⅱ
회복의 심리학 엘비스Ⅱ
Elvis 멤피스에 위치한 썬(sun) 스튜디오. 엘비스와 로크롤을 탄생시킨 역사적 장소로
PresleyⅡ 현재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경욱 - 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리커버리) 대표 꿈의 전도사들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꼬마들에게 3명의 미국 스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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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1917~1963), 암스트롱(1930~2012) 엘비스(1935~1977). 그
들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케네디는 짧은
재임 기간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꿈들을 잃어버렸는지 상기
시키면서 그 꿈을 되찾는 모험에 함께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 꿈들
의 절정은 달나라 여행이었다. “10년 안에 사람을 달나라에 보내고
무사히 귀환시키겠다.” 그의 선언(1962년)이 있고 10년이 채 안 된
1969년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아폴로 11호가 발사되어 달
에 착륙했고 약속대로 무사히 귀환했다. 꿈을 실은 우주선의 선장
은 암스트롱이었다. 두 사람이 활약하던 시대에 엘비스는 세계인의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의 거친 숨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전당’에 올라가는 것이다. 당연히 엘비스는 제1호이다. 뿐
헉헉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꿈속에 있던 욕망들이 그의 만 아니다. 컨트리뮤직 명예의전당과 가스펠 명예의전당
노래를 듣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사람들은 ‘점잖은 척’을 에도 올라가 있다. 각기 장르가 다른 최고의 기관 3곳에 등
버리고 개성과 욕망을 가진 존재로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 록된 예는 엘비스 말고는 없다. 이 모든 기록들을 차치하
하기 시작했다. 고서라도 다음 한 가지 사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세 사람은 지난 세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다. 케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그의 흉내를 내면서 먹고 사
디는 이미 성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아일랜드계 백인 엘 는 모방 가수가 전세계에 1만여명이나 된다!
리트 출신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서민대중을 대변하고 자유
세계의 가치를 확고히 굳혀 스타가 되었다. 암스트롱은 잘 로큰롤 발명
교육받은 중산층 출신으로 달나라의 환상을 현실로 보여 1953년 7월. 낮에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밤에는 술집
주었다. 엘비스는 엘리트도 중산층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청년이 멤피스의 ‘썬(Sun)레코드’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고 부르는 최하층 백인 출신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줄 노래를 녹
으로 로큰롤을 창시, 데뷔 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지 2~3년 만에 전미대륙 <My Happiness>, <That’s
에 이어 세계를 정복했다. When Your Heartsaches
엘비스는 “나도 했으니 너 Again> 등 두 곡을 자비 녹
도 할 수 있다”며 아메리칸 음했다. 엘비스는 그날 레
드림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코딩 매니저인 머라이언 키
될 수 있다고 몸소 증명했 스커(Marion Keisker)의 눈
다. 그는 지금도 아메리칸 에 들었다. 엘비스가 썬레
드림의 대명사로 통한다. 코드의 문을 열고 들어간
죽어서도 가장 많은 추종자 지 1년 째 되던 날, 이번에
들을 거느린 스타로 군림하 는 자비 녹음이 아니라 레
고 있다. 코드사의 공식녹음에 초청
받았다. 매니저로부터 엘
엘비스의 기록 두살 때의 엘비스와 부모. 아버지는 백수였고 어머니가 목화농장에 비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의 기록 속으로 들어 서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썬레코드 사장이 대박의 직
감이 드는 곡을 엘비스에게
가 보자. 그의 음반은 지금
까지 대략 10억장 이상 팔려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역사 시켜보자고 한 것이다.
상 최고의 기록이다. 하루 동안 음반판매량이 가장 많은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Mama>를 녹음한다. 미국독
가수이기도 하다. 그가 죽은 다음 날인 1977년 8월 17일 하 립기념일은 7월 4일, 엘비스의 <That’s All Right Mama>
루 동안 무려 2천만장의 음반이 팔렸다. 미국 역대 넘버원 가 녹음 된 것은 그 다음 날인 1954년 7월 5일. 미국의 한
싱글 2위(1위는 비틀스), 영국 역대 넘버원 싱글 1위 기록 사회학자는 이날을 가리켜 ‘로큰롤 발명일’이라고 했다. 이
을 가지고 있다. 음반 최다판매량을 의미하는 골드, 플래 날 녹음된 <That’s All Right Mama>는 7월 10일 밤 9시30
티넘, 멀티 플래티넘 레코드가 총 140종으로 역시 세계 1위 분 멤피스의 가장 인기 있는 DJ인 듀이 필립스에 의해 전
이다. 최다 히트 싱글 1위, 빌보드 탑100 등록 1위(151회) 등 파를 탔다. DJ는 엘비스의 싱글을 턴테이블에 걸면서 이런
전무후무한 기록의 보유자이다. 그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 멘트를 날렸다. “이거 큰 사고를 치겠군.” 실제로 이 노래
장 많은 팬클럽을 확보한 아티스트다. 625개의 팬클럽이 는 사고를 쳤다. 방송국으로 리퀘스트가 쇄도했다. 그로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멤피스 그레이스랜드에 있는 그의 터 2~3년 뒤 엘비스는 미대륙을 로큰롤로 평정했다.
무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자수를 자랑한다. 이상은 엘비스 이전의 미국 팝은 잘 생긴 백인이 부르는 달콤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공식기록들이다. 발라드가 주종이었다. 썬레코드 사장 샘 필립스는 세상이
로큰롤 뮤지션에게 최고의 영예는 미국 ‘로큰롤 명예의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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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다봤다. “만약 흑인의 목소리와 감성을 지닌 백인 가수 서 할 테니까.” “엿 먹어라. 나도 너 못지 않다고.” 자라나
를 찾는다면 수십억 달러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는 세대들은 엘비스의 입과 골반의 지휘에 따라 노래하고
는 일을 낼 적임자로 엘비스를 지목했다. 필립스는 인종의 춤추면서 기성질서에 대들었다. 로큰롤의 불길은 소년소
장벽을 뛰어 넘었다. 그가 설립한 썬레코드의 모토는 ‘언제 녀, 청년들에 의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이들을 주
어디서나 누구의 음악이라도 녹음한다’는 것이었다. 흑백 소비자로 삼는 라디오, TV도 마침내 백기를 들고 엘비스
을 떠나 수많은 신인들에게 레코딩의 문을 개방했고 급기 의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단숨에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지
야 엘비스라는 대어를 낚았다. 배적 장르로 굳어졌다. 엘비스 이전의 달콤한 발라드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것들은 촌티 나고 늙은 냄새 나는 노래
멤피스에서 첫 전파를 탄 <That’s All Right Mama>는 그 로 전락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시
때까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불려지지 않은 스타일이었 대가 로큰롤을 요청한다는 의미였다. 엘비스가 문을 열고
다. 말랑말랑 부드럽거나 센티멘탈하지도 않았다. 빠른 박 10년 뒤인 1964년, 비틀스를 필두로 엘비스의 노래를 듣
자에 거친 숨소리와 콧소리가 뒤섞인 신종이었다. 백인의 고 성장한 일단의 ‘영국 출신 록그룹들의 미국 침공(British
컨트리음악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가 교배된 독특한 형식 Invasion)’이 시작되었다. 대중음악은 완전히 록의 시대로
이었다. 노래 부르는 가수도 가만 있지 않고 요란한 동작, 진입했다.
특히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떨며 청중들에게 손짓 발짓으
로 이 발칙한 장난에 동참하라고 연신 유혹해댔다. 점잖 흑인의 감성으로
은 지식인들은 그에게 영어에서 ‘골반’이라는 뜻을 지닌 ‘펠 미국과 캐나다 국경 근처의 로키산맥에서 발원하여 미
비스(Pelvis)’라는 별명을 붙이고 비아냥거렸다. 그의 노래
는 여러 주에서 방송 금지 당했고 TV 출연이나 공연자체 국의 정중앙을 흘러내리는 미시시피강은 멕시코만으로 빠
가 불허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비스가 지른 로큰롤의 불길 져 나간다. 그 하구에 자리 잡은 도시 뉴올리언스는 목화
은 꺼지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이 몰려들었고 이어 청년들 의 집산지이다. 그래서 도시 형성 초기부터 흑인 노예의
도 가세했다. 그때 엘비스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것 노동력이 필요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사냥’해온 흑
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이미 대중들은 제임스 딘, 말론 브 인들을 사고 팔고 하는 시장이 이곳에 있었다. 흑인노예의
란도 등을 통해 저항의 세례를 받은 터였다. 엘비스가 로 공급기지였다. 당연히 흑인이 백인보다 많이 살았다. 뉴올
큰롤의 폭약을 실은 배는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 정도 리언스에서 미시시피 물줄기를 따라 차로 7시간 올라가면
의 함정이 아니었다. 전미대륙에 대폭격을 가하는 항공모 뉴올리언스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 멤피스가 있다. 역시 지
함이었다. 금도 흑인이 많이 사는 곳이다. 멤피스에서 북동쪽으로 차
로 3시간 거리에 테네시 주의 주도인 내쉬빌까지, 이 세 도
엘비스의 폭격은 기성의 문화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는 미국 대중음악의 트라이앵글이다. 뉴올리언스에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었다. “웃기지 마. 내 인생 내가 알아 흑인 재즈가 탄생했고, 내쉬빌에서는 백인 컨트리 음악이
만들어졌으며, 멤피스에서는 흑과 백이 융합된 로큰롤이
엘비스의 곡 제목을 딴 ‘핫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 엘비스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그레이스랜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3성급 호텔이다.
이 세 도시와 이 도시들에서 탄생한 음악들은 모두 목화
재배와 관련이 있다. 이들 지역에는 플랜테이션이라고 하
는 대단위 목화 단일농장들이 조성되었으며 목화재배에
동원된 흑인노예들로 넘쳐났다. 엘비스는 목화 재배지에
서 태어나고 자랐다. 멤피스에서 동쪽으로 1시간 30분 거
리의 투펠로(Tupelo)이다. 테네시 주와 미시시피 주의 경
계선상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어머니 글래디스는 의류공
장 근로자 출신이었고 아버지 버논은 백수였다.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뚜렷한 직업이 없어 어머니가 목화농장에 나
가 일해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목화 45kg을 따
면 1달러를 벌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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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흑인들과 함께 목화를 땄고, 엘비스는 흑인들
사이에서 자랐다. 흑인들이 부르는 노동요가 엘비스의 자
장가이자 동요였다. 엘비스는 데뷔와 함께 흑인의 필로 흑
인의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훔쳐온 것이 아니었다. 젖먹
이 때부터 가슴 속에 새겨진 자기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지리적으로도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 컨트리 음악의 고
향 내쉬빌이 가까이 있어 흑백의 음악이 교배되기에 딱 좋
은 조건이었다. 엘비스는 백인들이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
고, 그렇다고 흑인의 노래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는 자신만
의 노래, 즉 흑인 감성으로 부르는 백인의 노래 ‘로큰롤’을
발명한 것이다.
‘백인 쓰레기’의 금의환향 1956년 9월 26일 엘비스는 고향 투펠로를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었다.
엘비스의 고향 투펠로(Tupelo). 남부전쟁의 격전지였던 투펠로에서는 이 날을 엘비스의 날로 선포했다.
이곳도 뉴올리언스, 멤피스, 내쉬빌과 마찬가지로 목화의 운명의 핫브레이크호텔
집산지이고 흑인들이 많이 살았다. 어머니는 쌍둥이를 임 엘비스의 로큰롤이 발명된 지 2년 뒤 썬레코드는 초대
신했는데, 쌍둥이 형인 제시 가론 프레슬리는 태어나면서
죽었다. 출산비 15달러는 사회복지회에서 보조 받았으나 형 레코드사인 RCA빅터사에 팔렸다. 엘비스도 계약금 4
3.5달러가 없어서 묘비명을 새기지 못한 채 엘비스의 형을 만 달러를 받고 이 회사에 적을 두게 되었다. 4만 달러는
침례교 공동묘지에 묻었다. 엘비스는 8살 때부터 마을 이 당시에 팝 보컬리스트에게 지불한 가장 큰 금액의 계약금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엘 이었다고 한다. 엘비스는 RCA로 이적한 뒤 곧바로 운명의
비스의 기타 실력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엘비스는 죽을 녹음에 들어간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었고
때까지도 기타를 제대로 칠 줄 몰랐다. 노래 실력은 탁월 대중음악의 운명이 뒤바뀌는 일대 사건이었다. 운명의 곡
했다. 8살 때 올드 셉(Old Shep)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12살 은 바로 ‘상심의 호텔(Heartbreak Hotel)’이다. 실연자의 비
때까지 지겹도록 반복해서 불러 자기 노래로 만들었다. 참한 최후를 그린 이 노래는 마침내 로큰롤이 세계를 평정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 로큰롤의 영원한 송가가 되었다.
직업이 없고 교도소까지 들어간 남편을 의지하고 살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 엘비스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우리 집 RCA 이적 이전에 이미 상업적 성공을 거둔 엘비스는 당
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너는 집 시에 엑스턴이라는 홍보 매니저를 두고 있었다. 그녀는 엘
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엄마는 엘비스를 끔찍이 보살 비스의 활동에 적극 개입, 가수 활동에 관한 조언을 아끼
폈다. 11살 때 엘비스는 엄마와 함께 투펠로 시내에 나가 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게 된
쇼핑을 했다. ‘투펠로 하드웨어’라고 하는 철물점인데, 이 신문기사를 읽게 된다. 어떤 자살한 청년이 “나는 쓸쓸한
것저것 다 파는 일종의 수퍼마켓이다. 엘비스는 생일 선물 거리를 걷는다”는 메모를 남겼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로 자전거를 원했지만 돈이 모자란 것을 알고 8달러 짜리 영감을 얻은 그녀는 작곡가 토미 더든과 함께 단 20분 만
기타를 사달라고 했다고 한다. 에 곡을 완성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실연 당한 청년
엘비스는 투펠로에서 13살 때까지 살고 멤피스로 이사
했다. 엘비스는 멤피스에서 로큰롤을 창시, 세계 대중음악
을 제패했고 떼돈을 벌었다. 데뷔한 지 불과 2~3년 만에
이룬 일이다. 그는 고향 투펠로를 잊지 못했다. 성공한 뒤
고향 사람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었다. 고향 어린이의 금의
환향에 수만 청중이 몰려들어 축하해주었다. 엘비스가 태
어난 집, 예배를 보던 교회는 그대로 복원되었고 기념관도
함께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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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죽을 것 같은 외로움에 사로 잡힌다. 그는 외딴 거리 끝 엘비스가 머물던 멤피스 소재의 그레이스랜드. 매년 60만명 이상이
에 있는 ‘상심의 호텔(Heartbreak Hotel)’을 찾아간다. 실연 방문하는 미국 최고의 관광명소다.
당한 사람들이 눈물로 지새우는 호텔이다. 물론 환상 속
의 공간이다. 실연의 주인공은 말한다. “만약 당신의 연인 레슬리 엔터프라이즈(EPE)는 광부들을 그레이스랜드로
이 떠나버렸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사연이 있다면 외 초청했다.
로운 거리에 있는 상심의 호텔로 오세요. Hey now, if your
baby leaves you, and you got a tale to tell. Just take a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고 끝까지 살
walk down lonely street to heartbreak Hotel.” 아 남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불려지고 들려지는 것을 이
른바 고전이라고 하지 않은가. 고전은 사람들에게 삶의 위
‘핫브레이크호텔’은 로큰롤의 뇌관이었다. 엘비스는 이 안을 주고 살아갈 길을 안내해준다. 엘비스가 남긴 수천
곡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녹음할 때 신들린 듯이 불렀 곡은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 연주되고 있고, 사
고, 녹음장에 있던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했다”고 느낌을 람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다. 흘러간 유행가가 아니라 살아
전했다. 에코 효과를 살리기 위해 최고의 엔지니어가 동원 서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노래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되었으나 맘에 들지 않았다. 제작팀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왜 엘비스와 그의 노래들을 좋아하고, 산호세의 광부들처
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르기로 한 것이다. 신비한 럼 그의 노래에서 용기를 얻게 되는가. 뚜렷한 이유가 없
에코음이 살아 났다. 엘비스는 수류탄의 핀을 뽑아 던졌고 다. 엘비스를 들으면 그냥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엘
마침내 대중들은 폭발했다. 핫브레이크호텔은 발표되자마 비스의 노래들을 살아 있는 고전이라고 한다.
자 전미 차트를 휩쓸었다. 빌보드 팝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컨트리 차트와 리듬앤블루스 차트도 석권했다. 한 곡 엘비스는 생전에 대중음악의 거의 전 장르를 커버했다.
의 노래로 3개의 차트를 석권한 것은 핫브레이크호텔이 최 엘비스의 주 전공은 우리가 즐겨 듣는 팝 발라드가 아니
초이다. 이 노래 한 곡은 RCA사의 그 해 전체 음반 판매량 고 본래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재기 발랄한 로큰롤이
의 20%를 차지했다. 그 해 엘비스의 음반 총판매량은 1천 었다. 그러나 로큰롤에 머물지 않고 왼쪽, 오른쪽의 장르
만장으로, RCA사 총매출의 절반이었다. 대형사건이 터진 들을 섭렵해갔다. 동과 서 막론하고 좋아하는 팝 발라드를
것이다. 엘비스는 핫브레이크호텔을 들고 공연 투어에 나 특유의 스타일로 해석해 불렀고, 크리스마스 송을 비롯한
섰다. 가는 곳마다 괴성과 아우성으로 가득했고, 곳곳에서 가스펠에서도 출중한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
실신해서 실려나가는 청중들이 속출했다. 엘비스와 그가 신의 노래만큼이나 남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음악적 창의
창시한 로큰롤은 이제 하나의 문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력이 소진된 말년에는 남의 노래를 더 많이 불렀다. 그러
나 어떤 노래도 엘비스의 수중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엘비
살아 있는 고전 스 자신의 노래가 된다. 전 장르에 걸쳐서 그의 음악을 들
2010년 8월 5일. 칠레의 산호세 광산이 붕괴해 33명의 을 수 있기에 누구라도 그의 음악을 사랑할 수 있다. 엘비
스는 모든 사람을, 미국과 전세계의 모든 사람을 음악에
광부들이 갱도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전 빠지게 만들었다. 음악을 혐오하던 사람들까지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칠레 대통령이 광산으로 내려갔
고, 구출작전은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그들은 무려 69일 그러나 그의 삶은 모범적이지 않았다. 마치 가난에 보복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기적적으
로 구출되었다. 갱도에 갇힌 광부들은 역할분담을 통해 질
서정연하게 움직여 내부의 동요 없이 암흑의 날들을 견딜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조직경영의 훌륭한 귀감이 되어 지
금도 연구되고 있다. 광부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역할이
주어졌다. 그 중 에디손 페냐라는 광부는 엘비스의 광팬이
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담당이었다. 그의 주도로, 갱도
에 갇혀 있는 동안 광부들은 엘비스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
루에 5km씩 갱도 터널을 달려 정신을 또렷하게 유지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엘비스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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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도 하듯 닥치는 대로 돈을 썼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오 러 개 두고 있다. 그 중 특히 1973년 하와이 공연 기념 판매
토바이와 자동차를 수집했고 비행기도 사들였다. 수면제, 관에서는 하루 종일 하와이 공연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각성제, 변비약과 다이어트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년에
는 심각한 마약중독자였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엘비스의 이곳은 1991년에는 국가 사적지로, 2006년에는 국가랜
인생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평 드마크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60만명 이상이 방문, 미국에
생 마음껏 즐겼고,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의 서 개인주택으로는 백악관 다음으로 방문객 수가 많다. 모
노래와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엔터테이너이지 정 든 코스를 도는 패키지는 약 70달러. 3시간 정도면 한 바
치가나 도덕 교사가 아니다. 그는 로큰롤의 창시자이지 종 퀴 둘러볼 수 있다. 공연 영상 관람 시간, 기념품관 방문까
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스스로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불살 지 포함하면 하루로도 부족하다. 그레이스랜드 바로 옆에
라 마음껏 즐겼고 우리도 함께 즐기게 된 것이다. 는 ‘핫브레이크호텔’이 지어졌다. 3성급 호텔로 숙박료가
그리 비싸지 않아 엘비스 팬이라면 하루쯤 묵어볼 만하다.
그레이스랜드, 멤피스 마피아
엘비스는 썬레코드에서 첫 노래를 녹음한지 3년만인 미국인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흔히 백악관
과 함께 워싱턴, 제퍼슨, 루스벨트, 링컨 등 대통령 4명의
1957년 3월 멤피스 외곽의 ‘그레이스랜드’라 불리는 대저 얼굴을 조각해놓은 러시모어산을 꼽는다. 엘비스의 저택
택을 사들였다. 전 주인이 부인에게 결혼선물로 마련한 곳 그레이스랜드는 그보다 더 위에 있다. USA투데이는 그레
인데, 현재 약 1,700여평의 주택과 3만여평의 부지로 조성 이스랜드를 미국의 관광명소 1위로 꼽았다. 왜 미국인들은
되어 있는 대저택이다. 당시에 10만 달러로 매입해 자신의 엘비스를 가장 미국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그의 저택을 대
왕국으로 만들어갔다. 벤츠, 캐딜락, 롤스로이스의 최상위 표적 명소로 꼽을까? 그들은 남녀노소 예외 없이 엘비스
기종 수십 여대와 최고의 오토바이들을 사들여 주차시켰 의 세례를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기라성 같은 록스타들이
고 두 대의 비행기도 구입했다. 저택에는 침실, 집무실, 오 있지만, 그들은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갈린다. 엘비스는
락실, 음악실, 식당 등 외에도 당구장, 사격장, 승마장, 수 연령, 지역, 인종 관계없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
영장 등을 갖추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멤피스를 떠나지 다. 미국인들은 엘비스가 미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
않았고 이 집에서만 살았다. 그레이스랜드에 대해 얼마나 특히 현대 미국식 민주주의의 ‘자유’를 선두에서 대변한 사
끔찍한 애정을 가졌는지 그의 전용 비행기 내부도 집과 똑 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메리칸 드
같이 꾸몄다. 림의 표본이라는 점 때문에 그들은 엘비스를 국가 대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이 없는 날엔 그레이스랜드에 머물렀다. 집에 있을
때도 부인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 지난해 1월 멤피스의 그레이스랜드를 찾았을 때 종일 비
이 더 많았다. 데뷔하기 이전에 사귀었던 멤피스의 문제아 가 부슬부슬 내렸다. 날이 춥고 평일이었는데도 방문객들
들은 그가 성공한 뒤 그대로 엘비스의 조직으로 합류했다. 은 많았다. 장년층이 가장 많았지
‘멤피스 마피아’라고 부르는 친구들이다. 경호원이자 비서 만 젊은층도 꽤 되었다. 엘비스
격이었던 친구들은 엘비스가 죽을 때까지 곁에 있었다. 그 기념관을 돌고 공연장면을 보면
들은 엘비스의 여자관계, 마약투약 등 사생활의 모든 것을 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엘비스는 공연이 없는 날엔 그레이스랜드에 있었다. 그들은 엘비스를 통
머물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기 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
타를 치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놀았다. 고 있었다.
지금 그레이스랜드는 엘비스 프레슬리 주식회사인 ‘엘 *스페인 바르셀로나
비스 프레슬리 엔터프라이즈(EPE)’가 운영하는 엘비스 기 에서 송고합니다. 다음
념관이다. 그의 저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별도로 엘비 호에는 엘비스의 가족 이
스의 옷과 골드, 플래티넘, 멀티플래티넘 레코드 전시실, 야기와 그의 노래에 담긴
공연 기념관 등을 갖추고 있다. 두 대의 전용 비행기, 수십 사연들을 소개합니다.
여 대의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전시한 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그의 음반과 책,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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