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ds you are searching are inside this book. To get more targeted content, please make full-text search by clicking here.
Discover the best professional documents and content resources in AnyFlip Document Base.
Search
Published by 제이미파커스, 2019-05-01 22:12:17

발행인칼럼_46

발행인칼럼_46

발행인 칼럼 46_ 스페인 기행 ⑩

‘정복자의 고향’
트루히요(Trujillo)

오비에도 히혼

레온
아스토르가

발행인 칼럼 46 _ 스페인 기행 ⑩ 사모라
살라망카
‘정복자의 고향’
트루히요(Trujillo) 플라센시아

박경욱(본지 발행인, 제이미파커스 대표)

트루히요

카세레스
메리다

사프라

은의 길 세비아
(Ruta de La Plata)

90

은의 길(Ruta de La Plata)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아(Sevilla)에서 북쪽 칸타브리아 지방의 해안
도시 히혼(Gijon)을 잇는 630번 국도는 고대 로마시대에 ‘은의 길(Ruta de La Plata)’
이었다.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채굴한 금과 은, 농산물을 이 길을 따라 가지
고 내려와 강과 바다를 이용해 로마까지 운송했다. 중요한 자원의 운송로였기에 당
연히 이 길에 도시들이 세워졌다. 지금의 히혼(Gijon) → 오비에도(Oviedo) → 레온
(Leon) → 사모라(Zamora) → 살라망카(Salamanca)→ 플라센시아(Plasencia) → 카
세레스(Caceres) → 메리다(Merida) → 사프라(Zafra) → 세비아(Sevilla) 등은 모두
천년 이상 된 고도들이다. 이 도시들에는 지금도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그 중간쯤에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라는 지방이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척
박한 땅이다. 이곳 사람들은 살림이 변변치 않았기에 예로부터 출향민이 많았다. 특
히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대항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중남미에 정착했다. 그들을 콘키스타도레스(Conquistadores)라고 부른다. ‘정복자’
라는 뜻이다. 이 지방의 작은 도시 트루히요(Trujillo)는 ‘정복자의 고향’으로 불린다.
최초로 잉카제국 침략에 성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
가 이곳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의 길은 순례길의 한 코스이기도 하다. 예부터 순
례자들이 이 길을 따라 스페인의 성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들어갔다.

부활절 축제가 열리고 있는 트루히요의 마요르 광장.
페루의 정복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기마상은
이 도시의 상징이다.

안테케라의 엘 토르칼(El Torcal). 해발 1,366m.
9911

◀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 정복자 피사로가 잉카제국 황제의 항복을 받는 장면

잉카제국의 정복자들 빈민 출신인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그때 신
대륙의 파나마에 있었다. 글도 읽을 줄 몰랐던 그는 12명의
아래 사진은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Machu 병사와 함께 잉카제국으로 원정을 떠나 해안가의 작은 도시
Picchu).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911년에 발견된 이 도시는 해 를 발견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이 소식을 전하고 600여
발 2,450m의 안데스 산악에 세워져 ‘공중도시’라 불린다. 명의 병사를 지원받아 다시 1530년에 신대륙 원정에 나섰다.
위 사진은 마추픽추에서 80km 떨어진 옛 잉카제국의 수 신대륙에 도착해 살아남은 병사는 200명이었다고 한다. 그
도 쿠스코(Cuzco)이다. 불가사의한 문명으로 알려진 잉카 는 원정대를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카하마르카라는 도
의 중심지로 해발 3,740m의 고원에 세워졌다. 인구 1,200 시에 이르렀다. 여기서 1천km 떨어진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만의 대제국이었던 잉카는 약 500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있는 잉카제국 황제를 불러들여 회담을 청했다. 그것은 계략
들어온 무리들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콘키스타도레스 이었다. 황제가 호위대 8천명을 이끌고 나타나자 곧바로 그
(Conquistadores), 즉 정복자들은 불과 200명! 이로부터 오늘 를 체포했다. 잉카의 병사들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포 소리
날 ‘라틴 아메리카’라 부르는 중남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와 처음 보는 동물(말)에 그만 놀라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남
미에는 말이 없었고, 총이나 대포도 없었던 것이다. 정복자들
500년 전 스페인에 ‘엘도라도(El dorado. 황금의 땅)’의 소문 은 닥치는 대로 잉카의 병사들을 살육한 뒤 곧장 쿠스코로 진
이 돌았다. 멀리 신대륙에 황금으로 가득한 도시가 있다는 것 격해 순식간에 대제국을 무너뜨렸다.
이었다. 실제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은 태양신을 표
현하기 위해 아낌없이 황금을 사용했다. 스페인 트루히요의

잉카제국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92

피사로 박물관 정복자의 최후
마요르 광장의 피사로 기마상
정복자들은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페루라는 식민지를 세
워 그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소문으로 듣던 ‘황금의 도
시(엘도라도)’를 발견하진 못했지만,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거둬들여 본국으로 보냈다. 피사로는 고지대의 쿠스코 대
신 해안가 저지대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그곳이 지금 페
루의 수도 리마(Lima)이다. 이로부터 브라질을 제외한 중
남미 대륙 전체가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었고, 브라질은 포
르투칼의 식민지가 되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무차별
살육했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전염
병이었다. 중세 때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몰살시킨 페스트
가 정복자들에 의해 신대륙으로 옮겨졌고,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당시 살육과 강제노동, 전
염병에 의해 죽은 원주민의 수가 8천만 명이라고 한다.
피사로는 후작이라는 지위를 얻고 식민지의 지배자가 되
어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건설했다. 막대한 부도 쌓았지만 끝
은 좋지 못했다. 함께 원정했던 동료 알마그로와 전리품을
놓고 사이가 틀어져 그가 먼저 알마그로를 살해했다. 그리
고 그는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한 암살
자가 꽃병으로 그의 머리를 찔렀다. 죽는 순간 그는 성호를
그으면서 “고백…”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슨 고백인
지는 알 길이 없다. 그는 머리와 몸으로 이등분된 채 리마
성당 안뜰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1977년 성당 보수공사 중
에 발굴되었다.

93

도시 곳곳에 정복자의 흔적이 … 중세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고도

정복자의 고향 트루히요의 중심에 마요르 광장(Plaza 트루히요는 피사로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마요르 광장에 위
Mayor)이 있다. 이 광장에 사나운 형상의 기마상이 우뚝 서 압적으로 서 있는 피사로의 기마상은 트루히요의 상징이
있다. 주인공은 피사로다. 그를 가리켜 이 고장 사람들은 ‘페 며, 구시가에 르네상스 풍으로 세워진 중요한 건축물들은 모
루의 건설자(El Fundador Del Peru)’라고 부르며 진정 두 피사로와 그의 일가가 세운 것들이다. 골목 한 귀퉁이에
한 영웅으로 추앙하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손 는 피사로 아버지의 집이 남아 있다. 이곳은 지금 피사로 박
자를 데리고 와 기마상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 물관(Casa Museo de Pizarro)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시가의
명하는 것도 영웅의 기상을 가장 높은 곳에는 트루히요 요새가 있다. 무슬림이 스페인
전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 을 지배하던 9~10C 경에 세운 것을 13C에 재건축했다. 그
나 잉카제국의 후예임을 자 리고 구 도시 전체는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트루히요는
처하는 페루 원주민들에게
그는 가장 흉악한 악당, 흡 인구 9천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의외로 성의 규모가 크
혈귀로 통한다. 조상들이 그 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중세의 건물들이
의 의해 떼죽음을 당했고 잉카 늘어서 있다. 로마, 이슬람, 가톨릭 문명
제국의 모든 것이 파괴당했 에 더해 남미 정복자들의 흔적들까지, 예
기 때문이다. 사롭지 않은 곳이다.

요새 쪽으로 올라가면 트루히요 구시가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사진은 구시가 중심인 마요르 광장. 일대의 주요 건축물들은 대부분 피사로의 돈으로 지었다.

94

트루히요 구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중세의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트루히요의 치즈 축제

트루히요 요새. 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슬람 점령기에 아랍인들이 세운 것을 13C에 재건축해 오늘에 이른다.

95


Click to View FlipBook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