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57 : 니체, 철학의 길(2)
엥가딘 계곡의 니체
발행인 칼럼 57 : 니체, 철학의 길(2) _박경욱(제이미파커스 대표)
엥가딘 계곡의 니체
엥가딘 계곡의 고지대(1,800m) 호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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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남동부 엥가딘(Engadine) 계곡.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정(山頂)들은 만년설로 덮여 있고, 가까이 가면
깊은 빙하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빙하 녹은 물이 수십 km 길이의 수많은 계곡을 타고 내려와 해발 1,800m 지점에 저렇게
맑은 ‘크리스털 호수’들을 빚어놓았습니다. 오른쪽부터 샴페러, 실바플라나, 실스마리아 호수입니다. 샴페러 호수 오른쪽에
상크트 모리츠(생 모리츠) 호수가 있는데, 이 사진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인(Inn)강이 시작되어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 인스부르크를 지나 독일 파사우까지 흘러가 도나우강과 합류하고, 도나우강은 루마니아 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들어갑니다. 연중 320일 이상 맑은 ‘샴페인 기후’를 자랑하는 이곳은 크로스컨트리 스키, 보트, 자전거, 트레킹 등 사계절
레포츠 왕국입니다. 동계 올림픽이 두 번이나 열린 이 지역은 스위스 빙하특급열차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영감을 얻었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사상의 불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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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어파스(Julier Pass)
독일인 부부를 태우고 율리어파스를 넘어 실스마리아로 엥가딘의 계곡의 호수 마을 실스마리아(Sils Maria)로 들어가려
면 율리어파스(Julier Pass)라는 해발 2천m의 고갯길을 넘어야 합니다. 지난 8월 20일 오후, 15km 전방의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출발하려는데 한 남자가 차를 좀 태워달라고 합니다. 호수 마을에서 산을 타고 왔는데, 힘들어서 차를 타고 싶
답니다. 요하네스 페퍼라는 독일 남자와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매년 여름휴가를 이쪽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십분 쯤 갔을
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캄캄해지고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나기가 몰아쳤습니다. 하하, 이들에겐 얼마나 다행
인지. 한 30여분 그의 고향 튀빙겐과 이곳 엥가딘 그리고 니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부부를 실바플라나에 내
려준 뒤 우리는 좀 더 가서 실스마리아 호수에 안겼습니다. 열흘 뒤 뮌헨에서 서울로 가는 루프트한자를 탔는데, 옆자리에
서 어떤 남자가 웃으면서 반깁니다. 아니 웬일? 자기 회사에서 현대자동차 협력사에 부품을 납품하는데, 급한 상담이 있어
딱 하루 일정으로 서울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이 우연에 기뻤던지 부인과 문자를 주고받더군요. 그렇잖아도 그들
은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며 한국에서 온 우리 얘길 했다고 합니다. 다음에 튀빙겐에서 만나 맥주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비는 이내 소나기로 몰아쳤다(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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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스마리아 호수
예술가들의 영감의 고향 위 사진은 말로야(Maloja) 마을에서 본 실스마리아 호수로, 별명이 ‘엥가딘의 샹그릴라’입니다. 세
상으로부터 숨겨진 영원한 행복의 유토피아라는 것입니다. 일대는 하이킹의 천국입니다. 3~4천m급 알프스 봉우리들로
가는 수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스위스관광청 한국어 홈페이지에 각 등산로의 난이도가 나와 있는데, ‘디피컬트’라고 표시
된 곳도 우리나라 산들에 비하면 그리 힘든 편이 아닙니다. 폰트레시나에서 올라가는 로젝(Rosec) 빙하를 비롯해 빙하계곡
으로 가는 코스도 많습니다. 코르바취 전망대에서는 스위스 동부의 알프스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산 아래 호수에서
도 전망은 360도로 열려 있습니다. 호수 한 바퀴는 15km(실스마리아), 13km(실바플라나), 5km(상크트 모리츠) 정도로, 천
천히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돌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예술가들이 찾아와 영감을 얻어 갔습니다. 세간티니, 바
그너, 토스카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샤갈, 헤밍웨이, 카라얀 등은 이 지역의 자랑스러운 이름
들입니다. 니체는 바젤 대학 교수를 퇴직하고 어떤 곳에도 적을 두지 않은 독립적인 사상가로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10
년 중 8년의 여름을 여기에서 사유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는 실스마리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습니다.
무오타스 무라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실바플라나(오른쪽)와 실스마리아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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펙스 계곡(Val Fex)
니체가 가장 사랑했던 길 “모든 인간은 노예 아니면 자유인이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를 위해 쓸 수 없는 사람은,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니체가 그의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그렇게 썼습
니다. 그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집필에 몰두하는 시간 외에는 자연 속에 들어가 걸으면서 몸을 해방시켰고, 그러면서 사상
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있던 내면의 야성을 들판에 놓아주자.” “진정 위대한 생각은 걷
는 동안 떠오른다.” 걷고 또 걸었던 철학자 니체가 가장 좋아했던 길이 바로 저 길입니다. 그 이름은 발펙스(Val Fex. 펙스
계곡). 니체하우스가 있는 실스마리아에서 시작되는 저 길은 이탈리아 국경의 트레모지아 봉까지 약 20km, 사람이 걷기
좋은 아래 사진의 빙하입구까지는 약 8km. 천천히 휘파람 불며 걸어도 3시간이면 빙하입구까지 갈 수 있습니다. 니체는
“내가 이만큼 사랑하는 곳은 달리 없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고, 중간에 헤밍웨이가 머물렀다는 펙스호텔
이 있습니다. 펙스호텔 근처까지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빙하입구까지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도 갈 수 있습니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곳곳에서 빙하 녹은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 없이 이완된 채로 걸을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21일, 펙스 빙하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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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플라나 호수의 산책로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흐른다” 니체는 실스마리아에서 머물던 1881년 8월, 위 사진의 길을 걷던 중 20세기를 뒤흔든 사상
의 힌트를 얻습니다. 그는 회상했습니다. “그날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을 산책하다가 수를레이(Surlej) 근처의 우뚝 솟은 바
위 옆에서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상이 내게로 왔다.” 그것은 ‘영원회귀’에 관한 것입니다. 다음 문장에 그 진수가 요약되
어 있습니다. “어느 날 악령이 그대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지금 살고
있고, 이제껏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들이 그대로 다시 찾아올 것이다.”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니,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저주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또는 내일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에게 말
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영원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이 물음에 일체 단서를 붙이
지 않고 단호하게 “Yes!”하고 대답할 정도로 철저하게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어떤 후회도 남김없이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
다.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 …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흐른다.” 부디 헛된 말이 아니길 빌 뿐입니다.
니체의 기념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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